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42화 (42/45)

제40장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뒤에 내려앉은 빛을 돌아보았고, 이어서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빛과 함께 나타난 존재가 그녀보다 한참은 컸으니까.

에스메랄다의 손을 살며시 잡아 준 존재는 컸다. 보이는 것은 건장한 청년과 비슷한 체격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커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토록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일생의 평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존재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로부터 하얀 실타래가 흘러내리고, 건장한 체격 뒤로 펼쳐진 세 쌍의 날개가 에스메랄다를 비춰 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녹안이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이름을 모름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존재가 미소를 지었다.

딱딱하고 서늘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음에도, 너무나도 다정한 미소라서 눈물이 났다. 에스메랄다의 뺨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아래로 뚝, 떨어지자 갑자기 나타난 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어버이께서는 언제나 너와 함께하고 계시니.”

아니, 그것을 말이라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득히 높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선고 같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한 음성이 그녀에게 닿은 직후, 황금색 눈동자가 무너진 성벽을 향해 움직였다.

“훗날 너희 모두가 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그가 존재했다.

“미…….”

심판, 그 단어를 통해 찾아낸 이름을 입에 담기도 전에 달콤한 속삭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의 심판대 위에서 논하는 것이 죄악만은 아님을 알려 주고 싶구나.”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음성이었으나, 너무 선명해서 잘못 들었다는 착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음에도 방황하는 바람에 닿을 수 없었다.

그사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빛 무리의 품을 떠난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에스메랄다 양은 어버이께서 계속, 계속 지켜보시던 사람이니라.’

왜 하필 그때 제르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그저 떠올랐기에 생각했을 뿐이다. 심판을 논한 저 존재가 추악하고 지긋지긋한 인간들 틈에서 에스메랄다를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천사야.’

허무맹랑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천사라 부르던 형제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불쾌해하기는커녕 사랑스럽다는 미소를 짓는 존재가, 왜 이렇게…….

“나는 너 또한 다시금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커다란 손이 아르페시스의 뺨을 매만져 준 후 떨어졌다. 에스메랄다의 뒤를 따라왔던 루기스가 그에게 고개를 비비며 그르렁, 그르렁, 나른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루기스의 행동에 그 존재는 조금 전과 같은 다정한 손길로 하얀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온 김에 페드로의 소식을 전해 주마. 너희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어찌나 고집이 심한지, 심판은 나중에 받고 조금 더 너희 둘을 지켜보겠노라 떼를 쓰고 있단다.”

아르페시스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다급히 들이마셨다.

“그러니 그 아이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 주렴.”

아르페시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존재는 커다란 품으로 두 사람을 안아 주며 속삭였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어버이께서 너희 두 사람을 축복하고 계신다.”

그 존재는 왜 하필 그 순간에 아르페시스가 했던 그 말을 되돌려 주었을까?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마.”

하늘로부터 시작되어 땅에 내려앉았던 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입을 떡 벌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무릎을 꿇은 채 감격을 토하며 엉엉 우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혼란스러운 장소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에스메랄다였다.

“미…….”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안긴 채로 손에 쥔 확성 마도구를 발동시켰다. 커다랗고 두려운데도 포근하던 그 존재가 잡아 주었던 손을 꽉 움켜쥐고, 반대쪽 손에 든 마도구에 불빛이 들어온 순간 그녀의 입술이 포문을 열었다.

“미카엘께서 직접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밝혀 주셨다!”

그제야 방금 전의 이적을 목격한 이들이 숨을 몰아쉬었고, 에스메랄다의 말이 이어졌다.

“본인의 죄악마저 타인에게 떠넘기는 저 추악한 자를 잡아, 그분 심판대를 본떠 만든 인간의 심판대 위에 올려야 할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패륜아를 끌어내려야 한다! 전군 진입하라!”

그에게 답하는 함성이 하늘에 닿을 듯 높았으니, 황성을 점령하기까지 고작 1시간이 걸렸다. 미카엘의 현신을 목도한 이들 중 대다수가 창검을 버리고 투항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 5일,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는 황성에 발을 들였다. 분명한 그들의 승리였다.

* * *

아주 오래전, 이제 와서는 횟수로 거슬러 가기도 힘들 만큼의 오래전의 일이다. 주신은 인세를 보살피기 위해 대천사들에게 언제든 인과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의 권능을 하나씩 떼어 주었다.

인간의 생을 빼앗을 수 있는 심판의 권능은 미카엘에게, 인간에게 옳은 지혜를 빌려줄 수 있는 인도의 권능은 가브리엘에게,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는 보호의 권능은 라파엘에게 주었다.

그리고 인세에 내려가 직접 겪고 느끼고 살필 수 있는 순례의 권능은 한때 루시퍼에게 허락했다. 하지만 그는 천계를 등지고 떠나 버렸다. 주신은 자식의 생을 거두지 못했으나, 남용될 경우 위험한 권능은 거두었다. 그리고 천계의 맏이인 미카엘에게 떠난 루시퍼의 권능을 다시 하사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미카엘은 심판자인 동시에 순례자였다.

천계에서 유일하게 인세에 현신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존재가 바로 미카엘인 것이다. 주신마저도 인세에 현신을 할 수는 없다. 루시퍼에게 주었다가 거둬들인 것을 다시 미카엘에게 주었으니, 그에게는 현신의 권능이 없었다. 권능은 복사가 불가능하기에 미카엘에게서 다시 거둬들이지 않은 이상 주신이라 해도 인세에 현신하는 건 불가능하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냥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주신을 제외한 천계의 모두가 얼을 빼놓은 채 아르셀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와의 상의도 거치지 않고 대뜸, 미카엘이 가진 순례의 권능이 아르셀에 닿았으니까.

“아…….”

가장 먼저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권능은 천사의 힘으로 창조주로부터 허락받은 신의 힘을 구현하는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신력이 소모되고 대천사의 몸이라 해도 버티기 힘든 반발을 겪어야 한다.

결국, 지금 아르셀에 현신한 미카엘이 돌아오면 얼마간은 끙끙 앓을 것이라는 말이고, 심판자인 그가 나가떨어지면 내세를 마친 후 대기 중인 영혼들의 심판이 미뤄진다. 다시 내세를 받을 영혼이 확정되지 않으면 안배과는 다시 생명을 점지할 수 없다.

“살았군.”

정말 다행히도, 감사과나 기도과 쪽에는 큰 영향이 없다. 그저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제발 아이를 점지해 달라는 기도가 좀 늘어나겠지. 가브리엘은 미카엘이 친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뒤를 이어 들린 털썩, 소리는 가브리엘보다 한 박자 늦게 스스로의 처지를 깨달은 라파엘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낸 소리였다.

“루시퍼, 이 악마보다 못한…….”

보호자인 그가 안배과의 업무를 떠안은 것도, 지금 미카엘이 사고를 친 것도, 전부 루시퍼가 사직서를 내던지고 뛰쳐나갔기에 파생된 일이었다.

“미카엘… 이, 이… 치사한…….”

물론, 직접 사고를 친 미카엘의 탓도 있으니 그도 함께 욕해야지. 라파엘은 그렇게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원흉인 루시퍼와 미카엘을 욕하며 뒤로 넘어갔다. 의식의 끈을 놓은 그의 입가에는 거품이 매달려 있었다.

안도하고 절망하는 두 대천사 사이에서 주신은 유일하게 미카엘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가 내려가기 전까지 황태자에게 삿대질을 해 대며 울화병을 토로하던 것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장한 녀석! 그래! 잘한다, 잘해! 구원자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해 줘야지! 마룡을 없애고 오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천계에서 원하는 만큼 쉬게 해 줄 거라고 말해 주렴!”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니라 했거늘, 가브리엘은 주신이 흥분을 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몇백 년 후, 주신이 다시 내세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구원자의 영혼을 끼고돌 줄 알았다면 당장 저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천사가 예지를 하는 것은 아닌지라 당장은 고개를 내젓는 것이 전부였다.

* * *

「제4장 성국의 힘과 정의(正義)

성국의 초대 교황 제르민 이후 더 이상의 성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음에도, 성국은 5백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신력을 발현하는 신관의 수는 매해 줄고 있음에도 성국의 힘은 대륙 곳곳에 미치고 있다. 고작해야 영지 두어 개쯤 되는 크기의 영토를 가진 나라가,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그들이 가진 국력이 막강하다는 의미와 같다.

신학을 파헤친 학자들은 그 강력한 국력의 이유로 창조주의 존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서 보이는 망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그 망각이 가져와야 할 의심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감히 부정을 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창조주의 존재감이 성국을 지탱하는 힘인 셈이다.

그 외에도 오래전 신벌로 인해 신관들이 힘을 잃었던 이야기, 여전히 존재하는 신관들의 신력, 마룡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륙에 남아 있는 신수의 존재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요소에 포함된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과거 대륙에 현신했던 심판자 미카엘의 존재다.

현재까지 최초임과 동시에 최후의 현신에 대한 진실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대다수가 그것이 진심임을 인정하고 있다.

대륙력 1439년 라 4일, 에렘 제국에서 발발한 내전의 끝을 앞두었던 그 날 미카엘의 모습이 기록된 수정 마도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당 마도구는 당시 에렘 제국의 14대 황제인 유세프를 독살하여 제위를 탐했던 페라노스(당시 에렘 제국의 황태자) 측의 마법사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째서 패전의 형색이 짙은 당시 수정 마도구를 발동시키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곳에는 대천사 미카엘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5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수정 마도구는 성국의 국보로 보존되고 있으며, 매해 라 4일 성국에서는 동일한 기록을 복제해 세간에 공개한다. 고작 과거의 한순간에 불과하나, 그날 인간을 찾아 주었던 이가 미카엘임을 모두가 깨닫고야 마는 기록이다.

일부, 해당 기록을 본 적이 있는 학자들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절대적인 존재가 거짓에 대한 논란조차 허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 그 기록을 본 적이 없는 이들 중에는 성국이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작한 증거라 폄하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본 저자는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그 기록이 조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임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진실을 확인하길 권한다. 매해 라 4일, 성국에서 직접 공개하는 사본을 보라. 그것이 모든 진실을 알려 줄 것이다.

(후략)」

- 라 주브 테세우스 『성국의 건국과 역사』 中 발췌.

* * *

황성에 진입한 후 아르페시스는 황태자와 관계가 있던 귀족들부터 정리했다. 체포 과정에서 저항했다는 명분 아래에서 주요 인사 대다수를 사살했고, 나머지는 모두 황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황태자는 비밀 통로로 도주하려다 아르페시스에게 붙잡혔다.

그렇게 아르페시스가 귀족과 중앙 관료의 목줄을 잡을 때, 에스메랄다는 로부오들이 보호하던 수사관들을 데려왔다. 황도를 비워 둔 사이 엉망으로 엉킨 수사 과정을 제대로 정리하라는 의미였고, 자신들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던 황태자의 행동에 반감을 품은 수사관들은 빠르게 일을 시작했다.

함께 황성에 진입한 귀족들이 알현실에 놓인 황좌에 올라앉은 아르페시스에게 고개를 숙인 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가 살아 있는 관료들을 불러 국정 장악을 시작한 동안 에스메랄다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지금 그녀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선황의 집무실이었다. 잠시간 황태자가 쓰긴 했을 테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처분하지 못한 선황의 무언가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황태자가 다 찾았을 수도 있고, 찾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한 번쯤 뒤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국정 회의에서 쓸 수 있는 귀족들의 약점, 내부에서 은밀하게 오간 뇌물이나 불법 거래의 정황, 혹은 황제가 개인적으로 비축하던 비자금 같은 것들. 선황은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위에 머물렀다. 그토록 긴 시간을 함께한 집무실에 남겨진 것이 있다면 감히 그 가치를 잴 수 없으리라.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접견실에 있는 동안 집무실 앞에 도착했고, 서둘러 안에 들어섰다. 루기스가 그녀를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엎드렸다. 성벽 앞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루기스의 꼬리가 계속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루기스의 꼬리를 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색해라.”

함께 들어온 로부오들이 집무실을 뒤지기 시작했고, 감춰진 공간이나 선황만의 암호로 만든 서류들을 찾아냈다. 에스메랄다 역시 각종 행정 서류를 훑어보았다. 선황이 죽은 이후 황태자가 억지로 밀어붙이며 행한 많은 정책들이 그곳에 명백한 증거로 남아 있었다. 강제 징집과 징수, 그리고 전방에 배치된 징집병을 버리고 퇴각하라는 비겁한 명령서까지 모조리.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바랐던 선황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미 전부 털어 간 것인지, 선황이 집무실에 다른 것을 보관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하고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니 아쉬울 뿐이었다.

“쯧.”

짧게 혀를 찬 에스메랄다가 수색을 마친 후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로부오들에게 지시했다.

“머저리의 거처도 모두 털어 와라.”

아르페시스의 인지 범위는 황성을 넘어 황도를 가득 채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놓친 황족은 없다. 황태자비‘였던’ 제르아니와 그들의 두 자식, 그리고 자신의 궁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황후까지.

지금은 그들 모두를 황태자, 아니, 페라노스가 쓰던 궁에 감금한 채 감시 중이었다. 솔루베르 공작과 디오세네트 공작같이 선황의 세력에서 주축이었던 인물은 아르페시스가 최우선적으로 사살했다. 부친의 부고와 페라노스의 패전을 전해 들은 제르아니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다고는 하는데, 알 게 뭔가.

배필과 자식들, 그리고 친모까지 버리고 저만 도주하려던 페라노스의 인성에 정말이지 다시 한번 감탄하고야 만다. 에스메랄다가 비릿한 조소를 지어 보인 사이 로부오들은 집무실을 나섰다.

