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히폴로테스의
발소리가 원통형의 돌탑을 울렸다. 그가 지하에 모습을
드러내자 잔뜩 긴장한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려 대던 하녀들은
흉측함을 두른 황자를 흘긋거렸다.
“황자님, 이 일에 관여한 하녀들입니다.”
“응. 알고 있어 .”
카코스는 천진하게 휘어지는 붉은 눈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분명 반나절이라고 명령했었는데,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저회가 잠시 잠에 드는 바람에……"
“꼬박 하루라니. 죽을 뻔했잖아. 내가 죽기 전까지라고 했지
언제 죽이라고 했어?”
순식간에 번뜩이는 붉은 눈이 그리 서늘할 수가 없었다. 잔뜩
벼른 칼날 같은 눈빛에 온몸을 바짝 굳힌 이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같잖은 꼴을 보고 있자니 힘겹게 감춰 온 살의가
치밀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히폴로테스가 대강 눈짓하자 카코스는 들고 있던 금빛
상자를 하녀들에게 툭 던졌다. 귀한 것이 상할까 헐레벌떡
그것을 받아 낸 하녀들은 상자를 열어 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약속했던 금화다.”
그녀들의 얼굴에 완연한 충성심이 비쳤다. 그 버러지 같은
꼴에 신물이 났다. 인간은 이리 더럽고 추악하건만. 어째서
그것들을 썰어 낼 때마다 다른 이들은 저를 두려워하고, 남몰래
혐오하며 또 기피하는 건가.
“다음에는 차질이 없어야 할 거야.”
나는 그것이 마땅한 인생을 걸어왔을 뿐인데.
어쩌면 그것도 구차한 변명일까. 히폴로테스는 느른하게
은발을 쓸어 올렸다. 내리뜬 눈을 감았다 뜬 히폴로테스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돌탑을 벗어났다.
왕궁의 가장 중심에는 왕과 왕비가 머무는 본궁이 있었다.
달빛이 드리운 비밀스러운 내실 안. 침상에 기대어 있던
미네스는 테이블에 앉아 홀로 포도주를 들이켜는 히에로스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히에로스, 에즈라만은 안돼요.”
에즈라. 그 이름에 포도주를 감미하던 히에로스의 눈빛이
돌변했다.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에 머리를 부여잡는데 다가온
여자는 금기시하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미네스.”
고혹적인 태도로 그의 무릎에 뺨을 비비던 미네스는 이내
허벅지 위로 손을 얹었다. 뱀처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히에로스는 그녀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더 이상의 움직임을
막았다.
“정말 모르나요? 왕궁에 익히 퍼진 이야기를. 당신이 모를 리
없어요. 히폴로테스 황자와 에즈라, 그 아이에 대한 소문
말예요.”
왕궁에 퍼진 이야기. 언제부터 왕궁의 입이 그토록 가벼워진
건가. 물론, 왕궁 안에 그가 모르는 이야기는 없었다. 미네스는
손을 뻗어 세게 다물린 그의 턱을 감쌌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해
죽겠어요.”
“뭐가 불안하다는 거지?”
“제국의 황비 자리에 걸맞는 건 내 딸들이에요. 정상적인
공주로 자라 온, 티텐의 영광을 그곳에서도 빛낼 수 있는…… 내
딸이라고요.”
히에로스는 고개를 돌려 미네스의 손을 떼어 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떠보려던 미네스의 표정은 그가 침묵을
고수할수록 시시각각 변했다. 지나친 원망만이 남아 기어코
가면을 뒤집는다. 미네스는 결국 증오를 담뿍 담아 소리쳤다.
“내가 무얼 눈감아 왔는지 잘 알잖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미천한 출신의 여자와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핏줄까지. 나는, 나는……!”
“진정해, 미네스. 지금은 아주 신중해야 할 때야.”
바닥에 쓰러져 울먹이는 그녀를 일으켜 어깨를 다독여
주었지만 미네스는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당신이 일말이라도 나를 생각한다면 에즈라만큼은 절대 안
돼요. 안 된다구요. 무엇보다 돌탑에 갇혀 지내 온 그 아이가
황비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 아이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요.”
“가축?”
흥분해 앞뒤 가리지 않는 미네스를 향한 낡은 눈동자에 얼핏
혐오가 스쳤다. 히에로스는 지금까지 미네스를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이 남긴 상처에 대한 속죄라 여기며 다른 이의 희생에서
고개를 돌렸건만. 돌아온 것은 여전한 원망과 멸시뿐이었다.
“말을 골라서 하시오. 아무리 그래도 에즈라에게는 내 피가
흐르고 있어.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기도 해.”
부축해 주던 차가운 손이 단숨에 거둬졌다. 일말의
양심마저도 지워진 표정이 냉혹하다. 한 번도 마주 웃어 주지
않았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건 악독함뿐이었다.
“가축처럼 대한 건 당신이 먼저 그리한 것 아닌가요? 돌탑에
가둬 둔 채 최소한의 음식과 넝마 같은 옷가지, 하녀들과 나눠
쓰는 욕탕. 딱 그 정도까지만 허락했잖아요. 가둬 두고 키우는
건 가축이나 다를 바 없는 거예요, 히에로스.”
