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는 병사들을 보며 더없이 상냥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분명한 미소였음에도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직접 초대한 걸로 하겠다는 말인데.”
볼품없는 외모와 누추한 몰골. 게다가 남자치고 작달막한 키.
그럼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용이 흘러나와 그들의 몸을
묶었다.
“그러니 문을 열어.”
온화한 어투를 구사하는 황자가 잡아챈 창을 빼낼 수 없었다.
엄청난 완력에 우물쭈물하던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닫힌 문을 열었다. 스치듯 보았던 문틈 사이로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그리 느꼈다.
“이리로.”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남자가 꿈처럼 손을 내민다. 한참을
멍하니 내어진 손을 응시하자 그는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면, 뭇 남성들은 오해할 텐데요.”
습관일까. 호선을 그리는 눈에는 분명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벙찐 채 서 있는 에즈라의 손을 맞잡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삶을 옭아매고 있던
줄이 일순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온 이국의 남자가 만들어 낸 길. 그를 따라 처음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시선이 꽉 마주 잡은 손을 타고 올라 단단한 등에 머물렀다.
둥근 천장에 매달린 보석들이 내뿜는 색색의 빛 무리. 금칠을 한
조각상들이 즐비한 호화로운 홀과 그곳을 누비는 이들이
뽐내는화려한 자태까지 .
하나같이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들을 담을
새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저를 이끌어 주는 널따란 뒷모습만이
마음에 가득 담겨 왔다. 찰랑이는 은빛 머리칼, 믿음직스러운
등과 곧고 당당한 걸음걸이가.
놓칠까 더욱 세게 감싸 쥐는 손의 온기가 적나라하다.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이라도 하듯 그는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붉은 눈은 태양이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다가서는 순간 나를 태워 버리고 말…… 태양.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둘러싼 절망에서 도망치지 않고
떡하니 버티고 섰던 이유를.
에즈라는 무심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문 앞에서 버티면, 계속 버티고
서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어. 나는
저 너머에 있을 당신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거야.
한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들어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소문으로만 듣던 버려진 넷째 공주.
그녀를 친히 이끌고 온 제국의 황자라니. 귀족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훔쳐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 반해 그녀의 등장에 왕족들은 금세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그중 왕비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에즈라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왕족을 위해 마련된 금빛 의자. 본래 왕족이라면 마련된
의자에 았아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옳았으나, 에즈라를
위한 자리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즈라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왕족들을 서늘하게 훑어보던 히폴로테스는 혼잣말을 했다.
왕비의 눈초리 때문일까. 뭐가 그리도 두려운지 새하얗게 질려
벌벌 떨던 여자는 결국 종잇장처럼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에즈라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싸 안아 부축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세 명의 공주들의 얼굴은 서로 다르게
일그러졌다. 분을 참지 못한 스케네가 벌떡 일어서려 하자 옆에
선 하녀가 극구 만류했다. 결국 그녀는 시‘썰게진 얼굴로 욕을
중얼거리며화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죄, 죄송해요.”
“무엇이?”
그는 은근히 말을 낮추고 있었으나 그것을 눈치챌 만한
여유는 에즈라에게 없었다.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하게 되셨어요. 저, 저 같은 건…… 그냥
무시하셨어도 되는데.”
“하나도곤란하지 않은데요.”
겨우 이런 것에 곤란할 리가. 오히려 술술 풀려 가는 상황에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입장을 위해 열려 있는 문밖을 스치듯
응시했다. 마타리를 향해 눈짓하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급히 물러났다.
히에로스가 마땅찮은 얼굴로 흠흠, 헛기침을 하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해 주었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거의 다 들어서자 경쾌한 선율이 가득한
홀에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사방을 부산스럽게 둘러보던 에즈라에게 히폴로테스는
조용히 속삭였다.
“우선 히에로스 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서요.”
“아……I”
그제야 자신이 그의 소매를 꾹 붙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에즈라는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았다.화르륵 달아오르는
얼굴이 느껴져 어쩔 줄 몰라 하자 머리 위로 그의 웃음이
쏟아졌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기다리라니. 다시 내게 와 준다는 걸까. 어느새 친숙하게
말을 튼 남자는 왕족을 위해 내어진 길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에즈라는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담아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열댓 개의 계단 앞에 멈추어 선 히폴로테스는 적당한 거리를
남겨 둔 채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홈잡을 데 없는 품위가 느껴졌다.