“백작님.”

로부오들이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간 직후의 일이었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며 아스터가 들어왔다. 가득가득하던 서류에서 페라노스를 공격할 수 있는 것들을 추려 내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단둘이, 라는 어조가 강한 말이었다. 에스메랄다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아르페시스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람들과 특별히 친분을 나눈 적은 없었다. 그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휴고와도 사적인 관계를 따지자면 불편한 사이였고, 다른 이들과 친분을 나누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다. 그런데 황성을 점령한 이 시기에 아스터가 대뜸 들어와 단둘이 대화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일인가?”

“전하의 눈을 거둬 주시길 바랍니다.”

단번에 그녀의 손목에 매달린 리본이 꼿꼿하게 솟아올랐다. 황성에 들어올 당시 손목에 묶은 것이었다. 리본의 끝자락은 아스터를 향해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그를 꿰뚫으려는 듯이.

“제… 청은 들어주지 않으시겠으나, 백작님의 청은 들어주실 겁니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아스터의 주변에서 파란 마나가 유형화된 채 떠돌고 있었다.

“그만해.”

푸른 물결은 곧장 사라졌지만 리본은 여전히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아스터를 향해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전하의 시선을 거둬 주신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아는 아스터라는 사람을 쭉 훑으며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아르페시스의 눈을 가리면서까지 전달해야 하는 것이라면 가볍지는 않으리라.

“아르페시스.”

허락과도 같은 부름에 아르페시스가 반발하듯 리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기로 오면 화낼 거야. 넌 할 일이 있잖아? 루기스가 있으니 괜찮아. 집무실 근방은 전부 비워 줘.”

리본이 뚝 멈췄다. 당장에라도 이동해 오지 않을까 해서 미리 경고를 한 말인데, 딱 맞혔나 보다.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웃으며 리본을 살살 매만졌다.

“당분간 각방을 쓸까?”

조금 더 방황을 하는 듯 보이던 리본은 곧 축 늘어졌다. 경고를 하는 것처럼 다시 피어난 파란 물결이 위협적으로 아스터를 휘감은 후 사라졌다. 확인차 그를 몇 번이나 불러 보았지만 그녀의 손목에 매달린 리본은 잠잠했다.

잠시 동안 제 손목과 리본을 내려다보던 에스메랄다가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집무실 근방에만 겨우 들릴 정도의 비명 소리.

층이 완전히 다른 접견실에 있는 아르페시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집무실 밖에 서 있던 다른 기사들이 다급히 들어왔다. 집무실 내부뿐만이 아니라 근방에 퍼져 있는 마나를 전부 거둬 간 것이다. 정말이지, 말은 참 잘 듣는다고 흡족해한 에스메랄다가 손을 내저어서 데미안을 비롯한 아르페시스의 기사들을 내보냈다.

데미안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아스터를 보았으나, 아스터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데미안은 머뭇거리면서도 집무실을 나서야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만.”

만약 조금 전 아르페시스가 주변의 마나를 모두 거두지 않았다면 아스터는…….

에스메랄다는 대뜸 저를 찾아와 무례한 부탁을 한 그에게 경고를 함과 동시에 이제 그만 얘기를 해 보라는 압박을 가했다.

아르페시스의 기사들 중에서 귀족의 말을 가장 잘 해석하는 아스터가 창백하게 질린 상태로 마나를 유형화시켰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뭘 하는지 몰랐으나 가만히 지켜보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잠시 무언가를 살피는 것 같던 아스터가 뻣뻣한 걸음을 옮기며 물어 왔다.

“전하께서… 글자를 보지 못하시는 게 확실한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투를 보아하니 아스터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꽤나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확신을 해야 할 만큼 기밀을 요하는 것이 대체 뭘까?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르페시스는 마나로 시야 밖의 상황을 확인하는 게 손으로 만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움직임이나 마나의 존재 같은 것은 쉽게 느끼고, 말소리는 공기의 울림을 집중해서 느낀 후 해석하는 것이라나?

그리고 종이에 적힌 글자를 느끼는 건 아직 자신의 마나 운용력으로는 힘들다고 말했다. 20대 후반 무렵의 운용력으로도 글자 자체를 읽지는 못하고, 글을 쓰기 위해 움직이는 깃펜을 보고 추론한 게 전부라고 했다.

“그렇다네.”

에스메랄다는 대체 아스터가 뭘 전하려고 이러나 싶어 확신을 전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같은 것을 꺼낸 아스터가 집무실에 있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니,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책상이 아니라 의자였다. 에스메랄다는 아스터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새겨진 양각의 조각 사이를 더듬더니 손에 쥔 열쇠를 끼워 넣는 중이었다.

그때부터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차게 식었다. 언뜻 보면 양각으로 새겨진 조각 때문에 생긴 그림자처럼 보이는 홈이었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로부오들까지 찾아내지 못한 비밀 공간을 알고 있고,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까지 가지고 있다. 그 두 가지 사실이 증명하는 건 아주 명확했다.

“이리 지척에 내통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선황이나 페라노스, 아스터가 그 두 사람 중 누군가와 내통을 했다는 의미다. 에스메랄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열쇠가 돌아가며 만들어 낸 달칵 소리와 함께 울렸다. 아스터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의자의 쿠션 부분을 들어 올려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는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배신을 택한 세작의 모습으로 보기는 힘든지라 조금 혼란스러웠다.

“선황 폐하께서 전달하라 명하셨던 것들입니다.”

제 입으로 누구와 내통했는지 그대로 토설하는 것도, 세작이 할 만한 짓은 아니다. 에스메랄다의 눈이 시린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어 움직이지 않자, 아스터가 그 물건들을 책상 위에 고이 올려 두었다.

“전하께서 마나를 다시… 그러실 수도 있으니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감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아스터를 잠시 응시했다. 그는 줄곧 손 안에서 소규모로 마나를 유형화한 상태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위아래로 쭉 살핀 후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가죽 책 한 권, 두툼하다 못해 두꺼운 봉투 하나, 아스터가 비밀 장소를 여는 데 사용했던 투박한 열쇠 한 정, 그 세 가지가 전부였다.

그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기억의 호수 속에서 과거의 순간이 튀어 올랐다. 제멋대로 수면 속을 벗어난 물방울에 떠오른 글자는 선명했다.

‘미안하다.’

페드로가 그녀와 했던 약속을 어기고 아르페시스를 따라 전장에 갔던 그 시기에 남겼던 말. 왜 그게 떠올랐을까? 지금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주먹을 꽉 말아 쥐어 떨림을 쫓아냈다.

“뭐야…….”

황제가 죽기 전까지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움에 불안감을 느꼈고, 죽은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불안했음에도 해소할 방법을 알지 못해서 꾹꾹 눌러 참아 왔을 뿐.

하지만 그것이 에스메랄다의 기우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지금의 순간이지 않나. 모든 것은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아르페시스는 제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득한 감각을 느껴야 하지?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했고, 아스터가 원상태로 돌려놓고 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열쇠를 옆으로 치우고 두툼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카 록트 에렘 에스메랄다.」

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찾아오던 구역질은 어디를 가고, 이렇게 스산한가.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선황이 무엇을 남겼든 흔들리지 않고, 현혹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펼쳐 본 것은 봉투가 아니라 가죽 책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편지로 보이는 것이 전달의 주된 목적 같고, 가죽 책은 그 참고 자료처럼 보였으니까. 내용을 가볍게 훑어볼 요량이었다.

「대륙력 1403년 사 33일.

부황 폐하의 장례를 마치고 무거운 황관을 머리에 짊어지었다. 길고 긴 전쟁을 이어받은 오늘 짐은 홀로 맹세해 본다. 반드시 지금의 세대에서 지겹기 그지없는 마룡과의 전쟁을 끝내리라. 그리하여 짐의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선물할 것이다.」

첫 장의 첫 줄을 읽자마자 이것이 선황의 일기임을 알 수 있었다.

날짜의 간격은 생각보다 길었으나 내용은 아주 차분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선황이 어떤 생각을 하며 제위를 이어받았는지, 즉위 초기에 그가 무엇을 목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는지 같은 것들.

에스메랄다는 선황이 왜 이것을 자신에게 남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스터를 통해서.

그렇게 인상을 구긴 상태로도 한 장, 한 장, 선황의 일기를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많은 해에는 1년에 십여 장의 기록이 있었고, 적은 해에는 서너 장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렇게 드문드문 남은 기록은 지금의 일기가 선황의 습관적인 일상이기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정도였다는 반증이다.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거나 감상을 남기고 싶을 때 쓰는 변덕 같은 일기다.

중앙 귀족들을 향한 환멸과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 황후의 사랑 고백에 느끼는 염증,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여 세력을 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까지,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한때 부친으로부터 선황이 즉위 초기에는 이상적인 황젯감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에스메랄다가 태어났을 때는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을 보고, 사람을 읽게 되었을 무렵의 그는 이미 권력을 탐하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을 누르는 데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황후가 황제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귀찮게 굴었다는 것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글로만 남은 그 흔적은 그녀가 보지 못했으나 그녀의 선대들이 보았던 선황의 과거였다. 이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꽤나 생경한 느낌으로 그것들을 읽어 나갔다. 그녀로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흔적을 훑는 기분이었다.

그 기록, 그 과거 속에는 선황의 적나라한 사생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색에 중독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호색한이라 보긴 힘들었지만, 선황은 꽤나 자주 여인을 찾을 정도로 여색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를 관찰하고 정의하며 헛짓을 하는 대신 직진하는 사람.

취향이 어떤지, 언제 여인을 품었는지 같은 것들도 종종 적혀 있었다. 이런 내용은 에스메랄다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의 사생아가 십수 명에 달한다는 건 알 만한 이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대륙력 1410년 라 7일.

펠릭스를 불러 한 소리를 해야만 했다. 짝이 있으면 데려오지 말라 했는데, 왜 짐의 침실에 들어온 계집이 남편이 있다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게 만드는가.

외관이 곱상하고 풍만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기는 했다만… 짐이 계집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짐승도 아니고, 짝이 있는 이들까지 탐할 정도로 굶주리지도 않았단 말이다.

어이고, 누구를 탓하겠나. 짐을 탓해야지. 마음에 차노라, 말하며 데려오라 한 적은 별로 없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끌고 온 게지.

적당히 걸러 아니 될 것 같다 말하면 될 것을……. 딴 놈들은 너무 간사해서 골치인데, 이 녀석은 너무 충직해서 골치구나.」

선황은 여인을 품는 일에 소극적이지 않았고, 자신이 원한 이들이라면 언제고 품었다. 하지만 기록 속의 선황은 그러한 사생활 속에서 강요는 있었을지언정, 강탈은 없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글을 읽어 나가던 에스메랄다는 어느 순간 다시 손을 떨어야만 했다. 가쁜 호흡을 고르지 못해 헐떡이자 원치 않았던 문장 앞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스메랄다는 아스터가 왜 아르페시스의 시선을 거두어 달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당장 달려올 테고, 그럼 이 기록을 보고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않나.

* * *

「대륙력 1414년 카 88일.

매일 중앙 궁의 후원을 바삐 걸어가는 계집이 있다. 벌써 한 계절째 꾸준히. 짐이 허락한 적이 없는데 하녀로 보이는 계집이 후원을 오가다니, 딱 보니 그곳을 지름길이라 여기고 멋대로 오가는 모양이다. 이곳이 중앙 궁인지도 모르는 듯 보이는 그 계집은 돌아갈 때 꼭 넘어진다.

손에 든 바구니에 옷감이 가득한 것을 보니 세탁을 하는 하녀다. 바구니가 가득 차 있으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바구니가 비기만 하면 어찌 매번 넘어지는지. 창문 너머로 보고 있노라면 저러다 무릎이 남아나지 않겠다, 싶을 정도다.

가장 귀찮은 건 넘어질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오후 2시가 되면 예외 없이 들려오는 통에 시계 같을 지경이다. 거슬리는구나.」

이상… 아니, 평범한 기록이었다. 귀족들도, 신하들도, 그들 중 누구도 언급되지 않은 평범한 내용.

에스메랄다가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는 동안 그녀의 손은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이어 다음 장에 적혀 있는 날짜는 그녀가 본 기록 중에서 간격이 가장 짧았다.

「대륙력 1414년 카 98일.

지름길을 오가는 것은 뭐라 하지 않을 테니, 제발 그 이상한 비명 소리 좀 참아 보라 말했더니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게 아닌가.

짐의 궁에 들어온 불청객은 그 계집인데, 왜 짐이 파렴치한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인지 모를 일이다. 괘씸한 것.」

에스메랄다는 묘한 표정으로 다시 종이를 넘겼다.

「대륙력 1415년 바 10일.

후원을 오가는 건 그냥 묵인해 주겠노라 분명 말했을 터인데, 요 발칙한 계집이 짐의 말을 무시하고 오지를 않는다.

요상한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조용해서 좋은데, 어찌 이리 마음이 허한지……. 곁에 두어 보면 이 허전함의 이유를 찾을 수 있으려나?

혼인을 하거나 정인이 있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벌써 그 계집에게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겠지.

그 요상한 비명 소리에 정이라도 들었나? 내일이 기대되는구나.」

조금 전보다 더 짧은 간격의 기록이 이어졌다.

「대륙력 1415년 바 11일.

혹시 이 계집을 몇 번이고 언급한 짐의 행동 때문에 펠릭스가 또 과한 짓을 했나 싶어 확인까지 했다. 그 녀석은 충직해서 좋은데, 가끔 너무 충직해서 사고를 치는 게 문제란 말이지.

