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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화 (2/113)

2화

그렇게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그를 감상하듯 바라보던 에즈라는 단숨에 새파랗게

질려 갔다. 감히 눈을 맞추다니. 돌아가 호된 매질을 당할까

싶어 하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달달 떠는 에즈라를 위아래로 훑던 그의 눈이 아주 잠깐

번뜩이 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호선을 그렸다.

“와스터 제국의 황자 히폴로테스입니다.”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야에 뾰족한

하녀의 눈이 들어왔다. 퍼뜩 놀란 그녀는 마른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네, 넷째 공주 에즈라입니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칠 기세에 초원의 맹수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히폴로테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조소했다.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티텐의 공주들. 그리고…… 얼빠진

공주 하나라.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보이며 그는 에즈라에게

훌쩍 다가섰다.

“히에로스 님과 그의 왕비님은 아직 자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공주님들도 그러하고요.”

“네, 네.”

황금 식탁 위에는 윤기로 반들거리는 고기와 물기를 머금은

채소가 가득했다. 도톰하게 구워 낸 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생소한 과일들도

빼곡했다. 허나 왕족들이 더 늦는다면 음식들은 차갑게 식어

제맛을 잃어버릴 것이다.

얕보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게 고작 시간을 끄는 거라니.

너무 진부한 거 아닌가. 간사한 속뜻을 모를 리 없는

히폴로테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와중에 이

덜떨어져 보이는 여자는 다른 이들의 의중을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맞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여자의 손끝을 잡았다. 겨우 손끝이건만,

작은 접촉에화들짝 놀란 에즈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비 온 뒤 이파리처럼 생생한 녹빛 눈동자를 헤집던

히폴로테스는 손등에 입을 맞추어 감사를 표했다.

“아, 저는……"

재빠르게 손을 거둔 에즈라는 손끝을 맞잡으며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건 알았지만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 그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손등에 입을 맞추다니. 이성과의 접촉이 처음인 에즈라가

평정을 유지하기란 버거웠다. 게다가 남자의 용모가 너무도

수려하지 않은가. 그녀는 깊게 숨을 고르면서도 본능적으로

히폴로테스를 흘긋거 렸다.

위협적일 만큼이나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몸체. 달빛과

닮은 은발은 이곳을 둘러싼 순금보다 반짝였으며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조각한 듯 뚜렷하고 섬세했다.

여러모로 눈을 떼기 힘든 미려한 남자. 그의 외관 중 가장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타오르듯 은은한 온기를 내뿜는 붉은

눈동자였다.

멸시와 혐오, 경멸이나 동정이 아닌 순수한 호의를 담은 눈.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이는 지금껏 한 명도 없었으니까.

고작 눈 한번 마주한 것뿐인데도 손끝까지 맥박이 뛰어 댔다.

이건 뭘까.

에즈라는 남자의 입술이 닿은 손등을 은근하게 비비적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자리가 많습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애잔한 여자를 친히

이끌어 주려는 찰나, 웅장한 황금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긋하게 걸어 들어온 그들의 시선은 우두커니 서 있는

이국의 황자에게 닿았다가 에즈라에게로 흐른 뒤 이내

흩어졌다. 에즈라는 왕비의 등장에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우선 자리에 앉게나. 곧 공주들이

몰려오면 정신이 없을 테니까.”

히에로스왕은 마치 에즈라가 보이지 않는 듯 무감하게 스쳐

지나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왕비 역시 딱딱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자리하자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미련 없이 뒤로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군. 우리가 공주를 보내면 보냈지 와스터

제국에서 먼저 티텐을 찾아올 줄은 몰랐네.”

“저로서는 티텐에 발을 들일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영광, 영광이라……"

히에로스는 황금 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일언반구 없이

들이닥친 제국의 유일한 황자. 불꽃과 같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타오르는 불길 반대편에는 그림자가 지는 법이라고.

그는 알게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자 에즈라는 식탁의 맨

끝자리에 조심스럽게 았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로

옆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왕비의 증오 어린 시선이 느껴져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절로 식은땀이 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황금 문턱을 넘은 세 명의 공주들은 사뿐사뿐 다가와 고운

자태로 인사를 건넸다. 왕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들은

곧바로 히폴로테스와 그의 곁을 지키고 선 세 명의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주와 황자의 흠잡을 데 없는 첫 만남.

