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가 대충 손짓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데몰레온은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정숙한 태도로 들어선 마타리는
히폴로테스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인사는 됐어. 상황은?”
“예상하신 대로 벌써 며칠째 매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맞을 만큼 맞았다?”
“예.”
마타리의 대답을 끝으로 그는 창가에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계획했던 대로 만신창이가 되었을 여자를 기만하기 위해서
히폴로테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천한 어미의 몸을 타고 난 공주이자, 왕께서 가장 사랑하던
여자를 죽이고 태어난 홍한 존재. 괴로움에 울부짖던 왕은 눈이
돌아가 어린것에게 단도를 들이밀었지만, 아기는 어미를 닮은
초록색 눈동자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젖먹일 적부터 돌탑에서 자라난 공주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 갔고, 곁을 지키던 하녀들은 수가 줄더니 태어난 지 다섯
살이 된 이후로는 매일 끼니를 챙겨 주는 하녀 두엇이 다였다.
홀로 몸을 씻고, 어수룩하게 말을 하게 되고, 두 눈에 담기는
이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에즈라가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추위였다. 돌 틈으로 들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하루
온종일 몸을 움츠리고 있다 보면 그토록 기다리던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것에 신이 나 돌문 앞에서 서성거리면 곧 문이 열리고
익숙한 하녀가 들어와 빵과 수프를 내어주었다.
늘상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에즈라가 음식을 원하는 것인
줄 알았는지, 음식이 두 배로 늘었으나 에즈라는 여전히
그녀들의 기척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가끔 아주
필요한 말만 하고 돌아설 뿐, 대답조차 듣지 않고 도망치듯 등을
돌릴 뿐이었다.
에즈라는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하녀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매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먼저 말을 걸면, 대답해 줄까.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잡은
옷깃을 빼내며 깊은 한숨을 토해 내지는 않을까. 여기는, 혼자는
너무 춥다고 말해도 될까.
‘ 나와.’
목욕하는 날이면 하녀는 그리 말하고 차갑게 뒤를 돌았다.
좁은 보폭으로 열심히 계단을 내려가면 하녀는 욕실 문을 열고
툭, 등을 떠밀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욕실 안에서 어린 에즈라는 새까만
어둠이 두려워 대충 물을 끼얹고 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상태를
내보이면 가끔 험한 손속으로 물기를 닦아 줄 때도 있었기에
얼어붙을 듯 추워도 꼭 물기를 말리지 않은 채 욕실을 나서곤
했다.
그것마저도 다섯 살 이후로는 경멸 어린 시선만 받을
뿐이어서 그만두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지하에서 목욕을 마친 뒤 꼭대기를 향해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였다. 매일 꽁꽁 닫혀 있었던 돌탑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에즈라는 그 열린 문틈을 발견하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생전 처음 마주한 새하얀 빛 사이로 맑은
공기가 밀려 들어왔고, 흐린 시선에 짙은 녹음이 비쳤다.
‘저기는 어디예요?’
하녀는 못 들은 양 대놓고 무시했으나 에즈라는 애절한
눈동자로 한참을 우물거 리 다 물었다.
‘저기에 나가 보면…… 안 돼요? 그 손가락, 다섯 개 접을
동안만요.’
고개를 저을까 봐 급히 손바닥을 펴 보았으나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하던 하녀들은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안돼.’
차디찬 눈동자에는 아주 찰나였지만 동정이 비쳤던 것도
같다.
‘밖에서는 너를 원하지 않거든.’
왜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기엔
어렸으니까. 그저 험하게 잡아끌던 하녀가 야속하기만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발견하지 않은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아도 떠도 새하얗게 부서지던 햇볕과 코끝을
간지럽히던 맑은 공기가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건 꼭 부질 없는 희망을 갖게 할 뿐이 니까.
그날 이후로 어린 에즈라는 하녀가 식사를 챙겨 올 때면 겁
없이 치 맛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가 보고 싶다고 부탁하는 손가락은
다섯 개에서 세 개로 줄었지만 하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했다.
허나 매일같이 이어지는 에즈라의 투정 아닌 투정에
하녀들도 지쳐만 갔다. 결국 잔뜩화가 난 하녀 하나가 세차게
뺨을 내리친 후 어깨를 밀쳤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울먹이는
에즈라에게 씩씩거리던 하녀는 격앙된 어투로 쏟아부었다.
‘숨 쉬는 것에 감사하며 죽은 듯이 살아! 너는 태어난 그날
죽었어야 했어 !’
하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성을 잃고 윽박지르는 성인의
그림자에 에즈라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오들오들 떨었다.
‘오히려 나가면 너는 뒈져 버릴 거야. 왜냐고?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네가 죽어 나가길 바라고 있거든.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야.’
