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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2화 (22/113)

22화

소원.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었던 것. 하지만 내게 허락된

소원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라며 매일 기도해 왔어.

“……영원히 승리하시기를.”

그것 하나만 빌었다. 당신이 살아갈 삶에 이른 죽음이 없기를.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기를, 그래서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고 영원한 승리를 쟁취하기를.

그 말을 끝맺은 여자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손을 뻗다가 문득 멈추었다. 자신에게서 옮겨

간 핏자국이 남은 여린 몸을 멍하니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이불자락으로 그녀의 몸을 감싼 후 가뿐히 안아 들었다.

“너는매번울어.”

듣지 못할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래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방을 나서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걸까. 아니면…… 바라보고 싶은 건가.

가져서는 안 되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한참을 그리

서 있어야 했다.

녹지 않는 새하얀 눈은 산비탈에 엉겨 붙어 수천 년을

지내왔다. 떼어 낼 수 없는 얼음 조각들 덕에 드넓게 트인

산등성은 모두 하얗기만 했다. 와스터 제국의 가장 북쪽. 설산이

가득한 그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는 잠시 발아래를 응시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 구르면

뾰족한 얼음산에 사지가 갈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토록이나 험한

산속에서 휘몰아치는 얼음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히폴로테스는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날이 길게 울었다.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운

검 끝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목을 겨눴다. 결코 빗나가지 않는 검.

그의 검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도망치다니,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구나.”

“그러는 형님은 여기까지 들쑤셔 찾아내시는군요.”

히폴로테스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남자를 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수도에서나 입을 법한 얇은 옷자락. 어깨에 얹어진

짐승의 털가죽만 아니었다면 남루한 거렁뱅이라 해도 믿을 법한

차림새였다.

익숙지 않은 추위 탓인가, 그도 아니면 곧 들이닥칠 죽음

때문인가. 갓 어린 티를 벗은 이복동생은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다닥다닥. 그의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한 모양새에 픽, 조소를 머금으며 히폴로테스가 칼날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눈빛은 살벌해졌다. 번뜩이는 붉은 눈을

을곧게 응시하던 갈색 눈동자에 처연한 빛이 어렸다.

“저는 형님을 미워했었습니다.”

자조적인 미소. 잔뜩 일그러진 미간이 그의 아픔을 대변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히폴로테스를 외면한 채로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형님

역시…… 죽지 않기 위해 저를 베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형님들을 베어 살아가는 삶을, 그 죄악감으로 물든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저는 황제에

오를 재목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곳까지 도망친 거야?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그럴 리가요. 오로지 카라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이미 다른 길로 도망친 후였다. 알고

있었지만 쫓지 않은 것은 동생을 잡아야 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여자만은 살리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동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폴로테스는 무감한 눈빛으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감긴

눈과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 평온하게만 보이는 남동생의

얼굴에 그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었다.

“베지 않고 뭐 하십니까. 한번 겨눈 칼날은 거둬들일 수 없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는 망설이지 말고 베십시오.”

“……망설인 적 없는데.”

“형님께서는 끝까지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중얼거리던 남자가 번쩍 눈을 뜨며 저를 노려본 순간, 미미하게

울던 칼날은 결국 그의 목을 꿰뚫었다. 반은 충동적인 행위. 푹,

날붙이가 살을 가르는 감각이 손을 타고 그를 전율시켰다. 칼을

뽑자 사선으로 갈라진 목이 대롱대롱하더니 이내 뒤로 넘어가

얼음 속에 파묻혔다.

“황자가 된 것을 감축드립 니다.”

남은 몸뚱이마저 옆으로 쓰러지자 히폴로테스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다섯의 전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어 보였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히폴로테스에게 예를 갖추었다. 휙, 뒤를 돌아

그들의 숙여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힘없이 팔을

툭 늘어뜨렸다.

“고마워.”

하늘도 땅도, 허공에 흩날리는 눈발마저도 새하얀 그곳에서

칼날을 타고 흐르는 핏물만이 붉었다. 뚝뚝, 칼끝에 고인

핏방울이 눈 속에 궤적을 만든다.

“춥네. 그만가자.”

새까만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히폴로테스는 그들 사이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를 따라 발을 재게 놀리던

전사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침묵을 지켰다.

배다른 이복형을 생글거리는 얼굴로 불태웠다. 어릴 적부터 퍽

친밀하게 지내던 이복동생의 목을 단칼에 베어 남은 시체조차

수습해 주지 않는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주군의 냉혈한

뒷모습은 설산의 그 무엇보다도 시려웠다. 펄럭이는 망토 자락에

붙은 얼음 조각이 바람에 흩어진다.

도망치듯 급히 설산을 빠져나가며 히폴로테스는 제 자신에게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절대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결코

후회해서도 안 된다. 죽는 것보다 죽이는 게 나으니까. 나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찬 바람에 눈을 감으니 불타 무너지는 잔해 속에 깔려 울던

여자가 아른거렸다. 누군가의 손에 끌려 나가는 내게 손을 뻗던

여자의 붉은 눈동자.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웃어 보이며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었지.

‘오지 마라. 나는 괜찮으니 어서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매운 연기에 숨이 턱턱 막혀 왔어. 사방에서

일렁이는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몸을 녹여 버릴 듯 뜨거웠지.

그보다 괴로운 것은 눈앞을 가리는 재 가루 속에서 엉엉 울고

있는……너무도 무력한 나.

이름도 부르지 못했는데 비가 먼저 내렸다. 회색빛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에 드리우고 나서야 다가갈 수 있었던 까맣게 타

버린 어미의 시신. 잔뜩 일그러진 그것에서 뒷걸음치다가 등을

돌려 내달렸다. 비틀거리는 걸음마다 눈물이 사라져서 멈출 수

없었다.

