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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3화 (13/113)

13화

가녀린 몸으로 안간힘을 써서 문을 밀어 보았지만 미끄덩한

바닥에 발만 밀릴 뿐이었다. 에즈라는 뒤를 돌아 어둑한 공간을

눈에 담았다. 아득한 어둠이 바로 뒤에 있었다. 암흑 속, 숨어

있던 무언가가 덮쳐 온몸을 뜯어먹는 건 아닐까. 이때다 싶어

나를 잡아채 어 딘가로 끌고 가는 건 아닐까.

시간이 지 날수록 두려움은 극한으로 치 달았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제발! 내가 잘못, 잘못했으니까……-”

뭘 잘못했던가. 피어오른 의문에 에즈라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무서워요…… ! 제발 꺼내 주세요. 제발요!”

내지른 외침은 덧없었고, 이리저리 갈라지는 목소리는

외로웠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글로사 님. 이,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 죽은 듯 살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곳에 가둬 두지는 마.

발악 같은 울부짖음이 무색하게 몸은 점점 식어 갔다. 턱이

덜덜 떨려 오자 에즈라는 엉금엉금 기어가 나무 욕조 안으로

다시 몸을 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끓어오를 듯 뜨거웠던 물은

어느새 미온이 되어 있었다.

“열어 주세요, 제발……,”

언제 이곳에서 나가게 될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은

냉수가 될 것이다. 무릎을 감싸 안으며 몸을 최대한 말았다.

그곳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독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턱 끝에 고여 떨어지는 눈물이 잔잔한 수면에 파란을

일으켰다. 식어 가는 모든 것들 중,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만은

지긋지긋하게 뜨거웠다. 거칠게 얼굴을 닦아 내다 보니 갈 곳

잃은 원망이 치밀었다.

“제발 열어 주세요.”

대체 얼마나 울어야 따뜻해질까, 얼마나 울면 삶은 끝이

날까.

“열어 달란 말이야.”

수백 번의 중얼거림 끝에 물은 차갑게 식었다. 그때까지도

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꺼내 달라

애원해도, 그러다가 포기해도 열리지 않는다.

모든 희망을 놓은 에즈라는 욕조에서 나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나를 해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괜찮아.

턱에 걸려 바닥에 넘어져도, 높이 쌓아 두었던 이름 모를

물건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도, 여기저기 튀어나온

나무판자에 부딪혀 바닥을 구르고, 거칠한 바닥에 쓸리고

또…… 이렇게 울게 되어도.

‘에즈라.’

여기저기 가시가 튀어나온 바닥에 엎어진 채로 흐느꼈다.

그가 불렀던 내 이름이 지독하게 아파서. 그게 아픔이라는 걸

알게 해 준 사람이 아주 조금 원망스러워서. 그런 당신이

떠나가면, 나는 잊혀져도 잊지 못하는 삶을 살 테니까.

아프지 않냐고 물어 오던 당신에게 아팠다고, 너무 아팠다고

말할걸 그랬나 봐.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참고 또 참아 오던

눈물이 감은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도, 신음 같은 흐느낌이

허공을 울리는 것도.

쉼 없이 헐떡이는 작은 등 위로 찬 바람이 불었다. 축축한

몸은 어느새 말라 가며 온기를 빼앗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얼음장에 갇힌 듯한 추위. 정신이

흩어져 혼미해질 즈음,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손가락을 까닥여 그것을 손안에 쥐었다. 몸과 부딪혀 부서진

나무 잔해였다. 끝이 뾰족한 것에 베인 듯 손바닥이 섬짓하다.

금세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에즈라는 그것을 더욱 꽉 부여잡을

뿐 놓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이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베여도 아픈지

모르는 삶이 아닌…… 베이면 아프고, 찢어지면 괴로운 삶을

살아갈 자신이 내겐 없어서.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이 또박또박 발음한 순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서 바로 누운 에즈라는 멀쩡한 손목을 향해

그것을 거침없이 내리찍었다. 퍽, 날카로운 것이 살을 찢으며

파고드는 소리가 살벌하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두 팔은 곧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무

조각이 깊게 파고든 손목은 발작하다가 이내 손가락 끝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손목에 박힌 조각 사이로 맑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새어

나오다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무뎌진 고통에서 고개를

돌린 에즈라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킥킥거렸다.

끝까지 지고 가야 할 죄와 벌에서 벗어나려 하다니. 비겁한

짓을 하고 말았음에도 죽음을 기대하는 마음은 평온하기만

해서……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느끼며 눈을 감고 꿈을 꿨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문이 열리고 염치없게 바라온 환청이 한 번

더 들려오는, 그런.

미련을 남기는 잔인한 꿈을.

새벽은 아침이 되고, 낮이 지나 밤이 되었다. 한참 들려오던

애원도, 손이 터져라 문을 두드리던 소음도 모두 끊기고 나서야

남자는 느지막이 그곳에 걸음했다.

그의 뒤를 지키고 선 마타리는 멀리 떨어진 구석에 서서

자리만 지킬 뿐,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나 됐어?”

“새벽녘에 들어가셨으니 꼬박 하루가 가깝습니다.”

