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충돌
“이거 참, 백작.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술을 몇 잔 기울인 듯 그에게선 알코올 향이 났다.
“면목 없습니다, 전하.”
“일정이 촉박하여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요.”
에스메랄다의 사과를 변호한 것은 오웬이었다. 진즉 백작 저에 도착했던 그들이 굳이 외부로 나가 마차를 타고 돌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그런가…….”
두 사람의 연극에 말꼬리를 흐린 황태자가 제르민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이리 만났으니 된 것이겠지. 백작에게 소개를 부탁해 볼까 하네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에스메랄다가 그려 낸 상냥한 미소는 자연스러웠다.
“이번 기회에 인사를 나누시는 것도 좋겠지요. 성하, 에렘의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그녀의 소개 앞에서 황태자가 제르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
황족이나 왕족을 대하는 것에는 명확한 예법이 존재하나, 교황이나 신관을 대하는 것은 관습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나라마다 신관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에렘이나 실테르의 법은 신력 치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절도와 유사한 죄로 보나, 세튀스나 롤베르만 왕국은 모욕죄로 본다.
거기다 더해 신관을 대하는 태도는 개인의 신앙심이 큰 영향을 미치기에 교황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는 제각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교황에게 보이는 예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라면 충분히 무례한 수준이다.
관습적으로 교황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지 않아도 용납되는 건 나라의 지배자 정도다. 그 외의 왕족이나 황족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신앙심이 깊지 않은 아르페시스조차 그것을 알고 있는데 제르민의 곁에 서 있는 오웬과 다른 이들은 어떠하겠나.
그 증거로 황태자의 인사가 끝나자 오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군가 흡, 하고 들이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짙은 적막 속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앳된 미성이었다.
“모가지에 철 기둥이라도 심은 게야? 대뜸 타인의 대화에 끼어들더니 제 소개도 스스로 할 줄 모르는구나. 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인지…….”
에스메랄다에게 대하던 것과 사뭇 다르게 와락, 하고 표정을 구긴 제르민이 황태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을 본 아르페시스는 기가 찼지만 헛웃음을 내뱉을 자리가 아니라 여겼기에 꾸역꾸역 삼켰다. 제르민의 앞에 선 황태자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 나이가 되도록 예의범절도 제대로 배우지 않고 무얼 했단 말이냐?”
“……말씀이 과한 것 같소. 나는 에렘의 황태자요.”
그러자 제르민의 표정이 더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사이 황태자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의 발언이 에렘을 모욕하는 말이었음을 알고…….”
“일국의 태자라는 놈이 제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구나.”
“뭐라……?”
“요상하다, 요상해. 동생은 멀쩡하던데, 형이라는 놈은 왜 이 모양인고?”
세기의 난제를 푸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린 제르민이 다시 혀를 차며 말했다.
“둘 중 하나는 정상인 걸 보면 부모인 황제보다는 네게 흠이 있는 게로구나.”
“무엄하다. 내가 누군지 말…….”
“네놈이야말로 무엄하다!”
양쪽에서 진심을 다해 성을 내는 상황까지 왔음에도 에스메랄다는 나서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아르페시스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녀에게 어련히 생각이 있겠지.
“나는 네놈의 창조주께서 직접 선택하신 대리인이다. 황제도 되지 못한 것이 어디서 말을 내리느냐!”
다시 한번 황태자를 쭉 훑어 내리는 제르민의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무엇이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꼈다. 그건 오웬도 마찬가지였는지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으로 제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 놈들의 지도자가 무어 대단하다고.”
황태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제르민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에겐 생각을 할 머리가 없느냐? 맞아 죽은 놈들은 어버이의 종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구나. 이제부터 새로 꾸리는 놈들이 진짜 종이지.”
그 앞에서 기가 죽지도 않는지 제르민은 기다란 소매 속에 숨겨져 있던 손가락까지 들어 가며 황태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맞아 죽을 만큼 못난 것들을 싹 정리해야겠다 싶으셨으니, 제대로 다듬어 보라는 의미로 어버이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네놈의 눈에는 내가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음이 뵈지도 않는 게로구나.”
두 사람의 언쟁을 관전하던 아르페시스는 제르민 앞에서 이를 악물고 있는 황태자를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영특하다 한들 고작 다섯 살의 아이와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조금만 살펴보아도 내가 조금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탁을 내려 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뭐라? 맞아 죽는 놈들의 지도자? 말버릇 한번 고약하구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황태자와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제르민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더니 발을 뒤로 쭉 뺐다.
“네놈 뒷배가 황제면 다인 줄 아느냐? 내 뒷배는 창조주이시다! 어디서 바락바락 대들어? 이 발칙한 놈!”
“악!”
제르민이 그 작은 발로 황태자의 정강이를 걷어찰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조차 지금의 일은 내다보지 못했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경악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이 있는 힘껏 황태자의 정강이를 걷어찬 제르민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찌 그리 노려보는 게야? 그러다 한 대 치겠구나?”
험악한 인상을 더 깊게 구긴 황태자가 손을 뻗었을 때, 에스메랄다가 제르민의 옆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아르페시스 역시 반응했다.
“형님.”
그에게 손목을 붙들린 황태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사이 제르민이 빽 소리를 지르며 쐐기를 박았다.
