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눈을 내리깐 채로, 오늘따라 힘겨운 기만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차마 시선을 올려 어린아이처럼 기뻐할 여자를 볼 수 없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자 손끝에 닿아 오는 온기에 염치없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마타리 님께 늘
도움만 받네요.”
위험에 몰아넣었던 자신을 잊은 모양이다. 픽, 실소를 터뜨린
마타리는 부러 그녀의 기억력을 탓하며 더욱 싸늘한 태도로
에즈라를 이끌었다.
“어서 내려가야 합니다. 사슴을 받으셔야죠.”
“ 사슴요?”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기며 물어 오는 에즈라의 손을
마타리는 조금 더 꽉 맞잡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히폴로테스의 손이 텅텅 비어 있기를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아주 조금 서글펐다.
사냥 놀음 내내 히폴로테스는 히에로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마치 대결하듯 조그만 새들부터, 몸집이 커다란
멧돼지까지. 번갈아 서로의 사냥 실력을 뽐냈지만 끝내 무언의
승리를 쟁취한 것은 당연히 히폴로테스였다.
히에로스는 젊고 팔팔한 히폴로테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애초 그의 목적은 히폴로테스의 사슴
사냥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에게 사냥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 그가 사슴을 다섯 마리나 잡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제지하지 못한 히에로스는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내비쳤다.
“자네가 사슴의 씨를 말리겠군.”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에즈라 공주님과의 약조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말은 그리 하면서 그는 우월감을 감추지 않고 가증스럽게
싱글거렸다. 히폴로테스의 얄미운 태도에 고삐를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으나 열등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히에로스는
거칠게 말을 돌리며 물었다.
“에즈라가 다섯을 원한다, 그리 말했나?”
“아닙니다. 제가 먼저 다섯 마리를 바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허면……어째서 다섯이지?”
기다렸던 물음이 돌아왔기에 은은한 미소를 띤 그는 가볍게.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와스터 제국에서 다섯은 풍요를 상징하지요. 초대 황제과
황비에게서 다섯의 자녀가 났고. 그들은 서로를 잡아먹어 단 한
명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잡아먹었다니. 다섯의 자녀들이 서로를 죽였다는 대목에서
히에로스는 대놓고 경악했다.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지 않던
히에로스의 감추지 못한 표정이 볼만한 터라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계속 설명했다.
“와스터 제국의 오래된 전통이지요. 자식이 몇이든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죽여야 합니다. 동복이든, 이복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죠.”
“그런 잔악한 전통이라니!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야. 설마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건가?”
“히에로스 님. 제국은 여태껏 황실의 권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황제를 위협하는 다른 세력과
그들을 따르는 잔당들을 척살해 온 것이지요. 그러니 아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강한 것은 물어뜯고, 약한 것은
물린다……오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느새 파리해진 얼굴과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채로 히폴로테스를
다그쳤다.
“나는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나 물었네!”
유들유들한 대답에도 히에로스가 공포심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며 날뛰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당연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선대
황제께서는 황비에게서 한 명의 자식만 보셨지요. 다른 자식을
낳아 그들이 서로 황좌를 두고 죽고 죽이는 일은 부모로서 그리
볼 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러고 보니……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히폴로테스는 와스터
제국의 유일한 황자라 했다. 문득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굴었던
제 모습이 떠올라 히에로스는 진정하려 숨을 길게 내쉬면서도
쉬이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여직 빠르게
뛰어 대는 심음이 목구멍까지 울렸지만 그는 짐짓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하네. 상상도 못 한 전통이라 꽤 놀라서 그러하니 자네가
이해해주게.”
“아닙니다. 그리 반응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히폴로테스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자 인상을 찡그린
히에로스는 말머리를 돌렸다. 히에로스와 히폴로테스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사냥터를 벗어났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몇몇의 귀족들과 공주들의 시선이 쏠렸다.
“히에로스 님 어찌 이리 많은 것을 사냥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살이 뒤룩뒤룩 찐 귀족이 허겁지겁 달려와 처진
입술로 정신 사납게 아부를 해 댔다. 귀찮은 파리 쫓듯 손을
내저은 히에로스는 축 늘어진 짐승을 모두 시종들에게 넘긴 후.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가 앉았다.
아직까지도 의심을 거둘 수는 없는 일. 수백 년간 무너지지
않는 성벽 아래 평온을 누려 온 티텐은 와스터 제국에 대해
무지했다. 그러니 히폴로테스의 말이 온전한 진실이라 확신하는
건 섣부른 행동이었다.
사냥감을 위협하는 사냥꾼처럼 자신을 뒤쫓던 붉은 눈동자.
히에로스는 공포를 쫓아내기 위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왕이
말없이 자리만 지키자 그곳에 모여 있던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들은 히 폴로테스에게로 향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린 히폴로테스는 더없이 여유롭게 말을
몰았다. 그의 뒤를 숨통이 끊어진 사슴 다섯 마리가 줄줄이
이었다.
과연 어떤 공주가 그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모두는 숨죽여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이것에 판돈을 건 귀족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인지 저들끼리 숙덕이고 손짓 발짓을 해 대는 게 가소롭기만
했다.
