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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1화 (21/113)

21화

“네, 네.”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 잔뜩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뒤질 듯 미약하다. 죽고 싶다며 발악하며

시위하듯 손목을 긋더니 모두 거짓이었던 모양이지. 목숨이 진정

경각에 다다르니 저런 잡놈에게도 빌빌 기는 꼴이라니.

구질구질한 여자가 떠오르자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심호흡을 하며 웃음을 가라앉힌 그는 곧바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정도면 됐겠다 싶은 순간, 그는 뒤를 돌아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시야에 들어온 밀랍같이 늘어진 여자의

알몸.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남자는 흉흉한 것을 막

들이댄 참이었다.

히폴로테스의 등장에 다섯 명의 남성들은 그 상태로 멈추더니

돌처럼 굳어만 갔다. 히폴로테스는 유려하게 고개를 틀어 탁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 고여 오는

눈물만을 흘려보내는 눈을.

아무 소리도 내지 말랬더니…… 착실하게 입을 틀어막은

여자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즐거움을 힘겹게 삼켰다. 아무래도

지금은 두 눈에 담길 분노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지금 뭐하는 거지?”

“그, 그, 그게……:’

방 안으로 들어선 히폴로테스를 발견한 남종들의 다리가

힘없이 후들거렸다. 침상 위에서 에즈라를 깔아뭉갰던 남종은

황망한 얼굴로 거의 기다시피 내려와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도 에즈라는 그대로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건가

싶었으나 간헐적으로 끔뻑거리는 눈은 그녀가 멀쩡하다는 걸

방증했다. 분명한 건…… 어디로 보나 제정신은 아니었다.

“누가 저지른 짓이지?”

“사,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차마 입도 벙긋 못 하던 이들 중 하나가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으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눈 깜짝할 새 휘두른 칼날의

궤적을 좇을 수 없었다. 남종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목에 점차 붉은 실이

드러나더니 그 사이로 핏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어……”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흠뻑 적시는 피를 보며

남종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잘린 목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홀로 남은 몸뚱이는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잘린 목에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는 모여

있던 남은 이들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여전히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는 에즈라의 뺨에도 두어 방울이

튀어 있었다. 그 흔적을 발견한 히폴로테스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배후를 물었는데. 앞으로 다른 소리를 지껄인다면 하나하나

친히 벨 것이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릴 테니 잠시. 잠시만……:,

처음으로 에즈라를 겁탈하려던 남자가 팔을 내저으며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공포에 짓눌린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글로사 공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 타. 탑에 갇힌 공주님을

범하기만 하면 금화를 잔뜩 주시겠다기에 어, 어쩔 수 없이.”

“이런. 어쩔수 없이?”

히폴로테스는 온화하게 웃는 낯으로 말꼬리를 잡았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절로 코웃음이 나오는 탓이다. 금화를 받아 챙기려고

제 발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놈이 하는 변명치고는 너무 질

낮은 것 아닌가.

“아니, 그것이 아니라…… 실은 부양할 가족이 너무 많아서

정말.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거짓부렁까지 내뱉으며 구역질 나는 입을 놀려 대고

있었다. 새하얀 밀랍처럼 질린 여자의 얼굴이 달빛에 선명하다.

이 정도면 되었을까. 히폴로테스는 글로사의 이름이 나왔을

적부터 다 죽은 사냥감처럼 헐떡대던 에즈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시뻘건 피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적셔 오자

상기된 심장이 쿵쾅거렸다. 금방이라도 이들의 가죽을 가르고

살덩이를 짓밟아 피 칠갑을 하고만 싶었다. 곧 닥쳐올 쾌감에

검을 고쳐 잡은 그는 기다란 칼에 날을 세웠다.

바닥을 짚은 팔을 두 동강 낸 것이 시작이었다. 늘 상냥한

태도로 웃어 보이던 남자의 험한 칼질은 분명 눈 뜨고 보기에

역겨운 광경이었으나 에즈라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잔인한 면모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목숨을 빼앗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까운

살육이었다. 그 무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마타리는 밀려오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 아악!”

가슴에 꽂힌 칼날을 뽑기 위해 남자는 아등바등했다. 반쯤 빼낸

칼을 어쩌지 못하고 병사가 뒤로 넘어가자 히폴로테스는 그 칼을

빼내 수직으로 휘둘렀다. 횡으로 베인 다른 이는 철푸덕, 바닥에

늘어졌다.

"시, 시싫어……억!”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가던 한

남종이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무릎 밑으로 다리가 없었다.

아무리 다리를 움직거려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 꼴을 보며 킥킥거리던 히폴로테스는 그의 등 부근을 향해

칼을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남종은 짓눌린 개미처럼 꼼짝도

않는다.

턱 끝에 고인 알 수 없는 액체를 대강 훑어낸 후 문 쪽으로 달려

나가는 남종을 향해 칼을 던졌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칼이

정확히 뒷목을 꿰뚫었다. 널브러진 몸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 목을

단칼에 잘라 내었지만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피 칠갑을 한 후 주변을 둘러보자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너무 흥분해 날뛰었나. 그는 곤란한 얼굴로 은발을

느른하게 쓸어 올리며 홀로 남은 남자 앞에 다가섰다.

