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43화 (43/45)

제41장

다시 한번

내전이 끝나고 이어진 전후 처리는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일의 대부분이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황도는 전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분주한 와중에도 본래 남부군에게 전달되어야 했을 물자가 이동을 시작했다. 봄에 받은 물자를 아껴 여름을 시작한 그들에게 전달될 물자는 차후 부족한 부분을 메워 줄 예정이다.

당장 남부군의 급한 불을 끈 이후 북부와 남부에서 진행 중인 반군의 행보에 제재가 가해졌다. 아르페시스의 사자가 양쪽의 전쟁터로 향했고, 황제의 인장이 고스란히 찍힌 명령서를 중앙군에게, 협의 제안서를 반군과 남부 영주들에게 전달했다.

그곳에 기록된 이름은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 현재 즉위 준비를 하고 있는 에렘의 15대 황제의 이름이었다. 누가 내전의 승자인지 확실하게 보여 주는 그 종이 덕분에 북부에서의 전쟁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페라노스의 패륜 증거가 쏟아지며 귀족들의 참관을 허락하는 공개 재판이 준비되고 있다. 동시에 내전 당시 백성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물자를 수탈하는 데 관여한 귀족들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본디 국정 회의에서 오가는 모든 말은 기록에 남는다. 그 기록은 후에 궁정 기록으로 편찬되고 법안 발언자, 정책 건의자의 확인 작업에 사용되기도 한다.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에렘의 황좌는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황태자는 국정을 대리 운영했을 뿐, 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쪽과 남쪽에서 자국민들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그는 성대한 즉위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지.

그가 즉위를 미룬 이유는 타국의 사절을 초청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즉위식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타국에 에렘 황권의 건재함을 보여야 하는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리라.

에스메랄다는 지금 황태자가 그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던 세 명의 이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름뿐이겠는가? 그들의 기본적인 신상 정보와 이력까지 상세하게 기재된 보고서가 그녀의 손에 있는데.

“선황께서 신임하셨다고?”

에렘의 국력과 황권의 건재함을 운운하며 선황의 시신을 묻은 후에도 즉위를 미뤄야 함을 건의했던 이들이다. 황태자는 그 말에 설득되었든, 감화되었든, 일단 그들의 의도에 따라 즉위를 미루고 성대하게 준비하려 했다.

즉위식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아르페시스가 예상을 훨씬 벗어난 규모로 밀고 들어왔으니, 어쩌면 즉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약식으로라도 즉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황태자로 20년이 넘게 자리를 지켰는데, 그는 종내 황제가 되지 못했다.

알음알음 내부에서는 저들끼리 황제라 칭하기는 한 모양이지만, 법이나 행정 절차 속에서 그가 제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결국 죽은 14대 황제 이후 15대 황제의 자리에는 아르페시스의 이름과 초상화가 이어질 것이다. 선황이 그토록 바랐던 대로, 아르페시스는 참 지독한 길의 끝에서 황제의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을 전부 가졌다.

“십여 년 전부터 법무부에서 종사하던 이들은 도합 7명이고, 그중 4명은 독살 수사에 참여했으며 3명은 황성에 남아 즉위를 지연하는 데 손을 썼습니다.”

그녀가 툭 하고 건넨 질문에 답한 것은 헨릭이었다. 아르페시스가 직접 빼어 냈던 수사관 중에 선황의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헨릭은 지하 감옥에서 나온 직후 계속 백작 저에 머물며 에스메랄다에게 선황이 남긴 것들을 전해 주고 있었다. 워낙 많다 보니 아직도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찌나 치밀하고 꼼꼼한지, 에스메랄다는 내막을 알아 가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황이 진심을 담아 대응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볼 정도로 깊고 은밀한 곳에 숨어 언제 도래할지도 모르는 때를 기다리던 패가 많았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선황의 뜻이 페라노스가 아니라 아르페시스에게 있음을 아는 숨은 패. 각양각색의 관료로 포진하거나 은거 중이었던 이들은 70명을 넘어가고 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모두 하나씩 수를 숨겨 두었기 때문이다. 내막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나, 일부는 아는 자들.

“많군.”

이 상황에서 비밀 유지가 가능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모두 선황 폐하께서 거둬 교육시켰으며, 충성심이 깊은 이들 중에서도 직접 선발하셨습니다.”

못 이겼을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들 모두 선황과의 연관점이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기에 내치는 대신 등용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이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각자가 모두 소속된 곳에서 유능한 성과를 내어 온 자들이다. 인력난을 정말 지긋지긋하게 겪어 온 에스메랄다에게는 매력적인 상황이었다.

무능하다면 모를까, 유능하다면 곁에 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종의 유산이기도 한지라 더더욱 마음이 기울었다. 죽은 선대가 후세에게 남기는 것은 이름과 권력, 재물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르페시스를 위해 선황이 갈고닦아 남겨 준 사람들이다.

당장은 곁에 두어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지켜보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손을 쓰자. 시간을 내서 한번 만나 보아야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에스메랄다가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헨릭과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아르페시스에게 들려줄 수 없었기에 그에게 시선을 거둬 달라 청하는 날이 많았다. 확인을 위해 아스터를 데리고 있는 시간도 늘어났고.

에스메랄다는 이미 아스터를 통해 어떻게 아르페시스의 감시 여부를 판단하는지 전부 전해 들었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그와는 침실에서 만나도 서로 입을 꾹 다물고 잠만 자는 상태가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이것을 말해 주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아 눈치를 보고,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못한 채 끙끙 앓았다.

“지금은 이게 급한 게 아니지…….”

현재 에렘 내부에서는 연일 다양한 재판이 열리는 중이다. 그중에는 군법 재판도 있었다. 내전이 끝난 지 40여 일, 중앙군은 황좌의 주인이 바뀐 후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다.

전쟁은 인간을 갉아먹고, 미치게 만든다. 내전 당시 피에 흥분해 백성을 겁간한 병사들도 있고,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약탈을 감행한 이들도 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행동에 가담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모두 처벌 중이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중앙군이 반기를 들고 일어날 뻔했다.

물론 직접 북부로 가서 황명에 저항하는 중앙군을 모조리 쓸어 버리고 돌아온 아르페시스 덕분에 그 불길은 피어 보지도 못하고 꺼졌다. 이후로는 군 내부적인 조사와 감찰, 그리고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참 우스운 것은 그것을 진행하는 이들이 황실 기사단이라는 것이다. 중앙군의 지휘권을 가진 상위 조직. 오로지 황제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무장 세력.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아르페시스의 명령에 복종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황성의 성벽을 무너트린 아르페시스의 무위에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진실을 안다.

내전의 조짐이 본격화되었을 때부터 선황은 황실 기사단의 지도부를 천천히 교체했다. 기사단의 예산을 횡령했거나 에렘 내부에서 유통이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는 등, 각양각색의 죄목으로 단장과 부단장, 부장들이 쫓겨나고 아래에서 많은 이들이 승진을 했다.

오래전부터 선황의 충신이었으나, 아르페시스가 태어난 이후 천천히 일선에서 물러났던 기사의 자제들이었다. 테베르처럼 오로지 아르페시스에게 주기 위해 키워 온 세력. 그것이 보였기 때문에 참담하고 아릿한 마음을 다스리느라 많은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남부의 영주들이 도착했습니다.”

에스메랄다는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온 첸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미 반군이나 남부 영주들과의 협상은 끝난 상황이다. 미리 준비되었던 서류, 미리 준비되었던 조항, 미리 준비되었던 약속.

반군은 남부군에게 전달될 예산과 물자를 확인하는 즉시 남부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현재는 천천히 병력 중 일부가 이동을 시작한 상황이다. 그중 영지를 무단으로 탈주한 백성들로 몸집을 불린 반군 쪽은 병력 보존을 위해 내부적으로 바쁜 상태였다. 백성들이 영주의 사면을 받고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아르페시스의 말 때문이었다.

그들이 영지로 돌아가면 본인들이 이끌 수 있는 병력이 줄어들고 결국, 남부군 내부에서의 영향력이 감소된다. 애초에 케니스를 따르지 않는 세력들에게 백성들을 통해서 무력을 쥐여 준 건, 이런 전후 처리를 통해 전력을 깎아내기 위함도 있었다.

남부군의 문제 자체보단 남부군의 문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권력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되고,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퍼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적당히 쓰고, 적당히 쥐여 주고, 아니다 싶으면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 놔야 한다.

쓸 만큼 썼으니 백성군 사이에 숨어 있던 현상 수배범이나 범죄자들도 처리해야지.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 그들을 잡아 범죄를 저질렀던 영지의 사병에게 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군법 재판 외에, 귀족들의 재판도 계속 진행 중이다. 죄목은 다양했고, 판결과 형벌도 다양했다.

현재까지 페라노스 측에 섰던 중앙 귀족들 중 8할이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그 8할 중 4할은 처형되거나 케락행을 선고받았다. 온건한 승계가 아닌 쟁탈을 통해 주인이 바뀌었으니, 핏물로 인한 정리는 피해 갈 수 없다.

연좌제가 적용될 만한 일, 가령 선황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정황이 나왔다면 가문 단위로 처벌하고, 아니라면 해당자만 처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덕분에 많은 가문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선대의 오판으로 폭삭 내려앉은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면 고생 좀 할 것이다.

그렇게 중앙 귀족들이 갈려 나가며 생긴 빈자리는 아르페시스 측에서 내전을 진행한 지방 귀족에게 넘어가고 있다. 물론 반군에게 돌아간 자리도 몇 있었다. 남부군의 지원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그중에 케니스의 세력에 포함되어 있던 이는 고작 두 명뿐이니, 그를 제외한 반군이 권력에 눈을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과 같다. 아니었다면 케니스의 지지자들처럼 곧장 남부군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어야지.

“벌써 꽤 정리했군.”

“예, 제 예상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이니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에렘 내부에서는 여전히 연일 핏물이 흐르고 있으나 백성들은 그 소식이 들릴 때마다 환호했다. 중앙군이 약탈해 간 지역을 함락한 아르페시스의 군이 오히려 그들을 위해 물자를 풀며 왔기에 그의 승리를 축복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전쟁이란 길다. 단순히 준비 과정과 진행 과정도 길지만, 전후 처리가 포함되면 정말 길다. 일이 무척 많은 건 당연하고.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최근 아르페시스를 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녀도 일을 한다고 바빴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백작이지만 관직에 나선 것이 아니기에 국정 회의에 참여할 수는 없다. 그저 그가 그곳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물어다 나르며 지원을 하고 있는 정도다.

