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44화 (44/45)

제42장

다음 이야기를 위하여

세튀스를 건드리기 위한 준비는 순조로이 진행 중이다. 케니스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다. 남부군 인사들 중에 그간 에렘의 희생으로 안전하게 평화를 누려 온 후방국을 좋게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이 기회에 훗날을 위해 기선 제압을 해 두고 싶다, 말했더니 그는 선뜻 손을 보태 주었다. 자신의 것은 희생시키지 못해도 타인의 것을 희생시키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사람이 바로 케니스니까.

그렇게 세튀스의 문제에 손을 대는 동안 각국에서 모여든 귀빈들의 면민은 화려했다. 인외자를 살피기 위함이기도 하고, 내전 당시 있었던 미카엘의 현신 때문이기도 하며, 한바탕 피바람이 분 에렘의 내부 정세를 살피기 위함이기도 했다.

먼 곳에서 이르게 출발한 사절단이 하나둘 도착할 무렵, 에스메랄다는 임시로 배정된 내궁에서 혼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루, 아르페시스의 혼례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해가 진 이후 임시로 머물고 있는 궁에서 빠져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땅을 거니는 발걸음의 목적지는 황성 내부에 지어진 작은 신전이었다. 황족을 치료하기 위해 황성 내부에 머무는 신관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

에렘, 세튀스, 실테르와 아비체룬을 비롯한 대륙의 모든 나라에 있는 신전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이 없다. 신관들은 언제, 어디서든 어버이를 찾아올 신도들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들이 머무는 신전에는 문을 만들지 않는 게 관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신전에도 예외적으로 문으로 구분되는 공간이 있기는 하다. 스스로의 죄를 고할 때 사용하는 고해실, 그곳에는 문이 있다. 신도가 고한 죄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 신관들의 맹세이기에, 말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문을 닫아 두는 것이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가고 있는 곳이 바로 그 고해실이었다. 언제나 그녀가 가는 곳을 따라오는 루기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메랄다는 루기스를 잠시 돌아보았으나, 문 앞에 엎드리며 더 이상 따라오지 않기에 홀로 고해실에 발을 들였다. 부탁을 받고 미리 도착해 있던 제르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 양.”

해맑은 미소로 그녀를 맞이하는 제르민에게 에스메랄다 역시 같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다시금 눈을 되찾은 아레스를 보았을 때 얼마나 복잡했던가. 제르민이 왜 귀족들의 앞에서 그를 치료해 주었는지 눈에 훤히 보였기에, 그렇게 눈과 팔을 되찾을 아레스가 무엇을 택할지 알기에 웃으며 울어야만 했다.

다시금 두 개의 녹안을 가지게 된 아레스는 가능성을 인지하자마자 승계에 뜻을 보였고, 페르멘은 동의했다. 그녀가 입궁한 후 진행된 승계 작업에서, 새로이 후작 위에 오른 건 아레스였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어린아이의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비정한 지도자를 똑바로 보았다.

앞으로 오래도록 함께 걸어야 할 동맹이라면 무능한 것보다 유능한 것이 낫다. 오늘의 일을 제르민에게 부탁한 이유였다. 그와 그녀의 목표는 명확하게 일치하니까. 함께 갈 동맹의 견고함을 다지기 위해서, 그녀 스스로의 평온을 위해서, 앞으로도 이렇게 걸을 테니 보폭을 맞추라는 언질을 주기 위해서였다.

에스메랄다는 백의를 갖춰 입은 제르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감은 그녀가 지난 며칠 동안 홀로 적어 보았던 글자와 숫자를 찬찬히 읊었다. 평온한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말은 핏물의 기록이었다.

뒷골목 정리부터 알라반 약탈은 물론, 반군의 가족을 살해하고 중앙군의 대형 마수 토벌을 방해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많은 이들을 살해했으며, 내전을 조장하여 그보다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합산 추정치 32만 7천여 명.”

남부에 알라반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게 손을 쓴 것과 내전을 조장한 것이 컸다. 특히 내전, 각 성을 점령하며 발생한 민간 백성의 피해는 물론 북부와 남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20만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 무거운 숫자인데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보며 예전처럼 공포에 떨지 않았다.

‘어둠이 뱉어 낸 사냥꾼은 재앙이 되어 멸망을 몰고 오니, 곧 나의 적이다.’

마룡의 출현을 알리던 신탁이 그녀를 보듬고 있었으니까. 주신께서 직접 명명한 적을 제거하는 공훈을 세우면 인간의 삶을 심판한다는 미카엘께서 판결 전에 고려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덕분에 이기적인 욕망과 바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염원이었다.

지금껏 저질러 온 죄악으로 인해 지옥의 나락에 떨어질 운명이라 해도, 형벌을 피해 갈 수 있는 면죄부를 가져가면 된다. 그 면죄부를 움켜쥐기 위해 흘려야 할 피는 지금보다 더 많겠지만, 에스메랄다는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마.’

에스메랄다는 죄를 고하는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앞으로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하는 죄도 미리 고해 봅니다.”

잔혹한 고해 앞에서 창조주를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보듬어 준다는 교황이 웃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손길 아래에서 웃었다. 하얀 축복이 그녀에게 닿았다.

“모든 죄를 사해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 그녀가 그것을 바라니 그렇게 될 것이다. 아르페시스와 혼례를 앞둔 그 날, 에스메랄다는 과거에 흘러 버렸으며 미래에 흐르게 될 핏물을 입에 담아 보았다.

날이 밝으면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남긴 에스메랄다가 제르민을 등졌다. 고해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 홀로 엎드려 있던 루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참 어색했는데, 벌써 3개의 계절을 함께한 덕분일까? 이제는 루기스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에스메랄다는 보드라운 루기스의 털을 쓰다듬었다.

“성하를 뵙지 않고 가도 되겠니?”

루기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신수들은 자신들의 탄생에 관여한 제르민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녀의 곁을 지키는 루기스는 그를 자주 만나지 못한다. 해서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가라 말한 것인데… 괜찮다는 이에게 굳이 강요를 할 필요는 없겠지.

에스메랄다는 루기스의 답을 본 후 더 이상의 지체 없이 신전을 떠났다. 그녀의 뒤로 루기스가 따라붙었다. 이제는 밤공기가 제법 차갑다. 벌써 가을이 한창이니 당연할까? 에스메랄다는 조금씩 물들고 있는 낙엽 속을 거닐었다.

지난 보름간 머문 거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애초에 아르페시스에게 신전과 가까운 궁으로 배정을 해 달라고 했기에 마차가 아니라 두 발로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혼례식이 끝나면 황성에서 정식으로 황성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모시기 위해 배치받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예법을 가르치기 위한 시녀 두 명과 시녀로 위장시켜 데려온 로부오들이 그녀를 보필하고 있다. 소식을 가져온 건 로부오였다.

“강도가 들었답니다.”

나단을 자극한 후 세튀스로 떠났던 귀족이 죽었다. 그를 습격한 로부오는 살인강도 죄로 붙잡혔기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한 사건에서 끝났다. 물론, 그 로부오가 감옥에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로부오가 잡힌 영지는 곧 시끄러워질 테니 그 틈에 빠져나올 예정이다.

죄를 고하고 온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또 핏물이 더해졌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대신 덤덤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할 때였다.

* * *

아침부터 성수로 몸을 씻고, 혼례를 위해 지은 예복을 몸에 걸치고, 황금색 융단 위를 지나 오늘의 혼례를 주관하기로 한 오웬의 앞에 섰다. 제르민이 제가 하겠노라 떼를 쓰는 사건이 있었지만, 혼례를 주관하기엔 그가 너무 어리다는 말로 오웬이 자청했다.

며칠 전 황관을 썼던 단상 위에 다시 오른 아르페시스는 몇 번이고 홀로 숨을 고르다가 익숙한 기척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걸어온 길의 끝에 그녀가 있었다.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염원해 보았던 존재와 배필의 맹세를 나누는 날이었다.

백색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에스메랄다가 아레스의 손을 잡고서 금색 융단을 거닐고 있었다. 오로지 그에게 오기 위해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가빠지며 전율이 일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단상 아래로 내려온 아르페시스가 두 사람 앞에 섰을 때, 아레스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넘겨주었다.

“영원토록 행복이 두 사람의 곁을 지켜 주기를.”

아레스의 축복에 감사를 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떨리는 손길로 에스메랄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선대 백작이 남기고 간 축복을 머리에 얹은 에스메랄다는 길고 긴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베일 아래에 가려져 있는 그녀는 지금 무슨 표정일까? 원하지 않는 혼인에 침울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그처럼 긴장과 전율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닐까? 너무 행복한데, 또한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냥 어서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의 배필이 되어 그녀를 배필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르페시스에게는 오웬이 축사를 읊는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예식 절차에 따라 서로에게 충실하겠다는 맹세를 나누고, 예물로 준비된 반지를 나눠 낀 후에야 마침내.

“배필의 맹세를 위한 입맞춤을.”

오웬의 목소리를 따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베일을 걷었을 때, 아르페시스는 그녀라는 세상에 취했다.

발그레한 뺨으로 수줍고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와 마주 섰으니, 그는 자신의 심장이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기꺼운 손길로 그를 맞이해 준 에스메랄다 덕분에 두 사람은 식장에서 나누기에는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 순간만큼은 완벽했다. 그가 에스메랄다에게 혼례를 강요했다는 죄책감도, 그녀가 혼례를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생겼던 불안감도,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피어오른 행복 앞에선 무의미했다.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순순히 틈을 벌려 준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양껏, 욕심껏 탐하는 그 순간만큼은.

체중을 회복했다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가녀리기만 한 여체를 품에 가둔 그 순간만큼은.

아르페시스는 오랜만에 닿아 보는 에스메랄다를 탐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요한 움직임에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비음이 그를 더한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흠, 흠.”

예식의 절차치고는 지나치게 길어지는 입맞춤에 오웬이 주의를 주고자 헛기침을 했지만, 본의 아니게 한 계절이 넘도록 금욕을 해 온 아르페시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에스메랄다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절대 멈추지 못했으리라. 에스메랄다가 붉게 물든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예, 예식 중이야…….”

그것이 뭐. 아르페시스는 얼굴을 가려 버린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사탕을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제발, 조금만 더.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얼굴에 열기가 몰린 에스메랄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은밀한 접촉을 꺼리는 사람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다니. 그가 느끼고 있는 환희와 전율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흠!”

보다 못한 오웬이 조금 더 단호한 헛기침으로 주의를 주었고, 그제야 참석객의 웅성거림을 인지한 아르페시스가 물러났다. 아쉬운 사람처럼 몇 번이고 그녀의 입술을 훔쳐보던 그가 자신을 방해한 이들을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그제야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발갛게 익어 버린 얼굴을 숙이면서도 제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를 힐끔거렸다. 그가 느끼고 있는 흥분이 고스란히 보였다. 거친 숨결과 몽롱한 눈동자, 때때로 스스로가 느끼는 전율 때문에 움찔거리는 몸까지. 서로의 살결을 탐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제 손을 옭아맨 채 놔주지 않는 아르페시스에게 신경을 빼앗겼을 때, 마침내 오웬이 말했다.

“이로써 두 분이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곁에 서 있는 아르페시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언제나 어버이의 축복과 행복이 두 분의 곁을 지키기를.”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배필이 되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맹세를 나누었다.

* * *

예식이 끝난 후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는 마차에 올랐다. 몇십여 일 전 아르페시스 홀로 올랐던 그 마차였다. 두 사람 모두 달가워하지 않는 절차였지만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기 위한 행진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홀로 지났던 길을 그녀와 함께 지나는 동안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즉위를 했을 때와 달리 그는 이리저리 날뛰는 감정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평생토록 단 한 번, 유일하게 원했던 존재를 손에 넣은 날인데 침착하다면 이상하리라.

그의 노골적이고도 적나라한 시선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손을 꼬물거리는 중이었다. 그 손마저 아르페시스의 커다란 손에 덮여 있지만. 때때로 아르페시스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입술을 훔쳐 갔다. 두 사람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와 있던 백성들이 환호성을 높였다. 그 소리에 표정을 굳힌 아르페시스가 물러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달려들었던 아르페시스가 다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주변을 쭉 훑은 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오던 그의 시선이 어느 곳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연신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을 가리기 바빴던 에스메랄다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정오에 오른 태양의 아래에도 반짝거리는 빛을 품은 꽃이 있었다. 매해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생일 선물로 주었던 라퓨나가 환하게 웃는 소녀의 손길을 따라 허공에 수를 놓았다. 에스메랄다는 그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 소녀에게 목마를 태워 주고 있는 이를 알아보았을 뿐이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소녀의 목마를 태워 주고 있던 이는 헤롤의 아들, 자르간 가문의 차남인 모건이었다. 덕분에 라퓨나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는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아르페시스를 가만히 응시하던 중 말했다.

“멈춰라.”

그 한마디에 황실 기사단과 경비단의 호위 아래 움직이던 행진이 멈추었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에스메랄다 스스로도 왜 그때 마차를 세웠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갑자기 멈춘 행진에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졌을 때, 에스메랄다가 마차 곁을 에워싸고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데려오라고. 곧 백성들은 물러났고, 에스메랄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차로 인도되어 온 아이를 만났다.

모건의 목에 올라타 있다가 내려온 아이는 세리, 그의 손을 잡은 채 따라온 아이는 메리. 서부 대란 시기 아르페시스가 만났던 아이들이다. 이제 고작 열두어 살이 되었을 그 아이들.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장성한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네었고, 아이들이 어설프게 그것을 따라 했다. 두 아이 모두 손에는 반짝거리는 라퓨나를 한 송이씩 꼭 쥐고 있었다.

“자르간 경, 오랜만이군.”

에스메랄다는 이번 내전에 참전했던 모건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귀족들의 사병은 전후 처리가 이어지던 시기 모두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헤롤과 모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모건은 아르페시스를 사이에 둔 채 인사를 주고받았다. 즉위 무렵에는 상황이 어수선해서 황도로 올라오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타국의 사절까지 왔을 정도로 정세가 안정되었으니 오늘을 위해 황도로 올라온 모양이다.

“따로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황도에 도착했노라 연통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20대의 창창한 기사는 자신의 주군이 백성들 틈에서 알아봐 주었다는 것 때문인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사적으로 휴가를 내고 온 것이라…….”

아이들 때문에 저택으로 오지 않고 여관에서 머문 게 빤히 보였다.

“오라버니께 말을 전해 둘 터이니 후작 저에서 머물다 가게.”

“영광입니다, 폐하.”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모건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두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르페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마주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동요하면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다니, 미련하기는.

지금 그의 모습이 씁쓸한 것인지, 안쓰러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그를 담아 두었을 아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모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아이를 안아 주었고, 아직은 다 여물지 못한 작은 손이 아르페시스에게 라퓨나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 주는 대신 그저 빤히, 빤히,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아르페시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별개로 존재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게 이리도 사무치게 아플 줄이야. 이럴 때는 정말 그와 하나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아니기에 그의 생각과 감정을 오차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고작 추측하는 정도. 그래도, 고작에 불과한 추측뿐이지만 그래도. 이 어설픈 이해가 그를 도와줄 수 있기를.

환호성이 잦아들며 아이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무렵, 에스메랄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건넨 라퓨나는 그녀의 손에 닿았다. 순간 리퀘나로 가기 위해 들렀던 후방 도시에서 만났던 아이가 떠올랐다. 꽃을 팔기 위해 창문을 두드렸던 그 이름 모를 아이에게 페르멘이 해 주었던 말도 함께.

입술을 벌려 꺼내는 이 한마디는 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녀의 곁에서 떨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위한 것이었다.

“예쁜, 꽃이구나.”

핏물 위에 선 그녀가 아르페시스를 위한다는 말로 그 말을 해 본다. 그 한마디에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반면 천천히 손을 거둔 그녀는 아이들에게 웃어 주지 못했다. 오래지 않은 과거 속에서 자신이 했던 생각을 다시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현실의 가혹함이 만들어 낸 참사 속에서 잘못한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지독한 선택지로 내몰린 불쌍한 이들이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와 아르페시스를 용서했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의 곁에는 처형대 위에서 마주했던 돌팔매질과 저주가 남아 맴돌고 있었다.

“그만 가지.”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 짧은 순간에 아르페시스가 손을 뻗었다. 모건의 품에 안겨 있던 메리의 뺨에 그의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직후 두 아이에게 닿아 있던 그의 시선이 거둬졌다.

“화,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뒤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두 사람을 따라왔다. 복잡한 상념은 잠시간 그들을 내버려 둘지언정, 결코 떠나가지 않는다.

참 우습다. 그들을 사랑하여 지키고자 했을 때는 도달하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그들을 사랑하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그들의 목숨과 피를 제물로 바친 지금에서야 그들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을 손에 넣다니. 이건 대체 무슨 모순인가. 이 세상도, 에스메랄다 본인도, 모순 천지로구나.

* * *

「제4장. 이용과 희생.

마수가 존재했던 시기는 종이와 글로서만 엿볼 수 있는 아득한 과거가 되었고, 지금의 평화가 시작되기 위해 지나온 그 과거 속에는 진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참혹한 기록 역시 포함되어 있다.

마신과 악마를 따르던 마수마저 이용했던 인간의 발자취는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대륙력 1439년 사의 달에 있었던 세튀스 왕국의 학살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에렘 제국은 황실 소속의 연구 마법사였던 바 루그 라그나가 개발한 포획 마도구를 통해 4천여 기에 달하는 마수를 생포, 세튀스 왕국의 영토에 방생했다. 당시 최전방 전선 국가라고 불리었던 3국 중 에렘 제국이 주도했던 그 사건은 무려 세 차례나 반복되며 총합 12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바 있다.

같은 해 세튀스 왕국이 내전이 발발했던 에렘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나,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당시 에렘 제국이 취한 행동은 지나친 폭력이었다. 그 시절 최전방 전선 3국은 물자 조달 및 병력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후방국에 강압적인 참전을 요구한 바 있고, 그 시발점이 바로 에렘 제국의 국경을 침범했던 세튀스 왕국이 겪었던 피해였다.

