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테노리엘 일가의 비화(祕話)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붉고 검은 핏물로 흥건한 바닥에 처박히자 거대한 대형 마수가 그를 지나쳤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숨을 내쉬던 페드로가 그 광경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대형 마수는 앞길을 막아설 수 없는 놈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놈이 가는 방향은 분명, 휴고가 아르페시스를 데리고 사라진 방향이었다.
‘휴고.’
이미 이 자리를 떠나고 없는 그에게 서두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대형 마수의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으니까. 전장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놈의 목적은 아르페시스 하나였다.
그는 절대 죽어선 안 될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목소리를 낼 힘마저 없었다.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난 걸까? 어느덧 대형 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가득하던 인간과 마수의 시체도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어두웠다. 어지러웠다.
‘죽는구나.’
기어이 의식마저 희미해지던 순간이 찾아오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그에 한층 더 간절해지는 바람이 있었으니.
‘제발.’
휴고가 늦지 않게 아르페시스를 빼내기를. 온갖 상처를 뒤집어쓴 에스메랄다에게 전해지는 부고는 자신의 것이 전부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신에게 빌어 보던 중 애써 기억 속에 묻어 둔 시간이 선명해졌다. 고작 하루뿐이었던 열락의 시간.
“아…….”
초점이 흐릿해진 페드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미련이 남은 탓일까? 루이자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다시 한번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고 싶다. 그리하여 그녀의 곁에서 평생토록 사랑을 속삭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테고, 그의 사랑도 여기서 끝나리라.
“루이…….”
페드로는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던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다. 죽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지금 뒤에 남은 그녀가 그립다.
하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부림치며 죽음의 아가리에 몸을 집어넣는 순간.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나란히 선 그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그려 보자 루이자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있었다.
미련은 남았어도 후회는 남지 않았으니, 언젠가 다시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온다 해도 오늘과 같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자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대륙력 1411년 바 51~1436년 카 57일.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신뢰할 수 있는 형제이며 누구보다 훌륭한 기사로서의 생을 마친 페드로, 여기에 잠들다.」
* * *
「1439년 사 77일
황제 아르페시스가 출정 의사 표명하며 황후 에스메랄다에 의한 국정 운영이 논의되다. 동일 국정 회의에 참석한 황후 에스메랄다의 건의로 세튀스의 영토 침략에 대한 대응 방책이 화두에 오르다.
- 서기 총책임자 라 오트 하실라 로벨리우스 『에렘황조록 국정 총편』 中 발췌.」
― 황후에게 뜻을 물어보겠다.
내전이 정리된 이후, 국정 회의를 주도해 온 아르페시스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그건 에렘의 실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황제인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뜻보다 우선하고 있는 사람. 황후 에스메랄다가 국정 회의에 참석한 오늘, 대신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면, 본국의 비호를 원수로 갚은 세튀스를 용서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
싸늘한 말이 끝나자마자 회장이 고요해졌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누구 하나 나서서 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루기스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음에도 누구 하나 시선을 주지 못했다.
“본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재산을 갈취한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 눌러앉아 있는 도적 떼를 용서하자니, 참으로 관대한 처사로군.”
이어진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부드러운 손길로 루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과 대조되어 그 한기가 뼈를 파고들 정도였다.
“차후에 같은 일이 발생한다 해도 우리는 관대함을 논하며 용서를 베풀면 되겠어. 그들이 밟은 영토는 후한 마음으로 넘겨주고 말이야.”
“화, 황후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고…….”
“그게 아니라면.”
낭랑함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에 아르몬 자작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재무부 장관의 부관인 그는 상사의 눈총을 버티지 못하고 에스메랄다의 의견에 반대했다. 덕분에 이제는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 황후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고작해야 배상금을 받아 내자는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해 보게.”
에스메랄다는 매서운 시선으로 좌중을 훑었다.
“아르몬 자작의 의견, 엄벌을 논해도 모자랄 일에 보상이나 받아 내고 말자는 이 안일한 의견에 동조하는 이가 더 있는지 궁금하군.”
평범한 이라면 기가 죽어 눈치를 살피기도 바쁠 터인데. 에스메랄다의 살벌한 기세에도 주눅 들지 않고 의견을 언급하는 이가 있었으니.
“하지만 황후 폐하,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남부의 지원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재정적인 부담이 상당할 겁니다. 이 와중에 세튀스를 침공하면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루그레디안이었다.
외무부의 책임자로서 국정 회의에 참석한 그가 재무부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서 몇몇 이들이 동조했다.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꺼냈던 아르몬 자작은 몸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준 루그레디안이 구원자처럼 보였다.
“아, 이런.”
루그레디안의 말이 끝나자 에스메랄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혹시 자작의 반대도 같은 이유 때문인가?”
“예, 예, 황후 폐하. 현재 배정된 예산으로는 또 한 번의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당장 유용 가능한 돈이 없다는 소리를 제 입으로 하고 있는 아르몬 자작으로서는 죽을 맛이리라. 이 모든 것이 보좌관인 그에게 말을 떠넘기고 침묵 중인 재무부 장관 때문이었다.
“한 해, 아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어떻게든, 내년에는 물자 운용이 가능하도록 예산을…….”
“그만, 그만.”
서둘러 고개를 내저은 에스메랄다가 자작의 말을 잘랐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영토를 수복하는 데 황실의 예산이 필요하지는 않네.”
“……예?”
돈을 쓰지 않고서 전쟁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아르몬 자작의 얼빠진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혹시나 저들에게 돈을 내라 할까 싶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걱정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에스메랄다가 귀족들의 주머니를 우아하게 털어 오는 건 몇 년이나 더 지난 후의 일이니까.
“반군을 자처했던 이들에게 물자가 남아 있네. 황실에서 정당한 남부 지원을 약속한 지금 더 이상 무력 시위를 할 이유가 없으니, 기회만 준다면 올라가겠다는 뜻을 밝힌 참이고.”
그제야 아르몬 자작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에게 총대를 맡기고 숨어 있던 재무부 장관의 안색도 밝아졌다. 예산에 구멍이 나지 않는다면 차후 그가 문책받을 일은 없으니까.
“내가 미리 언질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에스메랄다가 한결 누그러진 눈으로 자작을 응시했다.
“그, 그런 희소식이! 하면 바로 진군을…….”
“이번 기회에 과거 본국의 정세를 어지럽힌 이들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시는 것도…….”
“분명한 공로를 세운다면, 선황 시절 멸문한 그들의 가문도 복권…….”
그 틈을 타 눈치를 보고 있던 이들이 입을 열었다. 에스메랄다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케니스를 보내 세튀스의 군을 몰아내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그럼 이제 본국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세튀스에게 어떤 벌을 줄지 논의하는 것이 좋겠군.”
한마디를 더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으려던 이들이 덜컥거렸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서둘러 근처에 있는 이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금 전까지 케니스의 군대를 올려 보내 세튀스 군을 징벌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참이다. 한데 방금 에스메랄다가 한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빠르게 오간 시선은 많았지만 정작 도출된 답은 없었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눈만 굴리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어찌 말들이 없는가. 마땅한 대안이 생각나지 않나?”
그에 힐난하는 어조로 말을 꺼낸 에스메랄다가 혀를 찼다.
“하면 우선 내가 생각한 것부터 확인하지. 보고 더 나은 방법이 없을 것 같다면 그대로 진행하면 될 테니.”
“예, 예, 그러시지요.”
에스메랄다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가 자진하여 나섰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머리를 굴리면 되겠다고. 그리 판단한 이들이 서둘러 동조했다.
“들여오게.”
에스메랄다의 한마디에 회장의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근위 기사들이 몸을 돌렸다.
이윽고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나타난 것을 본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다 의자에 걸려 넘어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간 이들도 있었다. 일부는 당황한 와중에도 침착함을 가장하며 자리를 지켰고, 열린 문을 지나 들어온 마수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이들은 흥미를 가지고서 관찰을 시작했다.
“대단하군…….”
그중 루그레디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완전히 곯아떨어진 마수를 살폈다.
그래, U자 형태로 구성된 회장의 테이블 사이로 떡하니 들어온 건 잠들어 있는 소형 마수였다. 마수가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크렁, 컹, 하고 요란스러운 울림이 일어났다.
마수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일으킨 루기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루기스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사이 당장의 공포에 짓눌려 있던 귀족들이 이성을 되찾았다.
“최근 친정의 마법사가 새로운 마도구를 하나 개발했다네.”
이후 에스메랄다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보다시피 정신계 마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던 마수를 인위적으로 잠재우는 데 성공한 것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덕분인지 자리를 이탈했던 귀족들이 주춤거리며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테노리엘 후작이 공개한 마도구 수식으로 해당 마도구의 양산은 끝난 상태네.”
숨을 고른 에스메랄다가 아주 자애로운 낯으로 말을 이었다.
“이놈들을 잡아다 국경 너머로 보내는 건 어떻겠나?”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고요한 침묵의 시작이었다. 미리 알고 있던 이들과 아닌 이들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갈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건 아르페시스였다. 곁자리에 앉은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표정만 보자면 에스메랄다가 저에게 사랑을 속삭이기라도 한 줄 알 것이다.
“물론, 자국의 영토를 가로질러야 하는 만큼 사전에 안전성은 검증해 봐야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루그레디안과 머리를 맞대고 짜 온 연극에 집중한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외부적인 요인에도 깨지 않는 것인지 확인해야겠는데…….”
말꼬리를 흐린 그녀가 마수가 있는 방향으로 손짓했다. 황실의 협조 요구에 차출되어 직접 마수를 끌고 들어왔던 테노리엘의 기사가 그녀에게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하명하십시오, 황후 폐하.”
이어진 건 지나치게 덤덤한 음성이었다.
“찔러 보게.”
히익, 하고 누군가 질겁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사이 지체 없이 창을 치켜 든 기사가 마수의 복부를 단번에 찔렀다. 검은 핏물이 기사의 안면을 적시고 회장의 바닥까지 튀었다. 꿈틀, 하고 거대한 몸체가 들썩거렸지만 크렁, 컹, 하고 이어지는 숨소리는 여전했다.
“고통이 어느 수준까지 마비되는지도 알아야겠으니 내장을 헤집어 보도록.”
“예, 황후 폐하.”
마수를 창으로 찔렀던 기사가 답했다. 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수의 몸속을 헤집기도 한참.
“이왕 한 김에 안구도 찔러 보게. 깊으면 깊을수록 좋네. 뇌를 자극해도 마법이 유지되는지 알아 두어야지.”
“모든 것은 황후 폐하의 뜻대로.”
창을 거둔 기사의 행동에 따라 검은 핏물이 테이블까지 튀었다.
“으억!”
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뒤집어쓴 이들이 반. 마수의 피가 무슨 독극물이라도 되는 양 옆으로 몸을 날린 이들이 반이었다.
겁에 질린 귀족들의 행태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비릿하게 웃었을 무렵.
“크허어엉!”
별안간 괴성을 내지른 마수가 깨어났다. 기사가 내지른 창이 뇌를 헤집은 탓에 수면 마법이 깨진 것이다.
미리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은 고요했다. 물론 모르고 있던 이들은 또다시 혼비백산하며 날뛰었지만. 그마저도 파란 안개가 피어남과 동시에 마수의 몸뚱이가 조각나자 조용해졌다.
반짝거리던 회장의 대리석 바닥에 검은 피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비위가 약한 두엇이 속을 게워 내며 토사물까지 쌓였다.
“후작이 보낸 보고서에는 마도구가 직접적으로 뇌에 마나를 주입하며 잠을 유도한다고 적혀 있었더군. 그래서인지 해당 부위에 손상이 가면 마법이 깨어지는 모양이야.”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뇌를 헤집지만 않으면 몇 날 며칠이고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스메랄다는 그 말을 끝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이 정도면 본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지?”
“……예?”
얼빠진 반문을 건넨 이는 처음과 달라진 것 없이 덤덤한 에스메랄다를 볼 수 있었다.
“이놈들을 세튀스의 영토로 넘겨 보내자고 했잖은가.”
그 흔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세튀스는 오래도록 이어진 본국의 희생과 은혜를 잊은 듯해.”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본국의 영토를 침략할 생각을 하겠느냐고.
“하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 주는 것도 좋겠지.”
저들이 에렘 덕분에 무엇으로부터 안전한지. 누구의 희생으로 평화를 누리는지.
“제대로 알고, 또한 배워야 앞으로는 이딴 헛짓거리를 하지 않을 터.”
마치 누군가를 훈계하는 것처럼 엄한 어조였다.
“어떤가? 내가 생각해 낸 방안이.”
에스메랄다가 다시 한번 답을 재촉하자 미리 이 사실에 대해 언질 받았던 이들이 동조했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그 틈을 타 에스메랄다의 말이 이어졌다.
“황제 폐하, 대신들도 동의한 듯하고 안전성도 검증되었으니 마수를 방생하는 것으로 세튀스의 만행을 벌했으면 합니다.”
그에 회의가 시작되고 줄곧 에스메랄다만 바라보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해.”
“이번 마수 이송에 남부군을 차출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놈들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참여하는 것이 더 안전하겠죠.”
“그 또한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지. 남부로 전보를 보내 이송 일자를 조율하도록.”
“예, 총사령관님.”
회의장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남부군 행정관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국경 지대까지 이송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이어진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답할 때도 행정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포획에 걸리는 시간은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바, 교대를 거쳐 밤낮없이 빠르게 이동하면 20일 내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면 사 100일이 되는 날 방생하게. 케니스 측에게 그전까지 영토를 수복하라 이르고.”
“모든 것은 황후 폐하의 뜻대로.”
덤덤하게 대답한 이가 있는가 하면, 벌벌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놀린 이들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상태를 살피는 대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내년도 예산에 대해서 논의하고 가지.”
아르몬 자작과 재무부 장관의 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걸세. 다음번에도 반군을 자처한 이들이 황실의 뜻과 함께해 주리라는 보장은 없네. 다시는 생겨선 안 될 무장 세력이기도 하고. 이게 다 이리저리 새는 돈이 많기 때문일 터. 정작 필요할 때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전면 개편을 진행할 생각 하고 있으니 재무부 관료들은 회의가 파하는 대로 5년간의 예산 자료를 챙겨 내 집무실로 오게. 자료를 준비하는 데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터, 점심 식사가 끝난 후부터 시작하겠네.”
무척이나 덤덤한 어조로 이어진 야근 독촉에 재무부에 속해 있는 귀족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럼 다음으로는…….”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거렸다.
“화, 황후 폐하.”
그때,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이가 있었으니. 조금 전 마수의 피를 피해 몸을 날렸던 그 귀족이었다. 동시에 바닥에 토사물을 뱉어 낸 인물이기도 하고.
“어찌 그러나?”
그를 돌아본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사, 사체를, 마수의 사체를 치우고 회의를 이어 가는 것이 어떠실…….”
“시간 낭비네. 사용인들을 불러다 치우고, 닦고, 그사이 회의는 산만해지겠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잘라 낸 에스메랄다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뭐 대단한 것이라고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여 치워야 하지? 설마, 저놈들이 무서운가? 조각나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체인데?”
먼저 말을 꺼냈던 귀족이 창백한 안색으로 도리질을 쳤다.
“하면 신경 쓸 것 없겠군. 계속하지.”
그렇게 검은 핏물과 징그러운 내장이 흐트러진 곳에서 회의가 속행되었다.
1439년 사 77일, 이후 장장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에렘을 통치한 황후 에스메랄다가 직접적으로 국정에 개입한 날이었다. 혹자는 그날을 두고 귀족들이 제시한 그 어떤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폭정의 시작이었다고 평했다.
* * *
회장을 빠져나온 직후 줄곧 꼿꼿하던 에스메랄다의 자세가 무너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안색은 피로로 물들어 있었다.
“집무실로 가겠나?”
옆에서 들린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에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당장 그녀에게 피로를 선물한 원흉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밤새도록 그녀에게 달라붙어 괴롭힌 주제에. 왜 정작 본인은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의에서 언급한 대로 시급한 예산 문제부터 손을 볼 생각이었다.
현 재무부 장관은 선황 시절부터 자리를 역임한 자로, 내전 당시 페라노스의 편을 드는 대신 황도를 떠나 있기를 택했다. 딱히 페라노스를 편든 것도 아니고, 그에게 패륜에 대한 정확한 조사 과정을 공개하라는 상소까지 올린 이라서 내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힌 상태였다.
기존의 사람을 너무 갈아엎으면 반발이 클 테니까. 이미 군사 쪽이 모조리 뒤엎어진 참이라 권한이 큰 재무부의 자리를 그대로 두는 것으로 기득권과 나름의 타협을 진행한 것이다. 그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지라 이번 기회에 길을 좀 들여야겠지만.
에스메랄다는 이후 해야 할 일을 곱씹다 말고 아르페시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아직도 회장 밖의 복도에 있었으니까. 평소라면 이미 인외의 힘으로 집무실에 데려다주었을 터.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의 그는 초조한 안색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왜?”
눈썹을 들썩이며 묻자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물며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손은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지분거리는 중이었다.
“그만 좀…….”
인상을 찌푸린 에스메랄다가 그를 밀어냈다.
혼인을 한 이후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인 상태였다. 침실에서 날이 샐 때까지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건 예삿일이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침실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되겠나?”
에스메랄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엔 미련이 가득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지난밤의 후유증 때문에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싫어. 힘들다고.”
꽤나 강경하게 그를 밀어내자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절부절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아르페시스가 돌연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럼 집무실에서라도.”
“……뭐?”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감각에 움찔거리기도 잠시. 에스메랄다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아르페시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거의 동시에 푸른 마나가 피어났고, 에스메랄다는 황후 궁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인외의 힘이란 여러모로 편리했다. 지금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황후 궁으로 달려오고 있을 루기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굳이 마차를 타고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 무척이나 달가운 일이었다. 이동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이미 초야 이후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덕분에 루기스는 아르페시스만 보았다 하면 짜증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고.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조금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집무실에 남아 있던 보좌관들은 아르페시스를 발견하자마자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다들, 나가 있도록.”
그 직후 아르페시스에 의해서 모조리 쫓겨났지만. 에스메랄다는 순간 얼이 빠져서 자신의 보좌관들이 모두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제발, 한 번만. 당장 그대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 회장에서부터 그 생각만 했다. 제발, 응?”
그리고 이어진 애원에 표정이 구겨졌다. 어쩐지 회장에서 계속 다리를 꼬고 있더라니.
‘회의를 하는 동안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대체 회의 중에 불이 붙을 일이 어디에 있었다고?
미리 얘기한 대로 잘 처신하기에 별다른 기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아르페시스는 회장에서부터 발기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동안, 허리를 타고 올라온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축축한 혀로 에스메랄다의 귓불을 빨아 올렸다.
“하, 에디.”
살을 섞을 때처럼 뜨거운 숨결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 오늘 왜 이래?”
아르페시스의 보수적인 성향은 여전했다. 그는 침실 밖에서 정사를 가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전부 에스메랄다가 먼저 달려들었을 때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어제.”
거친 숨을 몰아쉰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드레스 단추를 풀어 내리며 속삭였다. 순식간에 헐거워진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가 본격적으로 제 하체를 에스메랄다에게 비비기 시작했다.
“어제 그거, 다시 보고 싶다. 더는 못 참겠어. 한 번만, 응?”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속된 자극에 참지 못하고 실례를 했던 순간을 떠올린 탓이었다. 덕분에 지난 밤 황후 궁의 침실은 정말이지 난장판이었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피로에 골골거리는 것 역시 그 때문이고.
“시, 싫어!”
여기서 또 그런 식으로 버거운 관계를 가지면 오늘 하루가 이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전력을 다해 아르페시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자 했다. 정작 완전히 불이 붙어 버린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기에 장렬히 실패했지만.
“응……!”
옷 속으로 파고든 아르페시스의 손이 뽈록 솟아오른 유두를 건드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굴리던 그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여기부터 빨까?”
아르페시스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흐릿했다. 그에 경각심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읍!”
본능적으로 저에게 불리한 말이 나오리라는 걸 직감한 걸까?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여유라곤 한 톨도 없는 사람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입맞춤이었다.
에스메랄다가 받아 삼키지 못한 타액이 맞물린 입술 옆으로 흘러내렸다. 양손으로 그녀의 유방을 받쳐 든 채 주물럭거리는 손길에 탐욕이 가득했다.
“응, 으응… 흣!”
어느덧 그녀를 번쩍 들어 집무실 책상 위로 앉힌 아르페시스가 제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에스메랄다의 턱선을 타고 흐른 타액을 하나하나 핥아 가며 아래로 내려간 입술은 이미 탐스러운 유방을 한입에 집어삼킨 상태였다. 익숙한 쾌락이 전신으로 퍼지자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페시스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그는 망설임 없이 속옷을 옆으로 젖혔다.
“벌써, 젖었어.”
“그건……!”
집무실로 오자마자 가슴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이 만져 댄 아르페시스 때문이었다. 잦은 정사에 적응한 몸은 사소한 자극에도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정도로 길들었으니까.
“당장, 그만, 흣, 그만해! 으읏, 할 일이 많단 말이야!”
“그대도 나를 원한다고 했잖아.”
분명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빈도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었다. 하루 온종일 짐승처럼 붙어먹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뭐라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입이 막혀 버린 에스메랄다가 바르작거렸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맞추며 막아섰다. 성급하게 그녀를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내부를 넓히기 시작했다.
“음, 읍! 응!”
퍽, 퍽, 아르페시스의 가슴을 때려 보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숨과 타액을 훔쳐 갔다. 이미 머릿속에 살색이 그득해서는 다른 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드레스를 끌어 내린 아르페시스가 비어 있는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었다.
“응!”
한쪽 돌기를 꼬집은 채 당기는 손길에 몸이 저절로 들썩거렸다.
‘이 짐승 같으니라고!’
예민해진 유두를 꾹, 꼬집은 아르페시스가 제 선단을 에스메랄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달아, 그대가 너무 달아.”
그녀의 입술을 문 채로 웅얼웅얼.
아르페시스는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미 벌떡 일어나 배꼽까지 고개를 치켜든 그의 성기가 쉴 틈 없이 꿈틀거렸다. 허리를 치대는 와중에도 질을 파고든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찌걱찌걱. 민망하고 야한 소리가 엄숙한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으흥! 흣! 읍!”
줄곧 입이 막혀 있는 탓에 버거운 숨을 겨우겨우 채우기도 한참. 아르페시스의 손에 절정을 맞이한 에스메랄다의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파정을 한 아르페시스가 제 정액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너 또……!”
절정의 여운을 떨치기도 전에 사색이 된 에스메랄다가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배쯤 되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하려는 짓은 에스메랄다가 정사를 피하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 흔적에 집착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과거에는 그저 물고 빤 흔적을 남기고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정도였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 정액을 에스메랄다의 몸에 치덕치덕 바르기까지 했다. 그녀에게서 제 냄새가 나는 게 좋다나 뭐라나.
‘냄새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냐고!”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손에 흥건한 정액을 덜어다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감촉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직후 어떤 예고도 없이 흠뻑 젖은 질 속으로 아르페시스가 들어섰다.
“으아……!”
몸을 부르르 떨며 탄성을 토해 낸 아르페시스는 그대로 에스메랄다를 몰아붙였다.
퍽, 퍽, 퍽.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고 서로의 성기만 노출한 채 이어진 정사는 거칠었다. 하얗고 얇은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나풀거렸다. 에스메랄다가 책상 위에서 밀려날 때마다 고집스럽게 다시 끌어 온 아르페시스가 연결된 서로의 밀부를 홀린 듯 응시했다. 저를 빼낼 때면 아쉬운 듯 쪼르르 따라 나왔다가, 다시 치받으면 부드럽게 집어삼키는 속살.
“아!”
탄성과 신음,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소리가 집무실을 적셔 나갔다. 에스메랄다가 절정에 이를 때마다 잠시 추삽질을 멈추고 기다려 주던 아르페시스는 없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허리가 휘고, 내벽이 그의 씨물을 쥐어짜듯 오물거릴 때마다 한층 더 격해졌다. 삽입을 하고 나면 거의 만지지 않던 음부의 돌기까지 문질러 대며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 그만! 흐읏, 앙! 제발, 그, 앙! 그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자극은 그녀를 전날 밤의 그 아찔한 감각으로 안내했다.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에스메랄다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참아 내고자 했다.
“갈 것 같아? 보여 줘, 에디, 참지 말고 보여 줘.”
안달이 난 아르페시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속삭이며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유두를 집어삼키고 이를 세웠을 때.
“흐앙!”
이명이 울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올라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움찔, 움찔,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에스메랄다의 음부에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다.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애액과 소변이 뒤섞이자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물며 파정했다.
“하으.”
그는 직후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에스메랄다가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르페시스는 제 아래에 깔린 채 완전히 흐트러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정 직후 잔잔해지는 것 같던 은회색 눈동자가 다시 일렁거렸다. 제 성기를 빼어 낸 그는 자신의 축축한 옷과 집무실 테이블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침실…….”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엉망이 된 에스메랄다의 허벅지 안쪽과 음부를 할짝거리며 속삭였다.
“침실로 가지.”
그대로 덜렁 에스메랄다를 안아 든 아르페시스의 신영이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겨우 깨어 있던 에스메랄다에게는 반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침실로 올 것이지.’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침대에 몸을 누인 순간 그녀의 입술을 덮친 아르페시스 때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 * *
“황후 폐하?”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던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다급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끔뻑끔뻑. 빠르게 움직이며 졸음을 쫓아내려던 눈꺼풀은 금세 다시 무거워졌다.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정신을 차린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대로는 안 돼.’
밤새도록 아르페시스에게 시달리는 날이 반복되자 낮에 눈을 뜨고 있는 게 버거워졌다.
기이한 성벽에 눈이라도 뜬 걸까?
아르페시스는 최근 에스메랄다가 과도한 자극에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의 침대는 매일같이 민망한 분비물에 젖어 버렸다.
과한 절정의 끝에서 기절하듯 잠들어도 잠깐뿐이다. 아르페시스는 잠든 그녀의 몸을 지분거려 깨우고, 다시 달려든다. 그가 욕심을 채우고 그녀를 놔주면 어느새 동이 트는 나날이었다. 해가 져 있는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떠 있을 때 꾸벅꾸벅 졸게 되니,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대책이 시급했다.
잠이 부족해 따끔거리는 눈을 부릅뜬 채 고심하던 에스메랄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직후 그녀는 가물거리는 글자를 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그리트 남작가를 포함해 선황에 의해 억울하게 멸문했던 이들의 복권을 준비 중이었건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 오전 5시부터 다시 시작하지. 그 전에 라그나를 만나야겠으니 시간에 맞춰 입궁하라 이르게.”
“예, 황후 폐하.”
보좌진을 대표해 답한 첸을 뒤로한 에스메랄다가 집무실을 벗어나 침실로 향했다. 곧장 뒤를 따라온 루기스가 그녀의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혹여 아르페시스가 온다면 쫓아내 주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기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수와 함께 침실에 도착한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녀가 침실로 향했다는 소식이 아르페시스에게 전해졌다. 혹여나 어디가 아픈가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곧장 에스메랄다의 침실로 이동한 순간. 루기스가 이를 드러내고서 달려들었다.
“뭐, 뭐 하는 짓인가!”
화들짝 놀라 물러난 아르페시스가 루기스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루기스 역시 아르페시스의 팔뚝을 물었다. 붉은 피가 뚝, 뚝, 아래로 떨어졌다.
뜬금없는 유혈 사태에 놀란 아르페시스가 굳어 버렸다. 그사이 루기스가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 에스메랄다가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어 있는 아르페시스를 한 번, 바닥에 떨어진 핏물을 한 번.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아르페시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쫓아내.”
웅얼거리는 한마디를 꺼낸 에스메랄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것을 기점으로 루기스가 한층 더 사납게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사지를 물어뜯을 듯 흉폭한 기세에 아르페시스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폐, 폐하!”
침실 밖에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녀들이 문밖으로 쫓겨난 아르페시스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정작 팔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복도로 나온 아르페시스는 허망하게 전방을 응시했다.
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으르렁. 문가를 떡하니 막고 선 루기스가 정말 아르페시스를 죽일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게 에스메랄다의 뜻임을 알아버린 아르페시스는 루기스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카의 달이 밝아 출정을 하게 된 그 날까지 단 한 번도.
* * *
「1440년 바 30일
군사부 수장인 쿠베트 후작의 장녀 사 아그라 쿠베트 루이자와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의 혼례식이 열리다. 동일 황제 아르페시스와 황후 에스메랄다, 교황 제르민이 직접 참석하였으며 쿠베트 후작이 황후 에스메랄다와 독대를 하다.
- 차석 서기관 라 오트 모벨타 아그렘 『에렘황조록 외유편』 中 발췌」
아레스는 오늘 식장에서 자신의 손을 잡았던 루이자를 떠올렸다. 과거, 페드로를 그리며 울던 얼굴 위로 흐리고 잔잔하던 미소가 덧씌워졌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
자신의 복잡한 심정이 겉으로 드러날까 싶어 꾸역꾸역 한숨을 삼킨 아레스가 문을 두드렸다.
“부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때 형제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은 오늘 그와 혼례를 올렸다. 식과 축하연이 모두 끝나고 초야를 앞둔 지금, 아레스는 자신의 감정이 루이자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네, 들어오세요.”
곧 루이자의 허락이 떨어졌고, 아레스는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은 내부의 사물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한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아레스가 문을 닫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조명을 모두 꺼 버리는 것이었다.
“아…….”
그는 루이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식이 끝난 이후 줄곧 고민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것이 최선일지. 그 길고 긴 고민 끝에서 아레스가 고른 건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루이자의 뺨을 쓸어 본 아레스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입술을 겹치고 여린 살을 입에 머금은 채 빨아 올리는 찰나의 순간 결심이 흔들렸다.
하지만 유혹은 한순간이었고, 아레스는 거친 충동을 억누른 채 루이자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축축한 살덩이가 맞닿았다.
“음, 응…….”
희미하게 들려오는 콧소리가 뭐라고 심장이 이렇게나 뛰어 대는지. 아레스는 자신의 것과 뒤섞인 루이자의 타액을 꿀꺽 삼켰다. 그 직후 그의 손이 루이자의 몸을 훑었다. 부드러운 실크 아래로 느껴지는 여체를 만끽하기도 잠시. 얇은 슬립을 밀어 올리고 봉긋한 가슴을 움켜쥐자 루이자의 몸이 떨렸다.
아레스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는 것처럼 가볍게 뺨과 눈가에 입술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은 꽤나 거칠었다. 본래의 습관이 나오기 전에 이를 악문 아레스가 루이자의 위로 올라탔다.
‘녀석이라면 분명.’
그는 단번에 루이자를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아, 저기, 잠……!”
미약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루이자의 음부에 입을 맞춘 아레스가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어요. 핥아 줄 테니.”
“으응……!”
“전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부인이 힘들 겁니다.”
그의 타액이 메말라 있던 루이자의 비부를 적셔 나갔다. 쭙, 쭈웁, 찌걱. 음탕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어두운 침실을 채워 나갔다.
“흥, 흐응! 하… 읏!”
“여기가 좋습니까?”
“그, 그만, 잠깐만요!”
떨리고 있는 루이자의 손이 아레스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힘을 주어 버틴 아레스가 길고 딱딱한 손가락을 깊고 좁은 루이자의 질 속으로 집어넣었다. 보드랍고 뜨거운 속살을 확인한 아레스의 목에서 들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넣고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루이자는 이제 겨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레스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녀를 넓혀 갔다. 어느덧 그의 타액은 보다 미끈거리는 액체와 뒤섞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단내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를 세운 아레스는 루이자의 허벅다리 안쪽을 깨물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보다 짧은 간격으로 이어지자 루이자의 교성이 높아졌다. 탐스러운 몸이 굳는가 싶더니 아레스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내벽이 움찔거렸다.
“아읏… 으…….”
움찔, 움찔.
아레스는 루이자를 눈에 담으면서도 슬그머니 손을 놀렸다. 검지와 중지로 내벽을 문지르는 건 물론, 엄지로 예민하기 그지없는 핵을 꾹꾹 누르자 대번에 반응이 왔다. 직전의 절정이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시작된 자극에 루이자가 울먹거렸다.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레스는 이를 악물며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루이자가 스스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으니까.
“빠, 빨리, 그냥…….”
그 순간 이성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아레스는 가운을 벗어젖혔다.
과거의 그라면 이대로 한 번에 자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아레스의 정사는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그는 격렬한 정사를 즐겨 왔으니까. 침대 위에서의 그는 상대방이 자신 외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관계 중에 오가는 대화는 오로지 몸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덕분에 파정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는 건 당연했고, 가끔은 파트너가 실례를 하거나 까무룩 기절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평소의 아레스는 분명 인내심이 강하고 배려심이 깊으며 다정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의 그는 절대로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정사 중에는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보여 주고 쾌락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습관대로 루이자의 질구에 귀두를 맞춘 아레스의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하지만 선단이 루이자의 좁은 입구를 살짝 비집고 들어간 순간.
“윽.”
이를 악문 아레스가 스스로를 억눌렀다. 평상시의 모습과 침대 위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은 페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길게 숨을 고른 아레스는 루이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굴리자 움찔거리는 몸은 아름다웠다. 살결을 쓸어 올리며 움직인 손은 어느덧 루이자의 입 속을 파고들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빨아 봐요.”
그에 루이자는 어설픈 움직임으로나마 쪽쪽 소리를 내며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반면 꼿꼿하게 선 유두를 입에 머금은 아레스가 천천히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당장이라도 허리를 치대고 싶은 충동과 침실에 들어오기 전 다잡았던 다짐이 충돌했다. 차라리 그의 방식대로 루이자를 품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제 존재를 과시했다. 그렇게 시간이 거듭되면 루이자에게 남은 페드로의 그림자는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자, 잠깐… 조, 조금 아파요……!”
울먹이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리했을 텐데. 움직임을 멈춘 아레스가 이를 악물고서 루이자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었다. 후욱, 후욱, 숨을 고르자 직전의 충동이 점차 고개를 조아렸다.
여린 목덜미의 살과 풍만한 유방을 이리저리 핥아 대기를 한참. 루이자의 몸이 흐물흐물 풀어지고 아레스는 비소로 그녀의 안을 자신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동시에 아주 느릿한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손을 아래로 내린 아레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음부의 돌기를 꾹, 눌렀다
“으앗!”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른 몸은 아레스의 체중에 짓눌려 있었다. 그대로 루이자에게 입을 맞추며 혀를 얽자 옅은 콧소리가 이어졌다.
부드러운 입맞춤. 야릇하게 돌기를 문질러 주는 손길. 조심스럽게 내벽을 가르고 들어가는 와중에도 루이자가 버거워할 때마다 잠시 멈추는 행동까지.
모두 아레스가 아니라 페드로가 침대에서 할 법한 행동이었다. 평소의 페드로가 충동적이고 직설적이며 이기적이었던 것과 달리, 침대 위에서는 자신보다 상대방의 기분과 쾌락을 우선시하는 편이었으니까. 철없던 시절, 서로의 경험담을 두고 시시덕거린 적이 많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렇듯 페드로를 흉내 낼 수 있었다.
―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해 볼게요.
식이 시작되기 전 덤덤한 미소를 그리며 말하던 루이자를 봐 버렸으니까. 그걸 보았기에 아레스는 끝내 자신이 아닌 루이자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사내 경험이 많지 않은 듯, 그녀는 적응을 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레스는 루이자의 신음에서 고통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크게 허리를 흔들었다. 페드로라면 분명, 이렇게 했을 테니까.
“어디가 좋은지, 후우, 말해 봐요.”
“아, 응! 그런, 그런 거 묻지… 아! 흐앙!”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허리를 물리고 선단이 걸릴 때마다 루이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때부터 아레스는 루이자의 예민한 부분을 집요하게 긁어 댔다.
“학, 핫! 그, 그만, 제발, 으앙!”
아무리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신경 쓴다지만, 페드로 역시 사내였다. 이런 상황에서 멈추지는 않았으리라. 정사를 공유한 적은 없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페드로는 그와 가장 가까웠으며 또한 각별했던 형제니까.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올린 아레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루이자의 안에 파고든 상태 그대로, 가볍기 그지없는 몸을 번쩍 들어서 엎드리게 만들었다.
“아, 아레스?”
루이자가 흐트러진 음성으로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높게 치켜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아레스가 그대로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앙! 앙!”
한층 축축해진 신음에 등줄기가 저릿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눈길을 주고야 만 것인지.
‘녀석을 잊었다는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루이자는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정직했다. 그게 아레스의 눈길을 훔치고야 말았다. 혼례를 하게 된 지금 어쩌면, 마음까지도. 가식도, 거짓도 없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루이자에게서 빛이 났다. 필시 페드로의 눈에도 그리 보였겠지.
머릿속이 엉망이었음에도 몸은 정직했다. 아주 잠시, 아레스는 본래의 결심을 잊고 원하는 만큼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퍽.
그가 움직일 때마다 힘없이 흔들린 여체가 침대 위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아레스는 멈추는 대신 루이자의 골반을 꾹 움켜쥔 채 쾌감에 집중했다.
그러다 루이자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은 아레스가 허리 짓을 멈추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루이자를 온전히 제 몸으로 덮었다. 히끅, 히끅. 희미한 울음소리에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인상을 찌푸린 채 루이자의 뺨과 목에 자잘한 입맞춤을 건네기도 잠시. 아레스는 다시 루이자가 좋아할 법한 곳을 부드럽게 찌르며 속삭였다.
“루이.”
흠칫, 몸을 떤 루이자가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레스가 한발 빨랐다. 그는 루이자의 눈가를 손으로 덮은 후 평소와 다른,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이.”
“아흣! 흥!”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루이자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미 한창인 정사로 인해 축축하던 음부가 보다 더 흥건해졌다. 시트 위로 뚝뚝 떨어지는 애액 때문에 속이 쓰렸다. 아레스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옆으로 밀어 둔 채 말했다.
“눈 감아.”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평소의 그와 다른 목소리. 페드로를 닮은 그 음성 때문이었을까? 이후 루이자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아닌 형제를 그리고 있겠지.
보다 힘주어 루이자를 품에 안은 아레스가 들끓는 신음 소리를 내며 파정했다.
아레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는 루이자의 곁에 조심스럽게 몸을 누였다. 서로가 거칠어진 호흡을 고른 후에도 침실은 고요했다. 혹시나 그녀가 할 말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기다리기도 잠시. 침묵이 계속되자 결국 아레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흠칫, 하고 떨리는 등을 훑으며 말을 이어 가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목소리에 힘을 풀면 녀석과 비슷해지더군요. 녀석이 목소리에 힘을 주고 제 흉내를 낼 때 알게 된 겁니다. 쌍둥이 녀석들이 전혀 구분을 못 했죠.”
잔뜩 흐트러진 루이자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괜한 짓이었다면 미안합니다.”
그저, 그녀가 초야를 조금이라도 덜 힘겹게 넘겼으면 했다. 자신의 형제를 잊지 못하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기도 했고. 어쩌면, 그녀가 페드로를 잊지 않고 간직해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많았다. 사내로서는 루이자가 페드로를 잊기를 바랐지만, 형제로서는 그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죽은 사람을 영원히 끌어안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도. 루이자가 자신의 형제를 잊지 말았으면 했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짓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페드로의 빈자리를 잠시 잠깐 메꾸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미련과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페드로를 사랑하고 있는 루이자에게는 이 선택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초야를 치르는 건 힘든 일이지 않나. 페드로와 초야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 있으면 그나마 괜찮겠지.
“……기뻤어요.”
역시나.
“그 사람이 돌아온 것 같아서…….”
한참이 지난 후 되돌아온 루이자의 대답은 아레스에게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런 마음으로 당신이랑 혼례를 올리다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자신의 형제를 잊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녀는 참, 사랑스러웠다. 아레스는 울고 있는 루이자를 제 품에 안아 주었다.
“제 형제를 잊는 대신 품어 주어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마음 쓰지 마세요. 난 녀석의 형이기도 합니다.”
아마 루이자는 죽음으로 떠나 버린 페드로를 평생 품고 갈 것이다. 그리고 아레스 본인은 자신의 형제를 잊지 못하는 루이자를 평생 품고 가겠지.
‘이거면 됐다.’
한발 늦은 이에게 주어지는 결말로 충분했다.
아레스는 어둠 속에 숨어 쓰게 웃었다.
문득 10년도 더 지난 과거가 떠오른다. 훗날 같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누가 이길지 내기해 보자고. 치기 어린 페드로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못 들은 체했던 날의 기억이 오늘따라 유독 생생했다.
‘녀석이 이길 것 같더라니.’
과거의 아레스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무시로 일관하며 내기에 응하지 않았다. 신중한 자신과 저돌적인 페드로는 너무나도 달랐고, 아레스는 그날부터 직감했다. 자신이 멀거니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페드로는 이미 치고 나가 아리따운 여인을 차지하고야 말 것이라고.
다시 되새겨 보니 페드로의 내기에 응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그날, 그 과거의 날에 예상한 대로 오늘이 도래했으니까.
아레스는 그대로 초야를 마무리 짓고 잠을 청할 생각이었건만, 루이자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울음을 한결 털어 낸 루이자가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요.”
아레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사람은… 테노리엘 페드로는 죽었어요.”
“…….”
“그리고 난 페드로가 아니라 아레스와 혼인했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 나갔다.
그라고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자에게 저를 제대로 새기고 떠난 페드로의 흔적을 자신의 것으로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은 존재했다. 그는 형제인 동시에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루이자에게 상처가 될까 봐, 언젠가 페드로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인데. 그런 그를 저 작고 어린 여인이 충동질한다.
“……후회할 텐데요.”
마지막 경고처럼 나지막이 속삭이자 루이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왜 이렇게 많이 닮아서는…….”
“예?”
루이자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아레스가 반문했다.
“후회를 하든 말든, 그건 내 몫이에요!”
그에 루이자가 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나신.
꿀꺽 침을 삼킨 아레스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자극적이면서도 곳곳에 배려가 남아 있던 직전의 정사와 달랐다. 아레스는 말 그대로, 쾌락에 잠식된 루이자가 실신할 때까지 그녀를 몰아쳤다. 그녀에게 새로이 남는 것이 자신이기를 바라면서.
* * *
라의 달이 되어 황성으로 돌아온 첫날, 아르페시스는 양옆을 돌아보았다. 마나 구속구가 채워진 그의 손이 사슬을 통해 침대 양쪽에 결박되어 있었다.
두 계절 만에 만난 에스메랄다의 침실에 슬쩍 발을 들인 지 십여 분. 출정 전까지만 해도 그를 침실에서 쫓아내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에스메랄다가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게 웬 횡재냐 싶었는데.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순응해 침대로 올라오자마자 이 꼴이 되었다. 반항하고자 했다면 묶일 일은 없었겠지만 그녀가 먼저 유혹한 날이 아니던가. 두 계절 내내 에스메랄다가 고팠던 아르페시스는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저… 에디.”
하지만 의문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녀가 왜 자신을 결박하는지 궁금했던 아르페시스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왜?”
웃는 낯을 하고서 그의 위에 올라타 있던 에스메랄다가 반문했다. 실오라기 한 점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을 훑던 아르페시스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직후 그는 양쪽으로 벌어진 채 구속구에 매여 있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런 쪽에… 흥미가 있었던가?”
이런 식으로 신체가 구속되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에스메랄다가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긍정이 아니었다.
“전혀.”
아르페시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해 봤거든.”
“응?”
갑자기 무슨 생각? 의문을 꺼내기도 전에 에스메랄다가 알아서 답을 주었다.
“네가 인간인지, 짐승인지.”
움찔, 하고 떨리는 몸이 정직했다. 그는 혼례 직후 자신이 지나치게 자주, 그리고 과격하게 정사를 요구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해서 루기스가 그를 물어뜯으며 쫓아냈을 때, 일을 크게 키우는 대신 순순히 물러났던 것이다.
두 계절이나 자제를 하고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랐으니 이제는 용서받은 줄 알았는데. 그 무렵의 일이 다시 언급되자 절로 위축되었다.
“그랬더니 자꾸 짐승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지 뭐야?”
입이 딱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짐승과 혼인을 했다니.”
“…….”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어.”
“…….”
“그렇다고 이 혼인을 무를 수는 없으니 짐승의 버릇이라도 잡아 놔야겠다, 라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는데…….”
“…….”
“네 생각은 어때?”
주섬주섬, 베개 밑에서 무언가를 꺼낸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에디?”
놀란 아르페시스가 말을 더듬었다. 에스메랄다가 제 손에 쥔 무언가를 자신의 성기에 달칵, 하고 채우는 중이었다.
“짐승도 짐승 나름이라지.”
훈련을 해도 성과가 없다면 내칠 수밖에.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스산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르페시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으, 핫… 윽……!”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오래도록 파정을 하지 못한 아르페시스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했다. 비단 얼굴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정액을 쏟아 내며 파정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어디에 쓰는지 모를 기괴한 물건을 꺼낸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아르페시스의 성기에 끼웠다. 동그란 고리 형태를 한 그 물건은 성기의 뿌리 쪽을 꽉 조이고 있었다.
라그나가 만든 마도구였다. 씨물이 통과해야 할 곳을 마나가 막고서 열어 주질 않았다. 마나 구속구를 찬 상태라 그 마도구에 새겨진 마법 진을 파훼할 수가 없었다. 해서 구속구부터 파괴한 후 성기에 끼워진 것을 풀어 보려 했는데.
‘나가.’
아르페시스가 마나 구속구를 깨 버리자마자 에스메랄다는 미련 없이 그를 쫓아냈다. 말 그대로, 그를 벌거벗긴 채 문밖으로 쫓아냈다는 말이었다.
에스메랄다의 명령을 받은 루기스가 작정을 하고 달려드니, 신수를 죽일 수가 없었던 아르페시스는 속수무책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출정을 하기 전 겪었던 상황과 똑같았다.
그렇게 알몸으로 쫓겨나 문 앞에서 빌고 빌고 또 빌어 겨우 다시 얻은 기회였다. 아르페시스는 구속구를 깨고 싶은 충동과 참아야 한다는 인내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으흥, 앗, 아앙, 아, 좋아.”
그런 와중에 그의 위에 올라탄 에스메랄다는 저가 좋은 곳만 찔러 대며 신음하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기괴한 물건을 아르페시스에게 채운 후 곧장 그를 집어삼켰다. 체위는 일관된 기승위. 그 과정에서 에스메랄다는 이미 두어 번 정도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는 본인이 힘들지 않은 선에서 기분 좋은 곳만 가볍게 자극했으니까.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 있어 이건 고문이었다. 파정을 하지 못하자 성기가 따끔거리고 아랫배에서 꽉 뭉친 이물감이 느껴졌다. 훤히 트여 있어야 할 몸속 어딘가가 막혀 가는 것 같았다.
“아, 아응, 아……!”
그의 위에 올라타 감질나게 허리를 흔들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내벽이 순간 수축했다. 동시에 그녀의 허리 짓이 멈춰 버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멋대로 허리를 쳐올린 아르페시스의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헉, 에디, 제발!”
본능적으로 추삽질을 해 보지만 더 괴로워질 뿐이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허락해 주기 전까지 파정할 수가 없었다. 순간 눈앞이 일렁거렸다. 당장이라도 구속구를 깨 버리겠노라 마음을 먹은 순간. 그의 위에서 흔들리던 에스메랄다가 저를 쏙 빼내며 일어났다.
아르페시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발가락이 한없이 곱아들고, 몸의 근육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네 부탁을 왜 들어줘야 해?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건……!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미칠 것 같아. 이제 그만 싸고 싶어. 으읏……!”
에스메랄다의 발이 검붉게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를 꾹, 눌렀다. 안에 가득 차오른 열이 짓뭉개지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가 거칠게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몸을 피하고 싶은 건지, 그 보드라운 발에 자신을 더 문지르고 싶은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앞으로 그만하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
“그만, 그만하겠다. 그만할 테니까!”
애원을 하다 못해 언성까지 높인 아르페시스가 눈물을 흘렸다.
“허억, 제발……!”
“흐응.”
평소보다 더 흐트러진 신음을 흘린 아르페시스가 바르작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발에 눌린 성기가 꺼덕거렸다. 평상시 같았으면 몇 번이고 사정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파정에 이르지 못한 정사는 지독한 쾌락과 섬뜩한 고통의 사이에서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윽… 읏… 하악……!”
어느 순간 아르페시스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비이상적으로 빠르게 뛰며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꽉 틀어막힌 부분이 끊어질 것 같았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끅, 하고 이상한 소리가 났다.
마나 구속구에 금이 간 것과 동시에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오랜 시간 그를 옥죄고 있던 고리 모양의 마도구가 달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올랐다.
“으하, 학… 아…….”
저도 모르는 순간에 파정해 버린 아르페시스가 입을 벌리고서 침을 질질 흘려 댔다. 그의 성기는 아직까지도 정액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간 뱉어 내지 못하고 쌓아 둔 것을 모조리 분출하는 것처럼 길고 긴 파정이었다. 간지럽고 딱딱하고 괴롭고 답답하던 것들이 한 번에 해소되는 감각.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단적인 쾌락이었다.
평소 짧게 스쳐 지나가고서 가라앉던 쾌감이 십여 초간 지속되었다. 분명 파정하기 전까지는 고통이 더 컸는데, 파정을 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움찔움찔,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넋을 놓은 사람처럼 누워 있기도 잠시.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무작정 얼굴을 문질렀다.
“이런 건 너도 싫지?”
흠칫, 몸을 떤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고 하얗게 변했던 머리에 생각이란 것이 들어찼다. 직전의 그 비정상적인 쾌감을 떠올리기 무섭게.
“…….”
뻐끔뻐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만 아르페시스가 제 혀를 깨물었다. 가끔 한 번씩은 이런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저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답을 삼키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걸 말했다간, 침실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경각심이 차오른 탓이었다.
* * *
이제 겨우 라의 달이 시작되었건만 남부의 더위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몸을 씻고 왔는데, 금세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멘은 채 마르지 않은 금발을 쓸어 올리며 땀을 닦았다. 거의 동시에 그보다 한발 앞서 천막에 들어갔던 기사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서로 간에 가벼운 고갯짓을 주고받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직후 오멘은 기사가 나온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군의관과 행정관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낸 오멘은 행정관 앞으로 향했다.
“라 에타 테노리엘 오멘, 중앙군 부대 총지휘관입니다.”
“라 8일, 라 에타 테노리엘 오멘, 기록했습니다. 지명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짧게 답한 오멘이 가지고 온 가죽 주머니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행정관은 그 속에 든 금화를 확인하고 오멘의 이름표를 달았다. 오늘 그를 상대한 여성이 받아 갈 돈이었다. 정사가 끝나면 행정관이 대리 지급할 것이다.
남부군은 여성들에게 지급할 대금에 하한선만 규정해 두었다. 개인적으로 추가적인 대금을 지급하는 것은 막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오멘처럼 하한 금액보다 많은 돈을 지급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대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이번에도…….”
이어진 행정관의 말에 오멘의 손이 움찔거렸다. 잠시 생각을 거친 그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인원을 둘로 해 주시고, 동행은 한 번 이상 제 천막에 방문했던 이로 부탁드립니다. 합실에 동의해 준 이들의 명단이 있을 겁니다. 대금은 선지급을 부탁하죠. 병영으로 돌아가 같은 금액을 추가로 보내겠습니다.”
그간의 경험상 단둘이 있는 것보다 한 명이 더 있는 게 덜 어색했다. 사전에 부드러운 행위를 보여 줌으로써 두려움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고.
오멘의 요청에 행정관이 곧장 답했다.
“해당 명단을 확인해야 해서 몇 분가량 소요될 겁니다. 당장 가능한 이가 없으면…….”
“그럴 경우에는 괜찮습니다. 제 선에서 알아서 하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7번 천막으로 가시면 됩니다.”
행정관을 지나 군의관에게 향한 그는 세 병의 피임약을 지급받았다. 이후 배정받은 천막에 도착해 상의부터 벗었다.
내부에 준비되어 있는 와인을 한 잔 비웠을 무렵. 녹색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 두 명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들이 입은 후드에 그려진 문장은 남부군을 상징하는 방패였다.
“테노리엘 경,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중 한 명은 곧장 후드를 벗고서 인사를 건넸다. 오멘이 요청했던 대로 이미 안면이 있는 로리아였다.
“아, 안녕하세요.”
반면 입구에 서서 어물어물, 어렵게 인사를 건넨 여성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멘은 후드조차 벗지 않고 이름도 말해 주지 않는 그녀를 힐끔, 확인한 후 비어 버린 잔을 다시 채웠다.
그는 가득 찬 잔을 들고 침상으로 몸을 돌린 후에야 가볍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별일은 없었습니까?”
“경 덕분에요. 다시 뵙는 날만 고대했죠.”
픽, 웃으며 침상에 앉자 로리아가 다가왔다.
“날 기다렸습니까?”
“저만 그런 게 아닐걸요?”
“감사한 이야기네요. 그나저나 동생은 좀 어떻습니까?”
일전 건축 현장에서 자재에 깔려 다친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의원과 약제를 보내준바. 동생이 잘 나았나 싶어서 경과를 묻자 로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아 내는 사람처럼. 그녀는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꽉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기억력이 좋다 보니.”
오멘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로리아는 그가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남부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던 여성이었다. 그와는 이번이 여섯 번째 만남이었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경이 보내 주신 의원과 약제 덕분에 다 나아서, 몇 주 전부터는 다시 일을 나가고 있어요.”
침상에 앉는 대신 옆에 서 있던 로리아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애써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몫입니다. 누군가에게 정사를 보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연락해요. 종자에게 당신의 이름을 말해 놨으니, 곧장 사람을 보내 줄 겁니다.”
반면 오멘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처럼 숨을 고른 로리아는 곧 조심스럽게 침상에 걸터앉았다.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오멘은 제 복부를 쓸어내리는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방 부대로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따듯한 여체가 닿자마자 몸이 달아올랐다. 힐끔, 천막의 입구를 확인한 로리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름은 소피아라고 했어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정말…….”
로리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오멘은 와인잔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복근을 훑어내리는 손길이 조금 더 진득해졌다. 바지 앞섶이 불룩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로리아가 오멘의 바지춤을 풀며 속삭였다.
“입으로 먼저 해 드릴까요?”
오멘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뒤졌다. 군의관에게 받은 피임약 중 여성을 위한 것을 건네자 로리아가 금세 병을 비웠다. 그녀와 똑같이 제 몫의 약을 마신 오펜은 남은 한 병을 와인잔 옆에 두고서 말했다.
“위로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같이 하죠.”
로리아는 순순히 옷을 벗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오멘은 살짝 젖어 있는 로리아의 음부에 얼굴을 묻었다.
“응…….”
얕은 비음을 흘린 로리아가 곧 반쯤 고개를 치켜든 그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야스러운 소리가 위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웁, 우움, 훕.”
로리아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오멘의 성기가 한층 더 커졌다. 그녀의 음부를 빨고 있던 오멘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혀가 성기를 휘감을 때마다 나른한 쾌감이 이어졌다. 입에서 오멘의 성기를 빼낸 로리아가 타액에 젖어 든 선단을 손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좋으신가요?”
“네, 조금만 더 해 줄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오멘은 로리아의 질 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서 흔들었다. 움찔, 움찔, 몸을 떨면서도 그의 성기를 머금은 로리아가 성심성의껏 구음을 이어 갔다.
“입에, 해도 됩니까?”
검지와 중지로 로리아의 질 내를 더듬으며 엄지로 돌기를 누른 오멘이 조금 다급하게 물었다. 그에 로리아는 그의 것을 뱉어 내는 대신 더 깊게 삼켰다.
곧 오멘의 복근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잘게 떨렸다. 오랜만의 파정이었다. 후희를 즐기는 것처럼 긴 숨을 내쉰 오멘이 로리아의 음부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후 자세를 바로 했다.
“바로 넣어도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급하시네요.”
입에 머금은 그의 정액을 꿀꺽, 삼킨 로리아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앉았다.
“오랜만인지라.”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저와 마주 보게 앉힌 오멘이 자세를 잡았다. 질구에 그의 것을 맞추자마자 로리아가 허리를 내렸다.
“아흥.”
“하아.”
풍만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오멘이 말했다.
“아프지는, 않습니까?”
조금씩 격해지는 숨을 삼키며 묻자, 로리아는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 바로.”
그대로 로리아를 안아 들고 무릎을 세운 오멘이 허리를 쳐올렸다.
“입을 맞춰 줄 수 있습니까?”
격한 숨을 몰아쉬며 부탁하자, 교성을 내지르던 로리아가 바로 입술을 맞대어 왔다. 곧장 얽혀 든 혀가 서로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리아의 오금에 팔을 건 오멘은 부드러운 여체를 만끽했다. 가볍게 허리를 흔들던 오멘이 로리아의 뺨을 잘게 깨물며 물었다.
“조금, 헷갈려서, 이쪽 맞습니까?”
매번 같은 이를 상대하는 게 아니다 보니 로리아의 성감대가 가물가물했다.
“하응, 응! 기, 억력, 좋으시… 흐읏, 다더니!”
“면박, 주는 겁니까?”
“으응, 아, 아니… 더 앞쪽……. 앙!”
“아아, 기억, 기억났어요.”
제대로 위치를 찾은 오멘이 이전보다 강하게 저를 찔러 넣었다. 한 번 파정을 한 탓인지 로리아와의 정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두 사람은 어느덧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오멘은 뺨을 타고 뚝, 뚝, 땀이 떨어지기 시작한 후에야 로리아에게서 저를 빼내고 파정했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을 고른 그가 축 늘어진 로리아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여러 사내를 상대해야 할 로리아를 배려해 최대한 부드럽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가진 정사인 탓에 성급한 부분이 있었다. 한 번 파정을 한 후라서 교접 시간도 길어졌고.
“너무 오래 괴롭혔네요. 미안합니다.”
“괘, 괜찮아요. 경께서는 만족하셨나요?”
“난 좋았습니다.”
오멘은 그녀의 파들거리는 다리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제대로 신경을 못 써 준 것 같은데… 부족하면 입으로 해 줄까요?”
“아, 아니에요. 경께서 만족하셨다면 전 괜찮아요. 곧장 다른 분께도 가 봐야 해서… 너무 느끼면 힘들 것 같아요.”
로리아의 거절에 오멘이 허리를 숙이다 말고 자세를 바로 했다.
“바로 가야 한다고요? 그럴 줄 알았으면 삽입은 짧게 끝냈을 텐데요. 무리…….”
“아, 아뇨. 제가 경과 하고 싶어서……. 그, 그렇게 무리하는 것도 아니에요. 워, 원래는 계획에 없었는데… 행정관님이 소피아를 부탁하기에 한 분 더 만나겠다고 한 거고…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라서 가는 길에 고기라도 좀 사 가려고요.”
로리아의 부친은 양다리를 잃고 전역한 남부군의 병사였다. 가장이 불구가 된 상황에서 모친이 겨우겨우 생계를 책임지던 중 쿠그스에 걸려 사망했고, 당시 열여덟 살이던 로리아와 열 살이던 동생만 남았다.
마땅한 기술을 배우지 못했던 그녀는 제 몸을 가지고 남부군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처럼 타인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동의를 받았을 때 알게 된 사정이었다.
오멘은 순순히 물러나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물동이와 천을 끌어 왔다.
“그럼 닦아 줄게요.”
“……감사해요.”
축축한 천이 닿자 로리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멘은 정성껏 제 흔적을 닦아 냈다. 곧 옷을 챙겨 입은 로리아가 오멘을 힐끔거렸다. 와인잔을 다시 집어 든 오멘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부친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네, 기뻐하실 거예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보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머뭇거리면서도 오멘의 뺨에 입을 맞춘 로리아는 그길로 소피아에게 다가가 조곤조곤, 몇 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녹색 후드를 뒤집어썼다. 남부군에서 지급하는 후드였다.
오멘은 그 광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저렇게 얼굴을 가릴 수 있게 된 것도 아르페시스 덕분이라고 했지.’
원하지도 않는 매춘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것이다. 저렇게 후드를 쓰는 건 물론, 관계 중에 베일을 착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만약 그것을 억지로 벗길 경우 처벌하는 군법이 제정되어 있고. 후방 도시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병사들이 몸을 파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추행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일반적인 전쟁터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병영 내부에서 얼굴을 감춘 이들이 돌아다니다니. 세작이나 테러범들이 들어와 분탕질을 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남부군의 적군은 마수였으니까. 세작이나 테러범들이 숨어들 가능성은 희박했다.
‘숨어든다고 해도 애초에 종이 다르니까, 뭐.’
해서 아르페시스가 강행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다. 저건 그녀들을 보호하는 방패이기도 했다. 저 후드를 쓰고 천막 밖에서 이동 중인 여성에게 손을 댈 경우, 그 또한 군법으로 처벌할 수 있으니까.
물론 저 후드는 당일 배급 받은 후 반납을 하고 가야 한다. 덕분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외부인이 병영 내부에 들어오는 일도 적었다.
‘확실히, 녀석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라의 달이 되자마자 에스메랄다를 만나겠다며 황도로 가 버린 아르페시스를 떠올린 오멘이 픽, 하고 웃었다. 그사이 로리아가 천막을 빠져나갔다.
오멘은 그때가 되어서야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로리아와 정사를 가지는 동안 우두커니 입구에 서 있던 여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방금 본 대로 진행될 겁니다.”
후드로 가린 몸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오멘은 와인을 마저 비우며 침상 밖으로 발을 빼내어 앉았다.
“억지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죠.”
“…….”
“준비가 되면 앉아요. 기다려 줄 테니.”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쭈뼛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올린 오멘은 그녀를 재촉하는 대신 비어 버린 잔을 다시 채우며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다가온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후우… 좁은, 편인 것 같으니까.”
오멘은 제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소피아의 돌기를 문지르며 말했다.
“상대에게 전희를, 신경, 윽… 신경 써 달라고 해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삽입하면, 당신이 다칠 겁니다.”
“흐윽, 흣, 응!”
“흐우, 하아!”
가볍게 허리를 흔들었을 뿐인데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를 씹어 대는 내벽의 움직임은 적나라했다. 안쪽에 가득한 주름이 꿈틀거릴 때마다 구음을 받을 때처럼 빠듯한 압박이 이어졌다. 소피아의 속살은 마치, 그를 빨아 대는 것만 같았다.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자극에 머리털이 삐죽삐죽 서기 시작했다.
‘명기라는 게 진짜, 있는 건가?’
페르멘과 달리 정사에 능숙한 그였지만 이렇게까지 자극이 강한 여인은 처음이었다. 소피아를 애무할 당시에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삽입을 한 지금 생각보다 강한 압박감에 절로 허리가 들썩거렸다.
‘그냥 상성이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오멘은 소피아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멋대로 움직이려는 허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억지로 숨을 고른 그는 눈을 꾹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소피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향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더니.’
후드를 입고 있을 때는 몰랐건만. 밀색 모발과 보라색 눈동자 모두 색소가 옅었다. 그 때문에 흐릿한 인상을 줄 법도 한데, 이목구비 자체가 선명해서 머릿속에 확 박혀 들었다. 가녀린 체격에 비해 가슴은 크고, 둔부는 풍만했다. 착 감겨드는 살갗의 감촉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길을 줄 법한 여인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피아를 눈에 담고 있자니 목이 탔다. 꿀꺽, 침을 삼킨 오멘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입…….”
흠칫, 떨리는 몸이 고혹적이었다.
“입을 맞춰도, 됩니까?”
짧은 침묵 후 소피아가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멘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인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할짝할짝, 입술을 빨아 대자 오래지 않아 소피아가 그를 받아들였다. 오멘은 로리아를 상대할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치열을 가볍게 훑자 경직되어 있던 혀가 안쪽으로 쏙, 도망가 버렸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녀를 쫓아간 오멘이 곧 물컹한 혀를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쭙, 츕, 적나라한 소리를 내며 혀를 빨기도 잠시. 멈추었던 허리를 조금씩 흔들자 거친 손이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몸을 바짝 밀착한 탓에 바들거리는 떨림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오멘은 소피아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꾹, 짓눌렀다.
“흐응!”
입을 맞춘 채로 비음을 흘린 소피아의 몸이 들썩거렸다. 오멘의 허리가 보다 크게 움직였다. 소피아의 애액이 부드럽게 길을 내주었다. 그 순간 오멘은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저를 찔러 넣었다.
“으앙!”
목을 뒤로 젖힌 소피아와 오멘의 입술이 떨어지고, 높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하으…….”
오멘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올 때마다 강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를 물고 있는 소피아의 속살이 집요하게 달라붙어 왔다.
“흐앗! 앙! 아읏!”
오멘에게 깔려 있던 소피아의 팔다리가 힘없이 흐느적거리기도 잠시, 오래지 않아 그녀의 몸이 경직되었다. 격한 숨을 들이쉰 소피아가 바르르, 떨자 오멘이 이를 악물고 추삽질을 멈췄다. 촘촘한 주름이 그를 휘감으며 쭙쭙, 예민한 귀두 부분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억눌린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윽……!”
그의 인상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당황한 것도 있었지만, 소피아가 걱정된 탓도 있었다.
‘단순히 나랑 상성이 좋은 게 아니라면 달려들 놈들이 많겠는데.’
만약 소피아의 몸이 태생적으로 다른 여인들과 다른 편이라면?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 지명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날 터.
‘악질적인 놈들에게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강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멘이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가 사내에게 매력적인 몸을 가졌다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이들도 똑같아.’
어느 여인이 몸을 팔고 싶겠나. 다른 여인들을 전부 도울 수 없다면 소피아만 두둔해선 안 될 일이다. 그것을 빤히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운이 따라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오멘은 이를 악문 채 소피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후우, 어디가, 좋은, 윽… 좋은지, 말하면 제대로 해 주겠습니다.”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 제 욕구보다 여인들의 쾌감을 더 중요시할 것.
오멘이 남부에서 여인들을 상대할 때 지키는 원칙이었다. 해서 평소처럼 물어보았건만 소피아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그에 오멘은 그녀를 만족시키는 대신 최대한 빨리 파정하기로 했다. 정말 다행히도 다시 추삽질에 박차를 가하자마자 사정감이 밀려왔다.
“으, 하……!”
서둘러 저를 빼낸 오멘이 성기를 손으로 빠르게 문질렀다. 울컥 하고, 뿌연 정액이 쏟아지며 소피아의 아랫배를 뒤덮었다.
“하으, 하…….”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오멘은 등줄기가 오싹하다는 말을 실감하며 거친 숨을 골랐다. 평소라면 뒤처리까지 책임졌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흡, 흐윽…….”
정사가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울음소리 때문에. 소피아의 위에서 몸을 물린 오멘이 모포를 덮어 주며 말했다.
“나에게 배정된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은 쉬면 됩니다.”
“네, 네에…….”
억지로 삼킨 한숨으로 인해 속이 뒤엉켰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매춘을 하게 된 여인이었다. 오멘이 대강 그녀의 통과 의례를 치러 준 셈이다. 이 모든 게 여인들 틈에서 난 소문 때문이었다. 오멘이 보수를 두둑이 챙겨 주고, 정사 중에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 소문을 들은 행정관 측에서 넌지시 부탁을 해 오며 시작된 일이다. 매춘에 익숙하지 않은 여인들이 받게 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거칠고 사나운 이들보다 오멘 같은 부류를 상대하는 게 나으니까.
비단 오멘뿐만이 아니다. 행정관은 몇몇, 여인들 틈에서 좋게 소문이 난 이들에게 이런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들이 행정관의 부탁을 수락하는 편이었다. 군의 병력은 앞으로 더 늘어날 텐데, 새로운 색인의 유입은 과거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남부의 인구 문제가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해서 남부군은 나름 새로 합류하는 이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방책을 강구했다. 처음 매춘을 하는 이들에게 달콤한 사탕을 흔드는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거금을 벌 수도 있다고.
그 행태가 기가 막힐 법도 하건만, 오멘은 군의 내부 사정을 알기에 손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욕정을 풀고자 오는 게 아니라 돈을 쓰기 위해 여인들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덕분에 파병 1년 차에 많은 여성들과 살을 섞은 편이었고, 이렇듯 첫 관계가 끝난 후 우는 여인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달래 줘야 하나……?’
오멘이 조심스럽게 소피아의 등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줄 때마다 소피아의 몸은 더 움츠러들었다. 결국 오멘은 손을 거두었다.
‘어려워.’
정말 우는 여인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처음에는 얄팍한 동정심에 취해 돈만 지급하고, 관계는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여성은 관계 직후 군의관에게 진찰을 받기에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오멘은 행정관으로부터 주의를 받아야만 했다.
남부에서 매춘은 명확한 금전이 오가는 일거리였다. 그런데 오멘이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일도 하지 않은 이들에게 금전을 지급하니 문제가 된 것이다.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상대하겠다고 나설 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오멘에게 보내 달라고 뇌물을 쓰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한 부정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정사를 가지라는 경고 조치가 내려왔다. 노력 없는 보상은 기강을 흐트러트린다.
그 결론에 동의한 오멘은 관계를 가지되 최대한 부드럽게 상대방을 안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잘해 준다 한들,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살을 섞는 것이 쉬울 리는 없지.
“흑, 흣…….”
“자리를 비켜 줄까요?”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던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시간이 되면 청소를 하러 올 테니 그때까지는 추스르도록 해요. 돌아가거든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만났던 행정관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됩니다.”
억지로 울음을 삼킨 소피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답을 확인한 오멘은 그대로 천막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직전의 정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오멘은 천막 밖으로 내디뎠던 걸음을 물려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긴 한숨 끝에 그가 한 말은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전희를 받는 대신 윤활액을 사용하도록 해요.”
모포 아래 숨어 있던 소피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군의관에게 요청하면 피임약과 함께 지급해 줄 겁니다. 당신이 달아오른 상태에서 사내를 받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어떻게든 사내에게 자극을 덜 주는 방법을 찾…….”
말을 하다 말고 손에 얼굴을 묻은 오멘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괜한 오지랖이야.’
그는 이곳의 문제도, 소피아의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조심하십시오.”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지 못한 오멘이 몸을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병영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로리아와 소피아의 현실에 젖어 든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 * *
일전의 혹독한 정사 이후 아르페시스는 꽤나 얌전해졌다. 에스메랄다가 거절하는 체위는 일절 시도하지 않았고, 그녀가 피로를 언급하며 잠자리에 들고자 하면 순순히 물러났다.
“늦은 밤 오셔서는 어찌나 침울해하시는지.”
“…….”
“결국 아레스가 술을 두어 잔 드시게 해서 객실을 내어 드렸죠.”
며칠 그렇게 잘 따르는가 싶더니. 어젯밤 테노리엘 저택으로 가서 외박을 하고 왔을 줄이야. 분명 그녀가 잠들기 전에 곁에 있었고, 깨어난 후에도 곁에 있었는데.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와 혼인한 후 교류가 더 잦아진 루이자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께서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따로 말은 안 하는데, 한숨은 쉬더라고요.”
