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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1화 (11/113)

11화

급격히 차분해진 글로사의 태도에 씩씩거리던 스케네도 점차

평정을 찾아갔다.

“네가 아끼는화 말이야. 이번 여름에는 찾지 않을 건가

봐?”

“무슨 소리야.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거 알잖아. 안 그래도 곧

찾으려 했어. 역겨운 황자님께 함께 가자 권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단 말이야.”

주절주절 설명하던 스케네는 일순 눈을 번뜩이더니 크게

외쳤다.

“설마, 빌려 달라는 거라면 꿈도 꾸지 마! 그화는 내 거야.

아버지가 내 탄일을 축하하며 선물하신 거라고.”

“걱정하지 마. 네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저 네 것에 겁도 없이 발을 들인 이를 알려

주러 온 것뿐이야.”

호수에 발을 들이다니. 그곳에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었다. 그건 왕궁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암묵적인 금기였다.

“누구야?”

스케네답지 않은 날 선 목소리였다. 하녀라면 당장 혀를 뽑고

눈을 파낼 것이다. 남종이라면 거세시켜 내쫓아 버릴 생각을

하며 스케네는 분개했다.

“누구냐고! 하녀야? 남종이야? 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하녀도 남종도 아니야 스케네. 히폴로테스 님과……,”

히폴로테스라는 말에 스케네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가 자신의화를 찾았다니, 치솟던 분노가 곧 불쾌함으로

변모했다. 말을 늘이던 글로사는 상상도 못 했던 이름을

내뱉었다.

“에즈라.”

“……에즈라? 그 돌탑에 사는 애?”

“그래. 그 두 사람. 네화에서 허락도 없이 뱃놀이를 하는

것도 모자라 입까지 맞추었지.”

뱃놀이를 했다는 것에 옷자락을 움켜쥐던 스케네는 입을

맞췄다는 대목에서 결국 사납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언니가 바라는 거하러 가. 왜?”

내가 바라는 게 원 줄 알고. 글로사는 서리가 내려앉을 듯

싸늘해진 여동생을 응시하다가 낮게 조소했다. 모든 게 뜻대로

되었다. 여직 꺼지지 않은 저열한 질투는 다른 이의 분노에 불을

지폈으니까.

“혼자서는 힘들지 않겠어?”

섬뜩한 말투에 앞서가던 발이 멈칫했다. 혼란스러움에

기다란 복도만 바라보던 스케네는 이내 대답 없이 걸음을 떴!다.

차디찬 돌바닥에 았은 에즈라는 좁은 침상에 얼굴을 기댄

채로 올려놓은 풀꽃 다발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불자락에 얼굴을 폭 묻었다가도 지겹지도 않은지 다시금

그것을 빈틈없이 살피며 손을 뻗었다.

“부드러워.”

작은 꽃송이가 손끝에 스칠 때마다 보드라운 여린 촉감이

느껴진다. 간질거리는 것이 한낮의 심정과 닮았다. 에즈라는

천천히 손끝으로 제 입술을 더듬었다.

맞닿았던 뜨겁게 젖은 입술. 부드럽게 올라가던 단단한

입매와 슬쩍 닿아 오던 코끝, 그리고 숨결. 그의 여린 곳은

촉촉하고 무척이나 황홀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그래서

감각 말고는 남지 않을 정도로.

“어, 어, 어떡해……"

입맞춤은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입 안을

핥고 혀를 얽다가 잡아먹을 듯 쪽쪽 ‘빨아 당긴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배 속 어딘가가

저릿해져 왔다. 모든 게 이상한 감각이었다.

“싫지 않았어.”

습관이 된 혼잣말에 실없는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달아오르는 ‘뺨과 누군가 잡아당기듯 올라가는

입꼬리에 결국 얼굴을 가린 채로 활짝 웃던 그때였다.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돌탑 안을 울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져 온다. 음식을 가져오거나, 이불을 갈아 주러 오는

하녀들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아주 조급하고, 계단을 짓이기는

험한 움직임.

불길한 예감에 벌떡 일어선 에즈라는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가장 먼저 풀꽃 다발을 집어 들었다. 왕비든, 매질하러 온

하녀들이든 이것만은 감춰야 했다. 저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

어디에 두어야 하나, 허둥지둥하던 에즈라가 침상 아래로

풀꽃 다발을 막 숨긴 찰나, 기다렸다는 듯 돌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 공주님……?”

에즈라는 바닥에 꿇어았은 채로 그녀들을 마주했다. 평생

찾아올 리 없다 여겼던 이들의 방문에 아연해졌다. 그들은

내려다보았고 저는 올려다보았다.

가없는 공포에 등줄기에 땀이 솟았다. 맺혀 가는 식은땀이

살짝 흐르려는 때, 발 들이기를 대놓고 꺼리던 두 사람은 문턱을

넘었다.