에렘 제국이 가장 먼저 시작한 무력시위로 후방국의 협조가 이전보다 원활해졌다는 결과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변화들이 쌓여 마수와 마룡을 토벌한 지금의 평화를 누리는 본 저자에게 과거를 비난할 자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판을 통해 비극의 반복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주브’의 이름을 쓰는 학자가 해야 할 의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지금의 주제를 거론하는 바이다.

혹자는 전란의 시대에 강압을 통한 협력도 필요하다고 말하나, 과거의 기록은 필요와 불필요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에렘 황실이 세튀스 왕국의 백성을 학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략)」

- 바 주브 엘레노어 『인간과 마수의 과거』 中 발췌.

* * *

피로와 함께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에스메랄다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는 내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대체 오늘 하루에 욕조를 들락거린 것이 몇 번인지, 진절머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성수에 몸을 담그고, 예식과 행진이 끝난 후 연회 치장을 위해 또 씻고, 연회가 끝난 후 초야를 위해 또 씻는다. 지금 그녀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것은 피로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자주 욕조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정도로. 에스메랄다는 욕조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꾹꾹 참으며 욕조에 들어섰던 건 이제부터 이어질 절차가 아르페시스와의 초야이기 때문이다. 진즉에 할 것 다 한 상황에서 초야라고 칭하는 게 이상했지만, 그래도 혼례 후 처음으로 합방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당장 침대에 늘어지고 싶은 몸을 애써 가눈 채 시녀들의 단장을 받고 있었다.

속살이 살짝 보이는 속옷은 레이스로 만든 것이고, 슬립은 살결이 다 비치는 데다 그 위에 걸친 가운은 가슴 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녀들을 물렸다.

침대에 주저앉으니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침대 옆에서 엎드린 채 미동도 없던 루기스가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면 앉아 있는 그녀의 허벅지에 턱을 괼 수 있을 루기스가, 그녀의 손길을 바라며 기대어 왔다. 에스메랄다는 루기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생각에 잠겼다.

여름의 끝자락에 있었던 즉위 연회와 오늘의 국혼 연회는 규모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연회를 위해 들어간 자금은 물론 참석자들의 규모 역시, 많이 달랐다. 자국의 귀족들은 물론, 타국에서 온 사절단까지 함께 있으니 연회장은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그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상념을 뒤로한 채 사절단을 상대했었다.

가장 먼저 겨울부터 줄곧 전보 마도구로 교류를 해 왔던 헤도크. 오늘을 위해 국경을 열고 나온 아비체룬의 왕세자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은 상당했다.

‘밖으로 나오니 색다르군요.’

그가 사용하는 에렘어는 조금 딱딱한 느낌이었지만, 문법적으로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남진을 생각한 이후 틈틈이 아비체룬어와 실테르어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아비체룬어를 그리 유창하게 하지는 못한다. 학습 시간을 조금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헤도크의 에렘어 실력은 상당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내국의 일만으로도 벅차서 외국어에는 소홀했는데, 이제는 국외 관계에 신경을 써야만 하니 필요하리라.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일정 중 외국어 공부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되짚어 보며 헤도크를 떠올렸다.

국경을 닫아 두었으면서도 그는 에렘어를 익혔다. 실테르어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헤도크의 세대에는 국경을 열 생각이었던 것이겠지.

현왕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고 했으니 이제 슬슬 아비체룬도 왕권 이양의 시기가 다가왔다. 굳이 왕세자를 보낸 건 향후의 교류에 상당히 우호적이라는 것이니 달가운 일이다. 개인의 성품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편은 아니니, 아비체룬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다를 터이니 종종 놀러 오게. 자네가 온다면 기꺼이 환영할 테니.’

‘그리 말씀해 주시니 꼭 자주 와야겠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국외로 나가겠다고 떼를 쓰다 아버지께 엉덩짝을 걷어차였을 정도로, 궁금했거든요.’

헤도크는 에스메랄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쾌하고 천연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제르민과 아는 사이인 척하는 것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에스메랄다까지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한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헤도크를 떠올리다 보니 연회장에서 그와 아르페시스가 마찰했던 순간까지 함께 생각나 버렸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습니다. 만나 뵐 날을 꽤나 고대해 왔는데, 하필이면 손을 청할 수 없게 된 오늘에서야…….’

당시 시종일관 웃는 낯이던 그의 표정이 살짝 무너진 이유는 간단했다. 단상 위에서 줄곧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그를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라.’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헤도크가 어색한 미소를 짓던 순간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도 함께.

‘실언이었습니다, 폐하.’

‘다행이군. 진심이었다면 마침내 열린 아비체룬의 국경을 없애야 했을 테니까.’

오늘의 연회가 즐거워 죽겠다는 낯을 하고 있던 그가 눈썹을 크게 들썩거릴 만큼, 과한 말이었다. 세리와 메리를 마주친 이후 아르페시스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에스메랄다가 나서서 중재를 했었다.

‘농으로 한 말이겠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게. 축하만으로도 부족한 날이니.’

‘주의하겠습니다.’

타박을 하면서도 농담으로 듣고 넘기겠다는 말에 좋게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동맹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건만, 아비체룬과 틀어져서 좋은 건 없었다. 그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날부터 세우는 아르페시스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었다.

이후 그가 헤도크를 돌아보며 살피는 횟수가 늘어났고, 결국 에스메랄다는 헤도크와의 대화를 길게 이어 가는 대신 다음을 기약했다. 어차피 국혼이 끝나도 에렘에 오래도록 머물 이들이다. 거리가 멀기에 일찍 떠날 사절들과 달리, 바로 국경을 접한 나라의 사절이니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 두었다. 연회장에서 나누지 못할 말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많으니 그때 대화를 이어 가도 된다.

‘두 분의 곁에 언제나 행복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헤도크가 두 사람의 곁을 떠나자 다음은 실테르였다. 실테르에서 사절단을 이끌고 온 왕세자 쥬르흐니브는 조금 더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이었다. 헤도크처럼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려는 사람. 내년에야 성년식을 치르는 어린 후계이니 따지고 보면 실테르가 가장 마지막에 세대교체를 하게 되리라.

실테르가 보낸 사절에도 왕세자가 끼어 있다. 사절단의 의사 결정권자를 왕족으로, 그것도 후계자를 보냈다는 건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암묵적으로 서로가 모두 인지하고 있는 동맹의 필요성을 공식화하고, 가능한 가시거리까지 일을 진행을 하고 싶거나, 아예 결판을 내고 싶거나.

실테르는 병력 지원을 대가로 철광석을, 아비체룬은 국경 마수를 전담해 주는 대가로 신관 사냥의 정당성을 얻었다. 그들은 에렘 내부의 일을 돕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하나씩을 받아 갔으니 3국이 전선 문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건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그 동맹의 내부적인 사항을 조율하고, 어떤 조항을 넣어 불가침 조약을 맺을지 같은 상세한 부분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남았다. 선황이 아르페시스를 택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진행되었을 일이 이제야 다가온 것이다.

사절단의 장기 체류는 그것을 위한 시간이었다. 국혼 이전에 미리미리 내부적으로 준비를 해 두었지만, 많은 것이 무산되고 보태질 터. 외교부의 철야는 확정된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찾아오려는 상념을 옆으로 밀어내고 오늘 처음 만났던 쥬르흐니브를 떠올렸다. 그는 헤도크보다 더 유창한 에렘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묘하게 승부욕이 자극받는 기분이었다. 동맹을 맺으면 주기적으로 회담을 가져야 하니, 그 전까지는 제대로 실력을 다져 놔야겠다.

연회장에서 만난 쥬르흐니브는 딱 안면만 익히자, 같은 목표치를 정해 놓고 다가온 사람 같았다. 계속 얘깃거리를 이어 가며 스스로가 가진 흥미를 드러내던 헤도크와는 달리 그는 가볍게 대화를 끝내 버렸다. 앞으로 이어질 동맹에서 아비체룬보다는 실테르의 속을 보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사절의 대표들이 순차적으로 다가와 인사를 나누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루기스가 곁자리를 차지한 단상 위에서 아르페시스와 함께 앉아 맞이한 사절단은 상당히 많았다.

에렘과 물리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군도 연합에서도 사람을 보내왔고, 아비체룬이 국경을 닫기 전까지는 가장 폐쇄적이었던 데녹에서도 인외자의 이름을 살펴보기 위해 왔을 정도다.

여름의 초입부터 준비해 가을이 한창인 지금까지 100일이 넘는 시간을 준비에 들였다. 덕분에 오늘의 연회에서는 대륙에 남은 모든 나라가 한자리에 모였었다. 하지만 딱 한 곳, 이 자리에 초청조차 받지 못한 곳이 있으니.

“사절단이 돌아가면 세튀스의 일이군…….”

이미 포획한 4천여 마리의 마수가 북부로 운반되었고, 케니스의 병력이 직접 마수를 감시 중이다. 사절단이 에렘의 영토를 떠나고 세튀스의 영토에서 발을 거두면, 내전을 틈타 에렘의 재산과 영토를 넘본 세튀스는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은 분명 에스메랄다였지만, 선택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세튀스 왕실이고 펠라체 공작이다. 부추김으로 고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도 그들이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절단을 다 만난 후에는 외교부 수장으로 앉은 루그레디안을 잠시 만났었지.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지만, 루그레디안은 에스메랄다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혼례를 올렸고 10대에 들어선 후계도 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건만, 루그레디안은 벌써부터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눈 밑이 거뭇거뭇한 상태에서도 묘하게 활기가 돌던 그를 떠올리며 새삼, 그가 참 우직하고 집요한 인물임을 실감했었다. 아르페시스에게서 듣자 하니, 사라진 시간에선 에렘이 무너진 후에도 다시 한번 해 보기 위해 데녹으로 가려 했던 모양인데…….

연회장에서 만난 그는 그 집요함이 독이 되지 않게 막아 주어야 할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실테르와 아비체룬의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그를 어디에 좀 가둬 놔야겠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후작 부인과 작당을 한 에스메랄다가 루그레디안을 황성에서 쫓아낸 이유였다.

각양각색의 인사를 만나 다음을 가늠해 보았던 연회는 무척이나 오래도록 이어졌고, 그 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황후 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는 앞으로 평생을 지내게 될 침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사랑을 품은 시간만큼 매해 늘어나기만 하던 라퓨나가 은은한 빛을 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공간. 그곳의 한쪽에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서신을 쓸 때 주로 사용하게 될 외발 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검은색 가죽 책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침대 위에서 일어난 에스메랄다가 그곳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선황의 손을 오래도록 탄 물건은 지금 그녀의 손에 닿아 있다. 검은색 가죽 표지를 쓸어 보는 손길이 참 무거웠다.

얼마나 그 자리에 서서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았을까? 달칵,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에스메랄다는 저처럼 가벼운 침의 차림으로 문가에 서 있는 아르페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묻어야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고심했다.

지금 그녀의 판단에 따라 말을 하는 건 결국 아르페시스에게 잔혹한 진실을 떠안기는 강요가 아닐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는 평생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텐데, 그래도 되는 일인가?

그녀의 진득한 시선 끝에 서 있던 아르페시스가 문을 닫았고, 라퓨나의 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위태로웠다.

“왜… 나를 그렇게 보나?”

아르페시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들 사이의 침묵을 먼저 걷어 주는 건 어렵게 용기를 내는 아르페시스였다. 그는 몇 시간 전 식장에서 보았던 그녀의 미소를 떠올리며 용기를 쥐어짠 것이다. 그는 참 겁이 많으면서, 또한 언제나 에스메랄다보다 먼저 용기를 낸다.

그녀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르페시스가 힘겹게 건넨 말에 답을 하지 않은 그녀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자리를 잡고 문가를 돌아보니 그는 아직도 같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빨리 와.”

에스메랄다가 베개를 세우며 옆자리를 톡톡, 손으로 두드리자 아르페시스가 경직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세워 둔 베개에 기대자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먼저 손을 뻗었다.

언젠가 비겁한 방식으로 서먹함을 떨쳐 냈을 때처럼, 에스메랄다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르페시스가 눈을 꾹 감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의 뺨을 매만져 주는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이미 홀려 가고 있었다.

“내가 말해 준 적 없지?”

에스메랄다가 속삭이자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뻣뻣하게 굳어 가는 아르페시스의 몸을 느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언제부터 사랑했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아르페시스가 다시 한번 움찔거렸다. 그 직후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에스메랄다를 찾아왔다.

“열여덟 살 여름이었어.”

그를 만나러 리퀘나로 갔던 그 뜨거운 여름날.

“그날 이후로 계속, 계속… 너를 이렇게 쓰다듬고 사랑을 속삭이는 상상을 해 봤지.”

그가 힘들었던 시간을 모두 위로해 주고 싶었고, 언젠가 미래를 맹세하여 함께하는 꿈도 꿔 보았다.

“네가 나에게 마음을 고해 주는 상상도 해 봤어.”

그러면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행복할까. 열여덟, 그 어리고 아름답던 나이에 찾아온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왜 그에게 감정을 고하지 않았는지 모두 설명했다. 그가 자신을 향한 마음을 감추었던 이유를 설명했던 것처럼.

“그런데도 여전했어.”

정리하자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르페시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얼마나 끈질겼는지 모두 털어놓았다. 스스로에게 그를 사랑하지 말자고 속삭이면서도 그가 죽지 않았으면 해서,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를 기만하고, 시간을 돌아와서도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그의 부름에 얽매였었다.

혼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이후 계속 위태로웠던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에스메랄다는 그를 품에 안아 주며 속삭였다.

“계속 너만 사랑할 거야.”

앓는 소리가 짙은 숨을 타고 흘러나왔다. 모든 얘기를 들은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중얼거렸다.

“내가 그리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은 더 한심하군.”

“왜?”

“……그때 내가 조금만, 조금만 더 용기를 냈으면 그대에게 닿을 수 있었을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그의 속삭임을 듣고 쓰게 웃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너무 커서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용기를 냈다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용기를 내지 못했고, 먼 길을 가 보았다. 이미 한 번 해 보았으니 이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그만둘 때도 되었다.

“너를 사랑해.”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목덜미를 꽉 껴안았다. 미루고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그런데, 혼인 얘기가 나오면 마냥 행복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허리를 마주 안아 주었던 아르페시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선고될 말에 두려움을 느끼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물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오늘부로 그의 배필이 된 그녀를 놔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듣게 될 말이 무서워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는 공포 속에서도 에스메랄다가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의 용기를 내 보았다. 바로 조금 전에 용기를 내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번에는.

“왜… 나를 사랑한다 했으면서 혼인은 꺼려했나? 대체 왜…….”

공포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면 그는 혼례를 준비하는 내내 수십 번, 수백 번이고 더 죽었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지금도 무서워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며 답을 애원했다. 울먹임까지 섞여 있는 목소리의 끝에서 에스메랄다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르페시스를 안아 주며 말했다.

“에렘의 이름이 너무 싫었어.”

굳어 버리는 그를 토닥여 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잠시간 그렇게 침묵하던 아르페시스가 별안간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눈은 당혹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양위를…….”

그는 에스메랄다가 예상했던 그대로 반응했다. 과거에 예견했던 그대로. 혼인 문제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집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당장이라도 양위 대상자를 찾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이제는 괜찮아.”

“어?”

아르페시스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어 버린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몸을 숙이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제는 괜찮아. 이제는 정말, 괜찮아.”

아르페시스가 무엇을 더 내뱉기 전에 에스메랄다가 한발 빨랐다. 그녀는 가벼운 깃털처럼 그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고, 예민한 살결을 맞붙인 상태에서 다시 말했다.

“사랑해.”

상황과 과정이 제대로 인지가 되지 않아서인지, 아르페시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마저도 에스메랄다가 그의 입술을 혀로 핥아 주는 순간 사라졌지만. 오랜만에 느껴 보는 자극 때문에 자연스럽게 감겨진 아르페시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던 이유를 들었고, 그 끝에서 여전한 그녀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에스메랄다와 꿈같은 입맞춤을 나누고 있다. 겁쟁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치고는 너무 훌륭하지 않나. 아르페시스는 제 몸을 긴장시키던 공포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디…….”

에스메랄다의 보드라운 살결을 쓸어 본 그가 열기에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너무 오래도록 굶주렸다. 사랑을 확인하고, 혼인을 약속했음에도 행복한 날보다는 두려운 날이 많았다. 그녀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에 차마 원하지 못했던 나날의 끝에서, 에스메랄다가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원해 준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가운을 풀어내는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허우적거리며 억눌려 있던 욕망을 풀어냈다. 그는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던 에스메랄다를 바짝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으음…….”

그녀의 허리를 충분히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천천히 아래로 흘렀다. 언제나 그를 황홀하게 만드는 감촉이 이어졌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탐스러운 둔부를 움켜쥐며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타액은 이미 서로의 것에 섞여 들며 달콤한 미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자, 그 손길에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그가 더 적극적으로 그녀를 찾아들었다. 입술 사이에서 오가는 은밀한 움직임 덕분에 고요한 침실은 물기에 젖은 질척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와 자신의 혀를 얽어내며 다급하게 손을 놀렸다. 스르륵 풀린 가운의 매듭을 들쳐 가운을 걷어 내고,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가리고 있던 슬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황성 곳곳에 퍼져 있던 그의 마나가 오로지 지금의 순간을 독차지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응…….”

얕은 비음이 그를 충동질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쥐며 양껏 주물렀다. 그가 움직이는 사이 에스메랄다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도 아르페시스의 가운을 밀어내고 그의 탄탄한 근육을 매만지는 중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손길이 이어질 때마다 탄식과 닮은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가 에스메랄다의 슬립을 걷어 내고 속옷까지 끌어 내렸다. 언제 탐해 보아도 달콤한 과실을 베어 물자 에스메랄다의 교성이 조금 더 짙어졌다. 아르페시스는 제 위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를 번쩍 안아 뒤로 눕혔다.

하얀 목덜미, 고개를 파묻고 싶어지는 계곡, 탐스러운 과실의 끝자락, 가녀린 허리를 타고 지나간 입술이 이윽고, 그만이 닿을 수 있는 성역을 찾아들었다. 그는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열기로 가득 찬 에스메랄다를 집요하게 핥았다.

