25화
미친 여자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머리를 팔로 껴안은 디케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이리로 저리로
굴렀다. 꿈의 여파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이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생생한 감각이 깨어났다. 아등바등하던 디케는 그려지는 꿈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능력을 빙자한 저주.
꿈은 현실이 된다. 아니. 현실의 조각을 꿈꿨다.
“아아악!”
발작하며 소리를 지르자 문밖을 지키던 하녀들은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늘어진 공주를 침상 위에 올리며 달래려 했다.
미래를 꿈꿀 때마다 주기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공주를
모르지 않았다. 신음을 내지르는 공주의 사지를 내리누르며
하녀들은 황망한 얼굴을 했다.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인가.
흐려진 눈으로 자신의 금발을 마구 쥐어뜯는 여자를 보던
그들은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던
이들은 이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안개처럼 머리 위로 드리워진
두려움이, 사특한 기운이 입을 쩍 벌려 온몸을 집어삼켰다. 구름
낀 하늘에는 별 하나 비치지 않았다.
티텐의 백성들에게 성벽 너머의 세계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땅이었고. 그들은 곧 마주하게 될 신세계에 들뜬 분위기를
지우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집어져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감을 품은 채 귀족이니 평민이니 할 것 없이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침묵을 지켜야 하는 왕족뿐.
너절한 에즈라와 황자의 혼인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던 스케네는
쌍심지를 켜고 난동을 피우다가 결국 앓아누웠다고 했다.
글로사는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스케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찻잔을 든 채 내리깔았던 눈을 가늘게
뜨던 글로사는 잠시 손끝을 떨었다.
자신이 에즈라에게 저지른 짓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태도를 취하다니. 대체 히폴로테스의
의중은 무엇일까. 글로사는 그 생각으로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탓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 눈만 감으면
잔인하게 도륙당한 남종들의 사체가 떠올랐다.
“아……!”
기어코 손에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반도 넘게 남아 있던
찻물이 얇은 자리옷 위로 쏟아지고 굴러떨어진 백색 찻잔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튀는 날카로운
소리에 멈칫하자 뒤를 지키던 하녀들이 하나둘 다가와 급히
조각들을 수습했다.
“공주님, 괜찮으신지요?”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하녀의 시선이 답지 않게 떨리는 손등을 향했다. 들키지 않으려
부러 차갑게 명령하자 하녀는 군말 없이 몸을 뒤로 물렸다.
글로사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훔쳤다. 언젠가 자신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진 않을까 내심 두려웠던 탓이다.
죄책감이 있던 곳에 무지막지한 공포가 자리 잡은 게 분명했다.
하녀들을 내쫓고 난 그녀는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며 방을 빙빙
돌고 또 돌았다.
불안에 찌든 하루하루가 점점 숨통을 조여 오던 어느 늦은 밤.
글로사는 느닷없이 침실에 들이닥친 디케를 불쾌한 얼굴로
마주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은 밤에.”
디케는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석상처럼 굳어 서 있기만
했다. 맞잡은 그녀의 손톱은 바짝 짧아져 얼핏 피가 비치고
있었다. 글로사는 자신과 비슷한 그녀의 손톱을 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스케네나 할 법한 짓을 하다니……오 대답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성가시기 짝이 없는 터라 신랄한 말을 내뱉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린 디케를 마주하고 말을 잃었다. 며칠 사이 시체처럼
상한 몰골을 한 디케는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을 또다시
짓이겼다.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녀가 손을
뻗으며 비틀거렸다.
"언니, 저……:’
도를 넘은 불안이 엄습했다.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기도
잠시,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글로사는 매섭게 하녀들을
노려보았다. 단숨에 그들이 자리를 뜨자 글로사는 디케의
가느다란 어깨를 억세게 붙들며 물었다.
“오랜만에…… 미래를 봤구나. 그렇지?”
절박한 음성에 디케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얼굴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또다시 손톱을 물어뜯다가 꾹꾹 감정을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무슨
꿈이길래 그래.”
짓누르던 공포가 글로사에게 옮겨 간 모양이었다. 디케는
어깨에 얹어진 그녀의 팔을 내치며 한결 차분해진 어투로
대답했다.
“파편처럼 조각난 순간들을 보았어요. 피에 젖은 얼굴로 울고
있는 에즈라와 불타는 왕궁이요.”
에즈라의 이름에 글로사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살기마저
흐르는 통에 디케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게 다야?”
“문틈 밑으로 새어 나오는 피가 흐르고 흘러서 황금 바닥에
검붉은 핏물이 고여 있었는데.”
두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는 디케를 놓았다. 비틀거리던
글로사는 결국 침상에 주저앉고 말았지만 디케는 멈추지 않았다.
달빛을 등진 그녀의 얼굴에 캄캄한 역광이 졌다.
“아버지가 이름을 불렀어요.”
“……누구의?’’
“에 즈라.”
처음부터 끝까지 에즈라가 얽혀 있는 불온한 꿈에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글로사였다. 디케를
다독이던 글로사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음을 숨기며 침착하게
물었다.
“전쟁이었니?”
“몰라요, 나는 대체 어찌 된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확실한 것. 내내 드리워 있던 역광이 가시자 디케의 흉흉한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에즈라. 에즈라가 모든 것의 원흉이 분명해요. 다른 건 보이지
않아도 피범벅이 된 에즈라의 절규만은 생생했으니까.”