차를 마시며 그녀의 말을 순순히 긍정한 루이자가 상체를 숙였다.
“그래도 먼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한층 목소리를 낮춘 루이자는 지난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에스메랄다에게 전해 주었다.
“에디가 마음껏 못 하게 한다, 자꾸 안 된다고만 해, 이러면서 훌쩍거리시는 게 제 눈에도 불쌍해 보이기는 했어요.”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서 아르페시스의 흉내를 낸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에스메랄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 입으로 그런 얘기까지 했다고?’
그 보수적이고 꽉 막힌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 저택에 가서 외박을 하고 왔다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더니. 그가 아레스에게 부부간의 일까지 털어놓았을 줄은 몰랐다.
‘……그런 얘기를 할 만큼 힘들다는 건가?’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빈도와 강도가 아주 흡족하지만, 혼례 직후의 아르페시스를 떠올리면 무척이나 자제 중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입으로 타인에게 에스메랄다와의 정사에 관해 언급할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얕은 충격에 잠시간 말을 아꼈다.
“그래도 매일 한다면서요?”
“……아, 네.”
그런 그녀에게 루이자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정말 힘들겠네요. 아레스는 한 번 달려들고 나면 사나흘은 쉴 시간을 주거든요.”
갑작스러운 주제에 당황한 건 잠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흥미로운 눈을 하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오라버니는 그리 자주 요구하지 않으시나 봐요?”
“음…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 것 같은데, 인내심이라고 할까요? 한 번 할 때 정말 힘들게 만들어도 본인의 행동이 저를 힘들게 한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한 번 요구하고 나면 다음 며칠은 아랫도리를 세우고도 얌전히 잠만 자요. 덕분에 추스를 시간이 있죠.”
“……부럽네요.”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루이자가 위로하듯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혼례 직후 폐하께서 심하셨다면서요? 리디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존다고 소문이 파다했잖아요.”
“그래서 나름 대책을 세운 건데… 오라버니께 가서 하소연을 할 줄은 몰랐어요.”
“전 황제 폐하께서 잘못하셨다고 봐요. 우리가 무슨 강철도 아니고, 쉴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어요? 마냥 몰아붙이기만 하니까 리디도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에스멜라다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며칠 밤을 새우고도 쌩쌩한 아르페시스와 그녀는 달랐다. 루이자가 말한 대로 그녀가 강철이 아닌 이상 휴식은 주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도 아레스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을 만큼 힘겨워하는 아르페시스가 눈에 밟혔다. 에스메랄다는 어떻게 하면 부부 관계에서 그와의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래서 루이자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의 간격을 두고 하면 버틸 만한가요?”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루이자는 생각을 곱씹었다.
“음… 사실 아레스도 침대 위에선 거친 편이라 다음 날은 정말 힘들긴 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해서 온종일 누워 있거든요.”
“…….”
“그래도 그다음에 평범하게 쉴 수 있으니까 회복을 하는 거죠.”
그렇다면 현재 아레스와 루이자처럼 한 번을 격렬하게 하고, 다른 날 휴식을 가지는 방식은 불가능하다. 에스메랄다는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바. 하루 온종일 자리를 비우고 쉬는 건 불가능했다.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맞닥뜨린 기분이라 미간에 절로 주름이 생겼다.
그때 루이자가 대뜸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어이없는 일이 있었는데요.”
“네?”
“원래 어제는 아레스가 하고 싶다고 한 날이었거든요. 그 사람은 그렇게 전날이나 당일 중에 신호를 주는 편이죠. 그래서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밤에 폐하께서 들이닥치신 거였어요. 저도 궁금한 마음에 기웃거리긴 했지만, 도통 폐하의 하소연이 끝날 줄을 모르니 먼저 자기로 했죠. 그런데 아레스가, 폐하를 재우고 와서는 저를 차마 못 깨운 모양이더라고요.”
에스메랄다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루이자의 말을 경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은 꼭 해야 한다고, 먼저 자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니까요? 그 태도가 어찌나 진지한지, 전 무슨 심각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뭐 큰일이라고, 하루 안 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사내들은 왜 이렇게 정사에 진심인 걸까요?”
“그러게요. 하지 못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루이자, 그녀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에스메랄다.
두 유부녀의 대화가 깊어졌을 무렵이었다.
“황후 폐하, 로젤리나 님과 조프리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국정을 맡은 이후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만나게 된 아이들이 도착했다. 이미 죽어 없는 전 황태자, 페라노스의 아이들.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딱딱해지자 루이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서 토닥여 주었다.
“난… 리디가 정말 훌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에스메랄다는 쓰게 웃었다. 사라진 시간에서 페라노스가 그녀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에서 선황이 한 일을 생각할 때면 마음 한곳이 죄책감으로 인해 묵직했다.
선황이 페라노스를 제물로 고르지만 않았어도, 황족을 아비로 둔 아이들은 적당히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르페시스가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의 미래까지 희생시킨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속이 거북할 만큼 버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이유로 당장 아이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날과,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 싶어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날이 반복되는 중이었다.
“리디는 정말 잘하고 있어요.”
한 번 더 그녀의 손을 토닥여 준 루이자가 일어났다.
“그럼, 다른 손님도 오셨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또 들러 줘요.”
“당연하죠. 매일매일 놀러 올 거예요.”
밝게 웃는 루이자를 배웅하고 아이들을 맞이한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과 같은 평화로운 대화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응접실을 채운 날.
세튀스 왕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 * *
“너 말이야.”
“응? 왜 그러나?”
뜬금없는 말에 에스메랄다와 춤을 추던 아르페시스가 반문했다.
오늘은 라 58일, 아르페시스의 탄신 축하연이 열린 날이었다. 지난 계절 동안 자리를 비운 그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고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조금은 위압적인 연회를 준비한 참이었다.
그곳에서 첫 춤을 추고 있던 중 에스메랄다는 몇 주 내내 생각했던 바를 입에 담았다.
“……많이 부족해?”
“뭐…….”
주어가 생략된 질문에 다시 반문하려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젯밤도 에스메랄다의 취향대로 부드럽고 큰 자극이 없는, 잔잔한 정사를 가졌다. 삽입을 한 동안 아르페시스는 계속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시트나 베개를 찢어질 듯 꽉 움켜쥐곤 했다. 더 거칠게 허리를 치대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원하지 않으니 억지로 인내하며 저가 겨우 파정에 이를 정도로만 움직이고서 끝냈다. 이후 부족하다고 호소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전혀 시들지 않는 성기를 살짝 뒤로 빼낸 채 어정쩡한 자세로 에스메랄다를 안은 채 잠을 청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니 에스메랄다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혼인 전후의 경험은 아르페시스의 취향에 대한 것을 알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정사를 좋아한다. 정사 중에는 오롯이 서로만으로 가득해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다음 날 일정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 이유이리라.
한데 이번 라의 달의 절반이 지나도록 날마다 딱 한 번, 그것도 에스메랄다가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정사만 가지고 있다. 불만이 쌓이고 쌓여 가득할 것이다.
‘그런데도 말을 안 하는 걸 보면, 참을 만한 걸 수도…….’
대답이 없는 아르페시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난 지금 정도가 딱 좋아.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없으니까.”
직설적인 말에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에게 루기스처럼 귀나 꼬리가 있었다면 아래로 축 처졌겠지. 그럼에도 그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에스메랄다와 함께 텅 빈 댄스홀을 누볐다.
“혼례 직후에는… 내가 심했다는 걸 인정한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 말문을 연 아르페시스는 침울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은 내게 부족해.”
그는 에스메랄다가 혹여나 다시 저를 내쫓을까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그간 너무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아서 참고 있는 것이지, 만족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기어코 이리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부족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게 내 진심이다.”
그의 말을 끝으로 음악이 끝났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서 한 발 물러나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이는 그를 힐끔거렸다.
귀족들의 박수 소리를 뒤로하고 댄스홀을 내려온 후, 에스메랄다는 귀족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곁을 목석처럼 지키고 섰다.
그리고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잡아끌었다.
“에디……?”
순순히 그녀에게 끌려온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데리고서 회장을 벗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아르페시스의 휴게실.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는 함께 휴게실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는 이전까지 없던 가구가 떡하니 마련되어 있었다. 커다란 침대를 발견한 아르페시스의 몸이 우뚝, 멈췄다.
“자주는 내가 너무 힘들어.”
“……뭐?”
“하지만… 특별한 날만이라면.”
문을 닫고서 아르페시스의 가슴팍을 쓸어내린 에스메랄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오늘 연회 때문에 내일 오전 일정을 비웠어.”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아르페시스의 손이 움찔거렸다.
“슬슬 회장을 떠나도 될 시간이고.”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아르페시스가 으스러질 듯 꽉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
“오늘만큼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 황홀한 허락에 아르페시스는 제 바지춤부터 풀기 시작했다. 당장 침실로 가지 않을까 했더니, 거기까지 이동할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다.
‘침대가 있으니까 여기도 침실로 인식한 걸지도.’
에스메랄다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제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입맞춤조차 하지 않았는데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고개를 치켜든 성기는 흉흉했다.
“마, 만져 줘. 아니, 빨아 줘.”
에스메랄다는 순순히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의 것을 쥐었다. 그 잠시를 참지 못하겠는지, 아르페시스는 이미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채 허리를 들이밀었다. 빨리 물어 달라고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나 어디 안 가. 천천히 해도…….”
“내, 내 마음대로라고 하지 않았나.”
결국 에스메랄다는 뭐라고 첨언하는 대신 입을 벌렸다. 아르페시스는 곧장 그녀의 입에 제 것을 물렸다.
“혀로 빨아 줘, 하!”
그가 좋아하는 귀두 부분을 사탕 빨듯이 쪽쪽 거리자 단번에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에스메랄다가 단단하고 뜨거운 선단을 핥아 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드레스를 풀어 헤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급한 손길에 엉킨 코르셋의 끈이 풀리지를 않았다. 어찌할 줄을 모르는 아이처럼 끙끙거리던 아르페시스는 결국 그녀의 드레스와 코르셋을 쭉, 잡아 찢었다. 그리고 강한 힘으로 에스메랄다를 밀어붙였다. 그녀가 풀썩, 침대에 눕자 그 위로 올라탄 아르페시스가 말랑거리는 젖가슴을 끌어모았다.
“으응……!”
우악스러운 힘으로 가슴을 움켜쥔 아르페시스 때문에 에스메랄다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걸 돌아볼 여유가 없는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유두를 꼬집으며 아찔한 둔덕 사이에 제 것을 끼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 밑에 베개를 깔아 주었다.
“해 줘, 그대의 얼굴에 하고 싶어.”
에스메랄다는 또 제 흔적에 집착하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미간을 구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요구하는 것을 순순히 해 주었지만. 제 손으로 가슴을 모은 에스메랄다는 골짜기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것을 입으로 앙, 물었다. 귀두 부분이 뜨겁고 축축한 입 속으로 쏙 사라졌다.
“하아!”
짜릿한 감각에 탄성을 내뱉은 아르페시스가 제 상의를 잡아 뜯는 것처럼 벗어 내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마른 살갗끼리 부딪치며 여린 살이 쓸렸다.
하지만 곧 아르페시스가 뻐끔뻐끔 뱉어 낸 쿠퍼 액과 에스메랄다의 타액이 흥건하게 고였다. 아르페시스의 허리 짓이 보다 유연해졌다.
“좋아, 너무 좋아, 에디. 더 빨아 줘……!”
어느덧 나신이 된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손을 밀쳐 내고 직접 가슴을 모아 쥐었다. 욕심껏 젖가슴을 그러모은 그가 엄지로 유두를 문질거렸다.
“으응, 응!”
“그대도 섰어.”
딱딱한 감촉을 즐기기라도 하는 건지. 아르페시스는 때때로 바짝 일어난 돌기를 톡톡, 두드리며 감촉을 음미했다. 그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슴에서 시작되는 쾌감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간질간질, 천천히 시작된 감각은 몸속을 배회하며 아랫배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탄탄한 허벅지를 꾹 움켜쥐며 자신의 흥분을 표출했다. 살짝 풀어진 동공이 에스메랄다의 가슴과 입술을 진득하게 훑고 지나갔다.
끝이 다가온 것처럼 평소보다 낮은 신음을 흘린 아르페시스가 젖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살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옴과 동시에 울컥, 하고 에스메랄다의 입 속에 씨물이 쏟아졌다. 재빨리 제 것을 빼낸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뺨과 목, 가슴에 제 흔적을 흩뿌렸다.
“흐아, 하…….”
부르르 몸을 떤 아르페시스의 입이 헤프게 벌어졌다.
“또…….”
에스메랄다가 그의 성벽에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나른한 숨을 몰아쉰 아르페시스가 입맛을 다시며 에스메랄다에게 묻은 정액을 이리저리 펴 발랐다. 그러고는 불쑥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여느 때처럼 아르페시스의 것을 삼킨 에스메랄다는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여전히 다급한 기색으로 그녀의 입 속을 헤집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무작정 안으로 밀고 들어와 내부의 여린 살을 한 곳도 빠트리지 않고 다 건드리기 시작한 침입자는 거칠었다.
외설적인 입맞춤이 이어지기를 한참. 아르페시스가 제 다리 사이에 깔려 있던 에스메랄다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그대로 쏙 빼내었다. 곧장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의 목적은 속옷이었다. 천 자락 위로 입술을 파묻은 아르페시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으응, 읏!”
손바닥만 한 천 자락을 제 타액으로 적시며 우물우물. 에스메랄다는 천 너머에서 전해지는 자극에 몸을 비틀며 끙끙거렸다.
“젖었어.”
속옷 한쪽을 걷어낸 아르페시스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음부를 응시했다. 혀를 내밀어 길게 핥아내자 속에 고여 있던 애액이 딸려왔다.
“달아.”
할짝할짝, 추잡한 소리를 내며 음부에 고인 샘물을 핥아 먹던 아르페시스가 손가락을 놀렸다. 엄지로 예민한 돌기를 꾹 누르면서도 검지와 중지를 질 내로 밀어 넣어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흑! 아! 아르페시스!”
“좋아? 더 빨리?”
“아앙! 앗, 흐앗!”
“줄줄 흐를 정도라니…….”
어느덧 에스메랄다의 애액은 아찔한 곡선을 타고 흘러 항문을 적시고, 침대 시트에 얼룩을 남겼다.
“그대도, 바랐던 거지?”
흥건한 제 손을 쪽쪽 핥으며 몸을 일으킨 아르페시스가 몽롱한 눈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으응…….”
그가 본격적으로 삽입을 준비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 시작될 쾌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고삐를 풀어 준 이상 아르페시스는 오늘 밤새도록 그녀에게 매달려 있으리라. 그 황홀하면서도 버거운 시간을 익히 알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아쉬운 듯, 축축한 음부를 손으로 한 번 쓸어 올린 아르페시스가 제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어제보다 더 흠뻑 젖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중얼중얼.
“그대도 이렇게…….”
꿀꺽 침을 삼킴과 동시에 허리에 힘을 준 그가 기습적으로 제 것을 밀어 넣었다.
“흐앗!”
에스메랄다의 허리가 휘며 허공으로 떴다. 하지만 곧 상체를 낮추고 그녀를 품에 가두다시피 한 아르페시스 때문에 다시금 침대에 맞붙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삽입에 적응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제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댄 채로 흘리는 신음이 점점 짙어졌다.
“아, 으윽, 으아.”
그리 큰 소리도 아니건만, 귓가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르페시스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그의 숨결이 스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에스메랄다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퍽퍽퍽, 살이 맞부딪치며 상스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그간의 인내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르페시스의 움직임은 유독 거칠었다.
“항, 아항, 앙!”
에스메랄다는 빠르게 몸과 정신을 잠식하는 쾌락에 취해 교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짐승처럼 허리만 흔들어 대는 그를 안아 주었다.
“아으……!”
파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에스메랄다를 가득 채운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그때부터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하읏, 거, 거긴 안……!”
지속적인 마찰에 이미 절정의 언저리까지 몰려 있던 에스메랄다가 가녀린 다리를 바동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더 힘껏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갈, 것 같나? 나도 싸고 싶, 어.”
그녀와 함께 절정에 다다르고 싶다고 귓불을 씹어 먹으며 중얼거린 그가 깊숙한 곳을 건드렸을 때.
“으앙!”
내벽이 꿈틀거리며 에스메랄다의 절정을 적나라하게 알려 주었다. 그녀를 으스러질 듯 꽉 안은 아르페시스는 붉은 입술을 한입에 삼키며 몸을 떨었다.
“윽……!”
배 속 가득 뜨거운 씨물이 들어찼다.
“하아, 하으…….”
만족스러운 파정에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안에서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후희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혀를 얽어 오는 게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역시나, 아르페시스는 곧 더듬더듬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언제 만져도 좋아. 이렇게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래에 피가 몰려.”
“으응…….”
그는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내벽에 스스로를 문지르며 다시금 뜨거운 열락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성기가 다시 딱딱해지는 것을 느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정사를 거치며 겪어 본 절정이었는데, 왜 익숙해지기는커녕 더 버거워지는지.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게걸스럽게 혀를 놀리기 시작한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에스메랄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딱 여기서 끝내면 좋겠지만 직전에 제 입으로 직접 아르페시스의 고삐를 풀어 준 참이다. 오늘 밤은 분명 버겁고 끈질긴 쾌락을 감당해야 하리라.
‘싫은 건 아니지만…….’
다음 날을 생각하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거 아는가?”
그때 할짝할짝, 부러 소리를 내며 에스메랄다의 유두를 빨아 대던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뭘……?”
나른한 정신을 애써 추스르고 되묻자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젖가슴을 손에 쥔 채 출렁출렁, 흔들며 답했다.
“커졌어.”
“뭐……?”
“예전보다 그대의 젖가슴이 커졌다고.”
에스메랄다는 헛숨을 내뱉으며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럴…….”
이미 성장이 끝난 성인이니 그럴 리가 없다고 답하려 했는데. 혼례 전에 입던 드레스가 맞질 않아 품을 늘였던 게 기억났다. 딱히 살이 찌지는 않았는데.
“만지면 계속 커지는 걸까?”
그런 거라면 좋겠다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풍만한 젖가슴을 주무른 아르페시스가 입맛을 다셨다.
“서적에서는, 아이를 가지면 더 커진다고 했다.”
대체 그런 서적은 또 언제 본 건지 싶어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
“그때가 되면 여기서 모유도 나오겠지.”
언젠가는 먹어 보고 싶다고 중얼거린 아르페시스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앞으로 한 번만 더 하고, 후으, 다음에는 뒤로 해도 되겠나?”
“으응!”
오늘만큼은 제 욕심을 다 채우겠다고 선언한 그는 에스메랄다를 안아 든 채 몸을 일으켰다. 그 직후 탱글탱글한 그녀의 둔부를 받쳐 들고서 무릎을 꿇은 채로 자세를 잡았다.
“내 허리를 안아.”
벌써부터 제 허리를 치대기 바쁜 아르페시스의 목을 그러안은 에스메랄다가 서둘러 탄탄한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목에 이를 박아 넣으며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르페시스는 상쾌한 낯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서너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음에도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인외의 영역에 달한 후 수면 시간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까.
반면 에스메랄다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동이 터 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으니, 당연하겠지.
‘더 자게 두어야겠군.’
쪽쪽, 하고 에스메랄다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아르페시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간밤의 정사는 만족스러웠다. 지난해 겨울부터 쌓여 온 욕망은 어느덧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잠든 에스메랄다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절로 나른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음욕에 물들어 질척거리던 은회색 눈동자도 한층 밝아져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살갗을 쓰다듬으며 평화를 즐겼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누리는 여유였다. 그가 전선에서 돌아온 후에도 에스메랄다는 바빴고, 해가 뜨기도 전에 집무실로 향해 해가 진 후에나 침실로 돌아왔다. 전선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간다는 이유로 마음껏 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의 욕망을 꾹 억누른 채 에스메랄다가 허락한 선에서만 허리를 흔들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불만이 쌓이고 쌓여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종종 이렇게 시간을 내어 준다면 참아 봐야지.’
신혼 무렵처럼 날뛰다가 쫓겨나느니, 그녀가 허락해 주는 날을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나으리라.
아르페시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에스메랄다를 품 안으로 잡아끌었다.
“음…….”
그에 에스메랄다가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그의 가슴에 뺨을 문질렀다. 그 순간 부드럽던 아르페시스의 미소가 흔들렸다. 에스메랄다의 보드라운 손이 그의 가슴팍을 쓸어내린 탓이다.
그녀는 여전히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잠결에 살짝 흘러내린 손이 스친 것에 불과하건만 그의 아랫도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든 에스메랄다를 한 번, 이불을 밀어내며 점점 더 단단해지는 아랫도리를 한 번. 양쪽을 번갈아 살핀 아르페시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족을 논한 지 몇 분 만에 다시금 욕정이 차올랐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민은 짧았다.
‘……깨우지 않고 혼자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제 가슴팍에 고이 올려져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가슴을 지나 복근을 훑고서 이윽고 성기에 닿은 손길은 황홀했다. 아르페시스는 축 늘어진 에스메랄다의 손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수음을 시작했다.
“하아…….”
흘러내린 이불 덕분에 훤히 드러난 아르페시스의 흉부가 점차 크게 들썩거렸다. 거칠어진 숨이 흩어질 때마다 그의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금발이 살랑거렸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울긋불긋한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아르페시스의 손짓이 빨라졌다.
“에디……!”
그에게 붙잡힌 채 뜨거운 선단을 문지르는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몸을 떨며 정액을 쏟아 낸 아르페시스가 힐끔, 에스메랄다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고민은 짧았다. 아르페시스는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에스메랄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깨우지만 않으면.’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아르페시스가 훤히 드러난 에스메랄다의 음부를 응시하며 제 것을 손에 쥐었다. 지난밤의 흔적이 말라붙어 있는 나신에 새로운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기 시작했다.
* * *
배정받은 천막을 나선 오멘이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었다. 전선으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으로 정사를 가진 참이었다. 그를 상대한 여인은 한발 앞서 돌아갔고, 그는 천막을 보다 빨리 비워도 된다고 행정관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돌아가던 길이었다.
좌우로 늘어선 천막 내부에서 여러 교성이 흘러나왔다. 덤덤한 표정으로 그 길을 걷는 내내 오멘의 청록색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틈틈이 후드를 쓴 여인들이 그를 지나쳐 갔다. 오멘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열댓 걸음 앞에 있던 천막에서 또 다른 여인이 나왔다.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오멘이 있는 방향을 본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오멘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쳐 가고자 했다.
“저기, 테, 테노리엘 경…….”
그를 부른 이가 옷깃을 붙잡은 탓에 멈춰 섰지만.
힐끔, 시선을 내리자 방금 천막을 빠져나온 여인이 보였다. 오멘은 두어 걸음 거리를 물러나며 팔을 빼내었다. 분명 직접적으로 닿은 게 아니었는데 팔이 따끔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손을 꽉 말아 쥔 오멘이 부러 평의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천막 외부에서는 접촉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주의해 주십시오.”
“아, 죄, 죄송합…….”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러니까, 일전에… 어…….”
“제 천막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멘은 그녀가 누군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주기적으로 여인을 품어 왔다. 그가 지급하는 보수는 하한 금액보다 많았고, 그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 줄 테니까.
따로 남부의 여인들과 전사한 병사의 가족들을 후원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돈을 제공하려면 이 방법이 확실했다. 휘하의 몇몇 기사들의 금전을 대신 제공해 주는 일도 하고 있을 정도였다.
의무감과 동정심은 오멘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을 업무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상대방을 어렴풋이 기억은 하지만 로리아처럼 몇몇, 이름을 알고 지내며 따로 챙기는 이들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긴 한 것 같은데…….’
천막 밖에서 후드를 벗으라 할 수는 없는 일.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결국 오멘은 그녀의 이름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바 라몰 소, 소피아… 라고…….”
“아.”
이름을 듣자 연관된 기억이 주르륵,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긴장감이 차올랐다. 오멘은 저도 모르게 슬쩍, 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언제든 그녀를 피해 물러날 수 있도록.
“오랜만입니다. 무슨 용건이라도?”
하지만 정작 되묻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 저기…….”
우물쭈물, 소피아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각자의 용건을 마치고 천막을 나온 이들이 한 번씩 시선을 던지며 지나갔다.
오멘은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재촉했다.
“알다시피 얘기를 나누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말하기 어려운 내용입니까?”
그가 얘기를 다 듣지 않고 떠날 거라 생각했던 걸까? 줄곧 아래로 처져 있던 고개를 치켜든 소피아가 다급히 말했다.
“아, 아뇨! 저, 저는 지, 지, 지명을 부탁드리려고…….”
오멘은 그녀의 용건을 확인하고서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었다.
“호, 혹시라도, 그날 제, 제가… 아… 그, 그날은 즈, 즐겁지 아, 아, 않으셨겠지만 이제는 더 잘할 수 있으니까…….”
곧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미안합니다만.”
“네?”
“난 누군가를 지명하지 않습니다.”
후드 아래에서 꽉 마주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쯤이라면 알고 있겠죠. 내가 지급하는 금액은 상당한 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특정하면 그만큼 다른 이들의 기회가 줄어듭니다.”
“아…….”
“그런 이유로 행정관도 같은 이들이 나에게 배정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을 테고요.”
이게 맞는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최대한 공평해야 한다. 자신이 정한 원칙을 되새긴 오멘이 숨을 골랐다. 그 직후 그는 조금은 매정하게 소피아의 부탁을 거절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럼 이만.”
뒤에 남은 이를 두고 나아가는 걸음이 조금은 다급했다. 소피아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멀어지고 싶었으니까. 가능한 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여름내 그녀와의 정사를 잊고자 애를 써서 이제 겨우 성과가 보이던 참이었는데.
‘미치겠군.’
그날을 떠올리자마자 손가락 끝이 저릿해지다니.
억지로 손을 말아 쥔 오멘은 행정관의 천막에 들어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 * *
사의 달이 밝자 아르페시스는 다시 전선으로 떠났다.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한 계절 동안 곁을 지켜 주었던 그가 사라지자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무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일. 에스메랄다는 텅 빈 침실에서 홀로 잠들 때면 괜스레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억지로나마 그가 없는 일상에 적응해 가던 나날이었다. 한창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그녀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집무실을 나섰다. 뜨겁던 태양의 열기가 한풀 꺾여 야외로 나서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참이었다. 에스메랄다도 황후 궁의 정원에서 점심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폐하!”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제르민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네 왔다. 조프리를 안고 있던 유모와 로젤리나가 헐레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두 아이에게 잠시간 닿았다.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조프리와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꽉 마주 잡고 있는 로젤리나. 그들을 살피는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켰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만남이 시작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아직 자아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조프리와 달리 로젤리나는 예전보다 더 에스메랄다를 어려워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아이가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로젤리나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못한 채 눈을 돌렸다.
시녀들이 준비해 둔 야외 테이블에 도착하자 제르민이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에스메랄다는 제 치마폭으로 달려드는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성하.”
“기다리고 있었어요!”
로젤리나처럼 1여 년 사이에 부쩍 자란 제르민이 해맑게 웃었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아…….”
에스메랄다는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로젤리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직후 제르민을 안아 들고서 의자에 앉자 집무실에서부터 따라온 루기스가 곁에 자리를 잡았다.
시녀들이 음식을 내어 오기 시작했다.
“그간 잘 지내셨을까요?”
나긋하게 물으니 그녀의 무릎을 차지한 채 루기스를 쓰다듬어 주던 제르민이 킬킬,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저야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놀고먹을 방법이 많으니까요. 대신 오웬이 바쁘지만요.”
에스메랄다는 지난 1여 년 사이 두어 번가량 만났던 오웬을 떠올렸다. 파들거리는 얼굴을 하고서도 제르민에게 뛰어놀 시간을 주고 싶다던 사람이다. 해서 제르민이 교황으로서 해결해야 할 모든 행정 업무를 떠안았고. 몇 년만 버티면 된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오테르미카 작성이 시작되면 더 바빠지겠지만… 제 입으로 열 살까지는 놀라 했으니, 그때까지는 부지런히 놀 생각입니다.”
시녀들이 내어 온 빵을 집어 든 제르멘은 그것을 반으로 쪼개 에스메랄다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가 준 빵을 베어 문 에스메랄다가 웃었다.
실제로 제르민은 누구보다 열심히 노는 중이었다. 오늘처럼 황후 궁으로 오는 것은 주에 한두 번뿐이지만, 로젤리나와 조프리가 머물고 있는 이볼 궁에는 하루 걸러 한 번씩 방문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힐끔, 하고 맞은편의 아이를 살피고야 말았다. 제 몫의 음식을 깨작거리며 에스메랄다를 훔쳐보던 로젤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속이 불편해지기 무섭게.
“참, 황후 폐하께 윤허를 받고 싶었던 게 있는데요.”
어느새 양 볼이 볼록해진 제르멘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에스메랄다는 그의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며 답했다.
“이볼 궁에 다른 아이들을 초대해서 놀아도 되나요?”
냅킨을 쥐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이 우뚝, 굳었다.
“어느 정도 거르기는 해야겠지만… 정치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고르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신전으로 부르자니 오웬이 만류하더군요. 로제가 아직은 외부 활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이볼 궁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요.”
에스메랄다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에 그녀와 함께 있는 두 아이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랐다. 제르민은 에스메랄다의 답을 기다리며 태연히 제 몫의 식사를 이어 갔으나, 로젤리나는 안쓰러울 정도로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스메랄다가 눈을 감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제르민이 먼저 말을 꺼냈지만 로젤리나도 어느 정도 원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웬의 말대로 로젤리나가 황성 외부로 나돌아다니기엔 너무 일렀다. 에스메랄다는 두 아이를 처형시키지 않고 황성에 남겨 둔 것만으로도 약간의 정치적인 부담을 짊어진 상황이다.
실제로 귀족들은 아직까지도 아이들의 처분을 들먹이고 있다. 에스메랄다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간이 큰 자가 없어 말에서 끝나는 수준이었지만, 잊을 만하면 언급되는 중이다. 조프리와 로젤리나는 이대로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게 좋았다.
에스메랄다의 이성이 내어놓은 최선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 하여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거듭한 에스메랄다가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을까요?”
“그런 건 없어요. 저야 특별한 목적 없이 놀고 싶은 것뿐이지만… 상대방은 아닐 수도 있으니 폐하께서 골라 주시는 이들만 만나 볼 생각이었죠. 곤란하시다면 이대로도 괜찮고요.”
“……조만간 명단을 추려 볼게요.”
“오, 괜찮은 건가요?”
에스메랄다는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민의 말대로 어느 정도 거를 필요는 있겠지만,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다. 단순히 모여 노는 것에 정치색을 입히고 이해득실을 논하기엔 과했다. 교황이라는 이름 때문에 평범한 교우 관계를 쌓기 힘든 제르민에게는 좋은 일이리라. 어쩌면,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뺨이 상기된 로젤리나에게도.
에스메랄다는 애써 작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식사를 이어 갔다. 잠에서 깨어난 조프리가 칭얼거리기 시작한 건 에스메랄다의 접시가 거의 다 비었을 무렵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불편한 표정으로 힐끔힐끔, 조프리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손발을 바동거리며 유모의 품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 과정에서 허공을 가른 손은 분명 에스메랄다를 향하고 있었다.
“조, 조프리 님… 괜찮아요, 괜찮아요.”
줄곧 조프리를 안고 있던 유모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 보려 하는 것 같지만, 칭얼거림은 어느새 울음이 되었다.
어느덧 식기를 내려놓은 에스메랄다의 손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차마,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제르민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곧장 에스메랄다의 무릎에서 내려간 그는 유모에게서 조프리를 안아 들었다.
“정말이지 넌 울보구나.”
작은 몸으로 어찌나 야무지게 아이를 받아 드는지. 제르민은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 조프리를 달래었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하지 못한 그녀와 달랐다. 오래지 않아 울음소리가 잦아들었고, 제르민이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이제 조용해졌네요. 한번 안아 보실래요?”
굳은 표정으로 조프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못 할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뜻이 있으셨으니 이 아이들을 거두셨을 터, 당분간은 제가 더 보살필게요.”
“……면목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필요한 법이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게요.”
에스메랄다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만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데.
차마 삼키지 못한 한숨을 토해 내자 속이 거북했다.
* * *
전투를 끝내고 주둔지로 돌아온 오멘을 반긴 소식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2년 차, 그의 종자로 지내며 기사 서임을 준비 중인 빌레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멘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네 잘못은 아니지.”
“……죄송합니다.”
이후 오멘은 꽤나 오래도록 미간을 문질렀다. 손에 쥔 서신의 문구가 두통을 선물로 준 탓이다.
「행정관들도 이런 일은 해결이 불가능하다고만 하고… 점점 심해지면서 애가 망가져 가는 게 보이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이번 일에 일전 그 몫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죄송하지만 꼭 부탁드려요.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로리아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소피아가 일부 무리에게 독점되어 ‘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몇몇 인원이 모여 특정 인물을 연달아 지명할 경우 벌어지는 일이었다. 잦은 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자행되고 있었다. 한 명의 여인에게 하한 금액의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을 스무 번 이상 지급할 경우 우선 지명권을 갖게 되니까.
그럴 경우 여인 측에서는 지명을 거부할 수 없다. 언젠가, 그가 홀로 그려 봤던 가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미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이 소피아처럼 독점당하고 있다. 여인들에게 돌아갈 보수를 늘리기 위한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악질적인 짓이었다.
하지만 다수에게 돌아가는 보수가 전반적으로 상승한 순기능도 있어서 해당 제도를 폐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이와 언제든 정사를 가질 수 있다는 보상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조건이었으니까. 해서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하한 금액의 다섯 배를 지급했고, 보다 확실한 금전 유통의 활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오멘은 로리아의 서신을 다시 확인하고서 무거운 한숨을 반복했다.
「이번 일에 일전 그 몫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로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에게 타인이 보는 앞에서 정사를 가지는 대신 매번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했다. 직접적인 금전은 주지 않으나, 금전이 필요한 일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의원을 보내 주거나 겨울을 날 식품을 마련해 주는 식으로.
그리고 오늘날 로리아는 과거 소피아가 보는 앞에서 정사를 가졌던 것에 대한 대가를 언급한 것이다. 덕분에 오멘은 홀로 정한 원리 원칙을 저버리고 손을 쓸 명분이 생겼다. 하지만 꼭 체한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여기나 저기나, 왜…….’
이건 로리아가 수치를 감내하고서 얻어 낸 기회였다. 아무리 동성이라지만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정사를 나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이런 부탁을 하는지. 로리아를 생각할 때도, 소피아를 생각할 때도 마음이 무거웠다.
‘나도 알고 있어.’
그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
― 지, 지, 지명을 부탁드리려고…….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원칙을 들먹이며 뿌리친 그 애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빌레트, 가서 데려와라. 지휘관 특전으로 빼내고, 위약금은 통상의 세 배를 지급하도록.”
소피아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음에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야 만다.
“대상은 라몰 소피아, 히프론 로리아, 두 명이다. 다음 바의 달까지 내 전속으로 올려 두거라. 병영 진입 문제는 내가 손을 써 두마.”
소피아를 빼내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로리아가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녀에게 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두 사람을 모두 데려오기로 했다.
“예, 테노리엘 경.”
종자인 빌레트가 서둘러 오멘의 천막을 빠져나갔다. 남부에 온 이래 나날이 늘어만 가는 한숨은 쓰라렸다.
* * *
중앙군이 책임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아흐레간 밤낮없이 진행된 전투에서 겨우 해당 지역을 수복한 오멘은 함께 출전한 중앙군과 함께 주둔지로 복귀했다. 그가 전투를 나간 사이 이동한 병영은 기존에 있던 곳보다 이틀 거리를 더 남하한 상태였다.
“라카난 경께서는 6일 내로 진지를 구축하겠노라 전달하셨습니다.”
중앙군 부대와 교대하여 추가 남하를 시작한 라카난의 부대에서 언질한 시일은 6일. 보좌관의 보고를 받은 오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나흘간 휴식, 닷새째부터는 다시 전시 체제로 전환한다. 언제고 출전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예, 테노리엘 경.”
“곧장 병력 보고 및 회의를 시작할 테니 지휘부는 30분 이내로 정비를 마치고 중앙 천막으로 모이라고 전하게.”
보좌관의 대답을 들은 오멘이 곧장 천막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도, 돌아오셨군요…….”
내부에서 병사들의 가죽 갑옷을 꿰매고 있던 로리아와 소피아가 벌떡, 일어났다.
“마저 하십시오. 회의가 있어서 씻고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혼자서 하는 게 익숙합니다.”
그녀들이 전투가 오가는 지역에 머물 수 있게 된 건 지휘관의 특전 덕분이었다. 부대 총지휘관의 경우 5인, 수석 지휘관과 차석 지휘관은 3인과 1인. 특정 여인을 전속으로 두어 언제든 동행시킬 수 있었다.
위험 지역까지 데려가는 것이기에 지급해야 하는 보수의 단위가 달라지지만, 부대의 지휘관들이 전속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휘하의 기사들을 다독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오멘은 민간인들을 전투 지역에 데려오는 것이 꺼려져 하지 않던 짓이었다. 소피아가 독점되고 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은 오멘이 힐끔, 소피아를 확인했다. 눈치를 살피며 초조하게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 위로 기억이 덧씌워졌다. 병영에 도착한 첫날 저를 보자마자 엉엉, 울어 버리던 얼굴이 자꾸만.
다행히도 지금은 그때에 비해 안정을 찾은 것 같았으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항상 손끝이 저릿했다. 충격적이었던 그 정사가 계속 떠올랐으니까. 로리아가 말해 주기를, 병영에 도착했을 무렵 소피아의 몸에는 억센 아귀힘으로 인해 생긴 손자국이 가득하다고 했다. 군법에 걸릴 만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아니나 폭력과 다를 바 없는 정사를 즐기는 이들에게 독점되어 온 탓이다.
저도 모르게 그 광경을 상상해 버린 오멘은 서둘러 시선을 거두며 이를 악물었다. 짧게나마 상태를 확인했으니 되었다고. 그는 억지로 소피아를 머릿속에서 몰아내며 천막 뒤로 향했다.
도색을 지우고 종자들이 준비해 둔 물로 마수의 피와 살점을 떼어 내는 건 금방이었다. 몸을 씻어 낸 오멘이 수건 한 장을 허리에 감았다.
이후 천막으로 돌아오자 군의관과 신관이 대기 중이었다. 전투 중 입은 부상을 살피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전투에선 큰 부상이 없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자 신관이 가벼운 축복을 내려 주었다.
“끝났습니다. 휴식기 동안 오른팔의 사용을 자제하시고, 가벼운 축복을 받으시며 관리하면 다음 출전까지 충분히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생했네. 물러가도록.”
군의관과 신관이 떠난 후 오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천막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꽉 말아 쥔 오멘이 숨을 골랐다. 그 직후 그는 종자들이 가져온 군복을 입으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리아.”
“네?”
다시 가죽 갑옷을 꿰매는 데 집중하고 있던 로리아가 대번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등진 채 묵묵히 군복을 갖춰 입은 오멘이 말했다.
“……오늘 밤에 가능하겠습니까?”
“몇 시까지 돌아오면 될까요?”
“11시까지는 끝내 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그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게요.”
“부탁합니다.”
최근 들어 빈번해진 부탁에 괜스레 귀가 달아올랐다. 병영 내에 로리아가 없었을 때야 꾹 눌러 참았지만, 눈앞에 있으니 참는 게 쉽지가 않았다. 실제로 지난 사의 달 내내 전투가 끝나고 돌아올 때마다 로리아와 살을 섞었다.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귓불을 만지작거린 오멘이 재빨리 천막을 빠져나왔다.
* * *
“하앙! 앙!”
거친 숨소리와 높은 교성이 뒤섞인 곳에서 자극적인 마찰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로리아의 품을 파고들어 허리를 흔들던 오멘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곧장 응해 오는 여체는 따스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고 누군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던 오멘은 그 온기에 매달렸다. 평소보다 더 몸을 밀착한 그가 이를 세우며 로리아의 혀를 깨물었다.
“흡!”
연결된 하체에선 찌걱거리는 소리가, 맞물린 입술 사이에선 츄릅거리는 소리가 엉켜 들었다. 오멘은 저도 모르게 미끈거리는 로리아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골반과 허벅지는 그의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좋, 습니까?”
앞선 두 번의 정사에서 로리아를 신경 써 주지 못한 오멘이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울부짖던 로리아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들이… 후우, 거칠게, 굴지는 않고요?”
전투가 끝난 직후의 기사들은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당장 오멘만 해도 후방에서 그녀들을 품을 때와 달리 성급하고 거칠게 제 욕심부터 채운 후였다. 해서 염려가 되어 물었더니.
“으응, 응! 저, 저희한테, 손도 아앗! 안, 대세요, 흐읏.”
이번에는 오롯이 로리아의 쾌락을 위해 허리를 치대던 오멘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덕분에 겨우 숨을 고르게 된 로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구음만 요구하시고, 삽입은 하지 않으세요. 기사분들 모두가요.”
“왜…….”
오멘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답을 찾은 탓이다. 평범한 부대라면 총지휘관과 여인을 공유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여자는 욕망을 분출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안정을 주는 존재에 가까웠으니까. 어떻게 보면 생존과 관련된 문제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문제의 지휘관이 오멘이기에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그는 단순한 상관이 아니라, 황후 에스메랄다의 오라비이자 황제 아르페시스의 처남이니까. 실제로 아르페시스가 그의 부대에 방문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기에 휘하의 기사들이 실감하는 바는 더 컸으리라. 결국 자진해서 그의 눈치를 살핀 기사들이 정사를 피하게 된 것 같았다.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그가 나서서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라고 종용하기도 애매했다. 로리아와 소피아의 입장에선 지금이 나을 테니까. 기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면 그가 뒤로 빠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오멘이 여자들과 동침을 하지 않으면 참아 왔던 기사들이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없었다면 모를까, 눈앞에 당장 품을 수 있는 여인이 있는 지금은……. 자신의 인내심에 처음으로 실망한 오멘이 속으로 혀를 찼다.
‘……못 본 척해야 하는 건가.’
복잡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병영 생활은, 지낼 만합니까?”
“후, 후방에 있을 때보다, 나앗, 앙! 정말, 감사…….”
오멘은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입을 맞추었다. 버거웠던 탓이다. 그는 로리아와 소피아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녀들의 입에서 감사 인사가 나올 때면 속이 좋지 않았다.
오멘은 오래지 않아 절정에 이른 그녀의 허벅지에 파정하고서 잠을 청했다.
아흐레간 거듭된 전투는 물론, 연달아 치른 세 번의 정사까지. 오멘이 기절하듯 잠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곤한 와중에도 소곤소곤, 귓가에 닿는 목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지내도 되는 걸까요?”
오멘의 특전으로 인해 병영에 머물게 된 이상, 책임도 오멘의 몫이었다. 전속 여인들에게 지급하는 보수는 물론, 그녀들이 먹을 음식과 옷 등. 전체적인 의식주를 오멘의 사비에서 지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든 총지휘관들이 전속 여성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이유였다. 후방에서 관계를 가질 때와 달리 액수의 단위가 달라지니까.
그런고로 두 여인의 숙소는 당연히 오멘의 천막이 되었다. 그의 허락이 없다면 다른 사내는 그녀들을 건들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모든 부담을 그가 지고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춰 가며 대화 중인 이들을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도 좀 걱정되기는 해. 나중에 테노리엘 경에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
“무, 문제라니, 왜요?”
“직접 명령하신 건 아니지만, 일단 그분 때문에 기사들이 우릴 피하는 셈이잖아.”
“…….”
“책임과 권한은 경이 가지고 계시지만… 후방에서랑 달리 지휘관 특전으로 우릴 병영에 데려오신 거라서. 이게 지휘관만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부대 내의 기사들을 위한 제도이기도 하거든? 보통은 지휘관이 휘하 기사들을 다독이기 위해 전속 색인들을 데리고 다녀. 혼자 독차지하는 경우는 들어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애매하다는 거지. 누군가 떠들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 나도는 건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 그래도 경께서 저희를 부러 독점하시는 건 아니고… 혹시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내일은 제가 다른 분과 해 볼게요. 언니는 경을 챙기셔야 하니까, 제가…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괘, 괜찮으니까 제가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탁한다고 해결될 문제일지……. 경께서 황후 폐하의 오라비시다 보니 기사들이 멋대로 눈치를 살피는 거잖아. 아무래도 같은 사람과 정사를 가지는 게 불편한 거겠지.”
할 수만 있다면 듣지 않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들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게 다 그 소문 때문이야. 경께서 원래 색인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던 분이라서 이상한 말이 붙어 버렸어.”
“아…….”
“너도 들어 봤지? 우리에게 홀딱 반하셨다고.”
키득키득, 숨죽여 웃는 목소리에 얼굴이 벌게졌다.
“정작 반한 건 우리인데 말이야. 그렇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 뒤로 작게나마 ‘네…….’ 하고 따라붙는 목소리는 소피아의 것이었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한 오멘이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에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자는 척, 하며 숨을 죽이고 있기도 잠시.
“이러다가 깨시겠다. 그만 떠들고 우리도 자자.”
“네…….”
로리아가 소피아를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곧 고른 숨소리가 천막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한숨을 내쉰 오멘이 몸을 웅크렸다. 그녀들의 대화가 자꾸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냥, 도움을 준 사람이니까.’
그래서 호감을 느끼는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지만 열이 오른 얼굴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 *
최근 테노리엘 저택은 한적해졌다. 찾아오는 방문객마저 사절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찌 보면 삭막하기까지 했다. 날이 점차 차가워지기 시작한 어느 날, 루이자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루이자가 하혈을 하면서 알려졌다. 가문의 주치의는 산모에게 유산기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레스가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후계를 가지게 된 탓일까? 테노리엘의 가신들은 루이자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날이 선 상태였다. 외부적인 불안 요소는 모조리 차단되었으며, 루이자를 만날 수 있는 건 직계 가족과 측근 시녀들 뿐이었다.
루이자 역시 혹시나 아이가 잘못될까 싶어 외출을 줄이고 저택에서 두문불출했다. 첫 임신인 것은 물론, 유산기가 있다는 의원의 판단에 모든 것을 조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전에도 속옷에 피가 묻어난 탓에 루이자의 심신은 불안정했다.
“부인.”
마음을 달랠 겸, 아이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작명 책에 매달려 있던 루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에서 영지 업무를 살피고 있던 아레스였다.
“아레스, 왔어요?”
서재의 소파에 앉아 있던 루이자가 손을 뻗었다. 그에 아레스는 훌쩍 다가가 손을 마주 잡았다.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온 뺨에 입을 맞출 때면 언제나 그렇듯 행복해진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루이자의 옆에 자리를 잡은 아레스가 말했다.
“오늘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까?”
“네……. 아들일지, 딸일지… 성별을 모르니 고르기가 힘들어요.”
“아들 이름 하나, 딸 이름 하나, 그렇게 두 개를 지으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럼 남는 이름은 어떻게 해요?”
“둘째가 태어날 때 주면 되겠죠.”
“둘째도 성별이 같으면요?”
“그때 또 새 이름을 지어야죠.”
전부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지. 루이자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최근 그녀의 감정 기복이 요란하다는 건 저택 내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레스는 그 점을 입에 올리는 대신 웃는 낯으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투정과 짜증이 많아졌지만, 아레스의 눈에는 그게 마냥 예뻐 보였다. 평소에도 그런 면을 좋아했지만 최근에는 유독 더. 덕분에 최근 아레스의 얼굴에선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내 방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정했다가 더 예쁜 이름이 생각나면 어쩌죠?”
“바꾸면 되죠.”
“치, 왜 그렇게 다 쉬워요?”
아레스는 소리 내어 웃고야 말았다.
“왜 웃어요?”
“부인이 이렇게 물을 때마다 예뻐서 그래요.”
뺨이 붉게 물들어 오르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때때로 이 모습을 보고 그와 똑같이 설렜을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마 남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테지.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질지도.
“예쁘긴 뭐가요.”
“부인은 예뻐요.”
“살이 쪄서 입던 드레스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고요. 매일 저택에서 빈둥거리면서 먹기만 하니까…….”
“……난 지금의 부인이 더 좋은데요.”
“그럼 말랐을 때의 난 별로였다는 건가요?”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뾰족해지는 눈초리를 마주할 때면 심장이 철렁거렸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다고 루이자를 미워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레스는 이미 그녀를 사랑해 버렸으니까.
“그럼 살집이 통통한 여인과 혼인하지 그랬어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팩, 하고 내친 루이자는 살벌한 눈초리로 아레스를 노려보았다. 여유롭고 따듯하던 아레스의 미소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이며, 마음의 안식처가 된 주치의의 말을 떠올렸다.
― 임신 초기에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품고 계신 부인께서도 직접적으로 그 존재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요. 해서 짜증이나 불안감을 표출하는 빈도가 늘어날 수 있죠. 무엇보다 부인들의 보호 본능이 강해지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실 수가 있어요. 당신께서 접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아이와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외부적인 요인을 위협으로 느끼는 순간 화를 내실 수도 있고, 심할 경우 울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일부 귀부인들 같은 경우에는 부군의 마음이 떠났다고 여겨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아이 때문에라도 부부 관계를 멀리하라는 조언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불안감이 크죠. 그럴 때는 후작님의 애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표현해 주셔야 합니다.
주치의가 몇 번이고 숨을 골라야 했을 정도로 긴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듣는 순간 귀에 쏙 들어왔다. 실제로 그가 한 말은 몇 번이고 현실이 되어 아레스를 찾아왔다. 오늘도 보라. 굳이 다른 여인을 운운하다니.
‘그러니까 이건…….’
혹시나 임신을 하면서 변한 자신의 체형 때문에 아이도 저도 아레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 어떻게 하나, 같은 불안감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루이자 몰래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레스가 한층 더 몸을 가까이 붙여 앉으며 속삭였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어떤지 부인도 알잖아요.”
“내가 뭘 아는데요? 당신이 기분 내킬 때나 뜨문뜨문 말해 주는 그걸 내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요?”
저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알고 있다는 시인이면서.
아레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루이자가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원할 때면 난처했다. 타고난 성정이 부드럽고 나긋한 것과 달리, 아레스는 의외로 이런 표현에 서툴렀다. 에스메랄다에게 애정을 줄 때도 페드로처럼 사랑을 직접 입에 담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말보다는 몸으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
“이거, 놔요. 놓으라니까!”
바르작바르작, 몸을 비틀어 아레스의 품을 빠져나가려던 루이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레스는 그런 그녀를 따라가 가볍게 입술을 훔쳤다.
“부인, 내 마음을 몰라요?”
“그런 거 내가 알 게 뭐라고요.”
입맞춤 한 번에 살짝 누그러졌지만 아직 부족해 보였다. 아레스는 루이자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달래려 했다. 루이자는 한동안 얌전히 그의 애정을 받아들였다. 말 그대로 한동안만.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을 더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러다 아레스의 목을 껴안으며 깊게 혀를 얽어왔다. 이게 웬 횡재람. 아레스는 기꺼운 마음으로 루이자를 끌어안았다. 빈틈 하나 없이 맞물린 서로의 입술 사이로 타인이 절대 볼 수 없는 노골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축축한 살덩이는 서로를 옥죄려는 것처럼 탐욕스러웠다.
“응, 으음.”
어느새 앞으로 쏠린 아레스의 몸이 루이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뒤로 허리를 젖힌 채 아레스에게 매달린 루이자의 손짓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단단한 가슴팍을 더듬는 손길에 몸이 불같이 달아오른다.
루이자의 타액과 숨결을 멋대로 갈취해 꿀떡꿀떡 삼키는 데 열중하기도 잠시. 한껏 숨이 거칠어진 루이자를 위해 잠시 입술을 거둔 아레스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부드럽고 달콤한 살결을 따라 뺨과 귀, 목덜미를 핥았다.
“마, 만져 줘요.”
느긋하게 그녀를 맛보던 중이었는데. 귓가에서 들려온 속삭임에 순간 이성이 끊어질 뻔했다. 침대 위에서의 버릇이 나오기 전에 이를 악문 아레스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루이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그가 힘겹게 말했다.
“그랬다간 내가 못 참아요.”
“하면 되잖아요.”
“……안 됩니다. 주치의는 아직 부부 관계를 가지기엔 이르다고 했어요.”
울먹울먹, 표정을 구긴 루이자가 그를 팩 밀어내며 말했다.
“그냥 내가 살이 쪄서 싫은 거죠?”
대화가 왜 또 이렇게 흘러가는지.
아레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루이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루이자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레스가 그녀의 손을 제 아랫도리로 이끈 탓이다. 그녀가 삐죽이며 입술을 내밀 때부터 물려 보고 싶어서 딱딱해진 참이었다. 조금 전 입맞춤 때문에 꺼덕거리며 음란한 액을 줄줄이 뱉어 내기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싫다니.
“내 속옷은 이미 축축해요. 부인 때문에.”
루이자의 몸을 바짝 끌어안은 아레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을 보고 있으면 난 항상 이런걸요.”
“거, 거짓말…….”
“정말인데.”
푸흐흐, 웃은 아레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루이자를 안아 들었다. 살이 쪘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아레스가 한 손으로 번쩍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루이자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아레스가 진득한 음욕을 담아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제 위에 앉아 있는 루이자를 보고 있자니 짜릿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어느새 그에게 길든 듯, 당연하다는 듯 이 자세를 받아들이는 루이자가 페드로를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서.
“정말이라는 걸 보여 줄 테니까, 풀어 줘요.”
루이자의 목덜미를 쪼던 아레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에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도 얼굴을 붉힌 루이자가 아레스의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아레스는 그대로 루이자의 입술을 삼키며 직전의 입맞춤을 반복했다. 두 개의 살덩이는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열렬하게 서로를 문질렀다. 루이자의 호흡이 가빠진 것을 느낀 아레스가 입술을 맞댄 채 웅얼웅얼, 속삭였다.
“잘 봐요, 부인.”
그들의 입술을 연결한 은색 실타래가 길게 늘어졌다. 아레스와 눈을 맞추고 있던 루이자의 시선 역시 아래로 향했다. 그에 맞춰 아레스가 수음을 시작했다. 루이자는 저러다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 사이사이를 벌려서 볼 건 다 보고.
‘귀여워 죽겠네.’
아레스는 그녀의 손등을 핥으며 속삭였다.
“제대로 봐야죠. 내가 당신 때문에 어떻게 발정하는지.”
주춤주춤, 손을 거둔 루이자의 시선이 아래에 고정되었다.
“하, 하아…….”
선단을 쓸어 올린 아레스의 손이 예민하기 그지없는 귀두 부분을 문지르고 있었다.
“보입니까?”
빨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 루이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인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뻐끔뻐끔.”
아레스는 그런 그녀를 눈에 담으며 제 상태를 굳이 말로 짚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음탕하게 움직이고 싶어서는, 쉬지 않고 뱉어 내는 것들이 보여요?”
잠시 손을 멈춘 아레스가 루이자를 비스듬히 고쳐 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수음을 이어 가도 그녀가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이미 평소보다 많이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인해 아레스의 성기가 번들거렸다.
“기억납니까? 흐으, 부인이 내 위에 올라탄 채로 울며불며 더는 못 하겠다고 했던 날.”
“그, 그건……!”
“내 생각에는 그날이었던 것 같아요. 하아, 아이가 잉태된 게.”
숨을 헐떡이며 루이자의 목덜미를 깨문 아레스의 흉부가 거칠게 들썩였다.
“페드로 얘기를 꺼냈더니, 흥건하게 젖어서는.”
“그, 그만, 왜 자꾸 그 사람 얘기를…….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후우, 흐, 싫어요?”
“다, 당연하잖아요.”
“거짓말.”
벌을 주려는 듯, 루이자의 귓가를 살짝 아프게 깨문 아레스가 신음했다. 페드로의 얘기를 꺼내자 사정감이 몰려왔다. 혼전에는 이런 식으로 관계 중에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불나불. 페드로를 언급하며 관계를 가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 녀석 얘기를 꺼내면 흥분하면서. 하아, 신이 나서는 엉덩이를 흔들었잖아요.”
그가 홀로 채워 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음탕하게 젖어 들던 루이자를 기억한다. 두 사람의 침대 위에 페드로가 있는 날과 없는 날, 루이자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레스의 말에 루이자가 당황한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탓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꼭, 하아, 셋이서 하는 것 같아서. 윽…….”
“그게 무슨…….”
“녀석이 살아 있었으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루이자의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사정감을 참느라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한 아레스가 숨을 헐떡였다.
“나도, 그 녀석도 물러나지 않았을 테니까. 서로 나누는 한이 있어도 부인 옆에 붙어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겁니다.”
아레스는 딸꾹질을 시작한 루이자의 손을 끌어갔다. 보드랍기 그지없는 살결이 닿으니 절로 허리가 들썩거렸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이전보다 더 빠르게 흔들자 짜릿한 쾌감이 쌓여 갔다.
“하, 으……. 그럼 당신은 우리 둘을 발치에 두고 고민했을까요?”
순순히 손을 내어 주었던 루이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히 가정을 하는 것뿐인데도 황홀한 쾌감과 씁쓸한 패배감, 기이한 만족감이 뒤섞였다.
“하나만 가지기엔 아까우니까, 우리 둘을 다 가지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윽, 하고 신음을 삼킨 아레스의 손짓이 빨라졌다.
“우리 형제가, 어딜 내어 놔도 빼어난 편이라.”
뻐끔거리며 투명한 액을 흘려 대던 성기가 한층 더 부풀었다.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쾌락이 치고 올랐다.
“아, 루이……!”
루이자의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본 아레스가 몸을 떨었다.
“윽……!”
곧 흥건한 씨물이 루이자의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그걸 본 아레스는 잦아들기도 전에 거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그의 얼굴도 루이자의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이렇게 말로 전달하는 건 쑥스러웠다. 아레스는 루이자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눈을 돌려 버렸다. 그게 꼭 어리숙한 소년 같아서, 푸흐흐 웃어 버린 루이자가 손을 꼬물거렸다. 사내의 씨물에 의해 축축해진 손은 사정 이후 예민해진 아레스의 성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레스는 눈을 꾹 감은 채 그녀의 손길을 만끽했다. 쾌락을 지나 나른해진 몸과 달리 심장은 벅찬 박동으로 뛰었다. 행복했다.
잠시간 후희를 즐기던 아레스가 루이자의 몸을 고쳐 안았다. 손이고 옷이고, 여기저기 흔적이 남았지만 사용인을 부를 생각은 없었다.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쪽쪽, 소리를 내며 루이자의 뺨을 훔친 아레스의 녹안은 애틋했다.
“내가 표현이 부족했다면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말할 수 있게 노력해 볼게요.”
루이자가 수줍게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품에 꼭 껴안은 아레스가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계속 서로를 안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가 했더니.
“……왜.”
오래지 않아 루이자가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 잠깐 사이에 미소가 사라진 루이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레스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해서 무어라 물어보려던 찰나.
“……왜 다시 딱딱해지는 거예요?”
“그야……. 한 번으로 부족한 거 알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답한 아레스가 픽, 웃었다. 한두 번 살을 섞은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이렇게 된 김에 한 번 더 볼래요?”
아레스는 자연스럽게 제 성기를 쥐며 루이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 * *
대륙력 1440년 카 3일 자로 다시 기사 서임을 받은 페르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임 직후 황실 기사단을 개편하기 전까지 혼인을 하라는 에스메랄다의 재촉을 받은 탓이다.
이미 그의 혼례 얘기가 나오고 1년이 넘게 흘렸다. 에스메랄다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페르멘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 유예 기간을 선고받은 그는 매일 같이 선 자리에 불려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귀찮은 사교 행사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던 그가 택한 방식은 중매. 자신을 원하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계획이었다. 아레스와 에스메랄다가 합심한 덕에 무려 네 명의 귀부인들이 그의 혼사에 달라붙었다. 덕분에 2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선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끙.”
오전 티타임, 점심 식사, 그리고 저녁 식사까지. 오늘은 무려 세 건이다. 장소를 옮겨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페르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겨우 오전 티타임이 끝났는데 벌써부터 지쳤다. 남은 두 번의 만남에서 과연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피로와 더불어 끊이지 않는 회의감에 몸이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 적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사무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찝찝했다.
‘그냥 계속 사교 행사에 나갈 걸 그랬나?’
지금의 상황을 후회하는 건 잠시뿐이었다. 결혼할 배우자를 찾겠다고 사교 행사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건 더 이상 못 해 먹겠으니까. 행사장에서 여러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도 이제는 지쳤다. 반면 이런 식의 선 자리에서는 한 명만 상대하면 된다.
페르멘은 몸을 늘어트린 채 휴식을 취하는 데 집중했다. 미리 예약해 둔 별실은 고요했고, 그 속에서 상념에 젖어 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확실히, 내가 먹음직스럽긴 한가 봐.’
그와의 혼인을 원하는 영애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하긴.’
황후의 오라비, 황제의 처남,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테노리엘 가문의 계승권을 가진 직계. 평범한 이들이 가지지 못한 배경이기는 했다. 그래서 배우자를 찾는 게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흐아암.”
페르멘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시 쪽잠을 잤던 것 같다. 최근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일정에 나름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랜 훈련에 단련된 그는 별실로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를 들은 후 눈을 번쩍 떴다. 조금 다급한 듯, 발걸음 소리의 간격이 짧았다. 그리고 살짝 어긋나 있기도 했다.
‘절름발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이번에 만날 영애의 신상 정보를 떠올린 페르멘이 빠르게 잠기운을 떨쳐냈다. 주머니 속에 든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처음부터 지각인가.’
아직 만나 보지도 않았는데 지각생이라는 꼬리표를 달다니.
‘마차가 밀렸는지, 늦게 출발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약속 시간을 우습게 아는 것일지도.
마지막 경우라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제외할 생각이었다. 회의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도 조건을 보고 상대방들을 고른 것이었으니까. 최소한의 조건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 이미 몇 번이고 그런 여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 참이다. 더 이상은 사양이었다.
곧 노크로 자신의 방문을 알린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트 영애.”
사 게만 아마트 멜리안, 그녀는 아마트 남작가의 장녀였다.
“테, 테노리엘 경,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제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불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마주한 여자는 작았다.
그의 어깨쯤에 올까 말까 한 키. 밀색에 가까운 옅은 색채의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동그랗고 순한 인상임에도 묘하게 이목구비가 선명한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데다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그것을 애써 참느라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우선 이쪽으로.”
사정을 모르는 이상 무작정 괜찮다고 상대방의 실수를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해서 사과를 받는 대신 말을 돌려 버린 것이고.
“가, 감사합니다.”
맞은편으로 향해 의자를 빼 준 페르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다리를 저는 게, 어딘가 다친 것 같기도 하고. 상기된 뺨, 흐트러진 호흡, 그리고 불편해 보이는 다리까지.
‘뛰어온 건가?’
페르멘은 아마트 남작가에 마차가 없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만 했다.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는 내용은 있었지만.’
영지가 있어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는 있으나 그 금액이 많지는 않다고. 멜리안을 후보군에 넣은 귀부인조차 얘기를 꺼내며 눈치를 보았을 정도였다. 테노리엘과 수준이 맞지 않는 집안이라고. 그럼에도 멜리안이 오늘 그와 선을 보게 된 건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금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페르멘이 간단한 정보를 들춰 보는 사이 멜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 직후 그는 창문을 살짝 열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사전에 전달받은 바에 따르면 따로 기피하는 음식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어……. 아, 네. 뭐든 잘 먹어요.”
그래 봤자 새 모이처럼 조금, 그것도 야금야금 먹겠지. 페르멘은 언제나처럼 앞에 사람을 두었음에도 혼자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하면 제가 미리 준비한 음식으로 괜찮겠습니까? 혹시 따로 원하는 음식이 있다면 메뉴를 설명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셨으면 그걸로 괜찮아요.”
“그럼 식사부터 하죠.”
간결하게 답하면서도 페르멘은 또 한 번 회의감을 느꼈다.
‘이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했더라.’
지난 2주간의 기억이 주르륵, 흘러갔다.
애써 한숨을 참은 그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내어 오라 말했을 때였다. 맞은편에 있는 멜리안이 꼼지락거리기에 저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낸 채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콕콕, 찍고 있었다. 아마도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빤히 보기도 잠시, 어느덧 페르멘의 시선은 그녀의 미간에 닿아 있었다. 살짝 일그러진 게 자꾸만 눈에 걸렸다. 결국 페르멘은 종업원이 나간 후 먼저 말을 꺼냈다.
“다쳤습니까?”
“네?”
“다리가 불편한 것 같던데요.”
“아…….”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 어… 그게…….”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서요.”
“어려운 게 아니라…….”
기가 죽은 듯 웅얼거린 그녀가 페르멘의 안색을 살폈다.
“변명처럼 들릴까 봐서요.”
“네?”
“마차 바퀴가… 도중부터 삐걱거리는 게 상태가 이상했어요.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싶어서 걸어왔는데 길을 착각해서, 구두를 신고 뛰어 본 건 오랜만이라 발목이…….”
제 입으로 말을 하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 건지, 멜리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뛰어온 겁니까?”
“네, 네, 늦을 것 같아서요.”
어쩐지. 페르멘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던 멜리안을 떠올렸다. 그녀의 지각으로 인해 남아 있던 불퉁한 평가가 사라졌다.
“……시녀를 통해 연락을 주셨으면 기다렸을 텐데요.”
“그, 마부만 동행한 참이라…….”
“아.”
“평소에는 시녀랑 함께 나오는데, 휴가를 준 상황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리나가 아이를 가져서……. 초기에는 조심하는 게 좋다고 들어서 영지에서 쉬라고 했어요.”
“하녀는 어쩌시고요? 그녀라도 대동하셨으면…….”
“저희는 리나만……. 새, 새로 고용할 시간이 없었어요. 황도로 오는 것도 급하게 잡힌 일정이라…….”
말이 길어질수록 멜리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기만 했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얘기를 줄줄이 하는 게 창피하기라도 한 듯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페르멘의 눈동자가 또르륵, 옆으로 굴러갔다.
‘나 지금 실수한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하녀와 시녀의 업무는 구분된다. 하녀가 세탁, 청소, 요리 같은 가사 업무에 관여한다면 시녀는 주인 일가의 시중을 든다. 세숫물을 준비하거나 의복을 정돈하고 치장을 돕는 등, 직접적으로 주인 일가와 마주치는 것이다.
페르멘은 그 두 직업군이 당연하게 분류된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도 그렇게 살아왔으리라 단정해 버렸다. 금전 사정상 그들을 구분하여 고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입장도 있을 텐데.
“……혹시 제 질문이 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발목은 괜찮습니까? 의원을 데려오라 할까요?”
“아, 아뇨.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멜리안은 어째서인지 기가 죽은 얼굴로 계속 시선을 피했다. 페르멘 역시 자신에게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수치를 준 것 같아서 쉽사리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 미치겠네.’
부유한 처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돈이라면 그가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는 곧 개편될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내정되어 있는바, 향후 봉급도 나올 테고 모친과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상당했다. 외가에서 그의 몫으로 떼어 준 것도 있고, 혼인을 통해 분가를 할 경우 테노리엘 가문에서 법적으로 양도받을 수 있는 재산도 남아 있다. 아레스가 재산 문제로 그를 홀대할 리는 없으니 남은 평생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는다 해도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규모였다.
만약 가정을 일구고 가족이 생길 경우 그들을 건사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의미였다. 해서 그가 봐야 할 조건에서 지참금은 완전히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멜리안에게 대놓고 말하기도 애매모호한 것이.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녀가 가난하다고 못을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페르멘은 가난에 대해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귀족이 가난해 봤자 하루 세끼를 굶는 게 당연한 빈민층과는 다르니까. 이런 선 자리에 나오고, 일정 시기나마 중앙 사교계에 참석한다는 건 끼니를 챙기는 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페르멘이 감흥을 느낄 정도의 가난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아마트 남작가가 풍족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어려워졌지만.
‘이럴 땐 어떻게…….’
그는 평생 전선에 갈 생각으로 검에 집중해 왔다. 사교계를 등한시한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해서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에 사람을 즐겨 만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의 주변에는 멜리안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침묵을 거듭할 때였다. 종업원들이 음식을 가지고 도착했다. 준비된 식사는 정찬용. 사람이 들락거리며 소문을 퍼트릴 게 싫어서 미리 지시한 것이었다.
페르멘은 얼음이 들어간 음료잔을 제 앞에 놔 주는 종업원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영애께 드리게.”
“예, 테노리엘 경.”
“아,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나간 후 페르멘은 창가를 돌아보았다. 땀이 어느 정도 식었다면 찬 바람은 좋지 않으리라.
“아직 많이 덥습니까?”
“아, 아뇨. 감사했어요. 추우시죠? 바로 닫을…….”
멜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다친 발목으로 이리저리 움직여서 좋을 리가 없는데.
“제가 하죠. 뭐 어려운 일이라고.”
페르멘은 그녀를 만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닫고 돌아보자 멜리안이 얼음이 든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따로 준비하길 잘했다.
“아!”
라고 생각하자마자 멜리안이 잔을 놓쳤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페르멘이 흠칫, 멈추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진 음료가 아래로 흐르기 직전. 페르멘은 멜리안이 앉아 있는 의자를 뒤로 쭉 잡아 뺐다.
“으아!”
끼익 하고 바닥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음료가 테이블 밑으로 흘러내렸다. 다행히도 멜리안과 그녀의 드레스는 페르멘의 손에 의해 구출된 후였다.
또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이것도 실수 같은데.’
옷이 젖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을 뻗기는 했는데, 처음 만난 사이에 몸을 덥석 잡기도 그렇고, 결국 의자째로 빼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멜리안의 드레스를 버리지 않았으니 다행이겠지.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자면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를 이렇게 물건처럼 휘두르는 게 신사적인 태도는 아니리라.
“……놀, 랐다면 미안합니다.”
“그, 제가 더 죄송해요. 너무 긴장을 해서…….”
“우선 자리부터 옮기죠.”
종업원들을 불러 다른 별실로 옮긴 페르멘이 힐끔, 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 다리를 저는 게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근육을 다친 거라면 며칠은 고생할 텐데.’
일단 최대한 천천히 에스코트를 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멜리안이 거절한 이상 그가 멋대로 의원을 부르기는 애매했다.
두 사람이 이동하는 사이 종업원들도 서둘러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다시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음에도 특별히 오가는 말이 없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보통은 상대방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으니까. 결국 이어지는 침묵을 버티지 못한 페르멘이 먼저 말했다.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네, 맛있어요.”
그게 입에 발린 대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멜리아는 정말 ‘잘’ 먹고 있었다. 깨작깨작,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포크로 소스나 찍어 먹던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근 2주 만에 처음이었다.
