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왕궁은 제국에서 온 유일무이한 황자를 위한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물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공기가 떠다니는
초여름. 어느 때보다 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나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과 풍성한 연회에 들떠 있었다.
그 탓일까, 준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마무리되어
갔다. 침소에서 창밖을 구경하던 첫째 공주 글로사는 옆에 서서
재잘거리는 스케네를 무감하게 훑었다.
“언니 이것 좀 봐 줘. 아까보다 이게 낫지?”
“글쎄, 기억이 안 나네.”
스케네는 계속해서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만 내놓는 태도에
복장이 터졌다.
“정말!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제대로 본 적도 없잖아.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
대답 없는 글로사의 얼굴에는 은근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스케네는 헛웃음을 흘리며 비아냥댔다.
“아아, 이제 알겠네. 언니도 황비 자리가 탐나는 거지?
그래서 내가 더 아름답게 치장할까 봐 견제하는 거 아니야?”
스케네가 빽 소리를 지르자 곁에 서 있던 하녀들은 기함하며
물러났지만, 글로사는 씩씩거리는 스케네를 대놓고 비웃었다.
다혈질에다가 멍청하리만치 솔직한 셋째 동생은 얼굴 빼고
봐줄 것 없는 여자였다. 어차피 제 상대도 되지 않는 불쌍한 것.
글로사는 어깨를 으쓱이 며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니? 황자가 누굴 선택할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가 그를 원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아마 디케도 제
방에서 너처럼 수선이란 수선은 다 떨고 있을걸.”
둘째 디케는 조숙하지만 그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음습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잠시 그녀를 떠올린 글로사는
슬쩍 인상을 썼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하지만 아무리 언니라도 그리 여유로울
수 없을걸. 만찬에서 그와 내가 몇 번이나 눈을 마주쳤는 줄
알아? 못해도 열 번은 넘었어. 그때마다 나는 웃었지. 알잖아?
언니들 중 내가 가장 뛰어나게 아름답단걸.”
“그랬니?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점찍은 남자를 포기한 적
없어. 포기할 필요도 없었지. 눈길을 주기만 해도 넘어왔거든.”
스케네는 콧방귀를 뀌며 글로사를 내려다보았다. 절대로 질
수 없었다. 히폴로테스, 그 남자를 차지하기만 한다면 제국의
황비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황자의 흉측한 겉모습 따위는 그로 인해 얻게 될 황비 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끝까지 고아한 태도를 유지하며 글로사는 스케네를 마주
보았다. 욕망에 찬 새파란 눈동자와 굽이치는 금발, 풍만한
가슴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이 눈에 띠었다.
확실히 남자라면 동할 법한 외관이긴 했다.
“생각보다 더 방만하구나 스케네. 제국의 황자가 고작 시들어
버릴 미색만으로 여자를 택할 것이라 생각하다니. 생각이 짧은
건 여전하고.”
“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스케네가 들고 있던 머리꽂이를 콱
움켜쥐었다. 무어라 반박하려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입술만 꾹 깨물었다.
“고고하고 잘나신 언니께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할지 참
궁금하네.”
“그래, 기대하렴. 나 역시 그의 곁에 선 나를 보며 박수 칠 네
얼굴이 궁금하거든.”
글로사가 여유를 가장하며 손끝을 다듬자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스케네는 험하게 뒤를 돌았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문 열어 !”
그녀는 애먼 데화풀이하며 끝까지 신경질을 냈다. 질겁한
하녀들이 재빨리 문을 열자 스케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지긋지긋한 것을 내쫓고 나서야 글로사는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준비해 두었던 것들. 모두 가져와.”
만찬에서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하지 않았었다.
스케네가 내뱉은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짐승과 다를 것 없는 에즈라와 황자 사이에
풍기던 미묘한 기류.
그러니 스케네 못지않게 아름다워야 했다. 빛나야 했고
어떻게든 그 혐오스러운 남자를 사로잡아야 했다. 글로사는
스케네 앞에서 감추었던 초조함을 내보이며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한 자리를 두고 세 명의 공주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에즈라는 창에서 쏟아지는 노을빛 아래에 서 있었다. 왕궁에서
꽤 떨어져 있는 돌탑까지 시끌시끌한 걸 보아하니 오늘이
그날이구나.
게다가 문밖을 지켜야 할 두 명의 하녀도 어딜 간 것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회 준비로 한창 바쁘니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려 한 모양이었다. 슬쩍 다가가 문을 밀어
보았지만 열릴 리가 없었다.
까슬한 돌문에 손을 댄 채로 상념에 젖어 있던 그녀는 이내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에 맺힌 땀을 옷자락에
벅벅 닦으며 마구 도리질 쳤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씁쓸한 미소를 걸친 에즈라는 돌문을 밀었던 손을 한껏
비웃었다. 만에 하나라도 열렸다면 월 어쩌겠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무력감에 괜히 눈가를 손으로 비비적대는데 문득 소름이
돋았다. 감도는 스산함 사이로 탑을 오르는 여럿의 다급한
발소리. 듣는 귀가 예민한 탓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니. 혹, 왕비님인가 싶어 에즈라는 낡은
침상을 파고들었다.
이불자락으로 몸을 꽁꽁 싸맨 채 구석에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는데 이윽고 묵직한 돌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에즈라 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슬그머니 감은 눈을 떠 보자 낯선
하녀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연회에 참석하라는 왕명입니다. 어물쩍거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여, 연회라요?”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한껏 동그래졌다. 연회에 참석하라니.