“어디 때려 보아라! 10년쯤 후에는 에렘에서 어버이의 종을 만나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또다시 귀족들이 경악으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제르민이 내뱉은 말은 정말 경악할 만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성하.”
에스메랄다는 식식거리던 제르민이 황태자를 한 대 더 걷어차기 직전에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께서 과음을 하신 모양입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노여움을 풀어 주세요.”
나라에서 신관이 사라진다는 건 그 나라가 주신에게 버림받음을 의미했다. 신관이 가진 신력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데, 버림받은 것과 다를 리 없다. 신력은 위급한 상황에서 생을 연장해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장애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수단이다.
각 나라가 신관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며 밀착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역사 속에서 신관들이 나라를 버리고 떠난 예시가 세 번이나 있었다. 대신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신력을 권력처럼 휘둘러 왔다.
“전하, 오해가 더 이상 쌓이지 않도록 다음 기회에 다시 뵙는 것은 어떠신지요? 제가 폐하께 연통을 넣어 두겠습니다.”
오늘 일을 황제에게 일러바치겠다는 의미구나. 당장의 일이 아니라 해도, 만약 정말 신관들이 모두 빠져나간다면 그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을 터. 그 일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순간 어디에서든 설 자리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그것을 알기에 저리 뻣뻣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겠지. 아르페시스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제게서 손을 빼내는 황태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사이 에스메랄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제르민을 달래고 있었다.
지금의 일이 사전에 상의되었던 것일까? 아르페시스는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이 답이 부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하,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마음이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부러 걸음해 주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신관의 구심점은 당연히 교황이나, 제르민같이 교황이 될 수 있는 성인은 존재했던 때보다 부재했던 기간이 더 길다. 이 때문에 각지로 흩어져 있는 신관과 신전을 이끄는 것은 대신관들이 해 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관들이 속한 제도는 체계적이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스승으로 모시는 신관으로부터 서임을 받는데, 누구를 스승으로 두었느냐에 따라 서임의 위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제대로 된 중앙 관리 기구가 없기에 그 나라에 머무는 대신관이 신관들의 위계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신관들이 출세하기 위해선 신력보다 연줄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대신관들이 뜻을 합치면 다른 신관들은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런 구조 때문에 대신관의 뜻에 따라 나라를 떠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실제 신관들이 대대적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신전을 떠난 건 그 나라의 지도층과 대신관들의 다툼이 심했을 때였다. 혹은 그 나라의 왕실이나 귀족들이 대신관들과 완전히 틀어졌을 때거나.
“어찌 에스메랄다 양이 사과를 하세요. 술에 취해 위아래도 못 알아본 놈의 잘못입니다.”
“……이거, 참, 연회가 흥겹다 보니 백작의 말대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야.”
에스메랄다는 황태자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방관했나? 아니면 이렇게 행동하길 바라서? 어쩌면, 황태자에게 미리 교황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 과거를 이용해 지금의 상황을 유도한 건 아닐까?
오만하기 그지없는 황태자의 성정을 미루어 볼 때, 가능성은 충분했다. 제 아래에 고개를 조아려야 할 신하가 저에게 무언가를 숨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분노할 테니 말이다.
“연회가 너무 즐거워 과했군. 제 언행에 사과, 드립니다, 성하.”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복잡한 머릿속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곱씹을 때, 마찰을 일으킨 황태자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흥!”
하지만 황태자의 말에 콧방귀를 낀 제르민이 몸을 돌려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에스메랄다의 치맛자락을 가림막 삼아 숨어 버렸다.
“오늘의 실례는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백작을 통해 연락을 드리지요.”
그건 제르민이 아니라 에스메랄다에게 하는 말이었다. 오늘 더 이상의 마찰 없이 물러나는 대신 반드시 제르민을 황성에 보내야 할 것이라는 경고, 혹은 거래일까?
“알, 나는 먼저 돌아가 보마.”
“……예, 형님. 살펴 가십시오.”
황태자는 사과의 말을 읊으면서도 끝까지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곧 연회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황태자는 조금 더 교묘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의 일은 조금 이상했다.
‘황제는 황태자를 버릴 생각도 있는 것 같아.’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이 지금 도망치듯 떠나는 황태자의 뒷모습에 얽혀들었다.
‘그럼 비어 버릴 태자 자리는 어찌하고?’
‘너를 앉히려 할 수도 있지.’
‘솔루베르가 용납하지 않을 텐데?’
‘지금 패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패배는 아니니까.’
황제가 황태자를 버리다니,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이었다.
그것 때문일까? 에스메랄다는 황태자 앞에서 더 이상은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조금 전 황태자의 손목을 붙들어 직접적으로 제지한 것처럼, 형식적인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했지. 과거와 달리 숙이지 않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이 황태자를 계속, 계속 자극할 테니까.
패륜에 손을 댈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아넣어야 한다고 했으니, 더 열심히 해 보아야겠지. 아르페시스는 황성에서 황태자와 마주칠 만한 방법을 고심했다.
“먼 길을 오신 분께 에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황태자를 에렘의 수치로 만들고 있었다.
“혹여나 머무시고자 했던 마음이 변하셨을까 무섭습니다.”
