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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9화 (9/113)

9화

“아닙니다, 공주님. 그건 공주님 몫의 식사가 맞습니다.”

바짝 긴장한 하녀는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안절부절못하며 문을 곁눈질했다. 전과 달리 하녀들은 저를

피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멸 대신 공포가 자리했다.

자신이 왕비를 피하는 것과 비슷한 공포.

“히폴로테스님께서 매끼마다 공주님의 식사를 보내오시기에

저희는 그대로 올려 드릴 뿐입 니다.”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에즈라에게 하녀는 덧붙여

설명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에즈라는 얼음처럼 굳었다.

그렇다면 들여놓은 새 이불도, 호화롭고 따끈한 음식들과

깨끗한 옷을 건네주는 것과 괴롭히던 하녀들이 언제 그랬냐는

양 저를 슬슬 피했던 것까지.

설마 했던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아

어딘가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공주님,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는 쌩하니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허망한 표정으로 건더기가 가득한 수프를 내려다보던

에즈라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늘한

한기가 피어오르는 바닥.

그를 밀어낼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마타리가 올라온 것은 세 번째로 끼니를 거른 이른 오후였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을 치우던 하녀들이 언질을 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을 흐트러지지 않은 마타리는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 역시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끼니를 거르신다 전해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이건…… 제가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에요.”

하녀들이 새로 가져다 놓은 아침 식사를 외면하며 주먹을 꽉

말아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기어코 피가 비쳤다.

차갑게 식은 음식과 바닥에 주저앉은 에즈라를 번갈아 보던

마타리는 걸음을 돌렸다.

“하녀 말입니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구겨져 있는 이불을 탁탁 털더니 침상

위에 가지런히 폈다.

“공주님께 히폴로테스 님이 보내신 것이라 입을 놀린 하녀.”

갑자기 하녀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타리는 몸을 돌려 눈을 맞춰 왔다.

“혀를 잘랐답니다. 본보기로요.”

“……네?”

고저 없는 목소리.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마타리는 허리를

숙여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무껍질처럼 메마른 새까만

동공이 두려워 급히 눈을 내리깔면서도 에즈라는 꿋꿋이

대꾸했다.

“그, 그분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제 물음에 답해 준

게 다예요.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윗전의 일을 가벼운 입에 담은 것. 그것이 잘못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피딱지가 았은 손바닥이 잘게

떨렸다.

“설마 그것 역시 히폴로테스 님께서 명하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저 하녀들 사이의 일입니다. 공주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지요.”

피비린내가 조금 더 짙어졌다. 에즈라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녹색 눈동자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은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니 공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편히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차갑게 일갈하며 마타리는 울먹이는 에즈라를 뒤로했다.

혀가 잘렸다는 끔찍한 형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아니면 되도

않는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위선적인 악어의 눈물일

그럼에도 넘지 못할 문 앞에서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 시선이 마주친 찰나, 지어 보였던 어설픈 웃음까지

상기해 낸 마타리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거슬리는 여자. 받아 챙긴 금화만 아니었다면 굶어 죽든 말든

내버려 두었을 텐데.

“그보다 히폴로테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주님.”

허나, 걸음한 목적은 명확했다.

“부디 걸음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호하게 말을 뱉는 그녀에게서 흐르는 냉기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저았아 있는

자신의 팔뚝을 끌어당기는 손만은 따뜻해서 또다시 울컥

눈물이 났다.

“너, 너무 잔인한 짓을 하셨어요. 그런 일은…… 언젠가

마타리 님까지 괴롭게 할지도 몰라요.”

겁을 상실한 것인지 질질 끌려가면서도 입을 뗐다. 혀가 잘린

하녀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그리할 수밖에 없었을 마타리가

주제넘게도 안쓰러웠다.

커져 가는 에즈라의 훌쩍임에도 앞서가던 마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쥐고 있던 팔을 조금 더 꽉 죄어 올 뿐이었다.

쾌청한 하늘 아래, 수백 년을 살아온 수양버들 나무가

있었다. 튼튼하게 뻗은 가지 아래로 하늘거리는 잎사귀들이

간헐적으로 흔들렸고 이름 모를 벌레 소리는 귓가에 맴돌았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탁 트인 푸른화를 바라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부리가 노란 오리들. 만물은 평화롭고 느긋하게

흘러갔다. 마음까지도 잔잔하게 만드는 풍경에서 히폴로테스는

몇 발자국 물러났다.

조악한 선착장 앞에 걸려 있는 낡은 나룻배와 거뭇한 손때가

탄 노까지. 이 모든 건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칼 대신

노를 젓는 자신은 존재해서는 안 되 었다.

허나, 모든 일에 예외는 있는 법이다. 슬슬 이마를 문지르던

히폴로테스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공주님.”

뭉게구름이 펼쳐진 하늘을 가로지르는 싸늘한 바람. 그 위에

얹어진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촉촉한 흙바닥은

푹신하고 돋아난 새싹은 싱그러웠다. 탁 트인화를 지키는

굵직한 나무, 그 아래서 나를 기다리는 남자.

돌탑 밖으로 자신을 이끄는 마타리를 따라 불편한 걸음을

옮기던 에즈라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는 에즈라를 발견하고 바로

섰다.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하게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게 선명하고 눈이 부셨으나 눈 한 번 제대로 깜빡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보이는 게

칙칙하고 버석한 천장일까 두려웠다.

“에즈라 공주님.”

“왜 자꾸……,”

왜 자꾸 내게 이런 것들을 선물해서 바라게 만드는 건가.

자꾸 이렇게 닿아 오면 나는 도저히 거부할 수도, 외면할 수

없는데.