노골적인 소리의 끝에서 그의 손가락은 이미 에스메랄다의 안으로 침범해 달뜬 교성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정사가 반복되며 그녀는 억지로 소리를 참으려 들지 않았고, 그건 아르페시스에게 언제나 황홀한 전율을 선물했다.

손을 놀릴수록 선명해지는 교성이 그의 탐욕을 더한 놈으로 키워 내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질 것만 같은 그녀의 교성에 취한 아르페시스가 서둘러 제 하의를 벗어 던졌을 때, 에스메랄다가 몸을 일으켰다.

가녀린 손길에 밀려 뒤로 누워 버린 그의 위에 에스메랄다가 올라탔다. 느른하고 고운 손길로 그의 중심을 쓸어 주자 신음 소리가 섞인 숨결이 흐트러졌다.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의 성기를 입 안에 머금었다.

아르페시스가 몸을 움찔거리며 쾌락을 누렸다. 허벅다리에 닿아 오는 에스메랄다의 돌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문지르는 건 그에게 허락된 수많은 쾌락 중 하나였다.

그의 손가락이 예쁘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문지르자 에스메랄다는 그의 단단한 성기를 입 안에 머금은 채 몸을 떨었다. 그때마다 아르페시스 역시 신음을 내뱉었다.

이윽고, 인내의 끝에 다다른 그가 에스메랄다를 안아 자신의 위에 앉혔다. 그녀는 그대로 아르페시스를 받아들이며 하체를 바짝 밀착시켰고,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찌걱찌걱, 쾌감과 함께 찾아오는 소리가 두 사람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달구었다. 에스메랄다가 더한 쾌락을 바라는 사람처럼 스스로 자신의 음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아르페시스가 아래에서 허리를 쳐올렸고, 그녀의 행동은 도중에 무산되었다. 갈급하게 숨을 들이쉰 에스메랄다가 그의 복부를 손으로 짚었다. 그로 인해 모여든 그녀의 봉우리는 아르페시스의 손아귀에 갇혔다. 커다란 손의 밖으로 흘러내릴 만큼 풍만한 가슴이 아찔하다.

그는 강한 힘으로 허리를 쳐올리며 자신의 앞에 펼쳐진 절경을 눈에 담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금발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 어디도, 그 어떤 것도,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그녀보다 아름답지는 못하리라.

눈앞에 펼쳐진 에스메랄다의 나체를 꼼꼼하게 눈에 새긴 그는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윽고 시작된 격렬한 허리 짓에 에스메랄다가 그의 몸 위로 무너지며 쾌락의 울음을 내질렀다.

아르페시스는 그 울음마저 독차지하기 위해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제 입술로 삼켜 버렸다. 위아래로 이어진 그들이 열락을 좇아가는 동안, 두 사람에게 잊힌 루기스가 하품을 하며 잠을 청했다. 초야의 밤이 흐르고 있었다.

* * *

에스메랄다는 몇 번이고 반복된 쾌락의 끝에서 엎드린 채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뒤덮은 채 울긋불긋, 붉게 물든 살결에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목덜미, 등줄기, 귓불까지 빠짐없이. 그녀의 사랑과 열락을 통해 공포를 떨쳐 낸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곤한가?”

“응…….”

“그럼 대화는 내일로 미루지. 긴 하루였으니 어서 잠을 청하는 게 좋겠다.”

물어보아야 할 것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피곤한 그녀를 재촉할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분명 한 시간 전만 해도 그에게 가장 두려운 문제였음에도 지금은 아니다. 내일 천천히 듣는다고 하여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는 안도감이 존재했다. 그녀가 괜찮다고 해 준 그 한마디 덕분에.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그의 말대로 잠에 빠져드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아르페시스는 제 품을 빠져나가 자리에 앉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괜찮은지는 안 물어봐?”

그녀는 침실에 놓아둔 가죽 책을 떠올리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에스메랄다의 뺨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이유도 들었고, 그대가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고… 오늘 식장에서…….”

혹시나 싶어 그녀의 안색을 살핀 아르페시스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행복하게 웃은 것을 보아서인지 어제처럼 힘겹지는 않다.”

그녀가 살며시 웃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건 결코 착각이 아니리라. 아르페시스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에스메랄다는 신탁이 내려왔을 무렵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뭐든 서로에게 말하기로 한 약속 있잖아…….”

아르페시스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같은 생각이야?”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질문을 듣고 생각에 잠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꽤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괜한 약속을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대의 말을 듣는 게… 무서워서.”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은 그가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에게 집중했다. 무섭고, 피하고 싶고, 힘들기만 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에 이르러 그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대가 떠나고…….”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옅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계속 생각했다. 그대가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알아보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무리 무서웠어도 그대를 선택했을 텐데… 하고.”

말로써 정립해 놓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잃어 보기도 전부터 에스메랄다는 이미 그의 세상이었다. 만약에 그녀가 생명을 위협받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했다면, 그녀가 그렇게 힘든 말을 했던 이유를 분명하게 파헤칠 식견이 있었다면…….

“그대에게 받는 경멸도, 남부에서 일어날 참사도, 다 감내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안위가 엮여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 그것을 말로써 정립하여 인지한 것뿐이지, 이전이라 하여 그렇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모두가 너처럼 양보하고 배려할 줄 안다면 다르겠지만,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너처럼 손해를 감수하며 양보하기보다 이익을 얻기 위해 빼앗는 걸 택하고 있으니까.’

페드로는 또 한 번 틀렸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은 수없이 많은 이유로 타인을 희생시키지만, 그는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일에서만 타인을 희생시키기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타인보다 그 경우가 현저하게 적을 뿐, 결국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것은 똑같았다. 그래서 말해 주지 않은 에스메랄다를 원망했고, 알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저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는 에스메랄다가 해 주는 배려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내륙을 보지 않고 전선만 보아도 되는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

에스메랄다에게 경멸받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내륙을 외면했다. 현실에 길든다는 건 그런 의미겠지. 그 결과 만약, 만약, 그 지독한 가정이 그를 후회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아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모르고 지나치는 것보다, 알고 감내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그는 에스메랄다를 품으로 잡아끌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그대가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에스메랄다는 그의 품에 기댄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그대는 내가 양위에 열을 올릴까 봐 말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래도 이유를 알았다면…….”

에스메랄다는 새삼 그의 성장이 자랑스러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부탁했다.

“그러니까 천천히, 내가 준비가 되면 말해 달라 청할 것이고, 그대가 준비를 마치면 말할 수 있다 얘기해 줘. 그때까지는 서로가 조금씩 기다려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녀는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침묵으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아르페시스는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그녀와의 대화를 회피했다. 그러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준비를 거친 다음에 말하자고, 아르페시스가 부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다리는 사람이 지칠 수도 있을 테니까…….”

“기한을 정할까?”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나는 오늘처럼 그, 괜찮다는 말이나… 사, 사랑… 그렇게 달래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곧장 알아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랑하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달콤한 말로 위로해 달라는 어리광이었다.

“나는, 나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대를 사랑하니까. 내게는 그대가 유일하니까… 그러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그 확답에 아르페시스가 웃었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지. 에스메랄다가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는 동안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난 기한을 정하는 게 좋아.”

끝을 정해 놓지 않는다면 그녀는 계속 고민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차라리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게 나았다.

“만약 내가 말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100일 내에 결론을 내릴게. 그동안은 오늘처럼 너를 달래 주고. 그럼 될까?”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서로에게 맞는 방법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난… 준비가 됐다. 그대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런 이유가 있겠지.”

들어 보고 그녀가 무리를 하고 있다 싶으면, 그는 지금 손에 넣은 제위를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게 에스메랄다의 뜻에 반하더라도, 부부의 관계를 이어 가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아르페시스는 물러서 줄 수가 없었다.

“나도, 말할 준비가 됐어.”

그가 혼자 생각을 하는 동안 슬프게 웃은 에스메랄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운을 집어 들어 몸에 걸친 그녀는 덩그러니 놓인 채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에디?”

아르페시스는 말을 해 준다던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리자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에게 선황의 기록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모르는 게 나은 이야기.”

“…….”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은 이야기.”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그에게 건네주었음에도 걱정이 되어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가올 진실을 모른 채 웃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검은색 가죽 책에 닿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모르는 것이 나을 정도로 지독한 얘기겠지. 하지만 몰라서 어리석어지느니, 아파도 아는 것이 낫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는 모르기에 어리석어진 적이 너무 많았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이제는 그런 겁쟁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변하고 싶다면 노력을 해야 하지.

“정말,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흘러내리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읽어 보면 되는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있을게.”

“함께 있지 않고?”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붙들었지만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물렸다. 루기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따라 침실을 나섰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야간 시중을 위해 대기하는 시녀가 그녀를 맞이했다.

“내일 아침까지 침실이 있는 층을 전부 비우렴.”

“예, 황후 폐하.”

시녀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를 따라 나온 루기스가 곁을 지켰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침실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그의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에스메랄다는 무릎을 당겨 안은 채 울었다. 평생 숨겨야 하지 않았을까? 괜히 건넨 것은 아닐까? 수없이 많은 상념과 후회가 그녀를 흔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비명은 어느덧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그녀의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파열음도, 비명 소리도, 흐느낌조차도. 몇 번이고 망설이던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물건이 이것저것 깨지고 부서진 곳에서 아르페시스가 어둠과 함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쥐여 주었던 선황의 기록은 바닥을 나뒹구는 중이었다. 그의 옆자리로 다가간 에스메랄다는 제 품을 파고드는 온기를 안아 주며 토닥였다.

“이것을 믿으라고?”

이미 그녀처럼 눈물로 얼룩진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이것을 믿으면, 난 뭐가 되나.”

자신은 뭐가 되냐고,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울었다.

“누가, 나는, 왜…….”

에스메랄다는 그를 품에 안고서 함께 무너져 주었다. 아르페시스가 아이처럼 울며 설움을 토해 냈다. 그는 스스로가 무엇을 서러워하는지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채 그저 울기만 했다.

에스메랄다는 한때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너져 내린 그의 곁을 지켜 주었고, 아르페시스는 밤새도록 그녀의 곁에서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 * *

깊은 수마 속에서 빠져나온 아르페시스는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겨 있는 체온을 더 깊은 곳으로 잡아당겼다. 분명 버거운 감정과 함께 허우적거리다 의식이 끊겼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창밖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일렁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고요했다. 선황의 일기를 모두 다 읽었을 때만 해도, 조금 일렁거렸을 뿐 경멸이 선명했다. 하지만 갑자기 떠오른 메리와 세리의 얼굴이 그를 무너트리고 끔찍한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그가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 낸 과거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아들이다. 건강한 아들이다. 짐을 꼭 닮은 어여쁜 아들이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눈물이 침대 머리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있던 그의 가슴께에 떨어졌다.

누가 바란다고 했던가. 제멋대로 그저 본인의 이기를 행한 주제에, 왜 저딴 것을 남겨서는 그에게 번민을 던지나. 아르페시스는 스스로를 질타했다. 왜 저것을 보겠다고 했을까?

문득 마나 속에 숨어서 선황을 응시하던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날 시종이 가져온 찻잔은 은테가 둘러져 있었다. 찻물을 마신 선황이 검게 변한 은테를 가만히 바라보았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 왜 사람을 부르지 않는지 의문을 느꼈으니까.

이후 아르페시스는 의자에 앉은 채로 숨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 선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지금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그 무엇인지도 모를 것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버거웠다.

왜, 왜, 그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멋대로 행동한 선황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끔찍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가 말이다.

‘짐의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선물할 것이다.’

세리와 메리의 얼굴이 그의 앞에서 아른거린다. 선황이 본래 하고자 했던 대로 했다면 이렇게 버거운 순간을 마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득한 곳으로 가라앉는 그를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뻗어 오는 체온이 없었다면 계속 그렇게 여기며 선황을 경멸할 수 있었을 텐데.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깨어난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녀린 두 팔을 가지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그를 안아 주었다. 목을 졸린 사람처럼 끅끅거리며 우는 그의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계속 났다.

에스메랄다의 품으로 파고드는 그 순간에,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박동에 취하는 그 순간에, 인지하고야 마는 것이다. 살아 있다고. 살아서 에스메랄다를 만나고 결국은 그녀의 곁을 차지했노라고.

걸음마를 겨우 하던 아기는 어느 날 말을 배워 옹알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검을 잡아 본 아이는 복도에서 마주친 이복형제에게 걷어차였다.

친부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거둬졌음을 깨달았던 소년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이후에는 마수를 처음 마주해 공포를 느끼던 소년과 남부군과 함께 전장에 섰던 청년까지.

‘전하!’

‘퇴로를 열어라!’

검게 일렁이는 마기와 함께 도래하던 바위를 뚫고 다가온 비명도. 암흑 속으로 가라앉기 전 그를 쫓아오던 고함도.

그 모든 시간과 순간을 거쳐 그는 살아 있다. 그때도, 지금도, 그것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황도에서 다시 만났던 세리와 메리의 얼굴이 사라진 시간에서 그가 만들어 낸 참사의 비명 소리에 뒤덮였다.

‘에렘의 이름이 너무 싫었어.’

그렇게 살아 있기에 스스로의 모순으로 가려져 있던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그의 시작과 이름은 에렘이다.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것 역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수십만, 수백만의 목숨을 내다 버렸기에 살아남는 기적을 쟁취해 낸 그는 에렘이다.

잔인한 깨달음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안겨 아직도 마르지 못한 눈물을 쏟아 냈다.

* * *

아르페시스가 진정을 되찾은 것은 해가 완전히 밝아 온 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어 주는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순응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었네.”

희미한 미소는 낮게 잠겨 버린 목소리와 함께였다. 아르페시스는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너 못생겼다.”

애써 달래 주려는 마음이 느껴지는지라 그는 조금 전보다 선명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대는 언제나 아름다워.”

그녀의 눈매도 부어 있었지만 아르페시스의 눈에는 아름다웠다. 에스메랄다의 눈가에 내려앉은 입맞춤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흉터보다 선명했다. 그는 예쁘게 웃어 보이는 에스메랄다를 따라 웃었다.

“화가… 나지는 않아?”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인지라 아르페시스는 얼떨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괜한 것을 네게… 강요한 것 같아서. 알아야만 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에스메랄다의 말 앞에서 그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은 길지 않았지만 대답은 길었다.

“내가 오기를 부린 것이지.”

그녀의 강요가 아니라 그가 원했던 것이다. 모르는 채로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이제 관두고 싶어서, 그가 자진한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제가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녀가 홀로 움켜쥔 것을 미리 이해했다면, 계속 남부군을 이끌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더 빨리 알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괜한 짓을 했다.

“괜한 짓을 했군…….”

“응?”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을 언급했다. 알지 못하기에 행한 어리석은 짓이 또 쌓였다. 그것을 주절주절 토로하자 에스메랄다도 똑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가… 아니야, 따져서 뭐 하겠어.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사고를 친 건 너니까, 수습도 네가 해.”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아르페시스는 눈치를 봐야 했다.

케니스를 따르는 병력은 2만에 달한다. 내전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더욱이 그는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남부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표한 상태다. 군내에서 2만에 가까운 세력을 이끌게 될 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간, 뒤끝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에스메랄다가 그린 그림 아래에서는 하지 않는 게 나은 일이었다. 저가 친 사고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대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 그대의 곁을 차지하고 싶어서… 그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알아.”

“……자주 돌아오겠다. 몇 시간 걸리지도 않으니까.”

주절주절, 용서를 구하는 변명을 하고 있노라니 에스메랄다가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네가 알아서 해.”

아르페시스는 살짝 잠겨 든 목소리로 대꾸하는 에스메랄다를 뒤에서 껴안았다. 어리석은 그의 행동에 화가 났을 텐데, 이유를 말하지 못해 홀로 꽁꽁 싸맸을 그녀에게 미안했다. 선황의 기록을 보여 주기 직전에도 망설이고 망설이던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랑한다.”

“……알아.”

한숨을 폭 내쉬는 그녀의 귓가로 다가간 아르페시스가 속삭였다.

“앞으로는 성급하게 굴지 않고 그대가 말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다. 정말로, 응? 잘못했다.”

“……나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그녀의 살갗에 뺨을 문지르고 있노라니 에스메랄다가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어 주었다. 맨살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먼저 품 안으로 안겨 오다니,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곤 빤했다. 그는 이불 속에 잠겨 있는 그녀를 살살 매만지며 속삭였다.

“할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를 마주 안아 주는 그녀의 위로 올라탄 그 순간, 당장은 무거운 과거 대신 행복한 현재에 취하자고 마음먹은 그 순간. 침대 아래에 엎드려 있던 루기스와 시선이 마주친 그의 몸이 덜컥거리며 멈추었다.

“왜?”

에스메랄다가 갑자기 굳어 버린 그의 행동에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아르페시스가 서둘러 이불자락을 당겨서 그녀의 몸을 가렸다.

지난밤에, 루기스를 내보냈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치심과 화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그렇지, 매번 내보내던 루기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난 또 뭐라고.”

에스메랄다가 허탈하다는 듯 말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기스와 눈싸움을 하느라 바빴다.

“안 할 거면 씻을래.”

그녀가 몸을 빼내며 설렁줄을 잡아당길 때에도 아르페시스의 신경은 온통 루기스에게 쏠려 있었다. 부름을 듣고 들어온 시녀들은 엉망이 되어 버린 침실 앞에서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곧 침실 내부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고, 몇 명은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에스메랄다의 지시에 따라 욕실로 향했다.

침실에 사람의 움직임이 가득 찼지만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루기스를 보고 있었다. 그는 루기스가 평균적인 늑대보다 커 버린 이후 에스메랄다와 정사를 가진 적이 딱 한 번뿐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녀와 마차 안에서 정사를 가진 후에는 지난밤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잠시, 루기스의 존재를 망각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욕실로 사라진 후에야 벙긋벙긋, 망설임을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이봐.”

짐승의 외관을 하고 있는 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정말 기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짐승의 모습이라 한들, 지성이 있는 생명체다. 루기스는 분명 자의적으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한다. 그런 존재가 있는 공간에서 계속 정사를 가질 수는 없지 않나.