‘자, 잘못……"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온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지랄이야! 네가 죽인 어머니도, 네 아버지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너를 원하지 않아. 그러니 주제를 알면 가만히
닥치고 있으란 말이야! 애꿎은 사람들 들쑤시지 말고!’
사특한 감정에 도취된 하녀는 친히 속삭여 주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어 버려.’
그녀가 쏟아 낸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단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다. 깊은 증오와 환멸. 진정으로 저가 죽어
버리길 바라는 눈동자에 서린 광기.
그날, 또다시 홀로 남겨진 에즈라는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돌탑에는 왕비님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주의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그리하여 돌탑 가장 아래에는 지하 감옥이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감옥이었다. 그곳에 가두고, 굶겼으며, 폭행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유 없이 끌려가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0 0”
언제 기절했던 것일까. 뒤늦게 정신이 들자 온몸이 조각난 듯
쑤셔 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잔뜩 부푼
눈두덩 이로는 주변을 살필 수도 없었다.
뺨을 대고 있는 차디찬 돌바닥에서는 혈 향이 났다. 코피와
터진 입 안에서 새어 나온 핏물일 것이다. 끄응, 신음을 내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야, 깨어났나 봐.”
에즈라가 바르작거리자 철창 앞을 지키던 하녀 한 명이 다른
이에게 고했다. 두 쌍의 눈동자는 꿈틀거리는 에즈라를 잠시
응시하다가 물이 담긴 나무통에서 물을 떴다.
“제대로 깨워 놔야지.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데.”
둘 중 하나가 철창 안으로 들어와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등골이 다 시려 와 몸을 떨었으나 하녀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뒤돌아 나간 후 걸쇠를 걸었다.
하녀들은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킥킥거리고, 임금
이야기를 하며 너무 적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종종 끊겨 들렸다. 집중적으로 맞은 오른쪽 귀가 먹먹한
탓이다.
“나 참, 그러니까 주제도 모르고 거기는 왜 가냐고. 왕비님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멍청하니까 맞는 거야. 멍청하니까. 왕비님 신경 안 건들고
조용히 살면 좀 좋아? 우리도 이런 일 껄끄러운데.”
“근데 이번에는 정말 장난이 지나쳤어. 마타리 님이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니까? 그분은 원래……7
“잠깐. 조용히 해.”
나불대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막았다. 누군가 지하로
내려오고 있었다. 왕비님인가 싶어 두 사람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굳었다. 일정하게 걸어 내려오는 발소리는 왕비의
것이라기엔 무게감이 느껴졌다.
에즈라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감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래된 습관에 손바닥에는 다시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얼마나 떨었을까.
“화, 황자님……?”
물을 끼얹었던 하녀가 새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찌나 놀랐는지 한껏 커다래진 눈은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했다.
“여긴 어떻게 아시고…… 아니, 무슨 일로 이곳을.”
정신을 차린 다른 하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무표정한 황자는 이내 미간을 좁혔다. 짐승의 것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이 살기등등하다.
움찔, 몸을 떨던 하녀들은 그의 뒤로 후다닥 달려가 구석으로
처박혔다. 히폴로테스는 철창 안에 갇힌 가냘픈 몸을 냉정한
얼굴로 관망했다. 어차피 저런 몰골로는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할 테니까.
그는 샐쭉 올라간 입술을 열었다.
“에즈라 공주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새하얀 알몸에는 채찍 자국과 멍
자국이 빼곡했다. 저 정도면 때리는 이도 퍽 힘에 겨웠을
것이다. 잔인한 것에 무감한 그마저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 이 라 남몰래 쯧, 혀를 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주먹이었다. 또다시 손톱에 손바닥이 터진 것인지 싱싱한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을 보며 히폴로테스는 붉은 입술을
핥았다.
“대체 누가 이런거예요.”
화를 내며 물었음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기절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시하는 태도가 은근히 신경을 긁어 댔다. 성마른
연기를 하려는 찰나, 가녀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는 괜찮으니까……가주세요.”
“황자님께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요.”
뭉그러지는 발음. 울음 섞인 말은 결국 흐느낌으로 끝을
맺었다. 쓰라린 상처를, 처절한 모습을 감추려는 듯 여자는 힘
빠진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것마저도 힘에 겨워 작은 등이
들썩였다.
“에즈라.”
가장 감추고 싶던 부분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던 사람에게
보이고 말았다. 허나 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준 순간,
처음으로 소리 내어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동정에 삼켜
온 울음이 숨을 막아 왔다.
“지, 지금 저…… 너무, 너무 부끄러워요.”
아무 생각 없이 부른 이름에 아이처럼 울다니. 잠시 멈칫했던
히폴로테스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니까 제발가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히폴로테스는 남몰래 코웃음 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촘촘히 짜여진 연극 우I,여자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되었다.
“그럼 치료만 할 수 있게 해 줘요. 내가 살필 수 있게만 해
줘요. 그럼 바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