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히폴로테스는 차마 닿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손끝과 얼굴
곳곳을 살피는 걱정을 담은 눈동자를 보며 잠시 굳었다.
놀리려던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로 여자의 무지는
충격적이었기에.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뭐…… 아뇨.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장난이었어요.”
히폴로테스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자 그를 향한
에즈라의 눈빛이 조금 뾰족해졌다. 장난이라니, 저는 마음이 쿵
내려았는 줄 알았건만. 그는 은근히 사람을 들었다 놓는 장난을
즐겼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는 터라 에즈라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수척해진 얼굴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졸지에 병약한
남자가 된 히폴로테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안심이 된 건지 에즈라는 속없이 따라 웃었다.
“깨어나 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한마디에 마음이 전부 먹먹해졌다. 그런 의미로
전한 말이 아니라 해도, 꼭 내 삶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말 같아서. 피해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붉은 온기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저예요. 황자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는 제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단번에 달려와
주었다. 볕을 등진 남자가 그려 낸 그림자가 머리 위에 졌다.
에즈라는 그 아래서 더듬더듬 내뱉었다.
“저, 저도…… 아니, 저야말로 황자님을 다시 뵐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말 한마디 하기가 어찌 그리 힘든지. 겨우겨우 전한 말에
히폴로테스는 간신히 어깨에 닿는 검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속삭였다.
“제대로 보니까 더 예쁘네요.”
히플로테스는 단숨에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여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짓궂게 머리카락을 쥐고 그 위에 입을 맞추자
에즈라는 펄쩍 뛰며 그에게서 훌쩍 벗어났다.
대놓고 킥킥거리는 히폴로테스를 지켜보며 장난임을 알아챈
에즈라는 벌게진 얼굴을 가라았히려 애를 썼다. 당하는 사람은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은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그토록 재미있는 걸까.
은근히 씩씩거리는 에즈라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화제를 돌렸다.
“아, 그보다 며칠 후에 히에로스 님과 함께 사냥을 나가기로
했어요.”
“사냥……이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 아버지께서 사냥이 취미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모든 왕족 행사에서 제외되어 온 터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네. 귀족들과 자주 사냥을 즐겨 오신 모양이에요. 제게
권하시길래 덥석 알겠다고 했죠. 공주님들과 귀족 영애들까지
관전하신다길래 엄청 기대했는데 지금은 많이 실망스럽네요.”
“왜요?”
“그거야…… 이왕이면 공주님 앞에서 늠름한 무용을 뽐내려
했으니까요.”
조금 긴장한 목소리. 답지 않게 쑥스러운 미소.
“어,언니들에게요?”
말을 내뱉고 후회했다. 대놓고 질투하는 말투에는 누구나
눈치챌 가시가 돋쳐 있었다. 히플로테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당겨 웃자 후회는 배가 되었다.
“설마요. 에즈라 공주님은 못 오는데 괜히 나간다고 했으니
후회한다는 거죠. 당신이 아플 줄 알았으면 단번에 거절했을
거예요.”
히폴로테스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은근슬쩍
목덜미를 쓸었다.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손길을 피하면서도
에즈라는 꿋꿋이 대꾸했다.
“멋진 모습보다 몸조심하세요. 무리하시다가 말에서
떨어지시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걱정하지 마요. 이미 잡아 둔 것들을 풀어놓는 거니까.
사방이 막힌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건, 잡기 쉬워요.”
의아한 얼굴로 눈을 맞추자 그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뒤늦게
입을 뗐다.
“어디라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땀을 홀린 탓에 추운 것일까. 휘어지는 붉은 눈을 마주하자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마땅히 대꾸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아, 그래도 조금 걱정이에요. 칼은 자신 있어도 활은 별로
자신 없거든요. 왕께서 형편없는 황자에게는 공주님을 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 없어요.”
“뭐, 그러셔도 포기 안 할 거지만요.”
절대 못하죠.
그리 중얼거리며 히폴로테스는 몸을 일으켰다. 뺨을
다정하게 감싸자 막 돋아난 이파리처럼 말간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담는다. 엄지로 여자의 눈을 살짝 누르자 도톰한 입술이
할 말이 있는듯 오물거렸다.
“예쁜 사슴 잡아다 줄게요. 그동안 몸 잘 추슬러요.”
사슴을 원하다 말한 적도 없건만. 그는 어쩐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즈라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상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시는 거예요?”
“미안해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무래도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어쩌죠.”
“전혀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손길이 떠나간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자니
우습게도 가슴 한구석이 허했다. 에즈라는 살짝 고개를 떨구며
애꿎은 손끝을 매만졌다.
차마 그곳에 끼고 싶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늠름한 그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족이 그녀를
부를 일도 없을뿐더러 그에게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몸조심하세요.”
이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 말뿐이라는 게 조금
아팠다.
