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혼몽했던 데몰레온은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몸을 퍼덕였다.
본능적으로 칼에 손을 뻗었던 그는 침상에 비스듬히 앉은
희멀건 여자를 보고는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에이씨, 깜짝아.”
에즈라는 선명히 들려오는 욕설에 이불자락을 꼭 쥐었다. 저
때문에 잠이 깨화가 난 걸까. 아니 그보다 저 사람은 누구고
여기는 대체 어디인 걸까. 에즈라는 막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남자를 살폈다.
천장에 닿을 듯 커다란 키. 울끈불끈한 몸은 돌보다 딱딱해
보였다. 갈색 머리칼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이마에는 길게 찢어진 홍터가 선명했다.
제 머리 위를 덮는 커다란 그림자에 위협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 왕비님께서 다른 이를 고용한 것인가. 그가 손을 뻗자
에즈라는 재‘빨리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허!”
데몰레온은 어처구니가 없어 코밑을 쓸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건만, 뭘 했다고 고양이 앞의 쥐 새끼마냥 떠는
건가. 대체 저를 뭐라 생각했길래!
“저기요, 공주님. 괜찮으니 고개를 드시죠.”
“때, 때리지 않는 건가요?”
“제가요? 공주님을요? 나 참, 공주님을 때리면 아마 제가
죽을겁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남자는 퉁퉁거렸다. 그보다…… 죽는다니.
의아함에 에즈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험악한
인상이었으나 잔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어딘가
낯이 익는 게……
“혹시 와스터 제국의 기사분이신가요?”
“예. 데몰레온이라고 합니다.”
침상 가장자리로 몸을 피한 에즈라는 여직 떨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으니 이름을 밝히는 게 옳았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망설이는 에즈라를 보며 데몰레온은 입술을
비죽였다.
“에즈라 공주님.”
그가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자 데몰레온은 에즈라를 뒤로한
채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시죠. 히폴로테스 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커다란 보폭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쾅 닫히는 방문을 얼마나 응시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휘황찬란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에즈라!”
설마 달려온 건가. 그의 어깨가 조금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보폭이 큰 걸음에 맞춰 은빛 머리칼이
살랑인다. 그를 하나하나 뜯어 감상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는 이마에 손을 언은 채였다.
“열은 내렸네요. 상처가 깊어서인지 열이 엄청 올랐었는데.”
기분 좋은 서늘함이 흐르는 손바닥은 생각 외로 거칠었고,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여 있었다.
“어디, 또 다른 데 불편한 곳은 없어요?”
바짝 다가온 얼굴에 잔뜩 담긴 걱정. 저를 살펴 주는 남자의
손이 이곳저곳에 닿아 올 때마다 심장이 너무 뛰어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목덜미까지 열이 치솟는 기분에 입만
벙긋거리는데 그는 알겠다는 듯 씩, 웃으며 이마를 톡 맞댔다.
“내 얼굴이 다시 아프게 한 모양이네요.”
입을 열면 볼품없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에즈라가
세차게 도리질 치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믿어 줄게요. 여기, 물 먼저 마셔요.”
느물거리는 그를 피해 떨리는 손으로 물을 건네받아 목을
축였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인지 커다란
방 안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고 깨끗한 방은 그가 머무는 라뷔린토스의 수많은
방들 중 하나인 듯했다. 에즈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남자를 알아채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아, 놀랐겠네요. 다들 저랑 함께 티텐에 온 기사들이에요.
그러니 긴장할 것 없어요. 해치지 않아요.”
해치지 않는다니. 그 대목에서 데몰레온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에즈라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더 없이화사한 얼굴을 했다.
“소개해 줄게요. 저기 험악한 인상을 한 남자는
데몰리온이에요. 힘 하나는 세니까 힘쓸 일 있으면 부려도
좋아요.”
“네. 네?”
당황한 탓에 말을 더듬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슴께에 팔짱을 낀 데몰리온은 대강 한 손을 올려 보일
뿐이었다. 히폴로테스가 남은 이들을 보며 눈짓을 하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조르르 달려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카코스라고 합니다, 공주님.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 불편한
일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를 처음 만났던 만찬 자리. 히폴로테스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카코스를 기억해 낸 에즈라는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렸다.
“제논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각 맞춰 걸어온 남자가 딱딱한 음성으로 간단한
인사를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인사에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인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마치
그들에게 존귀한 공주라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다, 다들 제게 고개 숙이시면 안 돼요.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걸요.”