“아니에요! 에스메랄다 양을 보러 온 것이니 예정대로 머물 겁니다.”
조금 전의 그 성난 표정은 어디로 던졌는지, 제르민은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에스메랄다의 곁에 착 달라붙었다.
“머무실 곳은 정하셨나요? 혹여 아직 정하지 못하셨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는 좋아요!”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께는 항시 도움만 받는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편히 머물러 주신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미리 상의가 되었던 일은 다 끝났다.
“다른 분들도 소개를 해 드려야겠지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으로 다가와 있던 귀족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집사가 무어라 언질을 했는지 귀족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아직 연회가 끝나려면 멀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한순간 범람한 피로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 * *
에스메랄다에게 전해 준 신수 외에도 제르민의 소매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하얀 뱀 형태의 신수 때문에 연회장에서는 잠시의 소란이 있었다.
‘어버이가 주신 힘이노라.’
하지만 본인의 두세 배는 되는 성인들의 틈에서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우던 제르민 덕분에 혼란은 오가지 않았다. 한동안 신수를 데리고 귀족들의 틈을 오가던 제르민은 오래지 않아 하품을 시작했다.
‘성하, 이제 침수에 드셔야지요.’
곁에서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키던 오웬이 말했을 때, 부득부득 제르민을 붙드는 사람은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제르민은 분명 교황이었으나, 이제 고작 다섯 살이 된 아이이기도 했으니까.
자리를 비우기 힘든 에스메랄다를 대신해 아르페시스가 정식으로 백작가의 손님이 된 두 사람을 안내하기로 했다. 페르멘이 해도 될 일을 굳이 그가 하는 것 역시 에스메랄다와 그의 사이가 공고함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오웬이 아니라 아르페시스가 제르민을 안아 들고 연회장을 나선 것 또한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신관을 벌한 주신이 직접 선택한 교황과 사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어 나쁠 것이 없다나?
에스메랄다가 하라는 것은 꼼꼼히 다 챙긴 아르페시스는 연회장을 나선 후에도 제르민을 품에 안은 상태였다.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제르민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황도에 티타 녀석이 오면 재미지겠구나.”
“당장 치안대가 출동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황도 내에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에스메랄다 양이 황제를 만나게 해 준다 하지 않았느냐. 그때 얘기를 해 봐야지.”
아르페시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굳이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제르민을 침실까지 안내해 주는 역할만 마치고 돌아가고자 했는데…….
“후후, 이제 침실에서 시간을 때우지 않아도 되는 게지?”
“그렇습니다.”
“드디어 에스메랄다 양을 매일매일 만날 수 있겠구나. 조찬을 함께 먹자 하고, 오찬과 만찬도, 다과도 함께 할 게다. 꼭 말을 전해 두어야 하느니라. 내가 늦잠을 자지 못하도록 깨우는 것도 잊지 마라!”
“예, 성하.”
대체 제르민이 에스메랄다에게 보이는 호의는 왜 이리도 짙단 말인가? 찬찬히 사람을 알아 가며 친해지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제르민은 에스메랄다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아르페시스는 조금 꺼림칙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녀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나,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는 건 이상하다.
“흐아암, 네놈이 이해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지.”
아르페시스의 너른 어깨에 기댄 채 다시 하품을 반복한 제르민이 웅얼거렸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제르민은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포기하는 대신 질문을 물고 늘어졌다.
“왜 그녀를 보자마자 태도가 변하셨는지요? 불경스럽다 노하셔도 제 입장에서는 꺼림칙한지라,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거참, 집요한 놈이로구나.”
잠투정을 하는 것처럼 그의 어깨에 고개를 비비면서도 제르민은 혀를 찼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뵙고 싶었으니 이러는 게다. 꺼림칙하기는 무엇이 꺼림칙해?”
아르페시스는 제르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큰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태어나기 전이라고 말한 것이 맞나? 그의 머릿속에 계속 물음표가 생겨났다. 그가 무언가를 되물을 여유도 없이 뻣뻣한 걸음을 이어 가는 사이, 제르민이 웅얼웅얼 말을 꺼냈다.
“에스메랄다 양은 어버이께서 계속, 계속 지켜보시던 사람이니라.”
아르페시스가 제르민의 진심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의 그는 누구에게도 에스메랄다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잠기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와 긴밀한 관계여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지 않고 이유를 설명해 주었음에 안도할 뿐이다.
“……예?”
“잠들지 않고, 쉬지 않으며, 끝나지 않던 그 공간에서 언제나 에스메랄다 양을 지켜보고 계셨다, 이 말이다.”
오웬도 처음 듣는 말인지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또 이유를 물으려거든 하지 말거라. 나도 모르니.”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어진 제르민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어렴풋이,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포근하고 안락하던 미카엘의 품도, 거대하고 슬프던 어버이의 모습도…….”
속에서 울컥하고 치솟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곳에 머물던 당시, 어버이의 곁에서 에스메랄다 양을 자주 훔쳐보았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만나고 싶었고, 만났기에 기쁜 게지.”
