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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4화 (24/113)

24화

“데몰레온에게 매일같이 돌탑으로 보내 주면 안 되겠느냐고 철

덜든 망아지마냥 수선을 떨어 댄답니다. 손톱을 야금야금

물어뜯는 게 아주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라고 하던데요.”

“회복했다며.”

그의 혼잣말에 카코스는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리며 눈썹을

비죽 올렸다. 톡톡, 의자의 손잡이를 일정하게 두드리던

히폴로테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 내보내지 마. 히에로스왕이 공표할 때까지 곁을 잘

지키라고 해. 데몰레온에게 전해. 놓치면…… 아주 혹독한 벌을

톡톡히 치르게 될 거라고.”

“ 예.”

카코스는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보이며 남몰래 쯧. 혀를

찼다. 졸지에 에즈라의 호위를 도맡게 된 데몰레온이 얼마나

짜증을 부려 댈지 이미 예상이 가는 탓이다.

제국에서 전해 온 정보를 다시금 확인하던 카코스는 무기력한

얼굴로 침상에 늘어진 히폴로테스를 곁눈질했다. 은근히

카코스의 시선을 즐기며 벌어질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던

히폴로테스는 눈을 감고 얼마 전의 일을 되짚었다.

늦은 밤, 아무도 몰래 자신을 찾아와 에즈라를 들이밀던

히에로스왕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었더랬다. 그는 어둑한 방

안에서 히폴로테스와 마주 앉아 고심했던 말을 꺼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에즈라에게 사슴을 바쳤더랬지. 그 마음

아직도 그대로인가?’

‘당연합니다. 그날 저는 에즈라 공주님과 히에로스 님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완연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 히에로스는 수심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고민을 한 것인지 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어쩐지 역겨운 터라 히폴로테스는

어렵사리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맹세할수 있나?’

‘ 맹세합니다.’

진지한 얼굴로 맹세를 입에 담자 철석같이 믿는 왕을 보며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인간에게 있어서 맹세는 허울뿐인 자기

위로가 아닌가. 언제라도 손바닥 뒤집듯 변모해 버릴 아주 가벼운

약조. 배반은 늘 맹세로 시작된다.

‘황자의 뜻이 그러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에즈라와의 혼약을

공표하고 싶네. 이후의 일은 차차 진행시키는 걸로 하지. 어떤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은 듯 히에로스의 표정은 가뿐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히폴로테스의 확답을 원하던

히에로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돌탑에 갇힌 에즈라가 받아 온 핍박을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

진정 아비로서 딸을 위함인가. 아니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마음일까. 무엇이든 히에로스는

에즈라를 티텐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살펴 가십시오.’

등을 보인 채 멀어져 가는 왕의 어깨는 잔뜩 낡고 금이 가

있었다. 날붙이 위를 걷듯. 무엇도 의지할 수 없는 남자는 홀로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것이다. 귀퉁이를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버릴 왕과 왕국. 그를 뒤로하며 히폴로테스는 치미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회상을 마친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흐린 풍경을 따라 높다란 성벽이 늘어서 있었다. 과연

왕의 공표가 먼저일까 아니면 미래를 본다는 공주가 먼저일까.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둘 중 무엇이 먼저이든

에즈라, 그녀만 제 손안에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

정도로 그물 안에 걸린 여자는 너무도 완벽한 미끼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은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들썩였다. 그도 그럴 것이 즉위 이후. 대내외적으로

공주의 약혼을 공표하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위

귀족뿐 아니라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신관들을 추려 왕궁으로

초청한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네 명의 공주 중, 가장 먼저 소문의 중심이 된 것이 넷째

공주 에즈라라는 것에 사람들은 입을 쉬지 않고 놀려 댔다. 한

번도 왕실의 구성원으로서 모습을 내비치지 못하던 덜떨어진

공주.

귀족들은 쉴 새 없이 이런저런 말들을 떠들어 댔다. 그녀와

황자의 약혼이라니. 히폴로테스의 외양을 익히 아는 이들은

차라리 잘되었다 말하면서도. 제국의 유일한 황자와 맺어지는 게

에즈라라는 사실에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타리……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절대 비밀로 붙이라는

왕명이 있었습니다.”

에즈라는 망연한 얼굴로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금칠이 된 천장에는 고풍스러운 무늬와 함께 해석할 수 없는 붉은

글자가 빼곡했다. 박힌 보석들까지 하나하나 훑어보던 에즈라는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지만 이곳이 왕궁의 가장 중심. 그레이트

체임버라는 것을 직감했다.

졸지에 이곳까지 떠밀려 온 에즈라는 떨리는 손끝을 맞잡으며

획 주위를 둘러보았다. 꽂혀 드는 시선에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입은 의복 중

가장화려한 것을 걸치고 있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목덜미에서

묵직하게 흔들리는 보석은 제 것이 아닌 듯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새벽같이 들이닥친 하녀들의 손에 힘없이 흔들리며 그저 다른

이의 일이겠거니 안일한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에즈라 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활짝 열린 문 너머. 황금 의자까지 내어진 길. 그 길의 양옆에는

귀족들의 머리통이 빼곡하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옷차림을 한 그들은 갖가지 표정으로

에즈라를 바라보다가 저들끼리 귀엣말을 했다.

왕족과 가장 가까운 곳을 일렬로 지키고서 있는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해 왔다. 머리카락부터

발목까지 가리는 로브를 걸친 이들이 뿜어내는 음산함에

에즈라는 마구 도리질 쳤다.

