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충돌
연회장을 빠져나온 아르페시스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분개했다. 이후 계속 뚱한 상태였음에도 에스메랄다가 악몽을 꿀까 싶어 침실로 찾아왔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보며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누었던 언쟁 때문인지, 그는 특별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났다는 것을 온몸에서 폴폴 풍겨 대니 계속 눈치를 보게 되지 뭔가? 은근슬쩍 화를 풀어 주려고 유혹까지 했는데 실패했을 정도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에스메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버린 아르페시스를 달래기 시작했다. 저렇게 화를 내면서도 절대 제 입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꺼내지 않을 테니, 이번에는 그녀가 양보를 할 생각이었다.
이미 한 번 선언했으니 굳이 다음에 하지 않아도 모두들 어림짐작은 할 터. 또한 황태자가 오늘의 일을 언급하지 못하게 선을 그어 두는 것도 끝났으니 되었다.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자 아르페시스는 다시 화가 욱하고 치솟았는지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연회장에 있던 사내들이 다 그대를 두고 저열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분개하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녀의 연인은 다른 건 다 좋은데, 너무 보수적이다. 했다고 자랑을 좀 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이렇게 들들 볶다니.
과거에는 한 번도 머리를 풀어 본 적 없는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제 것이라 자랑하며 꽤나 즐거웠다. 그는 전혀 아닌 모양이라 김이 팍 새어 버렸지만. 이제 화를 좀 풀라고 슬금슬금 안겨 들었더니, 그가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낚아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도, 그대와 보낸 그 시간도, 전부 나만 가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다른 사내와는 이러지 않아.”
“……그대가 그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한 시간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을 그대와 나의 사이에 두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싶다.”
그들이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며 누군가는 머릿속에서 저열한 상상을 하겠지.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의 영역까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조금 전 일처럼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아니지 않나. 그저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될 텐데, 굳이 그런 외설적인 행동이 왜 필요한가 말이다.”
아르페시스에게 에스메랄다와 보낸 열락의 시간은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출 수 있는 만큼 꽁꽁 감춰서 오로지 에스메랄다와만 나누고, 떠올리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에게 이성과의 정사란 그토록 은밀한 것이었다. 오로지 상대방과만 나눌 수 있는 비밀. 그것을 타인에게 언급을 하는 것은 마치, 누군가 보는 곳에서 정사를 가진 것만 같은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하지 않을게.”
“……기쁘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 쪽에서 먼저 하지 않겠다고 말해 주자 반색하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지금 내가 그대를 어떻게 만지는지, 어디에 닿는지, 그대의 숨결이 어떠한지, 심장 소리가 얼마나 거센지, 그건 오로지 나만, 그대와 나만 알았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에는 그가 그녀를 얼마나 소중하게 심장에 품고 있는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취해 가는 것을 느낀 에스메랄다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사랑해.”
그 한마디에 사르르 녹아내린 응어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똑같은 사랑을 고하며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고작 몇 초 후에 전보 마도구가 방해를 하는 바람에 놔주어야 했지만.
“나중에 확인해도 되지 않겠나?”
침실에서까지 일이라니, 같은 생각으로 졸라 보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확인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길이가 명확한 글자를 확인하는 것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으나, 확인을 하고 나선 꼭 다른 일이 생기니 이러는 것이다.
그간 야심한 시각에 울린 전보 마도구는 십중팔구 그에게서 그녀를 빼앗아 가곤 했다. 아르페시스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협탁 위에 놓인 수정에 손을 뻗은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순식간에 열기 대신 예기로 가득 찼다.
“북부로 가야겠어.”
이것 보라지. 아르페시스는 힐끔, 전보가 떠오른 수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호 대상 후보 확보. 동행자 신관.]
북부의 아드리안에게서 온 전보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드디어, 성인을 찾은 것 같다.
* * *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안겨 잠든 사이 북부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동안 잠을 청하라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억지로 눈을 감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들다니. 그의 품에서 잠을 청하는 것에 버릇이 들었나 보다.
“에디, 도착했다.”
자신을 깨우는 조심스러운 부름에 눈을 뜬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좋은 꿈 꾸었는가?”
“응, 넌 괜찮아? 피곤하지 않아?”
하늘이 푸르스레한 것을 보니 해가 뜰 시간이다. 그녀를 안고 밤새 이동을 했을 텐데 피곤한 기색이 없다.
“그다지.”
“너무 부려 먹는 것 같아서 면목이 없는걸…….”
“괜한 소리.”
에스메랄다의 뺨에 입을 맞춰 준 그가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고갯짓하며 물었다.
“여기가 맞나?”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안아 든 채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그만 내려 줘도 될 텐데…….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르페시스는 끝까지 그녀를 안아 든 채 붉은 하늘 용병단이 거처로 쓰고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출발 전에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 주었기에 기다림 없이 곧장 아드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내와 함께였다.
“……어서 오십시오.”
정말 이 짧은 시간에 중부와 북부를 가로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아드리안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사내는 무언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 줘.”
에스메랄다가 아쉽다는 듯 미적거리는 그의 품에서 내려오자 아드리안이 말했다.
“아직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왜 이 시간에 함께 있었지?
“일찍 깨셔서…….”
그가 잠시 내려왔을 때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도착했다는 말이겠지. 그녀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금발이 흘러내리자 중년 사내의 눈매가 경직되었다. 황도에서 후드를 쓴 채 만났던 것이 눈앞의 사내가 맞는 모양이다.
“우선 자리를 옮기죠.”
에스메랄다는 곧장 아드리안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고, 응접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이 닫힌 후에야 아르페시스가 후드를 걷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입니다.”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다.”
“아… 바 율 오웬입니다. 황자 전하와 테노리엘 백작님을 뵙게 되어 기쁘군요. 백작님과는… 황도에서 한 번 뵈었지요.”
순순히 그날 도망쳤던 것이 자신이라 인정하는 오웬 앞에서 에스메랄다 역시 말을 돌리지 않았다.
“성하와 함께 계시던 분이었군요. 자세한 것은 차후에 설명하지요.”
오웬이 안도인지, 포기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아드리안이 곧장 간략한 상황을 보고했다.
성인에 대한 수색이 내려진 후 국경 지역에 있는 로부오들의 감시도 강화되었다. 그들이 국경을 넘어가면 지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에 에스메랄다가 직접 내린 지시였다.
아드리안은 지난번 남부에서 복귀하던 중 낙오한 이들을 챙겨 케니스에게 데려다주었고, 모든 일이 끝난 후 해당 업무에 합류했다. 그때 국경 마을 근처에서 세튀스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오웬을 만난 것이다.
아드리안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오웬을 바로 알아보았다. 과거 그에게 태생 신관에 대한 진실을 알려 준 것이 오웬이었으니까. 그 인연 때문에 아드리안은 오웬에게 용병단의 거처에 머물 것을 권했다. 오웬이 여전히 순례를 다니노라 말한 탓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관들을 향한 폭행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마찬가지로 폭동으로 인한 사고를 걱정한 오웬은 국경을 넘어가는 대신 아드리안에게 의탁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성하를… 배낭에 넣어 다니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에스메랄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짚어야만 했다. 곁에 앉은 아르페시스도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신관들에게 들켜선 안 되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오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굳이 숨길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아드리안은 오웬이 아이와 함께 움직이기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오웬 역시 아드리안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과거의 연에 매달려 모든 것을 말하기엔 망설여졌을 테지. 무려 성인의 안전이 걸린 일이기에 계속 숨기기로 했고, 어린 성인을 배낭에 넣어서 매고 다니느라 그의 존재가 감춰졌다.
오웬은 절대 아드리안에게 성인의 존재를 알릴 생각이 없었다. 단지…….
“거처에 도착했을 무렵에 갑자기 딸꾹질 소리가 들려서…….”
배낭에 들어 있던 성인이 갑자기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오웬이 아이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고아 한 명을 데리고 다니노라, 하는 오웬의 변명을 믿어 주는 척하고 넘겼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지시 때문에 아드리안은 로부오들을 통해 두 사람을 관찰했고, 잠든 성인의 이마에 새겨진 주신의 문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신탁 직후 내려온 지시인지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여겨 곧장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메랄다가 도착했다. 과연 아드리안의 과거가 없었다면 오웬과 성인이 국경을 넘기 전에 찾을 수 있었을까? 에스메랄다는 부정에 가까운 답을 찾았다.
사람은 이동을 하면 흔적이 남는다. 식량을 사기 위해 방문하는 식료품점, 숙박을 위해 머무는 여관, 성문을 지나는 기록이나 외부에서의 발자국까지 흔적이 되어 추적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웬은 그녀의 감시망을 빠져나가 황도에서 북부의 국경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아드리안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놓쳤을 확률이 더 높다. 그래도 만났으니 다행일까? 아니면 그녀의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불행이라 칭해야 할까?
“폭동이 너무 잦아 국경을 넘을 엄두가 나질 않더군요. 세튀스보다는 에렘에서 아드리안 군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나을 듯하여… 염치없이 의탁을 결정했습니다.”
“성하께서는 그럼…….”
“아직 주무십니다.”
다행이고 불행이고를 모두 떠나서 성인이, 신의 대리인이 안전하다. 에스메랄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오웬이 언제부터 성인과 함께 지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가 본 아이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신탁이 내려오던 날까지 단 한 번도,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오웬이 성인의 탄생에서부터 존재 자체를 철저하게 감추었다는 의미다. 몇 년이 넘도록 신전의 눈을 피해 성인을 숨기느라 참 어려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노고가…….”
에스메랄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 오웬이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 풍족한 환경에서 모시지 못해 죄스러울 뿐입니다.”
순례 신관으로 몇십여 년을 떠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전의 체제가 부정하다고 여기며, 신전의 폐단 또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가 성인을 신전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대신관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성자를 손에 넣었다면 필시 죽였을 것이다. 태생 신관들에게 하는 짓을 보라. 그들은 능히 그럴 수 있는 자들이다. 오웬은 성인의 안전을 위해 존재 자체를 숨기길 택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성하께서 허하신다면 테노리엘에서 두 분의 안전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
“이제야 나타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불편하고 의심스러울 수 있겠으나, 시국이 위험한 것을 감안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웬에게서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황도에서부터 계속 성하를 찾고 계셨던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민감한 사안일지 모르나, 테노리엘 일가는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재력과 권력을 위해 신도를 등진 자들 앞에서 기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없지요.”
“……조금 더 빨리 찾아뵈었으면 좋았겠군요. 세간의 평이 틀린 것이면 어찌하나 싶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게 해명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신관님의 선택은 성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가타부타 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어째서인지 그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잠시 상념에 빠져들 뻔했지만 그녀는 생각을 오래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당장은 오웬과 성인에 대한 것만 곱씹어도 충분하다. 그녀가 상념을 떨쳐 내는 동안 숨을 푹 몰아쉰 오웬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신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은혜라 칭하며 안전을 의탁한다는 건…….
‘풍족한 환경에서 모시지 못해 죄스러울 뿐입니다.’
오웬은 신관의 지도자인 교황을 길거리에서 자라게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스스로를 탓하며 끙끙거리는 사람이 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흐리게 웃어야만 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세상을 외면하고 복수를 좇는 동안에도 성인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오웬 앞에서 작아졌다. 만약에, 그가 도박을 하여 과거의 순간 성인을 데려왔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시 그녀는 분노와 복수가 전부이던 사람이었기에 성인을 이용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식사부터 하지.”
에스메랄다의 숨소리가 변한 것을 기민하게 잡아낸 아르페시스가 화제를 돌려 버리고자 했다. 그는 여전히 수백만 백성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고 그런 생각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없다면 그는 또다시 리퀘나를 망가트릴 생각도 있었다.
더욱이 그는 애초부터 신앙심이 희미한 편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 하여 신실한 신도가 된 것은 아니기에 성인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아르페시스가 나서 준 덕분에 생각을 떨쳐 낸 에스메랄다는 아드리안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성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 전에 신관님이 전체적인 상황에 대해 들어 두시는 것도 좋겠지요. 저희 쪽 일이… 성하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우선은 듣고 판단해 주시기를. 혹여나 성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안전을 책임지는 것에서 끝내겠습니다.”
“예, 그리하지요. 성하께서 깨어나시면 말을 전하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아드리안이 오웬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신전에 관한 내용만 간략히 알려 드려라.”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그가 나가자 에스메랄다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한숨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 전에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속삭인 덕분이다.
“밤새 이동을 했는데 곤하지는 않은가?”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는데 피곤할 것이 어디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픽, 웃으며 저를 덮어 오는 온기를 안아 주었다.
“괜찮아. 오히려 아주 잘 잤어.”
“그거 다행이군.”
아르페시스의 커다란 손이 에스메랄다의 뺨을 쓸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주의를 돌리려는 듯 계속 다른 얘기를 했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빤히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에 따라 다른 생각, 다른 대화를 하는 동안 식사 준비가 끝났고,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아르페시스의 무릎 위에 앉아 도란도란 나누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것은 오웬이 찾아온 후였다. 그는 깨어난 성인에게 해 주어야 할 법한 설명은 다 전했다고 말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성하께서 만나겠노라 답하셨습니다.”
“……가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오웬의 뒤를 따르는 내내 복잡한 상념이 그녀와 함께였다. 아르페시스가 없었다면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괴롭혔으리라. 초조함에 마주 잡은 에스메랄다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3층의 손님방에 도착한 오웬이 문을 두드렸다.
“성하,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흠, 흠, 들어오라.”
앳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끝나자 오웬이 문을 열었다. 침대 하나와 4인용 테이블이 전부인 그 방에서 에스메랄다는 주신의 문장을 이마에 새긴 아이를, 신관들의 지도자인 교황을 마주했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 온 죄인의 죄책감이었는지, 신의 대리인을 만난 신도의 감동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성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에스메랄다가 성하께 인사 올립니다.”
성호를 그으며 예를 갖추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갑작스러운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들기에는 에스메랄다의 신앙심이 너무 굳건한지라 잠시의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닿는 손길을 느꼈다. 동시에 하얀 빛 무리가 감긴 눈꺼풀 사이를 파고들며 앳된 음성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버이의 축복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기를.”
핏물에 절어 있는 그녀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뒤로 밀어낸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신발을 신지 않은 작은 발이 꼼지락거리는 게 가장 먼저 보였다. 고개를 들자 발갛게 뺨을 붉힌 성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르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뻐요.”
힐끔힐끔 시선을 들어 그녀를 훔쳐보는 제르민은 이제 다섯 살쯤 되어 보였을 만한 아이였다. 그녀를 담은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아르페시스가 성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르민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버이의 축복이 있기를.”
제르민은 아르페시스에게도 축복을 해 준 후 손을 거뒀다.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내리쬐었던 빛 무리보다 약하고 짧은 것 같았지만… 착각이려니 하고 넘겼다. 주신의 대리인이 차별을 하여 축복을 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에스메랄다에게로 시선을 돌린 제르민이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오웬에게 듣자 하니, 이곳의 책임자시라지요. 오갈 곳 없는 상황에서 베풀어 주신 호의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늦게나마 인사를 전합니다.”
에스메랄다는 제르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라 보지 못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아니었다. 그는 제르민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웬을 확인한 후 살짝 미간을 좁혔다.
분명, 제르민은 조금 전 에스메랄다가 예를 갖추었을 때 잔뜩 들떠서는 허둥지둥,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어쩌면… 눈앞의 꼬맹이가 영악하게 에스메랄다 앞에서 가식을 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제르민을 훑은 아르페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린 에스메랄다 역시 몸을 일으켰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을요. 부담 가지지 마시고 편히 머물러 주세요.”
에스메랄다의 말에 제르민이 뺨을 감싸 쥐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 그래도 될까요?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인지라 보답도 해 드리지 못하는데…….”
이어지는 제르민의 행동이 아르페시스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다. 반면 에스메랄다는 대륙의 유일한 교황이 숨어 다녀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논하는 것을 보고 속이 말이 아니었다.
“곁에서 모실 수 있게 허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영광이지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나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앉으시겠어요? 아니, 앉아 주세요, 제발요!”
