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의 말은 빙빙 돌기만 했다. 이해하기 어려워 살짝 인상을 쓴
에즈라는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자락으로 드러난
상체를 가려 보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 애원하는 얼굴로 그의 손등을
감쌌으나 그는 더 이상 몰라도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히폴로테스는 시선을 피하며 조금도 흔들림 없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모습을 숨기면서까지 티텐에 온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티텐을 정복하지 않으면 죽임당할 테니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입에 담았다. 죽음이라는 말에
황망해진 에즈라의 얼굴이 볼만해 가슴속에 희열이 차올랐다.
처음부터 의심할 것이라 예상치도 않았던 일. 술술 풀려 가는
상황에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다.
“죽음이라뇨?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 농담치고는 너무,
너무……:’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담한 어투. 와르르 부서져 내리는 정신에 에즈라는 이불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달빛에 봉긋한 가슴이 훤히 드러난다. 차마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그녀를 지켜보던
히폴로테스는 곧 냉혹한 얼굴로 선언했다.
“에즈라. 나는 티텐을 멸망시키고. 그렇게 당신의 족쇄를
풀고…… 황제의 자리에 앉을 거예요.”
멸망과 죽음, 그리고 황제.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으나 그
단어들만큼은 날카롭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곧이어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아니면,
고국의 멸망. 사랑과 죽음 아니면 멸망.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탓에 에즈라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연한 표정으로 귀를 억세게 틀어막던 에즈라가 새하얘지는
눈앞을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지던 순간,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놓을 수 없다는 듯 품에 가두며 믿을 수 없게도 떨었다.
히폴로테스는 뭔지 모를 감정을 삼키며 에즈라의 머리칼에 햠을
부볐다.
“황비가 매일같이 보내는 살수들 때문에 열 살배기일 적부터
칼을 머리맡에 두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독을 삼키고
생과 사를 험하게 넘나든 이후로는 누군가 내미는 물 한 잔도
다른 이의 입을 거쳤고. 내 편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소중한 이들을 망설임 없이 베고, 또……,”
그런데 어째서일까. 혈육을 모두 도륙했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가슴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에즈라를 더욱
옭아매며 두 주먹을 쥐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이 연극이
어려워질 만큼이나.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삶을 살아왔어요. 어제의 아군은 내일의
적이 되고. 적을 아군으로 만들며 죽자 사자 진탕을 굴렀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죽고 싶지 않아서. 무엇보다 어머니와
약속을 했거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옷깃을 적시는 눈물. 옷자락을 찢어질 듯 잡아 쥔 채로 놓지
못하는 작은 손은 뼈마디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처연한
여자를 감싸며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어두워요.”
눈을 떠도 캄캄한 그의 가슴팍에서 그리 속삭였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낀 하늘 때문에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열린 창 너머로 들이닥친 바람이 불꽃을 앗아가 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고개를 올려 마주한 붉은 눈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당신이 손을 내밀어 나를 이끌어 주던 그 어느 날의 태양처럼.
“내게 스며든 핏물이 너무 많아서 나는 살아 나가야 해요.”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흐르는 눈물은 오히려 맑기만 했다.
에즈라는 자신도 놀랄 만큼이나 주저 않고 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대체 월 어떻게 해야……
히폴로테스 님을 구할 수 있어요?”
“……에즈라, 내가 두렵지 않아요?”
문득, 상황과 동떨어진 물음에 에즈라는 번쩍 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절박하게 부여잡았던 옷깃을 놓자 히폴로테스는
어림없다는 듯 에즈라의 팔을 잡아채 자신에게 바짝 끌어당겼다.
그는 이마를 맞댄 채로 에즈라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슴속에화마가 휘몰아쳤다. 저주스러운 나와 다를 게 없는 너
때문에.
“그럼 다른 이들을 조금만 미워해 줘요. 조금 더 원망해 줘요.”
우리에겐 쉬운 일이잖아. 혈육을 배반하는 것쯤은.
“복수를 품고. 나만을 바라봐줘.”
잔인한 말을 속삭이며 그는 더없이 애절하게 매달렸다.
히폴로테스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에즈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환멸과 희열이 뒤섞인 그의 눈빛이 미치광이의
것처럼 번뜩인다.
