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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화 (7/113)

7화

설움에 헐떡이는 에즈라에게 애원했다. 아니, 그런 척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움직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명령하자 멀찍이 서 있던 하녀들은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나 재게 발을 놀렸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은 깨끗한 천과 미온수, 그리고 고약을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열어라.”

“네.”

그가 턱짓하자 하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걸쇠를

열었다. 작은 감옥 안으로 허리를 숙여 들어간 히폴로테스는

거친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힘 빠진 에즈라를 쉬이 품에 안아

들었다.

“시, 싫어요

적나라하게 드러난 알몸이 부끄러운지 여자는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세게 쥐면 부러질 듯한 두 팔로 가슴을 가리려

노력하는 게 애잔했지만 이미 모든 치부는 드러난 뒤였다.

흐르는 눈물이 귓가로 넘어갔다. 그것을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굳혔다. 언젠가 안았던 새끼 망아지도 이리

가볍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바짝 마른 여자는 생각보다 더

가벼웠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은 뭉클했으며 옅은 온기가 어려 있었다.

힘주어 안으면 사라질 환영처럼 희미하기도 했다. 잠시

미묘했던 마음은 곧 흩어졌다. 그는 깨끗한 천에 물을 적셔

핏자국을 하나하나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 아파요?”

조막만 한 얼굴은 말라붙은 피로 범벅이었다. 이리저리

생채기가 난 이마를, 잔뜩 부풀어 시퍼렇게 멍든 뺨을, 터져 피

맺힌 입술과……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모두 닦아

냈다.

“……아니요.”

“거짓말.”

“진짜예요. 황자님 손길이 깃털 같아서 하나도 안 아파요.”

느릿하게 전하는 말에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애처럼 엉엉

울 때는 언제고, 찢어진 입술로 잘도 지껄인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에즈라는 힘겹게 부은 눈을 들어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이토록 깜깜한 지하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눈부셨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으로 빛을 보듯, 어둠 속에도 내려오는

한줄기 빛.

그냥 바라만 보다가 손끝을 뻗어 보았다가, 슬쩍 발을

들이밀어 보고 싶은 그런 빛줄기.

그러니까 그렇게 무정한 눈으로 내려다본대도 괜찮아.

몸을 가리는 건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다. 히폴로테스는 눈을

감은 얼굴에 살살 고약을 발랐다. 신음을 흘리거나, 그도 아니면

찡그릴 법도 하건만. 품에 안긴 여자는 멍청하게도 웃었다.

미치도록 잘 어울리는, 막을 길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과 함께.

단 한 번을 아프다 하지 않았다. 그저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

뿐이었다.

그래서 괴로울 때마다 파고들고 또 파고든다는 것을, 조금

뒤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

땅거미가 져 가는 시간. 창가에 앉아 성벽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은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리를 숙이고 있던 하녀들은 전신을 휘감는

공포에 눈 한번 깜빡이지도 못했다.

“황자에게 지하 감옥을 들키는 것도 모자라, 그 배후가

나라는 것까지 알게 하다니.”

“면목 없습니다 왕비님. 제, 제발 모, 목숨만은……"

“목숨? 목숨이라.”

말을 곱씹던 왕비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허리를 숙인 채

끅끅거리는 뒷모습. 마치 배 속을 긁어 대는 듯한 웃음에 좁은

등이 바르르 떨렸다.

결국 그녀는 허리를 젖히며 파안대소했다. 적막 속에 퍼지는

웃음은 흡사 마귀의 것이리라. 공포에 젖은 하녀들은 그리

느꼈다.

한참을 낄낄대던 왕비는 겨우 호흡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일을 벌여 놓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버러지 같은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오래도록 앉아 있던 미네스는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또각또각 다가오는 왕비의 발소리가 음산하다.

“그래, 감히 살고 싶다?”

“예, 예! 사, 살고 싶습니다. 살려 주세요, 왕비님.”