꽤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편이나 정인이 없는지 물었더니 그런 것과는 연이 없었다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지 뭔가.

고작 그 한마디에 음심이 동하다니, 꽤나 신기했다. 손은 거칠었고, 몸은 잘 먹지 못한 것처럼 말랐다. 그런 것치고는 가슴이나 둔부가 풍만해서 품는 동안 간만에 즐거웠지.

침대보에 남은 혈흔이 다른 사내의 손길을 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지라, 상당히 흡족하다. 처녀를 품은 것이 처음도 아닌데 갑자기 웬 주책인지.

정사를 마치고 사정을 들어 보니 역시나, 세탁 일을 하는 하급 하녀다. 궁에 들어온 지는 1년도 되지 않아 자세한 지리를 몰랐단다.

시간이 적게 걸리기에 오가기 시작했다고, 중앙 궁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노라 고하며 바들바들 떠는데 참… 짐이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심드렁한 기색을 가장해 얘기를 재촉하니 어린 동생이 세 명이라 한다. 막내를 낳던 도중 어미가 죽었고, 아비는 3년 전 강도에게 찔려 죽었다고.

이후 동생들과 근근이 하루를 이어 가던 중 자수 일감을 주던 의상실의 마담이 황성 하녀 자리를 소개시켜 준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계집이 꽤 성실하고 타인에게 호의를 받을 만큼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랫것들에게 추천이란 그런 것이다. 그 마담은 훗날 이 계집이 황성에서 칠 사고에 대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돕고 싶었던 게지.

황성에서 일을 시작하고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 말하는 계집의 몸을 보고 입 안이 썼다.

형편이 나아졌다는 이의 몸이 저리 마른 이유야 빤하다. 황성 하녀의 봉급이면 평민치고 꽤나 괜찮은 수입일 텐데, 그것만으로는 넷이나 되는 입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곡물의 물가가 높기 때문이겠지.

남부의 경작지를 대거 잃은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피해를 야기하고 있다. 부황 폐하의 통치 기간에 오른 물가가 아직도 내려가지 못할 만큼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지 못한 짐의 과오를 마주한 기분이다.

아무래도 황권을 다지고 중앙군과 남부군, 군법 개편에 집중을 하다 보니 두루두루 백성들을 살피지는 못한 게지. 생각이 난 김에 곡물 유통량을 좀 늘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바란 상단이 너무 커져 가고 있지 않은가. 견제책이 필요하기도 했고, 적당한 이를 골라서 남부군과 일정량을 고정 거래하게 만들면 군의 유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유통망을 넓혀 공급을 늘리면 물가도 조금은 떨어질 테니… 전부는 불가능하더라도 배를 곯는 이들 중 누군가의 사정은 나아지겠지. 다른 곳의 백성도 짐의 백성인데, 그간 너무 남부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구나.

디오세네트는 이미 황후 자리를 주었고… 짐의 밑에 있는 놈들에게는 곡물을 맡기기 조금 꺼림칙하다. 반드시 돈 놀음을 하려 들 텐데, 훗날 그것을 엄히 단속하려면 짐의 손발이 아닌 자들이 좋겠지.

어디가 좋을까… 테몬은 이미 테메프 상단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더 얹어 주는 것은 과하다.

테노리엘 역시 병장기 쪽을 넓혀 가고 있으니 곡물을 얹어 주면 훗날 위협이 되리라.

쿠베트는 상단 쪽으로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 상계의 일이라면 모름지기 사기도 치고 거짓도 고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집안은 너무 순진해서 문제란 말이야.

아브람은 광물 쪽을 크게 벌이고 있으니 더 얹어 주면 안 되고, 테뷔르는… 소템과 엮여 있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이미 중앙에서도 한자리 거하게 차지하고 있는 소템이 곡물에서까지 발이 넓어지는 건 경계해야지.

이것저것 재고 따져 보니 루소멜이나 벨베크가 좋겠다는 결론이다. 수입을 원활하게 하려면 국경이 나을 테니 벨베크가 최선책이다. 백작이 젊은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완은 괜찮으니 한번 맡겨 봐야겠…….」

잠시 기록이 도중에 끊어진 것처럼 글자가 흐트러졌고, 옆에 잉크 자국이 남았다. 깃펜을 내려놓은 흔적이다.

「맡겨 봐야겠다. 조만간 백작을 불러 얘기를 해 보면 되겠지.

계집이 앓는다. 사내를 받아들인 것이 처음이라 몸에 무리가 간 것일까? 짐의 욕심이 과해 고생을 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야밤에 짐의 부름을 듣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올 주치의를 생각하니 꼬시구나. 잔소리꾼, 어디 고생 좀 해 보라지.

그러고 보니 계집의 이름도 모르는구나.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에스메랄다는 멍하니 그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

황제가 벨베크에게 면세를 제시하며 수입 곡물 유통을 늘린 것도, 그중 일부를 무조건 남부군과 저가 거래하도록 만든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일의 계기가 이런 것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륙력 1415년 바 17일.

주치의에게 전해 듣기로 몸을 회복했다기에 얼굴을 확인할 겸 불러 보았다.

이름은 ‘로라’, 귀엽다는 생각을 해 버릴 정도였으니 정말로 마음이 많이 기운 모양이다. 처음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괴상한 비명 소리를 지르는 귀찮은 계집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리되었지?

다시 만난 후부터 기분이 너무 좋은지라 부정을 할 이유가 없다. 로라라는 계집이 마음에 드는구나.

대뜸 또 하는 것이냐고 물으며 옷을 풀어 헤칠 때에는 잠시 동했지만… 짐이 병상을 떨친 이를 마구잡이로 탐할 만큼의 무뢰배는 아니지. 그럼, 그렇고말고.

오늘은 그저 얼굴을 보기 위해 찾은 것뿐이다.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자는 것이 꽤 예쁜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나저나, 옷깃을 풀어낼 때 시종장님이, 시종장님께서, 이런 말을 입에 담았지.

펠릭스 이놈이, 필시 나를 모시는 방법이랍시고 이것저것 가르쳐 준 것이렷다?

내 이 녀석을 정말… 침실에서 절로 배우게 둘 것이지, 왜 나서느냐 말이다. 짐의 망신은 녀석이 다 시키는구나.」

처음으로 종이를 넘기던 에스메랄다의 손에 망설임이 서렸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그 후 ‘로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선황의 일기 속에서 자주 등장했다. 국정 회의에서 귀족들과 드잡이를 한 내용을 쓴 날이 있는가 하면 그녀와의 정사를 적나라하게 그리며 흡족함을 남긴 날도 있었다.

「대륙력 1415년 바 50일.

펠릭스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로라를 너무 자주 찾고 있다나……. 확실히 침실에 이리 오래, 그리고 자주 들인 여인은 없었지.

황후가 또 못난 짓을 하기 전에 적당히 멀리해야겠다.

벨베크가 꽤나 적극적으로 나오니 당분간은 곡물 쪽에 신경을 쓰면서 중앙군의 인재들이 자라기를 기다려야 하고… 규율과 인원을 손본 종자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기사가 될 테니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구나.

그사이에 실테르 쪽과 회담을 잡는 것도 좋겠지. 그들은 철광에 허덕이는 중이니 주고받을 것이 명확하다.

한번 일을 벌여 놓으니 생각보다 방법이 많다. 진즉에 해 놓을 것을, 서둘러 외교부를 다그쳐야겠구나.」

하지만 멀리하겠다는 내용과 달리 그 후에도 로라의 이름은 틈틈이 언급되었다.

「대륙력 1415년 바 81일.

로라의 살결이 그립다. 고작 일곱 번 품은 계집이 왜 이리 자주 생각난단 말인가?

이런 망할, 아랫놈들이 상스러운 욕설을 왜 쓰는지 알겠구나. 다른 계집을 품어도 즐겁지가 않다. 짐의 침대가 이리도 넓었나? 마음이 허하다.」

정확히는, 대부분이 로라의 이야기였다.

「대륙력 1415년 바 97일.

펠릭스가 로라의 소식을 가져왔다. 짐이 떡하니 살아 있는데 사내랑 단둘이 얼굴을 붉히며 대화를 나누었다니!

괘씸한 마음에 당장에 로라를 불러오라 소리를 지르고 나니 후회가 되어 말을 거두었다. 따지고 보면 후궁이나 황비로 들인 것도 아니니, 누구든 만날 수는 있지 않나.

로라는 제국법상 미혼이다. 짐이 그 아이를 취했다 하여 짐의 여인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괘씸하다. 짐의 품에서 그리 어여쁘게 울었으면서, 사내랑은 연이 없다 말해 놓고, 한 계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딴 놈과 만나다니!

되었다. 괜히 정을 더 붙였다가는 황후에게 빌미만 주겠지. 적당히 멀리하려면 마음을 쓰지 않는 게 맞다.」

그다음 장에서는 로라의 이름이 일기 속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또다시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긴장이 되는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스멀스멀 피어나 그녀의 발치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것은… 공포인가, 아니면 불안감인가.

잠시 후 다시 안정을 되찾은 녹색 눈동자가 이어지는 기록의 날짜를 집요하게 훑었다. 15년, 15년, 그리고… 15년. 다시 그녀가 등장했다.

「대륙력 1415년 사 30일.

한 해도 지나지 않았건만 로라를 다시 찾고야 말았다. 짐이 이리 줏대 없는 행동을 할 줄이야. 그래도 품으니 좋다. 잠에 빠진 로라를 두고 일어나 깃펜을 쥐기까지 대체 얼마나 걸린 것인지…….

그 마구간 놈팡이는 어찌 만난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황제가 되어 옹졸하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노라 고할 수도 없지 않나.

궁에 들인 것도 아니라 짐의 여인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미혼의 여인이 다른 사내와 말 좀 나눈 것으로 처벌하는 것이야말로 폭정의 시작이겠지.

하지만 이리 마음에 드는데… 차라리 후궁으로 들일까? 후계를 낳아도 계승권이 없으니 귀족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봄 중에 로라를 자주 찾았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황후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로라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은밀히 불러온 것이지 않은가. 골치구나.

이리 한숨이 나오는 와중에도 잠든 모습이 어여쁜 것을 보면, 짐이 이미 마음을 다 빼앗긴 모양이다. 이 나이가 되어 가슴이 설렌다는 것을 이해할 줄이야.」

제발, 다음 장은, 다음 장은, 하고 바라며 날짜를 눈에 담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대륙력 1415년 사 33일.

품에 안겨 얼굴을 붉히는 게 너무 어여뻐서 조급해졌던 것일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입이 멋대로 나불거리며 질문을 끝낸 참이었다. 짐이 찾지 않을 때 섭섭하지는 않았느냐고.

섭섭한 것은 짐이었는데 로라를 떠보다니, 이리 볼품없게 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황제가 아니라 사내로서의 짐은 꽤나 한심하구나.

백성 된 도리로 짐을 모시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니, 돌아온 답이 참으로 섭섭했다.

황제의 권위 때문에 억지로 살을 섞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 할 때도 짐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데. 짐이 원하기에 품은 것이지 않나.

멋대로 취해 놓고 멋대로 실망하다니, 꼴불견이구나.

싫다 하면, 앞으로는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싫은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놔줄 각오까지 다져 보았다.

차마 있는 그대로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고, 제대로 답하기엔 곤란한 질문이 될 터이니 말을 빙빙 돌려 왜 마구간에서 일하는 그놈과 잘해 보지 않은 것이냐, 하고 물어보았다.

겁쟁이가 다 되었다 싶어 침울해 있는데 로라가 짐을 들뜨게 만들지 않겠나?

짐이 짝이 있는 여인은 품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어서 거절했단다.

붉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답하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말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들다니, 요망하구나.

앞으로도 짐에게 와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로라는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곁에 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짐이 생소하다. 여색에 홀려 가문과 나라를 말아먹은 사내놈들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홀려 버린 게 분명하다.

묻는 대로 전부 답을 하는 것을 보니, 로라는 자신을 감추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당당한 것이지.

이런 이들은 성정이 지나치게 솔직한 만큼 거짓과는 연이 없다. 억지로 시켜도 성과는 기대하기 힘들기에 황실에 어울리지 않는다.

후궁으로 들여 봤자 황후에게 시달리며 겪을 고생길이 훤하다. 이 때문에 황실에는 들이지 않겠노라 마음을 다잡는데, 입 안이 쓰다.」

「대륙력 1415년 사 31일.

앞으로는 로라를 만나는 데 더한 신중을 기해야겠다. 황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야지.

죽이는 것만은 못 하게 막아 왔다만… 그놈의 사랑 타령.

짐의 마음이 로라에게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면 어찌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우선은 로라를 감추는 것부터다.

이미 로라를 초기에 자주 찾으며 낌새를 흘려 버렸다지만 이후 따로 찾는다 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언제 만나는지도 모르게 하면 짐이 로라와 만나는 것을 어찌 알까? 다른 계집으로 가리면 로라를 숨기는 건 충분하다.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역시 세상일은 어찌 돌아갈지 모르는 법이지.」

「대륙력 1415년 사 43일.

로라를 가리기 위해 최근 꽤나 난잡하게 굴었더니 마음에 돌을 얹어 둔 것만 같다. 짐에게 닿는 계집들의 손길이 이리 거북했던가? 침실에 로라 외의 여인을 들이는 것이 괴롭다.

태어나 처음으로 먹은 음식을 게워 냈더니 궁의 주치의와 펠릭스가 난리를 피우는 통에 골이 울릴 지경이다.