에스메랄다가 거의 백작 저에서 칩거하는 상황임에도 그녀에게 방문 요청을 하거나 서신을 보내는 이들은 상당히 많은 축에 속했다. 아르페시스가 즉위보다 국혼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위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귀족들의 말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절을 받는 행사는 국혼으로도 충분할 터, 하루빨리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니 즉위는 국내 행사로 진행할 것이다.’

그가 워낙 강경했기에 결국 즉위는 국내 행사로 진행하되, 국혼은 성대하게 준비해 타국의 사절단을 초청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황도 내에서, 아니 에렘에서 에스메랄다가 황후 자리에 내정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미래의 권력자에게, 아니 벌써부터 권력자인 에스메랄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도장 한번 찍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에스메랄다는 대부분의 방문 요청과 초대를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모두를 거절하는 건 아니지만.

“백작님, 쿠베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내전이 끝난 후 다시 황도로 올라온 루이자는 거의 매일 백작 저로 놀러 오고 있었다.

“곧 가마.”

소식을 들고 왔던 시녀가 물러가자 에스메랄다는 헨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며칠 전부터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을 잡을 생각이었다.

‘어린 동생이 세 명이라 한다.’

물어서 무얼 하나,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나, 알면 어떻게 하나, 길고 긴 반문이 되돌아오는 그 질문을 오늘에서야 헨릭에게 해 본다.

“전하의…….”

도중에 말꼬리를 흐린 건 질문을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성별을 모르기에 지칭할 단어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고하신 황비 전하의 동생분들은, 어디에 있는지, 어찌 되었는지 아는 게 있는가?”

결국 에스메랄다는 말을 바꿔서 다시 질문을 꺼냈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일까? 아니면 답을 하기에 꺼려지는 것일까? 그녀가 질문을 하면 아주 부드럽게 차근차근 모든 것을 읊던 헨릭이 잠시 답을 미루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감더니, 심호흡을 거친 후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얘기를 꺼내는 것이 그저, 어려웠던 모양이다.

“가장 어리셨던 분은 선황 폐하께서 선황비 전하를 찾지 않으실 무렵에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으며, 다른 두 분은…….”

에스메랄다는 이어지는 말에 두 눈을 꾹 감았다.

“첫째 동생분께서는 선황 폐하께 서임을 받은 후 황실 기사단에서 잠시 근무하셨습니다. 이후 전하의 근위 기사로 임명되셨고, 테노리엘 페드로 경과 헤니아겔 테베르 경이 전사했던 전장에서 함께 전사하셨습니다.”

아직도 아프고 충격적인 게 남아 있을 수 있다니.

그래, 여기도 황제의 수가 들어가 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한 허수로 기사들을 보내고, 그 속에 그를 지켜 줄 진짜를 숨겨 놓았구나.

페드로가 죽었던 전장에서 생환했던 아르페시스의 근위대는 고작 3명이었다. 휴고, 아스터, 데미안. 모두 부상을 입은 아르페시스를 후방으로 데려간 이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 전장에서 죽었다. 이 말은 결국, 황제가 보냈던 호위 기사들이 전장에서 도주하는 대신 남아서 대형 마수를 저지하는 데 손을 보탰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것을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했다. 너무 깊게 박힌 고정관념이 그녀의 눈을 가려 놓아서. 애초에 사라진 시간에서 십여 년 동안 살아남은 건 분명 그의 무위의 덕이 크다. 그는 자신이 전선에 가게 될 운명임을 알게 된 유년기부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동년배는 물론 10여 년 앞서 나가 있는 연장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검술과 마나 운용력을 가진 실력자였다. 그게 전선에서 그를 살려 주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전선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그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선황이 아르페시스를 대신해 죽음으로 내몬 기사들의 목숨도 분명 포함되리라.

에스메랄다가 앓는 소리를 삼키는 동안 헨릭의 설명이 이어졌다.

“둘째 동생분께서는 현재 행정부 관료로 재직 중이십니다. 전해 드린 목록에 그분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 페닐란 유다, 선황이 신분을 정리해 준 이후 페닐란 남작가의 방계로 살고 있다.

“……그런가.”

또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진실이 쌓인다.

“하나 더, 물어볼 것이 있네만.”

“하문하시지요.”

다시금 덤덤하고 고요한 표정을 되찾은 헨릭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홀로 풀지 못했던 의문을 꺼내 보였다.

“선황 폐하의 붕어 당시, 페라노스는 자네와 모종의 거래를 나눈 사람처럼 굴었지.”

아르페시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토대로 하면, 분명 일이 어그러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당시 근위 기사 측에서 제 아들을 납치했습니다.”

역시, 페라노스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구나. 그저 그보다 더한 것을 해 온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현 황실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필두로 한 기사들이 구출에 성공했기에, 현재는 자택에서 건강히 쉬고 있습니다.”

협박과 겁박, 위협 속에서도 저항할 수 있을 만큼의 신뢰. 선황과 그의 충신들 사이에도 그게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군.”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는 그 대화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하지.”

“내일 뵙겠습니다, 백작님.”

인간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루기스가 에스메랄다의 뒤로 따라붙었다.

* * *

반군은 협상 당시 남부군에게 전달될 예산과 물자를 확인하는 즉시 남부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현재는 천천히 병력 중 일부가 이동 중이다. 나머지 일부는 케니스와 함께 아직 북쪽에 남아 있었다. 세튀스와의 문제 때문이다.

케니스는 직접 병력의 일부를 이끌고 디오세네트 공작령으로 이동했고, 현재 추가적으로 집결 중인 세튀스군과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반군과의 협상 조건 중에는 공작령의 탈환을 위한 병력 제공에 대한 조항도 있었다.

반군이 중앙군의 대다수를 붙잡아 둔 덕분에 아르페시스의 내전이 손쉬웠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내부적인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에서 끝이다. 아르페시스가 반군과 관련이 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물밑에서 약간의 밀착 관계가 있을 뿐이다.

짜고 치는 연극이지만 주고받을 것은 확실히 했고, 어차피 에스메랄다가 아니었으면 반군은 그만큼 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르페시스가 중앙군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쓸 수 있다면 써야지.

혼란을 틈타 국경을 침범한 세튀스의 문제는 아직 해결할 때가 아니다. 최선책은 계속 연구 중이었던 라그나에게서 성과가 나와야 시행이 가능하다. 만약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성과가 없으면 정리가 끝난 중앙군이 합류해 치고 올라갈 것이다.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지금은 내부를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명분으로 잠시 미루고 있는 것이 가능하지만, 아르페시스가 즉위한 후에도 계속 미룰 수는 없다. 여름의 끝자락에 그의 즉위가 예정되어 있으니, 그 전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지.

라그나를 생각하니 휴고를 통해 돌아온 말이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을 장식했다. 그녀는 로부오를 통해 휴고에게 서신을 보냈었다. 아르페시스가 글을 엿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러 말이 아닌 서신을 전한 것이다.

그녀가 보낸 것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으니 아르페시스는 그저 침묵으로 그 일을 넘겼다. 휴고로부터 받은 서신에는 황성을 점령했던 그 날 아르페시스가 화난 것처럼 보였던 이유가 적혀 있었다.

‘아가씨는 전하와의 혼인을 싫어하세요.’

나단과 관련된 문제였다. 보는 순간 두통이 일어나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당시 귀족들만 물리고 곁에 호위 기사들은 남겨 놓은 덕분에 휴고는 대화의 전부를 들었다. 나단을 건드릴 만한 명분을 위해서는 목격자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겠지.

아르페시스가 예전과 달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실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분명 단속을 했는데, 부족했던 모양이지. 이유나 방법이 어떻든, 나단이 그를 다시 건드렸다는 건 직접 경고를 건넸던 그녀를 무시하는 행위다.

에스메랄다의 경고를 받은 이상 나단은 이 문제로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그가 주군으로 모시는 에스메랄다의 뜻이었으니까. 더욱이 그런 내부적인 문제를 제하더라도 이건 쉽게 넘어가 줘서는 안 된다. 무려 황제가 될 사내와 혼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날의 대화가 새어 나가 어떤 식으로든 부풀었을 수도 있다.

나단이 그녀의 혼사에 관여하는 것을 두고 그가 숨겨 놓은 연인이라는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와의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말한 것 역시, 어떻게든 그녀를 안 좋게 엮어 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게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져서 그녀의 부정을 암시하기라도 했다면 나단은 에스메랄다를 공격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중요하지 않다. 실수로라도 주군에게 날붙이를 겨누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래도 나단을 다시 단속해야 할 것 같다. 마주칠 때마다 아르페시스를 긁어 놓으니 그게 맞다.

이후에는 그의 시야에 두어 감시할 수 있게 해 주거나, 아예 시야 밖으로 빼내어 치우거나. 라그나가 걸려 있으니 무작정 쳐낼 수는 없고,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야겠다.

에스메랄다는 모든 일이 끝난 후 백작 저에서 쉬고 있는 나단에 대한 것을 곱씹었다. 그에게 손을 쓰겠노라 다짐하자마자 그녀가 등을 밀어 주었던 나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 왜일까?

‘페드로 도련님은…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이유는 빤하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나단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을 쓰겠노라 다짐했음에도, 험한 방법 말고 온건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녀에게는 나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에스메랄다 양!”

갑작스럽고도 익숙한 부름에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생각을 관두고 전방에 멈춰 선 새하얀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뛰어내린 후 눈을 부릅뜬 채로 달려오는 이는 제르민이었다.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할 겸, 신전을 정리할 겸 실테르로 향했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성하를 뵙…….”

“진짜인가요? 진짜예요?!”

마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제르민은 에스메랄다의 치맛자락을 붙든 채 이리저리 흔들었다.

“미카엘께서 오셨다면서요! 정말 만나 뵈신 건가요?”

그래, 지금 에렘에 도는 소문 중에는 이것도 있었다. 미카엘의 현신, 그가 직접 만나러 온 성녀와 그녀의 반려. 모두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엮여 있는 소문이었다.

아르페시스를 찬양하는 말에는 에스메랄다와 연관된 것도 있었다. 성녀가 고른 배필이니 성군이 될 것이라나 뭐라나.

