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41화 (41/45)

제39장

죄악의 무게

“음…….”

에스메랄다의 귓불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쾌락에 취해 있던 에스메랄다가 슬금슬금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아르페시스가 갑작스럽게 저를 깊게 밀어 넣었다.

두 다리를 옆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모로 누워 있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옆으로 쏠린 가슴에 손을 뻗은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문질렀다.

“잠은 나중에.”

퍽퍽, 느리지만 강하게 쳐올리는 힘은 잠에 빠져 가던 에스메랄다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앙! 흑, 흣!”

귀를 타액으로 적시며 잘근잘근 씹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마다 살결을 핥아 대는 혀는 뜨거웠다.

하얀 살에 이를 박아 넣으며 저를 새기던 아르페시스가 허리에 힘을 빼고 다시 얕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읏… 이제 그만해…….”

“오늘 밤은 내 뜻대로, 해도 좋다고 했잖은가.”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는 그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밤이 지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 버린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는 바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허리를 멈춘 채 그녀의 혀를 잡아다 쪽쪽 빨아 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격렬하지는 않으니까 괜찮지?”

전혀 괜찮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말문을 열려고 할 때마다 비겁하게 입을 막는 아르페시스로 인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아르페시스의 품에 안겨 영지로 돌아온 후 계속 침실에 붙들려 있었다.

이미 몸은 서로의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찝찝했고, 아르페시스가 움직일 때마다 혹사당한 몸은 파들파들 떨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만족을 모르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계속, 계속.

당분간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시무룩한 그를 달래고 싶었을 뿐이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이렇게까지 고생하게 될 줄 알았다면 입을 다물고 있었을 텐데.

오늘 밤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아르페시스를 유혹했던 과거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에디……. 좋은가? 좋아?”

“으흥! 읏!”

“난 좋다. 그대의 안에 있을 때면 좋아서, 녹아 버릴 것 같아.”

헉헉, 점차 거칠어지는 움직임에 따라 아르페시스의 숨소리가 커졌다. 쾌락과 정염에 물들어 있는 은회색 눈동자는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자신에게 온전히 몸을 파묻은 채 헐떡이는 그를 안아 주고야 말았다.

* * *

황태자가 아르페시스의 궁을 습격한 날로부터 나흘, 그의 품에 안겨 다시 백작령으로 돌아온 지도 나흘이 지난 오늘. 에스메랄다는 1시간 전쯤 백작령에 도착한 사히카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온 참이었다.

헤도크의 부관인 동시에 가템 후작가의 후계자, 바 아그라 가템 사히카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짧게 다듬은 머리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백작님.”

곁에 서 있던 통역관이 그녀의 말을 전해 주었고, 에스메랄다는 살포시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전 황도에 방문해 제르민을 만났던 사람 중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사히카를 다시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로부오들을 돌려받기 위함이었다.

“사실 조금 의외였답니다. 전부 제거하셨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통역관을 통해 전해진 말에 사히카가 뻣뻣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왕세자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부족하던 차였거든요.”

“……다, 음에는 공식적인 방문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날을 그려 보느라 기대가 크답니다.”

오래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고, 책임자로 온 것이기에 사적인 대화는 없었다. 그동안 꽉 막혀 있던 전선 측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자리를 파했을 것이다.

“5기… 그게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군요.”

그뿐이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서 수십만의 마수가 다시금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정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히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에스메랄다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시기상조인 말이다. 어차피 전선 3국은 마수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며 남진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괜한 불안감과 공포를 자극해 초조함을 안겨 줄 필요는 없다. 그 사실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건 증거를 손에 넣은 후의 일이다. 후방국의 물자 지원을 넘어 병력 동원을 요구하게 될 그 날까지는 아르페시스의 정의를 내세워 남진을 추진해도 충분하다.

“또한, 표적을 노리는 등의 행동도 한다 하니 전선의 주요 인사들의 호위를 강화하시는 것도 필요할 듯 보입니다.”

그녀의 부친이 그리 죽었으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며칠 전 본격적으로 시작된 내전을 위해 떠나기 직전, 아르페시스가 어렵게 전해 준 말이었다.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시간이 여유롭지 못한 관계로 이제 그만 일어나 봐야겠군요.”

“다음에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백작님.”

사히카가 데려온 로부오들은 이미 따로 모여 있다. 인사를 마친 후 응접실을 등진 그녀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나와 함께 다른 방에 들어서자 기립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꾸준히 아비체룬에 집어넣었던 로부오의 숫자는 50명이 넘었고, 그중 42명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가장 넓은 응접실을 골랐는데도 방이 꽉 찬 상태다.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서 돌아올 줄이야. 운이 좋다.

‘자국에 들어온 세작을 치료까지 해서 보내는 왕세자는 나뿐일 거요.’

목숨을 살려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호의를 베푼 것이니, 그들이 아비체룬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든 너무 따지지 말아 달라는 말이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제 품으로 파고들어 온 세작을 발견했다면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정상이니 인력을 돌려준 헤도크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사이 대표자를 선정한 모양이지.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의 인사에 따라 뒤에 서 있던 이들이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다들 이곳이 어디인지 언질을 받았으리라.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답은 없었지만 다들 눈에 담긴 열기는 선명했다.

지금의 일은 분명 운이었을 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헤도크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우호의 선물로 전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생존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지만, 저들이 보기에는 그녀가 그들을 꺼내 온 것처럼 보이겠지. 충성심이 견고해질 수 있는 일이니 오해라고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다들 아비체룬에 얼굴이 알려졌으니 은밀한 활동은 더 이상 힘들 게다.”

임무에 실패한 것 때문인지 조금은 침울한 감정이 방 안을 채웠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질타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드러난 그들은 다른 일을 하면 된다. 아비체룬이 그들을 포착해도 관여하지 않을 만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나라가 전달될 게다. 우선적 목표는 하나, 함께 파견되는 이들과 해당 나라의 뒷골목 세력의 구도를 확인하고 정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에렘의 뒷골목이 에스메랄다의 관리하에 있는 것처럼, 후방국들의 뒷골목도 정리해서 정보 선을 만들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인원이 충원되는 대로 지원을 보낼 테니 차근차근 진행하면 될 테고… 금전적 회유 대신 무력적 압도에 우선순위를 두어야지.”

에렘에서는 조용히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불법 자금을 상당히 동원했지만, 타국에서까지 그렇게 돈을 쏟아부을 정도로 재정이 넘쳐나는 건 아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의 치안대와 마찰이 생길 경우에만 금전 뇌물의 사용을 허가할 생각이었다.

“자세한 지침과 임무 사항은 파견 당시에 전달하마.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도 있을 거고.”

그래, 당장은 아니다. 그들은 영주 일가의 절반이 죽고, 남은 절반은 황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디오세네트부터 건드려야 한다. 마석 광산과 세튀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에스메랄다의 설명이 끝나자 앞으로 나섰던 청년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답하는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같은 뜻을 품은 눈동자는 42쌍이나 된다.

“당분간은 몸을 추스르는 데 최선을 다하렴.”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메랄다는 곧장 문가로 다가갔다. 사실, 그녀는 저들이 죽었다 해도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생존을 전해 들었을 때 반긴 것은 그들을 아껴서라기보다는 언제나 부족한 인력에 쓸 만한 이들이 다시 채워졌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의 감정이 어떨 때 자극을 받고, 어떤 감정이 그녀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뿐이다.

에스메랄다는 열기가 가득한 방을 나서서 곧장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녀에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레트몬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던진 질문에 첸이 곧장 답을 전해 주었다.

“대치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현재 테노리엘의 병력은 영지 경계선까지 진입한 채 레트몬 백작에게 권고 중이었다.

‘패륜아에게 죄를 묻기 위함이니, 황도로 가는 길을 열어라.’

열어 주는 게 미친 짓이다. 테노리엘의 병력이 영지에 들어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하지만 열게 될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에스메랄다는 레트몬을 지나 중부에 진입하고 황도까지 쭉 밀고 들어갈 테니.

아비체룬의 병력은 이미 쿠베트의 영지 인근까지 내려간 상태다. 적지 않은 피해를 낸 움직임이었지만 아비체룬의 군대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들을 도와 마수들과 싸우는 신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덕분에 쿠베트는 테노리엘이 꾸준히 내밀었던 손을 붙들어 병력을 보내왔다. 아르페시스를 지지하겠다는 최종 답안을 제출한 셈이다.

