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버릇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서글픈 얼굴을 감추고 있는데
머리 위로 덤덤한 말이 떨어졌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무뚝뚝한 표정의 마타리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히폴로테스 님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바느질도 능통하지요.”
평소처럼 무표정했으나 어딘가 자신에 찬 말투였다. 입만
벙긋하며 눈을 몇 번이고 끔뻑이는데 답답한 듯 마타리는 획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
“원하시는 실과 천의 색깔을 말씀해 주세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도, 도와주시는 건가요? 저를요?”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확답을 받은
에즈라는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마타리의 앞으로
가서 섰다. 마타리는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에즈라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색을 정하셨나요? 빨리 말씀해 주세요.”
공주를 독촉하는 꼴이라니, 평범한 왕족이라면 당장이라도
매질을 할 정도로 방만한 태도였으나 에즈라는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뚝 멈춰 버릴 듯 뛰어 대는 심장이 두려워
어물어물 말을 내놓았다.
“……붉은 실과 은회색 천이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누가 봐도 히폴로테스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마타리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짓자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은 에즈라는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그리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던 에즈라는
침을 꼴딱 삼켰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결코 다정하지는 않지만 누그러진 말투. 다른
하녀들이었다면 무시하거나 주제를 알려 주겠다며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뉙스가 무엇인지 아예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한 말을 해야 했다. 가진 게 없는 내가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건 오로지 진심뿐이 니까.
“정말, 정말 감사해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보이는 에즈라를 차분한 얼굴로
살피던 마타리는 쓰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눈을 커다랗게 뜬
에즈라는 결국 못 참고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래된 습관에 또다시
손바닥이 터지려는 찰나, 마타리는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말씀을 낮추세요.”
“네.”
서로 질리지도 않는지 수십 번째 같은 말이 오갔다. 어쩐지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무심하지만 결코 무시하지는 않는 눈빛이
편해서, 에즈라는 평생 말을 낮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럼.”
마타리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을 나섰다. 그륵그륵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뒤로한 채, 에즈라는 살짝 흘러내린
보슬보슬한 잔머리를 정리하며 벅찬 숨을 골랐다.
혼인을 약속한 사이에나 주고받는다는 부적. 저 같은 게 그런
의미를 내민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가슴속
남은 용기를 박박 긁어모았다. 남몰래 기합을 넣던 에즈라는
잇새로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괜찮았다. 설사, 그것이 거부당한다고 해도.
함께 입술을 나누었던 그날. 에즈라는 머릿속에 박힌 기억을
아스라이 더듬으며 눈을 감았다. 물기 어린 은발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물방울. 그린 듯한 입술의 온기. 스며 오는 뜨거운
숨결고느 그보다 더 열기 어린 눈동자까지.
바람이 스쳐 가던 순간의 남자. 무언가를 바라는 건, 정녕
아니었다. 그저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를 그리며 온 진심을
담아내고 싶었다.
사냥 대회가 예정된 날의 날씨는화창했다. 높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햇볕은 공평히 만물을 비추었다.
히폴로테스는 지나치게 생생한 모든 것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잘 정돈된 숲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성대하게 치를
것이라더니. 왕과 귀족의 사냥 놀이를 즐기는 곳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얽어진 나뭇가지들이 잘려 나가 휑하기만 했다.
어디로 보나 사냥터는 넓게 펼쳐진 야트막한 언덕과 다를 게
없었다.
그 하찮은 꼴을 보며 히폴로테스는 비웃음을 삼켰다.
와스터의 사냥과는 아예 격이 다른 탓이다. 제국의 전사들은
무기 하나만으로 험한 산중을 가로질러 멧돼지든 뭐든 목숨을
걸고 야만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피가 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짐승들의 내장과 살점을 뒤집어쓴다. 가장 많이 피를 묻힐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환호했다.
그날을 상기해 내니 몸이 달아 등골이 짜릿했다. 두 눈을
번뜩이던 그때, 등 뒤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그는 몸을
돌렸다.
“어쩌다 보니 오랜만에 보는군. 갑작스러웠을 텐데 함께
자리해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히에로스는 제 앞에서 완벽하게 예를 갖추어 보이는 남자를
보며 눈살을 좁혔다. 여전히 해괴한 몰골에 보잘것없는
외양이었으나 주눅 들기는커녕 대담하고 기개가 묻어 나오는
몸가짐이었다.
“그럼, 기대하지.”
뒤늦게 대답한 그는 곧바로 다른 귀족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서늘하다. 히에로스는 부러
그것을 모른 척하며 덤덤한 척 연기를 했다.
한편, 숲을 조금 벗어난 초입에는 공주들과 왕비를 위한 붉은
천막이 자리했다. 왕비가 건강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자 세 명의
공주만이 자리를 지켰다. 건너편에 사냥을 관람하러 온
귀족들이 몰려 있었으나 그들은 왕족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곁에 선 하녀들은 금빛 부채를 펼쳐 들어 공주들의 더위를
식히려 노력했다.
