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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0화 (10/113)

10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사방은 새까맣고, 들이닥친 물이 숨통을 틀어막는다. 혼을

빼앗긴 듯 정신을 차릴 수 없던 그 순간, 견고한 팔이 허리를

감아 올렸다. 느껴지는 누군가의 온기를 꽉 붙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푸핫, 소리를 내며 공기를 머금은 에즈라는 캑캑거리며

입에서 물을 쏟아 냈다. 코끝과 목구멍까지 맵고 찌릿했다.

먹먹한 귀 탓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즈라는 자신을

잡아 준 남자의 목을 두 팔로 껴안으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괜찮아요, 공주님 . 괜찮으니까……7

히폴로테스는 안심하라는 듯 등을 다독이면서도 에즈라를

감싸 안은 채 물 위를 유영했다. 그 여유로움에 허둥대던 그녀는

곧 그에게 몸을 맡겼다. 쫄딱 젖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물방울 맺힌 속눈썹을 수없이 끔뻑이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뭍에 다다랐다.

“ 영차.”

그는 마치 이리될 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에즈라를 먼저 뭍으로 올려 보낸 히플로테스는 그

주변을 조금 더 수영하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눈물을 닦던

에즈라는 어이가 없어 눈물이 쏙 멎었다.

“너무해요! 저, 저는 무서워서……-”

“죽는 줄알았어요?”

그가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외쳤다.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이유 모를 웃음이 나왔다. 저리 장난기가 많은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꼬르륵, 물속에서 오래도록 잠수하던 그는 저가

벌떡 일어나 이름을 세 번쯤 부르고 나서야 쏙 얼굴을 내밀며

대놓고 키득거렸다.

“장난치지 마세요!”

“몇 번이나 해도 속는 게 귀엽잖아요.”

귀엽다니. 그 한마디에 붉어지는 얼굴을 불쑥 가렸다. 쉴 틈

없이 장난을 치는 남자 때문에 콩닥거리는 심장이 남아날 리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어깨가 떨리자 귀신같이 알아차린

히폴로테스는 망설이지 않고 에즈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추울 텐데. 미안해요.”

“춥지 않아요. 잠깐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예요.”

에즈라가 도리질 치자 검은 머리칼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히폴로테스의 얼굴에 마구 튀었다. 마치 물에 홀딱 젖은 강아지

같은 꼴에 그는 손등으로 얼굴을 닦으며 픽, 웃었다.

“카코스!”

히폴로테스가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단숨에 달려와 망토와 도톰한 천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준 뒤 천으로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이, 이러시지 않아도…… 제가 할 수 있는데요.”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앗!”

그는 마치 남자의 머리칼을 말리 듯 기다란 그녀의 머리를

탈탈 털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작은 머리통이 귀여워 그는

저도 모르게 동그란 이마에 쪽, 입술을 맞췄다.

“어

“미안해요. 갑자기 너무 귀여워 보여서요.”

잠시 딱딱하게 굳었던 여자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커다란 두 눈을 두 번 껌뻑였다. 물기 어린 앵두빛 입술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차마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젖은 입술이 촉촉한

물기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뒤늦게 입술이 닿았다는 것을

깨달은 에즈라는 퍼뜩 어깨를 떨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흡!”

탄탄한 팔이 가느다란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바짝

끌어당겼다. 호홉이 가까워지기 무섭게 말캉한 살을 쪽

빨아들인 그는 고개를 틀어 느릿하게 살점을 짓눌러 왔다.

섞여 드는 습한 숨결은 뜨끈했다. 그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손은 바들거릴 뿐,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정신을 차린

에즈라가 힘주어 그를 밀치자 촉, 젖은 것들끼리 떨어지는

음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야릇한 접촉에 손끝까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입술과 입술이

닿다니. 손과 손을 맞잡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감각에 멍청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수려한 남자는 싱글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지금, 지금 이게……,”

이런 행위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던 에즈라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그를

마주했다. 퍽 만족한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귓가가

살짝 달아오른 남자와 손끝까지 새빨개진 여자.

남김없이 젖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은구슬처럼 빛나는 머리칼. 남성적인 턱선과

콧대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머리 위의 태양보다 열기 어린

붉은 눈동자까지 오

“한번더 하면 안돼요?”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빈틈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톡, 이마를 맞댄 남자가 뚫어져라 눈을 맞춰 온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딱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그가

속삭였다.

“지금 대놓고 공주님 유혹하는 거예요.”

“대놓고 넘어와 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대답할 틈은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입술이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빨아 당겼다.

윗입술까지 쪽 빨아들인 그는 잠시 입술을 떼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진지해진 남자는 이내 성마르게 입술을 겹쳐 왔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를 가르고 넘어온 남자는 데일 듯 뜨겁고

달았다. 그의 열기에 점점 뒤로 몸이 밀리자 그는 손을 뻗어

허리를 감고 뒷머리를 살짝 틀어쥐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그와 혀를 얽었다. 어설픈 제

혀를 은근히 감싸고 간지럽게 핥아 주던 입맞춤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이어졌다.

