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내지르자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그것 또한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는 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놓았다. 깜짝 놀라 누가 들으면 어쩌나 싶어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속 편하게 킥킥거렸다.
“뭔데?”
“네, 네?”
“줄 거 있다며.”
착각일까. 잔뜩 기대감에 부푼 붉은 눈동자가 지나치게
반짝이고 있는 것 같은 건.
히폴로테스는 자신을 멀거니 올려다보는 에즈라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왜요? 말 놓는 거 별로예요?”
“아뇨! 그러니까…… 조금 놀라서요.”
세차게 고개를 젓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말을 놓는 게
싫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더 친밀해진 기분에 가슴이 터져 나갈
듯 뛰어 대기만 해서 허둥지등 품에서 뉙스를 찾아 꺼내 들려는데
그보다 훨씬 재빠른 손이 뉙스를 탁. 낚아채 갔다.
“……붉은 실이네.”
제멋대로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어색했다. 히폴로테스는
조금 거칠한 은색 천에 새겨진 엉성한 제 이름을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쓸어 보았다. 조금 삐뚤빼뚤한 이름과 우습기 짝이
없는 엉성한 바느질.
글을 모르는 여자가 처음으로 익힌 이름, 소원을 빌며 수놓은
이름은 제 것이었다. 여기저기 바늘 자국이 남은 여린 손가락을
감추려 그토록 잡힌 손을 빼려 했던 건가. 히폴로테스는 손안에
들어온 뉙스를 꽉 잡아 쥐었다.
“구,구겨질텐데요.”
“ 아.”
주먹에 닿아 오는 에즈라의 온기에 그는화들짝 놀라 털어 내듯
그녀를 멀리했다. 자신의 과민반응에 더 놀란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향해 대강 웃어 보인 후 자신의 칼에 그것을 단단히
묶는 것도 모자라 매듭까지 지어 보였다.
“이러면 안 풀릴거예요.”
어느새 다시 말을 높이는 그는 왜인지 은근히 시선을 빗겼다.
선물이 맘에 들지 않는 걸까. 조금 실망한 티가 나지 않도록
에즈라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매일 밤, 잠을 설치며 바느질을 이어 가던 날들. 바늘 끝에 찔려
피가 나는 손가락을 빨고. 마타리의 뾰족한 눈길 아래서 지나온
험난한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니. 누가 보아도 어설픈 것을 그가
받아 주었다는 게 너무도 행복했다.
에즈라는 오늘 쓰고 버려질 활이 아닌, 그가 쓰는 검에
매듭지어진 뉙스를 보고 또 보았다. 마치 소중하게 대해 주는
것만 같아서 지나치게 가슴이 뭉클했다.
내보인 진심을 처음으로 받아 준 사람. 그가 선물해 준 두 번째
행복에 에즈라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마주 웃었다.
한편, 스케네는 모멸감을 견디기 힘겨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밖에 담지 않는 두 남녀의 눈빛은 마치 만물이
축복하듯 눈부셨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복장이
터졌다.
미친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리 별 볼 일 없는 에즈라를
선택하다니. 순식간에 비루한 외양의 황자에게 혐오감이 일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황비 자리만 아니라면 저런 남자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스케네가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막 한 걸음 내디디려는 그때,
글로사는 손을 들어 보이며 그녀를 막아섰다.
“기다려.”
“……뭐?’’
말을 높일 정신머리는 없었다. 야차같이 얼굴을 구긴 스케네는
글로사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에즈라에게
증오를 쏟아부을 때는 언제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녀가 조금은
두려웠다. 글로사는 나긋나긋한 어투로 훈계했다.
“채신머리없게. 내가 먼저 갈 테니, 너희는 순서에 맞춰
들어와.”
“언니!”
스케네가 한쪽 발을 구르며 소리쳤으나 쌩하니 무시한
글로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은 그 누가 보아도 황자에게
거부당한 공주라 손가락질할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쳤다.
“뭐 해요, 디케 언니! 언니가 가야 내가 가잖아!”