요즘 두통이 심해져서 그런지 저 잔소리꾼들의 말이 참으로 고깝다. 저 칙칙한 놈들 말고 로라가 보고 싶구나.」

「대륙력 1415년 사 60일.

몇십 일 만에 만든 자리임에도 곁으로 오는 것을 꺼려하기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입을 맞추어도 예전처럼 수줍게 웃어 주지 않고, 살을 섞는 동안에도 짐을 보지 않으려 하니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너무 오랜만에 찾아와서 서운했느냐고, 아니면 이제 짐이 싫어져 그러는 것이냐고 어르고 달랬더니 울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울먹임에 먹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말을 주워 담아 보니, 최근에 다른 계집들과 놀아난 것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죄인의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로라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기대감이 모락모락 차올랐으니, 짐은 정말 사내로서는 훌륭하지 못한 모양이다. 벌써 짐의 나이가 마흔 줄인데, 로라는 아직 창창한 20대이니 짐이 눈에 차겠는가 말이다.

주치의와 펠릭스의 잔소리에 몸 관리는 꾸준히 해 왔다만… 이거 참, 계속 신경 줄을 건드는구나. 나이가 부끄러울 날이 오다니. 훈련을 조금 늘리고 관리를 더 해야겠다. 주치의에게 영약도 잔뜩 들여오라 해야지.

그리 불안했음에도 짐이 황제이기에 모시는 것인지, 아니면 사내로 보기에 설레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짐이 좋으냐고, 후궁으로도 들여 주지 않는데 밉지는 않느냐고, 넌지시 떠보니 그 예쁜 입술로 짐을 뒤흔드는구나.

모든 것은 황제인 짐의 뜻대로 해야 함이 맞는데, 다른 여인을 찾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솔직히 말하며 우는 것을 보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짐은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사내로서 로라의 심장에 들어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해 웃어 버리니, 그게 또 섭섭했는지 또다시 울음보를 터트렸지 뭔가.

품에 안고서 짐의 사랑을 고해 주니 그제야 그치고. 어쩜 이리 예쁜 짓만 골라 하는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천사 같구나. 잠든 그녀를 두고 홀로 앉아 상념을 거니는데, 복잡하다.

어쩌다 이리도 깊게 빠져 버린 것일까. 이 뭉클한 것이 사랑이라니, 참으로 무서운 감정이다.

짐이 사랑을 고하고, 짐에게 사랑을 고해 주는 여인과 보내는 밤은 열락과 함께였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누는 정사는 쾌락을 좇는 짐승의 것과는 달랐다.

분명 이 에렘의 황제는 짐인데,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는 것도 뜻대로 하기 힘들다. 심란하구나. 곁에 두고 싶은데, 두어서는 안 되겠지. 짐의 욕심으로 아프게 하는 것은 첫날의 일로 충분하지 않은가. 소중히 품고 싶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짐이 황제인 것인지……. 처음으로 짊어진 것을 다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복잡한 밤이 짙어져 간다.」

「대륙력 1415년 사 92일.

로라에게 아이가 들어섰다. 의원의 말을 전해 듣자 하니 5주가 조금 안 되는 것 같다 한다.

줄곧 바빠 로라를 만나도 품지 못하고 잠드는 날뿐이었으니, 그날이구나. 그녀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열락의 밤에 찾아온 아이구나. 이리 기쁠 데가 있나.」

읽어 버린 글이 많아질수록 에스메랄다의 호흡은 가빠졌다. 눈앞에 보이는 날짜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믿지 않으려 발악했다.

「대륙력 1416년 라 58일.」

선황이 남긴 기만책이다. 되지도 않은 수작이다. 읽을 가치도 없는 것이다. 덮어라.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으나 그녀는 글자를 계속 읽고 있었다.

「아들이다. 건강한 아들이다. 짐을 꼭 닮은 어여쁜 아들이다. 핏물을 제대로 닦을 여유도 없이 품 안에 안아 본 아이는 짐의 한 손으로도 안을 수 있을 만큼 작고, 세상의 모두를 매혹시킬 만큼 사랑스러웠다.

첫 아이를 볼 때는 덤덤하기만 했는데, 이 아이에게는 그럴 수가 없구나. 감정이 이토록 많은 영향을 미치는구나. 안아 보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참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지.

산통이 시작되었단 말을 들었을 때는 당장에 암행을 나갈 준비부터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품에 안아 본 것은 처음인데 어찌나 예쁘던지. 달려가지 않았으면 평생을 후회했을 것이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 논해야 할까? 아이와의 첫 만남이 준 감동의 끝에서 찾아온 것이 죄책감이라 비참하구나.

혼외자를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니건만 왜 이제야 이런 감정을 배우는지, 짐이 다른 아이들에게 보인 부정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로라와의 아이를 만난 후에야 깨닫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아이들에게는 지금 같은 뭉클한 사랑이 생기지를 않는데. 로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특별한데.

아비 없는 자식으로 자라야 할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루하루 자라나는 아이의 곁을 지켜 주지도 못하겠지. 어느 날 몰래 찾아가 훌쩍 자라 버린 아이를 보며 슬피 웃게 될 날이 훤히 그려진다.

짐의 아들임을 알려도 평생을 혼외자로 손가락질받으며 살게 될 뿐이다.」

긴 틈을 두고 이어 간 것처럼 마지막 문장의 필체가 달라졌다.

꾹꾹 눌러쓰는 바람에 굵어진 흔적이 마지막 문장을 쓰던 당시 필자가 얼마나 감정적이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놀려 다음 장을 펼쳤을 때, 1년을 훌쩍 넘긴 날짜의 기록이 나타났을 때 드디어,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그녀가 마주한 가혹한 현실은 얼룩덜룩 일그러진 종이와 함께였다. 마치 필자가 울기라도 한 것처럼, 물기에 녹아내린 잉크는 제멋대로 번져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대륙력 1417년 라 61일.

로라가 죽었다.」

공식적으로, 아르페시스의 탄생일은 대륙력 1417년 라 58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태어난 날은 16년 중 언제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의 친모가 황비로 입궁한 이후 태어난 것으로 만들어야 했으니 출생 신고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황제가 그의 탄생일을 같은 날짜로 맞췄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1년을 꼬박 기다릴 만큼 황비의 입궁 절차가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분명 자작가 출신으로 황성에 입궁한 황비는 아르페시스가 태어난 17년 무렵에 산고의 후유증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16년에 죽었을 것이라고, 아르페시스가 실제로 태어난 날에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왜 여기에 남은 일자는 17년인가? 그의 과거에 남아 있는 진실이 너무 참담해서 에스메랄다는 가슴께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 * *

‘걱정할 것 없다. 짐이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어느 누구도 아이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짐이 그리 만들 게야.’

로라가 황비로 입궁한 가을의 끝 무렵, 그녀의 회임 소식이 공표되었고 이듬해 여름 아이는 황실의 적자로 태어났다.

계승권이 없는 후궁도 아니고 황비의 후계는 황실의 일원으로 계승권을 가질 수 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자리에 로라를 들인 건, 아이가 그의 아들로서 가져야 할 것을 모두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계승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위와 관련된 문제였기에 디오세네트 공작과 거래를 했다.

로라의 입궁 후 페라노스의 황태자 책봉과 관련된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혼외자로 둘 수가 없어서 적법한 자신의 후계로 인정하고, 황실의 고귀한 후손으로 자라 그의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쥐여 줄 생각이었다.

황비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 때는 잠잠하더니, 실제 로라가 입궁한 이후 황후가 그를 몇 번이고 찾아왔다. 하지만 만나지 않았다. 그와 황후는 후계를 본 이후 공식 행사가 아니면 마주치지조차 않았기에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 여겼다. 괜히 만남에 응했다가 그가 로라를 사랑하여 곁에 들였다는 인식을 주느니, 평소처럼 무시하는 것이 나았다.

이미 황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공작이 동의했다는 건 황실을 지지하는 세력이 동의했다는 말이다. 황후라 해도 막을 수 없다. 제위는 약속대로, 황후에게서 난 페라노스가 이어받을 것이다.

디오세네트를 위시한 귀족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며 두 사람을 황실에 들이기 위해 고르고 고른 방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겁고 험난한, 그리고 버겁기까지 한 제위를 그와 로라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줄 수는 없지.

아이는 앞으로 황제인 그가 만들어 나갈 평화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 그가 태어난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아르페시스.’

‘아르니스’라는 고어에 그의 이름을 넣어 아이의 이름을 지은 이유였다. 행복을 거머쥘 사람, 이름처럼 반드시 그리 살 수 있게 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간절한 일이었기에 강행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실수였음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라?’

아르페시스가 태어났다고 공표된 지 사흘, 지나친 편애는 독이 될까 우려해 황비 궁에도 몰래몰래 담을 넘어가듯 찾아갔던 1여 년이었다. 마냥 행복하기만 하던 그 시간의 끝에서 펠릭스가 가져온 건 로라의 부고였다.

그는 하얗게 질려 있는 자신의 신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때때로 충직함이 지나쳐 사고를 칠 정도로, 제 자식들보다, 가족들보다 그를 더 귀하게 여기는 펠릭스가 이런 일로 거짓을 고할 리 없음을 안다.

하지만 거짓이다. 로라가 죽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호위를 얼마나 치밀하게 짰는데, 목숨을 내걸어서라도 그녀를 지킬 만한 충직한 시녀로 곁을 가득 채웠는데, 왜 그 시녀가 로라를 난자해 죽인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끔찍하게 난도질을 했으면, 황성에 머무는 신관을 데려가기도 전에 로라가 세상을 떠난단 말인가!

‘알…….’

분명 거짓임에도 그는 이 소식이 진실임을 안다. 그가 아르페시스의 안위를 채 다 묻기도 전에 펠리스가 답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황비 전하께서 몸으로…….’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켜는 순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폐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주치……!’

‘소란 피우지 말라!’

짧은 어둠의 끝에서 서둘러 돌아온 그는 자신을 부축해 준 펠릭스의 입을 막았다. 아르페시스가 태어난 이후 줄곧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몽롱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지상으로 추락하며 또렷해졌다.

‘화, 황후가… 했더냐?’

‘……가능성은 가장 높습니다. 조금 전에야 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황비 전하를 찌른 시녀의 가족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협박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려 페라노스의 태자 책봉을 내어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후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공작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 이 일을 빌미로 그가 페라노스의 태자 책봉을 무를 수도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고 여겼다. 오만했다. 그의 오만이 불러온 참사였다. 감정에 취해서 천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날뛴 결과가 이것이다.

‘오만함은 너를 실패로 이끌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게다. 때때로 휘두를 수 있도록 가지고는 있되, 결코 도취되지는 말아라.’

그 순간 부황의 가르침이 저주처럼 다가왔다. 숨을 한 번 삼키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오만 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사라졌다.

‘펠릭스.’

‘……예, 폐하.’

‘황후가 어디까지 확신하고 있느냐?’

그는 이미 감정에 취해 사고를 쳤고 로라는 죽었다. 그건 무를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아르페시스까지 그리 둘 수는 없었으니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두 분이 은신처에서 만나신 건 모릅니다. 계승권 때문에 폐하의 총애가 기운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 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펠릭스가 저리 확언한다면 사실이리라. 그는 그 정도로 유능한 신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끔찍한가?

그는 혼례 전부터 제게 사랑 타령을 하며 귀찮게 굴던 황후를 떠올렸다. 무려 태자 위를 내밀었는데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고작 의심 하나로 그가 직접 들인 황비에게 살수까지 더할 줄이야. 설마, 명확한 확신조차 없이 그가 직접 공작과 거래를 해서 들인 황비를 이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가 겪어 보았으니 짐작했어야 하는데, 잘 감추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니. 공작에게도 로라를 황비로 들이는 이유를 보여 주지 않기 위해 허수를 가득 두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오늘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상황이 어떠하든,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이미 탐욕에 홀려 사고를 친 상태였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펠릭스가 오늘 황비 궁에서 있었던 일을 어둠 속에 묻어 버릴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게. 그가 바랐으니 충직한 펠릭스는 목격자 하나 남기지 않으리라. 그리해야만 한다.

감정에 취해 똑바로 보지 못했던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영민한 머리가 많은 것을 보고, 집고, 파헤쳤다. 넘어졌던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은 그는, 가장 먼저 아르페시스를 황성 밖으로 빼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이미 입적한 이상 황성 밖으로 내보내 보았자 황후가 쫓을 것이다.

로라가 죽은 상황에서 아이를 밖으로 대피시키는 건, 그가 아르페시스를 지키고자 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내보내는 순간 역시나, 하고 달려들겠지. 급사했다고 처리한 후 빼내는 것도 의심을 심어 줄 터, 결국 내보내는 것보다 곁에 두는 것이 낫다.

그럼 다음 문제, 황성에 남은 아르페시스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거기서부터 그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끼고돌까?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세력을 쥐여 주면서 그가 직접 보호하면 안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을 느낀 순간 그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로라의 부고를 가지고 왔던 펠릭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의 귓가에서 울렸다.

아무리 단단히 호위를 짜도 한번 뚫리면 끝이다. 죽음이란 마지막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지막. 이미 일이 벌어진 후 죽은 이를 붙들어 보았자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로라 역시 그 한 번을 피하지 못하기에 죽은 것이다.

그는 미래를 알 수 없는 한낱 인간이다. 발버둥을 쳐 가며 지켜도 오늘처럼 단 한 번, 아르페시스에게 닿는 죽음이 있다면 그는 아들을 잃는다.

