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40화 (40/45)

제38장

흘러가 버린 죽음

케니스를 필두로 한 반군의 선언은 벽보가 되어 에렘 전역에 붙었고, 그것을 행한 건 에스메랄다가 움켜쥔 뒷골목의 건달들이다.

이번 일로 본인들의 무릎을 꿇린 것이 누구였는지 어느 정도 깨달았을 터. 이미 눈치가 빠른 이들은 탈주를 시도해 왔지만, 앞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도주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을 사냥하는 건 각지에서 뒷골목 관리를 위해 투입되었던 로부오의 몫이다. 도주자들의 목을 술집과 유곽에 틈틈이 걸어 두면 공포가 그들의 걸음을 붙잡으리라.

뒷골목을 단속하는 동안 케니스는 본래의 계획대로 7대 3의 규모로 나누어 두었던 병력을 움직였다.

그가 직접 이끄는 본진이 에렘의 최북단에 위치한 디오세네트와 도미르베체를 치고 있다. 후방과 전방에 모두 적을 두는 일이 없도록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북부 영주들의 사병을 후방에, 중앙군을 전방에 두어 포위하고자 했던 황제의 전술을 망가트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사이 반군의 나머지 병력과 테몬을 위시한 소수의 북부 영주들이 사병을 중북 경계선으로 보낼 것이다. 중부와 닿아 있는 세르도트 백작령과 솔루베르 공작령을 압박해 황제 측의 북진을 막기 위함이다. 중립에 속했던 벨베크 백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해야겠지만 큰 변수는 아니다.

이미 벨베크는 황제보다 반군의 값을 크게 치고 있으니, 롤베르만과의 국경을 핑계로 황제의 명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각국의 병력이 움직이는 중이니 국경과 맞닿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에겐 꽤나 위협적인 상황이다.

현재 국경 지역으로 이동한 실테르의 병력은 아르페시스의 내전을 도와줄 지원병이다.

그리고 서부의 북쪽 지대에서 집결 중인 또 다른 반군이 중서 경계선에 닿아 있는 라그테스 공작령과 오르테메스 백작령을 치면서 중앙군의 일부를 묶어 둘 것이다. 이후 황제 세력의 영지가 모두 정리될 무렵에는 케니스가 아래로 내려와 중앙군을 직접 치게 될 터. 각지로 나뉘어 있던 반군이 한자리에 집결한 후, 그때부터가 진짜다.

에스메랄다는 그 전까지 아비체룬의 국경병이 이동하는 것을 핑계로 사병을 집결시킬 것이다. 문제의 그 병력은 아비체룬이 아닌 에렘의 내부를 향하게 될 예정이고.

그런 군사 이동이 있는 상황에서 테노리엘과 영지를 접하고 있는 레트몬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테노리엘이 아르페시스의 세력임을 자청해 버린 탓이다. 자칫하다간 아르페시스를 지지하는 테노리엘에게 빈집털이를 당하게 될 터, 그들로서는 황제에게 많은 병력을 내놓지 못하리라.

“여기도, 저기도, 다사다난한 겨울이 되겠군…….”

마차 밖을 내다보던 에스메랄다가 느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아직 짧기만 한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는 제르민과 오웬이, 그녀의 품에는 함께한 지 이제 닷새가 된 신수가 엎드려 있었다.

반군의 일이 진행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황도에서 계속 포섭을 진행해야 한다. 그녀가 가는 길을 따라와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늘어나도록.

황제의 견제와 감시 속에서 황태자가 악수를 두도록 부추기는 것도 계속해야 한다. 케니스가 황태자의 목숨을 명확하게 명시한 이유도 에스메랄다가 그를 압박하고 자극하기 위해 요구한 부분이다.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황태자가 남부군의 군수 물자를 약탈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황제가 직접 저지하고 일을 덮기는 했지만 오멘은 상당히 많은 물증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놈이 성공하면 반격해서 다시 빼앗아 올 방도가 있어야 하니, 차근차근 모아 왔다나? 그것들이 고스란히 에스메랄다의 손에 들어왔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 장엄하구나!”

황성에 들어서자 제르민이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드디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사건들 속에 있음에도 황도는 여전했다. 카의 81일인 오늘, 어제 자로 발발한 내전 소식은 아직 황도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니까.

뭐, 도착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소란스러웠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지겠지. 황제가 반군을 토벌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저들끼리 떠들며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저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친분이 있는 귀족들끼리 소소한 모임을 가지며 다가올 봄에 시작될 사교 행사를 준비할 것이다. 반군 따위에게 겁먹지 않는다고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평소와 똑같은 연말을 보내야 한다. 북부에 영지를 둔 이들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전전긍긍하겠지만 그걸 타인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으리라. 겁쟁이라는 놀림감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북부에서 소식이 도착하려면 모레는 되어야 할 터, 그날에는 아르페시스의 공훈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린다. 애초에 황제가 아르페시스를 불러들인 명분이 그것이니 급한 대로 준비가 끝나자마자 황도에 머무는 귀족들에게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곳에 참석해서 황태자의 속을 긁어 줄 생각이었다.

“에스메랄다 양, 저 중에 황제가 사는 궁은 어느 것인가요?”

마차 밖에서 시선을 거둔 에스메랄다가 제르민을 돌아보며 질문에 답을 했다.

“중앙 궁은 황성의 중심부이기에 조금 더 들어가야 하지요.”

지금 그들이 탄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관료들이 출입하는 황성의 외각 지대였다. 동서남북 사방위로 자리 잡은 내성의 입구를 지나면, 북쪽을 제외한 모든 장소에 관료들이 근무하는 외궁이 분산되어 있다.

재무부, 외무부, 행정부, 법무부, 그리고 군사부를 비롯한 황실 기사단의 거처까지 모두가 외궁에 속하고, 황실 기사단과 경비대가 경비를 선다. 그리고 북쪽의 외성을 지나면 곧장 마주하는 황실 기사단의 거처를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면 내궁을 마주할 수 있다.

황족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 바로 그 내궁이다. 그리고 황성의 가장 깊숙한 곳, 모든 것의 중심에는 황제와 황후의 거처가 있다. 황성 내부에 상주하는 병력을 모두 합하면 1천. 황제와 황후의 거처는 그토록 깊고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이다.

영지에서 나온 귀족들이 황도에 대동하고 들어올 수 있는 사병의 수는 작위마다 다르다. 황도에서 무력을 동원한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내부에 있는 병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황도에서 백 단위가 넘는 병력을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이유였다.

“음? 그럼 황제는 국정을 어디서 보나요? 그렇게 거리가 멀면 중앙 궁까지 관료들이 오가기 번거로울 텐데요?”

“거리가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외궁과 중앙 궁은 오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지 않습니다.”

마차로 10분에서 15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매일 오전에 개최되는 국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관료들은 중앙 궁으로 향하지요. 거기서 황제의 주도하에 회의가 진행됩니다.”

“15분이라……. 황성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마을 수준이군요.”

“예, 실제 인구 1만의 마을과 황성의 면적이 유사하지요.”

“관리를 하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나갈 텐데, 지탱이 가능한가요? 건물들이 다 새것처럼 번쩍거리는데 말이죠.”

에스메랄다는 제르민에게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처럼 설명을 이어 나갔다.

“북부의 데녹 다음으로 넓은 면적의 영토를 가진 것이 에렘입니다. 하지만 인구수가 보다 많고 영토에서 자력으로 생산할 수 있는 물자가 풍부하기 때문에 국력을 수치로 환산해 비교할 경우, 데녹과는 4배가량의 차이가 나지요.”

“그리 많은 차이가 나나요?”

“동서남북을 차지한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부여된 세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롤베르만과 세튀스에 비하면 2/3 수준이지요. 그럼에도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부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한 번 맞혀 보시겠습니까?”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제르민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백성의 숫자군요!”

맞다. 쿠그스 이후 남부의 인구가 절반이 넘도록 줄었음에도, 여전히.

“예, 대륙에서 에렘보다 인구수가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같은 세율을 적용해도, 세금을 내는 이의 숫자에서 차이가 나기에 세수의 규모가 다르지요. 실제 황제는 중앙 행정관을 각 영지에 파견해 인구수와 세수의 규모를 매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감시가 있으니 세수를 빼돌리지도 못하겠군요. 사라지는 돈이 없으니 그것이 모두 황성에 모여 부가 되는 것이고요.”

미약한 감탄이 섞인 말에 에스메랄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없지는 않습니다. 황제가 눈을 감아 주는 선에서 영주들은 세수를 뒤로 빼돌려 비자금을 만들지요.”

“허어…….”

“제도가 아무리 탄탄해도, 그것을 이행하는 인간이 탄탄하지 못하기에 계속 문제와 허점이 생겨난답니다.”

그렇게 이어지던 설명은 마차가 중앙 궁 앞에 멈추어 섰을 때 끝났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오웬의 도움을 받아 제르민이 마차에서 내렸다.

“성하, 저는 황자 전하의 궁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나온 에스메랄다가 제르민과 오웬에게 말했다.