그에 페르멘의 태도가 한층 유해졌다. 그는 저와 가까이에 있는 음식을 덜어 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것도 먹어 봐요.”
“감사합니다.”
접시를 받아 가서 먹는 모습이 꼭.
‘다람쥐?’
볼이 빵빵한 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페르멘은 밖으로 흘러나올 뻔한 웃음을 삼켰다.
“저… 테노리엘 경은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페르멘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는 조금 얼빠진 얼굴로 멜리안을 응시했다. 취미에 관한 질문은 근 2주간 지겹도록 들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에서 저 질문이 가장 먼저 나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들 리디나 형 얘기부터 꺼내고 안부를 묻기에 급급했지.’
자신이 그녀들에게 먹음직한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잠시 얼을 빼고 있던 페르멘은 멜리안이 눈에 띄게 초조해하자 서둘러 답을 내어 놓았다.
“승마를 즐겨 합니다. 사냥도 좋아하고요.”
“아…….”
뭔가 실망을 한 것처럼 아래로 축 처지는 어깨가 유독 눈에 밟혔다.
“승마를 싫어합니까?”
“그렇다기보다는…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어색하게 웃은 멜리안이 또 시선을 피했다.
최근에는 여인들도 기본 소양으로 많이 배우는데. 초반의 실수 때문에 한층 조심스러워진 페르멘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같이 해 보는 건 어떠신지.”
“네?”
“……네?”
끔뻑끔뻑, 서로를 바라보기도 잠시.
“무슨 문제라도? 혹시 말을 무서워하는 거라면…….”
“다음에요?”
“……네.”
또록, 또록.
포크를 쥔 채 당황스러운 듯 눈을 굴리던 멜리안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저는 좋아요.”
가능한 한 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아니라고 해도 강요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멜리안이 실내에서 정적인 생활을 선호한다면 어느 정도 맞춰야겠지. 체스나 카드는 제법 잘 두니까.
‘체스는 할 줄 알려나? 가르쳐 주면 되는 건가?’
또 멋대로 기준을 잡았다가 실수하고 싶지는 않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저가 기준을 잡아서 그녀가 못 해 본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실수인 것 같기도 하고.
‘어렵네.’
페르멘은 구겨질 뻔한 미간을 풀며 말했다.
“아마트 영애의 취미도 궁금하네요.”
큽, 하고 마침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던 멜리안이 기침을 시작했다. 페르멘은 거의 비어 있던 그녀의 물잔을 채워 주었다. 왠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오래지 않아 진정한 멜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취미라고 부를 만한 건 없어요.”
“…….”
“자, 자수를 둘 줄은 아는데……. 꽤, 잘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시군요. 다음에…….”
다음에 뭐? 자수 놓는 걸 구경이라도 하겠다고?
멜리안의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하나 싶어서 머뭇거리다 보니 침묵이 길어졌다.
“음… 경께서 좋아하는 색은 뭔가요?”
이번에도 다르다. 페르멘은 좀처럼 에스메랄다나 아레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멜리안의 행동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의식적으로 피하는 건가?’
한 줄기 의심이 피어났지만 당장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녹색입니다. 영애께서는요?”
“저는 노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같아요? 선호도에 있어 그리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아닌가?
“그게 저한테 잘 어울리더라고요.”
페르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울린다는 이유로 특정 색을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뭔가 찝찝했다.
“계절은 특별히 선호하시는 게 있으신지.”
“아무래도 라의 달이 편하죠.”
편해? 좋은 게 아니라?
멜리안의 알쏭달쏭한 말에 찝찝함이 한층 더 강해졌다.
“경께서는요?”
“……카의 달을 좋아합니다. 찬 공기를 쐬면서 말을 달리면 상쾌하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왜 실망한 것 같지?
페르멘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멜리안을 보다 집요하게 살폈다.
이후에도 서로의 선호나 습관 같은 것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때때로 직전처럼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누군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종업원이 전언을 가져왔다. 아마트 남작가의 마부가 전한 소식이었다. 마차 바퀴의 이음새를 바꿔야 하는데 수리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그에 페르멘은 멜리안을 타운하우스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갈 것을 청했다. 멜리안은 조금 망설였을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멜리안이 몸을 흠칫, 떨며 굳었다. 곁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던 페르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기대요.”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발목 부상이 악화된 것 같았다.
‘그냥 의원부터 부를걸.’
이것저것 재고 따지느라 손을 놓고 있었더니 걷는 게 버거울 때까지 방치한 꼴이 되었다. 속으로 혀를 찬 페르멘은 한 걸음, 한 걸음, 멜리안의 속도에 맞춰 식당 밖으로 나섰다. 타운하우스의 위치가 시가지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이었기에 시간이 꽤나 걸렸다.
하지만 그동안 지루하지는 않았다. 취미에서 성격, 선호도에 이어 식사가 끝날 때쯤 시작되었던 연극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갈 수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무언가 막혀 있는 듯 주고받는 게 어색하던 대화는 어느덧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다음에 함께 보죠.”
“하지만 연극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맞는데, 오갈 극단의 작품은 대부분 괜찮았어요. 제가 본 것 중 팔 할 정도는 거기서 올린 극일 겁니다. 생각 없이 만든 희극 같은데, 은근히 비판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죠. 쓸데없이 시간만 때우는 다른 극과는 달라요.”
“그럼, 네……. 저도 좋아요.”
“언제가 편합니까? 제가 시간을 맞춰…….”
약속 일자를 맞춰 보려던 참에 마차가 멈춰 섰다. 페르멘은 한발 앞서 문을 열고 나섰다.
“조심해요.”
그는 멜리안이 내릴 수 있게 도와주면서도 티 나지 않게 주변 광경을 살폈다. 타운하우스의 질이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귀족들은 물론, 부유한 평민들조차 선호하지 않으리라.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신세를 많이 지네요.”
멜리사는 지금처럼 금전이 관련된 문제가 두드러질 때마다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허언이나 허세로 감추려 들지는 않았다. 해서 페르멘은 그저 덤덤하게 눈앞의 사실을 보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녀가 특별히 언급하지도 않는데 과하게 반응하는 게 더 실례일 것 같았다.
짧은 계단을 올라 문 앞까지 멜리안을 배웅한 페르멘은 직전의 대화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공연 일자를 확인한 후에 서신을 보내겠다고.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하지만 멜리안이 한발 빨랐다. 그녀는 에스코트를 위해 잡고 있던 페르멘의 손을 놓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상황이 그렇게 되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서신으로 연락하는 게 낫겠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페르멘이 계단을 내려왔다. 마차로 가기 위해 두어 걸음 정도 나아갔을까? 팩, 몸을 돌린 그가 대뜸 말했다.
“발목이요.”
“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멜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치신 발목,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근육을 다친 거라면 밤사이 부어오를 수도 있어요. 뼈에 이상이 있으면 더 큰 문제고.”
“그냥 조금 삔 건데…….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거듭 거절하니 뭘 더 할 수도 없고. 답답했음에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살펴 가세요.”
“……예,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멜리안이 타운하우스 안으로 사라졌다. 페르멘은 잠시간 문가를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황후 폐하와 각별하시다고 들었어요. 어릴 적 추억이 많으신가요?”
“그런 편입니다.”
저녁 약속은 허탕이었다. 솔비란 자작가의 차녀는 그와 만나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에스메랄다를 언급했다. 이후 줄곧 그녀의 이야기만 묻고 있고.
페르멘은 한숨을 참지 않았다.
그도 자신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황후의 오라비, 황제의 처남,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테노리엘 가문의 직계.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 배경이 먹음직하다는 것도 동의하고 있다.
페르멘은 분명하게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난 2주간 시간을 할애한 건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건 남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여인을 찾고 있다는 의미지, 자신의 옆에서 황후인 누이나 후작인 형에게 알랑거릴 간신을 찾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작위에 욕심을 내지 않을 법한 사람들로 추렸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익숙한 일이 반복되자 익숙하지 않았던 시간을 알려 준 사람이 자꾸 떠올랐다.
아마트 멜리안.
만난 지 20분도 되지 않아 에스메랄다의 얘기부터 꺼내는 이들과 달리 한 번도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식사와 후식, 그리고 배웅까지. 함께 보낸 시간은 세 시간 정도. 그녀가 꺼낸 첫 질문은 그의 취미에 관한 것. 마지막 대화는 다음을 약속하는 것.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페르멘은 자신의 행태에 기가 막혀서 허, 하고 웃어 버렸다. 솔비란 영애가 웃는 낯으로 이유를 물어 왔지만 대답해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론을 내려 놓고 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영애를 배필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군요. 식사는 천천히 즐기십시오.”
“자, 잠깐만요, 테노리엘 경!”
솔비란 영애가 목소리를 높여 가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페르멘은 서둘러 별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부에게 테노리엘 저택으로 향할 것을 명했다.
“다음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다음 만남을 청한 적이 없었는데. 멜리안에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권했다. 거기서부터 이미 답이 나온 것인데 뭐 하러 저녁 시간을 낭비했는지 모를 일이다.
페르멘은 초조한 마음에 마부를 재촉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빨리 저택에 도착한 그는 바로 주치의부터 찾았다.
“왕진이요?”
“함께 갈 거니까 준비해.”
“네, 도련님.”
주치의가 왕진 가방을 싸는 동안 집사를 찾은 그는 이후 약속을 모두 취소하라고 전했다.
“사정은 간략히만 설명하고, 정중한 사과의 말을 적어 보내.”
“무어라 설명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찾은 것 같다고. 아니, 결정했다고.”
“예, 도련님.”
집사를 뒤로하고 다시 마차에 오른 페르멘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미 약속을 잡은 상대방에게는 다른 여인들과의 만남도 언질된 상태다. 이후의 일정 때문에 지금밖에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이 만나 보겠다고. 꽤나 무례하고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시간적 제한이 있는 페르멘에게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어느 누가 그것을 트집 잡겠나. 뒤에서는 욕을 할지언정 앞에서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황제가 권력을 쥐여 준 황후의 오라비였으니까.
해서 강행했고, 솔비란 영애를 비롯한 이들 모두 페르멘이 다른 영애들과 선 자리를 거듭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결론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리라. 대부분의 영애들이 초반에 그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였다. 뒤로 밀려난 이들은 가문의 세가 약하거나, 멜리안처럼 영지에서 황도로 올라올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들이다.
‘욕 좀 먹겠네.’
그렇다고 이미 마음을 정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만날 필요는 없지. 아레스가 돌아오면 도움을 구해야겠다. 트집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물을 정해야 할 테니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할 때였다. 주치의가 도착했고 마차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페르멘은 창밖을 주시했다.
이윽고 다시 한번 마차가 멈추었고,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멜리안을 배웅했던 문 앞으로 달려갔다. 조급한 듯 문을 두드리자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
열린 문 너머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당황하기도 잠시. 페르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허리춤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소년이 보였다.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 합니다. 아마트 멜리안 영애께 테노리엘 페르멘이 왔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어…….”
이미 커다랗던 눈이 한층 더 커지는 신기한 광경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누, 누님!”
문을 열어 둔 채로 쪼르르, 뛰어간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누님.’
분명 아마트 자작은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멜리안과 그녀의 동생.
‘어린애가 있길래 혹시나 했더니.’
사용인인 줄 알고 하대를 했으면 점수를 깎아 먹었을 것이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킨 페르멘은 문가에서 우두커니 기다렸다.
곧 웬 노부인이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보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훗날 멜리안이 나이가 든다면 그녀를 닮아 갈 테니까.
“미안해요, 테노리엘 경. 월터가 경황이 없어서 손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처음 뵙겠습니다, 아마트 남작 부인.”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와요. 멜도 곧 내려올 거예요.”
“갑작스레 찾아뵈었는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멘은 테노리엘가의 주치의와 함께 타운하우스 안에 발을 들였다. 공용 응접실로 안내받아 기다리기도 잠시, 멜리안이 도착했다. 쩔뚝쩔뚝. 시종의 부축을 받아 나타난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테노리엘 경, 여기까진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앉으시지 않고…….”
“진찰은 받았습니까?”
“아…….”
아마트 남작가가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건 눈으로, 귀로 확인한 참이다. 그러니 필시 따로 의원을 부르지는 않았으리라. 의원을 오라 가라 하는 데도 돈이 드니까. 발목이 삔 것 정도는 며칠 고생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까? 거듭 거절만 하던 그녀의 표정이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우선…….”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페르멘은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던 그가 입매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상황에 맞지 않게 웃어 버릴 것 같아서.
밖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층 더 작아진 멜리안의 키 때문이었다. 분명 그의 어깨쯤에서 오가던 사람인데, 지금은 가슴께에 닿을까 말까 싶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얼마나 높은 걸 신은 거야.’
그 높은 구두를 신고 늦을까 봐 열심히 뛰어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귀엽잖아.’
페르멘은 웃는 낯을 감추며 주치의에게 눈짓했다.
“얘기는 천천히 하고 우선 진찰부터 받아요. 내가 마음에 걸려서 안 되겠어요.”
시종이 멜리안을 소파로 부축하자 주치의가 그녀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주치의에게 발을 내어 준 멜리안이 페르멘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발목을 움직여 볼 텐데, 그때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진료가 시작되자 페르멘은 벽난로 옆에 기대어 섰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작은 멜리안이 전부였다. 지긋지긋한 선 자리에서 처음으로 호감을 느껴 본 사람. 귀족들의 진절머리 나는 성품이야 익히 알고 있는바, 그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성품이나 사고방식은 앞으로 더 만나 봐야겠지만 권력과 가문이 아닌 그에게 관심을 가져 준 건 멜리안이 유일했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크게 와닿았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호감이라는 건 분명했다. 설령 이것이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해도 괜찮을 것이다. 잔잔한 호감 위에 쌓아 가는 부부 생활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비어 있는 사랑의 자리를 배려와 존중으로 채우면 뜨겁지는 못해도 따듯할 수는 있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다음 계절.”
“네?”
“바의 달이 되면 혼례를 올리죠.”
해서 순간적으로 말부터 튀어 나갔고 시끄러운 파열음이 그 뒤를 이었다. 차를 준비해 온 남작 부인이 쟁반을 통째로 떨어트린 채 응접실 입구에 서 있었고, 그녀를 따라왔던 아마트 영식은 입을 떡 벌린 채 페르멘과 멜리안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아.”
그제야 깨닫는 사실이 있었으니.
페르멘은 지금 혼례를 올리고 싶은 여인의 가족들 앞에서 청혼을 한 것이다. 최소한의 체면이나 미사여구조차 챙기지 않고 벽난로 옆에서 그녀를 감시하듯이 서서 대뜸. 멜리안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통보하듯이 툭.
이후 그가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될 고백이었다.
카의 달이 시작되자 전투는 더 버거워졌다. 해일처럼 밀려 올라오는 마수를 감당하기 위해 모든 부대가 최소한의 휴식을 유지한 채 전투를 반복했다.
그런 와중에도 오멘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맴돌았다.
「루이는 잘 지내고 있다. 네가 보내 준 딸랑이를 하루 종일 만지작거려. 그녀가 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을 정도야.」
아레스와 혼인한 루이자의 임신 소식 때문이었다.
‘드디어 첫 조카인가.’
오래전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은연중 형제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아레스의 배려로 루이자의 유산기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오멘은 내년에 태어날 조카를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어 버렸다.
‘내년까지는 조금 바쁠 것 같고……. 내후년에는 볼 수 있으려나?’
원래라면 내년 카의 달에는 파병 기간을 채우고 황도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중앙군의 파병 규모가 늘어난 반면 기간은 5년에서 2년으로 단축되었으니까.
하지만 오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는 황도에서 출정하던 날 이미 연장 파병을 신청해 두었다. 과거 에렘의 영토를 지키는 것에서 그쳤던 남부군은 이제 막, 마수에게 점령당한 인간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 멀리 남하해야 하기에 한두 해 정도는 상급 기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울 만큼 버거운 상황이다.
해서 일정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내후년 즘에나 만나 볼 수 있을 조카는 벌써부터 사랑스러웠다. 오멘은 아레스가 보내 준 서신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더 읽는다고 해서 내용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한참이나 같은 서신을 읽어 내린 오멘은 꽤나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다음 서신을 집어 들었다. 페르멘이 보낸 서신이었다.
「잘 지내냐?」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 서신은 그간의 근황이 구구절절 다 적혀 있었다. 페르멘의 서신은 중구난방, 제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편이었기에 익숙했다. 오멘은 형제들 중 유독 각별한 페르멘의 서신을 별생각 없이 읽었다.
그리고 끝부분에 이르러서.
「아 참, 나 청혼했다. 내달에 식을 올릴 거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자식이 진짜.’
대뜸 저가 하고 싶은 말만 적고, 오멘이 궁금할 법한 얘기는 한 줄도 적어 놓지 않았다.
‘원래 저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적어도 가족이 될 사람의 이름은 가르쳐 줘야지.’
형제의 익숙한 행태를 짧게나마 흉본 오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황도로 돌아갔을 때 조카가 두 명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답장을 쓰기 위해 양피지를 끌어 왔을 무렵이었다. 기사들을 위로하고 천막으로 돌아온 로리아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오멘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형수님이 조카를 가지셨다는군요.”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그는 부러 로리아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지난 사의 달, 두 사람이 야밤에 나눈 대화를 들은 후 어째서인지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진 탓이다. 억지로 빈 양피지에 시선을 고정하자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축하드려요!”
“추, 축하드려요…….”
슬그머니 피어난 미소가 입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형제가 곧 혼인을 한다기에, 자꾸만 웃음이 나오네요.”
“겹경사네요. 형제분이라면… 쌍둥이분이죠? 아직 미혼이신 건 그분뿐이라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본 오멘은 로리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분명 직전까지만 해도 불편했는데, 즐거운 소식 때문인지 잠시나마 그것을 잊고 로리아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어느 영애가 녀석을 데려갈까, 싶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죠. 그 녀석 성격을 감당하려면 제수씨가 조금 고생하겠지만요.”
“아, 경이 먼저 태어나셨어요?”
“네, 4분 먼저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위아래를 가리고 자란 건 아니지만요.”
“무척 즐거워 보이세요.”
“그렇게 보입니까? 조금… 들뜬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달리 그는 자신이 들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레스의 아이보다 페르멘의 아이가 더 기다려졌으니까. 그는 오멘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지 않나.
‘그 녀석을 닮으면 나도 닮는 거잖아.’
제 자식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결혼도, 후손도, 그의 미래에 상정해 두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는 페르멘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 쌍둥이, 셨어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웃고 있던 그때. 얼떨떨한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깃펜을 쥐고 있던 오멘의 손이 흠칫, 떨렸다.
“네.”
들뜬 마음에 평소처럼 풀어졌던 목소리가 살짝 경직되었다. 오멘은 로리아의 옆에 있는 그녀를 돌아보는 대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몰랐어? 얘기를 들어 보니까 진짜 똑같이 생기셨다고 하던데?”
“쌍둥이를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닮으셨어요? 전 쌍둥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일란성은 정말 판박이라고 했어. 구분하는 게 힘들 만큼.”
도란도란 이어지던 로리아의 목소리가 불현듯 작아졌다.
“점의 위치까지 똑같다는 말도 있고, 거기도 똑같다는…….”
“크흠.”
로리아 나름 목소리를 죽인 것이겠지만, 범인에 비해 훨씬 예민한 감각을 가진 오멘에겐 다 들렸다. 다행히도 그녀들을 등지고 있던 탓에 벌게진 얼굴을 숨길 수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귀를 가려 주지 못한 탓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 * *
루이자의 임신으로 인해 테노리엘 저택을 드나드는 외부인을 통제하기 시작한 지 어언 50일. 안정기에 접어든 루이자는 주치의로부터 외출을 허락받았다. 그에 아레스와 함께 에스메랄다를 만나겠다며 입궁했고, 페르멘이 멜리안을 초대했다.
‘좋아하려나 모르겠네.’
이미 연극이나 연주회를 관람하며 사적인 만남을 이어 왔다. 시기를 따지면 슬슬 초대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터. 처음 만났던 날 승마를 해 보자고 말한 것도 있고, 남들의 눈을 피해 조금 편히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시간에 맞춰 도착한 멜리안이 환복하는 동안 페르멘은 먼저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의 말은 이미 연무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최근 페르멘이 마차만 탔기에 마구간에서 답답했던 모양이다.
‘조만간 데리고 나갔다 와야겠네.’
연무장을 쭉 훑어본 페르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영지였으면 승마장에서 편하게 탔을 텐데.’
황도의 저택은 규모가 한정적이기에 따로 승마장이 없었다. 해서 기사들의 훈련 시간을 피해 멜리안을 초대했다. 공간이 좁아서 멜리안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뭐, 다음에 영지도 가 보면 되니까.’
멜리안이 탈 말을 쓰다듬고 있던 페르멘의 귀가 살짝 달아올랐다. 가문의 근간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영지에 아내와 함께 방문하다니.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가신들에게 그녀를 소개할 생각을 하니 낯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열이 오른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잠시. 페르멘은 연무장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리 준비해 둔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멜리안이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여전히 작았다. 첫 만남 이후로는 높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으니 만날 때마다 작다고 해야겠지.
“큼.”
페르멘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에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승마복도 잘 어울리네요.”
멜리안은 그의 손을 잡고서 옆으로 다가왔다.
“괘, 괜찮나요? 처음 입어 봐서 어색하기만 하고…….”
“잘 어울려요. 이쪽으로.”
오늘 그녀와 함께할 말을 소개해 줄 차례였다.
“이름은 라라, 암컷이고 올해 네 살입니다.”
“아… 생각보다, 크네요. 말을 본 적은 많은데.”
“아무래도 일반적인 말보다는 클 거예요. 군마로 개량된 종이라.”
“……네?”
“내가 가진 말은 다 군용이라…….”
멜리안이 타기에 크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택에는 평범한 말이 없었다. 아레스의 말도 죄다 군마고, 루이자는 말을 타지 않는다.
‘마차를 끄는 녀석들은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까.’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거나, 태워 본 지 오래된 말은 제 기분이 나쁠 때 기수를 떨어트리기 위해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멜리안을 그런 말에게 태울 수는 없지 않나. 조금 크기는 하지만 라라는 페르멘이 가진 말 중 가장 작고 안전한 녀석이었다.
“말을 몇 마리나 가지고 계신 거예요?”
“넷… 아니, 세 마리네요. 몇 년 전에 남부에 갔다가 한 녀석이 죽어서요.”
“아…….”
“내 말 중에는 그래도 라라가 제일 작아요. 라셀!”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빠를 터. 페르멘은 아직도 연무장을 달리고 있던 말을 불러들였다. 라셀은 그의 부름에 불퉁하게 투레질을 하며 터벅터벅, 다가왔다. 건장한 흑마가 제 자리를 아는 것처럼 라라의 옆에 멈춰 섰다.
“이름은 라셀, 일곱 살이고요.”
페르멘은 라셀의 주둥이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영지에 라울이라고, 아버지가 주신 말이 있는데… 다음에는 그 녀석도 소개시켜 줄게요. 갈색에 발만 하얗죠. 오멘이랑 같이 받았던 선물이라 어릴 적부터 엄청 아꼈어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영지 밖으로 데려오기는 힘들지만. 시간을 내서 영지에…….”
“우와…….”
은근슬쩍, 영지 얘기를 꺼냈던 페르멘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본 라셀의 크기에 놀란 건지, 멜리안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말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귀엽네.’
눈이 반짝반짝한 게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설핏 웃은 페르멘이 라셀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차이가 좀 나죠? 성격도 많이 달라요.”
라라는 안전제일, 무사주의. 빨리 뛰라고 재촉을 해도 저가 위험하다 싶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군마로는 적합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반면 라셀은 고삐만 풀어주면 망아지가 된다. 마음대로 달려 보라고 부추기는 순간 정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빠르게 내달릴 줄 아는 녀석이었다. 겁도 없어서, 영지에서 지내던 당시에는 곰에게 달려든 적도 있을 정도였다.
“라라는 믿어도 돼요. 이 녀석, 기수를 떨어트린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라셀은 길들이기 전까지 날 열 번도 넘게 떨궜는데.”
“아, 안녕…….”
“만져 봐요. 무는 일은 없으니까.”
“네…….”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다가간 손이 라라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것 같았지만, 곧 멜리안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페르멘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좋아하는 것 같지?’
다행이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페르멘이 말했다.
“그럼 소개도 끝났겠다, 타 보죠.”
“네? 지금 바로요?”
“타야지 배우죠.”
페르멘은 멜리안의 골반을 붙잡은 채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를 안장 위에 올려 주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고삐 잡고, 여기 발 걸고 허리 세워요. 그렇게 엎드려 있으면 위험해요.”
“네, 네…….”
멜리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직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변화를 발견한 페르멘이 움찔거렸다.
‘나 뭐 실수했나?’
페르멘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멜리안의 미소가 사라진 사이에 새로 벌어진 일이라곤 말에 탄 것뿐이다. 정확히는, 그가 태웠지.
‘딱히 놀란 것 같지는 않았는데……?’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아.”
혹시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을 만큼 놀란 건가?
“어… 혹시 놀랐어요? 내가 너무 갑자기 태웠나?”
“아, 아뇨, 괘, 괜찮…….”
괜찮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 그,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하게, 일단, 일단 내려와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페르멘은 멜리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다리를 이쪽으로 돌려요. 내가 받아 줄 테니까, 미끄러지듯 그냥 내려오면 돼요.”
뻣뻣하게 굳은 움직임으로 몸을 돌린 멜리안이 스르륵,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페르멘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놀랐다면 진짜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은 편이라, 너무 높았나? 많이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아요.”
꿀꺽, 침을 삼킨 멜리안이 파들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페르멘의 시선이 힐끔,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옷깃을 꾹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진짜.’
페르멘은 멜리안을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 주며 한숨을 삼켰다.
“쉴래요?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아뇨, 정말 괜찮아요. 조금 놀라서, 새, 생각보다 높더라고요.”
어색하게 웃은 멜리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옷을 놔준 후에도 잘게 떨리고 있는 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정말 괜찮아요.”
그 순간 페르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멜리안은 괜찮다고만 말한다.
‘차라리 화를 내든가.’
실수를 한 건 그인데, 화를 내라고 말하기도 이상하지 않은가.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은데.’
서로가 마냥 편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페르멘 역시 멜리안을 만나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생각이 많아지고,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나아졌다. 나름 농담을 건넬 때도 있었고, 조금 전에는 멋대로 그녀를 말에 태워 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처음 만났던 날에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페르멘은 그 나름대로 멜리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정작 그녀는 아니었지만. 멜리안은 처음 만났던 날과 다를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선 자리에서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적당한 거리에서 예의를 지키고만 있다.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아마도.
페르멘이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는 사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멜리안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페르멘은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불쑥 고개를 치켜든 충동에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그녀와 억지로라도 거리를 좁혀 보고 싶어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페르멘이 허리를 숙였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용인들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 버린 멜리안을 보고 있노라니 목이 탔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페르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흘렀다.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에 고정된 청록색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간 망설이던 페르멘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가볍게 스치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멜리안의 허리를 잡아끈 페르멘이 곧바로 말랑거리는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음!”
흠칫, 하고 떨리는 몸을 품에 가두자 생각이 사라졌다. 멜리안의 타액은 생각보다 달콤했고, 뜨거운 체온은 만족스러웠다. 굳은 채 움직이지 않는 혀를 단번에 낚아챈 페르멘이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대로 혀를 휘감아 문지르자 등줄기가 저릿했다.
“응… 읍…….”
첫 입맞춤치고는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또한 길었다. 페르멘은 욕심껏 멜리안의 타액을 훔쳐 왔다. 그 틈을 타 멜리안이 입을 크게 벌리며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곧장 뒤를 쫓아간 페르멘이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쭙, 츕, 노골적인 소리가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흐응, 흡.”
멜리안과의 입맞춤에 열중하기도 한참. 한껏 흐트러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멘은 몸을 물리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거칠게 들썩거리는 멜리안의 흉부가 다급히 숨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쪽, 하고 멜리안의 입술을 훔친 페르멘이 눈을 떴다. 붉게 달아오른 멜리안의 얼굴을 보자 그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페르멘은 멜리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말했다.
“말은… 잠시 쉬었다가 타죠.”
“……네.”
멜리안을 등지고 선 페르멘이 괜히 라셀의 목을 툭툭,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벌건 얼굴이 식지를 않아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멜리안과의 입맞춤은 그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심장이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너무 급했나?’
그가 생각하기에도 뜬금없는 순간이기는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페르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응해 오는 대신 뻣뻣하게 굳어 버렸던 반응을 떠올리자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각자의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승마를 시작하자 답답함은 더 배가 되었다. 그날 멜리안은 더 이상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 * *
양 가문의 화합을 기념할 겸, 가족 간에 인사나 나눌 겸. 에스메랄다가 주최한 만찬 자리에 참석한 인원은 일곱 명이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에스메랄다까지 포함하면 여덟 명이고.
페르멘은 에스메랄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맞은편의 멜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페르멘.”
그에 곁에 앉은 아레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를 타박했다. 노골적인 시선을 지적한 것이다. 페르멘은 그제야 눈을 돌렸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멜리안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일전 승마를 함께한 이후 그녀는 페르멘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으니까.
답답한 속을 풀어낼 길이 없어 한숨만 삼키던 중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에스메랄다가 도착했다. 착석해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황후 폐하.”
아레스와 페르멘이 가볍게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음으로 예를 갖춘 건 멜리안의 혼사 문제 때문에 급히 황도로 올라온 아마트 남작이었다.
“아마트의 헤레미아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를 따라 아마트가의 직계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남작, 반가워요. 우선 앉도록 하죠.”
상석으로 향한 에스메랄다를 시작으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만찬은 상석의 에스메랄다를 중심으로 테노리엘 일가와 아마트 일가가 양측으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그중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한 페르멘과 멜리안은 에스메랄다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고.
페르멘의 시선이 다시 멜리안에게 닿았다.
‘긴장한 것 같은데.’
평소보다 더 경직된 표정을 보건대 아마도.
힐끔 주변을 둘러본 페르멘이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고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에스메랄다가 올 때까지 말하지 못했다. 남작 내외와 아마트 영식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었다. 말실수를 할까 싶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오기 전에 잠깐이라도 따로 만날걸.’
그럼 긴장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었을 텐데.
페르멘이 후회를 되짚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오늘은 인사도 나눌 겸 보자 했어요. 가족들 간에 가볍게 식사를 하는 자리니, 편히 즐겨 주면 고맙겠군요.”
“과분한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마트 남작이 긴장한 기색으로 답했다. 사용인들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하자 에스메랄다는 멜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멜리안이라고 했던가?”
“네, 황후 폐하.”
멜리안이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페르멘에게까지 들렸다.
“만나서 반갑네. 어느 영애가 페르멘 오라버니의 짝이 될까, 많이 궁금했는데……. 앞으로 오라버니를 잘 부탁하겠네.”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테노리엘 경과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르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상투적으로,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페르멘은 저도 모르게 뺨을 긁적거렸다.
그날 식사는 특별할 일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마트 일가의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가벼운 주제를 언급하며 가벼운 대화를 주도했다. 덕분에 멜리안의 표정은 식사를 시작하기 전보다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페르멘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건 똑같았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식사가 길어질수록 페르멘의 심기는 바닥으로 처박혔다.
‘한 번 정도는 봐 줘도 되잖아.’
이렇게나 열심히 그녀를 보고 있는데, 어떻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을 수가 있는지. 결국 참지 못한 페르멘이 한숨을 푹 몰아쉬었을 때 누군가 만찬장의 문을 두드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전보를 보내신지라 급히 찾아뵈었습니다.”
지난봄에 복권된 앙그리트 남작가의 디아나였다.
페르멘은 멜리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렸다.
아르페시스가 보낸 연락이라니?
“이리로.”
디아나가 종이에 적어 온 내용을 확인한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구겨졌다. 짧게 혀를 찬 그녀는 종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오실 필요 없다고 답을 보내게. 독단으로 움직이실 경우 이혼장을 보내겠다는 말도 꼭 첨부하고.”
“예, 황후 폐하.”
페르멘과 아레스, 루이자는 물론 아마트 일가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에스메랄다를 보고 있었다.
‘이혼?’
아르페시스를 단 한 순간도 달가워한 적이 없던 페르멘의 눈이 반짝거렸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에스메랄다를 보았지만, 그녀는 먼저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결국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 페르멘이 말을 건넸다.
“황제 폐하께서는 다가오는 황후 폐하의 탄신일에 오신답니까?”
“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기에 오지 마시라 전한 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겠다는데?
페르멘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서 말했다.
“전선이 한창 바쁠 시기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황후 폐하의 탄신일인데요. 지난해에도 불참하셨는데……. 밤새 이동하시면 왕복으로 하루면 되질 않습니까? 잠시나마 오셔서 얼굴을 보여 주시면 어떨까요?”
“생일이 무어 특별하다고 전선에 계신 분을 오라 가라 하겠어요.”
무덤덤한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속이 탔다. 지난해 그녀가 홀로 생일을 보내고 귀족들이 얼마나 떠들어 댔던가. 한데 올해도 그 꼴을 보라고?
아르페시스를 향한 페르멘의 불만이 한층 더 크게 몸집을 부풀렸다.
“하면 선물은 어찌하신답니까? 올해도 라퓨나 한 다발로 끝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한 말이었다. 정작 그게 에스메랄다에게는 트집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라버니, 그건 황제 폐하와 제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선물이에요.”
“제 말은, 꼭 그것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도 함께 주면 될 텐데, 황제 폐하께선 왜 그것만…….”
“제가 필요 없다 했으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에스메랄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더 말해 보려던 찰나, 날 선 아레스의 엄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페르멘은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입이 조용해진 것과 달리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었지만.
‘고작 라퓨나 한 다발이라니.’
그는 여전히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주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생일날 그녀를 혼자 두다니.
‘하여간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놈이라니까.’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짝으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나마 녀석이 리디 말이라면 시늉을 넘어서 진짜 죽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놈이니까…….’
에스메랄다가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우러러보고 사니까 참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에 이혼을 하라고 쪼았으리라. 아니, 애초에 혼례조차 올리지 못하게 막았겠지.
속으로나마 있는 힘껏 아르페시스를 흉보던 페르멘은 버릇처럼 시선을 들었다. 그에 자신을 보고 있던 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동시에 움찔거렸다. 드디어 그녀가 자신을 봐 주었다는 것에 들뜬 페르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려던 찰나. 멜리안이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페르멘의 기분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매끄럽게 나아가던 차량이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동 수단에 몸을 맡긴 남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피곤해…….”
그의 중얼거림은 꽤나 나른했다.
차현우, 열두 살의 나이에 각성해 15년이 지난 지금 세계 정상급 헌터로 자리 잡은 그는 유럽에서 열린 12등급 게이트를 공략한 후 귀국한 참이었다.
“점점 더 빈번해진단 말이야…….”
말을 꺼내기 무섭게 손목에서 삐익,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또 인근에서 게이트가 열렸다는 의미였다.
현우는 곧장 시계처럼 생긴 헌터 전용 스왓을 확인했다. 국내에는 13등급 이상의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만약 새로 생긴 게이트가 그 이상이라면 바로 다음 공략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규 발생이라는 글자와 함께 붉은색으로 표시된 새로운 게이트는 별이 한 개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후우.”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이 정도는 일반 군인들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만약 인근에 헌터가 있다면 식후 산책 겸 가볍게 공략할 수 있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에 있던 헌터가 공략에 들어간 모양이다. 붉은색 글자는 곧 노란색으로 바뀌었고 30분도 되지 않아 게이트 공략 알림과 함께 초록색으로 변했다.
익숙해지다 못해 당연해진 과정을 덤덤히 넘긴 현우는 곧 자신이 머무는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량을 세웠다. 그는 바로 내리는 대신 잠시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오늘 아침,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꾼 꿈 때문인지 괜히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던 현우가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상태창.”
곧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생겨났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복잡한 숫자가 가득한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현우가 말이 되지 못한 생각들을 늘어놓았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기억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했다. 새하얀 공간과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날개를 가진 존재들. 시끄럽게 울면서 그 천사들을 닦달하던 커다란 존재. 그곳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던 기억과 간간이 주워들었던 대화까지.
그건 전생과 사후의 기억이었다. 마룡과 마수, 마신까지. 평범한 영혼이라면 몰라야 할 내막을 모두 알아 버린 현우가 피식, 웃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신께서 만든 세상을 보기 싫어서라니.’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그 개고생이 전부 마신의 별것 아닌 심술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화가 나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영혼 상태로 방방 날뛰는 통에 그를 싸고돌던 미카엘이 난처해졌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마신을 향한 적의는 그대로였다. 그 때문인지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인외에 닿을 수 있는 영웅이 너무 적어. 구원자나 현자가 가더라도 실질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칼이 없으니 전세가 밀릴 수밖에.
-이 아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적극적으로 육성해 보자는 말은 빈말이 아니야.
-이처럼 선명한 용기와 신념이 새겨진 영혼이 흔한 줄 알아? 더군다나 마신을 향한 적대감도 어마무시하지. 딱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를 두 손으로 꼭 안은 채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던 미카엘, 그런 미카엘에게서 저를 빼앗으려던 가브리엘.
-내가 항시 지켜보겠다고 약속할 테니 이리 내놔.
-하지만 가브리엘, 이 아이는 더 쉬어야 한다. 아르셀에서 겪은 상흔도 아물지 않은 지금 다시 인세로 내려가면 영혼이 손상될 터. 더군다나 아직 기억이 남아 있어서 혼란스러울 거야.
-튼튼한 아이니까 괜찮아. 기억은 망각의 샘을 주면 될 일이고.
-육성이니 뭐니,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지만 넌 이 아이가 자꾸 요람을 빠져나와 사무실을 들쑤시고 다녀서 내쫓으려는 것에 불과해. 그런 사적인 이유로 이 아이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수 없다.
-부정은 안 해. 그것도 이유 중 하나니까. 물론 육성 얘기도 진심이고. 이미 라파엘에게 내가 직접 확인했어. 그 녀석이 다른 아이들보다 배는 튼튼하니까 한두 번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 이리 내놔.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설전은 미카엘의 패배로 끝이 났다. 추가적인 영웅이 필요하다는 걸 그도 인정한 탓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전생에서 우러러보았던 존재들과 보낸 시간은 나름 유익했다. 이것저것 얻은 정보도 많고.
한동안 만져지지 않은 상태 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현우가 픽, 웃었다.
“일단 이게 이 세상의 인과율이라는 건 알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가브리엘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가 영웅이 된 건지, 아직 평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세계의 정상에 선 그는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지만 그게 영웅이라는 보장은 아니었다. 영웅의 영혼이란 단순히 뛰어난 존재를 이르는 말이 아닐 테니까.
문득 전생에서 보았던 아르페시스를 떠올리자 픽, 웃음이 났다. 그놈이 주신께서 직접 차원 아르셀에 안배한 영웅일 줄 누가 알았겠나.
“아니…….”
은연중에 알고 있었나? 제 누이를 채어 간 그놈이 대단한 놈이라는 걸. 오랜만에 그리운 이를 떠올린 탓인지 애써 묻어 두었던 다른 기억들도 물밀듯이 쏟아졌다.
현우는 한동안 자신의 전생에서 만났던 인연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늘어졌다. 온전한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과거를 추억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추억에 매달려 있던 현우의 미소가 조금씩 흐려지고, 고동색 눈동자가 깊어졌다. 과거의 인연 중에서 그에게 미칠 것 같은 갈증을 안겨 준 이도 있었으니까.
후우, 하고 깊게 숨을 고른 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 새하얀 곳에서 보낸 마지막 순간. 기어이 미카엘에게서 저를 빼앗는 데 성공한 가브리엘이 동그란 물방울을 주려다 말고 한숨과 함께 해 주었던 말.
-미리 주는 상으로 치마. 어버이께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잊지 말거라.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주던 느낌은 아직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혼에 새겨진 그 감각은 거대한 목소리와 함께였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 너보다는 어릴 터, 잘 찾아보렴.
그대로 쏘옥, 무언가에 빨려 들어간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는 손발도 잘 움직이지 않는 아기가 되어 있었으니까. 자신에게만 남아 있는 기억을 되짚어 보자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몇 살이나 어린지 좀 알려 주시지…….”
너무 범위가 넓은 것 아니냐고, 마른세수를 벅벅 한 현우가 투덜거렸다. 아니면 이름이라도, 얼굴이라도, 사는 곳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걸 알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힘겨웠다.
이미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건 아닐까?
언젠가 만나도 모르고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하지? 기껏 만났는데 법에 저촉될 정도로 어리면 그건 또 어쩌고?
때때로 치솟는 감정은 기어이 푸념을 하게 만든다. 생을 건너 버린 만큼 길어진 작별을 더는 견디기 힘을 만큼 그리웠다. 혹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나 싶어 부러 해외 원정 요청도 다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도통 보이지를 않는다.
“하아……. 보고 싶다.”
핸들에 이마를 기댄 현우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 * *
연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멜리안이 잠시 볼일을 보기 위해 떠난 사이 페르멘은 남부군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찾아 나섰고. 이미 화장실과 휴게실에 들러 멜리안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회장을 배회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멀리서 익숙한 드레스 자락을 발견했다. 짙은 보라색과 흰색 실크로 재단하고, 노란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드레스. 그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멜리안이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로 알아본 페르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잘 어울려.’
멜리안은 노란색이 자신에게 잘 어울려서 좋아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짙은 색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해서 페르멘은 이번 연회에서 입을 의복을 짙은 보라색으로 준비해서 선물했다. 저와 같은 색과 디자인으로 맞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멜리안은 예뻤다. 페르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하는 것 같았지?’
함께 연회장으로 오는 내내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웃던 멜리안을 떠올리니, 선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마 사건 이후 묘하게 서먹해져서 마음이 무거웠던 참이다. 해서 멜리안의 마음에 들어 보겠다고 이것저것 준비를 했고, 다행히도 그녀의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잠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를 감상하던 페르멘은 웃는 낯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그녀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기분 좋게 울렸다. 거리가 좁혀지자 인파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꼬물거리는 멜리안. 다음으로 보게 된 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걸린 비릿한 웃음.
“……서 너무 부러운 거 있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테노리엘 경이라니, 아마트 영애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게 마냥 운이겠어요? 비법이 있었겠죠.”
“영애, 어떻게 테노리엘 경을 낚아챈 거예요? 저희에게도 좀 알려 줘요.”
그들 간에 오가는 대화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페르멘의 입매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곧바로 장갑을 벗기 시작한 그의 걸음이 급해졌다.
“저희도 궁금합니다. 사실 테노리엘 오멘 경과 달리, 테노리엘 페르멘 경에 대해 아는 이가 많지 않아서 저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 뭡니까.”
“테노리엘 경이 왜 영애께 청혼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혹시 침대 위에서…….”
페르멘은 슬쩍, 멜리안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감아 안는 남자의 발치로 장갑을 던졌다.
“다음번에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 멜리안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페르멘에게 집중되었다. 대번에 멜리안에게서 남자를 떼어 낸 페르멘이 그녀를 제 품으로 잡아끌며 말을 이었다.
“얼굴에 던질 겁니다, 사비르 영식.”
“테, 테노리엘 경. 그, 이건 나쁜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아마트 영애, 앞으로는 이런 작자들과 어울릴 필요 없어요. 무시해요.”
페르멘은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묵살하고서 멜리안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멜리안을 둘러싸고 있던 대여섯 명의 얼굴을 빠르게 확인한 직후,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들 입맛에 맞춰 떠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멜리안이 듣게 되자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비르 남작가의 장남은 대놓고 멜리안을 추행하려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의 멱살을 잡아다 바닥에 메다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일을 키워 봤자 좋을 것이 없기에 꾸역꾸역 화를 억눌렀다. 그 탓에 페르멘의 걸음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멜리안이 뒤로 처지는 바람에 속도를 늦춰야만 했지만.
잠시 후, 테라스로 들어가 커튼을 친 페르멘이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저런 놈들이 한 말 귀담아듣지 말아요. 마수보다 못한 쓰레기들이니까.”
욱, 하고 올라온 것을 억지로 삼킨 페르멘은 화를 참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 분노가 멜리안을 조롱하던 영애들을 향한 것인지, 그녀를 추행하려 했던 영식을 향한 것인지 모호했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한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을 듣고도 어색하게 웃고만 있던 멜리안을 향한 것일지도.
페르멘은 형체와 대상이 정확하지 않은 화를 식히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곧 이어진 멜리안의 말이 없었다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을 텐데.
“저기… 뜬금없으시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니 귀담아 들어주세요. 역시 혼인은 다른 영애와 하시는 게 좋겠어요.”
“……뭐라고요?”
뜬금없는 말에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그와 달리 멜리안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처음부터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어요.”
다급해진 페르멘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 아까… 아까 그놈들 때문에 그래요?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게… 당장 가서 결투 신청이라도…….”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경이 곤란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를 만류하는 것처럼 손을 내젓고 있는 멜리안을 보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냥 팔다리부터 분질러 놓을걸.’
그럼 멜리안이 저렇게 손을 내젓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 텐데. 조금 전 문제를 키우지 않은 건 오로지 멜리안을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추행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될 테니까. 이미 그와의 혼사로 인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있는 그녀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멜리안이 그들에게 되갚아 주기를 원한다면 페르멘은 기꺼이 나설 수 있었다. 그건 그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했다. 정작 멜리안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지만.
“……내가 곤란해진다고요?”
“네… 저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
“그게 왜 괜한 일이죠? 아내가 될 사람의 명예를 위해 나서는 게 어떻게 괜한 일이 될 수 있냐고!”
참지 못한 화가 결국 밖으로 새어 나갔다. 언성을 높이자마자 움찔, 몸을 떤 멜리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차, 싶어서 한 걸음 물러난 페르멘이 억지로 숨을 골랐다.
“미안해요. 화를 내려던 게 아닌데…….”
“괜, 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전에 겪어 보지 않았던가. 언성을 높여 봐야 후련하기는커녕 후회만 늘어갈 것이다.
페르멘이 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끼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 간의 침묵은 한참이 지난 후, 멜리안이 입을 열고서야 끝이 났다.
“저…….”
“……말해요. 듣고 있어요.”
“확실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뭘……?”
“혼사를… 파혼을 하고 싶어요. 이제 와 뜻을 바꾸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페르멘의 몸이 움찔거렸다.
‘진심이었다고?’
정말 혼사를 무르고 싶다는 건가? 초조함이 밀려왔다. 페르멘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말했다.
“말했듯이 아까 그 일 때문이라면, 내가…….”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요? 혹시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어요? 난… 나는 요즘 다들 이렇게 비슷한 형식으로 옷을 맞춘다기에, 영애가 좋아해 줄까 싶어서 준비한 건데……. 너무 내 멋대로 결정해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다음에는 꼭 물어보고 주문할게요.”
“네? 아… 그게 아니라…….”
힐끔, 눈을 들어 그를 확인한 멜리안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대체 왜? 내가, 내가 뭘 잘못했어요? 그, 저번에… 혹시 승마한 날 내가 한 짓 때문에 그래요? 그건 진짜 내가 그때 순간 뭐에 홀려서……. 불쾌했다면 앞으로는 허락 없이 절대 그런 짓…….”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서둘러 손을 내젓는 모습이 눈에 익어서, 심장이 욱신거렸다. 페르멘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잘못도 없다고 하고, 기분이 나빴던 적도 없으면서 혼인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계속 아니라고만…….”
욱하는 감정을 털어놓고 따지려던 페르멘이 이를 악물었다. 한 번, 두 번, 심호흡을 거친 그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요.”
“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멜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지만 페르멘은 보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저 말고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영애가 있을 테니까…….”
흠칫, 몸을 떤 페르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건……?”
여기서 갑자기 조건이 왜?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지 못한 페르멘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조건, 그래요, 중요하죠. 애초에 당신을 만난 것도 그 조건을 추린 덕분이었으니까.”
그는 어느새 주절주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계승권 문제가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나에게 뜻이 없다고 해서 내 처가나 자식들에게도 뜻이 없으리라는 단정해선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작위에 욕심내지 않을 사람이나 집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멜리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추스르지 못한 페르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 페르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조건 따진 건 부정 안 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과 혼인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
“난… 나는 그냥, 그날 당신 생각만 나서. 그 드레스도 웃는 것 좀 보고 싶어서, 좋아해 줄까 싶어서 준비한 건데, 그날 이후로 날 봐 주지도 않으니까!”
기어이 다시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 페르멘이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사이 멜리아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페르멘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손을 아래로 늘어트린 그는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라고……. 내가 영애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서 영애도 그런 건 아닐 테죠.”
“…….”
“혼례는… 그래요, 영애 뜻대로 해요.”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페르멘이 테라스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죠, 마지막으로 데려다주는 것 정도는…….”
커튼을 걷고 문을 열기 무섭게 겨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울컥, 치솟았다. 테라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 버린 페르멘이 몸을 획 돌렸다.
“대체 내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직전까지 대화를 하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멜리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말해 주면 노력할게요.”
“무슨…….”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혼인도 싫다는 거 아니었어요?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말해 줘요. 그 부분 고쳐 볼 테니까.”
“마음에 안 들다니, 그, 그런 거 없어요…….”
정말 한계까지 내몰린 기분이었다.
“이런 씨발…….”
참아 볼 새도 없이 욕설이 흘러나갔다. 그간 멜리안을 의식해 언행을 조심해 왔는데 더는 안 되겠다.
거친 언사에 놀란 걸까? 멜리안이 입을 틀어막고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게 꼭,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여서 페르멘의 감정에 불이 붙었다.
“매번 없다,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좀 솔직해져 보라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겨, 경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멜리안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경은… 꼭 왕자님 같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식식거리던 페르멘의 몸이 삐긋, 어긋났다.
“……뭐?”
얼떨떨한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멜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직전까지 난동을 부려대던 화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페르멘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격정에 휘말렸다.
“아, 아니, 이건, 실언… 실언이었…….”
“씨발…….”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페르멘은 멜리안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테라스를 빠져나왔지만 느린 멜리안의 걸음에 속이 타들어 갔다. 이번에는 그녀의 걸음에 맞춰 줄 여유가 없었다.
페르멘은 멜리안을 번쩍 안아 들고 걸음을 서둘렀다. 주변에서부터 쏟아지는 시선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의 뛰다시피 자리를 옮긴 페르멘이 도착한 곳은 아르페시스의 휴게실이었다.
‘어차피 오지도 않을 테니까, 좀 써도 되겠지.’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지난여름, 잠시 황도로 복귀했던 아르페시스는 이미 테노리엘 일가에게 자신의 휴게실을 내어 준 상태였다. 그가 전선에 있는 동안에도 황성에선 연회가 열리니까. 덕분에 페르멘의 앞길을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문을 쾅, 닫아 버린 페르멘은 침대로 뛰어들었다. 애초에 휴게실에 이 침대가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복장이 뒤집어지지만, 지금은 그걸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당장 그에게도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뭐라고 비꼴 수도 없다. 이것을 준비한 게 에스메랄다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껏 뭐라고 한 적도 없고.
멜리안을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탄 그는 다급하게 입술부터 맞대었다.
―경은… 꼭 왕자님 같은…….
귓가에서 맴도는 목소리와 붉게 달아올랐던 멜리안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성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딱 한 번만 맛본 이후 줄곧 그를 애달프게 만들었던 멜리안의 타액은 여전히 달았다.
게걸스럽게 그녀의 입속을 탐하기 시작한 페르멘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민감하고 축축한 살덩이가 서로 스칠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지난번과 달리 소극적이게나마 그를 반겨 주는 움직임에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페르멘은 본능적으로 멜리안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움!”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멜리안이 몸을 떨었다. 쭙, 춥, 외설스러운 소리가 퍼질 때마다 페르멘의 바지춤은 한층 더 부풀었다. 멜리안과 자신의 사이를 막고 있는 드레스가 거슬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누워 있는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밀어 넣은 페르멘이 성급하게 드레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을 때.
“음, 읍!”
멜리안이 몸을 비틀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거칠 것이 없던 페르멘의 움직임이 덜컥, 하고 멈추었다. 뜬금없는 순간에 제동이 걸린 페르멘이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건 분명, 거부의 몸짓이었으니까.
눈을 뜨고 확인하자 고개를 돌린 채 그를 외면하고 있는 멜리안이 보였다. 심장이 콕콕, 쑤셔 왔다. 몇 번이고 망설이던 페르멘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아, 안 됩니까?”
멜리안은 말없이 그를 밀어내는 손에 힘을 가했다. 페르멘은 힘 같지도 않은 힘에 순순히 밀려나면서도 다급하게 매달렸다.
“내가 그… 뭐냐, 그거, 그거 같다면서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 아니었어요?”
멜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페르멘이 낭패한 기색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그, 내가 오해한 거면 미안해요. 난 영애도 내가 좋다는 건 줄 알고…….”
멜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페르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첫 만남 이후 줄곧 반복해 온 실수가 오늘도 되풀이된 모양이다.
“저는 이, 이만 가 볼게요.”
페르멘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심장의 욱신거림은 그대로였지만, 여기서 그녀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가요. 데려다줄게요.”
“그냥 저 먼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래요.”
“왜 기다려야……?”
이유를 묻는 멜리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페르멘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게… 지금은 좀, 밖에 나가기가…….”
그가 더듬더듬, 변명 아닌 변명을 주절거리고 있을 때 멜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페르멘은 그녀의 손목을 붙든 채로 황급히 몸을 틀었다. 부풀어 오른 하반신을 어떻게든 감춰 보기 위해서였다. 멜리안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진 것을 보면 실패한 것 같지만.
혼자만 달아오른 것 같아 부끄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보았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이 차올랐다. 페르멘은 멜리안을 놔주지도 못하고, 다시 달려들지도 못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그를 따라 하는 것처럼 마른침을 꿀꺽 삼킨 멜리안이 손을 뻗었다. 곁눈질로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페르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틈을 타 멜리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 페르멘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뭐 하는……. 하지 마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이러지 마요. 사내놈들의 인내심은 얄팍하기 그지없다고.”
페드로에게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오늘날 페르멘은 형제의 가르침을 절절하게 실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멜리안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말과 달리 그녀를 만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덕분에 멜리안의 손길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아…….”
뜨거운 숨을 내쉬자 허리가 움찔거렸다. 어설프면서도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아랫도리를 문지르는 멜리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페르멘의 내면에서 격렬한 충돌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 그를 밀어내던 손길과, 지금 자신을 만져 주는 손길.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진 그녀의 행동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씨발…….”
그 격렬한 충동 끝에서 도달한 결론은 빤했다. 이전에야 어떠했든, 지금은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만져 주니까 허락이나 다름없지 않으냐고. 결국 참지 못한 페르멘이 다시 멜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입술부터 들이민 그가 자신의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으응…….”
희미하게 새어 나온 비음이 그를 재촉했다. 멜리안의 치맛자락을 들치고 속옷을 끌어 내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그의 허벅지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을 만큼 얇은 다리를 잡아당겨 하체를 맞추자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그와 달리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할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페르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저를 밀어 넣으려 했다.
“윽… 좁아…….”
“아윽……!”
성급한 삽입에 멜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척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페르멘이 저를 빼냈다.
“미안, 미안해. 아팠어? 너무 급해서, 아씨…….”
물기가 그렁그렁한 멜리안의 눈가에 입을 맞춘 페르멘이 중얼거렸다.
“이런 게 익숙하지를 않아서…….”
이어진 건 자책이었다. 실제로 페르멘은 여인과의 정사에 능하지를 못했다. 날 때부터 성욕이 적은 편이었던 건지 여자가 자주 필요하지도 않았고, 성에 눈을 뜨고 관심을 기울일 나이에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키느라 바빴으니까. 황도에서 줄곧 생활했다면 모를까,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페르멘의 생활은 온통 에스메랄다에게 맞춰져 있었다.
덕분에 충동적으로 차오르는 욕망에 대처하는 것도 미숙했다. 멜리안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저를 집어넣으려고 한 건 스스로를 제어하는 데 서툰 탓이었다. 직전의 행동을 자책한 페르멘이 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상의를 침대 밖으로 집어 던진 그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제 바지까지 끌어 내렸다.
“오, 옷을 왜 전부…….”
그에 당황한 멜리안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댄 페르멘이 벌건 얼굴을 하고서 속삭였다.
“나부터 벗어야 네가 벗을 때 덜… 혹시 벗기 싫어? 억지로 벗기는 짓은 안 해. 난… 난 네가 입고 해도 상관없어.”
다시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멜리안을 보니 목이 탔다. 하지만 직전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떠올리니 참을 수 있었다. 페르멘은 조심스럽게 드레스의 단추를 풀며 멜리안의 목덜미를 핥았다.
“좋아하는 데 있어?”
뻣뻣하게 굳어 버린 멜리안이 경악에 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반응에 또다시 거부당할까 봐 겁을 먹은 페르멘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서툴러서……. 어디가 좋은지 말해 주면 거기부터 해 줄게. 네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말해 줘.”
거듭된 청원에 그의 시선을 피한 멜리안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 그런 거 몰라요……. 이, 이런 게 처음, 해 본 적 없어서…….”
꿀꺽, 침을 삼킨 페르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혼자 했을 때 좋아했던 곳이나……. 자, 자위는 해 봤을 거 아냐…….”
움찔거린 멜리안이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가, 가슴…….”
때마침 멜리안의 드레스 단추와 코르셋을 전부 풀어낸 페르멘이 옷가지를 끌어 내렸다. 출렁거리며 밖으로 흘러나온 젖가슴을 보자 목이 바짝바짝 탔다.
노골적이고 집요한 시선에 멜리안이 가슴을 팔로 가렸다. 억지로 그 팔을 치우고자 하면 못 할 것은 없지만……. 그랬다가 멜리안이 또 자신을 거절할까 봐 무서웠다. 페르멘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보고 싶은데, 더 보고 싶은데.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바람은 행동이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멜리안을 눕힌 페르멘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할짝, 할짝, 천천히 혀를 놀린 그는 봉긋한 가슴 주변을 손으로 훑었다. 멜리안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그녀의 팔을 비집고 들어가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사, 상냥하게 해 주세요…….”
그에 천천히 팔을 거둬 간 멜리안이 울먹이며 말했다. 페르멘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격해지려 할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상냥하게, 부드럽게. 발딱 일어난 유두를 양손 엄지로 문지르는 손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으응, 흣…….”
그 인내에 대한 보상일까? 멜리안이 달콤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거칠어진 숨을 뱉어 낸 페르멘이 그녀의 앙증맞은 유두를 입에 물었다.
“기분 좋아?”
우물우물, 입에 문 채로 물어보자 멜리안이 얼굴을 가리고서 답했다.
“으응……. 흣, 모, 모르겠어요.”
“싫어? 그, 그만할까?”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페르멘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멜리안의 가슴에 달려들었다. 보드라운 살덩이를 가득 베어 문 그가 딱딱한 돌기를 혀로 문질렀다.
“부드러워…….”
“흐읏!”
욕심껏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으흣……!”
“하……!”
달큼한 살 내음이 그를 채우기 시작했다. 한동안 멜리안의 젖가슴에 매달려 있던 페르멘의 손이 아래로 움직였다. 치맛자락을 들치자 이미 한참 전에 그가 벗겨 냈던 속옷이 멜리안의 허벅지에 걸려 있었다. 페르멘은 그것을 마저 벗겨 낸 후 깊은 곳을 더듬었다.
“으앗!”
놀란 멜리안이 몸을 떨면 멈추고, 그녀가 저를 밀어내지 않는다고 확인하면 다시 움직였다. 앙증맞게 부풀어 오른 음부의 핵을 건드림과 동시에 멜리안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전희에 공을 들이자 그녀의 음부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응, 으읏, 으항!”
메말라 있던 샘은 어느새 흥건해져 있었다. 페르멘은 좁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움찔거린 멜리안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흐느꼈다. 페르멘은 그런 그녀의 뺨과 귀를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교성이 높아질수록 흘러나오는 애액도 많아졌다. 음부를 타고 항문을 지나 시트까지 흘러내린 물은 페르멘의 손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멜리안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정말 황홀했다.
페르멘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 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는 교성을 더 듣고 싶다는 일념하에 손을 놀렸다. 이미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그의 성기에서 울컥울컥, 맑은 액이 흘러나왔다.
그때 별안간 한껏 웅크리고 있던 멜리안이 페르멘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흐느꼈다. 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내벽이 찌르르, 울렸다. 저도 모르게 멜리안의 허벅지에 성기를 문지르고 있던 페르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거친 숨소리가 휴게실을 가득 채웠다.
잠시간 축 늘어진 멜리안을 살피던 페르멘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애액에 젖어 축축한 손을 빼내 자신의 성기를 문질렀다. 멜리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 움직임은 여전히 조심스럽기만 했다.
“넣을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허리를 움직였지만, 멜리안이 흥건하게 젖어 있음에도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꽉 막힌 벽은 그의 귀두를 밀어내기만 했다.
“흐…….”
몸이 달아서 초조했던 페르멘이 상체를 숙이며 멜리안의 뺨과 턱에 입을 맞추었다.
“힘 좀… 힘 좀 빼 봐, 나 진짜 더는 못 참겠어.”
그는 애타는 음성으로 애원했다.
“제발…….”
그에 페르멘을 꽉 껴안은 멜리안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직후 입을 꽉 닫고 있던 내벽이 길을 열어 주었다. 페르멘은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십여 분 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려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멜리안은 그를 빨아들였다. 그녀가 온전히 저를 원해 주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페르멘은 그대로 멜리안의 끝까지 저를 집어넣었다. 분명 끝에 닿았는데, 멜리안은 그를 전부 삼키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의 깊은 곳에 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뜨거워……!”
더는 못 참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페르멘은 곧바로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살이 부딪치며 질퍽거리는 소리를 뱉어 냈다.
“흐앙, 앙! 앙!”
멜리안과 깍지를 낀 채 입을 맞춘 페르멘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아! 윽……! 하, 좋아!”
그녀의 교성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몽롱했다.
“너는? 너도 좋아?”
“으핫, 앙! 아응! 앙, 앙!”
대답을 듣고 싶은데 멜리안은 울부짖느라 바빴다. 페르멘은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고 핥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기분 좋게 들어차는 감촉은 부드러웠고, 그를 뒤덮은 내벽은 황홀했다.
“아랫도리가, 하아, 녹아 버릴 것 같아. 너무 좋아, 멜.”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딱딱하게 곤두서 있는 유두가 손바닥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에 그것을 끼고 문지르던 페르멘은 저를 쥐어짜듯 요동치는 내벽을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흑, 흐읏…….”
움찔거리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멜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을 핥아 준 페르멘이 말랑거리는 귓불을 입에 넣고서 우물거렸다.
“방금 간 거지? 어땠어? 좋았어?”
이미 발갛던 멜리안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혼자 지레짐작하고 오해한 전적이 너무 많은 탓이리라.
결국 페르멘은 그녀를 어르는 것처럼 얕은 입맞춤을 반복하며 속삭였다.
“좋았다는 거… 맞지? 네가 말을 안 해 주면 난 또 오해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대답 좀 해 봐, 응?”
거듭된 애원에 멜리안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페르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럼, 그럼 더 해도 돼? 나 아직 못 쌌는데.”
“그냥, 빨리…….”
울먹이는 대답에 페르멘이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하!”
직전의 절정 때문일까? 한껏 예민해진 멜리안의 속살은 더 야무지게 그를 물어 댔다. 페르멘은 본격적으로 허리를 치대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멜리안의 골반을 붙잡기 무섭게, 격렬한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퍽퍽퍽, 상스러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페르멘의 신음과 멜리안의 교성이 뒤섞였다. 그때마다 페르멘은 멜리안이 더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를 다 삼키지 못했는데, 지금은 꼭 서로에게 맞추어 태어난 것처럼 완벽하게 맞물렸다. 그 변화를 인지하자 사정감이 몰려왔다.
“하아, 윽!”
낮은 신음이 반복될수록 추삽질은 더 거칠어졌다.
“자, 잠깐, 으항, 갈, 아읏! 갈 것 같……!”
“나도……!”
이윽고 멜리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을 파묻은 페르멘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의 정사였던 탓일까? 그의 씨물은 맞물린 틈새를 비집고 나올 만큼 흥건했다.
황홀한 파정이었다.
* * *
겨울이 시작되자마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루이자가 아이를 가졌고, 지난 1년여간 도통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던 페르멘의 혼처도 결정되었다. 그 반가운 소식들이 걱정거리를 하나씩 달고 오기는 했지만.
응접실에 도착한 에스메랄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자의 유산기에 철렁했던 심장은 오늘에 이르러 페르멘의 파혼 소식 때문에 울렁거렸다. 아마트 남작가에서 보낸 서신의 내용을 되짚어 보던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처음 이 혼사가 진행될 무렵 아레스와 나눈 대화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당일에요?’
‘예, 당일 영애를 다시 찾아가 청혼을 하고 왔답니다.’
이번 혼사는 페르멘 쪽에서 주도했다. 해서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사감을 최대한 배제한 채 그의 혼사를 관망해 왔다. 페르멘의 성정을 잘 아는 탓이다. 그는 형제들 중 ‘사람’에게 가장 예민했으니까. 타인의 악의에 민감하기도 했고, 본인이 싫다 싶으면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사감을 어느 정도 배제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랐다. 페르멘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드문 편이었다.
그런 이가 고른 영애이니만큼 최대한 뒤로 물러나 있을 생각이었다. 대뜸 파혼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후우.”
에스메랄다의 한숨이 깊어졌다. 일전에 마련한 만찬 자리에서 만나 본 아마트 남작 일가의 인품은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다. 멜리안 개인의 성품 역시 마찬가지였고. 향후 그녀가 맡아 주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실망스러웠지만, 페르멘이 바라는 인연이기에 조용히 뒤에서 혼사를 지지해 주기로 했던 것인데 파혼이라니.
에스메랄다가 이리저리 생각과 기억을 정리하던 그때.
“황후 폐하, 아마트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노크 소리를 뒤로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멜리안은 긴장한 기색이 선연했다. 파혼의 뜻을 밝힌 후 불려 온 것이니 편하기는 힘들 테지.
“아마트의 멜리안이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영애. 우선은 앉지.”
에스메랄다가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는 동안 시녀들이 다과를 내어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내 입장에서는 파혼도 상관은 없어.’
후에 루이자를 보필해 사교계를 단속하기엔 멜리안의 성정이 너무 유했으니까. 보다 적극적이고 사나운 사람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스메랄다의 입장이었다. 이미 아레스를 통해 페르멘이 매일같이 아마트 남작가의 타운하우스를 찾아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참이다. 페르멘은 파혼을 바라고 있지 않은 것이다.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마음을 엿본 이상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삼킨 에스메랄다가 눈을 뜨며 말했다.
“내가 왜 영애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멜리안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감히 짐작건대, 테노리엘 경과의 혼사 때문이 아닐지…….”
“그래, 페르멘 오라버니와 파혼하기를 원한다고.”
멜리안이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어 갔다.
“남작은 이 혼사가 처음부터 부담스러웠으며,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니 물러나겠다는 식으로 말하더군.”
“…….”
“영애의 뜻도 같은가?”
이번에도 멜리안의 답은 같았다. 순순히 긍정하는 그녀를 두고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
“네?”
멜리안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반문했다. 에스메랄다는 질문을 거듭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오래지 않아 당혹감을 추스른 멜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제가 테노리엘 경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 말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잘랐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 견해가 왜 나온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였네. 그게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라면 두말하지 않고 파혼을 허락할 테니 말해 보게.”
그에 무릎 위에 놓인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멜리안이 말했다. 자신은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페르멘이 사는 곳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니 물러나는 게 맞는다고.
“저에게 테노리엘 경의 옆자리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 말을 저가 하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듯이, 점차 작아진 목소리는 끝에 가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스메랄다의 한숨 소리에 멜리안의 고개가 더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찻잔을 들어 올린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자리를 마련한 김에 솔직히 말하지. 사실 난 처음부터 영애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네.”
멜리안이 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페르멘의 뜻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지만, 그의 혼사 자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기로 했다. 향후 10여 년의 계획을 간결하게 알리고, 그 과정에서 페르멘의 아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하나하나 짚어 주는 사이 에스메랄다의 찻잔이 비었다.
“쉽게 말하자면 귀족들의 돈주머니를 털어 와야 한다는 뜻이지.”
남부군은 앞으로 계속 몸집을 불릴 것이다. 그만큼 필요한 물자도 많아질 터. 지금이야 다들 아르페시스의 눈치를 보며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고 있지만 몇 년 후에는? 점차 빈도가 줄어들 것이고, 기부금은 씨가 마를 것이다. 언제나처럼 남부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겠지.
그래서 사교계가 중요한 것이다. 그곳에서 기부를 종용하여 돈을 털어 와야 하니까. 그 우아한 강도 짓의 선두에 서는 건 루이자일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뒤를 봐 주기는 할 테지만 직접적으로 나설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루이를 귀애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의 성정은 너무 선해. 타인을 의심하기보다 믿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거든. 타인의 위에 군림하기 좋은 성정은 아니지. 해서 페르멘 오라버니의 배필은 조금 더 교활하거나 영민한 사람이기를 바랐어. 루이자를 잘 보필해 주었으면 했으니까.”
“…….”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애가 페르멘 오라버니의 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 어찌 보면 영애도 루이와 비슷한 사람이니 사교계의 기강을 잡고, 우아한 가면을 쓴 채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오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
비어 버린 잔을 내려놓은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덤덤했다.
말 그대로, 지금의 루이자는 여러 면에서 사교계를 휘어잡기에 부족했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충분히 다듬을 수 있는 부분이니까. 아레스가 틈틈이 그녀에게 교묘한 화술을 가르치고 있다. 과거 부친에게 배웠던 것을 그대로. 그녀는 현재 훗날을 위한 준비 중에 있다. 만약 멜리안이 파혼을 언급하지 않고 페르멘과 혼인했다면 같은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멘 오라버니가 영애와의 혼인을 바란 이상,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어. 나는 당연히 영애도 가르칠 생각이었네. 오라버니께서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을 테고.”
“…….”
“정작 당사자는 우리가 방치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퍼뜩 고개를 든 멜리안이 다급히 손을 내젓고자 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아니었다? 하면 영애가 오라버니의 곁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는 무엇에 기반했지? 영애가 말하는 어울림의 자격은 어디에서 나왔기에?”
“…….”
“금전인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한층 더 하얗게 질린 멜리안의 손이 답을 대신했다.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푹 내쉬고야 말았다. 그에 멜리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작고 여린, 그리고 한껏 위축되어 있는 그녀를 눈에 담기도 한참. 에스메랄다는 처음과 변함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영애가 생각하는 자격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해 보는 게 좋겠어.”
“네?”
“나는 말이야, 날 때부터 많은 것을 쥐고 태어났네. 지금에 이르러서는 황후의 자리에 올라 있기도 하지.”