어쩌면 아주 먼 곳에서라도 그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망측하게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티 나게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자 하녀들은 곧 들뜬 태도로 에즈라를 둘러쌌다.
처음 보는 하녀가 다가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정말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믿고 맡겨만주세요.”
처음 그날처럼 에즈라는 목욕부터 시작해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값비싼 향유까지 발랐다. 일련의 과정이 지나가는
동안 에즈라는 꽉 메어 오는 심장께를 자그마한 손으로 꾹
짓눌렀다. 세차게 뛰어 대는 심장은 완연히 설렘을 부추겼다.
다정하게 웃어 보이던 얼굴이, 손끝에 입을 맞추며 마주한
붉은 눈동자도 머릿속에 새겨져 잊혀지지 않았다.
하녀들은 에즈라의 달아오른 귓바퀴를 보고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킥킥거렸으나 비웃음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어서, 그 사이로 희망이
불어와서…… 지금은 그것만 감당하기도 벅찼으니까.
이윽고 준비를 모두 마친 에즈라는 마지막으로 훤히 드러난
어깨와 가슴팍을 손으로 훑었다. 이렇듯 몸이 훤히 드러나는
옷은 처음인지라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든 말든
에즈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본 마타리는 대강 손을
휘저었다.
“가시죠.”
“저, 저기……"
앞서 나가는 하녀들의 뒤를 따르던 에즈라가 처음으로
마타리를 불러 세웠다.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마타리는 뒤를 돌아 대답했다.
“마타리입니다. 저기라는 호칭은 다른 이들 앞에서 하시면 안
됩니다.”
“네, 네.”
에즈라는 힘주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대답하거나, 대답 없이 고갯짓을 하거나. 말을 늘이는
것도 하지 마세요.”
“네.”
“그래서 하실 말씀은?”
“왕께서 진정 저를 부르신 건가요?”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왕명입니다.”
왕명이라는 말에 에즈라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제대로 눈 한 번 마주한 적 없던 아버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을 상상했다.
헛된 희망이 일렁였다. 마타리가 성가심을 감추지 않으며
뒤돌아 걸음을 옮기자 에즈라는 뒤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종종걸음 쳤다.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왕궁의 가장 중심이자 오로지
왕족들을 위해 개방하는 그랜드 홀이었다.
금칠을 한 뒤 붉은 성어를 새겨 넣은 문은 두텁고 무거워
병사 두엇이 열기에도 힘이 들었다. 붉은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정예병들은 다가오는 에즈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눈짓을 주고받았다.
“누구십니까?”
당연한 물음이 들려왔다.
“넷째 공주님이십니다.”
“넷째 공주? 들이라는 명을 받은 적 없다. 돌아가.”
이전과 달리 맨 앞에 선 마타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발밑에서 피어올라 발목을 꽁꽁 묶었다.
어수룩한 모양새로 입술만 달싹이는데 병사들은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들이지 말라는 왕명이다. 어서
물러나지 않고 뭐 하는 건가.”
병사가 마타리에게 뾰족한 창을 들이밀며 명령했다. 그들은
뒤에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인도하던 마타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후, 다른 하녀들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홀로 남아 휙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본 후에야
키득거리는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질 낮은 장난임을
뒤늦게 깨달은 에즈라는 석상처럼 굳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모여드는 시선들과 귓가에 선명히 꽂혀 드는 비웃음. 그
중심에 서서 마타리의 무정한 얼굴을 마주하며 아주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즈라는 송골송골 땀이 찬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다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이곳까지 걸음한 것인가. 한 번 생각해
주었다고 주제도 모르고 이곳까지 발을 들이민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발밑이 부서져 내리는 찌릿한 기분에 습관처럼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초대받지 못했나?”
처연한 음성에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붉은 솔이 달린 창을 들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 도착한 귀족들은 문 앞을 가로막은 에즈라를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줄 지어 선 채로 수군거리며 무어라 대놓고
불평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 이제는 뒤돌아서야 했다. 더 이상의 수치는 견디기
힘들었으므로. 기척을 죽이고, 숨을 삼키며 평소처럼 도망쳐야
하는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떡하니 버티고 선 에즈라를 향한 비난이 점차 커져 갈
즈음이었다.
허락된 자가 아니면 평생 열리지 않을 문. 그 문틈이 느리게
벌어지더니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문을 연 장본인을 알아채고는
아연실색했다.
남자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모여 있던 모두는 말없이 입을 떡
벌렸다. 소란이 잠잠해진 가운데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한
정적이 깔렸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 단정하고 일정한 발소리가 울린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은 이윽고 에즈라의 앞에서 멈추었다.
내리뜬 눈을 슬그머니 올려 그를 확인하기 무섭게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앞을 티텐의 성벽처럼 막아섰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왕족인 에즈라 공주님께서
이곳에 들지 못할 이유가 뭐지?”
“왕명입니다.”
병사는 에즈라를 향했던 창대를 꽉 움켜쥐며 내뱉었다.
한순간에 뾰족한 창끝은 방향을 틀어 하늘을 향했다.
“나를 위한 연회가 아니었던가?”
“마, 맞습니다. 허나 초대받지 못한 이는 들이지 말라 분명
그리 명하셨습니다.”
왕의 명령. 에즈라는 이국의 손님인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그를 위한 연회에 큰 소란을
일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절박한 표정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려던 그때였다.
“그럼 내가 초대한 걸로 하지.”
“……예?”
“초대받지 못한 이는 들이지 말라 하셨다 하니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