6천, 만일을 대비한 병력을 제외하고 쿠베트가 보낸 병력의 규모였다. 봉신들까지 손을 보탠 최종적인 수치였고, 이미 테노리엘의 병력과 합류한 상황이다. 그리고 록스와 라히크도 병력을 집결시키는 중이다. 물론 양측 모두가 에스메랄다의 뜻에 동참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건 아니었다.

테노리엘의 북쪽과 영지를 접한 라히크 백작령은 서쪽에 아비체룬, 동쪽에 라그테스 공작령을 두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과거, 국경을 핑계로 황제의 병력 차출 명령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시간을 끌며 출정을 미뤄 왔던 라히크는 이번에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방어적인 병력 배치를 하고 있을 뿐, 출정을 결정하지 않았다. 라히크의 동쪽에 있는 라그테스는 이미 반군을 위해 절반이 넘는 사병을 차출해 내보낸 상황이니, 방어가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참전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중앙에 뜻이 없는 것인지, 어떤 종류의 손해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라히크는 침묵을 택했다. 그나마 라히크의 봉신 중 일부가 에스메랄다에게 슬쩍 참전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본인은 발을 들이고 싶지 않으나, 아랫것들의 지지까지는 말리지 않겠으니 이후에 적당히 봐 달라는 의미였다.

반면 테노리엘의 동쪽에 있는 레트몬은 만일에 대비해 운용 가능한 병력 중 3할만 출정시켰다. 서쪽과 남쪽에 반황실 세력의 영지가 있었으니 빈집털이를 당하기 싫은 이상 당연한 선택이다.

덕분에 레트몬은 중앙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버티려 할 테지. 지금 레트몬이 테노리엘의 병력 앞에서 물러서지도 않고, 선제공격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고 있는 이유였다.

“록스는?”

“북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중입니다. 모레 중으로 4천 7백 병력이 집결을 완료할 듯 보입니다.”

그리고 록스, 과거 에스메랄다의 정보를 신전에 팔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아르페시스의 편에서 참전을 택했다. 에스메랄다가 성년이 되었던 해 혼담이 진지하게 오갔던 가문으로, 실제 서로의 출생 기록까지 주고받아 성스러운 날을 잡아 약혼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 대한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결국 혼담을 무산시켰다.

성사 직전까지 갔기에 록스는 그녀가 태어난 시간과 당시 그녀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이들의 숫자, 그리고 세례와 함께 받은 아명까지 알고 있었다.

[푸른 별이 떨어지던 때, 일곱이 땅을 잡아먹고 태어난 마녀를 지켜보았노라.]

그녀를 마녀로 몰고 갔던 가짜 신탁의 일부였다. 푸른 별이 떨어지는 건 새벽의 어둠이 물러가 동이 틀 무렵이고, 땅을 잡아먹었다는 건 생명을 품은 모친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몇 가지 정황과 탄생을 지켜본 증인들이 일곱이라는 점까지 합해져 에스메랄다가 마녀로 지목받았다.

그래, 신탁의 표적으로 에스메랄다가 지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은유적 표현이 외부인은 알기 힘든 그녀의 정보와 같았기 때문이다. 횡령 때문에 휘청거릴 뻔한 것을 잡아 주었더니 그녀의 뒤통수를 거나하게 날려 주었지.

에스메랄다는 잠시 그들의 병력 이동이 표시된 지도를 내려다본 후 사감을 덮었다.

“록스 백작은 기회주의자지…….”

사실은 중앙 귀족이 되어 권력을 좀 가지고 싶은데, 그럴 여력과 능력이 되지 않아 지방 귀족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 현 록스 백작이다. 그의 영지는 남부의 서북쪽 끝자락에 있으니, 다른 남부 영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아 반황실 세력이 된 것뿐이다. 황제의 세력권 내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면 언제든 남부의 영주들을 배신했을 만한 인물이다.

당시 대부분의 황제파 세력이 외부 세력을 견제하며 끼워 주지 않으려고 해서 방도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반황실 세력 내에서 입지를 넓히려고 테노리엘에게 혼담을 넣은 것일 테지. 하지만 무산되어 버렸고, 그런 상태에서 황태자가 모종의 거래를 제안했다면? 에스메랄다는 록스가 당연히 거기에 응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가문 간의 혼담이 꽤 공개적이었으니 황태자 쪽에서 무언가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접근했겠지. 그녀를 치우는 데 협력하면 한자리 내주겠다고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것일 수도 있고,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슬쩍 발을 들이민 록스를 받아 주기로 했다. 생각과 시야의 범위가 넓고 신중하며 자신만의 길이 있는 이들보다, 눈앞에 보이는 이득에 쉽게 혹하는 기회주의자가 다루기 쉽다. 적당히 써먹다가 훗날 내정을 다질 때 필요한 사건의 본보기로 삼아 주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의 가치는 있다.

서쪽이 이렇듯 난리가 난 상황에서 동쪽도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아브람 백작과 아르페시스가 주도하여 병력을 모으고 소템 백작령을 압박하고 있다.

“아브람 백작 쪽은 어떻지?”

“테뷔르가 지원병을 북상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람 백작령은 위로 솔루베르 공작령, 아래로 소템 백작령을 두고 있다. 둘 모두 황제의 세력에 들어가는 영주들이다. 자칫하다간 포위된 상태에서 허무하게 끝나 버릴지 모르니, 아르페시스가 직접 가서 돕고 있다. 거기에 더해 소템의 아래에 있는 테뷔르가 슬쩍 합류했으니 허무하게 끝나는 일은 없으리라.

어제 자로 아르페시스가 패륜의 처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실테르에게 원군 요청을 보냈으니 조만간 아브람 백작이 국경을 열 것이다. 그녀를 백작 성에 데려다준 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에 짙은 불안감을 내비치던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방해꾼이 없다고 중얼거린 그는 밤새도록 에스메랄다를 품었다. 그가 지칭하는 방해꾼이 루기스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루기스는 그의 힘으로 옮길 수 없었기에 따로 움직이는 중이다. 모레쯤에는 테노리엘 백작령에 도착할 예정이고. 신수를 방해꾼 취급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침묵하는 사이 그에게 휘말려 밤새 침대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혼인에 관련된 문제로 언쟁을 나눈 후 잠시 주춤했으나, 에스메랄다가 먼저 그를 탐한 이후 두 사람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있었다. 정말 과장 한마디 보태지 않고 단둘이 있으면 항상 서로에게 매달리곤 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원해 준다는 사실에 안도하고는 있지만… 아직 문제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때때로 체기가 올 때처럼 속이 꽉 막히곤 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는 애써 그와의 사이에 놓은 문제를 덮어 두고 말했다.

“소문은 어떤가?”

“황도에서는 전하를 옹호하다 붙잡혀 가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르페시스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황태자는 이미 그에게 패륜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장례와 함께 선황의 시신을 땅에 묻었다. 한때 에렘의 모든 것을 손아귀 속에 넣은 채 권력으로 휘둘렀던 선황에게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후련한 건지, 허무한 건지 모호했다.

황제의 인장을 차지했으니 황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황실 기사단을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 정식 즉위, 혹은 승계 전까지는 후계자가 선대의 인장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니, 지금 황태자는 다음 제위의 적법한 주인이고 할 수 있다.

그가 패륜자라고 말할 만한 이들이 전부 황도를 빠져나온 상황이라 죄를 입증할 만한 방법도 없다. 황실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죽고 싶지 않다면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에 따라야 한다. 결과적으로 아르페시스는 현재 죄인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다. 남부군 총사령관직에서도 해임되었고.

백성들이 그 수배령을 몰래 떼어 내 찢어 버린 덕분에 별 효과는 없었지만. 황태자가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아비를 잡아먹은 패륜아는 황태자라고, 뒷골목과 닿은 여관과 술집을 통해 퍼지는 말을 백성들이 전적으로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페시스와 황태자의 과거가 비교당하며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덕분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경우와 아르페시스의 경우를 비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수작에 완전히 무너졌는데, 아르페시스는 오히려 더 굳건해지고 있었다. 신탁, 소문, 영향력, 신뢰 등등, 변수는 많았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상념은 아주 짧았다. 그녀는 곧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남부군은?”

“전하의 지시가 아니면 따르지 않겠노라 선언한 후, 중앙의 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남부군은 아르페시스의 해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중앙에서 새로 임명한 총사령관을 거부하고 있다. 황태자가 그토록 경계해 왔던 일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남부군이 황실을 배신하는 일 말이다.

물론, 그들이 인간에게 칼을 겨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부군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 마수를 막아내면 된다. 그사이 내륙에서는 황태자를 심판한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오를 테니까.

