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투박한 돌탑.
어찌나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것인지 군데군데 먼지 끼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풍화된 돌 틈 사이로 계절의 바람이 들어와
휘젓고 지나가기를 수차례.
그곳에서 살아왔다. 아니, 그곳이 전부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돌탑의 꼭대기. 작달막한 창에는 손끝조차 닿지 않는다.
오직 내리쬐는 한 줄기 햇빛과 달빛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려
주었으며 뿌옇게 쌓여 가는 먼지는 지나온 세월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매서운 손길에 떠밀린 에즈라는 끼긱거리는 침상으로 힘없이
어푸러졌다. 퉁퉁 부은 눈꺼풀 사이로 여전히 씩씩거리는
여자의 인영이 좌우로 흔들렸다.
에즈라는 또다시 날아올 채찍이 두려워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힘없는 두 팔은 축 늘어지기만 했다.
고통이 짙게 밴 신음을 흘리며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 냈다. 조금은화가 풀린 걸까.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
여자의 어깨가 점차 가라앉았다.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에즈라는 캑캑 피 고인 침을 뱉었다.
“가증스러운 것, 죽어 버려!”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악에 받쳐 소리치는 왕비의
절규는 돌탑 안을 크게 울렸다. 제화를 못 이겨 경직된 채로
성을 내는 그녀는 몇 번이나 더 패악을 부리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 며 신음했다.
“나는, 나는 말이야. 네 눈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아.”
에즈라는 급히 눈을 감았다.
“네 두 눈을 파내고 그년과 닮은 얼굴을 달군 쇳덩이로 지져
버리고 싶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 온 저주의 말. 그것을 긍정하는
에즈라는 저주의 대상이 자신임에 늘 안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괴로워해야 했고, 모든 건 아주 마땅한 벌이었다.
그러니 평생 괴로워도 좋았다. 모든 걸 참아 낼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다면.
“너를, 너를 내 손으로 죽이기 전에 나는 눈을 감지 않을
거야.”
왕비는 마지막으로 에즈라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 늘어진 에즈라를 뒤로하고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돌탑을
내려갔다. 높다란 돌탑을 울리는 발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린다.
끄응, 남은 힘으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에즈라는 밭은 숨을
내쉬며 이불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에즈라는 갈라진 손톱으로 맨다리에
새겨진 멍들을 살짝 눌러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퍼렇고
누르스름한 멍 자국은 빼곡했고 어디가 아픈 것인지 제대로
짚어 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침상 한구석으로 피신한 에즈라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고통과 사무치는 외로움. 갈 곳 잃은 원망과 절망 속에서
평생 몸부림치며 살겠지.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이리 혼자 남겨지기를 바란
적 또한 없어.
그러니 나 같은 것의 삶이 아니라, 어미의 삶이
이어졌더라면.
우습게도 얼굴조차 모르는 이를 그리워했다. 매일 밤, 제
얼굴을 더듬으며 낳아 준 어미의 모습을 새카만 시야에 그려
보았다. 이왕이면 웃는 얼굴을 상상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고 그런 날들 중, 아주 평범한 밤이었다. 돌문이
끼긱거리는 소음을 내며 열리더니 붉은 등불이 눈을 찔러 왔다.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리던 에즈라는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둘이 아닌 열댓 명의 하녀들이 들이닥친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추레한 몰골의 에즈라를 훑어
내리더니 흩날리는 먼지에 손을 내젓고, 퀴퀴한 냄새에는
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개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하녀가
턱짓하자 다른 이들이 다가와 양팔을 잡아끌었다.
하녀들이 말없이 등 떠민 곳은 욕실이었다. 아무렇게나
쏟아져 내린 차디찬 물에 기겁하며 몸을 굳혔으나 하녀들은
평소와 달리 조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씻겨 주었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녀들을 둘러보았으나 여전히 입을 꾹
다문 하녀들은 간간이 인상을 쓰거나 흘린 땀을 닦아 내기만 할
뿐, 저를 씻기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덕에 몸을 움츠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정한 손에 얼마나 휘둘렸을까.
적당한 온도의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살갗이 벗겨지지 않은 목욕이 끝난 후에는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마구잡이로 엉켜 있는 터라 그들은 조금 애를 먹는
듯했다. 그럼에도 사정없이 뻑뻑 빗어 내리는 통에 두피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문 채로 버티는데 눈 안 가득 담긴 불안을 읽은
것인지 하녀장으로 보이는 낯선 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선심 쓰듯 설명해 주었다.
“바다 건너 와스터 제국에서 황자가 왔습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갸우뚱하는
에즈라에게서 뒤를 돈 하녀장은 먼지 낀 돌 틈을 슬쩍
훑어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공주님들 중 한 명에게 구혼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를
환영하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빠짐없이 참석하라
명하셨습니다.”
왕명, 황자, 와스터 제국.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이름뿐인 공주. 돌탑 안에 갇혀 생활하는 저따위가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모자라 함께 식사를 하다니.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잘못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해요. 저는 그런 곳에
발을 들일 수 없어요.”
“저희로서도 이변입니다만. 분명 넷째 공주까지 통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공주.
하녀장은 침상에 걸터앉은 에즈라를 내려다보았다. 시들어
가는 풀꽃처럼 핏기 없는 얼굴은 수척했고, 멍청히 끔뻑이는
댕그렁한 눈은 선명한 녹빛을 띠었다. 얇은 데다가 구불거리는
통에 잘 엉키는 새까만 머리칼까지.