“…….”
“하지만 그게 나의 자격 덕분일까? 영애가 보기에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다시 에스메랄다를 바라본 멜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야 물론… 폐하께서는…….”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고?”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서늘해졌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멜리안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네.”
잔을 기울인 에스메랄다가 따듯한 홍차를 한 모금 삼키며 덤덤히 말했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그리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에 어울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
“영애가 본 귀족들 중에 그런 삶을 누려 마땅한 이들은 얼마나 되던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에스메랄다에게까지 들렸다.
“본인이 정말 페르멘 오라버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합당한 이유를 가져오게. 우리가 채워 줄 수 없는 것,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부족한 능력, 혹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결격 사유 같은 것들 말이야.”
오래전 입을 다문 멜리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게 없다면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혼담을 파기해 가문의 이름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군.”
이제 일방적인 대화를 끝낼 때가 되었다.
“가난은 많은 것을 앗아 가지.”
자존감, 여유, 그리고 기회까지. 지금의 멜리안은 그렇게 많은 것을 빼앗긴 결과물이었다.
“오늘날 물러나면 자네는 10년 후에도 그곳에 있을 터. 또 한 번 기회를 빼앗겨도 괜찮은지 잘 생각해 보게.”
덤덤한 음성으로 말한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내 결론이 같다면 영애의 뜻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이달 내로 답이 없을 경우에는 파혼하는 것으로 알고 다른 이를 찾겠네.”
멜리안을 남겨 두고 응접실을 나선 에스메랄다의 한숨이 깊어졌다. 부디 오늘의 대화가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 *
페르멘은 서둘러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지난 연회 이후 여드레가 넘도록 연락이 되질 않던 멜리안이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날 페르멘은 쑥스러우면서도 기쁘고, 아쉬우면서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직접 타운하우스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가벼운 입맞춤까지 나누었다.
그런데 정작 다음 날이 밝자마자 멜리안과 연락이 되질 않았다. 서신을 보내도 답이 돌아오지 않고, 혹시 저 때문에 무리를 해서 아픈 건가 걱정이 되어 찾아가면 남작이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주제에 맞지 않는 자리였다면서 혼사를 무르자는 말과 함께.
하지만 페르멘은 파혼을 거부했다. 그는 이미 멜리안과 황홀한 정사를 나눈 후였다. 그녀를 놓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매일 아마트가의 타운하우스 앞에 진을 치고 서성거렸지만, 멜리안의 얼굴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페르멘은 초조한 마음에 여기저기 성질을 부릴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에 아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곤 했지. 하지만 페르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멜리안으로 가득했다.
‘대체 왜.’
분명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는데, 그녀도 자신을 원해 주었는데. 그녀 역시 좋았다는 확답까지 들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지난 여드레간 그는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를 지옥으로 보낸 멜리안이 찾아왔다.
페르멘은 숨을 고르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곧 응접실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의복을 정돈하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마트가의 타운하우스로 가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던 참이라 머리가 아직 젖어 있었다.
‘거울 좀 보고 나올걸.’
다급하게나마 외양을 정리한 페르멘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두드렸다.
“영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노리엘 경, 갑작스럽게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그녀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대번에 곁으로 다가간 페르멘의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어디 아팠어요? 그날 내가 너무 심했나? 아… 그, 그래서 내 연락을…….”
걱정으로 인해 울렁거리던 심장은 한순간 화로 가득 찼다.
“왜… 왜 그런 식으로 나를 피해요?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러다가 다시 염려에 젖어서는 일렁거리고야 만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페르멘이 심호흡을 시작했다.
“일단, 앉죠. 앉아요.”
“……네.”
분명 서로를 의식하고서 살피는 중이었는데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페르멘은 손을 쥐었다 펴며 오랜만에 만나는 멜리안을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멜리안을 다시 만나게 되자 모든 게 확실해졌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처음에는 조건에 맞춰서, 그다음에는 그나마 호감을 느낀 사람이라서. 이것저것 따져서 만나게 되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페르멘은 멜리안을 심장에 들여 버렸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며칠을 지옥이라 표현할 만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페르멘이 초조하게 입매를 매만졌다. 멜리안을 향한 감정이 확실해진 것과 별개로 그는 지금 파혼 위기에 처해 있다. 분명 그녀와 정사를 가졌음에도 아마트 남작은 혼사를 무르자며 그녀와의 만남을 막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멜리안과 아마트 남작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며칠 전에…….”
“네?”
“며칠 전에 황후 폐하를 뵙고 왔어요.”
에스메랄다를? 페르멘은 처음 듣는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멜리안이 에스메랄다를 만났다고? 전해 들은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리디가 불렀나?’
아니면 멜리안이 알현을 청했나?
너무 뜬금없는 말에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 전 경과의 혼인이 여전히 부담스러워요.”
“그런…….”
쿵, 하고 떨어진 심장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으로 좋아해 본 여자에게 차이다니, 비참했다. 그런데도 억울할 수가 없는 게, 페르멘은 그간 자신이 거듭한 실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참한 자괴감과 서러움이 뒤엉켰다.
그리고 그 뒤로 분노가 따라붙었다. 욱, 하고 차오른 감정에 뭐라고 말을 꺼내 보려던 찰나 멜리안이 말했다.
“전… 황실의 화려한 행사에도 익숙하지 않고, 이렇게 큰 저택도 낯설고, 말을… 비싼 말을 몇 필이나 가지고 있는 게 기이하기도 하고……. 저, 저희 집안에는 마차를 끌 말 두 마리가 전부인데, 경은 혼자서 그보다 많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꾸역꾸역 생각이라는 것을 반복한 페르멘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많으니까 부담스럽다고?
‘라울 빼고 다 정리하자.’
그럼 한 마리만 남는 거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울은 선대 백작이 처음으로 선물해 준 말이라 각별했다. 페르멘은 멜리안에게 딱 한 마리만 허락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사실 황성에 가 본 것도 손에 꼽아요. 고작해야 데뷔탕트 때만 두어 번 참석해서…….”
하지만 그가 부탁을 하기도 전에 멜리안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전이 발발했던 해에 성년이 되었다. 직접 참석한 데뷔탕트 연회를 세어 봐야 두어 번이 전부였다.
‘황성에… 황성에 안 가면 되는 건가?’
페르멘은 난처함에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단이 개편되면 그는 부단장으로서 매일 황성으로 출퇴근을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테노리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외부적인 활동을 그가 담당하기로 했으니까. 제르민이 성장해서 신력을 보다 자유롭게 다루게 되면 아레스에게 팔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럼 아레스는 다시 출정할 테고, 황도에 남는 테노리엘은 페르멘뿐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야…….’
달달달달, 부산스럽게 떨리기 시작한 다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멜리안은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런 연회에서 샴페인은 어떻게 찾아 마셔야 하는지도 몰랐고, 황후 폐하와 만찬을 함께할 때도 낯선 음식이 너무 많았어요. 경께서 준비해 주신 드레스처럼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도 처음 입어 봤고…….”
“…….”
“저에게 경이 사는 세상은 낯선 것투성이였어요. 그래서 제가 경의 곁에 있으면… 흠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자격지심이죠.”
아래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를 봐 주지 않는 멜리안은 잔인했다. 페르멘은 두 손을 꾹 움켜쥐며 말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기어이 파혼하고 싶다는 겁니까?”
“그…….”
멜리안이 고개를 들고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편하다면 맞출게요. 내가 영애한테 전부 맞출게요.”
페르멘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이렇게 허망하게 파혼을 할 수는 없는데. 이게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어떻게든 멜리안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지 마세요……. 황후 폐하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앞으로 경이 어떤 일을 하셔야 하는지…….”
하지만 혼사를 무르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멜리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손에 힘을 너무 준 탓일까? 손톱이 손바닥의 살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떨군 페르멘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당신도 날 원해 줬잖아.”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그날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음에도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 멜리안의 신영이 얼핏 보였다. 그걸 보자 욱, 하고 차오른 화가 난동을 부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멘이 주변을 서성거리며 말했다.
“내가 파혼을 해 줄 것 같습니까?”
“어…….”
“날 먹고 버리겠다고? 웃기지 마! 책임져야 할 거 아냐, 그런 걸 가르쳐 놓고 버리겠다니, 파혼은 꿈도 꾸지 마요.”
멜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그날 피임도 안 했어. 지금 당신은 내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파혼? 파혼……. 이, 씹, 파혼이라니…….”
계속 파혼이라는 말을 반복하니 그게 절대 피할 수 없는 미래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내려다보던 페르멘이 성큼성큼, 멜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난 이미 당신이 좋아졌단 말이야. 이렇게 버리지 마요.”
“아뇨, 아뇨, 제가 어떻게 버, 버, 그게 아니라…….”
“나도 내가 형편없는 놈인 건 알아. 성격도 급하고, 속도 좁고, 짜증도 많아. 나도 다 아는데, 그래도 당신한테는 잘할게. 진짜 잘할……!”
“제가! 제가 맞추겠다고!”
“……어?”
눈물이 흐르기 직전 훌쩍, 코를 삼킨 페르멘이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노력할게요. 낯설고 어색한 것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배워야 할 게 많겠지만 당신에게 흠이 아니라, 훌륭한 배필이 될 거라고요.”
“혼사를 무르자는 말이…….”
“아, 아니에요. 저, 정말 염치가 없지만… 경만 괜찮으시다면 저, 저, 저랑, 혼인을 해 주시면…….”
생각을 정리하는 건 사치였다. 페르멘은 그대로 멜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지난 입맞춤과 달리 멜리안은 그에게 열렬히 응해 주었다. 멜리안을 품에 무작정 끌어안은 페르멘이 끙끙 앓기 시작했다. 맞물린 입술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리는 요란했다. 젖은 살덩이를 문지를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좋아, 너무 좋아.’
당장이라도 그날처럼 멜리안을 품고 싶었다. 반사적으로 멜리안의 치맛자락을 더듬던 페르멘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대로 잠시간 굳었던 그는 오래지 않아 몸을 물렸다. 멜리안은 발간 얼굴을 하고서 눈을 끔뻑거리는 중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놀랐다면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놀랐다기보다는… 저도 기뻤어요…….”
꿀꺽 침을 삼킨 페르멘이 멜리안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진짜로……?”
끄떡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사랑스러웠다.
“그럼 한 번 더 해도…….”
페르멘은 멜리안이 거듭 고개를 주억거리자 조심스레 입술을 맞대었다. 부드럽고 여유롭게 시작되었던 입맞춤은 다시 격렬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를 소파에 눕힌 채 올라타 있었다.
페르멘은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숨을 골랐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묵직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의 무언가를 하는 대신 멈추기를 택했다. 첫 정사를 가진 후 멜리안과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조금, 겁이 났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못 버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아직 혼전이기도 하고…….’
초야 때까지만 참자.
스스로를 다독인 페르멘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멜리안을 앉힌 그가 작은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더한 것을 바랐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손으로 발간 얼굴을 문지른 페르멘은 힐끔, 멜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도 그를 살피고 있었던 듯 바로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기도 잠시. 멜리안은 다시 살금살금 시선을 들어 그를 봐 주었다.
‘너무 예쁘잖아.’
페르멘은 자꾸만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어…….”
“네?”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멜리안의 전부를 눈에 새길 것처럼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우물쭈물,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끝… 인가요?”
덜컥, 거린 페르멘의 몸이 실시간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눈을 감았다.
“그, 아무래도, 그날 일은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서……. 우린 아직 식을 올리지도 않았고…….”
횡설수설 생각했던 바를 늘어놓던 페르멘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여기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슬그머니 다가온 손이 아랫도리에 닿은 탓이었다. 서둘러 멜리안의 손을 떼어 낸 페르멘이 이를 갈았다. 처음이라더니 왜 이렇게 덥석덥석.
‘겁이 너무 없는 거 아냐?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페르멘의 다리가 경박스럽게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왜… 막 그렇게 만지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데……. 불에 기름을 끼얹는 거라고요.”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누구에게서 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도 좋았어요.”
맞물린 잇새에서 까득, 하고 딱딱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냥 한 번의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했는데, 매일 생각이 나서… 잊을 수가 없었어요.”
“…….”
“그날처럼… 해 주시면 좋겠… 으아!”
멜리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페르멘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으니까. 그길로 응접실을 나선 페르멘이 위층에 있는 제 침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꺄!”
멜리안을 침대 위로 던진 페르멘은 제 옷을 무작정 뜯어냈다. 단추가 뜯어지고 옷가지가 흘러내리며 탄탄하게 단련된 육체가 드러났다.
침대에 누워 그를 보고 있던 멜리안도 주섬주섬, 자신의 드레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정말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순식간에 나체가 된 페르멘이 멜리안의 곁으로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딴 놈들도 이렇게 유혹합니까?”
“아, 아니…….”
“나한테만 이러는 거죠?”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는 게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멜리안의 허리를 낚아챈 페르멘이 귓가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딴 놈들한텐 그렇게 막, 덥석덥석 만져 주고 그러면 안 돼요. 알죠?”
“아, 알아요…….”
“지난번처럼, 개새끼들이 와서 당신을 만지면 무조건 싫다고 해요.”
“읏… 네?”
“안 돼요, 싫어요, 빨리.”
멜리안의 목덜미를 핥기 시작한 페르멘이 제 음경을 그녀의 옷자락에 문질렀다.
“따라 해 봐, 안 돼요, 싫어요.”
“아, 안 돼요……. 싫어요.”
“딴 놈들이 당신을 만지면 무조건 그렇게 해. 그 개새끼……. 팔다리를 분질러 놨어야 하는데.”
다시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멜리안을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쉽게 넘어가 주었다. 어디선가 그놈을 마주치면 뒤통수를 깨 버리겠다고 다짐한 페르멘이 멜리안의 드레스 자락을 풀어 헤쳤다.
“오늘은.”
“네……? 으흣.”
“오늘은 다 벗겨 봐도 돼? 제대로 보고 싶은데.”
새빨갛게 달아오른 멜리안의 얼굴에 입술을 비빈 페르멘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부끄러우면 안 해, 난 네가 싫어하는 거 절대 안 할 거야.”
“시, 싫지 않아요…….”
“그럼…….”
“조, 좋아요…….”
“해도, 돼?”
“…….”
“다 벗기고?”
“……돼요.”
페르멘은 그녀의 드레스를 잡아 뜯기 시작했다.
“아, 흐으, 아!”
낮게 잠긴 사내의 신음 뒤로 여성의 간헐적인 교성이 따라붙었다. 멜리안의 허리에 팔을 쑥 끼워 넣은 페르멘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돌렸다. 음부가 이어진 채 휙, 엎드리게 된 멜리안이 얕은 비명을 질렀다.
멜리안은 정말 가벼웠다. 체격도 그에 비하면 작았고. 그런데도 그의 물건을 온전하게 다 삼키다니. 여인의 몸은 정말 신비했다. 페르멘은 몽롱한 와중에도 멜리안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움직였다.
엎드린 채 엉덩이를 높게 치켜든 멜리안의 뒤에서 격렬하게 허리를 치대기도 한참. 짐승처럼 으르렁거린 페르멘이 몸을 숙였다. 단단한 가슴이 보드라운 등에 닿았다. 침대에 짓눌려 있던 멜리안의 가슴을 움켜쥔 페르멘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와 등줄기를 깨물었다.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움직인 허리로 인해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 자세, 좋아. 네가, 흐, 나를 더 꽉 물어.”
“으흣, 흑, 읏!”
“넌? 싫어? 바꿀까?”
“이대로……. 앗!”
“너도 좋아?”
“조, 앙! 좋아, 하앙!”
벌써 몇 번이나 파정했는데 부족했다.
페르멘이 정신없이 저를 치대던 그때, 멜리안의 말랑거리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절정에 달한 멜리안의 내벽은 페르멘의 사정을 재촉했다.
“아, 나도 쌀게……. 윽!”
움찔, 움찔. 멜리안에게 저를 온전히 파묻은 채 몸을 떤 페르멘이 파정했다.
“허억, 헉.”
그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도 멜리안의 목과 귀, 뺨에 쉼 없이 입을 맞추었다. 힘이 빠진 멜리안의 몸이 쭉 미끄러지며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녀의 안에서 후희를 즐기던 페르멘의 몸도 딸려 내려갔다. 제 체중으로 멜리안을 뒤에서 뒤덮은 페르멘이 얕게 허리를 돌렸다. 거듭된 파정에 지칠 법도 한데, 그의 성기는 다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으응…….”
안에서 다시 부풀어 오른 그를 느낀 걸까? 멜리안이 몸을 틀면서 그의 품을 빠져나가려 했다. 페르멘은 아쉬운 마음에 그녀를 가둔 채 속삭였다.
“계속하자, 응?”
이대로 허리를 쳐올리면 얼마나 황홀해지는지 배웠다. 마음에 품은 여인과 나누는 정사는 단순히 쾌락을 얻기 위한 것과 달랐다. 그녀가 몸을 열어 자신을 받아들일 때 느끼는 그 충만함은 말로써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걸 계속 느끼고 싶어서 자꾸만 달려들고야 만다. 직전까지 그를 가득 적셨던 그 감각을 다시 원했다.
하지만 멜리안은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이제 그, 그만…….”
“……싫어?”
힘없이 늘어진 채로 고개를 주억거린 멜리안이 훌쩍거렸다.
“더, 더는 못 해요…….”
“알았어…….”
시무룩한 어조로 답한 페르멘이 저를 빼내었다.
“으흣……!”
그 작은 자극에도 움찔, 몸을 떤 멜리안이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페르멘은 입맛을 다시며 멜리안의 위에서 내려왔다.
“물… 물…….”
“물 줄까요?”
눈을 감은 채 끄덕, 고개를 까딱거린 멜리안을 품에 안아 든 페르멘이 잔에 물을 따랐다. 멜리안은 잔을 입가에 대어 주자 힘겹게 한 모금 삼키고서 축 늘어졌다. 그제야 양심이 아파 왔다.
“……많이 힘들었어요?
해가 높게 떠올라 환하던 하늘은 어느새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그를 받아 냈으니 지칠 만도 하지.
“쓰, 쓰라려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멜리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안고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페르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쓰라리다고요? 아파요?”
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입에 달고 있던 괜찮다는 말도 안 하다니.
사색이 된 페르멘이 서둘러 그녀를 제대로 눕히고 아래를 살폈다. 얇은 다리를 벌려 은밀하고 아름다운 곳을 확인하자 할 말이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들 때는 몰랐는데, 멜리안의 음부가 부어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확연하게 티가 날 만큼 심각했다.
“아, 어떡… 이런 미친… 미안,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잠깐만요… 의원을 부를게요.”
다급하게 설렁줄을 당긴 페르멘이 제 가운을 가져와 멜리안에게 걸쳐 주었다. 이어서 바지를 주워 대충 다리를 끼우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의원 데려와! 빨리!”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전에 소리를 지른 페르멘이 멜리안의 옆에서 다리를 떨었다.
곧 테노리엘가의 주치의가 도착했다.
“빨리 진찰부터. 그, 여인의 그 부분이 아프다고…….”
페르멘은 거의 울 것 같은 기세였다. 주치의는 몸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한 채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는 멜리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진찰은 시녀를 통해 하겠습니다.”
페르멘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주치의가 몸을 돌린 사이 시녀가 가운을 들치며 멜리안의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외음순이 많이 부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출혈은 없나?”
“당장 보이는 혈흔은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안쪽도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 손가락으로…….”
“그건 내가.”
“예, 도련님.”
멜리안을 안아 든 페르멘이 자신의 정액과 애액으로 범벅이 된 멜리안의 음부를 더듬었다.
“으응…….”
비척비척, 힘없이 몸을 뒤트는 멜리안을 보자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페르멘은 창백한 안색으로 주치의의 지시에 따랐다.
“내벽이 평소에 비해 부으셨습니까?”
“응… 심해.”
관계를 가지기 전, 손가락으로 전희를 했을 때보다 내벽이 울퉁불퉁하고 공간도 좁았다. 이를 악문 페르멘이 멜리안을 꼭 껴안았다.
“이번에는 영애께서 답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런 자극이 없음에도 아프십니까? 아니면 자극이 있을 때만 단발적으로 통증이 느껴지시는지요?”
얼굴이 새빨개진 멜리안이 작게 속삭였다.
“계속,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프대.”
그걸 페르멘이 전달했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을 아끼던 의원이 곧 처방을 해 주었다.
“우선 혈흔은 없는 듯하니,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드리겠습니다. 연고가 마르지 않게 주기적으로 발라 주시면 됩니다. 경과를 지켜본 후에도 부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약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하죠.”
“겨우 그걸로 되는 거야? 아파하잖아.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데?”
“……그건 하루 이틀 내에 괜찮아지실 겁니다. 도련님께서 잘 참으시면요.”
결국 전부 그의 탓이었다. 눈시울을 붉힌 페르멘이 자책을 시작했을 때였다.
“도련님, 후작님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형이?”
시녀가 작은 쪽지를 들고서 그의 침실을 방문했다. 그것을 받아 확인한 페르멘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아직 혼전이다.」
“이 미친놈…….”
멜리안이 너무 좋아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전후 사정은 죄다 무시한 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혼전 순결을 따지지 않는 시기라고는 하나 뒤에서 떠드는 말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멜리안이 테노리엘 저택에서 묵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그 개 같은 자식들이 또 떠들어 댈 텐데.’
잘못을 저지른 건 저인데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는 건 멜리안이 되겠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페르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애께서… 자택으로 돌아가셔도 돼?”
“우선은 연고를 바르고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왕진을 가면 되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
“약은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페르멘이 시녀에게 지시했다.
“목욕물을.”
“예, 도련님.”
멜리안을 품에 안고 있는 페르멘의 몸이 아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멜리안을 씻기고 입혀서 타운하우스 앞에 도착했을 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페르멘은 멜리안을 안고서 직접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축 늘어진 그녀를 침대에 눕혀 주자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래도 이제 좀 정신이 든 건지, 괜찮다는 말을 또 입에 담는다. 허탈하게 웃었다가도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린 페르멘이 침대 맡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난 이런 게 다 처음이라……. 앞으로는 자제할게요.”
“그래도 전 좋았는데……”
“아, 진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페르멘의 다리가 또 달달달, 경박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말 하면 더 좋아지잖아요.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도 몰랐어요.”
“……나 좋아하는 거 맞죠?”
“네.”
페르멘의 얼굴이 와인처럼 붉어졌다. 그는 멜리안을 힐끔거리며 우물우물, 볼품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 내가 사실 겉으로 보이는 거랑은 좀 달라요. 이름만 좀 유별나지, 별 볼 일 없는 놈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혹독하게 가르치셔서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건 많은데, 형들에 비해서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성격도 좀… 모난 편이고, 놀고먹는 거 좋아하는 데다 사람도 엄청 가려서 사교성이라곤 바닥이거든요. 실망하거나 그런 건…….”
“아.”
그건 거의 고해에 가까웠다.
페르멘에게 있어 예를 갖추고 성격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었다. 줄곧 방법을 배우고 훈련해 왔으니까. 멜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도 사교계용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혹시 멜리안이 좋아하는 게 그런 모습이라면? 진짜 그는 불같이 드세고, 성질머리도 나쁘고, 말도 생각 없이 툭툭 내뱉어서 매번 형제들에게 타박을 듣는데.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 된 멜리안이 실망할까 봐 불안했다.
“욕을 하셨을 때 놀라긴 했어요.”
어색하게 웃은 멜리안이 말했다.
“연무장에서 구르다 보니 저절로 입에 익어서… 고쳐 볼게요.”
멜리안의 안색을 살핀 페르멘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른 거는요?”
“네?”
“……성격도 급하고, 속도 좁고, 짜증도 많다고 했잖아요. 전부 빈말이 아니라서……. 그래도 나 좋아해 줄 거예요?”
“음… 이미 다 알고 있던 거라서…….”
“알고 있었다고요?”
페르멘의 눈이 커졌다.
“성격이 급하신 건 빨리 알아챘어요.”
“……언제요?”
“의원과 같이 찾아오셨을 때요. 그것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바로 혼인을 하자고 하셔서… 아, 성격이 급하시구나, 하고…….”
붉게 익어 있던 페르멘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속이 좁거나 짜증이 많은 건… 만찬 때.”
“아.”
“황제 폐하를 엄청 질투하고 계신 게 보였어요. 황후 폐하께 계속 투덜거리시는 걸 보니까, 그냥 알게 되더라고요.”
“그놈은 그냥 도둑…….”
아르페시스가 언급되자마자 조건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은 페르멘의 안색에 낭패감이 서렸다.
“방금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특히 아레스 형한테는 절대 안 돼요. 난 그길로 세 시간짜리 설교를 들게 될 거예요.”
“아하하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혔다.
“형제분들과 사이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
페르멘은 순순히 긍정했다.
“제가 듣기로 경께서 쌍둥이시라고…….”
“맞아요. 오멘이라고, 그 녀석은 지금 전선에 있어서… 혼례식에는 못 올 거예요.”
“그분과도 사이가 좋으세요?”
“좋다기보단, 그 녀석은 또 다른 나라고 해야 되나…….”
멜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격은 많이 달라요. 녀석은 나랑 달리 차분한 편이죠.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생각하는 거나 뭐나 그냥 나 같아요. 똑같이 생기기도 했고.”
“그렇게 많이 닮았어요?”
“닮은 게 아니라 그냥 똑같아요. 아레스 형은 아직도 우리가 작정하고 속이면 못 알아볼 정도죠. 리디나 페디 형은 예전부터 곧잘 구분했지만요.”
“우와…….”
“신기해요?”
“네, 조금.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불쾌할 게 뭐가 있다고. 다음에 소개시켜 줄게요. 여유가 생기면 황도로 돌아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멜리안의 입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페르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는 대화가 더 흘러가기 전에 물었다.
“……그, 나에 대해 다 아는데도… 왜…… 좋아하는 거예요?”
스스로가 정말 치졸하다 싶을 만큼 집요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확인받고 싶었다. 멜리안은 이전과 달리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페르멘은 초조한 마음에 손을 쥐었다 펴야만 했다.
“처음 만난 날 반했던 것 같아요.”
이윽고 들려온 답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창문 열어 주신거랑, 의자를 잡아당기신 거랑… 제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을 걸 아셨을 텐데도 위로나 입에 발린 말 대신 그냥 덤덤하게 넘기신 거랑…….”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을 이어 간 멜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제가 겪어 본 사람들은 대부분 땀을 흘리면 손수건을 빌려준 후에 생색을 내고, 의자를 빼는 대신 옷이 젖은 걸 지켜본 후에 걱정하는 척하고, 가난한 걸 알면 비웃거나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스스로가 관대하다고 포장하거든요.”
“…….”
“그런데 경은 달랐어요. 그게 색다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무척 솔직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좋아진 것 같아요.”
페르멘의 얼굴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붉어져 있었다. 당장 터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멜리안이 이불 속으로 쏘옥, 숨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잘생기셨어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페르멘이 웅얼거렸다.
“어머니한테 감사해야겠네요.”
“선대 백작 부인을 닮으신 거예요?”
“나랑 오멘이랑 페드로 형까지 그분을 닮았죠.”
“다른 분들은…….”
“아버지를 닮은 편이죠. 다음에 초상화 보여 줄게요. 회랑에 걸려 있으니까. 딱 보면 아레스 형이랑 아버지랑 판박이예요.”
“벌써부터 궁금해요.”
각자의 마음을 꺼내 보이는 대화였다. 마음 한구석에 그녀가 한 말이 차곡차곡 쌓였다. 페르멘이 식을 줄 모르는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던 멜리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경은… 제가 왜 좋으세요?”
짧은 침묵을 지나 페르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간결했다.
“……난 그냥,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네?”
“그때는 몰랐는데… 날 만나겠다고 그 높은 구두를 신고 열심히 뛰어온 영애를 눈에 담았을 때 그냥… 아마도…….”
기어 들어가는 것처럼 점차 작아진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페르멘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멜리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발정이라도 난 걸까? 그렇게 쏟아 냈는데도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분신이 느껴졌다. 이를 악문 페르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볼게요. 쉬어요. 내일 의원이랑 다시 올 테니까.”
“네, 네에…….”
“오늘은 정말 미안했어요. 몸조리 잘하고요.”
그는 망설임 끝에 허리를 숙여 멜리안의 뺨을 훔쳤다. 그 직후 곧장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오는 게, 꼭 도망치는 사람 같았다.
타운하우스를 빠져나와 마차에 올랐지만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밤사이에 아프면 어떡해.’
그를 받아 내느라 무척이나 힘들었을 텐데. 고작 연고 하나로 처방을 끝낸 주치의를 향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걱정되는 마음에 떠날 수가 없었던 페르멘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테노리엘 경.”
그렇게 밤이 깊었을 무렵. 마차 밖에서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 않으나 분명 아는 사람의 목소리. 페르멘은 아마트 남작의 목소리를 듣고서 다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남작님, 늦은 시간인데 주무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이러고 있으면 우리가 잘 수가 없을 테니.”
“아, 아닙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하루 묵어가세. 저 조막만 한 곳에서 무슨 일이 있다고 떠드는 것도 우스울 테니.”
“…….”
“그리 가 봐야 잠이나 제대로 자겠나? 차라리 옆에 있다 가게.”
“……그럼, 염치 불구하고 하루만 묵겠습니다.”
“침실은 따로 쓰고.”
오늘의 사달이 벌어진 바를 지적받자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딸아이를 아껴 주니 고맙기는 하네만, 앞으로는 조심해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추우니 이만 들어가세. 월터의 방을 비워 놨네.”
페르멘은 남작과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 응접실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이라…….”
“우리가, 우리가 불편하네. 자네를 응접실에서 재우고 우리가 어찌 자겠어.”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문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던 소년, 멜리안의 동생 월터가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후 쪼르르 위층으로 올라갔다.
제 누나의 침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멜리안이 옆방에 있다고 생각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이틀 정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다. 전선에 가지 않겠다 마음먹은 후에도 훈련 강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의 몸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었다. 덕분에 페르멘은 눈이 살짝 충혈된 것 말고는 멀쩡했다.
밤새 입고 있던 아마트 남작의 실내복을 벗어서 각이 잡히도록 개어 둔 페르멘이 옷을 갈아입었다. 가볍게 바지와 셔츠만 챙겨 입는 동안 그는 작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어린 처남의 침실은 모든 가구가 작아서, 침대에 누우면 발이 아래로 삐죽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나도 이렇게 작았을 때가 있었지.’
부친의 유품에서 찾은 수정 마도구를 떠올린 페르멘이 피식, 웃었다. 그 직후 의복을 다 갖춰 입은 페르멘은 곧바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는 멜리안과 월터의 것이었다.
‘아직 자네.’
그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페르멘이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조금 전부터 아래층에서 느껴지는 분주한 기척 때문이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가자, 작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아마트 남작 부인이 보였다.
“남작 부인.”
화들짝 놀란 그녀가 들고 있던 볼을 떨어트리기 직전, 페르멘이 재주 좋게 받아 냈다.
“놀라셨다면 죄송…….”
“테, 테노리엘 경. 일찍 깨셨네요. 준비만 하고 세숫물을 내어 가려 했는데……. 내 정신 좀 봐, 밤새 잠자리는 괜찮았나요? 아무래도 월터가 쓰던 방이라 경에게는 불편했을 텐데…….”
“편히 잤습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제가 어디서든 잘 잘 수 있거든요.”
그는 정말 눈밭이나 삭막한 바위틈에서도 잘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건 오로지 멜리안이 옆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숙면에 방의 구조나 시설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남작 부인에게 볼을 돌려준 페르멘이 부엌을 돌아보며 소매를 걷었다.
“화덕부터 피우면 되겠습니까?”
“네?”
“요리는 대부분 야전용만 익힌지라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불을 피우는 건 잘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객에게 일을 시킬 수는…….”
“객이 아니라…….”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소매를 깔끔하게 접어 올린 페르멘이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가족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대해 주십시오.”
“어머.”
“곧 사위가 될 테니까요.”
페르멘은 부러 사위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멜리안이 파혼 얘기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번 혼사를 거절한 건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트 남작은 지난밤 멜리안을 데려온 페르멘을 손님으로 대해 주었으나 혼사에 관해서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페르멘은 남작 부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장작을 쌓아 둔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장작과 부싯돌을 챙겨 화덕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남작 부인은 더 이상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엔 쑥스럽지만, 요리를 잘하는 편이라 뭐든 만들어 줄게요.”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그리 살가운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그를 부엌에서 쫓아내는 대신 반죽을 넘겨주었다. 적어도 남작 부인은 이 혼사에 긍정적인 모양이라고. 내심 안도한 페르멘은 열과 성을 다해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
그러기를 한참, 인기척이 느껴졌다. 움찔, 몸을 떤 페르멘이 밀가루가 가득 묻은 손을 재빨리 씻어 냈다. 비누까지 써 가며 뽀득뽀득 손을 씻고 무명천을 집어 들자 인기척은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어?”
마침내 부엌에 도착한 멜리안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영애.”
역시나, 가볍고 보폭이 짧은 발걸음은 멜리안의 것이었다. 페르멘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테, 테노리엘 경? 왜 여기…….”
“남작 부인을 도와드리던 중이었어요. 잘 잤어요? 몸은 괜찮고요?”
“네, 네…….”
성큼성큼, 두어 걸음 만에 멜리안의 옆에 도착한 페르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악은… 발랐어요?”
남작 부인에게 들릴까 싶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멜리안도 다르지 않은지, 그의 너머를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내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에 발목 부상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몸을 챙길 줄을 모르는 거야.’
한숨을 삼킨 페르멘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작 부인, 잠시 영애를 도와주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천천히 다녀와요.”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남작 부인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멘은 그길로 멜리안을 안아 들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마트 영식은 일어났습니까?”
“아, 아직이요.”
그녀의 침실로 향한 페르멘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월터를 옆방으로 데려다 놓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밤 테노리엘 저택에서 챙겨온 연고를 꺼내 멜리안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요. 발라 줄게요.”
멜리안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는 대신 순순히 따라왔고. 침대에 도착한 페르멘은 그녀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멜리안의 속옷을 벗기는 사이 하반신이 딱딱해졌다. 멜리안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 짓도, 안 해요.”
멜리안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에 가까웠다. 연고를 덜어 내 아직도 부어 있는 음부에 바르자 멜리안의 몸이 흠칫, 떨렸다.
“으응…….”
“……아파요?”
“조, 조금…….”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움직임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페르멘은 벌건 얼굴을 하고서도 약을 꼼꼼히 발라 주었다. 이윽고 연고가 담긴 나무통을 닫은 페르멘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어요.”
“하, 하지만 식사 준비를…….”
“내가 할 테니까 쉬어요.”
멜리안을 보면 또 달려들 것 같아서 시종일관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오자 제멋대로 고개를 치켜든 하반신이 문제였다. 계단 앞에 우두커니 선 페르멘은 한동안 병법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몸의 열기를 식혀야만 했다.
식사 준비가 끝나자 아마트 일가와 페르멘이 한 식탁에 둘러앉았다. 평화롭고 잔잔한 대화가 오가는 식사는 따듯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난 후에는 테이블 위의 분위기가 변했다. 페르멘이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으니까.
“갑작스러운 얘기일 수도 있으나,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찻잔을 들었던 아마트 남작의 시선이 페르멘에게 닿았다.
“무엇인가?”
“……혼인을 하면 두 분을 모시며 살고 싶습니다.”
남작 부인의 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멜리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페르멘은 남몰래 그녀를 살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제 선에서 두 분을 보호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건 그가 멜리안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혼사를 제 뜻에 맡겨 주셨으나, 제 혼인은 그리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앞으로 오르내리는 말은 점점 많아질 겁니다. 아마트 영애는… 이후 황후 폐하를 보필해야 할 테고요.”
아마도 멜리안이 에스메랄다를 만나 들었다는 얘기. 그건 사교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현재 아르페시스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끌고 있고, 그로 인해 사교계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해서 루이자와 페르멘의 배필이 사교계에 손을 써야 한다.
“……네,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멜리안이 긍정했다.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따듯한 김이 올라오고 있는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본 페르멘이 말했다.
“대외비이기는 합니다만, 교황 성하께서는 5년 이내에 제 형님 되시는 테노리엘 후작께 팔을 되돌려 주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쯤이면 형님께서는 다시 출정하실 테죠. 그 전에도, 후에도 가문 차원에서 할 일은 많습니다. 그걸 대부분 제가 담당하게 될 터, 제 처가라는 이유만으로 적대감을 표하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십시오.”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는 건 힘들겠나?”
남작의 반문에 페르멘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황후 폐하를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라도 갖은 사기꾼들이 달려들 겁니다.”
테이블 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네가 먼저 자리를 마련해 준 김에 하는 말이네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연 아마트 남작이 말문을 열었다. 페르멘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처음 선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부터 부담스러웠네. 테노리엘이라니, 호간 백작 부인의 서신을 확인하자마자 거부감부터 들었지.”
페르멘이 테이블 아래로 감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멜리안이 파혼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녀와 같은 입장을 취했던 남작이다. 그는 이 혼사를 반기지 않는다. 멜리안이 마음을 다잡았다고 해도 그의 허락이 없으면 혼사는 언제든 무산될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멜의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지 않겠나? 자네가 멜과 혼인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닌지라, 기회라도 줘 보자 싶어서 받아들인 자리였어.”
페르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네가 청혼을 했다는 소식에 정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더군. 멜에게는 잘된 일이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꽉 막혀서는……. 감히 우리 입장에선 거절하기도 어려운 혼사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황후 폐하까지 뵙고 오니 잠이 오지 않았어.”
한숨을 푹 내쉰 아마트 남작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멜이 파혼을 언급했을 땐 안도했을 정도니 어련할까.”
“아버지, 그건…….”
멜리안이 서둘러 첨언하려 했으나 남작이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선조께서 적당히 먹고살 만큼의 영지와 재산을 물려주신 것만 해도 큰 행운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네. 멜과 월터에게 근사한 의복 하나 장만해 주는 것도 버거웠지만, 우리 네 식구가 배곯으며 살지는 않았으니 충분하다 여기는 삶이었고.”
“제 입장이 부담스러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아마트 영애와 꼭…….”
그 순간 말을 잊기가 힘들었다. 이 혼인은 페르멘의 행복을 위해 평화롭던 아마트 일가를 전쟁 통에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멜리안을 눈에 담자 어쩔 수가 없었다.
“따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말뿐이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 아버지, 저도 테노리엘 경과 혼인하고 싶어요. 지난번 일은 제가 철이 없어서…….”
“네가 하고 싶다면 나도 무작정 막을 생각은 없다.”
멜리안의 말을 자른 아마트 남작이 한숨을 푸욱, 몰아쉬며 말했다.
“딸아이가 원하면 내 마음 불편한 거야 무슨 문제겠나. 하지만… 혼사를 계속 진행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자네도 출정할 생각인가?”
페르멘의 몸이 움찔거렸다.
“내 개인적으로는 테노리엘 일가를 존경하고 있네. 선대 백작 내외를 만나 뵌 건 두어 번뿐이지만, 무척이나 훌륭한 분들이셨지. 인품도, 신념도, 흠잡을 곳 하나 없었네. 이 넓은 에렘의 땅에서 황가를 욕하는 사람은 보았어도 테노리엘을 욕하는 자들은 보지를 못했어. 그분들께서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사셨는지 훤하지.”
“…….”
“자네의 선조들이 행해 온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네. 하지만 자네가 출정에 뜻이 있다면…….”
“없습니다.”
언젠가 다시 전선으로 향할 아레스와 이미 그곳을 지키고 있는 오멘. 그곳에서 의무를 다하고 떠난 페드로와 선대 백작, 그리고 가문의 선조들. 그들의 그림자가 페르멘을 덮쳐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날 보았던 누이의 눈물 앞에서 했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제가 출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후 폐하께 약속했습니다.”
“……그래, 그렇군.”
아마트 남작의 날숨은 안도의 한숨을 닮아 있었다. 이후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잔이 모두 비어 버린 다음에야.
“거처는 자네 뜻대로 합세.”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멘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멜을 잘 부탁하겠네.”
페르멘은 악수를 청한 아마트 남작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 * *
전투 중간중간 배정되는 휴식기 중에도 오멘은 개인 훈련에 소홀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차가운 바람이 상당히 따듯해진 어느 날,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제 천막에 들른 오멘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반쯤 걷어 올렸던 옷을 다시 내리며 수건을 챙겨 들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물동이가 준비된 천막 뒤쪽으로 나가자 누군가 천막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소피아였다. 오멘은 출입을 위해 만들어 둔 간이 입구를 통해 그녀를 힐끔, 확인했다.
“실… 실… 굵은 실이 분명…….”
소피아는 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이나 수납장을 뒤졌다.
“이상하다……. 배급받은 걸 여기에 넣어 놨는데…….”
끙끙, 작은 몸을 들썩거려 가며 수납장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그녀의 뒷모습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오멘은 제 행태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뭐 하는 거야.’
숨어서 여인의 뒤태를 훔쳐보다니. 저열한 변태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오멘은 서둘러 몸을 돌리고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부러 소란스러운 인기척을 내며 물을 끼얹었다. 땀을 모두 씻어 낸 직후, 그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반쯤 서 버린 제 것이 원망스러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처음에는 소피아를 눈에 담을 때 조금 거북한 선에서 끝났다. 손끝이 저릿하고 심장이 평소보다 살짝 빨리 뛰는 정도. 그런데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의 반응은 적나라하게 변해 갔다. 해가 바뀌었을 무렵부터는 그녀의 모든 것이 저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저를 등지고 서 있는 소피아에게 홀린 듯 손을 뻗었다가 황급히 거둔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정작 반한 건 우리인데 말이야. 그렇지?
그 말에 속삭이듯 작게 대답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
“하아.”
로리아를 상대할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소피아에게는 왜. 계속해서 변하는 자신의 반응은 경각심을 안겨 주었다. 소피아와 다시 살을 섞으면 무언가 틀어질 거라고. 당장 스스로의 반응을 통제할 수가 없다는 것부터가 그 막연한 직감을 맹신하게 만들었다. 다행인 점은 아직 행동까지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마저도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 같지만.
‘고작 한 번이었는데.’
기이한 충격을 남겼던 정사가 어딘가에 각인되기라도 한 걸까? 아무리 노력해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소피아를 만졌던 그 날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녀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감각을 선물해 주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후우…….”
오멘의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제 것을 손으로 쥐어 보려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소피아가 돌아갔다면 혼자 해결이라도 해 보겠는데,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여전했다. 억지로 숨을 고른 오멘이 허리에 수건을 감았다.
‘이번 달만 버티자.’
두 여인들이 그의 전속으로 배정된 건 올해 바의 달까지였다. 라의 달부터는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무거운 한숨을 삼킨 오멘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천막에 발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는 소피아의 신발 코가 보였다.
“테노리엘 경, 돌아오신 줄 몰랐어요…….”
오멘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침상 앞에 섰다.
“화, 환복을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소피아를 등지고 선 덕분에 아랫도리를 감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정 난 것도 아니고, 대체 뭐냐고.’
그 잠깐 사이 한층 더 커진 제 분신을 노려보는 오멘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 * *
“오라버니.”
“황후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보는 눈도 없는데 그리 예를 갖추지 마세요. 섭섭해요.”
“제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페르멘이 따라 할 테니까요.”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아레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페르멘 오라버니께서 보시지 않을 때 만이라도요.”
“그 정도라면 문제 될 건 없겠지.”
아레스는 기꺼운 마음으로 에스메랄다를 꼭 안아 주었다. 매일같이 보던 누이를 한 계절에 두어 번 만날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장애를 가지게 된 그는 페르멘을 앞세운 채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으니까.
곧 두 사람은 응접실에 마련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손을 마주 잡은 채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는 따듯했다.
“날이 많이 더워졌는데, 루이는 괜찮고요?”
“요즘에는 그나마. 입덧이 가라앉아서 살 것 같다는구나.”
유산기를 떨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루이자의 입덧은 아레스의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왔다. 이러다가 루이자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을 정도였다. 다른 산모에 비해 입덧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으며, 증상도 심해서 바의 달 내내 테노리엘 저택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 힘겨운 시기가 지나갔지만.
덕분에 잠시나마 영지에 다녀올 짬이 생겼다. 아르페시스가 라의 달을 맞이해 황도로 돌아왔기에 그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내일 오전 중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 출발을 앞둔 아레스는 에스메랄다의 응접실에서 잠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레스, 왔는가?”
오래지 않아 아르페시스가 도착했고, 그들은 테노리엘 후작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드로 오라버니께 제 안부도 전해 주세요.”
“걱정 말거라. 녀석도 네가 바쁜 것을 이해할 게다.”
아레스는 다정한 음성으로 함께 가지 못하는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그럼 다녀오겠다, 에디.”
“응, 조심하고.”
곧 손을 마주 잡은 아르페시스와 아레스의 신영이 사라졌다.
* * *
사용인들이 꾸준히 관리해 온 묘비는 그 흔한 잡초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그럼에도 괜히 비석을 손으로 쓸며 있지도 않은 흙먼지를 닦아 내게 된다.
아레스는 부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무거운 걸음을 옮겨 페드로의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선대 백작과 페드로의 묘비 앞에서 술잔을 기울였던 건 이제 아득한 과거가 되어 버렸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루이자와 혼인해서 하루하루, 행복하기 그지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의 안부를 전한 후 한동안 말이 없던 아레스가 쓰라린 속을 붙잡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이가… 생겼어.”
루이자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페드로가 생각났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이곳으로 달려와 말해 주고 싶었다. 그 당시의 감정이 아직도 선명해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아레스는 흔들리기 시작한 입매에 힘을 준 채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는데… 다음 계절에는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오는 답이 없는 묘비 앞에서 아레스는 그간 마음에 담아 두기만 했던 말을 하나하나 꺼내 들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무사히 태어나 주기만 한다면 기쁘겠다만, 에스메랄다를 보고 자란 탓인지 딸이었으면 좋겠어.”
선대 백작이 그녀를 안고 얼러 주었던 것처럼. 아레스도 그렇게 사랑하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사랑해 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해. 여인에게 임신과 출산은 많은 부담이 된다고 해서……. 어머니께서도 리디를 낳으시고 오래 버티지 못하셨지.”
마음 한구석에 주치의가 했던 말이 못 박힌 듯 남아 있었다.
“루이가… 아이를 가지기에 그리 적합한 몸은 아니라고… 임신과 출산이 다른 여인들보다 더 위험하고 힘들 거라는구나.”
임신 초기 루이자에게 유산기가 있었다. 그녀가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에도 하혈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 무렵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알려 주었던 이야기였다. 당시 아레스는 루이자의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홀로 덤덤히 버텨 냈다. 하지만 페드로의 앞에서는 자꾸만 허물어졌다.
“불안하다. 그녀가, 아이가 잘못될까 봐 매일 악몽을 꿔. 너를 잃었는데 그녀마저 잃으면…….”
후욱, 후. 어렵게 숨을 고른 아레스가 비석의 상단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네가 그립다, 페드로.”
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없음에 기뻐하는 나도 있어.”
어느 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는 순간에. 페드로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끔찍한 생각을 해 버릴 때가 있다. 그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온전히 루이자를 차지하지 못했을 테니까. 추악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나면 끔찍한 죄책감이 그의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참 우습게도, 또 다른 날에는 그가 살아서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루이자의 전부를 가지지 못해도 좋으니 형제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레스에게는 두 사람 모두 소중했기 때문에 누구 한 명만을 우선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 페드로가 살아 있었다면. 아레스는 그에게서 루이자를 빼앗을 수도, 온전히 내어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혼인을 한 후에야 루이자를 만났다 해도 사랑했을 테니까. 그래서 자신보다 먼저 루이자에게 사랑받았던 페드로를 질투하고야 만다. 루이자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패배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반대로 자신을 원해 주는 루이자를 볼 때면 저열한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자꾸만 정사 중에 페드로를 언급하는 게 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의 남편은 저라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페드로에게 말해 주고 싶어서.
“너는 이런 나를 어떻게…….”
감히 제 연인을 넘보았다고 화를 낼까?
그도 아니라면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해 줄까?
아레스가 홀로 꾸역꾸역 눌러 온 감정이 쏟아졌다. 억지로 참아 보지만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흐느끼던 아레스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름을 맞이해 뜨거워진 태양 아래에서도 기이할 만큼 차가운 비석이 심장을 할퀴었다.
“……참.”
큼, 큼, 깊게 잠긴 목소리를 풀어낸 아레스가 떨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페르멘이 혼인을 했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제수씨에게 완전히 빠져서는 정신을 못 차리더구나. 그 녀석이 질투에 눈이 멀어서 하는 짓이 얼마나 웃긴지 몰라. 오멘과 달리 이상하게도 여인에게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아서 혹시 남색이 취향인가, 식겁하게 만들더니… 다행히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내가 따로 훈수를 두지 않아도 제 처가를 잘 챙기는 게, 철이 많이 들었지.”
아레스는 앞으로도 영원히 답이 돌아오지 않을 곳에서 오래도록 소식을 전했다. 자신과 루이자의 이야기.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이야기. 페르멘과 멜리안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홀로 전선에 나가 있는 오멘의 이야기까지.
“이번에는 전선에 남았지만 내년에는 함께 오마. 그때쯤이면 페르멘도 기사단 일에 익숙해진 상태일 테니,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다. 네 기일에는 다들 바쁠 시기라… 아마 라의 달에만 간간이 올 수 있을 것 같다.”
아레스는 페드로의 이름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다들 너를 많이 그리워해.”
처음으로 떠나보낸 가족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특별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잊지 못하고 각자만의 상처를 품고 살았다. 아레스는 눈물 자국을 닦아 내며 마지막으로 페드로의 비석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부디.”
주신의 품에서 평안하기를.
페드로를 위한 기도를 끝낸 아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겁고 위태로운 걸음을 옮겨 비석을 등졌던 그때.
-형.
아레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 자리에 경직되어 있던 아레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온전히 몸을 돌렸을 때, 그립고 그리운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레스의 녹안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때때로 페드로의 환영을 본다고. 쓰게 웃던 에스메랄다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도 이렇게 페드로를 다시 만났던 걸까? 그가 모르는 곳에서도 페드로를 떠나보내고, 다시 또 이 고통을 거듭한 에스메랄다를 생각하자 마음이 미어졌다.
하지만 당장 눈에 비친 형제가 너무 반가워서, 아레스는 저도 모르게 구슬프게 웃고 말았다. 주책맞게 달아오른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페드로.”
그의 부름에 답하는 것처럼 환하게 웃은 페드로가 말했다.
-내 조카딸은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루이도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
페드로는 제 말을 끝내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정말 신이 허락한 만남일지, 아니면 그의 죄책감과 그리움이 만들어 낸 허상일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하나 그저 벅찼다.
홀로 흐느끼며 어렵게 감정을 추스른 아레스가 숨을 골랐다. 뜨거운 여름 바람을 타고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레스는 벌건 눈을 하고서 묘지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입구 근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일어났다.
“끝났나?”
“예, 폐하께서도 들어가 보십시오. 녀석 마음이 내키면 만나 줄지도 모릅니다.”
“……그대도 본 모양이지?”
아레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도 봤다던데……. 나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아르페시스는 툴툴거리며 묘지에 들어섰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직 해가 기울지도 않았다. 그러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고맙다.”
흐리게 웃은 아르페시스가 페드로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아레스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추도곡이 들려왔다.
* * *
전생의 세상은 아르셀, 그리고 현생의 세상은 랑곤. 마법이나 마나 대신 과학이라는 문명이 발전한 세상은 평화로웠다. 30여 년 전 시작된 마계의 침공만 없었다면 계속 평화로웠을 테지.
첫 게이트 사태 이후 현재까지 개방된 게이트의 등급, 속칭 공략 난이도는 총 열세 개. 현우는 다음 주에 있을 10등급 게이트 공략을 앞두고 오랜만에 길드 건물을 방문했다.
중앙군이니, 남부군이니. 특정 단체에 대한 반발심이 남아 있었던 탓에 각성 이후 줄곧 솔로를 고집해 왔던 그건만. 10등급 이상의 게이트가 열린 이후에는 어쩔 수 없었다. 혼자서 공략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으니까. 1, 2주분의 식량과 식수, 각종 약을 비롯한 비품을 혼자 짊어지고 다니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해서 외숙부가 일하는 길드에 가입한 지 2년이 지났다. 그의 영입으로 거대 길드의 반열에 오른 길드에선 회의가 한창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13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길드, 번영.
‘지루하네.’
원래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드물었던 현우가 한숨을 삼켰다. 그는 공략대와 함께 들어가도 물자적인 서포트를 받을 뿐이다. 전투 자체는 홀로 하는 편이었기에 기본적인 일정과 배정된 서포터에 대해서만 숙지하면 되었다. 해서 잘 오지 않았는데, 외숙부가 그의 대인 관계를 걱정하며 불러 대기에 꾸역꾸역 나와 참석한 것이었다.
‘가족이긴 하지만…….’
전생에서의 기억 때문인지 그들이 그리 애틋하지 않았다. 죽든 살든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무심한 건 아니지만, 서먹서먹한 가족 이상은 되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그가 바라는 건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회의장 한편에서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회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현우가 속으로 실소했다.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지난 생에서의 고생이 너무 억울했다. 랑곤은 마법보다 과학이 발전한 세상이라 전생에서의 전쟁보다 수월한 점이 많았다. 전자 망이 구축되어 있어서 각종 자료를 산출하는 게 쉽다는 점이 특히나.
‘여기선 종이 쪼가리에 파묻힐 일이 없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기술이 아르셀에 존재했다면 에스메랄다가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을 텐데.
‘고작 그런 문명에서 그런 대규모 전쟁이라니. 천사니까 가능했던 거지, 평범한 놈들이면 못 이겼어.’
그립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떠올린 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따로 경과를 전달받은 건 아니지만 그는 확신했다. 어느 순간 천사들의 입에서 아르셀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의 사랑스러운 누이가 기어코 마룡을 짓이기고 평화를 되찾았다고.
현우는 과거로 남아 버린 인연들을 생각하며 하품을 했다.
‘지금쯤이면 녀석들도 생을 마감했겠지?’
그렇다면 천계로 돌아와 심판을 받고서 쉬고 있으리라. 모친의 배 속처럼 안락하고 따스해서 가만히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세에서 얻은 상처가 치료되는 것 같던 그곳, 영혼의 요람에서.
‘계속 그곳에 있으면 기억을 잃게 될 텐데…….’
그럼 인세에서 맺었던 그들의 인연도 사라질 것이다. 현우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기억과 함께 상처마저 잊어버리는 것과 자신처럼 기억과 상처를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 무엇이 더 좋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리라. 전생의 페드로가 쌓아 온 기억이 지독하리만치 무거울 때가 있으니까.
특히나,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먼저 떠난 자신의 과오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숨이 막혔다. 스스로의 이기적인 행태에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기어 나와 미친 듯이 날뛰었던 자신을 생각하면 정말 기가 질렸다. 요람에서 탈출한 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 천사들에게도 조금 미안했고.
하지만.
‘후회는 안 해.’
현우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요람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하나둘, 자신을 떠나는 기억이 모두 소중했으니까. 설령 그것을 품고 있기에 고통스럽다 해도 놓고 싶지 않았다. 해서 천계의 문제아라는 이명까지 얻어가며 뻔질나게 요람을 탈출했던 것이고.
‘녀석들도 간절하다면 빠져나오겠지.’
그렇게 빠져나온 사람 중에 그가 바라는 사람도 있으면 좋을 텐데.
현우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간절함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왔을까? 자신과의 시간을 놓고 싶지 않아서 몸부림쳐 주었다면 기쁠 텐데. 그렇다면 천사들의 안배로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현우는 자신의 속내를 보고 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그는 여전히 이기적이다.
‘네가 나를 잊었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만약 기억하고 있다면.
“차현우 헌터?”
“……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답이 한 박자 느렸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회의 내용은 이미 다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부.
그의 대답을 끝으로 브리핑을 주도하던 이가 공략 회의를 파했다. 집합은 내일 06시, 이틀 전에 발생한 10등급 게이트 앞. 일정을 확인한 현우는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제외한 이들은 공략 시 함께 움직일 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그는 오래지 않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홀로 오를 수 있었다.
“응?”
하지만 닫힘 버튼을 눌렀음에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지를 않았다.
‘뭐야, 고장인가?’
꾹, 꾹, 꾹.
몇 번 더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현우의 미간이 구겨지려던 찰나.
[기껏 옆에 붙여 주었더니, 잠깐 붙잡아 주마. 서두르거라.]
정말 기이한 음성이었다. 동시에 익숙했다. 이미 현생에서 몇 번이고 그의 음성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으니까. 잠시간 굳어 있던 현우는 꿀꺽, 침을 삼키며 밖으로 나왔다.
회의장이 위치한 13층에서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총 두 대. 그중 하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움직이질 않고 있다. 현우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재빨리 다른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처음부터 13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가 층수를 누르기도 전에 1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이윽고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가슴에서 뛰어야 할 심장이 머릿속에서 뛰어 대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였다. 저절로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자 띵, 소리를 낸 엘리베이터가 9층에 멈춰 섰다. 열린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총 다섯 명.
“청첩장 나오면 꼭 줘야 된다?”
“과장님도 참, 당연히 드려야죠. 영석 씨가 과장님께 신세 진 게 얼만데요. 축의금은 가져오지 마시고 몸만 오세요. 몸만. 오셔서 맛있는 거 잔뜩 드시… 아.”
선두에서 얘기를 나누던 두 여자와 그 뒤에 섞여 있는 세 명의 남녀.
현우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차, 차현우 헌터,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오늘 공략 회의에 참석하셨어요?”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아 차마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탔다. 직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해졌다. 힐끔힐끔,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자 심장의 박동 소리가 더 커졌다.
현우는 속으로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엄청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눈을 뜨자 엘리베이터는 고작 한 층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또 한 층, 또 또 한 층. 점차 작아지는 숫자를 보고 있노라니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다 함께…….”
고요하던 엘리베이터 내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사라도 하러 가십니까?”
“아, 네? 네, 네. 이번 연도 신입들인데, 입사하고 계속 바빴거든요. 오늘 시간이 난 김에 맛있는 거라도 사 먹이려고요.”
“신입이요.”
머릿속에서 곧장 울리던 그 음성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기껏 옆에 붙여 주었더니.
때마침 현우의 질문에 답을 해 준 이가 말을 이었다.
“네, 얘들아. 인사드려. 우리 길드 간판 헌터, 차현우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정말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위에 무슨 일 있나요? 엘베 하나가 13층에서 꼼짝도 안 하던데.”
“……고장 난 것 같더라고요.”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쓴 현우의 시선이 힐끔, 한쪽에 닿았다. 가장 마지막에 올라탄 덕분에 층계 버튼이 위치한 곳에 서 있는 사람. 상단의 층수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눈에 담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힘줄까지 불거진 손은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때려 부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혹시라도 그게 이상해 보일까 봐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을 때였다. 띵, 소리를 내며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럼 저희 먼저 가 볼게요.”
“……예, 식사 맛있게 하세요.”
다른 이들이 모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현우는 비로소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어우, 놀래라.”
“별일이네, 먼저 말을 다 걸고.”
“그러니까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오늘 진짜 웬일이래. 대형 공략 회의에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사람이.”
“제 말이요. 그것 때문에 싸가지 없다고 말 많았는데.”
“한성우 본부장님 만나러 온 건가?”
총총총 멀어지는 이들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순간 현우의 신경을 독차지한 건 짧은 단발을 꽁지머리로 묶고 있는 여자뿐이었다.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명찰을 떠올리자 순간 현우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눈에 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꼭 그녀에게 공명하는 것처럼 찌르르, 하게 우는 영혼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찾았다.’
그가 애타게 기다려 온 사람, 루이자의 환생.
“강은지.”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채웠다.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이시여.’
그를 인도해 준 이에게 감사를 전한 현우가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 * *
버거운 인내 끝에 마침내 찾아온 라의 달은 평온했다. 전속 기간이 끝나며 소피아와 로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녀들을 빼어 간 게 오멘이라는 말이 나돈 덕분에 악질적인 보복을 피해 간 것 같았다. 여기나 저기나 그의 눈치를 살피는 이들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한시름 더는가 싶었더니. 오멘이 라의 달 동안 누린 평온은 폭풍 전의 고요함과 다르지 않았다.
‘미치겠군.’
한숨을 삼킨 오멘이 회의장을 훑어보았다. 오늘은 10여 일 앞으로 훌쩍 다가온 재출정을 앞두고 마지막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해서 부대 내의 상급 기사들이 모두 참석한 상태고. 순조롭게 진행된 회의는 이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직전에 언급된 주제가 아니었다면 진작 파했을 텐데.
오멘은 미간을 문지르며 톡, 톡, 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모든 상급 기사들이 한목소리를 내자 독단으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잘못하면 잡음이 생길 텐데.’
그건 에스메랄다에게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 오멘은 현재 황실과 관련된 인사를 밑에 두기 거북스러워하는 이들 때문에 특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그의 나이에 한 부대를 통솔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간 잡음을 최소화하고자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써 왔다.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보좌관을 선별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경험에 기대어 조언을 구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이견은 없나?”
드문드문, 시차를 두고 대답이 되돌아왔다. 덤덤한 이가 있는가 하면, 들떠 보이는 이가 있었고, 거북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았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네.’
군은 수직적인 조직이고, 그런 곳에서 지휘관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오멘의 영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디 그는 전투 중에 전속 색인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휘하 기사들도 자연스럽게 그의 행동에 따랐다.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대놓고 그와 다른 행보를 보이며 병영에 여인을 데려온 기사는 없었다. 그의 실력보다 배경을 무시하지 못한 탓이다.
한데 지난가을부터 그들에게 제동을 걸던 오멘의 행동이 달라졌다. 그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쌓였던 불만이 터진 것인지. 상급 기사들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문제를 언급했다. 이번 출정에도 여인들을 동행시키자고. 거듭 건넨 질문의 답이 모두 똑같은 이상 오멘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하면 다음 사의 달에도 전속 여인들과 동행하는 것으로 하지. 기간은 내년 바의 달까지. 전속 기간 동안 여인들의 부담이 큰바, 빈자리가 없도록 지휘관들의 특전 인원을 모두 채우게. 하보르, 브롬, 자네들이 책임지고 부대 내 지휘관들의 전속 명단을 작성해 오도록. 내 명단도 조만간 전달하지.”
“예, 알겠습니다.”
“이상으로 회의를 파하겠네. 출정 일정에 지장이 없도록 막바지 정비에 최선을 다하게.”
경례를 올리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회의장을 나온 오멘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자마자 떠오른 얼굴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소피아. 딱 한 번 우연히 품에 안아 본 여인. 그녀를 떠올리자마자 이상했던 자신의 반응들도 하나둘, 기억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데려가면 돼.’
그럼 지난봄처럼 고생할 일은 없을 터.
간단한 결론에 도달한 오멘은 그길로 소피아를 머릿속에서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정작 그날 밤 그의 손으로 작성한 명단의 가장 아래에 적힌 이름은 익숙한 것이었다.
* * *
아레스는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이를 악물었다.
“아아악!”
산실에서 들려오는 루이자의 비명이 그를 난도질 했다. 첫 진통이 있은 후로 벌써 20시간이 넘게 지났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레스는 순간 뚝, 끊어진 소음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님! 마님! 정신 차리세요,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물 가져와!”
벌써 세 번째였다. 의원은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루이자와 아이 모두 위험해질 것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실에 들어가 있던 주치의가 다급하게 뛰쳐나왔다.
“후작님,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길목이 너무 좁아서 아기가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출혈량이 너무 많아서 마님이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기만 했는데 아레스의 숨이 거칠었다. 지난 하루의 기억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산실 앞에 앉아 문 너머의 루이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였다. 산실에 남편이 들어가면 부정을 탄다는 미신이 무서워서. 혹시라도 산실을 침범한 자신 때문에 아내와 딸이 잘못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루이자에게 모든 고통을 떠넘겼다. 그렇게 그가 함께해 줄 수 없는 시간을 홀로 버텨 내던 아내가 위험했다. 그들의 곁에서 300일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해 준 아이까지도.
“……형.”
근무가 끝나자마자 달려와 곁을 지켜 준 페르멘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레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페르멘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사실, 그의 결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레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네게 짐을…….”
“별걸 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그의 뒤에 서 있던 페르멘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만약 아레스가 후계를 볼 수 없게 된다면 남은 건 페르멘뿐이다. 그도 직계인바, 자식을 가지면 양자로 들여 작위를 물려줄 수 있다. 어린 아우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가슴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아레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사산시켜라.”
이런 식으로 아이를 죽이면 여인의 몸은 망가진다. 루이자는 두 번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레스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가문을 책임지게 된 이상 후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나, 그보다 루이자가 더 중요했으니까. 설령 루이자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예, 후작님.”
비통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주치의가 산실 안으로 돌아가고 몇 초나 지났을까?
“싫어! 내 몸에 손대지 마!”
정신을 차린 건지, 루이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포기하면 용서 안 할 거야!”
“제발, 루이…….”
아레스는 문에 바짝 붙어 섰다. 이마를 대고서 중얼중얼.
“날 떠나지 마요, 제발! 아이는 다시 가지면 돼!”
그는 어느덧 언성까지 높여 가며 애원했다. 하지만 루이자의 거부가 격렬했다.
“쫓아내! 날붙이, 저놈을 내 앞에서 치우라고!”
실신했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강인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반항이 지속될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미칠 것 같았다.
“제발…….”
아레스가 할 수 있는 건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녀를, 우리의 아이를 지켜 달라고. 누구에게 비는 줄도 모르고 그저 간절하게.
“아래를 찢어야겠습니다! 칼 이리 내!”
“아악!”
“헝겊 더 가져와!”
전장에서 보았던 아비규환보다 더 끔찍했다. 그곳에서 아레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숨 막히는 몇 분이 지난 후 기적처럼.
“응애애애!”
산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여쁜 아가씨세요!”
“마님! 마님!”
들려오는 건 오로지 아이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그 사이에 루이자의 목소리는 없었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형!”
“후작님!”
비틀거렸던 아레스가 억지로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 직후 문을 박차고 들어간 그는 태어난 아이에게 시선 한번 주지 못하고 루이자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감은 채였다.
“루이, 부인?”
서둘러 손을 잡아 보지만 차가웠다. 싸늘하게 식어 그들의 곁으로 돌아왔던 페드로의 시체처럼. 이성을 잃은 아레스가 주치의를 닦달했고, 무려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도 무사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제야 줄곧 아이를 안고 있던 산파가 다가왔다. 하지만 아레스는 아이를 건네받는 대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아이였다. 볼 수가 없었다. 차마 안을 수도 없었다. 죄책감에 짓눌려 숨통이 막혔다.
아레스는 침대 옆에서 루이자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아 버렸다. 어렵게 그들의 곁으로 와 준 딸은 아레스에게 어렵기만 했다.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해 주고 싶었는데. 이 작은 생명을 포기하려 했던 스스로가 미웠고,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루이자가 대견했고, 그의 품으로 와 준 딸에게 고마웠다. 사용인들은 그가 방황하는 동안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 조카딸은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루이도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확신하건대, 그 목소리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평생 아이를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아레스가 아이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안녕, 아가…….”
레아나, 하고. 루이자가 고심 끝에 골라 두었던 딸의 이름을 부르자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레스는 제 손보다 조금 큰 아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든 머릿속에서 잠시 잠깐, 비석 앞에 서서 웃으며 그를 배웅하던 페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레스의 흐느낌이 짙어졌다.
“고맙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페드로가 두 사람을 지켜 준 것 같았다.
* * *
오멘은 라의 달이 끝나기 직전 다시 출정했다. 여름내 뜨거운 열기에 늘어져 있던 마수를 쓸어 낸 참이었기에 이동은 순조로웠다. 리퀘나에서 출발하여 열흘 하고도 이틀을 달리자 본부대에서 지정해 준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옛 페르데른의 영토 중에서도 남부에 가까운 하갈산맥 인근이었다.
그날 오멘은 오후 내내 주둔지를 꾸리며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급한 일을 끝냈을 땐 해가 져 버린 후였다. 당장 내일부터는 주변 정찰에 신경을 써야 하기에 곧바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건만.
“그럼 두 사람 다 테노리엘 경하고 해 본 거구나?”
두툼한 천 너머에서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무려 다섯이었다. 제 천막임에도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오멘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땠어? 정말 소문처럼 다정하니?”
“그보다 잘해? 내가 아는 애는 다시 그분한테 가고 싶다고 며칠을 시끄럽게 울던데, 그렇게 그리워할 정도야?”
“잘하시는 편이죠. 저희가 느낄 수 있게 꼼꼼히 챙겨 주시거든요.”
“흐응, 궁금한데?”
“몸이 좋으셔서 안겨 있으면 솔직히 설레기도 하고요.”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때문에 밖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를 한참.
“큼.”
결국 오멘은 부러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드러냈다. 그제야 끊이지 않고 오가던 대화가 잦아들었다. 수년간 중앙 귀족들을 상대로 단련된 가면을 쓰고 안으로 들어서자 다섯 쌍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섯 명의 여인을 훑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네 명이었다. 기어이 제 손으로 다시 데려온 소피아에게는 어떻게 해도 시선을 줄 수가 없었으니까.
그의 천막에 자리를 잡게 된 이들 중 낯선 얼굴은 총 세 명이었다. 모두 전사한 남부군 병사들의 유가족이었다. 부러 사정이 어려운 이들을 추려 온 탓에 셋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물자 마차와 함께 이동한 그녀들과는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얼굴을 익히기 위해 바라보기도 잠시.
“테노리엘 오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저, 저희도요.”
“반갑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꾸벅 허리를 숙인 여자들을 지나 로리아를 돌아본 오멘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로리아.”
“네?”
그의 부름에 곧장 답한 로리아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했습니까?”
“아, 네. 배식받은 음식으로 다른 지휘관을 따라온 사람들과 함께 먹었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오멘이 침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럼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부터 바로 일정이 시작될 테니까요.”
“아…….”
“지난번과는 다를 겁니다. 그리고 이미 전달한 대로, 병영 내에서 여인들의 단속은 당신의 몫입니다. 일정에 착오가 없게 관리 감독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걱정하는 말 같기도 하고, 지적 같기도 한 말이었다. 잠시 오멘의 눈치를 살피던 로리아가 평소와 달리 위축된 음성으로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사이 수건을 챙긴 오멘은 이동 중에 뒤집어쓴 흙먼지를 씻어 내기 위해 천막의 뒤로 향했다.
그때쯤에는 분명 평정을 되찾은 줄만 알았는데.
“뭐야, 뭐야, 잘생겼잖아.”
그가 천막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총지휘관이 저렇게 젊어도 돼? 나이가 얼만지 알아?”
“스물 중반이시래요.”
“세상에, 나랑 비슷한 연배잖아!”
“황후의 오라비니까 뭐. 그 배경에 누구 밑에 있는 게 이상한 거야.”