“나랑 같이 제국으로 가자. 내 곁에 떳떳하게 널 세울 테니,
평생을 함께해 줘.”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는 가슴이 몇 번이고 지껄였다. 너를
바라보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내가 나를 증오하는 만큼이나
너를 평생 증오할 거라고.
그럼에도 사랑 닮은 사랑에 눈물이 흘러내린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눈물에 당황하기도
잠시, 여자는 손을 뻗어 히폴로테스의 젖은 뺨을 훔쳐 주었다.
닦아도. 닦아도 괴로움은 범람해 그의 옷깃을 적셔 나간다.
“에즈라, 나를 버리지 말아요.”
당신이 기뻐하면, 나는 웃을 거야. 당신이 아프다면 나는
슬프고 절망스럽겠지. 그러니 당신이 죽는다면 나는……오
“울지 마세요. 히폴로테스님.”
이렇게 눈을 감은 채 사랑을 택하고 싶은 내가 있어. 어지러운
건 모두 묻어 버리고 당신의 손을 잡고 싶은 내가 저주스러워.
그럼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나를 구원이라 했지만 당신이야말로 나의 구원이었기에.
“뭐든 할게요.”
아무도 상처 입히기 싫다는 같잖은 위선과 악역이 되고 싶지
않다는 비겁함까지. 그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당신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나라를 부수고. 왕가를 배반하고,
수많은 죽음을 뒤로하고…… 그의 삶을 선택할 거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 저는
남은 감정을 다 떠안을 수 있어요.”
모든 사랑을 짊어지고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을 수 있어. 끝내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없다 해도.
품에 안긴 에즈라는 말없이 그의 곁을 분신처럼 지키는 뉙스를
만지작거렸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피에 가려진 이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테니까.
오로지 타국의 손님들을 위해 지어진 라뷔린토스. 그곳에는
수많은 방이 있었고, 티텐에 머무르는 것은 히폴로테스와 그의
전사들이 유일했기에 그들은 넓은 라뷔린토스를 독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비밀스러운 뒷공작을 벌이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는 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양피지를 쥔
카코스가 옆에서 무어라 줄줄 읊으며 상황을 보고했으나,
히폴로테스의 시선은 맺힌 물방울이 모여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남은 이들이 탄 배가 모두 출항했다는
거잖아.”
“예? 아, 네 그렇죠. 이미 오래전 준비가 끝나 히폴로테스
님께서 전령을 보내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령이라. 히폴로테스는 얼마 전. 에즈라의 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테르모스에게 전령을 보냈던 일을 상기해 냈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총병력은?’’
“추리고 또 추려서 대략 삼십 만입니다. 물론 전사들 포함이긴
합니다만…… 성벽이 무너지기만 한다면 티텐은 칼도 제대로
들어 보지 못한 채 항복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 나라는 오백 년
가까이 평화로웠으니까요. 이들에게 전쟁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힘찬 대답에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그는 턱을 괴며 긴 다리를
꼬았다. 어딘가 무료해 보이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른 오전.
우중충한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꾸준하게 내리는 탓에 방 안은
눅진하다. 그는 은근히 미간을 좁히며 짜증 섞인 투로 내뱉었다.
“항복은 재미없지. 웬만하면 잘근잘근 밟아서 정신마저
무너뜨려 놓는 게 좋아. 나라의 부홍이니 뭐니. 허튼짓 따위는
생각도 못 하도록 말이야.’’
그 말은 곧, 왕족들을 모두 척살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처단하고 나면 남은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납작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밖에 없을 테니까.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보이는 히폴로테스를 마주하던
카코스는 들고 있던 양피지를 힘주어 잡았다. 저리 온화한 미소를
걸치고선 무자비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다니. 여전히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주군이었다.
“상황은 어때?”
카코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던 히폴로테스가 다시금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퍼뜩 정신을 차린 카코스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모두 피가 들끓고 있답니다. 수백 년간 넘을 수 없던
미지의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그거 말고 다른 거라니. 의아함에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데
히폴로테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던 그의 머 릿속에 한 여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 여자일까 의심하면서도 카코스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에, 에즈라 공주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 털고 일어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매 끼니도 거르지 않고요. 헌데…… ”
“ 그런데?”
자신이 정확히 짚었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하건만,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히폴로테스는 몸을
일으켜 제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