점점 끝이 늘어지기 시작한 목소리는 달콤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얘기를 하는 게 즐거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홀로 떠올린 것이 즐거웠던 것일까, 아르페시스에게 안겨 있던 제르민의 다리는 달랑달랑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에스메랄다 양의 곁에 있으면 어버이께서 나도 보실 수 있지 않겠느냐? 계속 옆에 머물려고 욕심을 부리는 이유이다. 이제 되었느냐?”
“……예.”
“네놈도 꼴이 꽤나 우습구나. 하다 하다 어린아이에게까지 투기를 하다니.”
“……투기가 아닙니다.”
“허면 달리 무엇이 투기란 말이더냐.”
아르페시스가 입을 다물자 제르민의 어조가 조금 딱딱해졌다.
“질시와 투기가 너희를 갉아먹게 두지 말라, 그것은 너와 너의 사람을 함께 나락으로 안내할지니.”
“…….”
“어버이께서 성서에 남기신 말은 괜한 것이 아니니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르페시스의 귓가에 단호한 음성이 박혀 들었다.
“에스메랄다 양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신수들을 이용해서라도 너를 치워 버릴 게다. 명심하라.”
그 말을 끝으로 제르민은 고롱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분명 제르민의 입을 통해 나왔음에도 어째서인지, 아르페시스는 그것이 주신이 제르민을 통해 전하는 경고처럼 들렸다.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에게 향해진 경고를 심장 깊은 곳에 담아 두었다.
제르민을 침대에 눕혀 준 아르페시스는 오웬을 등지고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복도가 아니라 상념 위를 거닐었다. 참석자들이 하나둘 돌아가며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그저 어렴풋이,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에스메랄다를 찾아들었다. 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고? 그럼, 시간을 되돌린 것도 그녀를 위해서였을까? 그녀가 신에게 사랑받아서?
본인이 한 생각임에도 아르페시스는 저절로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왜, 그녀에게 그렇게 비참한 순간을 안겨 주었나. 대체 왜, 시간을 되돌려 놓고도 그녀의 가족을 다시 빼앗아 갔나. 왜, 페드로를 지킬 수 있는 그의 힘을 일찍이 돌려주지 않았나.
아르페시스는 모든 참석자가 백작 저를 떠난 새벽녘이 되었을 때도 복잡한 상념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에스메랄다에게 짧은 작별을 고했다.
“곤한 날이었으니 어서 쉬는 것이 좋겠다. 나도 그만 돌아갈 테니.”
“응…….”
오늘도 그녀가 잠든 후에나 곁으로 갈 수 있겠지. 아마 에스메랄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마차를 타고 백작 저를 떠나는 경험은 생소했다. 아르페시스는 멀어지는 백작 저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단둘밖에 없는 공간에서 나누어야 할 대화가 무서워 피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뜻에 따르지 않고 독단으로 움직인 그의 행동을 싫어하고, 경멸할까 봐 무서웠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감내하리라 다짐했지만,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머리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심장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에스메랄다가 혼례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한 만큼…….
“겁쟁이…….”
고작 몇십 일 전의 그는 모든 것을 서로에게 말하자고 약속했는데, 지금의 그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한때 그를 행복으로 이끌었던 약속이 이제는 위협을 가해 오다니, 미래를 기억하는데 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걸까?
매일 밤 그녀를 피해 숨어드는 것이 부끄러움에도 용기가, 먼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분명 그녀의 곁에 있음으로써 더없이 행복하건만, 왜 이리 힘든지. 익숙하지 않은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한숨에 취했다.
* * *
‘다음에 만날 때는 마침내, 길고 길었던 과거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군.’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기 전 루그레디안이 남긴 말에 에스메랄다는 단호하게 답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앞에서 루그레디안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미래를 위한 날이 시작되는 그때,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겠소.’
에스메랄다는 말없이 그를 배웅했다. 반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북부에 영지를 둔 루그레디안은 더 이상 황제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 테몬과 봉신들의 사병은 반군과 함께 움직일 테니까.
그러니 다음에 만나는 것은 내전이 모두 끝났을 때, 제위에 오른 아르페시스가 반군과 협상이라는 명목하에 자리를 마련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이르면 여름이 오기 전, 늦어도 가을이 오기 전에는 그날이 도래해야 한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루그레디안을 배웅한 에스메랄다는 곧장 침실로 돌아가 치장을 벗겨 내고 목욕부터 했다. 이후에 침대가 아닌 집무실로 향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 할 일은 후방국들의 기선 제압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다지는 일이다. 에스메랄다에게 필요한 정보와 사건들이 대부분 최전방 3개국에 몰려 있었기에 눈과 귀를 자주 돌리지 않았을 뿐이지, 지난 시간 동안 북쪽의 후방국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을 생각하면서 후방국을 눌러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들을 위협할 만한 제물로 세튀스를 골랐다. 이미 마음을 먹은 직후 세튀스로 올려보낸 로부오들이 정세를 파악하고 보고까지 끝낸 상황이다.
[펠라체 사병 이동 확인, 왕실 묵인, 용병 모집 시작.]
그리고 연회 도중에 도착한 소식이 하나 더 있지. 세튀스가 에렘의 내전에 대비해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펠라체 공작은 과거 왕권의 약화를 목표로 했던 귀족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음에도, 현재는 세튀스의 국왕을 지지하고 있다. 현왕은 귀족들을 누르고 싶어 안달이 났었고, 3년 전부터 펠라체의 후계를 왕녀와 엮어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덕분이다.