아르페시스는 시선이 마주친 이후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루기스에게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어제 같을 때는 나가 주었으면 하는데.”

정말 알아들을까? 왜 늑대와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나, 싶은 자괴감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아 버리는 루기스의 태도에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치껏 나갈 수도 있지 않나.”

루기스는 제힘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다. 앞발을 들어 문고리를 돌리는 모습을 무려, 그가 직접 목격했다. 그것 때문에 루기스를 쫓아낸 후 문을 걸어 잠갔으니 확실했다. 그럼 알아서 눈치껏 나가 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홀로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흥, 하는 콧김 소리가 들렸다.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조금 더 격정적으로 꿈틀거렸다.

“어차피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네가 할 일이 없다. 그녀를 지키라고 곁에 둔 것이지 감시하라고 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흥, 하고 조금 더 커진 콧김 소리가 이어졌다.

“관음에 취미라도 있는 것인가? 적당히 나가 주면 다 해결될 일인데, 왜 굳이 남아 있지?”

이번에는 콧김 정도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콧방귀를 닮은 소리였다. 절대 그의 착각이 아니다.

에스메랄다가 욕실로 가 버린 후 홀로 침대에 남아 있던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침실 내부를 치우고 있던 시녀가 서둘러 가운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대충 몸에 끼워 입은 아르페시스가 침대 밖으로 내려섰다.

그는 보통 늑대보다 훨씬 커다란 루기스를 번쩍 안아 들고는 문가로 향했다. 손길이 닿자 으르렁으르렁, 성을 내며 반항을 시도하는 루기스의 반응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나가란 말이다.”

잠시 문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르페시스는 곧 커다란 몸을 문 안쪽으로 들이미는 루기스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루기스와 그를 내보내려는 아르페시스의 대치 상태는 꽤나 오래 이어졌다.

시녀들이 망가진 물건을 다 치웠을 때도, 에스메랄다가 씻은 후 욕실에서 나왔을 때도, 여전히. 덕분에 문가에서 루기스와 실랑이 중인 아르페시스를 발견한 에스메랄다는 눈매를 좁혔다.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렇게 신경 쓰여?”

보다 못한 그녀가 말하자 아르페시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정말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방에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에스메랄다 역시 신경이 쓰였겠지. 하지만 루기스는 사람이 아니라 신수다. 제르민은 신수에게는 번식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관계로 루기스는 그들을 보고도 그저 밤마다 살을 맞대고 비비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말 것이다.

관음이란 그것을 보고 욕망을 느끼거나 흥분을 해야 성립이 되는 말이 아닌가? 루기스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걸 굳이 설명해 주었더니 아르페시스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대꾸하는 게 아닌가?

“비, 비비다니!”

“그럼 문지른다고 할까?”

“에디!”

정말이지, 에스메랄다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문가로 다가갔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욕실에 가거나 볼일을 볼 때는 혼자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처럼 루기스에게 말을 건넸다.

아르페시스의 말은 콧방귀를 끼고 흘려도 에스메랄다의 말은 듣는 루기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본 아르페시스가 루기스를 사납게 노려본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닌 척하면서도 그를 살폈다. 투덜거리면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오는 것도, 퉁퉁 부은 눈매로 루기스를 노려보는 것도, 조금 마음이 놓인다.

아무리 그가 원했다 한들 아플 것을 빤히 아는데,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줄곧 고민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염려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홀로 안도해 본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아프게 울었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아직 눈동자 속에 일렁거리는 것이 남아 있지만……. 그는 참 강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그를 향해 움직이며 흐트러졌던 옅은 갈색 눈동자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 또다시 아픈 날이 온다 해도, 그래도.

‘자주 돌아오겠다. 몇 시간 걸리지도 않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루기스를 흉보며 투덜거리는 아르페시스의 무릎에 앉은 채로 눈을 꼭 감았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일에 대해 논해 보자.’

‘짐이 끝끝내 해내지 못한 것을 네가 해 주리라 믿으며 기뻐하는 짐을 용서하지 말거라.’

‘그간 준비한 것을 모두 정리해서 헨릭에게 남겨 두었다.’

조금 전 그가 했던 말 위로 선황의 말이 얽혀드는 것 같았다.

* * *

주인과 손님이 막 온실로 들어서서 딱 세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핏물은 파란 마나에 막혀 에스메랄다에게 닿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폐하!”

시녀들이 그녀의 주변을 에워싸는 동안 루기스가 물어뜯은 태후의 팔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챙그랑, 하는 소리는 태후가 쥐고 있던 단도가 떨어지며 생겨난 것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옆에 엎어져 비명을 지르는 태후를 덤덤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실에서 차나 한잔 대접해 달라던 연락이 왔을 때부터 예견했던 일이다. 에스메랄다가 위협을 당했는데도 아르페시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녀는 태후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온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기사들에게 말했다.

“황족을 시해하고자 한 죄인이다. 포박하라.”

증인이 있고 정황이 명확하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물증까지 존재한다.

끝까지 품고 가지도 못했던 어중간한 탐욕이 억울했던 것일까? 아니면 뭐라도 하나, 분풀이라도 하나, 어떻게든 스스로를 위한 보상을 하나 움켜쥐려던 심보였을까?

이유야 어떻든, 지금의 결과가 나온 건 참 빤했다. 아르페시스에게 닿을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그녀를 노려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겠지. 어쩜 생각하는 게 다들 이렇게나 똑같은지.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수족들이 하나도 없으니 직접 나서겠노라 마음먹은 것일 터.

권력이나 재물보다 간절히 원했던 사내의 사랑을 포기한 지금에 이르러 태후에게는 제위를 이을 자식도, 가문도 없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으니 죽는 길에 하나라도 가져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날붙이가 보이자마자 태후의 팔을 물어뜯은 루기스에게 손을 뻗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던 루기스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비벼 왔다. 핏물에 젖은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항시 그녀의 곁에 붙어 다니는 루기스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건물만 한 크기로 자랄 수 있는 신수가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황후는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었고,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선황비 전하를 난자한 시녀의 두 살짜리 딸이 납치된 상황이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저 헨릭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고, 아르페시스의 팔다리에 가득한 절단 흉터를 떠올렸다.

“고작 팔 하나에 버둥거리는 꼴이 가관이군.”

황성에 남아 있던 태후의 문제는 아주 순조롭게 처리될 것이다. 선황의 아내인 그녀는 법적으로 아르페시스의 모친과 같은 위치이기에 죽이는 건 자제해야겠지만, 오늘의 일로 유배령을 내리기엔 충분해졌다. 아무리 부모라지만, 먼저 살수를 꺼냈으면 목이 졸리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지.

“치워라.”

핏물 앞에서 고개 한 번, 걸음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명령하는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겁에 질려 있던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선황은 황성 내부로 들어오는 귀족들의 세작을 걸러 내는 데 결코 소홀하지 않았고, 에스메랄다는 헨릭이 지목한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 황성의 사용인 대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제 그들은 새로 모시게 될 주인의 성정을 알아야 할 것이고, 선황비의 사고 같은 일이 없도록 새로이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 태후가 청한 자리에 나오며 시녀들을 줄줄이 데리고 온 건 만일의 경우에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 지금의 순간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에스메랄다는 본인보다 커다란 기사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태후가 흘린 핏물을 밟았다. 걸어가는 곳마다 붉은 발자국이 남았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신수에게는 수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들은 자신의 탄생에 개입한 교황 제르민으로부터 각자의 존재를 위한 이유를 받았고, 그것이 충족되면 자의로 영면을 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마룡과의 전쟁이 막을 내린 후 대부분의 신수가 영면을 택했고, 첫 출현 이후 5백여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수는 채 200기도 되지 않는다.

신수의 영면과 관련된 학설이 제기된 것은 에렘 제국의 황후였던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킨 신수 ‘루기스’의 존재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신수가 마룡과의 전쟁 직후 갑자기 빛으로 산화해 사라졌으나, 당시 신학계에서는 그 현상을 영면이라 정의하지 못했다. 떠난 신수와 남은 신수의 차이점을 특정하지 못했으며, 교황 제르민이 신수에 대한 것을 알려 주지 않았기에 곧 신수가 멸종할 것이라는 추측을 내어 놓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후 에스메랄다의 곁을 항시 지키던 루기스가 그녀의 사후 빛으로 산화하여 영면을 택함으로써, 신수에게는 수명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신수는 현재 대부분이 성국에 머물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에렘 제국의 황성에서도 볼 수 있다.

성국의 건국 당시 영토를 제공했던 에렘의 황실은 교황 제르민에게서 백사자의 모습을 취한 신수를 받았고, 에렘의 이름이 존재하는 지금까지 신수 ‘페노르’는 제국의 곁을 지키고 있다.

(후략)」

- 카 주브 롤베르만 엘리자베스 『신수의 기원과 변화』 中 발췌.

* * *

선황의 기록과 편지를 읽은 이후 에스메랄다는 많은 의문을 가졌다. 몇 가지는 해결되었고, 몇 가지는 아직 진행 중이며, 몇 가지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놔 버려야만 했다.

그중의 하나는 선황이 아르페시스를 남부로 보낸 이유였다. 그것이 정말, 오로지 그의 미래만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녀는 부정의 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황은 아르페시스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남부의 참극을 보고 겪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짐작했을 것이다.

남부 전선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무의식 속에서는 스스로가 내팽개친 의무를 아르페시스가 해 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백성들을 등진 죄책감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고, 아르페시스가 살아갈 세상이 계속되길 바랐을 수도 있겠지.

어제 자로 전부 확인한 선황의 비자금이 그 생각에 무게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가 헨릭을 통해 남긴 건 에렘이 한 해에 소모하는 국정 예산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결코 목적 없이, 혹시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모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군…….”

입 밖으로 꺼내 보지도 못했을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되어 간다. 아르페시스는 남부로 갈 것이니까.

화가 나면서도 안도감이 느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말을 뒤엎어서 옆에 붙들어 두고 싶은데, 에스메랄다는 그것이 악수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이용은 할 수 있을지언정 손에 쥐고 마음대로 휘두를 만큼 케니스가 만만한 것도 아니고, 아르페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해 두었을 것이다. 돌아오더라도 당장은 아니다. 케니스의 수에 대응할 수 있게 손을 쓴 다음이다.

에스메랄다는 케니스에 대해 아는 것을 쭉 나열하고, 모르는 것을 가정하며 생각의 꼬리를 묶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채워야 보지 못한 곳에서 일어난 케니스의 행동과 생각을 잡을 수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폐하.”

너무 오래 생각을 붙들고 있었나 보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가 오기로 했기에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잠시 남는 시간에 생각을 곱씹었더니 그가 도착한 줄도 몰랐다. 오라비가 반가운 것과는 별도로,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응접실 문을 열어 준 시녀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파다한 상황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가 책임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루기스가 함께 있다 한들, 방문한 손님이 혈육이라 한들, 허락 없이 문을 여는 건 문책 받아 마땅하다.

중앙 궁의 사용인들은 7할 이상이 그대로 아르페시스를 모시고 있고, 그 말은 선황이 다듬은 인원이 대부분 그곳에 있다는 의미다. 해서 에스메랄다는 남은 사용인들 중 쓸 만한 이들을 골라 황후 궁을 채웠다. 온실에서 태후의 팔이 뜯겨 나간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아직 다듬어야 할 게 많다.

“오셨어요, 오라버니?”

“예, 자연스럽게 열어 주기에 저도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페르멘은 에스메랄다가 이 일로 시녀들에게 한 소리를 하게 되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에게 어떤 언질도 없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사용인의 훈육과 관리는 주인의 몫이지 손님의 몫이 아니니까.

“그렇군요.”

에스메랄다는 굳이 더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뜻을 내보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저야 언제나처럼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지요.”

영지에서 나눈 대화와 달리 아레스가 작위를 승계한 이후 페르멘은 후작 저에서 노는 중이었다. 틈틈이 영지 업무를 도와주기는 하는데, 어제 만난 아레스는 그가 놀 궁리를 하느라 바쁜 것 같다고 말했다.

사흘에 한 번씩 입궁해 에스메랄다를 만나는 것 외에는 저택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도 훈련은 빼먹지 않는다고 하니, 어린 시절 그들의 부친이 몸에 새겨 준 버릇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본 에스메랄다가 시녀들이 내온 찻잔을 쥐었다. 오늘은 그에게 꼭 해 주어야 할 말이 있어서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마음을 먹긴 했지만, 얘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동안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에스메랄다는 한때, 홀로 앉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당시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골랐다가 내다 버린 선택지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르페시스에게 선황의 기록을 건네주었을 무렵, 그녀는 자신의 앞에 여전히 존재하는 그 선택지를 전부 걷어차 버렸다. 아예 그녀의 삶에 존재하지도 못하게 멀리, 멀리 쫓아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정답이 아닌데 계속 보고 있어 무얼 하나. 신념이고 방향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것일 뿐이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귀족들을 떠올린 그녀의 녹안이 차갑게 식었다. 그들과 그녀는 다를 게 없다.

‘길고 긴 전쟁을 이어받은 오늘 짐은 홀로 맹세해 본다. 반드시 지금의 세대에서 지겹기 그지없는 마룡과의 전쟁을 끝내리라.’

선황이 스스로의 이기와 탐욕을 위해 과거의 맹세를 등졌던 것처럼 그녀도 그리 살 생각이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아르페시스와의 미래를 위해 선택하고 살아가리라고. 그녀가 가는 길에 필요한 사람은 이용할 것이고, 그녀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제거할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옳고 그름? 신념과 정의? 그딴 걸 따지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어느 것을 고르든, 어느 길로 가든 끝은 허무할 뿐인데 이제는 알 바가 아니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스스로가 증오해 마지않는 이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신념이니, 대의니 하는 허울에 시선을 주지 않으리라. 그저 스스로의 이기를 위해 필요한 것을 행할 뿐이다.

참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스스로의 이기를 인정했기에 다른 이들의 이기도 인정해야겠지. 아직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으나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노력을 해 보자.

“오라버니.”

그녀의 부름에 함께 찻잔을 들었던 페르멘이 답했다.

“예, 폐하.”

그녀를 위해 스스로의 삶과 신념을 저버린 형제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아주 예쁘게 웃어 보였다.

“저 이제 괜찮아요.”

페르멘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억지로 곁을 지켜 주지 않아도 되노라, 그녀는 그녀대로 그를 사랑하며 버티는 방법을 찾았으니 이제는 그도 자신의 삶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녀로 인해 그의 삶이 망가지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눈물 대신 미소로써 다짐한다. 그런 에스메랄다의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페르멘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여기 있을 거야.”

에스메랄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해야지.”

예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던 에스메랄다의 입매가 천천히 아래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전선을 지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네 곁을 지키고… 누군가는 필요하니까.”

페르멘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군사부의 외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곳에는 오멘이 있다.

“녀석은 전선을 지키는 누군가가 되길 선택했고, 나는 네 곁을 지키는 누군가가 되길 선택한 거야. 그러니 내가 있을 곳은 여기지.”

에스메랄다의 입매에 울음기가 스며들었을 때 페르멘이 속삭였다.

“너를,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는 목소리가 아니라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로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기를 선택한 것 역시 자신의 삶이라고.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하여 각기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사람이 세상을 채우고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곳에서, 페르멘 역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그의 선택 앞에서 우는 대신 환하게 웃었다.

“그럼 혼사부터 알아보죠.”

“……으응?”

그녀는 당연히 페르멘이 떠나지 않는다는 선택지에 대해서도 이미 준비를 해 놓았다.

“명색이 황후인 저의 오라비이십니다. 혼례도 올리지 않고 혼자 계시면 쓸데없는 빌미를 줄 뿐이지요.”

일부의 시끄러운 이들은 그녀와 페르멘의 근친까지 입에 담으며 더러운 소리를 해 댈 테지. 그런 짓거리에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1년을 드리죠. 그사이에 찾아오지 못하시면 제가 직접 주선하겠습니다.”

이미 아레스는 루이자와 혼사를 진행시키는 중이었고, 오멘은 전선에 갈 것이라며 거부의 뜻을 보였다. 하지만 전선에 가지 않을 페르멘은 사정이 다르다. 계속 미혼으로 남아 있을 때 얻는 이점보다, 혼인을 해서 얻는 이점이 더 많다.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페르멘이 삐걱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기에는 염치가 없는 말이나, 기사 서임도 다시 받으셔야겠습니다. 황실 기사단에는 언제나 인재가 필요하니까요.”

“……예, 폐하.”

이제 노는 건 다 끝났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것에 더해 잘 놀기까지 해서 반질거리던 페르멘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 * *

“아, 혼례라니…….”

여전히 스스로를 철없는 소년이라 여기고 있는 그는 배필을 맞이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에스메랄다가 한 말의 의미를 알기에 혼인을 해야 한다는 건 인지했다. 하지만…….

“1년이라니… 여인은 어디서 만나야 하지? 사교 행사라도 나가야 하나…….”

“뭘 그렇게 중얼거려??”

터덜터덜, 황후 궁의 복도를 지나던 페르멘이 오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폐하를 뵙고 가는 길이야?”

“응, 넌 뵈러 가는 길?”

“응.”

한숨을 폭 내쉰 페르멘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혼인은 어떻게 하는 거냐?”

축 늘어진 어깨가 일견 측은해 보였으나, 오멘이 보기엔 참 어이없는 고민이었다.

“선보면 되잖아.”

“어?”

“황후 폐하의 오라비, 테노리엘 백작가의 사남, 앞길이 창창한 상급… 아, 너 작위 없지?”

잠시 동안 페르멘을 훑어본 오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긴 건 나랑 똑같으니까 훌륭하고. 앞의 두 개만 해도 봉신에 들지 못한 가문은 줄을 설 테니까 그중에서 추려. 정략혼으로 갈 거면 외모, 지참금, 가문 내력, 개인 능력, 이런 조건들부터 구체적으로 잡는 게 중요하겠지. 마음 있는 사람과 하고 싶으면 당장 눈에 보이는 사교 행사는 전부 참석해서 최대한 많이 만나 보는 수밖에 없고.”

페르멘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제 쌍둥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구체적이야?”

황당함을 담아 물어보니 오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전선에 가지 말까, 고민했을 때 이것저것 생각해 봤거든. 내륙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거.”