성녀라니. 에스메랄다는 그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 백성들을 향해 조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녀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헌신했을 때는 마녀라 매도하여 돌을 던지더니, 마녀가 되고자 하여 핏물을 짜낸 지금은 성녀라 부르며 찬양하다니. 정말이지, 이리저리 제멋대로 저들이 바라는 것만을 보는 간사함과 우매함에 구역질이 인다.

더 끔찍한 건 백성들을 이토록 경멸하면서도 공존하는 죄책감이다. 참 모순적인 마음이다. 에스메랄다는 미카엘을 만났던 날 이후 계속 홀로 생각해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예, 정말로 뵈었습니다.”

당사자의 확답 앞에서 제르민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어 버렸고, 곧 황금색 눈동자 속에 눈물이 차올랐다. 함께 도착한 오웬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볼 때,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제르민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으허허헝,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어허엉, 그럼 나도 만나 뵈었을 텐데에!”

빽빽 소리를 지르며 통곡하는 모습이 정말, 영락없는 아이였다. 에스메랄다는 당황한 채로 곧장 자세를 낮추었다. 곁에 서 있던 루기스가 제르민의 눈물을 핥아 주며 낑낑거렸다.

두 다리를 늘어트린 채 주저앉은 제르민은 고사리 같은 손을 바닥으로 내리치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만 했다.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말을 꺼냈지만 제르민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매달려 울음을 이어 가는 제르민과 함께 서둘러 백작 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메랄다는 미리 다과를 준비해 두었던 응접실에 도착했다. 시녀에게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가져오라 이르며 제르민을 자리에 앉혀 주자, 그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파에 몸을 묻어 버렸다.

“성하?”

“실테르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무언가 서늘하다 했어! 어이고, 거머리처럼 붙어 있었어야 하는 것인데, 이놈들, 이 망할 신관 놈들, 도움이 안 되는 놈들! 흐어어엉!”

소파 위에서 버둥거리던 제르민의 눈앞에 주먹만 한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가 가지고 온 상자에서 꺼낸 수정 마도구였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손에 쥐자마자 곧장 발동시켰다. 이미 기록된 내용 중 대부분을 지우고 미카엘의 현신이 담긴 부분만 남겨 두었다.

본래는 이렇게 급히 주려던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봐도 미카엘을 뵙지 못함에 억울해하는 모습인지라 이것으로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내민 것이다.

발을 동동 차며 울던 중 그것을 발견한 제르민이 히끅, 히끅 하는 딸꾹질과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그들의 뒤를 잘 따라온 오웬이 제르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인사를 나누겠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코를 훌쩍이는 제르민의 손에 수정 마도구를 고이 쥐여 준 에스메랄다가 안도의 숨을 삼키며 그를 맞이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 지냈습니다. 두 분께선 실테르에서 어찌 지내셨나요? 여정은 잘 마무리되었을까요?”

“백작님의 배려 덕분에 안전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급한 대로 신수들의 힘을 빌려 주요 도시는 전부 정리를 했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다.

“에스메랄다 양…….”

제르민이 백의에 콧물을 닦으며 수정 마도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다시 발동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신관은 마나를 품지 못한다. 마나가 자리를 잡아야 할 심장에 신력이 담겨 있으니까. 억지로 마나 운용법을 새기면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하니, 신관이 되면 마나와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로 날 때부터 신력을 품고 태어난 제르민이 마도구를 발동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에스메랄다는 기록이 끝남과 함께 멈춘 마도구를 다시 발동시켜 주었다. 그렇게 대화를 할라치면 짧은 기록을 다 본 제르민이 다시 마도구를 내미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제르민의 옆자리로 옮겨가 계속 마도구를 발동시켜 주었다. 도중에 마나 고갈이 온지라 시녀에게 마석을 가져오라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르민을 사이에 두고 앉은 오웬과의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끊이지 않고 줄줄이 이어질 수 있었다.

“한데 이것은…….”

그간의 일을 대충 주고받았을 때였다. 여전히 수정구 속을 바라보느라 바쁜 제르민을 대신해 오웬이 물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저 수정 마도구는 황성 진입 도중 투항한 마법사가 손에 꼭 붙들고 있던 것으로, 이리저리 보고가 전달되어 에스메랄다에게까지 올라왔다. 수정 마도구 자체는 본래 황실의 물품이었으니 압수 조치를 취했다. 그 마법사에게 약간의 보상을 제시해서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고.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치부를 남기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대체 왜 기록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 마법사는 이것을 분명 기록했고 지금 여기에 있다. 그가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투항하고 몸에 꼭 지니고 있던 덕에 손상 없는 완전한 상태로 에스메랄다에게 전달되었다.

몇 개의 사본을 만들어 그중 두 개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하나씩 보관하기로 했고, 나머지는 모두 여기 이 자리에 있다. 에스메랄다는 본래 수정 마도구 세 개가 들어 있던 상자를 열며 말했다.

“성하께 드린 것은 사본이지요.”

이어서 그녀가 가리킨 것은 사본이 담긴 것과 달리 하얗게 칠해진 상자였다. 주신의 문장을 새겨 신전의 것임을 명확히 보여 주는 그 상자 속에 든 것이 원본이다.

“이것이 건국 축하 선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어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오웬은 슬쩍 마도구를 훔쳐보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선물이라니요, 이것은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역사상 최초의 현신이 아닙니까? 사실 저도 소문을 들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성하께서 울고불고 떼를 쓰시는데, 이해가 가기는 처음이었지요.”

제르민이 도움을 제공하며 도움을 청할 때 오간 말은 단순히 신수에 대한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신관들의 체계를 정립하고 싶어 했고, 그에 가장 적당한 방법은 점조직의 중심에 위치하는 거점을 형성해 아래를 관리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대신관들이 구역을 나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신관들도 군인처럼 명확한 차출 절차를 거쳐 강제로라도 전선에 보낼 수 있다.

가장 효율적인 게 지도부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 기틀을 나라의 형태로 잡았다. 이름이 없는 성국, 그저 신을 모시는 종들을 위한 나라. 신관들만의 법을 만들고, 신관들만을 보호하기 위해 외교를 하고, 치안과 법의 집행을 위한 무력을 갖추고, 사제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기관도 생각 중이었다.

제르민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관의 명단을 확보하고 가진 신력에 따른 품계를 정확히 측정하는 등, 모든 것을 중앙에서 관리하는 형태로 만들고 싶어 했다. 단순한 조직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크다. 줄었다고는 하나 대륙 전역에 남은 신관은 수만 명이나 되고, 사제들은 그보다 몇 배는 많다.

이 때문에 공국 정도의 영토와 인구를 예상 중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라처럼 만들어 갈 예정이었다. 관리를 담당해야 할 중앙에 일부가 머무르게 되겠지만, 대다수는 신국 밖의 신전에서 생활할 터. 영토는 크지 않아도 된다.

기관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은 헌금 중 일부를 세수처럼 거두어 사용할 계획이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마땅히 법과 행정을 통해 보호하고 관리하는 곳이 존재하게 됨을 의미한다.

처음 만났던 북부에서 이미 오간 얘기였다. 작은 영토 마련에 도움을 주는 등, 건국을 지원해 주면 훗날 신관들의 체제를 정립한 후 에렘에 최우선적으로 신관을 파견하겠다는 밀약.

“킁, 정말 무어라 감사를 전해야 할까요. 너무 감정적으로 추태를 보였네요. 죄송해요…….”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인지 제르민이 발갛게 부어오른 눈매를 문지르며 말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조용히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신관이 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지금껏 신관들이 정립해 온 신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물론,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의학적 지식도 있어야 한다. 신력을 발현하지 못한 사제들이 대부분 의원으로 진로를 트는 것도 이런 과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식을 속에 채우며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 신실하고 정갈한 마음을 품으면 어느 날 신력이 발현되고, 그때부터 사제들은 신관이라 불리는 것이다.

수련과 학습을 반복하는 사제 중에서 실제 신관이 되는 이는 적다. 오래전에는 둘의 하나 정도였으나 지금의 시대에는 열의 하나까지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제르민은 그들이 한곳에 모여 수학하는 체계 또한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을 관리하는 건 중앙에서 하지만, 각 국가에 한 곳씩 교육 기관을 마련하는 방향이다. 그런 부분은 후로 미루더라도,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관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정상적인 나라보다는 신관들의 관습과 특징에 적합한 예외적인 나라가 될 터. 나라를 만드는 것이 뚝딱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3년에서 5년은 공을 들여야 겨우 가시거리까지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 험한 길을 제르민은 자의로 원했다. 다듬어야 한다고, 본인들만의 법이라도 있어야 지금처럼 폐단을 일삼는 못난 종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고작 여섯의 나이에 국가관을 가지고 나라의 체계를 원하는 이는 참 아이 같지 않은데, 손에 쥔 수정 마도구에 마음을 모두 빼앗겨서 웃는 이는 여전히 아이 같다.

에스메랄다는 제르민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중 시선을 돌렸다. 황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제르민처럼 힘겨운 길에 놓인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간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던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저어… 미카엘께서 무어라 하시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심판대를 언급한 것 외에도 더 있는 것 같은데…….”

제르민이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질문을 꺼냈다. 그저 마냥 좋아서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아이 같으면서도 아이 같지 않은 제르민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흐리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걷는 상념 속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이것을 제르민이나 다른 신관들과 의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서두를 열었다.

“당신의 심판대에서 논하는 것이 죄악뿐이라 여기지 말라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페드로의 소식도 조금은 전해 들었고. 에스메랄다는 그날 이후 주신의 품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오라비를 떠올리며 슬픔을 한가득 덜어 냈다. 우는 것보다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는 듯 보이는 두 사람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이 말씀에 대해… 성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의 질문에 제르민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툭 내뱉었다.

“무어, 심판이란 결국 잘잘못을 논하는 것이니, 죄악을 잘못이라 둔다면 잘함을 뜻하는 공훈 역시 존재해야겠지요.”

주신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 남긴 말을 정리해 둔 성서, 그곳에는 미카엘의 심판대가 인간의 생의 과정을 심판한다, 라는 문구가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을 매겨 지옥의 불구덩이로 안내한다는 문구는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만, 공훈을 매겨 보상을 내린다는 문구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그저 어버이의 뜻에 따라 생에 충실하게 임하고, 죄악을 쌓지 않는다면 지옥의 형벌을 피해 간다는 문구가 있을 뿐이다.

교리를 따라 충실하고 어버이를 위한 공훈에 이바지한다면 보상을 준다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지긋지긋한 희망을 품는다. 보상이 없다면 심판이 아닌 죄를 벌한다는 말이 전부일 것이고, 심판이 존재하는 곳에서 형벌을 피한다는 말 역시 없어야 할 테니까.

