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7화 (37/45)

제36장

정의에 가려진 이기

새벽녘에 휴고에게서 전보가 왔었다. 황제의 전서구가 도착했다고. 온갖 미사여구가 들어 있었지만 내용을 짧게 축약하면, 대형 마수 토벌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를 황도로 부른다는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힘겹게 울다가 겨우 잠든 에스메랄다를 깨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다 예견했던 일이며 향후 그의 행동까지 모두 정해진 상태였으니까. 그저 잠든 에스메랄다를 보며 그녀가 자신과 정말 다른 유형의 사람임을 실감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상황이 그녀가 설명한 대로 흘러가는 중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니 어려운 거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잠든 에스메랄다를 응시했다.

‘정치라고 거창하게 말해 봐야 별것 없어.’

당시 페드로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말을 하면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을 정도였다.

‘권력, 재력, 무력,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이득을 위해서 타인이나 상황을 이용하는 것, 그게 정치의 전부야.’

존재하는 것을 이용해 이득을 얻는 것, 당시에는 추상적인 이해가 전부였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구체적인 인지를 할 수 있었다. 페드로가 말하고, 에스메랄다가 이해시킨 정치, 그곳에서의 방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설득과 종용, 협박과 기만, 동조와 선동, 어떨 때는 사람을 넘어 상황에도 손을 뻗게 된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하고 있는 것처럼.

검을 들고 공포에 직면한 채 살기 위해 싸우는 그의 전장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참 지저분한 전쟁이라고……. 아르페시스는 정치의 내면을 이해한 후 그런 생각을 했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가 나날이 웃음을 잃고 냉소적으로 변해 갔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그는 결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자세하게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그런 안목을 키워 줄 수 있는 스승이 없었다. 에스메랄다와 오래도록 교류를 한 것은 맞지만, 교육을 받을 만큼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페드로가 그것을 바꾸었기에 배웠고,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거기에 에스메랄다가 만들어 낸 예시를 적나라하게 보니 당연히 이해가 될 수밖에. 그가 있던 전장만큼이나 비참하고 끔찍한 전장을 누비던 에스메랄다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실감한다.

“우음…….”

지긋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작 서너 시간 전에 잠들었던 그녀가 깨어났다. 아르페시스는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깨어나자마자 그를 마주한 에스메랄다 역시 해사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깨어나 마주한 그녀가 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다시 웃어 준다. 어쩌면 그가 섰던 곳보다 치열했을 전장에서 지친 에스메랄다가 그를 볼 때는 웃는다. 그녀에게 다시금 필요한 존재가 되었음을 증명받는 그 찰나의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 타인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런 상태에서 어제의 일을 떠올리니 계속, 계속 참기 힘든 충동이 일어났다. 단순한 조문객으로서 참석할 줄 알았는데 에스메랄다도, 그녀의 형제들도 그에게 혈족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건 그를 에스메랄다의 배필로서 인정했다는 말이지 않나.

작위에 관한 것도 그러하다. 그녀는 ‘당장’이라는 말로 훗날의 승계는 형제들이 해야 함을 암시했다. 그 말은 결국 훗날 작위를 넘겨야 하는 상황, 다른 이름과 계승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면, 그의 배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심장이 간질거린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벅찬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탐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초조함과 기대감, 그리고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할 생각이었다. 장례가 끝났다 해도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조금은 더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줄 반지라도 마련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저를 간택해 달라는 진정을 담아 말할 생각이었는데. 순간의 행복에 취해서, 당장의 충만함에 취해서 더는 참지 못했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자신을 포로로 만들어 사로잡는 녹안 속에서 속삭였다.

“나의 배필이 되어 주겠나?”

잠기운이 남아 몽롱한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아르페시스는 오래도록 염원해 왔던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언제나 속에 가두어 두었던 바람이 드디어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전해지는 순간, 아르페시스는 전율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의 격동을 증명하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와 정식으로 혼인하여 평생을 함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간절하게. 아르페시스의 말이 모두 끝나자 에스메랄다가 답했다.

“……응.”

희미한 답과 함께 그녀는 내면을 비춘다던 눈동자를 감추었다.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 녹안에 무엇이 담겼기에?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에스메랄다의 몸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더한 그는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어째서? 하고. 하지만 겁쟁이는 돌아올 답이 무서워 물어보지 못한다.

* * *

속에서 많은 것이 뒤엉켰음에도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묘지에 다시 들렀다. 과거보다는 운신이 자유로워질 테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떠나기 전에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갈 생각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벅찰 때마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걸림돌이 항상 함께 온다.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고해 주는 사랑은 그의 것처럼 짙고 곧아서 의심을 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청혼을 했을 때 그녀가 보인 반응은 그의 불안을 부추긴다. 마수의 마기처럼 스멀스멀 피어나 그를 타고 기어오르는 불안감.

“그냥 물어보았으면 좋을 것을… 나는 또 제자리다.”

아르페시스는 밤사이 바람에 흐트러진 안개꽃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언제쯤 이 못난 겁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씁쓸하게 웃은 그가 페드로의 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들르겠다.”

황도로 가기 전 전선에 들러 근위 기사들을 데려가야 하기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복잡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정리될까 싶어 굳이 걸어가는 것을 택했는데,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모양이다.

그는 정원 한쪽에 서 있는 나단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본성을 힐끔거리는 이가 그의 시선에 걸렸다.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연무장이나 다른 곳을 가기 위해 정원을 지나는 길이 아니다. 거기에 멈춰 서서 그냥 서성이는 것뿐이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저 충심이라고?’

황도를 떠나기 직전, 에스메랄다가 쌍둥이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그녀의 침실 주변을 계속 얼쩡거리던 그에게 경고를 했다.

‘대체 어느 신하가 주군의 침실에 관심을 둔다 하더냐?’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놈에게 분명히.

‘누가 함께 있는지 빤히 알면서.’

사색이 된 녀석에게 분명히.

‘사내놈들의 머릿속은 결국 다 똑같다지만, 분명히 경고하마.’

멱살을 붙들리고도 반항하지 못하는 놈에게 분명히.

‘나의 배필이 될 여인이다. 감히, 넘보지 말라.’

나단의 목을 당장에 잘라 내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추잡한 음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눈에 보였다면 라그나의 아들이라 해도 기꺼운 마음으로 죽였을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아끼는 인재이건 말건,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건 말건, 반드시.

그녀가 하라는 건 전부 하겠노라 마음먹었으나 외간 사내놈이 에스메랄다에게 음욕을 품고, 나아가 그것을 드러내려 한다면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 생각과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건 오로지 아르페시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녀의 배필이 될 사람은 그가 유일하니까.

사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주변에 다른 사내가 있는 상황에 꽤나 익숙한 편이었다. 그녀에겐 사내 형제가 많기도 했거니와 군부 인사들과의 관계도 돈독했기에 주변에 여인보다는 사내의 수가 많았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지금처럼 날을 세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에스메랄다를 여인으로 보며 곁을 맴돈 게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한 번쯤 에스메랄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겉으로 티 내며 그녀에게 다가간 사람은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움직이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선은 딱 거기까지였다.

“내 경고가 우스웠나?”

본성을 바라보고 있던 나단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마주한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가 에스메랄다 주변에 있는 사내들에게 날을 세우지 않은 건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녀를 대상으로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거슬리는 감정을 꺼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얼마든지 날을 세우고 경계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르페시스에게 에스메랄다는 유일했다. 다른 사내와의 시답지 않은 경쟁으로 빼앗길 생각도 없거니와, 만약 그런 기미가 보인다면 문제의 사내를 죽여서라도 사전에 경쟁 자체를 차단할 것이다. 그가 아무리 못난 사내라 해도, 분명 에스메랄다에게 부족한 사내라 해도, 절대 빼앗길 생각이 없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는 고작 그녀와 초야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에 존재조차 확실치 않던 사내를 죽이고 싶어 했다. 결국 은연중에 속에 있는 것을 흘리며 에스메랄다의 주변을 배회하는 나단은 그가 그어 둔 선을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그는 나단을 좋게 보지 않았다. 리퀘나 관저의 후원에서 에스메랄다를 다시 만났던 야심한 시각에 나단이 함께 있었으니까. 그녀가 데리고 갔든, 그가 멋대로 따라갔든, 어떻게든 에스메랄다가 동행을 윤허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거슬렸다.