뭐, 작고한 선왕비에게서 본 1왕녀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건 그리 주목할 만한 정보가 아니다. 새로 들인 왕비에게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 1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것은 조금 신경 써야겠지만 말이다. 왕세자와 2왕자의 친모가 현 모젤타 공작의 누이다.
현왕이 가장 경계하는 개국 공신 가문으로 오래도록 중립을 유지하고 있고, 혼인을 통한 포섭을 했음에도 왕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었다. 애초에 그 혼인이 모젤타의 뜻을 배제한 현왕의 강압이었으니 당연하려나. 그런 모젤타의 반응 때문에 현 왕이 펠라체로 시선을 돌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혼인은 배우자의 계승권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열다섯 살짜리 아들이 왕녀의 부마가 될 수 있으니, 펠라체 공작의 손주 역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태어날 왕족이다. 그런 상황에서 펠라체가 제 외조카를 노리고도 남겠다는 판단을 했는지, 모젤타 공작은 1왕자의 왕세자 책봉을 밀어붙였다.
원하지도 않았던 혼인에, 원하지도 않았던 정쟁이었음에도 모젤타 공작은 이미 태어나 버린 조카를 지키기 위해서 중립을 내던진 것이다. 결국 현왕은 왕녀를 통해 얻은 펠라체를 가지고 모젤타를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저가 가지고 싶었던 힘을 제 아들이 쥐었으니 배가 꽤나 아프겠지.
그리고 현왕의 충신이 되어 버린 펠라체는 왕세자를 없애야 왕녀를 이용해 왕권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으니, 왕실 내부에서 부친과 자식이 갈라선 것이다. 현재 세튀스의 내부 정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개판’이 라는 단어가 적절하리라.
“욕심을 부리다 망한 셈이지.”
에스메랄다는 귀족의 힘을 차지해 제 세를 불리려던 국왕이 실패한 결과물을 보며 조소했다. 문득 에렘의 황제와 세튀스의 국왕을 비교하게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건 각 나라의 지배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는 게 아니다. 세튀스가 에렘에게 피해를 끼치고, 죄를 짓게 만들어 명분을 쥐어야 한다.
펠라체는 세튀스의 남쪽 지대를 영지로 가지고 있다. 정확히는, 에렘과 국경을 접한 세튀스의 최남단 지역. 그 영지에서 병력 이동이 보인다는 건, 혹여나 에렘의 내전이 국경을 넘어 세튀스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섰다는 의미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는 귀족이 취할 정상적인 반응이다.
에스메랄다는 여기서 살짝 일을 틀어야만 했다. 그래야 훗날 마수로 세튀스를 뒤집어 놓을 만한 명분을 손에 쥘 수 있으니까. 혼사로 왕실과의 우호를 다져 버린 펠라체를 파고들 만한 것은 뭐가 있을까?
권력? 아니다. 이미 펠라체는 왕도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국왕은 저가 끌어들였음에도 통제하는 데 실패한 모젤타를 견제하기 위해 펠라체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왕 역시 펠라체의 지지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누리고 있고. 그럼 재력 쪽인데……. 왕실은 펠라체와의 혼사를 위해 지출한 지참금 때문에 꽤나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펠라체는… 왕실 말고 펠라체의 자금 사정은 어떻지?
에스메랄다는 곁에 놓아둔 상자 속에 가득한 종이 뭉치를 뒤적거렸다. 상자의 겉면에 새겨진 세튀스의 이름이 유독 커 보였다. 뭉치마다 별지로 요약문을 붙여 둔 보고서 더미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손쉽게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마석 광산이라…….”
왕녀와의 혼담이 오갈 무렵 펠라체가 가지고 있던 마석 광산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지참금을 엄청나게 요구했던 것이고. 당시에는 숨기려고 노력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채굴량은 판매량과 직결되니 사정이 알려지는 건 금방이었다.
펠라체의 상단은 마석 외의 분야에 진출한 적이 없고, 영지 수익은 안정적이지만 그뿐이다. 그들의 부를 책임져 주던 건 80년 전부터 채굴을 계속한 마석 광산이었다. 그게 동이 나 버렸으니 결국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제한되어 버린 것이고. 귀족들의 세상에서 부의 축소는 영향력의 감소를 의미한다. 그걸 왕녀가 가져온 은광으로 겨우겨우 채우고 있는 중이니, 틈이 있다.
어떻게 건드려야 분쟁을 일으켜 줄까, 고심했더니 생각보다 파고들기 쉬운 틈이 나왔다. 현 황후의 가문인 디오세네트 공작령에 마석 광산이 있다. 손을 잡은 이상 펠라체가 부를 손에 쥐면 왕실로서는 나쁠 게 없다. 아니, 펠라체를 부려 마석 광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꽤나 남는 장사겠지. 세튀스 국왕 정도면, 최악의 경우 눈 딱 감고 펠라체 공작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버릴 수 있는 인사니까.
“경비 병력이 얼마나 되나…….”