그러니 그날 미카엘께서 공훈을 세우면 죄를 면해 주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라고. 그 공훈이 오래전 어버이께서 신탁을 통해 전한 그것일 것이라고.

길고 나른한 숨이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통해 새어 나왔다. 면죄부, 그것에 대한 심증이 확신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에스메랄다가 확신 속에서 안도하며 다시 한번 앞날을 직면했다.

그날 제르민과 오웬이 훗날 성국의 국보가 될 선물을 들고 신전으로 돌아갔다. 여드레 후에는 다음을 위한 소식이 에스메랄다에게 도착했다.

「성과 확보, 실험체 수면 상태 진입, 유지 시간 증가를 위해 연구 지속 중.」

라그나가 성과를 냈으니 이제 세튀스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 전에 나단의 문제도 손을 써야 하고.

「황도로 직접 방문하여 보고할 것.」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가 주는 것이 과한 특혜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큰 건에 엮어야, 라그나와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나단을 떼어 내겠지. 지금의 시국에서 그만한 문제, 특히나 나단과 엮을 만한 문제는 많지 않다.

사고를 치게 만들려면 황성에 들여보내 두는 것이 수월할 터. 황실 마법사의 다수가 구속된 지금, 마법사의 부족한 수를 지원해 준다는 명분으로 나단을 움직이는 게 가장 적당하리라. 그녀는 나단 쪽의 일을 계획하면서도 헨릭을 불러 말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면 일선에 복귀해야겠지.”

답은 없었지만 가지런히 모여 있던 두 손이 꾹 말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에스메랄다는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혹여 전하께서 자네가 답할 수 없는 것을 여쭈시거든, 내 지시라고 답하게.”

“예, 백작님.”

첫날 인사 이후 그는 에스메랄다를 백작이라 칭하지만 다시 그날처럼 불리는 날이 올 것이다.

바쁜 날이 이어지는 동안 영지에 있던 아레스까지 황도에 도착했건만, 그녀는 곁이 텅 빈 것만 같은 허전함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페시스에게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선황의 일기에서 본 것처럼 복잡한 상념과 함께 밤이 짙어져 간다.

* * *

백작 저에서 칩거를 깨고 나온 에스메랄다는 응접실로 들어선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쓰다듬으며, 강경한 힘으로 그녀를 품 안으로 잡아끌었다. 겁을 먹은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것이 훤해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 주어야 하는데, 아직 고민의 끝을 보지 못했기에 이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에스메랄다의 손에 깍지를 껴 왔다. 이후에는 무릎 위에 앉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에스메랄다 역시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의 머리카락을 사르륵 쓰다듬어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를 따라 눈을 감은 에스메랄다는 조만간 벌어질 것 같은 사건을 그려 보기로 했다. 페라노스 측에 붙어 있다가 이것저것 다른 귀족들의 죄를 진술해 주고 자리를 보전하거나, 본인의 재물을 지킨 하급 귀족들이 몇 있다.

힘을 가지지 못해 힘을 가진 자들에게 기생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고, 에스메랄다는 이번 일에 그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중앙 귀족들이 해 왔던 악행과 비리를 차근차근 고발하는 것으로 형을 감형받은 이들.

에스메랄다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집행 유예의 판결을 건넨 후 일을 시켰고, 일이 끝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타국으로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약속과 달리 타국으로 나가서 이제 끝났다는 안도를 느낄 무렵 강도로 위장한 로부오들에게 제거될 것이다.

현재 아르페시스를 통해 황실은 정식으로 몇몇 가문에게 도움을 청한 상태다. 마나 구속구의 관리를 도와줄 인력을 내어 달라는 말에 테노리엘이 보낸 마법사는 나단이었다. 그는 다가올 어느 날에 마나 구속구를 풀어 페라노스의 탈주를 도울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직접 고른 사람이 황성에 출퇴근하기 시작한 나단에게 접근해서 감정적인 충동에 흔들리도록 열심히 말을 흘리고 있다. 황자 시절부터 황위에 욕심을 보이던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을 이용했다, 혹은 권력을 위해 에스메랄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정도일까?

굳이 추가를 해 보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아르페시스가 교활한 인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와의 혼인을 바라지 않는다는 자극을 주면서, 페라노스를 풀어 주기만 한다면 모두 제자리로 돌릴 수 있다고 속살거리겠지.

나단은 두 사람의 혼인 문제에 대해서 자신만의 확신에 차 있다. 과거에 황자비를 논하며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겠지.

나단이 충동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여기는 근거는 간단하다. 귀족이 접근한 후 그가 에스메랄다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설임 없이 그 유혹을 떨쳐 낼 수 있었다면, 그녀에게 와서 보고를 했어야지. 페라노스와 관련된 사람이 접근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보고를 했어야 하거늘, 나단은 오지 않았다.

‘페드로 도련님은…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에스메랄다는 속에서 올라오는 한탄을 삼켰다. 중요한 것의 우선순위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중앙에서 오래 살아남을 정도로 화술이 뛰어난 이를 골랐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녀는 자신에게 기대어 있던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며칠 집무실을 좀 써도 될까?”

“……알겠… 며칠?”

습관적으로 답을 하려던 아르페시스가 반문을 던졌다. 이미 나단이 충분히 자극받았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 나단의 감정은 커다랗게 부풀었을 터. 이전 황권이 어떤 통치를 이어 갔는지, 내전 도중에 페라노스가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나단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정보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에게 속았다, 라는 전제가 부풀린 감정에 잡아먹혀 가고 있다. 그는 황위에 오를 아르페시스 앞에서 혼례 얘기를 먼저 꺼냈을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곁에서 계속 자극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에스메랄다를 구해야 한다거나, 혹은 에스메랄다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한순간 완벽하게 잡아먹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 한 번의 순간에 튀어 오를 충동이 나단을 움직여 주겠지. 정확히 언제라고 날짜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리 오래 남지는 않았으리라. 나단은 그런 식의 부정적인 감정과 충동에 저항하는 방법을 모른다.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아르페시스를 통해 지하 감옥의 경비를 서는 이들에게도 손을 써 두었다.

마나 구속구를 떨쳐 낸 후 철창 속에서 나오면 페라노스는 생각보다 운신이 자유로워진다. 선황이 남긴 황성의 비밀 통로 14개 중에서 궁을 증축하거나 수리하는 동안 폐쇄된 것이 3개다. 결국 현재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 11개. 그 모든 것을 페라노스가 알고 있다. 그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직접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온 이후 외부로 나서지 않고 들어설 수 있는 입구는 하나, 그곳을 통해 갈 수 있는 출구는 셋. 각기 내궁, 황성 외부, 그리고 중앙 궁의 집무실로 이어진다. 에스메랄다는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한 그 날 집무실에서 페라노스를 만날 생각이었다.

‘란은 오만하다.’

그는 절대 황성 외부로 탈출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집무실로 온다. 일이 터지기 전에 에스메랄다가 중앙 궁에 있다는 소문이 날 테니까. 지하 감옥에 있는 간수들의 입을 타고 흘러, 흘러 도착하게 될 그 소문이 페라노스를 에스메랄다에게로 인도해 줄 것이다.

“며칠이라는 건…….”

“중앙 궁에 며칠 머물고 싶어.”

그녀가 중앙 궁에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당장 페라노스가 쓸 수 있는 비밀 통로 중에서 중앙 궁으로 이어지는 건 하나뿐이다. 그녀가 집무실에 있으면, 중앙 궁을 목표로 올 페라노스를 곧장 만날 수 있다.

혼인 전에 조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내와의 염문설이지, 아르페시스와의 염문설이 아니다. 그가 허락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행보다.

에스메랄다가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하니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인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그는 에스메랄다가 청하는 것을 반려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해서 최근 들어 그녀가 부탁하는 것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모두 들어주었는데, 또 위험한 일을 자청하고 있다.

“……꼭 만나야 하나?”

“꼭 그럴 필요는 없지.”

그저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잠시나마, 잠깐이나마, 그저 그럴 뿐이다.

“……안 된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영 꺼림칙한지 아르페시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되물었고, 에스메랄다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나단이 사고를 치게 만들려는 것이다. 페라노스와의 대면은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을 하는 것인지, 망설이는 것인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르페시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마나를 거두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으면 한다.”

“……알았어.”

어차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만나려는 게 아니다. 아르페시스가 보고 듣는다고 하여 문제 될 건 없다.

그날부터 에스메랄다가 타고 온 테노리엘의 마차가 며칠 내내, 중앙 궁에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 *

선황은 참 많은 것에 손을 대었고, 많은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는 아르페시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페라노스를 망쳐 놓는 일이었다. 분명 배운 지식과 가진 능력이 있음에도 조금 더 손쉽게 상대할 수 있도록, 너무 큰 장벽이 되지 못하도록.

결과적으로 페라노스는 우수한 교육을 받고, 지배자로서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선황처럼은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나락으로 이끈 오만을 페라노스에게 심어 주고, 아르페시스에게서는 빼앗았다. 반면 아르페시스에게 심은 겸손은 페라노스에게서 빼앗았다.

오만하고, 방자하며, 교만한 사람의 심리는 겸손한 이와 상당히 다른 국면을 보인다. 겸손을 가진 자는 실패 앞에서 ‘이것 때문에 실패했구나.’라며 잘못과 실수를 인정한다.

하지만 오만한 사람들은 실패 앞에서 ‘이것만 없었으면 성공했을 텐데.’라며 잘못과 실수를 부정한다. 두 분류는 애초에 생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 결과가 지금 에스메랄다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다.

몇십 일이 넘도록 지하 감옥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음식만을 제공받은 페라노스. 그는 나단이 풀어 준 게 분명한 마나 구속구를 떨치고 철창 속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역시나, 간수들이 떠든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왔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이 우스운 건지, 참담한 건지, 정확히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하!”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평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장식을 위한 실력은 아니었나 보다. 황태자는 이미 에스메랄다가 확인한 공간을 통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고, 처음부터 그녀가 앉아 있는 장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쯤 그의 머릿속엔 자신이 대단했기에 탈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차 있지 않을까?

그 과정 전반에 에스메랄다가 관여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내가 대단해서, 내가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그래서 성공했다고…….

“하아…….”

차마 삼키지 못한 한숨이 흘러나오자 황태자가 이죽거리는 미소와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자리가 탐이 났더냐?”