곧 제르민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향해 오는 호감에 답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여전히 뺨을 붉게 물들인 제르민이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의자로 이끌었다. 냉큼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그의 행동에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들썩거렸고, 오웬의 표정이 기괴하게 망가졌다.
“시, 식사는 하셨나요? 다과라도… 아니, 신세를 지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이상하네요. 헤헤헤.”
“혹여 좋아하는 다과가 있으신가요? 준비해 오라 이르겠습니다.”
“저, 전 단것이라면 대부분 좋아해요.”
“알겠습니다.”
사람을 불러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제르민은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에스메랄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티끌 한 점 없이 하얀 머리카락은 노화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결 좋게 살랑거렸고, 그녀를 보는 금색 눈동자는 초롱거렸다.
“성하, 조금 전에…….”
“에헤이! 급히 굴지 말거라. 담소를 나눈 후에도 충분히 논할 수 있는 문제이니라.”
오웬의 조심스러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르민은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에스메랄다는 경련이 인 것처럼 입술을 씰룩거리는 오웬과 뺨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중얼거리는 제르민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어찌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용건을 운운하겠는고? 통성명도 하고, 인사도 나누고, 감사도 전하고,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느냐 말이다.”
“……언급하신 것은 이미 모두 하셨습니다.”
“그, 그것 외에도 많다는 의미이니라. 어찌 내가 하는 말에 그리 토를 많이 다는 게야!”
“이거 경사로구나, 당장 불러오라, 하고 말씀…….”
“나, 나는 그러한 적이 없노라! 허언을 퍼트리다니, 어버이께서 네게 그리 가르치시더냐?”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인 게지, 그 꽉 막힌 성격을 고치라고 누누이 이르지 않았더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아르페시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제르민을 지그시 응시했다. 에스메랄다는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오웬에게 훈계를 하는 제르민을 보느라 그런 아르페시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다과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오웬은 직접 과자를 집어 제르민에게 쥐여 주었다.
“이런 것으로 네 잘못을 눈감아 줄 거라 믿으면 오산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둘러 손을 뻗어 과자를 받아 드는 모습이 퍽 귀여워 에스메랄다는 미소 짓고야 말았다. 신자 된 도리로 신의 대리인을 평해선 안 되겠으나, 보아하니 성격이 꽤나 드센 모양이다. 오웬이 했을 고생이 눈에 훤했다.
“단것이 있으면 세상 조용하시지요. 그 틈에 몇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웬의 말대로, 과자를 먹기 시작한 제르민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타의 또래 아이들보다 발음도 또렷하고, 이미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 정도이나 고작 대여섯 살의 아이인 것이다. 제르민이 다과에 집중하자 에스메랄다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오웬에게 시선을 준 그녀가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오웬은 답을 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 두고 하얀 신력을 피워 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무얼 하나 싶어 지켜보던 중 몸을 움찔 떨었다. 침대가 있는 방향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로 무언가 후다닥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파란 물결을 일으키며 가장 먼저 반응했으나, 그의 마나가 테이블 위로 튀어 오른 것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녀석들… 그래, 세 마리나 되는 동물은 오웬에게 모여들기만 했을 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오웬, 정확히는 그의 손 앞으로 모여든 동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양이, 새, 그리고 뱀까지. 털과 가죽, 그리고 비늘이 전부 하얗기만 한 그 동물은 오웬의 손에 코를 박은 채 꾸물거리는 중이었다.
“먹지 않아도 문제는 없으나, 신력은 먹더군요.”
“그게 대체…….”
에스메랄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오웬이 다른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하께서 만드시노라, 그리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겠군요. 종종 묘한 신력을 꺼내 짐승에게 먹이처럼 주시는데… 그런 녀석들이 사나흘 후에는 이렇게 하얗게 변해서 성하께 돌아오곤 합니다.”
뭐? 에스메랄다는 정말 멍청한 표정으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제 기억에 따르면 70마리 정도 되는 듯합니다. 모습이 작아 함께 움직이는 녀석들은 여기 있는 3마리가 전부고, 몇몇 맹수 정도의 크기를 가진 녀석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성하를 졸졸 따라옵니다. 집채만큼 커진 경우도 있는데… 평범한 크기를 벗어난 아이들은 너무 눈에 띄는지라 데녹에 두고 왔습니다.”
에스메랄다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 앞에서 침묵하는 동안 오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관찰을 해 보니 사람의 말을 꽤나 잘 이해하더군요. 지능이 상당히 높습니다. 노년에 이 녀석들 덕에 이동이 상당히 편했지요.”
“…….”
“……저는 우선 신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침묵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 * *
「신수가 처음으로 대륙에 등장한 시기는 비교적 명확한 일자로 기록되어 있다.
교황 제르민의 유년기부터 그의 교육을 책임져 왔으며, 노년에 성국의 원로로서 신관들의 규율을 바로잡는 데 헌신한 바 율 오웬이 남긴 사기록 덕분이다.
- 눈처럼 하얀 늑대가 악인의 핏물로 발자국을 찍으며 나를 찾아온 날, 일생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치하받은 것처럼 그분을 만났다.
주신의 대리인이며 우리의 지도자이고, 대륙에 유일한 교황 성하께서 차가운 눈밭에 누워 계시던 그 순간을 잊게 되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
부덕한 길로 가 버린 종을 다시금 바른길로 안내해 줄 수 있는 분으로 자라시기를 바라며, 대륙력 1433년 카 57일에 그분을 위한 헌신을 남은 평생에 심어 본다.
위의 기록은 신수의 최초 출현 일자를 추측하는 데 일조한 기록의 전문이다. 이를 통해 신수로 추정되는 하얀 늑대가 최소 1433년 카 57일 이전에 대륙에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출현 지역은 교황 제르민이 태어난 데녹이 최초임이 명확하게 명시된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신수가 탄생한 방법에 대한 것도 당시 신관 오웬이 남긴 기록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신수를 창조한 것이 교황 제르민이었다고 주장한다. 해당 주장과 관련된 근거는 상당히 직접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성국의 원로 오웬은 교황 제르민과 만났던 당시 주변에 낭자한 시체의 소지품에서 낯선 문장을 찾았고, 그것을 따로 기록하여 보관했다. 이후 그것이 데녹에서 활동하는 용병단 중 한 곳의 문장이며, 그들이 외진 마을 하나를 몰살시켰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음은 관련 기록의 전문이다.
- 180명가량이 거주하던 마을 하나가 완전히 불탔고, 생존자는 없다 했다. 그 마을에 출산이 임박했던 임산부가 2명이었다 하니, 아마도 성하의 모친은 그곳에서 명을 다한 듯하다.
아그사 용병단의 평소 행실에 패악과 폭력은 물론 탐욕마저 가득하니, 마을에 들렀던 그들이 성하의 탄생을 알고 신전에 팔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성하께서 티타 녀석을 일찍이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다면, 티타가 용병들을 모두 죽인 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성하께서 어찌 되셨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과 발이, 그리고 나의 영혼이 겁에 질려 떨리고야 만다.
신께서, 어버이께서 나를 성하께 안내하신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아니, 어쩌면 성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분이 무사함에 나는 언제나 우리의 어버이께, 성하께, 그리고 티타에게 감사한다.
당시 개인적인 조사를 지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오웬은 일견 타당성 있어 보이는 추측을 기록해 두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증거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기에 진실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현재의 신학계에서는 해당 내용들을 토대로 성국의 초대 교황인 제르민이 신수를 만들었다, 혹은 태어나게 했다는 추측에는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다.
(후략)」
- 카 주브 롤베르만 엘리자베스 『신수의 기원과 변화』 中 발췌.
* * *
각기 관직에 이름을 올린 귀족들이 모인 국정 회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시끄럽다. 오늘 언급된 주제가 그의 생일 연회 전날 벌어진 마수 투기장에 대한 것이기에 평소보다 더 심했다. 페라노스는 눈앞에 있는 놈들의 입을 틀어막고, 혀를 잘라 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를 위한 연회가 한창인 순간에도 마수의 사체를 처리하고 사상자를 집계하느라 치안대는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일각에서는 백성이 죽었는데도 연회를 열었다고 황실을 헐뜯는 놈들도 있다지. 버러지 몇 죽은 것으로 왜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가 부당한 것처럼 언급되나.
지금 페라노스의 심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마수를 도륙한 아르페시스의 이름이 들려오는지라 더더욱.
그 연회에서 있었던 일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는 감히, 그를 위한 연회에서 사생아 놈을 함께 언급했고, 그를 모욕한 테노리엘의 계집은 비천한 사생아 놈과 살을 섞고서 뻔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오는 말은 페라노스의 심사를 비틀다 못해 쥐어짜고 있었다.
“그동안 수십, 수백만의 병사들이 마수를 막아내기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수를 돈벌이로 쓰다니요. 간악한 짓입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계신 황도에 마수를 들여오다니… 마수에게 인간의 땅을 팔아넘긴 간신들이나 할 짓입니다.”
고위 귀족들 중 일부는 알음알음 마수 투기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 드나드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존재를 몰랐던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게 된 척이라니.
“폐하, 황도에서 마수 투기장이라 명명된 시설을 운영한 자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사상자가 200이 넘는다 합니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 벌하셔야 합니다.”
“그곳에 드나들며 제국의 이름에 누가 되고자 자청한 이들도 엄히 벌하셔야 합니다.”
“엄히 벌하셔야 합니다.”
반황실 세력의 귀족들이 입을 모아 말했고, 세력권을 벗어난 중립 귀족들도 찬동했다.
“가벼이 넘어가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다시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에 마수를 들여놓는 일이 없도록 기강을 잡으셔야 합니다.”
황제의 세력 중에서도 간간이 말을 보탤 정도로 오늘 언급된 안건은 무거운 주제였다.
마수를 이용한 돈벌이는 2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생겨나 지금은 꽤나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합법인 것은 아니다. 황도에서 그 마수가 사상자를 내는 바람에 뇌물로 덮는 것도 불가능했다.
위험한 것을 부러 황도에서 키우다시피 했으니, 그 행동 자체를 황제를 향한 공격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만약 페라노스가 그 행동을 묵인하며 돈을 만졌다는 게 탄로 나면 일이 커진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투기장 관련 인물을 모두 사살하라 했고, 혹시나 간사한 마음을 먹은 놈들이 그가 출입한 기록을 남겼을까 싶어 거처까지 모조리 털었다. 이번 일에서 그의 흔적은 모두 지웠다. 최대한 일이 커지지 않도록, 함께 투기장에 들락거리던 하급 귀족들에게 떠넘긴 후 덮자.
탐욕이 그득한 놈들을 골라 훗날 그가 제위에 오를 때를 기약하면 충분하다. 한 자리를 약속하면 기꺼이 먹이를 물겠지. 놈들도 이후에 조용히 처리하면 훗날의 문제도 통제가 가능하다. 혹시 모르니 그를 따르는 이들 중에 법무부로 나선 놈들을 불러야 한다. 황제가 수사 기관을 새로 창설한다면 그쪽에 그의 사람을 넣어 놔야 하니까.
페라노스는 시끄러운 귀족들 틈에서 지겹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찬 것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중 자신이 놓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방문에서 크게 딴 돈이 하필이면 직인이 없는 불법 금괴다. 당시에는 비자금으로 쓸 수 있겠다 싶어 흡족했는데, 이제 와서는 위험하다. 황실의 직인과 일련번호가 찍힌 금괴는 반드시 거래 명세가 남기에 추적이 가능한 합법적 자금이나, 직인이 없는 금괴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보유하는 것 자체가 죄이기에 발각 즉시 재무부 산하의 통화 관련 기관이 자율적 수사에 착수한다. 폭파로 인한 잔해 때문에 쉽게 발견된 마수 투기장에서 나온 금괴와 유사점이라도 발견되면 이번 일에 엮인다. 회의가 파하자마자 금괴부터 숨겨야겠다. 버리기엔 아까운 금액이니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숨겨 두자. 훗날 자금이 필요할 때 써야 한다.
“황도에서 마수를 키운 놈들이 있단 말이지…….”
분명 운영하는 놈들은 황제에게 따로 뇌물을 먹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이제껏 조용했을 리가 없지 않나.
대놓고 마수를 사로잡아 끌고 다니는 서커스단도 있는데, 황도에서 마수를 키우고 그것으로 돈을 번 게 놀라울 것도 없다. 며칠 전의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마수의 사육을 문제 삼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작게 혀를 찬 페라노스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었다. 이게 다 투기장 관리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들 때문이다. 무능한 것들.
탐탁지 않은 아랫것들을 헐뜯은 페라노스가 황좌에 앉아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이고 있는 황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덕분에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은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둘러 눈을 돌리는 그 찰나의 순간 손발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페라노스는 여전히 권태를 표정에 담았다. 이번 일에 연관이 없다고,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발을 빼야 한다.
솔루베르 공작이 몇 번이고 황제를 독대한 상황에서 약점이라 불릴 만한 것을 늘려서 좋을 게 없다. 무슨 얘기가 오간 것인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에 더더욱.
저절로 이가 갈린다. 누구 덕에 지금의 권세를 누리는데, 감히 그를 배제한 채 황제를 만나? 침대에서 별 쓸모도 없는 것을 태자비로 들여 주었더니……!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솟는 통에 욕지거리가 일었다.
궁에 돌아가면 지시를 내린 후에 새로 잡은 놈들로 목욕이나 하자. 생각보다 유가족들의 사냥이 쉽지 않아 자주 할 수 없는 귀한 휴식이었다.
페라노스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게 눌러 참은 후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가 시작된 이후 첫 발언이었다.
“폐하, 관련 인사를 처벌하는 것은 물론 당일 폭파에 연관된 이들 또한 색출해 벌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황도 한복판에서 원거리 폭파 마도구가 사용되었는지도 조사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수북하게 쌓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보란 듯이 앞으로 던졌다. 계속 까딱거리던 황제의 다리가 멈춰 있었다. 페라노스는 자신의 등 뒤를 훑고 지나가는 한기에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지켐 자작, 자네가 마탑에서 구매한 물품의 일련번호와 잔해에서 나온 마도구의 일련번호가 같다더구나. 치안대가 가져온 증거물에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어서 기가 막혔다. 짐의 신하가 설마 마수 투기장을 묵인하고 원거리 발동 마도구를 조달해 주었을까 싶어 굳이 물어보는 것이다. 사실대로 고하라.”
그 순간 페라노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지켐은 오르테메스 백작의 봉신으로 황제의 세력권 내에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몇 번 투기장에서 마주친 적도 있기에 그가 투기장을 공개할 이유가 없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왜 그것이 그 자리에 있었나?”
“저, 저도 물품을 받기 전에 일부를 도난당한지라…….”
“하면 어째서 도난 신고를 하지 않았나?”
“예? 해, 했습니다! 마탑에서 영지로 물품을 보낸 후 일부 수량이 도난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해서 곧장 신고를…….”
“자네가 낸 도난 신고는 어디에도 없던데……. 정말 도난을 당한 게 맞는가? 몰래 빼내어 투기장 인사들에게 쥐여 준 것은 아니고? 분실 사실은 어떤 경위로 인지했나? 인지한 날로부터 시일이 얼마나 지났지?”
60이 넘은 노인네가 내는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황제가 꼬고 앉은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양이 꽤 많더군. 그것을 사다가 어디에 쓸 생각이었나?”
“이, 일전 폐하께서 부, 북부의 있는 무도한 자들을 상대할 화력이 필요하다 하셨…….”
“그래, 짐이 필요하다 했지. 한데 좀 많더구나. 일부를 슬쩍해도 짐이 원한 수량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이 또한 변명을 해 보라.”
“여유분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도움, 도움이라……. 황도에서 터트리는 것이 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란 말이지.”
“폐, 폐하, 아닙니다!”
“네놈이 하는 말은 전부 변명, 변명, 변명이군. 그것을 받쳐 줄 증거도 제대로 없으니 더는 못 들어 주겠구나.”
황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장 문이 열렸다. 그곳을 지나 들어온 건 황실 기사단이었다. 법무부나 치안대 소속의 기사가 아니라 황제의 기사가 움직였다는 건 절대 바뀌지 않을 결과의 선언이다.