황태자의 죄를 입증할 사람도, 증거도, 증인도 모두 에스메랄다가 가지고 있다. 황도를 함락한 후 공정한 재판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형될 것이다. 당장 아르페시스 혼자의 힘으로도 황도를 점령할 수 있지만, 지방 귀족들의 사병을 모아서 먼 길로 빙빙 돌아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백성들의 목숨쯤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귀족들에게 공훈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기존의 중앙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자리를 그들에게 나눠 주기 위한 판이고, 아르페시스의 지지 세력을 견고히 다지기 위한 거래인 셈이다. 그것을 위해 죽어 나갈 백성이 수만은 거뜬히 넘을 테지만 에스메랄다는 일을 거행했다.

그런 속사정은 읽을 줄도 모르고 아르페시스가 옳다며, 패륜을 행한 황태자를 질타하는 백성들을 보며 조소하는 것이 전부였다.

“징집 기미는 아직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소소한 충돌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대적인 전투가 발한 건 아니었다. 전투라고 부를 만한 건 남쪽과 북쪽에서 진행 중인 반군의 전쟁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곧 일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 졸지에 두 개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황태자는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다. 결국 황태자는 부족한 병력을 메우기 위해 징집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많은 영주들이 배신을 해 버린 남부와 동부, 서부를 제외하면 중부밖에 없다. 억지로 고기 방패를 채울 경우 반감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자 창고 습격 준비는?”

“경비 병력과 운송 일자까지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물자 보급에 타격을 입으면 어떻게 될까? 군이 사용할 식량이 불타 버리면 어떤 선택지가 남나?

어제 자로 에스메랄다는 상권을 통한 물자 공격을 시도했다. 덕분에 중앙군은 본래 양도받았어야 할 물자 중 3할을 받지 못한 채 우왕좌왕, 도착하지 않는 물자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다. 남은 7할은 정상적으로 양도되고 기존의 물자도 꽤 있으니 전쟁이 길어지지 않는다면 버티고도 남겠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버티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중부는 사방위에서 포위되어 있기에 외부로부터 새로운 물자가 유통되기 힘든 상황이다. 고립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물자가 사라지면, 군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다. 백성들의 식량을 징수하는 수밖에. 그것이 다시 한번 중부 백성들을 자극해 황태자를 향한 반감을 극대화시켜 주겠지.

이기기 위한 싸움으로 만들기 위해 길을 닦는 데 사용한 시간만 해도 10여 년이다. 에스메랄다는 질 가능성을 찾는 게 더 어려워 보이는 전쟁을 기어코 만들어 냈다. 그 결과 바 48일, 황태자는 예상대로 백성을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소식을 접한 에스메랄다는 다음 날 곧장 움직였다. 징집병이 제대로 구성되기도 전에 귀족들의 사병을 진군시킨 것이다. 테노리엘, 쿠베트, 록스는 물론 그들의 봉신들이 보낸 병력이 모인 서쪽은 약 1만 8천, 아르페시스의 지원 요청을 수락해 공식적으로 병력을 파병한 실테르 병력과 아브람 백작의 사병들이 모인 동쪽은 2만 4천이었다.

이제 남은 건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가 황도에 숨어 있는 황태자를 끌어내리는 것뿐이다.

* * *

그간 인내해 왔던 길고 긴 시간이 보상받는 것처럼 일은 잠시의 지체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병력이 움직인 후 에스메랄다는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전보 마도구를 모든 참전 영주들에게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마나 수식을 파헤치려다 전보를 망가트려 다시 받아 간 이들이 있었던 건, 사소한 사건이었다.

연락선이 마련된 다음에는 각기 서쪽과 동쪽에서 패륜을 심판하기 위한 병력이 빠르게 진군했다.

첫 충돌로부터 12일이 지난 바의 61일에 동쪽의 소템, 서쪽의 레트몬령이 점령되고 잔여 병력은 중부로 후퇴했다. 양측 군대가 중부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 시기, 에스메랄다가 중앙군 내부에 꾸준히 심어 둔 세작들이 빛을 발했다.

중앙군의 물자 이동로, 물자 보관 창고, 물자 경비 인원까지, 모든 정보가 줄줄 흘러 에스메랄다의 손에 들어왔다. 결국 바 62일부터 보름간 지속적으로 중앙군의 물자 창고가 불타 운용 가능한 식량의 7할이 전소되었다.

바 74일에는 아르페시스의 병력이 동쪽의 중앙군을 돌파한 후 빠르게 중부로 진입했다.

바 77일, 강제 물자 징수가 시작되어 중부 내에서 식자재의 물가가 치솟았다.

바 78일, 서쪽의 레트몬 백작령을 넘어선 병력이 중서 경계선에서 버티던 중앙군을 격파했다. 패잔병 중 강제 징집으로 끌려왔던 이들은 후방의 중앙군과 합류하는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몸을 숨기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징집군은 무기를 버려라! 징집군은 무기를 버리고 전장을 벗어나라! 무고한 백성의 피해는 야기하지 말라!’

아르페시스의 심각한 염려증 때문에 전장에 직접 가지 않기로 한 에스메랄다를 대신해서, 서쪽의 부대는 새로운 쿠베트 후작이 책임졌다. 선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 이후 곧장 승계를 진행한 쿠베트는 현재 루이자의 조부가 아니라 부친이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요구대로 창검을 쥘 줄도 모르는 채 고기 방패로 내몰린 징집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전투를 이끌었다. 그들을 죽이는 이들이 아니라, 죽음으로 내몬 이에게 원망을 쏟아 내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후 바 80일, 디오세네트 공작령의 마석 광산이 산적으로 위장한 로부오의 습격을 받아 약탈당했다.

이틀 후인 바 82일의 해 질 녘, 중부에서 4개의 도시를 넘은 아르페시스가 황도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도템에 도착했고, 다음 날 곧장 공성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수성이 시작되자 에스메랄다의 세작들이 또 한 번 빛을 발하였다. 수성 시 외부에서 적군을 교란시키는 별동대의 규모와 위치, 작전의 상세한 내용까지 모조리 에스메랄다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 83일, 중부에서 군의 물자를 훔치다 잡힌 이들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튿날 군의 처사에 반발하며 폭동을 일으킨 5백여 명이 학살되었다.

바 85일 오후, 황도 서쪽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유캄에 도착한 쿠베트 후작의 병력은 곧장 야간 공성을 시작하고, 90일에는 동쪽의 도템이 함락되어 잔여 병력이 황도로 퇴각했다. 도템을 지난 아르페시스는 병력을 3분할하여 1군은 황도로 2, 3군은 북쪽의 라그라스성과 남쪽의 시모체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바 91일 새벽, 서쪽의 유캄을 함락시킨 쿠베트 후작 역시 병력을 2분할시켜 1군은 황도로, 2군은 시모체의 공성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르페시스가 직접 간 라그라스는 빠르게 함락되었고, 그는 다시 1군과 합류해 황도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 93일, 어둠을 틈타 국경을 넘은 펠라체 공작의 사병이 디오세네트 공작령을 점령했고, 비어 버린 마석 광산에 주둔지를 형성했다.

바 99일이 되었을 때 황도 최후방 저지선을 담당하는 4개의 성이 모두 함락되고, 계절이 바뀜과 동시에 3만에 이르는 병력이 황도를 에워쌌다. 함락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분산된 후방 병력을 제외한 숫자였다.

그리고 라 1일이 된 오늘, 에스메랄다는 그 병력을 빙 돌아 우회하는 마차 속에 앉아 있었다. 아르페시스를 만나기 위해서. 그에게는 말을 하지 않고 가는 방문이었다. 몇십 일이 넘도록 보지 못해서인지 그는 전투가 없을 때면 거의 초 단위로 연락을 해 오는 중이었다. 전혀 귀찮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귀찮은 것보다는 기쁜 마음이 커서 가만히 내버려 둔 것에 가까웠다.

한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아르페시스를 찾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에디, 아직 자는가? 어디쯤 왔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계속 마차를 타고 움직이면 피곤할 테니 내가 데리러 가는 게 좋지 않겠나?]

서쪽 진영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숨 자겠다고 말한 게 1시간 전이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전보를 보냈다.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수정구에 기록되어 있는 이전 연락들을 쭉 훑어봤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30개 정도가 한계였지만, 라그나가 기능을 개선한 덕분에 현재는 100개까지 기록이 남는다.

에스메랄다는 굳이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보내온 전보를 훑어보며 미소 지을 뿐이다.