왜, 어떻게, 본인이 나타날 그 시간에 정확히 에스메랄다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보지 않는다.

정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와 달리 선황이 무언가를 더 해 놓은 걸까? 사라진 시간 속에서의 선황이 어디까지 손을 대어 놓았는지 모르니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런, 이걸 어찌하나. 홀로 축배를 들다 나를 만났구나.”

참 이상하다. 본인이 황제가 될 것이라 믿으며 자랐으면서, 선황의 사후 내부적으로는 황제라 불렸으면서, 그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란은 오만하다. 제 인생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은 오로지 짐뿐이라고 생각하지.’

아마도, 죽음을 통해서도 넘을 수 없는 벽, 평생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던 선황에 대한 공포가 무의식에 깔려 있는 건 아닐까?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말이다.

에스메랄다가 홀로 생각을 해 보는 사이 페라노스가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잡았다. 오늘 지하 감옥의 경비를 담당하던 황실 기사들 중 한 명에게서 빼앗은 검이리라.

이미 그들에게는 은밀한 명령이 전달된 상태다. 일부는 방만하게 자리를 비우고, 남은 일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말고 패배해 주라고. 탈주 경종조차 울리지 말라고. 어차피 오늘 페라노스의 탈출은 공식화되지 못할 테니 징계의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네가 비명을 지르는 게 빠를까,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빠를까?”

에스메랄다는 뚜벅뚜벅 걸어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오는 페라노스를 눈에 담았다.

“궁금하면, 해 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페라노스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날뛰다니. 만약 지금 몰래 집무실에 들어온 것이 에스메랄다였다면 상황이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끝나고 가망조차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구구절절, 쓸모없는 말을 꺼내지 않았으리라. 그는 눈앞에 있는 먹잇감이 약자라는 사실에 도취되기보다, 당장 제거해 버리겠다는 일념에 취해 먼저 달려들어야 한다.

목표물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와 다시 붙잡히든 말든, 달려들어 난도질해 죽이는 것부터, 그게 먼저다. 그렇게 목숨을 빼앗는 게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복수일 테니까. 지금 이 시점까지 와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선택을 왜 한단 말인가? 상대편에게 겁을 주어서 어디다 쓴다고.

페라노스가 에스메랄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일견 느긋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이 순간까지도 그에게는 희망이 있는 걸까? 정말로 스스로가 판을 뒤엎을 수 있다고 믿나? 평생을 가도 눈앞의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에스메랄다에게 닿지도 못한 검이 푸른 물결에게 붙잡혔다.

“컥……!”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처럼 아르페시스가 페라노스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에서 떨어진 검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제 되었다. 무엇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마주했으니 된 것이겠지.

“다시 감옥에 넣어 줘.”

페라노스의 목이 부러지기 전에 에스메랄다가 먼저 말했고, 아르페시스는 군말 없이 따랐다. 페라노스를 감옥에 집어넣은 후 돌아온 그는 다시 구속구를 채워 놨다고, 짧게 말했다. 너무 시끄럽기에 혀와 성대를 잘랐다는 말과 함께.

“어떻게 할까?”

“……무엇을?”

“나단.”

줄곧 그녀의 시선을 피하던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대의 곁에 없다면 어떻게든.”

“놀리기엔 아까운 전력이니 너만 괜찮다면 남부군으로 보낼게. 꺼려진다면 영지로 보내고.”

케니스와 멋대로 약속을 해 버린 탓에 그는 곧 남부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불편하다면 나단을 남부로 보낼 수는 없지 않나.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화가 올라오는지라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삼켰다. 기껏 황위를 가졌는데 그는 다시 남부로 간다. 그와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어서 정말 억울해 죽겠는데, 그걸 따질 수는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모호한 태도로 그의 선택을 부추겼으니까.

“……남부로.”

차라리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 게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손님을 위한 객실에 머물고 있는 그녀가 잠든 후에야 다시 곁으로 와 주겠지.

그날로부터 이틀 후, 공식적으로 페라노스의 재판이 열렸다. 아르페시스의 즉위 전에 거행된 마지막 재판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가 선황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물론, 그간의 악행들에 대해서도 줄줄이 증거와 증언이 쏟아졌다.

남부군 전사자의 유가족을 건드렸던 죄도, 남부의 신관들을 협박했던 죄도. 그것을 전부 고발한 건 슈페르트였다. 죄악에 가담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발을 통해 죄인의 처벌에 기여한 것을 감안해 케락에서의 보름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본인이 동의한 형벌이었다.

굶어 죽지 않고, 먹혀 죽지 않는다면 형을 끝내고 다시 태양 아래에 서게 되겠지. 슈페르트와 달리 사전 고발로 감형을 받지 못한 페라노스의 근위 기사 전원은 죄에 가담한 벌을 물어 교수형, 페라노스 당사자는 단두형을 선고받았다.

이튿날, 황도 광장에 마지막 핏물을 위한 처형대가 세워졌다.

* * *

본래는 대역을 세우고 당사자는 뒤로 빼돌리고자 했다. 페라노스를 뜯어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마음을 바꿨다. 페라노스는 예정대로 오늘의 처형대 위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를 원하는 사냥꾼들에게는 그의 시체가 선물이 되리라.

황제가 교묘하게 유도를 하여 페라노스를 키웠다고 한들, 그의 선택은 모두 본인이 한 것이다. 그러니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의 죄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르페시스를 위해 바쳐진 산 제물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몇 명의 죄인들이 교수형을 통해 죽음에게 인도되었고, 그걸 보며 흥분한 백성들은 계속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었다. 오늘의 처형을 보기 위해 몰려든 백성들이 소란스러운 저주를 퍼부으며 환호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처형대 옆에 마련된 객석의 한구석에서 그런 그들을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반복된 처형의 끝에서 마침내 페라노스의 차례가 왔다. 양손에 마나 구속구를 차고, 발에는 사슬을 감은 채 기사들의 손길에 끌려 제위가 아닌 처형대에 오르는 페라노스를 향해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언젠가 그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정숙하라.”

그녀의 부탁이라면 모두 들어주는 아르페시스가 시끄럽게 저주를 쏟아붓는 백성들에게 일갈했다. 돌이나 이물질을 던지는 이들도, 멋대로 입을 열어 고요함을 방해하는 이들도, 모두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그걸 본 백성들은 점차 고함 소리를 죽여 웅성거렸고, 이어 침묵을 선택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타의에 의해 처형대 위로 올라간 페라노스의 억눌린 괴성뿐이었다. 혀도, 성대도 사라진 지 오래기에 짐승의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으나, 기사들은 그의 몸을 단두대에 묶는 데 성공했다.

“품어 돌보아야 할 백성은 물론, 공경하여 모여야 할 부모까지 살해한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라.”

사방에 내려앉은 적막을 파고든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와 함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에스메랄다는 처형대 위에서 초라하게 구르는 페라노스의 머리를 뚫어져라 응시했고, 그런 그녀를 아르페시스가 지켜보았다.

대륙력 1439년 라 80일, 에렘의 황태자였던 카 록트 에렘 페라노스는 그렇게 죽었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짙은 전율이 일었으나 참 모순적이게도 기쁘지는 않았다.

* * *

아브람 백작, 에반스, 시리스, 테란, 그 외에 선황과 페라노스에게 원한이 가득한 사람들이 황성의 지하 감옥에 모였다.

오늘은 에스메랄다가 과거의 순간에 그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쥐여 주는 날이다. 몇 시간 전에 머리가 떨어져 나간 페라노스의 시신도, 이미 땅에 묻혀 있던 선황의 시신도, 오늘의 보상을 위해 황성의 지하 감옥으로 옮겨 왔다.

“살아 있는 것을 주지 못해 미안하군.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회포를 풀게.”

죽은 사람의 눈으로 시체를 난자한 사람도 있었고, 이글거리는 원망을 아직까지 품은 채 악을 내지른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만의 끝에 도착한 후 다시금 각자만의 길에 올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그곳에 남은 건 에스메랄다와 그녀가 데려온 아스터뿐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

내전 이후 길게 늘어지는 리본이 달린 옷을 입어 온 그녀였기에 곧 아르페시스의 답을 볼 수 있었다. 아스터가 아르페시스의 눈과 귀가 사라졌음을 알려 주자 혼자가 된 에스메랄다는 온전한 형체도 남지 않은 두 구의 시신에게 다가갔다.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자 아스터가 말했다.

“제가…….”

선황의 시신은 이미 썩어 가며 구더기가 가득했기에 나선 것이나, 에스메랄다는 그를 물리고서 두 구의 시신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수습했다. 본래의 계획대로 선황의 것은 다시 황실의 무덤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페라노스의 것은 들개의 밥이 되어 사후의 안식조차 허락되지 않으리라.

에스메랄다는 그날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에반스가 자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에스메랄다는 한동안 멍하니 그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랐던 복수의 끝도 언젠가 덧없이 죽어 버린 히나의 끝처럼 허망했다. 한때는 그토록 간절했는데, 어째서.

* * *

황제의 즉위, 황태자의 책봉, 황후나 황비와의 국혼 등, 에렘의 계승권을 가지게 되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자의 지위가 변할 때에만 개방되는 내궁이 있다. 중앙 궁의 남쪽에 있는 그곳의 정식 명칭은 개화의 궁. 새로운 시작이나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이뤄지는 행사가 진행되는 궁이다.

대륙력 1439년 라 90일에 진행된 아르페시스의 즉위식도 마찬가지였다.

개화의 궁으로 들어서는 곳에 깔린 금색 융단은 오로지 궁을 개방하게 된 행사의 주인공만이 밟을 수 있는 길이다. 지금 그 융단을 밟은 아르페시스는 시종일관 덤덤했다. 바라 본 적 없던 자리기이게 성취감은 없었다. 그가 전율에 떨며 손에 쥔 것에 만족하는 건 오늘이 아니라, 60여 일 앞으로 다가온 에스메랄다와의 혼례가 끝난 후다.

금색 융단을 따라 개화의 궁에 들어선 아르페시스는 저가 황관을 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도열해 있던 귀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속에 있는 에스메랄다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그는 그녀가 어디에 있어도, 어떤 모습이어도 찾을 수 있다. 설령 기억을 빼앗긴다 해도 그녀를 발견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찬란하기만 한 그녀로 시야를 채운 아르페시스가 단상 위에 놓인 황좌를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즉위식의 증인으로 선별된 다섯 명의 귀족들이 서 있었다.