지켐은 끝났다. 황제는 이번 일에서 지켐이 어떤 해명을 해도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미 물증이 있다. 실제 지켐이 관련 없다 해도 황제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거짓을 위해 위조된 것이라면 무능하게 놀아난 지켐이 잘못한 것이다.
황제는 무능을 경멸했기에 무능한 신하는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그의 황권이 폭정 속에서도 탄탄한 이유였다.
“테몬 후작.”
“예, 폐하.”
“오늘 외교부 소속인 그대가 법안 상정에 대한 제의서를 냈다지. 발의하라.”
페라노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의 진행을 보고 직감했다. 테몬과 황제 사이에 거래가 있었구나.
“마수의 내륙 반입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필요하다 사료되는 바, 관련 법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남부는 예외로 두고자 함인가? 그곳에서 돌아다니는 놈이 꽤 많을 텐데.”
황제가 자신에게 속한 지켐을 내어 주었다면 꽤나 비싼 값을 치른 셈이다. 테몬이 황제에게 제시한 것이 무엇이기에?
필시 황제가 세력을 잘라 내는 값을 치러서라도 폐기해야 할 품목을 내걸었을 텐데……. 페라노스의 머리가 바쁘게 정답을 찾아 움직였다.
“군사 목적 외의 모든 내륙 반입을 금하는 것으로 하여 세부 조항을 다듬으면, 남부의 마수들은 군사 작전 중 도주한 잔여 병력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내륙에 슬금슬금 들어오는 놈들은?”
그러나 그의 시야에선 마땅히 잡히는 게 없었다. 스스로와 관련된 것인가 싶어 흔적을 짚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의 투기장 방문 증거는 이미 다 지웠고, 금괴는 아직 들키지도 않았다. 그럼 다른 황제파 세력의 귀족들과 관련된 흔적인가
“발견 즉시 신고를 요하는 조항을 만드는 것은 어떠신지요. 황도에 가두어 키웠던 놈들 역시 소수로 흘러들어온 마수를 포획했던 것일 터이니 같은 일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고라… 그래, 그리하면 짐의 땅 위에서 마수를 키우며 돈 놀음을 하는 놈들은 없겠구나. 법무부는 후작과 논의하여 다음 회의 때까지 초안을 만들어 오도록 하라.”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잠시 고요한 적막이 회의장을 떠돌았지만 몇 초 만에 다시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로 인해 사라졌다.
“그제 일어난 마수 난동에 대한 판결부터 내리겠다. 짐의 땅에서 마수와 놀아난 이들의 모든 것을 몰수하라.”
말 그대로 재산이나 작위를 가릴 것 없이 가진 것이 있다면 전부 몰수하라는 의미였다.
“또한 관련인 모두에게 케락에서의 15년 형을 선고할 것이니, 형을 채워야만 빛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케락은 에렘의 중북부에 위치한 석산의 지하에 있는 감옥이었다. 내부에서 중첩되어 새겨진 마법 진만 30여 개로, 그 어떠한 물리력에도 암석이 파괴되지 않기에 지금껏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감옥에는 철창이 없다. 그저 5천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공동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매일 공동의 천장에 있는 구멍을 통해 식량을 떨어트려 준다. 음식이 아니라 식량이다. 썩은 음식 쓰레기일 때도 있고, 때로는 동물의 사체이기도 하다.
그런 식량이 떨어진다 해도 어둠 속에서 음식을 찾지 못해 먹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곳의 간수들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않기에 죄수들끼리 서로를 잡아먹는 일도 생긴다. 어둠 속에서 미쳐 자살하는 이들이 절반이라 하고, 굶어 죽는 이들이 2할, 잡아먹혀 죽는 이들이 2할, 그리고 형을 선고받은 후 들어가기 전에 자살해 버리는 이들이 1할이다.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가두는 케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이가 200일을 버텼다고 추정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유골을 회수해 생전에 뼈에 새긴 죄수 번호를 확인하고, 사망 시기를 추정하기에 꽤나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그렇게 확인한 유골은 형기가 끝나기 전까지 다른 공동에 보관한다. 말 그대로, 유골이 되어도 빛을 다시 보려거든 형기를 채워야 하기에 그곳에서 15년 형은 사형과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들어간 죄인의 수와 형기를 채워 밖으로 나온 유골의 수가 정확히 일치하기에, 탈출한 자가 없노라 확언할 수 있는 감옥이 바로 케락이다.
“사안이 엄중하니 관련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수사는 황실 기사단에게 일임해 짐이 직접 지휘할 것이다. 모두 협조하라.”
“예, 폐하.”
황제의 발이 다시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권력 휘두르기가 끝난 것이다. 페라노스의 주먹에 한껏 몰려 있던 힘이 스르륵 풀어지기 시작했다.
“거참, 짐이 기거하는 곳에서 마수가 날뛰었단 말이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경고인지, 위협일지 모를 말을 던진 황제가 회의를 진행시켰다.
그날 회의가 끝난 후 당연하다는 듯 황제의 집무실로 불려 간 페라노스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명령서 사건부터 지금까지, 이제 네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질려 간다.”
황제가 앉은 책상 위에 놓인 수정 마도구에는, 페라노스가 마수를 가리키며 도박금을 걸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황제가 지켐을 값으로 치러 구매한 것은 그였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페라노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짐이 너를 내어 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요즘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 도무지 모르겠으니 혹여 짐이 떠올리지 못한 것이 있으면 어디 한번 들어 보자.”
황제는 화를 낼 때 절대 폭력을 사용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폭력보다 더한 공포를 안겨 주고 떠난다.
“제가, 에렘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에렘의 이름은 견고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의 주인이 바라는 만큼의 권력을 누리니까.
“네놈에게 달린 것이 짐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내다 버렸을 것이다. 어찌 걸려도 테몬에게 걸리느냐? 그 독종이 네놈보다 쓸 만하다는 건 이리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
“법안과 지켐으로 이미 얘기 다 끝냈으니 금괴부터 내다 버려라. 짐의 기사들이 그것 하나 찾지 못할 거라 여긴다면, 어디 한번 해 보아라.”
별것도 아닌 인외자의 힘이 나타나자마자 겁먹고 꼬리를 내린 놈이,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채 내려다보다니. 페라노스의 속에서 분노와 모멸감, 경멸이 뒤섞이며 끔찍한 색을 만들어 냈다.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가 죽은 듯이 살라 했다.”
“…….”
“짐이 죽고 난 후에 제위에 앉아 네 멋대로 살라고, 나라를 말아먹든 말든 네 알아서 하라 그리 말했는데, 귀가 먹기라도 했더냐?”
“…….”
“도움이 되라 낳아 놓았더니 짐의 앞길을 방해만 하는구나. 어찌 닮아도 제 어미만 닮아서는… 쓸모없는 것.”
쯧, 하고 혀를 찬 황제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 페라노스를 응시했다. 적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자 삭삭, 하고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이고 있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페라노스의 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사라졌다.
“아니다, 네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덜떨어진 것을 황후로 들인 짐의 죄지.”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테이블 위에 있던 수정 마도구가 책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치워라.”
페라노스가 허리를 숙여 수정 마도구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삭삭, 스치는 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마도구를 잡은 페라노스의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
“황손이 둘이던가…….”
페라노스는 살기를 띤 채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저보다 더한 살기를 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한 직후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치우라 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고개를 조아린 페라노스가 몸을 돌렸다.
집무실을 나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페라노스는 금세 중앙 궁을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본인의 궁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황태자비의 궁이었다.
궁에 들어선 페라노스는 곧장 수정 마도구를 내던졌다. 입에서 소리 하나 꺼내지 않고 수정을 짓밟아 깨트린 후에야 그의 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사용인들을 지나 벌컥, 하고 문을 연 곳은 제르아니의 침실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도망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르아니를 붙잡는 건 쉬웠다. 그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제르아니는 마도구를 사용할 때나 마나를 쓰는 병신이니까. 그녀의 머리채를 틀어쥔 페라노스가 언성을 높였다.
“가랑이를 벌리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년이, 아비 놈에게 가서 뭐라 주절거렸느냐!”
“아악!”
“그놈이 왜 황제를 독대했느냐고 물었다!”
“몰라요! 모른다고!”
“이년이 끝까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높은 비명 소리가 울렸지만 두 사람이 있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라노스가 통곡을 하는 제르아니를 내던지고 나온 것은 고작 몇 분 후의 일이었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계속 화풀이를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금방 관두어야만 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근위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페라노스는 아직도 식지 않은 화로 인해 식식거리면서도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그가 제르아니를 손봐 줄 때는 누구도 근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해 두었는데도 왔다는 건, 급한 일이라는 의미다.
“남부에서 용병들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페라노스의 표정이 한층 더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남부의 신전 쪽에 풀어 둔 용병과 기사들이 하나둘 실종되는 통에 성질이 나던 차였다. 그런데 남부에서 연락이 올라왔다고?
“무엇이기에?”
“부소네 공작이 야심한 시각에 영지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비밀스러운 움직임에는 언제나 구린 것이 있기 마련이다. 몇 년 전 명령서를 바꿔치기한 놈들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분명 존재함에도 실체를 찾을 수 없어 끝자락의 꼬리만 몇 번 발견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그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자결한 놈들이 대부분이고, 고신을 가해도 입을 열지 않아 폐기되었다.
“남부에 나간 이들 중 몇 명이나 남았더냐?”
“12명입니다.”
남부에서 용병들을 관리하라고 보낸 기사는 본래 40명이다. 그런데 남은 게 고작 12명이라니. 페라노스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잔뜩 짓씹힌 발음으로 말했다.
“쫓아서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해라.”
“예, 전하.”
이번에는 어쩌면, 놈들의 머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솔루베르 공작은 물론 남부에서 잡히지 않는 놈들에게도 반드시, 그를 기만한 값을 치르게 만들리라.
페라노스가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 앞을 벗어나자 사색이 된 시녀들이 약제 상자와 신관을 대동한 채 제르아니의 침실로 들어섰다. 그들의 행동은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 * *
에스메랄다는 오전 시간은 물론, 오찬을 함께하는 내내 제르민의 곁에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매우 불만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특히나, 과자 한 접시를 말끔히 비운 제르민이 에스메랄다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그의 뒷덜미를 잡아다 멀리 던져 버리고 싶어서 손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이니 억지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착실하게 그녀와 거리를 좁힌 제르민은 오찬 무렵이 되었을 즘엔 이름까지 허락받아 갔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품에서 뺨을 감싸 쥔 채 다리를 달랑거리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먹여 주는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제르민이 낮잠에 빠져들자 이를 앙다문 채 말했다.
“성하께서는 참으로 정직하시군.”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지나친 호감을 표하는 제르민의 행동이 불쾌해 몇 번이고 그의 주의를 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제르민은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 모른다, 정도의 간략한 답을 대충 던지고 다시 에스메랄다에게로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 차별적인 대우를 비꼬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오웬의 대꾸에 기가 찼다.
“예, 그러신 편입니다.”
오웬은 에스메랄다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잠들어 버린 제르민을 안아 들며 말했다.
“저도 놀랍기는 하군요. 성하께서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시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제게는 과분한 호의였으니 감사할 뿐이지요.”
제르민의 모든 질문과 관심은 에스메랄다에게 쏟아졌고, 이 자리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직접적으로 그 감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한 본래부터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능숙한 이였다.
아르페시스 역시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상당히 예민해지기에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감정을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오웬, 그는 제르민의 평상시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평소와 전혀 달랐던 조금 전의 반응을 눈치채기 쉬웠다.
오웬이 아는 제르민은 세상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이 많고, 비난과 비평에 능숙하다 못해 때때로 냉혹한 말까지 스스럼없이 꺼내는 사람이었다. 고작 다섯 살의 아이라고는 하나, 제르멘의 사고력이나 학습력은 여타 아이들과 달랐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살피는 5년간 언제나 감탄과 존경이 따랐고 결과적으로 충성심은 나날이 단단해져 갔다. 이 사람이라면 부덕의 길로 빠져든 신관을 벌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 믿었다. 물론 5년의 시간 동안 약간의 울화병이 생기긴 했으나 불치병 수준으로 심한 것은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병의 원인이 고집이 강하고, 떼를 자주 쓰며, 투정이 심한 제르민의 성격 때문이니,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면 정신적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신수… 들을 데녹에 두고 왔다고 말씀하셨지요?”
오웬이 제르민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오웬이 제르민을 만난 일부터, 신수가 태어나는 과정과 그들의 능력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고 꽤나 세세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마수를요?”
그 과정에서 줄곧 데녹에 몸을 숨기고 있던 두 사람이 에렘까지 내려온 이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예,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며 고집… 강경하셨습니다. 세 살이 되시던 해부터 노래…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기에 이번에 날을 잡아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남부에서 소형 마수를 몇 번이고 본 후 데녹으로 돌아가던 중에 신탁의 전조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부랴부랴 가장 가까운 상징물을 찾아간 곳이 황도였고.
“대신관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기에 다른 곳으로 가 볼까도 했습니다만… 혹여나 이동하는 사이 신탁이 내려올까 염려되어 황도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계속 광장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섰더니 너무 많은 시선을 샀고, 결국 제르민에게 후드를 씌워 안고 다녔다고 한다.
“신수라……. 놈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주신께서 내리신 힘이라고 여기는가?”
“본디 신학에서는 주신께 대적하는 마신을 동등한 존재라 보지만, 지금의 문제에도 같은 상황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응적인 힘, 혹은 존재라 하기에는 불확실한 것이 많지요.”
“마수와 유사점이 존재하는지요?”
“체격이나 지능에 대해서는 유사점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먼 거리에서도 녀석들만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가 추측 중입니다.”
에렘으로 출발할 당시 그의 개인 짐 중 일부를 빠트렸는데, 닷새 후 그것을 본래 머물던 곳에 남겨 두고 온 신수가 가져다주었단다. 짐을 두고 왔다고 말했을 때 제르민의 품에 새로 태어난 신수가 있었으니, 혹시나 하고 생각해 본 것이었다.
“하나 섭식을 하지 않을 경우 아사하는 마수와는 상당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오웬은 분명 신수들이 먹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통상적으로 알려진 마수의 성장과도 조금 다릅니다. 평균적인 속도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신력을 먹을 경우 그렇지 않은 녀석들보다 빠르게 자라더군요.”
신력을 ‘먹을’ 경우에는 더 빠르게 자라긴 하나, 습식 자체에서는 자유로운 생명체라니. 완전한 미지의 존재였다.
“수명에 대해서는 모호하겠군.”
티타라는 이름으로 칭해진 늑대 형태의 신수를 본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그마저도 고작 5년 전의 일이다. 낯선 생명체의 수명을 논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역시나, 오웬은 아르페시스의 말에 긍정했다.
“어떤 편견도 가지지 않은 채 보기 위해 되도록 확답을 내리지 않고자 했습니다만……. 성장에 대해서는 신력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신력을 먹지 않는다 하여 아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오웬은 고뇌가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러는 것인지 빠르게 눈치챘다.
신벌이라 불리는 신탁 때문에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던 신관들이 확연하게 줄었다. 혹여나 신수라 칭해지는 존재가 주신께서 마신에 대항하기 위해 보내 준 힘이라면, 신관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성인이 탄생시키는 신수를 자라게 해서 마수를 상대하려면 신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니까.
“성하께서 신수를 만드… 탄생시키는 데에는 제약이 없는지요?”
“몸이 덜 자랐기에 그 힘은 자주 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해보다 올해 훨씬 더 자주 사용하고 계시기는 합니다.”
“성하의 성장에 따라 개체 수가 변할 수 있다는 의미로군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수는 이미 수십만을 거뜬히 넘을 것이다. 반면 신수는 5년에 70여 기다. 마룡을 품은 알이 나타난 것이 9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기에 마수는 이미 규모를 불린 상태였다. 또한 마룡이 알을 깨고 나온 이후 마수는 번식이 가능해졌다. 제르민이 해에 몇만 마리씩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수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현실의 상황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확신할 수 없는 희망을 품고 제르민이 성장하길 기다렸다가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른 방향이면? 너무 위험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상징…….”