더군다나 에스메랄다에게 있어 나단은 유용함을 논할 수 있는 인재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저보다 나단을 더 아끼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허황된 생각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마법을 사용한 문제로 리퀘나 성벽에서 다시 만났을 때부터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단은 그가 누군지 빤히 알면서도 굳이 에스메랄다를 언급하며 웃었다. 마치, 그녀와 친한 사이임을 드러내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구금되었을 때 철창 안에서 나단이 무얼 중얼거리는지 다 들었고, 풀려난 후 리퀘나에서 만난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웃어 주는 것도 보았다.

아르페시스는 마나로 나단을 감시할 수 있기에 이후에도 그가 혼잣말로 에스메랄다를 얼마나 많이 언급했는지,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메랄다와 함께 있는 침실을 그가 기웃거리기까지 했으니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래, 십분 양보하여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여겨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그의 앞에서 드러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나단은 그들의 대화를 들었고,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연인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이 침실을 함께 썼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속에 품은 것을 꽁꽁 감추기는커녕 계속 밖으로 흘리다니, 그건 아르페시스에게 던져진 도전장이다.

아르페시스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면서 적을 상대할 때 호전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배웠다. 결국 그는 자신을 향한 도전장을 허허실실 보고 넘길 만큼 관대한 사내가 아니었다.

“화, 황자 전하를 뵙…….”

“시선조차 주지 말라.”

고압적인 말에 나단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에게 바짝 다가가서 지난번보다 더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다.

“또 오늘과 같은 행동이 내 눈에 띈다면, 네놈은 물론 네 아비도 사지를 갈라 주마.”

적나라한 협박에 나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르페시스는 한 뼘 가까이 차이가 나는 높이에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성 쪽에서 에스메랄다의 기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그녀를 향한 욕심을 숨기지 못한 놈을 위협하는 데 집중했다.

“아시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부름이 있은 후에야 나단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성큼성큼 걸어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르페시스는 잠시 나단을 돌아보았고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대의 주변에 저놈이 있는 게 거슬려서.”

이를 악무는 나단의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전투 마법사라지? 유능한가?”

에스메랄다가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쓸모라도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르페시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단둘이 자리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알겠어.”

뜬금없다 못해 억지가 가득한 말에도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아르페시스의 편을 들었다. 지금 이 행동은 에스메랄다가 그를 먼저 위해 줄 것을 알기에 하는 유치한 과시였다.

그 과정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나, 아르페시스는 분명 에스메랄다에게 청혼했고 승낙을 받았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알려 주고, 누가 그녀의 배필이 될 것인지 분명히 못 박아 두어야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들어가지, 바람이 차갑다.”

“……그래.”

그녀는 나단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라그나의 아들일 뿐이야. 전쟁에 쓸 수 있는 마법사고.”

단순히 그런 것치고는 놈에게 허락된 그녀의 미소가 너무 다정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대에게 사욕이 있는 놈이다. 너무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에스메랄다에게 따질 수는 없으니 간청이라도 해 보아야지.

“……알았어.”

아르페시스는 성내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낚아챘다. 조찬을 위해 식당으로 향하던 귀족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더 이상은 그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언제, 어디서든 그녀의 곁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아르페시스는 간편한 평상복에 외투를 걸친 상태였다. 마치 이 성에 사는 사람처럼. 그걸 본 귀족들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예전에는 몰랐던 것이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게논 자작, 자작 부인.”

“예, 테노리엘 영주 대리.”

“간밤에 평안하셨나요?”

“영주 대리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저희는 조찬을 하러 가는 길인데, 두 분은 드셨나요?”

“예, 저희는 조금 일찍 식사를 했습니다.”

굳이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 건 다른 이들의 동태를 살피고 그들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서겠지. 이제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자작 내외를 비롯한 이들과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곁을 지켰다.

“전하께서는 언제 출발하시는지요? 내려가는 길은 비슷하니 함께 출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록스 백작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단호한 답을 내어 놓았다.

“난 따로 이동할 생각이라 동행은 힘들겠군. 미리 인사를 해 두겠다. 조심해서 가도록.”

마치 성의 주인 같은 인사의 끝에서 아르페시스는 잠시 록스 백작을 훑었다.

기억을 되찾은 후 그는 에스메랄다에게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때, 사라진 시간에서 거짓된 신탁이 그녀를 노릴 수 있었던 이유가 록스에서 유출된 정보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당장에라도 목을 잘라 내고 싶건만… 에스메랄다가 아직 록스가 쓸모 있다고 말했기에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우연한 마주침으로 시작된 대화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적당히 대꾸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올라가지.”

“다음에 뵙길 고대하겠습니다, 전하.”

“그래.”

아르페시스는 귀족들을 지나칠 때도 에스메랄다를 품에 바짝 끌어당긴 채였다. 보란 듯이 붙어 걸었으니 의도는 분명하다. 정치적 동맹을 넘어선 관계임을 암시한 것이다.

어차피 함께 있다 보면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감정은 쉽게 들킬 테고, 그렇다면 약점으로 여겨지기 전에 먼저 과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외자의 분노가 무섭다면 함부로 에스메랄다를 건들지 않을 테지. 그가 홀로 생각을 거듭해 내린 결론이었다.

“불편했나……?”

타인의 눈이 없는 직계의 거처까지 올라온 후에야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에스메랄다는 걷는 내내 그런 그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나?”

“새삼 네가 달라졌다 싶어서?”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칭찬을 받고 기분이 나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르페시스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예전에는 행동에 의도를 담을 줄 몰랐잖아. 어제 추도식에서도 꽤 잘했다며? 솔직히 조금 놀랐어.”

“당시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몰랐으니까. 이번에는… 페드로에게 많이 배웠지. 그대에게도 배우고 있고.”

아르페시스는 사라진 시간에서의 자신과 지금의 시간에서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다름의 원인이 페드로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아르페시스는 자연스럽게 에스메랄다의 침실까지 함께 들어갔다. 그녀로 품을 채우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는 건 이미 그의 버릇이 되어 버렸다. 나단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기분이 그녀의 체온과 맥박 때문에 나아졌다. 조금 전 들었던 칭찬도 한몫을 했고.

“가기 싫군.”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그의 행동에 에스메랄다가 웃었다.

“투정이야? 아니면 어리광?”

“둘 다.”

슬금슬금 그녀의 치맛자락 속으로 들어가려던 손이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려났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맞은 손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안 되나?”

“아침부터 무슨. 의복도 다 갖춰 입었잖아.”

“의복이야 벗으면 되지.”

아르페시스는 이제 드레스의 단추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풀 자신이 있었다. 조금만 더 고집을 부리면 허락해 줄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하며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을 때였다.

“안 돼, 곧 조문객들을 배웅해야 된다고.”

그녀가 다시 한번 찰싹, 하고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내전이고 뭐고, 그냥 하루 온종일 그녀와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전선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에 황도에 도착하려면 슬슬 움직여야 했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옷으로 환복하고 나니 짧은 작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르페시스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뻗어 곁으로 다가온 에스메랄다를 안았다. 잠시 서로 간의 대화가 사라진 사이 그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는 지금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남은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 많은 것을 공유하는 중이고, 서로의 계획을 숨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건 고작 한 시간 전에 나누었던 그 대화 때문이겠지.

“혼사 얘기 말인데…….”

아르페시스는 제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몸이 경직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응, 왜?”

이런 상황에서 무얼 어찌 묻는단 말인가. 에스메랄다를 꽉 껴안으며 미간을 좁혔지만 속에 담긴 것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저, 기뻐서.”

답이 나오기 전 생긴 틈에서 분명 삼킨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다.”

내일은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린다. 그 전까지 에스메랄다와 일행들을 황도로 데려가야 하니 빠듯한 일정이 될 것이다.

“응, 항상 조심하고.”

“그대도.”

에스메랄다의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그는 곧 해야 할 일을 위해 움직였다. 침실을 떠나기 직전 보았던 녹안이 그의 뇌리 깊은 곳에 남았다. 그곳에 담긴 것은 밝고 화사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짙은 것이었다.