에스메랄다는 펠라체와 세튀스 왕의 탐욕을 부추기기로 결정했다. 내전이 시작되면 디오세네트 공작은 반군 때문에라도 최소한의 사병을 남겨 둔 채 전쟁에 나서야 한다. 황제는 이미 북부의 영주들에게 전쟁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켐이 원거리 발동 폭파 마도구를 구매한 이유다.
그런 관계로, 일이 시작되면 국경 수비를 위한 최소한의 사병만 남을 터, 그때 별동대로 디오세네트의 마석 광산 경비병을 치자. 산적으로 꾸미면 광산을 터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는 김에 마석도 조금 챙기면 더 그럴듯할 것이고.
세튀스의 왕과 펠라체의 눈에 마석 광산을 인지시키면 뒤는 내전으로 인한 사병의 빈자리와 인간의 탐욕이 해결해 줄 것이다. 조금만 건들면 먹을 수 있겠다, 싶은 상황을 눈앞에 두면 펠라체는 혹할 것이고, 그들의 힘으로 모젤타를 견제하고 있는 국왕은 지원을 하든, 묵인을 하든, 절대 말리지는 않으리라. 마석 광산이 주는 부를 누려 보았던 펠라체가 왕실과 협심해 침략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배제하고, 평범한 경우라면 보복을 하지 않을 가능성을 높게 치리라. 내전 직후의 피해도 그렇고, 에렘이 전선에 상당한 여력을 쏟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계획을 이행할 인원은… 이번에 헤도크로부터 돌려받게 될 로부오들을 동원해 보자.
고신에도 그녀에 대한 것을 발설하지 않을 만큼의 충성심이 증명된 아이들이다. 고문을 경험함으로써 유사시에 버틸 능력도 생겼으니 밖으로 내보내기에 적합하다.
이 일로 세튀스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펠라체를 가진 세튀스의 국왕이 이기든, 모젤타를 가진 왕세자가 이기든 중요하지 않다. 누가 되든 무릎을 꿇게 만들 테니까.
“놈들이 쑥덕거리는 내용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후방국을 마룡과의 전쟁에 참전시키려면 그들의 동태와 정보가 필요할 것은 자명한 사실, 기회가 되면 타국의 뒷골목을 모두 정리해 정보 선을 만들 의향도 있었다. 에스메랄다로서는 언젠가 사용할지도 모르는 기반을 만들어 두는 것이니 나쁠 건 없다. 뭐, 조금 더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라그나에게선 좀처럼 성공 소식이 들려오지 않지만, 아직 한 계절도 지나지 않았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훗날의 걸음도 그만큼 제약되겠지. 만약 그때도 필요한 패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될 일이다.
반군의 저력은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니, 만일의 경우 협상으로 그들을 세튀스의 일에 동원할 방법도 생각해 두어야겠다. 에스메랄다가 내전 이후의 그림을 채우느라 바쁠 때였다.
[급습 완료, 부소네 포획 성공, 5인 중 2인의 도주 지원 중.]
황태자와 부소네가 부딪쳤다. 수배령이 내려진 지휘부 반군과 만나다 걸렸으니 곧 황실 기사단이 부소네령을 뒤질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치기로 결정한 이상 부소네령에서 증거가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심증만 있고 물증을 발견하지 못했던 테몬과 달리, 부소네는 황실을 적대하는 무력 세력을 의도적으로 지원했다는 물증이 나온다는 의미였다. 재판장 위에서 반역죄를 판결받기에 충분한 물증, 말이다.
“혹시 모르니 확인해 둘까…….”
잠시 고민했으나 에스메랄다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확인 작업 도중에 덜미가 잡힐 수도 있다.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정리했다.
업무를 마친 에스메랄다가 집무실을 나섰을 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그녀를 반겼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깨어 있었군.”
집사가 집무실 밖의 복도에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바쁘신 듯하여.”
그는 에스메랄다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굳이 소식을 알리지 않고 밖에서 기다린 모양이다.
“들어오게.”
에스메랄다는 다시 집무실 내부로 돌아왔고, 집사가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야심하기 때문에 문을 다 닫는 대신 살짝 열어 놓기를 택했고, 에스메랄다 역시 그의 행동에 동의했기에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문 밖의 일을 할 때 굳이 테노리엘의 인사들을 관여시키지 않는다. 인력이 부족하긴 해도 일을 시킬 그녀만의 사람이 있다. 고로 이 늦은 시간에 집사가 굳이 그녀를 찾아올 만한 이유는 별로 없었다.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물어보아야지.
“무슨 일인가?”
“전해 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책상 앞까지 걸어온 집사가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무엇인가?”
설명이 없기에 굳이 물어보았음에도 백작 저의 집사는 망설이는 기색이 선명했다. 영주 성의 집사가 오래도록 가문에 충성해 온 봉신의 후계라면, 백작 저의 집사는 그녀의 부친이 후계 시절일 때부터 보좌하며 곁을 지켰던 인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들어 부친의 친구이며 또한 신하이자, 어린 시절 삼촌처럼 따랐던 집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게 몇 년 만인지…….
‘이 무례한 놈들! 놔라! 당장 백작님을 놔드리란 말이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는 에스메랄다가 체포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테몬 후작 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아른거렸다.
“선백작님께서…….”