상실감이 무엇인지 배운 맹수는 극도로 예민해지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이제 겨우 몸을 뒤집고 손을 바동거리던 아르페시스가 핏물에 잠겨 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건 안 된다. 그것만은.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 또한 할 수 없기에 섬뜩하리만치 무섭다.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단 한 번의 위험에 겁을 집어먹은 그는 문제의 단 한 번조차 없는 길을 찾아 나섰다. 결국 품에 끼고 사는 것도 아르페시스에게 독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황위를 주겠다는 뜻을 보일까? 신흥 세력을 키워서 붙여 주면……. 아니, 그것 역시 독이다. 페라노스에게 주려던 황위를 아르페시스에게 돌리면 디오세네트 공작까지 움직일 터. 죽음의 위협이 더 거세지는 악수다.

결국 페라노스의 태자 책봉을 받아 낸 공작이 움직일 이유가 없는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면서, 황후가 아르페시스를 노릴 이유도 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고작해야 그가 죽기 전까지.

그가 죽은 이후에는 계승권 때문에라도 훗날 아르페시스의 존재가 계속 부각될 것이다. 그의 탐욕이 아이에게 쥐여 준 그 망할 놈의 계승권. 그저 그의 아들이기에 가져야 당연한 권리였을 뿐인데, 그게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하나라도 더 쥐여 주고 싶어서 날뛰다가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가 죽으면 누가 아르페시스를 지켜 주나. 외가도 없고, 세력도 없는, 그의 아들이기만 한 황자를 누가 지켜 주는가 말이다.

마흔이 넘어 겨우 만난 아이가 아닌가. 그가 늙어 죽음을 앞두게 되어도 아르페시스는 겨우 2, 30대에 불과할 것이다.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나이에 죽게 두려고 곁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과오가 아들의 발목을 잡는다.

‘어리석기는…….’

가장 고귀한 자로 나고 자란 그는 자신이 망가트린 아들의 인생을 보며 가만히 앞날을 정리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아르페시스가 안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위…….’

계승권 때문에 위협당할 운명이라면, 그 계승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을 쥐어야지. 외가도, 세력도, 힘도 없는 황자는 숨어도 들킬 것이고, 숙여도 경계받을 것이다. 그의 욕심 때문에 계승권을 가지게 된 아르페시스가 오래 살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황후도, 페라노스도, 모두 밟고 올라서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깊고 깊은 상념의 아래로 내려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앞일을 더듬었다.

황후를 죽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리했다가는 디오세네트를 필두로 십수 년간 키워온 그의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가 직접 키우고 다져 온 권력은 아직 굳지 못했다. 쥐고 휘두르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페라노스가 있는 이상 그들은 언제고 마음을 뒤집을 수 있다. 괜히 제위 문제로 귀족들을 자극했다가 그가 죽기라도 하면, 아르페시스를 지킬 사람이 일찍 죽어 버리는 최악밖에는 되지 않는다. 아직 그의 황권은 단단하지 않고, 그의 방패는 완벽하지 않다.

아르페시스가 황성에 있는 동안에는 제위를 주고자 하는 뜻을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아이에게 권력을 모두 빼앗길까 걱정한 귀족들이 페라노스를 제위에 올리려 들겠지.

‘내전…….’

결국 아이가 클 때까지 시간을 번 후 황좌를 강탈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주르륵 이어졌다.

어차피 황성 내에 남아야 할 아르페시스의 안전을 지키려면 이유가 필요했다. 황후가 아이를 노리지 않을 명분. 당장 필요에 의해 입적된 자식이 될 경우 안전 하나만큼은 보장할 수 있다. 그 명분을 남부의 마수로 만들자. 그럼 아르페시스가 자랄 때까지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아들이 떡하니 있는데 위로 난 딸을 전장에 내보내면 페라노스의 체면이 상할 것은 당연한 사실, 해서 밖에서 난 아들을 새로 들인 것인데 황후가 그것을 방해했다. 이게 진실이 되어야 한다. 아니, 이미 진실이다. 그가 그것을 바라니까. 그렇게 하면 사랑 타령에 미친 황후의 눈에서 아르페시스가 벗어날 것이고, 황성에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안전해진다.

스스로의 행보를 되짚어 본 그는 뻣뻣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로라에게 모여드는 시선을 배제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황비 궁을 방문한 적이 거의 없다. 기록에 남은 방문은 고작해야 입궁 시기에 있었던 합방과 회임 소식을 들었을 때, 아르페시스가 태어난 날 찾아갔던 것까지 합해 세 번이 전부다.

디오세네트 공작과 거래를 할 때도 로라에 대한 사적 감정이 아니라, 황비의 입궁을 통해 반황실 세력에게 혼인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허수를 두었다.

회유, 포섭, 혹은 인질을 들이는 협박까지. 페라노스가 태어난 이후 막아 두었던 혼인의 패를 꺼낸 셈이겠지. 실제 로라를 가리기 위해 후궁과 황비를 더 몇 들일 생각이었으니, 그대로 진행하기만 하면 된다.

여지는 많다. 오해와 거짓말로 산을 쌓을 공간과 틈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훗날 아르페시스가 전장에 가야 한다는 명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유년기를 보낼 황성에서의 안전을 위해 필요에 의한 자식이 되면, 미래에는 전장에 가야 한다.

살리기 위해 사지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게 대체 무슨 모순인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르페시스가 고작 세 살, 다섯 살, 열 살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본 그는 겁쟁이가 되어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위협보다 눈에 보이는 마수의 이빨이 안전한가? 정말로? 스스로에게 물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시스의 곁에 놔두는 이들 역시 결국은 사람이다. 인간은 참으로 모호한 존재이기에 언제, 어느 방식으로 튈지 모른다. 차라리 일관적인 마수가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변수가 적다. 이것도 저것도 다 위험하지만 그중에서도 굳이 나은 것을 고르라면 마수다.

이후에는? 아르페시스가 남부 전선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지?

결론은 간단했다. 매해 수만이 죽어 나가는 그 사지에 오래 있지 않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아무리 인간보다 마수가 낫다 해도, 전장 역시 눈먼 돌에 맞아 죽는 사지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황실의 명예를 위해 밀어 넣은 사지에서 빠져나오도록 만들 수 있지?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빠져나오지 않고 사라지면 된다고. 아르페시스가 전장에서 전사한 것으로 꾸미면 황권과 얽힌 모든 위협에서 자유로워진다. 쉽고, 확실하고, 명쾌한 방법이었다.

분명 그것을 아는데 왜 이토록 억울할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꼴이 되고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해야 할 아이가 황후와 귀족들의 눈을 피해 도망쳐, 평민들 틈에 뒤섞여 산다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 하나뿐인 자식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잘못은 그가 했는데 왜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것을 잃는 건 그의 아들이어야 하나.

싫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그의 심장에 자리 잡은 탐욕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쥐여 주고 싶다는 치졸한 탐욕에 또 한 번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가 머릿속에 떠오른 명확하고 확실한 방법을 외면해 버린 이유였다. 고작 한 명의 이기와 탐욕이 만들어 낼 미래가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의 선택지를 당연하다는 듯 외면한 그는 생각을 이어 갔다.

‘남부군…….’

남부에서 황도로 돌아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 아르페시스는 남부군을 움켜쥐어야 한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황제인 그가 남부군과 틀어지면? 찬탈에 대한 욕망이 생길 정도의 폐단을 미리 쌓아 두면? 그들은 외가도, 세력도 없는 황자의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폭정…….’

지금 가지고 있는 세력이 전무한 아르페시스에게 힘을 실어 줄 만한 이들과 황제인 그의 관계가 틀어지면, 가능성이 보인다. 남부군의 예산 감축으로 그들의 무력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연스럽겠지.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온 과거가 이상해지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가 점점 권력에 집착하게 되어 버린 것처럼. 그렇게 내륙의 정세를 바꾸며 남부군이 조급해질 정도로 목줄을 조이면, 훗날 아르페시스가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을 정도로만 조이면 된다.

다음으로는 내전에 동원할 수 있는 외부 세력과 아르페시스가 거래를 할 수 있을 만한 패를 남겨 놔야겠지. 예를 들면… 실테르가 간절히 바라는 철광석.

훗날 아르페시스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그들이 얻어 갈 것 역시 있어야 도움을 제공하든, 거래를 하든, 끼어들 동기가 생기겠지. 상황을 천천히 악화시키면서 원하는 것이 생기도록 몇몇 세력들에게 결핍을 안겨 주어야 한다. 그러한 결핍을 아르페시스를 통해서 채울 수 있게 된다면? 아이의 필요가 두드러지면 위로 올리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겠지.

‘영웅…….’

황실의 명예를 위해 이용당한 황자는, 남부에서 제국을 구하고 폭정을 일삼는 황제와 황태자를 징벌해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럼 내전의 명분도 적당히 챙길 수 있고, 동조하는 귀족들도 생겨날 테지. 폐단과 심판, 영웅과 정의가 만들어지면 가능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가능성과 희망이 그의 손에 잡히고, 걸리고, 흔적을 남겼다. 테노리엘, 테몬, 쿠베트, 아브람, 록스, 라히크같이 그의 것이 아님에도 강한 가문들이 훗날 내전이 필요하다고 여길 정도의 상황이 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선 악이 있어야 하고, 영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악마가 있어야지.

내면에서 오간 생각은 길었으나 외면에서 흐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황후 궁으로 갈 것이다.’

결론이 나자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의 욕심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그는 아르페시스에게 걸음하는 대신 황후 궁으로 향했다. 꾸준한 훈련을 해 온 체격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건장했고, 만인의 정점에 서기 위해 황제로 나고 자란 걸음은 당당했다.

황후 궁에 도착한 그는 표독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손찌검을 해 보면 어떨까, 목을 비틀면 지금의 기분이 나아질까, 수없이 많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끝끝내 그것을 모두 삼킨 그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삭막했다.

‘짐이 이래서 그대를 경멸하는 것이오.’

저가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저에게 향하는 감정이 부당하다 악을 쓰는 저 계집을 증오한다. 화를 내야 할 것은 그이건만 도리어 화를 내고 있는 저 계집의 모든 것이 가증스럽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감정 중 밖으로 새어 나온 것은 없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지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할…….’

‘황후 자리에 앉혀 주었을 때부터 줄곧 그 사랑 타령 좀 그만하라 일렀소. 짐승이라도 그리 자주 들었으면 알아들었을 거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분노는 없었다. 그저 경멸뿐. 그에 혼란스러운지 황후라 불리는 여인의 자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행히 새끼가 살았으니 조용히 넘어가는 거요.’

이런 저급한 단어로 그의 아들을 칭하고 싶지 않았다.

‘무…….’

지금부터 황후는 제멋대로 상황을 판단해 그의 큰 그림을 망친 방해꾼, 그 이상도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지 그의 욕심으로 일을 그르친 지금, 아르페시스를 황후로부터 지킬 수 있다.

‘어련히 알아서, 조용히 치울까.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일 정도로 멍청하고 무능하니, 짐이 네년을 좋게 볼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비의 반만 닮았어도 쓸 만했을 것을.’

경직되어 있는 황후의 앞에서 그는 오해를 낳기 위해 거짓을 입에 담아 본다.

‘란을 전장으로 보낼 게 아니라면, 앞으로는 얌전히 있으시오. 일이 충분히 꼬였으니, 짐이 그대의 뒤치다꺼리를 또 한 번 하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오.’

말을 마친 그는 등을 돌렸다. 황후 궁을 빠져나온 그는 분명 위태로웠지만,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내디딘 걸음이 그것을 가렸다.

집무실로 돌아와 다시 혼자가 된 후에야 아득한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앞으로 그가 그려야 할 크고 잔혹한 그림이 벌써부터 버겁다.

너무, 성급했다. 처음 겪어 보는 사랑과 부정에 취해서는 자신을 찾아온 탐욕에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순응했다. 그게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꽁꽁 숨겨 두었어야 했다. 이렇게 만인의 눈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 잔악한 황후가 두 사람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도록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의 힘으로 두 사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오만하게 그리 믿었다. 그 결과가 로라의 죽음이다. 곁에 두고서 감정도, 물건도, 사람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것은 다 주고 싶다는 그의 탐욕이 아르페시스의 인생을 망쳤다. 그럼에도 또 한 번 탐욕에 굴복하고야 만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길고 긴 전쟁을 이어받은 오늘 짐은 홀로 맹세해 본다. 반드시 지금의 세대에서 지겹기 그지없는 마룡과의 전쟁을 끝내리라.’

하지만 떨리는 숨이 그 과거를 떨쳐 내 버리고야 만다. 한평생 사랑하기로 맹세했던 백성들을 배신하게 되더라도 하나뿐인 아들의 미래가 더 중요했으니까. 결국 그는 훌륭한 사내도, 훌륭한 황제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아비이기를 택했다. 그마저도 훌륭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훗날 아르페시스가 거둬 가야 할 것이 그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할지라도 흔쾌히.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만든 사내가 생각을 더듬는 동안 기울어 버린 해는 이미 하늘을 떠나 버렸다. 그렇게 어둠과 함께 창궐한 탐욕으로 인해 희극인지, 비극인지 알 수 없는 긴 연극의 막이 올랐다.

* * *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 선황은 권력에 집착하고, 자신을 향한 도전을 용서하지 않는 폭군이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핏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고, 누명은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그런 잔혹한 인물.

그 고정관념,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로 자리 잡은 생각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선황이 남긴 발자취를 좇아가는 내내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씹었다. 헐어 버려서 상처가 날 정도로 잘근잘근.