* * *

아르페시스가 떠난 후에도 에스메랄다는 할 일이 많았다.

“앉게.”

조찬을 마친 조문객들은 모두 떠날 채비를 했기에 에스메랄다와 형제들은 오전 내내 그들을 배웅했다.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한 오찬이 끝난 후에야 여유가 생겼다. 에스메랄다가 시간이 나자마자 만난 건 라그나와 나단이었다.

이미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에게 백작의 장례식 무렵까지 결정을 내리라고 전했다. 오늘은 그 답을 듣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녀는 라그나가 응접실에 들어오는 순간 답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곧 대답이었다.

“결정은 했나?”

그럼에도 굳이 물어보는 건 확실한 의사 표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라그나가 미간을 좁혔다. 성격이 더럽다는 중얼거림 끝에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세튀스의 신분 패였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것과 나단의 것을 모두 챙기며 말을 이었다.

“남부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으니 떠날 준비하게. 마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실험체가 있어야지.”

라그나가 잔류를 결정한 순간 그의 거처는 남부로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대적으로 내전에서 자유로울 지역이기도 하고, 마수를 실험체로 구하기 가장 수월한 지역이다.

곧 아르페시스가 황도에서 마수를 사냥할 예정이기에 당장은 놈들을 내륙에 들여와 좋을 것이 없다. 황태자를 깎아내리고 아르페시스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작업인데, 그런 짓을 했다간 같이 추락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의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는 중앙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에렘에는 내륙의 마수 반입에 관한 법률이 없다. 그래서 황도에 마수를 풀어낸 이후 나올 조각을 루그레디안에게 쥐여 주기로 한 것이다. 그 일과 관련해 군사적 용도 외에 마수의 내륙 반입을 금하는 법안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

황태자가 마수 투기장에 들락거리는 것을 기록한 수정 마도구가 있으니 패는 충분할 테고, 반황실 세력이 나서 주면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의 일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라그나가 남부로 가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마수가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하기에 포획도 쉬울 것이고, 내륙에서 마수를 데리고 있다 발각되는 것보다 안전하기도 하다.

“바로 가라고?”

“자네의 준비만 끝나면. 늦게 가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에반스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 두었으니 물품을 챙겨 이동하면 된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호위들이 따라갈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자네가 궁금해하던 건 남부에 도착하면 자세히 들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지.”

라그나는 나단을 힐끔 돌아보더니 표정이 복잡해졌다. 전투 마법사인 나단은 내전을 위해 에스메랄다의 곁에 남아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말을 하는 내내 떠나는 사람이 라그나 혼자임을 언급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표정이 저런 것을 보니, 나단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지.

“여름이 되기 전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뭐? 그게 뚝딱하면 나오는 건 줄 알아?”

이어 나온 에스메랄다의 말에 라그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복잡한 생각이 날아간 것 같으니 다행일까?

“자네가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겠지.”

그녀가 어떤 식으로 성과를 요구하는지 알면서 남겠다고 결정했으면 감수해야지.

“더 할 말이 있는가?”

없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라그나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없으면 자리를 좀 비켜 주게. 나단과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쫓아내는 듯한 형국이었지만 라그나는 나단을 힐끔거리면서도 오래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라그나가 문을 열고 나서자 미리 언질을 받았던 시리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단은 시리스가 들어와 문가에 서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페시스가 단둘이 있는 것을 피해 달라고 했기에 시리스를 불러 둔 것이다. 나단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아르페시스가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틀린 모양이다.

“길게 얘기하지 않으마.”

에스메랄다는 말을 돌리는 대신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내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니?”

조금 더 완곡한 단어를 선택할 수도 있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굳이 부정적인 단어로 나단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 자리에 있는 나단이 상처를 입는 것보다, 이 자리에 없는 아르페시스가 안심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나단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그는 지금 침묵으로 긍정을 한 것이다. 아니었다면 단호하게 부정을 했어야 한다. 저절로 한숨이 흘렀다. 나단을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의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시절부터 하나둘, 가르친 것이 그녀였기 때문이리라.

정신이 자라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되었다 해도 에스메랄다에게 나단은 여전히 아이였다. 훌륭하게 잘 자란 아이,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단을 응시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눈치를 보는 모습에 속이 답답해진다.

“너를 계속 곁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리하렴.”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집무실로 돌아왔으나 답답한 마음에 잠시 손과 머리가 굳었다. 그녀는 애써 나단을 머리에서 털어 냈다. 손을 뻗은 그녀가 골라 든 것은 책상 위에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였다. 반군과 남부군의 물자 내역에 관한 서류들. 에스메랄다는 오늘 최종적인 일정을 잡을 생각이었다.

“물자…….”

남부군은 반군의 내전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그들이 아르페시스를 따르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군과는 별도로 아르페시스의 내전에만 최소한의 반응을 하는 것에서 그쳐야 한다. 여기서 신경을 써야 할 점은 남부군이 중앙의 지원이 없을 경우 완전히 무너진다는 점에 있다.

“바의 달…….”

일반적으로 가문이나 개인이 하는 후원은 달의 도중에 이루어진다. 대표적으로 테노리엘은 매달의 초순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3, 40일 전후로 하여 양도가 끝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중앙 지원은 달이 시작되기 전에 금전과 물자 양도가 이루어진다. 바의 달의 운영금과 물자는 카의 달의 80일에서 90일 내로 모두 전달되어 다음 달에 사용하는 식이다. 그러니 적어도 다음 바의 달을 버틸 물자를 받은 후에야 남부군이 움직일 수 있다.

“봄…….”

이런 물자의 전달 일정은 결국 여름이 되어 남부군의 물자가 비어 버리기 전에 아르페시스의 내전이 끝나야 함을 의미한다. 황태자가 빨리 움직여 주지 않으면 일정과 계획이 밀리게 된다. 오늘 아르페시스가 황성에 발을 들이는 것이 그 첫걸음이리라.

반군의 내전은 아르페시스의 내전보다 빨리 시작해서 도중에 소강상태에 접어들 예정이다.

“물자를 채운 후 움직이면 되겠는데…….”

애초에 내전을 길게 끌면 손해만 커진다. 상대방을 무너트린 후 다음을 위해 다듬어야 하니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에스메랄다가 생각하는 최선책에 따르면 두 개의 내전 모두 여름이 끝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한다. 전선에 어떤 타격도 주지 않으면서 제위의 주인을 바꾸려면, 아르페시스가 전면에 나선 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선 안 된다.

“카 84일…….”

오멘에게서 들은 일정에 따르면 이번 달의 경우, 85일쯤에 중앙 물자가 각각의 리퀘나에 모두 도착하게 된다. 중앙이 추가 개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물자 이동 행렬이 남부에 진입한 후여야 한다. 남부군의 후방 휴식 부대가 물자 이송에 대한 전권을 확보한 이후. 그렇다고 너무 늦으면 아르페시스의 내전과 시기가 겹칠 위험이 있다.

“다나, 일자를 잡았으니 반군 측에 연락을 하렴.”

에스메랄다가 리퀘나와 황도를 다녀오는 동안 반군의 물자 확보는 끝났기에 일자를 정하기만 하면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한 에스메랄다가 결정한 그 날, 북부와 서부에 흩어져 있는 반군이 내전을 선포하는 그 날은 카 80일이다.

아르페시스의 정당성을 위해서 내전을 쪼개기로 한 이상 참전 병력의 구성도 변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병력이 준비를 마쳤으니 먼저 시작할 이들과 나중에 시작할 이들을 구분하기만 하면 된다.

에스메랄다는 실테르의 병력과 새로이 합류할 지방 귀족들의 사병을 아르페시스의 내전 쪽에서 움직이게 만들 생각이었다. 외세의 세력을 빌려온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철광 거래에 목을 매고 있기에 통제가 가능한 위험이다.

황도에서 백작령으로 돌아오는 동안 왕실과 얘기를 끝내 두었으니, 더는 실테르 쪽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 반군, 루그레디안을 비롯한 반황실 세력, 그리고 실테르와도 거래가 모두 끝난 상태. 이제 황도에서 일어날 일만 마무리하면 된다.

[전선에 도착했다. 오찬 후에 곧장 출발할 예정이니 해가 지기 전에는 황도에 도착할 것 같다.]