찢어질 듯한 음성에 사시나무처럼 떨어 대던 하녀들은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머리를 한껏 조아리며 헐떡이자

미네스는 돌연 차분해졌다.

“살고 싶으면 말해. 대체 누가 황자에게 그곳을 귀띔해

주었는지 말이야.”

“왕비님!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황자님을 제대로

마주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마, 맞습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착아왔다라. 분노로 거칠어진 숨결에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 이를 악문 채로 턱을

치켜든 미네스는 뒤를 돌아 창가로 다가섰다.

감은 두 눈 앞에 얼마 전의 일이 그려졌다. 손에 착 감겨 오는

채찍을 떠올리며 가뿐한 기분으로 들어선 돌탑. 그리고 마주한

예상치 못한 인물.

‘미네스 왕비님.’

그래, 그 망할 황자.

녹슨 문을 열자마자 미네스는 지하 계단에서 올라온 남자를

마주쳤더랬다. 널따란 품에 안겨 축 늘어진 여체까지 모두

파악한 미네스는 아주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황자께서 여긴 어떻게.’

조신한 태도로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으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덜떨어지지 않고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 없을 터.

싸늘하게 식어 버린 붉은 눈동자에는 채 지우지 못한 혐오가

서려 있었다.

‘그러는 왕비님께서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저는

에즈라 공주님께 일이 생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온 것입니다.’

전해 들었다는 말에 미네스는 입 안을 씹었다. 대체 누가

감히, 이 일을 입 밖에 냈을까. 하녀 따위가 겁도 없이 입 밖에

냈을 확률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숨길 이유가 사라진 미네스는 그에게 안긴 채 정신을 잃은

에즈라를 독살스럽게 노려보았다.

‘이렇게 심각한 일인 줄 모르고 말이죠.’

이어진 말에 미네스는 시선을 올려 히폴로테스를 마주

보았다. 저열한 속내가 전부 까뒤집어진 기분. 미네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보자 다 알고 있다는 듯 히폴로테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히에로스 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요.’

명백한 협박.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네스는 정도를 넘은 모멸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 하지만 에즈라 공주님께서 아버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 부탁하셨으니 그럴 수는 없겠네요.’

히폴로테스는 한 걸음 다가와 미네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 왕비님. 에즈라 공주님을 잘 돌보아 주세요. 질 낮은

하녀들이 또 이런 짓을 벌인다면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 니까요.’

배후가 자신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황자는 그리 지껄였다.

분명한 경고에 자존심이 벅벅 갈려 나간 채로 미네스는 그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아아, 멍청한 너희를 믿었던 내 잘못이지.”

회상을 끝마친 미네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연극조로

내뱉었다. 물론, 하녀들의 잘못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

저리 바들바들 떠는 이들이 히폴로테스에게 접근했을 리 없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어딘가로 향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좀먹고 말 테니까.

“끌고 가. 피가 모두 쏟아져 나올 때까지 매질한 뒤 묻어

버려.”

“미네스님!”

“아악!”

잔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 떨어지자 두 명의 하녀는

본능적으로 발악을 해 댔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뒤에 버티고

섰던 다른 하녀들은 그녀들을 몽둥이로 기절시킨 뒤 입을

틀어막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난 후에야

미네스는 조금이나마 풀어진 마음으로 침상에 몸을 뉘었다.

한숨 돌리기 위함이었으나, 추잡한 감정들 뒤로 과거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스케네를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날, 정원이 너무도 잘 보이는 창가에 서서 부른 배를

쓰다듬는 여자를 내려다보았었다. 그 옆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어 보이던 사랑하는 남자까지도.

제 것이어야 하는 자리에 주제도 모르고 발을 들인 여자.