에스메랄다는 중얼거리며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고,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웬은 눈을 감은 채 침묵하는 아르페시스를 보고 거기에 동참해 잠시간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생각을 마친 에스메랄다는 침대에서 잠든 제르민을 돌아보았다. 복잡함을 담은 녹안과 달리, 그녀의 입술은 단호하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언급한 것은 신전에 관한 고발이 전부겠지요.”
“……예, 최근 벽보와 수정 마도구를 통해 퍼지고 있는 신관들의 악행이 백작님께서 오래도록 모은 것이라 하더군요.”
“그 외에도 제가 하는 일은 꽤나 많습니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제르민에게서 아르페시스를 향해 옮겨졌고, 그것을 본 오웬은 앓는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짐작은 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남진을 생각하고 있지요. 인간은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렘이 뚫리는 순간 대륙 전역이 마수에게 집어삼켜지겠지요. 아시다시피 마수는 인간과…….”
“타협하지 않지요.”
에스메랄다는 암울한 앞날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리는 오웬에게 말했다.
“저는 마룡을 이 땅에서 지우고, 마수의 씨를 말리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훗날의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목표, 그건 아르페시스를 비롯한 소중한 이들과 여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영토와 시간이 필요하기에 남진을 결정했다.
“……황실… 에렘의 황실에서는…….”
“그녀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이미 황관을 쓴 사람처럼 답하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오웬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신탁이 내려온 지금 성하의 움직임이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직 어리신 분께 과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으나, 나이가 상황을 선별하여 마주하는 조건이 아님을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렇지요.”
제르민의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 향후 아비체룬과의 관계가 결정되기에 그의 의사는 중요하다.
“에렘의 황실과 성하께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홀로 하는 것보다 더한 명분이 되겠지요.”
만약 함께하겠노라 결정했다면 마주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아비체룬의 일은 물론 내전에 관한 것을 일부분 오웬에게 알려 준 후 덧붙였다.
“아비체룬은 중요합니다.”
최전방 3개국 중 하나이기에 남진을 하려면 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실테르는 내전에 관한 것을 얘기하며 현왕과 후계까지 같은 뜻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문제는 아비체룬, 그들이 신관 사냥을 했다는 사실이 대륙에 알려지면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나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신관 사냥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14인, 아니 12인의 대신관 중 신력을 잃은 것이 분명하게 확인된 인원은 9명이다. 그들은 여전히 각국의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권력으로 휘두르던 신력을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 그들의 재력 또한 건재하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건 없다.
결국 제르민이 신관 사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명분이 달라진다. 에스메랄다로서는 아비체룬이 마수와 인간을 동시에 상대하도록 둘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아비체룬은 남부 전선에 전력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하면 신전은…….”
아비체룬이 신관을 사냥해 남부 전선에서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창백하게 질렸던 오웬이 물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기존에 비해 신전의 수는 6할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추정됩니다. 남은 4할 중 다수의 신전이 아직 신력을 발현하지 못한 사제들의 관리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일부는 신력을 발현한 젊은 층의 신관들이 관리 중입니다.”
신관들의 폐해를 알고 있어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이리라. 아비체룬의 왕실이 사냥한 신관 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신관들, 무고한 신관들도 분명히 있었을 테니까.
“성하께…….”
얘기가 길어질수록 혈색이 옅어졌던 오웬이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성하께 말을 전해 두겠습니다. 결정은 오롯이 그분의 몫이지요.”
오웬은 복잡한 표정을 한 상태에서도 이 일에 개입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며 말을 마쳤다. 이제 낮잠을 자고 깨어난 제르민이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에스메랄다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답은 성하께서 깨어나시면 듣겠습니다.”
“……예, 다시 한번 백작님께서 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를 전합니다.”
“저야말로,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영광이지요.”
에스메랄다가 오웬과 제르민을 두고 방을 나서자 아르페시스 역시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그녀를 뒤따랐다. 이곳에서는 제르민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우선은 아드리안에게 갈 생각이었다. 전보 마도구를 짊어지고 오기 번거로웠던 탓에, 전보를 보내지는 못하고 받아 읽을 수 있는 휴대용 마도구만 챙겨 왔다.
오찬 시간 전까지 아르페시스는 이미 그녀의 요구에 따라 오웬과 제르민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 확인했고,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어 놓았다. 마나와 성질이 너무 다른 신력을 품고 있는 이들은 그의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황도로 데려가는 것도, 영지에 숨기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 또한 호위 병력도 편성해서 그들을 어디로든 안전하게 이동시켜야겠지. 제르민의 답을 들어야 그녀가 움직일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 여기서 답을 듣고 가야 한다.
결국 귀환은 조금 미뤄질 테니 케니스에게 들렀다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드리안의 전보 마도구로 케니스 측에 방문에 대해 언질해 줄 생각이었다. 리퀘나에 있을 당시만 해도 아르페시스의 합류는 루그레디안만 알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케니스와 아드리안, 아브람 백작까지 내막을 알고 있다.
내전을 쪼개며 최소한의 설명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슬슬 부소네의 일이 터질 때가 되었으니 황태자가 움직일 터, 이 기회에 아르페시스에게 협조하지 않는 반군을 조금 쳐낼 수 있으리라. 해 보았자 수뇌부 몇이니 병력 전체의 손실은 크지 않을 테고…….
“내전… 신력… 명분…….”
에스메랄다가 바쁜 것처럼 아르페시스도 그녀와 제르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확히는, 제르민을 무릎 위에 앉힌 채 미소 짓던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최근 많은 생각을 그녀와의 혼인 쪽에 할애하고 있기에 자연적으로, 그녀의 무릎을 차지했던 제르민이 그들의 아이로 변해 버렸다. 여전히 그녀가 왜 혼인 얘기에 거부감을 표하는지도 모르고, 아이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건만, 한번 생각을 시작하니 떨쳐 낼 수 없었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더 이상 중얼거리지 않게 되었을 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이를… 좋아했던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녀가 특별히 아이를 좋아하거나 반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 교황이기 때문인가?”
그러니 어쩌면, 제르민이 아이라서가 아니라 성인이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에스메랄다는 잠시의 틈을 두고 답했다.
“아무래도 성하께서 좋아해 주시니 나도 들떴던 거겠지. 딱히 아이를 반긴 적은 없거든.”
무지한 백성들의 아이를 사랑했던 적은 있으나, 아이를 보았다 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등의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가족들이 모두 죽은 후의 어느 날부터 에스메랄다에게 아이는 두통을 유발하는 시끄러운 존재, 그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부정의 답 때문에 아르페시스가 긴장했을 때, 그녀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하지만 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품에 안아 보는 건 기대가 되네.”
에스메랄다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르페시스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다가 지금의 질문을 꺼냈는지 짐작이 되었기에 미리 답을 내어 준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그리해 주셨던 것처럼 글을 가르치고, 걸음마를 가르치고, 매일을 안고 다니며 사랑하노라 속삭여 주는 것도 해 보고 싶어.”
아르페시스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선 채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손 밖으로 드러난 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에게 아이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고,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부모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지금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녀가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기대하고 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넌 아니야?”
함께 걸음을 멈춘 에스메랄다의 물음에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싫을 리가 없지 않나.”
에스메랄다가 웃음을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고자 했으나, 아르페시스의 손길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잔뜩 긴장한 것이 눈에 보이는지라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붙잡힌 채로 기다려 주었다.
“우리의…….”
아르페시스는 몇 번이고 말을 고른 후에야 어렵게 서두를 꺼냈다.
“그대와 나의 혼례 말이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에스메랄다를 보았다.
“언제쯤…….”
말끝이 흐려지고,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글쎄?”
에스메랄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의 손을 살며시 밀어냈다.
“빨라도 내년 가을은 되어야겠지? 즉위 이후 국혼 준비를 하려면 한 계절도 빠듯해. 더욱이 내전을 봄 안에 끝내는 건 결국 모든 일이 최선의 방향으로 흘렀을 때니까 더 늦어질 수도 있고.”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먼저 걸음을 내딛는 에스메랄다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몸을 돌림으로써 가린 표정도, 앞서 나가며 모아 쥔 두 손이 떨린 것도 보지 못한 척 뒤를 따르는 수밖에.
“그렇군.”
분명 진심을 담아 미래의 아이를 기대하던 그녀가 그와의 혼례에는 일관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 한때 홀로 해 보았던 생각이 그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 * *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한 제르민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에스메랄다 양은?”
낮잠에서 깨자마자 에스메랄다에 관한 것부터 물어볼 줄이야. 제르민의 성격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대체 그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오웬은 늙으면 늙을수록 늘어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미 돌아가…….”
“뭬야? 어디로? 설마 황도로 돌아가신 게냐?”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던 제르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울 것처럼 일렁이는 금색 눈동자 앞에서 오웬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거의 신생아 시절부터 그를 돌보아 온 자신을 볼 때는 불손한… 아니, 건방진… 아니, 아니, 시큰둥한 눈을 하면서 오늘 처음 본 에스메랄다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내어 줄 것처럼 굴다니.
오웬은 묘한 배신감에 숨을 고르며 말을 덧붙였다.
“아래층으로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아하, 다행이로구나.”
그제야 표정이 활짝 펴진 제르민이 침대 위에서 뛰어내렸다.
“……어디를 가십니까?”
“에스메랄다 양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게야? 아둔하기는.”
오웬의 턱이 불거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제르민보다 10배는 더 긴 시간을 살았건만, 이놈의 교황께서는 가끔 그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예, 제가 조금 아둔하지요.”
오웬은 오늘도 울화병이 도지는 것을 느꼈으나, 언제나처럼 자기 세뇌를 통해 치료하기 시작했다. 제르민을 모시는 내내 그는 성격이 괴팍해지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해야만 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 것이라고, 자라면 모두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오웬이 문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제르민을 붙들었다.
“성하, 설명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또?”
“새로이 알게 된 것이 많지요.”
친히 제르민의 손을 붙들고 침대로 돌아온 오웬이 준비되어 있던 대야에 세숫물을 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속눈썹 사이사이에 낀 눈곱을 떼 주고, 자는 사이 흐른 침이 굳은 자국도 말끔히 닦아 주었다. 세안을 끝내고도 오웬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에스메랄다에게 들은 것이 많기에 전해야 할 것 역시도 많았다.
“이거 참…….”
모든 얘기가 끝났을 때 제르민은 허탈한 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내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이러니 어버이께서 그리도 열심히 지켜보셨겠지.”
“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오웬이 되물었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제르민은 오웬이 뭘 물어보아도 그걸 왜 모르냐고 타박하는 일이 더 많았다. 설명을 해 주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기만 했다.
‘이 때문에 주셨던 게야.’
신수를 만드는 힘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신탁이 내려올 당시 했던 말에 대해서도 설명은 없었다. 오웬은 그저 제르민이 어떤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하든 따를 뿐이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구나.”
조막만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는 모습은 어른을 흉내 내는 어린아이의 꾸밈 같았지만, 그건 제르민의 버릇일 뿐이다.
“흠… 확실히 한 번에 깔끔하게 쳐내고 가는 것이 나을 게야. 적절하게 쓸 수 있는 기회가 또 오리라는 확신도 없으니 말이다.”
오웬은 그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곁을 지켰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아비체룬의 남부에 있는 놈들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을 터이고…….”
오웬은 아드리안에게 전해 들은 것을 통해 신력을 잃은 신관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신탁이 내려온 당시 제르민은 무엇이 기준인가 고심하는 그를 보고 혀를 끌끌 찼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타박도 따라왔다. 설명은 당연히 없었기에 홀로 고민을 하던 상태에서 아드리안과 에스메랄다에게 들은 것들을 끼워 맞추면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마룡과의 전쟁, 그것이 가장 우선되는 기준이다. 악행을 자행했음에도 전쟁에 기여했다면 신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신세를 지는 것에 마음이 무겁다 하여 몸까지 무거워서는 아니 되는 법이니…….”
에스메랄다에게 얘기를 전해 들을 때부터 제르민이 무슨 선택을 할지 짐작은 했었다. 지금 그가 언급한 정리는 붉은 핏물과 함께 이행될 것이다. 다섯 살이 된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치고는 냉혹하나, 오웬은 제르민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안다. 5년은 모시는 이의 성향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열 살은 되어야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때가 온 것 같으니 어서 움직이자꾸나.”
“예, 성하.”
짧은 다리로 바쁜 걸음을 내딛는 이는 분명 어린아이였으나, 오웬이 오래도록 염원해 왔던 것을 이루어 줄 냉혹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쌓이고 쌓여 온 부정을 씻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핏물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 * *
‘기록을 보면, 저와 같은 힘을 가진 성인은 없었지요.’
‘어버이께서 제게 내리신 힘을 깨달았을 때, 저는 그릇된 종들에게 훈계하고, 저의 창조주께서 적이라 명명한 마룡의 몰락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에스메랄다는 고작 몇 시간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분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도 분명 제가 해야 하는 일이겠으나, 저는 그것까지 살필 여력이 존재할 것이라 믿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힘들겠지요.’
‘그러니 그 몫은 제가 아닌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성자로서, 교황으로서 하기에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 든든한 말이었다.
‘나머지를 다음의 일로 미루는 것이 타인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돌보고 다듬는 것은 훗날의 누군가가 짊어질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요.’
그 누군가가 모든 일을 해결한 훗날의 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죽은 후 새로이 나타날 또 다른 성인일 수도 있다.
‘지금은 지금의 문제만을 보고 가도 벅찰 겁니다.’
‘비록 아직 아는 이도 적고 힘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버이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저의 뜻은 곧 어버이의 뜻이죠.’
‘어리석은 종들은 제 뜻에 따라야만 종을 자처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반드시 그리 만들 거예요.’
제르민은 이미 교황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배웠고, 자신이 신관들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웬이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가르친 덕분이겠지.
‘교황으로서의 저는 아비체룬의 왕실에서 주도한 일에 어떤 사감도 표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없는 사이 그렇게라도 신관들에게 해야 할 일을 강제해 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할 생각도 있어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해 이미 걸어갈 준비를 마쳤던 제르민은 그 말의 끝에서 에스메랄다에게 필요했던 허락을 내어 주었다. 그 대화 직후 에스메랄다는 곧장 아드리안의 전보 마도구로 영지에 연락을 넣었다.
성인을 발견한 후 줄곧 영지에서 대기 중이던 시리스에게 들려 보낼 서신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시리스는 테노리엘의 깃발과 교황에게만 허락된 주신의 문장을 깃발로 걸어 올린 채 아비체룬으로 향할 것이다.
국경병 모두가 과거의 사냥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겠으나, 책임자 정도면 아는 것이 있으리라. 신탁에서 대리인이 언급된 지금의 시기에, 그 깃발을 보고 왕실에 전할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시리스는 테노리엘이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신탁 속에서 언급된 교황의 존재와 그의 뜻이 담긴 서신을 들고서 국경을 넘을 것이다. 아비체룬의 국경을 열게 만들어야 하기에 과거에 행해진 신관 사냥에 붙들리지 않도록 명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황의 선언을 통해 타국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들이 다가올 봄에 쿠베트령과 인접한 지대까지 내려와 주면 최상이다. 그렇게 되면 아르페시스의 내전에 동원할 수 있는 귀족들의 사병에 쿠베트의 전력이 더해진다. 빠르게 달리면 국경에서 아비체룬의 왕실까지 6일이 걸린다. 그들의 왕도가 동남쪽으로 살짝 치우쳐 있는 것이 도움이 되고 있다.
생일 연회 전에는 답이 와야 에스메랄다도 발 빠르고 확실하게 제르민의 존재를 공표할 수 있다. 바쁘게 상황을 그려 보는 와중에도 제르민과 오웬의 호위진은 그녀가 직접 챙겼다. 북부의 로부오들 중 실력이 좋은 이들을 선별하고 나니 해가 이미 저물어 있었다.
향후의 일을 이리저리 엮으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와 함께 케니스를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한 시간쯤 그의 품에 안겨 있었을까? 에스메랄다는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를 치기 위해 분주한 케니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불쑥 등장한 두 사람을 보고 잠시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이미 아르페시스의 힘에 대한 말이 여기저기 퍼졌으니 케니스 역시 그 소문을 들었을 터.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연락까지 보내 두었기에 금방 당혹감을 감추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내려 줌과 동시에, 케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케니스가 인사 올립니다.”