많이 놀랄까? 아니, 놀라기는 할까? 아직 그의 인지 범위 내에 진입할 정도로 가까워진 게 아니라서 모르는 거지, 만약 그 범위 내에 들어가 버리면 바로 눈치를 채지 않을까?

“대체 그 덜떨어진 놈의 어디가 좋은 거야?”

그녀가 아르페시스와 연락할 때 사용하는 전보 마도구를 붙들고 놔주지 않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페르멘이 툴툴거렸다. 그의 질문에 에스메랄다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어디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존재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의 성격, 말투, 행동, 사고방식, 그리고… 사실 그는 외모도 꽤나 준수한 편이었다.

황제와의 연결점을 생각하지 않고 아르페시스라는 존재만 본다면,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에스메랄다에게는 그러했다. 열병처럼 시작된 사랑이 마냥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버거운 것과 함께함에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행복 또한 주기에,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그가 웃어 줄 때,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 줄 때,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심지어 본인보다 그녀가 더 소중하다고 속삭여 줄 때, 절절한 감정으로 열락의 밤을 선물할 때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있음으로써 행복하다. 언젠가 홀로 꿈꿔 보기만 했던 사랑이 이제는 서로에게 닿아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표정 속에서 진심을 읽은 것인지 페르멘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더 괜찮은 놈들도 많단 말이야.”

그에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을 힐끔거리면서도 확실히 말했다.

“전… 그가 좋아요.”

페르멘은 그녀의 형제들 중 유독 아르페시스에게 날을 세웠다. 에스메랄다는 과거 페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형제들과 아르페시스가 잘 지냈으면, 하고 바라는데……. 페르멘은 어째서인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대체 그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에스메랄다의 눈에는 거의 다 예쁘고 귀여운데.

그녀의 말이라면 싫어도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는 것도, 그녀를 보며 녹아 버릴 만큼 달콤하게 웃는 것도, 싸우고 화가 난 상태도로 그녀가 악몽을 꿀까 걱정되어 매번 찾아와 주는 것도, 전부.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예시까지 하나하나 들어 가며 그의 장점을 설명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러니 잘 지내 보라고 돌려 말하자 페르멘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도둑놈 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으으으, 정말 싫어…….”

도중에는 부들부들 떨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에 설득을 관두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마차 밖에서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에스메랄다의 말이 끊어진 후였다. 마차 밖에서 타박타박, 언제든 그녀를 따라오는 루기스의 으르렁거림이 들린 것이 시작이었다. 보통의 늑대의 두 배쯤 되는 크기까지 자란 후로 루기스는 더 이상 신력을 먹지 않고 있었다.

더 커지면 실내를 돌아다닐 수 없겠다, 하고 걱정을 하자마자 루기스가 자의로 신력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루기스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호위로 동행한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습격입니다.”

페르멘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리춤에는 영지를 나선 후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마차에서 나가기 직전, 수납장에 넣어 둔 단검을 꺼내 에스메랄다에게 쥐여 주었다.

“안에서 나오면 안 돼, 알겠지?”

“네, 오라버니. 가능하다면 정황 파악을 위해 포획 인원을 남겨 주세요.”

“알겠어.”

픽 하고 웃은 페르멘이 에스메랄다의 뺨에 입을 맞춰 주고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발그레하던 뺨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창의 덧문을 닫았다. 만일의 경우 마차를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면 유리보다는 나무로 만든 덧문이 더 효과적이다. 그마저도 상급 기사가 날리는 화살이라면 전부 관통해 버리겠지만. 라그나가 만든 실드 마도구가 있으니 괜찮겠지.

페르멘이 쥐여 준 단검을 뽑아 손에 쥐자 마나를 두른 병장기가 마찰하는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전투 인원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보다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일이 곤란해진다. 그녀의 시선이 곁자리에 놓여 있는 전보 마도구에 닿았다. 연락을 해야 할까?

“하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고함 소리가 오가며 굉음이 이어지는 외부와 단절된 마차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꾸린 호위진은 아니었다. 급에 따른 기사들을 각기 20명씩, 총 60명이나 차출했고 동행한 사용인들은 전원 그녀의 로부오들이다.

근 80명에 달하는 인원 중 비전투 인원은 그녀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을 만큼 탄탄했다. 마차를 몰고 있던 마부조차 전투 병력이다. 한 사람을 호위하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탄탄한 구성이었고,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실력을 믿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언제나 그녀가 버리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기에 아르페시스에게 소식을 알려야 했다.

[도템의 남서쪽 3, 4시간 거리에서 습격받는 중이야.]

에스메랄다의 이동 동선은 일정에 참여한 호위 중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고, 다른 이들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더욱이 이동 경로 주변을 로부오들이 수색한 후 아무런 위협 요소가 없다고 보고를 올린 지역이다. 그래서 결정한 이동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소식이 다시 아르페시스에게 상처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깜짝 선물을 해 주겠다고 나섰다가 습격을 받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예상보다 습격 병력이 많은지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고, 에스메랄다가 탄 마차가 몇 번이나 흔들렸다. 덧문을 뚫고 들어온 화살이 생길 때마다 그녀의 앞에 파란 실드 마도구가 생성되곤 했다. 그 속에서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단검을 움켜쥔 그녀의 귀에 별안간 이질적인 부름이 닿았다.

“도련님!”

앳된 음성은 에스메랄다가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나단! 마차!”

그를 부르며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는 페르멘의 것이었고.

나단이 여기에 왜?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다시금 살짝 좁아졌다. 테노리엘 백작령에서 사병들과 함께 출정한 나단은, 유캄을 뚫었을 때 2군에 편성되었다고 들었다. 2군은 당시 시모체를 함락하기 위해 움직였는데…….

“허공에서 내리꽂혀 눈앞의 적을 벌하리라!”

분명, 나단이 낙뢰 마법에 쓰는 문장이 맞기는 하다. 시모체를 치고 올라온 병력의 주둔지 근방이니 순찰을 하던 중에 발견한 걸까?

그녀의 상념을 뚫고 콰광, 하는 폭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시작되니, 끝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이번에는 화염 마법까지. 매캐한 냄새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외부의 상황이 어떤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했다. 이럴 땐 정말 제대로 무위를 갖추지 못한 몸이 밉다.

에스메랄다가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비명이 솟구치더니 고요해졌다. 화살 몇 개가 꽂혀 뾰족한 촉이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는 덧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굉음도,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 시간이 조금 더 지속되자 깨달았다. 아르페시스가 온 모양이다.

사고를 친 상황이다 보니 저절로 입술이 메마를 만큼 긴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얼굴로 아르페시스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나 싶어 확인차 똑똑, 하고 덧문을 두드리니 근방에 있던 기사가 그 소리를 듣고 다가와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덧문을 열고 깨진 창문 너머로 밖을 살폈다. 시체와 핏물이 가득한 공간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는 시체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헉, 하고 갈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직후 성큼성큼 걸어와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 재낀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데리러 오게 두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앞으로는 깜짝 선물이고 뭐고,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절박했고, 아팠다.

“서둘러, 이동하라.”

“……예, 전하.”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 아르페시스가 거친 손길로 마차 문을 닫아 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 커다란 소리가 그에게 난 상처의 크기 같아서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숙였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녀의 품에 안겨 왔다. 잔뜩 흐트러진 숨소리가 마차 안을 채우며 에스메랄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아르페시스의 몸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직접 맞닿는 그의 체온이 너무 차가워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그대로 콱, 하고 깨물었다. 옷 위에서 느껴지는 압박임에도 얕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에게 붙들린 손목도 조금씩 아려 왔지만 에스메랄다는 통증을 호소하는 대신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지금 그녀의 박동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잇새에 끼워 압박하면 혈관 위로 펄떡이는 박동이 더 선명해지니까 하는 행동. 그가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칭하는 상태일 때 하는 행동. 이상하지 않을 때는 입술로 그녀의 살결을 빨거나 핥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 아플 정도로 깨물지는 않는다.

그녀를 꽉 껴안은 아르페시스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한 박자로 어긋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귓가에 닿아 오는 그 박동 소리를 들으며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렇게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거친 숨을 몰아쉰 아르페시스가 물어 왔다.

“다, 다친 곳은…….”

“없어, 정말이야.”

그의 질문에 답하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작았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왜, 여기에…….”

에스메랄다는 아직도 잔떨림이 남아 있는 아르페시스의 눈치를 보며 있는 그대로를 모두 설명했다.

“내가 가겠노라 말하지 않았나!”