“어쩐지 올해는 참석한 귀족이 현저히 많네요?”
황금 잔을 내려놓은 디케가 글로사에게 물었다. 딱딱한
표정의 글로사가 대답 없이 턱을 괴자 스케네가 끼어들었다.
“와스터 제국의 황자를 불렀다니 궁금해서 더 몰려들었겠죠.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공 쫓는 개마냥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나 참, 바글바글한 게 내가 다 덥네.”
“경박하게 입 놀리지 마, 스케네.”
혼잣말로 끝을 맺은 스케네의 말에 글로사가 쏘아붙이자
스케네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요, 언니. 설마 저 땅딸막한
황자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거예요?”
“스케네!”
디케가 급히 그녀를 제지했으나 스케네는 느물거리는 얼굴로
살살 글로사를 긁어 댔다.
“야망 덩어리인 글로사 언니와 달리 디케 언니는 황비 자리가
별로 탐나지 않나 봐요. 황자에게 얼굴 도장 한 번 안 찍는 걸
보니.”
두 사람은 기어 오르는 여동생을 자근자근 짓밟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들이 많은 터라 분기를 가라앉히며 경고했다.
“그만.”
글로사의 서릿발 같은 시선에 스케네는 한발 물러섰다.
에즈라, 그녀에게 저질렀던 무자비한 행위가 떠오른 탓이다.
칼을 쥔 채 망설임 없이 머리칼을 잘라 내던…… 정도를 넘은
증오.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던 스케네와 두 사람의 관심은 이내
모습을 드러낸 히폴로테스에게 꽂혔다. 능숙하게 말을 모는
히폴로테스가 안장에서 내리기 무섭게 벌떡 몸을 일으킨
스케네는 종종걸음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우습네요. 방금 전까지 얼굴 보기 메스껍다 지껄이더니.”
“네가 보기에도 그러니?”
“사람 눈은 다 비슷하죠. 그러니 욕망도 겹치는 거
아니겠어요?”
차분하게 대답하던 디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았은 글로사를
살폈다. 글로사 역시 그녀의 대답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한참 침묵하던 글로사는 저 멀리서 그에게 뉙스를
내미는 스케네를 덤 덤한 눈으로 응시했다.
“뉙스를 준비했니?”
“……아뇨.”
조금 늦게 내놓은 대답에 알 만하다는 듯 글로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째서?”
“스케네 말대로예요. 저는 언니와 스케네와는 달라요.
황비…… 그런 건 제게 필요 없어요.”
필요 없는 게 아니고, 가질 수 없는 걸 알고 포기한 거겠지.
이성적인 척,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린 디케의 태도에
가슴속에서 비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기에 글로사는 대놓고 디케를 후벼 팠다.
“뭐, 그렇게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도 있지.”
성공한 것인지 무시무시한 눈초리가 닿아 온다. 그러든 말든
글로사는 우아한 몸짓으로 일어나 움직이기엔 너무도
거치적거리는 옷자락을 갈무리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하녀가
대신 정리를 마치자 글로사는 걸음을 뗐다.
천막을 벗어나자 정오의 볕이 모두 제 것 같았다. 더없이
해사한 미소를 걸친 글로사는 여직 달라붙어 주절대는
스케네의 뒤에 멈추어 섰다.
그녀를 발견한 히폴로테스가 늘 그랬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갖추자 글로사도 치맛자락을 쥐었다 놓으며 마주
인사했다. 졸지에 두 사람 사이에 끼이게 된 스케네는 불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뉙스를 받으셨군요.”
“예. 스케네 공주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것이라 해서요.”
히폴로테스는 반질거리는 검은 천 위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바느질이 익숙지 않을 스케네의
손끝은 너무도 고왔다. 누구의 손을 탄 것인지도 모를 것을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으나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부끄럽지만 아직 티텐의 문화에 있어서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흥미가 담긴 붉은 눈동자가 문득 반짝였다. 누추한 황자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이죠. 뉙스는 혼인을 하거나, 혼인을 약속한 남성에게
여성이 건네는 부적입니다. 신분에 따라 의미에 차이는 있지만
보통 남성은 단 한 사람의 뉙스만 받을 수 있지요.”
“단한 사람이라……"
그가 턱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 글로사는 품에 감추어
두었던 자신의 뉙스를 꺼내 들었다. 기품 있는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는 남자의 눈길에 긴장이 됐다. 떨리는 손끝을 숨기지 못한
글로사는 그에게 뉙스를 건넸다.
“부디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황자님을 위해 꽤 오래도록
준비했거든요.”
“저를 위해 준비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헌데…… 방금
하나만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그러니 황자님께서는 편히 선택하시면 됩니다.
스케네의 뉙스와 제 것 중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