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두 사람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귀족들은 아량이 넓은 왕비가 넷째 공주를 챙겨 주는
모양이구나 하며 왕비의 너그러움을 추켜세울 뿐. 그들을 향해
쏠렸던 관심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잔을 부딪치고
방탕해졌다. 어둑한 그림자는 이곳밖에 없었다. 빛줄기
속으로는 손가락조차 내밀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돌아가. 돌아가서 내가 찾을 때까지 네 뺨을 치면서 기다려.
뺨이 부어 있지 않으면…… 채찍을 들 거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기억 한 조각이 귓가를 찔러
왔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스쳐 가던 남자가 남기고 간 말. 에즈라는 홀의 중심에서
반짝이는 그를 곁눈질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내게 와
줄까 기대했었나 보다. 그럴 일 없다는 거…… 너무 잘 알고
있는데도.
애꿎은 손톱만 잡아 뜯으며 시간을 죽이는 에즈라를
미네스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대답해.”
“예, 예. 그럴게요. 그럴게요, 왕비님."
미네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에즈라를
이끌었다. 조용히 미네스에게 끌려가는 에즈라는 더 이상
히폴로테스를 바라볼 수 없었다.
“에즈라 공주님.”
미네스와 에즈라가 문 앞에 선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을 열려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에즈라 공주님.”
환청인가. 에즈라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선명한 부름이
다시금 들려왔다. 그대로 굳어 버린 에즈라 대신 미네스가
천천히 뒤를 돌아 그를 마주했다.
왕비의 눈에 담긴 초조함에 비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글로사와 춤을 추면서도 에즈라를 살피던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찢어발길 듯 겁박하던 왕비를 모르지 않았다.
미네스가 경멸스러웠지만 뭐, 그 덕에 이런 기회가 온 것
아닌가. 고작 저런 추잡한 여자 앞에서 머저리같이 구는
모습이라니. 벌레처럼 움츠러든 에즈라에게 환멸이 났다.
“왕비님. 에즈라 공주님을 데리고 어딜 가시는 건지요?”
이내 미네스를 향한 붉은 눈은 어쩐지 검게만 보였다. 전해져
오는 음산함에 미네스는 힘겹게 대답했다.
“공주는 오늘 이곳에 초대된 이가 아니랍니다.”
미 네스는 여전히 고아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황자님께서는 괘념치 마시고 지금처럼 연회를
즐기시기를.”
“왕비님. 에즈라 공주님은 오늘 제 초대로 걸음하셨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만 믿고, 저를 따라
이곳에 오신 분이 니까요.”
단호한 말이 또다시 미네스의 걸음을 막았다.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미네스의 뺨이 실룩였다.
“함부로…… 대한 적은 없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 하기에
친히 데려다주려고 했던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그는 미네스의 손을 더러운 것을 만지듯 떨쳐 낸 후,
에즈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끝까지 왕비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는 에즈라를 바라보는 히폴로테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갑시다.”
연회의 주인공인 이가 겨우 덜떨어진 공주 때문에 자리를
비우다니. 게다가 에즈라를 편히 대하는 그의 태도에 그곳에
있던 모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에즈라는 왕비의 손이 아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일렁이는
시야를 보니 또 멍청하게 울먹이는 모양이었다. 엉망진창으로
얼어붙은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생글거리며 달콤한
말을 내뱉었다.
“오늘 엄청 아름다운 거 알아요?”
“네, 네?”
그는 허리를 숙여 또다시 자신의 울타리 안을 훌쩍 침범했다.
“안 그래도 생각보다 재미없었는데. 잘됐네요.”
그는 생각보다 직설적이었다. 재미없었던 건가. 그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에즈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그는 오늘 연회의 당사자였다.
“히폴로테스 님은 오늘의 주인공이시잖아요. 저, 저는
괜찮아요.”
다리가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주제에.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그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주인공이니까 마음대로해도되는 거 아닌가. 나가요, 우리.”
“그, 그래도 이건……"
문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곤란한 얼굴에 서린
걱정은 아마 저를 향한 것일 테지.