그녀의 이실직고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 그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벙어리가 되었다.

“안전 지역이라 판단되었어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계속 전투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근 정찰 결과가 깨끗해서…….”

“어제가 안전했다 하여 오늘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이다. 내일이 불안한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말이다! 왜 이리 무모한가!”

그래, 그녀가 안일했다. 전투가 끝나면 패잔병이 발생하고, 그건 낙오병과 탈영병이 계속 생겨난다는 의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이들이 80이 넘는 인원과 함께 다니며 보호받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이 가치 있는 인물임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군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던 낙오병은 공을 세우기 위해서, 돌아갈 곳이 없는 탈영병의 경우에는 몸값을 위해서, 어떤 이유에서든 습격을 포기하기보다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 당장 그녀의 시야에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안일하게 이동을 결정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가 보고 싶어서, 그녀를 그리워하는 그에게 가고 싶어서, 감정적으로 결정을 해 버렸다.

“……그냥… 널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잠시간 변명을 입에 담아 보았던 에스메랄다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해.”

그들만의 약속으로 사과를 하자 아르페시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추었다. 이후 오래도록 돌아오는 말이 없자 에스메랄다는 힐끔, 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그가 계속 머뭇거리자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랑해…….”

이번에는 답이 곧장 돌아왔다. 아르페시스가 깊고 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속삭였다.

“다음에는 내가 움직이겠다.”

“……응, 정말 사랑해.”

거듭된 사과에 아르페시스는 결국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이 규칙 말인데…….”

“응……?”

그는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화를 못 내게 만드는군.”

조금 전보다 얕아진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정박자로 돌아오는 심장의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아르페시스의 화가 누그러진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비겁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입술을 열었다.

“사랑해.”

“……나도, 소리를 질러서…….”

그는 하던 말을 끝맺는 대신 헛웃음을 터트리며 속삭였다.

“정말 이상한데,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나아서 그만하자는 말을 못 하겠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언성을 높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혹시 놀라지는 않았는가?”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더…….”

“응?”

“더, 말해 주면 안 되겠나?”

안 될 것이 어디에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곧장 아르페시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겋게 달아오르는 귓가를 보고 있으니, 새삼 조금 전 페르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웃어 버렸다.

“사랑해.”

“……조금만 더.”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동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너를 사랑한다고.”

“나도, 그대를 사랑해…….”

아르페시스는 오른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며 왼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미치겠군.”

에스메랄다는 제 허벅지에 닿은 그의 성기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잔뜩 부풀어 올라 바지춤을 밀어 올린 성기는 때때로 꺼덕이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대를 다시 만나는 게 오랜만이지 않은가.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 사내는…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옆자리에 내려놨다.

“왜?”

“뭐?”

그를 그리워했던 건 에스메랄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생각으론 여기서 그와 떨어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아르페시스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것처럼 달려들면서, 시작하기 전까지는 생각이 왜 그리도 많은지.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와인처럼 빨갛게 변한 아르페시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 하지 않으려 드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여긴, 마차고… 하면, 아니, 그러니까, 움직이면 마차가 흐, 흐, 흔들릴…….”

“조심하면 되잖아?”

느른한 손길이 아르페시스의 뺨을 쓸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살짝 흘렀다. 조심을 한다 해도 밖에 있는 이들이 모르기는 힘들다.

그의 망설임을 읽은 에스메랄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인데, 남들이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고 이러는지.

아르페시스의 품이 그리웠던 에스메랄다로서는, 그의 망설임을 읽었음에도 물러나 줄 수가 없었다. 당장 그의 품을 원했다.

“빨리, 응?”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유혹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굶주린 것은 아르페시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주변을 부유하던 마나가 모여들며 견고한 장막을 만들어 냈다. 에스메랄다의 숨결 하나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음…….”

그의 열기가 전해져 올 만큼 깊은 입맞춤이 시작되자 에스메랄다가 옅은 비음을 흘렸다. 그녀의 뺨을 두 손 안에 가둔 아르페시스가 집요하게 입 속의 여린 살을 탐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제 양껏 에스메랄다의 타액을 훔친 그의 손은 어느덧 치마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에스메랄다의 둔부를 콱, 움켜쥐자 언제나처럼 그에게 감탄을 안겨 주던 보드라운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아르페시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걸 느꼈다. 이건 그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전후를 가리지 않고, 그는 정사 중에 이런 식으로 에스메랄다의 체 향을 탐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곧장 이어질 손길을 기대했건만,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안아 들더니 맞은편 자리에 앉혀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마차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치마를 들쳤을 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야 말았다.

지금 거세게 몰려오는 것은 분명 기대감과 흥분, 그리고 수치심이리라. 열기가 꽉꽉 들어찬 숨을 내뱉은 그가 에스메랄다의 속옷을 모조리 벗겨 낸 후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자, 잠…….”

마차를 오래 타고 있었던 에스메랄다는 그의 입술을 피하고자 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려 버리자 밖으로 밀려난 아르페시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먼저 유혹해 놓고 왜 허락은 해 주지 않느냐고.

“핥고 싶다, 응?”

달뜬 숨과 함께 나온 애원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가 구음을 해 준 것이 처음은 아니나, 이런 식으로 명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의사 표현을 한 적은 없었다.

“아, 아침에나 씻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다음에…….”

“대체 왜 그런 걸 신경 쓰지?”

재촉을 하는 것처럼, 혹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맨다리에 계속 입술을 비비적거리며 웅얼거렸다. 에스메랄다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더럽잖아…….”

씻은 직후도 아니고, 시간이 꽤 지났으니 청결한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논리적인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에스메랄다의 무릎을 깨물며 속삭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새하얀 종아리를 길게 핥으며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에스메랄다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벌려 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움찔거리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포기를 모르는 것처럼 계속 조르기만 하는 아르페시스의 태도 때문에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승기가 제게 넘어오고 있음을 깨달은 아르페시스가 힘이 빠진 그녀의 다리를 핥으며 재촉했다.

에스메랄다는 붉게 물든 얼굴을 푹 숙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예견된 패배를 받아들이며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벌어지는 틈이 넓어질수록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허벅지 살을 핥으며 더 깊은 곳으로 고개를 숙였다.

“단내가 넘쳐흐른다.”

그녀의 음부에 입을 맞춘 아르페시스가 웅얼거리자, 숨결이 고스란히 닿았다.

“흣……!”

물컹한 혀가 여린 살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에스메랄다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어 둔 아르페시스가 바짝 긴장한 그녀의 돌기를 빨아들였다.

“아읏……!”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쭙, 츕, 하고 울리는 야스러운 소리와 함께 찾아온 자극에 에스메랄다는 그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그의 숨이 점점 더 격해질 때마다 에스메랄다가 느끼는 오싹한 자극도 강렬해졌다.

“그대는 달기만 해, 혀가 아릴 정도로.”

잔뜩 뭉개진 말소리가 그녀를 희롱하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그는 어째서인지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저가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게, 집요하기까지 했다. 에스메랄다는 제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을 느끼고선 헛숨을 삼켰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가볍기만 한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등받이에 붙어 있던 허리가 떨어지자,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입에 음부를 들이민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추잡한 소리가 이어지는 와중에, 아르페시스의 손은 어느덧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쥔 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드레스 위로 드러나 있던 그녀의 가슴골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며 형태를 바꾸었다. 옷감 위에서 가해지는 힘은 빳빳하게 일어난 그녀의 유두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높게 치솟은 에스메랄다의 교성이 음욕을 부채질했을 때, 아르페시스는 제 바지춤을 풀어 헤치고서 한 손으로 수음을 시작했다. 이미 그의 귀두에선 질척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가 삼키는 액체가 많아질수록, 에스메랄다의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다리 사이에 낀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동그랗게 말린 채 한동안 움찔거렸다.

그녀가 절정에 달한 후에도 아르페시스는 아쉬운 사람처럼 계속 에스메랄다의 음부를 핥아 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구음을 관두고 몸을 일으키며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녀 스스로는 모르겠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와 입을 맞추며 미끈해진 제 성기를 끊임없이 문질렀다. 그리고 입술을 떼는 찰나의 순간마다 짧게 끊어진 말로 속삭였다. 맞댄 입술 때문에 조금 뭉그러졌지만 에스메랄다가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나도…….”

뜨겁게 몰아붙이는 아르페시스에게 쓸려 가던 에스메랄다가 뺨을 붉힌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의자에 앉아,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마차의 바닥으로 내려가 아르페시스의 허벅지를 짚었다.