“……그래. 만나는 건 처음이군, 자작.”
황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아르페시스에게 예를 갖추었다는 건, 암묵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는 루그레디안과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에스메랄다의 계획을 깊게 알고 있다. 만약 오늘 만난 이가 부소네와 아르텐 측의 인사였다면, 아르페시스를 완전히 무시했을 것이다.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재 작위는 환수되었으니 그저 케니스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
에스메랄다는 초반부터 케니스를 키우고 견제책으로 다른 이들이 뜻을 합치도록 만들었다. 소수 반군의 인사들이 모여 만든 병력은 어디까지나 케니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지, 그를 꺾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래에서 케니스를 견제하는 것 이상은 못 한다. 반군의 물자 중 대다수가 케니스와 교류하는 루그레디안을 통해 유통되니까.
더욱이, 케니스와 달리 그들은 내전이 벌어지면 끼어들 실테르에 대해서도 몰랐다. 본래 실테르의 참전은 내전 발발 직후 외교부 소속이었던 루그레디안의 지원 요청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둔갑시킬 예정이었다. 그것 말고는 에스메랄다의 존재를 가리면서 실테르의 참전을 그럴싸하게 꾸밀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으니까.
후에 모든 것이 끝나면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오명을 루그레디안이 뒤집어쓰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르페시스가 그 역할을 대신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대부분의 반군들은 곧 일어날 내전이 아르페시스의 정당성을 위해 본래의 규모보다 축소된 판이라는 것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케니스가 반군의 구심점이고, 그 아래에서 다른 세력들이 그를 견제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큰 틀에서 양분화시켰으니 망정이지, 저들끼리 하게 두었으면 반군 내부의 분열은 더 심했을 터. 사라진 시간에서 반군은 크게 3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 속에서 또 저들끼리 공을 놓고 다투면서 몇 개의 파벌을 형성했었으니 안 봐도 뻔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다시 한번 사과하겠습니다, 백작님.”
이제 작위를 가졌으니 말을 높이겠다는 건가? 이런 점을 보면 케니스도 천생 귀족이긴 했다.
참석해서 좋을 것이 없어 막았으나, 그는 남부군을 지원해 온 선대 백작과 꽤 오래도록 교류를 해 온 인물이다. 지금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 직후 케니스는 아르페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습니다만, 직접 보니 신기하군요.”
“적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의 힘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에스메랄다가 단번에 끊어 냈다. 내부에서 괜한 탐색전이 오가는 것은 달갑지 않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앉으시지요, 전하.”
“그래.”
오늘은 혹여나 문제가 있는지 점검차 들른 것뿐이다. 평생을 기사로서, 군인으로서 살아온 케니스와 반군들은 그녀의 지시에 맞춰 착착 준비를 해내고 있다.
“실테르 측에선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까?”
“이러니, 저러니, 어차피 그들의 병사들이 죽는 건 마찬가지니 챙길 것이나 확실히 하자는 태도에 가까웠습니다.”
“흠… 가끔 실테르의 국왕 폐하께선 인자하신 것인지, 냉철하신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군요.”
“굳이 평가하자면 현명하신 것이지요.”
에스메랄다는 케니스와의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에도 곁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르페시스를 살폈다. 그는 낮의 대화 이후 확연하게 말수가 줄었다.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부름에도 반응이 느렸고. 깊은 생각을 반복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가끔 시선이 마주치니 그 생각이 그녀와 관련되었다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북부 중심과 서부의 북쪽 지대에 집결한 반군의 병력 배치를 확인하면서도 아르페시스에게 신경을 쏟았다. 벌써 세 번째, 그가 혼례 얘기를 꺼낼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오른 구역질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아르페시스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는 거겠지.
그와의 혼인을 바라는 것은 진심이나 그 과정에서 딸려 올 이름 때문에 거부감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해명을 할 필요도 없는, 별것 아닌 문제다. 어차피 그와 혼인을 할 것이니까.
에스메랄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을 때였다. 병력과 물자에 관한 것을 전달한 후 조용하던 케니스가 말했다.
“제가 이 번거로운 일에 동의한 이유는 아시겠지요? 5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중앙군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것 말입니다.”
실테르의 병력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불평이고, 질문이었다. 모두 아르페시스를 향한 것. 따지려면 결정을 내린 그녀에게 할 것이지, 왜 그를 건든단 말인가? 에스메랄다가 뭐라고 반박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알고 있다. 내가 제위에 오르는 순간 남부군의 지원은 자료의 논리적인 수치에 따라 측정될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평의한 어조로 케니스가 원하는 답을 돌려주었다.
“……루그레디안이 있기는 하나, 사실 저는 전하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문서로 남길 수 없는 조건이기에 아르페시스가 즉위한 이후 말을 바꿀까 걱정된다는 의미다. 이 걱정을 해소해 주지 않는다면 후에 가서 그 역시 어떻게 말을 바꿀지 모른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계획하고 있는 남…….”
“내가.”
에스메랄다가 케니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후의 계획에 대해 언급하려던 때,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는 본인의 은회색 눈동자에 그녀를 담았다. 망설임인지, 거부감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 속에 함께 담겨 있었으나 곧 사라졌다. 긴장을 할 때면 으레 그러하듯, 시선을 거둔 그가 뒷목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마수가 매해 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직 남부군 내부에 연락책이 있다는 시인이다. 몇 년도 아니고, 몇 세대 동안 남부군에서 종사한 가문이 알그레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케니스의 시인이 아니라 아르페시스가 꺼낼 다음 말 때문에 긴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남부군 지원과 그녀가 혼례에 보인 거부감이 무슨 관련이 있기에 지금 나선 것이지? 그녀가 생각을 파고들기 이전에 아르페시스가 답을 주었다.
“이후 남하하지 않으면 전선은 물론 에렘 전체가 위험하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흠…….”
남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케니스는 남부의 상황을 곱씹어 보는 듯했다.
“확실히, 계속 이런 증가 추세가 이어지면 10년, 20년 후를 장담할 수 없겠군요.”
“그러니…….”
아르페시스는 다시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치 오늘 날씨가 좋다, 같은 흔한 인사말을 꺼내는 사람처럼 평의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잔인한 말을 꺼낸다.
“즉위 후에도 나는 계속 남부군의 총사령관일 것이다. 이 정도면 답이 충분할 것 같군.”
황제가 된 이후 직접 남부군을 이끌 터이니, 현황처럼 남부군의 무력을 경계하여 목줄을 죄었다 푸는 짓은 없을 것이라고. 예산 편성은 황제의 인가가 필요한 일이고, 그 황제가 직접 남부군을 이끈다면 자금으로 기 싸움을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몸담은 군을 경계할 이유가 없으니까.
케니스가 슬그머니 꺼낸 걱정과 의심, 경고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의 효과를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에스메랄다에겐 절대 달갑지 않은 결정이었다.
물론, 즉위 이후 아르페시스가 시찰과 사기 진작, 명분 유지 등을 위해 전선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몇 번이다. 수십 년이 남은 시간 중 고작 열댓 번 정도.
에스메랄다는 단 한 번도, 그가 지금처럼 전선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말리었고, 입술을 콱 깨물어야만 했다. 그가 말을 내뱉었고, 그것을 들은 것이 반군의 가장 큰 세력을 통솔하는 케니스인 이상 무를 수 없다.
무르는 순간 내전 이후에 반군을 흡수해 커질 남부군과의 신뢰에 금이 간다. 케니스는 오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렇구나 하고 웃어넘길 인사가 아니었다.
“더없이 훌륭한 제안이군요.”
에스메랄다와 달리 케니스는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제가 된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을 이끌면, 두 번 다시 현황처럼 자금으로 군의 무력을 견제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제 정말로 지원 규모를 늘려 달라고 드잡이하지 않고 군의 일에만 신경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 그러면… 중앙에서 국정은 어찌하시려는지 궁금합니다만. 전하의 부재를 틈타 저들끼리 밥그릇 싸움에 열중할 놈들이 좀 많아야지요.”
케니스가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며 수염을 만지작거렸고, 아르페시스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후가 할 것이다.”
그의 시선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스스로가 느끼는 배신감을 감추지 못한 에스메랄다뿐이었다.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를 번갈아 보던 케니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러면 걱정할 것이 없겠군요. 제 뜻은 언제나 그렇듯, 테몬이 대변할 겁니다.”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고,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더 남았던가?”
에스메랄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의 분위기를 유심히 삼키던 케니스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짧으면 봄, 길면 여름까지는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다시 뵐 때는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길 바라 보겠습니다.”
“그리될 것이다.”
에스메랄다를 품 안으로 잡아끈 아르페시스가 짧은 말을 남기고 케니스의 천막을 떠났다.
어둠 속에 잠긴 나무와 수풀, 고르지 못한 흙바닥 위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에스메랄다가 그의 손을 쳐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나와 상의 한마디 없이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있어!”
분명 밀어냈건만,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아르페시스에게 붙잡혀 있었다.
“계속 전장에서 살겠다고? 내가 뭐 때문에 남진을 생각했는데!”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녀를 찾아와 괴롭히는 지옥의 공포를 감내하고서도, 핏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데!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그녀의 비난을 듣던 아르페시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가 나와의 혼인을 무르지 못하도록 나름의 방안을 찾은 것뿐이다.”
“하겠노라 답했잖아! 굳이 네가 전선에 가지 않아도 그를 통제할 방법은 있었어!”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앞에서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문 채 읊조렸다.
“달가워하지는 않았잖아.”
카 록트 에렘 에스메랄다, 그녀는 그 이름 앞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고,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감추지 못한 것을 적나라하게 확인했다. 이어지는 침묵은 에스메랄다가 그의 말을 긍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내게 사랑을 고해 주면서, 나와의 아이를 바란다 말하면서, 혼인 얘기만 나왔다 하면 꺼리지 않는가!”
이미 승낙을 받았음에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분명한 반응 때문에 혹여나, 그녀의 뜻이 바뀔까 봐 두려움에 떠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뜻을 바꿀 수 없을 만한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녀가 절대 떠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자고, 그러한 생각의 끝에서 나온 게 국정을 이끌어야 할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황제가 되어 중앙에 머물면 에스메랄다가 곁에서 도울 것이나, 그건 혼인이라는 방법이 없어도 가능하다. 부관, 자문관, 관직, 그 어디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혼인을 피하더라도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그보다 영민한 에스메랄다가 그 방법을 찾지 못할 리가 없으니, 혼인을 피하는 선택으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존재했다.
반면 황제가 될 그가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국정을 보살피기 위한 대리자로 나서야 하고, 그건 신하의 자리에선 할 수 없다. 그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신하로 남으면 그의 부재를 틈탄 승냥이 떼가 달려드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한다.
반면 혼인을 해 신하가 아닌 배필이 된다면 그의 빈자리를 확실하게 채울 수 있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남진을 생각했으니, 아무리 싫다 해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된다면 감내하겠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는 결국 에스메랄다에게서 혼인을 피해 가는 선택지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겠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에게 양쪽 팔뚝을 붙들린 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에스메랄다는 혼인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아르페시스는 제위 자체를 버릴 테니까. 그는 오늘도 겁먹은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에 가득한 상처와 공포를 보았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바짝 다가온 아르페시스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경고를 읊조렸다.
“그대는 나의 배필이, 나는 그대의 배필이 될 것이다.”
그건 아르페시스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목적이었고,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 대가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 에스메랄다의 경멸과 원망이라 해도, 그녀의 곁을 차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그녀가 남녀의 육체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물러날 수 있으나,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 혼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르페시스는 이 사안에 관해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그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녀와 정사를 가진 후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기괴한 웃음이 다시 그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 * *
에스메랄다의 생일 연회를 알리는 초대장은 그녀가 황도에 도착한 다음 날 많은 가문에 전달되었다. 이제 아비체룬의 답을 기다리며 생일 연회에서 모습을 드러낼 제르민과 오웬의 행보를 계산해 봐야 한다. 아비체룬에서 어떤 답이 돌아오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이동을 서두르는 중이다.
오늘 중으로 도착을 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으니 오후에는 만나 볼 수 있으리라.
「황도에 도착했어요. 아버지께서 서신을 보내야겠다고 하셔서 저도 살짝 끼워 보내요! 오늘 중으로 백작 저에 방문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 와중에 루이자에게서 서신이 왔기에 쿠베트 측에는 미리 언질을 해 주기로 했다.
「귀한 손님을 맞이해야 해서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요. 아쉽지만 연회 당일에 봤으면 해요. 그때 귀한 손님도 소개할 예정이니 기대해 줘요. 새로운 후작님의 승계도 축하드릴 겸 답신에 선물을 동봉하니 꼭 전해 주세요.」
문제의 선물이 주신의 문장을 수놓은 손수건이었으니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기밀 중의 기밀을 미리 알려 준다는 것은 테노리엘이 쿠베트에게 보내는 우호의 손길이 여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레스에게서 혼사 얘기를 전해 들은 쿠베트 후작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답을 보내왔었다. 그에 대한 기꺼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아마 내전의 일이 마무리되면 테노리엘과 쿠베트의 혼담이 정식으로 오가게 되리라.
그리고 또 신경 써야 하는 게 있다면, 당일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일 터. 단순히 정치적인 이득을 논하는 관계를 넘어 사적으로도 누구보다 밀접한 관계임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과시해야 한다.
입장을 함께할 것이고,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선 추지 않았던 춤도 함께 출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당일 연회가 열리기 전에 에스메랄다를 만나기 위해 공식적으로 백작 저에 방문하기로 얘기를 끝내 두었다. 정확히는 에스메랄다의 통보에 아르페시스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 전부였다.
케니스를 만나고 온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꽤나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매일 밤 그녀의 침실로 와 품을 내어 주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는 에스메랄다와 마주치는 상황을 피했다.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 수마에 잡혀들면 조용히 나타나 곁을 지키지만, 그녀가 깨기 전에 돌아가 버린다. 하루는 밤을 지새우며 기다려 보았지만 그녀가 잠들지 않으면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곁으로 와 주지 않는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두통이 가시지 않는 며칠을 보내야만 했다. 오늘도 뒤척이며 그를 기다려 보지만 도무지 올 생각을 않는다.
“아르페시스.”
이름을 불러 보아도 묵묵부답이다.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침대에 누워 그의 빈자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씁쓸했다. 에스메랄다는 허전한 옆자리의 온기를 홀로 채우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아르페시스.”
사실, 이렇게 불러도 아르페시스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조금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가 온다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혼인에 대한 얘기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가 에렘의 이름 때문임을 알면, 그는 기꺼이 제위를 버릴 것이다.
‘하나 지금은 반드시 가질 생각이다. 가장 완벽한 수단이니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이나, 지난날 그가 혼인과 관련된 문제에 보이는 집착을 경험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제위가 그녀와 혼인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라고 여겼기에 가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제위에 오른 그와 혼인하게 될 경우 가지게 되는 이름이 싫다. 당연히, 그가 제위와 함께 에렘의 이름을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와 혼인해도 그 역겨운 이름을 가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의 제위가 없으면 그다음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더 강한 권력을 쥔 채 다른 이들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과, 비슷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등을 떠미는 것이 같을 리 없다. 필요한 방법도, 성과를 거두기 위해 필요한 시간도 차이가 난다. 최선책이 눈앞에 빤히 있는데 차선책도 아닌 악수에 가까운 방법을 고를 수는 없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비어 있는 아르페시스의 자리를 더듬었다.
“아르페시스.”
혼인이 아니라 에렘의 이름이 싫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만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무 보고 싶다. 벌써 며칠이 넘도록 아르페시스의 얼굴을 꿈속에서만 보았다. 서로의 사이에 놓인 문제가 버거워도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시스…….”
애타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불러 보았지만 오늘도 그는 만날 수 없었다. 한숨의 끝에서 억지로 잠에 빠져들었던 에스메랄다는 화마 속에서 자신을 찾아온 아르페시스를 보며 입매를 끌어 내렸다.