“하긴, 밑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거북하겠지?”
“그래도 어리니까 눈요기로는 좋네. 저런 남자라면 좀 난폭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저, 전혀 난폭하지 않으세요! 무척 다정하시고 또, 섬세하신…….”
“어머, 얘 좀 봐라? 아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네 임을 욕하는 것 같아서 파르르 떠는 거…….”
“병영 내에서.”
부지불식간에 평소보다 큰 목소리를 낸 오멘이 여인들의 대화를 잘라 냈다. 소피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더 이상의 인내가 불가능해진 탓이다. 뚝, 끊어진 수다의 빈자리를 평소보다 엄한 오멘의 목소리가 채웠다.
“사담은 자제하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멘의 천막이 비로소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얼굴의 열이 가라앉았다. 이후 천막으로 들어간 오멘은 여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소등하겠습니다.”
어두워진 곳에서 몸을 누이자 드디어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눈을 감기도 전에 총총총, 다가온 기척이 그의 휴식을 방해했다.
“테노리엘 경?”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킨 오멘은 낯선 여인을 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오늘 밤은 필요 없으신가 하고요.”
방긋 웃은 여인이 그의 가슴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인상을 찌푸린 오멘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게서 떼어 놓았다.
“괜찮습니다.”
오멘은 그녀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나는 로리아가 전담하게 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흐음… 아쉽네요.”
순순히 멀어지는 기척에 안도하기 무섭게 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그럼 소피아는요?”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흠칫, 떨린 몸을 어둠이 가려 주었다. 짧은 침묵 끝에 다시 몸을 누인 오멘이 답했다.
“그녀도 다를 건 없습니다. 로리아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나를 상대할 때 외에는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주의하세요.”
“네…….”
로리아의 답을 확인한 오멘은 억지로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려 누웠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중에 거슬리는 하나. 꾸역꾸역, 울렁거리는 숨을 짓누르다 보니 문득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다. 저들과 함께 남은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니.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할 때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오멘은 어두운 천막에 불을 밝힘으로써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밤사이 도착한 전보에 루이자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그에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기도 잠시. 잠들어 있는 소피아를 발견한 오멘의 표정이 굳었다. 침상에 걸터앉아 종자가 챙겨온 배식품으로 식사를 시작하자 잠들어 있던 여인들도 하나둘, 눈을 떴다.
“총지휘관님, 하보르입니다.”
“들어오게.”
때마침 보좌관 하보르가 도착했고, 출정 준비의 전반적인 사항을 보고 받았다. 하보르가 돌아가고 오래지 않아 오멘은 식사를 마쳤다. 비척비척,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여인들을 등지고 서자 대기 중이던 종자들이 다가왔다. 마법 시약으로 몸에 도색을 하고 있노라니 로리아와 소피아가 침상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도색 중인 종자들을 대신해 오멘의 장비를 챙겨 왔다. 그때쯤에는 전투 지역까지 따라온 게 처음인 여인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게 도색이구나…….”
“그, 절단 부상당했을 때… 맞지?”
“기사들만 하는 거지?”
“아마도. 절단 부상을 치료하는 건 기사들부터 가능하니까…….”
작은 속삭임 사이에 찰칵, 탁, 단조로운 금속음이 끼어들었다. 그때마다 오멘의 몸에 걸친 장비가 늘어났다.
“하나, 둘.”
소피아와 로리아가 힘을 합쳐 무거운 흉갑을 가져오자 종자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멘의 몸에 걸쳐진 흉갑의 이음새가 탁, 소리를 내며 잠겼다. 투구까지 챙겨 쓴 오멘이 제 손이 잘 닿을 법한 등허리에 단창을 끼웠다.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는 곧장 천막을 나서려고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한 그는 결국 이 악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피아는 천막에 남아 의무실에서 전달하는 일거리를 책임지십시오.”
“네?”
얼떨떨한 반문이 들려왔지만 오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전담은 당신이 합니다. 다른 일정은… 소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답조차 듣지 않고 천막을 빠져나오자 한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어 보자 복잡했다.
‘이건 그냥…….’
병영 내에서 소피아를 품은 사내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아서다. 그럴 뿐이다. 오멘은 억지로 제 행동에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천막을 뒤로하고 말에 올라 출정하는 내내 마음이 술렁거렸다.
* * *
충동적인 결정으로 소피아를 열외시키고 한 계절이 넘게 지났다. 겨울이 찾아왔음에도 서늘한 바람이 전부인 나날. 그간 오멘은 소피아에게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에 눈치라도 보였던 걸까? 소피아는 조심스럽게 다른 기사들에게 구음을 해 주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해 왔다. 제 기이한 고집으로 그녀의 위치가 애매해졌다는 걸 알기에 오멘은 순순히 허락했다.
그 이후로 어떻게든 잘 버티는가 싶었더니.
“음…….”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오멘이 목을 좌우로 당기며 굳은 근육을 풀려던 찰나. 침상의 맞은편, 여인들의 침상이 있는 쪽에서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공용 수납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죽여 가며 무언가를 뒤적거리고 있는 그림자.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그게 소피아의 뒷모습이라는 걸 금세 알아보았다. 헐벗은 채 아래 속옷만 겨우 갖춰 입은 그녀의 하얀 등에 시선이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하지만 수납장 속에서 제 짐을 뒤적거리느라 바쁜 소피아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순간 오멘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더는 안 되겠다.
오멘의 머릿속에 그 짧은 문장이 가득 찼다.
한 걸음, 한 걸음, 다른 여인들의 침상을 지나는 내내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두어 걸음 거리까지 다가가자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굳이 이 이른 시간에 일어나 옷을 벗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월경 중인가…….’
오멘의 목울대가 다시 한번 더, 크게 꿀렁거렸다.
그제야 소피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기척을 느끼기 무섭게 흠칫, 하고 몸을 떨더니. 정작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안도한 것처럼 숨을 내쉰다.
‘왜.’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온 저를 보고서 도망가는 대신 안도하나.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를 악문 채 의문을 삼킨 오멘이 소피아를 눈에 담은 채 자세를 낮추었다.
“아, 안녕히 주무셨…….”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던 소피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수납장을 짚은 오멘이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갔으니까. 이번에는 소피아가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반쯤 몸을 돌려 앉은 그녀를 두고 오멘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는 비어 있는 손으로 제 바지춤을 헤집고 있었다. 또로록, 아래로 내려간 연보라색 눈동자가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 반쯤 일어서 있던 성기가 완전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를 악문 오멘은 훤히 드러난 소피아의 어깨와 가슴, 가녀린 목덜미를 샅샅이 훑으며 수음을 시작했다.
“하아, 하아.”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예민한 곳을 스칠 때마다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제가, 해, 해 드릴…….”
당황한 채 굳어 있던 소피아가 손을 뻗어 오자 오멘이 꽉 억눌린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를.”
딱딱하고 날 선 어조에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던 소피아의 손이 뚝, 멈췄다.
“만지지 말아요.”
“아…….”
“그냥, 거기에 가만히…….”
허억, 허억, 점점 거칠어지는 숨이 소피아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잔머리. 언젠가 한 번 입을 맞춰 보았던 피부. 손 안 가득 들어차던 풍만한 가슴. 앙증맞은 주제에 존재감을 과시하듯 바짝 일어섰던 유두. 그리고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깊게 삼키고서 빨아 대던 그곳.
“윽……!”
과거의 정사를 떠올리기 무섭게 오멘은 파정에 이르렀다. 투툭, 하고 튀어 오른 정액이 소피아의 등허리에 묻었다. 떨리는 숨을 고르며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오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데려와서는.’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야 만 그가 벌떡 일어나 천막을 뛰쳐나갔다.
멜리안과 혼인한 페르멘은 작은 저택을 마련했다. 본가 저택에서 분가를 한 것이다. 그곳에서 처가 식구들과 함께 오순도순, 따듯한 날을 보내기도 근 1년.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멜?”
페르멘은 신년이 밝은 기념으로 멜리안과 한바탕 뜨거운 밤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멜리안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결국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옆에 몸을 누인 페르멘이 말했다.
“왜 그래요?”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감아 안자 멜리안이 그의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베실베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페르멘은 말없이 자신의 품에 안겨든 멜리안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무래도…….”
기나긴 침묵 끝에 멜리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무래도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진찰? 왜? 어디 아파요?”
벌떡 일어난 페르멘이 멜리안을 샅샅이 살폈다.
“……아이요.”
“응?”
“1년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어서…….”
그제야 페르멘은 멜리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에이, 뭐가 급하다고요. 혼인하고 3, 4년 넘게 소식이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그런 사람들은 정말, 합방일에만 볼일 보듯이 일을 끝내는 거잖아요. 우리와 비교하면 안 되죠.”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말했던 페르멘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매일같이 에스메랄다에게 불려 다니며 사교계에 익숙해진 탓인지 멜리안이 예리해졌다.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데 실패한 페르멘이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그도 알고 있다. 정략혼으로 합방일만 겨우 지키는 이들과 그들의 상황은 다르다고. 하루 걸러 한 번씩, 아니 거의 매일같이 관계를 가지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소식이 늦어지다니. 어쩌면 이게 이상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은연중 무언가 서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금세 떨쳐 냈다. 아레스와 루이자도 아이를 가지기까지 1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니까. 자신들은 그저 조금 더 늦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괜한 걱정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점점 더 초조해하는 멜리안과 달리 페르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임신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게 급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달리 멜리안의 인내심은 오늘부로 동나 버린 것 같았다. 페르멘은 한숨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해 봤자 우리 둘 다 젊다느니, 초조하지 말라느니, 그런 말이나 하고 몸에 좋다는 쓴 약만 먹이겠지만… 당신이 원하면 내일 주치의에게 와 보라고 하죠. 그럼 될까요?”
“……네.”
방긋 웃은 페르멘은 그대로 몸을 굴려 멜리안의 위로 올라탔다.
“그럼 이제 해도 돼?”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죠? 얘기하는 중이었잖아요.”
“이거 하면서도 얘기는 나눌 수 있어. 딱 세 번만 하자. 아니, 네 번.”
주섬주섬, 멜리안의 네글리제를 말아 올린 페르멘이 그녀의 가슴을 앙, 하고 베어 물며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아이를 가지고 싶으면 더더욱 해야지. 혹시 알아? 기특한 녀석이 오늘 딱, 우리한테 와 줄지.”
가슴에서 복부, 복부에서 음모, 음모에서 꽉 다물린 허벅지까지. 쪽쪽쪽, 입술을 맞추며 내려간 페르멘은 말랑거리는 허벅지 살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기 빨리 오라고 잔뜩 싸야겠다.”
“침대 위로 올라오면 왜 이렇게 경박해지는 거냐고요!”
부끄러운 말을 듣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힐 정도로 수줍음이 많으면서.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려 주는 멜리안은 사랑스러웠다.
페르멘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음부에 얼굴을 묻었다. 혼례 전에는 그래도 달아오르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멜리안은 그가 닿기만 해도 젖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볼 때마다 입맛을 다시게 된다. 그녀를 눈에 담는 모든 순간에 반쯤 부푼 성기를 가리기 위해 다리를 꼬는 습관도 생겼고. 오늘도 역시나. 몇 번 핥지도 않았는데 벌써 받아 마셔도 될 정도로 흥건해졌다.
“넘쳐흐를 만큼 많이 싸서 두세 명 정도 한 번에 오게, 그렇게 만들어 줄게.”
말랑말랑하게 풀어진 멜리안을 파고든 페르멘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랑 오멘처럼 쌍둥이면 좋겠다.”
며칠 후 자신들에게 찾아올 소식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무책임하게.
* * *
“윽, 흡…….”
꽉 맞물린 잇새에서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에 절어 있는 신음은 붉은 핏물이 줄줄 쏟아질 때마다 한층 더 짙어졌다.
“도련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눈을 감으면 두어 시간 전의 광경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해가 바뀐 지 고작 20여 일이 지난 오늘, 전투 중 갑작스럽게 20여 기의 중형 마수가 출몰했다. 지휘부를 특정한 체계적인 습격. 난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무언가 뒤로 접근하는 기척.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앞으로 떠밀린 몸.
마수인 줄 알고 대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그를 밀어낸 호위 기사의 얼굴이 마수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대검을 받쳐 들고 있던 그의 왼손과 함께.
그 틈을 타 달려든 소형 마수의 발톱에 목을 깊게 베였고, 난전 중에 호위 기사를 파고들어 온 마수가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연이은 부상에 순간적으로 현실 감각이 아득해졌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틴 덕분일까? 다행히도 오멘은 살아남았다. 그의 호위 기사 중 여덟이 죽고, 부대 병력의 삼 할 가량이 전사한 전투에서 겨우.
“라카난 부대다! 교대, 교대! 중앙군은 후퇴하라!”
근방에 있던 라카난의 부대가 늦지 않게 지원을 와 준 덕분이었다. 그들과 전열을 바꾸는 사이 살아남은 호위 기사들이 마수의 사체를 가르고 잘려 나간 그의 손을 건져 왔다.
급하게나마 출혈을 잡고 병영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도 길었다. 이동 중에 한 번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금 눈을 뜬 오멘의 허리가 꺾였다. 깊고 깊은 어둠으로 잠겨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무저갱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으로 떨어졌다가 튕겨져 나온 것 같은 감각은 섬뜩했다. 몸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우욱…….”
그런 상황에서 역한 피 냄새까지 들이닥치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검붉은 핏덩이가 말의 갈퀴 위로 쏟아졌다.
“신관, 신관부터! 먼저 가!”
그를 태우고서 말을 재촉하던 호위 기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곁에서 달리던 이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한발 앞서감과 동시에 머리가 찡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몸은 어느덧 차가워져 있었다.
오멘은 저 멀리 병영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정말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려고 했는데. 오멘이 마주한 건 병영이 아니라 그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자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곳.
얼마 남지 않는 힘으로 악을 내질러 가며 발버둥 치자 기적처럼 의식이 튕겨져 오르며 시야가 확보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병영에 도착해 있었다. 의무실 천막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때마침 누군가 그를 말 위에서 끌어 내리는 중이었다. 흐릿한 시야 끝에서 우유에 담근 채 병영으로 가져온 손이 보였다. 핏물이 섞인 우유 위에 떠 있는 자신의 손은 비현실적이었다.
오멘이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중, 그를 말에서 끌어 내린 이가 소리를 질렀다.
“신관은? 신관은 어딜 간 거야!”
악에 받친 목소리는 오늘 전투에서 살아남은 호위 기사의 것이었다. 본디 테노리엘 기사단에 속했으나, 그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군으로 적을 올리게 된 충직한 가신. 그의 존재를 인지하자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직전의 그곳으로 의식이 잠겨 들 것 같았으니까.
천막으로 들어갈 여유조차 없이 흙바닥에 몸을 누인 오멘이 멀쩡한 오른손으로 호위 기사의 팔을 꽉 붙잡았다. 차가워야 할 갑옷의 감촉이 흐릿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다음번에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유언, 장은… 작성, 쿨럭, 해 놨… 리디, 황후 폐하께 너무 오래, 큽, 품고 계시지 말라고…….”
억지로 말을 꺼낼 때마다 속에서 울컥울컥, 끔찍한 핏물이 기어 나왔다.
“도련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빨리!”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너머로 신관을 허리에 끼고 말에 오른 채 부리나케 달려오는 이가 보였다. 그걸 보았음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 후, 크륵, 폐하께… 무탈하시…….”
몇 해 전, 구슬프게 울던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죽은 후 그녀가 흘릴 눈물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서 억지로 입을 열어 보지만 어느 순간 오멘의 의식은 뚝, 끊어졌다.
기어코 돌아온 이 깊은 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 * *
전선에서 또 한 번 해가 바뀌었다. 순조롭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비명과 피, 폭음과 죽음, 그리고 공포겠지.
전부 그가 자청하여 짊어진 것이었다. 원망은 없었지만 미련이 남는다면, 그의 죽음에 또 한 번 무너질 에스메랄다. 어릴 적부터 형제들의 보물이었던 누이. 제게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죽음을 본 오멘은 부디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기도했다. 저를 대신해 내륙에 남은 페르멘에게 그녀를 잘 다독여 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저 바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비명을 내지르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를 집어삼키는 죽음을 거역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깊고 깊은 곳에서 끔찍한 죽음에게 쫓기기를 한참. 오멘이 불현듯 메마른 숨을 내뱉었다.
“허억.”
갈급하게 숨을 들이켜 폐부를 채우자 어두컴컴한 세상이 조금씩 윤곽을 찾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천막의 기둥. 어둠에 파묻혀 있는 그 실루엣을 확인하자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참 기이하게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숨결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살아 있기에 힘차게 박동하며 존재감을 과시해야 할 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오멘은 잠시간 멍하게 천막의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테, 테노리엘 경?”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테노리엘 경, 정신이 드십니까?”
종자인 빌레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청록색 눈동자는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수건과 대야를 들고 침상 옆으로 다가온 여자, 소피아.
“바, 바로 군의관을 불러……!”
그녀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멘이 손을 뻗었다. 그는 소피아의 팔을 움켜쥔 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
우당탕탕.
소피아가 들고 있던 대야가 떨어지며 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오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왼손이 자연스럽게 소피아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오멘은 이미 소피아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황홀했다. 무작정 저를 밀어붙이는 움직임은 거칠었다. 언젠가 섞어 보았던 타액을 맛보자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날의 기억으로 가득 찼다. 소피아의 체온과 쾌감만이 선명해졌다. 당장 그걸 손에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오멘은 게걸스럽게 소피아와 입을 맞추었다. 거친 움직임이 지속되자 소피아의 입술이 그의 치아에 짓눌리며 살짝 찢어졌다. 피 냄새에 한층 더 흥분한 오멘이 소피아를 제 아래에 깔고 올라탔다.
늦은 밤 일정을 마치고 천막으로 복귀했던 여인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에 빌레트가 그녀들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물론, 오멘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허억, 허억.”
초점이 풀린 청록색 눈동자는 제 손으로 찢어 낸 옷 너머에 보이는 광경을 빠르게 훑었다. 딱 한 번, 그에게 기이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던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활짝 펼친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졌다.
“하아.”
메말라 버려서 존재조차 인지할 수 없었던 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로소 자신의 숨결을 느끼게 된 오멘이 허리를 숙였다. 형편없이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고개를 묻자 달큼한 살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그날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곧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그곳에 저를 파묻은 오멘은 눈앞에 놓인 젖무덤을 움켜쥐었다.
“읏.”
엄지를 놀려 바짝 약이 오른 돌기를 문지르자 아득한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꿀꺽, 침을 삼킨 오멘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소피아의 젖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입술에 걸린 유두를 쫓아 움직이자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여체가 크게 들썩거렸다.
“으응, 응.”
한 손으로 유방을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 바지춤을 헤집은 오멘이 오래지 않아 소피아의 치마를 들치었다. 무작정 속옷을 벗겨 내고 뻑뻑한 그녀에게 저를 밀어 넣는 순간.
“아윽!”
고통 섞인 비명이 오멘의 이성을 후려쳤다. 강압적이던 움직임이 한순간 멈춰 버렸다. 겨우 이성을 되찾은 오멘이 덜덜 떨리는 몸을 물리며 말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십시오.”
볼품없이 쉬어 버린 목소리는 딱딱하기만 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왔다.
쿵, 쿵, 쿵. 비로소 오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흥! 앙! 아앙!”
오멘의 아래에 깔린 소피아의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나풀거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빠르게 허리를 치대고 있던 오멘은 제 몸을 소피아에게 바짝 밀착시킨 상태였다. 입을 맞출 때처럼 빈틈 하나 없이 맞물린 살갗이 뜨거웠다.
오멘은 소피아의 목덜미와 귓불, 뺨과 입술을 번갈아 가며 물고 빨았다. 그녀의 피부에 남은 벌건 자국을 볼 때마다 기이한 포만감이 차올라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흐, 아, 흐아.”
질척거리는 소리와 오멘이 삼키지 못한 신음 소리가 선정적으로 뒤섞였다.
“으하아…….”
하체에서 시작된 쾌락은 이미 그의 전신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오멘은 상체를 맞댄 채로 손을 비집어 넣어 소피아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손에 착 감기는 감촉은 여전히 아찔했다.
소피아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서 탄식을 내뱉자 파르르, 떨리는 몸이 느껴졌다. 잠깐 가슴에 한눈을 파는 사이 느려졌던 추삽질에 다시 힘이 실렸다. 한동안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쥔 채 멋대로 주무르고 있던 손은 어느덧 소피아의 골반을 붙잡기에 이르렀다. 그 직후 상체를 세우며 자세를 잡자 줄곧 소피아와 맞닿아 있던 살갗이 시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연결되어 있는 성기로 그녀를 느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동을 느낄 수 없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으니까.
“흐아!”
숨을 고른 오멘은 전력을 다해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단조로우면서도 빠른 박자의 소리가 천막 내부에 울려 퍼졌다. 활짝 벌어져 있던 소피아의 다리를 모아 팔 안에 가두자, 그들의 음부가 더 바짝 맞물렸다. 오멘은 제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리는 가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앙! 아흐앗! 하으응!”
오래지 않아 소피아가 비명을 닮은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 그 감각이었다. 그녀가 저를 빨아 대는 그 느낌.
오멘은 사정감을 참지 않았다. 소피아의 깊은 곳에 저를 찔러 넣은 상태 그대로 파정하자 아찔한 쾌감이 이어졌다. 등골을 타고 올라 머리를 강타한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직까지도 연결되어 있는 음부에서 울컥울컥, 젖은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미 몇 번이고 그녀의 안에 파정했건만. 거듭된 정사에서도 불구하고 거북할 정도로 많은 씨물이 쏟아져 나왔다. 맞물린 성기를 비집고 나온 정액이 아래로 뚝뚝 떨어져 침상을 적시고 있었다.
오멘이 흐릿한 눈으로 저와 소피아의 결합 부분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던 소피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아…….”
곧 오멘의 몸도 허물어졌다. 그는 소피아를 제 품에 가둔 채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 *
아레스는 루이자가 자고, 먹고, 걷는 것을 모두 손수 챙기며 곁에 머물렀다. 그 지극한 정성 덕분일까? 루이자의 회복은 순조로웠다. 새해가 밝았을 무렵 그녀는 평상시의 건강을 되찾았다.
“더 먹을래요?”
대답 대신 아, 하고 입을 벌린 루이자에게 포도를 먹여 준 아레스가 웃었다. 그들은 잠들기 전 서로를 품에 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레스의 말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를 올려다본 루이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레스는 따듯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감정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짚어 보기 위해서였다. 거듭 고심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아레스는 루이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침실에…….”
“네?”
“침실에, 페드로의 초상화를 걸고 싶습니다.”
달아올랐다가 식었다가, 다시 달아오르는 루이자의 안색은 꽤나 신기했다. 아레스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페드로와 자신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루이자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울렁거렸다.
“왜…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덤덤하게 해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한 거요.”
페드로의 존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었다. 정사를 나누는 중에 언급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레스가 먼저 추억을 말해 주기도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을 함께 보며 그 속에서 페드로와 함께 연무장을 뛰었던 이야기. 화창한 날 함께 산책을 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 훈련을 빼먹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던 이야기. 그렇게 페드로와 아레스가 쌓은 추억 위에 루이자가 덧입혀지는 나날이었다.
아레스는 깊게 잠긴 눈으로 루이자를 응시했다.
“난…….”
대답을 하기 전 숨을 고르는 사이 복잡한 감정이 뒤엉켰다. 끔찍한 죄책감, 저열한 승리감, 지독한 불안감. 하지만 그런 복잡한 감정보다 더 사무치는 것이 있었으니.
“난, 녀석이 살아 있기를 바라요.”
툭, 하고 고개를 떨군 아레스가 중얼거렸다.
엉키고 뒤섞인 모든 것의 기저에 존재하는 그리움. 페드로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리움은 나날이 짙어진다. 죽은 형제가 더없이 그리워질 때면 루이자를 사랑하는 것도, 그녀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도 모두 죄스러워지곤 했다. 페드로의 환영에게 허락을 받았음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페드로가 살아 있기에 루이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 해도. 아레스의 바람은 언제나 같은 곳에서 끝났다.
“난 부인을 사랑해요. 그 녀석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마음을 주고야 말았을 겁니다.”
설령 그것이 홀로 이어 가는 외로운 사랑이었다 해도 멈추지 못했으리라.
“내 눈에 당신은 그 어떤 여인보다 빛나 보이거든요.”
“…….”
“하지만… 그 녀석도 부인만큼이나 소중해요.”
아레스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생겼다.
“이렇게 살아서 부인과 행복에 취할 때면, 마음 한편이 무거워요. 그럴 때면 멍청한 생각을 하는데… 여기에 그 녀석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됩니다.”
“…….”
“초상화 얘기는… 거절해도 돼요.”
이 복잡한 감정은 그의 몫이니까. 스스로를 위해 루이자를 힘들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남편이 계속 과거의 연인을 언급하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을 테지. 아레스는 어느새 떨리고 있는 루이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울리고 싶었던 건 아닌데.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루이자를 몰아붙인 건 아닐까?
“내가 그 녀석 얘기를 꺼내는 게 불편하다면 자제할게요.”
아레스가 애틋한 목소리로 루이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마냥… 마냥 편한 건 아니에요.”
그에 루이자가 울먹이며 답했다. 아레스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당신이 허락해 준 것 같아서…….”
“루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부름이었다. 루이자의 눈물을 훔쳐 준 아레스는 웃고 있었다.
“그건 내게 허락받을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말했잖아요. 녀석을 잊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고.”
루이자를 꽉 껴안은 아레스가 말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 녀석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러면서 자신도 함께 사랑해 주면 더없이 기쁠 테지. 뒤따라 건네고 싶었던 진심을 삼킨 아레스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그의 녹안은 조금 더 짙어졌다.
“주치의는…….”
꿀꺽, 침을 삼킨 아레스가 제 몸을 루이자에게 바짝 밀착했다.
“이제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아…….”
뺨을 붉게 물들인 루이자가 힐끔, 그를 올려다보며 꼼지락거렸다.
“될까요?”
루이자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레스는 초조한 손길로 그녀의 슬립을 끌어 올렸다. 보드라운 피부가 손에 착 감겨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셔 볼 만큼 그리웠던 살결이었다. 루이자의 위로 올라타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춘 아레스가 웅얼거렸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부인은 모를 겁니다.”
“으음…….”
아레스는 한동안 하얀 목덜미에 붉은 흔적을 남기는 데 집중하며 이제는 당연해진 이름을 언급했다.
“페드로는 어디부터 해 주던가요?”
흠칫, 떨린 몸이 거부의 뜻일까? 아니면 그저 혼란스러워서? 아레스는 루이자가 답을 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녀석이 어디를 어떻게 핥아 줬는지 말해 봐요.”
“으응.”
재빠르게 슬립을 벗겨 내고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지자 루이자가 몸을 웅크렸다.
“말 안 해 줄 건가요?”
아레스는 오로지 그녀의 목덜미만 우물댔다. 답을 해 주기 전까지는 나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루이자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미, 밑에.”
떨리는 목소리가 드디어 답을 주었다.
“그, 그 사람은 밑에부터, 핥아 줬어요…….”
남편의 앞에서 과거의 연인과 나누었던 정사를 언급하는 게 불편했을까? 루이자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아레스는 기뻤다. 자신이 모르는 루이자와 페드로의 시간을 엿보게 되었으니까. 푸흐, 하고 소리 내어 웃은 아레스가 그녀를 돌려 눕히고 엉덩이를 치켜들게 만들었다.
“여기를 어떻게?”
“혀로… 처음이라고, 혀로 핥으면서…….”
루이자의 말에 따라 그녀의 음부에 고개를 파묻은 아레스는 틈틈이 그녀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녀가 페드로와 나누었던 시간을 알려 달라고.
“안쪽은 손가락으로?”
“응! 으응! 안에, 그렇게 해 줬… 으읏!”
“벌써 이렇게 젖어서는… 녀석이 좋아했겠네요.”
분명 정사 중에 말을 하는 건 싫어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시끄러운 사람이 되었는지. 새삼 지금의 변화가 신기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뜨거운 숨이 닿자 루이자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에 아레스는 이를 세우며 그녀의 예민한 돌기를 긁었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내벽이 움찔거렸다.
“이런 것도, 해 줬습니까?”
“아, 안 했… 으앗! 항! 더, 더 빨리……!”
아레스의 손이 한층 더 바삐 움직였다. 이미 그의 손가락을 두 개나 기껍게 삼킨 루이자가 엉덩이를 흔들었다.
“이대로 갔습니까? 녀석의 손에 갔어요?”
“으응! 가, 갔어요! 그러니까 빨리!”
“그다음은?”
“다, 다음, 내가, 으핫, 앙, 앙! 내가, 입으로 해 줬……!”
내벽을 쑤시던 아레스의 손이 뚝 멈추었다. 그에 절정에 닿기 직전 고꾸라진 루이자가 칭얼거렸다.
“아레스, 빨리… 빨리 해 줘요.”
음탕하게 그를 요구하는 루이자는 예뻤다. 평소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원 없이 찔러 주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질투심이 먼저였다. 루이자의 음부에서 손가락을 빼낸 아레스가 애액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난 받아 본 적 없는데.”
그는 루이자에게 단 한 번도 구음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받는 것보다 해 주는 것을 선호했고,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구음이 없어도 충분한 쾌락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한데 페드로는 그녀에게 구음을 받아 보았다고.
루이자의 엉덩이 살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한 아레스가 중얼거렸다.
“녀석이 그런 걸 시킬 줄은 몰랐는데…….”
그가 알기로, 페드로 역시 구음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때때로 음담패설을 나눌 때 언급되기는 했지만 좋았다는 식의 표현은 없었다. 아레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 녀석, 이로 긁어 주는 걸 좋아하던가요?”
언젠가 그래도 그건 좋더라, 하는 식으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아레스의 질문에 루이자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것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뻣뻣한 움직임으로 뒤를 돌아본 루이자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그런 것까지 아는 거예요?”
아레스는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형제니까요.”
“그, 그런 걸 왜 형제가 아느냐고요! 같이 했어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페드로와 같은 공간에서 옷을 벗고 정사를 즐긴다? 아내를 다른 사내와 나누는 건 분명 불쾌해야 할 가정인데. 그 대상이 페드로와 루이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레스는 이미 몇 번이고 페드로를 언급하며 루이자와 정사를 가졌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셋이서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 조금 더 구체적인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자신이 루이자의 안에 성기를 찔러 넣으면 페드로는 그녀의 입에 제 것을 물려 보겠지. 이미 충분하게 부풀었던 아랫도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짜릿한 상상이었다. 저와 페드로를 동시에 물고 있는 루이자를 떠올리자 목이 탔다.
아레스는 그녀를 서둘러 제 쪽으로 돌려 안았다. 루이자와 마주 보고 앉은 그는 무릎을 굽힌 채 자세를 잡았고, 한 번에 안을 꿰뚫었다.
“목 안아 봐요.”
황급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른 루이자의 허리가 휘었다. 안쪽에 있는 주름이 그를 휘감아 왔다.
“하아.”
아레스는 그대로 루이자의 다리를 한쪽 팔에 걸고 허리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반대쪽 다리로 허리를 감아 오는 그녀가 기꺼웠다.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퍽, 퍽, 퍽.
깊게 저를 찔러 넣을 때마다 달콤한 교성이 그의 전신을 훑어 주었다.
“여기선 페드로가, 후, 부인의 입에 제 것을 물리겠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루이자가 눈을 꾹 감았다. 그러고는 꼭, 무언가를 빨아 대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녀도 아레스와 같은 것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 페드로가 있다고. 루이자가 그의 등을 긁어 대자 그게 꼭, 페드로의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그의 뒤에 선 채로 루이자의 입에 제 것을 물린 페드로가 허리를 흔들면.
“아!”
사정감이 몰려왔다. 갑작스러운 파정이었다.
-하아!
동시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휙, 뒤를 돌아본 아레스의 녹안이 떨리고 있었다.
“으응… 나 아직 못 갔는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루이자가 멋대로 허리를 돌리기도 전에 그의 성기는 다시 힘을 얻고서 딱딱해진 상태였다. 아레스의 입매가 떨렸다. 그는 칭얼거리는 루이자에게서 제 것을 빼내었다.
“아레스?”
“하아, 하아…….”
기이한 흥분이었다. 루이자를 엎드리게 만든 아레스가 그녀의 턱을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그 녀석이…….”
“네? 웁!”
루이자의 입에 성기를 집어넣은 아레스는 몸을 숙이며 손을 뻗었다. 그가 싼 정액으로 가득 차 있는 음부에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 움직임이 다급했다.
“녀석이랑, 뒤로도 해 봤어요?”
“웁, 후웁!”
그의 것을 입에 문 루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앗, 이게 그 녀석이라고 생각해 봐요.”
루이자의 뒤에서 페드로가 허리를 치대고 있다고 생각하자 등줄기가 저릿했다. 아레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지금 아내를 페드로와 공유하고 있었다. 단순히 셋이서 해 본다, 라는 가정을 넘어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와중에 같은 여자를 탐하며 달뜬 숨을 내뱉는 광경.
“아!”
배덕감과 질투, 쾌락과 그리움, 그리고 환희가 뒤섞이며 이성을 빠르게 잡아먹었다.
“좋습니까?”
아레스의 녹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페드로와 내가 동시에 당신을 원하고 있는데, 좋아요?”
“웁웅! 후욱!”
허리에 힘이 들어가자 버거웠던 걸까? 루이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것을 뱉어 내지는 않았지만.
-아주 정신없이 빨아 대네.
또다.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그렇게 맛있어?
루이자의 내벽을 쑤시는 손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내 것도 오물오물 씹어 대고, 음탕한 루이.
“하으!”
루이자가 안쪽을 꾹 조이며 절정에 달하는 순간, 아레스 역시 자신을 루이자의 목구멍까지 밀어 넣은 채 파정했다. 충격적일 만큼 황홀한 정사였다.
아레스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정신을 차린 루이자가 빽빽,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런 거에 흥분하는 거예요!”
“……그건.”
아레스는 조금 멍한 심정으로 답했다.
“……진짜 같이 해 본 거 아니에요?”
“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간간이 얘기를 나누는 정도.”
“설마, 그 사람이 나랑 한 것도 말해 줬어요?”
“아뇨.”
단호한 대답에 루이자의 눈초리가 살짝 유순해졌다.
아레스의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페드로는 살아생전 그에게 루이자에 대한 것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죽고 나서야 유서 한편에 짧게 남겨 둔 게 다였지. 아마도 꽁꽁 감춰 놓고 그가 보지 못하게 경계한 것이리라. 그가 루이자를 보면 저와 같이 사랑에 빠질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만약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 아레스가 루이자를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면…….
“씻을래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레스는 루이자가 제게서 몸을 휙 돌리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자 여린 몸은 손쉽게 끌려왔다.
“화났어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팩 돌린 루이자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도 자꾸만 페드로가 떠올랐다.
* * *
“이런 씨발.”
번영 길드의 공용 훈련장을 이용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현우에게 몰려들었다. 웨이트 기구에 떡하니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서는 다들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10등급 게이트 공략이 끝나자마자 뻔질나게 길드 건물을 들락거린 지 열흘. 그간 현우는 강은지로 환생한 루이자와 두 번이나 더 마주쳤다. 그로 인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다. 은지의 왼손 약지에 떡하니 끼워져 있던 반지를 봐 버렸으니까.
‘결혼한 건 아니겠지? 남자 친구? 진지한 사이인가? 아니면 그냥 그런 연애? 하지만 가벼운 사이에 다이아몬드 반지는 이상하잖아.’
헌터로 각성하며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각을 가지게 된 현우였다. 반지의 보석이 모조 플라스틱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알은 작았지만 진짜 다이아몬드였다.
그래서 지금의 사달이 난 것이다. 기껏 만난 사람의 옆에 누가 이미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것 같으니까!
“씨발!”
치솟는 울분을 참지 못한 현우의 욕설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너무한 거 아냐?’
어떻게 그녀만 기다려 온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 줄 수 있나. 가브리엘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던 게 언제였냐는 듯, 지금은 원망스럽기만 했다.
‘보내 줄 거면 혼자인 상태로 보내 줘야지. 반지? 남자 친구? 왜 쓸데없는 거머리까지 붙여 주냐고!’
넘쳐흐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현우가 훈련장 바닥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까……?”
근처에서 각자의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헌터들이 단체로 몸을 떨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며 현우를 힐끔거렸다. 서슬 퍼런 표정은 방금 전의 그 중얼거림이 그의 진심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현우의 소문을 떠올린 이들이 하나둘, 그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야성미, 세계 톱10, 국가의 자랑 등등. 더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수식어와 함께 팬층이 두터웠지만 헌터 업계 내에서 그를 수식하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친개.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 개차반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기준에 맞춘 지독한 수준의 공략 페이스. 타인을 무시할 때마다 드러나는 거친 입담. 게이트 내에서 낙오자를 가차 없이 버리는 비정함. 그리고 모두가 해낼 수 없으리라 말할 때도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집요함에 기본적인 사교성이 결여된 것 같은 행보까지.
다양한 요소는 많은 이들이 그를 꺼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둘러싼 소문은 더 활개를 쳤다. 그 소문의 대부분이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건 당연했고. 만약 그가 세계 정상급 헌터가 아니었다면 상대하려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테지. 최근 길드 건물에 출근 도장을 찍는 그의 행보에 많은 헌터들이 고통받는 이유였다.
‘왜 자꾸 나오는 거야?’
‘집에 개인 훈련장이 있다며?’
‘좀 가라, 제발 좀 가라고!’
안타깝게도 현우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 한 톨의 관심도 없었다. 당장 그의 신경을 모조리 잡아끄는 건 은지의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을, 누군지도 모를 개자식이었으니까.
그의 능력이라면 사방에 가득한 CCTV를 피해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은지의 뒷조사를 해서 누군지 모를 그 놈팡이를 찾아내고 싶었다.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슥삭, 하는 것쯤이야 숨 쉬는 것보다 쉬울 테니까.
위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를 갈던 현우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누군지도 모를 놈을 죽여 은지에게서 떼어 놓는 상상을 수백 번도 더 반복했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많이 좋아하는 건가? 소중한 사람이면?’
그에게는 개자식에 불과한 그 거머리가 은지에겐 더없이 소중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그놈이 죽었을 때 은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견딜 수 있을까? 그녀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자신은 있고?
“아… 진짜.”
미치겠다.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현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로 열흘째. 현우는 복잡한 와중에도 길드의 사무직원들이 퇴근할 때까지 훈련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어… 도, 도착했는데…….”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아, 네에……. 그럼 안녕히 가세요.”
현우가 짧게 답하자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벌써 열네 번째.
현우는 훈련장이 있는 최상층에서 1층까지 열네 번을 왕복했다. 오로지 강은지를 만나겠다는 일념하에 꾸준히. 안타깝게도 눈물겨운 노력에 비해 성과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앞선 아흐레 동안 시도해 봤으나 성공한 건 겨우 두 번. 확률이 2할도 채 되지 않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무식한 방법 외에는 그녀를 볼 구실이 없었다.
‘대뜸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해 봤자 미친놈 취급받겠지.’
이미 미친개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고백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도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훗날 그녀를 만났을 때 문제가 될까 봐 포장을 해 두어야 하나,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해서 10대 시절에는 어느 정도 조심을 했었고. 물론, 도저히 못 해 먹겠어서 때려치우고 말았지만.
전생에서도 황제 직할령을 중심으로 신문이 발행되었지만, 현생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죽다 살아온 사람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사진부터 찍어 대는 기자들도. 바로 옆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몬스터를 찍겠다고 핸드폰을 들이대는 대중도.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저를 맹신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트리는 몇몇 헌터들까지. 그들을 정중하게 상대하느니 그냥 개자식이라 욕을 먹는 게 편했다.
현우는 전생에서도 빌붙어 먹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백성들을 경멸했다. 현생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훗날 그녀를 만나면, 그때 가서 그녀의 발을 핥으며 정성스레 오해를 풀면 된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서 성질 가는 대로 해 버렸다. 경솔했던 과거가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도 모르고.
“씨발…….”
이제 와서 후회해도 이미 그는 미친개였다. 헌터 길드에서 일하고 있는 이상 은지도 그의 소문은 들어 봤을 터.
‘고백했다가는 겁먹고 도망갈지도 몰라.’
미친개에 이어 변태 스토커라는 말까지 붙으면 끝이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현우는 다시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직전 들려오는 다른 엘리베이터의 소리는 그의 화를 부추기기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두 대인 게 은지와의 만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도와주시려거든 좀 확실하게 해 주시지.’
현우는 이 순간에도 저를 지켜보고 있을 가브리엘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 랑곤은 아르셀과 달리 신의 간섭이 조금 더 수월한 편이었다. 오래도록 인과율이 자극을 받지 않은 탓에 예민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니 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많지 않겠나? 이전처럼 퇴근 시간만 되면 엘리베이터 하나를 한 층에 고정시켜 놓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일 터. 하지만 가브리엘은 좀처럼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불순한 마음을 품은 그를 혼내기라도 하는 듯이.
‘치사하게.’
잔정이 많은 미카엘이라면 눈물겨운 노력을 반복 중인 그가 불쌍해서라도 진작에 도와주었을 텐데. 가브리엘은 첫 만남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도 참, 어리광이 늘어난 것 같네.’
이러나저러나 영혼들에게 오냐오냐해 주는 천사들의 품에서 오래 지낸 탓일지도.
어느새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다시 입을 벌렸다. 그 너머에 서 있던 헌터들이 단체로 움찔, 몸을 떨었다. 현우는 야구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뜻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타지 마라.’
이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 기적적으로 은지가 탄다면? 그때 저놈들 때문에 그녀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다면? 저들을 멀쩡히 살려 보낼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도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 본 헌터들은 그의 경고를 아주 잘 알아들었다. 주춤거리며 옆으로 물러난 그들을 두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벽면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쉰 찰나. 9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를 확인한 현우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씨, 존나 좋네.’
열린 문 너머에서 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줄곧 그녀를 기다려 온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만지고 싶어, 안고 싶어,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리웠다고 말하고 싶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미친놈같이 보일 것도 문제지만, 대뜸 그렇게 달려드는 건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현우에 대한, 페드로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고작 네 번째 마주침에 불과했지만 알 수 있었다.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를 알아보았다면, 저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 성질에 내 뺨부터 올려 쳐야 정상이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전생의 성격도 어느 정도 딸려 올 수밖에 없다. 현우 역시 페드로 시절과 일정 부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조금 다른 건 어쩔 수 없어도, 근본 자체는 비슷할 텐데.’
그를 만난 은지는 낯선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얌전하기만 했다. 기억이 없다는 증거이고,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확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감정을 무작정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마음이야 그녀에게 맞아도 좋으니 저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덧없는 짓이었다. 루이자에게는 그가 새겨진 기억이 그리 절박하지 않았던 모양이니까. 요람에서 떨쳐 내도 상관없을 정도로.
‘당연한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고 떠났으니 자업자득이었다. 아레스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은연중에 기대를 했나 보다.
‘매번 날 끌어들였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레스와 할 때도 그를 잊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했었다. 평생 그녀의 삶에 자신이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기에 심판을 받았던 건데. 하지만 섣부른 기대와 달리 강은지는, 루이자는 그를 잊었다. 억지로 한숨을 삼킨 현우는 고개를 숙이며 슬쩍, 모자를 벗었다. 그녀가 자신을 잊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본래 그는 사방팔방, 전 세계에 얼굴이 알려진 탓에 밖에선 모자나 마스크를 잘 벗지 않는 편이었다. 그를 발견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를 알아본 놈들이 달려들든 말든, 은지에게 얼굴도장을 한 번 더 찍는 게 중요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더 남겨야 할 때였다.
‘한 1년? 이렇게 마주치면서 익숙해지면 데이트 신청은 해도 되지 않을까?’
1년이면 완전한 타인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을 터.
‘아니야, 안면을 트는 건 반년으로도 충분해.’
어쩌면 3개월로도 충분할 수 있고.
‘한 달만 해도 되지 않을까?’
점점 유효 기간을 줄이기 시작한 현우는 또 한 번 은지를 힐끔거렸다. 그사이에 은지가 누군지도 모를 개자식과 헤어지면 금상첨화다. 아니면 누군지 알아내서 헤어지도록 훼방을 놓든가.
“어… 안녕하세요.”
현우가 머릿속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사이 은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 힘든 것을 꾸역꾸역 해낸 현우가 평의한 어조를 가장하며 말했다.
“퇴근하시나 봐요.”
말을 걸자마자 흠칫, 하고 몸을 떠는 그녀를 보고 혼자 상처받는다. 멍청이처럼.
“네에.”
“늦었네요. 벌써 6시 40분인데.”
“마무리할 게 조금 남아서요.”
“……일이 많나 보죠?”
“네, 아무래도……. 그래도 오늘은 엄청 빨리 끝난 편이에요. 대부분은 야근이라 10시 넘어서 겨우 가요.”
이런 씨발. 또 습관적으로 욕이 나올 뻔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2, 30분가량 엘리베이터서 죽을 쳤음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나보다 늦게 나가니까 못 만나는 게 당연하잖아.’
병신같이, 그냥 그녀가 나올 때까지 건물 앞에서 기다려 볼걸. 오늘은 만나지 못했다고 실망하면서 그대로 돌아간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대로 하자, 제대로.’
첫 만남이 엘리베이터에서 이루어진 탓에 사고가 협소해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다시 만난 그녀를 보고 동요해서? 자신이 이 정도밖에 머리를 굴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우는 앞으로 보다 더 치밀하게 행동하겠노라 다짐했다.
“10시면… 너무 늦는 거 아닌가? 위험할 텐데요.”
그러면서도 지난 며칠간 저를 괴롭게 만들었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오나요?”
“네?”
“……반지, 끼고 계시길래.”
“어… 이건, 그… 네, 그렇, 죠?”
무언가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현우에게는 그 이상함을 곱씹어 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있구나.’
그가 생각했던 대로 은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
‘진짜 죽여 버릴까?’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이렇게까지 격렬한 적대감을 가질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까득.
현우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꽉 다물린 잇새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은지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면을 보았지만 속은 들끓는 화마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개새끼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지? 성인 남녀가 만나 손만 잡고서 알콩달콩 소꿉놀이를 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 개자식이 은지를, 루이자를…….
“후우…….”
진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현우가 혼자만의 절망과 분노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때.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듯 곧바로 떠나는 그녀가 야속했다. 이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받는 스스로가 어찌나 한심한지. 고개를 떨군 현우를 두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닫혔다.
‘생을 마감할 때쯤에는 날 잊었던 걸까…….’
아레스와 함께한 삶이 그만큼 행복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요람에서 그를 모두 털어 낼 수 있었던 것이고. 심장이 쓰라린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안도했다. 그녀에게 기억이 없다는 건, 그가 했던 잔인한 짓도 잊었다는 의미다. 사라진 과거로 인해 원망받을 가능성이 없어진 셈이니 다행일지도.
한동안 바닥을 바라보던 현우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모자를 눌러썼다.
‘그래도 오늘은 얼굴 봤으니까.’
애써 좋은 점을 꼽으며 열림 버튼을 누른 그가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이 지난 로비는 한산했다. 은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심하다, 진짜.’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또 실망하고야 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건물 입구에서 은지가 나타났으니까. 이제 막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온 현우를 보지 못한 듯, 곧장 1층 카페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 다급해 보였다.
‘오늘은 운이 좋네.’
다시 모자를 벗어 손에 쥔 현우는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했다. 그사이 주문을 마친 은지가 그를 돌아보았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커피를 주문하자, 몇 분 동안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커피가 나온 후에는 그마저도 끝나 버렸지만.
은지는 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앉는 것까지 하면 좀 그렇겠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카페까지 계속 마주치지 않았나.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다.
‘남자 친구 기다리는 모양이네.’
회사까지 데리러 올 정도면 사이가 나쁘지 않은 걸까? 끔찍한 사실을 확인하고 몸을 돌리는 내내 심장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삼킨 현우는 거북이가 기어가듯 느릿하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서는 걸음 역시 느리기 그지없었다. 혹시라도 은지가 나올까 봐, 그 남친이라는 놈의 면상을 볼 수 있을까 봐. 차로 다가가 올라타는 움직임도 느렸다.
하지만 아무리 느리게 움직여도 끝은 다가오는 법. 기어이 탁, 소리를 내며 차량 문을 닫자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이게 조울증인가 본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현우가 핸들을 꾹 움켜쥐었다.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꽤나 위협적이었다. 시동을 켤까, 말까 고민하던 현우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얼굴만 보고 가자, 얼굴만.’
당장 죽이는 건 보류했지만 대체 어떤 놈팡이인지 알아야겠다. 이를 뿌득, 하고 간 현우가 뜨거운 눈으로 길드 건물의 정문을 응시했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은지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다시 일하러 올라간 건 아니겠지? 분명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는데?
‘후문으로 나갔나?’
그럼 여기서 잠복하고 있는 게 다 헛짓거리인데?
‘그냥 아까 카페에 있을걸.’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은지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 보자고 다짐한 찰나. 은지가 커피를 손에 든 채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나 두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려 했는데. 건물 밖으로 나와 계단을 밟은 그녀가 눈에 띄게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상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현우의 눈썹이 삐죽, 위로 솟았다. 정문만 보고 있던 그의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왔으니까. 조금 전 은지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그는 은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처럼 계단을 몇 번 밟아보더니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회전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와 주차된 차량 틈으로 사라졌고.
현우의 고개가 삐걱삐걱, 옆으로 기울었다. 모자에 마스크에 후드까지. 유명세 때문에 헌터들이 얼굴을 가리는 일은 많았다. 당장 현우 본인도 평상시 그러고 다니니까. 하지만 무언가 싸했다. 번영 길드 소속의 헌터라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현우는 차에 시동을 걸고 정문으로 향했다. 통유리로 된 건물 내부를 자세히 보자 역시나. 사원증을 찍는 곳 너머에서 은지가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그길로 차에서 내린 현우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회전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발견한 은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외부의 차량 틈에 우두커니 서 있는 놈을 한 번, 출입 게이트 너머에 있는 은지를 한 번. 차분하게 살핀 그는 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곧 은지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현우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 지체 없이 출발한 차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길드 건물에서 조금 멀어졌을 무렵, 현우는 조수석에 앉은 은지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저놈 뭡니까?”
남자 친구면 이렇게 피하지는 않을 터. 아니나 다를까. 은지는 경직된 표정으로 우물쭈물, 말을 아꼈다. 다행히도 현우가 아무런 말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에는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 두 달쯤 전부터 자꾸…….”
그마저도 제대로 끝맺어지지는 않았지만.
꿈틀, 하고 위로 올라간 현우의 눈썹이 꽤나 사나운 모양새를 그렸다.
“스토커?”
“안, 믿기시겠지만… 네…….”
확인차 물으니 정말 기가 막혔다. 남자 친구도 모자라서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죄다 은지에게 들러붙어 있다니. 백미러 너머로 시선을 준 현우의 고동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벼려졌다.
‘넌 뒤졌어.’
어느새 차량 뒤로 따라붙은 택시, 그 택시의 조수석에 탄 신원 미상의 남자. 두 가지를 확인한 현우의 표정은 비틀려 있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도 은지가 옆에 있다는 게 좋아서 심장은 두방망이질 치는 중이었지만.
“……남자 친구는 늦나 보죠?”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스스로가 정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쩌겠나. 저 스토커 놈보다 그 남자 친구라는 놈이 더 위협적인데. 얼굴 한번 볼 수 있을까 했더니 허탕을 쳤다.
‘SNS 계정이라도 찾아볼까?’
보통은 사진도 올리고 그러는 편이니까. 번영 길드에 입사한 강은지가 많지는 않을 테니 금방 찾을 수 있을 터.
“아, 그, 사실은 남자 친구 없어요…….”
어떻게 하면 남자 친구 놈의 얼굴을 알아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그때. 은지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현우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목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평온을 가장했다.
“그럼 반지는…….”
“저 사람이 자꾸 따라다녀서 거절한다고……. 결혼할 사람 있다고 막 둘러대면서 끼고 다닌 거예요. 엄마 결혼반지 빌려서요. 그런데 효과가 별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반지가 진짜 다이아몬드였던 게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장모님 반지구나.’
속에 꽉 뭉쳐져 있던 살의가 파스스, 흩어졌다.
“그런데 또 있다고 했는데 빼는 것도 이상해서 계속 끼고 다니게 된 거고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은지의 옆에서 현우는 씰룩거리는 입매를 꽉 붙잡아야만 했다.
‘남자 친구가 없다고.’
가득하던 살의 대신 환희가 차올랐다. 그녀가 언제 헤어질까 전전긍긍하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딴 놈이 그녀를 안고, 사랑을 속삭일까 봐 불안에 떠는 것도 남 일이 되었다.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은가.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니.
“집.”
현우는 격정적인 감정을 제 안에 가둔 채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저 새… 저놈이 집도 압니까?”
“아……. 그렇기는 한데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어서 괜찮아요.”
분명 직전까지만 해도 날아갈 것처럼 좋았는데 또 바닥이다.
“……어딘데요.”
스토커도 아는 걸 저는 모른다니. 새삼 전생에서 끊어져 버린 관계가 쓰라렸다.
“어…….”
“그냥, 다른 뜻은 없어요. 기왕 태운 거 데려다주려고.”
그는 그녀에 대한 것을 이렇게 변명이나 해 가며 물어봐야 하는 처지다.
“그럼, 감사히……. 아, 주소… 내비에 바로 찍어 드릴까요?”
“네.”
그날 현우는 은지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이후 은지를 집에 데려다주었고, 그녀가 무사히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현우는 그길로 돌아가는 대신 차량을 다른 곳에 세우고 다시 은지의 집 근처로 돌아왔다. 그의 차를 졸졸 쫓아온 택시가 기어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추는 걸 봤으니까. 타인의 눈을 피해 아파트 옥상에 오른 지도 10여 분, 현우는 고민했다.
‘저놈을 치워야 할까?’
은지가 사는 호수 근처에서 어슬렁어슬렁. 후드와 마스크를 쓴 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스토커 놈이 거슬리는 건 맞는다. 하지만 저놈을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퇴근길에 은지를 태워 줄 구실이 생긴다. 그렇게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늘리면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면 데이트 신청을 해 볼 수도 있을 테고.
원래라면 당장이라도 은지 옆에서 치우려던 것을 10분이 넘도록 고민하는 이유였다. 이건 정말, 그에게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하, 씨발…….”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욕을 읊조린 현우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의 미간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 * *
“부상병과 회복병은 이번 전투에서 열외하고, 출전 가능한 인원은 라카난 부대와 비르바트 부대를 지원하라. 브롬, 자네가 지휘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오멘은 모포로 하반신을 가린 채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는 물론 그에게 답한 브롬도 모두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오멘의 옆에서 턱 끝까지 모포를 꼼꼼히 덮고 있는 소피아가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으니까.
보좌관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으려 할 때마다 오멘이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시야를 방해했다. 그에 묘한 시선을 주고받던 하보르와 브롬은 오래지 않아 천막을 나섰다.
잠들어 있는 소피아를 힐끔, 확인한 오멘이 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뻣뻣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첫 절단 부상인지라 걱정했더니 생각보다 잘 붙은 것 같았다. 옆구리와 목의 상처도 다 아물었고. 이미 보좌관들보다 먼저 도착한 의원과 신관에게 진찰을 받은 결과, 경과가 좋다고 했지.
‘죽는 줄 알았더니.’
다행히도 이번에는 살아남은 모양이다. 긴 한숨을 내쉰 오멘은 먼 곳에 있을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안도했다.
앞으로도 그녀에게 자신의 부고가 전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기도를 올리고 나니 머쓱해졌다. 에스메랄다를 위하며 기도를 하는 중이었건만, 그의 철없는 하반신은 슬쩍 모포를 밀어내고서 고개를 치켜들었으니까. 부지불식간에 지난밤의 격정적이던 정사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미친놈…….”
이성이 흐릿하고 본능만이 남았던 순간의 기억이 왜 이렇게 선명한지 모를 일이다. 기억을 하지 못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겠지만. 예전부터 범인들보다 뛰어났던 기억력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한숨을 내쉬는 사이 그의 아랫도리는 어제의 기억을 양분 삼아 완전히 일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안정을 얻은 탓일까? 어제처럼 통제할 수 없는 열이 들끓지는 않았다.
“우음…….”
때마침 그의 옆구리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소피아가 꼬물거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오멘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조심스럽게 다시 몸을 누인 그가 소피아를 품에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진행된 신력 치료는 총 열한 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체력을 소비했으니 쉬어야 할 때였다.
오멘은 그대로 두어 시간 정도 더 눈을 붙였다. 하지만 그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도 소피아는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종자를 불러 식사를 내어 오라 이른 오멘은 그녀의 곁에서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했다.
소피아가 깨어난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의 가슴에 뺨을 문지르며 잠꼬대를 하던 그녀의 몸이 한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잘… 잤습니까?”
오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 귀가 붉어지며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에 파드득, 튀어 오른 소피아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제, 제가, 나, 나가야…….”
안쪽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던 그녀는 엉금엉금 오멘을 넘어 침상 밖으로 몸을 빼내려고 했다. 소피아를 따라 자리에 일어나 앉은 오멘이 팔을 뻗었다. 작은 몸을 제 품에 끌어안는 움직임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가지 말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우뚝, 굳어 버린 소피아가 숨을 죽였다.
“지난밤에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아픈 곳은 없는 건지 오전 내내 걱정했습니다. 다음부터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게 자제하겠습니다.”
“다음… 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저를 돌아보는 소피아를 마주하니 목이 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오멘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다음에도 어제처럼… 당신이 나를 받아 줄 수 있다면 염치없이 부탁을…….”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소피아 때문에 오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우는 여인을 제대로 달래 준 적이 없으니까. 그 귀한 에스메랄다조차 달래 주지 못하고 물러섰고, 첫 매춘을 하는 이들이 우는 것도 곁에서 묵묵히 보기만 했다. 소피아와 처음 살을 섞었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둥지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손은 곧 소피아의 뺨에 닿았다. 오멘은 어설픈 움직임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 미안합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저, 저를 싫어하시는, 줄, 으흑… 알, 고…….”
“그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간 오멘은 의식적으로 소피아를 멀리했었다.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뻐끔뻐끔,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의미 없이 입술만 놀리기를 한참. 오멘은 앓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는 소피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그건 고해였고, 그간 알면서도 외면하려 했던 그의 진심이었다.
“한 번 더 닿고 나면 나를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당신을 눈에 담을 때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은 무서웠어요. 내 눈에 비친 당신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래서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내 태도가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곁에, 있어 주십시오.”
한층 더 짙어진 울음소리와 함께 소피아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
따듯했다. 오멘은 두 팔로 소피아의 몸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안았다.
“오멘, 부상 소식이 들…….”
뜬금없이 들려온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그 따듯한 시간을 만끽했을 텐데. 화들짝 놀란 오멘은 저가 덮고 있던 모포를 끌어 올려 소피아부터 가렸다. 서둘러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했지만 아르페시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었나?’
싶어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노라니 소피아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그리고 직전의 음성이 환청이 아니라는 듯,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하다.”
그들을 놀라게 한 범인은 이미 천막 밖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이를 악문 오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부상 소식을 듣고 놀라서 최대한 빨리 온다는 게… 정말 미안하다.”
주절주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과 사과를 늘어놓는 저놈이 이 에렘의 황제라니.
“저, 저, 저분은……. 히끅.”
오멘이 애써 화를 삭이는 사이 소피아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황제 폐하이십니다.”
한숨을 푹 몰아쉰 그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 미안하다만, 대화를 할 수 있겠나?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곧 나가겠습니다.”
아르페시스의 요청에 오멘이 침상 밖으로 발을 빼내었다. 그는 소피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쉬고 있어요.”
“하, 하지만…….”
“피곤한 사람을 불러다 억지로 예를 갖추게 만들 분은 아닙니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요. 아니, 제발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무시해 줘요. 오늘 여기에 온 사람은 없던 걸로 치죠.”
“네? 네?”
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일어난 오멘이 옷을 갖춰 입으며 다짐했다. 전속 여인들은 물론 소피아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천막으로 불쑥불쑥 찾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한창 살을 섞는 중에 아르페시스가 들이닥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 * *
침상을 뒤적거리던 오멘이 등 뒤에 있는 여인들을 확인하고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만지작만지작. 사내를 위한 피임약이 든 병을 손에 쥐고 굴리기를 한참. 오멘은 뒤에 있는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약을 삼켰다. 그러고 나서야.
“큼.”
인위적인 헛기침을 했다. 일정을 끝내고 잘 준비를 하던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오멘은 벌게진 귀를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신력 치료로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고, 절단되었던 신체의 감각을 끌어 올리는 사이 사흘이 지났다. 사흘이면 거친 정사에 시달렸던 소피아가 휴식을 취하기에 충분했을 터. 내일 다시 출전해야 하기에 그녀의 품이 그리웠던 오멘은 결국 준비한 말을 꺼냈다.
“한 시간 정도, 천막을 비워 주었으면 합니다.”
직접 입에 담자 생각보다 훨씬 더 낯뜨거웠다. 야트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밝은 대답이 따라왔고, 여인들이 우르르 천막을 빠져나갔다. 남은 건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소피아와 오멘뿐이었다.
“당신이 나가면… 곤란합니다만.”
단둘이 남았음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피아 때문에 한마디를 꺼냈을 뿐인데. 순식간에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싫다면, 당신이 싫다면 혼자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침을 꼴깍 삼킨 소피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멘은 이를 악문 채 한 걸음 물러났다.
“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그녀를 두고 팔짱을 낀 오멘이 숨을 골랐다. 아랫도리는 이미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준비를 끝낸 참이지만. 그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를…….”
“……네?”
“그러니까 내 말은… 한 가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우습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당신이 나를 원하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끌렸고, 기어이 선을 넘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오멘과 소피아의 관계는 금전에 얽매여 있다. 이건 일종의 ‘일거리’였으니까. 그에 따라 오멘은 그녀에게 정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소피아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의무감 때문에 안기는 건지, 아니면 자신처럼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내가 당신을 원하는 건 의무나 권리 같은 게 아닙니다.”
오멘은 자신의 욕망에 감정적인 부분이 엮여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소피아도 그러기를 바라고야 만다. 만약 그녀가 저와 달리 이 행위를 일처럼 여긴다면 타격이 크리라.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하고 싶지 않…….”
“……해요.”
그의 가슴팍으로 뛰어든 소피아의 대답에 심장이 쿵쿵쿵,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겨, 경을… 원해요. 예전부터 줄곧 로리아 언니가 아니라 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뜨거운 숨을 몰아쉰 오멘이 고개를 숙였다. 격정적인 감정에 물든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소피아의 입술을 빨아들이자 그녀가 목에 팔을 둘러 왔다.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꼭, 그녀와 연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황홀했다.
주머니에 있던 피임약을 꺼낸 오멘이 그것을 소피아에게 쥐여 주었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상에 앉는 사이 소피아가 약을 챙겨 마셨다. 그 직후 다시 입을 맞추자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탄 소피아가 먼저 입술을 열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자 달큼한 타액을 맞볼 수 있었다.
“움, 우웅…….”
작은 머리를 손 안에 가두고 잡아당기자, 입술 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우물거리며 입술을 놀린 오멘은 한참이나 그녀의 혀와 타액을 빨아 댔다.
이윽고 천천히 허리를 타고 올라간 손이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피아는 움찔거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손길을 허락해 주었다. 하나둘, 단추를 풀어낸 오멘이 그녀의 젖가슴을 밖으로 꺼내 앙증맞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으응……!”
그러는 중에도 그들의 혀는 서로의 입 속을 넘나들며 타액을 교환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뭉그러지는 가슴은 아름다웠다. 어느덧 소피아의 옷가지를 모두 벗겨 낸 오멘이 음부의 속옷 근처를 더듬었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소피아가 다리를 벌리며 그를 재촉했다. 소피아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오멘이 눈을 감았다.
“하아.”
손가락 끝에서 부드럽고 미끈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소피아의 음부는 이미 젖어 있었다.
“으흣!”
미끈거리는 돌기를 매만지다 안으로 손가락을 쏘옥, 집어넣자 소피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바지춤을 힘껏 밀어 올리고 있던 오멘의 성기가 꺼덕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넣으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멘은 삽입을 서두르는 대신 소피아의 성감대를 찾는 데 집중했다. 몇 번이나 정사를 나누었지만 그녀의 몸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처음으로 살을 섞을 때는 의무적으로 허리를 흔든 것에 가까웠고, 두 번째는 거의 이성을 놓은 채 짐승처럼 달려들기만 했으니까.
다행히도 시간과 공을 들이자 소피아의 성감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닿을까 말까 싶을 만큼 깊은 곳, 자궁경부와 가까운 내벽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작은 돌기가 있었다. 오멘은 혹시나 싶어 그것을 살짝 긁어 보았다.
“흐앗! 하앙!”
갑작스럽게 몸을 떤 소피아의 내벽이 요동쳤다. 오멘은 제 품에 안겨 바르르, 경련 중인 소피아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것 같은데.’
그녀는 정사를 나눌 때 타인보다 훨씬 예민하고 격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몸을 가졌다. 상대방에게도 더한 것을 줄 수 있는 것 같고. 새삼 그것을 확인하자 몸이 들끓었다.
‘야해.’
제 위에 올라앉아 쾌락에 취해 파들거리는 소피아는 정말이지, 너무 야했다. 성마른 숨을 내뱉은 오멘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파묻고서 속삭였다.
“나도 벗겨 줘요.”
쪽, 쪽쪽, 뺨과 귀에 가벼운 입맞춤을 건네는 동안 소피아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항, 하앙… 핫…….”
물론, 그동안 오멘이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소피아의 예민한 부분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그 때문인지 소피아는 헛손질을 반복했고, 오멘의 옷을 반도 벗기지 못했다.
전희만으로 또 한 번의 절정에 이른 소피아가 오멘의 손가락을 빨아 댔다. 이미 그녀의 속옷은 줄줄 흘러내린 애액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오멘의 손도 마른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축축했고.
질 속에서 손가락을 빼낸 오멘은 축 늘어지는 소피아를 안아 든 채 속옷을 벗겨 냈다. 그리고 그녀가 벗기지 못한 옷을 직접 벗었다. 이후 소피아를 마주 안은 채 질구에 제 성기를 가져다 댄 그가 속삭였다.
“난… 여성 상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 체위가 대체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으니까.
“……네에?”
“이대로 넣고 싶은데… 됩니까?”
소피아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내렸다.
“윽…….”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빠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이전, 보다 더… 심한데.’
애액이 많기 때문일까? 그저 삽입을 한 것만으로도 파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채 사정감을 참던 오멘은 결국 소피아를 안아 든 채 몸을 돌렸다.
“……테노리엘 경?”
그녀를 먼저 눕히고 체위를 남성 상위로 바꾸자 어리둥절한 부름이 들려왔다. 오멘은 멋쩍은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위에 있으면 제때 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아…….”
“지금도 당장…….”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민망했다. 오멘은 소피아의 시선을 피한 채 자세를 잡았다.
“움직일게요.”
“네에……!”
작게 속삭인 직후 허리를 딱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아……!”
오멘은 다급히 저를 빼내야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소피아의 허벅지 안쪽에 파정을 한 후였다. 사내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허망한 심정으로 제 정액을 바라보던 오멘이 소피아의 애액을 한 움큼 덜어 와 제 성기에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손으로 압박을 주자 풀이 죽어 가던 선단이 다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몸을 숙여 소피아에게 입을 맞춘 오멘은 주저 없이 저를 밀어 넣었다.
“하아!”
“하으응!”
짙은 탄성과 달큼한 교성이 맞물렸다. 그대로 허리를 치대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때부터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오멘은 누군가 저를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허리를 쳐올리기만 했다.
“아으, 하, 으윽…….”
억눌린 신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흥, 앙, 아앙! 앙!”
귓가에서 울리는 소피아의 교성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분명 직전에 한 번 쏟아 냈는데, 밀려드는 압박은 그의 사정을 조르고 있었다. 소피아의 머리 옆에 팔꿈치를 댄 오멘이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이를 악물었다. 아직 삽입 후 소피아가 절정에 오르지 못했다.
오멘은 억지로 사정감을 참아내며 허리를 치댔다. 다 벗지 못한 바지가 둔부에 걸린 채 조금씩 흘러내렸다. 전희를 할 때 찾아냈던 부분을 찌르자 귀두 부분에 말랑거리는 돌기가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감촉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해서, 누군가 안에서 귀두를 기분 좋게 긁어 주는 기분이었다.
오멘은 더 열정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에 소피아가 울먹이며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얇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그의 어깨와 등을 할퀴는 움직임은 자극적이었다.
“여기, 여기가 좋, 으… 좋습니까?”
어느덧 오멘의 목에는 핏대가 올랐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를 꼭 껴안은 소피아의 손톱이 날개뼈 근처를 긁자 끄륵, 하고 속에서 무언가 끓어 올랐다. 동시에 소피아의 내벽이 무섭게 꿈틀거렸고,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또다. 내부에서 그를 쭙쭙 빨아 대는 것만 같은 섬뜩한 감각. 오멘은 저를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파정해 버렸다.
“흐하, 아…….”
입을 벌린 채 쾌락에 휩쓸리는 감각은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했다. 사정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를 오물거리는 내벽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멘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흐트러진 숨을 몰아쉴 때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여체가 느껴졌다.
오멘은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허리를 돌렸다. 애액과 정액이 뒤섞인 내부는 황홀했다. 질척거리는 그 감촉이 속살거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멈출 거냐고.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나는 성기가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하앙!”
절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허리를 쳐올리자, 소피아가 굵은 눈물을 떨구며 파득거렸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둔부를 움켜쥔 오멘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추삽질에 열중했다.
격렬한 정사는 그 여운마저 강렬했다. 소피아의 품으로 무너져 내린 오멘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후희를 즐겼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정사의 흔적을 지우려면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잠시간 미적거리던 오멘은 곧 미련을 떨치고 몸을 일으켰다.
“저어…….”
물수건을 가져와 소피아의 다리 사이를 닦아 준 그가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모포를 꼭 움켜쥔 소피아가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어두웠다. 그에 오멘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왜요?”
오멘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너무 심했나?’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녀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과한 요구에 그녀가 질렸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피임약을 먹었다지만 두 번이나 그녀의 안에 파정을 하지 않았나. 뒤처리가 쉬운 사내들과 달리 여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일 테지.
하나둘, 자신의 실수와 잘못들이 부각되자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오멘은 들고 있던 물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혹시 제가 어딘가…….”
“네?”
소피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무릎에 괴고 있던 팔꿈치가 삐끗, 어긋났다.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방금 전까지 그녀를 붙들고 미친놈처럼 치대던 그를 다 봤을 텐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당황한 오멘의 말문이 막혔다. 다행히도 그는 오래지 않아 당혹감을 추스르고서 말했다.