직전까지 그가 집어삼켰던 입술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이후 찾아올 감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껏 긴장한 채, 또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이 성기에 닿자 그는 달뜬 숨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입속에서 움찔거리는 아르페시스를 올려다보았다. 혀를 동글게 말아 귀두를 감싸자 그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녀가 머금은 성기가 움찔거리며, 그가 느끼는 전율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왜 매번 구음을 하려 드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몸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정염과 음욕에 물든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채 야스러운 소리를 내면, 흥분으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그게 참, 선정적이었다.

그녀가 아르페시스에게 구음을 해 줬을 땐 어두웠기에 보지 못했는데, 날이 밝은 지금 직접 눈으로 보며 실감하니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의 행동이 적극적으로 변하자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목 깊숙한 곳까지 닿은 그의 성기가 조금 버거웠음에도, 더 깊이 삼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싹텄다. 그녀는 제 타액으로 젖어 질척해진 기둥을 문지르며 입을 가득 채운 귀두를 빨아들였다.

“에디……!”

아르페시스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밀어냈다. 팍, 하고 튀어 오른 정액이 에스메랄다의 뺨과 머리카락에 흩뿌려졌다.

한동안 헉, 헉, 헉, 하고 거칠어진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마차 안을 맴돌았다. 잠시 후,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뺨에 묻은 제 정액을 닦아 주며 물었다.

“약은……?”

“왼쪽 수납장…….”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고, 에스메랄다는 순순히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허리를 낚아챈 아르페시스 덕분에 일어나다 말고 그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다시 시작된 입맞춤은 서로를 탐하며 빈틈없이 맞물렸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등 뒤에 달린 단추를 풀어내면서도 수납장에서 피임약을 꺼내 들었다.

파란 마나를 타고 허공에 둥실 떠오른 병이 그의 손에 안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피임약을 복용한 직후, 아르페시스의 손은 저가 풀어 헤친 에스메랄다의 옷을 파고들었다.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이 이어지자, 헐거워진 의복 위로 아찔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제게 입술을 내어 준 채 몸을 바르르 떨어 대는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인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일어나는 사이 다시 아래로 처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입술을 떼었다.

붉게 부풀어 오른 채 제 타액으로 젖은 입술도, 헐거워진 옷 속에서 가슴이 일그러지며 만들어 낸 곡선도, 잔뜩 흐트러진 그녀가 내쉬는 숨결도 그를 부추기기만 한다.

에스메랄다의 타액에 젖은 성기는 손으로 살짝 문질렀을 뿐임에도 다시금 빳빳하게 일어섰다. 에스메랄다의 음부는 이미 축축하게 젖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마주 안으며 곧바로 성기를 삽입했다.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아찔한 교성이 마차를 채워 나갔다.

아르페시스는 제 눈앞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곳에 이를 박아 넣고서 깨물자 붉은 흔적이 남았다. 언제나 맛보아도 달기만 한 피부를 핥자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더, 세게.”

얕은 움직임에 안달이 난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직접,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앙……!”

이미 한 번의 절정을 느낀 에스메랄다로서는, 아르페시스의 뜻대로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하는 자극을 버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몸이 무너졌다. 이후부턴 아르페시스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흔들리는 게 전부였다.

한 사람의 체중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게 어찌나 능숙한지, 에스메랄다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며 내벽을 문지르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또 한 번의 절정을 느끼며 울먹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파정을 했던 탓인지, 아르페시스는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극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녀의 속에서 저를 빼내었다. 그 직후 그는 에스메랄다를 의자 위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뽀얀 둔부를 움켜쥔 채 다시금 내부를 헤집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올랐다.

에스메랄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커질수록, 아르페시스의 움직임도 거칠어졌다. 의자에 얼굴을 묻은 채 둔부를 높게 들어 올린 그녀를 제 몸으로 뒤덮었다.

아래로 처진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이 집요했다. 다 벗지 못한 의복 속에서 오가는 움직임이 평소보다 더 다급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가슴을 지분거리던 아르페시스가 손을 아래로 내려 한껏 예민해져 있는 음부의 돌기를 문질렀다.

에스메랄다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반항은 아르페시스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그는 제게서 도망가려는 듯, 앞으로 기어가던 에스메랄다의 팔을 붙잡고서 당겼다. 그녀의 상체가 딸려 올라가며 의자에 짓눌려 있던 가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으흑, 읏! 아앙!”

아르페시스가 귀두의 끝부분까지 빼내며 허리를 물리더니, 쉴 틈도 주지 않고 한 번에 그녀를 꿰뚫었다.

깊고, 길게, 그리고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던 중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잔뜩 짓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리 짓이 반복될수록 그를 오물거리는 에스메랄다의 움직임이 선명해졌으니까.

반복된 절정으로 에스메랄다의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으며 빠르고 잘게 허리를 흔들었다.

에스메랄다의 동그란 어깨에 이를 박아 넣은 그가 짐승의 것처럼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파정이 주는 쾌감을 음미하는 것처럼,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에스메랄다의 안에 저를 문질렀다.

축 늘어진 에스메랄다의 귓가에 입술을 묻은 그가 밀어와 사랑을 속삭이며 제 것을 빼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음부에서 울컥, 하고 쏟아지는 정액을 보다 말고 마른침을 침을 삼켰다. 파정 직후 힘없이 늘어지려다 말고 다시금 뻐근해지기 시작한 제 하체와 달리 에스메랄다는 이미 축 늘어진 상태였으니까.

그녀의 건강과 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르페시스의 선택은 빤했다. 그는 힘없이 하늘거리는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고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몇십 일 만에 만난 연인의 품을 벗어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 * *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살색은 항상 밀폐된 공간과 함께였다. 그 ‘밀폐’의 정의가 침실로 한정되어 있다는 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데 고작 두 계절 만에 연회장의 휴게실과 마차까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장소들이 그의 머릿속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다음번에는 대체 어떤 장소가 튀어나올지 살짝 무서울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한 것 같았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의 끝에 잡힌 것은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채,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에스메랄다였다.

동그란 어깨와 얇은 허리는 물론,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가슴과 엉덩이,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하얀 피부, 그리고 그의 성기를 쥔 보드라운 손까지.

그는 여전히 열기로 달궈진 숨을 내뱉으며 제 품에 기대어 있는 에스메랄다의 귓불을 깨물었다. 신음을 흘리지도 못한 채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게 그녀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아르페시스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에스메랄다의 손을 멋대로 가져다 수음을 하는 중이었다. 반대쪽 손으로는 흐트러진 드레스 밖으로 흘러나온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양껏 주무르는 중이고. 더 했다간 에스메랄다가 혼절할 것 같아서 나름 타협을 본 셈이다.

에스메랄다를 희롱하고 있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기둥을 훑어 내리자 오싹한 전율이 허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의 욕망이 부족하다고 소리를 지른 탓에 시작된 일이지만, 제 품에 기대어 있는 에스메랄다를 지분거리는 건 상당히 자극적인 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뭘 하는지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홀로 욕심을 조금 더 채우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여린 몸을 꽉 끌어안았다.

함께 흐트러진 호흡을 나누던 때보다는 못하지만, 이렇게 홀로 달뜬 숨을 몰아쉬며 에스메랄다를 느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급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손을 놀리던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울긋불긋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몸을 떨었다. 뜨거운 정액이 울컥, 뿜어져 나오며 그와 에스메랄다의 손을 뒤덮었다.

움찔움찔거리며 떨리는 몸이 에스메랄다를 파고들 것처럼 바짝 맞닿은 직후,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그가 펼쳐 놓은 마나 장막을 건드는 이가 있었다.

그의 눈에 서늘한 빛이 감도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사라져 버렸다. 지금 그들이 이동 중이며, 이곳이 마차 안임을 상기한 탓이다.

몇 번이고 계속 안쪽을 파고들려는 것처럼 건드리는 움직임을 보건대, 용건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르페시스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마차 내부를 돌아보았다. 정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기도 그렇거니와, 에스메랄다와 그의 몸 곳곳에 남은 파정 흔적은 상당히 난잡했다.

몇십 일 만에 만난 연인과 나눈 정사에 빠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 버렸다.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는 급한 대로, 마차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제 망토로 방금 쏟아 낸 씨물을 닦아 냈다. 그 후 곧바로 에스메랄다의 의복을 정리해 주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그녀의 속살을 보게 둘 수는 없으니까.

격렬한 정사를 나눈 것치고, 의복을 정돈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 다 완전히 옷을 벗지는 않았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옷을 정리한 후, 흐트러져 있는 제 옷도 가다듬었다.