머저리 같았던 방금 전의 자신이 떠올라 에즈라는 옷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 모였으니 본론을 꺼내도 될 것 같군.”

“예. 말씀하시지요.”

“티텐을 찾은 이유가 내 딸들에게 구혼을 하기 위함인가?”

에즈라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말이었음에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구석에 찌그러져

숨소리도 내지 않는 제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예. 맞습니다.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공주님들 중 한 분을 제

곁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주저 없는 대답에 히에로스왕은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게 황자의 울퉁불퉁한 얼굴은 혐오가 일 만큼이나 추했고,

몸가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누추했으며 키가 난쟁이마냥

작았다. 몸집은 뭐, 칼 한 자루도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염려되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와스터의 황자라지만…… 길거리 잡부를 들여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왕은 깊은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대륙을 집어삼켰다는 와스터 제국. 아무리 수백 년간

티텐의 성벽을 넘은 나라가 없다 해도 방심은 파고들 구멍을

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현 황제께서 아직 정정하시다 들었네만. 어째서 구혼을 하러

온 거지?”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한 걸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가 꺼낸 말에 주위를 둘러싼 공기는 서리가 내려았을 듯

싸늘해졌다. 그럼에도 황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 공주님들 중 한 분과 인연을 맺어. 두 나라의화합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 또한 깊지요.”

단단히 굳어 버린 히에로스의 입매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신의 비호를 받는다는

티텐이라도 제국을 척지고 싶지는 않을 터. 왕은 분명 공주들 중

하나를 제게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왕이 얼마나 시간을 끌든, 움켜쥐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기도 했다.

“……가볍게 맺어질 일은 아니지. 늦었지만 티텐을 찾아 주어

고맙군. 부디 티텐에 있는 동안 편히 머물기를 바라네. 아! 귀한

손님이니 연회도 열어야겠지. 부족함 없이 준비시킬 테니,

마음껏 즐겼으면 해.”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히에로스왕은 발을 빼지도, 성급히 굴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딸들은 둘러 살피다가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적막한 공간 아래,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잔뜩 긴장해서일까. 허기 따위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기에 막 손을 들어 올린 참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에즈라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마주하고 잠시 굳었다.

스치는 시선에 도사린 어둠. 그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그는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이 불현듯 뜨거워졌다. 금세 떨어져

나간 시선이었지만 귓가에 아른거릴 만큼 심음은 컸고,

잠재우지 못할 감정은 선명했다.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데,

무엇도 느껴서는 안 되 었는데. 운명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에즈라는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트릴까 더욱 꽉 감싸 쥐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생경했던 찬란함 속, 그 눈빛만이

가장 황홀했다는 걸.

“이제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황자님의

억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라뷔린토스의 복도에 두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어둑한 곳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히폴로테스를 뒤따르던 카코스는 대답 없는 주군을 보며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용모로 글로사 공주의 마음을 얻어도 모자르건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습을 가장하신 것인지 이유를 통 말씀해

주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범상치 않다는 네 명의 공주를 마주했는데. 네 감상은

어때?”

“제 감상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마

가장 비천한 공주의 마음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 정도지요.”

비천한 공주. 히폴로테스는 카코스가 일컫는 여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발발 떨던

유약함. 혼자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정도로 보이던 무력한

여자.

“한 나라의 공주가 저런 꼴이라니…… 꼴같잖아 죽는 줄

알았어.”

드물게 그가 가면을 벗고 감정을 내비쳤다. 환멸만이 잔뜩

느껴지는 어투에 카코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가장 싫은 구석은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용기가 없다는

점이 가장 한심하지.”

“그깟 별 볼 일 없는 공주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상황이라면……!”

“그래? 나는 내 감이 들어맞았다는 데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데.”

“그게 무슨

앞서가던 남자가 거침없이 뒤를 돌자 검은 망토가 마침

불어온 바람에 휘날렸다. 흉측한 모습을 하고서도 숨길 수 없는

위용이 가득 흘러넘치는 터라 카코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턱을 들어 올리며 경쾌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순조로워.”

히폴로테스는 눈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제

손에 쥐여 줄 여자라는 것을.

치미는 희열을 참지 못한 그가 입을 가리며 큭큭 웃었다.

들썩이는 그의 어깨를 조금 두려운 눈으로 응시하던 카코스는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참 후에야 표정을 갈무리한 남자는 환한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그 여자를 만난 건 운명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행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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