디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글로사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마를 감싸며 혼란을 숨기지 못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야겠어. 내가 대신 전할 테니 우선
너는……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도록 해.”
“뭐라고 말씀드릴건데요?”
“뭐긴 뭐야! 너도 알잖아. 네 말대로 에즈라가 원흉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에즈라를 죽여 버려야 해!”
답답하다는 듯 글로사가 크게 외치자 디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에즈라의 죽음을 원한다면 그 방법으로는 안 돼요.”
"그게 무슨 뜻이야?”
반쪽짜리 피붙이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던 그들은
문득 섬뜩함에 둘러싸였다. 그 탓일까,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버지가 에즈라를 죽일 거였으면 돌탑에 그리 가둬 둘 게
아니라 벌써 죽여 버렸을 거예요. 무엇보다 잘 알잖아요,
에즈라가 누구의 딸인지.”
끄집어내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는 게 존재했다. 글로사가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디케는 눈을 내리깔면서도 끝까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에즈라를 죽일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돼요.”
텅 비어 무뎌진 눈동자. 잔인한 장면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디케는 인간으로서의 무언가를 포기한 채였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디케를 살피던 글로사는 한 발짝 그녀에게서 물러서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전쟁이분명해요, 언니.”
정말 전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에즈라 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터. 진정 티텐을 위협할 이는 히폴로테스.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글로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수백 년간. 그 어느 나라의 공격에도 지켜 준
높다란 성벽. 그리고 그 너머를 모르고 살아온 백성들과 왕족들.
이 감옥은 완전했고. 또 안온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지성을 믿었다. 분명 모든 건 정신이
나가 버린 여동생의 억측일 뿐. 글로사는 턱을 치켜들며 미쳐
가는 디케를 내려다보았다.
“전쟁이든 뭐든, 먼저 해야 할 게 있잖아. 네 말대로 원흉만
사라지면 모두 될 일 아니니?”
생각해 보면…… 손쓰지 않고도 코를 풀게 된 격이니 잘된 일
아닌가. 결정을 끝마친 글로사는 부러 디케를 충동질하려 그녀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너만. 너만이 할 수 있어. 내가 뒤를 봐줄
테니 어떻게든 해 봐.
글로사는 디케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다. 미약해진 이성을
완전히 놓아 버린 듯 디케는 몇 번이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결연함까지 비치는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글로사는
디케의 뺨을 감싸다가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모두 괜찮을거야.”
불쌍한 것. 심약하기도 하지. 글로사는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기쁨을 감추며 꽤 오래도록 디케를 다독인 후 방으로 돌려보냈다.
어쩐지 끙끙 앓으면 고민하던 문제들이 단번에 술술 풀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알리아 신이 내 손을 들어 주시는 게 분명해.”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털썩, 침상에 몸을 누이며 글로사는
큭큭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디케가 에즈라를 처치하면 황비의
자리는 분명 제 것이 될 것이다. 디케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전쟁 비스무리한 디케의
꿈이었지만 글로사는 누구도 캐낼 수 없는, 자신조차도 닿을 수
없는 비밀을 떠올리곤 코웃음을 쳤다. 자신만 입을 열지 않는다면
티텐의 성벽은 언제나처럼 완벽할 테니까.
피어오르는 질투와 욕망은 판단력을 흐렸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글로사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미치도록 아늑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단잠이었다.
글로사가 단잠에 빠져 있는 동안 에즈라는 삐걱거리는 침상
위에 앉은 채로 메마른 뺨을 몇 번이고 부볐다. 에즈라는 흐린
시선으로 언제 그랬냐는 양 깨끗하게 치워진 돌탑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평생 잊을 수 없을
테지만 이곳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곳 또한 없었다.
혼약식이 끝나기 무섭게 돌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애걸하자
그는 선심 쓰듯 그리하고 싶으면 그리하라며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미안해요. 돌탑을 정리하느라 그랬어요. 아무래도 공주님이
보기엔 좋은 광경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답하기는 했지만 보호라는 명목하에 며칠 동안이나
저를 라뷔린토스에 가둬 두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즈라는 상냥한 미소를 짓던 히폴로테스를 떠올리며 심란한
얼굴을 했다.
무엇보다 혼약이라니, 그리 중요한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먼저 언질을 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마치 저 혼자만 아무것도
모른 채 파도에 휩쓸려 가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맹세합니다.’
거짓을 입에 담던 날. 자신을 또렷이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눈은
너무도 가슴 아픈 것이었다. 혼란에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리던
에즈라는 이내 고개를 저어 히에로스의 얼굴을 털어 냈다.
‘다알리아 신이시여. 부디 죄를용서하여 주세요.’
나를 절망에서 꺼내 준 사람. 장난스럽게 마주 웃어 주던 얼굴,
끌어안아 주던 뜨겁고 든든한 두 팔과…… 부드럽게 맞닿아 오던
입술까지. 나는. 나는 도저히 그를 버릴 수 없어. 그의 죽음에서 등
돌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몇 번이나 빌었던 기도를 되풀이하던 에즈라는 이내 눈을 번쩍
떴다. 긴장감이 온몸의 피를 타고 흘러 손바닥 아래에 서늘한
땀이 고이게 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에 그것을 문질러 닦으며
히폴로테스가 은밀히 속삭였던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에즈라. 글로사에게서 티텐의 성벽을 무너뜨릴 방법을 알아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