마침 오전에 출발한 아르페시스에게서 전보가 왔다.

[인근에 도착하면 다시 알려 줘.]

그에게 답을 보내고 난 뒤에는 일전부터 준비를 하던 황도의 로부오들에게 소식을 전할 차례였다.

[폭파 준비 착수.]

투기장으로 연결되는 지하도를 폭파해 마수들을 지상으로 불러내어야 한다. 아르페시스와 황도를 연결해서 생각하자 그가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떠올랐다.

“황제…….”

에스메랄다는 아직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모른다. 이제껏 그녀의 손에 들어온 주요 정보들을 모두 다시 훑었는데도 모르겠다.

황제가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일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반군의 내전을 미루어야 하나? 어쩌면 반군 내부에 그녀가 모르는 황제의 세작이 있는 건가? 아니,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벌써 반군의 위치가 탄로 났어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황제가 선공을 하지 않았다는 건,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만약 알았다면 황제는 불길이 커지기 전에 껐을 것이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도록 두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무지는 위협이 되어 다가온다.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르페시스와 이 버릇을 고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당장은 황제와 관련된 문제에서 조각을 맞춰 볼 정보가 없다. 결국 지금 에스메랄다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이다.

황제에게서 생각을 거두고 황도에서 일어날 피해의 규모를 추정해 보자. 피해가 났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테노리엘의 이름에 명예를 더할 수 있다. 그건 아르페시스의 내전이 터질 때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벌이기로 한 판이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얻어야지.

신탁 때문에 신관들이 위축된 상황이니 의원들을 투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터. 사태가 일단락된 후 의원들을 고용하고, 약제를 무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피해 규모에 따라 소모될 자금도 상당한 차이를 보일 터, 추정치를 산정해 두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어디선가 피어나 그녀의 가시거리 안에 들어온 불안감을 인내했다. 그녀가 놓친 것이 무엇이든 늦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 * *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검은 연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두 발로 딛고 선 땅이 흔들릴 만큼의 커다란 폭음에 귀를 기울인 날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노을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하루의 끝과 함께 찾아왔다. 땅속에서 기어 올라온 지옥이 아비를 물어 가자 핏물은 자식을 삼켜 버렸다. 공포에 잡아먹힌 이가 곁에서 웃고 떠들던 친구를 지옥 속으로 떠밀고 도망쳤다.

아이가 넘어져 울었으나 누군가의 발에 짓밟히고 조용해졌다. 남편이 이빨에 꿰뚫려 동강 나자 부인은 그 틈을 타 달아났다. 인간들의 유흥을 위해 굶주렸던 마수들은 눈앞에 가득한 먹이들을 보며 흥분했고, 닥치는 대로 달려들어 배를 채웠다.

창검을 들고 달려왔던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고 무너졌다. 검을 치켜든 기사로부터 파란 잔상이 피어올랐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붉은 눈동자에 쫓기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외성 밖으로 퍼져 있는 시가지에서 시작된 공포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어떤 짐승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포효가 거리를 채우는 동안 흐른 건 붉은 핏물뿐이었다. 검은 핏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외성의 시가지가 시체의 핏물로 적셔지고 잔상을 남길 만큼 격하게 떨리는 검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그때, 허공에서 피어오른 푸른 물결로 인해 지옥이 검은 핏물을 토해 냈다.

황도의 외성 밖에 있는 시가지 아래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소형 마수 42기가 침묵한 순간, 외성의 남쪽 성문 앞에 나타난 사내가 죽은 마수의 사체를 발로 툭 찼다.

“왜 내륙에 마수가 있지?”

사내의 중얼거림은 혼란의 끝에서 찾아온 적막 속에서는 기묘한 울림을 담은 채 퍼져 나갔다. 인간의 시선들이 그의 손짓을 따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푸른 물결을 좇았다. 이윽고 푸른 물결이 사라져 허공이 텅 비어 버렸을 때.

“누, 누구…….”

창을 움켜쥔 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마수에게 고정되어 있던 은회색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흘렀고, 단조로운 음성이 공포에 물든 이들의 귀에 닿았다.

“치안대는 서둘러 마수의 사체를 수거해 태우도록.”

이름 모를 사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사내가 말했다.

“전하, 서둘러 입궁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몸을 돌리자 새하얀 망토 위에서 포효하는 사자가 펄럭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성문 앞에 갑자기 나타났던 이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아르페시스는 황성의 정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자신의 거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성의 입구에 나타난 아르페시스 때문에 성의 경비병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으나, 황도의 시가지에서처럼 그를 향해 누구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16세의 겨울에 떠나 22세의 겨울에 돌아온 황자 성은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가구는 물론 사람까지. 그가 없는 동안 궁의 관리를 맡은 카덴이 사용인들을 바꾸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이들이 아르페시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가 경비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카덴이 위층에서 다급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뛰어왔는지 다급한 숨을 몰아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전하.”

아르페시스는 근 6여 년, 아니 어쩌면 10여 년 만에 만난 카덴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지금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안락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끔찍한 황제와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왜 편안하단 말인가.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카덴을 쭉 훑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기억을 빼앗기던 순간까지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없다.

‘돌아오시는 그 날까지 궁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두 번 모두 카덴은 그 말과 함께 아르페시스의 뒤에 남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당시 황성까지 마수가 발을 들였었으니…….

아르페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털었다. 황자 궁을 지키다 그곳에서 죽었는지, 도망치다 마수에게 잡아먹혔는지 무슨 상관인가. 불필요한 상념이다. 어차피 카덴은 황제를 향한 증오 때문에, 혹시 모를 훗날의 기회를 위해 황성에 있는 것뿐이다.

황태자가 혼인과 동시에 거처를 옮겼으니, 그것 때문에 예전보다 편한 모양이라고. 아르페시스는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대충 이유를 붙이고 무시해 버렸다. 카덴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둔 아르페시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입에서 내뱉는 단어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부황 폐하께 내 귀환을 알려라.”

황도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모든 것을 에스메랄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의복과 말, 행동과 위치까지 모두.

황족만이 걸칠 수 있는 망토를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낸 것도, 시가지에서 마수의 사체를 소각하라 이른 것도, 황성의 정문이 아니라 그의 궁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역겨운 단어조차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른 것이다.

“휴고, 성의 경비 상태부터 확인해라. 필요하다면 새로 편성해도 좋다.”

“예, 전하.”

“데미안, 식사 이후에 만날 수 있도록 아스터를 불러와라. 나머지 인원은 휴식을 취하도록.”

“예, 전하.”

당분간 그는 황도에 있게 될 것이다. 그사이 에스메랄다가 들를 수도 있기에 궁의 안전을 확보하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근위대를 등진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10년이 넘도록 살았던 기억이 선명하기에 성의 구조에는 훤했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시녀와 시종들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침실 문을 직접 연 그가 뒤따라온 카덴에게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실로 자수가 들어간 흰색 의복을 준비해 두도록.”

“예, 전하.”

카덴이 문을 닫기 직전 대답했고, 동시에 침실 밖에서 분주하다 못해 부산스러운 기척이 쏟아졌다. 아르페시스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문가를 돌아본 후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망토를 집어 던지다시피 풀어낸 후에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에스메랄다의 생각대로라면 황제가 그를 부를 테니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이동은 아니었으나 남부에선 비가 오고 있었기에 몸이 젖었다. 씻는 게 좋으리라.

본래부터 의복 시중 외에는 타인의 손길을 거의 타지 않았던 그는 직접 목욕물을 받았다. 얼마 가지 않아 욕조에 몸을 담근 그는 물속으로 빠져들기 전 숨을 들이쉬었다. 머릿속에 익숙하지 않은 생각들이 너무 많았기에 정리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생각을 모두 엿보지 못했지만, 하나씩 쌓여 갈 때마다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에스메랄다는 지금 남쪽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의 그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의 그는 에스메랄다가 하는 모든 행동이 기반을 닦기 위해서임을 안다.

‘너를 따르는 게 정의라고 믿어야 해. 증거가 없잖아, 증거…….’

그녀의 뜻이기에 따를 생각이나 진득거리는 거부감은 존재했다. 그녀의 계획 끝에서는 아르페시스가 경멸해 마지않는 이들이 평화를 누리게 될 테니까.

