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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0화 (20/113)

20화

이제는 차라리 왕비님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가까워진

발소리들은 이윽고 돌문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서성거리는 듯

복작거리는 이들의 수근거림. 그들은 더 이상 기척을 숨기지

않는다.

도를 넘은 공포에 온몸이 달달 떨려 왔다. 스스로 뺨을 내리쳐

힘겹게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급히 작은 사슴뿔 하나를 집어 들고

침상 구석으로 피신했다. 막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끼긱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문이 열렸다.

“누,누구세요? 누구신데 가, 갑자기……!’’

“쉿, 조용히 해.”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단번에 그녀를 압도한 이들은 줄 지어

문턱을 넘어 좁은 방에 들어섰다. 이리저리 구경하듯 작은 방올

둘러보던 그들은 거치적거리는 사슴뿔 네 개를 밖으로 치워 버린

후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에즈라를 응시했다.

총 다섯 남자들의 그림자는 그녀를 더욱더 구석으로 몰았다. 등

뒤에 닿는 차갑고 까슬까슬한 돌벽.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곳에

갇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힘은 자꾸만 빠져 간다. 여기저기서

닿아 오는 진득하고 음흉한 시선들. 개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주라고 하더만 이건 뭐, 짐승을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군.”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반쪽이지만 왕의 피를 이은 것

아닌가.”

짐승이라니. 저는…… 진정 짐승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에즈라는 좁다란 방 안 한 곳에 몰려 죽음만을 기다리는 자신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지금의 제 처지는 사냥당하는

사슴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온몸을 집어삼키는 자괴감과 절망.

감출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제 팔로 감싸 안는데 바로 앞에 선 키가

작은 남자가 킥킥거리며 외쳤다.

“공주님과 한탕이라…… 영광입니다, 공주님!”

“한탕? 너 고작 그 정도냐? 난 이 정도면 두 발은 거뜬히 뺄 수

있어.”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제 신변에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부디 죽음만은 아니길 바라며

애원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찌 말하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끙끙 앓는 소리가 처절하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울먹였으나 둘러싼 이들은 우습기만 한지

마주 보며 킥킥거렸다.

울컥 눈물이 차오르자 눈앞이 흐려져 그들의 인영이

희미해졌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눈물 흘리는 거라니, 살려 달라 빌

수조차 없는 처지가 저주스러워 미칠 것 같아.

“어허, 공주님께서 이렇게 위험한 걸 들고 있으면 어쩝니까.

예?”

마지막 발악처럼 사슴뿔을 치켜들어 휘둘렀으나 그뿐.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손쉽게 사슴뿔을 뺏어 들었다. 그와 벌였던

잠깐의 실랑이에 손바닥이 베인 것인지 뜨거운 핏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으으”

차마 상혼을 확인하기도 전에 남자는 가녀린 팔뚝을 세게

잡아끌어 침상 위로 내동댕이쳤다. 어푸러지기 무섭게 제 몸을

타고 올라온 남자는 꼼짝할 수 없도록 양다리로 허리를 졸라

왔다.

커다란 돌덩이 같은 몸에 짓눌려 숨 쉬기마저 힘들어지자

에즈라는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랐다. 자주 꾸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이러다가 정말 죽겠다 싶은 순간까지

다다랐을 때 깨어나던 그런 꿈이기를.

“가만히 있어!’’

몸을 일으키려고 발악하는데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두터운

손이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 돌로 내리친 것처럼 머리가 울리고

귀가 먹먹해지자 현실로 돌아왔다. 꿈이 아니었다. 맞아, 꿈일

리가 없어. 단 한 번도 바라던 것은 이루어진 적이 없으니까.

뺨이 타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차마 신음도 뱉지 못하자 남자는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제압한 후 가슴을 움켜쥐었다.

“0으|”

— ―I -

“핏줄은 공주라 이건가? 보기보다 만지는 맛이 있네.”

남자가 큭큭거리며 가슴을 짓이기자 말 못 할 통증이 일었다.

벗어나려 몸부림치려다가 이내 힘을 뺐다. 또다시 두터운 손이

날아들까 봐 너무 두려웠다.

힘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맞아 죽지 않으려면

그래서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서 그를

보려면…… 그냥 이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게 나아.

올라탄 남자가 중심부를 납작한 배에 비비적대자 딱딱하게

솟은 무언가가 여실히 느껴졌다.

“뭐 해, 먼저 벗기지 않고. 그러다 해 뜨겠네.”

다른 이가 다가와 그의 팔뚝을 쳤다. 키들거리던 남자가 목

부분으로 손을 뻗더니 단번에 너절한 키톤을 찢어 냈다. 꺅.

소리를 지르며 팔로 드러난 살결을 가리려 했지만 남자는 손쉽게

그녀를 제압했다.