혼자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그는 문득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어느덧 눈을 뜬 에스메랄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제 눈치를 보던 그녀가 생각났다. 고개를 숙인 채 동그란 눈매로 저를 올려다보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화가 났음에도 왜 이리 예쁜 것이냐고,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해 버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웃어?”

살짝 갈라진 목소리마저 사랑스럽다.

“그냥.”

좋아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훔친 아르페시스가 마차 밖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의 장막을 뚫고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시도를 지속하는 것처럼 건드리는 느낌이 지속되고 있었다.

“곧 도착할 모양인데…….”

“아…….”

장막을 뚫으려는 시도가 집요한 걸 보건대, 페르멘일지도 모르겠다. 아르페시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나 장막을 거두어들였을 때, 으득으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앞길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곧 병영에 도착하니, 알고 계시라고.”

역시나, 그의 물음에 답한 이는 페르멘이었다. 이를 박박 가는 것도 모자라 말까지 짧아졌다. 타인의 눈이 있을 때는 형식적인 예를 갖추었는데, 이젠 그런 것마저 신경 쓰지 않을 모양이다.

“페르멘이 또 심통을 부리겠군.”

아르페시스는 멀어지는 페르멘의 기척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대화를 해 보긴 했는데, 성과가 좋지는 않네. 사랑해.”

이 이상한 문장이 왜 이리 좋은지. 그녀를 다시 만났던 순간에 날뛰던 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대가 뭐라고 해도 변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응?”

“그대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가 날 곱게 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뭐? 어째서?”

정말 모르는 건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니, 곱게 보이지 않겠지.”

“네가 나를?”

빼앗아 갔다니? 하고 되묻는 에스메랄다를 보니 정말 짐작도 못 하는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는 예민하다 못해 날카로운 사람이 왜 페르멘의 심리는 보지 못하나 싶어 조금 불퉁해졌지만, 그는 그저 웃고 말았다.

뭐 어떤가, 이제는 그가 시끄럽게 굴어도 흘려들을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쌓였다. 제르민이 쏟아 내던 잔소리의 도움도 조금 받았고. 그건 당장 시선을 주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평생 듣고 살 소리인데 오늘도 듣는다고 하여 뭐가 달라질까.

마나를 밖으로 풀어낸 아르페시스는 마차가 이미 주둔지 근방에 도착한 것을 확인했다. 빨리 이 귀찮고 번거로운 전쟁을 끝내고 그녀와 침실에 틀어박힐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작 며칠이면 다 끝날 테니까 마지막 남은 인내를 쥐어짜 보자. 아르페시스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찾아들며 웅얼거렸다.

“거의 다 도착했다.”

그녀의 입술을 물고 말을 하는 바람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놓을 생각은 없다. 그녀가 행복하다는 듯이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으니까.

* * *

아르페시스의 천막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황도를 포위한 병력이 움직였다. 에스메랄다는 그 병력의 후방에서 말에 오른 채 확대경을 들었다. 직접 뛰어들어 공성을 할 것도 아닌데 그녀가 병력 사이에 끼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활동성을 위해 바지를 입는 것은 물론,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아르페시스가 준 보호구를 착용했지만 그녀는 전투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백작님.”

아스터의 부름에 잠시 확대경을 떼어 놓자 말의 갈퀴에 묶어 둔 리본이 허공에 솟아오른 채 살랑살랑,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본 주변을 떠돌고 있는 파란 잔상은 마나였다. 앞에서 병력을 이끌고 있는 아르페시스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보고 픽, 웃었다.

“심심해?”

리본의 꼬리가 좌우로 움직이며 부정을 비추었다.

“그럼?”

이번 질문에는 꼬리가 콕콕, 에스메랄다를 가리켰다.

“보고 싶다고?”

단번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리본을 보며 에스메랄다가 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루기스가 잠시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자신의 근위대를 대거 남겨 놓더니 인지 범위 내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후 출발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에스메랄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고 싶어. 빨리 끝내고 쉬자.”

다시 한번 위아래로 움직이는 리본을 뒤로하고 에스메랄다가 확대경을 눈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 나도 보여.”

확대경 속에서 작은 점처럼 황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감회가 색다른걸.”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움직이는 리본이 물음표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주변에서 푸른 마나가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면 조금 더 대화하기 편하지 않겠느냐고, 아르페시스가 직접 달아 준 리본인데… 확실히 긍부의 뜻만 표현할 수 있었던 이전보다 편한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저곳에 있는 놈들을 죽이기 위해 필요했던 고생들이 떠올라서. 드디어, 라고 생각하니 복잡 미묘하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리본을 다시 움직이기 전에 말을 이었다.

“놈들을 죽이는 것과는 상관없어. 그냥 여기까지 오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라서 그런 거야.”

복잡 미묘하다는 것은 그간 그녀가 걸어온 시간과, 그녀가 들인 노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저 속에 들어앉은 놈들을 죽이는 것에 관련된 감정이 아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과 눈이 따가울 정도로 글자를 훑던 순간, 그리고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나날까지.

“모든 것을 잃고 처형대에 오를 놈이 기대돼.”

잔혹하고 냉혹한 말에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들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었으니까. 각지에서 로부오와 그녀의 비자금을 관리하느라 분주했던 이들에게, 겨우내 남부에서 황태자의 기사와 용병들을 사냥하느라 바빴던 에반스에게 줄 선물이 눈앞에 있다.

“물론 처형대 위에서 죽지는 않겠지만.”

모두에게 보이는 처형대 위에서 죽는 건 황태자의 대역일 것이다. 그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증오와 원망의 칼날에 난도질되어 죽게 될 운명이다.

에스메랄다는 많은 이들에게 복수의 사탕을 내밀며 회유했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저 선물은 시간이 지나 도착한 지금의 순간에 그들에게 내려야 하는 보상이었다. 패전의 확률을 내리고 승률을 올리기 위해 달려온 과거의 끝에서 드디어, 에스메랄다는 지독한 핏물 위에 피어난 복수의 꽃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르페시스에 의해 움직이던 리본이 꼿꼿하게 섰다. 공성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어디, 며칠이나 버티는지 볼까?”

리본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듯이, 금방 끝나겠다는 듯이,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이후 축 늘어진 리본을 손에 쥔 채 다시 확대경을 들었다. 붉게 피어오르는 화염이 보인다. 수성용 마도구가 발동된 지 고작 이틀 후, 에스메랄다는 외성을 뚫고 황도에 들어선 아르페시스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 * *

반황실 세력은 반군이 내전을 선포한 후 황도를 빠져나갔고, 중립이었던 이들 중 일부는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남았다. 반면 벨베크 쪽 인사들은 서쪽과 동쪽에서 군사가 일어나자마자 황도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현재 황도에 갇히다시피 해서 모여 있는 이들은 기존의 황제를 따르던 세력이 대부분이다. 그들 중 8할이 북부에 영지를 가진 귀족이고. 현재 북부는 반군이 버티고 있어서 그들은 영지로 대피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들은 황태자의 몰락이 본인들의 몰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덕분에 어떻게든 이기고자 백성의 징집을 건의하기도 했다. 동쪽과 서쪽 모두 전투 시 징집병에게 도주를 권고하며 밀고 들어왔고, 그 소식은 소문이 되어 에렘을 덮고 있다.

자신의 남편, 아버지, 형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황태자 쪽보다, 그들을 살리려고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한 아르페시스 쪽의 평판이 나은 것은 당연하다. 실제 징집병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오며 무고한 백성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아르페시스를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다.

참 우습다. 전투 중에 죽은 징집병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르페시스가 그들을 살린 사람이 되어 있다니 말이다. 백성들이 무지하고 멍청해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휘두르는 게 너무 쉽다. 한때 그들을 가르쳐 품고자 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질 만큼.

에스메랄다는 황도의 외성을 넘어 내부로 진입한 아르페시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로부오들에게서 계속 보고를 받았다.

‘우리의 목적은 패륜아를 처단하는 것이다. 무고한 백성들에게 검을 겨누지 마라!’

외성을 지나 시가지로 진입해 병력을 배치하는 내내, 아르페시스는 황도를 누비며 경고했다. 일단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만으로도 욕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기에 에스메랄다가 요구한 행동이다. 그리고 시가지 점령이 끝나고 병력이 황성을 완전히 에워쌌을 때, 에스메랄다는 황도에 발을 들였다.