에스메랄다의 뜻임을 알면서도 놈들이 평화와 행복을 누린다 생각하면 화가 들끓는다. 그녀가 그 결말을 모를 리 없는데 왜? 그들을 용서한 것인가? 당사자가 아닌 아르페시스조차 그녀에게 돌을 던졌던 백성들을 증오하는데, 그녀가 용서를 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해를 할 수 없기에 머리가 아프다. 물속에서 빠져나오며 뱉어 낸 숨을 따라 답답한 것들이 함께 빠져나갔다면 좋으련만, 아르페시스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따듯한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내려갈 생각인 건 분명한데…….”

욕조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어 보아도 속에 쌓인 건 여전하다.

‘……응.’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복잡한 와중에 억지로 꺼낸 것이 분명하던 승낙의 답까지 그를 괴롭힌다. 그렇게나마 승낙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하다가도 그녀가 경직되었던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불안해진다. 불안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면서도 자력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다.

“물어볼까…….”

그랬다가 그와의 혼인이 싫다는 답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는 여전히 에스메랄다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만다.

“내게 사랑을 고해 주면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하기에 그녀와의 혼인을 원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사랑함에도 혼인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보였다. 왜?

아르페시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지금은 승낙했지만 후에 그녀의 마음이 변해서 답이 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작 가정에 지나지 않건만 그의 심장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가질 것이라 생각조차 못 했던 때와 달리, 그는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는 분명 번거로운 일이고 눈에 띄는 이득을 내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해.’

페드로가 해 주었던 말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때 대화의 주제가 세작이었나?

‘아무런 방비 없이 세작들의 집결지가 습격이라도 당해 봐. 그들이 전멸하면 정보가 막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게 내렸던 임무는 실패하게 된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내부 정보가 유출될 위험도 존재하지.’

그녀가 싫다고 말하면 아르페시스는 절대 강요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안전장치, 집결지와 세작의 숫자, 구성 같은 걸 계속 변경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번거롭지? 그래도 있어야 해.’

하지만 에스메랄다와의 혼인은 이미 그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다. 지금을 유지하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과실.

‘가시적인 이득이 없더라도 손해를 최소화하거나 제거하는 안전장치는 필수적이야. 잊지 마라.’

그러니까,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에게 손해라 불러야 할 건……. 에스메랄다가 마음을 바꾸고 직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자의로 혼인을 해야 할 상황을 만들어 두면, 그녀의 입에서 직접 ‘하기 싫다.’라는 거부의 말이 나오는 건 막을 수 있다.

“남진…….”

아르페시스가 억지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이어 갔다. 하지만 불안감 때문에 도무지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떨쳐 내기 위해 그녀와 보냈던 열락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에게 안겨 오던 체온과 그의 움직임에 따라 내뱉던 달뜬 교성, 그를 탐하던 손길과 그에게만 허락했던 모든 것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해질 정도로 행복한데, 그 순간들을 잃게 될까 봐 더없이 무섭다.

‘당시의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이번에는 테노리엘을 노린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전선에 들렀을 때 칼라일로부터 들은 보고까지 엮이니 두통이 일었다. 페드로가 죽었던 전장에서 대형 마수는 분명하게 아르페시스를 노렸다.

이제껏 대형 마수는 군이 퇴각할 경우 추적을 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아르페시스의 동선을 따라 몇 시간이고 쫓아왔다. 그래서 본부대의 피해가 몇천이 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표물이 테노리엘로 변한 것만 제외한다면 대형 마수의 행동이 그때와 유사했다고 한다. 당시 백작이 이끌던 것은 중앙군이었고, 아레스가 이끌던 건 7할 가까이 테노리엘의 사병으로 구성된 자원병 부대였다.

백작이 죽고 아레스가 살 수 있었던 이유다. 중앙군은 백작을 살리기 위해 대형 마수의 앞길을 막지 않았고, 자원병 부대는 아레스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다.

아직 에스메랄다에게는 알리지 못했다. 중앙군이 백작을 지키는 대신 몸을 사렸다는 것도, 마수들이 그녀의 가족을 선별적으로 노렸다는 것도, 그녀에게 전하기엔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어떻게 마수들이 특정 인물을 선별하여 노렸는가에 대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그녀의 가족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결과 말이다. 전선에 가고자 하는 오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안 후였기에 더더욱 무거운 말이다.

에스메랄다로부터 페르멘을 제외한 그녀의 형제들은 내전이 시작되면 몸을 빼고 영지에서 침묵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레스와 오멘이 내전에 손을 거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했다. 에스메랄다가 하는 일을 방해할 힘과 의지가 없기에 결국 나온 선택이 침묵인 거겠지.

문제는 오멘은 내전이 끝나면 본래의 목적대로 중앙군을 데리고 전선에 갈 것이라는 점이다. 백작의 서재에서 술잔을 함께 기울일 때 그는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다. 대형 마수가 그를 집중적으로 노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에스메랄다에게 해야 하기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니 카덴과 시종들이 그가 말한 조건에 맞는 의복들을 꺼내 두었다. 침실의 광경을 본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무리 황실 내정에서 그의 치수에 맞춰 옷을 준비해 둔다고 해도 형식상 몇 벌 맞춰 두는 것이 전부일 줄 알았다. 분명 그는 몇 년이 넘도록 궁을 비운 상태였기에 입을 사람도 없건만, 흰색으로 한정한 의복이 왜 이리 많단 말인가?

“목이… 가려지는 것으로.”

한숨을 내쉰 아르페시스는 곧 의복을 추렸다. 흰색 의복에 금색 자수, 목이 가려지는 형태처럼 단정한 것으로 하되 보석은 청색과 녹색 계열만. 의복의 형태와 색상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한 에스메랄다가 황제를 만날 때를 위해 지정해 준 조건이었다.

그가 막 상의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 시종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전하, 중앙 궁의 시종장이 방문했습니다.”

중앙 궁은 황제의 거처를 의미한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이 현실이 되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부르기 위해 보내는 사람도 중요하지. 황제는 시종장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 지금 너는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위협적이기에 굳이 기 싸움을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도착하면 바로 들이도록 해.’

언제,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로 불필요한 기다림을 주지 말고 곧장 들이라고 했지.

“들여라.”

아르페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단정하다 못해 딱딱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건은?”

“혹여 여정이 곤하지 않았다면 만찬을 함께하자는 폐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정말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군. 아르페시스는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의 말대로 흘러가는 지금의 상황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알겠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다리도록.”

“예, 전하.”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아르페시스는 굳이 시간을 끌지 않았고 치장을 끝내자마자 침실을 나섰다.

시종장이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 중앙 궁에 도착하고, 황제가 기다린다는 만찬장으로 향하는 동안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함께 폐하로부터 전하를…….’

테베르가 근위대에 들어온 건 아르페시스가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더욱이 테베르는 그가 직접 선별해 곁에 둔 사람이었다. 그 오래전부터 보이는 곳은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도 그를 감시할 사람을 심어 놓았던 황제의 치밀함이 역겨웠다.

만찬장에 들어서는 순간 본 황태자의 면상 역시 그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황태자가 에스메랄다에게 했던 짓과 하려던 짓을 떠올리자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죽이고 싶다.

이 역겨운 놈들 사이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니, 아르페시스는 표정이 구겨지기 전 이를 악물었다. 왜 에스메랄다가 입 안의 살을 깨무는 버릇을 가지게 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알!”

자신을 발견하고 호방하게 웃는 황제를 보고 순간 살의가 일었다. 그의 손은 금방이라도 황제의 목을 향해 나아갈 것처럼 꿈틀거렸다. 황성에 풀어 둔 마나가 사납게 요동치는 바람에 아르페시스는 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그의 의지에 반응하는 마나가 유형화되어 물리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인내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손가락 한 번만 까딱하면 모두 죽일 수 있는데, 에스메랄다가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기에 할 수 없다. 억지로 입을 열어 예를 취할 때도 그는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부황 폐하를 뵙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황제를 부황이라 칭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조금 전 황자 궁에 도착했을 때와 지금.