사냥 대회는 착실하게 준비되어 갔다. 왕의 초대를 받은 고위
귀족들은 애써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왕궁을 찾았고, 그로
인해 왕궁은 전보다 훨씬 복작거렸으며 전에 없던 활기를
띠었다.
여기저기서 바쁜 움직임이 오고 가는 한편, 다른 이들은
시선도 주지 않을 돌탑 우느 에즈라는 여전히 그곳에 갇혀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주 가끔 문 앞을 지키는 하녀들이 바깥을
드나들 때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훔쳐 듣는 건 이미
일상이 되었다.
도둑질한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벌여 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이번 사냥 대회는 무척 성대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들의 대화는 눈요기할 기대감에 차 있으면서도 몰아치는
일에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늘 끝을 맺었다.
그럴 때마다 문에 등을 댄 채로 에즈라는 자신의 무력함에
주저앉곤 했다.
“공주님?”
“에즈라 공주님.”
“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우선 이것부터 드세요.”
마타리가 내미는 손가락만 한 병에는 녹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익히 그것을 알고 있는 에즈라는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으나 단호한 표정의 마타리는 오늘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두 눈을 꾹 감으며 약을 훌쩍 마시자
입 안에 온통 쓴맛이 퍼졌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쓴맛에 몸을 부르르 떨자 마타리는
사탕을 입가에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말씀을 낮추세요.”
몇 번이나 그녀가 해 온 말이지만 쉽지 않았다. 에즈라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자 마타리의 눈이 단숨에 매서워졌다.
에즈라는 곧바로 소리 내어 대답했다.
“으, 응.”
에즈라가 입에서 사탕을 굴리는 동안 마타리는 자신이 내민
것들을 꿀떡꿀떡 잘 집어 삼키는 에즈라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약을 삼킨 건 저 여자건만 제 입 안이 다 씁쓸한 건
왜일까.
마타리는 슬쩍 고개를 돌려 트인 창만 올려다보는 에즈라를
곁눈질했다. 자신을 몇 번이나 위험에 빠트렸던 사람은 피하고,
미워하고, 그도 아니면 두려워하기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시야에 다 말라비틀어진 풀꽃 다발이 들어왔다. 시들어
버리기 전에 꽃병이라도 갖다줄 걸 그랬나 생각하는데
에즈라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건네 왔다.
“별이 많네요.”
이제는 좁은 창에 비치는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다. 밤만
되면 가까워지는 하늘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허황된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테지만.
익숙하게 에즈라를 공기 취급 하는 마타리가 제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에즈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녀들의 대화를
다시금 곱씹고 있었다.
‘내기하자.’
‘무슨?’
‘황자님의 선택을 받을 공주님이 누굴지 말이야.’
히폴로테스의 선택을 받는다는 말에 에즈라는 후다닥 달려가
문에 귀를 붙였다. 하녀들의 목소리가 작아진 탓에 절로 애가
탔다. 에즈라는 바짝 몸을 기대며 집중하려 눈까지 질끈 감았다.
‘사슴은 당연히 글로사 공주님이……:
‘스케네 공주님도……"
두 사람의 이름이 오갔지만 그 이후의 말은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에즈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포기하려던 찰나, 한
하녀의 말이 생생하게 꽂혀 들었다.
‘어떤 보답을 하실까?’
보답. 하녀들은 공주들이 서로 다르게 내어놓을 보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김새를 알 수 없는 값비싼 보석의 이름을
한참 거론하던 그녀들은 아무리 그래도 전통에 따라 손수 만든
뉙스가 아니겠냐며 설렘을 감추지 않았더랬다.
한참 마타리의 눈치를 보던 에즈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타리 님……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공주님.”
그토록 당부했지만 또다시 말을 높이는 에즈라를 마타리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이불을 각 잡아 정리하던 그녀는 허리를
들어 올려 에즈라와 눈을 맞추었다.
“혹, 뉙스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뉙스요?”
글자도 모르는 에즈라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마타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타리의 표정을 보며 입을
벙긋거리 던 에즈라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금 물어 왔다.
“제, 제가 잘못 발음했나요?”
“아뇨. 맞습니다. 뉙스라면 남성들이 무기에 묶는 기다란
부적입니다.”
“부적이요?”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마타리는 답지 않게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왕족,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대체로 부인이 남편을 위해
손수 만드는 천 조각이죠. 가장 질 좋은 천에 남성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땀 한 땀 이름을 새겨 넣는
겁니다. 그 탓에 평민들 사이에서는 혼인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는 혼인을 약속하는 증표로 여겨집니다.”
“아……"
“참고로 저는 그런 미신은 믿지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혼인을 약속한 사이에나 주고받는 거라니. 그토록 큰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몰랐기에 에즈라는 당황하고 말았다. 닿아 오는
마타리의 빤한 시선을 살짝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글자를 모르는 이에게는 어려운 일이겠네요.”
평민들도 알 법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부끄러웠다. 어차피 이곳에 갇혀 평생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자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저는 압니다.”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