쿠베트, 테몬, 아브람은 새로운 황제가 가질 황권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그것을 나눠 가질 것이다. 반면 이번 내전에서 가장 피해가 적었던 라그테스의 새로운 공작은 새로운 황권을 견제하여 과거의 세를 되찾고자 노력하겠지. 그리고 남부 영주들의 무력시위를 통솔했던 아르텐 공작은 황제의 행보를 지켜보며 남부의 이득을 챙기려고 들 터.

황제의 처가가 될 테노리엘은 증인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에스메랄다는 황권에 외척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자 했고, 아르페시스는 거기에 따랐다.

테노리엘은 논공행상을 통해 백작 위에서 후작 위로 승작된 것 외에, 그 어떠한 이득도 챙기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형제들은 아르페시스의 치세 동안 권력을 경계하고 전선에 전념하겠노라 맹세한 상태였다.

증인을 지나 단상에 오르자 황실의 내정을 살피는 담당관이 황관을 들어 아르페시스에게 씌워 주었다. 이후 예법에 따른 황제의 맹세와 다짐을 줄줄이 읊는 지겨운 절차가 이어졌다. 아르페시스는 모든 것을 마친 후 곧장 즉위식에 참석한 귀족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새로운 태양에게 축복을, 경의를, 복종을 바치겠습니다.”

에렘의 귀족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새로이 탄생한 황제에게 축복을 전하며 존경을 표하고 또한 복종을 맹세했다. 저들 중 저 복종의 맹세를 지키지 않을 이들이 더 많은데, 대체 왜 이런 쓸모없는 절차가 있나. 아르페시스는 홀로 조소하면서도 귀족들 틈에 있는 에스메랄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은 제위에 오른 그의 말을 처음으로 귀족들에게 전하는 절차가 있다. 스스로가 겪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절차를 밟아 가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지금 너희가 누리는 평화가 누구의 핏물 위에 세워진 것인지 잊지 말아라.”

그저 사전에 에스메랄다와 상의해 만든 말을 짧게 읊을 뿐이었다. 이 말에 담긴 비난과 질타를 알아들을 이들이 과연 있기는 할까?

보이는 곳은 물론, 보이지 않는 곳까지 파란 마나의 물결을 채운 것은 에스메랄다가 원했던 것이다. 경고와 과시, 그리고 경외를 위해서였다.

개화의 궁을 나서 사방이 뚫려 있는 마차에 오르는 것으로 새로운 황제의 첫걸음이 시작된다. 여름 내 보수를 진행하며 이제야 다시 성벽의 형태를 갖춘 황성을 벗어나 황도를 가득 채운 백성들의 사이를 지났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에 홀려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버러지들. 아르페시스는 인상을 구기지 않기 위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의 즉위식은 흩날리는 꽃잎이 없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푸른 마나 덕분에 위협적이었다. 선황의 즉위식과 비교하면 절차는 간소화되고 타국의 귀빈들 역시 참석하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축제를 즐길 백성에게 베푼 음식은 풍족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은 채 형식적인 행진을 마쳤고, 중앙 궁으로 돌아와 다시금 금색 융단을 밟았다. 그가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사이 중앙 궁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공후백과의 오찬을 마치면 연회가 시작된다. 그 모든 것이 즉위식 행사의 일부였다.

살짝 미간을 좁힌 아르페시스는 중앙 궁에 발을 들인 후 곧장 오찬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선대 테노리엘 백작의 추도식에서는 테이블의 중앙에 앉았으나, 오늘의 그는 상석에 앉았다. 에스메랄다와의 혼례를 준비 중이기는 하지만 아직 배우자가 없는 미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상석이 아니라 중앙으로 자리를 배치하면 맞은편에 배우자를 앉히거나, 동맹의 수장을 앉혀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쿠베트와 아브람, 테몬 중 누군가를 특정하여 잡아 줄 시기가 아니라고 말했고,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의견에 따라 오늘의 자리를 배치했다.

황제가 된 아르페시스가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오찬은 고요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간간이 오가는 말도 전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이후 연회를 위해 자리를 파할 때까지 아르페시스가 한 말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새로운 지배자가 그리 무뚝뚝하니 그의 힘을 경계하고 있는 귀족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메랄다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혼인이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의 뜻을 존중하고 그녀를 위해 주고 싶은데 그 말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벌써 한 계절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앙 궁인데, 이곳에 서 있는 스스로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아르페시스는 잠시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갈 곳을 찾아 헤매었다. 그가 갈 곳은 에스메랄다의 곁뿐인데, 지금은 그곳에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갈 곳이 없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어제 자로 중앙 궁으로 복귀한 헨릭이 다가왔다. 시종장은 본래 그를 모시던 카덴이 맡기로 했고, 헨릭은 그 아래 직급으로 중앙 궁에 돌아왔다.

선황의 충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최근 그의 눈을 피해 만드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은 가득한데 한번 닫아 버린 입은 다음에도, 다음에도, 열 수가 없었다.

“곤하시다면 오수를 취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답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페시스는 곧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느끼고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 해?”

그의 뒤에서 안겨 온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그냥.”

“그냥?”

오늘부로 제 궁이 된 곳에서 갈 곳이 없어 헤매었다고 말하는 건…….

요즘은 에스메랄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해진다. 아르페시스는 억지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에스메랄다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 질문을 꺼내는 것이 무섭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 억지로 혼사를 밀어붙이는 중이지 않나. 화가 난 것일까? 하지만 이렇게 먼저 그에게 와 주는데? 품으로 파고들면 당연하게 안아 주는데?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에스메랄다를 잃는 게 너무 무서워서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물어보았다가 혼사를 물러 달라는 얘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는 버티지 못하리라.

즉위식은 분명 약식으로 준비했으나 혼례식은 황도로 올라온 아레스와 상의해 준비하고 있는 게 많았다. 벌써 세튀스를 제외한 각국에 초청장을 보냈으니 가을에는 사절단이 속속들이 도착할 것이다. 일은 착착 진행 중이건만, 그녀가 바라지 않는 혼인을 강요하고 있다는 현실은 홀로 버티기 힘든 복잡한 감정과 함께였다.

“피곤하지는 않아?”

귓가에 닿는 달콤한 음성이 너무 반가워서, 슬프다.

“……그다, 지.”

“요즘 바빴잖아. 잘 시간도 거의 없는 거 아냐?”

“……괜찮다. 인외의 힘을 가진 후에는…….”

“피로가 훨씬 적게 느껴진다고?”

그를 올려다보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것처럼 위축된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지? 제위에 오르기로 하면서 그에게 가장 필요한 배필은 그녀가 되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는 것처럼 그녀가 혼인에 거부 반응을 보였고, 혹시나 차후에 그녀가 마음을 바꿔 거부할 수 없도록 안전장치까지 만들어야 했다.

실제로 가문 간의 혼담을 마무리 짓고 서약서와 혼례식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인데, 왜. 사랑하는 이와의 혼인은 기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에스메랄다는 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선 그럴듯한 가정이 잡히지 않았다. 황관을 쓴 지금까지 자신이 에렘의 이름에 속해 있지 않다고 여기기에 생긴 일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선황과 페라노스를 혐오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안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그들과 혈육이라는 건 의식 속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다. 페드로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떠났다. 스스로를 향해 고아라고 망설임 한 점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황실의 피와 자신을 단절시켜 놓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괴물을 인정하고 있다는 건 그의 모순이었다. 같은 시간에서 다른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인격을 쌓아 왔기에 생긴 모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는 에스메랄다의 심리를 파헤칠 수 없었다.

“……크게,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큰일은 거의 해결되기도 했고.”

한숨을 삼킨 아르페시스가 덤덤함을 가장해 대답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진행된 일이니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며칠 만에 나누는 대화인데 이딴 것을 말하고 있다니.

“충분히 자고 있다.”

또 대화가 끊길까 싶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럼 왜 나를 볼 시간조차 없는 사람처럼 몰래 왔다가 몰래 가 버리는데?”

하지만 대화를 바라며 꺼낸 말은 실로 꿰맨 것처럼 입술을 딱 붙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간이.”

병신같이. 방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이 아니라고 시인하지 않았나. 이전처럼 그녀가 잠든 후에야 슬쩍 곁으로 갔다가, 깨기 전에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던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결국 다시 입을 다물자 에스메랄다가 먼저 그를 잡아끌었다.

“나 아직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못 정했어.”

“…….”

“네가 골라 줘. 응?”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막혔다. 딱 하나만은 내어 줄 수 없으니까.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에렘의 황제가 되었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후에 이어진 연회는 지루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계속 그에게 말을 걸어 주었으니까. 그는 연회가 이어지는 내내 에스메랄다와 깍지를 낀 채 그녀의 손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오늘을 위해 황도로 온 아레스와 대화를 할 때도, 그의 파트너로 참석한 루이자가 술에 취해서 에스메랄다를 빼앗아 가려 했을 때도, 페르멘이 익숙한 시비를 걸 때도, 제르민이 에스메랄다의 품에 안기려고 떼를 쓸 때도,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걸 때에도 계속.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그와 달리 에스메랄다는 때때로 깊은 눈을 한 채 계속 와인잔을 비워 갔다. 뺨이 붉어지고 몸이 비틀거릴 만큼.

“너무 과한 것 같다.”

결국 보다 못한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서 와인잔을 빼앗아야만 할 정도였다. 그의 손길을 따라온 녹안과 마주쳤을 때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너무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혼례식까지 고작 60여 일이 남았다. 그런데 에스메랄다는 왜 저런 눈으로 그를 볼까?

순순히 와인잔을 놓고 그에게 기대어 오는 에스메랄다를 품에 안고 있는데, 마음이 허전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에서 분명 모든 시간을 함께했는데 그녀가 곁에 없는 것처럼 외로웠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 * *

짧은 다리 때문인지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무척이나 빨랐다. 백의를 입은 제르민이 자신보다 훨씬 큼지막한 어른들의 사이를 파고들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버텨 왔다.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 에스메랄다는 배울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가령 사람의 시선을 이용하는 방법, 혹은 특정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방법까지.

제르민에게 신학과 교리, 세상의 과거를 가르친 것이 오웬이라면 정치와 인간, 세상의 현재를 가르치고 있는 건 에스메랄다였다. 만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제르민은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오늘 그것을 써먹어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목표물을 찾기 위해 이렇게 연회장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후작 저가 된 테노리엘의 저택에서 한 번 만난 적도 있거니와, 연회에 참석한 후 에스메랄다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도 보았는데 어디로 갔지?