단어를 선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죽음을 위해 황제에게 거둬졌음을 깨달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단 한 번도 황제를 부황이라 칭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혈연을 강조하여 황제에게는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 두고, 반대로 황태자는 자극하기를 바랐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황태자는 이제 30대를 넘겼다. 본래 그의 위로 여아가 둘이 더 있었으나, 황제는 딸들이 성년이 되자마자 베손과 랑뒤르 왕국의 귀족에게 시집보냈다. 계승권자가 많으면 세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한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철이 들기도 전에, 그가 고작 대여섯 살 때 진행된 일이었다.

황권을 더 높게, 더 단단하게 쌓아 올리던 시기였을 테니, 아마도 맞으리라. 그런 상황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전선으로 떠나기 전까지 언제나 숙이고 복종하여 이를 악물기만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감히, 그의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역시 기분이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눈앞에 있는 두 놈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게 얼마 만이냐!”

황제는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노인이었다. 황제의 나이 서른을 지나 황태자가 태어났고, 아르페시스는 황제의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가 되어서야 태어났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아르페시스는 늦둥이다. 그 때문에 20대 초반의 건장한 그의 앞에서 황제는 무척 작았고, 역겨웠고, 끔찍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끌어안으며 환영의 말을 주절거리는 황제의 목을 비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가 한 모든 행동은 에스메랄다가 하라고 했던 것들이다. 그 외에는 억지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 게 전부였다.

* * *

티 파티, 사냥 모임, 공연 관람 및 기부와 경매같이 다양한 사교 행사 중에서 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단연 연회다. 즐겼던 적은 거의 없지만 에스메랄다 역시 사라진 시간에서 상당히 많은 연회에 참석했다.

모든 것이 반짝거리며 아름답지만 그 속에 질척거리는 추악함을 담고 있는 연회, 그건 단순히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세력을 과시하고 다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동시에, 적을 탐색할 수 있는 훌륭한 명분이다.

에렘의 귀족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은 건국 기념일에 열리는 연회이고, 그다음으로 많이 모이는 자리가 바로 황족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다. 건국 기념일의 연회가 지방 귀족과 중앙 귀족의 세력 싸움이라면, 황족이 연관된 연회는 중앙 귀족들 간의 싸움이다.

오늘 에스메랄다가 페르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발을 들인 황태자의 생일 축하 연회는 그녀의 무기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전장이다.

참 우습다. 바로 어제 황도에 마수가 풀려 사상자가 생겼는데, 떡하니 연회라니. 이렇게 술과 음악, 그리고 탐욕에 취해 놀고 난 후에야 내일 국정 회의에서 죽은 이들을 들먹이며 대책을 논하겠지.

“테몬 후작님은 예정대로 참석하셨네.”

페르멘의 중얼거림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연회장 한쪽으로 향했다. 루그레디안을 비롯한 반황실 세력은 테노리엘은 물론, 반군과의 연결점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았다 해도 알 사람은 어떻게든 알고 있겠지만.

북부는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가 가득한 관계로 결국 조문객들은 서부와 남부의 지방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부의 영주 중 장례식에 온 것은 아브람 백작을 따르는 이들이 전부였다.

덕분에 오늘 연회에는 황제 측의 주요 인사들과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관직에 진출한 젊은 귀족들은 물론, 황제가 말만 했다 하면 반대부터 하고 보는 반황실 세력까지 모두 참석했다.

완벽한 자리다. 그녀는 자신이 등장하자마자 속닥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선백작의 장례식이 그제라고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오늘 황성에 나타난 그녀를 이해할 수 없겠지. 상이 끝났다고는 하나 곧장 연회에 참석한 행동도 저들의 입맛에 따라 해석하기 바쁠 테고.

그녀의 행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황제가 남부로 전서구를 보낸 일자와 아르페시스가 황도에 도착한 일자. 그 두 가지를 알고 있으면 지금 그녀의 행보를 곧장 아르페시스와 연관시킬 수 있다.

“백작님, 황성에서 뵙는 것은 무척 오랜만입니다.”

에스메랄다의 왼손 검지에 끼워진 가주의 반지를 본 중립 귀족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녀가 아직 황도에 있던 시절 백작 저를 오가며 안면을 튼 이들이 포문을 열었다.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에스메랄다는 쌍둥이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다가 루그레디안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인사를 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백작과 친분이 깊은 반황실 세력의 귀족들이 전부다. 황태자의 혼례에서는 정말 잠시 얼굴만 비춘 후 돌아갔고.

그럼에도 중립에 속한 이들이 굳이 그때 얘기를 꺼낸다는 건, 그녀와 루그레디안이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지 캐 보겠다는 수작이다. 반군에 붙어야 하나, 황제에게 붙어야 하나 결정을 못 했으니까.

말을 하자마자 의도를 들킨 이에게 먹이를 쥐여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중립 귀족들 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의 세력과는 연회 내내 드잡이를 해야 할 테니 지금은 그 외의 이들을 상대할 때다.

반황실 세력과는 따로 대화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곧 열릴 국정 회의에서 어제의 마수 사태를 잘 써먹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대부분 그녀의 부친에 대한 얘기를 입에 담았다. 관직 때문에 장례에 가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최소한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백작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착용한 코르셋 때문에 불편했음에도 에스메랄다가 여유롭게 대화를 이어 갈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에렘의 가장 높은 곳에 배필도 없이 홀로 서 있는 황제가 먼저.

“페라노스 황태자 전하, 제르아니 황태자비 전하, 그리고 아르페시스 황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황제의 것을 탐할 수 있는 황족과 배필들이 다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웃음으로 가면을 쓴 채 모여 있던 귀족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에렘에서 귀족들이 개최하는 연회는 참석자의 호명이 자율이다. 주최자가 원한다면 행하나, 원하지 않는다면 생략하기도 한다. 반면 황실의 연회에서 입장을 알리는 건 오롯이 황족뿐이고, 생략하는 경우도 없다. 귀족은 결국 황족의 아래에서 그들을 모시는 신하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으나 에스메랄다는 이미 연회장을 가로지르고 있는 황제를 좇고 있었다. 걸음걸이, 손의 위치, 표정, 시선은 물론 오늘의 의복과 연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말과 행동까지 모두.

“모두 고개를 들라.”

황제는 단상 위에서도 가장 높은 황좌에, 아르페시스와 황태자 부부는 그보다 한 층 아래에 마련된 좌석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축사에서 귀족들의 수를 추상적으로나마 언급하는 건 단순히 정말 기뻐서가 아니라, 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 때문이다.

황실은 겨울의 초입부터 오늘의 연회를 계획했고, 에렘 전역에 있는 귀족들에게 모두 초대장을 보냈다. 그것에 응답하지 않은 지방 귀족들을 언급한 것과 같다. 후에 테노리엘 백작 저에서 개최하게 될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해진다.

에스메랄다는 그날 참석함으로써 아르페시스를 지지하겠다는 확답을 준 귀족들을 확인하고, 그들이 황제에게 잡힐 수 있는 약점을 미리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가 공격을 결정했을 때 세력이 될 수 있는 패를 잃는다.

“오늘처럼 기쁜 날 짐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니, 황실의 자랑이다.”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연회 도중도 아니고, 연회의 개회사에서 아르페시스를 언급하는 건 과한데…….

어제의 마수 사태로 인해 그의 도착과 존재감은 황도 전역에 퍼졌다. 발 빠르게 소문을 물어다 나른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 덕분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순간 황도 곳곳에서 피어올랐던 푸른 물결은 백성들에게 구원이었을지 모르나 귀족들에겐 위협이다. 특히나 이제껏 아르페시스에게 죽음을 종용해 왔던 황제와 황태자에게는, 심각한 수준의 위협이겠지. 그가 언제 어디서나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다는 건, 언제 어디서나 타인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와 똑같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가진 마나의 양에 따라 스스로의 영역이 달라진다고 했다. 형태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영역은, 결국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황도에 있는 인간들을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수를 도륙한 일로 이미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황태자와 같은 선상에서 언급한다라…….

왜? 아르페시스를 옭아맬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에스메랄다의 관계를 알고 있는 황제가, 그의 목줄을 확신하지 못한 사람처럼 물러설 리 없다.