“이러. 이러면 약속이. 다른, 분명히

뚝뚝 끊어져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약속한적 없는데.”

“……예?”

“약속한적 없다고.”

한껏 덜떨어진 얼굴을 한 남종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누추하고 흉측한 얼굴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미려한

콧대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마저도 황홀하게 느껴졌다. 잘못 본

것인가. 남종이 천진하게 싱글거리는 얼굴에 홀려 고개를 잠시

흔들던 그때였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마음을 숨기며 히폴로테스는 마지막

남은 이의 복부를 사선으로 찢었다. 돌벽에 흩뿌려진 피를

마지막으로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히폴로테스는 피에 젖은 은발을 탈탈 털며 나른한 눈빛으로

바닥을 살폈다. 이리저리 늘어진 사체들 때문에 돌바닥은 흥건한

피로 미끌거렸다. 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떼자 이미

진득해진 핏물이 쩍쩍 소리를 내며 들러붙는다.

“에 즈라.”

이름을 부르자 가만히 누워 있던 에즈라가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바로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히폴로테스는

당황한 얼굴로 핏자국이 선명한 볼을 긁으며 나직이 말했다.

“놀랐겠네요. 미안해요.”

“왜……사과를 하세요?’’

되레 물어 오는 여자의 눈동자는 예전 같지 않았다. 비에 젖은

듯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과 부들부들 떨리는 꽉 쥔 주먹까지.

아아, 이건 너무도 익숙한 감정이 아닌가.

“화가 났군요. 설마 나 때문인가요? 내가 당신을 범하려던

이들을……죽여서?”

“ 아니요.”

에즈라는 단호한 어투로 내뱉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살벌한 눈빛이 헐벗은 여체를 훑었으나 에즈라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늘 유약함을 내비치며 말갛게 빛나던

에즈라의 눈은 북받치는 감정에 불거져 있었다.

“그럼 누구에게화가 난 거예요?”

알면서도 물었다. 가증스러운 가면을 쓴 남자는 침상 맡에

무릎을 꿇고 눈물 자국이 선명한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에

질척하게 묻은 피. 비릿한 혈 향이 코를 찔러 왔으나 에즈라는

그것에 더욱 뺨을 부볐다.

그 행위에 오히려 몸을 굳힌 쪽은 히폴로테스였다.

“너무 무력한 제 자신에게화가 나요.”

“글로사 공주님은 아니고요?”

“그것도…… 맞아요.”

여전히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뺨을 묻은 채로 에즈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첫째 공주가 친히 저들을 시켜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에 이토록이나 가슴이 끓어오르는 걸까.

심심찮게 왕비가 찾아와 뺨을 내리치고 채찍으로 휘갈길 때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건만.

“복수하고 싶어요?”

복수. 그 단어에 살짝 인상을 쓰던 에즈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픔을 깨닫게 해 준 그가, 분노마저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서. 하지만 복수. 그런 것은 마음에 담고 싶은

감정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 그냥?”

그는 제 말을 차분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용기가 되었다. 마음을 고백할 용기.

“혹시라도 당신이 와 주지 않을까, 계속 문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럴 리 없는 거

알고 있는데도.”

괴로웠던 순간마다 나타나 구원해 주던 남자. 닫힌 문을 열어

주고, 꽃다발을 선물해 주고. 또……,

“또 이렇게 와 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해요.”

죽고 싶었던 삶에서 기어코 끌어내 준 남자. 당신이 내어준

온기가 나를 살게 해. 그러니, 언젠가 혼적도 없이 내 삶이

없어져도 좋아. 그건 내 존재가, 내 세상이…… 내 모든 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다 괜찮아.

에즈라는 술렁임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히폴로테스는 자신의 목을 감아 오는 부러질 듯한 두 팔을 느끼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피범벅인 남자가 역겹지도 않은지,

두렵지도 않은지 여자는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끈을 붙잡듯 더욱 품을 파고들 뿐이었다.

“에즈라.”

결국 안아 주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안기는 꼴이 되어 있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히폴로테스는 착실하게

에즈라의 벗은 등을 토닥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만 실소가

흘러나온다.

이내 에즈라는 침상에 아무렇게나 놓인 칼로 손을 뻗었다.

선물했던 뉙스가 여전히 달려 있는 잔혹하고 무도한 칼날.

에즈라는 피가 튀어 잔뜩 엉망이 되어 버린 뉙스를 잡아 느릿하게

문질렀다.

상처에 약을 바르던 마타리의 손처럼, 아주 다정하게.

일정한 박자로 다독이던 손은 천천히 멈추었다. 뉙스를

만지작거리는 가느다란 손은 제게서 훔친 피로 범벅이었다.

그것을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을 토해 냈다.

“묻고싶은게 있어요.”

에즈라는 천천히 자신의 팔을 풀었다. 여자는 내려다보고

남자는 올려다보았다. 뒤바뀐 위치에도 아랑곳 않는 두 사람은

아주 오래도록 서로를 눈에 담았다. 그가 드디어 입을 뗐다.

“무슨소원을 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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