황제에게 연락을 넣은 직후, 두 사람의 만남에 동석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은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테노리엘과 제르민은 서로의 우호 관계를 숨기지 않았으나, 테노리엘이 교황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미 제르민의 존재를 알고서도 세상에 말하지 않았던 테노리엘이다. 그것을 제르민의 의사를 존중했다, 라는 식으로 포장하려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과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 곁에 오웬이라는 보호자가 있으니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기로 했다. 제르민의 행보에 테노리엘이 간섭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네, 오찬이 끝나면 황자 궁으로 찾아갈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오늘 제르민은 황제에게 다수의 신수들이 황도로 오고 있음을 알리고, 후에 그것에 어떤 문제도 없도록 미리 협상을 해 두어야 한다. 아마도 황도에 괴생명체를 들여놓는 것에 허락을 받으려면 그만한 것을 내어 주어야 할 터. 에스메랄다는 황제가 조건으로 제르민의 에렘 거주를 내밀 것이라 예상했다.

신탁으로 대부분의 신관들의 권력이 증발하듯 사라진 지금, 그들이 잃은 권력은 고스란히 제르민이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역시 신탁 때문이다. 마치, 신께서 대리인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것처럼. 황제는 그 권력이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있기를 바랄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가 지은 죄의 값을 치러야만 다시금 나의 종을 자처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은 나의 대리인이 판단할 것이다.’

제르민이 신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손안에 쥐고 있어서 나쁠 것이 없는 패가 바로 제르민이다.

에스메랄다와 인사를 마친 제르민은 나들이에 신이 난 아이처럼 내달려 중앙 궁으로 들어갔다.

“이야, 천장이 엄청 높구나! 저기도 청소를 하는 겐가? 어찌 올라가지?”

에스메랄다는 멀리서 들려오는 제르민의 감탄사를 뒤로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황자 궁에 도착하니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마중 나와 있었다.

“성하께서 나오실 때 모셔 오렴.”

“예, 백작님.”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마부에게 다시 중앙 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전했다. 사실, 그녀가 제르민과 황제의 만남에 동석하지 않은 이유는 아르페시스의 힘 때문이기도 하다. 함께 있지 않아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으니까. 이미 제르민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마부가 마차를 돌리자 에스메랄다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아르페시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네 궁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움찔거렸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곧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오찬을 준비해 두었다. 들어가지.”

“응…….”

떨어지기 싫다는 듯 그녀를 꽉 안아 주었음에도 말을 짧게 끊는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려는 듯 보이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굳이 그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선 그들이 자리에 앉자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만났군.”

식사를 하는 내내 에스메랄다는 제르민과 황제의 대화를 아르페시스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녀의 예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대화였다. 순조롭다.

* * *

에스메랄다는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의 허벅지를 벤 채 엎드려 있는 신수를 쓰다듬었다. 아르페시스의 공훈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오웬으로부터 신력을 꾸준히 제공받은 신수는 어느새 대형견만 하게 큰 상태였다.

“이거 맛있어요!”

황도의 다과 상점에서 사 온 디저트를 먹은 제르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에스메랄다는 다음에도 같은 디저트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때 귀를 쫑긋 세운 신수가 문 쪽을 돌아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 첸입니다.”

그는 제르민과의 티타임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에스메랄다에게 달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유죄 판결입니다. 기본 골자는 작위 및 재산의 몰수 및 혈족 전원의 사형 정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로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반군과의 밀회 현장에서 체포된 부소네 공작의 재판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남부에 남아 있던 기사와 용병들을 동원해 체포 직후 부소네성을 털었던 황태자는 정말 많은 물증을 손에 넣었다. 그 물증 속에서 자신의 인장을 본떠 만든 것까지 발견했으니 길길이 날뛴 것은 당연한 일.

황태자는 증거물을 바리바리 황도로 싸 들고 와서 황제에게 부소네의 재판을 건의했고, 그 소식을 들은 아르텐이 부소네가 반군에게 건넨 뇌물 기록을 익명으로 황태자에게 넘겼다. 익명 고발에서 존재를 철저히 지우긴 했지만, 그 뇌물 기록을 찾을 수 있게 해 준 것이 에스메랄다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부소네가 반군을 의도적으로 지원하며 반역에 가담했다는 판결이 떨어진 것이다. 체포로부터 고작 보름 정도가 지난 상태다. 아무리 물증이 쏟아졌다지만, 부소네 측의 반론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밀어붙인 재판이었다.

이미 반군이 북부에서 본격적으로 들고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진 상태이기에 본보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반군과 관련되었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황제의 직접적인 압박.

그에 먼저 움직인 루그레디안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남부의 영주들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전투가 지속되면 생포되는 반군의 수뇌부들이 생길 터, 고문을 겪게 될 그들의 입에서 관련 귀족의 이름이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결국 이미 반군과 유착 관계를 형성한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숨어 있다 들켜서 부소네처럼 몰락하느니 무력을 과시해 훗날 협상을 논하는 방법이 나은 것은 자명한 사실. 이제 루그레디안의 포섭으로 반군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태었던 반황실 세력의 귀족들이 영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본인들의 사병을 동원해 반군의 뜻을 지지하며 중남 경계선에 또 다른 전장을 만들어 내겠지.

중북 경계선과 중남 경계선에 중앙군을 묶어 두는 일은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 진행되고 있다. 여전히 순조롭다.

* * *

“혼자 있기 싫어.”

이렇게 말하면 그가 져 준다는 것을 안다. 지금 그녀를 감싸 안는 체온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에스메랄다는 곧장 자신에게 달려온 아르페시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남부 영주들이 움직인 후 남부군이 북상하면 비어 버린 남부를 마수로부터 지키는 게 되지. 황제나 황태자는 남부군의 이동을 막을 수 없을 거야.”

“……알겠다. 칼라일에게 소식을 전해 두지.”

“남부군이 움직이면 황태자가 널 걸고넘어질 가능성도 있어. 인외자의 힘을 가지고 황실을 지키라는 식으로 말이야. 넌 북부가 아니라 남부의 일에 시선을 둬야 해.”

에스메랄다가 말하면 아르페시스는 알겠다는 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 오가야 할 대화는 피한다.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역시 여전히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페시스가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녀에게 져 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니면 말이다. 그의 역린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은 한 손으로 꼽고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적다. 딱 하나뿐이니까. 혼인에 관한 것, 아르페시스는 그 외의 모든 것을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르고 있었다.

그녀와 가진 정사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긴 했지만, 참으려는 노력은 했었다. 만약 먼저 양보하지 않았더라도 아르페시스는 화를 낼지언정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말을 하는 순간 그가 절대 제위에 앉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고뇌하고야 만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메랄다에게 다행인 것은,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그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대어 오는 온기는 절절하고, 겁을 먹어 떨리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는 애달팠다.

“있잖아…….”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아르페시스가 시선을 흘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시간이 늦었다.”

그러니 이만 잠을 청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돌리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곧장 시선을 주었으나, 붙잡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 앞에서 잠시 말을 아꼈다. 그녀는 그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알고 있다. 그가 듣는 것을 거부하며 침묵을 종용하고 있다 해도, 그녀가 과거의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분명 모든 것을 서로에게 말하기로 약속했는데, 한 계절도 지나기 전에 그것을 어기는 날이 왔다. 그가 절망을 고하던 날의 아픔을 보았음에도 미래를 위한다는 이기로 또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하다니.

에스메랄다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아르페시스의 위에 올라타자 단단한 육체가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에디…….”

억눌린 목소리를 지나친 에스메랄다가 그의 입술을 빼앗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틈을 벌려 그녀를 쫓아오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뒤섞였다. 아르페시스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위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의 침의를 움켜쥐었지만, 꽤나 매서운 손길이 그를 방해했다.

에스메랄다에 의해 손이 밀려난 아르페시스가 머뭇거리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그와 맞대었던 입술을 물리며 직접 옷자락을 잡았다. 흡, 하고 갈급히 들이마신 숨소리는 아르페시스가 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제게 매달리는 아르페시스를 제지했다. 그녀를 만지려 할 때마다 번번이 막힌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에디, 제발…….”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뜻에 따라 온전히 몸을 맡겨야만 했다.

어느덧 나신이 된 에스메랄다는 직접 손을 놀려 아르페시스의 상의를 밀어 올렸다. 그녀의 것과 달리 탄탄한 복근을 매만질 때마다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옷을 마저 벗겨 내자 조각같이 빚어진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두드러진 아르페시스의 유두를 문질거리는 움직임은 어설펐다. 하지만 그게 더 아르페시스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제발, 나도… 나도 그대를 만지고 싶어.”

아직 포기하지 못한 아르페시스가 애원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녀는 앙증맞은 유두를 입에 물고 아르페시스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이미 단단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던 기둥을 붙잡자 아르페시스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예민한 귀두를 만지작거리며 음부를 맞대자 아르페시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으응…….”

에스메랄다가 그의 성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경악과 혼란, 그리고 환희에 뒤섞인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에스메랄다의 입이 벌어지며 달뜬 숨과 교성이 뒤섞였다. 단단한 아르페시스를 받아들인 직후 그녀는 망설임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아……!”

찌걱찌걱, 에스메랄다의 느릿한 움직임에 따라 적나라한 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으흥, 응!”

“에디……!”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헐떡이는 아르페시스는 관능적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만 움직인 덕분에 평소와 다른 나른한 쾌감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그리고 일정한 박자에 맞춰 에스메랄다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조금만 더.”