로라가 죽은 이후부터 천천히 아르페시스가 사생아라는 소문이 흘렀고, 더 천천히 그가 전선에서 이용하기 위한 장기 말이라는 정황이 쌓여 갔다. 그렇게, 거짓은 진실이 되어 버렸다. 선황은 황후에게서 그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이용 가치로 덧칠해 놓은 것이다.

로라를 잃은 후 그는 아르페시스의 안전에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집요했다.

「란을 다듬어 놓아야겠다. 후에 다가올 그 날에 알이 상대하기 쉽도록, 망가트려 놓는 것이 좋겠지.」

선황은 페라노스의 성장에도 관여했다. 그의 사고방식, 성품, 그리고 일 처리 방식에 조금씩 개입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오만하고 성급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것이다. 언젠가 그가 원하는 결말의 희생양으로 쓸 수 있도록.

「알의 마나 친화력이 최상 판정을 받았다. 다행이다. 훗날 그 아이는 남부군을 가져야 하니 무위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다.

지금부터 꾸준히 최상급 운용법을 추가로 새기면 성년 무렵에는 30대 기사들보다 마나가 충만할 것이다. 그건 그 아이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겠지.」

선황은 아르페시스의 교육에도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고르고 골라내 믿을 수 있는, 그리고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교육을 맡겼다. 그 모든 것은 훗날 아르페시스가 황실에 가져올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선으로 가야 할 그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오만하여 일을 망치느니, 겸손한 것이 낫다. 짐의 꼴을 보라. 오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알에게는 겸손을 심어 두어야지.」

아르페시스가 가지고 있던 겸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보았다. 선황이 그에게 거듭된 교육을 함으로써 그리 자라도록 만든 것이다.

「귀족들의 반감과 경계심을 자극하기 위해 오늘 토제르 남작가를 멸문시켰다. 남작이 중앙군의 예산을 횡령한 것은 맞지만,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극악한 죄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짐은 그들이 횡령한 금액을 열여섯 배나 부풀려 죄를 더한 후, 일가의 목을 쳤다.

이미 지난해부터 조금씩 짐의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남부군의 예산 감축도 진행된 상황에서 정상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 처벌했다면 짐이 변해 가고 있다는 인식이 흐릿할 터,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변화의 조짐을 부각시켜야 한다.」

아주 천천히, 하루, 한 달, 1년 단위로 짜인 계획 속에서 선황은 천천히 성군에서 폭군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변화가 너무 당연해서 그를 지켜보는 이들이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의 변화를 부정하지 않도록 아주 교묘하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짐이 정말 알을 위해 이 거짓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짐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권력에 심취해 집착하게 된 것인지, 혼란스럽구나.」

그가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길고 긴 연극을 끝까지 이어 갈 수 있었던 건, 아르페시스 덕분이었다.

「알이 전술 교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려 하고 있단다. 이 미련한 놈을 정말……. 그걸 왜 외우고 있나. 책은 주둔지에 얼마든지 챙겨 갈 수 있는데.

전술 예시를 내며 작전을 다듬는 것은 밑의 녀석들이 할 일이다. 위에 서 있는 자는 아랫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분석하고,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냥 그런 것이 있다, 정도만 알고 넘어가도 되는데…….

어이고, 어이고, 이 단순한 놈을 어쩜 좋은가. 생긴 것은 짐을 꼭 닮았으면서, 알맹이는 완전히 로라의 판박이구나. 이왕 닮을 것 알맹이도 짐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은가. 어이고, 속이 타는구나. 전부 욀 필요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그의 주변에 심어 놓은 눈과 귀가 가져오는 소식, 멀찍이서 기록한 수정 마도구, 달에 한 번 황족이 모여 함께하는 만찬.

「알이 열 살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다. 요즘 훈련을 늘렸다는데, 그 때문인지 조금 야위어 보였다.

쉬엄쉬엄,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된다 다독여 주고 싶은데, 그래서는 안 된다. 알은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래야 남부군을 가지기 위해 떠났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살리기 위해 사지로 보내는 것이 정말 옳은가? 오늘이 되어 짐은 또다시 방황하고야 만다. 부모를 잘못 만나 알이 고생하는구나. 이 죄를 아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사소한 것들이 혼란과 방황 속에서 계속 선황을 재촉했다.

「벌써 열두 살인데 아직 예법이 서툴다. 전장에서 예법에 따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교양 학습에는 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20대, 30대 무렵의 아이가 다시 황성으로 돌아오면 제위에 오르게 될 터. 그것을 제 것처럼 누리려면 예법은 필요하다.

이런 것은 어릴 때 몸에 익혀 놓아야 커서도 숨을 쉬는 것처럼 하는 법인데……. 다음 만찬에서는 예법을 지적해야겠다. 그리 찔러 두면 괜히 트집을 잡혀 괴롭힘당하느니, 억지로라도 몸이 익히는 것이 낫다고 여길 테지.」

선황은 아르페시스의 전사가 가져올 명예를 위해 그를 황실의 일원으로 대우받게 만든 것이 아니다. 아주 먼 훗날 모든 일이 그의 의도대로 흘렀을 때, 제위에 오른 그가 황족으로서 흠이 잡히지 않도록, 천한 사생아라는 말에 휘둘리지 않도록 다듬어 둔 것이다.

「너무 빠르다. 알은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내보내기엔 너무 이른데, 밖에서는 벌써 황실을 겨냥한 무장 세력의 조짐이 보인다.

알라반 운송에 누가 손을 댄 것은 분명한데 누군지를 모르겠구나. 운송에 참여했던 병사들 중 일부가 실종 상태다. 존재는 분명한데 흔적이 사라지다니.

테몬의 둘째인가? 아니, 그자는 이런 힘이 없다. 알라반을 동일한 날에 강탈하고 흔적을 지우려면 인력이 필요하다. 그만한 규모의 힘을 가졌다면 아직까지 가문을 차지하지 못했을 리 없지.

그럼 아브람? 가능성은 낮다. 밀매 이후로 칩거 중이라 짐이 국경을 장악하는 것도 모르던 이다. 외부의 일에서 아예 손을 뗀 상태이니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부소네나 테뷔르, 루소멜, 쿠베트 같은 남부 인근 영주들도 자신들의 피해를 감안하면서까지 남부군의 힘을 빼내어 황실을 겨냥하도록 만들 리가 없다.

라히크는 지나치게 안전을 추구하는 이들이라 아닌 것 같고… 그 고집 강한 테노리엘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방법에 손을 댔을 리도 없다.

누구인가, 대체 누구인가 말이다. 짐이 모르는 곳에서 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싹이 텄는데 어떻게 생긴 싹인지 알 길이 없구나.

일을 시작한 게 누군지도 모르건만 시간이 촉박하다. 슬슬 남부로 향하지 않으면 무장 세력이 다 자랐을 때 알이 남부군을 장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때까지 알이 힘을 가지지 못하면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겨울이다. 남부는 너무 위험하니 서부로 보내자. 이번에 중앙군 기사들이 친 사고가 있으니 남부에는 란을 보내서 일을 해결하는 척하고, 알은 마수의 수가 적은 서부로 보내서 경험부터 쌓게 하자.

테노리엘 백작이 서부에 있으면 알이 연합군을 가지기 힘들지도 모른다. 백작은 전선에서 마수를 상대한 경험이 있으며 봉신을 이끄는 공후백 중 하나이기에,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 알보다 군의 수장으로 훨씬 더 적합하다.

다른 이들이야 마수와의 전쟁에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샌님이니 짐이 눌러 주면 되겠지. 아직 군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으니 이번에 서부로 가서 한번 해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이론과 실전이 같을 리 없으니, 배워야만 한다.

백작을 황도에 잡아 놔야 할 것 같은데……. 연합군 창설을 살짝 미루고, 백작에게 중서 경계선을 넘기면 알을 챙겨 주는 것 정도는 가릴 수 있겠지.

함께 보낼 병력도 중요하다. 이 기회에 알을 따르는 중앙군 출신의 기사 세력을 만들까?

출세를 하지 못했으나 실력은 괜찮은 이들, 출세를 위한 욕심이 많지 않아 현상에 안주하는 이들, 실력이 있음에도 아부와 정치에 소질이 없어 밀려난 이들. 그런 이들을 붙여 주는 대신 수를 적게 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알을 챙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

아르페시스의 출정이 다가왔을 무렵부터 글의 분위기가 변했다. 오만하고 강압적인 문구 대신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많아졌기에 필자의 동요가 선명하게 보였다.

선황은 아르페시스를 챙기면서 그렇지 않아 보이도록 허수를 집어넣었다. 거기에 에스메랄다는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녀의 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고정관념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남부군을 향한 견제도, 실테르와 철광 거래를 단절시킨 것도, 하급 귀족들을 죽이며 폭군의 모습을 천천히 드러낸 것까지, 선황의 행동 지저에 깔린 이유는 전부 아르페시스였다.

상황이 악화되거나, 폐단이 존재해야 개선의 욕구가 생긴다. 선황은 자신을 악으로 돌리면서까지 개선 욕구가 생길 수 있도록 많은 폐단과 문제점을 차근차근 쌓아 왔다. 그리고 훗날 그것을 아르페시스가 개선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기반을 닦아 두었다.

그의 힘이 될 세력을 만들기 위해 국가 간의 거래에 손을 대어 수십만의 백성이 배를 곯게 만드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때때로 무고한 피를 흘려 내며 명분의 조각을 쌓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로지 아르페시스가 제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리면서, 또한 황후를 비롯한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대륙력 1432년 카 56일.

테노리엘 경이 맡을 줄 알았더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구나. 백작이 영지를 맡길 정도니 단순히 영특한 정도를 넘어섰겠지만,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소녀가 아닌가. 행정관이 보좌하는 영지 업무와 군을 통솔하는 것은 다를 터인데…….」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언급된 부분에서 일자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륙력 1433년 바 3일.

대체 이놈이 가서 뭘 하고 돌아다녔기에 그 집안 금지옥엽과 눈이 맞았단 말인가?

듣기로는 형제들이 싸고도는 것이 심하다 했다. 그 답답한 백작도 딸자식 얘기만 나오면 눈을 치켜뜰 정도고. 그만한 환경에서 자랐으면 꽤나 콧대가 높을 텐데……. 헤니아겔 경의 말을 보면 혼자 좋아 죽는 건 또 아닌 모양이고, 대체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하필이면 테노리엘이라니. 호재인지 악재인지 모호하다. 젊은 혈기로 무작정 만나고 다니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짐은 그들의 연관점을 발견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입장이니, 제발 잘 숨겨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에스메랄다는 뒷장에서 발견한 글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황제가 그들의 사이를 알고서도 모르는 척했던 이유를 알아냈다. 이제 와서야.

「알의 호위에 유능한 인물이 더해진 것은 좋다만 하필이면 직계가 근위대로 들어갈 게 뭔가. 잘 숨어 만난다 했더니, 다 허사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짐은 테노리엘을 건드려야 하지 않나.

듣자 하니 테노리엘 경은 독단으로 황실 기사단을 뛰쳐나간 전적이 있다 하던데……. 백작이 아들을 버려 주면 무난하겠지만 그가 그럴 인사는 아니다. 일이 번거롭게 되었어.

직접적으로 옭아매는 대신 면세 쪽에서부터 천천히 견제하는 쪽으로, 간접적으로 건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려나? 이건 어떻게 보면 봐주는 것인데……. 모호하구나, 모호해. 천천히, 그날이 다가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겠다.

알을 통제하는 척, 목줄을 움켜쥔 척, 뜻대로 휘두르는 척은 계속해야만 한다. 그러니 테노리엘도 슬쩍 건드려 보는 척은 해야지. 테노리엘 경을 제외하면 특별한 연관점이 드러난 것은 아니니 적당히, 확신을 가지지 못한 척 떠보는 정도에서 선을 지켜야겠다.」

페드로의 독단에 고생을 한 이가 또 있었던 모양이지. 에스메랄다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종이를 넘겼다.

「란의 죄를 뒤집어씌워 쫓아낸 기사들의 행적이 잡히지 않는다 하여 뒤를 캐기 시작한 게 1년이다. 혹여 미끼를 물까 싶어 세작들에게 누명을 씌워 내보냈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포섭한 후 내쫓은 유토 경 쪽에는 접근을 해 왔다.

차이가 무엇인고? 짐의 세작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쏙쏙 피해 간 게 우연인가?

정보가 새는 것인지, 그만큼 유능한 것인지,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찾았으니 되었다.

정말 예상도 못 했구나. 테노리엘이라니, 그 집안의 아이였다니. 놀랍구나. 그래, 백작의 아래에서 자랐다 하여 모두 똑같이 큰 것은 아니겠지.

고작 열네 살짜리 영애라니. 기적이구나. 영지에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숨은 것이었구나. 백작이 영주권을 내어 준 것이 아니라 빼앗겼던 것이야.

허 참, 너무 기가 막히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더니 딱 그 꼴이구나. 어린 나이에 방심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리 놀라울 데가 있나. 영주권을 빼앗았던 당시에는 고작 아홉 살이었을 텐데, 대체 뭘 하는 아이인고…….

생각해 보면 묘했지. 뒷골목을 손에 쥐는 게 그리 간단할 리 없는데 짐이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정리가 된 상태였다.

오래전부터 시간과 돈을 들여 왔던 것이겠지.

가능성이 커다랗게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그 아이 덕분에 짐의 연극이 비극을 피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리 고마울 데가 있나.」

유토,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과거 페라노스는 남부에서 돌아온 후 마약에 손을 댄 적이 있다. 그때, 황태자를 대신해 황성에 불법 약품을 반입했다는 죄목으로 불명예 제대한 기사의 이름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포섭했고.