타박타박, 말발굽 소리 위로 호위 기사가 창대에 매단 테노리엘의 깃발이 흩날렸다. 시체가 즐비하고 핏물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황성의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에스메랄다를 향해 다가온 건 아르페시스였다. 갑옷에 핏물을 가득 묻힌 그가 말을 바짝 붙여 오며 웃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떤가?”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공을 평할까요.”

보는 눈이 많으니 평소처럼 말을 편히 하기는 힘들었다. 그게 또 불만인지 아르페시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추정되는 잔여 병력은 2천 5백에서 3천으로 보고 있다.”

아르페시스가 황성을 턱짓하며 말했다. 기존에 황성을 지키던 병력 1천여 명, 그리고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며 황도로 합류한 중앙군을 합해 고작 3천여 명이다. 겨울 중에 북부로 파병했던 중앙군을 불러오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반군들이 퇴각하는 이들을 기습해서 반파시켰다.

그 결과 3만이 될까 말까 한 병력으로 동쪽과 서쪽을 막아야 했고, 완전히 실패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병력을 분산시켜 상대하면 이렇게 흡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케니스를 비롯한 반군이 중앙군을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으리라.

“저 중에 징집병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아르페시스의 명예를 생각해야 하는지라 신경이 쓰인다.

“외성을 공격하던 당시 걸러 냈다고 보긴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귀족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들도 있으니, 몇몇은 딸려 들어갔겠지.”

에스메랄다가 짧게 혀를 찼을 때였다. 아르페시스가 슬쩍 운을 띄웠다.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현재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는 아브람과 테노리엘의 병력이 섞여 있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동쪽은 실테르, 서쪽은 쿠베트, 북쪽은 록스를 주축으로 각기 다른 영주들의 사병이 뒤섞여 있다.

모두 백작의 장례식 때부터 아르페시스의 지지 세력이 되고자 슬쩍 발을 들이밀던 이들이다. 공적을 완성하기 직전이니 오래 기다리게 하여 좋을 게 없겠지.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에스메랄다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병력의 선두로 나서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린 아르페시스는 성큼성큼, 단절된 성문으로 향하는 해자 앞에 멈추어 섰다. 수성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고귀한 이들이 머무는 장소를 백성들이 머무는 곳과 단절하기 위해 만든 관상용 해자였다.

“패륜아는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목소리에 마나가 담긴 채 황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살짝 경직된 음성이었지만, 나쁘지 않다. 여기서 에스메랄다가 나서는 건 이상하니 아르페시스에게 맡기는 게 옳다.

성이 공격당했는데, 외성이 뚫렸는데, 백성을 내성 밖에 둔 채 제 몸만 피한 놈이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몰렸는데도 휘하 병력을 위한 항복 대신 스스로를 위한 항전을 택한 버러지.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나락 속으로 끌어내려 줄 테니.

“비겁한 패륜아는 모습을 드러내 심판을 받아라!”

몇 번이고 울린 그 목소리의 끝에서 마침내, 황성의 성벽 위에서 핏발 선 눈을 치켜뜬 이가 나타났다.

“선황을 살해한 놈이, 감히 누구에게 패륜의 죄를 뒤집어씌우느냐!”

상대방도 이번 공방에서 명문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확성 마도구의 도움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내가 그러했다면 어째서 부황의 사건을 조사하던 법무부의 수사관들을 보호했겠나. 그리고 네놈은 어째서 그들을 습격했나!”

그때부터 정말 유치하고 쓸데없는 공방이 오갔지만, 들려주어야 하는 내용들이니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부황의 거처를 습격해 기사들을 공격한 것은 누구냐! 부황의 시신을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않고 묻은 것은 누구냐! 감히, 패륜을 위선으로 덮어 죄를 가리고자 한 것이 누구냔 말이다!”

황도에 가까워질수록 전보 마도구로 그가 해야 할 말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지만…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에스메랄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르페시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침묵하는 황태자의 행동 때문에 시선을 옮겨야만 했다. 확대경으로 확인한바, 분명 우락부락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에도 그는 침묵했다.

적막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작되기 직전, 비릿한 미소를 꺼내든 황태자가 말했다.

“이제 보니 다 네놈 짓이었구나. 남부의 역병을 위해 황실이 보낸 약품을 약탈한 것도, 내 명령서를 위조해 중앙군 수천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전부 나를 함정에 몰아넣으려던 것이었어!”

에스메랄다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황태자의 죄를 쏟아 내던 중 딸려 나온 그녀의 죄악 앞에서 위축된다. 훗날 가게 될 지옥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니, 비천한 네놈이 그런 수작을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지! 네놈의 뒤에 숨어 있는 그 계집이구나! 모든 게 다 경박한 몸뚱이를 가진 그년의…….”

“감히 누구를 입에 담아!”

꾸며 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짙은 노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파란 물결이 황성의 성벽을 내리쳤다. 비명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질 때는 에스메랄다조차 놀라서 몸을 굳혀야만 했다. 성벽이 물결에 따라 쓸려 나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굉음 속에서도 아르페시스가 악을 지르는 소리는 선명하게 사람들의 귀에 닿았다.

“네놈이 감히 그녀를 모욕하는가! 너 따위가!”

본래 지나친 경계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정도의 힘은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성벽을 난도하고 있다는 건……. 아르페시스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에스메랄다는 서둘러 말의 허리를 찼다. 파란 물결은 계속 그들의 앞에 놓인 성벽을 다져 놓고 있었다.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는 루기스가 말의 옆에서 함께 달렸다. 아르페시스의 곁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린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전하.”

황태자는 여기서 죽이면 안 된다. 그는 적법한 심판대 위에서 패륜의 죄를 선고받고 처형되어야 한다.

“아르페시스!”

그녀가 아르페시스의 손을 잡아끌자 분노가 넘실거리던 은회색 눈동자가 에스메랄다에게로 돌아왔다.

“……죽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숨을 고른 아르페시스는 마나를 거두고서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사방이 고요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달그락하고 돌 더미가 들썩거렸다. 에스메랄다는 무너진 성벽의 잔해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황태자를 볼 수 있었다.

“하, 하하하! 살았다, 살았다고!”

그는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힘, 직접 보았음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힘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서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폐하!”

함께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이 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황태자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얕디얕은 관상용 해자를 사이에 둔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곧 시선을 느낀 것인지, 황태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산산조각 난 돌조각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참, 초라했다.

“아, 아니라면 증명해 보라! 네놈이, 네년이 수십만의 핏물을 밟고 여기에 섰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봐! 하늘과 진실은 가린다, 하……!”

다시 주변에 파란 물결이 피어나자 파리하게 질리는 모습이 어찌나 꼴불견인지.

“네, 네놈들의 명분은 다 거짓된 것이다! 죄인은 네놈들이라고! 감히 내 것을 탐내 악독한 짓을 저질러 온 이 악마 새끼들!”

에스메랄다는 그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삐에 엮어서 묶어 둔 확성 마도구를 풀어 손에 쥐었음에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안다. 지금 황태자가 하는 말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그가 과거에 선황이 저지른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녀가 반군의 창설을 앞당기기 위해 남부 역병 사태에 손을 댔다는 게 알려지면, 케니스를 비롯한 남부군이 날카롭게 반응할 것이다. 이미 다른 이들에게 뒤집어씌운 상태였지만, 괜한 의혹이 피어올라 좋을 게 없다. 아르페시스와의 혼인을 약속한 그녀의 죄는 드러나선 안 된다.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더라도, 그녀가 엮이면 안 되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발악과 다르지 않은 소리를 질러 대고 있는 황태자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당할 것도 없는 주제에, 남의 죄를 꼬집어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버둥거리는 저 비겁한 놈과 같아지는 것만은, 싫었다.

에스메랄다의 이기는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추락하는 꼴만은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죄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흘려 낸 핏물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훗날 가게 될 지옥 역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감내할 뿐이지. 그럼에도 이후를 생각하면 부정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벙긋거렸으나 말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부정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이 악독한 놈들! 악마들!”

완전히 무너져 내부가 훤히 보이는 성벽 앞에서 황태자를 데려가려는 근위 기사들과, 그들의 힘에 저항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는 황태자의 모습은 참…….

에스메랄다는 뒤에서 시작된 술렁거림을 느꼈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황도 전체에서 같은 술렁거림이 퍼지고 있을 테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 된 음식에 재를 뿌려 좋을 것이 없는데, 왜 이러나.

“패륜의 죄에 손을 댄 악인의 말에 현혹…….”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나서지 못하고 있던 에스메랄다를 대신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빛이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