한동안 이를 꽉 깨문 채 그녀를 보기만 하던 아르페시스가 성급하게 손을 뻗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둔부를 붙잡는 손을 쳐냈다.

“아, 제발……! 더 세게, 더!”

감질나는 움직임에 안달이 났던 아르페시스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에 에스메랄다가 불현듯 다리를 세우고 몸을 웅크렸다.

직전보다 더 빠르고 거세게 허리를 흔들자 아르페시스의 신음이 짙어졌다. 에스메랄다가 움직일 때마다 팡팡, 하고 살덩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제 속에서 움찔거리는 아르페시스를 오물오물, 맛있게 씹어 대던 에스메랄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달뜬 숨, 달아오른 얼굴, 흐릿하게 초점이 풀어진 눈까지. 매번 그녀를 몰아치던 아르페시스가 속수무책으로 휘말리는 모습은 색다른 쾌감을 알려 주었다.

그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에스메랄다가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제 손으로 가슴과 음부의 돌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그 광경을 보고 한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윽……!”

에스메랄다의 배 속에 뜨거운 정액이 차올랐다. 평소보다 격한 움직임으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려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붕 떠올랐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켠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안은 채 위치를 바꾼 것이다. 이제껏 참아 왔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퍽퍽퍽 허리를 쳐올리는 아르페시스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려야 할 가슴은 이미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였다. 평소보다 강한 악력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아르페시스는 쪽, 쭙,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아 올렸다.

“으앙! 앙!”

그의 머리를 껴안은 에스메랄다가 교성을 내지르며 가슴을 더 내밀었다. 본격적으로 추삽질을 시작한 아르페시스가 뚝, 뚝, 굵은 땀방울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를 더 힘주어 안은 에스메랄다가 속삭였다.

“사랑해……!”

흐트러진 호흡과 교성에 뒤엉킨 그 짧은 말에, 아르페시스가 몸을 떨며 다시 파정했다.

에스메랄다는 축 늘어진 아르페시스를 껴안으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사랑한다고. 그를 원한다고.

그날 밤, 반황실 세력의 중앙 귀족들이 남부로 파발꾼을 보냈다. 용병, 상인, 보부상까지. 본채를 가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뒷골목 건달들과 로부오, 그리고 아르페시스까지 가지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필시 사병의 출정을 명하는 내용이겠지. 그들이 황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황제는 남부와 북부에서 무력 단체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 * *

아르페시스는 현재 황제와 대신들이 국정을 논하는 회의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현 남부군의 움직임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이미 남부에 적을 두고 있는 영주들이 도망치듯 빠져나간 후라 회의장엔 빈자리가 많았다.

겨울 동안 황도를 빠져나간 남부의 영주들이 사병을 이끌고 북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아르페시스는 남부군 중 2만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를 전선 지역 너머로 올려보냈다.

급진파를 비롯, 앙뷔 가문처럼 전선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내전에 동의했던 이들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그의 행동에 깔려 있는 명분은 간단했고, 틈을 파고들 만한 허점이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알, 대체 남부군이 왜 북상한 게냐?”

그런데도 굳이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어떻게든 흠을 내고 싶다는 의미겠지.

“불온 분자에게 빌붙어 먹은 영주들이 중남 경계선까지 올라오는 와중에, 왜 부황 폐하의 뜻에 따라야 할 남부군이 전선이 아니라 남부에서 움직이느냔 말이다! 네가 그들의 책임자가 아니더냐!”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조금 언성을 높이는 황태자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잠시 침묵했다.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는 이미 에스메랄다의 뜻을 거슬러 독단으로 사고를 친 전적이 있었다. 더는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어도,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아프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것을 설명해 주어야 아냐는 듯이, 길고 긴 한숨이었다.

“영주들이 최소한의 치안 유지도 불가능하도록 사병을 끌어모았기 때문입니다.”

“치안? 네가 지금 폐하의 군으로 반군에게 붙은 영주들의 땅을 지켜 주겠다는 게냐?”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사병의 빈자리를 틈타 외성을 넘은 마수들이 백성들을 잡아먹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백성, 백성, 그럴듯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너에게 실망이 크구나. 네가 지금 반역도들의 뒤를 받쳐 주고 있…….”

“남부에 있는 영지민들 역시 부황 폐하의 백성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 아르페시스를 다듬어 오늘을 완성시켰다. 책을 읽듯 딱딱하던 목소리는 나른해졌고, 황태자에게 대꾸하는 모든 말에 성가심이 녹아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군, 스스로의 변화를 보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속으로 짧게 평을 내렸다.

황제를 언급하자마자 입매를 움찔거리며 말을 아끼는 것이, 황태자에 대해 에스메랄다가 해 주었던 말이 정말인가 보다.

‘당장 황제는 널 건드릴 명분이 없어. 이제 와 무작정 죽이기엔 네 명성과 명예가 너무 드높아졌거든.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네 반격을 경계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 시간을 벌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 본인의 제위를 지키면서 너를 제거하기 위한 시간. 그걸 위해 솔루베르 공작에서 섭정을 내걸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야.’

에스메랄다는 황제가 죽음의 그 순간까지 손아귀에 권력을 쥐고 있을 위인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더 그 권력을 쥘 수 있다면 자식을 버리는 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려 몰락시키는 것도, 반군과 엮어 처형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약점으로 협박을 가하는 것까지, 모든 건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뒤에서는 솔루베르와 밀약을 맺으며 힘을 합하고 앞에서는 시간을 벌기 위해 움직일 터.

반군의 일은 물론, 최근 그에게 도박금을 걸며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지방 귀족들을 달래서 시간을 벌려면 아르페시스의 황태자 책봉이 최선책이다.

일이 그렇게 되면 반군과의 충돌도 완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가 황태자가 되면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다음 제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남부군을 향한 정당한 지원에 힘써 줄 수 있겠지. 그러니 최선책이 아닐 리 없다.

하지만 그를 황태자로 올리려면 기존 것이 없어져야 하는 법. 에스메랄다는 황제가 황태자를 버릴 생각인 것 같다고 여겼고, 아르페시스가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를 자극해 주기를 바랐다. 부황, 백성, 지킨다, 지금까지 그가 사용한 모든 단어가 황태자를 위해 입에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전투에서 목숨을 노리고 들어가는 비수다.

“제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지킨단 말입니까.”

아르페시스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찢어 죽이고 싶은 표정의 황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 말하면서도 정작 너는 황도에 있지 않느냐. 이러니 네 말이 진심임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지금 네 행동은 꼭 북부와 남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반동 세력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다시 그의 행동을 물고 늘어지려는 황태자 앞에서 아르페시스가 꺼낸 말은 무척 간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전선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입니다.”

이 상황에서 황도를 떠나겠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은 황태자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선대 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에만 참석하고 곧장 복귀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황제를 돌아보았다.

“부황 폐하의 부름을 뒤로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한창 바쁜 겨울에 너무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고, 허락을 구하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황제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태자가 아르페시스에게 시비를 거는 동안 조용히 관망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아르페시스조차 ‘정말 아닌가?’라는 의문을 느낄 정도로. 눈앞의 저것이 거짓이라는 걸 몰랐다면 당장에 속아 버릴 정도로 선명한 감정.

“섭섭한 소리를 하는구나, 알. 당장 네가 없다 하여 남부군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터. 몇 년이 넘도록 남부의 일에 매달리느라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온 김에 조금 더 머물다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것도 에스메랄다의 말대로다. 그가 먼저 복귀 의사를 보이면 황제는 허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본인의 시야가 완벽히 닿지 못하는 남부에서 아르페시스가 남부군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놔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황제나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을 동원해 남부의 영주들과 북상하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대로 황제는 본인이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아르페시스를 잡아 두려고 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바로 대답하지 마라, 고민하는 척해라, 긍정도, 부정도 없이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최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는 황태자는 초조해진다.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가겠다고 답하면 남부군이 어찌 움직일지 몰라 골치가 아플 테고, 가지 않겠다고 답하면 계속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꼴을 두고 보아야 한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라 입을 다물었으나, 황제는 그 침묵이 달갑지 않았던 것인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미 겨울도 다 끝나 버렸지 않느냐. 이미 비운 자리, 몇 계절 더 비운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라의 지배자가 군의 최고 통솔권자에게 부재를 종용하다니. 아르페시스는 지금의 상황이 우스운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복잡한 와중에도 그가 할 답은 정해져 있기에 억지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예, 부황 폐하.”

황제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거두자 황태자의 턱이 살짝 불거졌다. 방금 황태자가 한 말을 부정하면서까지 아르페시스를 붙들고자 한다는 건 에스메랄다가 생각한 것이 진실이라는 의미겠지. 황제는 정말로 황태자를 버리는 수까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날 회의가 파한 이후 표면적으로나마 아르페시스와 사이좋은 형제를 연기하던 황태자가 가면을 벗어던졌다. 매일 아르페시스를 만찬장으로 부르는 황제와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이죽거리기 바빴고, 해가 바뀜과 동시에 시작된 봄을 맞이해 귀족들이 앞다투어 개최한 사교 행사에서는 아르페시스를 적대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두고 뒷골목을 통해 백성들에게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인외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시기하는 못난 형의 모습이 황도를 떠돈 것이다. 그 모든 일을 에스메랄다가 계획했음은 당연했다. 여전히, 모든 것이 순조롭다.