그의 약점은 당연히 에스메랄다이고,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한데 대체 왜 움직이지를 않고 아르페시스의 심기를 맞춰 주려 하지? 그가 인외자라 한들 과한데…….

싱그러운 색채의 녹안은 황제에게 닿지 않았음에도 그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만약 황제가 반군 측과 관련해 수를 쓰고 있는 것이라면 피해가 커진다. 황태자를 자극하는 중에 반군의 내전은 일찍 터져야 하기에 늦출 수가 없다. 이전에 중앙군과 반군이 충돌을 하면 더 빨리 터질지도 모르고.

이쪽의 계획은 무를 수 없으니 황제가 무얼 가렸는지, 그녀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늦기 전에 알아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황제의 태도를 보다 깊게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의 힘이 황성을 겨누지 못하도록 당분간 양보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페시스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미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아니면 아르페시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남부군을 배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나? 애초에 남부군이 전선을 비울 수 없다고 여기기에 다른 것을 경계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페시스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테노리엘과 지방 귀족들이 내전에 손을 보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니, 아니다. 전부 아니다. 황제는 분명 테노리엘이 반군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심증은 확보했고 물증이 없어서 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과 손을 잡은 것인데, 반군과 그를 분리해서 볼 리가 없다. 그 가정 위에서는 전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생각을 다시 더듬어야 했다.

“무엇이기에…….”

작은 중얼거림에 페르멘의 시선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에스메랄다는 느끼지 못했다. 에스메랄다가 머리를 바쁘게 굴리는 동안 황제의 개회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음악이 빠지면 되겠느냐?”

그 한마디에 악단이 연주를 위해 활대를 들고 악기를 잡았다.

“이제 모두 잔을 들어 오늘을 즐기도록.”

하지만 여전히 왜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관계에 침묵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과연 황제가 호방함으로 가린 간사함은 무엇일까?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음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잔을 들었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자 황태자가 제 부인의 손을 잡은 채 홀로 나섰다. 학대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꽁꽁 싸맨 꼴이라니. 에스메랄다는 황태자에게 가축처럼 얻어맞으며 살고 있을 황태자비를 잠시 훑어보았다.

그녀를 쳐다보는 이유는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부친의 뜻에 따라 희생된 제물이 아니라, 스스로가 황후의 자리를 원했기에 제 발로 황성에 걸어 들어간 것이다. 동정할 가치가 없다.

에스메랄다가 홀에서 첫 춤을 추는 두 사람을 보며 한 생각은 그들의 자녀에 관한 것이었다. 본래라면 저들의 첫째이자 장녀는 죽었어야 했건만, 아직 살아 있다. 둘째이자 장남은 두 계절이나 늦게 태어났고. 사라진 시간과 달리 두 명의 황손이 모두 살아 있기에 기회가 왔을 때 상기시켜야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이후 에스메랄다는 연회장 전체에 흩어져 있는 귀족들을 다시 살폈다. 황손의 일처럼 사라진 시간과 조금씩 달라진 것들을 확인하는 동안 첫 춤이 끝났다. 황태자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행동했으나 춤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르페시스 때문에 눈매가 움찔거렸다.

죽으라고 보냈던 전장에서 영웅이라는 칭송과 함께 돌아온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제에게 무어라 말을 전한 아르페시스는 답을 듣지도 않고 단상을 등졌다. 에스메랄다가 황태자를 주시하는 동안, 황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시선을 받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당연히 에스메랄다가 있는 곳이었다. 페르멘은 당연하다는 투로 곁에 다가온 아르페시스에게 에스메랄다의 손을 건네주었다.

속에서 아마 혼자만의 불평을 쏟아 내고 있겠지만 그도 테노리엘이다. 적 앞에서 표정을 감추는 것이 능숙하다. 정답을 예상했던 이들은 고요했고, 그렇지 못했던 이들은 곁에 있는 이들과 시선이나 속삭임을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에스메랄다는 연회장을 쭉 훑으며 그런 귀족들을 확인했다. 지금의 반응은 각 가문의 정보력이 얼마나 되는지 추상적으로나마 파악하는 수단이다.

아예 몰랐던 이들은 세력에 들일 필요가 없는 패다. 그들과 말 한마디 나누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의미다. 테노리엘 백작 저에서 열릴 연회에 초대할 인원의 명단이 방금 1차적으로 간추려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머릿속이 무척 바빴기에 몸이 무슨 일을 겪는지 잠시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아르페시스가 다른 한 손마저 뻗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귓가에 따스한 숨결이 스친 후였다.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푸흐, 하고 웃어 버렸다. 그 순간 허공에서 황태자와 시선이 잠시나마 얽혔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의식적으로 황제가 있는 방향을 힐끔거렸다. 꽤나 거리가 있음에도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생각보다 황태자의 반응이 좋다. 황제가 그의 앞에서 아르페시스를 언급한 건가? 아르페시스를 돌아본 그녀는 그 역시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에스메랄다는 손가락으로 아르페시스의 뺨을 쓸어 주며 물었다. 그는 배부른 짐승이 고롱거리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척이나.”

두 사람의 주변에 잠시 파란 잔상이 일렁거리다 사라졌다.

“조금 적응이 안 돼서 그러는데,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름의 경고라고 하면 되겠군. 그간 배운 것이 많은지라.”

애초에 숨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고 감정을 드러냈으니, 그에 따라 수반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경고, 혹은 협박이다. 에스메랄다는 새삼 페드로의 교육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깨달으며 또 웃어 버렸다.

인외자의 힘으로 인해 그의 행보에 따라붙던 제약들을 대다수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선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도, 황제에게 언질도 하지 않은 채 휴가계를 내고 전선을 이탈한 것도, 지금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달려온 것까지. 모두 그 힘 덕분에 뒤에 일어날 사건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기는 잘 썰어 줬어?”

“완벽했노라 자신할 수 있다. 도중에 같이 썰어 버리지 않도록 참는 게 제일 힘들었다.”

서로를 마주 본 채 속삭이는 두 사람을 또 다른 속삭임이 에워쌌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이제 슬슬 아르페시스를 다른 귀족들 틈으로 끌고 다녀야 하는데……. 그가 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기에 물어보았다.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안 돼, 할 일이 많아.”

그는 얕은 한숨과 함께 에스메랄다를 놔주었다.

가장 먼저 황태자에게 가야 한다. 명색이 오늘의 주인공인데 축하 인사는 해야지. 아르페시스와 함께 가는 것은 그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리라.

“가자.”

황태자부터 시작해서 황제의 세력을 전부 돌아야 한다. 황제도 빼먹을 수 없을 테니 긴 하루가 되리라.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황태자를 자극하고 황제파 귀족들을 순회한 후, 에스메랄다가 향한 곳은 황제가 있는 단상 쪽이었다. 승계는 오롯이 가문의 권한이기에 굳이 황가의 허락이 필요하지는 않으나, 한 번 정도는 찾아가 작위의 주인이 바뀌었노라 보여 줄 필요는 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반황실 세력과 관련 없는 중립 귀족들 틈에 끼워 넣었다. 그가 반군의 내전에 연관되는 그림은 좋지 않기에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속내가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것에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녀가 황제의 앞으로 찾아간 것은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후였다. 보통은 연회가 끝나기 전, 황제가 자리를 비우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찾아가는 건 고위 귀족들이고, 개회 직후에 찾아가는 건 어떻게든 얼굴도장 한번 찍어 보려는 하위 귀족들이 대부분이다.

“오, 이게 누군가.”

솔루베르 공작과 함께 있던 황제가 에스메랄다를 발견하고 입매를 말았다. 나이를 먹고 늙었음에도 그의 권력은 아직 건재했고, 그의 오만함은 강건했다.

“이만 물러가게, 나중에 따로 얘기하지.”

“예, 폐하.”

에스메랄다는 황제의 앞에서 물러나는 솔루베르 공작과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반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누가 뭐래도 솔루베르다. 그들에게 영지가 두 번이나 털렸고, 그것 때문에 자금난을 겪으며 상단까지 무너졌지. 에스메랄다가 반군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쯤 머릿속에서 그녀를 찢어 죽이는 중일 테고, 아니라면 어떻게든 캐 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중일 것이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녀는 공작에게 오래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상대하면 된다.