허, 하고 내뱉은 헛웃음 속에는 약간의 허탈감이 섞여 있었다.

“진짜 결정을 못 하겠다 싶으면 그냥 황후 폐하께 맡겨. 어련히 잘 찾아 주실까.”

“……그건 그렇지.”

에스메랄다라면 그의 성격과 취향, 조건 등을 정말 꼼꼼하게 따져서 평생 동안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는 여인을 소개시켜 줄 것이다. 딱히 혼인에 환상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여인에 대한 취향이 확고한 것도 아닌지라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싶었다.

결론을 내리니 응접실을 나설 때와는 달리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해 보는 데까지 해 보고 안 되면 에스메랄다에게 도움을 구해 보자.

“이제 좀 볼만하네.”

“응?”

“죽을상을 하고 있었잖아.”

“내가 언제? 그냥 좀 심란했던 거야. 곧 죽으러 갈 놈은 너잖아.”

흥, 하고 서로에게 콧방귀를 낀 쌍둥이가 잠시 후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아르페시스가 남부로 돌아갈 때 함께 출정할 중앙군을 선별 중이다. 그중 오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굳이 비밀도 아니었다.

“죽지 마라.”

“……노력할게.”

반드시 그러하겠노라는 약속은 없었다. 그 한마디가 훗날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엿본 두 사람은 쉽게 그 약속을 입에 담지 못했다. 쌍둥이는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어깨를 짚었다.

“잘 부탁한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건네며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의 손뼉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쌍둥이다. 모친의 배 속에서 300일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고 생김새도, 손 크기도, 몸에 있는 점의 위치도, 때때로는 생각과 말까지 똑같았다. 날 때부터 그들은 서로가 또 다른 자신이었다. 몸이 두 개인 셈이니 양쪽에 모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스스로가 존재할 수 없는 곳은 눈앞에 있는 형제에게 맡겨 보자.

“여름엔 돌아오고.”

“당연히 그래야지.”

1439년 카 2일에 중앙 지원군 3천과 함께 출정한 오멘의 전사 소식이 들려온 것은 8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매서운 겨울 속에서도 인간이 마수에게서 탈환한 옛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를 지켜 냈던 해였다.

* * *

「읽은 후 입궁하라.」

중앙 궁에서 나온 헨릭은 짧은 서신과 함께 작은 상자를 전해 주었다. 그 속에 담긴 건 손때가 묻은 가죽 책이었고.

아레스는 즉위와 함께 새로 만들어진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에 따라 가죽 책 속의 글을 읽었다. 그 속에 적혀 있던 날짜와 단어를 통해 과거를 추론하는 건 그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레스는 이후 잠들 수 없는 밤을 지새운 후 중앙 궁에 들어선 참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응접실에는 아르페시스가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잠을 자지 못한 건 그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앉지.”

아르페시스의 허락과 함께 자리를 찾아 앉은 아레스가 직접 챙겨 온 가죽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쉽게 서두를 열지 못하던 아르페시스는 시녀가 차를 내어 온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언을… 구해 볼까 해서, 그대에게 청했다.”

아레스는 이렇게 사적인 문제를 논의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에 살짝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페드로와 에스메랄다가 엮여 있으니 완전히 남으로 보기 힘들지만 이렇게 민감한 사안을 논할 만큼의 친분이 있다고 말하기엔, 애매했다.

그는 아르페시스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에 스스로의 피로를 감내하며 배려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고 고민을 논할 만큼의 신뢰를 쌓았냐고 묻는다면…….

신뢰라는 건 쌍방으로 쌓는 것인데 아레스는 아르페시스에게 그것을 준 적이 없다. 딱 페드로가 아끼는 동생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마음을 준 정도.

왜 에스메랄다를 두고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일까?

“에디는…….”

골이 지끈거리는 와중에 들려온 호칭은 아레스의 불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장점인 인내심을 십분 발휘하여 그것을 차분하게 다독였다.

사실, 그는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저렇게 부르는 게 싫었다. 그녀의 예쁘고 아름다운 이름을 두고 왜 굳이. 다만 지금은 그 말을 꺼낼 때도 아니거니와, 두 사람 사이의 호칭에 간섭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에스메랄다와 겨우 관계를 회복해 가고 있는 오라비는 참는 수밖에.

“에디는 스스로가 이미 선황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노라고… 한쪽에 치우친 사람과의 대화는 강요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을 거절하더군.”

아레스는 아르페시스가 한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면… 선황 폐하의 행동을 지지하는 형태로 대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

“그건 결국 폐하께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아르페시스가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그 한 음절에서 알 수 있다. 아르페시스는 아직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상태다. 혼자서는 못 할 것 같아 조언자를 찾았는데, 정작 무엇에 대한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해결해야 하는 것의 존재는 인지했으나, 정작 그 해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는 출발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

아마도 생각과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분명히 골라내지 못했으리라. 결국 오늘은 아르페시스에게 엉킨 실타래 같은 것을 풀어내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대화를 이어 가기 전, 아레스는 아르페시스를 찬찬히 살폈다. 곧고 강직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 공정하며 자신만의 기준이 단단하여 때때로 고집이 강한 사람, 그리고 보고 있노라면 안심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아레스가 보는 아르페시스였다.

언젠가부터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날카롭게 변했지만, 아레스는 그 타인의 범주에서 자신이 제외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제외의 이유가 에스메랄다의 혈육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이런 정황이 의미하는 바는 정말 간단했다. 아르페시스는 혈육에 얽매이는 사람이다. 유년기의 결핍이 소속감을 갈구하게 만들었거나, 가지지 못한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동경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의 감정이 본인의 것보다 우선시되고 있다는 것. 어쩌면 세 가지 가정이 모두 정답일 수도 있고.

하지만 혈육에 얽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그 이유 역시 짐작한다 해도 아르페시스가 살아온 시간의 무게는 아레스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레스는 잠시 그를 응시하나 싶더니 눈을 감았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해 보았다.

“저희들의 아버지는 참 다정하셨습니다.”

해야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사실 많지 않았다.

“교육에 관해서는 정말 틈 하나 주지 않고 엄하셨지만, 고집을 조금만 부리면 모두 오냐오냐 다 해 주셨지요.”

함께 놀고 싶다고 말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내어 주었고, 자장가를 불러 달라 조르면 밤새도록 곁을 지켜 주다가 함께 잠드는 일도 몇 번이고 있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 조르면 경제 관념을 가르치기 위해 용돈을 모아 사라고 말하지만, 그때는 이미 주문이 끝난 상태다. 돌아오는 생일에 주려고 미리 사서 모아 둔다는 걸 알았을 때 페드로와 배를 부여잡고 웃었지.

그들 남매는 부친에게서 생일 선물을 하나만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흘러가듯 말한 물건도 돌아오는 생일을 마주하면 꼭 끼어 있었다. 훈련을 하다 다치면 밤이 되어 몰래 침실을 방문한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모친이 그립노라 울면 그들을 무릎 위에 앉혀 주고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지만 잔인한 분이셨습니다.”

달각 하고, 찻잔이 내려앉는 소리의 끝에서 이어진 아레스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그 모든 다정함은 훗날 스스로의 부재를 가정하고 쌓아 올린 것이었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라는 마음가짐으로.

아레스는 페르멘을 통해 에스메랄다의 상처를 전해 들은 후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스스로가 겪어 본 후에야 잔인한 다정함이 무엇인지 배웠다.

“조금 못해 주어도 좋으니, 조금만 더 오래 곁에 계셔 주었다면 좋겠다고…….”

에스메랄다에게 똑같은 짓을 했으면서, 직접 겪은 것은 정말 아팠다.

“그래도 저희 남매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우습던지. 아레스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와 선황 폐하를 굳이 비교하자면… 반대일까요?”

선테노리엘 백작은 살아 있는 동안 그들 남매에게 많은 것을 주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뒤에 남아 있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는 대형 마수가 이동할 수 없도록 포위 진형을 펼치며 소극적으로 퇴각했다. 아레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다른 부대에서 대형 마수의 존재를 인지하고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뒤에 남은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선택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을 지켰다. 자식들을 위해 살아남는 선택 대신 의무와 책임을 위해 죽기로 결정한 것이다.

반면 선황은 살아생전 아무것도 주지 못했으나 제 목숨마저 자식을 위한 것으로 사용했다. 어차피 뒤에 남은 자식은 제 부재에 아파하지도 않을 테니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내던져 아르페시스의 자리를 만들고, 상황을 만들었다. 아레스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존재를 보았으니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은 해야지.

“색채나 모양새가 다르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원하는 형태가 아니라 하여 사랑임을 부정하는 것만은 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찻잔을 든 아레스가 속의 찻물을 삼켰다. 밤새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것이 찻물을 뒤집어쓰자 조금은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의 대화는 아르페시스의 정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아레스 자신의 정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친으로서의 선황을 평하자면, 안쓰럽다. 배필을 잘못 만나 파국에 직면한 것이 참, 안쓰럽다. 하지만 황제로서의 선황을 평하자면……. 아레스는 동정과 연민에 가려져 있던 감정을 기어코 집어 들었다.

그는 선황을 경멸하기로 했다. 아레스는 잔인한 다정함이 얼마나 아픈지 알면서도, 제르민을 통해 팔을 회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전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아레스 역시 작고한 선대 백작처럼 감정을 의무 위에 두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기에, 감정을 위해 의무를 버린 선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선황을 황제로서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결론을 내고 나니 상념이 시작되었다.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는 청명한 하늘색 눈동자. 요즘 아레스의 상념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 눈동자.

사실 혼담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작위를 승계할 페르멘과 진행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번 만나 본 페르멘과는 도무지 혼인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그가 지목받았다. 혼례 이전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만남을 청하는 서신은 아레스에게 왔던 것이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처음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이 났기에 루이자와 사적으로 몇 번을 만났고. 이미 가문 간의 대화는 끝났기에 아르페시스의 즉위 연회에서 정식으로 청혼을 했고 승낙을 받았다. 이후 정원에서 연회장으로 돌아왔더니 제르민이 그의 눈을 되찾아 준 것이다.

‘성하께서는 5년 내에는 제게 팔을 줄 수 있노라 확언하시더군요.’

그는 연회가 파하기도 전에 루이자에게 출정의 뜻을 전했다.

‘익숙해지면 출정하겠습니다.’

‘네.’

잔뜩 흐트러져 있던 루이자의 대답이 속을 긁었지만, 아직은 선황을 생각할 때 경멸이 먼저였다.

“이것을 부정이라 여기고 감사라도 하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수십 년간 나 때문에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속죄를 하라고?”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아르페시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질문에는 꺼림칙한 것들이 많았다. 아레스의 관점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두 가지나 되었다. 두 가지 질문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니 결국 전부다.

“사랑을 받으면 모두 감사해야 합니까?”

아르페시스가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사랑하는 이와 맺어진 이에게 집요하게 전해지는 타인의 사랑은 감사할 게 아니지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아레스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선황 폐하를 보십시오. 원하지 않은 폐태후의 사랑을 받아 인생이 아예 어그러지지 않았습니까? 원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사랑이라 한들 반드시 감사를 논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아르페시스가 답이 없는 사이 아레스는 말을 이었다. 하나를 짚었으니 다음 하나도.

“그리고, 어째서 폐하께서 죄책감을 가지십니까? 황제의 의무를 저버리고 백성들의 죽음을 방조한 것은 선황 폐하이시지요.”

2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그 일에서 아르페시스는 타인, 혹은 피해자였다.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니는 것이 다였던 아이가 무얼 했기에 죄책감을 느끼려 하시는가 말입니다.”

아르페시스는 짊어지려는 사람이다. 분위기와 태도가 변하긴 했지만 그런 근본이 변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대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질문 속에 있는 문제점을 짚었으니 이제는 질문의 답을 위한 조언이 뒤따를 때였다. 아레스는 미간에서 손을 거두며 아주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살려 달라고, 폐하를 대신해 수천, 수만을 죽여 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없다. 아르페시스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분명 무언가를 삼켰는데, 아레스는 아직 아르페시스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만큼 그를 잘 아는 게 아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행동을 통해 이득을 보았다고 해서, 피해를 본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건… 제 눈에는 무척이나 이상해 보입니다. 사과는 죄의 주체가 하는 것이지요.”

아르페시스가 입을 꾹 다물며 생겨난 침묵이 기묘하게 다가왔다.

“부디 간청하건대, 조금 전에 하신 괴상한 질문은 털어 내시기를.”

아레스는 말을 하면서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은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르페시스는 그의 말을 이해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아레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하는 종류의 죄책감이 아닌 것 같은데……. 기억 속에서 갑자기 튀어 올라온 글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에는 개꿈이라고 생각했어. 녀석이 미친 거라고.’

‘그 녀석 앞에서는 웃더라고.’

아마도,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이자 꿈을 통해서야 겨우 엿보았던 시간에서 일어난 일.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아레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질문에서 그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레스는 두 번째 질문에서 곧바로 손을 뗐다. 그는 모르기에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르페시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아레스가 그것을 막았다.

“저는 사라진 시간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지라, 이 부분은 위험 요소가 있더라도 황후 폐하와 상의를 해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

상당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아레스는 그런 아르페시스를 위해 쉽고 간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페드로의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빠르고 정확하게 그를 이해시킨 아레스가 본래의 주제로 대화를 끌어 왔다.

“처음 하신 질문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무엇… 이기에?”

아레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은회색 눈동자 앞에서 간결한 질문을 던졌다. 신하와 황제로서가 아니라, 똑같은 자식으로서.

“사랑받고 싶으셨습니까?”

아르페시스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당장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이상 그는 이미 대답을 한 것과 같다.

받지 못했기에 원망해도, 받고 싶었는가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 아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감정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바랄 수밖에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의 세상에는 부모가 존재하니까.

“어렸을…….”

영유아기에는 부모가 아이의 세상을 전부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잦은 것이지 받고 싶지 않아 하는 상황은 정말, 드물다.

“지금은…….”

아르페시스는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바꾸었지만 그마저도 끝맺음을 얻지는 못했다. 앞선 침묵과 지금이라는 한정적인 단어가 그의 대답을 고집이라고 말해 준다. 너무 억울하니까, 인정하면 자신이 겪은 시간이 무의미해지니까,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스스로가 인정하게 두는 수밖에 없다. 질문을 했고, 고민을 했으니 답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천천히 고심해 보셔도 되는 일입니다. 급할 것이 없으니까요.”

선황은 이미 죽었다. 답을 내는 것이 빠르든, 느리든, 달라지는 건 없다. 아레스는 혼자만의 고민을 이어 가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군요.”

이만 대화를 파하자는 말에 아르페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입궁해 주어 고맙다. 그대에게 청하길 잘한 것 같군.”

그에 아레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추천한 게 아니었나?

그냥 넘길까 하다가 슬쩍 돌려 떠본 것은 충동이었다. 그는 아르페시스를 아끼지만 신뢰하지는 않기에 조금 궁금했다. 에스메랄다의 추천이 없었다면 그를 부를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두 분 폐하의 청을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두 분?”

아닌 모양인데……. 아레스가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아르페시스가 오해를 풀어 주었다.

“아… 에디는 그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라면 믿을 수 있어서. 여기저기 새어 나가서 좋은 얘기도 아니지 않나.”

벌써? 뭘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갑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아르페시스의 신뢰가 부담스러워 눈을 끔뻑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에 아르페시스 역시 아레스를 마주 본 채 눈을 끔뻑거렸다.

“아.”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탄성을 꺼낸 아르페시스가 구구절절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 단어가 두 개뿐인 무척 간결한 설명이었다.

“페드로가 그대를… 혹여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상대방이 어떤 인사인지 깊게 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사적인 문제를 들고 와 논의한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페드로구나. 아마도 페드로가 신뢰했던 이니까 당연히 신뢰한다는 전제가 생긴 모양이다. 페드로와 정말 피를 나눈 아레스조차 마음은 주어도 신뢰까지는 주지 못했는데……. 정말 단순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지나치게 우직하다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다는 것에 가깝겠지. 먼저 떠난 형제를 이렇게까지 믿어 주는 사람이 있음에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고 청해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이후의 평생 동안 시달릴 줄 알았다면 입을 꾹 다물었을 테지만… 지금의 아레스는 알지 못했기에 답했다.

황도에서도, 전선에서도, 에스메랄다와 싸운 아르페시스가 ‘어떻게 하지?’라는 서두를 가지고 달려오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다. 결국 앞날을 모르는 아레스는 한 번, 두 번, 꼬리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주절거리는 아르페시스가 불쌍해서 도와주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동생 부부의 싸움을 해결해 주는 그의 모습이 당연해질 것이고. 뭐, 아직은 조금 먼 날의 일이지만.

* * *

대부분의 사절들이 돌아가고 내일은 드디어, 아비체룬과 실테르의 사절단과 본격적인 동맹 조율을 해 보는 날이다. 이미 외교부 관료들과 사절단 인사들이 사교 행사에서 말을 주고받았지만, 정식으로 규정된 문장을 들고서 테이블 위에 앉는 건 내일이 처음이다.

이쪽도, 저쪽도, 외교부 관료들이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며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으니 며칠 동안은 테이블 위에서 공상(公傷)이 이어질 테지. 본격적인 남진을 위한 준비가 바로 내일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머리에 집어넣은 것으로 내일을 그려 보던 에스메랄다에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리나 님과 조프리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녀가 방문을 알려 온 이는 두 명, 내전이 끝난 후 에렘의 계승권을 잃은 두 아이였다. 페라노스와 제르아니의 자식들.

테몬을 비롯한 기존의 반황실 세력이 강경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저었고 아르페시스가 거기에 따랐다. 그렇게 계승권 박탈을 대가로 목숨을 부지한 아이들이기에, 더 이상 황손이 아니다. 계승권이 없으니 방계나 마찬가지이고, 황족의 직계에게만 허락된 황녀나 황자의 칭호도 쓰지 못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죽이는 게 편하다. 두 아이의 친부는 명백히 패륜에 손을 댄 죄인이다. 그 핏물을 타고 다음 세대인 아이들도 패륜에 손을 대리라는 목소리가 상당했다. 에렘에서는 본디 패륜자의 자식은 똑같은 패륜자로 취급하는 것이 관습이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 스스로도 지금 두 아이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늘의 자리가 성사되었다.