바싹 말라 볼품없고 키까지 작은 에즈라는 어디로 보나 덜
자란 여자애 같았다.
에즈라 역시 자신의 그런 외양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니,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능력을 오로지 그녀만 갖고 있지
않았다.
첫째 공주는 세상의 모든 지성을, 둘째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아마 자신의 방에서 가장화려한 드레스를 꺼내며
수선을 떨어 대고 있을 셋째는 그 어떤 이성의 마음까지도 훙칠
아름다움을 가졌다.
반쪽짜리 공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거라곤 네 명 중 가장 별 볼 일 없는 외모 정도일까.
가장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밟고 태어난 저주스러운 존재. 그
삶은 늘 불행해야 했다. 죽은 듯이, 경멸과 멸시를 등에 업고
살아가며 매일 깨달아야 했다. 내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
“아!”
생각을 이어 가던 에즈라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질렀다. 그것마저도 죄인 것마냥
느껴져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하녀장은 대놓고 조소했다.
“왕비님께서 황자와 그의 측근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그럼 ……”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존재를 부정하고 계시면 됩니다.”
에즈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한 자리에 나선다는
것이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몸을 둥글게 만
벌레처럼 숨죽이는 건 내게 쉬운 일이니까.
“만약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왕비님께서 친히 벌을 내리겠다
하셨습니다.”
단번에 에즈라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그녀는 무언가를 참아 내듯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래된
습관. 손톱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박힌
채였다.
“대답하세요.”
“네……:
가녀린 어깨가 공포로 내려앉는다. 기어들어 가는 대답에
하녀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그녀는 차디찬 어조로 공주를
훈계했다.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말입니다.”
그토록 오지 않기를 빌었던 시간은 결국 도래했고, 에즈라는
생전 처음으로 거적때기가 아닌 매끈한 키톤을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탓에 거북함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이 민망한 피불라를 빼어 던지고
침상으로 도망가고만 싶었으나 기세등등한 하녀들은 사방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노려보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탑. 그들은 등불에만 의지한 채 수백 개의
계단을 빙빙 돌아 내려갔다. 녹슨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모두 숨을 터놓았다. 어찌나 공기가 탁했던지 컥컥
기침을 해 대는 이들도 있었다.
눅눅한 공기에서 벗어나 마른바람을 한껏 들이마신 에즈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는, 손끝을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이 길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밤하늘. 그곳에서 쏟아질 듯 가까운
별무리까지. 에즈라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주먹을 쥐었다.
이건 진정 꿈도, 환상도 아닌 건가.
탁 트인 사방에 적응하지 못하고 발밑을 내려다보자 밟고 서
있는 이름 모를 풀비린내가 코끝에 머물렀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는 스산한 소리를 내며 이파리를 흔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녀들은 멀거니 서 있는 에즈라의 등을
신경질적으로 밀어 댔다. 그들의 재촉에 에즈라는 거의
끌려가듯 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윽고 아연한 얼굴로 궁 안에
들어선 에즈라는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찔러 오는 강렬한 빛. 모든 게 새하얗게만 보이는 탓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가를 마구 비볐다. 천장이 지나치게 높고,
딛고 있는 이름 모를 돌은 빛을 반사할 정도로 맨들맨들했다.
감히 이것을 밟아도 되려나. 그런 의문이 들 만큼 모든 게
웅장하고 고귀해 보였다. 둥글게 이어진 금빛 계단을 오르며
에즈라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더러운 것이 내게서
떨어져 이곳을 더럽히지 않을까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걸음을 점점 빨라졌고, 이윽고 하녀들은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에즈라는 드러난 황금문을
힐긋거리다가 옆에 선 하녀의 눈초리에 황급히 눈을 돌렸다.
갈 곳 잃은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자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기다란 창을 내밀어 보였다.
“누구지? 허락받지 않은 이는 들일 수 없다.”
“넷째 공주님이십니다.”
“……넷째 공주?”
병사들은 서로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존재
자체도 확실치 않은, 베일에 싸여 있던 공주가 아닌가. 단번에
흥미로운 얼굴을 한 그들은 하녀들 뒤에 선 에즈라를 보기 위해
은근히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왕께서 넷째 공주까지 들이라.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키가 작은 여자는 툭 치면 넘어질듯 가냘파 보였다. 핏줄이
비칠 만큼 새하얀 피부와 바싹 마른 어깨선을 훑어보던 그들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드시지요.”
허참, 그들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짐승처럼 가둬
놓았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하녀라 해도 믿을 법한
몰골에 그들의 관심은 푸시식 식어 버렸다.
교차했던 두 개의 창을 일렬로 고쳐 잡은 병사들은 묵직한
문을 힘주어 열었다. 벌어지는 문틈으로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황홀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오직 귀한 손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라뷔린토스.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그곳은 바닥마저도 황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혼을 사로잡는 찬란함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잠시
그녀는 도리질 쳤다.
보아서는 안 된다. 무언가 반응해서도 안 되었다.
급히 내리깐 시선에는 눈부신 황금 식탁의 다리만이 보였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놀라 멈추었다.
시선이 닿아 오는 느낌. 하녀들은 이름 모를 이가 다가오자
이미 흩어져 뒤로 몸을 물린 상태였다. 졸지에 홀로 선 에즈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티텐의 공주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상냥한 말투와 전해져
오는 온화함에 에즈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