서글픔에 주먹을 쥐자 뾰족한 손톱이 흉터를 가르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고통이 어느 순간부터 아파서 목구멍은

따끔하고. 심장은 저릿했다. 자리에서 한참 움직이지 않자

답답한 건지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어느새 두어 걸음 앞에

있었다.

“도통 움직이지 않길래 나무인 줄 알았잖아요.”

“너, 너무 아름다워요.”

에즈라의 동문서답에 히폴로테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름다운 게화예요, 나예요?”

“……둘 다요.”

예전보다 훨씬 솔직해진 여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흡족함에 그대로 에즈라의 손을

잡아끌어 호숫가로 내달렸다.

“어어!”

제대로 뜀박질해 본 적 없는 다리가 휘청일 때마다 빈틈없이

맞잡아 주는 든든한 손. 이 손을 뿌리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감춰 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번잡한 마음까지

자취를 감추자 에즈라는 서글픈 얼굴로 그를 따랐다.

그는 에즈라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단번에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가 물 위에 떠 있는 나룻배의 밧줄을 당기는 동안,

에즈라는 생소한 수양버들 나무에 손을 스벋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족히 수백 년은 살았을 수양버들을 원 없이 구경한 에즈라는

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히폴로테스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배 타야죠.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배를 타다니. 에즈라는 출렁이는 나룻배를 보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네……? 무, 무서운데요.”

“나만 믿어요.”

잠시 고개를 돌린 히폴로테스는 걱정 말라는 듯 가슴을 팡팡

두드려 보였다. 에즈라는 침을 꼴딱 삼켰다. 호언장담하는 걸

보아하니 뱃놀이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귀족들의

놀이라면 그가 하지 않았을 리 없을 터.

와중에도 누구와 배를 탔을지 궁금해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배 자주 타 보셨어요?”

“아뇨. 처음이에요.”

어딘가 익숙한 대화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 있던 에즈라는

곧 그의 옷자락을 잡아 뒤로 당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안 돼요, 히폴로테스 님. 추, 춤은 그렇다 쳐도 배는

위험해요.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빠지면 빠지는 거죠, 뭐. 그것도 재밌겠는데요.”

“뭐,뭐라고요?”

대경실색한 에즈라가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자 그는 마치

납치라도 하듯 에즈라의 허리를 잡아챘다.

“이리 와요. 같이 타 줘요.”

“죄송해요! 싫어요! 무서워요!”

세 번씩이나 거절하다니, 그렇게나 싫은 건가. 세차게 내젓는

고개에 머리칼이 이리저리 찰랑였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한 번만 믿어 봐요. 공주님께 물 한 방울 안 튀게 할게요.”

“정말이에요……?”

“정말요.”

꽉 껴안아 오는 통에 움찔한 에즈라의 귓가에 그가 맹세했다.

그의 옷깃을 꽉 말아 쥐던 손에 슬그머니 힘을 빼자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 내렸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 낸 히폴로테스는 먼저 배 위에

올랐다. 그가 선착장 위에 서 있는 에즈라에게 믿음직한 손을

뻗었다.

“나를 꽉 잡아요.”

저 손의 온도를, 감촉을 알았다. 에즈라가 벌벌 떨리는 손을

겹치기 무섭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의 손을 의지하며 한쪽 발을 내딛자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히폴로테스는 이내 훌쩍 들어 올려 배 위로 실었다.

“놀랐어요?”

말이라고 하는가. 손만 잡아 주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짐짝

싣듯 안아 들 줄은 몰랐다. 절로 눈물이 고였으나 그는 개구진

아이처럼 실실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때요.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죠?”

자리에 았고 나서야 물 위에 동동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으나 투명한 물결은

잔잔했고, 생경한 물비린내는 나쁘기는커녕 상쾌하기만 했다.

“새들이 많아요.”

에즈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뿌듯한

얼굴의 남자는 능숙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처음이라더니, 퍽

능수능란한 탓에 에즈라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가까이 가 볼게요.”

“도망가지 않을까요?”

에즈라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정신을 빼앗겼다. 배가

나아가자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신기하게도 배를 절로 피해

가는 부리가 노란 새들, 노를 젓느라 도드라진 남자의 팔

근육까지.

내리쬐는 볕에 사방이 산뜻했다. 히폴로테스는화의

중심에 다다르자 노를 놓았다. 잔잔한 수면 위 떠 있는 배는

더없이 한가로웠다.

“음흉하네요, 에즈라. 아까부터 제 팔뚝만 보는 거 알아요?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오해세요!”

“허벅지 보면 더 놀랄 텐데. 보여 줄까요?”

그가 옷자락을 펄럭이자 에즈라는 고개를 팩 돌리며 눈을 꼭

감았다. 툭 건드릴 때마다 꿈틀하는 여자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괜찮아요.”

“너무 아쉬워하는 얼굴인데.”

“아니요? 전혀요! 진짜 아닌데요.”

조금, 아주 조금 궁금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

속마음을 들킨 기분에 몸이 절로 튀어 올랐다. 벌컥 일어난 채로

버둥거리는 에즈라 탓에 작은 나룻배는 아슬아슬 흔들렸다.

“어, 어. 잠시만요. 에즈라, 알겠으니까 진정해요.”

당황한 남자가 일어선 에즈라에게 손을 뻗으며 만류했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에즈라는 이미 중심을 잃은 채였다. 배가

속절없이 좌우로 비틀거리자 에즈라를 잡기 위해 그가 막

일어서던 때였다.

신음과 함께 배가 뒤집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풍덩, 묵직한

소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탁한 수면

밑으로 깊이 가라았자 물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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