“들어오렴.”

열린 문을 지나 두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부터 두 아이들을 돌보던 유모들이 그들과 함께 도착했다. 두 아이의 유모는 한때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이틀 만에 페라노스의 죄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져 본래의 위치로 복귀한 상태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로, 로젤리나가 인사 올립니다.”

비교적 발음이 뚜렷한 여자아이, 로젤리나가 먼저 치맛자락을 펼치며 인사를 했다. 36년 봄에 태어난 아이다. 유모의 손을 잡고 도착한 그녀와 달리, 지난해에 태어난 조프리는 유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제야 걸음마와 옹알이를 한다.

“화… 조, 조프리 님께서 아직 어려, 직접 예를 갖추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에스메랄다는 문가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두 아이와 두 유모를 조금은 오래도록 응시했다. 선황은 저 아이들에 대한 처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남기지 않았다. 자식의 자식이건만, 핏줄이라 여겼음에도 제 손주보다 이용할 패로 보았다.

에스메랄다 앞에, 그녀의 뒤로 흐르며 흔들리던 유다의 연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로젤리나가 몸을 떨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후에야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그래, 앉으렴.”

“예, 예, 폐하.”

로젤리나가 유모와 함께 에스메랄다의 맞은편 소파로 다가왔다. 그녀가 유모의 도움으로 소파에 올라앉을 때, 조프리는 유모의 품에서 소파로 내려왔다. 로젤리나의 옆자리였다. 그걸 본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성인이 곁자리에 없을 때 아이를 홀로 소파에 두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다 떨어지면 어찌하려고.”

조프리를 소파에 내려놓고 물러나던 유모와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조프리를 안은 유모가 소파에 앉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로젤리나에게 닿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의 시녀가 무엇을 마시겠느냐 물으며 다가섰지만, 로젤리나는 바들바들 떨며 눈치를 볼 뿐 답은 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 양!”

그저 침묵 위에서 홀로 찻잔을 기울이다 보니 노크 소리와 함께 지원군이 도착했다.

“성하, 어서 오세요.”

이제 황제의 배필로 그와 똑같은 경칭을 사용하는 에스메랄다였다. 더 이상 교황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국혼 이후 처음 뵙는 것이지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 나는 우유가 좋구나. 꿀을 넣어 다오.”

로젤리나의 곁에 서 있던 시녀 말고, 다른 시녀가 곁으로 다가가자 제르민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예, 성하.”

답을 한 시녀는 제르민의 음료를 가져오기 위해 응접실을 비웠으나, 로젤리나와 조프리의 곁에 있는 시녀는 여전히 응접실에 남아 있다.

“음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받은 시녀가 다시금 로젤리나에게 물었다.

“우, 우유…….”

“예, 로젤리나 님.”

마실 것 하나 고르는 게 참 어렵다. 로젤리나의 모습 위로 어린 아르페시스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저야 잘 지냈지요. 성하께서도 무탈하셨습니까?”

제르민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에스메랄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인사 나누시지요. 로젤리나와 조프리입니다.”

“아하, 그 아이들이군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제르민의 입에서 그 아이들,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로젤리나가 눈에 보일 만큼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르민은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로젤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는 제르민이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로젤리나… 입니다.”

“에헴, 나는 올해로 무려 여섯 살이지. 내가 너보다 한참은 오라비다, 이 말인 게야. 알겠느냐?”

로젤리나의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선언한 제르민이 다과에 손을 뻗었다. 시녀들이 어린이들의 음료를 가져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아이와 그리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할 줄 몰랐기에 조프리의 것은 아이가 있다는 시녀에게 일임했다. 그렇게 조프리의 앞에 놓인 것은 작게 잘린 과일이었다.

“아직 홀로 잔을 들기엔 위험하기에, 편히 먹을 수 있는 과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

조프리를 안고 있는 유모는 아이의 칭얼거림에도 바짝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에스메랄다는 먼저 과일을 먹으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제르민은 준비되어 있던 다과를 전부 비워 새로운 것을 내어 왔을 정도인데, 로젤리나는 제게 내어진 우유를 잔째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 아이에게 편히 마시라고 권유하지 못했다.

* * *

욕실에서 나온 에스메랄다는 침의로 환복을 하고 시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전등 마도구를 발동시키지도 않았는데 침실에 가득한 라퓨나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생각을 정리했다.

본격적으로 최전방 전선 3개국 간의 동맹 조약을 담당하고 있는 건 루그레디안이다. 내전 이후 외교부 수장직에 앉았으니까. 동맹 부분은 3개국 모두가 뜻을 가지고 있기에 이해타산이 일치한다면 성사될 것이다.

문제의 이해타산을 논하는 게 조금 번거롭겠지만……. 전선 문제는 3국 모두가 간절한 것이기에 무산되기는 힘들겠지.

국외 문제를 넘기고 국내 문제를 곱씹어 보면 국정 운영이다. 내일 아르페시스가 국정 회의에서 출정 의사를 보이고 나면 본격적으로 그녀가 국정을 이끌며 남진을 준비하게 되겠지.

그 외에는, 매일 그녀를 번민에게 안내하는 로젤리나와 조프리의 문제가 있다. 격일에 한 번, 오전 시간에 로젤리나와 조프리를 불러 티 타임을 가졌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제르민이 함께했다.

두 아이가 아직 어리다지만 듣는 귀가 있는 자리에서 일 얘기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기에 오가는 얘기는 별것 없었다. 그 자리에서 로젤리나는 아직도 잔을 매만지기만 하고, 조프리는 유모의 품에서 칭얼거린다.

자리를 만들기 전 유모들을 따로 불러 이것저것 듣기는 했다. 제르아니와 페라노스가 어떤 부모였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직접적인 폭력이나 학대는 없었으나 방치는 존재했다. 부모를 만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무얼 더 말할까.

황실 법에 따르면 열 살 이하의 유년기는 부모와 같은 궁에서 보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두 아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나마 두 아이가 같은 궁을 썼기에 로젤리나가 조프리를 챙기는 것 같지만… 그녀가 누구를 챙길 나이이기는 한가.

침실 내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오늘 오전에 만난 아이들을 생각하던 에스메랄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중앙 궁 대신 황후 궁에서 출퇴근을 하다시피 하는 아르페시스가 돌아왔다. 국혼 이후 중앙 궁의 침소에는 불이 켜진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반복되리라.

그는 생각에 잠겨 있는 에스메랄다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음에도 그녀가 처음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한숨을 쉬는가?”

아르페시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아이들.”

에스메랄다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도 놀라는 대신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라앉으며 답했다.

“……오늘도 만났다지?”

잠시 후 들려온 물음에 에스메랄다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전해 들은 것처럼 말하기는. 다 봤을 거면서.”

“흠, 흠.”

그녀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아르페시스는 이 주제에 관해서 먼저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일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왜… 만나는 것인지 물어보아도 되겠나?”

“나도 몰라.”

동정하느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챙겨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녀도 사람이다. 진실을 알게 되어 약간의 연민이 끼어든 상태라 해도, 평생을 혐오했던 페라노스의 핏줄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다정하게 품어 주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책임감인지, 죄책감인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를 감정 때문에 아이들을 외면하지는 못했다.

“어려워.”

“……나도, 어렵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는 며칠 전 아레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읊으며 끝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답을… 못 하겠더군. 그리고 지금도 못 하겠다.”

사랑받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지 못했고, 아직도 답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혼란스럽다고.

“나는 황제를 싫어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데, 왜 그 질문을 받는 순간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까?”

사라진 시간에서의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본래라면 흐려지다 못해 잊혀졌어야 할 오래전의 기억도 함께 움켜쥐어 버렸기에 괴롭다. 의식하지 않을 때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는데, 의식하고 난 지금은 분명히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젊은 선황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자꾸만 기억의 호수 속에서 떠오른다. 선황의 무릎에 앉은 그가 본 것 중에는 수줍게 웃던 친모의 얼굴도 있었다. 평생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기억이 그에게 남아 있다.

홀로 남은 아기 침대 속에서 바동거리던 때부터 시작해서 따듯한 유모의 품이 좋아서 매달렸던 두 살.

천둥소리가 무서워서 홀로 침대 위에 웅크렸던 세 살과 넘어져 까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던 네 살.

혼자 앉아 있는 식당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던 다섯 살과 유모에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보았던 여섯 살까지.

그 이후에도 밖으로 꺼내는 대신 점점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본인조차도 잊어버렸던 감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여전히 백성들이 끔찍하게도 싫은데, 계속 메리와 세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품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상념을 허락할 만큼 주변이 조용해지면 즉위식 날 보았던 세리와 메리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미의 시체를 뱉어 내고 싶은 듯이 구역질을 하던 메리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 위로 내가 만들어 냈던 비명 소리들이 덧씌워지는 게, 왜 이렇게 무겁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기는커녕 계속 더 무거워졌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 쌓아 왔던 그의 기억과 생각이 그 무게에 손을 보태고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깊은 한숨은 복잡한 내면을 그대로 담아냈다. 에스메랄다는 저만큼이나, 어쩌면 저보다 더 복잡할 그를 안아 주며 속삭였다.

“그러게…….”

왜 이렇게 무거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하지 않으면 계속 꽁무니를 쫓아오며 괴롭히니까, 그게 너무 싫어서 하고 있을 뿐이다.

“이유를 찾는 것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이제 몰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래. 이젠 그것만 보기로 했어.”

아르페시스가 오기 전까지 상념에 잠기어 모순과 혼란 속을 거닐었던 에스메랄다가 속삭였다.

그녀에게 기대어 있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마룡을 토벌하고 남부 전선이 사라지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이렇게 너랑 붙어 있을 거야.”

생각을 해도 결론은 나오지 않고 많은 것을 더듬어도 잡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 해 보았던 것처럼, 눈앞에서 신념이라는 선택지를 걷어찼던 그때처럼 놔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기대며 생각했다. 이제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은 그만하겠다고. 그녀의 투정을 들은 아르페시스가 복잡한 와중에도 저절로 웃음을 흘렀다. 그녀도 그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평생토록 이렇게 둘이서.

한때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듣게 되는구나. 에스메랄다는 백성들을 용서했기에 남진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 결정의 이유는 그와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의 평화와 행복을 평생토록 누리고 싶어서였다. 또다시 머릿속에 세리와 메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르페시스가 바라는 것 역시 에스메랄다와 같았다.

“원래 노는 건 노년에 하는 거라잖아?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랐을 테니 일을 떠넘기면 되겠지.”

아르페시스는 제 품속에서 중얼거리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몇십 년 후를 그려 보고 있는 그녀의 식견에 감탄해야 할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들을 언급하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일을 때려치우겠다는 말 대신 떠넘기겠다고 말하는 책임감에 기가 질려야 하는 것인지… 정말 모호한 순간이었다.

“아이들……?”

모호하다고는 해도 짐승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내가 눈을 둘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언젠간 태어나겠지?”

혼례 이전에는 두 사람 모두 나름 조심을 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피임약을 따로 챙길 정도였다. 그들의 실수를 아이들에게 짐으로 물려줄 수는 없기에 두 사람 모두 피임은 계속 신경을 썼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입 안이 살짝 썼다. 사생아, 그 지겨운 이름의 그림자 속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아르페시스는 억지로 그것을 밀어냈다. 아직은, 아직은. 모르지 않고 알게 된 것만으로도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니 다음 단계는 천천히 가자. 아직은 그 모든 것을 오래 품고 있기엔 버거웠다.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져.”

아직 그들을 찾아오지 않은 아이의 그림자 속에서 로젤리나와 조프리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당장은 외면하자. 한 번에 모든 것을 감당하려 들지 말고, 천천히 가 보자.

아르페시스는 어쩌면, 남부에 가기로 한 건 잘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끝자락을 빨리 보려면 인외자인 그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을 테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함에도 걱정거리는 있었다. 그의 부재로 인해 악몽을 꾸게 될 에스메랄다가 유일한 걱정이다.

아르페시스의 눈동자에 근심이 서리는 것을 본 에스메랄다가 설핏 웃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최근 들어 아르페시스가 전장에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그가 할 걱정이 무엇인지도 짐작이 되었다.

“왜?”

아르페시스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에스메랄다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지금이 조금…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르페시스를 본 에스메랄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는 지금이 이상해서.”

국혼 당시 황도에서 했던 생각은 조금씩 살을 붙여 가며 커졌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의문에 도착하니…….

“만약에 내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면, 지금이 있었을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예전처럼 수단과 방법에 얽매이고 자신만의 정의를 위해 살던 그녀가 시간을 되돌아왔다면 지금이 있었을까, 하고.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녀는 분명하게 실패했지만, 돌아온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완전히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반드시 성공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골랐다면 분명 어렵고 힘든 길이 많았을 테고, 그 길을 가던 중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시간을 되돌아와 마녀가 되고자 마음먹고 오로지 복수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집념 하나로 달린 지금, 그녀는 분명하게 이곳에 있다.

이미 핏물을 감내하여 얻어 낸 성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니, 또 한 번의 핏물을 흘려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성과 또한 그려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또다시 핏물을 흘리겠노라 다짐할 수 있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길로 가면, 반드시 마룡의 목을 가져갈 수 있노라 확신하니까.

앞으로 저지를 죄악을 면죄받을 길까지 만들어져 있으니, 무엇을 더 망설일까.

“가 보지 않은 미래는 확신하는 게 아니라고들 하지만… 나는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을 만들지 못했을 것 같아.”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이미 그녀 홀로 답을 내렸기에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모시는 주신이 오늘을 위해 그녀에게 복수심을 쥐여 준 채 되돌려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복수심과 함께 돌아온 그녀는 지금을 이루어 냈으니 어쩌면 정말, 그렇게 비참한 상태로 돌아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오늘에 이르러 에스메랄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죄악이 난무했음에도 면죄받을 길까지 만들어져 있으니, 더더욱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미카엘을 만나고 제르민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신앙심이 한층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멀고 먼 곳에서 ‘그건 아닌데…….’ 하는 중얼거림이 있었지만, 너무나도 먼 곳에서 시작된 것이라 에스메랄다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녀는 과거의 순간이 그러했듯, 앞으로의 순간도 모든 것이 전지전능한 주신의 안배일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아르페시스가 걱정하는 문제는 그녀에게 크게 와닿지 못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어째서? 하고.

“그냥, 괜찮아져서.”

그저 악몽을 꾸어도 끔찍하지는 않을 것 같았을 뿐이다. 이제는.

창밖을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이어질 길고 긴 여정 앞에서 숨을 골랐다. 다시금 아르페시스를 찾아든 녹안은 단단한 빛을 품고 있었다. 이제 상념으로 걸음이 흐트러지는 일도, 후회로 걸음이 무거워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두 그녀의 이기를 충족하기 위한 길이니까.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놀자.”

그녀의 속삭임에 아르페시스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려면 뒷일을 맡길 아이가 빨리 태어나야겠군.”

에스메랄다는 제 옷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는 아르페시스의 손길을 느끼며 맑게 웃었다.

* * *

「에렘 황실의 비화를 논할 때마다 최고의 화두로 오르는 것은 15대 황제와 황후의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황제와 황후가 정치적 동맹으로 권력을 나누거나, 적대 관계를 이루며 권력을 겨루었던 타 시대와 달리 그들은 정말 기이할 정도로 굳건한 신뢰를 나누었다.

황제 아르페시스는 군권을 장악했으나 결코 국정과 중앙 정치에 손을 대지 않았고, 황후 에스메랄다는 국정 운영과 중앙 정치의 중심에서 권력을 휘둘렀으나 결코 군권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40년이 채 되지 않는 통치 기간 동안 서로의 굳건한 지지자였고, 서로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신뢰를 나눈 것으로 보였다. 모두가 그 신뢰의 이유를 1432년 발발한 서부 대란 시기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으로 지목한다.

실제 황제 아르페시스는 즉위 초기 후사가 태어나지 않자 황비를 들이라 주청한 대신들에게 분노를 표했으며, 끝끝내 황후 에스메랄다 이외의 배필을 맞이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중앙 궁이 아니라 황후 궁에 기거했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황제 아르페시스가 제위 기간 중 중앙 궁에 머문 일자를 세어 보면 800일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토록 열렬한 사랑의 주인공인 그들은 살아생전 참으로도 많은 다툼을 했다. 귀족들의 사기록은 물론, 황실 실록 역시 그들의 다툼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800여 일은 황제와 황후의 다툼으로 각방을 선언한 일자를 더한 것이다. 고작해야 한 번에 사나흘간 각방을 사용한 일자의 총합이 800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황제 아르페시스가 젊은 시절 한 해의 대부분을 전선에서 보내고 여름에만 황도로 돌아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다툼은 무척이나 잦았다. 황위를 아들 유세프에게 양위한 이후 칩거를 이어 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다투며 각방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토록 잦았던 불화의 시기에도 신뢰를 나누며 국정과 군권 운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게 많은 이들에게 아이러니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두 사람의 다툼 중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것은 대륙력 1447년, 황후 에스메랄다가 국정 회의 도중 하혈과 함께 유산을 했던 시기다. 당시 혼절했다 깨어난 그녀에게 노성을 표한 황제 아르페시스는 거의 1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중앙 궁에 머물며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 무렵 황후 궁에 배치된 병력이 황후의 안전이 아니라 감시와 감금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동시대의 인물들은 그 불화를 심각하게 보았다.

하지만 그토록 잦은 다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불변한 것처럼 각별했고, 또한 격렬했다. 그 표현의 근거로 들어지는 것은 황후 에스메랄다의 의복과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황제 아르페시스가 전선에서 돌아올 무렵, 항시 목과 팔이 모두 가려지는 답답한 의상을 입었다. 그 시기가 뜨거운 열기에 지친 조숙한 숙녀들마저 팔과 목을 드러내는 여름이었으니, 많은 이들이 황후 에스메랄다의 의복은 부부의 정사에서 남은 흔적을 가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여기에 이어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불변하였다 말하는 근거는 황후 에스메랄다가 행했던 사치에 있다. 그녀는 본디 국혼 이후 화려함을 지양하고 검소한 생활을 이어 갔다. 드레스에는 보석을 달지 않고 오로지 자수만을 놓았으며, 장신구는 친모가 남긴 유품과 황제 아르페시스가 선물해 주는 것 외에는 일절 걸치지 않았다.