“흐웅……,”

헐떡이던 숨이 모자라 그의 어깨를 몇 번이나 두드리고

나서야 정신없이 제 안을 맛보던 그가 입술을 떼 주었다. 푸하,

익숙지 않은 접촉에 가쁜 숨을 내쉬며 부어오른 입술을 더듬자

그는 배부른 포식자처럼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방금 신음 소리 완전 야했던 거 알아요?”

“자, 자꾸 놀리지 마세요!”

“아, 맞다.”

놀리지 말라고 나름 엄포를 놓았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훌쩍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수양버들 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다가오는 남자의 품에 든 것이 눈을

사로잡았다. 생전 처음 보는 풀꽃들이 하나하나 모여 다발을

이루고 있었다.

“……화려한 꽃송이들로 채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여기엔

풀꽃밖에 없더라고요.”

“제게 주시는 거예요?”

머저리 같은 물음에 그는 무릎을 굽혀 에즈라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작은 품에 풀꽃 다발을 안겨 주던 남자는

부끄러움이 밀려드는지 괜히 시선을 빗겼다.

“당연하죠. 참고로 내가 하나하나 꺾었어요. 그러니까 안

받아 주면 엄청 속상해서 울지도 몰라요.”

울지도 모른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가 일렁였다.

모든 게 꿈만 같아서 두려워졌다. 가득 고여 오는 눈물을 깨닫기

무섭게 눈물이 뚝뚝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우는

에즈라를 보며 놀란 히폴로테스는 놀라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왜, 왜 갑자기 울고 그래요.”

그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당혹스러움이 짙게 느껴지는

터라 에즈라는 괜히 더 훌쩍였다. 기쁨에 차오른 눈물은 절망에

휩싸인 눈물과 다를 게 없이 짭짤했으나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이상해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아프다. 그 한마디에 히폴로테스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갔다. 여자가 내뱉기를 바라고 바랐던 말, 이런 아픔도

아픔이라면 아픔일까.

“숨이 막히고, 어딘가가묵직해요. 먹먹해서 눈물이 나요.”

나를 생각하며 준비한, 오로지 나를 위한 것. 처음으로 내

것을 품에 안은 순간, 그의 온기를 두려워하던 마음이 눈 녹듯

자취를 감췄다.

등을 톡톡 두드리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타인의 가슴 가득 끌어안긴 느낌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자 그는 짐짓 엄한

말투로 말했다.

“……콧물 닦는 거 다 알아요.”

“그럴 리가요!”

“내가 배려가 없었네요. 그렇게 믿어 줄게요.”

억울함에 그를 밀어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꿈틀거리던 그녀는 귓가에 쪽 입술을 맞추는 남자의 품에서

온전한 안정을 찾았다.

만물이 축복하는 가운데, 사랑을 연기하는 건 그뿐이었다.

라뷔린토스와 가까운 왕궁 도서관의 천장은 둥글었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낮에는 건조하고 환한 볕이, 밤에는 수많은

별들이 그곳을 채웠다.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는 분명 책을

즐기기도 했으나 그 풍경을 사랑하는 이유가 더 컸다.

허나 오늘은 서적 대신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개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쫄딱 젖은 채로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일까. 글로사는 치미는 감정을 삭이려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창을 짚은 손에는 핏줄이 잔뜩 섰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글로사가 뒤를 돌자화려한 자수가 수놓인 키톤

자락이 휘날렸다. 썩어 문드러지고 새까맣게 타 재 가루가 된

마음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따라라. 갈곳이 있으니.”

“예.”

군더더기 없는 몸짓의 하녀들을 대동하고 그녀가 착은 곳은

셋째 동생 스케네의 침소였다. 활짝 열려 있는 황금문을

마땅찮게 훑어보던 글로사는 지나치게화려해서 되레 천박해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버려. 오래됐네.”

“네, 공주님.”

“아, 맞다! 구해 오라 한 건? 구해 왔니?”

뭘 하는 건지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희멀건 바닥에 난잡하게 늘어선 보석들과 장신구들을 글로사의

하녀들이 하나둘 치우며 길을 만들어 갔다.

길거리 창부도 이리 경박하게 굴지는 않을 터. 입술을 꽉

깨문 글로사는 수십 개의 보석함을 뒤적이는 스케네의 뒤에

섰다.

“저…… 스케네 님. 글로사 공주님께서 걸음하셨습니다.”

“뭐?”

보석함을 든 채로 글로사의 눈치를 보던 하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화들짝 놀란 스케네는 곧바로 뒤를 돌았다.

“깜짝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스케네는 뒤에 바짝 다가서 있던 글로사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글로사의 눈살이 점점 좁혀졌다.

“뭐야. 진짜, 고상하신 언니께서 이렇게 경우 없이 행동해도

돼?”

“경우 없는 건 돼지우리 같은 네 방이겠지.”

글로사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사파이어를 발로 차 버리며

냉담하게 일갈했다.

“뭐? 돼지우리?”

스케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헛웃음을 뱉었다. 험악한

말은 입에 담지도 않는 언니가 불쑥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신랄한 말로 신경을 긁어 대니 그녀로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미친 거야? 함부로 쳐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왜

이래라저래라야!”

“됐으니까 더 이상 말꼬리 붙잡지 마. 네게 해 줄 말이 있어서

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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