고작 비천한 무희 따위가 반반한 얼굴 가지고 남편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역겨운 아이까지 수태했다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해사하게 웃는 저 얼굴을 뭉개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빌었다. 죽여 달라, 눈을 까뒤집고 죽어 버려라. 존재

자체가 사라지길 바라며 끙끙 앓았다. 그렇게 밤마다 독을 품은

채로 여자의 불행을 빌다가 어쩔 때는 울기도 했다. 나를

악독하게 만드는 두 사람이 너무도 원망스러워서.

과거를 반추하던 미네스는 손등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조소했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 남자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희미한 발 너머로 축 처져 있던 여자의

인영. 그 앞에 주저앉아 울부짗던 남자. 가지 말라, 나도

데려가라. 퍽, 애달프게 빌던 남자의 절망이 너무도 짙어서,

문턱 너머에 선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해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버린 여자에게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옆에 서서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산파의 품에는 어린것이 안겨 있었다. 축복은커녕 평생

저주스러운 것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온 어린것은 제 운명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울지 않았다.

그 난장을 지켜보던 나는 무어라 했던가. 억억거리며 울던

남자의 등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죽여 버려야 했어. 너를, 너를 내게서 앗아 갈 줄 알았더라면

벌써 죽여 버렸을 거야.’

눈을 번뜩이며 단도를 들고 아기의 목을 겨누던 남자는 곧

녹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바란 적 없다. 나는 정녕, 평생…… 너 하나만

바랐는데.’

나는 힘없는 흐느낌을 들으며 처음으로 후회를 했지. 차라리,

그 여자는 죽지 말았어야 했다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

당신에게 그 여자는 한 평생의 영원으로 남을 테니까.

‘그래도…… 울지 마.’

나는 당신이 나를 바라보기를 바란 것이지, 우는 걸 바라지는

않았단 말이야.

꿈을 꿨다. 꿈이라는 걸 알게 된 에즈라는 구석에서 통통한

손바닥에 호호 바람을 부는 어린 날의 자신을 구경했다. 몇 살

즈음이더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대여섯 살

정도일 것이다.

항상 뽀얀 손바닥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가득했다.

돌탑에서 지내다 보면 거친 돌에 쓸리는 일은 허다했으므로.

허나 누구도 자잘한 상처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쓰라린

상처를 입에서 오물거리다가 호호 불기를 반복했다.

어째서일까, 분명 지나왔던 세월인데 달려가 저 작은 등을 꼭

안아 주고 싶은 건.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것을.

저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을 바라며 항상 침상 구석에서 뚫린 창만

올려다보는 미련한 나를.

꿈인데도 내 맘대로 그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닿을 수

없는 곳에 그는 닿았다. 그가 다가와 주었다.

조그마한 인영 앞에 남자의 그림자가 진다. 밤하늘 아래서

품에 안아 주었던,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마지막으로

웃어라, 귓가에 속삭여 주었던 남자가.

그가 손을 내밀자 어린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밑의 어둠을 거두어 주듯 환한 빛 무리 아래 서 있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피딱지 앉은 손끝으로 그를 톡,

건드리자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위로하듯 감싸 온다. 꿈인데도,

그저 내가 그린 꿈속인데도…… 사람의 온기가 선명해서

눈물이 났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고 또 원해 온 것은 고작

사람의 온기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내어준

사람을, 나는 아마 평생 잎지 못할 거야.

에즈라가 깨고 싶지 않은 꿈속을 나와 눈을 뜬 것은 정신을

잃은 뒤 꼬박 삼 일 만이었다. 혼몽한 에즈라는 드높은 천장을

보고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뭘까. 꿈도 꾸지 않은

채로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허나,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생소했다. 낮은 천장은 시커멓고 까슬한 돌로 이루어져 있어야

했고, 침상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그녀는 슬쩍 상체를 일으켜 보았다.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등에서 느껴졌으나 당연히 신음은 목

뒤로 삼켰다.

“여기는……읏!”

한마디 하려는데 바싹 말라 있던 목에서 갈라지는 통증이

일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려 상황을 파악하던

에즈라는 창가 쪽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저, 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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