“누구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라도 있어요?”
그럴 리가. 세차게 고개를 내젓자 그는 거칠 것 없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히폴로테스는 뚫어져라 꽂혀 드는 시선을 느끼며 비틀어진
웃음을 지었다. 남은 공주들의 분노와 질투가 누구를 향할지는
뻔한 일. 게다가 왕비는 예상했던 대로 이 여자를 도를 넘게
증오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두려움이
일지는 않았기에 에즈라는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지나치게 끈적하고 불유쾌한 것들을 뒤로한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두 사람은 시원한 바람이 들어찬 기다란 복도를
지나 개미굴 같은 왕성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 끝에
존재했는지도 모를 작은 문.
손을 맞잡은 채 문턱을 넘었다. 왕궁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왕족들을 위해 조성된 후원은 잘 가꾸어져 있는 데다가 탁
트여 있어 밤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곳 중 하나였다.
왕족을 위한 곳이건만, 이곳의 존재를 아예 몰랐었나. 앞으로
일어날 일도 가늠하지 못하고 졸졸 따라오던 여자는 하늘에
홀려 정신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별과 별을 손가락으로 이어 보는 에즈라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늦게 시선을 눈치챈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눈에담았다.
“오늘 나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아, 어, 그, 그게……,”
하녀들의 장난 때문이었지만, 그를 보러 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기도 잠시, 머리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얹어지자 목석처럼 굳어 버렸다. 무심한 남자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여기 밤하늘 아름답지 않아요? 처음 보자마자
공주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손을 뻗으면 남청색의 하늘이 닿을 것 같았다. 빼곡한 별들이
하늘을 휘젓는 손에 톡톡 걸릴 것만 같아. 하늘이 이토록 넓은
줄도 모르고. 땅이 이렇게 광활한 줄도 모르고. 그래, 세상에
당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공주님한테 가장 먼저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알고 있었어도 지금은 모르는 척해 줘요.”
에즈라가 아주 작게 미소 짓자 그는 생글거리며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글로사에게도 했던 행위였지만 더욱
진득하고 야살스럽게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에즈라는 팩,
고개를 돌리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황자님, 황자님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은 저와 말도
섞어서는 안돼요.”
있어도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는 남자.
그가 별 뜻 없이 내미는 온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감춰 둔 진심은 잡힌 손을 빼내지 않았다.
“ 어째서요?”
“저 같은 건 황자님께 폐만 끼칠 거예요. 그러니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시는 게…… 옳아요.”
“그거 진심이에요?”
진심. 그가 단 한 번도 내보일 수 없었던 진심을 물어 온 탓에
에즈라는 처음으로 진심 이라는 걸 들여 다보았다.
사실은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잊지 않고 한
번 더 찾아 주기를 바라면서.
이미 당신을 알아 버린 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오 미래가 조금 더 두려워졌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할까. 기겁하며 주제도 모른다
여길 것이다.
잔뜩 주눅이 든 에즈라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오늘처럼 자꾸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저, 저는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몰라요.”
“이럴 수가, 그거 완전 환영인데요.”
능글거리는 말투.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대답하지 못한 채 습관처럼 두 주먹을 움켜쥐는데 그는
커다란 손으로 주먹을 감싸 주었다.
“함께 춤춰 주세요, 공주님.”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춤을 신청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그는 잡은 손에 콱 힘을 주더니 앞으로
끌어당겼다. 뾰로통한 입술이 열렸다.
“받아 줄 때까지 안 일어날 건데요.”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제멋대로 그리 버티는데
다른 수가 없었다. 붉어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돌렸다가
뻣뻣하게 끄덕이자 단숨에 일어선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걸쳤다.
탄탄한 팔이 허리를 혹 감아 오자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채
안기게 되었다. 민망함에 몸을 꿈틀거리며 속삭였다.
“저……사실 춤추는 법을 몰라요.”
“괜찮아요. 춤은 핑계고 그냥 안아 보고 싶었거든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 내어 고백했건만. 황당함에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 지금 소리 내어 웃어 줬어요.”