* * *

아르페시스가 국정 회의에 참석한 날로부터 이틀 후인 카 100일, 데녹에서 출발한 신수 중 일부가 에렘의 황도에 도착했다. 인간의 발로 1개의 달은 꼬박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 데녹이건만, 티타를 비롯한 신수들은 30여 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황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짐승 때문에 잠시의 소란이 있었으나, 제르민이 미리 황제와 얘기를 해 둔 덕에 황도의 치안대가 백성들을 통제했다. 황제는 이미 제르민이 에렘에 거주하는 것을 두고 그와의 거래를 마쳤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지금 교황이 에렘에 머무른다고 하여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외성을 지나 곧장 테노리엘 백작 저로 온 신수들로 인해 백작 저도 잠시 어수선했다. 티타라 이름 붙여진 늑대 형태의 신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정말 건물 한 채가 움직이는 것처럼 거대했다. 다른 신수들은 소형 마수와 비슷한 크기였으나, 티타는 중형 마수보다 조금 더 컸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도착할 때를 대비해 황도에 머무는 병력이 사용하는 연무장을 비워 두었다. 그럼에도 공간이 부족해서 티타보다 작은 신수들에게는 정원과 홀의 한쪽을 내주어야 했고.

중형 마수와 크기를 비교해야 할 신수는 4기, 그중 티타라는 이름의 신수가 가장 큰 체격을 자랑했다. 그다음으로 소형 마수와 유사한 크기의 신수가 40기였다. 나머지 신수는 모두 아비체룬 쪽으로 움직였다.

‘녀석들이 교황이 없다는 말을 가지고 와도 믿고 싶은 상황이오. 이왕 이쪽으로 온 것, 이놈들을 남부 전선에서 써도 되겠소?’

새해가 밝은 날 헤도크가 전보를 보내왔으니 약속된 장소에서 신수들을 만났다는 의미다. 아르페시스를 치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을 무렵 황도에 도착한 헤도크의 사람들이 제르민을 만나고 돌아간 상태다.

마도구도, 전서구도 믿지 않겠다고 하여 제르민의 존재를 확인한 그의 사람들이 직접 소식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 상관없이 교황의 존재를 믿고 싶어질 만한 광경이라고 칭했으니, 헤도크와의 동맹은 순조로울 듯하다.

그렇게 신수들의 도착으로부터 하루가 지난 오늘, 백작 저에 가득한 신수들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의 방문 요청이 들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방문을 요청하기도 전에 그 이유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제르민은 신수들이 도착한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곧장 그들을 데리고 움직였다. 황제와의 거래 때문에 에렘에 머물러야 하기에 직접 자신의 거처를 고르기 위해 나선 것이다.

증거가 남지 않는 구두 거래에 불과했지만 황제가 살아 있을 때 그걸 어겨서 좋은 점은 없다. 죽었을 때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지금은 거래를 이행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간 객으로 머무는 상황에서 백작 저를 번잡스럽게 할 수 없다는 말로 방문 요청을 전부 거절해 왔던 제르민의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제르민은 어차피 신전 내부를 싹 정리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니 시기를 잘 탔다. 황제가 죽은 후 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예정이니, 제르민에 관한 문제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저는 신수의 존재가 에스메랄다 양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에스메랄다 양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제르민은 에스메랄다를 좋아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호감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것이고, 공적인 영역 속에서 제르민과 에스메랄다는 명백한 거래 관계에 있다.

에스메랄다는 그와 신수를 통해 아르페시스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악마의 하수인을 벌할 교황과의 친분은 그의 존재가 곧 정의라는 인식에 손을 보태고 있다.

‘인간은 낯설고 다른 것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요. 그것은 신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륙의 역사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신력을 가진 이들을 이질적이라 지칭하며 사냥했던 과거는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제르민이 신수에 대해 가장 걱정했던 점은 혹여나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인간들로부터 공격받거나 사냥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그 문제는 아주 원활하게 해결된 상태였다. 제르민은 에스메랄다를 통해 신수의 존재를 조금 더 온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공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과거의 티타가 제르민을 납치했던 용병단을 몰살시켰다는 얘기와 함께 신수의 존재가 드러났다면, 대다수가 신수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공포와 경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도움으로 신수의 존재는 다른 감정을 동반한 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졌다.

마수에게 대항하기 위해 주신께서 내리신 힘으로 만든 생명체임을 명확하게 밝힌 덕에, 대다수가 보호받는다는 안정감과 함께 신수의 존재를 처음 접했다.

본래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제르민에게 신수를 선보일 기회를 주었을 때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위압감을 느끼기 힘든 작은 체구의 신수를 대동하는 것은 물론, 신수에 대해 궁금해하는 귀족들에게 그 힘이 주신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확하게 전달할 것, 정도.

그가 함께 움직이던 신수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대뜸 신수를 선물로 받아 버린 덕에 일이 아주 잘 풀렸다. 한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귀여운 신수 때문에 그날 처음으로 신수를 목격한 귀족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이 심어진 것이다.

그 후 에스메랄다가 뒷골목을 통해 손을 보태 소문을 가다듬자, 신수는 신성하고 듬직한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얘기가 가장 먼저 퍼지기 시작한 황도에서는 신수를 보고 겁에 질려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드물었다. 첫인상이란 이토록 중요하다.

물론, 그때의 일로 일부의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신수를 두고 탐나는 애완동물이라 칭하는 것은 좋은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티타를 비롯한 다수의 신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지금, 더 이상은 그런 얘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리라.

이미 소형 마수 40여 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피해를 알고 있는 자들이다. 황도에서 난동을 피웠던 마수들보다 큰 신수가 어떤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터. 성급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경외를, 귀족들에게는 경계를, 에렘에서 신수의 존재를 인지시키는 일은 좋은 흐름을 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르민을 호위하기 위해 붙여 두었던 로부오가 가져온 소식은 꽤나 흡족했다.

‘여기가 웅장하고 좋구나!’

제르민은 백작 저를 나선 후 황도에 있는 신전 중 한 곳을 찾아갔다. 대신관 오키만이 운영하는 신전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을 듣고 백작 저를 찾아왔던 이들 중 다수는 신관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주지도 않던 제르민이 신전에 나타났으니, 신전 내부에 꼭꼭 숨어 있던 오키만이 달려 나왔다고 한다. 제르민은 그렇게 우르르 몰려나와 제게 인사를 올리는 신관들에게 짧게 일갈했다.

‘다들 신력을 꺼내 보아라. 이곳은 종들을 위한 거처이니 없다면 나가야지.’

그 직후 신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신관들을 신수들이 물어다가 신전 밖으로 내던졌다. 신전의 입구에 서서 죄인들을 향한 선고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가히, 신의 대리인이라 칭할 만큼 위대하고 굳건했다.

당시 제르민이 신수를 타고 움직인 저를 쫓아 신전까지 따라왔던 백성들에게 한 말은 단호했다.

‘악마에게 넘어가 어버이의 자식들을 수탈한 죄인이니, 저놈들의 죽음은 어버이를 위하는 공훈이다. 죽여라.’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그 말로 인해, 오키만을 비롯한 일부 신관들은 신전 앞에 내던져진 채 맞아 죽었다. 그들이 수탈하고 이용해 왔던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그녀에게 마녀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어찌나 짜릿하던지.

신관은 주신의 종이지 나라의 백성이 아니다. 신관들은 그 어떤 나라에도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각국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고작해 봐야 고위 사제들과 오간 거래나 우호의 증표로 신관들에게 유리한 법을 몇 가지 만들어 두는 정도지.

신관들의 피해에 대해 성토하고 가해자의 처벌을 위해 나라의 지배자들에게 청원하는 건 같은 신관들이다. 같은 나라에 머무는 신관들을 관리하는 대신관, 혹은 그들의 지근에서 보필하는 상급 신관들이 아래의 신관들을 보호한다. 윗선의 신관들이 나라에 범인의 처벌을 요구하면 그때, 가해자에게 재판이나 형벌이 부여되는 주먹구구식인 것이다.

대신관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신관들은 보호해 주고, 위협하는 신관들은 죽일 수 있었던 이유다. 신관들이 모셔야 할 제르민이 그 보호자가 된 상황에서 오키만을 비롯한 일부 신관들을 악마의 하수인이라 칭하며 사형을 선고했으니 누구도 그의 죽음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렇게 제르민은 오키만이 꾸려 놓은 신전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고, 여전히 신력을 가진 신관들만 그곳에 남도록 허락했다. 본래 황도에서 가장 크던 그 신전에 머물던 신관의 수가 80명을 웃돌았는데, 남은 이들은 고작 11명에 불과했다.

제르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황도에 남아 있는 다른 신전을 돌아다니며 신력이 없는 신관들을 모두 내쫓았다. 함께 움직이던 신수들이 그의 명령을 이행했다. 그리고 여전히 신력을 가지고 있던 신관들에게 환자들을 받고, 신도들이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다시 신전을 개방하라 일렀다. 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진 주신의 문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황도의 모든 신전을 자신의 관리하에 묶어 둔 제르민은 사흘 후 곧장 다음을 위해 움직였다.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신전에 파발꾼을 보낸 것이다. 그 파발을 위해 동원된 것은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다.

