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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7화 (17/113)

17화

“그런……,”

그는 난처함을 숨기지 않았다. 곤란한 얼굴로 은발을 쓸어

넘기던 그는 끄응, 신음하기까지 했다. 그 솔직한 모습에 믿을

수 없게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옆에 서서 찢어져라

노려보는 스케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두 개 다 너무 아름다워서 쉽게 고를 수가 없군요.”

글로사의 뉙스는 손에서 미끄러질 듯 부드러웠다. 검은 천에

금실이라. 와스터 제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끈적한 야욕을

품위라는 가면 속에 숨긴 여자가 메스꺼웠다.

마음을 졸이는 두 여자의 보드라운 손끝을 번갈아 보던

히폴로테스는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연기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모습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글로사가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히폴로테스는 받았던 뉙스를

두 사람의 손안에 차례로 돌려주었다.

“두 분 중 한 분을 선택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군요. 제

안위를 빌어 주신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잠시만요, 히플로테스 님!”

자신의 것을 선택할 거라 자신만만하던 스케네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체통도 잊은 모양인지

뒤돌아 멀어져 가는 그를 따라가려고 하자 글로사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뭐?”

체면 차리기도 급급하건만. 흥분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스케네의 가슴팍을 보던 글로사가 경련이 인 듯한 미소를 띤

채로 짓씹듯 내뱉었다.

“지 켜보는 눈들 안 보여 ?”

그제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본 스케네는 어깨에 주었던 힘을

쫙 뺐다. 축 처진 눈썹과 입꼬리. 실망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스케네는 조금 진정이 된 것인지 자신의 팔을 쥔

글로사의 손을 떼 내며 중얼거렸다.

내 것이 훨씬 아름다웠는데.”

어쭙잖은 말에 비릿하게 웃어 보인 글로사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 만만한 걸음걸이였으나 붉은 키톤 자락을 쥔

손등의 힘줄은 불거져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남자의 얼굴을 스쳐 간 상념. 의아함과

아쉬움은 여성이기에 짚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기다리는

이는 스케네도 자신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자마자

마음은 고요한 수면처럼 편안해졌다.

있는지도 몰랐던 가시가 뚝 부러져 나가는 느낌. 흔적도 없이

흩어진 가시는 죄책감이 었다.

와스터 제국에 비하면 티텐은 훨씬 비좁은 나라였다.

히폴로테스는 탁 트인 숲속을 들쑤시며 호기롭게 앞서 달려

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볼 뿐, 성급히 달려들지 않았다. 뒤늦게

훌쩍 말 위로 올라탄 히폴로테스와 카코스는 한가로이 사냥터

안으로 들어섰다.

“이럴 수가. 생각보다 멍청해서 이골이 나.”

“그러게요. 저리 달려 나가면 사냥감들은 다도망갈 겁니다.”

“뭐, 어차피 도망갈 수 있는 곳에 한계가 있으니 저리 뒤쫓는

것도 이해는 간다만.”

사슴을 사냥해 에즈라 공주에게 바쳐야 하건만, 그는 턱없이

유치한 사냥 놀음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느긋하기만 한

태도에 카코스는 꽁지에 불붙은 새마냥 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사슴을 사냥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사슴 다

잡히겠는데요.”

“음…… 그럼 귀족을 죽여서 빼앗으면 되지.”

“진심이십니까?”

히폴로테스의 곁에서 말을 몰던 카코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방만한 태도였다.

“믿었어?”

“아뇨. 그럴 리가요.”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농을 치며 깊은 곳으로 들어선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히폴로테스의 한쪽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몸놀림으로 활을 집어 들고화살을 끼웠다.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기척을 죽였다. 고동색의

활대는 그의 몸집에 비하면 작았으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활대가 반달을 그리고, 시위는 팽팽했으며화살촉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번뜩이는 붉은 눈은 집중으로 인해

가늘어졌다. 시위를 당긴 팔의 근육이 풀리기 무섭게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눈 깜짝할 새 날아든화살은 꾸룩거리던 멧돼지의 눈을

꿰뚫었다. 엄청난 완력에화살은 단번에 짐승의 뇌를 짓이기고

지나가 뒤편에 꽂혔다.

“명중!”

카코스가 크게 외치자 건너편의 남자는 들고 있던 활을

천천히 내렸다. 히에로스왕은 자신이 노리던 사냥감이 갑자기

죽어 버리자 놀라 허공을 살피던 차였다.

언제부터 저곳에 존재했던 것인가. 낮게 몽을 숙이고 또 숨을

죽이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사냥감을 사냥했다.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온 히폴로테스는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인다.

히에로스는 섬뜩함에 들고 있던화살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황망한 얼굴로 급히 뒤를 돌아 말을 몰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히에로스를 향해 히폴로테스는 말을 몰았다.

마치 사냥을 하는 모양새였다. 히에로스는 자신을 뒤쫓는

황자를 알아차리곤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누가 사냥감인가, 제

뒤를 쫓는 이는 진정 동물을 사냥하려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오

히에로스는 무언가를 부정하듯 고개를 저어 보이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목을 축이는 사슴을 발견하고 성마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화살에 금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린 사슴이 여린 목덜미를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픽 쓰러졌다. 히에로스는 어깨 너머로 먼발치에

멈추어 있는 황자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히에로스 님. 어쩌다 보니 사냥감이

겹치는군요.”

“어쩌다 보니? 진심인가? 부러 나를 뒤쫓는 건 아니고?”

날 선 말투를 감출 여유는 없었다. 흥분한 채 그를

몰아붙이자 히폴로테스는 황급히 말에서 내리더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런, 노여우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에즈라 공주님께

사슴을 바치기로 약조한 탓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즈라가 자네에게 사슴을 원한다 했나?”