묵인한 일도, 죄가 된다면 그럴 것이다. 허공에 실소를
터뜨리는 히에로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했다.
“보고 싶지 않다. 안아 보고 싶지도 않다! 모두 당신이 저지른
일이라고요.”
그리고 그게 괴로웠다. 당신이 에즈라를 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한 당신이, 내게 너무
가혹해서.
굳이 내뱉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말. 핏발 선 미네스의 눈을
마주하던 히에로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내가 분명하니까. 그에게 남은
건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할 죄책감뿐이었다.
“진정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어째서 그자가 바다
건너 우리 티텐을 찾아왔냐는 거야. 티텐의 성벽을 넘은 제국의
황자. 지금 나는 티텐 안에 괴물이라도 들인 기분이네.”
“그를 봤잖아요. 그는 이미 에즈라에게 호감을 숨기지 않고
있어요! 내 딸들은 본체만체하면서 고작 그 아이를……!”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분개한 미네스는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와스터 제국의 유일한 황자야. 그런 황자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우리의 성벽 안에 떡하니 들어와 있지. 내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하여화합을 도모한다는 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지도 몰라.”
“아뇨, 이유가 어찌 되든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딸들 중
하나가 그를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제발 에즈라 그
아이를 왕궁 밖으로 내쫓아 주세요. 제발……,”
“그건 안돼.”
왕으로서 살아온 세월의 감이 그를 일깨우고 있었다. 감춰진
채 사방에 깔린 구덩이 우I,한번 잘못 내디디면 발이 빠질 것
같은 공포. 그를 위한 연회가 열렸던 그날, 에즈라를 옆에 끼고
나타난 황자의 타오르던 붉은 안광은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아른거렸다.
“그 눈은……
여유로운, 허나 무척이나 허기진 육식동물의 것과
진배없었다. 몸을 가장 낮게 숙인 채 살기를 꽁꽁 옭아매려
애쓰는 그런 종류의 위압감.
“나는 내가 두려워요. 당신이 내 딸들에게서 뒤도는 날, 내가
어찌될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비틀거리는 미네스를 더 이상
부축하지 않았다. 히에로스는 눈을 꾹 감고 조용히 탄식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공포.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흘로 끌어안은 히에로스는 무너지지 않도록 힘주어 섰다.
왕은 결코 그런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자리 니까.
히에로스는 주저았아 흐느끼는 미네스를 지나쳐 창가로
향했다. 고요한 왕궁이 오늘따라 외로웠기에 문득 오래된
얼굴을 그려 나갔다. 피와 땀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오던…… 사랑해 마지않았던 유일한 여자를.
‘에즈라를 부탁해요.’
그녀를 떠올리고 만 순간, 히에로스는 길고 길었던 고뇌의
끝에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히폴로테스가 에즈라를 다시 찾은 건, 꼬박 나홀 동안 사경을
헤매던 에즈라가 눈을 뜬 날이었다. 잔뜩 땀에 젖은 채로 눈을
깜빡이기 무섭게 곁을 지키던 마타리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병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의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을 열자마자 나오는 건 신음뿐이 었다.
의문을 가득 담은 눈동자를 뒤로한 채 멀어져 갔던 그녀는
이내 히폴로테스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어……히폴로테스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젖은 터라 터벅터벅 다가오는 그를
피해 황급히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에게 꾀죄죄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민망함에 눈만 빼꼼 내놓은
에즈라가 이제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는 자비 없이 이불을
확 뺏어 들었다.
“자, 잠시만요…… !”
“미안해요. 제대로 살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으면 내가 살필 수가 없잖아요.”
큰 외상도 아니었고, 조금 열이 치솟은 것뿐이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차마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에즈라는 은근히 제멋대로인 히폴로테스의 시선을 피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거침없는 손은 이마를, 드러난 목덜미를, 그리고……오
“저는 괜찮아요!”
갈라진 목소리로 빽 소리를 치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허벅지로 뻗어 오던 손을 상기한 에즈라가 시뻘게진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리자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픽, 짧은 웃음을 흘렸다.
“벗은 몸도 아닌데…… 겨우 그거 가지고 그런 얼굴을 해요?
이미 다 봤는데.”
“다, 다 보다뇨?”
“기억 안 나요? 헐벗은 공주님을 안고 여기까지 왔었잖아요.
그때 이미 속속들이 봤어요. 물론, 볼려고 본 거 맞아요.”
마지막 말에 대꾸할 말도 잊은 에즈라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알몸을 보인 게 벌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도 모자라 애처럼 울고, 매달리고 별의별 말을 다
늘어놓지 않았던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럴수가……"
있었던 모든 일이 눈앞에 줄 지어 스쳐 지나가자 에즈라는
수치를 넘어 절망에 빠졌다. 여직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대고
있는 에즈라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히폴로테스는 한껏
느물거렸다.
“그날 이후로 밤잠을 설쳤다니까요. 공주님 때문에.”
“네? 어째서요?”
잠을 설쳤다니. 일순, 에즈라의 표정이 돌변했다. 제국이
아닌 티텐에서 생활하느라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생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