「종의 거처에 악마의 하수인이 기생해서는 아니 될 터, 교황 제르민의 이름으로 명하니 종의 이름을 사칭한 죄인을 내쫓아라.

봄이 끝나기 전 어버이의 것과 다름없는 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니, 어버이의 사자를 보내 확인하겠노라.」

대신관들이 때때로 넘보며 남발했던 주신의 인장, 본래라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대륙 전역에 남은 신관들에게 경고했다. 그것을 위해 황도로 왔던 신수들 중 대다수가 파발꾼과 함께 다시금 길을 나섰다.

제르민이 본격적으로 신력을 잃은 신관들을 쳐내기 위해 움직인 그 날, 에스메랄다 역시 움직일 준비를 시작해야만 했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독을 찾으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과거 남부군의 유가족들을 사냥하던 기사,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회유에 모든 죄를 고했던 근위 기사, 라 울 베라한 슈페르트.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시간에서도 그에게 접근했고 벌써 몇 년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드시 황태자를 처벌하겠다고, 그러니 곁에서 증거를 모아 달라는 그녀의 속살거림에 속은 슈페르트는 에스메랄다의 세작이었다. 과거에는 속이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앞으로는 정말 그리할 예정이니 그와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그를 통해 독을 찾기 시작한 황태자의 행동이 곧장 에스메랄다에게 전해졌다. 제르민이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황태자의 곁에 있던 세작이 전해 준 소식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내전을 위한 병력을 나누면서까지 감수한 번거로움은 모두 이날을 위해서였으니 달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함께 소식을 전해 들은 아르페시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볼 만큼, 서늘하고 날카롭기만 했다.

황성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차갑게 굳었다.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롭다.

* * *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와 함께 황도의 시가지로 외출을 한 참이었다. 다과 상점의 창밖으로 시선을 준 그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가 질릴 정도군.”

북부에선 매일 서로에게 칼을 겨눈 이들이 죽어 가고 있다. 그런데 황도는 그 죽음이 닿지 않는 것처럼 평온하기만 하다. 그런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찻잔을 들며 속삭였다.

“나의 죽음이 아니니까, 내가 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 해낸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당장 스스로가 위험하지 않기에, 또한 황제의 중앙군이 반군을 막을 것이라고 믿기에 가능한 평화였다.

내가, 우리가 넘지 못한 황제를 반군 따위가 넘을 수 없다는 오만함과, 당장 나는 죽지 않는다는 안일함이 중앙 귀족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렇기에 겁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봄과 함께 시작된 중앙 사교계가 예년보다 더 바쁜 이유다.

“오만함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건가…….”

“그런 셈이지.”

에스메랄다의 말을 알아들은 아르페시스가 작은 조소를 보이며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바 28일, 겨울의 찬 바람이 녹기 시작하며 봄의 시작을 알린 지금 황도의 관심 중 절반은 인외자가 된 아르페시스에게 쏟아지고 있다.

인외자의 이름이 사생아의 이름을 덮은 순간부터 아르페시스는 수없이 많은 귀족들의 시선에 노출되었고, 그를 주시하는 시선은 나날이 많아지는 중이다. 당연히 그가 애지중지 곁에 끼고 도는 에스메랄다 역시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봄을 맞이함과 동시에 사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 귀족들이 황도에 방문하는 시기. 하루에서 몇 개씩 개최되는 소규모 티 파티부터 각종 공연, 경마, 나들이, 그리고 연회까지.

생일 연회나 친분이 깊은 이들끼리 가지는 티 파티가 전부이던 겨울과 달리, 지금은 활발한 사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페시스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에스메랄다와 함께했다.

그는 거의 매일 오찬을 함께하기 위해 백작 저로 방문하고,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황자 궁에 들 때는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고 단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공연을 보거나 경마장을 방문해 관람하기 위해 외출을 하는 일도 있었다.

열흘 전에는 중립 귀족이 개최한 티 파티에 참석했고, 에스메랄다를 파트너로 대동했다. 그리고 오늘처럼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 나타나 에스메랄다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었다.

그런 시간이 쌓일수록 두 사람이 이야기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서부 대란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들의 사랑 이야기 말이다. 대부분이 에스메랄다에게서 보석 반지를 하나씩 선물 받은 시녀들의 입에서 흘러 나간 말이다.

‘그 무렵, 새벽녘에 마주친 전하와 정원을 거닐었는데… 그때 네가 함께 있었던 것 같구나.’

‘전하께서 식사 시간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보셔서 많이 긴장하셨구나, 하고 홀로 웃었지. 그때 식사 시중을 네가 들었던가?’

‘처음으로 라퓨나를 받았을 때, 네가 그 선물을 전해 주었던 것 같은데… 이후 화병에 꽂는 것도 네가 했지?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도 몰래 훔쳐보았고 말이야.’

그렇게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말이 원하는 형태로, 원하는 시간 때에 밖으로 흘러 나갔다. 그 속에는 아르페시스가 매해 그녀의 생일마다 전해 주는 라퓨나의 얘기도 들어 있었다.

‘좋기는 한데… 지난해의 선물까지 받고 나니 밤에 눈이 부시더군요. 조만간 응접실로 옮겨 둘까, 생각 중이에요.’

시녀의 말은 물론, 티 파티에 참석했던 당시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인 에스메랄다가 흘린 말도 있었다. 그 얘기는 낭만적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미혼의 영애들 틈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마나만 있다면 시들지 않는 꽃이라니,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침실은 물론 저택을 가득 채우게 되지 않겠나? 여인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연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라퓨나가 영원한 사람의 징표처럼 여겨지며 유행을 타기 시작할 정도였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이득을 주는 방향으로 흘러감에도 에스메랄다는 타인의 시선이 없어진 곳에선 표정을 굳히곤 했다. 분명 모든 것은 에스메랄다의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다.

“저쪽도, 이쪽도…….”

찻잔을 입가로 가져오며 에스메랄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반군은 착실히 중앙군을 막아내고 있고, 케니스의 1군은 최북단 병력을 와해시키고 중북 경계선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서부의 북쪽 지대에서 집결한 후 움직이기 시작한 반군이 케니스 측의 2군과 합류한 어제, 중앙군과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서북부에서 북부로 올라간 병력이 합류한 덕분에 루그레디안을 위시한 반군은 2만 8천, 중앙군과 황제파의 사병은 3만 3천이다.

그들의 충돌은 승자 없는 소모전으로 끝났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군이 부딪치면 한 번의 충돌에서 승패가 가려지지 않기에 몇 번은 더 서로를 물어뜯어야 할 것이다.

반군은 포로를 사로잡는 대신 모두 처형하기에 피해는 중앙군 측이 더 컸다. 또한 포로로 잡힌 반군의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중앙군에 잠입해 있던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 움직일 예정이다. 성공 여부는 날이 저물면 보고받을 수 있겠지.

케니스가 1군을 이끌고 합류하기 전에 중앙군도 다른 경계선 측에 있던 병력을 지원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케니스의 합류로 병력 차가 벌어지는 순간 확연하게 밀릴 테니까.

이미 중남 경계선 쪽의 중앙군이 반황실 세력의 사병들과 치고받는 와중에 서쪽, 동쪽의 병력까지 줄어버리면 이후 진행될 아르페시스의 내전은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분명, 순조롭다. 그런데도 에스메랄다의 심장 속에 피어난 불안감이 조금씩 크기를 키워 가는 이유는…….

‘황제는 이미 알고 있다.’

여전히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참 역설적이게도 지금 에스메랄다는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웠기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황제는 대체 무엇을 어디에 숨겨 두었기에 그녀의 계획이 이렇게 순조롭단 말인가. 분명 그녀의 불안감은 실존하건만, 그게 단순한 기우라고 말하는 것처럼 계획은 어떠한 변수도 만나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다.

에스메랄다가 차를 한 모금 머금자 아르페시스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의 옆자리에 엎드린 채 하품을 하고 있는 신수에게 닿아 있었다.

제르민이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긴 했으나, 에스메랄다는 주신이 직접 내린 힘으로 태어난 신수에게 차마 이름을 지어 주지 못한 채 며칠 동안 끙끙거렸다.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한 제르민이 에스메랄다를 대신해 나선 것이 닷새 전이다.

매번 저기, 하는 불편한 단어로 신수를 부르는 에스메랄다가 안쓰러웠던지, 그는 본인이 직접 신수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루기스.’

이제는 사장된 말이었다. 오래전 멸망한 나라의 말, 학자들 틈에서 연구가 진행될 때나 쓰이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건 ‘보호자’였다. 그렇게 루기스라 불리게 된 신수는 매일, 매 순간, 에스메랄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지 관계없이 언제나. 그 때문에 아르페시스는 때때로 루기스를 억지로 안아다 침실 밖으로 쫓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정말 평범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 관음은 물론 노출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흥분은커녕 수치심만 느끼게 만들겠지. 그런 그에게 에스메랄다의 발치에 엎드린 채 잘 움직이지 않은 루기스를 옆에 두고 정사를 가지는 건…….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루기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후로는 직접 나서서 침실 밖에 내다 놓게 되었다. 루기스는 직접 문을 여닫을 줄 알기에 문고리를 꽉꽉 걸어 잠그는 것 역시 필수였다.