가만히 응시하는 시간이 얼마나 길어졌을까? 집사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전사하시기 전에 저택으로 파발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주문하셨던 물건인데, 이틀 전에 완성되어 도착했습니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찾아들었다.
“수취인을 언급하신 것은 아니나 백작님의 물건인 듯하여…….”
“영지로 돌아갈 준비는?”
부친의 얘기가 나온 후부터 가슴이 허했던 에스메랄다는 집사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말부터 자르고 본 것이다. 수취인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가져왔다는 말은, 그런 생각을 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의미겠지.
“황도에서 고용한 사용인들부터 천천히 내보내는 중입니다.”
“바의 달이 되면 정확한 시일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네. 때가 되면 곧장 갈 수 있게 미리…….”
에스메랄다는 말을 하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이미 모두 했던 말이 아닌가. 부친이 남기고 간 물건을 보았다고 이토록 동요하다니. 예전보다는 꽤 잘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나 보다.
“……알겠네. 돌아가 보게.”
“평안한 밤 되시기를.”
에스메랄다는 집사가 떠난 후 곧장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집사가 주고 간 상자가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적막한 복도 속에서 그녀의 전속 시녀로 들어온 로부오가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윽고 침실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삭삭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기울인 에스메랄다는 침실의 문을 열고 나서야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발톱으로 닫혀 있던 문을 열심히 긁고 있던 건 제르민에게서 받은 신수였다. 하얀 털 뭉치의 늑대는 에스메랄다를 발견하자마자 꼬리를 흔들었다. 목욕을 하고 집무실로 가기 전 신수를 침실에 두고 갔었는데, 그때부터 계속 문을 열기 위해 끙끙댄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없을 때 사용인들이 개인적인 공간에 들락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녀가 없으면 사용인들은 그녀의 침실이나 집무실에 접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신수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끙끙거린 것을 아무도 모른 모양이다.
분명 늑대라고 들었는데 그냥 작은 강아지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제 발치 주변을 뱅뱅 도는 신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온기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하는 것뿐인데 발걸음이 무겁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앉은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그 상태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침의로 환복을 한 후 잠을 청해야 함에도 그녀의 시선은 손에 들린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의 끝에서 다가온 에스메랄다의 선택은, 그 상자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페드로의 유서를 그렇게 늦게 열어 보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거듭했던가. 에스메랄다는 긴 한숨과 함께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마침내 입을 벌린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그녀의 심장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축복을 의미하는 흰색, 평화를 상징하는 노란색,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뜻하는 붉은색까지. 색색별로 반짝이는 보석이 장식된 물건은 티아라였다. 면사포를 달 수 있도록 이음 고리가 만들어져 있는 그 물건은 부모가 혼례를 앞둔 여식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했다. 집사가 이 물건을 그녀에게 가져온 이유였다. 선백작의 자식 중 혼례를 치를 ‘여식’은 에스메랄다뿐이니까.
그의 힘을 빼앗아 버린 딸이 무어 예쁘다고 이런 축복을 남기고 갔는지……. 부친이 그녀에게 쥐여 준 사랑은 너무 다정하고 커다래서, 행복한 만큼 힘들었다.
“아르페시스…….”
분명 보고 듣고 있을 텐데, 오늘도 와 주지 않을 생각일까? 에스메랄다는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혼자 있기 싫어…….”
투둑, 하고 떨어진 눈물이 상자를 붙들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손등에 떨어지자 커다란 온기가 그녀를 덮쳐 왔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울었다.
“에디…….”
차마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아르페시스의 목소리도 흔들렸다. 그의 시선은 이미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축복에 닿아 있었다.
“내가 리퀘나를 떠난 무렵에 주문하신 거래…….”
에스메랄다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품 안에 안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리퀘나에 방문했을 당시 선백작은 에스메랄다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국내 정세와 반군의 동태 역시 알고 있었을 테니,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느꼈겠지. 그렇게 일이 끝나고 제위의 주인이 바뀌면 국혼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오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르페시스와 그녀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 왔을 때 혹여나 자신이 없을까 봐, 만일의 경우 이 아름다운 축복을 전하지 못하고 떠날까 걱정이 되어서 손을 써 둔 것이다.
부자라서 닮은 것일까? 페드로도, 백작도, 왜 자신이 떠날 것을 대비해 이렇게 다정하고 잔인한 것들을 준비해 두고 갔나. 참 밉다. 미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이런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에스메랄다에게선 서러운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너의 존재로 내가 누렸던 행복을 모두 돌려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끝끝내 너보다 나를 위한 선택을 했으니, 이 못난 아비를 빨리 잊어 주렴.’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사라진 시간에서와 달리 해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지독할 정도로 많아서 떠올릴 때마다 사무치는데.
“아버지가 보고 싶어…….”
다시 가족에게 다가가기로 했을 때 각오했던 고통이라고는 하나, 미리 준비하였다 해서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다들 왜 이렇게 힘겨운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는지,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매달렸다.
전장에 있는 이상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건 안다. 그것을 각오하고 가족들을 보냈고,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그 일을 직접 하는 가족들을 존경하면서도 사랑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이 전장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정말 사랑했다면 이렇게 잔인한 것을 준비해 둔 채 그녀를 떠날 게 아니라, 전장을 떠나 주었어야지. 언젠가 스스로가 죽을 것이라 여겨 훗날을 대비해 두는 것이 아니라, 훗날을 직접 맞이할 수 있게 살아 주었어야지. 그러지 않았기에 백작과 페드로의 사랑은 참 잔인한 사랑이었다.