사라진 시간과 달리 언제든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꿈에서밖에 만나질 못하나.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멀어지는 온기를 붙들기 위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실감과 함께 눈을 뜬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자리를 쓰다듬었다.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
그를 기만하여 상처를 준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에스메랄다는 이번에도 재고 따지느라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에스메랄다는 세안을 하고, 환복을 마쳤다.
준비를 마치자 다나가 전보 마도구를 챙겨 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수정은 새로운 소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잠잠하기만 했다.
“부소네 측은?”
“동부로 이동 중입니다. 머저리가 따라붙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조만간 동부를 가로질러 북부까지 이동한 부소네가 반군을 만난다. 그들의 뒤를 쫓고 있는 황태자의 기사들이 현장을 급습하게 될 테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체포될 가능성이 있다.
“조그리만 남작의 부대에 몇 명이나 들어가 있지?”
“부관과 기사, 행정관까지 모두 합하면 6명입니다.”
수뇌부 쪽이 잡혀 들어가면 통솔을 받던 병력은 우왕좌왕 헤매게 되겠지. 더욱이 체포된 이들이 고문이나 회유에 넘어가 주둔지의 위치를 발설할 수도 있으니 손을 써 두어야 한다.
“기습에서 탈출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 그들을 중심으로 체계를 다시 잡을 수 있게 지원해 줘야 하는데… 부소네 측과 관련된 병력이 8천… 관련 인사는 총 몇이지?”
“부소네의 봉신 가문에 속했던 기사 5인과 봉신이었던 조그리만, 알터까지 합해 7인입니다.”
“그들이 대거 잘려 나가면 곧장 알그레노 쪽에 의탁하는 게 최선책이야. 혼란이 오래가지 않도록 양측에 미리 연락을 넣어 두렴. 급하니 손을 빨리 써야 해.”
“예, 백작님.”
에스메랄다는 책상에 앉음과 동시에 미리 정리되어 있던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어 본 종이에는 중앙군의 물자 조달에 엮여 있는 상단 중 에스메랄다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 나열되어 있었다. 계약한 물자의 규모, 전달 일자, 이동 경로까지 세세하게.
남부 파병 이후 손실된 병력을 채워 넣을 때 들어간 로부오들과 붉은 하늘의 용병단이 열심히 모아 온 정보들이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그 목록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어디를, 언제, 어떻게 잘라야 중앙군에게 돌아갈 타격이 클까, 하고.
“운송로 쪽에 배치할 인원은?”
“건달들을 동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쯧, 하고 혀를 차게 만드는 말이다. 분명 세력 내부의 인원은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었는데 인력은 왜 계속 부족한 것인지.
뒷골목을 손아귀에 넣었고 로부오를 키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황제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인생이 꼬인 이들이 부족했다. 지금은 로부오들이 활동을 시작했음에도 인력이 부족한 것은 여전하다. 긴 한숨과 함께 한창 중앙군의 물자를 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던 때였다.
다나가 에스메랄다의 책상 위로 옮겨 놨던 전보 마도구가 빛을 뱉어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에스메랄다는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지금의 시기에 그녀에게 직통으로 올라올 보고가 몇 개나 되는지 짚어 보며 손을 뻗었다.
[왕실과의 만찬 성사.]
아비체룬으로 넘어간 시리스였다. 그는 이미 왕도에 도착했다. 자리가 성사되었으니 전보 마도구를 통해 에스메랄다가 협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다.
[본진에서 협상 주도 예정, 만찬 참석 시 전보 공개 및 상시 발동 요구.]
[확인, 명령 이행.]
수정에서 손을 거둔 에스메랄다가 집무실에 있는 두 사람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만찬 시간에 아비체룬과 대화가 오갈 테니 다들 이른 식사를 해 두도록.”
“예, 아가씨.”
그녀의 생일은 모레, 그 전까지 아비체룬의 답을 받아 두어야 오늘 중으로 황도에 도착할 제르민의 행보가 정해진다. 그들이 후방국에 잡힐 약점이 너무 명확하기에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 * *
말이 퍼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막기 위해 백작 저의 사용인들까지 모두 물렸다. 소식을 들고 왔던 로부오가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 드디어 정문에서 암갈색의 평범한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메랄다 양!”
백작 저의 입구 앞에 멈춰 선 마차 속에서 제르민이 뛰쳐나왔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에스메랄다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성하.”
에스메랄다가 제르민을 맞이하자 곁에 서 있던 쌍둥이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오멘이 성하께 인사 올립니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페르멘이 성하께 인사 올립니다.”
에스메랄다의 드레스 자락을 꼭 껴안은 제르민이 그들에게 축복을 전해 주었다.
“머무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머무실 곳을 준비했습니다.”
오웬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에스메랄다는 지체 없이 두 사람을 저택 내부로 안내했다.
“이동하시는 동안 불편한 것은 없으셨나요?”
오멘과 페르멘이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비켜 주자 에스메랄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척이나 편했어요. 배낭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요. 정말 감사해요.”
“편안하셨다니 저의 영광이지요.”
쭈뼛쭈뼛,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은 제르민의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허공을 둘러보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웃음을 꾹 참느라 고생했다는 건 그녀만의 비밀이리라.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왼쪽에 서서 저택 내부로 걸음을 옮기는 제르민과 오웬에게 아비체룬과의 일을 설명했다.
“왕실에서 받아들일 것이라 보시나요?”
“언제나 그렇듯 확신은 금물이나, 가능성은 높습니다. 타국의 비난 없이 국경을 개방할 만한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그들을 지지해 주어야만 가능한 기회라서 그런 것이지요?”
“그렇지요. 성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으니, 잡지 않고 내치기엔 힘들 겁니다.”
고작 다섯 살의 아이와 나누는 대화가 국제 정세를 논하는 것이라니, 에스메랄다는 아이이기 이전에 교황으로서 살고자 하는 제르민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적어도 그녀는 이상 속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반면 제르민은 그런 시절도 없이 곧장 현실을 직면했으니 마음이 쓰였다.
두 사람이 머물 3층에 도착한 에스메랄다는 곧장 제르민이 사용할 침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급하게 준비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저택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시중을 들 사용인들까지 한 명, 한 명 인사를 시키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오늘 제르민 일행이 백작 저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사용인은 정확히 5명. 테노리엘을 위해 10년 이상 일을 한 이들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직접 선별한 이들이다.
“모두 입이 무거운 아이들로 선별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인사가 끝나자 사용인들을 물린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르민을 이끌었다.
“성하.”
에스메랄다는 그를 소파에 앉힌 후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는 제르민과 눈높이를 맞추며 마주 잡은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성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면 많은 것이 변할 겁니다.”
제르민의 황금색 눈동자가 에스메랄다를 담고 있었다.
“신관들 중에는 권력에 중독된 이들이 많습니다. 신탁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었으니, 그들 모두가 성하께서 모종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고 짐작하겠지요.”
그건 곧 제르민을 표적으로 움직일 만한 인물이 많다는 의미다. 누군가는 신탁에 의해 죄를 후회하고 속죄를 논하며 그를 찾아올 터이나, 또 다른 누군가는 쉽고 빠르게 자신의 힘을, 권력을 되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근거가 없음에도 그가 신력을 되돌려 줄 것이라고 믿으며 손쓰는 이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인간의 악의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지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시간이 올 겁니다.”
모두 경험해 보았기에 안다. 에스메랄다는 제르민이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힘겹기를 바랐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누리지 못한 채 힘겨운 현실로 내몰린 그가 안쓰러워 이렇게나마 위해 본다.
“명심하고 있을게요.”
그런 에스메랄다의 걱정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지, 제르민은 단단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진짜 교황일까요?”
“보지 못한 것을 믿지 못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지. 나도 그런 인간이고.”
“……믿지도 않으시면서 왜 성에 들이신 겁니까? 굳이 만찬 자리에 부르기까지 하시고.”
“글쎄…….”
아비체룬의 왕세자, 사 베람 아비체룬 헤도크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며 말꼬리를 흐렸다. 구릿빛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이가 인상을 쓰니 꽤나 위협적이었다.
“또 그놈의 감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헤도크의 곁을 지켜 왔던 부관 사히카가 피곤한 안색으로 물었다.
“뭐, 그런 셈이지.”
헤도크는 오늘 새벽 왕성에 도착했다는 사내를 떠올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며칠 전 에렘과 접해 있는 동부 국경 지대에서 두 명의 사내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당연히 검문소에 구금되었고, 당시 아비체룬어를 사용한 이가 스스로를 통역관이라 밝혔다. 그를 통해 시리스라는 이름을 전한 또 다른 사내가 하는 말인즉, 자신이 교황과 테노리엘의 뜻을 가지고 온 사자란다.
사냥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 일이 대륙 전역에 퍼지는 것을 막고 싶다면 자신을 만나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지. 남부 전선에서 겨울을 보내던 그가 급히 왕성까지 귀환한 건 바로 그 시리스라는 사내 때문이었다.
“믿지는 않는다.”
혼잣말을 대화처럼 늘어놓기 시작한 헤도크가 복도의 끝에서 보이는 만찬장을 응시했다.
“하지만 믿고 싶기는 하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만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이 없기도 하고.”
만약, 정말 만약, 시리스라는 사내가 가지고 온 것이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존재하는 진실이라면?
스스로의 믿음을 고집하다간 진실을 놓치기도 한다. 그가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고 하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할 수는 없으니까. 헤도크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굳이 시간을 내어 왕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쉽게 만든 시간은 아니었다. 현왕의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는 중이라 국정의 대부분을 헤도크가 책임지고 있었다. 전선도 나날이 버거워지기만 해서 그가 왕성까지 온 것은 꽤나 무리를 한 셈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진위 여부와 별개로 사냥에 대해 알면서도 주신의 깃발을 올리고 왔다는 건 타협의 여지를 보여 준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교황의 존재가 거짓이라 해도,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낼 가치가 있었다. 누군가 편을 들어 준다면 국경을 열기 수월할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마수 때문에 버거운 것은 아비체룬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10년 내로는 국경을 열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사냥에 동조하지 않았던 신관들 중 대부분이 죽고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살아 있다면 죽여서 입을 막으면 될 일이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신관 사냥은 젊은 하급 신관들 중 일부가 기존의 상급 신관들에게 반발하며 왕실의 계획에 동참해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대로 된 스승이 몇 남지 않았음에도 내륙에서 사제들이 신력을 발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에 슬슬 열 준비를 해도 되겠다고 여겼는데…….
계획을 앞당길 수 있다면 한 번쯤은, 그래, 한 번쯤은 못 할 것도 없지. 꽉 닫힌 만찬장의 문 앞에 멈춰선 헤도크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흠…….”
이미 사전에 약속한 시간보다 늦었음에도 사히카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조용히 기다렸다. 감에 죽고 감에 사는 그녀의 주군은 언제나 큰일을 앞두고 저러했으니까.
“테노리엘이라…….”
한참을 침묵하던 헤도크가 대뜸 물어 왔다.
“지하 감옥에 들어 있는 놈들이 몇이나 되지?”
“죽은 이들을 제하면 40명 정도 됩니다.”
“토해 낸 건 없고?”
“여전합니다.”
“그놈들도 정말 질기구나. 대부분 연식이 어리던데…….”
헤도크는 순간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아려 오는 느낌에 말꼬리를 흐렸다. 제 손을 응시하던 그가 또 대뜸 물었다.
“그놈들을 보낸 것이 테노리엘인가?”
국경을 걸어 잠그며 생긴 가장 큰 단점은 그들도 밖을 알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국경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지속하고 있는 상단에 세작들이 들어가 소문과 정세를 물어 오긴 하지만, 그들은 행동반경이 제한되는 세작이다.
다른 세작들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수가 적어서 나라별 정세나 상황을 고루고루 알려 오지는 못했다. 고로, 현재 헤도크가 테노리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까지 잡아들인 놈들이 그들의 세작이라는 증거도 없지만, 왠지, 그래 왜인지 느낌이 좋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추측에 의지할 뿐이지만… 사히카의 대답을 들은 헤도크의 입가에 호쾌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문 너머에 있을 사내가 가져온 이름은 수년간 계속 아비체룬 안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이 모시는 자의 것이다. 그런 직감을 느꼈다.
“네 말대로 모조리 죽였으면 골치 아파질 뻔했다. 거봐라, 내 뜻대로 살려 두기를 잘했지?”
보이는 족족 다 잡아들였는데도 사냥에 대해 알아냈다는 건 빠져나간 놈들이 있다는 것이다. 꽤나, 아니 상당히 유능하지 않은가? 마음에 든다. 국경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리스라는 자가 ‘사냥’을 언급했음에도, 무엇에 대한 사냥인지는 덧붙이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헤도크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둔 이들에 대해 곱씹는 동안 사히카는 그의 말에 경악을 표했다.
“설마 돌려보낼 생각이십니까? 고신이 그리 거세었는데… 어떤 보복을 가할지 모릅니다!”
“뭐, 괜찮을 게다.”
“…….”
“꽤나 찌릿하거든.”
정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저 말이 왜 이리 믿음직한지. 참 기가 막히게도, 헤도크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면 일이 잘 풀리곤 했다.
사히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스스로의 그런 반응이 한심해서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그사이 헤도크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목숨은 살려 놨으니 우리 쪽에서도 협상의 패를 하나 쥔 셈이지 않느냐. 주인이 누구든 그리 충성스러운 놈들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게다.”
헤도크는 저릿저릿한 손으로 직접 만찬장의 문을 열었다. 암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느낌이 좋다.
* * *
에스메랄다는 최근 며칠과 달리 자신이 깨어났음에도 멀어지지 않는 온기를 꽉 붙들었다.
“그대의 탄생이 내게는 축복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떠나는 걸 조금 늦추었나 보다. 에스메랄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온기를 느끼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숫물을 위해 시녀를 부르자 시녀장이 함께 그녀의 침실을 방문했다. 시녀장의 손에는 영지에 남아 몸을 추스르고 있는 아레스의 서신과 선물이 들려 있었다.
「너의 탄생을 축하하며, 언제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선물을 보낸다. 부디,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서신에는 그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내용과 함께 최근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래, 오늘은 에스메랄다의 생일이었다.
「요즘 나는 주치의에게 시달리고 있단다. 너희가 떠나고 챙길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런지 유난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 뭐니.
그리 심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을 조금 하는 정도인데 그만두라는 잔소리가 어찌나 심한지, 매일 연무장에 나와 나를 감시 중이란다.
조금씩 체중이 붙기 시작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침대에 꽁꽁 묶어 놓았을 게다.」
포근한 이불 위에서 아레스의 서신을 읽는 내내 그녀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자리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다음 축하 자리에는 반드시 참석하겠노라 약속하마.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만 줄여야겠다.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아레스가.」
그가 보내온 산더미 같은 선물들을 모두 확인하고 답신까지 작성하니 평소 기상 시간보다 늦어졌다. 에스메랄다는 서둘러 세안과 환복을 마친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꽃다발을 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온 두 사람이 에스메랄다의 양쪽 뺨에 각기 입을 맞춰 주었다.
“생일 축하해, 리디.”
“태어나 줘서 고마워.”
“감사해요, 오라버니들.”
그녀가 마음을 닫은 시기가 겹쳐져 있었기에 시간을 거슬러 온 후 생일날 아침을 가족들과 함께 맞이하는 건 처음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겪는 일이기에 어색했으나, 기뻤다. 수줍음으로 뺨을 붉힌 에스메랄다를 본 쌍둥이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매해 받은 선물들을 열어 보지도 않고 치워 버린 것이 대부분이라 면목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족들 품에서 탄생을 축하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분명 그럼에도 마음속 한구석이 무거운 건 오후에 예정되어 있는 아르페시스와의 만남 때문이겠지.
“자, 어서 풀어 봐.”