하여간, 이상한 곳에서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다. 글로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디케는 황자에게 대놓고 들이대던
스케네에게 조금 애잔한 마음이 들어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저 역시 쪼글쪼글해진 기대감에
자존심이 퍽 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짜……말도 안돼.”
그렇게나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인 걸까. 쿵쿵 발을 구르며
하녀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스케네는 다시금 에즈라와
히폴로테스를 노려보았다. 피를 잔뜩 흘리며 죽어 간 사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가리는 에즈라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포기할 줄알고?”
스케네를 둘러싼 하녀들은 고소한 마음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내리눌렀다. 생각을 입으로 내뱉는 버릇이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도 착실히
스케네의 뒤를 따랐다.
글로사가 머무는 남쪽 궁은 본궁을 제외하면 가장 넓고
화려했다. 보여 주기식인 사치품들은 정갈하게 제자리를 지켰고,
글로사는 그것들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무용하게 반짝이는
것들의 먼지를 털어 내는 일은 하녀들의 일이었지만 몰래 불평 한
자락 중얼거릴 수 없었다.
글로사의 측근들은 그녀를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딱 그만큼
두려워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 죽어 나간 하녀들의 시체를
늘어놓는다면 그녀가 아끼는 장미 정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테니까.
"글로사 님, 데려왔습니다. 들라 할까요?”
탁 트인 창은 굳게 닫혀 있었다. 훤한 대낮에 보이는 풍경은
드넓게 펼쳐진 한여름의 정원이었겠지만 늦은 밤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깜깜한 창에는 자신의 모습만이 비쳤다. 버릇처럼 창틀
꽉 잡아 쥔 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자신이.
“……조금만 기다리라 해.”
모르는 게 없는 삶을 살아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은 머릿속에 담겨 있었으며, 자잘한 지식들은
줄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 나라의 공주라는 위치는 힘들이지
않아도 모든 걸 쉽게 손에 쥐여 주었다.
타고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첫째 공주. 그 삶은 늘 우러러봄의
대상이었으며 추앙받아 마땅했다. 에즈라, 그 짐승 같은 공주가
제 자존심을 할퀴지만 않았더라면…… 좁다란 왕국을 벗어나
제국의 황비로서의 삶 또한 제 것이었을 것이다.
뚝 끊어진 탄탄대로는 점점 바스러져만 갔다. 어느새 제
발밑까지 금이 간 기분. 떨쳐 낼 수 없는 두려움에 짓씹은 입술이
터져 기어코 피를 보았다.
“들여라.”
“ 예.”
가시처럼 남아 미약한 존재감을 외치던 죄책감은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글로사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둑한 침실 안. 곳곳에서 타오르는 등불의
그림자가 남자의 어깨에 잠시 일렁였다.
“이곳까지 너를 불러들인 이유를 모르지 않겠지. 일이
틀어져서도. 입이 벌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일이지.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목을 벨 것이다. 설사 배후가 나라는 것이 알려진다 해도……
나는 큰 타격이 없거든. 그러니 너희는 제값을 잘 치러야 할
거야.”
“……예.”
내내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종은 발밑부터 꾸물꾸물
피어오르는 음습함에 고개를 들어 공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주홍빚 시야에 내려뜬 눈이 비친다. 날 끝에서 흐르는 시퍼런
기운이 얼룩진 눈동자. 공주라기보다는 책 속의 마녀같이
느껴지는 탓에 남종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대로 짓밟아 버려. 그리고 살려는 둬. 평생 그 기억을 가진
채 고통스러워하도록 냅둬야 하거든. 아! 너무 많아서도 안 도부
그래…… 딱 다섯이 좋겠네.”
다섯. 그녀가 선물받은 사슴의 수이자 와스터 제국에서는
풍요를 상징하는 숫자. 잔혹한 미소를 걸친 글로사는 획 뒤를
돌아 손을 내저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침실을 나선 남종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다가 복도 한가운데서 허리를 숙여 끅끅 웃어 댔다. 버려진
짐승마냥 돌탑 안에 갇힌 여자를 범하는 일에 금화 이백이
걸리다니. 종살이를 청산하고 평생 떵떵거릴 수 있는 기회를 그
누가 마다할까.