점점 작아지는 말은 결국 웅얼거림이 되었다. 들리기는
했을까. 대답 대신 선뜻 손을 뻗은 남자는 머리를 정리해 귓가에
꽂아 주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그냥 인사일 뿐이잖아요. 주고받는 인사요;
“아……
“제논이라고 합니다.”
히폴로테스의 옆에 선 남자는 다시 인사를 건넸다. 에즈라는
그와 눈을 맞췄다. 히폴로테스가 아닌 다른 이와 제대로 눈을
맞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머리칼과 같은 검은 머리칼. 그리고 검은 눈동자.
에즈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처럼 어물어물 대답했다.
“저는, 에즈라예요.”
아주 짧은 인사건만. 눈을 피하지 않고 건네는 말이 이토록
힘이들 줄이야.
히폴로테스는 아직까지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에즈라와 제논을 번갈아 응시하다가 은근히화제를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뇨.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더 이상의 결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몸이 다 낫지는
않았으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당장이라도 돌탑으로
돌아가야 했다.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침상에서 몸을
들썩이자 히폴로테스는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설마 지금 가려는 거예요? 이 꼴을 하고?”
에즈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제 몸을 살폈다. 몸 안
이곳저곳에 약을 바른 것인지 고약 냄새가 풍겼고, 드러난 상처
위에는 흰 천을 돌돌 말아 준 듯했다.
게다가 깨끗한 무명 키톤까지 빌려주다니. 평소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사치였다. 잠시 의뭉스러운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던 에즈라는 깨달았다는 듯 허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했다.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히폴로테스 님.”
이제 돌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불쑥 손을
맞잡아 왔다. 따뜻한 온기에 놀란 에즈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물
아래서 일렁이는 듯한 페리도트빛 눈동자.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남자는 조금 느리게 입을 뗐다.
“가지 말아요. 다 나을 때까지 여기 있어요.”
여자는 조용히 몸을 물리며 슬쩍 손을 빼내려 옴짝거릴 뿐,
한참 대답이 없었다. 감사하다며 얼굴을 붉히거나, 온전히
자신을 의지하게 될 줄 알았건만. 예상과 다른 행동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는 곧바로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런 곳으로 공주님 못 보내요.”
마땅한 대사. 애달픈 얼굴과 단호한 목소리로 동정을
연기했다. 잡힌 손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에즈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죄송해요.”
이것 역시 짜여진 각본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틀린 대사를
내뱉는 에즈라를 히폴로테스는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툭 떨궈 낸 에즈라는 조르르 달려가 문
앞에 섰다.
힘없이 떨어진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이유 모를 허망함에
천천히 주먹을 쥐던 히폴로테스는 나직이 물었다.
“안 아파요?”
“……네.”
거짓말.
“정말요?”
늘상 온화하던 붉은 눈이 돌연 새까맣게 타올랐다.
“저는 이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히폴로테스는 숙였던 고개를 비틀었다. 가늘어진 눈초리로
여전히 뒤를 돌아 서 있는 에즈라를 살피던 그는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눈짓하자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제논은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에즈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도, 그를
원해서도 안 되니까. 그의 호의는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더
받아들이면, 그래서 언젠가 떠나갈 그를 바라게 되면…… 너무
괴로워질 것 같았다.
도망치듯 라뷔린토스를 빠져나와 한달음에 돌탑으로
돌아왔다. 남몰래 바라왔던 일이 파도처럼 들이닥쳐 무엇 하나
실감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이 진정 제 자리라는
것이었다.
자칫하며 피부가 찢길 만큼 거친 돌로 이루어진 좁고 낮은
방이 편안했다. 고개를 쳐들어야 보이는 창 사이로 날아들어
오는 이름 모를 씨앗들은 오롯이 제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그덕 신음을 내는 침상 위에 앉아 해진 이불자락을
비비적거리 던 에즈라는 마지막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안 아파요?’
분명 순수한 물음은 아니었다. 에즈라는 무감한 얼굴로
상처를 닦아 주던 남자를 떠올리며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걸쳤다.
아프다 말할 수 있을 리 없는데 어째서 자꾸 그리 물어 오는
걸까. 마치 아프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가 내미는
모든 것은 지나쳤고 또 버거웠다. 그리고 그만큼 그를 밀어내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저기 …"
“네?”
벌써 며칠째였다. 에즈라는 급물살 같은 변화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훑던 에즈라는 결국
급히 돌아서는 하녀를 붙잡았다.
믿을 수 없게도 하녀는 엉거주춤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설마
대답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홀렀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에즈라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음식이 평소와 다른데요. 혹시 다른 이와 바뀌거나 한 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