흥,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히폴로테스는

단단히 잠긴 걸쇠를 손쉽게 풀어냈다. 철컥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 쇳덩이를 발로 차 버린 후 조악한 나무 문짝을 당겨

열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죽은 이의 비명처럼 음산하다. 풍겨 오는

썩은 내에 번듯한 미간을 찌푸린 히폴로테스는 내키지

않음에도 문턱을 넘었다.

“뭐,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리저리 갈라진 나무판자 사이로 들이닥치는 냉기 어린

바람. 그것을 타고 진득한 혈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나가게 해

달라 협박하며 자해라도 한 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흐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오

“젠장.”

거칠 것 없이 욕탕을 가로지른 그는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품에 안았다. 얼음처럼 식은 몸은 나뭇등걸처럼 딱딱했다.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에 남아 있는 핏자국과 주변에 고인

끈적끈적한 핏물까지.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시체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녀를

꽉 껴안은 히폴로테스는 미약한 온기와 곧 끊어질 줄처럼

나약한 숨결을 확인한 후에야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급히

자신의 망토를 풀러 여자의 몽을 꽁꽁 싸맨 그는 지체할 것 없이

에즈라를 안아 들었다.

되도 않는 연기를 해 가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마터면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칠 뻔하지 않았나. 에즈라를 내려다보는

히폴로테스의 눈은 다 놓친 먹잇감을 보듯 무시무시했다.

어리석고 유약한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겨우 이 정도로

자포자기할 줄이야. 감히 제 손으로 숨통을 끊으려 한 여자가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에즈라.”

만약 숨이 끊어져 내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다면, 직접

네 시체를 조각조각 내어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줄 거다.

그뿐인가. 히에로스 왕의 목을 베어 네 눈앞에 들이밀거나, 죽기

직전까지 고문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또……,

잔혹한 상상으로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며 돌계단을 오르던

히폴로테스는 힘없이 꺾인 여자의 목덜미를 보았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비치는 핏줄. 저것을 끊어 내면 세찬 핏줄기를

뿜으며 바로 죽음에 이르렀을 텐데.

죽는 방법도 모르는 머저리 주제에.

“조금만 기다려요.”

그래,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가 죽음을 원하는 날, 그리고

내 목적이 다하는 날. 그토록 원하는 죽음을 선물하겠다

다짐하던 그때였다.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걸까. 정신이 든 것인지 에즈라의

흐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을 꿈틀거리며 상처를

숨기려 애쓰던 여자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에즈라,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애달픈 얼굴로 그는 목울대를 꿀렁였다.

북받치는 슬픔을 연기하며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입 안을

사정없이 깨물자 본능적으로 눈물이 고여 왔다.

입술만 달싹일 뿐, 괴로움에 낑낑거리는 여자를 품 안으로

세게 끌어안으며 정정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저, 저요.”

말할 힘이 남아 있었는지 피딱지가 잔뜩 앉은 입술이 열렸다.

말을 뚝 자르다니. 히폴로테스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불러

놓고도 여자는 힘이 부치는지 한참 망설였다.

“그…… 머리카락, 이상하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나 했건만.

어처구니없는 말에 허탈한 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감추며 들쑥날쑥한 머리칼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조금 짧아졌네요. 되게 잘 어울려요. 안 어울리는 게

뭐예요?”

부러 농담조로 지껄였다. 탁해지는 네 눈동자가 거북해서.

“어떤 모습이든 내 눈에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에즈라를 더욱 껴안았다.

말없이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위에 입술을 내렸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었다. 입술이 멀어져도 여자는 버릇처럼 울었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 지금…… 아파요. 되게 아파요.”

눈물을 훔쳐 주는 온기에 에즈라는 진정 하고 싶은 말을

뒤늦게 건넸다.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정신을 잃은 여체가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툭 떨어지는 팔이 가슴속 어딘가를 치고

지나간 미묘한 기분에 히폴로테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는 몰라야 할 얼굴은 서릿발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더없이 침착한 걸음으로 돌탑을 오른 히폴로테스는

무표정했다. 다다른 돌문 앞에는 텅 빈 방을 지키고 선 두 명의

하녀들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우왕좌왕하는

하녀들에게 명령했다.

“무으 은이 ”

히폴로테스는 축 처진 여자의 몸을 조금 고쳐 안았다. 열이

펄펄 끓는 여자는 마른 입술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약하게

몸부림쳤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기만 하는 에즈라의 가쁜

숨이 몸을 달궈 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드러난 감옥 아닌 감옥을 문턱 앞에 서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볼 것이라고는 없는 손바닥만 한 방. 온통

돌로 이루어진 그곳에는 지나치는 바람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온다.

그는 에즈라를 낡은 침상에 누이며 자신에게 닿아 있던

여자의 손을 떨쳐 냈다. 소리 없이 등 뒤로 다가온 마타리는

미지근한 물과 보드라운 천 조각을 든 채였다.

“최대한 빨리 회복시켜 놔. 나머지 일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촘촘하게 짠 거미줄. 그곳으로 몰아간 후, 공을 들여

자신에게 기어들어 오도록 만든다. 먹잇감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그래서 벗어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계획한 남자의 연극에 소름이 돋았으나 티 낼 수는

없었다. 마타리는 공포에 젖은 눈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히폴로테스는 단 한 줌의 미련도 없이 방을 나섰다.

복잡미묘한 얼굴로 에즈라를 응시하던 마타리는 짧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후 그녀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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