새로운 황제와의 우호를 드러내기 위해 즉위식 연회에 직접 참여한 제르민은 계속 자신의 목표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뒤를 오웬이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갔다.

마침내, 연회장 입구에서 루이자와 함께 다시 돌아온 이를 발견한 제르민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열심히 뛰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사내의 왼팔 소매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아레스였다.

“테노리엘 경!”

“성하.”

루이자와 함께 인사를 올린 아레스는 곧장 제르민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세를 낮춰 주었다. 그에 제르민은 흠, 흠, 뒷짐을 진 채 헛기침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어찌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레스가 용건을 물어보는 와중에도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그에 제르민은 다시 복부에 힘을 딱 주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에헴!”

연회장을 채운 음악 소리 위로 인위적인 소리가 덮이자 그나마, 시선이 모여들었다.

“듣기로, 경은 남부 전선에서 헌신했었다지?”

“예?”

아직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는 조금 어설펐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아레스가 의문을 표하는 사이 제르민은 고사리같이 작고 고운 손을 뻗었다. 움푹 파인 흉터가 남아 있는 자리, 한때는 그의 왼쪽 눈이 있던 그 자리.

하얀빛이 제르민의 손을 타고 아레스에게 닿았다. 시선을 빼앗는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아레스의 흉터는 사라져 있었다.

“으아…….”

몰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린 그를 아레스와 오웬이 급히 붙들어 주었다.

“이게…….”

그는 갑작스럽게 다시 확보된 시야가 어색한지 계속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사이 제르민은 세상이 핑 돈다는 말을 몸소 겪는 중이었다.

“성하, 괜찮으신지요? 의원을 부르겠…….”

“아니, 아니다.”

두 어른의 손길에 의지해서 숨을 고른 제르민이 아직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재생의 힘을 사용하기엔 아직 몸이 덜 자란 게지.”

억지 헛기침으로 붙들어 둔 시선 속에서 웅성거림이 퍼지고 있었다.

“나중에 더 자라면 이 팔도 돌려줄 게야. 어버이를 위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영웅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텅 비어 있는 그의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린 제르민이 방긋 웃었다. 아레스의 곁에 있던 루이자의 표정이 조금 굳었지만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왼쪽 눈을 더듬어 보는 아레스를 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보상과 공훈을 인정해 주어야지 전장에 계속해서 무인들이 모이겠지. 신관들의 체계를 다듬는 것만큼이나 훗날 도래할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따지면 후자를 위해 전자가 필요한 것이니 결국 마룡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영광입니다, 성하.”

국내 행사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자리인 만큼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에렘에 남은 공후백이 다 모인 자리니 어련할까. 그들을 통해 타국으로도 소문이 퍼질 것이다. 굳이 보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아레스의 눈을 치료해 준 이유였다.

“어버이의 영웅에게 축복이 함께하기를. 어질어질해서, 난 이만 가 봐야겠네.”

어린아이의 얼굴로 웃은 제르민이 오웬의 품에 안겨 자리를 떠났다. 에스메랄다의 오라비를 이용한 것은 조금 미안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소홀할 수 없었다.

제르민이 자리를 비우자 귀족들이 아레스에게 몰려들었다. 교황이 부재한 시대에서 자라 온 이들이 재생의 기적을 직접 목도했으니,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단상 위에서 그 소란을 전해 들은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깊게 침잠했다.

* * *

20여 일 전 즉위와 함께 중앙 궁으로 복귀한 헨릭은 아르페시스를 보필하는 중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일 텐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는 말이 없다. 즉위식 무렵에는 그래도 말을 걸면 느리게나마 답이 돌아왔는데 이제는 고갯짓이 대부분이다. 그가 자신만의 한계까지 몰려 있다는 의미겠지. 선황의 당부처럼 그가 알아 보았자 힘들기만 할 진실이다. 그래서 하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그녀는 아직 선택하지 못했다.

“내일은 만찬 시간에 올게. 오후에 티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어.”

에스메랄다의 속삭임에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사의 달이다. 봄에 시작해 여름의 더위 때문에 잠시 주춤한 이후 바람이 시원해지는 가을에 다시 활기를 띠는 에렘의 사교계가 한창일 시기.

아르페시스의 즉위 이후 에스메랄다는 본격적으로 사교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 영지에서 지냈기에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없었다. 혼인 전에 조금이라도 다져 두어야 다음이 편하다.

덕분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니 라그나가 황도에 도착했다. 말끔하게 정리한 연구 성과와 시험 물품을 가지고서.

“어서 오게.”

그가 출발했다는 말에 에렘 내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마수를 하나 잡아다 놓았다. 에스메랄다는 정찰병에 대한 가설을 전해 들은 후 로부오들을 통해 줄곧 마수를 관찰해 왔다. 덕분에 내륙에 숨어 있는 마수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수성이 가능한 성벽을 가졌으며 무장 병력이 주기적으로 통과하는 도시 인근에서 주로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닌 곳도 분명 있으나, 그중에는 남부로 향하는 물자 운송로 사이에 끼어 있거나, 남부군과 거래하는 상단의 물자 창고가 존재하는 도시가 많다.

마수는 물자가 끊겼을 때 인간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남부의 중형 마수들이 후방로를 습격했던 건 명확한 목적을 둔 작전이었겠지. 훗날 인간을 굴복시키기 위한 예행연습이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마수는 인간과 다르다. 그들은 보급이 필요 없다. 진군하는 방향에 널린 인간이 그들의 먹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 반대다. 대륙의 남쪽은 마수들에게 잠식된 지 오래다. 그곳에서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후방에서 계속 보급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덕분에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는 마수가 인간을 정찰을 하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시되었다. 다행인 건 아직 습격하거나 파괴해야 하는 곳을 완벽하게 다 찾지는 못한 것 같다는 점일까? 군의 물자와는 관계가 없는 곳 근처에도 있기는 하다.

당장 포획해 둔 마수는 인가에서 먼 야산에 숨겨 놓았다. 황도 내부에 들였다가 혹시라도 일이 꼬이면 큰일 나겠지. 오늘 중으로 마도구를 가져가 직접 결과물을 확인할 생각으로 아르페시스와 함께 외출 약속을 잡아 두었다.

“사람이 뭐 이리 급해? 꽁지 빠지게 왔다고.”

서둘러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본인이 열심히 왔으면서 말을 꼭 밉게 한다.

에스메랄다는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한 라그나를 보며 한숨을 감추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성과를 가져온 그에게 전할 소식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원하는 바를 위해 손을 쓰는 건 언제나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현재의 상황을 가볍게 언급한 이후 곧장 본론을 언급했다.

“온 김에 나단의 일도 상의를 했으면 하는군.”

“엥?”

당장 성과를 보여 주겠노라고, 마수를 보러 가자던 라그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잘했다고 하던데?”

“전쟁은 했지.”

실제로 나단은 광역 마법으로 적군의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상당히 잘해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두툼한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건네는 종이를 꽤나 싫어하는 라그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시녀에게 나단을 불러오라 이른 후 읽어 보라 권하자 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종이를 팔락, 팔락 넘기기 시작했다.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역에 가담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지. 감정적으로 흔들리게 한 후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계속 자극했다.

에스메랄다는 아직까지 나단에게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탈주 사건은 일부 관련 인사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고, 페라노스는 예정대로 처형되었다.

나단은 최근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겠지. 어쩌면 탈출하지 못해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간 것이라는 희망을 붙든 채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걸 알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오늘을 위해 그를 방치했다.

페르멘 역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고, 에스메랄다가 침묵하라 일렀기에 나단과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나단이 페르멘에게 도움을 청하며 먼저 얘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손을 써 둔 셈이다. 그가 나단과 잘 지내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을 실수라고 여겨 넘겨줄 만큼 무르지는 않았다. 그도 엄연한 테노리엘이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라그나에게 건네준 종이에는 그날의 사건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나단이 구속구를 확인하기 위해 지하 감옥에 들어간 이후 구속구를 풀어낸 페라노스가 도주한 것, 비밀 통로를 통해 중앙 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그리고 그곳에서 아르페시스에게 다시 붙잡힌 것까지.

“아직 불러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날 지하 감옥에 수감된 이들의 마나 구속구를 점검한 건 나단이다. 그가 다녀간 후 탈주범이 생겼으니 혐의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 탈주범이 무려 페라노스이기에 더더욱,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

“조용히 덮으려고 애를 썼네. 이리저리 찾아보니… 페라노스 측의 일을 보던 하급 귀족 하나가 나단을 자극한 모양이야. 판을 뒤집고 싶었건, 목숨만이라도 부지해 주고 싶었건…….”

라그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앞에서 나단이 왜 이런 사고를 쳤는지 어림짐작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나단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황성 점령 당시 그가 아르페시스를 찾아가 어떤 말을 했는지, 모두.

“정리하라던 말에 반감을 가졌던 것인지, 폐하께 앙심을 품었던 것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해 오는 라그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었다.

“폐하께서 내 사정을 많이 봐주셨지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이해해 주리라 믿네.”

“어… 더, 덮어… 어디까지…….”

자식의 일 앞에서 흔들린 라그나가 말을 더듬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나단이 도착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안색은 파리했다. 그날 이후 마음 편히 쉬지 못한 게 눈에 빤히 보인다.

“너, 너 이놈이!”

버럭 언성을 높인 라그나 때문에 나단의 몸이 움찔거리며 위축되었다.

“자네는 나가 보게. 나단과도 따로 할 말이 있으니.”

식식거리며 화를 내던 라그나가 에스메랄다 앞에서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결국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는 것도,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두 라그나가 했다. 지금 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라그나가 있는 자리에 나단을 부른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그나가 언제 이렇게 그녀에게 숙인 적이 있던가? 부정은 이렇다. 이런 것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부모의 사랑은 참, 잔혹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쫓아내듯 라그나를 내보낸 후에는 나단이었다.

“왜 부른 것인지는 알 것이라 믿으마. 서서 얘기할 것이 아니면 그만 앉으렴.”

손을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나단이 침묵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해야 할 말을 읊었다.

“폐하를 찾아갔다지? 그분과 나의 혼사 문제로.”

답은 없었으나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안다. 나단을 가만히 응시하던 에스메랄다가 날카로운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종종 너 같은 사람이 있단다.”

