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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2화 (12/113)

12화

사각사각, 긴 머리칼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칼질을 했다. 서걱,

검은 뭉치가 바닥에 툭 떨어지고 또 가닥가닥 허공에서

흩날렸다. 다른 한쪽까지도 칼질로 끊어 내고 나서야 글로사는

세상 다정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훨씬 보기 좋네.”

볼일을 끝마친 글로사는 칼을 내던졌다. 챙강, 얇은 날이

돌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소음이 들린다. 그녀는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잔인한 말을 남긴 글로사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잔뜩 인상을 쓴 채 괜히 발만 굴리던 스케네는 도망치듯

글로사의 뒤를 따랐다. 뒤돌아볼까 말까 고민하던 스케네는

돌문이 닫히기 전,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만신창이가 된 에즈라는 고개를 떨군 채였다. 바닥을 짚은

멍투성이 팔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했다. 쯧쯧, 혀를

차는데 에즈라가 어깨 부근에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 흐느끼는 것 같았다. 손톱이 깨진 손으로

바닥에 놓인 머리칼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좌절. 삐죽삐죽 잘린 머리칼 끝은 심장을

난도질하는 칼이었다. 돌아보지 말 걸 그랬나. 묵직해진 가슴은

퍽 거북했다. 이윽고 닫혀 버린 문 앞에서 스케네는 오래도록

멍하니 서 있었다.

완전한 밤이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이라 그런지 달빛도

별빛조차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금촛대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입맞춤을 하셨다고요?”

“그게 왜?”

데몰레온이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소란을 피웠다.

양피지를 읽어 내리던 카코스가 노려보든 말든 그는

부산스럽게 자리를 빙빙 돌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럴 수가. 그저 뱃놀이를 하신다길래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0|,입술까지 맞추실 줄이야.”

“제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히폴로테스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고개만 틀어

제논에게 물었다. 턱을 매만지며 꽤 고심하던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

“첫 입맞춤 아니십 니까?”

여상한 대답.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히폴로테스를 향했다.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려 보인 히폴로테스는 그들의

갖가지 표정에 파안대소했다.

“하하, 걱정 마. 실전에 강한 편이라 아주 만족스러웠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카코스는 혼란함에 양피지를 떨구었다. 팔랑거리며 나뒹구는

그것을 제논은 하나하나 주워 들다가 들려오는 말에 손을

멈칫했다. 데몰레온은 입을 떡 벌린 채 눈만 끔뻑거렸다.

“뭐, 어차피 그쪽도 처음일 테니. 잘 모를 거야.”

대수롭지 않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어딘가 흐뭇한 어투였다.

느른히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그를 보며 카코스는 금세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연기에 너무 열중하시는 것 아닌가. 벅벅 머리를

긁어 대던 카코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는 라티아 님과 이미……"

“라티아?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그야……,”

세 사람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제국에서 그의 곁을

지키는 라티아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두 사람은 어느 때는 어린

날의 친구로, 어떤 날은 서로를 돕는 동료로, 그리고 애틋한

연인의 분위를 풍기며 늘 함께했다.

히폴로테스를 모시는 그들에게 라티아는 히폴로테스의

연인이었으며, 훗날 그의 곁에 서게 될 진정한 제국의 황비였다.

“라티아 님과 이미 입맞춤을 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 솔직한 자식.

카코스는 눈치 없는 데몰레온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물론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데몰레온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음, 글쎄.”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티아와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숨결을 섞으며 은밀한

부분을 질척이는 게 쉬이 상상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라티아는 고위 귀족의 딸이었고, 그만큼 곁에 두기에 적당한

여자도 없었다.

“잘 모르겠네.”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세 사람의 어깨가 조금

가라앉았다. 내려앉은 적막 속,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카코스는 심란한 마음으로 그를 곁눈질할 뿐이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자. 지금까지 곁에서 가장

가까이 그를 지켜봐 왔지만 도통 그의 심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고 여겨 왔지만, 히폴로테스에 관해서는

도통 물음표 천지였다.

그는 지금 어디쯤일까.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 걸까. 이런저런 상념에 풀이 죽은 카코스에게 제논은

양피지 더미를 내밀었다.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분위기 속 히폴로테스는 의자에

묻었던 몸을 조금 일으켰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작은 발소리.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제논이 다가가 문을 열자 마타리는 허리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마타리입니다.”

“그래, 알아. 상황은 좀어때?”

“명하신 대로 글로사 공주님을 서쪽 궁으로 이끌었습니다.

계획대로 호숫가를 목격하셨고요. 그리고……,”

딱딱하게 말을 이어 가던 마타리는 잠시 망설였다. 답지 않은

태도에 히폴로테스는 그제야 마타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스케네 공주님과 함께 에즈라 공주님을 착아오셨습니다.”

“때렸나? 그러면 지금쯤 지하에 있겠네.”

이번에도 냄새가 고약한 약을 발라 줄 차례인가. 가뿐히

일어선 그가 방을 나서려는데 마타리가 급히 내뱉었다.

“아닙니다. 주제넘다 모욕하시다가 벌을 주겠다며 머리칼을

잘랐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히폴로테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짐승의

것처럼 확장된 동공은 금촛대에서 타들어 가는 불꽃보다 더

짙은 색으로 번뜩였다.

“이럴수가, 그건 좀 아까운데……

거짓은 아닌지 그는 아쉬운 얼굴로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만지는 재미가 있었거든.”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머리칼은 마치 값비싼 융단처럼

부드러워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타까움을 연기했다.

“아무래도 너무자극했나 봐.”