“제, 제가요? 설마요……,”
고개를 휘휘 내저었으나 그는 맑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고고한 달빛 아래,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한 별들 아래서 몸을
겹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계속 그렇게 웃어요.”
귓바퀴에 닿아 오는 낮은 숨결이 달콤하다. 몸을 슬쩍 물려
마주한 남자는 유일한 빛처럼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선명했다.
“괜찮아요.”
난생처음 웃음을 허락해 준 남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려 주는 위로.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태도에 에즈라는 그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간절히 닿아 오는 마른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무료한
얼굴을 감춘 남자는 남몰래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에 굶주린
여자만큼 쉬운 건 없다더니. 이건 쉬워도 너무 쉬운 것 아닌가.
흥미가 떨어진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품 안에
들어온 여자의 여린 어깨를 감싸 주다가 검은 정수리에 제 뺨을
비볐다. 그렇게 위로를 연기하며 여자를 기만했다.
폭풍 같던 연회가 지나가고 왕궁에는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한 분위기 속, 히폴로테스와
그의 전사들이 머무는 라뷔 린토스에만 긴장감이 흘렀다.
바람도 숨죽인 밤. 훤히 뚫린 창틀에 온통 새까만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몰려든 구름 탓에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그곳을 아무도 몰래 가로지른 새의 다리에는 말아 둔
양피지가 묶여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새는 퍼드득 날아와 팔 위에 내려앉았다.
무심한 손길로 양피지를 풀어낸 히폴로테스는 그것에 쓰여진
내용을 읽어 내렸다.
“테르모스의 전령입니까?”
“그래.”
이내 손안에 든 양피지 조각을 꽉 구겨 버린 그가 불타고
있는 촛대의 불을 훔치자, 그것은 재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여기적힌게 다야?”
“예. 테르모스에게 훈련된 병사들의 수를 물었습니다.”
제논이 한 걸음 나서며 대답했다. 대답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제논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차갑게
일갈했다.
“나는 분명히 최대 병력이 궁금하다 물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모여들 병력을 어림짐작하기 어려워 우선 당장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 이들만 추렸을 겁니다.”
책사인 카코스가 덧붙여 설명하자 히폴로테스는 냉담한
얼굴로 뒤늦게 명령했다.
“계속 병사들을 모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려. 버러지 같은 것들 때문에 군량 낭비할
필요 있나.”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명령하는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기다란 다리를 꼬며 살짝 고개를 젖힌 황자는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목덜미에서 홀려내리는
은발과 달빛에 젖은 붉은 눈동자가……
“뭘 그렇게 봐?”
그가 오랜만에 본모습을 드러내자 지나치게 황홀한 미모를
감상하던 이들은 어렵사리 눈을 떼며 어버버거렸다. 태생부터
잔혹하고 무자비한 남자. 사람을 흘리는 미모에 속아 손을
뻗으면 단숨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카코스가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문지르자 히폴로테스는
비소를 흘렸다. 까마득히 먼 곳에 늘어선 잿빛 성벽. 저 성벽을
깨부수고 이곳을 불태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모든 게 귀찮고 성가셨다. 하루라도 빨리 티텐을
정복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제국을 손안에 그러쥐고 싶었다.
그러려고 혐오스러운 여자에게 되도 않는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사랑, 그리고 여자.
‘저 같은 건 황자님께 폐만 끼칠 거예요. 그러니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시는 게…… 옳아요.’
그렇게 지껄이던 주제에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쥐어 오던
옷깃. 절박하고 가냘팠던 손아귀를 떠올리던 히폴로테스는
번쩍 눈을 떴다. 꼬았던 다리를 푼 히폴로테스는 천천히 창가에
다가섰다.
“……히플로테스 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루한 여자. 다시 생각해도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었다.
“카코스, 그 하녀에게서 별다른 말은 없고?”
“예. 아직까지는……,”
“이상하네. 당장이라도 달려가 뺨을 휘갈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왕비와 에즈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으로 턱 끝을 훌는데
마치 짜 맞춘 듯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