“왜… 대체 왜 그런 생각을…….”
“괴, 괴로워 보이셔서…….”
울먹이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자 또. 바지춤이 위로 솟아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로리아 언니랑 하실 때는 그, 그렇게 소리를 많이 내지 않으셨는데… 인상도, 오늘은 인상도 쓰시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소피아를 보고 있노라니,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녀가 우는 걸 보느니 저가 창피한 게 나으리라.
오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니다.”
“네……?”
“당신과 하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런 거라고 했습니다.”
살짝 벌어진 손가락 너머에서 펑, 하고 순식간에 달아오른 소피아가 보였다. 오멘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소피아의 손을 붙잡고 깍지를 끼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그 순간이 영원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만의 아슬아슬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곧 천막으로 다가오는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소피아에게 옷을 입혀 주기 무섭게 로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돌아왔다. 오멘은 제 침상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옆에 있어 줘요.”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지만, 소피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멘은 소피아를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
* * *
어느덧 봄이 끝나 가고 있었다.
크나큰 결심을 하고서 침실로 들어온 아레스가 품에 껴안고 온 상자를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뭐예요?”
레아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루이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구체적으로 페드로와의 정사를 상상한 이후, 루이자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레스의 이성은 그녀의 기분이 풀어지면 말을 꺼내라며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사내의 욕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레스의 시선이 침실 한편에 떡하니 걸려 있는 페드로의 초상화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저것도 허락해 주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짧은 갈등 끝에 그는 기어이 말하는 것을 택했다.
“부인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여전히 심통 난 표정으로 그를 보던 루이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설렁줄을 당기자 곧 시녀가 도착했다.
“레아나를 데려가거라.”
아레스는 루이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레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시녀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루이자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부탁이 뭔데요?”
꿀꺽, 침을 삼킨 아레스는 다시 상자를 집어 들고서 침대에 앉았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뭘요?”
“성벽이… 변한 것 같아서.”
루이자 눈빛이 짜게 식었다. 저도 익히 알고 있다는 눈이었다. 아레스는 그녀의 시선에 왠지 모르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말했듯이… 난 페드로가 그리워요. 그 녀석의 방도 그대로 남겨 두었고, 생각도 많이 하고…….”
주절주절, 그가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 동안 루이자는 경청해 주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과 같이 있다고 생각할 때면 기뻐요.”
챙겨 온 상자를 열어 보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게… 뭐예요?”
안에 들어 있던 나무 조각을 꺼낸 루이자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사내의 음경을 본떠 만든 것인데…….”
툭, 하고 루이자의 손에서 떨어진 나무 조각은 남성의 성기와 모양이 똑같았다. 정확하게는 페드로의 것을 본떠 만든 조각이었다. 그의 밤 시중을 들었던 시녀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으니 비슷할 것이다. 아레스는 완전히 굳어 있는 루이자를 보고서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부인이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난 평생 그 녀석을 잊지 못할 겁니다. 쌍둥이와 리디도 소중하지만, 페드로는 나와 가장 각별한 형제였어요. 내 인생에서 부모님보다, 당신보다 오래도록 함께한 게 그 녀석입니다.”
“…….”
“그래서, 그래서 그 녀석과 같이 부인을 품는다고 생각하면…….”
꿀꺽, 침을 삼킨 아레스의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딱 한 번, 페드로와 같은 침대에서 루이자를 탐했던 날의 기억은 자극적이었다. 그날 이후 루이자가 부부 관계를 거절했기에 더는 해 볼 수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또. 페드로가 함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정사를 가지고 싶었다. 그가 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졌다.
그게 아레스의 진심이었다. 진심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그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루이자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뭘……?”
“이것저것… 페드로가 필요할 때 쓰면…….”
“필요하다는 건… 이걸 내 입에 물리겠다는 건가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루이자의 눈치를 살핀 아레스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사내 둘이서 여인 한 명과 할 때 여인의 항문을 쓰기도 한…….”
이불 위에 떨어져 있던 음경 조각을 집어 든 루이자가 그것을 집어 던졌다.
“나가요!”
“자, 잠깐, 부인. 진정하고 내 얘기를 마저…….”
“나가라고!”
음경 조각은 물론 그것을 담아 왔던 상자까지 집어 던진 루이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날 아레스는 혼인 후 처음으로 루이자의 침실에서 쫓겨났다.
* * *
나름 심각했던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결국 스토커를 처리했다. 자신을 위해서 은지가 계속 불안해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 당장 공략이 시작되면 1, 2주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그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도 한순간이나마 고민을 했다는 게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런 이유로, 정성껏 스토커를 떼어 낸 현우는 얼마 가지 않아 미국에서 열린 11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다. 그리고 어제가 되어서야 겨우 한국에 돌아온 참이고.
해가 뜨자마자 길드 건물에 출근 도장을 찍은 그는 더 이상 엘리베이터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의 잠복 장소는 엘리베이터에서 1층에 있는 카페로 변했으니까.
이제까지 왜 병신같이 훈련장에서 시간을 축냈나 모르겠다. 여기 있으면 출퇴근하는 은지를 하루에 두 번, 무조건 볼 수 있는데. 운이 좋으면 점심시간까지 해서 서너 번도 볼 수 있다. 하루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던 엘리베이터를 포기하자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오늘도 이미 출근하는 은지를 보지 않았나. 과거의 자신을 병신으로 매도한 현우가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의자 좀 바꾸라니까.’
190cm가 넘는 체격으로 이 작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분명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바꿔 놓으라고 했는데 여전히 기존의 가구다.
‘내가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이 정도 요청도 못 들어줘?’
말 그대로 그가 번영 길드에 벌어다 주는 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국내에선 13등급 이상의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게 그 혼자고, 전 세계를 뒤져도 열댓 명뿐이니까. 그런데 근 보름 전에 요청한 사항이 아직도 반영이 안 되어 있다니. 점심시간이 끝나면 올라가서 드잡이라도 해야겠다.
어떻게 깽판을 쳐야 효과가 빠를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직원들이 우르르 1층으로 내려왔다. 점심시간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그를 힐끔거리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럴까 봐 부러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나왔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이들 틈에서 은지를 찾기 위해 눈을 바삐 굴리던 현우가 별안간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문득 자신의 행태에 회의감이 든 탓이다.
‘내가 그 스토커 놈이랑 다를 게 뭐지?’
이게 스토킹이 아니면 대체 뭘까?
치솟는 자괴감에 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그렇다고 관둘 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저… 차현우 헌터님?”
자괴감에 한숨만 몰아쉬고 있던 찰나, 은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현우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탓에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 주다니.
‘이 정도면 안면은 텄다고 봐야겠지?’
그럼 언제쯤 데이트 신청을 하면 좋을까?
현우는 들썩거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답했다.
“……강은지 씨, 안녕하세요.”
좋아 미칠 것 같은데 자제하려니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안녕하세요, 진짜 여기 계시네요?”
“네?”
“직원들이 다 강현우 헌터를 여기서 봤다고 해서요.”
“그냥, 시간 때우려고.”
말을 내뱉고 나니 아차 싶었다.
‘할 일 없는 놈처럼 보이는 거 아냐?’
잠시 움찔거렸지만, 곧 그의 공략 사실을 은지가 모를 리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럴 땐 유명한 게 좋을지도.’
힘든 일을 끝낸 후 쉬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 그럼 잠시 괜찮으세요? 할 말이 있는데…….”
“……말해요.”
은지가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혹시 그녀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남자 친구도 없으니까 어쩌면.
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실망했다. 그럼 그렇지. 매번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것이 지칠 법도 한데, 배움이 부족한가? 어째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는지.
한숨을 삼키기 무섭게 머리가 바삐 굴러가기 시작했다. 고마우면 밥을 사라부터 시작해서 데이트를 해 주면 안 되냐, 한 번만 안아 보게 해 달라는 것까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후보군이 주르륵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조로웠다.
“네.”
“음… 그리고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요.”
감사 인사를 주고받는 게 끝났는데도 은지가 떠나지 않는 게 좋았다. 중증이라면 중증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순간.
“그 사람이요.”
“누구?”
“제 스토커……?”
“아.”
“그날 이후로 안 보여서요. 혹시… 혹시 헌터님께서 뭘 하신 건가 싶어서 여쭤봐요.”
“그냥, 가벼운 경고 정도.”
얼음이 다 녹아서 묽어진 커피를 쭉, 빨아 마신 현우가 뺨을 긁적거렸다.
“아,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모습이 예뻤다. 현우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남은 커피를 모조리 빨아 마셨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기, 음, 혹시 문제가 되지는 않겠죠? 헌터법에 민간인 대응에 관한…….”
“문제 될 거 없어요. 가서 그냥, 아는 사이라고 했더니 도망치던데요.”
사실은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전격으로 여러 번 지져 주면서 그놈의 위아래로 삼대를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길드에서 붙여 준 해결사가 놈을 24시간 밀착 감시 중이니까. 혹시나 그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무마할 힘은 충분했다.
“하긴, 그놈도 헌터님 앞에선 못 뻐기겠죠. 아우,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좀 억울한데요?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헌터님 보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간 거잖아요. 얍삽하게.”
삐죽, 입술을 내미는 게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웃게 된다. 그러자 은지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어, 웃었다…….”
“……네?”
“아뇨, 웃는 거 처음 봤어요.”
현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매만졌다.
‘혹시 웃는 얼굴이 이상한가?’
다시 태어난 이후 자신의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다지 웃을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생긴 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껏 한 번도 신경 써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은지를 만나며 하나둘, 변해 간다.
“은지 씨!”
그때 누군가 큰 목소리로 은지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자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봤던 신입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팬이라면서 싱글벙글 웃던 놈.
“밥 먹으러 가요!”
현우의 눈동자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놈이 저에게서 은지를 데려가려고 한다. 신입 사원 모모 씨가 현우의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슬 퍼런 현우와 시선이 마주친 모모 씨가 주춤거리며 손을 내렸다.
“금방 갈게요!”
그런데도 은지는 가겠단다. 뒤를 돌아보며 답한 은지가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주자 현우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밥은 먹어야 할 터. 순순히 보내 주려고 했는데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같이 먹자고 해 볼까?’
짧은 고민이 시작되기 무섭게 은지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정말 감사했어요. 그럼 전…….”
“고마우면.”
“네?”
은지가 갈 것 같자 다급하게 말을 끊어 낸 현우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고맙다면서요.”
“아, 네, 그렇죠. 감사합니다……!”
“그럼…….”
밥? 데이트? 밥? 데이트?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두 단어가 오갔다. 그리고 끝내 현우가 택한 건 더 간절한 단어였다.
“그럼, 나랑 데이트해 주면 안 됩니까?”
“아, 물론이… 네?”
당연히 들어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우뚝 굳어 버리고.
“엑? 네? 저요?”
당황한 듯 흐트러진 표정이 기괴하고 꼬였다. 그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깨닫는다.
‘난 매번 너에게 반하는구나.’
설령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해도, 페드로와 현우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반해 버리고 말았으리라.
“안 됩니까?”
“어…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이번 주말에.”
“아.”
“데리러 갈게요.”
슬그머니 핸드폰을 내민 현우는 은지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 * *
디저트로 주문한 케이크를 먹고 있던 은지가 말했다.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뭐가요?”
“왜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셨어요?”
“……호감이 있으니까요.”
“저희 대화도 몇 번 못 해 봤는데……. 혹시 절 예전부터 절 알고 계셨어요?”
“……네.”
그녀의 전생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쭉.
“어… 죄송해요. 전 기억이… 언제 만났… 어? 차현우 헌터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데?”
“헌터 말고.”
은지가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어도 설명해 줄 길이 없었다. 그래서 현우는 대화를 틀어 버렸다.
“네?”
“그냥 이름이요. 일하러 온 것도 아니고, 데이트… 하는 건 줄 알았는데요.”
은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대화를 틀어 버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신경 쓰였다. 오늘 함께하는 내내 은지는 저를 헌터님, 헌터님, 하고 불렀으니까. 함께 영화를 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말 그대로 데이트 중인데 헌터 소리가 웬 말인가.
“네에, 현우 씨…….”
“좋네요.”
“저, 말씀 편하게 하셔도……. 제가 어린데요. 세 살이나.”
“그럼 뭐… 편하게 할게. 너도 말 놔.”
“저, 전 이게 편해서.”
“그러든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은지의 손은 다시 케이크 접시로 향했다. 오물오물, 밥을 다 먹고도 열심히 케이크를 떠 먹는 게 예뻐 보였다. 은지 쪽으로 접시를 슥, 밀어 준 현우의 입매가 살짝 휘었다. 바삐 움직이던 은지의 손이 흠칫, 멈추었다. 현우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얼굴을 매만졌다.
“왜…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세요? 화장 망가졌어요?”
“예뻐서.”
“엑?”
“예뻐서 봤다고.”
얼굴 전체가 발갛게 변하는 그 모습을 보니 기뻤다.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더 먹을래?”
“네?”
“디저트.”
눈동자가 위로 한 번, 그리고 아래로 한 번. 테이블 밑에 있는 손이 몸 쪽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오늘은 괜찮아요.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럼 내일은?”
“네?”
“내일은 더 먹고 싶을 것 같냐고.”
“어…….”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면 좋겠다. 내일 디저트를 바리바리 싸 들고 배달 가서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초조한 심정을 숨기며 기다리자 은지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재빨리 테이블 밑에서 핸드폰을 켰다.
‘맛있는 디저트 집.’
검색의 힘을 빌릴 때였다.
* * *
쪽, 쪽쪽, 쯉.
거친 숨소리 옆으로 쪽쪽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끼어들었다.
“흐응, 읏, 흐앗!”
“아흐.”
그 주변에는 자극적인 신음까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숲속에서 들으리라 생각해 보지 못한 민망한 소음이 오멘과 소피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소피아를 번쩍 안아 든 채 꼿꼿하게 서서 허리를 흔들던 오멘이 중얼거렸다.
“입, 입 맞춰 줘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신음하던 소피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오멘은 대번에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달아.’
정사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소피아는 점점 더 달아지고 있었다. 끊을 수 없는 마약 같기도 하고, 욕망을 부채질하는 미약 같기도 하고.
“하, 윽, 후윽… 아…….”
소피아의 혀를 물고 빨며 허리를 흔들고 있노라니 또. 사정감이 엄습했다. 오멘은 소피아의 오금에 걸고 있던 팔과 그녀의 안을 헤집던 성기를 동시에 빼냈다. 다른 한 손으로 말랑거리는 소피아의 엉덩이를 받쳐 든 그가 제 성기를 덥석, 움켜쥐었다. 투둑, 툭. 소피아가 등지고 있던 나무에 정액이 튀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파정한 오멘이 이를 악문 채 선단을 문질렀다.
‘또…….’
이전보다는 오래 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소피아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그가 먼저 파정을 하는 날이 많았다. 한 번 할 때 기본적으로 서너 번의 파정을 하는 그와 달리, 소피아는 잘해 봐야 한 번. 전투를 하고 돌아온 직후에는 그녀가 절정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혼자만 만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를 제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힘이 빠지려다 말고 다시 딱딱해지는 성기를 문지른 오멘이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있던 소피아를 내려 주었다.
“미안해요. 금방 다시 해 줄게요.”
“저는 괜찮은데……. 매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그녀의 거절에 멈칫거리기도 잠시. 오멘은 아래로 흘러내린 치마 속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내가 안 괜찮아요.”
“네?”
“내가 좋은 만큼 당신도 좋았으면 해서……. 나 혼자 기분 좋은 건 싫어요.”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소피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오멘이 숨을 골랐다.
“당신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러면 날 더 원할지도 모르니까.”
“저, 저는 이미…….”
“난 당신을 안을 때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아예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좋은데…… 이러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초조해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멘은 소피아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게 무서웠다. 중앙 사교계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파트너를 내치고 상대를 바꾸는 일은 빈번했다.
‘이러다간 내가 내쳐지는 쪽이 될지도…….’
몸은 정직한 법이다. 오멘이 끝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소피아에게 무너진 것처럼. 만약 그보다 더 나은 사내가 나타나 그녀를 만족시켜 주면? 그때도 소피아가 자신을 원해 줄까?
오멘에게는 그녀가 저에게 안기는 것과, 저를 원해 주는 것의 무게가 달랐다. 막말로, 그가 권력을 앞세우면 언제든 소피아를 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도 그녀가 저를 원하는 마음만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오멘이 명백하게 그녀를 끼고돌게 된 지금 그녀와 정사를 가질 만큼 간 큰 놈이 없겠지만, 앞일을 멋대로 단정 지어선 안 되는 법.
오멘은 소피아의 목덜미를 살살 깨물며 속삭였다.
“이번에는 뒤로 할래요? 그 자세에서 잘 느끼는 것 같던데.”
은근한 목소리로 물으며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길이 음탕했다. 그에 얼굴을 붉힌 소피아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오멘은 그녀가 나무에 기대어 서자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엉덩이가 갈라진 틈이 아찔했다. 음부와 엉덩이골 사이에 성기를 문지르던 오멘이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그녀를 가르고 들어갔다. 치골에 맞닿는 엉덩이가 뭉근하게 일그러졌다.
“으응…….”
“하아…….”
어째서 하면 할수록 더 황홀해지는지.
이를 악물며 소피아의 어깨를 잡은 오멘이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한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하앙! 항!
정상위보다 후배위에서 그녀의 성감대를 찌르는 게 쉬웠다. 귀두 위가 아니라 아래쪽을 문지르는 감촉이 더 좋기도 했고. 본디 후배위를 즐겨 하지 않던 오멘이건만. 지금은 거의 매번 후배위를 한 번씩 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 흐…….”
나무에 손을 짚은 채 젖가슴을 출렁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등골이 저릿했다. 자제를 해 보려 했는데, 어느 순간 또 허리 짓이 빨라지고 있었다.
오멘은 황급히 상체를 숙여 소피아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으로 다른 성감대를 자극했다. 다리 사이의 은밀한 돌기도, 출렁거리고 있는 가슴의 유두도, 잔머리에 가려진 여린 목덜미까지. 세 곳을 동시에 노리고 허리를 쳐올리자 소피아의 교성이 한층 더 짙어졌다.
꾸욱꾸욱.
검지에 힘을 주고 음부의 돌기를 누를 때마다 소피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래로 미끄러지는 그녀의 몸을 제 몸으로 밀어 올리니 어떻게든, 추삽질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아, 미칠, 것 같으니까… 너무 조이지 말아요……!”
소피아의 귀에 입술을 파묻은 오멘은 숨을 헐떡이며 부탁했다.
“제, 제가 하는, 흐앙! 아, 니, 아앙!”
“좋아요? 하, 여기? 더?”
“더!”
“하아!”
움직일 때마다 거슬리는 상의를 입에 물고, 소피아의 골반을 두 손을 붙잡은 채 정신없이 허리를 놀리는 것만이 전부가 되었다. 그의 세상에 소피아만 존재하는 것만 같은 느낌. 오멘은 어느 순간 소피아가 절정에 달하며 몸부림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계속 허리를 흔들었다.
팡팡팡, 퍽퍽퍽.
그의 치골에 짓눌리는 엉덩이의 감촉, 고환에 닿는 음모의 까슬거림. 이건 몇 번을 느껴 보아도 절대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아, 싫! 으앙! 이상, 그, 아아앙!”
그때 소피아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엉덩이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부를 듣지 못한 오멘은 보다 빠르게 소피아의 성감대를 찌르며 저를 문질렀다.
“흐아, 헉! 아아……!”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를 피해 앞으로 물러나려던 소피아의 몸이 뚝, 굳어 버리더니 아래로 미끄러졌다. 오멘은 당연하다는 듯 파정해 버렸다. 마치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리자 눈앞을 채웠던 새하얀 빛무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어느새 무릎을 꿇고 소피아를 꽉 껴안은 오멘은 허리를 돌리다 말고 흠칫, 굳었다. 뚝뚝, 그의 하복부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느껴진 탓이다.
‘뭐…….’
간헐적인 숨을 겨우 내뱉으며 축 늘어진 소피아의 음부에서, 맑고 투명한 액체가 아직도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오멘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설마 이게 그…….’
여인들도 때때로 사내들처럼 무언가를 쏟아 낸다는 음담패설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오멘은 제 하체를 가득 적신 액체를 문질러 보았다. 애액과 달리 점성이 옅고, 새콤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났다.
“아, 진짜.”
이렇게 야하면 어떡하라고. 민망하면서도 흐뭇하고, 묘하게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오멘이 얼굴을 붉힌 채 축 늘어진 소피아를 있는 힘껏 껴안았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경종 소리가 울렸다. 그 즉시 몸을 일으킨 오멘이 제 옷을 추스르고 소피아를 덜렁 안아 들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챙겨 온 망토를 그녀에게 둘러 주는 손길이 다급했다.
“꽉 잡아요.”
바닥에 풀어 두었던 검을 허리에 찬 그가 짧게 속삭였다.
“네……?”
소피아가 흐릿하게 반문했을 때 오멘은 이미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병영 인근의 숲으로 나온 참이었다.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10여 미터에 이르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꺄아!”
아찔한 추락감에 소피아가 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허공에 체류한 그 짧은 시간에 상공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을 발견한 오멘이 땅에 착지하기 무섭게 방향을 틀었다. 평범한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리던 그는 곧 두꺼운 나무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지의 탄력을 이용해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가장 낮게 날고 있던 소형 마수의 다리를 낚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형 마수 중에서도 사냥이 번거로운 상공형 마수, 매를 기원으로 진화한 벨페였다. 총 열네 마리. 놈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매의 특징을 완전히 무시하고 병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가던 중이었다.
방해꾼을 감지한 벨페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격렬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한 팔로 제 몸과 소피아의 체중을 끌어 올린 오멘이 벨페의 등으로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검을 빼어 들고 마나를 두른 오멘이 벨페의 목덜미에 그것을 찔러 넣었다.
“끼아아악!”
소름 끼치는 괴성 소리가 신호탄이 되었다. 보다 높은 곳에서 활공 중이던 벨페들이 일제히 오멘 쪽으로 달려들었다. 소피아를 한 팔에 안고서 이리저리, 다른 벨페의 위로 건너다니며 진행된 전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마지막 마수의 목이 떨어져 나가며 사체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오멘은 죽은 마수의 몸에 타고 있다가 바닥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훌쩍 뛰어내렸다. 부드럽게 구르며 땅에 착지한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내달렸다. 직전의 경종, 병영 인근에 마수 무리가 출몰했다는 신호였다. 실제로 기동성이 가장 빠른 벨페를 발견한 상황에서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병영으로 가면 내 천막에서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완전히 굳어서 그를 껴안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던 소피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래지 않아 병영에 도착한 오멘은 곧장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이미 비상시의 지침에 따라 민간인으로 구분되는 이들이 모두 그의 천막에 모여 있었다. 소피아를 품에서 내려놓기 무섭게 종자들이 그의 무장을 도와주었다. 때마침 완전 무장 상태의 브롬이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상황은?”
“아콘 경이 1차적으로 출전, 현재 동쪽에서 300여 기의 마수들과 교전 중입니다. 직전에 사그만 경의 대원들이 모여 있는 서쪽에서 지하로 이동해 병영으로 침투한 50여 기와의 교전도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동남쪽에서 벨페 14기를 토벌하고 오는 길이다. 선발대인 듯하니 상급 기사들에게 활을 무장하고 허공을 주시하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브롬이 다시 뛰쳐나가는 사이 빠르게 무장을 마친 오멘이 단창을 한 움큼 집어 들며 말했다.
“호위병들은 민간인의 보호를 우선해라. 사상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충!”
비상시 그의 천막을 보호하게 된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답했다. 그 직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저의 커다란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던 소피아에게 다가간 오멘이 짧고 깊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날 오멘의 병영에서 토벌된 마수는 도합 1,400여 기에 달했다.
* * *
오멘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소피아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치댔다.
‘버릇이라도 들었나.’
이제 그녀가 없는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언제나처럼 황홀했던 정사를 마친 몸은 나른하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수마에 순응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잡한 상념 때문에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오멘은 먼저 기절하듯 잠든 소피아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습격으로 넘기기엔 규모가 컸어.’
또한 체계적이었고. 지하로 이동할 수 있는 마수와 상공형 마수가 모두 동원되지 않았나. 간을 보기 위해 한번 찔러 본 수준이 아니었다.
‘라카난과 비르파트 쪽은 조용했고.’
아무리 전선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병영이 습격당하는 일은 드문 편이었다. 전방에서 전투를 진행 중인 부대가 있으니까.
각 부대는 순번을 주고받듯 전투와 주둔 시 휴식을 반복한다.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오멘의 부대 동쪽과 서쪽에는 라카난 부대와 비르바트 부대의 주둔지가, 남쪽에는 현재 시점에서 전투를 담당하는 부대가 있다.
병영을 노리려면 그들을 넘어야 하는데, 현재 전투를 책임지고 있는 비르바트 쪽에서는 1천 기가 넘는 마수가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해 왔다. 마수들이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소수로 뿔뿔이 흩어진 채 전열을 넘어온 것 같았다. 인근 세 개 부대에서 습격을 받은 건 오멘의 주둔지뿐이었고.
상황이 이러하니 일전, 그의 부상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아르페시스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간 조용하기에 긴가민가했지만… 이번 전황을 보고 받으니 확실해지더군.’
‘이제까지는 널 특정하지 못했을 뿐이야.’
‘하지만 기어코 찾아냈지.’
마수, 마룡, 창조주, 에스메랄다가 갑자기 변해 버렸던 과거, 페드로가 홀로 안고 있었던 이야기. 아르페시스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 건 아니나,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소피아의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놈들은 널 집요하게 노릴 거다.’
‘네가 죽으면 에디가 흔들릴 테니까.’
마수들은 에스메랄다의 혈육인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쉽게 당해 주지는 않을 거다.’
어둠 속을 배회하는 청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따듯한 여체를 품 안 깊숙한 곳으로 잡아끄는 손길이 조금은, 절박했다.
* * *
습격이 있은 후 오멘은 비주기적으로 주둔지를 옮겨 다녔다. 대량 생산에 성공한 전보 마도구가 남부군에 정식으로 배급된 건 지난여름.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른 부대와의 소통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째 습격 없이 단조로운 전투와 휴식이 반복되던 어느 날. 자율 훈련을 마치고 천막으로 돌아온 오멘의 표정이 따스하게 녹았다.
“소피아.”
그의 천막에 있던 소피아가 흠칫,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째서인지,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반응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잠시. 오멘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역시나.
“왜 이걸…….”
소피아는 여성용 피임약이 든 병을 들고 있었다. 마시려던 참이었는지 뚜껑까지 열려 있었고.
“오늘은 할 생각 없어요.”
오멘은 그녀가 들고 있던 약병을 넘겨받고서 뚜껑을 닫았다. 지난밤 집요하게 그녀를 찔러 또 한 번의 흥건한 물을 보게 된 참이었다. 그의 복부와 허벅지가 흥건하게 젖어 버린 광경은 흐뭇했지만, 그 때문에 침상을 아예 새것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종자들 보기에 민망한 것도 있었고, 그렇게 느끼고 나면 소피아가 비척거리며 힘들어하기에 나름 자제를 하는 중이었다. 해서 오늘은 정말 할 생각이 없었다.
“부작용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지금은 먹지 않는 게 좋겠어요.”
마법으로 만들어진 약품이라 부작용이 거의 없지만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짓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남용해서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멘은 제 개인 수납장에서 피임약이 든 보관함을 꺼냈다. 약병을 도로 넣어 놓을 생각이었다. 소피아와 살을 섞는 일이 잦아진 후 개인적인 피임약까지 구비해 두었지만, 전지에 있는 이상 물자 보급이 되기 전까지는 아끼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보관함을 열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섯.’
지난밤 하나를 꺼내 쓰고 남은 숫자와 똑같았다. 오멘의 눈꺼풀이 평소보다 빠르게 깜빡거렸다.
‘여섯?’
전속 여성이 병영 내에 머무르는 이상 임신을 막기 위한 준비는 반드시 필요했다. 병사들까지 상대하기엔 여인들이 너무 힘들기에, 전속 여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건 기사들뿐이다. 애초에 그녀들은 기사들의 천막을 공유하기에 병사들이 난입해 강간을 하는 건 힘든 일이고.
해서 모든 기사들에게는 피임약이 제공된다. 오로지 기사들에게만. 전속 여인들에게는 피임약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사들이 피임약을 지참하고 와야지만 여인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약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면 그녀들은 기사들이 요구하는 관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전에 새로 개봉한 열 개짜리 피임약 보관함에 들어 있는 병이 여섯이라고. 손에 든 병과 보관함 내부의 병을 번갈아 보던 오멘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거…….”
그의 옆에 굳은 듯 서 있던 소피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디서, 났습니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정말 끔찍했다. 소피아가 저 외에 다른 사내와 하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누가 주었냐고요.”
다른 사내의 앞에서 제게 하듯이 음탕하게 아래를 적시고 울부짖는 그녀를 생각하자 뱃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저에게 그러했든 다른 놈의 것도 그렇게 황홀하게 물어 주었을까? 그렇다면 누군지도 모를 그놈도 저처럼 정신을 놓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겠지. 욱, 하고 치솟은 화를 겨우 억누른 오멘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소피아를 만나기 전에 그는 다수의 여성들과 관계를 가져 왔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보는 앞에서 로리아와 살을 섞은 적도 있었다. 한데 정작 소피아가 저 말고 다른 사내와 살을 섞는다는 이유로 화가 나다니.
병을 내려놓고 손을 꽉 말아 쥔 오멘이 숨을 골랐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내가… 내가 당신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
“아니에요! 그, 그런 게 아니라…….”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소피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멘은 그녀에게서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희게 질린 소피아가 다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아 왔다.
“구, 군의관께서, 주, 주셨어요.”
오멘은 땀에 젖은 제 옷깃을 한 번, 그것을 잡고 있는 소피아의 손을 한 번 훑은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다리 사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놈이 그곳을 넘봤는지, 아닌지,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소피아의 기분은?
‘난 그녀의 연인이 아니야.’
분명 서로에게 감정을 품고 있고,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연인도, 배필도 아니다. 오멘은 이 문제에서 소피아를 다그칠 자격이 없었다. 억지로 참아 보지만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모두 삼킬 수는 없었다.
“병영 내에서 피임약은 사내들에게만 지급됩니다. 군의관이 왜 이걸 당신에게 주었죠?”
혹시 그 군의관 놈이 소피아와 한 걸까?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에 다시 눈을 뜬 오멘이 이를 갈았다. 전지에서 여인은 기사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들이 전선에서 누구보다 큰 위험을 마주한 대가로 지급한 보상이기도 했다. 전투에 나서지 않는 군의관은 그녀들을 안을 수 없었다.
그러니 만약 그놈이 소피아에게 손을 댄 것이라면 정당하게 처벌할 수 있다. 군의 예산으로 마련한 피임약을 제멋대로 남용한 것도 죄를 물을 수 있으리라. 순식간에 뻗어 나간 생각이 보복이라는 달콤한 결론에 이르렀을 무렵. 눈꺼풀 사이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오멘의 청록색 눈동자가 스산했다. 그걸 마주한 소피아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자, 잘못, 했…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그녀는 어느새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오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녀를 따라 서둘러 자세를 낮추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울면서 빌기 시작한 그녀를 안아 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가 다른 이와 살을 섞었다는 생각에 화가 났으니까. 맞물린 잇새에서 까득,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에 소피아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두서없는 말을 쏟아 냈다.
“워, 월경을 안 해서… 너무 무서워서 군의관님을 찾아갔는데, 초기에는 이걸 주기적으로 먹으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오멘의 표정은 정말 기괴했다. 그는 방금 소피아가 한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채 눈만 끔벅거리기를 한참. 비로소 소피아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오멘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월… 그럼 임… 아, 어, 그럴…….”
더듬더듬,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그간 자제를 하지 못하고 그녀의 안에 파정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피임약을 거른 적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오멘은 저가 그녀에게 함락되던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천막 내부, 그곳에서 들려왔던 목소리, 순간적으로 자제심을 잃고 그녀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던 순간.
그날보다 더 오래된 과거를 돌아보자 새벽 무렵의 기억이 보였다. 헐벗은 그녀를 보며 욕정에 못 이겨 수음을 했던 날, 아마도 그녀가 월경 중이었을 그 날. 빠르게 굴러간 머리가 그 사이의 시간을 계산했다. 그러자 소피아의 가임 기간을 상정해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엇비슷하게 맞물렸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이 있었으니.
‘나는 먹지 않았어.’
부상을 입고 병영으로 돌아왔던 그 날, 오멘은 피임약을 먹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소피아에게 먹일 정신도 없었고. 다음 날에도 제 감정에 취해서 망각했다. 피임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헉.”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다급히 삼킨 오멘이 군의관을 호출했다. 소피아에게 피임약을 주었다는 그 군의관을.
* * *
오멘의 마나 장막이 천막을 꽁꽁 둘러쌌다. 그 속에서 오가는 대화를 완전히 가두고 몇 분이나 흘렀을까? 오멘에게 불려온 군의관은 사색이 된 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를 앞에 세워 둔 오멘의 표정이 사나웠다.
“사실대로 말하라.”
벌써 세 번째였다. 소피아의 임신 사실에 대해 캐묻는 그의 앞에서 군의관은 어물어물, 말을 흐리기만 했다. 저가 독단적으로 행한 짓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에 오멘의 화가 더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렸다. 인내심이 동난 그는 언성을 높이기에 이르렀다.
“자네가 내 아이를 죽이려 했다, 기어이 황제 폐하께 그 사실을 고해야 사실대로 말할 건가!”
평소에는 부러 황실과의 연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의해 왔던 그이건만. 오늘은 그 이름의 권위와 권력을 빌려서라도 알아야만 했다.
그에 드디어.
“이, 임신이 맞습니다.”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가 답을 주었다.
“일전에 진찰을 했을 땐, 대략… 10주 정도 된 것 같았습니다.”
그의 곁에서 벌을 받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소피아의 흐느낌이 짙어졌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흐느낌과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 속에서 오만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소피아를 임신시킨 스스로를 향한 질책. 제대로 된 뒤처리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경멸. 임신 사실을 고한 그녀 앞에서 치졸한 투기나 하고 있던 스스로를 향한 실망.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는 죄책감. 현 시국에서 자신의 아이가 가져올 파란에 대한 두려움. 소피아의 신분으로 인한 절망. 자신에게 이 사실을 고하는 대신 아이를 지우려 했던 군의관과 소피아를 향한 분노.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렬한 한 가지. 오멘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 홀린 듯 무릎을 꿇은 그는 소피아의 아랫배를 쓰다듬는 중이었다.
‘아이.’
제 아이라고. 저와 소피아의 아이가 여기에 있다고.
“우리 아이…….”
허억, 하고 숨을 채워 넣는 순간 오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넘쳐흐르는 희열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오멘은 소피아를 와락, 끌어안고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1442년 바 92일, 오멘은 소피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울다 지친 소피아는 이미 잠든 후였다. 오멘은 그녀에게 사과하고, 빌고, 또한 감사를 전하며 하루 온종일 곁을 지켰다.
‘내게 잘못했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데.’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당신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놀랐어요? 미안해요.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내가 그릇이 작아서…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
‘고마워요, 내 아이를 가져 줘서 고맙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내 생애 이렇게 행복한 날은 처음이에요.’
‘우리 아이예요. 우리 아이라고. 어떻게 떼어 내겠다는 생각을……. 두 번 다시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말아요. 무사히 낳는 거만 생각해 줘요. 내가 계속 곁에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피아.’
울음이 담긴 그 애절한 고해에 소피아는 비로소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오멘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잠든 소피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줄곧 소피아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혹여나 제 커다란 손에 아이가 다칠까 봐,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하아…….”
나른한 숨에 직전의 전율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소피아의 임신 소식에 분명 기뻤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바로 이러하리라. 하지만 전율과 행복 뒤에서 아른거리는 것들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선에 서기로 한 자신의 신념과 새로운 생명이 가지는 무게가 이리저리 뒤엉켰다.
이어진 숨은 분명 무거운 현실을 품은 한숨이었다. 직전의 나른한 전율이 섞인 숨과 달랐다. 오멘은 다시 달아오르는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눈물을 억눌렀다.
‘이런 기분이셨을까…….’
이제야 모친을 두고 전선에 나서야 했던 부친의 심정을 짐작해 본다. 선대 테노리엘 백작이 무엇을 짊어진 채 이 무서운 곳에 섰는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오늘에 와서야.
오래도록 소피아를 품에 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오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잠들어 있는 소피아를 보자 잠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멘은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쓸어 주었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그가 침상을 벗어나 수납장을 열었다.
개인 전보 마도구를 켜자 희미한 빛이 천막 내부를 밝혔다. 오멘은 천막 한쪽, 여인들이 잠들어 있는 방향을 잠시 확인했다. 그와 소피아의 기이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서둘러 잠을 청한 이들 쪽에서는 특별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전보 마도구를 가리고 선 그가 암호 수식을 그려 넣었다. 이후 마나로 획을 그어 만든 글자가 완성되었을 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여름에 올라갈게.」
오멘은 그것을 페르멘의 개인 전보 마도구로 보냈다. 이후 그는 전보 마도구를 다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몸을 돌려 소피아에게 돌아가는 걸음이 조금은 다급했다. 그는 따듯한 눈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침상에 몸을 누였다. 익숙하고 그리운 여체를 품에 안고서 눈을 감는 순간, 또 나른한 숨이 새어 나왔다. 복잡한 것은 미뤄 두자.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고마워요, 소피아.”
잠든 소피아에게 다시 한번 진심을 전한 오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 * *
“아레스!”
늦은 시간까지 영지 업무를 보고 있던 아레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고개를 들자 더운 날씨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았던 그의 집무실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보였다. 오늘 오후 황도에 도착한 아르페시스였다.
“……폐하.”
실내복을 대충 몸에 걸친 그는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레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에디가 자겠다고 나를 쫓아냈다!”
그 순간 아레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몇 주 전, 루이자에게 쫓겨난 제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날 이후 루이자의 침실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욕망에 못 이겨 이게 무슨 꼴인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을 길이 없었다. 착잡한 와중에도 아내의 침실에서 쫓겨난 사람이 저 혼자가 아니라는 게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무슨 짓을 하셨…….”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게 잘못된 건가?”
“…….”
“이건 다음 날 피곤해서 싫다, 저건 자극이 너무 심해서 싫다, 내가 하자는 건 전부 싫다고 할 때도 다 참았다. 그런데 횟수도 내 마음껏 못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
“한 번이라니, 고작 한 번 하고 자겠다니! 내가 몇 계절을 참았는데! 오늘 내가 돌아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내일 일정을 비워 두지 않을 수가 있지?”
분개해서는 식식,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기를 한참. 고개를 툭, 떨군 아르페시스가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난 그녀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올라서 미칠 것 같은데, 에디는 왜 아닌 거지?”
아레스는 착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리디의 오라비라는 건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군.’
대체 어느 사내가 아내의 손위 처남에게 와서 저런 말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딱히 말할 곳이 없다는 건 알지만…….’
아르페시스의 인간관계가 지독하리만치 협소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의 세상은 에스메랄다가 커다란 덩이를 차지하고, 그 옆에는 에스메랄다의 주변 사람으로 점점이 채워진 정도였다. 그러니 이렇게 저에게 달려와 하소연을 늘어놓는 건 어쩔 수 없겠지.
물론,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불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페르멘처럼 대놓고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도 아르페시스가 마냥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세상 모든 오라비들이 그러할 터. 그렇다고 또 페드로가 신뢰한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저를 찾아온 아르페시스를 내칠 수도 없는 일. 그런 이유로 하나둘, 받아 주다 보니 아르페시스는 아레스에게 하소연을 하는 게 당연해진 것 같았다.
‘다 내 업보지.’
처음부터 받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페드로 때문에, 에스메랄다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아레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르페시스가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그가 술에 약한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레스는 그에게 대충 두어 잔을 먹이고 손님용 침실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하룻밤만 떼어 놓으면 아르페시스가 알아서 숙이고 들어갔으니까.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매우 훌륭한 간계를 세운 아레스는 찬장에서 양주를 꺼내 소파로 향했다. 역시나. 한 잔을 비우자마자 아르페시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난 그리웠는데… 그리워서 매일 초상화도 보고… 수정 마도구도 보고… 그녀를 다시 만날 날만 그렸다. 그런데 에디는 아니었던 걸까? 나 혼자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아.”
아르페시스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화를 냈다가 우울해했다가 이제는 울기까지. 아레스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제 매부를 빤히 응시했다. 그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렇게 흘러간 이야기는 참 갑작스러운 순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나도, 나도 더는 이렇게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허.”
“이렇게 내쫓길 바에는…….”
제 손으로 빈 잔을 채운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꿀꺽 삼켰다. 그 직후 그의 입에서 각방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취했군.’
아르페시스의 술버릇은 익히 알고 있던바. 아레스는 그를 손님용 객실로 데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벌떡 일어난 아르페시스가 두 손을 꾹 움켜쥐고 말했다.
“각방…….”
그러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지.
아레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저놈이…….”
단어를 제대로 골라 볼 틈도 없이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술을 먹고 마나를 사용하다니. 저러다 마나가 뒤틀려 급사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 경우 그의 누이가 과부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한 소리 해야겠어.’
아레스는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집사를 불렀다.
“당장 황성으로 가서 폐하께서 무사히 귀환하셨는지 확인하고 오게. 당장!”
“예, 후작님.”
그의 명을 받은 집사가 집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마님, 오셨습니까?”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가던 아레스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아레스는?”
“안에 계십니다.”
“고맙네.”
몇 주간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던 루이자의 목소리였다. 휙, 몸을 돌린 아레스가 반쯤 닫혀 있던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집사와 루이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부인.”
조용히 고개를 조아린 집사가 떠나가고, 루이자가 무심한 얼굴로 집무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안 잤습니까?”
“폐하께서 오셨다기에 인사차 들렀어요.”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버리는 그녀가 너무 야속했다. 아레스는 충동적으로 루이자의 팔을 붙잡고 당겼다. 집무실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에 등을 기댄 루이자는 아레스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껴안은 아레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날 안 볼 겁니까?”
“…….”
“……그날 일은 미안합니다.”
“…….”
“부인이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내 욕심이 과해서, 불쾌했다면…….”
“아니에요.”
아레스의 말을 끊어 낸 루이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쾌한 게 아니라고요.”
어느새 아레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게 문제예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부인, 그건…….”
“난 당신의 아내인데, 그 사람과 하는 걸 상상하면서 기뻐하면 안 되는데…….”
아레스는 안도했다. 혹시나 그의 성벽이 끔찍해서 밀어내는 건 아닐까, 고민했었으니까. 그간 몇 번이고 페드로를 언급하며 정사를 가져 왔지만 그건 전부 아레스가 먼저 시작한 일이었다. 그에 휘말린 루이자가 속으로는 끔찍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게 아니었다. 아레스는 그제야 무거웠던 마음을 털고 웃을 수 있었다.
“몇 번을 말해야 믿어 줄까요?”
한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엉덩이를 받치자, 루이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두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감아 왔다.
“녀석이 살아 있었다면, 난 부인을 내어 주지도 빼앗지도 못했을 거라고 했죠?”
“…….”
“결국 우리의 타협점은 함께 나누는 것뿐입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녀석도 나와 다를 게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죽기 전까지 꽁꽁 숨겨 놓았던 것이다. 아레스가 루이자를 발견해서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나눌 수밖에 없다는 걸 직감했을 테니까. 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나누기 싫었으니까 숨길 수밖에 없었겠지.
“난 그 녀석 못 잊습니다. 평생 그리며 살 테죠.”
“……아레스.”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이 다가간 아레스가 물었다.
“당신은 아닙니까? 페드로를 잊을 거예요?”
루이자는 울먹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레스가 기다리던 답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추억해 줘요.”
“흑…….”
“질투는 나지만, 이렇게라도 녀석과 함께할 수 있다면 난 더 바랄 게 없어요.”
파르르 떨리는 루이자의 입술과 아레스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됩니까?”
루이자는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춰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갈급하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오랜만에 서로를 찾아든 혀가 뒤엉켰다. 아레스는 루이자를 안아 든 채로 소파로 향했다. 풀썩, 소리를 내며 루이자부터 눕힌 그가 바지춤을 풀어 헤치며 위로 올라탔다.
“아, 아레스?”
평소와 달리 그녀의 음부 쪽을 바라본 아레스가 치맛자락을 끌어 올렸다. 하얗고 가녀린 다리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원하는 것을 눈치챈 루이자도 속옷 안에서 아레스의 성기를 꺼내 물었다.
“하.”
루이자의 허벅지를 깨물던 아레스 역시 곧 속옷을 젖히고 아름다운 음부에 입을 맞추었다. 몇 번 핥지도 않았는데 루이자는 달큼한 애액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인데 빨리 젖네요.”
“우움.”
“나 때문입니까? 아니면 페드로?”
손가락 사이에 끼운 돌기를 문질거리자 루이자의 몸이 튀어 올랐다. 아레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붙든 채 음부에 고개를 파묻었다.
“응, 웁! 훙!”
“대답해 봐요. 나입니까, 페드로입니까?”
그의 성기를 입에 문 탓에 답을 하지 못한 루이자가 반항하듯, 이를 세웠다. 아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히 구음 중에 이를 세우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 녀석은 이걸 왜 좋아했는지…….”
“웁, 웁.”
“그래도 당신이 하고 싶으면, 후우, 해요. 페드로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에 루이자가 본격적으로 이를 세워서 긁기 시작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분명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구음은 그의 취향이 아닌데. 아레스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흔들었다. 루이자의 입술과 혀, 입천장의 주름과 딱딱한 치아에 선단을 문지를 때마다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축축한 음부를 핥던 아레스는 아래로 흘러내린 애액에 젖은 항문을 둥글게 문질렀다.
“웁, 웅.”
루이자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발버둥은 없었다. 그녀의 암묵적인 허락을 이해한 아레스의 녹안이 짙어졌다.
“당신은 페드로의 것을 물고 있고, 난 당신을 물고 있고…….”
위아래에서 음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방적으로 전희를 할 때와는 달랐다.
‘생각보다, 좋을지도.’
그간 구음을 즐겨 본 적이 없음에도 서로의 하반신을 입에 물고 탐닉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레스는 한동안 정신없이 루이자를 물고 빨았다. 오래지 않아 루이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쪽은 건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절정에 달할 줄이야.
“흣… 흥…….”
그의 성기를 뱉어 내고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은 루이자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역시.’
그녀는 페드로의 이야기를 꺼내면 더 흥분한다. 새삼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되기 시작했다.
아레스는 루이자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소파의 등받이를 잡게 만든 후 곧장 안으로 치고 들어갔을 뿐인데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윽……!”
억눌린 신음을 삼킨 아레스가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루이자의 침의를 끌어 내리자 탐스러운 젖가슴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레아나를 낳은 뒤 부쩍 커진 가슴은 뒤에서도 출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흣! 응!”
루이자의 귀를 크게 베어 문 아레스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의 손이 닿은 건 꽉 다물린 루이자의 항문이었다. 애액에 젖은 탓인지 엄지가 손쉽게 들어갔다.
“여기는, 허억, 다음에. 잘 풀어 주지 않으면, 윽, 다친다고…….”
“으응! 앙!”
“나부터, 윽, 나부터 할까요? 아니면 페드로?”
“당, 신, 당신 거부터!”
“좋아요.”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었다. 저는 뒤에서, 페드로는 앞에서. 루이자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보며 허리를 치댄다니.
“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아레스는 루이자를 꽉 껴안으며 파정했다.
“윽…….”
후희를 즐기는 것처럼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자 루이자가 엉덩이를 흔들었다.
“응, 빨리이…….”
“미안해요, 오랜만이라서……. 금방 다시 해 줄게요.”
그녀의 안에 들어선 채로 탁탁탁, 허리를 놀리자 금세 다시 힘이 붙었다. 아레스는 루이자의 목덜미를 길게 핥으며 말했다.
“뒤는 힘들겠지만, 앞은 오늘 해 볼래요?”
움찔거린 몸을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험 삼아.”
책상 위에 있던 서류와 잉크통, 깃펜을 쓸어 버린 후 루이자를 앉히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레스는 루이자를 돌려 앉혔다. 그대로 그녀를 눕히자 꽤나 자극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가 있는 쪽으로 머리를 내리고, 반대쪽으로는 다리를 활짝 벌린 루이자라니.
다급한 손길로 서랍을 뒤진 아레스가 예의 그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자, 잠깐! 그거 괜찮은 거 맞…….”
긴장한 듯 물어 오는 루이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레스는 페드로의 음경을 대신해 줄 그것을 루이자의 안에 찔러 넣었다.
“하앙!”
“안전해요.”
라그나가 만든 것이니까 믿을 수 있었다. 아레스는 그가 에스메랄다의 지시로 인해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제 발로 와서 주절주절 하소연을 한 덕분이다. 해서 라그나에게 이것을 부탁할 생각을 했던 것이고.
“흐앗!”
“어때요, 비슷합니까? 진동 기능도 넣었다고 했는데, 그건 다음에 하죠. 마석을 안 끼워 놔서.”
“앙, 앙! 아앙!”
“너무 좋아하는데.”
교성을 내지르느라 바쁜 그녀의 입에 제 것을 물리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좀 해 봐. 소리가 다 새잖아.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그가 바라던 사람이 보였다. 아레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루이자의 안에 찔러 넣은 것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마다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온 페드로가 함께 허리를 쳐올렸다.
어쩌면 상실감을 버티지 못해 미쳐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석 앞에서 페드로를 만난 후 그리움은 더 짙어졌으니까.
‘이렇게라도.’
가장 각별했던 형제를 만날 수 있다면.
“아, 페드로……!”
아레스는 처음으로 페드로의 이름을 부르며 파정했다. 직전에 한 차례 파정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정액이 쏟아졌다. 허리가 부르르 떨리고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쾌락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음에도 아레스의 손은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오롯이 그의 것이어야 할 루이자의 다리 사이에 서서 추삽질을 하고 있는 페드로가 보이는 것 같았다.
“흡! 흣!”
잔뜩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물리자 루이자의 입에서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레스는 그녀를 일으켜 앉히고서 계속 손을 놀렸다.
“앗, 아흥, 아앙!”
“더 깊게?”
“응! 으응! 깊게, 더 깊게, 아앙!”
그에게 등을 기댄 채 책상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린 루이자가 달뜬 교성을 내지르며 헐떡거렸다. 아레스는 그녀를 눈에 담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혼인한 이래, 처음으로 손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흔들리는 젖가슴을 마음껏 주물러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고개를 숙여 유두를 입에 무는 게 최선이었다. 혀끝을 세워 빳빳한 가슴의 돌기를 건드리자 루이자의 허리가 휘었다. 더 빨아 달라는 듯 가슴을 쭉 내미는 게 야했다.
-음탕한 루이.
웃음기가 섞인 페드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거의 동시에 루이자가 음경 조각을 물고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곱아든 발가락과 파르르 떨리는 허벅다리, 헤프게 벌어진 입과 경련을 일으키는 몸. 그녀가 절정에 달했음을 눈치챈 아레스는 천천히 음경 조각을 빼내었다.
“하아, 흐읏… 하아…….”
떨리는 숨을 내쉬는 루이자를 고쳐 안자 점차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땠습니까?”
아레스에게는 평소보다 더 이르게 파정을 할 정도로 자극적인 정사였다. 루이자에게는 방금 그 행위가 어떠했을까? 그녀에게도 더 황홀했을까?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자 그의 품을 파고든 루이자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바람피우는 거 아니죠?”
참아 볼 새도 없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녀석이랑 하는 건 바람이라고 하기 어렵죠. 애초에 나보다 녀석이 먼저였으니까.”
다른 사내는 그와 루이자 사이에 절대 끼워 줄 생각이 없지만, 페드로라면. 그가 루이자를 탐하는 건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황홀했지.
‘정상은 아닌 것 같다만.’
그렇다 한들 뭐가 문제일까. 지독히도 그리운 페드로를 만날 수 있는데. 루이자가 이 성벽을 받아 줄 수만 있다면 아레스는 페드로가 함께하는 것을 원했다.
“조금… 딱딱해서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는데,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당신이 보는데 그 사람이랑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무서웠지만 그래도…….”
“받아 줘서 고마워요. 기뻐해 준 것도 고맙고요.”
“나도 고마워요…….”
뺨을 붉힌 채 수줍게 말하는 루이자는 어느새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와 페드로의 사이에서 음탕하게 울부짖던 여인도, 지금의 순수한 소녀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아레스는 다정하게 그녀의 뺨과 눈두덩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힐끔, 문가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루이자가 자신의 성벽을 받아 주고 응해 준다는 확신이 생기자 해 보고 싶은 것들이 주르륵 생겨났다.
“다음에는요?”
“……페드로의 방에서 할까요?”
죽은 고인을 이리저리 데려다가 이러는 게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아레스는 죄의식을 손쉽게 털어 냈다. 그는 언뜻 기이해 보이는 이 행위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만약 페드로가 다시 제 비석 앞으로 튀어나와 뭐라고 하면 그도 할 말이 많았다.
‘우리를 두고 죽어 버린 네 잘못이지.’
그러니까 이 정도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저를 불러다 쓰는 건 이해하라고. 이제는 곁에 없는 페드로에게 한마디를 건넨 아레스가 루이자를 안아 들었다.
“오늘은 침실로 가서 마저 하죠. 페드로의 방은 한 번 청소를 해야 할 테니까.”
그의 목을 껴안은 루이자가 발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로의 분신이라 보아도 무방할 그 물건을 집어 들고 침실로 향하는 아레스의 걸음이 경쾌했다.
* * *
최근 헌터 차현우가 매우 너그러워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출처는 그와 공략을 다녀온 헌터 및 서포터들이었다. 그리고 덩달아 연애를 시작한 것 같다는 소문도 함께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현우는 연애 중이었다. 전생에서부터 사랑한 여자, 강은지와.
“왔어?”
“안녕하세요.”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자 조금은 어색한 표정의 은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너 번 반복된 데이트 끝에 현우는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붙잡았고, 그날부터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은지는 모친의 결혼반지를 빼고 그가 준비한 커플링을 끼게 되었다. 진도도 착실히 빼서 뽀뽀는 물론, 성적인 의미가 가득한 키스까지 나눈 참이고.
덕분에 최근 현우는 날아갈 것처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사귀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오늘, 예의 그 진도를 조금 더 빼 볼 요량으로 은지를 집에 초대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연애랑 비슷한 속도겠지.’
그녀를 눈에 담는 모든 순간에 안달이 났던 그로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참아 왔다. 오늘은 바라마지 않던 거사를 치르겠다는 일념으로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우와…….”
내부로 들어온 은지가 입을 떡 벌린 채 두리번거렸다. 열두 살부터 헌터 일을 시작해 몬스터 부산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현우다. 그는 고층 오피스텔 상층부 세 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최상층은 개인 훈련장, 아래층은 여가 공간, 그리고 가장 아래는 말 그대로 집.
영화도 보고, 밥도 만들어 먹고, 훈련장에서 놀면서 식후 소화까지 시키자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웅, 훕, 흐음.”
분위기를 타서 키스를 하는 데 성공한 현우의 몸이 들썩거렸다.
“웁, 움……!”
분명 부드럽게 하려고 했다. 난폭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은지가 오기 전에 무려 세 발을 뺐을 정도였다. 하지만 외부에서 만나 키스를 나눌 때와 달리,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입을 맞추자 자제가 되지 않았다. 현우는 은지를 잡아먹을 것처럼 거칠게 저를 밀어붙였다. 그와 은지의 상체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을 느끼자마자 은지가 바르작거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은 은지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현우는 물러나는 대신 아찔한 감촉의 가슴을 계속 주물렀다. 영혼으로 지내는 동안 시간을 세어 보진 않았지만,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보다는 오래 지났다는 걸 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리워한 사람이 품에 있는데, 스스로를 자제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쉰 현우가 은지의 목덜미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하아… 여유가 없어서.”
“너무 급…….”
“안 돼? 더 기다렸다가는 나 미칠 것 같은데.”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조르자 은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침대로 갈 여유조차 없어서 은지를 소파에 눕힌 그가 서둘러 청바지의 단추를 풀었다.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단번에 벗겨 내자 은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훌렁, 상의를 벗고 허리를 숙인 현우는 곧장 은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핫!”
“가만히 있어 봐. 빨아 줄 테니까.”
주섬주섬, 티셔츠를 말아 올리고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은 그는 말랑거리는 유방을 주무르며 음부를 핥기 시작했다. 촉촉하게 젖어 가는 그곳은 현우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세워 돌기를 긁으면서도 꽉 닫힌 질구에 혀를 쿡쿡, 쑤시자 은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흐읏, 흥!”
현우의 손은 은지의 유두를, 혀는 질구를, 입술은 음부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느라 바빴다. 점차 많아지는 애액을 마셔 보지만 오래도록 굶주려 온 그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혀에 힘을 주고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자 은지의 허리가 휘었다.
“싫, 이거, 흐앙! 너무, 하악!”
쮸읍, 하고 음탕한 소리가 난 직후 혀를 조이는 내벽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갔어?”
“흐아, 하아… 아응…….”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위로 올라탄 현우가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아앙! 넣지, 마앙!”
“풀어진 것 같긴 한데… 혹시 처음이야?”
그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당장 넣고 싶었지만, 처음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풀어 줘야 할 테니까. 손가락으로 더 넓혀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은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손이 움찔거렸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이로써 조금은 공평해진 것 같았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은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현우가 속삭였다.
“난 처음이야.”
현생에서 얻은 몸으로는 단 한 번도 여자와 살을 섞은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는 자신이 그녀의 처음을.
현생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처음을.
귀두를 질구에 맞춘 현우는 그대로 저를 안으로 찔러 넣었다. 마치 환영 인사를 하는 것처럼 길목을 활짝 열어 준 내벽이 그를 빨아들였다.
“흐아……!”
아찔한 쾌감과 충족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앙! 아읏! 자, 잠깐……! 콘돔……!”
그를 만류하는 은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아!”
그녀는 여전히 황홀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리고 그녀를 원하는 만큼.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쳐올리자 은지가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곧장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누른 현우가 허리 짓에 힘을 가했다.
“항! 하앙! 앙!”
달콤한 교성은 그를 충만하게 채워 주었다. 허리를 뒤로 물릴 때마다 집요하게 따라붙어 오는 내벽이 아찔했다. 비로소 그의 갈증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힘이 쭉 빠진 은지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은 현우가 다시 유두를 노렸다. 양손 엄지와 검지에 돌기를 끼우고 살살 문지르자 내벽이 수축했다. 그게 꼭, 더 해 달라고 조르는 것만 같았다.
“이거 좋아하는, 구나? 예민, 후으, 하네.”
“하앙! 아항!”
퍽, 퍽, 퍽.
허리를 치댈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에 얼굴을 묻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우는 부드러운 살덩이에 뺨을 비비며 으르렁거렸다.
“안에서, 흐, 녹아 버릴 것 같아……!”
손가락에 힘을 주고 꾸욱, 유두를 누르자 은지가 힉, 하고 다급한 숨을 삼켰다. 그녀의 숨결마저 전부 가지고 싶어서 입을 맞추자 헐떡이는 숨이 서로를 어루만졌다. 정상위로 허리를 치대고 있노라니 은지가 또 한 번의 절정에 이르렀다. 현우는 거기서 멈추는 대신 그녀의 몸을 꽉 껴안은 채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하응, 아, 앙 대! 싫어! 그만……!”
절정 후에도 지속되는 쾌감이 버거웠던 걸까? 은지가 울먹이며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그럼에도 물러날 수가 없어서, 현우는 은지의 목덜미를 깨물며 거칠게 헐떡였다.
“하아, 핫, 아아……!”
여린 몸을 독차지하기 위해 더 깊게 끌어안자 그날이 떠올랐다. 황홀하고도 슬펐던 정사. 그를 받아들인 채로 신음하면서도 끝내 사랑한다 속삭여 주지 않던 루이자. 그토록 이기적인 짓을 하고 끝내 죽어 버렸던 페드로.
“하아……!”
이윽고 밀려든 사정감에 현우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던 현우는 거듭된 내벽의 압박에 그대로 파정했다.
“아, 루이……!”
이런 씨발.
그는 저도 모르게 추억에 젖어 든 탄성을 내뱉었다. 허리를 타고 오르는 쾌감과 함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체가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실수했다.
* * *
라의 달이 되자 오멘은 휴가계를 내고 전선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왔냐?!”
그리고 야심한 시각, 그리웠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벌컥, 마차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 페르멘 때문에 얼굴을 구겼다.
“아…….”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소피아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녀를 다독이듯 더 깊게 끌어안은 오멘이 말했다.
“혼인까지 한 놈이 왜 이렇게 경박해.”
“몇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첫마디가 타박이…….”
씩, 웃으며 대꾸하던 페르멘이 우뚝 굳었다. 오멘은 소피아에게 고정된 제 쌍둥이 형제의 시선을 가리듯 몸을 틀었다.
“어라……?”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페르멘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전보 마도구가 상용화되며 도중에 내용을 가로채는 시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해서 소피아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여인을 데려온 것에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멘은 잔뜩 위축된 소피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 들어가서 얘기해.”
“어… 어, 어, 그래…….”
한발 물러난 페르멘을 지나 마차에서 내리자 그리웠던 테노리엘의 저택이 보였다. 시간이 늦은 탓에 불이 켜진 곳은 겨우 두 군데였다.
오멘은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그립고 그리웠던 이곳에 죄인처럼, 어둠을 틈타 몰래 숨어들게 될 줄이야.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황도 밖에서 우두커니 대기하는 동안 소피아에게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무거운 감정을 억누른 오멘이 소피아를 땅에 내려 주었다.
“들어가요. 형님께 인사부터 드리죠.”
“저, 저는… 제가 가도 될 자리가 아닌 것…….”
“돼요. 그러니까 같이 가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그녀를 달랜 오멘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앞장선 페르멘을 따라 익숙한 복도를 걷자, 아레스의 개인 응접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멘은 바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야, 그,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데… 너 때문은 아니었거든?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뭐?”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는… 아니, 놀라는 건 당연한가……. 아오, 나도 모르겠다.”
문 앞을 막고 서서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던 페르멘이 문을 벌컥 열고 먼저 들어갔다.
“형, 오멘 왔어.”
“오멘, 어서…….”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오멘은 낯섦에도 익숙한 인물을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응접실 내부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
아레스, 루이자, 페르멘, 그리고 오멘은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양쪽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독차지한 두 사람. 소피아와 멜리안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서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시선이 오가는 틈에 길어진 침묵을 깬 건, 오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상석에서 벌떡 일어나 있던 아레스였다.
“후우,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정말 그 말이 맞았다.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고……. 아니, 놀랄 거라고 했잖아.”
멋쩍은 페르멘의 목소리에 오멘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데려온 소피아, 그리고 페르멘이 혼인한 멜리안. 두 사람은 서로 혈육이 아닐까 의심해 볼 정도로 닮았으니까.
* * *
아르페시스가 사용하는 인외의 힘이 임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신이 없었다. 아르페시스 본인도 에스메랄다가 임신을 했다면 함부로 함께 이동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해서 육로로 이동을 한 참이었다. 아이에게 해가 될 짓은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승마를 할 줄 모르는 소피아를 배려해 마차로 이동한 탓에 근 20여 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걸 알고 있던 아레스가 자리를 일찍 파했다.
‘인사는 나누었으니 되었다.’
‘소피아 양도 긴 여정에 곤했을 텐데,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얘기하자.’
그렇게 짧은 재회를 뒤로한 오멘이 소피아를 침실로 안내했다.
“내 침실이에요. 외부 출입은 조금…… 힘들 겁니다.”
소피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심장이 미어질 것 같았다. 오멘은 직접 소피아의 시중을 들며 그녀를 씻기고, 입히고, 재웠다. 그런 후에야 아쉬운 입맞춤을 남기고서 침실을 나설 수 있었다.
따로 언질을 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페르멘은 저의 개인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과일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왔어? 그분은?”
먼저 잔을 기울이고 있던 페르멘이 그를 반겨 주었다.
“잠들었어.”
“어떻게 한마디를 안 해 주냐? 놀랐잖아.”
“다른 데서 먼저 놀란 것 같던데?”
“솔직히 놀랄 만했다고. 너도 놀랐으면서.”
픽, 하고 웃으며 페르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오멘이 곧장 술을 따랐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얼굴이야?”
페르멘에게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번에 들키자 심란함이 더해졌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나?”
“아레스 형이 보기엔 그냥 복잡해 보이는 정도?”
“…….”
“그런데 내 눈에는… 막 엄청 좋아서 펄펄 뛰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걸로 보이네.”
“……정확해.”
잔에 든 술을 벌컥벌컥, 삼킨 오멘이 긴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법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응접실에 적막이 맴돌았다. 오멘은 입을 다문 채 술잔을 기울이기만 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페르멘과 오늘 처음 본 멜리안에게 미안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아레스 형한테는 말 못 했는데.”
그때, 자신의 잔을 새로 채운 페르멘이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멜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한숨을 내쉬며 잔을 훌쩍 비운 그의 눈동자가 어두웠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소식이 생긴 건 페르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형제를 살피지 못했던 오멘은 작아졌다. 페르멘은 그를 보자마자 알아차려 주었는데.
오멘이 고개를 숙인 사이 잔을 두어 번 정도 더 비운 페르멘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멜이… 불임일 수도 있데.”
“……뭐?”
오멘은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고통에 젖어 들었다. 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페르멘이 감당해야 했을 감정이 그에게도 스며들어 왔다. 하지만 이미 그것을 추스른 페르멘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아기집이 비어 있는 여인들이 종종 있다고…….”
“…….”
“주치의는 앞으로 약을 먹으면서 경과를 보자고 하더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그런데 멜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괜찮다고 했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입장도 아니었고, 그때 멜이… 너무 많이 울어서, 나까지 울면 안 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덤덤하게, 큼, 받아들였는데…….”
“…….”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슬프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멜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진짜 상관없었어. 그런데 정작 네가 들고 온 소식을 들으니까… 기쁘다.”
오멘의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통제해 보기 위해 두 손을 꽉 마주 잡은 오멘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너 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페르멘은 어느새 무거운 감정을 거두고 씨익, 웃어 보였다.
“새삼 당연한걸.”
탁, 하고 잔을 내려놓은 페르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멜에게 물어볼게. 그녀가 허락해 준다면 나한테 입적해서 키우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지 못한 오멘이 눈가를 덮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마워.”
울먹이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페르멘이 웃으며 말했다.
“네 자식이나 내 자식이나, 어차피 우리 자식인데 뭘. 넌 그분에게 설명이나 잘해. 괜한 오해 하실라.”
“……응.”
“그럼 쉬어. 내일 보자.”
“고마워, 고마워, 펠…….”
오멘은 저를 두고 먼저 자리를 비켜 주는 페르멘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제 아이를 사생아로 키우지 않아도 된다. 소피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그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것을 함께 들어 준 형제 덕분에.
* * *
“그 녀석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인이 힘들어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페르멘은 멜리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직도 마음 쓰고 있잖아요. 매일 그 쓴 약을 먹고 내 위에 올라타면서.”
어두운 표정의 멜리안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페르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흐리게 웃으며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그녀의 고개를 들게 만들어 눈을 맞추자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솔직히 당신이 내 위에 올라오는 거 좋기는 한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요.”
“…….”
“날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맑은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멜리안에게 했던 말 그대로, 페르멘은 더 이상 그녀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월경을 할 때마다 혼자 숨죽여 우는 그녀를 보는 건 정말 너무 슬펐으니까.
“난 정말 괜찮았어요. 지금도 괜찮고. 기다리긴 했지만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간절한 건 아니었거든요. 당신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굳이 표현하자면 조금… 아쉬운 정도였죠.”
페르멘의 목소리는 흔들림 한 점 없이 올곧았다. 이게 그의 진심이었으니까.
“내가 목숨을 걸고 싶은 건 내 자식이 아니라, 테노리엘 멜리안이니까. 난 당신이랑 오순도순, 둘이서 늙어 가는 것으로도 이미 넘칠 만큼 행복해요.”
“…….”
“그런데 당신은 흠이니 뭐니, 그런 말로 또 자신을 상처 입히면서 나랑 혼인한 걸 후회하고.”
이제는 많이 추슬렀지만 아직도 그날의 고통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페르멘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야 마는 멜리안을 품에 안고 토닥여 주었다.
“난 자식 때문에 다른 여자와 뒹구는 짓 따위는 절대 안 할 거예요. 나한텐 자식보다 당신이 더 소중하니까.”
이제 페르멘에게 여인은 멜리안이 유일했다. 그녀는 자신의 배필이었지, 후계를 낳아 줄 도구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신의 앞에서 한 배필 맹세를 등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나랑은 달리 당신은 아이를 너무 원하는 것 같아서 복잡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와중에 오멘이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솔직히 기쁘더라고요. 나는 못 하지만, 또 다른 내가 당신에게 아이를 안겨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래서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났나 싶었다니까요?”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자 울던 와중에도 멜리안이 푸스스, 웃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는데 나에겐 그 녀석 자식이나, 내 자식이나 솔직히 똑같거든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둘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에게는 어려운 얘기일 테니까 이번 일은 당신의 결정에 따를게요. 생각해 보고…….”
“……싶어요.”
“응?”
울음에 잡아먹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페르멘이 반문했다. 그에 멜리안이 눈물을 뚝, 뚝, 흘리면서도 그의 목을 꼭 안으며 말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반사적으로 그녀를 마주 안은 페르멘의 귓가에서 구슬픈 고해가 들려왔다.
“내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으면, 정말 더없이 행복했겠죠.”
페르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결국 그만으로는 멜리안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걸까? 침울한 감정이 찰랑찰랑 차오르기 시작했을 무렵.
“하지만, 내가 낳지 않았어도 당신의 아이라면… 난 언제든 사랑에 빠질 자신이 있어요.”
“아…….”
“테노리엘 경과 소피아 양도 힘들 텐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뻐한 내가 너무 밉지만… 키우고 싶어요.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고 싶어.”
“…….”
“그래도 될까요?”
페르멘은 활짝 웃고야 말았다. 이제 그녀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평온해질 준비가 된 모양이다.
“당연하죠.”
멜리안의 뺨과 귓가에 쪽쪽 입을 맞춘 페르멘이 베실베실 웃었다. 오멘이 힘든 와중에 이렇게 행복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의 쌍둥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페르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겉으로는 그와 멜리안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되어야 할 터.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럼 내일 바로 얘기해 볼게요. 그러는 편이 오멘에게도 좋을 거고. 녀석, 많이 힘들어 보여서 좀 덜어 주고 싶어요.”