의무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응한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다른 모두가 그러하듯 비겁하게 침묵하고, 이기적이게 저만을 위해 살며 곁에 남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분명 그녀의 것이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전장에서 도망쳐서 직접 그날이 올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면, 그러했다면 지금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텐데. 차라리 아무것도 주지 말고 떠났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것이라도 있어 행복하다니. 분명 사랑받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토록 사무치는 건, 그 사랑이 곁에 남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부친을 떠올리며 울었다. 그녀의 옆에서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삼켰다. 죽음으로 인한 통증을 추억으로 다독이는 방법은 있어도, 완전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보다.
에스메랄다는 백작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우는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잘 버티다가 오늘은 그럴 수 없었던 거겠지. 아르페시스의 커다란 손이 티아라 상자를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덮어 주었다.
‘물론, 그때가 되면 제가 총사령관님을 그리 좋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 말했으면서 이런 것을 남기고 가는 건 비겁하지 않나. 아르페시스는 흐느낌으로 인해 떨리는 몸을 토닥여 주었다. 어설프게나마 말을 꺼낸 건 아레스에게서 슬픔을 추억으로 달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언제였더라…….”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선대 테노리엘 백작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자신의 추억이 에스메랄다의 통증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열두 살의 생일 연회 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 진심으로 나를 대했던 귀족은 선대 백작이 처음이었다. 길기는커녕 짧기만 했던 대화가 불쾌하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지.”
그때는 훗날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여유가 없던 시기였기에 친분을 나눌 기회도 없었다. 황제의 시야 아래서 그런 간 큰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도, 테노리엘이 미친놈들 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선대 백작이었다.
그의 잔잔한 추억 속에서 에스메랄다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굉장히 차분하고 묵직한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변했던 건 열여섯 살의 여름이었다. 지금의 시간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에서 보았던 기억.
“기억나나? 그대가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대뜸 나를 찾아왔던 것 말이다.”
그의 질문에 그리움의 눈물을 떨구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이듬해였는데… 그대가 황성에 온 적이 있었다. 여름에.”
아마, 부친이 두고 간 서류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부친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이라 얼굴을 보는 시간이 줄었고, 그래서 당시 부친의 부관이었던 지금의 집사가 백작 저에 돌아왔을 때 냉큼 기회를 낚아챘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얼마나 떼를 썼는지, 결국 부관이 들어야 할 서류 뭉치를 품에 껴안고 황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때 남부군의 보고서를 보러 가던 중이었는데, 재무부의 궁에서 백작이 나오는 걸 봤다.”
차분하고 묵직한 줄만 알았던 백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메랄다를 안아 주던 모습은 꽤 오래도록 그의 뇌리에 남았다. 그 당시 언제나 품속에 넣어 다니던 에스메랄다의 손수건을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모른다.
“참… 다른 사람 같아 보였지. 그를 그렇게 웃게 만든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궁금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회가 열리던 궁의 후원에서 아레스에게 그토록 아름답게 웃어 주던 에스메랄다, 백작에게 그렇게 환한 미소를 선물해 준 에스메랄다,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의문을 가진 채 리퀘나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매일 그녀에 대한 것을 홀로 곱씹었다.
“……얘기를 하고 보니 그대의 생각을 매일 했노라 실토해 버린 것 같군.”
여전히 남아 있는 눈물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이끌어 준 대로 고통을 추억으로 다독이며 그리움을 쏟아 냈다.
* * *
카 80일, 부소네 공작이 황태자의 기사들에게 압송되어 황도로 오고 있던 날의 일이었다.
「우리는 부당한 대우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희생되고 있는 모든 전우를 대표하여, 대륙의 모든 생명을 수호하고 있는 영웅들을 위한 투쟁을 선언한다.
마수의 침략으로부터 에렘을 지켜 낸 영웅들이 권력을 위한 폭정과 정쟁에 희생되었으니, 황제는 그 잘못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희생된 영웅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넋을 기림으로써, 향후 더 많은 영웅들이 부상을 떨치고 목숨을 잃지 않도록 남부를 위한 전폭적인 지지를 요구하는 바이다.
그에 더하여, 영웅들의 힘을 위협으로 치부하여 그들의 피해를 방관하고 주도한 귀족들에게도 죄가 있음이니, 지금까지 영웅의 희생과 목숨으로 평화를 누려 왔던 기생의 값을 치르도록 만들리라.
더 이상 희생 없는 평화를 누리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모두에게 같은 짐을 들릴 때까지 우리의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의 존재 목적을 권력으로 훼손하고 수만의 영웅들을 위해 쓰여야 할 군수 자금을 수탈하여 사치를 누리고자 했던 황태자에게는 그 비천한 목숨으로써 죄를 물을 것이다.
우리는 대륙을 수호했고, 수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호할 영웅들을 위하여, 오늘의 선언이 실현될 때까지 가혹한 핏물마저도 불사할 것임을 선포하는 바이다.」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장식된 내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