그래 봤자 승자도 패자도 없는 내기가 될 텐데 우습기도 하지.
손을 모아 비는 추레한 귀족들과 주먹을 꽉 쥔 채로 상기된 젊은
귀족까지 둘러본 히폴로테스는 짙은 비소를 머금었다.
세 명의 공주가 앉아 있는 붉은 천막은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얼마 안 가 열 발자국 남은 곳에서 그는 말을 세웠다. 정면에 서서
마치 기념품을 살피듯 하나하나 그녀들을 훑는 태도에 글로사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하나도 아닌 다섯 마리. 설마…… 모두에게 한 마리씩 나누어
주는 건 아니겠지. 뉙스를 받지 않은 것쯤은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왕족에 대한 모독이었고.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케네는 이미 엉덩이를
들썩이며 커다란 눈을 수십 번이나 깜빡여 댔고, 디케는 고고한
척 고개를 돌렸으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손끝을
매만졌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닿을 거리에서 그는 일말의 관심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을 돌려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완연히
무시하는. 그리고 무시당한 공주들이라니. 주변의 공기는
삽시간에 쩌적쩌적 금이 갈 정도로 얼어붙었다.
왕족, 귀족 할 것 없이 모두 커다란 충격에 말없이
히폴로테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파스스, 나뭇잎에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가는 바람 소리가 설마 하는 불안감을
부채질한다.
히폴로테스는 묵직해진 분위기를 즐기며 역겨운 것들을
뒤로했다. 경쾌한 마음으로 돌탑을 향해 말을 몰자 얼빠져 있던
이들은 사냥터를 뒤로하고 그를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여자의 횐색 치맛자락이 세찬 바람에
펄럭이자 말간 종아리가 슬쩍 드러났다.
“에즈라 공주님. 여기까지 마중 나와 주셨군요.”
좌우로 고개를 돌려 대며 영문 모를 얼굴을 한 여자는 여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담았다.
“……히폴로테스 님?”
초여름. 돋아나는 새순보다 무구한 녹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에즈라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지만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혼잡하여 하나도 분간할 수 없었다.
마타리를 따라 탑 아래로 향할 때까지도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기에 두려운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심지어
돌탑을 벗어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이다니. 후들거리는 다리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무릎을
박을 것만 같았다.
에즈라가 흠칫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려 하자 가냘픈 손목을
잡아챈 히폴로테스는 멋대로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답지 않게
성급한 모양새로, 마치 이 여자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애타는
사람처럼.
“에즈라 공주님. 오직 공주님만을 위해 사슴을 잡았습니다.
부디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펼쳐진 눈앞의 광경이 실감 나지 않는 터라 에즈라는 오래도록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고 보니, 사슴을 꼭 잡아 오겠다며 전의를
불태우던 그가 떠올랐다. 그저 한낱 호승심이라 생각하며 넘겼던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한마리도 빼놓지 않고요.”
그는 모두의 앞에서 선언했다. 그렇게 달콤한 기만으로
에즈라를 몰아넣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족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와중에 소문을 믿고 에즈라에게 판돈을 건
이들은 치미는 환호를 삼키려 괜스레 허벅지를 꼬집었다.
“사슴을 정말로 잡아 오신 거예요?”
“약조했는데. 설마 잊은거예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보다……,”
다섯 마리라니. 그의 뒤에 산더미처럼 쌓인 사슴의 사체에서는
아직까지도 싱싱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져 새파란 잔디를 뒤덮는 비린내가 조금은 역겨웠다.
“이렇게 많이 잡아 오실 줄은 몰랐어요.’’
햇살을 등진 히폴로테스는 아직까지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민망함에 꼼지락거리는 손끝이 못내
즐거워 한 번 더 입술을 맞춘 그는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에즈라의 손을 꽉 맞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받아 줄 거죠?”
두 사람의 대화에 모두의 귀가 쫑긋 솟았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세 명의 공주와 히에로스왕까지. 모두 각각 다른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에즈라의 대답만을 기다리던
히폴로테스는 종용하듯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아픔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여기서 더 망설인다면 그의 체면이
상하게 될 것이다. 덜컥 인상을 쓴 에즈라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엉킬 정도로 세게.
그렇게 내뱉지 못하는 진심을 대변했다.
“ 고마워요.”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대신 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는데 오늘따라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을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히폴로테스는 상냥한 손길로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신 정리해 주었다.
어디로 보나 풋풋한 연인 같은 분위기. 두 사람에게 사로잡힌
귀족들은 더 이상 꿍얼거리지 못했다. 와중에 에즈라는 품 안에
감추어 두었던 뉙스를 내밀까 말까 고민했다.
그가 약속했던 사슴을 내주었으니 저도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해야 하지 않은가. 이왕이면 그가 사냥에 나서기 전 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건네고 싶다는 욕심이
샘솟았다.
오직 그의 안위만을 빌며 완성한 뉙스를 품 안에 감춘 채
에즈라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에즈라를 알아챈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늦게 사과했다.
“많이 부담스러워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사람들이 지켜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게 아니에요. 저. 제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