스스로가 가진 부의 대부분을 남부군과 마수와의 전쟁에 사용한 그녀는 평생을 검소하게 지내며, 귀족들이 남부의 전장을 후원하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토록 검소했던 황후 에스메랄다에게도 예외는 존재했다. 매해 황제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생일 선물로 주었다는 한 다발의 라퓨나가 바로 그녀의 유일한 사치였다.

마나가 존재할 경우 영원히 존재하는 라퓨나는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마석을 필요로 한다.

대륙력 1432년부터 이어진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는 그 꽃이 훗날 황후 궁을 가득 채웠을 정도라고 하니, 유지를 하기 위해 필요한 마석은 결코 푼돈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해가 져 버려 어둠이 짙어져도, 황후 궁은 라퓨나의 빛으로 은은한 광채를 내었다고 전해진다.

무려 60여 년 동안 한 다발씩 쌓여 궁을 가득 채운 그 광경이 무척이나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의 사랑이 낭만적이었다고 논하는 이들의 주장은 지금의 얘기에 많은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 황후 에스메랄다는 관리 소홀로 라퓨나를 훼손시킨 시녀를 해임하는 등, 꽃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들의 사랑이 영원불멸하였음을 논하는 이유는 또 있다. 황후 에스메랄다의 사후에도 황제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무덤에 매해 라퓨나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다른 여인과의 염문설 한 번 흘리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황후 에스메랄다와 나눈 배필의 맹세를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후략)」

- 카 주브 오랑 라그오스 『에렘 황실의 비화』 中 발췌.

* * *

- 1439년 사 77일

황제 아르페시스가 출정 의사 표명하며 황후 에스메랄다에 의한 국정 운영이 논의되다.

- 1439년 사 85일

세튀스 왕국에 점령된 전 디오세네트 공작령을 수복하기 위해 에렘 제국의 3만 병력이 북진하다.

- 1439년 사 100일

영토를 되찾은 에렘 제국이 세튀스 왕국과의 국경 너머로 생포한 4천여 마리의 마수를 방생하다.

- 1439년 카 2일

황제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 오멘을 필두로 한 중앙군 3천이 남부로 파병되고, 황후 에스메랄다의 국정 운영이 시작되다.

- 1439년 카 27일

세튀스 왕국으로부터 도착한 항의 문서에 국정을 책임지는 황후 에스메랄다가 친필 답신을 전달하다.

「에렘을 위협하는 후방국을 지켜 주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세튀스 왕국은 지금부터 자국의 힘으로 마수를 막아야 할 것이다.」

- 1439년 카 29일

최전방 전선 3개국 간의 불가침 조약과 함께 동맹이 체결되고 대륙 전역에 위의 사실이 공표되다.

- 1439년 카 63일

세튀스 왕국으로부터 사과문과 함께 전달된 마수 토벌 요청이 황후 에스메랄다에 의해 반려되다.

- 1439년 카 70일

새로이 포획한 마수 5천 기가 에렘 제국의 북부로 운반되다.

- 1439년 카 78일

에렘 제국의 국정 운영 예산이 대대적인 개편에 직면하다.

- 1439년 카 90일

에렘 제국 전역의 뒷골목 수장들이 비밀리에 황성에 입궁하여 황후 에스메랄다를 알현하다.

- 1439년 카 100일

세튀스 왕국의 국경 너머로 5천 기에 달하는 마수가 2차로 방생되다.

- 1440년 바 30일

군사부 수장인 쿠베트 후작의 장녀 사 아그라 쿠베트 루이자와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의 혼례식이 열리다.

- 1440년 바 39일

앙그리트 남작가를 비롯한 13개 가문의 복권이 이루어지다.

- 1440년 바 41일

세튀스 왕국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과거의 침략 문제를 사과하자 황후 에스메랄다가 사건과 관련된 책임 인사 전원의 처형을 요구하다.

- 1440년 바 56일

전달된 책임 인사의 목록에 포함된 현왕의 이름을 보고 세튀스 왕국이 협상을 거부하다.

- 1440년 바 70일

새로이 포획한 마수 7천 기가 에렘 제국의 북부로 운반되다.

- 1440년 바 100일

세튀스 왕국의 국경 너머로 7천 기에 달하는 마수가 3차로 방생되다.

- 1440년 라 12일

세튀스 왕국에서 아테르몬 후작의 주도하에 내전이 발발하다.

- 1440년 라 78일

에렘 제국의 남부군이 전 반군을 받아들이며 대대적인 병력 증원을 시작하다.

- 1440년 라 90일

에렘 제국의 남부를 중심으로 대로 건설이 시작되며, 공사를 위한 인부가 모집되다.

- 1440년 사 1일

교황 제르민과 황후 에스메랄다의 주도하에 대륙 전역에 신관의 명부 ‘오테르미카(종의 이름)’가 공표되고, 각국에 작성을 위한 협조 공문이 발송되다.

- 1440년 카 3일

라 아그라 테노리엘 페르멘이 기사 서임을 받다.

- 1440년 카 92일

에렘 황실의 비공식 정보 기관 ‘러셀’이 창설되다.

- 1441년 바 32일

라 아그라 테노리엘 페르멘과 사 게만 아마트 멜리안의 혼례식이 열리다.

- 1441년 바 70일

황실 기사단의 개편을 통해 황족 개인 근위대가 기사단에 통합되며, 라 게만 오비텐 휴고 남작이 단장직에, 라 아그라 테노리엘 페르멘이 제1부단장직에, 라 게만 앙뷔 로웨나 남작이 제2부단장직에 취임하다.

- 1441년 라 92일

세튀스 왕국의 아테르몬 후작이 주도했던 내전이 종식되며 포획된 현왕과 펠라체 공작의 신변이 에렘 제국에 인계되다.

- 1441년 라 95일

39년 바의 달에 자행된 국경 침범의 죄를 물어, 관련된 세튀스 전 국왕과 전 펠라체 공작 외 4인이 에렘 제국의 황도에서 처형되다.

- 1441년 사 3일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의 장녀가 탄생하다.

- 1441년 사 40일

바 루그 라그나가 에렘 황실 연구 마법사의 수장으로 임명되다.

- 1441년 카 29일

남부군에게 판매해야 할 수입 곡물을 롤베르만 왕국에 밀매하던 벨베크 백작이 구속되어 수사가 진행되다.

- 1441년 카 62일

황후 에스메랄다가 벨베크 백작이 황실과의 거래를 등한시하고 곡물을 밀매한 행위를 황명 거역으로 보아 작위를 환수하다.

- 1442년 바 80일

라 게만 오비텐 휴고와 사 게만 앙그리트 디아나의 혼례식이 열리다.

- 1442년 사 37일

에렘 제국의 전 디오세네트령에 중앙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 인부를 모집하다.

- 1442년 사 90일

예산을 횡령한 행정부와 재무부 관료 17인이 체포되고 황후 에스메랄다가 횡령의 사실을 발견한 앙그리트 남작에게 백작 위와 함께 전 벨베크령을 하사하다.

- 1442년 카 3일

라 아그라 테노리엘 페르멘의 장남이 탄생하다.

- 1443년 바 7일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의 장남이 탄생하다.

- 1443년 라 97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회임 소식이 공표되다.

- 1443년 카 47일

오테르미카(종의 이름)의 1차 작성이 완료되다.

- 1443년 카 90일

황실 수석 연구 마법사 라그나가 마나를 통한 물품 이동 마도구의 시범작을 개발하다.

- 1444년 바 1일

교황 제르민이 대륙 전역에서 죄를 속죄하며 선행과 봉사를 행하던 신관들에게 성력을 허락하며 2차 오테르미카(종의 이름) 작성이 시작되다.

- 1444년 바 77일

에렘 제국의 황실에서 바 록트 에렘 유세프 황자가 탄생하다.

- 1444년 바 89일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이 교황 제르민의 치료를 받아 왼팔을 되찾다.

- 1444년 카 63일

전선에 있던 황제 아르페시스가 갑작스럽게 황도로 귀환하여 늦은 밤 황후 궁의 사용인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다.

- 1444년 카 64일

황후 궁이 폐쇄되어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다.

- 1444년 카 67일

황후 궁에 다시 사용인들이 들어서며 황제 아르페시스가 전선으로 복귀하다.

- 1445년 바 2일

에렘의 전 디오세네트령이 공식적으로 개국을 선포한 성국의 영토가 되다.

성국에서 대신관을 구성원으로 한 원로회가 창단되고, 원로회를 통한 성국 운영과 파견 신관들의 시범 관리가 시작되다.

- 1445년 바 3일

교황 제르민이 영토를 제공한 에렘 황실에 감사와 함께 전달한 신수에게 황제 아르페시스가 ‘페노르’라는 이름을 내리다.

- 14445년 바 32일

에렘 제국 내에서 관직에 종사하거나 기사 서임을 받는 여성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다.

- 1445년 바 75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주도하에 에렘의 교육 및 관직의 개편이 진행되어 학자와 관료를 구분하는 ‘주브’와 ‘오트’가 루가와 같은 단승 작위로 명시되다.

- 1445년 바 90일

남부의 대로가 완공되고 이어서 서부, 동부, 중부로 공사 영역이 확장되다.

- 1445년 라 2일

최전방 전선 3개국과 성국이 상공 신수를 이용한 1차 마수 지대 정찰을 시도하다.

- 1445년 라 30일

황제 아르페시스가 전선에서 잠시간 물러나 황도로 귀환하며 남부군 총사령관직을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이 대리하다.

- 1445년 라 50일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이 남부로 출정하다.

- 1445년 라 90일

에렘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서 시작된 운하 건설을 위해 인부가 모집되다.

- 1445년 사 2일

최전방 전선 3개국과 성국의 주도하에 시도되었던 1차 마수 지대 정찰대가 전멸하다.

- 1446년 라 10일

최전방 전선 3개국과 성국이 2차 마수 지대 정찰을 시도하다.

- 1446년 라 38일

에렘 제국의 황실 수석 연구 마법사 라그나가 마나를 통한 생명체의 공간 이동 마도구, 게이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다.

- 1446년 사 19일

카 루가 나단이 남작 위에 봉해지며 남부군 마법사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다.

- 1446년 사 59일

2차 마수 지대 정찰대의 생존자가 귀환하여, 정찰 과정에서 확보한 수정 마도구가 최전방 3개국과 성국에 공유되다. 해당 자료를 통해 마수의 전체 규모를 80만으로 추정하다.

- 1446년 카 1일

에렘 제국 내에서 기사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다.

- 1446년 카 38일

성국이 신력 치료에 대한 대가 지불을 자발적 헌금으로 제한하여 각국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다. 또한 수익 창출을 위한 성수 판매에서 자율 헌금제를 폐하고 정가제를 도입하다.

- 1446년 카 82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회임 소식이 공표되다.

- 1446년 카 98일

유캄, 시모체, 도템, 라그라스에 설치된 게이트의 시범 운영이 시작되다.

- 1447년 바 30일

황후 에스메랄다의 유산 소식이 공표되다.

- 1447년 바 32일

황제 아르페시스가 국정을 다시 운영하며, 황후 궁의 경비 병력이 증원되다.

- 1447년 라 14일

3차 마수 지대 정찰을 통해, 대형 마수가 최소 12인 이상의 인간을 마기로 융합해 만든 존재임을 확인하다.

- 1447년 라 20일

다시금 황후 에스메랄다가 국정을 이끌게 되고 황제 아르페시스가 전선으로 복귀하여 옛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로 남진을 준비하다.

- 1447년 라 50일

최전방 3개국의 25만 병력이 옛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남진을 시작하다.

- 1447년 사 72일

옛 졸본 공국과 옛 페르데른 왕국, 옛 실테르 제국의 영토를 확보하여 새로운 전선이 만들어지다.

- 1447년 카 91일

라 아그라 테노리엘 오멘이 옛 페르데른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나, 시신은 찾지 못하다.

- 1447년 카 100일

최전방 3개국의 영토 밖에서 형성된 새로운 전선에 30만에 달하는 3개국 연합군이 주둔하다.

- 1448년 바 2일

에렘 제국의 황실 수석 연구 마법사 라그나가 개발한 마기 감지 마도구가 3국의 남부에 시범 설치되다.

- 1448년 바 7일

에렘 제국에서 기사 양성을 위한 전문 기관 ‘펠그라모(교육자)’가 설립되며, 전문 종합 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다.

- 1448년 라 33일

후방국의 물자 지원 규모가 확대되다.

- 1448년 라 52일

옛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까지 이동한 남부 전선에 대규모 물자 이동이 가능한 게이트가 설치되다.

- 1448년 라 90일

공후백의 직할 영지에 이동 인원을 20명으로 한정한 게이트의 설치가 시작되다.

- 1449년 바 13일

최전방 3개국에 사제의 교육을 위한 신학 전문 교육소 ‘오테르벤(종의 길)’이 설립되다.

- 1449년 바 40일

마수의 사전 감지가 가능해짐에 따라 안전성이 확보되자, 에렘 제국이 남부의 토지에서 농경을 재개하다.

- 1449년 라 59일

에렘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 인공 운하가 완공되어 대형 선박이 오가기 시작하다.

- 1449년 사 33일

에렘 제국의 남부에서 외성 밖의 지역에 주거지를 비롯한 건물이 들어서다.

- 1450년 바 1일

교황 제르민이 대륙 전역에서 죄를 속죄하며 선행과 봉사를 행하던 신관들에게 성력을 허락하며 3차 오테르미카(종의 이름) 작성이 시작되다.

- 1450년 라 1일

성국에서 신수 2만 기와 신관 1만 5천 명을 전선으로 파병하다.

- 1451년 바 10일

에렘 제국에서 기사 전문 양성소 ‘펠그라모(교육자)’가 문무 종합 교육 기관으로 개편되다.

- 1451년 바 12일

롤베르만 왕국을 포함한 도합 4개국에서 사제의 교육을 위한 신학 전문 교육소 ‘오테르벤(종의 길)’이 설립되다.

- 1451년 카 38일

세튀스의 기사 카 루그 엘리나가 인외자로 각성하다.

- 1452년 바 3일

성국에서 오테르미카(종의 이름)의 완본을 선언하며 신관의 위계 개편이 시작되다.

- 1452년 라 90일

에렘 제국의 내부에서 게이트가 상용화되고 타국으로도 기술과 마도구 판매가 이루어지다.

- 1452년 카 37일

성국의 수도에서 건설 중이던 중앙 신전이 완공되다.

- 1453년 바 20일

문무 종합 교육 기관 펠그라모의 수용 인원 증대를 위해 증축 공사가 시작되다.

- 1453년 라 27일

신관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신력이 수치로 측정되며, 정식 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신력을 발현한 이후 수습 신관으로서 3년 이상의 순례 기간이 필요해지다.

- 1453년 라 30일

성국은 ‘오테르미카(종의 이름)’의 완본을 기반으로 신관들의 친분과 인연을 배제한 채 각 지역의 신전에 주둔할 신관의 명단을 작성, 하달하다.

- 1453년 라 50일

성국에서 하달된 파견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신관들의 이동이 시작되다.

- 1454년 바 13일

랑뒤르 왕국을 비롯한 4개국에 사제의 교육을 위한 신학 전문 교육소 ‘오테르벤(종의 길)’이 설립되다.

- 1454년 바 20일

세튀스와 롤베르만이 참전을 선언하며 전선의 병력이 충원되다.

- 1454년 카 9일

신학계에서 신력보다 낮은 수준의 힘이라는 의미로 칭하던 마기의 명칭을 신력과 동등한 수준의 힘을 의미하는 마력으로 정정하다.

- 1455년 바 10일

대륙의 모든 나라에 사제의 교육을 위한 신학 전문 교육소 ‘오테르벤(종의 길)’이 설립되다.

- 1455년 바 17일

성국의 주도로 신학교 오테르벤에 학비 제도와 성국 장학 제도가 도입되다.

- 1455년 바 60일

후방에서 치료를 담당하던 신관들의 전장 투입이 합법화되며, 최소 50인의 보호 인력이 전장에서 신관을 보호하게 되다. 이로 인해 전장에서 치료 시기를 놓쳐 사망하는 이들의 수가 급감하다.

- 1456년 바 95일.

랑뒤르 왕국과 아그나루센 왕국, 데녹 제국을 포함한 3개국이 추가로 참전을 선언하며 전선 병력이 증원되다.

- 1457년 라 25일

제폰 왕국 외 2개국이 병력 지원을 반려하고 물자 지원의 규모를 2배 이상 확대하다.

- 1458년 바 20일

마룡 토벌을 위한 75만 연합군이 남하하다.

- 1458년 라 1일

성국에서 신수 4만 기와 신관 1만여 명을 새로이 파병하다.

- 1459년 바 20일

남진 1년, 사상자의 수가 25만을 넘어가다.

- 1459년 바 80일

토벌 연맹 지원군 20만을 이끈 라 에렘 조프리가 출정하다.

- 1459년 카 72일

옛 멜 왕국 영토의 최남단에서 마룡의 둥지를 발견하다.

- 1460년 바 10일

마룡 둥지 인근의 40만 마수와 난전이 시작되고 바 아그라 테노리엘 아레스 후작이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이동하다.

- 1461년 라 30일

병력 증원 이후 마룡과의 1차 교전이 시작되었으나 토벌에 실패하고 퇴각하다.

- 1461년 라 83일

마룡 토벌을 위한 지원군 15만이 추가로 파병되다.

- 1461년 사 80일

마룡의 선제공격으로 2차 교전이 시작되었으나 황제 아르페시스와 창기사 엘리나가 중상을 입어 토벌에 실패하고, 전군이 퇴각하다.

- 1461년 카 29일

3차 교전에서 황제 아르페시스가 마룡의 목을 베어 내는 데 성공하나 오른팔을 잃고, 창기사 엘리나 역시 오른팔과 다리를 잃는다.