선황은 에스메랄다가 하나둘 포섭한 불명예 기사들을 통해 그녀를 찾았다. 이런 식으로 덜미가 잡혔을 줄이야.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너무 많은 이들을 내치기에 기억에 없는 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나름 걸러 왔었다. 유토는 그녀의 변한 행동 때문에 새로이 발생한 피해자라고 여겨 포섭을 했었고. 그런데 거기서 걸렸을 줄이야.

「분명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했는데, 테노리엘 경 때문인지 교류가 끊긴 모양이구나. 오라비를 사지로 끌고 들어간 사내가 마냥 곱게 보이지는 않겠지.」

에스메랄다가 방황하던 시기의 혼란도.

「알은 내전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에스메랄다라는 아이는 반군의 규모를 키우고 있으니… 요상하다. 요상해. 대체 일이 어찌 돌아가나.

둘이 힘을 합해서 같이 가는 것이면 알이 급진파 세력의 병력을 충원해야 하는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구나. 정말로 요상하다.」

페드로가 죽은 후 아르페시스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된 답답함도.

「형제처럼 따르던 이의 죽음이었으니 알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겠지. 그래도 알이 아니라 테노리엘 경이 죽어 다행이다. 이미 짐은 악마가 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헤니아겔이 떠났으니 이제 누구로부터 알의 소식을 받아 보나……. 알의 옆에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인물이 있던가?」

아스터를 포섭해 다시 아르페시스의 소식을 받아 보는 일도.

「인외자라니, 신께서 잔혹한 악마가 되어 버린 짐을 도우시는구나.

아니, 짐에게 희생당하는 알을 도우시는 게지. 경사로구나.」

아르페시스가 인외자가 되었음에 홀로 축배를 들었던 일도.

그렇게 길고 긴 20여 년을 보내는 동안 음식을 게워 내는 일이 잦아지자 건장하고 당당하던 풍채는 왜소하게 변해 갔다.

아르페시스를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과 백성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황후를 향한 원망과 증오, 권력의 앞에 서 있는 스스로를 보며 느끼는 혼란까지.

에스메랄다가 따라 걸어 본 기록은 잔인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아르페시스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희생시킨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건만 에스메랄다는 선황을 비난할 수 없었다. 아니, 비난하지 않으리라.

「대륙력 1439년 바 20일.

란이 짐을 죽이려 드는구나. 백작의 자극이 아주 적절했다. 황손들을 빨리 보라 재촉해 두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어. 짐을 죽이는 건 알일 줄 알았는데, 란의 손에 죽을 줄이야.

무어, 이 끔찍한 목숨이 그 아이에게 명분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겠지. 드디어 길고 길었던 연극의 종장이 펼쳐지니, 희극이구나.」

그렇게 선황의 기록은 끝이 났다.

하나뿐인 아들이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도 살아남아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던 선황의 탐욕은, 성공을 거머쥐었다. 에스메랄다가 고정관념에 갇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이 선황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채어 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책을 덮고 두툼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카 록트 에렘 에스메랄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밀봉을 뜯어내고, 봉투 안을 가득 채운 종이들을 꺼내 들었다.

「이게 네게 전해졌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최상의 결과를 내며 끝났다는 의미겠지. 무척이나 기쁘구나.

네게 남긴 짐의 낙서장은 본래 그냥 소각하려 했다. 남아 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는 기록이니, 흔적도 없이 지우고 떠나는 것이 옳다고 여겼지. 그런데 이리저리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쓸 곳이 한 군데쯤은 있을 것 같아 네게 전하고 간다.

페넬로프 경에게 듣자 하니 알이 혼인 문제로 너와 언쟁을 나눈 것 같다더구나. 그 아이가 혼자 끙끙 앓으며 중얼중얼, 겁먹은 사람처럼 절절매는 것을 보았다는 소리에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알이 네 옆에서만 예전처럼 순진하게 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네 형제들에게도 조금 무르기는 하지만… 그건 너 때문일 테니 결국은 네 곁에서만 그런 것이지.

짐이 다시 만난 알은 다른 이들 곁에서는 웃지도 않고, 말을 섞는 것도 거북해하는 듯 보였다. 예전에는 사람에게 무심해지려 노력하긴 했지만,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짐이 채워 주지 못한 결핍 때문에 자신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갈구하는 편에 가까웠지.

하지만 남부에서 돌아온 그 아이는 너 이외의 모든 인간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말이야. 그런 와중에 네가 그 아이와의 혼인을 꺼리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어 조급해졌다.

알은 너뿐이라고 말하는데, 너희 집안도, 너도, 모두 그 아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인가 싶어 겁이 나더구나. 해서 이유를 곱씹고, 찾고, 생각해 보니 딱 하나가 걸렸다. 너의 태도 말이다.

특별한 접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너는 어렸을 때부터 적대 세력을 키웠을 정도로 황실을 싫어했지. 사실 사교계에 나선 적도 없던 너와는 경멸이나 혐오, 증오 같은 감정을 논할 만한 일이 없어서 확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밖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보고 키운 감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짙었지. 겪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짙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거든. 이것 말고는 걸리는 게 없으니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한 수를 더하는 게지.

짐으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고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는 행보였다만, 짐에게 인사를 왔을 때 보인 경계심이나 반감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너는 아마도 황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에렘의 이름을 싫어해서 그 아이와의 혼사를 거북해하는 것이겠지.」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있었던 아르페시스는 알아내지 못한 것을 고작 몇 분 동안 나눈 대화에서 집어내다니, 역시나 유능하다 해야 할까?

「물론 짐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그 아이 대신 죽인 이들의 핏물이 대륙을 전부 적시고도 남을 정도로 많거니와, 그중엔 네 오라비와 아비의 피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 짐이 하는 말이 죄악 앞에서 내놓는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하기로 했다.

에렘의 이름에 쌓인 죄와 핏물은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짐의 과오다.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기록을 네게 남긴다.

알은 짐의 탐욕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뿐이니 황실의 이름이 싫다 해도 그 아이와는 엮지 말아 다오. 그저 수없이 많은 이들보다 아들 한 명을 택한 짐을 경멸해라.

이제 와 이리 간청하는 것이 구차해 보일 수도 있고, 기가 막힐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마땅히 누려야 할 어미의 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라게 만들었다. 짐이 그 과거에 잘했어야 하는데, 너무 서툴러서 모든 것을 망쳤어.

나로 인해 불행했던 그 아이가 이제는 제발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걸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인 것 같아 이리 애걸해 본다.」

에스메랄다는 감히,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어 달라 구걸하는 선황의 말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일에 대해 논해 보자. 본래는 짐이 했어야 하는 일이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결국 해내지 못했다.

네가 알의 정당성을 채우려고 한다는 건 내부를 다듬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건 곧 내실을 다져 남진하기 위해서겠지.

그걸 깨달았을 때 참, 간사하게도 안도하고야 말았다. 짐이 끝끝내 해내지 못한 것을 네가 해 주리라 믿으며 기뻐하는 짐을 용서하지 말거라.

그간 준비한 것을 모두 정리해서 헨릭에게 남겨 두었다. 알을 위해서 키운 녀석이니 쓸 만할 게야.

너라면 분명 알고 있으리라 여긴다만, 남진을 할 것이면 운송로부터 다져야 한다. 다른 지역은 포기하더라도 남부는 대로를 다져야 해.

에렘의 지리는 해상 운송에 너무 불리하다. 육로 운송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지정 장소까지 물자 운송에 들어가는 인력비 때문에 상단이 요구하는 가격이 높아지지.

그것 때문에 매해 예산의 일부가 불필요한 곳에 소모되고 있다. 그게 십 년 단위로 늘어나면 상당한 금액이니 미리 정리해 두는 것이 좋을 게다.

한두 해로 마룡과의 전쟁이 끝날 리 없으니, 멀리 보아라.

하지만 무턱대고 그곳에 흘러 들어가는 금액을 막아 버리면 운송일을 하며 먹고사는 백성들의 생명줄이 위태로워지겠지. 그들을 대로 건설에 동원하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남부 백성들이 먹고살 일도 필요하니, 돈은 어떻게든 풀려야 한다.

교황의 행보를 보건대, 아비체룬 놈들이 신관 사냥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놈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려면 신전의 체계를 다듬어야 한다. 아비체룬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계야.

전선에 신관들을 배치하려면 교황의 힘도 필요하겠지만, 이 부분은 네가 넘치도록 잘하고 있으니 더 첨언할 것이 없구나.

3국은 전선을 없애는 그 날까지 결코 구분될 수 없다. 그러니 협력하고, 협동하여, 견고한 동맹을 만드는 것이 첫걸음일 게다.

짐이 실테르와의 관계를 상당 부분 망쳐 놓았다만… 그런 짐을 처단한 이상 아르페시스와는 우호를 유지할 수 있겠지. 실테르의 병력을 가져오는 데 철광 거래를 걸었을 테지? 이것 역시 네가 이미 잘 해결한 듯 보여 굳이 더 첨언할 것이 없다.

그다음으로는 기사들이다. 숫자가 너무 적어. 오래전 종자와 관련된 군법을 개편해 두긴 했지만 여전히 적다. 양성을 위한 지정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가장 좋으나, 마나 운용법이 본인들의 통제 밖에서 풀리게 되는 것이니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게야.

이건 짐도 도무지 방법을 찾지 못하겠구나. 해결 방법도 없이 문제만 떠안기고 간다. 그간 봐 온 너는 참으로 영민하니 짐이 찾지 못한 방법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으마.」

선황은 내려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직면할 수 있는 문제점, 해결 방안, 혹은 변수 같은 것들을 전부 에스메랄다에게 남겨 두었다.

그 내용이 자그마치 33장에 달했으니, 길고 긴 여정의 큰 틀을 그려 놓은 기획안과 다를 게 없었다.

「일을 시작하려면 자금이 필요한 법이지. 출처는 모르겠다만 너도 금을 꽤 가지고 있더구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올 게다. 목표치를 전부 채우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짐이 모아 둔 양이 꽤 된다. 헨릭이 관리하고 있으니 필요한 일에 꺼내 쓰도록 해라.

그리고 알의 인지 범위가 넓어 그럴 일이 없다 싶지만, 혹시라도 란을 놓쳤거든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것일 게다. 헨릭에게 관련된 자료를 모두 주었으니 확인해 보거라.

란은 오만하다. 저가 넘을 수 없는 벽은 오로지 짐뿐이라고 생각하지. 짐이 그리 키웠다. 함정을 파면 쉽게 다시 들어올 터, 그때 다시 잡으려무나.」

아무리 길고 긴 이야기라 해도 끝은 존재하는 법이니, 마침내 선황의 발자취에도 마지막이 도래했다.

「참 흔해 빠진 말인데, 이것 말고는 할 말이 없구나. 고맙다.

그 아이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네 가족들까지 이용했으니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 그래서 사과는 남기지 않으마. 그저 고맙다는 말이 전부다.

짐의 낙서장은 네가 소각해 주었으면 한다. 그 아이가 알아 보았자 버겁기밖에 더하겠느냐. 영원토록 모르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끝났다. 그게 끝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선황이 남긴 발자국 위로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손에 들린 종이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이것 때문에, 그녀는 지금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조각을 꽤나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했었나 보다.

그동안 선황이 해 온 일을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르페시스를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너무 확고한 생각에 붙들려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보지 못했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아르페시스는 이미 이용당하기 위해 거둬진 황자가 되어 있었다. 그 확고하고 명료한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봐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따지자면 고아와 다를 게 없으니 꺼림칙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걱정하지 말라.’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움에도 에스메랄다는 낡은 가죽 책을 품에 껴안으며 흐느꼈다.

만약 아스터를 통해 아르페시스와 그녀가 혼인 문제로 싸웠다는 것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선황은 이것을 남기지도 않고 떠났을 것이다. 영원히 거짓을 진실로 만들었겠지. 그게 그가 바라던 일임에도 이렇게 기록을 남긴 이유는 또한 아르페시스다.

그가 했던 모든 선택의 이유, 모든 행동의 기반,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들.

선황은 자신이 행해 왔던 악행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설득을 남기지 않았다. 용서를 구하는 사과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와 아르페시스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명을 했을 뿐이다.

그는 에스메랄다보다 긴 시간을 준비에 할애했고, 그 과정에서 희박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많은 수를 두었다. 각양각색의 상황에 대비하고 준비하던 과거의 선황은 성공에 닿을 수 있다는 어떤 확신도 없었으면서, 준비에, 준비에, 또한 준비를 더해 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얽힌 지금에 이르러 선황의 도박은 성공을 거머쥐었다. 선황이 마지막으로 둔 도박 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에스메랄다가 에렘의 이름에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는 불확실한 정황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를 놓았고 적중했다.

이게 없었다면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와의 부부 관계를 이어 가는 내내 불화를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끔찍하게 에렘의 이름이 싫었으니까.

하지만 선황이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강행한 오늘의 사건이 그것을 막아냈다. 에스메랄다는 그 모든 것의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도 에렘의 이름이 싫으냐고.