“제가 바치고 싶어 그리 약조를 했습니다.”

“……사슴을 바친다는 게 무슨 뜻인 줄은 알고?”

히에로스는 그가 들고 있는 활을 샅샅이 훑어보았으나, 그

누구의 뉙스도 달려 있지 않았다. 세 명의 공주들이 그를 위해

뉙스를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세 명의 공주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

좀처럼 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왕의 얼굴은 착잡했다.

“당연합니다.”

두 사람 사이를 건조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히에로스는

활을 바닥에 내던진 후, 고삐를 험악하게 움켜쥐었다. 말이

투레질을 하든 말든 히에로스는 사나운 말투로 그를 자극했다.

“공주를 내주기에는 대단치 않은 실력이군. 내 뒤를 따르게.”

붉은 눈동자에 감도는 흥미. 시시하던 사냥이 드디어 그를

제대로 부추겼다.

모든 건 계획대로 완벽했다.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벌써 수십 번째 돌문에 귀를 댄 채 동향을

살피던 에즈라는 매일같이 문 앞을 지키던 하녀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돌탑의 꼭대기였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높디높은 곳에서는 멀리서나마 그를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 희미한 소망 하나로 그녀는 몰매 맞을 굳은 결심을 하며

돌문을 밀어 보았다. 단단하게 막혔던 돌문은 한참 끼긱거리는

소리를 낼 뿐, 쉬이 밀리지 않았다. 잠겨 있는 건가 했지만 분명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입술을 꾹 내리 물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자 믿을 수 없게도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일에 멈칫했던

에즈라가 마지막 힘을 짜내자 한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놀라 얼빠져 있던 에즈라는 빨개진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둘러싼 뿌연 먼지는

조용하기만 하다.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으로 막 발을 뻗던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즈라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이, 이건 문이 열려 있어서, 그래서……!”

날아올 폭력에 등을 둥글게 말고 몸을 작게 움츠렸다. 거칠한

돌바닥에 갈린 무릎이 따끔하게 아려 왔다.

“진정하세요, 공주님. 접니다.”

퍽 익숙해진 목소리. 두 팔로 머리를 감쌌던 에즈라는 아주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돌보다 딱딱해 보이는 분위기의

마타리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문밖을 지키던 이는 그녀

혼자뿐이었던 듯 마타리는 무심히 에즈라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서세요. 그리 무릎을 꿇으시면 안 됩니다.”

“네, 네.”

“그보다 무슨 일로 문을 열고 나서신 건지요.”

마타리는 기어코 피가 비친 무릎을 보며 쯧, 혀를 찼다. 탓할

줄로만 알았는지 티 나게 눈치를 살피던 에즈라는 더듬더듬

말을 내놓았다.

“……가장 높은 곳에 가 보고 싶어서요.”

마타리에게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설사 그런다고 해도

그녀가 속아 넘어갈 리 만무하다. 망설이며 건넨 말에도

마타리는 묵묵부답이었다. 탓하기 전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므I 몸을 돌리려는데 마타리가 입을 열었다.

“잠시라면 괜찮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말간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뒤돌던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에즈라를 보며 마타리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따르시죠.”

“마음이 변하신 건가요?”

“아, 아뇨! 지금 가요.”

둥글게 이어진 계단을 그녀와 함께 올랐다. 꼭대기까지

벽돌로 이루어진 탑은 어둡고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으며

거미줄이 발과 손에 얽혀 들었으나 상관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빛을 볼 수 있을 테 니까.

“다 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또 다른 문 앞에 다다른 채였다. 열병을

앓고 나서 아직 몸이 성치 않은 탓에 시야가 어질했으나 티 낼

수는 없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 사이로 오후의 볕이

눈을 찔러왔다.

“생각보다 더 아름답네요."

옆에 자리한 마타리의 감탄이 바람에 실려 온다.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어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그곳은 볕이 가득

쏟아져 내려 물에 잠긴 접시처럼 반짝였다.

“조심하세요!”

에즈라는 두려움도 잊고 탑의 가장자리로 바싹 다가섰다.

위아래로 불어 대는 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과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 놓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가 보여요.”

멀리 떨어진 숲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나무가 잘 정리된

사냥터를 구분 지을 수 있었다. 그곳을 누비는 몇몇 말들은

보였으나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건만

대체 무슨 수로 그를 찾았다는 건지.

마타리는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얼굴로 히폴로테스를

착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숨에 포기한 그녀는 에즈라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붙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하고 계셔요.”

한눈에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앞서 달리는 아버지의

금빛 옷자락, 그 뒤를 유유자적 따르는 남자. 흰색 클래미스와

허리에 찬 육중한 검이 뚜렷했다.

“여기서 이름을 부르면 들릴까요?”

그럴 리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던 마타리의

움직임이 멎었다. 앞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나지막한 말에는 진심만이 어려 있었기에.

“들리지 않을겁니다.”

그러니 소용없다고 일갈하고 싶었다. 그리 바라고 의지하게

될수록 당신만 상처 입고 말 거라고. 저 남자에게 당신은……

그저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모든 걸 솔직하게 터놓고 싶어졌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거짓 사랑에 젖어 가는 여자, 끝내 버림받고 죽음에 내몰릴

여자에게 처음으로 동정이 일어서. 마타리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평생을 바닥에 엎드려 떨던 여자에게 일어나는 용기를 심어

주고. 오랜 세월 자신을 가둬 둔 문을 제 손으로 열게 만든

남자가 끝내 그녀를 절망으로 끌고 갈 것을 모르지 않기에.

“이제 탑 아래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강을 건너온 후였다. 후회는

무용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붙잡아 둘 수 없듯이 .

“네?”

“곧 히폴로테스 님이 여기를 찾으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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