“흐윽……,”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드러난 새하얀 몸에 모여 있던 이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보드라워 보이는 횐 살결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깨끗했고, 저절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짓밟고 싶다는 욕정이 치솟자 남은 이들은 아래로 몰리는

열기에 홀린 듯 손을 가져다 대며 스스로 자극했다. 에즈라 위에

올라탄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감상하듯 흐느끼는 에즈라를

내려다보던 그는 드러난 맨가슴을 뭉근히 움켜쥐었다.

“으윽! 제. 제발요…… 제발……

터진 입으로 드디어 애원하고 빌었다. 무력감에 짓눌린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일밖에 남지 않았기에. 작은

얼굴을 축축이 적셔 나가는 눈물. 애석하게도 물기 어린 채로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는 음심을 더욱 부추겼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응?”

“ 악;”

단숨에 배를 타고 내려가는 손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허리를 거칠게 쓸어내리던 남자가 가슴 둔덕을 두툼한 입술로

머금다가 혀로 마구 지분거렸다. 느껴지는 끔찍한 축축함과

구역질 나는 냄새. 그를 밀어 내려 애쓰는 팔은 곧 저지되었고,

가슴팍에는 뜨겁고 역겨운 숨결이 진득하게 닿아 왔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저 멀리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열려 있는데, 조금만 내달리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괴로워서…… 내가 너무

증오스러워.

“죽일 건가요?”

“ 뭐?”

“……살려 주세요. 모, 목숨만 살려 주세요.”

아직,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졌어. 평생

죄악감에 짓눌려 살아가야 하는 삶이 괴로워 남몰래 죽음을 빌어

왔던 삶이지만 그가 나타나고 무언가 달라졌어. 나는…… 살고

싶어졌어.

아픈 삶을 모두 떠안고 계속 살아 나가고 싶어졌어.

헐떡거리는 여자의 입술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싹싹 빌던

손에서 흘러내리는 핏물. 아프지도 않은지 여자는 계속 목숨만을

구걸했다. 삶을 바라는 애원과는 다른 감정이 전해져 오는 탓에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잠시 침묵했다.

“살고 싶으면…… 닥쳐.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알았어?”

“네. 네.”

제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도 모른 채 살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에 에즈라는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마저도 조용히

속삭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에즈라를 잠시 내려다보던 남자는 이윽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그런데도……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와서, 터져 버린 손바닥이 미치도록 아파서,

입을 막은 손바닥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올까 봐 너무

두려웠다.

“히폴로테스님.”

모든 걸 포기한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을 소리 없이

불러 보았다. 문턱 너머 흔들리는 그의 옷자락이 환영은 아니길

바라며.

새벽녘이 되자 안개가 낮게 끼었다. 들숨이 텁텁하게 느껴질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가르며 마타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달음박질 했다. 한시라도 발리 히폴로테스에게 가야 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온 남자들을 보자 가슴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돌탑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그들을 뒤로하는

자신이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죄책감이 결국 흘러넘쳐서.

“히폴로테스님!”

단숨에 라뷔린토스에 도착한 마타리가 예를 차릴 새는 없었다.

황금문을 온 힘을 다해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두 번, 세 번 미친

듯이 문을 두들기며 그의 이름을 외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살벌한

표정을 한 데몰레온이 대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

“……촉박합니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시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목숨만 달라붙어 있으면 되는 일인데. 퍽 정이라도 준

모양이네.”

땀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어투로

히폴로테스가 일갈했다. 성질을 건드린 것인지 그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히폴로테스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데몰레온을 밀어 내고는 문턱을 넘었다.

“하필 새벽이라. 잠이 다 깨버렸어.”

미친 자식. 마타리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지껄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일 초마다 애가 달아 발을 동동 굴리는 그녀와

달리 히폴로테스의 보폭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마타리는 매초

목숨이 줄어드는 기분에 휩싸였다.

돌탑 앞에 선 히폴로테스는 허리에 찬 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검 손잡이 부근에 묶인 은색 끈. 안위를. 소망을 빌며 만들었다는

이것은 티텐에 머무는 동안 풀 수 없을 테지.

꼭대기에서 수세에 몰린 여자는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되도

않는 반항을 하다가 이리저리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미 축 처져 남자들 밑에 깔려 신음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픽. 짧게 조소하던 그는 계단을 올랐다.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도록 기척을 죽인 그는 금세 그녀의 방까지 올라 활짝 열린

돌문 뒤에 잠시 숨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걸 보니 정신을 잃은 쪽인가. 돌문 옆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하녀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듯

파리해져 있었다.

금화 몇 푼에 몇 번이고 여자를 사지로 몰아넣을 때는 언제고.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데 북적이는 방 안에서 음산한

협박이 흘러나왔다.

"살고 싶으면…… 닥쳐.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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