그렇게 밖으로 쫓아내면 낑낑거리며 발톱을 세우고 문을 긁어 대는 통에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침실 문은 엉망이 되었을 정도다. 거사를 치르고 문을 열어 주면 루기스는 다시 쪼르르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돌아온다.

지난밤에도 같은 일을 반복한 아르페시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민이 선물이랍시고 준 신수를 괜히 받았나 싶었다.

“에스메랄다 양!”

그때 다과 상점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제르민이 에스메랄다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이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제르민을 향해 움직였다. 또 번거로운 인사가 오가겠다고, 아르페시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삼켰다.

“성하.”

약속된 만남은 아니었으나 에스메랄다는 곧장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제르민이 에스메랄다의 무릎을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성하?”

“매일 호의호식하는 중이에요!”

에스메랄다가 미소를 그리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토로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성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황자. 지나가는데 에스메랄다 양이 보여서 들어왔다네!”

언제나 그렇듯, 제르민은 아르페시스에게 대충 인사를 던진 후 에스메랄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최근 제르민은 신전 밖으로 다니며 평민들에게 신력 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목적이 빤한 행동이었지만 돌아온 반응 역시 빤했다.

“전하와 백작님을 뵙습니다.”

“오웬 신관, 어서 오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조잘거리는 제르민을 익숙하게 방치한 후 오웬에게 말했다.

“미리 앉지, 어차피 성하께서도 머무실 듯하니.”

“감사합니다.”

오웬이 한발 빨리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 동안 창밖을 내다보니, 시선을 거둔 사이 나타난 마차가 상점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신전을 정리한 이후 제르민은 신수들을 타고 다니던 기행 대신 평범하게 움직였다. 오키만이 만들어서 타고 다니던 새하얀 마차가 그의 이동 수단이었다.

신전이 정리된 후, 아르페시스는 백작 저를 방문했던 제르민에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오키만의 물건들이 꺼림칙하지 않으냐고. 직접 죽인 것은 아니나, 오키만이 죽은 건 제르민이 한 말 때문이었으니까.

당시 제르민이 해 주었던 대답은 아르페시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버이를 위한 헌금으로 만든 것은 결국 종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것이니 내가 쓰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느니라.’

신관들의 지도자, 주신의 대리인, 교황이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라고만 여겼던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입으로 종을 자청하는 신관들의 존재는 주신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그들이 가진 것 역시 주신의 것이다. 그 말은, 모든 것이 주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된 제르민의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교황은 고작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 제르민이 어긋난 생각을 품으면 벌어질 비극은 고작 나라 하나에 국한되지 않으리라. 아르페시스는 눈앞에 있는 작은 아이가 그것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한 순간, 분명 그러할 것이라는 답에 도달했다.

‘저는 그릇된 종들에게 훈계하고, 저의 창조주께서 적이라 명명한 마룡의 몰락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과거 제르민이 했던 말이 그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아르페시스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제르민은 에스메랄다에게 함께 머물다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청을 거절한 경우는 이제껏 없었으니 당연히 합석이 결정되었다.

그가 나타날 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던 아르페시스는 옆에 앉아 있던 오웬을 돌아보았다. 제르민이 에스메랄다와 대화를 하면 남는 건 오웬과 아르페시스다. 그들은 이미 두 사람을 따로 떼어 놓고 간단한 말을 나눌 정도의 친분이 생겨 버렸다.

“즐겨 드는 차라도 있나?”

차에 대해 특별한 호불호가 없다는 답에 아르페시스는 종업원에게 자신의 것과 같은 차를 내오라 지시했다. 그사이 제르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어디를 가나 지켜보았더니, 빙결 마법 진이 새겨진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디저트를 보러 간 것이다.

앉은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아르페시스는 곧장 제르민을 따라가는 오웬을 보며 잠시 동정했으나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최근 빈민가 순회를 하시며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야.”

제르민이 정한 우선순위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스스로의 사명이라 칭하며 뜻을 내보일 만큼이나. 그래서일까? 훗날 챙기지 못할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제르민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르페시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성하께서는…….”

잠시 말꼬리가 흐려졌지만 그녀를 향해 다가간 손에 보드라운 뺨이 닿았을 때는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대만큼이나 강한 분이다.”

버겁고 버거워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버티는 사람. 땅을 뒤엎고 세상을 뒤흔들 강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굳건함을 갖춘 사람.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경외심을 심어 동화되게 만드는 그런 사람.

“크게 걱정을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괜한 걱정으로 마음 쓰는 것보다, 훗날 힘들어하실 때 도와드리면 되는 것 아니겠나.”

조금은 무뚝뚝한 위로에 에스메랄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손에 뺨을 기대어 오는 그녀의 미소와 똑같은 색채를 그리며 웃어 보였다.

“에스메랄다 양!”

두 사람만의 온화하고 부드럽던 시간은 곧장 빼앗겼다. 아르페시스는 단번에 제게서 녹안을 빼앗아 가는 제르민의 목소리에 한숨을 꾹 참아야만 했다.

“동그란 케이크가 있어요, 공처럼 동그란 것이요!”

그는 고작 여섯 살이다. 접해 본 디저트보다 접해 보지 않은 디저트가 많을 테지. 그걸 알고 있음에도 색다른 디저트를 봤다고 들떠서 에스메랄다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제르민에게 밀려났으니, 도무지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제르민은 직접 디저트를 고른 후 돌아와서는 에스메랄다의 무릎 위를 차지하고 앉았던 것이다. 잠시 울컥하긴 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익숙하게 인내를 시작했다. 여기서 뭐라고 하는 순간 투기는 좋지 못한 것이니 뭐니, 번지르르한 잔소리가 쏟아지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이럴 때는 제르민과 함께 돌아온 오웬과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낫다. 그 간단한 사실을 학습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대신관들을 다 내쫓으셨나?”

제르민이 활동을 시작한 후 30여 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의 존재가 알려지자 찾아오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제르민이 인사를 받는 건 신력을 보여 준 일부 신관들에 한해서다.

“예,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신력이 없는 이들은 신전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쫓겨나고 있었다. 무력이랄 것이 없는 제르민이 대신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신수들 덕분이다.

제르민을 만나겠다는 일념하에 억지로 신전에 들어오려 했던 신관들이 신수들로 인해 죽어 나간 일도 꽤 있다고 들었다. 똑같이 사람을 물어뜯음에도 마수들은 끔찍한 존재이고, 신수들은 성스러운 존재라니. 아르페시스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여관이 북적거린다고 하더군요.”

“타국에서 온 이들은 머물 곳이 필요할 테니 당연하겠지.”

오웬과 한 마디, 두 마디, 가볍게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더니 에스메랄다가 제르민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정한 손길에 웃은 제르민이 그녀에게 쿠키를 내미는 것도, 에스메랄다가 그 쿠키를 받아먹는 것도.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언젠가 해 보았던 생각이 그를 찾아와 잔상을 남기고 떠났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입술에 남은 부스러기를 보며 다시 손을 뻗었다. 계속 제르민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다시금 그를 향해 돌아올 때, 저도 모르게 미소가 넘쳤다.

“부스러기가 묻어서.”

굳은살이 가득한 아르페시스의 손가락이 에스메랄다의 여린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희미하게 그녀의 뺨에 떠오른 홍조가 아름다워서 아르페시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집요하게 손을 놀렸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마치 그날 같았다.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던 과거에, 서부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하던 그날. 그의 손에 뺨을 기대어 오고 지금처럼 파렴치한 손길마저 허락해 주었던 과거의 그 어느 날. 아르페시스는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그 당시의 감정에 계속 젖어 있고 싶었으나 제르민이 방해를 했다.

“애가 보는 앞에서 못 하는 것이 없소, 황자.”

이럴 때만 아이지. 아르페시스는 조금 불경한 마음을 품은 채 손을 거두었다.

“그저 부스러기를 털어 주었을 뿐입니다, 성하.”

그의 변명 아닌 변명에 제르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 매일 보는 사람이 한 번쯤 양보를 하면 얼마나 좋은가? 매번 그리 방해를 해야 속이 풀리겠소?”

신전을 정리한 이후 말투를 바꾼 제르민이 조목조목, 아르페시스가 했던 방해들을 나열하며 타박을 던졌다. 대체 어쩌다 이리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아르페시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흘렸다.

어차피 곧 에스메랄다가 나서면 제르민의 신경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 버리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역시나, 아르페시스는 금세 에스메랄다에게 집중하는 제르민을 두고 다시 찻잔을 집었다.

그 일이 있었던 다음 날, 슈페르트로부터 황태자가 손에 넣은 독의 성능과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에스메랄다의 심장에 똬리를 튼 불안감은 그 소식을 먹어 치운 후 다시 한번 몸집을 불렸다.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순조롭다.

* * *

‘시작됐습니다.’

고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전보를 보낸 건 슈페르트였다. 황태자가 드디어 손을 대선 안 될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간 솔루베르 공작이 황제를 독대하는 일이 잦았으며, 황제가 황손들만 불러 따로 식사를 하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으니 벼랑 끝까지 몰렸겠지.