제 자식을 사생아로 키우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딱 봐도 저처럼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저것, 다 신경 쓰느라 청혼도 못 하는 멍청한 형제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멜리안이 허락해 준 것이 더없이 고마웠다.
페르멘은 그날 밤새도록 도란도란, 후에 태어날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멜리안이 그간 얼마나 간절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화였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멜.”
“네?”
페르멘은 이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긴가민가해서 잠시 망설였다.
‘뭐, 못 할 말도 아니고.’
짧은 고민 끝에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 그가 말했다.
“우리도 계속 열심히 할 거지만 저쪽이 더 빠른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오멘에게 더 낳아 오라고 할까요? 병영에서 불 꺼 놓고 할 게 많지도 않을 테고, 형수님이랑 열심히 하면 두세 명 정도는 금방… 악!”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요! 테노리엘 경이 지금 얼마나 복잡하실지 생각도 안 해요?!”
“악, 아야, 아파요! 대체 왜 때리는 거야? 걔가 낳으면 내가 키우면 되는데! 당신이랑 형수님이랑 판박이마냥 닮아서 누굴 닮아도 우릴 닮은 거나 마찬… 아야!”
꽤나 괜찮은 생각 같아서 한 말인데 왜 이렇게 맞아야 하는지. 페르멘은 생각보다 매서운 멜리안의 손바닥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야만 했다.
아레스와도, 멜리안과도 이야기를 끝냈다. 아레스는 그와 페르멘의 뜻을 존중해 주었고, 멜리안은 기뻐해 주었다. 그녀는 곧 태어날 아이는 물론, 소피아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소피아가 원한다면 친모에 대한 것을 아이에게 알려 주고 싶다는 말도 해 주었다.
서신으로만 두어 번 인사를 나누고, 며칠 전에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건만. 오멘은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서는 막막하기만 했던 문제는 가족들을 만나자 술술 풀렸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고 안정을 찾은 것과 별개로 그는 여전히 무거운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해서 오늘, 비겁한 마음을 다잡고 소피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를…….”
야심한 시각, 그녀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온 오멘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미소를 본 소피아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오멘은 그녀를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우와……!”
그의 손을 잡고서 후원에 당도한 소피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후원을 가득 채운 연보라색 라퓨나가 흩뿌리는 빛무리를 눈동자 속에 담은 것처럼. 주춤거리며 앞으로 서너 걸음 걸어간 그녀가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 남아 있던 오멘은 라퓨나 속에 자리한 소피아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아름다웠다.
‘아르페시스가 고른 선물을 따라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라퓨나의 특징을 떠올리니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소피아는 후원의 라퓨나에 홀린 듯 시선을 주었고, 오멘은 그런 그녀에게 홀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다른 것을 눈에 담고서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후원에서 시선을 거둔 소피아가 그를 돌아보았을 때. 오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를 눈에 담은 소피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에게 다가간 오멘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뺨이 그를 벅차게 만들어 주었다.
“당신에게 처음 주는 선물인데, 마음에 들어요?”
“네? 네, 네… 너무 예뻐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다행이다. 마음에 들어서.”
저를 유혹하는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오멘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처음에는 분명, 육체적인 끌림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 작은 씨앗에 불과했을 감정은 이미 자라나 버렸다.
제 앞에서 우물쭈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도. 점점 기운을 차리고 맑게 웃는 모습도. 저를 원한다며 수줍게 속삭이던 모습도. 열락을 나누며 차마 말로써 전할 수 없었던 감정을 주고받던 그 순간의 모습까지. 그것들을 모두 먹어 치우고서 무럭무럭 자라나 그것이 없었던 날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의 손에 뺨을 기대고 있던 소피아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오멘은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들어 줄래요?”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소피아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쥔 오멘이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난 당신에게 청혼하지 않을 거예요.”
직전까지 가득 차 있던 빛이 천천히 사라지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오멘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발 오해하지 말아 줘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어요. 내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 때문에.”
혼란스러운 듯, 소피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오멘은 그녀의 뺨과 입술에 얕은 입맞춤을 남기며 숨을 골랐다. 그의 신념, 현재의 시국, 그리고 앞으로의 선택까지. 지금 그가 하는 말은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인지라 줄곧 혼인을 꺼려 왔지만, 아이가 생긴 이상 책임지고자 한다면 못 할 것은 없었다. 배필을 힘들게 하겠지만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선과 내륙을 오갈 수도 있다. 더군다나 혼인을 하면 그가 죽을 경우 소피아와 아이에게 합법적으로 유산을 남길 수가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오멘은 이미 그녀를 원하지만, 그녀와의 혼인은 오멘에게만 행복한 선택이었다. 소피아와 혼인하는 순간 테노리엘은 혈통에 관한 약점이 생긴다. 그녀는 모두가 뜯어먹기 좋은 먹잇감이 될 테고, 에스메랄다에게도 영향을 미칠 터.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행복을 위해 에스메랄다에게 부담을 주는 것만은, 절대로.
‘리디는 괜찮다고 하겠지.’
오라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오멘은 아니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이미 전선에 선 것만으로 그녀에게 근심을 안겨 준 오멘은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해서 청혼을 삼키고 비겁하기 그지없는 부탁을 입에 담고야 만다.
“그런데도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라요.”
동그랗게 커진 눈에서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쏟아졌다. 오멘은 뚝, 뚝, 떨어지는 소피아의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당신을 원해서.”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제대로 된 미래조차 주지 못하고, 우리의 아이마저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하는 처지지만… 그래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소피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건 청혼이 아니에요. 난 당신과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소피아가 울고 있었다.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미 커져 버린 욕심을 삼킬 길이 없어서.
“그런데도 감히 바라건대… 내 곁에, 있어 줄래요?”
오멘도 어느샌가 울고 있었다.
소피아가 뚝, 뚝, 흐르는 눈물을 두고 오멘이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이 비겁하고 이기적인 청에 허락을 받았다. 오멘은 격정적인 숨을 내뱉으며 경배하듯, 소피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건 배필에게 줘야 할 반지가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팔찌였다.
“고마워요…….”
그 팔찌를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 주자 목이 메었다. 큼, 큼, 억지로 잠긴 목을 풀어낸 오멘이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증표라고는 이게 전부이고, 당신과도 자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당신을 소중히 여길게요.”
“어……?”
“맹세해요.”
달콤한 속삭임이 끝나자 소피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자, 자주 못 만난다니… 그게 무슨…….”
주책맞게 흐른 눈물을 닦은 오멘이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같이… 곁에 있게… 아, 저, 절 보내지 마세요. 가기 싫어요. 경 옆에 있고 싶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소피아를 와락, 껴안고 있었다.
“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해요.”
방금 소피아에게 맹세했듯, 이 또한 그가 한 맹세였다. 뒤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가문과 선조들이 물려준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그것을 위해 누이의 슬픔마저 외면하고 전선에 섰다. 당장은 휴가를 신청해서 1년 정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는 전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피아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반드시.
“어디로 보내려는 게 아니에요. 여기 있어 줘요. 여기, 내가 나고 자란 이곳에. 아레스 형이 당신을 보살펴 주겠다고…….”
“시, 싫어요! 헤어지기 싫어, 아… 난 그냥 당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오멘의 품으로 파고든 소피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매달렸다.
“아…….”
그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을 잊은 적이 없기에 달콤한 유혹을 거절해야 할 때다.
“그곳은 너무 위험해요.”
언제 어디서 마수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지 모른다. 지난번과 같은 습격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고, 그를 노리는 죽음도 더 집요해질 테지. 쉽게 당할 생각이 없다 해도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해서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소피아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있어 줘요. 여름에는 만나러 올…….”
“싫어! 싫어요, 제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기껏 삼킨 눈물이 다시 기어 나올 것 같았다. 소피아를 꽉 껴안은 오멘은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곳에선 우리 아이를 만나는 것도 힘들고…….”
“그래도 싫어!”
빽, 하고 소리를 내지른 소피아가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거기서 죽어도 좋아요. 당신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죽기 전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옆에 있게 해 줘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내 세상에는 당신밖에 없단 말이야!”
“아… 진짜.”
표정을 와락, 구긴 오멘이 소피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 황홀한 청원을 어떻게 거역하겠나. 서로의 눈물에 젖어 든 입맞춤은 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몽롱해질 만큼 달았다.
“당신은 정말…….”
게걸스럽게 소피아의 입술을 탐하던 오멘이 거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어느덧 자라나 이름을 가진 그것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의 그는 그 감정을 소피아에게 줄 수가 없었다. 훗날 뒤에 남겨질 그녀에게 짐이 될 것이다. 어느 날 마음에 품게 된 이에게 감정을 전하지도, 청혼을 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그녀가 제 곁에 있는 것을 택해 주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분명 힘겨운 시간이 될 테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어서. 지금 품 안에 있는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대가가 무엇이든 내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비극이 될지도 모를 미래를 자처한 오멘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다짐했다. 그녀의 미래를 어그러트리고 있다는 죄책감도. 언젠가 떠나리라 생각하면서도 놔주지 못하는 스스로를 향한 환멸도. 자신이 저의 세상 전부라 말해 주는 사람의 곁에서 모두.
오멘이 준비한 라퓨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나를 잃고 천천히 바스러졌다. 훗날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듯 그렇게 천천히.
* * *
이능을 부여받아 각성한 헌터의 등급은 게이트 등급과 비슷한 조건으로 구분되었다. 헌터 개인의 마력과 이능의 종류, 그리고 신체의 능력까지. 모든 수치를 합산해 1에서부터 위로 숫자가 커지는 식이었다.
그중 10등급을 넘어가는 현터는 현재 전 세계에서 60명 안팎이었다. 14등급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13등급에 이른 건 여덟 명이 전부였다. 헌터들의 등급은 그보다 두 단계 아래의 게이트를 홀로 공략할 수 있다는 지표이기도 했다. 물론 같은 수준의 헌터가 다섯 명 이상 입장할 경우 본인의 등급보다 1, 2단계 높은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에선 10등급 헌터가 둘, 11등급 헌터는 한 명뿐이다. 그들이 뭉쳐도 11, 12등급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내의 시선이 현우에게 쏠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등급은 13이라는 숫자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국내에서 아홉 번째로 열린 11등급 게이트 공략에 그가 참가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흘인가.’
통상적으로 게이트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공략에 필요한 기간은 길어진다. 게이트 내부도 넓어지고, 몬스터의 숫자도 많아지니까. 핵을 파괴하기 위해 필요한 마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래도 지난 미국에서의 공략보다는 짧게 끝냈다. 다른 헌터들이 함께 들어간 덕분에 잔챙이 몬스터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물론 보수는 좀 줄겠지만.
‘부지런히 벌어야 여왕님처럼 모시고 살 텐데.’
전생에서 나름 있는 집 자식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생에서는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헌터 활동을 시작하며 이리저리, 집안에 돈이 많아지긴 했지만. 은지를 모시고 살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부족해 보였다.
‘상급 공략을 좀 더 나가 볼까?’
현우는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의 뒤로 함께 들어갔던 다른 헌터들이 따라 나왔다. 시끄러운 셔터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고 눈이 아플 정도로 따가운 플래시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게이트 공략 소식을 떠들어 대는 앵커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인상을 구긴 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안개처럼 생긴 게이트의 표면에 금이 가 있었다. 핵을 파괴했으니 이 상태로 2, 3일가량 지나면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균열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린 현우가 곧장 외부에서 대기 중이던 번영 길드의 서포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폰.”
멀뚱멀뚱, 그를 보고만 있던 전속 서포터가 다급히 짐을 뒤져 핸드폰을 가져왔다. 곧장 은지에게 전화를 걸자 짧은 신호음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공략 끝나서.”
-네, 보고 있어요. 길드에서도 뉴스로 계속 확인하던 중이라……. 다친 곳은 없어요? 안 피곤해요?
“어디?”
-네?”
“채널.”
-아… SCS…….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낸 현우가 서포터에게 무언가를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잘 지냈어?”
-저야 당연히… 다친 곳 없냐고요. 계속 걱정했… 어?
마침 제 머리통보다 큰 카메라를 짊어진 남자가 다가왔다. 현우는 그를 발견하고 손을 까딱거렸다. 지척 거리까지 다가온 카메라가 그를 담았다.
“차, 차현우 헌터님, 공략을 마치신 소감 한마디…….”
“질문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촬영만 하세요.”
대번에 앵커가 마이크를 내밀었고, 서포터가 그를 밀어냈다. 그들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은 현우가 카메라 앞에서 장비를 벗기 시작했다. 땀과 피에 전 특수 소재 타이즈가 조각처럼 완벽하게 빚어진 상체를 적나라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제야 현우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보시다시피 멀쩡해. 다친 곳 없으니까 안심해도 된다고. 제대로 못 씻어서 지저분하겠지만.”
-아, 정말…….
울먹이는 목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는 그녀를 걱정시키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래도 널 만났으니까.’
다시 같은 선택을 해야 된다 해도 오늘을 택하리라.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이 삶이 시험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가브리엘을 비롯한 천계의 천사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평범한 영혼에 불과한 그가 영웅의 영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시험대로 보낸 것이다.
지금의 삶은 미리 받은 보상. 현우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들의 기대를 충족한다면 또 한 번, 이번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을 터. 그러면 내세에서 또다시 그녀를 만나 사랑할 수 있겠지.
‘대체 영웅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선을 넘나든다 해도, 은지를 걱정시킨다 해도 멈출 수 없다. 여전히 지독히도 이기적인 그는 스스로를 위해 은지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쓰디쓴 감정을 삼킨 현우가 애써 덤덤한 목소리를 꺼냈다.
“일 언제 끝나는데. 오늘도 야근이야?”
-……공략이 끝났으니 바쁠 거예요.
“그래서 몇 시?”
-잘은… 한 10시? 11시쯤에는…….
“데리러 가도 돼? 보고 싶어.”
이번 게이트는 그가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지 닷새 만에 열렸다. 어떻게 해명을 할 수도 없는 실수인지라 그녀의 눈치만 살피는 나날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헤어진 탓에 줄곧 그녀만 생각했다.
“……보고 싶어.”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빨리 끝내 볼게요.
“나 기다리는 거 잘하니까 천천히 해.”
무려 생을 건너서까지 기다렸는데 그깟 몇 시간을 못 버틸까.
-……네.
“저녁 거르지 말고. 도시락 보낼 테니까 챙겨 먹어.”
-……현우 씨도요. 식사 챙겨요.
“응, 나중에 봐.”
통화를 끊기 전 카메라에 잡힌 입매를 가린 현우가 속삭였다.
“사랑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 *
은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그녀를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자신의 것처럼 가쁘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며칠간의 불안이 조금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리를 안은 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은지가 꼬물거렸다. 그때마다 아랫도리가 바지를 밀치며 꺼덕거렸다. 하지만 파정할 때 루이자의 이름을 입에 담은 후 조심스러워진 그는 은지를 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오늘은 안 할 생각이니까.”
“……왜요?”
“……내가 지난번에, 너무 억지로 한 것 같아서.”
물론,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지난번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달려드는 것만은 참아야지.
‘몸이 목적이라고 오해하면 큰일인데.’
대체 어떤 식으로 지난번의 실수를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저기…….”
“왜?”
은지의 부름에 곧장 답을 한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은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뭐지?’
드디어 지난번 그 일을 물어보려나? 루이가 누구냐고? 왜 저랑 하면서 그 이름을 부른 거냐고?
‘씹… 뭐라고 해야 되지?’
현생이니 전생이니, 그런 말을 해 봤자 미친놈 취급만 받을 텐데.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롯이 은지뿐이었으니까. 괜한 오해가 쌓이는 건 사절이었다. 이미 그 오해가 쌓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우가 갈팡질팡,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때.
“지난번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요, 그… 진짜 이상한 얘기라고 할까…….”
“……뭔데.”
“흠, 흠, 그,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거예요.”
왜 이렇게 서론이 길지?
“……무슨 얘긴데?”
현우의 목울대가 꿀렁거림과 동시에 우물거리던 은지가 말을 이었다.
“혹시 아레스라고… 알아요?”
순식간에 몸이 답을 대신했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그를 바라보는 은지의 시선이 복잡했다.
“그럼 테노… 엠? 페드로라는 이름은요?”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너무 당황한 탓에 저도 모르게. 다급히 입을 다물어 보지만 이미 물을 엎은 후였다. 당황한 것과 별개로 현우의 심장은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은지를 안고 있던 몸은 어느새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나를… 기억한다고?’
그럼 그날의 지독한 짓도 기억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나? 아레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분명…….
헉, 하고 숨을 삼키기 무섭게 은지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처음에, 현우 씨랑 만났을 때요.”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처음에는 그냥, 내가 욕구 불만인 줄 알았거든요?”
얼굴을 벌겋게 붉힌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데 자꾸… 어, 뭐라고 해야 되지? 잔상처럼 현우 씨 위로 금발 남자가 어른거리고… 꿈 내용도 계속 바뀌는데… 너무 이상한 거예요. 내가 그 여자가 된 것 같을 때도 있고…….”
은지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꿈이라고, 꿈이라니.
‘아르페시스처럼 꿈을 통해 나를 본 건가?’
이미 이와 같은 케이스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격양되기 시작했다. 은지가 자신을 기억할지도,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이게 뭐예요? 꿈에서도 그 사람들이 나를 루이라고 부르고… 당신도, 나랑 하면서 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기뻐서 얼굴이 상기되었다. 말해 주어야 하나? 말해서는 안 되는 걸까? 현우는 자신을 보고 있을 가브리엘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결국 홀로 결론을 내야만 했다.
‘안 된다면 막으셨겠지.’
애초에 은지에게 기억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테고.
이를 악물고 감정을 삼킨 현우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
“네?”
참아 보려 했지만 참아지지 않아서, 결국은 눈물이 흐른다.
“어…….”
“너랑 내가 처음 만난 생의 기억.”
그날 현우는 은지에게 페드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끝에서 은지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앉아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페드로의 환생이다?”
“어.”
“그리고 난 당신이랑 그렇고 그런… 음, 그런 사이였다는 거죠?”
“응.”
“그런데 정작 결혼은 당신 형이랑 했다는 건가요?”
“내가 죽었으니까. 쿠베트와 테노리엘의 결합은 그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대처였어.”
“……그 형이 아레스고요.”
“맞아.”
“……에이, 거짓말.”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부정하던 그녀가 현우의 얼굴을 보고 멈칫거렸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인데요.”
“그래도 사실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현우는 그녀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야기가 끝난 채 한참이 지났다. 그녀가 받아들일 시간은 충분히 주었고, 이제 그가 궁금한 것을 물어볼 차례였다.
“어디까지 기억해?”
“……네?”
“나를 얼마나 기억하냐고.”
은지는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처음 만났던 날은? 네가 나 좋다고 쫓아다닌 건? 내가 널 안은 날도 기억나? 내가…….”
그녀를 두고 죽었을 때의 기억은? 그의 부고를 들었을 무렵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차마 꺼내지 못한 질문 뒤로 은지가 어물거리며 답을 주었다.
“어… 한 번? 페드로라는 남자가 나온 꿈은 한 번뿐이에요. 전부 그런 종류긴 한데, 다른 꿈은 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 녹색 눈에… 내가 아레스라고 부르던 사람이었어요. 아니, 팔이 있었던 적도…….”
“한 번?”
은지의 말을 끊어 낸 현우의 뺨이 씰룩거렸다. 고작? 현생에서 처음 만난 날 이후 매일 꿈을 꾸었다면서? 다른 건 전부 아레스와 한 꿈이라고?
그들이 부부가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루이자가 둘째를 가질 때까지 미카엘의 곁에서 지켜보았으니까. 덕분에 그들이 침대 위에서 자신을 불러다 이것저것, 해 보았다는 것도 알고. 그게 아레스 나름의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질투를 하긴 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레스가 루이자를 행복하게 해 주었고, 루이자는 아레스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기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질투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의 루이자는 분명, 아레스도 사랑했을 테니까.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루이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아레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질투가 나고, 뿌듯한 것 같으면서도 착잡한 심정. 현우는 정말이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건 초조함이었다. 그보다 아레스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면 어쩌지?
‘나누는 건 해도 밀리는 건 못 참지.’
현우의 심장에서 사나운 경쟁심이 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전생에서 아레스에게 흠뻑 물든 그녀의 영혼에 자신을 더 새겨 넣어야 할 것 같았다. 현우가 혼자만의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은지는 계속 말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좀 그런 내용의… 무슨 병에 있는 걸 마시고… 엄청 그런 꿈이었죠.”
“어디까지?”
그녀가 자신과의 정사를 기억하고 있다. 달뜨는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당신이… 싸는 데까지요.”
점점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현우의 목소리는 격양되었다.
“난 그날 여러 번 쌌어. 얼굴에? 안에? 정확히 몇 번?”
은지에게 바짝 몸을 붙인 현우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 황홀했던 정사를 떠올리자 목이 바짝바짝 탔다.
“입으로 하려다가 얼굴에… 다음에는 안에, 총 두 번이요.”
그의 뺨을 때리기 전에 꿈이 끝난 모양이다. 안도일지 실망일지 모를 감정이 심장에서 꿈틀거렸다.
“전생의 기억이라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춘 현우가 말했다.
“그날 내가 너 빨아 줬어. 처음이라서 손가락으로도 했는데, 내가 했던 말은 기억나?”
수백 번, 수천 번을 그렸던 그녀와의 추억은 페드로와 현우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날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날 그녀와 주고받았던 야한 대화까지 모조리.
“씻고 기다렸나? 장미 향이 나는데, 향유 썼어?”
“…….”
“기쁘네, 나만 기대한 게 아니라서.”
의심과 경계, 불신과 경악이 뒤섞인 은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녀도 그날의 대화를 본 것이다.
“잘 봐, 만져도 보고. 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
“누가 이렇게 예쁘게 크라고 했어.”
현우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그가 은지에게 입을 맞추었다.
“하… 은지야, 루이…….”
허겁지겁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매달리는 움직임이 절박했다. 현우는 게걸스럽게 입술을 빨며 말했다.
“허락해 줘, 그때처럼.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은지는 그를 밀어내며 품을 빠져나갔다.
“자, 잠깐만요, 오늘은 안 한다고 했잖아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장 그녀를 안아서 저를 새겨 넣고 싶은데.
“은지야…….”
엉금엉금 기어 그녀를 따라간 현우가 애원했다.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동자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 그의 눈물에 고정되었다.
“안고 싶어.”
간절하게 허락을 구걸하자 기적처럼, 떨리는 손을 뻗은 은지가 그의 목을 안아 주었다. 현우는 무작정 은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무, 무섭다고요!”
그에 겁에 질린 것처럼 빽, 소리를 내지른 은지가 몸을 웅크렸다.
“으하, 아……. 미안…….”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는 위태로웠다. 억지로 숨을 고른 현우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은지를 바짝 끌어안았다.
“쓰다듬어, 줘. 나 좀.”
대번에 그의 품으로 끌려온 은지가 머뭇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아, 하아…….”
그녀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고르기도 한참. 현우는 반쯤 찢어져서 덜렁거리는 은지의 바지 속으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으응…….”
은지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 곧장 비어 있던 손이 그녀의 유방을 찾아 나섰다. 브래지어를 끌어 올린 현우는 한쪽 유방에 입을 묻고 핥기 시작했다.
“하아, 맛있어. 달아.”
“흣, 말이 되는, 으응, 소리를…….”
“넌 달아.”
쮸웁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아들이자 은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 틈을 타 속옷 위에서 갈라진 음부의 틈새를 더듬던 손이 집요해졌다.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까슬거리는 음모를 문지르자 은지는 그 감촉이 불편한 듯 몸을 뒤척거렸다.
“가만히, 있어 봐. 제대로 만지게.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래서 아레스를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아도 자신을 더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진짜, 으응, 말 좀 그만해요.”
흠칫, 굳은 몸이 경직되었다. 조심스럽게 은지의 유방에서 고개를 든 현우가 물었다.
“싫어?”
“……침대 위에서 말 많은 남자 싫어요.”
“여기, 침대 아닌데.”
“……소파에서 허겁지겁 달려드는 남자도 싫어요.”
그길로 은지를 번쩍 안아 든 현우가 침실로 향했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은지까지 나신으로 만들자 아랫배에 닿아 있던 성기에서 쿠퍼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조심스레 은지의 손을 끌어 오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성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아.”
그에 현우는 곧장 다시 은지의 음부에 손을 댔다.
“하앙, 싫어, 핫!”
침대 위에 엎드린 은지는 현우의 품에 폭, 파묻혀 있었다. 커다란 체격이 그녀를 가두고 있는 탓에 뒤에서 허리를 치대는 현우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자꾸만 과한 자극을 피하는 것처럼 도망가는 은지를 잡아 두기 위한 체위였다.
팡, 팡, 팡.
포동포동한 엉덩이 살과 딱딱한 복근이 맞닿을 때마다 달콤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지와 깍지를 낀 채 열심히 허리를 놀리던 현우가 별안간 낮고 질척거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후으……!”
바르르, 떨리는 등 근육이 그의 파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아, 또오! 콘, 돔, 끼라고… 했는데에!”
그에 아등바등, 몸을 비튼 은지가 울먹거렸다. 현우는 그런 은지의 귓가에 입술을 파묻고 으르렁거렸다.
“그건 안 돼.”
“아, 아기 생긴, 아앙, 생기면 어떻… 흐앙!”
“결혼하자. 안 생겨도, 나랑, 헉, 하겠지, 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은지가 교성을 내질렀다.
“아항! 항! 싫, 이렇게는, 싫어, 흐앙!”
“이미 늦었어.”
빠르게 쳐올리던 허리가 멈추고, 뭉근하게 문지르는 움직임에 은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흐으, 널 놔줄 것 같아? 너한테 선택지는 나뿐이야.”
“아응, 앙!”
“지난 생에는 형이랑 했으니까, 이번에는 나랑, 하아, 해야지. 안 그래?”
은지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음습한 집착이 녹아 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그는 생을 거듭할 때마다 그녀를 찾아갈 것이니까.
은지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한 현우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오금에 팔을 걸고서 다시금 추삽질을 이어 가자 은지의 몸이 힘없이 나풀거렸다. 현우는 그녀에게 잘게 입을 맞추며 하체의 감각에 집중했다. 이미 그가 싼 정액과 애액이 뒤섞여 거품을 만들어 낼 정도였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 아레스와 했던 만큼 현생에서는 저와 해야 될 게 아닌가. 아레스를 떠올리자 또, 질투심과 묘한 경쟁심이 뒤섞였다.
“형이랑 할 때도, 정신을 못 차리더니.”
“아……?”
“꿈으로, 봤다며. 하아, 나도 봤거든. 미카엘의 곁에서.”
“그, 그게 무슨… 흐응!”
“자주 빨아 주던데, 누가 더 잘해? 비교해 봐.”
“하응! 항!”
“찌르는 건? 내가 더, 잘할 것 같은, 하아!”
줄곧 깊게 찌르는 것에 집중하던 현우가 체위를 바꾸었다.
“말, 말 좀 그만……!”
처음에는 자제를 해 보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자 밍숭맹숭한 숭늉에 물까지 탄 기분이었다.
“그것도 안 될, 것 같네. 난 말하면서 하는 게 좋아.”
정확히는 음탕한 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가 좋은 것이지만. 더군다나 말을 하지 않으면 아레스를 언급할 수가 없지 않나. 현우는 전생의 형제를 이 자리에 부르는 게 좋았다. 은연중 그녀가 제 것이라고 과시하던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기분이었으니까.
그가 그리운 것과는 별개로 이번 생에서는 저가 은지의 배필이 될 것이다. 그러니 확실히 해 두어야지. 그 우위만 분명하다면 함께 은지를 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바이브를 사 볼까?’
꽤나 자극적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 현우가 허리 짓을 멈추었다.
“아흥, 흐으… 하아…….”
축 늘어진 은지의 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아직 한참은 더 하고 싶으니 그녀의 체력도 신경 써야 할 때였다.
은지의 다리를 옆으로 모은 그는 아주 잘게, 그리고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한쪽으로 쏠린 유방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음탕했다. 전생의 그녀는 깊게 찌르는 것보다 얕은 곳을 빠르게 문질러 줄 때 더 좋아했다. 혹시 이번에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더니.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반응이 그리 극적이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격한 반응이 돌아왔을 텐데. 그녀는 적당히 기분 좋은 듯 나른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몸까지 전생을 따르는 건 아닌 모양이네.’
그의 성적 취향은 어느 정도는 전생에서 딸려 왔지만, 은지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힘들어할 때 하면 되겠다.’
그럼 은지가 쉴 시간을 주면서, 저도 욕심껏 허리를 흔들 수 있을 테니까.
현우는 그날 은지를 제 아래에 가둔 채 정신없이 그녀를 탐했다. 몇 번째일지 모를 파정에 연결 부위에서 울컥울컥 삐져나오는 정액을 보니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 * *
“화, 황후 폐하아…….”
가을 정원에서 가볍게 차를 마시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1시간짜리 짧은 티타임에 참석한 유일한 손님, 로젤리나가 앉아 있었다. 제르민이 신전의 일로, 조프리는 약하게나마 감기 기운이 있다 하여 불참했다. 그 결과 그녀와 에스메랄다, 단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것이다. 3년이 가깝도록 이어진 만남은 여전히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에 회의감이 짙어지는 나날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부러 무심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찌 부르느냐.”
로젤리나는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 말문을 열었다.
“나, 날이 좋은데… 저기, 화단에 꽃도 많고…….”
다른 귀족들이 지금처럼 말을 어물거렸다면 한마디 쏘아붙였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에 계속 용건을 미루던 로젤리나가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 산책이라도……!”
직후 삑, 하고 어긋난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제 입을 막는 모습이 눈에 박혀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꽤나 오랫동안 로젤리나를 눈에 담았다. 점차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와 그 틈을 타 눈가에 매달린 물방울. 두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떠는 아이를 왜 다시 만났는지.
“그래.”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르면서 그냥 답해 버리고야 만다. 에스메랄다가 찻잔을 내려놓는 동안 번쩍 고개를 치켜든 로젤리나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를 뒤로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따라붙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이 무서워 덤덤히 정면을 응시하기도 한참. 아름답게 조성된 황후 궁의 정원을 거닐던 에스메랄다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온기가 그녀의 손에 닿은 탓이었다. 손을 전부 감싸지도 못할 그 온기는 작았다. 고작해야 소지와 약지만 겨우 가두어 버릴 만큼.
뿌리치고 싶다는 충동이 한 번, 그러쥐고 싶다는 욕심이 한 번. 어디로도 치우치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걸음 정도 들어갈 거리에서 그녀를 따라오던 로젤리나가 흐트러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팔을 쭉 뻗어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은 상태였다.
죽은 페라노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자색 눈동자가 형편없이 떨리는 광경은 무거웠다. 끝내 가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다시 시선을 들었고, 말없이 걸음을 이어 갔다.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을 움켜쥔 온기에 힘이 더해졌다.
* * *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려 할 때마다 파드득 튀어 오르는 귀족들과의 회의는 지긋지긋했다. 여느 때와 다를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회의가 끝날 무렵에 들려온 말이 이리도 거슬리는지.
“충심을 담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로젤리나와 조프리의 처분이 언급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차갑게 일갈했다.
“이미 수없이 답을 주었을 텐데. 이는 황실의 문제인바, 자네들이 신경 쓸 것 없네.”
“하나 패륜아의 자식들입니다. 훗날 폐하께 위해를 가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충언을 올리니, 부디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부디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선두에 나선 귀족은 물론, 그 뜻에 동참하는 이들까지 입을 모아 말했다. 재빠르게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꼴을 보자니 아르페시스를 대신해서 황좌를 지키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자네들은 정말이지 겁이 많군.”
가장 먼저 이 주제를 언급한 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어찌 폐하를 해한단 말인가.”
“소신들이 염려하는 것은 오늘이 아니라 훗날의…….”
“아.”
귀족의 말을 자르고 제 몸보다 큰 황좌에 몸을 기댄 에스메랄다의 입가가 비틀렸다. 조심스럽게 제 손을 잡아 오던 온기가 아른거린 탓일까? 이어지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겁이 많은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강건함을 의심하는 것이었군.”
“그런 것이 아니옵고…….”
“훗날 그 아이들이 폐하를 밀어낼까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을 의심한다는 뜻인 것을.”
그제야 말을 꺼냈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평소라면 여기서 끝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아른거리는 온기가 그녀를 나서게 만들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에 계속 토를 다는 이유가 뭐지? 무고한 어린아이의 피가 그리도 보고 싶은가?”
“황후 폐하, 이는 결코 무고함을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패륜아의 자식, 언제고 같은 역사를 밟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이 반복되도록 방치할 것이라는 의미로군.”
“폐, 폐하, 절대 그런 의도가…….”
“자네가 어린아이의 피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도 피가 보고 싶다면 자네의 자식이나 조카를 데려다 해결하게. 괜히 다른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지 말고.”
더 이상의 첨언은 불허하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스메랄다가 회장을 등졌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다 말고 멈춰 선 것은 걸음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념과 감정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 끝에서 에스메랄다는 꽉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들을 불러오게.”
그날, 에스메랄다는 제 기억보다 부쩍 자라난 아이들을 보고 눈을 감았다. 처음 만났을 때 제 몸도 가누지 못했던 조프리는 더 이상 유모에게 안겨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바들바들 떨 뿐이다. 로젤리나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나온 시간이 사무치다는 것을 느낀 후에야 후회를 배운다.
* * *
루이자처럼 난산이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소피아의 출산은 순조로웠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산실 밖에서 서성이던 오멘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피아는?”
“괜찮으실 겁니다.”
주치의와 오멘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줄곧 오멘의 곁을 지켰던 아레스와 페르멘이 서로를 보고 웃었다.
“안아 보셔야죠, 건강한 도련님이십니다.”
“아들이라고…….”
울먹이는 오멘의 목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코가 찡해졌다. 페르멘은 코를 문지르며 산실 내부를 슬쩍, 살폈다.
“고생했어요, 소피아. 정말 고마워요.”
소피아의 손을 붙든 채 아이를 안아 든 오멘의 뒷모습이 보였다. 절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간 오멘을 볼 때마다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그는 예전처럼 대화를 하고, 예전처럼 웃기도 했다. 하지만 때때로 페르멘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언제나 같았던 그들의 선택이 달라진 건 훨씬 전의 일이었는데. 그 모습을 본 후에야 그들이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되돌아오자 페르멘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후우.”
오멘의 품에 안긴 작은 천 뭉치를 보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앞으로 저 아이와 모든 순간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형제들의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옹알이를 알아듣겠다고 귀를 기울이고. 처음으로 뒤집기를 성공할 때 함께 웃어 주고. 걸음마를 가르치겠다며 손을 잡아 주겠지. 형제 덕분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된 그는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오멘은? 제 아이가 자라나는 것조차 봐 줄 수 없는 그는. 쓰디쓴 한숨을 삼킨 페르멘이 몸을 물렸다. 처음으로 아이를 안아 본 지금 오멘이 얼마나 애틋하겠나. 괜한 것에 신경 쓰지 않도록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다.
“펠, 빨리 들어와 봐. 제수씨도요. 우리 아기 엄청 예뻐요.”
하지만 오멘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산실로 들어가지 못한 채 서성이던 멜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감정을 추스르기에도 바쁠 텐데 저와 제 아내까지 챙겨 주는 오멘이 참, 고맙고 미안했다. 자칫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매에 힘을 주자 아레스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들어가 봐라. 네 아이이기도 해.”
“하지만…….”
“오멘이 그걸 바라니 해 주렴.”
그에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자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고 있던 오멘과 시선이 마주쳤다.
“빨리 와, 빨리.”
손을 휙휙 저어 가며 그를 부른 오멘이 일어났다.
“제수씨, 이리로 오세요.”
그는 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멜리안에게 내어 준 후 아이를 안겨 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 든 멜리안이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테노리엘 부인…….”
지친 기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소피아가 멜리안의 손을 잡았다.
“부디 잘 부탁드릴게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야 만 멜리안이 소피아의 손을 꽉 마주 잡으며 답했다.
“내가 배 아파 나은 아이보다 더 귀하게 키울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하고 속삭이는 멜리안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페르멘도 움직일 수 있었다. 멜리안의 곁에 서서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눈에 담기도 잠시. 오멘의 곁으로 다가간 그가 툭, 하고 어깨동무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 자국을 닦던 오멘이 숨을 골랐다.
“다 울었냐?”
“……안 울었어.”
페르멘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믿어 주기로 했다. 오멘의 어깨를 두드려 준 그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은 지어 놨고?”
“네가 생각한 거랑 똑같을걸.”
큼, 하고 잠긴 목을 푼 오멘이 페르멘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서로를 보며 활짝 웃은 쌍둥이가 동시에 똑같은 이름을 말했다.
“페드로.”
“페드로.”
대륙력 1442년 카 3일.
떠나 버린 형제를 대신해 오멘과 페르멘의 아들, 카 아그라 테노리엘 페드로가 그들의 곁으로 와 준 날이었다.
* * *
라의 달이 시작되자마자 황도로 돌아온 아르페시스는 곧장 에스메랄다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그의 인기척을 느낀 에스메랄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테고, 그는 반가운 재회의 입맞춤을 건넸을 텐데.
“성하께서 범인이 확실해요!”
“황후 폐하, 공정한 판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세요!”
“나, 나두 범인 할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고요해야 할 장소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스메랄다의 책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머리가 셋.
“이게 무슨…….”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사이 에스메랄다에게 고정되어 있던 세 쌍의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오! 폐하, 돌아오셨습니까?”
“……성하.”
아르페시스가 익히 알고 있는 제르민이 가장 먼저 아는 체를 해 왔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귀궁하셨다, 태양 궁에 전언을 보내도록.”
제르민 덕분에 그의 방문을 알아챈 에스메랄다의 보좌관들이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저와 마주 보고 있는 아이들. 제르민의 옆에 일렬로 서 있는 로젤리나와 조프리에게.
“아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서로를 주시하기도 잠시. 까치발을 들고서 겨우 책상 너머를 보고 있던 조프리가 비틀거렸다. 파란 마나가 아이를 잡아 주었다. 반사적으로 마나를 사용한 아르페시스가 시선을 돌렸다.
“아시스, 왔어?”
덤덤한 표정의 에스메랄다가 그를 보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에스메랄다와 책상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에 후다닥, 책상에서 떨어진 로젤리나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직후에는 저보다 작은 조프리를 잡아끌며 인사를 시켰고.
“인사, 빨리 인사드려. 황제 폐하셔.”
“아, 안녕하세요…….”
우물거리며 인사를 건넨 조프리가 로젤리나의 뒤로 숨었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기이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왜 저 아이들이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에 있는 걸까? 그의 의문에 답을 해 준 건 에스메랄다였다.
“디저트 실종 사건의 범인을 색출하려던 참이었어.”
“……뭐?”
얼빠진 아르페시스의 반문과 달리, 답을 내어 놓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평의했다.
“성하와 로젤리나에게 충치가 생겼다기에 디저트를 제한했거든. 그로 인해 양이 많이 줄었는데, 그 얼마 안 되는 디저트가 모조리 사라진 모양이야.”
그에 로젤리나가 범인을 찾아 달라는 청원서를 만들어 황후 궁으로 찾아왔다고.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아르페시스의 눈치를 살피던 로젤리나가 슬금슬금, 다시 에스메랄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퍽 간절하여 지켜보는 이들이라면 모두 애처로움을 느꼈을 정도였다.
“황후 폐하… 정말 저와 조는 한 입도 먹지 못했어요. 새로운 케이크가 필요해요…….”
“저도요! 케이크를 더 내어 주세요!”
반면 로젤리나의 옆에서 추가 디저트를 요구하는 제르민의 눈은 반짝거렸다. 두 사람을 가만히 보던 에스메랄다가 덤덤히 말했다.
“당장 결정하기엔 힘들겠구나. 홀로 디저트를 독식한 이가 여기에 있다면 평소보다 많은 케이크를 먹게 되는 것이니까.”
“전 무고한 피해자인데……!”
“무고하다면 잠시 기다려 보거라. 치아 검사를 해보면 누가 오늘 치 디저트를 독식했는지 알 수 있겠지. 궁의를 들라 하게.”
“허.”
아르페시스가 불청객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사이 궁의가 도착했다. 아이들의 입을 모두 확인한 궁의는 제르민의 이 사이에 끼어 있던 아몬드 조각을 보여 주며 말했다.
“성하, 오늘 식단에는 견과류가 없었다고 전달받았습니다만.”
“케이크 위에 아몬드가 올라갔습니다.”
결국 증거 인멸에 실패한 제르민이 범인으로 밝혀졌다. 그에게는 향후 3일간의 간식 금지령이 내려졌다.
“3일, 3일이라니요! 이는 분명 과한 처사입니다.”
“3인분을 독식하셨으니 그에 마땅한 벌을 받으셔야죠. 형벌로 죄를 씻어 내어 다시금 기회를 얻으라는 성서의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모범을 보여 주시지요, 성하.”
제르민의 반발을 어렵지 않게 묵살한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오웬 신관에게 오늘 일을 전달하고, 로젤리나와 조프리에게는 평소처럼 디저트를 내어 주게.”
“예, 황후 폐하.”
아이들을 데리고 황후 궁으로 왔던 시녀가 공손히 답했다.
“판결은 끝났으니 너희는 나가 보거라. 성하께서도 이만 돌아가시지요.”
사무적으로 말을 끝낸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그에 활짝 웃은 로젤리나가 조프리의 손을 잡고 뛰쳐나갔다. 제르민이 불퉁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 나가자 에스메랄다가 보좌관들마저 내보냈다.
“30분간 쉬도록 하지.”
그런 후에야.
“오는데 피곤하진 않았어?”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잠시간 복잡한 눈으로 문가를 바라보던 아르페시스가 곁으로 다가온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았다.
“그다지.”
“저녁에나 도착할 줄 알았더니.”
“예전보다 마나가 많아졌으니까. 그대가 보고 싶어서 서두른 것도 있고.”
쪽쪽, 하고 입을 맞추자 에스메랄다가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나도 네가 없어서 허전했어.”
소파로 자리를 옮긴 아르페시스는 재회의 키스를 건넸고, 에스메랄다는 열렬히 응해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황홀했다. 아르페시스는 더듬더듬, 에스메랄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침실에 다녀오면 안 되겠나?”
입술을 맞댄 채 웅얼거리자 대번에 고개를 튼 에스메랄다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지금은 안 돼. 오늘 일정을 일찍 끝내 볼 테니까 그때…….”
“그대가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겠다. 맹세해, 제발, 그대가 너무 그리웠다.”
이미 벌떡 일어난 성기를 에스메랄다의 다리에 문지르기 시작한 아르페시스가 애원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완고했다.
거듭된 거절에도 달아오른 몸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핥았다. 멋대로 그녀를 적셔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난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 떠나 무려 세 계절 만에 만나는 배필이었다. 당장이라도 에스메랄다를 안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시스.”
하지만 감히 그녀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 아르페시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에스메랄다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동시에 그의 품을 빠져나간 에스메랄다가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입으로 해 줄 테니까, 몇 시간만 참아 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황후 궁의 침실로 이동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에스메랄다. 그녀가 바지춤을 풀어내자 곧 예민한 살갗에 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아르페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벅지 안쪽을 쓸어 주는 손길에 이어 귀두를 물고서 우물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이 생생했다.
“하아.”
몸을 떨며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르페시스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더 깊게, 해 줄 수 있겠나?”
조심스러운 어조가 무색하게도, 에스메랄다는 기꺼이 그를 집어삼켜 주었다.
“아!”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쯉, 쩍, 타액에 젖어 든 성기는 아찔한 소리에 파묻혔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흐르는 것이 좋았다. 부드러운 금발이 아르페시스의 손가락에 엉켜 들었다. 오로지 그만을 위해서 앞뒤로 고개를 움직이는 그녀가 아름다웠다.
천천히 에스메랄다의 뺨과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그의 오른손이 드레스 안을 파고들었다. 옷자락 안에 감추어져 있던 가슴을 움켜쥐자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으흥.”
바짝 일어난 유방의 돌기를 손가락으로 긁자 달큼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족스럽게 웃은 아르페시스가 남은 한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문질러 줘.”
그에 아르페시스의 선단을 손에 쥔 에스메랄다가 귀두를 쪽쪽, 빨아 주었다. 빠르게 선단을 문지르는 감각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그를 파정시킨 익숙한 자극이었다. 자연스럽게 사정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어 가며 사정을 참았다. 겨우 정오를 넘긴 시간에 도착했으니, 그녀를 안기 위해선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지금 이 아찔한 구음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었다.
어느새 헐거워진 드레스 밖으로 에스메랄다의 젖가슴이 흘러내렸다. 양손을 아래로 내린 아르페시스가 처녀 적보다 더 풍만해진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주물렀다. 뽀얀 피부에 붉은 손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아, 흐아.”
낮게 잠긴 신음은 선정적이었다.
황홀한 구음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왜 참는 거야?”
아르페시스의 성기를 입에서 뱉어 낸 에스메랄다가 선단을 혀로 길게 핥으며 물어 왔다.
“더… 느끼고 싶어서.”
아르페시스는 솔직히 답하면서도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해.”
저를 두고 가겠다는 말이 너무 쉽지 않은가? 언제나 저를 뒤로 미루는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불쑥, 심술이 차올랐다.
“……해 주겠다고 했잖은가.”
“네가 이렇게 고집부리면서 참을 줄은 몰랐지.”
“조금만 더 해 주면 안 되나?”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마저도 좋아서 나른한 숨이 새어 나갔다.
“일어서 볼래?”
“왜?”
“입에 넣고 흔드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그대가 힘들잖아.”
물론,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말대로 구음 중에 멋대로 허리를 흔드는 감각을 좋아했다. 에스메랄다가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힘들어하기에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몇 년간 이어져 온 혼인 생활 중에서도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해 봐야 느는 거야.”
어서, 하고 그를 재촉한 에스메랄다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페시스가 제 성기를 쥐고 눈치를 살폈다. 위아래로 흔드는 움직임은 분명 그가 곧 일어날 행위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본 에스메랄다가 성기에 입술을 문지르며 웃었다.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르페시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고, 에스메랄다는 곧장 그의 것을 입 안 가득 물었다.
망설임은 금세 사라졌다. 그녀의 허락을 명분 삼아 허리를 쳐올리자 흐릿해지던 사정감이 다시 찾아왔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손에 쥐고서 저가 원하는 박자로 허리를 흔들었다.
“하아, 흐으!”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손길도. 어떻게든 더 크게 입을 벌려 그를 받아 내주는 노력도. 눈물이 맺힐 정도로 버거우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는 마음까지. 그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목구멍 깊은 곳에 저를 박아 넣고 파정했다. 하복부에서 전신으로 퍼져 골을 때리는 쾌감.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겪을 때마다 새로운 그 감각. 그건 오롯이 에스메랄다만이 줄 수 있는 황홀함이었다.
“하아, 하…….”
아르페시스는 평소처럼 후희를 즐기는 대신 곧장 성기를 빼내었다.
“콜록, 켁.”
그리고 서둘러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입을 맞추자 비릿한 정액의 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 안을 청소해 주는 것처럼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핥아 대기를 한참. 아르페시스는 염려 섞인 눈으로 에스메랄다를 살폈다.
“많이 힘들었나?”
“지금은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은걸.”
그런 말을 하면 더 자주 하고 싶어지지 않나.
한숨을 삼킨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드레스를 추슬러 주었다. 분명 순간적으로 이성이 점멸할 만큼 황홀한 파정을 했는데, 그의 분신은 또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느냐고, 오늘 밤은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파정 직후에 할 말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를 짐승이라고 분류한 에스메랄다에게는 특히나.
‘또 한 번만 된다고 하면…….’
잠든 그녀의 손으로 수음이라도 해야 될 판이다.
깊은 한숨과 들끓는 욕정을 속으로 삼킨 아르페시스는 곧장 에스메랄다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의식한 것은 아니나 반사적으로 힐끔, 문가에 시선이 닿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보았던 작은 뒷모습이 문가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을 따라간 에스메랄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왜?”
몇 번이고 망설이던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아이들.”
“…….”
“집무실에 오갈 정도였던가?”
“……얼마 되지는 않았어.”
아르페시스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생겼다. 그에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불편했어?”
“……낯설었다고 해야겠지. 직접 보는 것도 처음이니까.”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제껏 마주친 적은 없었다.
“미리 언질해 주지 않고.”
아르페시스는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내가 마음을 정했다고 해서 너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아.”
“그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이다. 특별히 꺼리는 것은 아니다만 반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아르페시스는 그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아이들과 교류하는 동안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지나가듯 두어 번, 아직도 만나느냐고 물어본 게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에스메랄다가 나긋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야.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러니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 잊어도 된다고. 에스메랄다는 그를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에스메랄다의 뜻이기는 했으나, 아르페시스는 아이들을 죽이는 대신 살려 주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줄 사람도 붙여 주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만나는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를 올려다보던 자색 눈동자 두 쌍은 잊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잊지 않고 생각을 거듭한다면? 한숨을 내쉰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더 꽉 껴안았다. 복잡한 생각은 뒤로 미루자. 아르페시스는 선황과 관련된 문제를 천천히 밟아 가기로 했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으니 이 정도 비겁함은 괜찮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인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난 기사단을 살펴보고 오겠다. 페르멘이 한 번씩은 얼굴을 비추라더군.”
“주인이 없는 기사단은 기강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니까.”
페르멘의 요구도, 에스메랄다의 설명도 모두 이해했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기껏 돌아왔음에도 다시 떨어져야 한다니. 아르페시스는 아쉬운 마음에 다시 에스메랄다에게 입을 맞추었다. 혹여나 다시 욕심이 날까 봐 가볍게 맞붙었다가 떨어진 그의 입술이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빨리 끝내 볼게. 내일 일정도 조율하고.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지?”
물어보지 못했음에도 원하던 답을 들은 아르페시스가 웃으며 집무실을 떠났다.
* * *
활짝 벌어져 있던 에스메랄다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르페시스는 짧은 고민 끝에 그녀의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주었다.
“좀 괜찮은가?”
이미 기진맥진한 채 축 늘어져 있던 에스메랄다가 눈을 흘겼다. 절로 눈치를 살피게 되었지만 그녀의 안에서 저를 빼내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이런 식으로 다음 날 일정을 비우는 건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으니까. 다른 날은 항상 스스로를 억누르고 꾹 참았으니, 이때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상체를 숙인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쪼며 말했다.
“잠시 쉬면서 하지.”
“으응…….”
그는 느긋하고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 정도면 될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져 준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허리 짓에 집중했다. 그는 한 팔로 체중을 지탱하고, 다른 한 팔로 에스메랄다의 살갗을 쓸어 보았다. 하얀 피부 위로 그가 쏟아 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쇄골에 고개를 묻고서 깊게 숨을 들이쉬자 향긋한 살 내음이 아르페시스를 가득 채웠다. 그 속에 희미하게 섞여 있는 정액 냄새는 정말이지 만족스러웠다.
부드러운 움직임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걸까? 에스메랄다가 그의 귀와 관자놀이에 입을 맞춰 주었다. 곧장 고개를 들어 올린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바짝 맞물린 입술 사이로 서로밖에 알지 못하는 혀가 엉켜 들었다. 줄곧 여유를 간직한 채 느긋하던 아르페시스의 허리 짓이 점차 빨라졌다.
“으응, 응!”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은 에스메랄다가 몸을 비틀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입술을 놔주고서 물었다.
“자세가 불편한가?”
에스메랄다는 한층 거세진 쾌감에 신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침대 위에 고개를 묻고서 엉덩이를 높게 치켜든 에스메랄다의 신음이 한층 선명해졌다. 곧장 몸을 겹치고 가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한 아르페시스 때문이었다.
“하, 하으.”
그는 에스메랄다의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하응!”
갑자기 바뀐 체위에 자극은 받은 건지, 에스메랄다의 내벽이 그를 쥐어짰다. 오늘은 사정감을 참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곁에 있으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으니까.
이윽고 아르페시스의 정액이 에스메랄다의 배 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의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미끈거리는 내벽은 그를 다시 발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르페시스는 사정한 적이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다시 딱딱해진 성기를 에스메랄다의 내벽에 문질렀다. 후희를 즐기면서 절정에 달한 에스메랄다가 쉴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뭉근하게 허리를 돌릴 때마다 선단을 감싼 내벽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게 꼭, 에스메랄다가 입을 맞춰 주는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던 에스메랄다의 팔을 붙잡은 아르페시스가 불현듯 허리를 세웠다. 힘없이 늘어진 에스메랄다의 상체가 딸려 왔다.
“으항!”
귀두가 보일 때까지 빼내었다가 단번에 안쪽으로 꿰뚫자 달콤한 교성이 쏟아졌다.
“항! 하앙! 아앙!”
등 뒤에서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이 보였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혀로 입술을 적신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상체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세우자 어깨 너머로 출렁거리는 가슴이 더 잘 보였다.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세우고 에스메랄다의 안을 파고들기도 잠시. 한 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움켜쥔 아르페시스가 남은 한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턱을 돌렸다. 곧바로 입술을 맞댄 그는 황홀하던 교성을 전부 집어삼킨 채 추삽질에 열중했다.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으며 꿀껄꿀꺽, 삼킬 때마다 단맛이 넘쳐흘렀다.
“흐읍, 으응!”
심술을 부리듯, 한 번씩 손가락으로 유두를 괴롭힐 때면 에스메랄다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아예 두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턱을 놔주자마자 에스메랄다는 도망가듯 고개를 틀어 버렸다.
“흐앙! 하앗! 앙, 아앙!”
아르페시스는 불만을 표하는 것처럼 더 깊게 저를 찔러 넣었다. 포동포동한 엉덩이 살이 아르페시스의 치골에 짓눌려 뭉개졌다.
“그, 그만! 아아앙!”
에스메랄다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직전의 절정에 이어, 또 한 번. 아르페시스는 익숙하게 저를 물어 오는 내벽의 감촉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는 이미 잇자국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서 약이 오른 유두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우고 문질렀다. 뜨거운 혀가 그녀의 피부를 핥는 동안 그의 허리에 점차 더 힘이 들어갔다.
반면 에스메랄다의 몸은 힘이 빠진 것처럼 앞으로 무너지려 했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몸을 아예 양팔로 껴안아 버렸다. 그대로 에스메랄다가 예민한 자궁경부 쪽을 집요하게 찌르자 마침내.
“흐읍, 으학! 아아앙!”
비명과 비슷한 교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뜨거운 액체가 아래로 줄줄 쏟아졌다. 그제야 에스메랄다의 몸을 으스러질 듯 꽉 껴안은 아르페시스가 파정했다. 맞물린 틈을 비집고 꾸역꾸역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로 많은 씨물이 침대 시트에 얼룩을 더했다.
* * *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열락의 시간을 함께한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기가 막힌 소리가 나왔으니까.
“황비?”
“봄부터 계속 말이 나왔어. 후보들을 추려 놨으니까 조만간…….”
이불 밖으로 드러난 에스메랄다의 어깨를 붙잡은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은은한 라퓨나의 빛 속에서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보라.”
“황비로 들일 만한 후보를 추 려놨…….”
“그대의 손으로, 내 옆에 세울 다른 여인을 골랐다는 말인가?!”
“……그래.”
아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목 끝까지 험한 말이 차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아이가 생기지를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한발 빨랐다.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벌써 4년이야.”
혼례를 올리고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이가 생기지를 않아서. 그래서 황비를 들여야 한다고.
“넌 후사를 봐야만 해. 그래야 로젤리나와 조프리도 안전하고, 전쟁이 끝난 후의 일도 체계적으로…….”
“그만.”
억지로 손에서 힘을 뺀 아르페시스가 몸을 돌렸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그의 진심을 대변했다. 한숨을 푹 내쉰 에스메랄다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시스, 이건 개인적인 감정으로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
“후사 때문에 다른 여인의 침실에 들어가라고? 차라리 내 심장을 찔러!”
겨우 눌러 참고 있던 화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녀가 원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참아 보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의무를 운운하는 그녀의 냉정함이 너무 서운해서.
아르페시스가 언성을 높이자 에스메랄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 끝에 먼저 손을 내민 건 아르페시스였다. 에스메랄다를 제 품으로 잡아끈 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생길 터, 마음 쓰지 말라. 황비 문제도 내가 해결하겠다.”
“하지만 이미 4년 동안 생기지 않았어. 이제 와 생길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제야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침울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제 감정에 취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황실 의원은 우리 둘 다 문제가 없다 했다. 단지 그대가 너무 무리를 해서, 아이가 찾아오기엔 몸이 너무 지쳐서 그런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그의 음성은 나긋해졌다. 에스메랄다를 위로하기 위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
쪽쪽, 에스메랄다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춘 아르페시스가 속삭였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어 왔다. 아르페시스는 단단한 팔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내가 국정을 돌보는 게 좋겠어. 그사이 아이가 찾아와 주면 좋겠군.”
다정한 입맞춤은 금세 열락의 전희가 되었다. 그날 세 번이나 더 에스메랄다 안에 저를 쏟아 낸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 *
“하여, 기어이 황비를 들이라는 뜻인가?”
날이 밝자마자 잠든 에스메랄다를 두고 대신들을 불러 모은 아르페시스가 좌중을 훑었다. 서슬 퍼런 그의 음성에 대신들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의 옆에 다른 여자를 들이밀고자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입을 모아 떠드는 귀족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없는 곳에서 저들에게 둘러싸여 무슨 말을 들었을까? 분명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교묘하게 그녀의 탓으로 몰아갔겠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열불이 치솟았다.
“부디 하루빨리 후사를 보시어 황실의 안녕을…….”
“아직 짐이 건재하다! 후사가 무어 급하다고 재촉하는가!”
결국 아르페시스가 언성을 높였다. 너도나도 입을 열어 대는 통에 시끄럽던 회장이 고요해졌다. 어디선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르페시스의 기세는 흉흉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욕심을 짓밟기엔 부족했던 것 같지만.
“에, 에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황비를 들이셔야 합…….”
“그 입 다물라!”
에렘의 미래라니, 우습지도 않은 소리. 저와 연이 닿은 여인을 황실에 들여보내 잇속을 채우기 위함이겠지.
“하, 하나, 벌써 몇 년째 황후 폐하께서 후손을 보지 못…….”
“네놈이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아르페시스가 내려친 황좌의 팔걸이가 부서졌다.
“짐이 황성에 머무는 날보다 비우는 날이 더 많거늘, 감히 이 문제로 황후를 입에 담아!”
“그, 그러니 더더욱 많은 여인을 곁에 두시어…….”
“짐이 그대들의 말을 듣고 순순히 황비를 들이리라 생각했던가? 해서 황후의 앞에서 황비를 운운했던 것이고?”
“저, 저희는 충심으로… 혹여라도 폐하께 변고가 생기면…….”
“짐이 전선에 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이다?”
“그런,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짐이 죽기를 바라서 하는 말인가?”
에스메랄다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그녀의 화법을 닮아 있었다. 평범한 이들의 경우에는 질문으로써 상대의 말을 비꼬고, 트집을 잡아 끌어내리는 화술이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공격받을 여지가 많고, 적을 만들기 쉬운 화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르페시스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언제든 적을 도륙할 힘이 있었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회장을 가득 채운 푸른 안개가 넘실거렸다. 황비를 운운하며 한 번이라도 입을 열었던 자들이 제 코앞까지 다가와 일렁이는 마나를 보고 숨을 멈추었다.
“그것이 가능하다 여기는가?”
그 살벌한 위협 앞에서 감히 어느 누가 입을 열겠나.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아는 듯한데.”
그에 아르페시스의 음성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댐과 동시에 회장을 채우고 있던 마나가 사라졌다. 자리를 채운 귀족들이 모두 숨을 죽이며 아르페시스의 눈치를 살폈다.
“짐이 황후와 같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이 문제가 반복되는 날 짐이 베풀 자비는 없을 것이다.”
서슬 퍼런 눈으로 회장을 둘러본 아르페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황도에 머무는 동안 국정은 짐이 맡겠다. 회의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진행할 테니 그리 알라.”
회장을 등진 그가 향한 곳은 황후 궁의 침실이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의 위로 올라타는 움직임이 다급했다.
“으음……?”
아르페시스는 곧장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지난밤의 흔적이 남아 질척거리는 음부를 빤히 응시하기도 잠시. 고개를 숙인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질구에 입을 맞추었다.
“아시스……? 아……!”
비몽사몽, 잠결에 허우적거리던 에스메랄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집요한 구음에 에스메랄다의 다리 사이가 금세 젖어 들었다. 아르페시스는 지체 없이 저를 찔러 넣었고,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하앙! 앙!”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급한 정사였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이제껏 아이를 가지지 못한 건 그의 탓이 컸다. 그녀를 놓칠까 불안해서 전선에 가겠다 자청했고, 특이한 성욕 때문에 외부에 파정을 해 대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런데 귀족들은 황성을 비운 그가 아니라 에스메랄다를 두고 떠들었다. 황후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분명 그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다른 여자를 품어야 한다고.
험악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절박한 움직임으로 에스메랄다를 파고든 아르페시스는 오래지 않아 정액을 쏟아 냈다. 거친 숨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 끝에 얕은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온…….”
“더 하지.”
아르페시스는 제 뺨에 닿은 그녀의 손을 아래로 이끌었다. 보드라운 손으로 몇 번 문지르자 그의 성기가 다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너 왜 그러는…….”
에스메랄다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거칠게 입을 맞춘 그는 제 옷을 벗으며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흐응!”
“흐아.”
연이은 삽입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르페시스는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치댔다.
“항, 하읏! 자, 잠깐……! 아앙!”
어떻게든 몸을 빼어 도망가려는 그녀를 꽉 붙들고 몇 번이나 정액을 쏟아 냈을까? 지난밤에 쏟아 낸 정액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 쌓인 정액이 에스메랄다의 음부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아르페시스는 제 성기로 그것을 다시 밀어 넣었다.
“왜, 이러는 거야…….”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였다. 벌써부터 힘겨워하는 에스메랄다의 뺨을 깨물어 버린 아르페시스가 속삭였다.
“급할 것이 없다 여겼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가능한 빨리 아이를 가져야겠어.”
그는 이미 허리를 쳐올리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녀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낀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아이가 생기면, 황비를 들이라 지껄이는 놈들도 조용해질 테지.”
“그렇… 으응!”
환한 태양이 비추는 침실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정사가 시작되었다.
「1443년 라 97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회임 소식이 공표되다.
- 차석 서기관 바 오트 올바트 카셀 『에렘황조록 연혁편 1443년』 中 발췌」
「1444년 바 77일
에렘 제국의 황실에서 바 록트 에렘 유세프 황자가 탄생하다.
- 차석 서기관 바 오트 올바트 카셀 『에렘황조록 연혁편 1444년』 中 발췌」
* * *
아레스는 자신의 왼손과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른쪽과 비교했을 때 앙상하기 그지없는 팔이 낯설었다. 제르민의 부름을 받고 중앙 신전에 도착했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그는 분명 오늘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기다려 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오늘이 되어 보니.
“후우.”
긴 숨을 내쉰 아레스가 몇 년 사이 낯설어진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후작.”
그때 제르민이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아레스는 여전히 작은 그의 손을 꽉 마주 잡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자라나 그를 지배해 버린 진심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감사합니다, 성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제르민에게 감사를 전한 아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는 제르민을 뒤로하고 저택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는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아레스는 곧장 루이자를 찾아갔다.
“아레스? 벌써 왔…….”
침실에서 둘째인 노만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루이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레스의 왼쪽 팔에 닿아 있었다. 아레스는 노만을 시녀에게 들려 보냈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맞추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껴안아 오는 루이자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으흥, 흡…….”
그녀의 긴 흑발을 쓸어 넘기는 왼손의 움직임은 조금, 어설펐다. 하지만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드레스의 단추를 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양손으로 루이자의 젖가슴을 가득 움켜쥐자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온기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은 이미 아레스를 가득 채워 버린 후였다.
이를 악문 아레스가 루이자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옷을 벗자 근육이 거의 없어 앙상한 왼팔이 드러났다. 루이자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아레스는 그녀의 고개를 들게 만들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양손에 쥐고서 주무르는 가슴의 감촉이 그를 재촉했다.
점차 진득해진 애무의 끝에서 맑은 애액이 흘러내렸다. 골을 타고 흘러내려 침대 시트를 적실 정도로 흥건해진 애액에서 달큼한 향이 났다. 아레스는 지체 없이 루이자를 파고들었다.
“아앙, 항!”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루이자가 황홀한 교성을 들려주었다. 뜨거운 숨을 몰아쉰 아레스가 허리를 세우고서 루이자의 골반을 붙잡았다. 그녀가 삽입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지체 없이 허리를 올려 치자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저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젖가슴과 쾌락에 흐트러진 표정, 헤프게 벌어진 입술, 그를 똑바로 보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 루이자의 모든 것을 눈에 담은 아레스의 움직임이 점차 거칠어졌다.
언젠가부터 당연해졌던 대화가 사라졌다. 오늘만큼은 페드로가 그녀와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뜨겁게 몰아친 열락이 사라진 그들의 대화를 대신 채워 주었다. 아레스는 그날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의 안에 자신을 쏟아 냈다. 어느덧 잇자국 때문에 울긋불긋해진 루이자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레스는 허공에서 나풀거리던 그녀의 다리를 붙잡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루이자의 굴곡진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을 눈과 손에 새기려는 듯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팔뚝에 시선이 닿았다. 팔은 물론 탄탄한 가슴과 목덜미, 날개뼈가 있는 등까지.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남은 루이자의 흔적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진심을 다시 한번 깨닫고야 만다.
잠시 후 아레스는 눈을 감은 채 색색, 가쁜 숨을 내뱉고 있는 루이자에게 몸을 겹치며 속삭였다.
“출정 준비를 시작할 겁니다.”
품 안에서 흠칫, 떨리는 몸이 그녀의 동요를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흔들리는 하늘색 눈동자가 그를 할퀴었다. 그에 아레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맹세하건대.”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애틋했다.
“명예와 전우를 버리고 도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팔을 돌려준 제르민의 앞에서 꽁꽁 감추었던 진심이었다. 루이자의 눈이 커지고, 그 속에 간절한 눈물이 차올랐다.
“아레스…….”
품 안으로 파고드는 루이자를 꽉 껴안은 아레스가 눈을 감았다. 과거의 그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할 수 있었다. 만약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명예가 바닥으로 치닫는다 해도 반드시.
훗날 주신의 곁으로 돌아가 만날 선조들 앞에서 죄인이 될 것이고. 홀로 전선에서 버티는 오멘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여생을 루이자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겁해질 수 있었다.
「1444년 바 89일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이 교황 제르민의 치료를 받아 왼팔을 되찾다.
- 수석 서기관 바 오트 올바트 카셀 『에렘황조록 연혁편 1445년』 中 발췌」
* * *
수정구에 기록된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아이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페드로를 만나지 않으려는 그를 설득해서 겨우 데려온 참이었다.
이제 문 하나만 넘으면 그들의 아들을 만날 수 있는데. 오멘은 그 하나를 쉽사리 넘지 못했다. 그래서 페르멘이 나섰다.
“뭘 그렇게 긴장해?”
“긴장한 거 아니야.”
“긴장했으면서 무슨. 너랑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 형수님이랑 멜도 우리만큼이나 판박이고.”
오멘을 대신해서 문고리를 잡은 페르멘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쪼그마한 녀석은 절대 눈치 못 채.”
오늘을 위해 부러 오멘과 똑같이 짧은 머리를 유지해 오지 않았던가. 오멘의 걱정과 달리 아이가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제 아빠가 왔다고 여기겠지.
천천히 문을 열자 오멘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페르멘은 굳은 듯 서 있는 형제의 등을 떠밀었다. 그에 곁에 있던 멜리안도 소피아의 등을 밀어 주었다. 얼결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페디.”
떨리는 부름 뒤로 앳된 페드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빠아!”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페드로가 대번에 오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활짝 웃은 오멘이 아이를 안아 들었고, 소피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안녕, 아가.”
페르멘은 쉴 틈 없이 아이에게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멜리안의 어깨를 껴안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당분간 부모의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몸을 돌리자 뒤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오멘이 제 아이를 만날 겸 소피아와 함께 황도로 돌아온 어느 날. 아레스는 루이자와 시간을 보내다 불이 붙었다. 어느덧 부부의 은밀한 공간이 된 페드로의 방으로 향했지만, 내부에는 먼저 도착한 손님이 있었다.
“페디 형도 못 본 지 꽤 됐네.”
“아르페시스한테 얘기해 볼까? 금방 갔다 올 수 있잖아.”
“그럴까? 리디한테서 녀석을 좀 떼어 놓을 겸.”
“……이제 두 사람은 부부야.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야, 네가 혼인 직후에 리디 상태를 봤어야 해. 애가 수척해져 가지고, 내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고! 짐승 같은 새끼.”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을 텐데…….”
쌍둥이가 페르도의 침실을 점령한 채 대화 중이었다. 이를 악문 채 고민하기도 잠시.
“오, 오늘은 그냥 가요…….”
-빨리 쫓아내.
제 품에 안긴 루이자의 목소리와 페드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아레스는 동생들 앞에서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의 손을 들고야 말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 루이자의 옷을 벗기면, 페드로가 또 나타나 줄 테니까. 루이자를 내려 준 아레스가 페드로의 침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형.”
“왜 안 들어오고 밖에 있나 했네.”
쌍둥이는 이미 그가 온 것을 알고 있었던 듯,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지금 아레스에게는 점잖게 동생들을 내보낼 여유가 없었다.
“나가.”
“뭐?”
“내가 좀 급하니까, 다른 데 가서 놀아라.”
“뭐? 우리가 앤 줄 알아?”
“잔말 말고 빨리!”
성난 아레스의 목소리에 찔끔한 쌍둥이가 투덜투덜거리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어… 형수님…….”
손을 내저어 가며 재촉하자 뒤를 힐끔거린 쌍둥이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그제야 아레스는 제 몸으로 가리고 있던 루이자와 함께 침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냥 가자니까……. 이제 도련님들 얼굴을 어떻게 봐요!”
“그런 게 신경 쓰입니까? 난 지금 당신밖에 안 보이는데.”
서둘러 옷자락을 헤집은 아레스가 루이자를 침대 쪽으로 몰아붙였다. 페드로가 살아생전 사용했던 침대 위로 오르기 무섭게 그리운 환영이 그를 찾아왔다.
-오늘은 나부터 넣는다?
루이자의 입술을 집어삼킨 아레스는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을 열었다. 그곳에 보관 중이던 도구를 꺼내 드는 손길이 다급했다.
* * *
에렘 전역이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적자, 유세프의 탄생을 축복했다. 영웅과 성녀의 자손이니 훗날 성군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쓰라린 악몽의 기억도 선명해졌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제 품에 안겨 꼬물거리는 아이가 과거를 밀어내 주었으니까.