또한, 해당 전투에서 라 에렘 조프리가 전사하다.

당일 밤 10시 마룡의 심장을 꺼내 완전한 침묵을 확인하자 전장에서 살아남은 신수 1만 4천여 기가 동일, 동시에 빛으로 산화하여 영면을 취하다.

- 1461년 카 30일

대륙 전역에 공식적으로 마룡의 토벌 소식이 공표되다.

- 1461년 카 48일

황제 아르페시스와 창기사 엘리나가 교황 제르민의 치료를 받아 부상을 회복하다.

- 1461년 카 64일

재정비를 마친 연합군이 잔당 마수의 토벌을 시작하다.

- 1462년 바 8일

에렘 황실은 마지막 토벌전에서 도주하려던 마룡의 날개를 잘라 내고서 전사한 52인의 기사와 조프리의 국장을 치르고,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마룡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를 세우다.

- 1462년 바 30일

잔여 마수에게서 번식 능력이 사라졌음을 확인하다.

- 1462년 바 77일

성년을 맞이한 황자 유세프의 성인식에서 황태자 책봉이 공표되다.

- 1463년 라 30일

개화의 궁에서 황자 유세프의 황태자 책봉식이 열리다.

- 1464년 바 55일

마수 잔당 토벌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어 참전했던 110만 병력 중 생존한 32만이 각국으로 귀환하다.

- 1467년 카 24일

에렘 제국의 황성에서 황태자 유세프의 약혼 축하연이 개최되다.

- 1469년 바 43일

에렘의 황태자 유세프가 랑그루발 백작가의 장녀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여 국혼이 열리다.

- 1472년 라 10일

황태자 유세프의 장녀 베아트리체가 탄생하다.

- 1473년 바 1일

황제 아르페시스가 황태자 유세프에게 양위의 뜻을 표명하며, 국정 이양이 시작되다.

- 1474년 바 27일

황태자 유세프의 장남 로그세이가 탄생하다.

- 1475년 바 82일

황태자 유세프가 31세의 나이로 에렘의 16대 황제로 즉위하다. 선황 아르페시스와 태후 에스메랄다가 일선에서 물러나 칩거하다.

- 1485년 카 10일

교황 제르민이 52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 1491년 라 59일

에렘 제국의 15대 황후 에스메랄다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신수 루기스가 영면을 취하다.

- 1499년 라 59일

에렘 제국의 15대 황제 아르페시스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구원자가 흑화했다』 마침

EPILOGUE

굉음과 함께 땅을 뒤흔드는 진동이 이어졌다. 그 모든 것이 허공에서 떨어진 거구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굳이 알려 준다. 귀가 먹먹해진 굉음이 끝나기도 전에 대륙에 비극을 가져왔던 재앙의 목을 잘라 낸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사체를 치워라!’

검은 피를 뒤집어쓴 사내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것을 듣고 사색이 된 이들이 재앙의 사체에 갈고리와 사슬을 걸었다. 사내가 그 작업에 직접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고귀한 손을 보태자 이윽고, 짙은 암흑의 비늘을 가진 재앙의 사체가 움직였다.

재앙의 사체가 들리자마자 그 아래의 틈으로 기어들어 간 사내는 팔을 잃고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폐하!’

‘폐하, 지혈부터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신하들의 부름이 들리지 않았다.

‘빨리 넘겨라! 어서 넘겨!’

아직 재앙의 그림자가 서려 어둡기만 한 곳에서 익숙한 펜던트를 발견했으니까. 그가 아들의 성년식에 선물로 주었던 물건은 핏물과 사람의 고기에 덮여 형체조차 완벽하지 않았다.

‘아…….’

나날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마음을 주었고, 어느새 사랑까지 품었으니 섞인 피가 흐리다 하여 아들이 아닐 리 없다.

황후 궁의 복도를 뛰어오던 아이가 그의 다리에 부딪히는 바람에 넘어지던 것을 잡아 주며 처음 만났다. 그날 어색하게 내민 그의 손을 잡아 준 건 작디작은 아이였다. 함께 그의 배필에게 향하던 순간에 얼마나 복잡했는지 모른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제 아내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는 모습에 치졸하게 질투도 해 보았다. 아직 포크질이 서툰 아이에게 밥을 먹여 주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 가고, 자장가를 불러 주며 쌓았던 시간이 지금의 순간에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리 따라오지 말라 했거늘, 위험한 사지에 오지 말라 그리 화를 냈는데 기어코 함께하겠다고 따라와서는 잔인하게 그를 떠났다.

사체가 완전히 넘어가며 그림자가 사라지자 짓뭉개 진 아들의 시신을 부여안은 사내가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1461년 카 29일, 3차 토벌전에서 도주를 시도하던 마룡 위에 올라타 날개의 피막을 잘라 낸 라 에렘 조프리가 전사한 날이었다.

그날 그와 함께 갈고리로 겨우 걸쳐진 사슬을 타고 마룡의 몸에 올라타 피막을 잘라 낸 52인의 기사들을 위해 이듬해 봄, 에렘 황실은 국장을 주관하여 망자들을 떠나보냈다.

* * *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지나도 죽음으로 생겨난 상실감은 떠나가지를 않는다. 그렇기에 아르페시스는 조프리가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그보다 훨씬 전에 떠난 페드로의 죽음에도 눈물을 보이는데 어련할까.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을 닦아 낸 아르페시스가 꿈에서 자신을 찾아온 아들을 떠올렸다.

“웃기는…….”

“응?”

그가 따듯한 봄의 햇살 속에서 낮잠에 빠져든 동안 곁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아니… 녀석이 꿈에 나와서.”

잠기운이 남은 눈을 매만진 아르페시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마룡 위에 서 있던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에스메랄다가 책을 덮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응시했다.

“악동처럼 웃더군.”

마치 ‘저 잘했죠?’ 하고 묻는 것처럼, 자라는 동안 평생 보여 준 미소와 함께 사라져 마룡의 사체에 짓눌렸다. 갑자기 추락하는 놈의 목을 벤 후에야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길고 짧던지.

베지 말았어야 했나, 하고 후회한 그 순간에도 아르페시스는 최선을 알고 있었다. 마룡이 추락하던 당시 땅에 창궐한 마기 때문에 인근에 있던 수백 명이 죽은 상태였다.

그때, 그가 마룡의 목을 베지 않았더라도 놈의 몸 위에서 마기에 뒤덮였던 아이는 죽었을 것이다. 그날, 그 순간에는 틈을 놓치지 않고 베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들이 앉아 있는 티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닿아 있었다. 그곳에는 중앙 궁과 황후 궁을 비우고 다른 내궁으로 물러난 그들의 정원에서 꽃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시간이 쌓이고 흐름에 따라 그들의 곁으로 와 준 손주들이었다.

동생에게 매일 괴롭힘을 당해 울음을 그칠 날이 없는 손녀와 온 황성을 뛰어다니며 사고를 치기 바쁜 손자는 참, 예뻤다.

“그 녀석도 저만할 때가 있었지…….”

“저보다 작을 때도 있었는걸.”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에스메랄다가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녀석이 많이 보고 싶네…….”

닦아 냈음에도 다시 흐르는 눈물을 그녀가 매만져 주었다.

“그대의 부친은, 이 지독한 것을 대체 어찌 버텼나 모르겠다.”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해…….”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기댄 채 소리 없이 울고 있노라니 아이들이 그것을 본 모양이다.

“할부지, 울디 마요!”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가지고 놀던 꽃을 내던진 아이들이 어느새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눈물과 함께 울먹이는 아이들을 본 아르페시스가 황급히 눈물을 거두었다.

“울기는, 하품을 한 것이다. 할비보다 건강한 사람이 있으려고.”

그래도 딸이 최고라고, 이제 여덟 살이 된 손녀부터 무릎에 앉히고 본 그가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때는 아레스가 하도 딸 자랑을 해 대는 통에 부러워서는 에스메랄다와 둘째를 가지고자 했었다. 유세프가 태어나던 날 분명 자식을 더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것을 무르면서까지 딸이 너무 가지고 싶었다.

로젤리나가 있었지만 그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것도, 옹알이를 하는 것도 모두 봐 주지 못해서인지 욕심이 조금 났었지. 그마저도 에스메랄다가 잘못될 뻔한 이후로는 포기했지만. 그래도 아쉬운지라 손자보다는 손녀에게 손이 더 많이 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제 세 살이 된 손자 녀석이 에스메랄다의 무릎 위로 올라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아르페시스는 당연하다는 손길로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다 제 무릎으로 끌고 왔다.

“왜 그리로 가, 할미 힘들게.”

“할모니가 더 폭신폭신해요! 이거 놔아!”

기껏 무릎을 내어 줬더니 볼을 부루퉁하게 불리기나 하고, 아르페시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품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낮잠을 원할 때까지 정신없이 놀아 준 후에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제 부모가 바쁘다고 그들의 내궁에 눌러살다시피 하며 노는 손주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한참을 뛰어다닌 후 낮잠에 든 아이들의 가슴을 토닥여 주던 아르페시스는 갑자기 벌컥 열린 문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연 이는 창백한 안색 위로 검은 피로 덩어리를 덕지덕지 달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핏줄이 참 무섭다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생김새까지 전부 그를 빼닮은 사내는 그와 에스메랄다의 자식 중 한 명인 유세프였다. 닮으려면 에스메랄다를 닮으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300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곁으로 와 준 녀석은 그를 너무 많이 닮았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부자는 곧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같은 사람을 찾았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아버지나 뵈러 갈까?”

“그러지 뭐.”

한날한시에 같은 사람을 찾아든 그들 중 선택을 받은 건 유세프가 아니라 아르페시스였다. 잠든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있던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가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니! 제발, 모후 폐하! 저 좀……!”

덕분에 홀로 남겨질 위기에 처한 유세프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지만 두 사람은 이미 황족의 직계만을 묻을 수 있는 무덤가에 도착한 후였다.

처음 몇 년은 여전히 황제, 유세프가 태어난 해부터 또 몇 년은 선황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자식을 키워 보며 부정을 배웠기 때문일지, 아니면 젊은 혈기로는 인정할 수 없었던 유년기의 설움을 털어 냈기 때문일지, 스스로도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부를 뿐이다.

“에디.”

무덤의 입구에서 선황의 묘비까지 걸어가던 중 아르페시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협박받았던 것일까?”

한 발, 두 발, 부드러운 걸음을 내디딘 아르페시스가 건넨 질문에 에스메랄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기사단과 치안대가 중무장 상태로 대로를 활보했을 테니까.”

사라진 시간에서 황도의 백성들은 마녀를 추종하는 불온 세력이라는 명분으로 치안대에 붙잡혀 간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어서 그들이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나오는 것도 보았겠지.

“그들에겐 협박이지.”

지금의 시간에서 아르페시스가 패륜을 명분으로 내걸고 내전을 일으켰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아르페시스가 정의라는 인식이 에스메랄다에 의해 계속 퍼졌고, 그가 세운 공훈들이 선황에 의해 인정된 상태였다. 백성들이 공포에 맞서 버티게 만들어 줄 기반이 아주 강력했다는 의미다.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힘을 가진 자가 재채기만 해도 몸을 움츠리며 겁을 먹게 된다. 아마, 그날의 그 끔찍한 악의는 그들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자식이건, 재물이건, 혹은 가족과 삶 그 어떤 것이든. 힘없는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뱉은 절규였겠지. 그때는 에스메랄다만 죽으면 그 공포가 끝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사라진 시간에서 그녀가 쌓아 온 기반은, 지금의 시간에서 아르페시스가 쌓은 것보다 잔잔했기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으리라. 그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아직 용서를 입에 담지 못했다. 그래서 일에 손을 보태는 대신 칩거하기를 택하지 않았나.

“그대는 용서했는가?”

“글쎄…….”

그의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함께 걷던 에스메랄다는 쓰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모든 것을 이해함에도 용서는 여전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불쌍하고 약한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또한 그들이 마냥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여전히 용서를 논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똑같을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쓰게 웃는 에스메랄다를 따라 웃으며 친부의 묘비 앞에 섰다.

천천히 가자.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만약 끝에 도착해서도 지금과 달라지는 게 없다면, 그냥 영원히 그렇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 *

독단으로 결정해 버린 현신 이후, 천계로 돌아온 미카엘은 한동안 혼수상태였다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천계 최고의 전사라는 이명에 걸맞게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안색이 파리하고 몸과 날개가 후들거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린 게 어디인가. 미카엘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자신의 심판장으로 향했다. 라파엘이 노려보는 시선이 너무 매서워서 밀린 심판부터 해결할 참이었다.

그는 심판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그가 만들어 준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영혼이 무려 셋이다. 전생에서 각기 테노리엘 페드로, 테노리엘 노만, 에렘 유세프였던 영혼들.

미카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심판대 앞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혼절했다가 깨어난 그는 주신으로부터 진한 뽀뽀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한 가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즉위식 행진에서 세리와 메리를 만난 아르페시스의 영혼에 하얀 반점이 생겨났단다. 오늘은 페드로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야 그의 미련이 채워지겠지.

“그러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

부드러운 손길 아래에서 이어진 설명과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도 페드로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카엘은 그의 또 다른 미련을 알아보고 물었다.

“이리 계속 쓰면 내세에 주어질 보상이 줄어들 게다.”

괜찮다고, 딱 한 번만 더 보고 가겠다고 답하는 영혼의 목소리에 미카엘은 결국 모니터의 화면을 바꿔 주었다.

아레스와 함께 앉아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는 루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곁에는 작은 여아가 함께였다. 그들의 모습을 빤히, 빤히 바라본 후에야 페드로가 그의 품으로 날아왔다. 이제야 떨친 모양이지.

처음 심판대 위에 선 페드로가 그의 얼굴로 달려들었을 땐 정말 당황했다.

“후…….”

그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은 미카엘이 제게로 날아온 페드로를 심판대 위에 올렸다. 그의 고집으로 만들어 낸 유예가 끝났다. 이제는 간다고 인사라도 하는 것인지 페드로가 노만에게 열심히 영체를 흔들었다.

심판을 유예하는 데 일부를 써 버렸음에도 공훈이 남아돌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마룡과의 전쟁에서 생을 다한 페드로는 공훈을 인정받아 내세를 준비하기 위해 떠났다. 지나 버린 생에서 얻은 상처가 모두 나을 만큼 쉬고 나면 그는 다시금 생을 받으리라.

영혼의 휴식은 중요하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영혼에게 생을 부여하면 전생은 물론, 영혼의 상태로 천계에서 머물던 기억까지 가지고 태어날 수 있기에 세상의 균형에 무척이나 위험하다.

제르민이 천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억하는 건 모두 그 때문이다. 너무 급해서, 손이 부족해서, 충분히 쉬지도 못한 영혼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버렸다. 더욱이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주신의 권능 중 일부를 떼어 주기까지 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권능을 쓰는 것이니, 제르민은 신수를 만들 때마다 몸에 무리가 올 터.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

페드로를 보내고 난 후 미카엘은 곧장 남은 두 명도 보내고자 했다. 자식을 잘 둔 덕에 한자리를 차지했던 노만은 순순한 반면 페드로의 변덕으로 끼었던 유세프가 말썽이었다.

미카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다시 손을 뻗어 보았지만 싫다는 듯이 쏙쏙 빠져나갔다. 미카엘은 계속 놔주는 대신 조금은 엄한 손으로 그를 움켜쥐었다.

“페드로가 네 유예의 대가를 지불했기에 봐준 게다. 녀석이 떠났으니 더는 안 돼.”

억지로 붙들어 올리자 유세프는 영체를 눈물처럼 뚝뚝 흘리며 미련을 토해 냈다. 차가운 외관과 달리 정이 많은 미카엘은 결국 눈물 앞에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유세프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며 물었다.

“너는 이렇게 계속 미루면 형벌이 더 무거워질 게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심판을 연기한다는 것은 죄를 회피하려는 것과 같이 보기에 벌이 더 무거워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공훈을 가득 세운 페드로가 그의 대가를 대신 내어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스스로의 이기를 위해 주신의 적을 방조하고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은 유세프의 형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유세프가 감내하겠노라 매달리자 미카엘은 결국 그를 다시 모니터 앞에 놔 주었다.

이렇게 계속 예외를 만들면 안 되는데, 다사다난했던 아르셀에서 돌아온 영혼에겐 차마 매정하게 굴 수가 없다.

유세프의 심판은 노만을 심판하고도 몇 년이 훌쩍 지나서야,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온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랜 지옥의 형벌을 선고받은 유세프는 아주 행복한 빛과 함께 심판대를 떠났다. 지은 죄나 영혼에 생긴 검은 얼룩이 사라질 때까지 지옥의 형벌을 채우면 그도 다시금, 내세를 준비하게 되겠지.

유세프를 보낸 이후 미카엘은 아르셀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심판장으로 오기 전 보았던 주신의 반응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아직은 흰색과 검은색이 얼룩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는 아직 여생이 존재하니 기회 또한 있으리라.

유세프가 떠난 곳에 남은 모니터를 가만히 지켜보던 미카엘이 설핏 웃었다. 주신도 미래와 앞날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지만, 에스메랄다의 악행이 만들어 낸 과거가 아르페시스의 영혼에 희망을 놓아 줄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나. 만약 그 과거가 없었다면, 아르페시스가 그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희망이 가능했을까?

“또 모르지…….”

다른 어딘가에서 또 무엇이 다가와 아르페시스에게 닿았을지도 모르고,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 주니, 따라 보내기를 잘한 모양이지.”

미카엘은 몇십 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본래는 구원자를 내려보낼 계획이 없었다. 유세프가 엉뚱한 짓을 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같은 차원에서 태어나 서로를 찾았고, 바라보고, 또한 잡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마.”

생을 모두 누린 채 돌아와 만날 때까지, 부디 두 사람의 삶에 그와 주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미카엘은 잔잔한 미소를 품은 채 모니터를 치웠다. 일을 할 시간이다.

“이제 나의 심판대 위에 오르라.”

그의 말이 끝나자 심판대 위에 새로운 영혼이 나타났다. 생을 마친 영혼은 모든 과거를 심판받게 되니,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리라.

EPILOGUE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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