혼인 후 옮긴 궁에서 제르아니의 비명이 그칠 날이 없다고 하니, 황태자의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지금은 황태자의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기 위해 아르페시스가 황제의 곁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떠나기 직전에 물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부인데 괜찮겠느냐고, 꺼림칙하다면 다른 이를 보내겠다고.

‘내게는 부모가 없다.’

그녀의 말에 답하던 아르페시스의 목소리는 너무 담담했다.

‘따지자면 고아와 다를 게 없으니 꺼림칙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걱정하지 말라.’

황제를 향한 동정이나 연민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슬픈 말을 하는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심장이 조금 아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 통증을 티 내지 않았다. 그가 괜찮다 했으니 그녀도 괜찮은 척을 해야지.

결국 계획대로 아르페시스가 움직였다. 차선책을 위한 인원이 준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선책은 누구에게도 들킬 가능성이 없는 아르페시스니까.

그가 떠난 지 한 시간, 에스메랄다는 창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황성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파고들어 찾아온 짙은 적막과 함께였다. 그 적막에 취해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고요함 속에서는 생각을 정리하여 다음을 내다볼 수 있고, 삭막함 속에서는 고독을 곱씹으며 지금을 확인할 수 있고, 괴괴한 쓸쓸함 속에서는 쓰라린 후회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

지금의 에스메랄다처럼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에 허덕이며 다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가능하다.

분명 황태자는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가 성공할 것이라 믿지는 않지만 시도 자체만으로도 에스메랄다에게는 이득이다.

닷새 전, 에스메랄다는 불법 시약 거래를 꾸준히 해 온 마탑 소속의 연구 마법사와 황태자의 접선을 확인했다. 그 직후 그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모의한 것을 역으로 이용해 증거를 명확하게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 상태다. 황태자는 마법사의 딸을 인질로 독의 값을 덮어 버렸다. 금전 거래가 오가는 순간 덜미가 잡힐 확률이 높아지니 없애야 했을 터.

구매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수작이지만 어제 자로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 마법사의 개인 금고에 금괴를 넣어 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 금괴는 황실의 내정에서 황태자에게 지급한 사비다. 내정에 남은 행정 기록에 금괴의 일련번호가 기재되어 있으니 발견되는 즉시 증명이 될 것이다.

일전 황태자가 도박을 할 때 사용했던 금괴를 몇 배의 돈을 얹어 주고서 확보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도박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지웠고. 황실 내부의 기록을 건드리는 것과 달리 외부의 도박장을 건드리는 건 쉬웠다.

그리고 인질을 구출해 주는 대가로 마법사의 증언을 사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다. 위치를 찾기만 하면 머릿수로 밀어붙여서라도 인질을 빼내 오리라. 어차피 황태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오래 살려 둘 인물이 아니다. 제위에 오르거나, 오르기도 전에 마법사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 은근슬쩍 구해 주고 딸을 돌려주면 회유는 충분하다. 넘어오지 않는다면 황태자가 했던 것처럼 딸을 가지고 협박을 하면 될 테고.

모든 상황이 그녀가 계획한 최선책을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한가 보다. 그녀가 경험해 온 삶은 아무리 열심히 준비를 해도 최선책이 연달아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변수와 그녀의 예상을 넘는 행동에 의해 항상 비틀리고,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 계획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세상이 에스메랄다를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그녀가 상정한 최선책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다. 에스메랄다의 잇새에서 까득, 하고 딱딱한 소리가 흘렀다. 그녀는 지금 초조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워서.

지금의 모든 것이 함정은 아닐까? 아르페시스에게 돌아오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본 모든 상황이 사실은 황태자와 황제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그럴듯한 연극인가?

그녀가 생각을 거듭하며 떨리는 숨을 내쉬던 그때, 곁에 두었던 전보 마도구에서 불빛이 들어왔다. 고뇌를 떠안았던 그녀의 녹안이 황성을 떠나 수정구에 닿았다. 그 속에 나타난 소식은 에스메랄다의 불안감을 부추길 뿐이었다.

[정오, 합류 예정.]

최북단에 있는 디오세네트 공작령과 도미르베체 백작령에서 무장 세력을 전부 정리한 케니스가 드디어, 중북 경계선 지역에서 항전하던 다른 반군과 합류한다.

그동안 중앙군도 계속 병력을 옮기며 북쪽으로 모여들었으니, 최종적인 충돌 예상 병력의 규모가 늘어나며 판이 커지고 있다. 아르페시스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 중앙군을 붙들고 시간을 벌어 줄 반군의 최종 병력은 4만 7천. 그들에게 발목이 붙들려 움직이지 못할 중앙군과 사병들은 5만이다. 남부의 영주들과 싸우느라 바쁜 중앙군이 1만 5천 정도.

과거의 증원으로 8만 가까이 불어난 중앙군 중, 동서 지역에 남은 병력은 고작 1만 5천이다. 그런 상황에 황도를 치기 위해 들어갈 병력, 아르페시스의 내전에 참전할 병력은 최소 3만. 정말 말 그대로 최소 수치에 불과하다. 장례식 이후 계속 자극해 온 지방 귀족들이 패륜을 심판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숟가락을 얼마나 올리느냐에 따라 최대 7만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

승패가 빤히 보이지 않는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고, 명분 역시 아르페시스가 쥐게 될 테니 그 후도 순풍을 타고 가는 배처럼 순항을 할 것이다.

“에디.”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이성의 곁에서 들쭉날쭉 거리는 감정 때문에 괴로웠다. 그러던 중 드디어, 아르페시스가 돌아왔다.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의 결과를 기다리는 그녀의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간 말을 아꼈다.

“뭐야……?”

결국 참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먼저 물었다. 일이 잘못되었나? 불안감이 실현된 것일까? 그녀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공포에 물들어 갈 때,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죽었다.”

주어가 빠졌음에도 알아들었다.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어야만 했다.

“죽… 었다니?”

죽였다가 아니라? 지금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황제를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태자가 그를 죽였다는 말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시종이 내어 온 차를 마시더니 오래지 않아 죽더군.”

황태자의 독살 시도를 몰랐나? 스스로에게 그것을 물어보지 않아도 에스메랄다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황제는 자신의 궁에 들어온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이 많고, 경계심이 강함에도 소극적이지 않고 과감한 성향을 가졌다. 에스메랄다를 비롯한 테노리엘보다 더 단단하게 내부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황제다.

사용인들이 외부에 회유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 와중에 절박한 이들에게 계획된 호의를 베풀어 충성심을 사는 것에도 출중한 성과를 보여 왔다.

황제의 암살이 불가능하다시피 한 이유는 그를 지키는 병력의 경계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무력적인 면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만일의 경우 황제를 대신해 목숨을 내던질 만한 충성심을 가진 이들이 상당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들은 근위 기사이고, 시종이고, 시녀이다. 암살 시도가 황제에게 닿지 못하고 끝날 가능성이 높은 것에는 이런 내막 역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황제가 입 안으로 넘기는 모든 것 역시 그의 통제에 충성하는 사용인들의 손을 거친다. 독살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포섭, 협박, 혹은 매수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황제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절대 풀어낼 수 없는 실타래처럼 엉켜 버린 생각을 짊어진 상태였음에도 파르르 떨리던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벌어졌다.

“궁에서 대기해. 시종장은 황제의 사망을 인지하는 즉시 직계를 호출해 장례 절차를 준비하도록 되어 있어.”

에렘은 황족이 죽을 경우 무조건 부검을 한다. 그게 자연사라 해도 절대 거르지 않는 절차다. 그들의 죽음에 타인의 개입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거나, 타살의 경우 그것을 행한 범인이나 지시한 배후가 밝혀져야지만 땅에 묻힐 수 있다.

범인이 확정되면 곧장 장례 절차가 진행될 것이다. 체포 과정에서 범인의 도주 및 저항 등으로 인해 끝없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황제의 독살 사실이 가려지지 않도록, 황태자가 황실 내정 인사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손을 써야 한다.

부검에서 사인이 독이라는 게 밝혀지면 법무부 수사관들이 수사에 착수할 것이고, 슈페르트의 고발부터 시작해 에스메랄다가 준비한 증거들이 튀어나오겠지. 에스메랄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다음 단계를 위해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곧장 떠나는 대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자세를 낮추었다.

“안색이 좋지 않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무릎을 꿇은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실제로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안색이 창백했다.

“……괜찮아.”

그는 궁으로 가야 한다. 그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사실, 사망 추정 시각과 유사한 때에 그가 궁에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용의자 선상에 오를 수도 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이미 그와 내부 관계가 없는 귀족 두 명이 에스메랄다의 명령에 따라 황자 궁에 들어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봄을 맞이해 한창인 사교 행사를 위해 황도에 방문한 지방 귀족으로, 작은 상단을 하나씩 운영하고 있는 이들이다.