유세프는 작은 입을 열심히 놀려 모유를 빨아 먹는 중이었다. 다시 정무로 복귀하여 바쁜 와중에도 에스메랄다는 직접 아이의 수유를 챙겼다. 어린 시절 그녀가 받은 사랑을 전부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유뿐만이 아니었다. 유세프의 유모와 전속 시녀들이 정해졌음에도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아이의 방은 에스메랄다의 침실에 마련된 참이었다. 매일 밤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에 깨어나는 것이 조금은 버거웠지만, 행복했다.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기를 한참.
“에디.”
욕실에서 나온 아르페시스가 가운을 걸친 채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그는 유세프의 뺨을 콕, 찌르며 말했다.
“다 먹은 건가?”
“조금 전에.”
“그럼 이리로.”
에스메랄다는 군말 없이 유세프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 아이를 가슴에 기대게 하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자, 어서 하고 자야지.”
그는 여름이 되어 돌아온 후 밤마다 아이가 트림을 할 때까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따듯한 눈길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닮은 부자를 바라보았다.
정작 그녀를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눈은 따듯하기보다 뜨거웠지만. 손은 아이에게 집중했으면서, 눈은 옷가지 밖으로 드러난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훔쳐보기 바빴다.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안 되나?”
“응?”
“오늘도 내 차례는 오지 않는 건가 싶어서.”
따듯하기 그지없던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살짝, 싸늘해졌다. 아르페시스는 유세프가 젖을 먹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은근한 불만을 토로했다. 에스메랄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자 아르페시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유모도 있지 않은가. 녀석이 먹을 것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조금 정도는 허락해 줘.”
무시했다간 밤새 매달릴 기세였다. 분명 배 아파 낳은 것은 유세프 하나건만. 왜 아이가 둘이 된 기분인지.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기껏 추슬렀던 옷가지를 끌어 내렸다. 화색이 된 아르페시스가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를 받쳐 든 채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에 흔들림이 없었다.
“흐읏……!”
그는 한층 더 커진 에스메랄다의 젖가슴을 크게 베어 물고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유두를 강하게 빨아 대기 시작했다. 유세프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빨아 대는 것과는 달랐다. 아르페시스의 행동은 수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노골적인 성애의 뜻이 담긴 애무였으니까. 뜨거운 혀가 유륜을 간질이고, 딱딱한 치아가 유두를 살살 긁었다.
“하읏!”
제 가슴에 매달린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에스메랄다가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저가 만족할 만큼 그녀의 가슴을 빨아 댄 아르페시스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바지춤은 이미 벌떡 일어난 상태였다. 커다란 살덩이에 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내 것인 줄 알았더니 이 녀석이 대뜸 빼앗아 가는군.”
불만과 짜증, 미미한 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어떻게 네 아들에게 질투를 할 수가 있어?”
“……억울한 걸 어쩌겠나.”
“억울하다고?”
아쉬운 듯 다시 한번 에스메랄다의 유두를 쪽, 빨아 본 아르페시스가 커다란 살덩이에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난 그대의 가슴을 마음대로 빨아 보기 위해 몇 년을 참아야 했다. 한데 이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제 것인 양 멋대로 차지해 버리지 않았나. 본디 내 것인데, 억울한 게 당연하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미련이 남은 듯, 자꾸만 가슴에 달라붙는 아르페시스의 얼굴을 밀어냈다. 때마침 꺽, 하고 작은 트림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를 바로 한 아르페시스가 아이를 고쳐 안으며 웃었다.
“오늘은 토하지 말고 곱게 자거라. 너 때문에 엄마가 반쪽이 되어 가고 있잖니.”
“우아! 마아!”
“정말이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대놓고 질투를 할 정도면서 정작 아이를 볼 때는 저렇게 해맑게 웃기나 하고. 복잡한 눈으로 부자를 지켜보던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따라 웃어 버렸다.
* * *
페드로를 만나러 황도로 돌아온 오멘이 떠나기 며칠 전. 형제들끼리 모여 함께 술이라도 마실까 해서 자리를 마련한 참이었다. 아르페시스도 에스메랄다가 잠들면 오겠다 했으니 곧 나타날 터. 오랜만에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라 그런지 마음이 들떴다.
아레스는 손수 병을 들어 쌍둥이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에 곧바로 첫 잔을 비운 페르멘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아레스를 바라보았다.
“형, 내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는데.”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아니, 궁금해 죽겠다고.”
페르멘이 할 말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아레스가 얘기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넌 안 궁금해? 형이 싸면서 페디 형을 부르는데? 너도 분명히 들었잖아.”
“큽, 쿨럭!”
잔을 기울이다 말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아레스가 격한 기침을 토해 냈다.
“아, 진짜…….”
한숨을 내쉰 오멘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사레에 들려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고 있던 아레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사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 성벽을 쌍둥이들이 엿보았으니까.
‘이 녀석들이 어떻게…….’
페드로의 침실에서 마주쳤던 그 날 밖에서 서성거리기라도 했던 걸까? 제 성벽을 다른 형제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형수님이 뭐라고 안 해?”
그런 아레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르멘이 툭툭 제 마음 가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딴 놈 부르면서 싸면 멜이 펄펄 뛸 것 같…….”
“입, 다물어.”
결국 아레스는 이를 악문 채 페르멘을 쏘아보았다. 평생 형의 권위에 눌리며 살아온 페르멘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매번 반복되어 오던 일에 오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술을 홀짝거렸다.
“아, 아니… 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한풀 기가 죽은 페르멘의 웅얼거림을 들은 아레스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애초에 그걸 왜 궁금해하냐고. 형이랑 형수님의 일인데.”
“넌 진짜 안 궁금해? 그 타이밍에 페디 형이 대체 왜 언급되냐고.”
아레스가 입을 꾹 다물고 술을 마시는 사이 페르멘이 오멘에게 바짝 붙어서 속닥거렸다.
거의 동시에 아르페시스의 신영이 나타났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아냐, 우리도 방금 모였어.”
오멘이 그를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아레스도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엄청 노려보네.”
인사 대신 아르페시스에게 와인을 따라 준 페르멘이 툴툴거렸다. 여전히 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아레스 때문이었다.
“뭐가 궁금했기에?”
홀짝, 하고 와인을 한 모금 삼킨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 형수님이랑 할 때 페디 형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다시 잔을 채운 아레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좀 궁금해할 수도 있지.”
그에 페르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결국 오멘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를 시작했다.
“아레스 형이 페드로 형이랑 각별했으니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형수님도 페드로 형이랑 알던 사이잖아.”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그러고 보니 루이 형수님은 지난번에 페디 형 성묘도 같이 했잖아. 대체 뭐냐고, 나만 모르는 거야? 넌 뭐 아는 거 없냐?”
하지만 페드로와 루이자의 이야기를 몰랐던 페르멘의 호기심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페드로는 오로지 아레스에게만 루이자에 대한 것을 언질해 주었으니까. 다행히도 오늘 이 자리에는 두 남녀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페드로가 남부군에 있을 때 후작 부인이 찾아오곤 했다. 꽤… 진지한 사이 같았지. 서부 대란 시기부터 이어졌다고 들었는데.”
“하아? 뭐야, 형수님이랑 페디 형이랑 만났던 거야?”
“……그건 아닌 것 같다. 페드로가 거절한 것 같았거든.”
“허어……? 와, 어떻게 우리한테 한마디도 안 해 줄 수가……. 설마 형은 전부 알고 있었어?”
아레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잔을 기울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부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미 답이 되었다.
“그래서, 와… 형수님이 아직도 페디 형이 좋데?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된 거고? 아니지, 그럼 형수님이 페디 형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녀는 내게 마음을 열었어.”
신경질적으로 페르멘의 말에 반박한 아레스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다만 페드로 또한 잊지 못하는 것뿐이다. 아레스도, 루이자도, 그것을 바랐다.
“그때 일은 그냥 내, 아니다, 그냥 관심 꺼.”
“치…….”
입술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나름 궁금증이 풀린 모양이다. 페르멘은 더 이상 아레스의 침실 생활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에 안도하기 무섭게 형제들 중 어디로 튈지 몰라 항시 긴장을 타게 만들었던 페르멘이 다른 폭탄을 들이밀었다.
“근데 너 은근 빨리 싸더라.”
“……뭐?”
다행히도 이번 대상은 아레스가 아니라 오멘이었다. 아레스는 페르멘이 저에게서 관심을 거둬 간 것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너랑 내 방 가깝잖아. 창문 그렇게 열어 놓고 하면 다 들린다고. 맨날 끅끅거리면서 미안합니다, 다시 해 줄게요……. 듣다 보니 내가 진짜, 멜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더라. 너 조루냐? 좀 참아 봐. 형수님이 얼마나 섭섭하겠냐고.”
“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오멘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닌 척하면서도 아레스와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오멘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부들부들 떨며 페르멘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내가 조루인 걸로 하자…….”
“하아?”
페르멘의 표정이 기괴해졌고, 아레스와 아르페시스의 눈도 살짝 커졌다. 제 아우가 조루임을 인정했다. 아레스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충격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기묘한 침묵을 걷어 낸 건 형제들의 눈치를 살피던 아르페시스였다.
“큼, 그, 아……. 오멘, 페드로는 어떤가?”
어설픈 티가 났지만, 나름 오멘을 배려해서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에 페르멘을 죽일 듯 노려보던 오멘이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
“뭐… 사랑스럽지. 매일 보고 싶을 정도로.”
“전선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못 볼 텐데, 곤욕이겠군.”
“너도 마찬가지잖아. 많이 보고 싶겠지?”
“보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이지만……. 에디가 걱정이다.”
“왜? 유세프가 잠투정이 심해?”
“심하다는 표현도 부족해. 에디가 잠들라 치면 칭얼거려. 그냥 달래야 하는 것이면 내가 하겠는데, 매번 배가 고픈 모양이다. 에디를 깨워야 끝나니… 이러다 그녀가 쓰러질까 겁이 날 정도다. 유모를 들이고도 굳이 본인이 하고 싶어 하니 말리지도 못하겠고.”
한숨을 푹 내쉰 아르페시스는 로젤리나와 조프리를 언급했다.
“그 녀석들처럼 조금 크면 괜찮아지려나?”
“서너 살만 돼도 부모는 안중에 없다. 저 혼자 놀기 바쁘거든. 요즘 레아나는 날 찾아오지도 않아. 내가 가야지 겨우 만날 수 있지.”
아레스가 슬쩍 자녀 이야기에 발을 걸쳤다.
“아, 맞다. 너 오면 얘기해 준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지난봄에 페디가…….”
페르멘까지 합세하자 대화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간 묵혀 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자 밤이 깊어 가는 건 금방이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아레스는 문득, 평온하면서도 행복한 형제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없는 형제가 그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기다려 보았지만 페드로는 끝내 이 자리에 함께해 주지 않았다.
“여긴 오기 싫은 모양이네…….”
“어?”
형제들의 반문에 손을 내저은 아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페드로는 저가 사랑하는 여자 옆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양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가 그리운 사람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마저 마시고 가. 난 일찍 일어나야겠다.”
자리에 남은 세 동갑내기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침실로 돌아간 아레스는 잠든 루이자를 깨우고야 말았다. 오늘도 그리운 형제를 만나고 싶어서.
* * *
은지는 테노리엘과 관련된 인사를 볼 때만 꿈을 꾸던 아르페시스와는 달랐다. 그는 현우와의 첫 만남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꿈을 꾸었다. 덕분에 그녀가 알게 된 기억은 나날이 많아졌다. 어쩌면 가브리엘이 저에게 온정을 베푼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이 따듯해지곤 했다.
물론, 그녀가 본 기억의 대부분이 아레스와 관련된 기억이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함께한 시간이 차이가 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덕분에 페드로에 대한 기억도 딸려 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아레스와 그녀의 정사에는 항상 그가 끼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 은지는 루이자와 페드로가 쿠베트성에서 처음 만났던 날을 꿈으로 보았다. 기뻤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것을 하나둘 되찾을 때마다 분명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자라났다. 저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 떠났는지도 알게 되면 원망할까 봐. 그리하여 현생에서 다시 만난 그를 떠나고 싶어 할까 봐. 어느 날은 그녀가 기억을 보는 것이 기쁘고, 또 어느 날은 불안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날이 부쩍 더워졌다. 현우의 억지 아닌 억지에 자연스럽게 한집에서 살게 된 은지는 더위를 많이 탔다. 붙어 자는 것이 찝찝하다며 자꾸 밀어내기에 밤새 에어컨을 틀어 놓고 몸을 치대던 나날은 분명 평화로웠다. 여느 때처럼 꿈을 꾼 은지가 울면서 깨기 전까지는.
“으학, 아, 아흑……!”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은지가 가슴께를 움켜쥔 채 바둥거렸다. 그 기척을 예민하게 잡아낸 현우가 잠에서 깨어났다.
“은지야? 은지야.”
현우는 곧바로 은지의 몸을 흔들었다. 곧 잠에서 깬 그녀가 벌벌 떨리는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은지야.”
그녀는 나지막한 부름을 듣고서 현우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받은 시간은 찰나였다.
“나쁜 새끼!”
벌떡 몸을 일으킨 은지가 손톱을 세우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짝, 하고 뺨을 내치더니 주먹으로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황한 채 굳어 있기도 잠시, 이어진 말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와!”
원망과 고통이 서린 눈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또 죽을 곳이나 찾아다니는 놈이 어떻게 날 찾아와!”
오늘 그녀는, 그가 죽던 시기의 꿈을 꾼 모양이다.
“그딴 것도 유서라고!”
현우는 묵묵히 그녀의 원망을 감내했다. 별반 아프지도 않은 주먹질을 묵묵히 받아 내는 동안 그녀의 손이 아플까 봐 초조했다. 각성자의 몸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했으니까.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은지가 손을 거두었다.
“이, 이게, 뭐야……! 아파, 아프다고!”
현우를 때리는 대신 제 가슴을 퍽퍽, 내리치는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다.
“그러다 멍들어.”
“이게, 뭐냐고!”
“쉬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전생에서 아르페시스를 보아 온 탓에 이런 일은 익숙했다. 얇은 손목을 붙들고 만류하자 곧 은지의 몸이 허물어졌다. 현우는 그녀를 제 품에 기대게 한 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은지가 다시 말문을 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제 알겠네요.”
“뭘?”
“죽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당신 표정이 엄청 안 좋았던 거.”
현우가 쓰게 웃었다. 만약 같은 시기로 되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후회를 하리라.
“그땐… 널 만나기도 전에 소중해져 버린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내가 아니라 루이자겠죠.”
“나한테는 같은…….”
“그녀를 두고 죽었을 때, 후회했어요?”
“……응.”
“그런데도 나를…….”
비척비척 그를 밀어낸 은지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물었다.
“왜 나를 찾아왔어요? 이미 끝난 생인데.”
“……네가 너무 그리워서.”
“당신이 전생의 기억이라고 하는 거, 내가 이걸 보는 게…….”
차마 완성되지 못한 질문을 알아들은 현우가 답했다.
“……기뻐. 네가 나를 되찾아 가는 게.”
“……엄청 이기적인 사람이었군요, 당신. 아니, 지금도 이기적이야.”
“그렇지.”
은지의 말대로다. 현우는 이기적이었다. 두 번의 생에서 모두 저가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위해 그녀를 힘들게 하니까.
쓰게 웃은 현우는 은지를 다시 품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맹세해.”
“거짓말… 거짓말쟁이…….”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리는 은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은지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춘 현우가 말했다.
“4년 전에, 첫 11등급 게이트 공략 기억해?”
흠칫, 떠는 몸을 꼭 그러안은 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때, 입장한 87명 중에 생환자는 겨우 세 명이었어.”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섬뜩했지만.
“하다 보니까 안 되겠는 거야. 핵 주변을 지키는 가디언을 죽이려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았어. 아니면 반신 불구가 되거나.”
“…….”
“그래서 같이 들어간 놈들을 미끼로 좀 썼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을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가디언을 죽이고 나니까 열두 명 정도 남았었는데, 그놈들도 다 처리했어. 밖에 나오면 떠들 것 같아서. 동급 헌터 두 놈만 살려 가지고 나왔더니 알아서 잘 포장하더라고. 녀석들도 동의했거든. 다른 놈들 미끼로 쓰자고.”
현우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래서일까? 굳어 있던 은지의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현우는 은지의 손을 입가로 가져와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지키기 위해 죽었던 그때랑은 달라. 이번에는 너뿐이야. 네가 내 전부라고. 너에게 돌아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 해도 망설이지 않아.”
은지의 흐느낌이 짙어졌다. 현우는 제 품을 파고드는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이번 생에선 오롯이 널 위해서 살아남을게, 맹세해.”
“……거짓말쟁이.”
그의 잔인한 맹세에 안도한 걸까? 작게 웅얼거린 은지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동자는 따스하기만 했다.
* * *
은지는 꿈에서 본 유서의 내용을 현우에게 물었다.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 짧은 문장을 소리 내어 답한 이후부터 은지의 태도가 변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 루이자와 자신을 구분하려던 그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전생을 인정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은지는 루이자로 살던 시절에 쌓인 울분을 현우에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순간에 발길질을 하거나 뺨도 때리는 건 물론, 현우를 집 밖으로 쫓아내고서 문을 걸어 잠그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우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화풀이를 받아들였다. 전생과 현생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음에도 그에게 이별을 고하는 대신 화풀이를 하다니. 이건 풀어낼 만큼 풀어내고 나면 그를 다시 받아 주겠다는 의미이지 않겠나? 그게 너무 기뻤다.
그날 이후 은지는 현우를 만나기만 하면 빽빽, 소리를 질렀지만 괜찮았다. 하루라도 빨리 더 풀어내라는 심정으로 부러 그녀를 졸졸 쫓아다녔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자꾸 사무실로 오지 말라니까요?!”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그리고 나도 여기 직원이야.”
현우는 퇴근 시간에 맞춰 슬그머니, 은지가 근무하는 부서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퇴근할 생각이 없는 은지의 옆에서 알짱거리는 중이었고.
사무실에 남아 있던 길드 직원들이 그런 현우를 보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은지는 나름 숨기려 해 봤지만 현우가 대놓고 행동한 탓에 거의 공개 연애가 되어 버린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숨길 생각이 없었던 현우에겐 잘된 일이었다.
‘엄한 놈이 수작을 걸게 두느니, 내가 버티고 서 있는 게 낫지.’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최선책이었다. 그게 은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사무실까지 찾아온 그를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던 은지가 척, 하고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 가서 기다려요.”
“언제까지?”
“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데? 몇 시에 가려고? 이미 퇴근 시간 지났는데 그냥 가면 안 돼?”
“일이 남았다니까요!”
“남았어도 퇴근 시간 됐으면 퇴근해야지.”
“월급쟁이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월급 루팡이라는 말 몰라?”
“이… 그게 길드 소속 헌터가 할 말이에요?!”
“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네가 월급 훔쳐 가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벌어다 주고 있잖아.”
궤변을 늘어놓으며 은지의 옆에서 버티고 서 있기도 잠시. 도끼눈을 치켜뜨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지가 이를 악물었다.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읊조리는 기세가 사뭇 날카로웠다.
“저기 가서 얌전히 기다려요. 아니면 내가 쫓아낼 거야.”
“……알았어.”
쫓아낸다는 말이 나온 후에야 현우가 몸을 돌렸다. 그는 입구 근처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걸 본 길드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개네.’
‘연애를 해도 개구나.’
‘그냥 종 자체가 개야.’
제 종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는 야구 모자를 슬쩍 밀어 올리고 한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은지가 속한 팀의 책임자. 그는 뻘뻘, 식은땀을 흘리며 현우의 시선을 전력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섬뜩한 시선을 버티기엔 그의 간이 너무 작았다.
“으, 은지 씨, 바쁜 일도 없고 오늘은 머, 먼저 들어가……”
결국 현우의 압박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그가 은지에게 퇴근을 종용했다. 그에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팀장님 협박하지 말랬죠!”
현우가 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은지는 소리를 질렀다.
“눈 안 깔아?!”
칫, 하고 혀를 찬 현우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은지 씨 대박.’
‘길을 들였어.’
‘미친개를 사육하다니.’
사무실에 남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박수갈채를 쏟아 냈다. 그사이 현우는 폰을 만지작거리며 식사를 주문했다. 은지가 굶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녀의 몫만 시키면 눈치가 보이느니 뭐니, 불편해하니까 사무실에 남은 직원들 것까지 넉넉히 주문하기로 했다.
덕분인지 은지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저녁을 먹고 나자 은지는 접근 금지 명령을 철회했고, 현우는 비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기다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길드 건물을 나선 건 9시가 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아무리 야근 수당을 준다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현우는 푸닥거리를 한 후 싹 바뀐 카페의 가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한 번 더 올라가야겠네.’
대기업처럼 정시에 전원을 차단하면 은지의 야근도 불가능해질 터. 매일 저녁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거의 동시에 무언가 날아온다는 것을 인지한 현우가 손을 뻗었다. 은지를 노리고서 날아들던 중 그의 손에 막힌 것이 퍽,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리고 주르륵, 하고 흘러내리는 점성질의 무언가.
현우의 뺨이 씰룩거렸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자 투수처럼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몸을 떤 여자가 움직이기도 전에.
“이 씨발 새끼가!”
계란 물에 젖은 현우의 손에서 파란 전격이 튀어 올렸다. 그가 각성하면서 얻은 고유 능력이었다. 현우가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은지가 손을 뻗었다.
“현우 씨!”
사색이 된 비명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굉음이 요동쳤다. 은지가 팔을 붙드는 바람에 전격이 빗나갔다. 대신 사방의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뒤집어지고 차량 대여섯 대가 전복되며 폭발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소란 속에서 현우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여자를 사납게 노려보기만 했다. 놀라 뛰쳐나온 길드 관계자들이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을 때도. 하얗게 질린 은지가 자신을 잡아끌었을 때도. 그의 시선은 은지에게 계란을 던진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일과를 끝내고 유세프에게 모유를 주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시스?”
파란 마나에 휩싸여 모습을 드러낸 아르페시스 때문이었다. 겨울이 한창인 지금 전선에 있어야 할 이가 왜? 에스메랄다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찰나. 성큼성큼, 다가온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품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궁을 비워라.”
아이를 곁에 있던 시녀에게 안겨 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물러나기도 전에 침실 가득 그의 마나가 피어났다. 침실을 가득 채운 푸른 안개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무슨 일 있어?”
사용인들이 침실 문을 닫고 나가자,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꿈.”
“꿈?”
“그대가 떠나던 날.”
“아.”
그제야 일자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대륙력 1444년 카 63일.
오늘은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가 죽기 전날이었다.
“언제부터?”
“……며칠 전부터.”
“왜 말을 안 했어?”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혼자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 싶어서 황도까지 달려온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잘게 떨고 있는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그녀를 다리 사이에 앉힌 아르페시스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샅샅이 훑었다. 약이 바짝 오른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였다. 에스메랄다를 안고 있는 팔에도 점차 힘이 들어갔다. 꼭, 누군가가 그녀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날 아르페시스는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켰다. 잔뜩 날이 선 아르페시스 때문에 에스메랄다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떠오른 태양이 하늘 높게 솟았을 무렵에는 그의 숨이 흐트러졌다. 에스메랄다가 처형대 위에 올랐던 시간이 된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그의 긴장감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괜찮아.”
에스메랄다는 부드럽고 따듯한 음성으로 그를 달래 주었다.
“난 여기 있어.”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그녀를 꽉 안은 채로 몇 시간을 그렇게 버티기만 했다.
「1444년 카 67일
당해 카 63일, 갑작스럽게 황도로 귀환했던 황제 아르페시스가 황후 궁의 출입을 허하고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다.
- 차석 서기관 바 오트 올바트 카셀 『에렘황조록 연혁편 1444년』 中 발췌.」
* * *
이틀 전 헌터의 능력으로 민간인에게 위협을 가하고 기물을 파손하며 구설수에 오른 차현우.
헌터법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며 피의자 신분이 된 그는 길드를 통해 직접 기자 회견을 요청했다.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카메라가 저를 담고 있는 그곳에서 현우가 꺼낸 첫마디는 해명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니들은 살고 싶은 생각이 없지?”
그가 입을 열기도 전부터 쉴 틈 없이 터지던 플래시가 뚝, 멎었다.
“아니면, 나한테 인류애나 정의감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마이크에 대고 평의한 음성으로 말을 하던 현우가 좌우로 뚝, 뚝, 목을 꺾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그거 착각이야.”
누군가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셔터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탓에 고요한 곳에 그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게이트가 터져서 수백, 수천 명이 죽어도 난 별로 상관없어.”
이제껏 그가 상급 게이트가 발생할 때마다 부지런히 움직인 건 은지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몰랐으니까.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가 다칠까 봐, 오로지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데 그녀 덕분에 제 힘에 빌붙어 살아가는 놈들이 감히.
현우는 계란 사건 이후 눈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그래서 확실히 해 두고자 평생 하지도 않던 기자회견까지 연 것이고.
“내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게이트 닫은 게 너희 때문이 아니라고.”
줄곧 잔잔하던 현우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꽥꽥, 시끄럽게 짖어 대는 것밖에 없는 너희를 내가 지켜 줘야 할 이유는 없어. 마찬가지로 너희들 목숨에 단 한 자락의 관심도 없고.”
그 순간 현우의 몸에서 파지직, 파지직, 푸른 전류가 튀어 올랐다.
“헌터법? 구속?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은 길드로 연락해. 다음 공략에 데려가 줄 테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잖아. 직접 가서 봐야 법이니, 공권력이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건지 알겠지.”
수십 명이 모여 있는 회견장에서 입을 여는 건 현우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너희들이 10등급 이상의 헌터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우리가 위험한 시한폭탄이라는 걸 알면 들쑤실 생각을 말고 조심할 생각을 해야지. 아, 저 새끼는 건들지만 않으면 최소한의 규칙은 지키는구나, 하고 취급 주의 딱지를 붙여서 피해 다녀야 정상 아닌가? 먼저 건드리는 건 무슨 심보지? 아, 신종 자살 수법? 죽여 줬으면 해서 이러는 거야? 내가 그걸 몰랐네. 죽고 싶어 하는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킥킥, 하고 이어지는 비웃음에 섞여 있는 건 분명 광기였다. 어쩌면 살기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고.
“니들이 자꾸 이러면 난 공략 거부할 거야. 이것도 착각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협박 맞아. 그러니까 귀담아들어.”
마이크에 입을 바짝 붙이고 있던 현우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헌터의 인권을 위해 법적으로 인정된 권리, 통칭 공략 거부권. 모든 헌터는 자주적 인격체로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5회 이상의 연속 공략 후에는 국가의 공략 요청을 거부할 수 있다. 만약 현우가 악의를 품고 저급 게이트를 공략한 후 높은 등급의 게이트만 거부한다면?
“내가 공략을 거부하면 남는 건 일곱 명이네. 11등급 이상을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여덟 번을 못 넘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한 번 확인해 볼까?”
다시 고개를 바로 한 현우의 표정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지금처럼 평화롭게 살고 싶으면, 처신 똑바로 해. 내가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확인하려 들지 마. 그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이었다.
“나 빈말 안 하는 놈인 거 알지?”
시작과 마찬가지로 질문으로 회견을 끝낸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를 주시하는 상황에서 홀로 단상을 내려가던 그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 직후 다시 몸을 돌린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마이크를 집어 들고서 가장 앞줄에 있던 카메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계란 던졌던 년, 뭐? 팬? 내 팬이라서 그랬다고? 씨발.”
뚝뚝, 다시 목을 꺾은 현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너 앞으로 내 눈앞에 띄지 마라. 아예 그냥 집 밖으로 나오지를 마. 보이는 순간 사지를 찢어발기고 내장을 익혀 줄 테니까. 너뿐만 아니라 네 위아래로 삼대를 똑같이 죽일 거야. 시체도 못 묻게 길드 앞에 걸어서 전시해 줄 거다. 네 일가친척이 그렇게 썩어 가는 걸 보면 다른 놈들도 내가 진심이라는 걸 배우겠지. 그러니까 타인의 귀감이 되고 싶으면 밖으로 기어…….”
현우가 말을 끝맺지 못한 건 회견장의 대기실과 연결된 문이 갑작스럽게 벌컥 열린 탓이다.
“야, 이 미친놈아!”
그의 처분을 걱정하며 회견장까지 동행했던 은지였다. 대기실에서 실시간 기자 회견을 방송으로 보고 얼어 있다가 다급히 뛰쳐나온 것이다. 후다닥, 곁으로 달려온 그녀가 현우의 등짝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현우는 몸을 비틀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걱정돼서.
“은지야, 아픈데.”
“거짓말하지 마! 야구 배트로 맞아도 소리 한번 안 내는 놈이!”
“그걸 알면서 왜 자꾸 손을 써? 제발 도구를 쓰라니까? 종류별로 사 줬잖아.”
현우는 자꾸 손찌검을 하는 그녀가 걱정되어 야구 배트와 오함마, 진압봉 등, 다양한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각성자의 몸을 때려 봐야 다치는 건 은지의 손이니까. 문제의 그 도구를 가져오기도 전에 터져 버린 그녀의 성질 때문에 몇 번 써 보지는 못했지만.
은지의 손을 잡아챈 현우가 보드라운 살결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가자.”
“가긴 어딜 가! 당장 사과해요!”
“내가 왜? 얌전히 있는 미친놈을 먼저 건드린 건 저놈들인데.”
“이, 이……!”
“오늘 내가 한 말 빈말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고 다녀. 너 잘못되면 나 여기 다 날릴 거니까.”
현우는 그길로 은지를 덜렁 안아서 회견장을 빠져나왔다.
“이 미친놈아아아!”
물의와 소란, 그리고 파급을 일으킨 회견은 뒷목을 잡은 은지의 비명 소리로 끝났다.
그날 현우는 집으로 돌아와 은지가 휘두르는 진압봉에 몸을 내주어야만 했다. 날이 새도록 이어지는 잔소리는 덤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민간인에게 직접적으로 각성자의 힘을 사용한 현우에게 내려진 처벌은 막대한 벌금이 전부였다. 정부 관계자들도 이미 아는 것이다. 여기서 잘못 대응하면 현우가 정말 눈이 돌아서 상급 게이트를 방치할 수 있는 미친놈이라고.
더군다나 10등급 이상의 헌터는 인간이 통제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의 시대에서 국가란 헌터들의 인정에 매달려 체계의 안전을 바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는 없으니 벌금을 부과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은지에게 계란을 던졌던 여자를 가중 처벌하는 것으로 현우와 타협을 보고자 했다. 아니, 그건 사실상 타협이라기보다 아부이자 경고였다. 만약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우선시되는 게 누구인지 보여 준 셈이다.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13등급 헌터,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민간인 한 명.
그 노골적인 행태에 많은 이들이 사법부의 결정을 욕했다. 현우를 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 말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탓이리라. 시간이 지나면 경각심을 잃고 다시 떠들어 대겠지만 당분간은 눈치를 살피는 척이라도 하겠지.
그에 현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러시아에서 발생한 12등급 게이트의 공략에 나섰다. 2년 전 처음 발생한 12등급 게이트. 올해 들어 벌써 일곱 번째였다.
‘점점 더 자주 생기는데.’
올 초 이미 13등급 게이트가 열렸다. 그런 상황에서 12등급 게이트의 발생 빈도가 늘어나고 있으니, 14등급 게이트가 열릴 날도 머지않았다는 신호다.
‘핵을 흡수해도 마력의 증가량이 적어.’
함께 공략을 한 헌터들과 나눠야 하니 어쩔 수는 없지만. 이러다간 14등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 고전할지도 모른다.
‘안전한 등급의 게이트를 독점해서라도 마력을 늘려야겠어.’
속으로 혀를 찬 현우가 손을 내밀었다. 전속 서포터가 당연하다는 듯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뚜르르, 뚜르르.
평소보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뒤로 서포터가 말했다.
“열흘 전 13등급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여드레 전 동급 헌터 다섯 명이 공략을 위해 진입했고요.”
현우에게도 버거운 13등급 게이트의 발생 소식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서포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현우는 긴장을 풀었다.
지난번 공략에서 부상을 입은 한 명, 이번 12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동행한 한 명, 그리고 현우 본인까지. 세 명을 제외한 모든 13등급 헌터가 나섰다. 그들 모두 연차가 현우보다 오래되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첫 13등급 게이트 공략 당시에도 동급 헌터 세 명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었다. 이번에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다섯 명이 들어간 것일 테니 곧 공략되리라.
은지가 있는 나라에 게이트가 생긴 것이 찝찝했지만, 발생 지역이 길드 건물과 제법 멀었다. 만약 공략에 실패해 게이트가 깨져도 당장 그녀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별장에 가 있으라고 해야겠다.’
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연결음이 끊어지고 은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공략 끝났어요? 다친 곳은 없고요?
“자잘하게 긁힌 정도야. 이 정도는 내일 되면 다 나아.”
사실은 팔이 떨어져 나갈 뻔했지만, 부지런히 모아 둔 엘릭서로 감쪽같이 치료했다. 게이트에서 나오기 전 동행했던 헌터들에게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으니, 은지가 그의 부상 소식을 접하는 일은 없으리라.
“어디야? 화상 통화 가능해? 얼굴 보고 싶어.”
-지금은 조금 곤란해요. 신규 13등급 게이트 앞에 와 있어서.
현우의 눈썹이 아주 사납게 꿈틀거렸다.
“네가 거길 왜 가?”
큰 문제 없이 공략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은지는 그 옆에 있으면 안 된다. 인간은 앞날을 모르는 존재이기에 그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며 살아왔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당장 이동해.”
-팀장님이랑 외근 온 거라고요. 차후의 부산물 정리를 저희 번영에서 따냈어요. 실무자들 만날 겸…….
“외근이고 뭐고, 당장 이동하라니까.”
-세계급 헌터들 다 왔는데 무슨 일이 생기려고요. 벌써 여드레가 지났으니 안정적으로 공략 중일 거예요.
“강은지, 나 빈말 안 해.”
그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번잡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지 씨, 뛰어!
-네?
곧이어 쿠왕, 하고 굉음이 울리더니 뚝. 핸드폰이 고요해졌다. 한 번, 두 번, 눈을 끔뻑거리던 현우가 말했다.
“……은지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통화가 끊겼다. 심장에서부터 기이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이명이 들려오고 시야가 흐릿해지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을 무렵.
“신규 13등급 게이트 터졌답니다!”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은 서포터가 사색이 된 채로 소리쳤다. 그때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갑작스럽게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땅에 묻혀 버린 것일지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새까만 절망이 부룩부룩,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펑 터졌을 때. 그가 10년이 넘도록 몸 안에 쌓아 온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온몸이 녹아서 흐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연기처럼 하늘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현우는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끝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진 폭음과 비명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크아아악!”
그리고 웬만한 3층 건물만 한 크기의 검은색 괴물이 그를 보며 괴성을 토해 냈다. 놈의 옆을 바글바글하게 채우고 있던 괴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놈들의 발치에는 박살 나 버린 카메라와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저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괴물들 대신 그 아비규환의 광경을 담고 있던 현우의 눈동자 속에서 파란 안광이 피어났다. 그 직후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던 마력이 요동쳤다.
“으아아아!”
처절한 절규와 함께 하늘에서 시퍼런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을 맞은 괴물의 몸이 움찔거리는 사이 허공에서 파지직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온 세상이 벼락으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찰나 사방에서 들려오던 폭음과 비명 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와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 곳에, 현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간 마력이 이리저리 꿈틀거리며 허공을 배회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스파크가 일어났다.
허억, 허억, 허억.
습관적으로 내뱉는 숨이 고통스러웠다. 새카맣게 타 버린 괴물들의 사체가 보였다. 그 위로 모락모락 피어난 연기가 주변을 자욱하게 덮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얼마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의식을 잃기 직전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는 퍼즐처럼.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하자 익숙한 지명이 보였다.
신규 13등급 게이트가 열렸다던 그곳. 연락이 두절된 은지가 있었을 곳. 지금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나도 남지 않은 곳.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으, 은지야…….”
볼품없이 흔들리는 목소리에 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은, 지야…….”
주춤거리며 나아간 걸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체 옆에서 멈추었다.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은 현우가 손을 뻗었다.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으려던 찰나.
“차, 차현우 헌터! 김은지 씨는 무사합니다!”
낯선 음성이 그를 불러세웠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곧 부서진 건물 앞에서 십수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속에서 제게 달려오는 사람을 발견한 현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앉아 있던 그의 품으로 뛰어든 건 은지였다.
“혀, 현우 씨. 괜찮아요? 다, 다친 데 없어요? 여긴 대체 어떻게…….”
은지가 살아 있었다.
그 짧은 문장을 명확하게 정의한 후에야 굳어 있던 현우의 몸이 움직였다. 은지를 와락 껴안은 현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곁에서.
* * *
“하아!”
철퍽, 철퍽.
어둠 속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흥건한 정액과 애액이 젖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으…….”
침대에 엎드린 채 간헐적으로 겨우 숨만 내쉬던 은지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으핫……!”
정신을 잃고 있다가 다시 깨어난 은지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히, 힘들어……. 흣!”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울먹이며 현우의 품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현우는 그녀를 놔주는 대신 더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가만히, 있어. 나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하앙, 앙!”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읊조린 현우가 은지의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그 직후 이를 박아 넣자 펄떡거리는 맥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두 눈으로 직접 무사한 것을 확인했음에도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의 감정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은지의 살갗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세게 깨물어 대던 현우가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축 늘어진 여체를 돌려 안아 저와 마주 보게 한 뒤 다시 허리를 쳐올리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교성이 이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질질 흘러나오고 있는 은지의 타액을 핥아 마신 현우가 으르렁거렸다.
“앞으로는, 후, 게이트 근처에 가지 마.”
“하흥, 아앙!”
“너 죽으면 여기 있는 것들도 다 죽어.”
허리를 쳐댈 때마다 힘없이 나풀거리는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알아들어?”
숫제 협박을 하듯 낮게 읊조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에 은지의 몸을 결박하듯 꽉 껴안은 현우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제대로 대답해. 게이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살기가 그득한 재촉이 이어지자 은지가 흐느끼며 답했다.
“아, 알았, 알았으니까……. 하응!”
그제야 사납던 현우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하아… 착하네.”
현우는 여린 목덜미를 핥으며 부드럽게 허리를 돌렸다. 그 틈을 타 힉, 힉, 하고 가쁜 숨을 고르던 은지의 몸이 별안간 뻣뻣하게 굳었다. 잠시 허리 짓을 멈추었던 현우가 무릎을 세우고 앉았으니까. 그는 본격적인 추삽질을 예고하듯, 길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 만…….”
그에 겨우 현우에게 매달려 있던 은지가 애원했다. 안타깝게도 그 애원은 현우에게 닿지 못했다. 입술을 혀로 적신 현우가 들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힘들면 다시 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은지의 오금에 팔을 걸기 무섭게 다시 시작된 추삽질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파정에 파정을 거듭해서, 함께 몸을 누인 시트가 정액으로 뒤덮일 때까지 계속.
* * *
신규 13등급 게이트 공략은 실패했다. 공략을 위해 내부로 진입했던 헌터 및 서포터 104명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에 게이트는 방치 상대가 되었고 핵이 폭발한 것이다.
13등급 게이트 내부에 있던 몬스터들이 시가지로 쏟아져 나온 그 날 시 규모의 도시가 완전히 반파되었다. 사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사람들은 7년 만에 벌어진 공략 실패에 자신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로 인해 현우에게 다시 한번 시선이 집중되었다. 러시아의 12등급 게이트 공략을 마치자마자 한국에서 모습을 드러낸 헌터. 13등급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한순간 모두 도륙시킨 헌터. 사흘간의 칩거를 끝내고 헌터국에 모습을 드러낸 차현우.
“마, 마력 측정이… 안 됩니다.”
“뭐?”
“차현우 헌터의 체내에… 마력이 없다고요. 단 한 톨도.”
게이트 발생 초기 정부에서 설립한 헌터국은 한국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정보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신규 각성 등록은 물론 등급 재측정, 공략 의뢰 전달과 부산물 처리 이후의 정산까지 담당했다.
그곳에서 각종 검사를 끝낸 후 나온 첫마디에 동행한 길드의 서포터가 입을 떡 벌렸다. 13등급 헌터 중에서도 세 번째로 많은 마력 보유자였던 현우에게 단 한 톨의 마력도 없다는데, 놀랄 법도 하지.
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현우는 덤덤했다. 그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이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서 무언가 계속 일렁이고 있었다.
‘영웅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본래 체내에 고여 있어야 할 마력을 모두 외부로 내보낸 탓이다. 한동안 그것을 빤히 보던 현우가 의식을 집중했다. 충격적인 결과를 전달한 후 고요하던 공간에 이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치직, 치직, 그건 고장 난 라디오에서 나는 소음과 비슷했다. 갑작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직후 검사실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허공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스파크를 보았으니까.
“마, 마력이 없다니! 그럼 저건 뭐야! 차 헌터 고유 각성 능력은 그대로잖아! 당신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
길드 최고 전력에게 마력이 한 톨도 없다는 소리에 넋이 나가 있던 서포터가 헌터국 직원들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그마저도 현우의 한마디에 조용해졌지만. 밖으로 내보냈던 마나를 체내로 회수한 그가 짧게 말을 덧붙였다.
“다시 측정해 봐.”
“네? 아… 네, 네! 측정기 돌려!”
멍하니 반문하던 직원이 서둘러 다시 마력 측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는 직전과 달랐다.
“기, 기존 마력보다 8만가량 증가했습니다. 마지막 측정 이후 공략 일정을 고려하면… 유효 범위 내에 해당합니다. 대체 이게…….”
“한 번 더.”
현우는 그대로 마력을 빼내고 집어넣는 것을 반복하며 측정을 거듭했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검사실 내부에서 몇 번, 아예 건물 밖으로 몇 번. 감각을 익히는 것처럼 제법 많은 이동을 거듭한 후에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를 보고 함께 있던 이들이 모두 입을 뻐끔거렸다.
혼란스러운 이들 틈에서 유일하게 차분하던 현우가 픽, 웃었다.
‘아르페시스가 날아다니던 게 이 힘 덕분이구나.’
그의 마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각성 능력을 발현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건 아마도 아르셀에서 인외라 칭하던 영역일 터.
모르고 있던 것들을 알게 되자 새삼 복잡해졌다. 인외의 힘을 각성하던 당시의 감각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던 그 추락감과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열망. 현우는 은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살아 있기를. 그 염원이 그를 인외로 이끌었다.
‘이렇게나 간절했다고.’
에스메랄다가 죽어 버린 후 아르페시스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생 같던 이가 품고 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게 되자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다. 현우는 저의 유언대로 에스메랄다와 함께 해맑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지금은 과거를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앞날을 볼 때지. 찬찬히 하나, 둘 실험을 해 본 결과 확실했다. 그는 인외의 영역에 들어섰다.
‘이게 영웅의 조건이라면.’
둥, 둥, 둥. 벅찬 박동의 끝에서 현우는 확답을 얻었다.
[고생했다. 랑곤은 네게 맡기마.]
익숙한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채우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는 정말로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저를 보살펴 준 가브리엘에게 마지막 감사를 전한 현우가 숨을 골랐다. 그 직후 그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자신과 함께 온 길드 관계자를 쳐다보았다.
“그놈 키워야겠어.”
“예?”
“이번에 은지 살려 준 놈, 키워 놔야겠다고. 당장 불러. 길드 가입시키고 공략 일정부터 짜. 내년까지 10등급으로 만들 거니까 휴식은 없다. 내가 같이 들어갈 테니 바로 준비 시작해.”
은지를 포함해 십수 명의 생명을 구한 양지훈.
그는 외부와 내부를 차단할 수 있는 ‘장벽’ 능력을 각성한 4등급 헌터였다. 실드와 비슷한 듯하지만, 장벽 외부에 환영을 덧씌워 은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상위 능력으로 분류되었다. 한국에서는 여섯밖에 없는 희귀 능력이기도 했고.
현우는 이번 기회에 그를 제대로 키워서 은지의 전담 호위로 편성할 생각이었다. 언제 또 이번과 같은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상, 그런 능력자를 곁에 두면 더 안전해지겠지. 인간에게서도, 몬스터에게서도, 은지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우가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더듬거리며 답을 한 길드 관계자가 물었다.
“아, 예, 예. 그런데 차현우 헌터, 방금 그건 대체 뭡니까……? 혹시 러시아에서 바로 한국으로 오실 수 있었던 게… 2차 각성입니까? 텔레포트 능력을 각성하신…….”
“인외.”
“예?”
“인외의 영역.”
그에게 짧은 한마디를 던져준 현우의 신영이 다시 사라졌다. 의문을 풀었으니 은지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한 번의 이동만으로 집에 도착한 현우가 조심스레 침대에 걸터앉았다. 은지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너도 그렇게 힘들었겠지.’
그녀가 죽은 줄 알았던 순간의 감정들은 마치 흉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막연히 힘들 것이라고, 고통스러웠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겪어 보니 고작해야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 끔찍한 것들을 루이자에게 알려 주었던 게 자신이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꿈으로 자신을 볼 때마다 기뻐했던 과거가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날 용서하지 마.”
그러니 그녀가 자신을 평생토록 원망한다 해도 이해하리라. 이렇게나 죄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는 자신이 끔찍해서. 그 시절을 떠올리고도 제 곁에 남아 준 그녀에게 감사해서.
“사랑해…….”
잠든 은지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꽉 잠겨 버렸다.
* * *
팔을 되찾은 이후 아레스는 재활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미 그의 출정 일자는 정해졌다. 다가오는 여름, 아르페시스가 황도로 돌아와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키게 되면 아레스가 그를 대신해 남부군을 통솔하기로 했다.
이는 아레스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명확한 말이 오간 것은 아니나 제르민이 그에게 팔을 돌려준 건 다시 출정하라는 뜻과 같았다. 그의 출정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으니 겸사겸사. 제 자식을 마음껏 안아 주지 못한 채 전선을 떠도는 동생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다.
오멘과 아르페시스, 두 사람에게 모두 뜻을 전했고 오멘이 아르페시스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페드로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상 자주 만나는 건 좋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반면 아르페시스는 무거운 얼굴을 하고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한 해의 대부분을 떨어져 보내는 에스메랄다와 유세프가 그리웠으리라. 그렇게 서로의 자리를 바꾸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물러나지 마라! 건물에 마수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공연장 건물 앞으로 몰려온 마수의 미간에 검을 찔러 넣은 아레스가 외쳤다. 마나가 담긴 목소리가 엉망이 된 거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물러나는 자들은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의 뒤를 페르멘이 뒤따랐다.
연이은 자극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 겁에 질린 채 주춤주춤, 물러나던 기사들 중 일부가 검을 고쳐 잡았으니까.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살면서 마수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들이다. 두세 명이 모여야 겨우 소형 마수를 상대할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는 완전히 겁에 질려 다리에 힘이 풀린 이들도 있었다. 기사 작위를 장식물로 여기는 귀족들이었다.
“기동성을 빼앗아! 다리를 노려!”
그들 틈에서 홀로 마수들을 상대하는 이들은 단연 눈에 띄었다. 중앙군 소속으로 남부에 파병되었던 기사들과 테노리엘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수의 사체가 쌓여 갔다.
‘황도에서 마수라니.’
아레스 역시 이를 악물고서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재활 훈련을 해 온 건 오늘날의 사고를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그는 단지 출정 전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의 외출 일정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고. 기사단을 이끄느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 동생 내외와 함께 극장에 방문했을 뿐인데, 황도 한복판에서 마수를 상대하게 될 줄이야.
‘멜리안이 편하게 극을 관람한 적이 없어서, 한 번쯤 갔으면 해.’
‘형수님이랑 몇 번 다녀온 것 같기는 한데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을 거야.’
페르멘의 말을 듣고 사교계에서 평이 좋은 극을 골랐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루이자는 물론 아레스도 오랜만에 머리 아픈 생각을 떨치고 웃을 수 있었다. 극이 끝나기도 전에 폭음이 들려오는 바람에 일이 꼬였지만. 공연장 앞의 대로가 무너지고, 그 구멍에서 마수가 쏟아져 나왔다. 해서 대피 대신 기사 작위를 가진 자들이 나서서 건물 앞을 막아서는 중이었다.
‘도박장에서 사육하던 것치고는 많다.’
과거 마수 투기장에 있던 마수들이 탈출해 소란을 일으켰던 것과는 그 규모가 달랐다. 아레스가 베어 넘긴 놈들만 해도 벌써 10기가 넘는다. 다른 이들이 상대하는 것까지 셈하면 수십은 거뜬하리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를 십여 분.
“지원이다! 황실 기사단이다!”
치안대보다 황실 기사단이 먼저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구덩이 앞에 포진한 기사들이 튀어나오는 마수들을 도륙했다.
“부단장님, 동쪽 광장과 남쪽 시가지에서도 현재 마수와 교전 중입니다! 치안대는 모두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페르멘의 얼굴이 구겨졌다.
“형!”
아레스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어느 쪽?”
“시가지! 장인어른께서 월터와 살롱에 가셨어! 베름으로!”
반사적으로 되묻자 다급한 답이 돌아왔다.
페르멘은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었고, 황실 기사단은 황제 직할령에서 최상위 군사 조직이다. 유사시 황도 치안대와 황도 내에 주둔 중인 중앙군의 통솔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페르멘은 이 난리 통이 벌어진 와중에 제 가족을 챙기겠다고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 해서 아레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호위 기사에게 말을 건네받은 아레스가 극장 건물을 한 번 돌아보았다. 루이자와 멜리안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곳엔 페르멘이 남을 터. 그녀들을 호위하기 위해 동행한 기사들도 있으니 괜찮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인 아레스가 말의 허리를 박찼다.
간간이 마주치는 마수를 베어 넘기고 도착한 시가지는 난장판이었다. 시가지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인파는 사라졌고, 대신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시체를 뜯어먹는 마수가 배회 중이었다. 공연장과 달리 곧바로 마수에게 대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마수가 튀어나온 구덩이가 멀지 않은 모양이다.
이를 악문 아레스가 말에서 뛰어내려 마수들을 두 동강 냈다. 페르멘이 말한 이름의 살롱 근처에도 몇 마리의 마수가 배회 중이었다.
놈들을 베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아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1층 내부는 엉망이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물건들이 당시의 다급한 상황을 알려 주었다. 혹여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내부를 수색하던 아레스의 걸음이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부산스러운 발자국과 이동 동선은 건물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이어졌으니까.
지하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트 남작! 사돈어른!”
혹시나 싶어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꽉 잠겨 있던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테, 테노리엘 후작!”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아레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히도 아마트 남작은 밖으로 대피하는 대신 안쪽에 숨어 구조를 기다린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간 아레스는 십수 명의 귀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남작과 살롱을 방문했다는 월터도 함께였다. 천만다행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레스가 마수의 핏물이 가득한 검을 털어 냈다.
“여, 여긴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페르멘이 알려 주었습니다. 전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내부를 쭉 둘러본 아레스가 간략하게나마 외부 상황을 전해 주었다.
“치안대와 황실 기사단이 나섰으니 오래지 않아 정리될 겁니다. 그동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죠.”
“……사태가 심각합니까?”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내부에 있는 귀족들을 의식한 아레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일은 사고라고 보기 힘들었다. 동시다발적인 폭발과 수백 기에 달하는 마수는 인구가 많은 구역에서 나타났다. 이는 사고라기보다 누군가가 부러 의도한 습격에 가까웠다. 아레스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남작에게 속삭였다.
“지하실로 오신 건 잘하신 일입니다. 만약 또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도 도주 대신 몸을 숨기십시오.”
후각이 예민한 마수들이라면 금방 찾아내겠으나, 주변에 다른 먹잇감이 많은 이상 굳이 번거로운 수색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숨는 게 나았다. 밖으로 나가 봐야 도망치다 잡아 먹힐 뿐이니까. 혹시 모를 사태를 가정한 아레스의 말에 아마트 남작이 옆을 내려다보았다.
“월터의 말을 듣기를 잘했군요.”
“……아마트 영식이요?”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머쓱한 표정의 소년이 보였다. 올해 열네 살이 된 월터였다.
“월터 녀석이 나가면 안 된다고, 나가면 잡아먹힌다고 소리를 지르지 뭡니까.”
그 말을 들은 이들 중 일부가 지하실로 함께 대피한 모양이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 월터가 말했다.
“일전에 매형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형 마수의 기동성은 사람의 발로 떨쳐 낼 수 없다고…….”
“아.”
“마차를 타고 온 이상 빨리 달리기도 힘들 테고, 황도 내에서 기마를 해 보았자 얼마나 빨리 달리겠나 싶어서…….”
“훌륭한 판단이었네. 영식이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도망가야 했던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월터의 어깨를 두드려 준 아레스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근방으로 접근하는 마수들을 토벌하며 1시간쯤 흘렀을까? 마수의 씨가 마르고 후속 처리가 시작되었을 무렵, 지하실에 있던 이들 모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장인어른!”
오래지 않아 페르멘이 살롱으로 뛰어왔다. 그의 몸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지원을 나온 기사들에게 받은 것인지, 왼손에는 단창까지 들고 있었다. 아마트 남작과 월터를 꼼꼼히 살핀 그는 아레스를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고마워, 형.”
아레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동생을 마주 안아 주었다.
“고맙기는, 내게도 귀한 분들이다.”
“……멜이랑 형수님은 기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보냈어. 부탁할게.”
“그래, 그쪽은 맡겨라. 다치지 말고.”
“걱정하지 마.”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준 형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마트 남작과 월터를 챙겨 저택으로 돌아오자, 이미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가 유지 중이었다. 기사들은 자리를 비운 아레스를 대신해 페르멘의 저택에 있던 아마트 남작 부인까지 데려와 보호 중이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도하기 무섭게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전보 마도구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에스메랄다가 연락을 보낸 것이다.
「다들 무사한가요?」
간략한 답을 적어 보낼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알려 주었다.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이번 사건의 배후가 드러났다. 과거 마수 방생 사태에 반감을 품은 세튀스의 짓이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그에 에스메랄다는 내전으로 세튀스의 왕위를 찬탈한 이들에게 죄를 물었다. 새로운 왕조는 사죄와 배상 대신 발뺌을 반복했고, 양국의 정세는 날카롭게 벼려졌다. 에스메랄다는 신왕조를 처단하기 위해 과거에 쫓겨난 어린 왕자에게 병력을 지원했고, 세튀스에서는 또 한 번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렇게 어린 왕자가 세튀스의 왕좌에 올랐을 때, 아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튀스가 엮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왕좌를 빼앗긴 후 숨어 있던 어린 왕자를 찾아낸 것도, 다시 한번 내전이 발발한 것까지. 모든 일이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서 묵인했구나.’
에스메랄다는 모든 것을 밝혀낼 자신이 있었기에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은 것이다. 가만히 두면 세튀스를 들쑤실 명분을 쥐게 되니까. 아레스는 무거운 진실을 가슴속 깊이 묻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틀리지 않았다고.
실제로 10여 년 후, 에스메랄다는 세튀스의 장병 수십만 명을 전선으로 밀어 넣었다. 세튀스가 에렘에게 행한 만행에 대한 죗값이자, 어린 왕에게 지원해 주었던 병력의 대가를 받아 낸 것이다. 그러니 틀리지 않았다. 단지 비정했을 뿐이지.
아레스는 그것을 깨달았기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속에 묻었다. 에스메랄다는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혹여 그 비정함에 휘말린 혈육이 위험해진다 해도, 자책할지언정 멈추지는 않으리라. 그에 누이가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시렸다.
* * *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삶이었다. 결코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어이 미련은 남아서.
“사랑합니다…….”
오멘은 소피아에게 닿지 못할 마음을 마지막 숨결에 섞어서 고해 보았다.
「1447년 카 91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오라비, 라 아그라 테노리엘 오멘이 옛 페르데른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나, 시신은 찾지 못하다.
- 수석 서기관 바 오트 올바트 카셀 『에렘황조록 연혁편 1447년』 中 발췌.」
「소피아, 난 당신을 만나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그간 이기적이었던 내 곁에 머물러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먼저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당신을 놔주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요. 부디 나의 미래 위에 쌓은 당신의 삶이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며.
훗날의 짐이 될까 봐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을 담아 안녕을 고합니다.」
* * *
명예로운 죽음을 기린 장례식은 황도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영지로 내려와 입관을 기다리던 중 에스메랄다는 오멘의 관 앞에 섰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는 그곳에 없었다. 시신을 되찾지 못했기에 빈 관을 채운 건 오멘의 유품뿐이었다.
검은 베일 아래에서 흐르는 눈물은 며칠째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던 가족들도 슬픈 눈물로 오멘을 배웅했다. 입관이 시작되자 이를 악물고 슬픔을 버티던 페르멘이 무너졌다.
“으아아아!”
그는 구슬픈 절규로 형제를 붙잡았다. 자세를 낮추고 페르멘의 어깨를 붙들어 준 아레스가 말했다.
“편히 갈 수 있게 해 주어야지.”
엄한 조언이었으나, 정작 그의 목소리도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통한 이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르페시스의 가슴에 기대었다. 오멘에게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동안 흙이 구덩이를 채우고 비석이 세워졌다.
「라 아그라 테노리엘 오멘
대륙력 1416년 라 98 ~ 1447년 카 91일
꺾이지 않는 신념을 품고서 명예롭게 전사한 기사와 형제, 오멘이 이곳에 잠들다.」
그에 루이자와 멜리안의 도움으로 겨우 서 있던 소피아가 쓰러졌다.
“의원, 의원을!”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든 페르멘이 비석을 등진 채 성으로 뛰어갔다. 혼비백산한 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에스메랄다가 혼절했던 소피아를 다시 만난 건 하루가 훌쩍 지난 후의 일이었다.
“화, 황후 폐하.”
그녀의 방문에 놀란 소피아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황후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오멘 오라버니의 누이로 온 것이니 일어날 것 없네.”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만류하고서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쥔 소피아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네, 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의 손을 잡자 오멘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라버니께서 자네에게 청혼을 하지 못한 건 나 때문이지.”
자신의 고통을 핑계로 오멘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 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구설수 몇 마디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그러니 제발 혼례를 올리라고. 오멘이 살아 있을 무렵 수도 없이 설득했다. 그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러더니 기어이 떠나 버렸다. 제 자식도, 제 배필도 제대로 품지 않고서 매정하게. 오로지 에스메랄다를 위한다는 이기로.
「걱정 어린 마음으로 몇 가지 당부를 남깁니다.
저는 끝내 폐하께 상처를 남기고 떠나는 못난 오라비이고, 스스로를 위해 귀한 여인에게 청혼조차 하지 않은 못난 사내입니다. 그럼에도 분에 넘칠 만큼 행복한 시간을 허락받았죠.
모든 것을 두고 잔인하게 떠나 버리는 지금, 그녀가 하루빨리 저를 잊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저를 뒤에 남겨 두고 나아가시는 폐하의 걸음에 망설임이 없기를 바라며. 못난 오라비가 사랑하는 누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부디 너의 앞길에 슬픔보다 행복이 가득하기를.」
오멘의 유서를 떠올린 에스메랄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라버니께선…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 그리 말씀하셨네.”
고인의 유지를 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소피아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오라비가 심장에 품은 여인이고, 사랑스러운 조카 페드로의 모친이다. 오멘이 떠난 이상 테노리엘이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한데, 어찌 가만히 있겠나. 그렇다 해서 멋대로 혼약서를 작성하는 건 오멘을 기만하는 일이 될 터.
“모든 것은 자네의 뜻에 따르겠네.”
에스메랄다는 가문의 족보에 그녀의 이름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혼인 문서도, 신전의 인정도 없을 테지만… 이름은 남길 수 있겠지.”
오멘이 혼인을 했다는 그 어떤 문서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페노리엘가의 족보에는 오멘과 소피아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지리라.
“물론, 자네가 허락해 준다면 말이야.”
엉엉, 울기 시작한 소피아가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오멘이 이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된 원흉이 듣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인사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는 소피아의 손을 꽉 마주 잡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이미 이주 얘기는 끝났다지.”
소피아는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겨우겨우 끄덕거렸다. 그녀가 마음에 걸렸던 건 아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서 소피아가 원한다면 남부를 떠나 테노리엘령에 정착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었고. 몇 해 전 혈육을 모두 잃었던 소피아는 각별하게 지내는 로리아의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기로 했다.
떨리는 손으로 소피아의 눈물을 닦아 준 에스메랄다가 슬피 웃으며 말했다.
“혹여나 하는 말이네만, 좋은 이를 만나면 망설이지 말게. 오라버니도 그걸 바라실 테니.”
소피아 역시 구슬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재혼을 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며칠 후 족보에 적힌 두 개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께서도 분명 이리하고 싶으셨을 테죠.”
오멘의 뜻에 따라 그와 소피아의 혼인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단지 소피아를 테노리엘의 울타리 안으로 데려와 가족으로서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는 고인의 유지를 어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 비겁함은 용서해 달라고.
“부디, 평안하시기를.”
고요한 목소리로 떠난 이의 안녕을 바라 본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렸다. 소중한 이의 죽음을 뒤로하고 다시 그녀의 전쟁터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지난봄, 연합군은 마룡의 둥지 근처에서 40만에 달하는 마수와의 교전을 겪었다. 그곳에 출현한 대형 마수는 총 12기. 아레스는 그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내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해가 거의 끝나 가는 오늘 영지에 방문해 가문의 묘지를 찾았다.
“백부님, 저쪽이던가요? 몇 년 만이라 헷갈리네요.”
“……그래.”
제 아비들을 쏙 빼닮은 페드로가 앞장섰다. 아레스는 그의 뒤에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두 사람은 부친과 페드로, 오멘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 도착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이를 악문 채 눈을 감자 어두운 감정이 그를 채워 나갔다. 그는 자신의 부친과 두 동생이 맞선 전장에서 도망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때때로 숨이 틀어막혔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대형 마수를 등지고 도망쳤을 것이다. 루이자와 약속했으니까. 지난날의 신념을 꺾고 이곳으로 돌아온 이상 여생을 이 지독한 죄책감과 함께해야겠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
“큼.”
아레스는 꽉 잠긴 목을 풀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부친과 형제들의 비석을 쓸어 보기도 잠시. 몸을 일으킨 아레스가 페드로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제 차례를 기다리던 페드로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아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비석을 하나하나 쓸어 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님, 백부님, 그리고… 아버지.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지난 카 3일, 페르멘은 성년이 된 페드로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날 오멘의 기일에 맞춰 페드로를 영지로 보냈다. 아직 전쟁이 다 끝나지 않아 시간을 내기 힘든 페르멘을 대신해 아레스가 동행하기로 했고. 그들은 각자의 복잡한 감정을 품고서 부모 형제의 묘비 앞에 섰다.
“예전에 뵈었을 때는 백부님인 줄 알고…….”
꽉 잠긴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레스는 아무런 말 없이 페드로의 곁을 지켜 주었다. 이후 페드로는 별말 없이 그저 오멘의 비석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기다렸다.
이윽고 자박자박,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레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워지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제수씨.”
오멘이 떠난 후 테노리엘령으로 이주한 소피아였다. 부러 오늘 묘지를 찾은 건 페드로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굳어 버렸던 소피아가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후, 후작님, 안녕하세요. 그간 무탈하셨…….”
그리고 다시 몸을 바로 세워 아레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페드로가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허?”
두어 살 무렵 이후 처음으로 제 친모를 만난 페드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에 아레스가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느냐. 네 아버지들이 쌍둥이었다고.”
“아니, 백부님. 아무리 쌍둥이라도 이건…….”
“계속 그러고 있을 게냐?”
“아, 흠, 죄송합니다.”
서둘러 자세를 가다듬은 페드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허리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페드로입니다.”
소피아가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씩 덧칠되었다.
페드로의 등을 토닥여 준 아레스는 부모 형제들의 묘비를 한 번 돌아본 후 걸음을 옮겼다. 몇 년 만에 만난 소피아와 해후를 푸는 건 뒤로 미루어도 되리라. 지금은 모자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묘비를 빠져나온 그는 곧장 영주 성으로 향했다.
“아버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사랑스러운 가족들이었다. 해맑은 웃음으로 그를 반긴 레아나와 노만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루이자였다.
“아레스, 다녀왔어요?”
그의 신념과 삶을 뒤바꾸어 놓은 사람.
아레스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루이자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은 아레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했다.
“네, 다녀왔어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임에도 참, 따스한 날이었다.
* * *
인외의 영역에 닿았으나, 아직 은지까지 이동시키는 건 무리였다. 해서 그녀의 출퇴근 길을 함께할 때는 언제나 차량을 사용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하는 은지를 데리러 온 현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약국에, 잠시 약국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아파?”
“아, 아뇨, 그냥… 살 게 있어서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현우는 길드 앞 사거리에서 핸들을 돌렸다. 가까운 약국을 알고 있기에 방향을 튼 것이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핸들을 꾹 움켜쥐었던 현우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은지의 치마 속을 더듬었다. 13등급 게이트 사건 이후 그가 은지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때때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곁에 있는 은지를 무작정 안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현우는 아직도 불안정했고, 그걸 알고 있는 은지는 그가 요구할 때면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응해 주었다.
그런데 왜.
“지, 지금은 안 돼요…….”
은지의 속옷 위를 문지르던 현우의 손가락이 덜컥, 굳었다. 다리를 꽁꽁 닫고서 그의 손목을 붙잡은 은지가 손에 힘을 주었다. 현우는 순순히 물러나는 대신 힘을 주어 버텼다. 그리고 초조한 눈으로 은지를 바라보았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도 겪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그날이 생각났다. 이미 현우의 심장은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 대는 중이었다. 그는 당장 은지를 안아야 했다. 그래야 이 지독한 불안감이 가라앉을 테니까. 은지 역시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강경했다.
결국 현우는 딱딱하게 굳은 은지의 표정을 보고서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왜? 생리해?”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초조했다. 피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왜 그녀가 자신을 거부할까? 그간 너무 무리시켰나? 하지만 당장 그녀가 필요한데.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해야만 이 불안감이 가라앉을 텐데.
“그, 일단 좀… 기다려 봐요.”
“……뭘 기다리는데?”
입술을 꾹 깨문 은지가 현우의 시선을 피했다. 현우 역시 이를 악문 채 차를 세웠다. 후다닥 문을 열고 내린 은지가 약국으로 뛰어 들어갔다.
딱, 딱딱, 굳은 얼굴로 손가락 관절을 누르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국이 아니라, 약국이 자리 잡은 건물의 문을 열고 나온 은지가 보였다. 식식거리며 돌아온 그녀는 차 문을 열기 무섭게 무언가를 냅다 집어 던졌다.
현우는 재빠르게 그것을 받아 들었고.
“그러게 콘돔 쓰라고 했잖아!”
은지는 차 밖에 선 채로 빽, 고함을 질렀다.
시선을 내리자 임신 테스트기가 보였다. 가운데 그어진 줄은 두 개. 스멀스멀 피어난 미소가 현우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손을 뻗어 은지를 잡아끈 현우가 곧장 입술을 맞대었다. 파지직, 하고 튀어 오른 마력이 차 문을 닫았고 현우는 조수석 쪽으로 올라타며 더 깊게 혀를 얽었다.
“으읍, 흡.”
차 안으로 끌려들어 온 은지는 울먹이며 현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섹스를 하지도 않았는데 불안감은 희미해지고 환희가 현우를 가득 채웠다. 길고 긴 키스 끝에 몸을 물린 현우가 은지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속삭였다.
“이젠 나랑 결혼해 줄 거야?”
훌쩍, 하고 코를 삼킨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서 몇 번이고 퇴짜를 놓던 그녀가 드디어.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간 현우의 입술이 은지의 아랫배에 닿았다.
“태어나기만 해, 그럼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그녀의 태중에 있을 아이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식장은 내일 알아보고, 오늘은 병원부터 가자.”
약국 앞에 정차해 있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 * *
전생과 현생, 두 번의 삶을 거치는 동안 줄곧 사랑한 여인과 맺어지는 날. 단상 위에 서서 은지를 기다리던 현우가 눈을 감았다. 그는 아레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처럼 요람을 빠져나왔다면.’
그리하여 그도 미카엘의 곁에서 자신과 은지를 지켜보고 있다면 좋겠다. 이번 생에는 저가 그에게 보여 줄 테니까. 은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은지로 인해 행복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서로가 한 번씩 주고받은 후에는. 언젠가 다시 같은 세상에서 태어나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중혼이 가능한 차원이 있을까 모르겠네.’
마신의 장난질이 계속되는 이상 인외에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이 필요한 곳은 많을 터. 그중 한 곳쯤은 중혼이 허락되겠지. 그곳에서 아레스도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그래서 서로가 망상으로만 그리던 정사를 함께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자, 그럼 이제 하객 여러분들이 가장 기다리던 순서군요.”
사후의 계획을 짜고 있던 현우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닿았다. 오늘의 사회를 맡은 은지의 대학 동창이었다.
“하지만 너무 순순히 시작하면 재미없겠죠? 신랑이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
현우는 그가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에 눈을 부라렸다.
“재, 재미를 찾다간 제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네요.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하객들 틈에서 웃음소리가 피어나자 현우의 눈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교우 관계라고 부를 것이 전혀 없는 현우에겐 사회를 부탁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기회는 은지의 친구들에게 넘어갔다. 그녀의 주변에 이성 친구가 있는 것이 거슬렸지만. 다행히도 저 남자는 그와 결혼할 여자에게 껄떡거릴 정도로 간이 크지 않았다. 해서 오늘 예식의 사회를 맡긴 것이고. 실제로 직전의 경고도 아주 잘 알아듣지 않았나.
나름 은지의 교우 관계에 만족한 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예식장 입구에서 부친의 손을 잡고 있는 은지가 보였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현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아레스와 그녀를 나누는 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일일 터. 이번 생에서 그녀는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기저에서부터 피어오른 만족감에 절로 몸이 떨렸다.
“그럼, 다들 기다리시던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현우는 베일을 쓴 채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은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32년 후 마계와 연결된 게이트를 모두 닫고 평화를 이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차현우는 그렇게 유부남이 되었다.
* * *
그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건 꿈이라고.
꿈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고동색 눈동자는 분명 낯설었는데, 어째서 그 사람의 미소는 이토록 익숙한지. 에스메랄다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꿈속의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에디?”
그에 아르페시스 역시 잠을 떨치고 일어났다. 몸을 웅크리고 울기 시작한 에스메랄다를 품으로 잡아끈 그가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그러나, 또 악몽 때문인가?”
대답을 할 정신이 없었다. 심장이 너무 먹먹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가슴께의 옷을 꾹 움켜쥐자 꿈에서 본 광경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이제는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정작 그 광경을 보고 느낀 감정만은 선명해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가슴에 기대어 울기만 했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눈물과 함께 오래도록 품어 온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구원자가 흑화했다』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