각기 준비한 선물을 내민 쌍둥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정말, 과할 정도로 선물을 바리바리 준비해 온 쌍둥이 덕분에 상자를 풀어 보는 데만 해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장신구와 구두, 부채와 모자, 심지어 드레스까지. 그들이 준 선물에 기가 질려 무거운 마음을 잊을 정도였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머뭇거리는 손길로 자신의 앞에 놓인 선물 상자를 하나, 하나 풀어 보았다. 꼭꼭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사용해 달라 신신당부를 하는 쌍둥이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조금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자 오멘은 연회에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황성으로 출근을 했고, 그녀도 집무실로 향해야만 했다. 이틀 전 아비체룬의 왕세자와 주고받기로 한 것을 명확하게 정했기에 생일이라 하여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다. 에스메랄다는 책상에 앉자마자 그제 헤도크와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에렘의 사정은 이해했다.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하고. 확실히 국경병을 빼면 내려갈 여유가 생기지만… 내가 테노리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군.’
그들이 테노리엘과 접한 국경병을 물렸을 때, 테노리엘이 역으로 공격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다는 말이다.
‘성하께서 우리를 옹호해 줄 거라는 것 역시, 백작의 말일 뿐 증거가 없지 않나?’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증거를 보고 가라고 답해 주었다. 말 그대로, 제르민이 아비체룬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가 에렘으로 와야만 성사될 만남이다.
아비체룬의 국경을 여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 해도, 제르민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의 존재가 공표되면 이동은 신중해야 하고, 로부오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아이들만 선별해 전담 호위진을 꾸리고 있을 정도다.
제르민은 아비체룬에 있다가 온 것으로 꾸며질 테니, 다음에 움직일 곳은 실테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갈 수 없으니 헤도크가 와서 만나는 수밖에 없지 않나? 직접 올 수 없다면 대리인이라도 보내야지.
또한 이쪽에서 동맹을 위한 호의로 먼저 선물을 주겠노라는 말도 전했다. 제르민이 그들의 과거를 직접 밝히고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이 그 선물이 될 것이다. 약속했던 것을 받아 버리면 헤도크는 쿠베트의 영지까지 군사를 내려보내야 할 것이다. 구매하고자 했던 것을 받았으면 값을 치러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지만 교황의 지지가 꾸준히 이어질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이미 헤도크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올 수 있게 영지에 연락을 넣어 두었다. 그들은 테노리엘의 사용인이 되어 황도로 올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의심을 줄여 놓기 위해 데녹에 남겨 두고 왔다는 신수들도 움직이고 있다.
제르민은 북부에서 황도로 오는 동안 데녹에 남겨 둔 신수를 부른 것이다. 항시 함께 움직이는 작은 신수에게 오고 있는 것이 맞느냐 물었더니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지. 일부는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제르민이 있는 황도로 올 것이고, 또 다른 일부는 아비체룬의 국경으로 보낼 예정이다.
오늘 연회에서 제르민이 직접 신수와 동행해 움직이기도 할 터이니 소문은 빨리 퍼져 나갈 것이다. 우선은 신수의 존재부터 알리고 그들이 제르민의 뜻에 따른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
신수의 지능이 대체 어디까지인지, 그들이 어떻게 먼 거리에서도 소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에 대해 에스메랄다가 아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 적지만, 제르민은 분명 자신이 신수를 통제할 수 있노라 답했다. 그렇다면 충분히 쓸 수 있는 패이고, 그것이 확인되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수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신수는 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제르민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신탁의 시기가 정말, 절묘했다.
신탁 덕분에 제르민은 존재 자체가 악마의 파수꾼들을 벌하는 옳은 지도자가 되어 있다. 신수의 존재와 신탁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모두에게 증명하는 셈이다. 두 존재에 대한 인식이 선으로 자리를 잡으면,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인상 역시 선 쪽으로 기운다.
황태자를 궁지로 몰아넣고 아르페시스의 정당성을 채우기엔 충분하다. 아니, 차고 넘친다. 황태자가 멍청한 짓을 딱 한 번만 해 주면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만한 기반이 깔리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살려 두었을 줄이야.”
거기에 더해 헤도크는 그녀의 로부오들을 죽이지 않고 데리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헤도크의 태도는 이전까지 그녀의 이름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게 진실이라면 아비체룬 쪽의 고문에도 입을 계속 다물었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는데 충성스러운 그녀의 손발이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 의외의 소득이었다. 아비체룬에 얼굴이 공개된 그들을 아예 드러낸 장소에서 쓸지, 아니면 관련이 없는 세튀스 쪽에 추가 지원으로 보낼지 생각이 많아진다.
그녀가 인력 배치를 고심하는 사이 오전이 흘러가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과 가볍게 오찬을 챙기고 치장을 위해 침실로 돌아갔다. 연회 참석을 위한 치장은 후에 다시 할 것이고, 지금은 오로지 아르페시스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드레스의 색감은 특이했다. 상의는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이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남색에 가까워질 만큼 짙어졌다. 그리고 치맛자락의 끝에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와 청록색 그란디디어라이트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연회복이라 보기에는 가볍고, 일상복으로 보기에는 조금 화려한 그 드레스는 오늘 페르멘이 준 선물이었다. 목과 귀를 차지한 채 반짝거리는 장신구는 은으로 세공해 문스톤을 박은 것이었다. 조금 흐릿한 광석 속에서 노란색과 청색을 함께 품고 있는 그 장신구는 아레스가 준 것이었다. 장갑은 보석 없이 레이스로 만들어진 것, 구두 역시 보석 없이 하얀 가죽에 남색 자수가 들어간 것으로 골랐다. 두 가지 모두 오멘이 준 선물이었다.
본래는 기존에 가진 것을 사용하고자 했으나 아침에 두 사람에게 꼭 사용하겠노라 약속을 해서 계획을 바꾸었다. 오멘이 준 드레스는 다음에 그와 함께할 때 입을 생각이었다. 아레스가 준 옷도.
이후에는 화장을 하고, 머리의 옆 부분을 땋아 고정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가 소식을 가져왔다.
“백작님, 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르페시스는 황성에서 지내던 시절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달에 한 번씩 얼굴을 가린 채 외부인이 출입하는 문으로 나다니던 것 외에는 성내에서만 살던 사람이다. 그가 황실의 마차를 타고 황성의 정문으로 외출을 한 건 아마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리라.
황실의 문장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마차가 황도의 대로를 가로질러 백작 저에 도착했다. 그걸 본 사람의 눈과 그것을 퍼뜨릴 사람의 입은 넘쳐난다. 그녀가 하라고 지시한 일이지만 아르페시스를 볼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옮기는 걸음은 다급해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급한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계단에서,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내딛자 1층의 홀에서 페르멘과 대화 중인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라비라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전혀.”
“분명히 과하다. 어느 오라비가 누이의 그런, 그런 사정까지 신경 쓴단 말인가.”
“오라비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지! 네가 자꾸…….”
끝에 가서는 목소리를 줄이는 통에 정확히 무슨 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계속 봐 왔던 광경이라 그럴까?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내가 분명 적당히 하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들어 먹지를 않는 건 너… 뭐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어딜 보는…….”
백작 저의 홀에 서 있던 아르페시스가 인기척을 느끼고서 시선을 돌렸고, 같은 곳을 돌아본 페르멘의 목소리가 도중에 흐려졌다.
아르페시스의 작은 움직임과 함께 그가 품에 담고 온 금색의 라퓨나가 산뜻한 춤을 추었다.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리는 열망이 피어났다. 기껏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왜 다시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는 결국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그의 시선을 힐끔거렸다. 연회 두어 번을 제외하면 그의 앞에서 이렇게 치장을 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은 물론, 최근 그와의 사이가 서먹서먹한 상태라서 그런 것도 있었다.
매일 그녀를 피하던 사람이 맞기는 한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계단을 벗어나 홀에 들어서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잠시간 그녀의 앞에서 숨을 가다듬던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떨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느릿한 손길로 내민 라퓨나 다발이 그와 함께 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아르페시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가다듬었다.
“언젠가 그대가 내게 말했지.”
에스메랄다가 그를 닮은 것처럼 떨리는 손을 뻗어 라퓨나 다발을 받아 들었다. 밝은 햇빛 속에서도 반짝이는 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빛을 내는 라퓨나는 올해도 그녀에게 전해졌다.
“태어나 주어 고맙다고.”
두 손이 모두 자유로워진 아르페시스가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도 그대의 탄생에 감사한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뺨에 내려앉는 온기에 몸을 떠는 동안, 그녀의 뺨을 붉게 물들인 아르페시스가 속삭였다.
“그대의 탄생을 축하한다, 에스메랄다.”
“……고마워.”
목소리가 너무 떨리는 바람에 끝에선 얕은 헛기침으로 말을 가다듬어야 했다. 축하를 전한 후에도 아르페시스는 계속 그녀의 뺨을 지분거리며 한 걸음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건네주고 싶었다.”
“고마워…….”
“……오늘도 그대는 아름답군.”
뺨이 더한 열기로 달아오르는 느낌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고개는 계속 아래로 숙여졌다. 단지 아르페시스의 손길에 붙들려 있다시피 해서 움직임이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가시가 달린 페르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계속 그녀에게 붙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보이지도 않냐?”
에스메랄다의 뺨을 매만지던 손길이 움찔거렸다.
“흠, 흠…….”
얼굴을 붉힌 채 손을 거둔 아르페시스가 페르멘을 힐끔거렸다. 꼭 이럴 때 방해를 해야겠냐는 힐난의 시선이었다.
“넌 계속 여기 서 있어라? 난 리디랑 갈 거니까.”
“……가더라도 나와 가야 하지 왜 그대와 간단 말인가?”
아르페시스가 미간을 좁히며 따지자 페르멘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난 리디의 오라비니까.”
그에 발끈한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반박했다.
“난 에디의 연인이다.”
“헹, 난 가족이지만 넌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관계라고.”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난, 나는 그녀에게 이미 청혼했고, 승낙까지 받았다.”
“혼담이 무산되는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그럴 일은 없다는데도! 대체 왜 이리 심통을 부리나? 페드로와 아레스는 이런 식으로 그녀와 내 관계에 간섭하지 않았다. 오멘도 마찬가지고!”
“난 형들이랑 다르니까.”
오멘이 먼저 태어났으니 따지면 형제들 중에서 페르멘이 막내인 건 맞다. 그러니 오멘을 형이라 부르는 것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설레고 부끄럽고 긴장되던 분위기가 한순간 사라지자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차츰 차가워졌다.
“그리고 내가 경고했지? 우리 리디를 그런 선머슴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귓구멍이 막혔냐?!”
“그녀가 내게 허락한 이름이다! 나 또한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들이 언쟁을 나누는 모습은 무척이나 꼴불견이었다. 사실, 언쟁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그냥 유치한 신경전에 가까웠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언젠가, 그들이 부친의 서재에서 만취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응접실로 다과를 준비해 오렴.”
침실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왔던 시녀들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리디가 입고 있는 드레스 봤냐? 내가 준 선물인데 넌 뭐야, 라퓨나 한 다발? 저게 끝이야?”
“그녀의 침실에 가득한 라퓨나는 전부 내가 준 것이다. 그녀와 나만의 의미가 있는 선물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폄하하지 말라!”
“꽃다발은 나도 줬거든? 오멘도, 아레스 형도 다 보냈다고. 원래 꽃이랑 선물은 따로 쳐야 하는 거야. 저택 한 채를 해 와도 눈에 찰까, 말까인데 고작 라퓨나 한 다발이 가당키는 하냐!”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시녀들과 함께 홀을 등졌다. 뒤에서는 그녀가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왕왕거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찌나 한심한지.
* * *
아르페시스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뒷말이 나돌았기에 최소한의 시간만 자리를 지키고 떠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생일을 핑계로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아르페시스는 연회가 시작된 이후 루그레디안을 비롯한 반황실 세력과는 적당한 인사를, 선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에서 만났던 지방 귀족들과는 대화를, 황태자와 함께 온 이들과는 무시를 주고받았다.
이미 선대 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에서 테노리엘과의 관계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황위에 대한 뜻을 보인 셈이다. 평생 중앙 귀족과 거리를 두던 그가 혼인 동맹을 내세웠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그런 상황에서 계속 황도에 있다는 것 자체가 황태자에 대한 도전과 비슷했다.
이리저리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에스메랄다를 가장 자주 찾았다. 그녀는 오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연회에 걸맞게 더 화려한 치장을 한 상태였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는 하얀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되었고, 탄생과 생명을 의미하는 붉은 색상의 보석들이 소매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르페시스는 이가 악물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마주한 귀족들을 훑었다. 계산을 하느라 바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훑는 자들도 있다. 그 속에 담긴 건 분명 음심이었다.
연회장 곳곳에선 그녀를 향한 불손한 시선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연회가 더욱 싫어졌다. 지금의 상황이 아르페시스의 신경을 계속 자극했음은 당연했다. 마치 쥐가 사각거리며 속을 갉아 먹는 기분.
당장 에스메랄다에게 닿는 시선을 모조리 뽑아내고 싶다. 두 번 다시 추잡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아예 목숨 줄을 끊어 놔야 하는데.
생각과 달리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건 에스메랄다가 오늘의 행사에 많은 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보고, 홀로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가 속에 품고 사는 괴물은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스메랄다와 밤을 함께 보낸 이후에는 꽤나 잠잠했었는데, 북부에서 케니스를 만난 다음부터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화가 번거로우시다면 플로어로 나가시는 것도 생각해 보시지요.”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줄곧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아스터의 목소리였다.
“……이미 한 곡을 추었다.”
함께 입장한 후 그녀가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곧장 첫 춤을 추었다. 사실 그는 사교계와 상당히 먼 생활을 했기에 춤과는 인연이 깊지 않았다.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춰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것이 서부 대란 당시, 쿠베트성에서였으니 어련할까.
그래서 혹시나, 그녀가 만든 자리에서 트집이 잡히는 일은 없도록 며칠 동안 급하게 연습을 했다. 눈앞에 있는 아스터와 함께.
황족의 근접 시중을 드는 시녀나 시종들은 귀족의 이름을 가진 방계들이 고용되는 편이니, 황자 궁의 시녀들도 춤을 출 줄은 알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는 말이 흘러 나가 추잡한 소문이 되는 건 절대 원하지 않았고, 교사를 불러도 어떻게든 말이 나돌 것이다.
결국 말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침묵할 주변 인물 중 마땅한 사람을 찾다 보니 아스터가 걸렸다. 아스터를 제외한 그의 근위대는 전장에서 움직이며 사교계와 멀어졌다. 덕분에 이런 쪽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삐걱거리는 미소와 함께 자신과 손을 맞잡은 채 여인의 스텝을 밟았던 아스터에게 조금의 부채감을 느꼈다. 그도 시커먼 사내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게 싫었는데, 아스터라고 좋았겠나? 최근 근위대의 말을 대부분 무시했음에도 그에겐 답을 해 준 이유였다.
“때로는 플로어에 나서는 것이 다수와의 대화를 떨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먼저 청해 보시지요.”
“이미 한 번 나섰는데… 또 청해도 되나?”
아르페시스는 분명 예법에 관해서 엄한 교육을 받았지만 사교계의 예절이나 관습, 혹은 행동거지까지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사교계에 나설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배움을 대충 흘려들은 것이다. 그래서 대뜸 또 청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실력에 자신 있는 이들은 연회 내내 플로어에 나설 정도니, 많이 춘다 하여 흠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트너와 사이가 좋다는 인식을 주는 편입니다.”
“……그런가.”
아르페시스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귀족들과 대화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보다 에스메랄다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건 당연하다.
한편, 아르페시스와 다른 곳에 있던 에스메랄다는 연회라는 기회를 이용하기에 바빴다.
“아비체룬의 병력이 빠질 것 같단 말씀이십니까?”
“겨울이라 전선 쪽으로 병력을 옮기려는 것 같더군요. 왕세자 전하께서 고민하시는 것 같지만… 아마 곧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비체룬의 왕세자 말씀이십니까? 그쪽은 국경을…….”
“통행을 금하는 것과 교류를 끊어 내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조금 전부터 아비체룬에 대한 것을 귀족들에게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그곳의 왕세자와 이어지는 연락망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그들이 테노리엘과 마주한 국경 쪽 병력을 빼게 되리라는 추측도, 제르민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소한의 정보를 풀어 두려는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에스메랄다를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바빠 보이는데 물러날까, 싶다가도 그녀가 거짓으로 웃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이어 갔다. 그녀에겐 지금의 모든 것이 유흥이 아니라 일의 일환일 테니, 조금은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최근 사이가 서먹하다 해도 그의 앞에서는 억지로 웃으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르페시스는 이동하는 동안 아스터로부터 적당한 핑곗거리에 대해서 몇 가지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거리가 확연히 가까워졌을 때, 에스메랄다의 맞은편에 서 있던 귀족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이 에스메랄다와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언급했을 무렵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
그의 손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물 흐르듯 당연하게 그의 품 안으로 안겨 오는 체온이 기꺼웠으나, 향수에 가려진 체 향은 아쉽기만 했다.