“마타리. 제발.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지금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오늘은 공주님과 히폴로테스 님의

혼약을 공표하는 날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두의 앞에서요.”

“호, 혼약이라쇼?”

숙이고 있던 허리를 들어 올리며 마타리는 느릿하게 문 너머로

에즈라의 시선을 인도했다. 활짝 열린 문이, 길게 뻗은 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평소처럼 뒷걸음칠 새는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걸어가시면 됩니다. 저기 멀리서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히폴로테스 님께요.”

공주님의 의지로.

뒤에서 속삭이는 마타리의 말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등 떠미는

분위기 속, 쓰러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줘 버텨 낸 에즈라는 저

멀리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셔요.”

처음. 생전 처음으로 저를 직시하고 계셨다. 너무도 멀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원망스럽다가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가슴이 저릿하고 또 벅차올라서……으

침을 꼴깍 삼킨 에즈라는 황금 문턱을 넘어 붉게 펼쳐진 길을

곧은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아버지의 얼굴. 제대로 눈을 마주한 적도. 불러 본

적도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도 당신의 딸이 될 수 있어.

문득, 에즈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딸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주제넘는 생각인가. 돌탑을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마치

왕족이나 된 듯 행동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한편 에즈라가 황금 문턱을 넘었을 때부터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히폴로테스는 멀찍이 서서 히에로스만을 바라보는

에즈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리더다가와서거라.”

우물쭈물하는 저를 향해 아버지가 명령했으나 죄악감이

발목을 묶어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자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히폴로테스가

자연스럽게 팔을 잡아끌었다.

“아……!”

“처음부터 제가 직접 모시고 올 걸 그랬습니다.”

그는 능청스러운 말을 지껄이며 에즈라의 가느다란 손을

끈질기게 얽었다. 고요한 가운데 저 혼자만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댔다. 다른 왕족들을 위해 마련된 황금 의자에는 왕비와 세 명의

공주들까지 모두 착석해 있었다.

에즈라를 향한 독기를 감춘 채 미네스는 모든 것을 외면했고,

전날까지 바락바락 대들던 스케네는 드디어 포기한 것인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의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글로사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히폴로테스를 잠시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글로사는 곧 시선을

바로 했다. 혼약을 공표하는 자리라기엔 너무도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히에로스는 입을 떴!다.

“히폴로테스 황자의 뜻을 존중해 넷째 공주 에즈라와의 혼약을

허가한다.”

혼약. 제대로 머릿속을 파고든 단어에 에즈라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리자 옆에 선 히폴로테스는

여봐란듯이 그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맸다.

“왕실은 적당한 때에 와스터 제국과 결속을 맺을 것이다.”

머지않은 날, 에즈라와 히폴로테스의 혼인으로 인해 티텐과

와스터 제국은 연맹을 이룰 것이다. 왕의 말이 이어지자 혼약의

여파로 일어날 뜻밖의 사실을 알아차린 귀족들은 체면도 잊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맹이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엇비슷한 말이 오가며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그 속에서 에즈라 역시 닥친 현실에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돌탑을 나와 라뷔린토스에 갇혀 지내던 날들이 얼마나

불안했던가.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은 저를 더욱 절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즈라는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티텐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던

그의 얼굴은 단단한 가면에 숨겨져 있었다. 에즈라는 행복에 취한

듯 해사한 웃음을 짓는 그가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니 두 사람은 이곳에서, 다알리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

다알리아, 티텐의 신. 히폴로테스는 홀려들었던 신명을

떠올리며 흡족함을 감출 수 없었다. 신이든 맹세든, 혹은

사랑이든 믿지 않았기에 알 바는 아니었다. 히폴로테스는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맹세를 입에 담았다.

“ 맹세합니다.”

단 하나 거슬리는 것이라면…… 아까부터 머저리처럼 굳어

있는 여자일까.

“에즈라.”

한참 대답하지 못하자 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어투로 히에로스가 이름을 불렀다. 일순,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름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다. 그 사실이 모든 불안과 공포, 그리고

자책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맹세합니다.”

그러면서도 에즈라는 이 모든 거짓에 발을 들였다.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거짓은 마음을 짓눌러 왔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 맹세를 입에 담는 남자가 두려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습관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비틀린 웃음을 짓던 히폴로테스는

여유를 가장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짙은 죄책감을 감춘 히에로스는 황량한 사막의 모래알처럼

스러질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곧바로 퇴청을 명하자 왕족들은 먼저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줄 지어 왕궁을 빠져나가던

귀족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제국과 연맹을 하고. 무역을 트게 되면 자신들에게 떨어질

이득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고 다른 이들의 사업을 경계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그런 이들에게 에즈라나 히폴로테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맹세한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신도,

맹세도, 사랑마저도.

달에 구름이 드리운 밤, 어둠이 내려앉은 널따란 방 안에는

구석구석 불붙은 램프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방의 주인이

완전한 어둠을 두려워하는 탓이다.

공주의 것이라고 하기엔 서늘함이 흐를 만큼 정갈하기만 한

침상 우I,오랜만에 꿈을 꾸는 디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기어코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그녀는 몸을 비틀며 끙끙대다가 눈물을

흘렸다가 결국 제 침상에서 퍽 나동그라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흐윽……",

고통도 잠시, 일어서지 못한 디케는 그 자리에서 몸을 둥글게

말며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꿈의 여파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다. 살짝 열어 놓은 창틈으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차는데도 온몸이 불타는 듯 뜨겁고 메말랐다.

“미, 미쳤어. 이건 아니야. 아닐 거야. 그냥, 그냥……"

악몽이야.”

아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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