‘어미가 너만은 꼭 지켜 줄게. 그러니 너무 걱정 말렴,

히 폴로테스.’

어린 날, 품 안에 꼭 껴안아 주며 매일 그리 속삭여 주었었잖아.

지켜 주겠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할

때는 언제고 혼자 죽어 버리다니.

‘히폴로테스. 어미와 약속해 주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악에 받친 마지막 외침이 평생 가슴속에 메아리쳐서. 그래,

당신처럼 죽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죽였다. 어미의 말대로

스스로라도 살아남기 위해. 남은 삶을 이어 가기 위해 죽였을

뿐인데.

웃어 보이는 가면 뒤에서 겁 없는 이들은 혐오와 경멸을 가득

담아 손가락질했다. 이 잔악하고 무도한 놈! 아무렇지 않게

형제를 몽땅 베어 버린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 살상을 즐기면서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인간 말종.

또 겁먹은 이들은 슬금슬금 기며 비위를 맞추려 애를 썼지. 두

눈 가득한 공포와 거북함을 제대로 감추지도 못한 채로. 짐승만도

못한 놈 피 냄새가 잔뜩 밴 악귀! 그리 숙덕이면서.

그러니 나는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증오스러워 미칠 것 같아.

두려움과 혐오. 경멸과 거북함을 감춘 이들과 밤마다 찾아와

저주를 읊조리는 내가 벤 영혼들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리저리

배회하지도 말고…… 베십시오.’

한때는 동생이라 여겼던 이의 유언이 귓가를 맴돈다.

히폴로테스는 가슴께를 몇 번 쓸어내리다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아아, 가슴속 어딘가 사방으로 찢어져 너덜너덜해지기라도

했는지 너무도 쓰라렸다. 불에 댄 것마냥화닥거리던 통증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이윽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도록 무뎌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약속한 삶을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시퍼런 기운이 감도는 방 안에서 그는

번쩍 눈을 떴다. 평생 꺼내 보지 않겠다 다짐했던 지옥을

들여다본 기분에 그는 잠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답지 않게 땀까지 '뻘뻘 흘린 모양이다. 번듯한 이마에 고인

땀을 손등으로 훑어 내자 주변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아,그러고보니.’’

그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머무는 라뷔린토스 안,

널따란 침상 위에는 옮겨다 놓은 여자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곁을 지키다가 선잠이 들었던 건가.

금빛 바닥에 앉아 침상 끝자락에 턱을 괸 채 히폴로테스는

허옇게 질린 여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손을 뻗었다.

여전히 분홍빛인 입술을 꾹 누르자 통통한 입술이 오물거린다.

여자가 내뿜는 고조곤한 숨소리가 공기를 포근하게 달궜다.

여전히 피범벅인 채로 잠시 눈을 감는데 스르륵 다가온 손끝이

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에즈라?”

“히폴로테스님.”

“정신이 들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언제부터 일어나 있던 걸까. 몸을 바로 세운 히폴로테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피자 에즈라는 평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늘 여유로운 그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가슴

한구석을 쿵쿵 두드렸다.

“아프지 않아요. 푹 자고 나니 몸도 가뿐하고요.”

“다행이네요. 정말.”

그가 과장되게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끝내

휘어지는 눈꼬리가 아름다워 에즈라는 그의 눈꺼풀을 살짝

건드렸다. 역시 핏자국이 선명한손끝으로.

히폴로테스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채 손가락을

얽었다. 오고 가는 따뜻한 온기와 애틋한 눈길. 그것을 연기하며

히폴로테스는 서글픈 목소리를 꾸며 냈다.

“당신이 고통받는 거 더 이상 못 보겠어요.”

“저는 괜찮아요.”

“혈육한테…… 배신을 당해 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히폴로테스가 이를 바득 갈며 신랄하게 대꾸했다. 처음 보는

성난 모습에 움찔 몸을 떠는데 그는 은빛 머리칼을 헝클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다는 말 되게 이기적인 거예요. 나는. 내가 괜찮지가

않은데.”

저보다 더 힘겨워 보이는 그를 보며 말없이 눈만 끔뻑이는데

그가 뺨에 제 손등을 비비며 울먹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앞에서 괜찮다는 말 하지 마.”

쏘아보는 눈빛에 에즈라는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의 약한 모습에 덜컥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가 명령했다.

“말해 보느 괜찮지 않다고. 그날처럼…… 아프다고.”

“아, 아파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새된 목소리로 지껄이는 여자는 하찮았고 그만큼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뺨을 감싸며 이마에 튄

핏자국을 문질렀다.

“추하다, 역겹다, 비루하고 혐오스러운 몰골의 황자다.

사람들은 다들 그리 말하는데. 공주님이 보는 나도 그래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히폴로테스 님께 그런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아요. 누구보다 히폴로테스 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글쎄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리 숙덕이던데. 당신만

몰랐나 봐요.”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더욱 꼬여만 갔다.

뚝 잘라 내지 않는 이상 풀어낼 수 없는 매듭에 갇힌 것처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 눈에 비친 히폴로테스 님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왜 그런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그의 벌건 눈동자가 짙어졌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아래,

타들어 간 잿더미가 시꺼멓게 내려앉는다.

무언의 긍정을 하는 여자는 퍽 긴장한 것인지 입술을 꾹 내리

문 채였다. 혼란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비집고 나오려는 비웃음을

억누르며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티텐에만 비범한 능력을 가진 공주들이 있는 건 아니에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은 제국에도 있어요. 모습을 숨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죠. 그러니 당신이 보는 내가 진정한 나예요.

당신만이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주님은 아무 능력도 없는 열등한 공주가 아니라는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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