그래도 이어지던 무료함에 톡톡한 재미가 된 것은 분명했다.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괴던 그는 생긋 웃어 보였다. 머리카락을

자르든, 뺨을 내리치든, 가둬 놓고 채찍질을 하든…… 뭐든

좋았다. 아프게 하는 거라면.

아프게 만들고, 고립시키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게

만들어서 그 여자의 유일한 것이 되어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그게 무엇이든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돌탑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공주들의 패악을 눈앞에서 목격한 몇몇 하녀들은 질겁하며

글로사에 대해 이리저리 떠들어 댔고, 또 몇은 에즈라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황자의 호감을 사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고상함 빼면 시체인 글로사 공주님이 직접 챂아와

질투를 숨기지 못할 정도로.

“에즈라 님.”

이른 새벽, 가장 먼저 돌탑을 찾은 이는 마타리였다. 문턱을

넘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마타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손도

대지 않은 식사는 그 자리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침상 위는

텅텅 비어 있었다.

어슴푸레한 방 안. 들고 있던 등불을 비춰 보던 마타리는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에즈라를 발견했다. 침상을 놔두고

굳이 이곳에서 청승을 떠는 여자가 고까웠기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고개를 드시고, 이제 그만 일어서세요. 그 머리칼도

놓으시고요.”

바닥에 온통 흩뿌려진 길고 짧은 머리칼은 웅크린 에즈라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찔러 왔다.

“죄송해요. 저는……여기가 편해요.”

“그래서. 계속 그곳에 계실 건가요?”

머리 위로 붉은 등불이 지자 자신의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진다. 시린 발가락 끝에 이름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가슴 속 열기가 끝내 목구멍까지 미친 모양이다. 울음이 터져

나올까 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잘려 나간 머리칼을 손 안에 가득 틀어쥐는

것뿐이었다.

분명 이렇게 꽉 잡고 있는데. 놓으면 모두 끝나 버릴 것

같아서 놓지 않으려고 계속 잡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한

가닥 두 가닥씩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어.

나는 너무 무력해.

“우선 목욕부터 하시죠. 들어와.”

말라비틀어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마타리는 냉정하게 손짓했다. 문턱 너머에서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은 소리 없이 다가와 에즈라의

양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제, 제발……"

이대로 잠시만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좋을

텐데.

“마타리 님.”

끌려가던 에즈라가 어깨 너머로 그녀를 불렀다. 마타리는

여직 그 자리에 서서 에즈라가 앉아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타리는 대답했다.

“하명하세요.”

내버려 두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살아온 운명 중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입술은 지나치게

쓴웃음을 지었고, 깊은 곳에서 올라온 눈물은 잔뜩 고였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 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말을 끝으로 에즈라는 끌려 나갔다. 텅 비어 버린 감옥

같은 방 안을 돌아보던 마타리는 다시 구석으로 돌아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여자가 쥐고 있던 머리칼. 그것을 쓸어 모아

버리던 그녀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이내 멎었다.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려 왔다. 치미는 감정에 입술을 꾹

내리 문 마타리는 에즈라가 끌려 나간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금 머리카락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마구잡이로 정리해 나가던 마타리는 곧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녀들이 이끈 곳은 돌탑 안에 마련된 욕탕이었다. 자주

들락날락했던 곳이지만 들어설 때마다 거부감이 느껴지는

욕탕은 비좁고, 사방이 어두웠으며 도통 가시지 않는 습기 덕에

나무 썩은 내가 진동했다.

“안에서 씻고 나오시면 됩니다. 저희는 앞을 지키고 서

있겠습니다.”

하녀들은 통보한 뒤 발가벗은 에즈라를 그 안으로 떠밀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불길한

예감. 획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자 나무판자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몇 줄기 빛이 다였다.

“드, 등불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기름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

다행히도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미약한 신음을 내던

에즈라는 공포에 질려 자신의 몸을 껴안았다. 목욕이 끝날

때까지 하녀들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목욕을 끝마치고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하녀들이 밖을 지켜 주고 있지 않은가. 눈을 떠도

감아도 어둠 천지였기에 손을

썯어 주변을 더듬었다.

미끌미끌한 바닥과, 낡아 빠진 판자로 만들어진 벽은 썩어

물렁해진 채였다.

“여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 나무 욕조가 닿았다. 딱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욕조에 담긴 물은 여전히 데일 듯 뜨거웠기에

에즈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릴까 했으나

역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마른침을 삼킨 에즈라는 그곳에 몸을 담굴 수밖에 없었다.

“으웃……!”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뜨거움. 열기 어린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벌게진 몸을 어쩔 줄 모르고 첨벙거리던

에즈라는 비집고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입술이 터져라 내리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할 법도 하건만, 열감은 끝을 모르고

피부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빨리"빨리……"

괜한 두려움에 혼잣말을 하며 천을 찾아 몸을 마구 닦아

나갔다. 이 와중에도 꼼꼼하게 발가락 끝까지 닦은 에즈라가

도망치듯 욕조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싸늘한 한기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며 온기를 빼앗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와락 어깨를 감싸 안은 에즈라는 문 앞에 다가서서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문 열어 주세요.”

“모, 목욕을 끝냈어요. 그러니까 문 좀……"

기묘한 불안감에 에즈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주변이 이상하리마치 고요하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 누구의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

자주 출몰하는 쥐가 깔짝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자마자 겨우겨우 버텨 오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깨선까지 짧아져 끝이 들쭉날쭉한 머리칼 끝에

맺힌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어요?”

불안에 젖은 목소리 끝이 덜덜 떨려 왔다.

“문 좀 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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