“전하.”
그녀는 서먹함을 잊은 것처럼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공식 석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좋지만, 그녀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것 역시 아쉽다. 아무리 그가 허락했다 한들, 황자인 그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은 황제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피하자고 했던가. 이것도 그가 제위에 오르면 달라질 테니 조금만 참자.
아르페시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메랄다의 뺨에 입을 맞추자 그녀와 함께 있던 귀족들이 아는 체를 해 왔다.
“전하.”
“그래,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었나?”
“백작님의 얘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다행이군.”
연회의 주최자나 할 법한 말을 그가 입에 담은 건 에스메랄다가 원했기 때문이다. 약혼을 거치지 않고도 두 사람이 장래를 함께할 사이임을 강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그건 개최하는 행사에 대해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도 그녀가 주의를 준 부분에 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간 아르페시스가 잠시 눈앞의 인물들을 훑었다. 당장 그녀와 함께 있던 건 쿠베트와 라히크, 그리고 록스 측의 봉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몇몇은 아르페시스가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인원 구성을 보면 서부 영주들과 연이 있는 귀족들이겠지.
에스메랄다가 굳이 이들과 함께 있었던 건 실테르군이 동쪽에서 압박해 들어올 때, 서부 지방 귀족들의 사병이 서쪽에서 중앙을 압박하는 그림을 위해서겠지. 곧 북부에서 반군들이 들고일어날 테고, 남부는 황실에 적대적인 지방 귀족들이 한가득이다.
반황실 세력 중 대부분의 중앙 귀족이 남부에 영지를 두고 있으니 케니스 쪽이 움직이면 그들은 사병을 동원하겠지.
그렇게 되면 남부군의 일부가 비어 버린 남부의 치안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움직일 예정이다. 사병을 차출해도 마수의 위협으로부터 영지의 안전이 보장되니, 남부의 영주들이 망설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
사방위에서 완벽하게 중앙을 에워싸는 그림을 위해 에스메랄다가 들인 시간은 10년에 가깝다. 새삼 그녀의 지략과 치밀한 준비성은 물론, 길고 긴 시간을 견뎌 낸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고야 만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셈이지만 백작은 내가 잠시 데려가도록 하지.”
아스터는 플로어로 나설 것이라면 굳이 떠나는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어차피 모두가 볼 테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아스터의 조언대로 그녀를 빼내었다.
“이건 또 누구에게 배웠어?”
“……아스터.”
함께 있던 이들을 등진 아르페시스가 자신들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한 곡 더… 추겠나?”
“……좋아.”
조금의 틈이 있었지만 희미하게 시작하여 밝아지는 미소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아르페시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생각보다 잘 추네?”
“……연습했다. 어릴 때 배우기만 했지 직접 춰 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왈츠가 한창인 플로어로 나서자 에스메랄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의 못난 부분을 모두 보았음에도 탓하지 않고 받아 주는 것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그녀는 알까?
“연습? 누구랑?”
“……아스터.”
함께 스텝을 내디딘 에스메랄다가 그의 품에 얼굴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민망한 마음에 귓가를 붉혔다. 그래도 연습을 한 것이 헛되지 않은 모양이다. 볼썽사납게 그녀의 발을 밟는 등의 실수는 없었다.
사람들 틈을 오가며 밟는 왈츠의 음률을 따라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또다시 빠져들었다. 바짝 맞붙은 채 움직이는 경쾌한 발걸음과 유려한 몸짓,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과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는 체온까지.
아르페시스는 충동적으로 잡고 있던 그녀의 허리를 잡아끌며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플로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선 그들을 주시하는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둘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연회는 이미 진절머리가 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왜 그래?”
“그냥.”
아르페시스는 벌써 두어 번 만에 질려 버린 시선 속에서 에스메랄다를 품 안에 가두었다. 플로어 밖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황태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말했다.
“그대가 좋아서.”
복화술 정도는 훈련을 받았겠지. 아르페시스는 제 입술 모양을 확인하고 눈썹을 꿈틀거리는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상냥한 녹색이 가득했다. 조금 전 본 황태자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그게 뭐야.”
푸흐, 하고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아 오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에 그의 심장은 달콤한 비명을 지른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매를 내버려 둔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번쩍 안아서 다시 음률 위를 거닐었다. 그녀의 발이 깃털처럼 허공을 거니는 동안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 오라버니들이 자주 해 주셨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라 매일매일 해 달라고 졸랐거든.”
아마, 지금의 시간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에서의 추억을 말하는 거겠지. 그 속에는 페드로도 있을 테고.
“그대의 파트너는 앞으로도 줄곧 나일 테니 이제부터는 내가 하면 되겠군.”
플로어 밖에서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하던 페르멘을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슬쩍 눈매를 좁혔다. 겉은 저리 멀쩡해 보여도 속에서는 그를 잔뜩 헐뜯고 있겠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훤했다.
“페르멘이 날 잡아먹을 듯 보는군. 왜 저리 심통이 잦은지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페르멘은 유독 심해.”
분명 페르멘의 태도가 과하다고 여기고, 때때로 심기에 걸림에도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는 건 페드로가 남겨 두고 간 말 때문이다.
‘누이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리석은 오라비들의 투정으로 생각해라. 너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정하기 싫어서 버둥거리는 것이니 귀엽게 봐 주고.’
줄줄이 외고 다니는 페드로의 말은 이미 그의 삶 깊은 곳까지 뿌릴 박고 앉은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피식, 하고 웃으며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어?”
그리고 너무 가벼워 날아갈까 걱정되는 에스메랄다를 번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반사적으로 아르페시스의 어깨를 짚은 그녀의 눈매가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해도 앞으로는 내가 다 해 버릴 것이다.”
맑은 웃음소리가 시시때때로 위협을 가해 오는 현실 속에서 그를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래, 이것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다면 못 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웃음에 화답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나 한 곡은 충분히 채웠다. 아르페시스는 플로어를 벗어나며 에스메랄다에게 속삭였다.
“그대가 좋아.”
허공을 누빈 후 계속 밝게 웃던 그녀가 뺨을 붉혔다.
“너무, 좋다.”
이 절절하고 들끓는 마음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정확하게 전달될까? 시나 문학을 공부하면 더 정확한 말로 전할 수 있을까?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감정을 더 자세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고심할 때였다. 백작 저의 집사가 서둘러 다가왔다.
“정문을 지나셨습니다.”
사실은 진즉에 도착했지만 듣는 귀가 많으니 진실을 가리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또한 신호이기도 했다. 제르민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신호.
“부족한 것 없이 모셔야 한다.”
“예, 백작님.”
플로어를 벗어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귀가 쫑긋거린 것 같았다. 들은 이들은 누가 오는가 싶어 입구를 바라보았고, 듣지 못한 이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점점 시끄러워지겠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물이 저택 앞에 진을 치겠지.”
“……번거로우면 언제든 내게 와도 되는데. 황제가 날 가만히 두고 보는 덕에 황자 궁은 조용하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알그레노 쪽이 움직이면 가서 하룻밤 지새우고 올까 싶었거든.”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르페시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궁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면 음흉한 놈들의 머릿속에 또 저열한 상상을 심어 줄 텐데…….
“낮에…….”
낮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도 그가 몰래 다시 궁으로 데려오면 되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생각할 놈들은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알았어, 알았다고. 공식적으로는 낮에 잠깐 다녀가는 걸로 해.”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동안 정문을 지났다는 마차의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고, 입구에서 참석자를 소개하는 시종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늘의 연회에서 에스메랄다는 참석자 전원의 이름을 호명하는 방식을 골랐다. 대부분은 그런 에스메랄다의 선택이 참석자가 참석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니겠지. 모두가 그 숨은 뜻을 알게 되리라.
아르페시스는 입구에 서 있는 시종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곁에 서 있는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성인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고작 몇십 일 전이다. 또한 오늘의 연회를 계획할 당시만 해도 그녀는 성인을 찾지 못했다. 분명 손에 쥔 패의 숫자도, 종류도 완벽하지 않았건만 에스메랄다는 지금 이 순간을 당연하다는 듯이 만들어 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경우의 수를 과거에서부터 모두 살피며 손에 쥐는 패가 달라질 때마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또한 변경한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막연하게 대단하다고 여겼던 그녀의 진면목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정말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의 경외심을 느끼게 만든다.
“교황 성하와 오웬 신관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때 에스메랄다가 만들어 낸 퍼즐 중 하나가 그림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경악과 혼란 속에서 굳어 있는 동안, 백의를 걸친 제르민과 함께 신관복을 갖춰 입은 오웬이 손잡이가 달린 웬 바구니 하나를 든 채 연회장에 등장했다.
신관은 주신의 문양을 그들만의 규율에 따라 백의에 새기나, 교황은 옷에 그 어떠한 것도 새기지 않는다. 이미 신체에 주신의 문장을 가지고 있기에 주신의 종임을 알리기 위한 다른 증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음악마저 멈춰 버린 연회장 속에서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홀을 가로지르며 에스메랄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 양!”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에스메랄다가 부름에 답하며 무릎을 꿇자 아르페시스 역시 당연히 그녀를 따라 자세를 낮추었다. 황태자를 제외하고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그들을 따라 무릎을 굽혔다. 제르민은 지난번과 같이 그녀에게 손을 뻗어 축복을 내려 주었다. 아르페시스에게 내리는 축복이 흐린 것도 지난번과 똑같았다.
“어버이의 축복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기를.”
“이리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르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스메랄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배배 꼬았다. 그녀와 아르페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회장에 있던 다른 이들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몸을 세운 아르페시스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까다로운 성질을 다 드러내면서, 대체 왜 에스메랄다만 보았다 하면 좋아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인 양 저러는 거지?
“오웬 신관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해 주신 백작님께 감사드릴 일이지요. 축하도 전해야 할 터이고요.”
미리 모든 것을 짜고 하는 명분 몰이에 익숙하지 않은 듯, 오웬의 표정은 조금 어색했다.
“에헴, 에헴.”
다행히도 다수의 시선이 오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성인의 허벅지 언저리에서 오가는 제르민이 모든 시선을 끌어가 버렸으니까.
“오늘이 에스메랄다 양의 탄생일이라고 해서, 부족하지만 선물을 준비했어요.”
사전에 들은 적이 없는 말인데?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에스메랄다 역시 듣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인 듯 보였다. 제르민이 손을 내밀자 곁에서 그를 따라왔던 오웬이 들고 온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수줍은 듯 발끝을 바닥에 콕콕 찍은 제르민이 직접 바구니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내며 말을 이었다.
“티타와 같은 늑대예요.”
아르페시스의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털 뭉치는 네발짐승이었다. 제르민의 말대로라면 늑대겠지. 에스메랄다도 전혀 예상을 못 했던 일인지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하나 성하…….”
“한 녀석 정도는 곁을 지켜도 될 겁니다.”
지킨다는 말에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바구니 속의 하얀 털 뭉치에게 꽂혔다.
“에스메랄다 양을 지켜 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꼭 곁에 두어 주세요!”
아직 자그마한 녀석이지만 신력을 먹으면 큰다고 하지 않았나. 에스메랄다는 곧 두 사람에게 당분간 백작 저에서 머물러 달라는 말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머무는 동안 오웬이 밥을 주면 될 일이다.
얼마나 쓸 만한지 모르겠으나 집채만 한 크기까지 자란 개체도 있다 했으니……. 신수가 마수와 비슷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면 훌륭한 호위 전력이 될 것이다. 어쩐 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군. 교황에게 품기엔 꽤나 불손한 마음이었으나 아르페시스는 모처럼 흡족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신수를 곁에 둔다는 것은 영광된 일이지.”
당장 손을 뻗어 바구니를 받아 든 아르페시스가 그 속에 얌전히 앉아 있던 신수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허공으로 올라온 금색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그는 제게 덜미가 잡힌 신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거렸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귀여운 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 언짢음을 표한 건가? 아르페시스는 오웬에게서 들었던 말을 되짚었다. 지능이 상당하다고 했는데… 그 지능이라는 게 대체 어느 정도인지 모호하다.
결국 찝찝함을 떨치지 못한 그는 신수의 발치를 손으로 받쳐 준 후 조심스럽게 에스메랄다의 품에 안겨주었다. 조막만 한 신수에게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없어졌다. 그사이 대체 무슨 말이 오가나 하고 그들을 주시하던 귀족들의 틈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신수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에게서 듣지 못한 사람에게로 얘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옆구리가 쿡쿡 찔리는 느낌에 옆을 보니 에스메랄다의 팔꿈치였다. 그녀는 조금 사나운 눈으로 아르페시스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짐짓 태연한 투로 근처의 시종을 불러 비어 버린 바구니를 넘겨주었으나, 혹시나 에스메랄다가 신수를 돌려주겠다고 할까 봐 초조한 상태였다. 먹지 않아도 산다는 건 무척이나 큰 이점이고, 그런 존재가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켜서 나쁠 게 없다.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지만,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 고립, 납치 등의 상황이 온다면 섭식이 필요 없는 존재는 에스메랄다의 안전을 보장하기가 더 수월해진다. 에스메랄다의 안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아르페시스는 마음을 굳혔다. 돌려주면 안 된다.
“어차피 신수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했으니 마침 잘되지 않았나.”
에스메랄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속닥거리던 그는 자신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다가도 혀를 차는 제르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시선을 주고받은 둘은 무언의 합의를 나누었다. 에스메랄다 옆에 이 신수를 두기로.
“성하께서 마음을 써 주신 일이지 않은가. 거절하는 건 좋지 않을 듯하다.”
“맞아요! 곁에 두어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그가 에스메랄다의 품에 안겨 준 신수는 그곳이 제 자리인 양 얌전했다.
“……감사합니다, 성하. 성심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헤헤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두 사람이 밀어붙이니 에스메랄다가 물러섰다. 아르페시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여정이 힘겹지는 않으셨나요? 너무 먼 길을 오시게 해서 마음이 쓰이네요.”
미리 약속되어 있던 말을 건네자 제르민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아비체룬의 왕세자가 편의를 많이 봐주더군요.”
많은 이들이 진실이라 여기게 될 제르민의 대답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가 아비체룬 내부의 일을 알면서도 지지하기 위해선 직접 그들과 교류를 했던 과거가 필요하고, 그래야 신빙성이 더해진다며 에스메랄다가 계획한 일이다. 다행히도 제르민의 행적은 줄곧 가려져 있었다. 아비체룬이, 그것도 왕세자가 직접 손을 보태 준다면 거짓 과거를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미 헤도크와 말을 맞춰 두었다고 들었다. 그의 사람들이 황도에 도착하기 전, 에스메랄다와 제르민은 그들을 지지해 둔다. 그렇게 되면 그가 보낸 사람이 제르민을 확인하고 돌아가 쿠베트가 막아야 할 마수를 대신 맡아 주고, 그 틈을 타 쿠베트의 전력을 아르페시스의 내전에 끌어들이는 것.
에스메랄다가 길고 길게 그린 그림은 대충 그런 형태였다. 그녀가 쿠베트의 지원 요청에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내어 준 건, 황실 측이 고용할 인원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세력에 포함할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쿠베트에게 신의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아니겠지. 그 속에 들어간 수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아비체룬에 꽤나 오래 머물렀으니 당분간은 에렘에 머물까 생각 중이에요.”
“에렘에 머무신다니 반가운 일이군요. 혹여 지내…….”
“잠시 실례하지.”
따스하게 녹았던 아르페시스의 모든 것이 사납게 얼어붙었다. 제르민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다가왔던 귀족들의 틈에서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7권에 계속
주석
1) 正午. 낮의 한가운데를 이르는 말.
2) 正誤. 바르고 그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