“과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자리를 빛내 주어서 고맙지. 자네를 위한 자리이니
모두와 한층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길 바라네.”
상대의 엄중한 눈빛에도 기죽지 않는 이국의 황자. 그를
샅샅이 살피는 히에로스의 낯빛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든 말든 분위기는 한층 풀어져
무르익어 갔다.
익숙한 얼굴들 가운데, 사람들은 갖가지 가면을 바꿔 쓰며
타인을 마주한다. 호탕하고 맑은 웃음 아래,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은 거미줄처럼 여기저기로 “벋쳐 나가고 또
뒤집어졌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길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다가서는 공주들을 가장 환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이런저런 찬사와 아부들, 그녀들의 호기심을 부추길 만한
이야기를 부풀려 귀에 은밀히 속삭이기도 했다.
히폴로테스에게 다가오는 귀족들 역시 끊이질 않았다.
잔뼈가 굵어 권세를 부린다는 고위 귀족이나, 낮은 계급이지만
부를 얻게 되면서 심히 거드름을 피우는 귀족들까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얻어 내려
성화였다.
흘러가는 상황을 살피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던 글로사는
스케네에게 붙잡혀 있는 히폴로테스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히폴로테스 님.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군요.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우아한 손짓. 입에서 나오는 나긋나긋한 말투와는 달리
스케네를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은 맹렬했다.
“첫째 공주이신 글로사 공주님이 아니십니까.”
히폴로테스는 예를 갖추어 글로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호의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글로사는 보석을 두른
손을 느릿하게 거두었다.
“스케네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계셨나요?”
“공주님께서 티텐의 성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래요?”
성벽이라는 말에 글로사는 싸하게 굳어 갔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스케네는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초조한 듯
방황하는 눈동자. 남몰래 이를 악문 글로사는 히폴로테스를
보며 어렵사리 미소 지었다.
“어떤이야기를 해 주던가요?”
“티텐을 수호한다는 다알리아 신과 그의 성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와스터 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
그런지 매우 흥미롭더군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남자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었다. 그에 조금 안심한 글로사는 우둔한
동생이 저지른 실수를 수습했다.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랍니다. 티텐의 견고한 성벽을
정복하지 못한 이들이 자신들의 무력함을 그리 포장하더군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진실이었다면 티텐의 영광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이유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가볍게 던진 말이 분명해
보였으나 속뜻은 티텐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글로사는 추한 외모의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얕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이 남자는 티텐과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공주를
원한다며 찾아온 이가 아니던가. 잠시 혼란해하던 글로사의
시야에 불쑥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깜짝 놀란 글로사의 귓가에 그가 은밀히 속삭였다.
“글로사 공주님.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 겠습니까?”
“……물론이죠.”
비위가 상할 정도의 추한 얼굴이 가까워지자 올린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으나 글로사는 그와 손을 겹쳤다. 그녀를 이끌어
연회의 중심으로 파고든 그는 능숙하게 글로사를 리드했다.
파트너를 향한 세심한 배려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품이
흘러나왔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감상하던 귀족들 역시
하나둘, 서로에게 춤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홀의 가장자리로
몸을 숨긴 에즈라는 금빛 커튼 앞에 우두커니 서서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었다.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도 히폴로테스와 글로사는 눈이
부실 만큼, 그래서 다른 곳이 어두워 보일 만큼 빛이 났다.
그래서일까. 완연한 고립에도 외롭지가 않은 것은. 글로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흘리는 미소, 움직임에 맞춰 얕게 흔들리는
머리칼과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주는 강인한 팔까지. 모든
순간의 그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으니까.
“꿈같아.”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때였다. 꿈같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하고 절망이 발목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곁으로 다가온 이의 그림자가 제 그림자까지 집어삼킨다.
정도를 넘은 악랄한 시선에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증오에 차마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등에 닿는 황금 벽이 싸늘하다. 덜덜 떨려 오는
아래턱을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미네스는 당장이라도 에즈라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꾹꾹 내리누르며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내뱉었다.
“버리지 같은 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거야.”
“와, 와, 왕비님……
“당장웃어. 얼굴 짓뭉개버리기 전에.”
협박에 에즈라는 울듯 웃어 보였다. 접힌 눈꼬리 사이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릴까 두려웠다. 목을 조를 듯 바짝 다가온
미네스는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오 오래도록 내가 걸음하지
않아 주제를 잊은 모양이구나.”
“자, 잘못, 잘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