“성공해야지. 암성공하고말고.”
까짓것 목숨이 걸렸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코를 파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분명했기에. 벌써 눈앞에. 두 손안에
금화가 수북이 쌓인 기분이 들었다.
어영부영 사냥 대회가 끝나고 처치 곤란한 사슴 사체는
에즈라에게 골머리를 썩게 했다. 턱없이 좁은 돌탑 안으로 들일
수 없었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
고뇌를 알아챘는지 마타리는 하녀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돌아온 하녀들과 마타리의 손에는
가지처럼 뻗은 사슴뿔이 들려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다섯 개의 사슴뿔. 저것을 손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들의 노고에 허리가 부러져라 감사를 표하자 하녀들은
됐다며 난색을 표했고, 마타리는 마뜩잖은 눈으로 허리를 숙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얏!”
늦은 밤, 며칠째 좁은 방 안을 빼곡히 채운 사슴뿔을 요리조리
구경하던 에즈라가 작게 신음을 내지르자 침상을 정리하던
마타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신경 쓰지 말라 해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나. 에즈라는 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말이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까.
에즈라는 자신의 어깨를 돌려 세운 마타리의 날 선 시선을
피하려 괜히 딴청을 피웠다. 그럼에도 꽤 깊이 베인 손끝에서
방울져 흐르는 피를 감출 수는 없는 일. 마타리가 검지를 꽉 잡고
있던 손을 때리고 나서야 숨겼던 상처를 내보였다.
“짐승의 뼈라 날이 서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죄송해요. 하도 신기해서 이리저리 보다보니…… ”
“잠시만 기다리세요.”
상처를 보며 인상을 쓰던 그녀는 아까처럼 손가락을 잡고
있으라 말한 뒤 방을 나섰다. 멍하니 굳어 가는 피를 관찰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타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품 안에는 깨끗해 보이는 천과 고약이 들려 있었다.
"이리 주세요.”
채 손을 뻗기도 전에 손목을 채 간 그녀는 미온수로 상처를
살살 닦아 냈다. 섬짓하고 아릿한 아픔에 무심코 신음을 흘린
에즈라는 헙. 입을 다물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으나 마타리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로 상처를 살필 뿐, 무어라 타박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고마워 가슴이 간질거리고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마타리는 끈적거리는 고약을 잔뜩 바른 후 흰 천으로
검지손가락 전체를 세게 감아 주었다.
고마워요, 마타리 님.”
“고,고마워.”
말을 올렸다가 살벌해지는 그녀를 보고 찔끔 어깨를 들썩였다.
급히 정정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보인 마타리는 탁탁 손을
털며 가져온 것들을 무심히 챙겨 들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최대한 손을
움직이지 마세요.”
“0 으”
—# 0 -
“ 그럼.”
돌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직까지도 얼얼한
손가락에서는 핏물이 조금씩 비치고 있었다. 괜히 수선을 떨다가
바보처럼 다치기나 하고. 요즘 들어 너무 들떠 있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타리가 각 잡아 정리해 준 침상을 파고들었다.
어둠 속. 덮쳐 오는 수마와 포근함. 최근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몰아쳐 피곤했지만. 자연스럽게 입꼬리는 올라갔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녀는 이윽고 깊은 잠에 스르륵 빠져들었다.
허나 곤한 몸과 마음에 깊이 잠들었던 에즈라는 밖에서 이는
미묘한 소란에 다시금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 으음
뒤척이며 흐린 눈을 비비적거리는데 돌탑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이들의 발소리가 느껴졌다. 돌탑에서 지내오며 갈고
닦은 감각. 평소와 다른 위화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침상 위에
무릎을 꿇은 에즈라는 더욱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짝 몸을
굳혔다.
이상했다. 모든 게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사방은 여전히 깜깜했고 불침번을 서는
하녀의 옅은 코골이도 들리지 않는다.
왕비님인가 싶었지만 그녀라면 여봐란듯이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랐을 터. 한둘이 아닌 발소리는 마치 숨어든 사람들처럼 아주
조심스러웠고, 그것은 또 다른 공포였다.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