“연회 이후로 처음이니 오랜만이구나, 에즈라.”

먼저 입을 뗀 것은 첫째 공주인 글로사였다. 채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우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지.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나누는 것도 이상한 일이야.

우리는 만찬과 연회 때 말고는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었으니까.”

“여 긴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덜덜 떨리는 음성이 수치스러웠지만 두려움은 본능이었다.

이를 악물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별일 아냐. 네가 지내는 곳이 어떤지 궁금했거든. 그런데

여기는 너무 역하구나. 공기마저 이리 탁하니 원……?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듯 입을 틀어막은 스케네는 손을

휘적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비위가 상한다며 코를 틀어막는

스케네를 밀친 글로사는 좁다란 방 안을 두어 바퀴 돌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도 참 너무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이런

곳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까마득히 잊어버리시다니.”

잊었다는 대목에서 가녀린 등이 꿈틀했다. 글로사는 잔혹한

웃음을 흘리며 안타까운 어조로 탄식했다.

“나 참, 가축도 이것보다는 낫겠어. 여물만 넣어 주면 다를 게

없겠는데.”

말이 끊기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익히 아는 사실임에도

절망은 덮쳐 와 저를 꿀꺽 집어삼켰다.

아버지가 나를 모른다 했다. 이름조차도, 어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그리 잊고 산다고.

방금 전까지 곱씹던 추억은 어디 가고 그제야 사방이 검은 방

안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제 자리인 것이다. 일생

동안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어야 할…… 삭막한 삶. 그곳에

돌아온 거야.

모든 건 꿈이었다. 사라져 버릴, 붙잡지 못할 환영이었다.

“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아버지가 그런 표정을 하시는 건 또 처음 봤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보듯 하셨잖아. 안 그래, 스케네?”

정도를 넘은 모멸감에도 에즈라는 대답 없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 꼴을 내려다보던 스케네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바락바락 대든다면 뺨이라도 갈기고 머리채를 틀어잡아

마구 망가뜨릴 텐데.

처음 제대로 마주한 이복동생은 생각보다 너무 가냘파서

선뜻 손찌검할 수 없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몇

걸음 물러서는데 글로사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네가. 아무것도 아닌 네가, 탑을 벗어나는 것도

모자라……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곳에 비집고 들어오다니.”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 어디인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머무는 돌탑을 제외하고는 모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었기에. 그럼에도 에즈라는 어렴풋이 반짝이던

호수를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입 닥쳐.”

상스러운 말로 일갈한 글로사는 두 눈을 감았다. 아직도

눈앞에는 찬란한 풍경 아래서 입을 맞추던 남녀가 생생하기만

했다. 감정이 마모된 듯, 상냥하고 친절한 웃음밖에는 내어주지

않던 남자의 열띤 얼굴.

그는 안달 난 사람처럼 에즈라를 세게 틀어쥐고 흘린 듯

탐했다. 그 모든 걸 들러리처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고작, 고작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에게 고귀한 황자의 시선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으읏……"

바짝 말라 가느다란 손을 부러져라 짓밟으며 글로사는 뒤를

지키고 선 하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녀가 공손한 태도로

그녀의 손 위에 날이 뾰족한 단도를 올려놓았다.

어두운 곳에서도 서늘하게 번뜩이는 날붙이를 보며 스케네는

글로사의 다른 쪽 팔을 잡아챘다.

“언니!”

“조용히 해.”

이 정도였나. 스케네는 무언가에 잠식된 글로사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화의 주인도 아니면서 저 정도로 눈이 돌아간 여자가

이해 가지 않았다.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글로사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질투, 그리고 독한 증오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만을 되풀이하는 에즈라의 뒤통수를 거칠게 틀어쥐며

고개를 꺾었다. 얼굴을 쳐들게 된 에즈라는 글로사와 눈이

마주치자 모든 걸 체념했다.

죽어 버려야 하는 주제에 감히 그를 욕심냈다. 벌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조건 없이 내어주는 걸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건 같아서.

“잘못했습니다.”

에즈라의 눈동자는 선명한 초록빛을 띠었다. 그리고

글로사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사로잡힌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페리도트빛 눈동자.

머뭇거리던 진심. 그의 손끝은 결국 잔뜩 젖은 검은 머리칼을

귓가에 꽂아 주었더랬다.

“0| 검은 머리칼. 너무 길구나.”

“으윽!”

회상을 마친 글로사는 머리칼을 고쳐 쥐었다. 쥐어뜯기는

듯한 통증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의 손이 닿았던

에즈라의 머리칼은 허리께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이대로 고개를 들렴. 잘못하면 목이 베일지도 몰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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