남부에서 활동하는 상단이기에 남부군 총사령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들른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다. 남부의 경제가 남부군을 통해 이루어지니, 어쩌면 물자를 납품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게 그들이 취할 입장이니까. 그 정도 관계로는 위증을 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증언이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하는 내부 관계는 딱 3가지다. 혈족 관계, 주종 관계, 그리고 금전 거래가 이미 오가고 있는 상거래 관계. 한때는 고용 관계에 있는 이들의 증언도 포함되었으나 위증을 하지 않는 고용인이 9할 9푼을 넘는다는 통계를 근거로 법이 개정되었다. 그중 아무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두 명의 귀족이 그 시각 아르페시스와 함께 있었노라 증언하면 법적 효력을 가진 증거가 된다.

이틀 전 황도에 도착한 그들은 예정보다 빨리 도착한 탓에 아직 머물 곳의 단장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다. 사정을 들은 아르페시스가 타운 하우스의 정리가 끝날 때까지 잠시 황자 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는 연극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관계를 따져 보면, 그들 모두 에스메랄다가 투자한 상단의 책임자였다. 자신에게 투자한 인물이 에스메랄다라는 것을 모르나, 투자자가 요구하니 위증을 하게 될 사람들.

상단을 지키고 싶다면 위증을 위한 포섭 과정을 발설하지 못하고, 그들은 지금 운영하는 상단이 가진 것의 전부인 이들이다. 휴고가 전보로 알려 온 바에 따르면, 그 두 사람은 지금 아르페시스가 없는 응접실에서 적당히 술을 마시며 시간을 때우고 있다.

“돌아가야 해. 호출이 온 즉시 반응하지 않으면 네 부재에 대한 말이 나올 수도 있어.”

“……궁에 사람이 오면 곧장 알 수 있다. 그때 움직여도 충분하니 걱정 말라.”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곧장 돌아가는 대신 에스메랄다의 차가운 손을 계속 주물럭거리며 체온을 나눠 주었다. 그가 돌아간 건 다시 한 시간 정도가 더 흐른 후의 일이었다.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하지.”

“응…….”

에스메랄다는 그가 사라진 장소를 빤히 보며 가슴께를 매만졌다.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일까?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길고 긴 기억과 시간을 가진 에스메랄다는 황제가 너무 쉽게 죽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 죽을 위인이 아닌데?

하지만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저 멀리, 황성의 첨탑 위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마도구로 만든 검은 연기, 그건 황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허탈감과 전율, 그리고 불안감이 뒤섞여 숨을 쉬는 것마저도 버겁기만 했다.

“움직여…….”

그럼에도 그녀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황제가 죽으면 제르민이 안전을 위해 실테르로 이동할 예정이다. 어차피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할 테니 그의 이동 경로와 일정, 호위단에 대한 정보가 샐 만한 구석은 없었는지 다시 확인해 보자.

그렇게 바의 29일 새벽 1시,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던 황제가 죽었다. 에렘의 모든 것을 자신의 권력 아래 두었던 폭군의 최후는 불안감과 함께였다.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순조롭다.

* * *

분명 늦은 밤에 발생한 일이었음에도 황제의 부고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황성을 둘러싼 4개의 첨탑이 모두 검은 연기를 토해 냄과 동시에 중앙 궁의 시종장이 황성에 있는 황족들을 호출했다.

‘부검인의 소견은 독살입니다.’

시종장은 황족이 모두 중앙 궁에 모이자마자 곧장 황제의 사인을 공표했다. 아르페시스의 말을 전해 듣기로, 당시 황태자가 시종장을 찢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지. 그의 예상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황태자가 시종장을 매수했다고 믿었다면, 그런 반응이 이해가 된다.

중앙 궁의 시종장 카 로제페 헨릭. 그는 성년이 된 직후 입궁해 황제의 전속 시종으로 근무했으며, 부친인 펠릭스의 사후 뒤를 이어 중앙 궁의 시종장이 된 인물이다. 황제의 충신들로 목록으로 만들어 순위를 매기면 다섯 번째 안에 들어갈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매수될 리가 없는데, 황태자는 왜 그런 반응을 보였지? 그저 너무 빨리 공표되어 당황한 것일까? 확실하지는 않다.

에스메랄다는 황제의 부고 소식이 퍼져 나가는 동안 두통에 시달리며 매일 입술을 물어뜯었다. 정말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제대로 된 근거도 없는 막연한 불안감에 붙들려서,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무시하고 떨쳐 내고자 노력해도 성과는 없었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그러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럴 때 대체로 심장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법무부가 수사를 위한 인원을 차출하고 독의 성분을 분석할 마법사들을 호출했고,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여드레, 에스메랄다는 고작 20분 전에 황태자의 협박에 독극물을 내놓았던 마법사를 확보한 참이다.

그 마법사는 귀가하던 중 괴한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했다. 다행히도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 구해 냈지만. 동시에 위치를 파악해 두었던 그의 딸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인 상태니, 늦어도 1시간 내로 성공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디.”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걱정을 한가득 담은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아…….”

그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중이었는데, 생각에 빠져 버린 바람에 손이 멈춰 버린 모양이다.

황제가 죽은 후 아르페시스는 더 이상 만찬을 위해 불려 가지 않았기에 식사 시간마다 그녀에게 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또,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고 있었으니까. 음식을 앞에 두고도 생각을 반복하느라 제대로 먹지 않는 날이 늘어 가니, 페르멘이 곁에 있음에도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르페시스는 말을 하는 대신 그녀가 방치해 둔 음식을 직접 먹여 주었다. 이럴 때는 그저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게 낫다. 그녀 혼자 포크를 들면 한두 입을 먹고 다시 멈춰 버릴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결국 그가 포크로 찍어 날라 주는 음식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으며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황제의 부고 소식이 황도를 덮긴 했으나 장례식은 아직이다. 타살의 정황이 드러난 상태에서 범인이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시신을 묻을 수 없는 것이다. 황실의 법이 그러했다. 결국 황태자의 즉위 역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가 국정 대리를 임하며 즉위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반군의 일도, 실테르의 병력 이동도, 아르페시스의 내전을 위한 테노리엘의 사병도 문제가 없다. 황제의 사인이 알려진 후 눈치 빠른 몇몇 이들이 에스메랄다를 떠봤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으며 아르페시스가 패륜에 손을 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못 박았다. 조만간 황태자를 겨냥한 증거들이 나올 테니 그녀의 주장이 진심임을 알게 될 터.

슈페르트는 고발을 준비 중이고, 쿠베트는 아비체룬의 남부군이 겨울의 마수를 뚫고 내려온 덕에 병력을 정비 중이다. 록스와 라히크도 조금씩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니 만약의 경우, 참전 의사가 있다는 의미일 터.

황태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에스메랄다의 입장에서는 허술하고 조잡한 행위일 뿐,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고 방해하거나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는 곧 저가 발을 들이고야 만 올가미에 목이 졸리기 시작할 터. 에스메랄다는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던 중 다시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또… 불안한가?”

걱정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온기가 에스메랄다에게 닿았다.

“괜찮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혹여 틀어져도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대는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

그의 다독임에 답한 에스메랄다가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사흘 후, 그녀가 확보한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황제의 독살에 사용된 독극물과 유사한 물질이 발견되고, 그의 금고에서 금괴가 나왔다. 황실의 내정에서 황태자의 사비로 지급했던 것과 똑같은 일련번호를 가진 금괴는 지출을 증빙할 자료가 없었다.

슈페르트가 법무부의 건물에 들어서서 황태자로부터 황제를 독살하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고발한 건, 증거가 나온 후 세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그로부터 1시간 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던 때 황태자가 근위 기사들을 동원해 법무부의 외궁을 습격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그보다 30분 먼저 에스메랄다가 손을 써 두었으니까. 수사를 진행하던 수사관과 증거는 이미 에스메랄다가 회수했다.

납치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나름 격렬하게 저항했던 수사관들은 법무부가 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해졌다. 1차 습격에 실패한 황태자는 곧장 2차 습격을 통해 비어 있는 중앙 궁을 장악했다. 그리고 아르페시스가 황제를 독살했노라 주장하며 3차 습격을 진행했으나, 황자 궁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궁이 습격당할 당시, 아르페시스는 법무부 궁에서 야근을 하며 황태자의 행동을 목격한 자들을 로부오들의 거처로 옮겼다. 그리고 직후 에스메랄다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황도를 벗어났다.

황태자는 아르페시스가 도주한 것을 빌미로 잡아 그를 패륜의 범인으로 몰아가고자 했으나, 상황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아르페시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니까.

인외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질시했으며 과거부터 꾸준히 무능에 대한 소문이 나돌던 황태자. 어린 나이부터 전선으로 향해 백성들을 지키고 결국 인외자가 되어 황도를 유린했던 마수까지 도륙한 황자. 두 사람 중 백성들이 믿을 인물은 진즉에 정해져 있었다.

그날 자정, 테노리엘은 국경을 완전히 비운 채 4천의 병력을 진군시켰다. 영지 전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 외에 유용 가능한 전군을 동원한 것이다. 쿠베트에 파병했던 병력까지 도로 데려왔을 정도로, 전력을 쏟아 냈다.

그 결과 봉신들이 보탠 병력까지 합해 7천이 넘는 군사가 그들과 중부를 가로막고 있는 레트몬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가 원했던 대로 두 번째 내전이 발발한 날은 바의 40일, 황제의 죽음으로부터 고작 11일이 지났던 날의 일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순조롭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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