비수를 치켜들어 깊은 곳으로.

“자신의 뜻이 윗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결국은 제 이기를 내세우는 것이면서 윗사람을 위해서라는 변명을 하는 그런 사람들.”

절대 낫지 않을 상처와 죄책감을.

“좋게, 좋게, 어여삐 보아 주었더니 와서는 안 될 곳까지 기어오르는구나.”

냉혹하고 모진 말이 몇 번이나 이어지자, 마침내 나단이 울먹이며 항변했다.

“시, 싫어하셨… 그분과의 혼인을 싫어하셨잖아요…….”

“네가 왜 그것을 판단하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것마저 냉정하게 짓밟았다.

“내가 언제 싫다는 말을 했기에?”

“하, 하지만 분명히 그때…….”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이잖니. 감히 너와 아비를 거둬 준 내게 사심을 품고, 내 곁에 있는 그분에게 반감을 품어서, 너 편할 대로.”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에게 보여 주었던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설령 정말 싫었다 해도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 내가 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그것으로 끝난 일인데 네가 무엇이라고 감히, 내 혼례에 대해 왈가왈부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결국 그 스스로의 이기를 위한 것이지 에스메랄다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알아서 소각하라며 종이 뭉치들을 나단의 품에 안겨 주었다.

“내 경고가 우스웠던 듯하니, 이번에는 행동으로 보여 주마.”

그는 곧 테노리엘 소속의 자원병으로 남부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절대 영지나 황도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의 마나 친화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소형 마수를 상대하는 데 훌륭한 전력을 놀릴 수는 없지.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나단에게 남부의 유배를 명했다.

“라그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조용히 덮지는 않았을 것이다.”

“…….”

“네가 라그나의 아들임을 감사히 여기도록 하렴.”

거짓말, 위선, 기만, 그 모든 것을 담은 명령 앞에서 나단은 종이 뭉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는 집무실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단을 바라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고요하게 그를 외면했는데,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것이 맞는데, 그래도.

“나단.”

굳이 한 번을 불러 본다. 그녀 스스로를 위해서.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지.”

문 앞에서 멈추어 선 나단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에스메랄다는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네게 감사한단다.”

그날, 그 새벽 날의 정원에서 그녀의 등을 떠밀어 주었던 그 다정한 위로. 그 순간이 없었다면 그녀는 아직도 아르페시스에게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정말 진심을 다해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너를 다시 부르는 날은 오지 않을 게다.”

그저 그뿐이다. 그렇게 나단은 남부로 쫓겨났다. 그가 마수 학살자, 라는 이명으로 칭송받는 것은 조금 더 먼 날의 일이었다.

* * *

고풍스러운 가구가 시각을 괴롭히고, 감미로운 차의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키는 장소였다.

국혼이 보름 남은 오늘부터 에스메랄다는 혼례 준비를 위해 황성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그녀의 첫 행보는, 이제 태후가 된 여자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아랫사람이 인사를 올린다는 명분으로 굳이.

한때는 황후였으나, 이제는 태후가 된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친모가 아니라 하나 선황의 배필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 궁에서 칩거만 했기에 그녀를 건들 만한 명분이 없었다.

페라노스는 선황 살해를 비롯한 죄명과 증거가 명확했으나 그녀는 아니었다. 과거의 순간까지 되짚어 보면 또 모를까, 지금의 시점에서 굳이 그녀에게 죄를 묻자면 자식을 잘못 둔 죄가 전부다.

“향이 무척 좋습니다.”

태후는 그녀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얼굴을 마주한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색이 흐려지면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새치와 깊게 새겨진 주름,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자색 눈동자.

사라진 시간에서도 그녀를 만난 적은 손에 꼽는다. 그는 아르페시스가 마나 유형화에 성공했을 무렵 조용히 칩거를 시작했고, 황실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오늘 에스메랄다가 태후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경고와 단속, 그리고 확인. 운이 좋게도 제르아니가 제 발로 사라져 준 덕분에 당장은 태후만 단속을 하면 된다. 그것마저도 고작해 봐야 10여 년 정도가 끝이리라. 이미 황성의 의원들에게 황후가 그리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너나 나나, 서로가 달가운 처지는 아니지. 할 말만 하고 가거라.”

에스메랄다가 찻잔을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태후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 말이 찻물이 식기 전에 나왔다면 상념은 없었을 텐데.

“무어, 거창한 것이 있으려고요.”

“그래, 알았다.”

사교계에 익숙한 자와 나누는 대화는 짧고 간편했다. 에스메랄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을 알아듣고 답하는 태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완전히, 모든 것을 놔 버렸다. 아마도, 평생을 염원했던 선황의 사랑을 포기한 것이겠지. 아르페시스가 마나 유형화에 성공했을 무렵부터 쭉.

직접 황비로 들인 여인에게서 난 아들마저 완전한 도구로 취급하는 선황을 지켜보며, 그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일까? 선황의 일기만으로는 확신을 하지 못했는데… 태후는 그가 만들어 낸 거짓말에 완전히 속았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에게서 새어 나온 실소가 비웃음처럼 들렸을까? 태후의 자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비어 버린 찻잔을 내려놓기 위해 손을 뻗은 에스메랄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더 일찍 포기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아르페시스의 모친이 그렇게 죽을 일도, 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을 경계하기 위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운 선황의 비극도 없었을 텐데. 페라노스는 제위를, 아르페시스는 부모의 사랑을 가진 채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가 덧붙인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처음으로 태후의 자색 눈동자에 감정이 들어섰다. 억울함, 비참함, 서러움, 그리고 회한. 이리저리 뒤섞여 제대로 구분조차 되지 않는 감정들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네가 무얼 안다…….”

“황비 전하를 그대로 두셨다면.”

에스메랄다는 뾰족한 가시와 함께 새어 나온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메랄다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태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위는 당신의 아들이 가졌을 텐데……. 부모를 잘못 둔 자식만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진즉에 포기하지. 그랬다면 선황은 마룡 토벌을 등지지 않았을 것이고,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르페시스의 삶 역시 평탄했을 텐데. 작은 불씨가 커져 세상을 덮는 법이라더니, 그 꼴이구나.

끝까지 움켜쥐고 있지도 못할 어중간한 탐욕이 그의 인생을, 이 세상을 꼬아 놓았다고 생각하니 욕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고작 저 정도의 탐욕 때문에, 고작 저렇게 포기할 수 있는 그저 그런 탐욕 때문에.

태후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몸을 돌렸다.

“새끼를 품은 맹수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지요.”

그러지만 않았으면 아들이 처형되는 일도, 가문이 풍비박산 나서 멸문하는 일도, 이렇게 비참하게 놀림받는 일도, 전부 없었을 텐데.

평생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체념하고 포기한 사람에게, 그건 누군가가 이미 가져갔다고 말해 주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있을까?

태후의 응접실을 나선 에스메랄다는 뒤에 남은 고요함을 즐기며 걸음을 옮겼다. 황후의 정확한 성정은 모르나, 이렇게 조용한 걸 보니 10여 년이나 기다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태후는 황후 궁을 비운 후 거처를 옮겼고, 그 과정에서 사용인들이 모두 감시와 감금을 위한 이들로 꾸려졌다. 황손과 태후의 근위 기사들은 황성 점령 당시 대부분 사살되었고, 살아남은 일부는 직위 해임과 함께 떨어트려 놓았다.

그녀가 무얼 하든 모두 귀에 들어올 테고, 과거와 달리 아르페시스는 암살 위협에서 자유롭다. 태후가 뒤늦은 깨달음으로 발버둥 친다 해도 칼날이 닿기에는 너무 늦었다.

태후의 거처를 나서는 에스메랄다의 발걸음이 조금은, 사나웠다. 중앙 궁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른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의 곁에서 타박타박 따라오는 루기스의 발걸음이 그녀를 상념 속으로 안내했다.

선황은 분명 태후의 포기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의 칩거를 직접 겪었을 테니, 분명히. 그럼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방심하지 않고 계속 태후를 속여 왔다. 그녀가 절대로 아르페시스의 목숨을 위협하지 못하게.

거만하게 하품을 하며 마룡을 노려보던 맹수의 뒤통수를 건드려 약이 바짝 오르게 만든 것은 태후였다. 그녀는 선황이 매사를 경계하여 아르페시스의 안전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태후로 인한 죽음의 위협은 배제되었고 고작해야 페라노스가 약한 독으로 괴롭히는 선에서 끝났다.

선황은 태후가 아르페시스의 목숨을 노려야 할 이유를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이게 사랑이 맞기는 할까?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독을 먹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묵인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으로 내보낸 것이 정말 사랑인가?

에스메랄다는 거기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선황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확실한 결과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아르페시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결과.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국정 회의가 끝나기엔 이른 시간이니 응접실에 가서 조용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중앙 궁에 도착하자마자 관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중이었다. 그 속에서 발견한 사내 때문에 깊은 한숨이 흐른다.

에스메랄다는 중앙 궁의 홀을 지나는 관료들 틈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에 옅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중년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 페닐란 유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는 분명 아르페시스의 외숙부다. 로라, 아니, 작고한 선황비는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라 했다. 아르페시스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동생들은 고작해야 열 살 언저리였다.

허공에서 그와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부딪쳤다. 저 사람의 존재를 아르페시스가 영원히 몰라야 하는 건가? 정말, 선황의 말대로…….

에스메랄다가 홀로 생각 속을 거니는 사이 그녀를 향해 묵례를 해 보인 관료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유다라는 이름의 중년인도 그녀를 지나쳤다.

“무슨…….”

아직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불러서 무얼 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이미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회의가 끝나기엔 이른 시간인데.”

관료들의 틈 속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있던 유다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두어 걸음 지나쳐 간 그를 돌아보았고, 유다 역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폐하께서 회의를 일찍 파하…….”

“에디.”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를 아르페시스가 잘라 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뒤로 흐르는 유다의 눈동자가 흐트러지는 것을 똑바로 보았다. 말하는 게 맞는 건가, 말하지 않는 것이 맞는 건가. 왜 선택은 끊임없이 찾아오나. 에스메랄다는 착잡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알려 주어 고맙네.”

유다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다시 몸을 돌렸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를 등진 후 아르페시스에게 다가갔다.

“일찍 끝났네?”

한 번의 끄덕임과 집요한 손길로 깍지를 껴 오는 게 벌써 몇 번이나 이어져서 그게 그의 습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꽉 붙든 아르페시스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에스메랄다는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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