고작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에렘은 권력에 취해 나라를 말아먹는 자의 이름이었다. 또한 오만에 취해 남부의 영웅들과 백성들을 도살하던 미친놈의 이름이었고, 그녀에게 평온한 죽음 대신 비참한 복수를 선물했던 원수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가? 그 한 시간 사이 에스메랄다에게 에렘의 이름의 의미가 변해 있었다. 그건 아르페시스를 위해 희생당한 산 제물의 이름이었고, 그를 만날 수 있게 해 준 사람의 이름이자 그를 지켜 준 사람의 이름이었다. 만약 선황이 오늘날의 비극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녀가 아르페시스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선황이 본래 생각했던 대로 그와 로라를 꽁꽁 숨겨 놓았다면 그들은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비극을 만들지 않고 아르페시스를 포기했다면 황후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제위에 올리는 탐욕적인 선택 대신 남부에서 전사자로 만들어 빼내는 선택지도 마찬가지다. 비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황제는 에렘을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찾아갈 일도 없었겠지.

거기에 더불어, 난세를 함께 거닐며 쌓은 감정 또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함께 겪었던 시간과 기억이 없다면 에스메랄다는 그를,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하나만 삐끗했어도 그를 만나지 못하는 미래로 이어졌을 것이다. 결국 그를 사랑하는 날도 오지 않았으리라. 만나지 못하고, 함께하지도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녀는 기록 속에 담긴 그 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황을 비난하지 않았다. 백성과 나라를 등진 채 스스로의 이기가 바라는 아들 한 명을 택한 황제라니. 사라진 시간에서 지금의 진실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르페시스를 계속 사랑할 수 있었을까?

답은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녀에게 오늘의 진실은 용납할 수 없는 종류였다. 모든 선택을 선황이 했기에 아르페시스를 비난하지는 못했겠지만 수십, 나아가 수백만의 목숨을 대가로 바쳤기에 살아남은 그를 이전처럼 대하는 것도 못 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시간 속에서의 에스메랄다는 용납할 수 있다. 무고한 자들 수십, 수백만보다는 아르페시스 한 사람이 더 소중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제게 잔인한 진실을 알려 주고 간 선황을 비난하지 않고, 백성과 나라를 배신한 황제를 용납하고야 만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이 아르페시스를 살리려다 실패한 것임을 알게 된 지금. 이유가 그러한 것이었다면 눈을 감고 묵인할 수 있을 만큼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가 살아남기 위해,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핏물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흐른다 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결국 지금의 에스메랄다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늦었지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감사, 합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이 선황이 집필한 연극의 일부였고, 그녀가 무대 위에 오른 배우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감사가 먼저였다. 탐욕이 만든 비극의 시작 앞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녀와 달리, 아르페시스가 살아남아 그녀와 만날 수 있게 수백만의 백성을 배신해 준 선황에게 감사한다. 모든 것이 그의 덕분이다.

에스메랄다가 선황에게 전해지지 않을 감사를 전하며 고요히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솔루베르 제르아니가 목을 맸습니다. 발견이 늦어 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르아니를 감시하기 위해 보내 두었던 로부오가 소식을 들고 왔다.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이 그녀의 속을 할퀴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어찌나 간사한지, 알 때와 모를 때에 보이는 것이 다르다.

“황손들은?”

설마 에스메랄다가 그 아이들을 황손이라 칭할 줄은 몰랐는지 로부오가 머뭇거렸다. 물론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곧 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각자 감시 중입니다.”

“그래…….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모시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가슴에 품은 책을 로부오에게 건네주었다.

“백작 저의 집무실에 가져다 두렴. 은밀히.”

침실은 아르페시스가 매일 찾아오는 반면 집무실이나 서재는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을 하는 에스메랄다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잘 오지 않았다.

“예, 주인님.”

자리에서 일어나자 계속 곁에서 침묵하고 있던 아스터와 잠시간 시선이 스쳤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스치듯 지나 걸음을 이어 갔다.

에스메랄다가 움직이자 집무실 한쪽에 엎드려 있던 루기스가 곧장 따라붙었다.

“전하께는 그놈의 궁으로 간다고 전해 주게.”

“예, 백작님.”

집무실 밖으로 나오며 말하자, 아스터처럼 그녀의 곁을 지키던 근위 기사 중 한 명이 옆으로 빠지며 소식을 가져갔다. 그 기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에스메랄다는 오래지 않아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몸을 돌렸다.

* * *

중앙 궁을 나서 페라노스가 사용하던 궁에 도착한 에스메랄다는 차분한 눈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줄을 끊어 내 바닥으로 내린 시체 한 구는 천으로 덮어 놓았다.

“황손들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항시 시야에 두도록.”

그 순간 여러 시선이 에스메랄다에게 닿았으나 반문은 없었다.

현재 황성을 점령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귀족의 사병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녀에게 충실한 로부오들도 있다. 황성을 점령한 직후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사람들이 가는 곳은 막지 말라고 언질했기에 활동이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태였다.

황성으로 피신해 있던 중앙 귀족들은 물론, 황성에서 일하던 사용인들 중 황족의 시중을 들던 이들은 현재 지하 감옥에 들어가 있다. 덕분에 황성의 지하 감옥이 미어터지려 하니 빨리 인원을 정리해야 한다. 같은 철창 속에서 서로를 폭행하는 사고를 치면 곤란하니까. 그 속에서 중앙 궁의 시종장인 헨릭을 꺼내 오기도 해야 하고.

선황이 준비한 인사를 무작정 쓸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가 관리하고 있는 것이 많기에 한 번은 만나 보아야 한다. 물론 찬찬히 살펴본 후, 그녀의 기준에서도 유능하다 판단되면 등용할 생각도 있었다.

그녀의 명령에 고개를 조아리는 로부오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에스메랄다가 제르아니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법무부의 수사관들을 불러 시신의 부검을 진행하라. 자살이라는 정확한 증거와 검시서를 남겨 두어야지.”

“예, 백작님.”

시체를 힐끔거린 기사의 답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감시를 하라고 붙여 놓았더니 대상이 자살을 한 것을 늦게 발견했다. 얼마든지 문책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니 긴장해야지.

에스메랄다가 그 기사를 가만히 살피며 넘어가는 것이 나을까, 책임을 지우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익숙한 체온이 그녀를 찾아왔다. 온기를 맞이한 에스메랄다는 기사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결정을 내렸다. 조용히 넘어가자.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 인물이었으니, 차라리 늦게 발견하여 다행이다.

“대화는 끝났는가?”

갑자기 나타난 아르페시스를 보고 움찔거리는 이들과 덤덤한 이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안아 오는 체온에게 기대며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아스터와의 대화가 끝났다고 판단되자마자 곧장 달려온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화를 꾹 눌러 참을 때처럼 가라앉아 있는 것을 잡아냈다. 그들은 서로의 목소리만 듣고도 속에 담긴 감정을 볼 수 있는 관계였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참 오래도록 서로를 보아 왔으니까.

아스터의 청으로 그의 눈과 귀를 물린 것에 아직도 화가 난 것일까?

당장 속에 담긴 것이 너무 복잡해서 힘든데, 그래도 혹시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걱정부터 된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선황을 비난하지 않은 이유를 다시 돌아보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선황이 그를 살리기 위해 죽인 것이 수십만 백성이라 한들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살 수 있다면 증오해 마지않는 백성들 따위, 얼마든지 죽으라지. 그 속에 섞여 있는 가족들의 핏물은 너무 슬프지만, 되짚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족의 죽음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못난 짓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흘려보내자.

“예, 전하께서도 일은 끝나셨는지요?”

잠시간 감정을 고른 에스메랄다는 평소와 똑같은 음성으로 그에게 답할 수 있었다.

“……조금, 남았는데 급한 것은 모두 처리했다.”

그러니 자리를 비워도 문제가 없다고, 조심스럽게 변명을 하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화가 났음에도 제 눈치를 보느라 바쁜 아르페시스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웃으려던 그가 움찔거리며 손을 뻗었다.

“운 것인가?”

아르페시스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매를 보자마자 목소리를 굳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과 눈매를 쓸어 주던 그가 근처에 있던 아스터를 눈으로 좇았다.

“조금이요. 페넬로프 경의 잘못이 아니니 문책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래, 알겠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사나운 기색이었으나, 시선은 순순히 거두었다.

“원하는 것은 찾았나?”

“……예.”

원하는 것뿐이겠는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찾았는데.

“즉위는 약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내부에서 다듬을 것도 많으니 첫 사절단은 국혼과 함께 맞이하기로 하지.”

덤덤하나 강경한 그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 록트 에렘 에스메랄다.’

이제는 그 이름을 경멸 대신 슬픔으로 바라보고야 만다. 아르페시스는 혼인 얘기를 꺼냈음에도 특별한 반응이 없는 에스메랄다를 살피는 중이었다.

‘아가씨를 놔주세요.’

그는 그녀가 이동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곧장 따라오지 못했다. 내전에 발을 담근 귀족들과 전후 처리를 논하던 중 찾아온 나단 때문이었다. 감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귀족들을 물려 달라기에 그리해 주었다.

이번에도 그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빌미를 주기 위해 응한 대화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고, 그 대화 중에 제대로 얻어맞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아가씨는 전하와 혼인하기 싫어하세요. 어차피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용하신 거잖아요!’

한 번, 두 번, 에스메랄다의 사람이라 경고로 끝내 주었더니 계속 기어오른다. 그런데 참 웃긴 건 그렇게 기어오르는 나단 앞에서 아무런 반론도 내뱉지 못했다는 것이다. 속에서 화가 들끓는데 그것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도 에스메랄다가 혼인을 꺼린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는 모든 순간이 괴롭다. 그 사이사이에 행복이 존재한다 해도 기저에 깔린 것은 두려움과 고통이다.

아르페시스는 홀로 한숨을 삼키며 에스메랄다를 꽉 껴안았다. 평생을 이 고통의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 해도 놓을 수 없다.

에스메랄다는 저를 꽉 껴안은 채 입을 다물어 버린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눈썹을 들썩거렸다. 아무래도 아스터와 있었던 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랬다면 그녀가 말리는 선에서 계속 아스터를 노려보았을 테지.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질문은 있는데 답은 없다. 아르페시스의 침묵이 이어지자 에스메랄다는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그의 뒤에 기립해 있던 휴고와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눈짓으로 물어보자 휴고가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구나.

“큰일은 마무리되었으니 그대는 백작 저로 돌아가 쉬는 것이 어떤가?”

속으로 혀를 찬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심적으로 너무 지친 상태였기에 쉬고 싶었다.

“……예, 전하.”

답을 피하는 그에게서 답을 얻느니 휴고를 파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번거롭지만 글자를 이용하는 수밖에.

에스메랄다는 궁에 남겨 둔 로부오들에게 황손과 황후의 감시를 맡긴 후 돌아갈 준비를 했다. 황성을 떠나기 전에 헨릭에 관한 얘기를 아르페시스에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로 만나 봐야겠으니 그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가겠다는 말에, 아르페시스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며칠 정도는 아스터를 곁에 두겠다는 말에도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그녀를 따라나서는 아스터를 가만히 응시하다 시선을 거뒀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지 모를 정도로 길었던 여정이 그렇게 끝났다.

* * *

테노리엘이 내전에서 아르페시스의 편에 섰으니 황도에 남아 있던 백작 저가 멀쩡하지는 않았다. 뭐라도 건질까 싶어 내전이 터지자마자 페라노스 쪽이 수색을 하며 들쑤셨다. 내부가 엉망이었지만 아르페시스가 병사들을 시켜 급한 대로 치우기도 했고, 이후에 도착한 사용인들이 열심히 손을 본 덕분에 그런대로 폐가 수준은 면했다.

백작 저에 도착한 에스메랄다는 며칠을 밖에서 보내며 피곤했던 몸을 따듯한 물로 달래었다. 그리고 사위가 어두워진 깊은 밤, 가벼운 실내복을 걸친 그녀는 침실이 아니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자 루기스가 익숙하게 그녀의 허벅지에 턱을 괴어 왔다.

하얀 털을 사락사락 쓰다듬어 주고 있노라니 오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그녀가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로부오의 안내하에 응접실에 발을 들인 중년인은 헨릭이었다. 그녀가 직접 챙겨 온 아스터까지 들어오자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분명 지하 감옥에서 바로 왔을 터인데 헨릭의 옷은 얼룩 하나 묻지 않았을 정도로 깨끗했다. 머리 역시 깔끔하게 올려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상태였다. 에스메랄다는 고요한 눈을 하고 있는 헨릭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페넬로프 경, 보아하니 전하의 인지하에 있을 때와 그러지 않은 때를 구분할 수 있는 모양이지요?”

분명 중앙 궁의 집무실에서 아스터는 아르페시스의 감시를 확인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했다.

“……예, 마나를 유형화할 때 차이점이 있습니다.”

에스메랄다는 몰랐다. 아르페시스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말했을 테니까.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허점을 발견했으니 다행이다.

“후에 상세한 얘기를 듣도록 하고, 지금은 당장 확인을 해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또 번거롭게 비명을 지르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데 사용해야지.

“예, 백작님.”

아스터의 대답에 에스메랄다는 로부오가 제 앞에 놔 준 찻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나, 둘, 셋, 적막한 침묵 끝에서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실내복에 달린 리본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곧 리본이 축 늘어지자 아스터가 마나를 유형화하며 확인해 주었다.

“마나를 거두셨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아스터에게 주기적으로 확인을 하라 이르며 헨릭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에게서 들려온 말은 참, 잔인했다.

“모시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황후 폐하.”

아르페시스에게는 절대 들키지 않게, 그가 보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헨릭이 사용한 단어 때문에 아스터가 움찔거리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눈을 꾹 감았다.

“로제페의 헨릭이, 정식으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반갑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지.”

“예, 백작님.”

단 한 번의 부름이었는데, 그 짧은 단어 하나가 밤이 깊도록 이어지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곧 그녀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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