“그래, 영애… 아니, 이제는 백작이라 칭해야겠군.”

황제의 은회색 눈동자가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황성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군, 한 3, 4년쯤 되었나?”

“예, 영지에서 머무느라 자주 찾아뵙기 힘들었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짐이야 매일이 똑같은 것을, 안부는 짐이 아니라 백작에게 물어야지. 부친은 잘 보내 주었고?”

“예,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기에 도움을 받았지요. 폐하께서 보내 주신 추도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의한 어조, 단조로운 음성,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잔잔했다.

“허허, 태자를 위해 와 주어 짐이 더 고맙지. 영지 일이다, 부친의 일이다 바빴을 텐데.”

하지만 그 속에서 오가는 것은 서로를 향한 탐색과 과시였다.

“모두 전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알이? 밤새 어디를 다녀왔나 했더니, 자네를 데리러 간 것이었군.”

밤사이 아르페시스가 황실을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는 건, 그의 궁에 황제의 눈과 귀가 있다는 의미겠지. 굳이 도착한 날 밤에 다시 황성을 비운 행보를 통해 황도의 마수 사태가 아르페시스를 위한 무대였음을 알아차렸다고 봐도 될 것이고.

“제 형의 생일이라고 손님을 데려오고, 그 녀석도 바빴겠어.”

표면적으로, 황태자와 아르페시스는 꽤나 우애가 좋은 형제였다. 그들은 황성 복도나 연회에서 서로에게 으르렁거린 적이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해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괴롭힘이 덜하니 숙인 것이고, 황태자는 훗날에 죽어 돌아올 동생의 명예를 잘 써먹기 위해서였다.

그런 광경을 보며 살았으니 황성의 사용인들 중 황족을 지근에서 모시는 이들 외에는 대부분 그들의 사이가 좋다고 알고 있다. 중앙 귀족들이야 실상을 알지만, 권력과 거리가 먼 지방 귀족들 중에서도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꽤 되는 편이다.

리퀘나가 함락되었던 당시 황태자가 뒤로 빠진 게 그의 부상을 걱정한 아르페시스의 권유였다는 소문도 있는데, 평민들이 생각하는 건 어떻겠나?

황제와 황태자는 아르페시스의 전사가 가져올 명예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데 이제 와 헛물을 켜게 되었으니 속이 엉망일 것이다. 인외자라는 힘은 지금까지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에스메랄다는 새삼 아르페시스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황제를 응시했다.

황태자를 버려서라도 자신의 황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반군과 관련된 일에 분명 자신이 있다는 것인데…….

반군의 규모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놓친 무언가가 그만큼 대단한 것인가?

의문과 의혹이 꼬리표처럼 줄줄 이어지는 상황에서 에스메랄다는 황제를 살짝 건드렸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지 않겠습니까?”

아르페시스를 전장으로 보내 결국 인외자의 힘을 쥘 수 있게 만든 것이 황제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에스메랄다의 떠보기에 황제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실실 웃는 저 단단한 가면 아래 무엇을 감추었나.

“짐이 한 게 어디 있다고, 녀석이 잘한 게지. 어릴 때부터 무위에 재능이 있어 기대하긴 했지만, 이리 놀라울 만큼 잘해 줄 것이라고는 몰랐다네.”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렇다마다! 당연하지 않겠나?”

에스메랄다는 도무지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물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가 인외자의 힘을 가진 게 달가울 리 없건만, 황제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을 쥐고 있기에 저리도 여유롭단 말인가.

반군이 움직이는 때를 늦추어야 하나? 그때까지 찾아낼 수 있을까? 황제의 세작이 그녀가 아는 것보다 규모가 크다면……. 혹시 뒷골목에 황제의 세작들이 미리부터 심어져 있었나? 백작 저로 돌아가는 대로 한바탕 털어야겠다.

이후 아르페시스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떠보기 위한 대화가 짧게 이어졌다.

“저야 무위에 소질이 없어 그저 넋을 빼고 있는 것이 전부였지요.”

에스메랄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추상적인 대답을 만들었다. 솔루베르 공작을 빼어 내면서까지 만든 대화는 조금 더 길어질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원하는 걸 건지지 못했고, 황제 역시도 원하던 것을 양껏 취하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녀석과 많이 친한 모양이던데…….”

“서부 대란 때부터 전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아, 잠시 그 일을 깜빡했군. 그 이후에 백작의 오라비가 알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말이야.”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언급하는 황제의 앞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화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전하께서 오라버니를 좋게 봐 주신 덕분이지요.”

“한 3년 정도였던가?”

“예, 엇비슷합니다.”

“자네의 오라비 덕에 알이 란의 빈자리를 느낄 새도 없었을 게야. 그 또한 고마워해야지. 짐이 공사가 다망해 이제야 인사를 전하는군.”

감히, 허울뿐인 형제의 관계를 페드로와 아르페시스의 우애에 빗대다니. 에스메랄다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거북함을 느끼며 웃었다.

그녀는 페드로가 아르페시스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고, 아르페시스가 페드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안다. 페드로의 죽음에 자책하며 애달프게 울던 아르페시스를 보았는데, 감히 그들의 관계를 황태자 따위와 엮다니.

“전하께서 오라버니를 아껴 주신 덕이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아꼈으니 그리 오래 함께했겠지.”

황제가 계속 페드로를 언급하자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이 이유를 찾기 위해 바빠졌다.

“테노리엘 경 덕에 두 사람이 자주 만날 수 있었을 테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지.”

지금 황제가 한 말은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관계가 페드로 덕분에 이어졌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테베르에게 보고를 받았으니 분명 그들의 관계가 페드로가 끼어들기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또 모르는 척하는구나.

대체 그와 그녀의 사이를 몰랐던 척, 그녀의 행동에 속아 주었던 척하는 이유가 뭐지? 페드로를 변명 삼아 꺼내는 이유는 또 뭐고?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서 무엇에다 쓰려고?

아르페시스가 직접 뽑은 근위대 중에 그의 눈과 귀가 더 있음을 숨기려는 것일까? 그거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일인데…….

지금의 행동은 에스메랄다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 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황제는 테베르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페드로는 어디까지나 테베르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하노라 말한 것이 전부였다. 그 끝에 황제가 있을 것이라는 건 추측이었을 뿐이고.

황제는 이런 사정을 모르겠지. 테베르가 죽으면서 연락이 끊어졌을 테고, 아르페시스 주변에 사람이 더 있다 해도 페드로의 유서를 본 것은 아닐 테니까.

아르페시스가 테베르의 뒤를 정확하게 짚은 이유는 사라진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베르가 직접 시인했다던 그 기억. 그러니 테베르가 죽었음에도 페드로를 들먹거리며 관계를 유추하는 척하는 건, 아르페시스 곁에 그가 숨겨 놓은 이가 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답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것일 뿐, 그녀가 놓친 게 무엇인지 알려 주지는 못했다. 오래전부터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이유, 그 답은 여전히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아르페시스 옆에 있는 이들을 한번 훑어보는 중이기는 하지만… 큰 의미가 없는 습관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가 이미 근위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르페시스는 움직일 때 근위대를 데리고 다니지 않기 시작했다.

신탁 무렵에는 아스터를 비롯한 몇몇과 함께 움직였으나, 백작령으로 올 때는 아레스만 데려왔다. 한번 데리고 다녀 보니 불편하다나?

이번에 에스메랄다를 황도로 데려오기 위해 움직였을 때도 혼자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행동에서 근위대를 배제한 상태였다. 부러 곁에 두지 않는 이상, 근위대가 신출귀몰하게 여기저기 움직이는 그의 행동을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 한번 그의 무덤에 짐의 인사를 전해 주게.”

에스메랄다가 페드로의 묘비 앞에 서서 황제의 인사를 전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테지만, 그것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지 않겠나? 지금은 빈말이 필요한 때다.

“폐하께서 직접 해 주시는 치하보다는 못하겠으나, 잊지 않고 꼭 전하겠습니다.”

“직접이라… 마음이야 가득하지. 시간이 된다면 꼭 들러 보고 싶지만 알다시피 여의치 않겠군.”

에스메랄다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하마터면 감정을 밖으로 드러낼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 성공했다.

분명 황제는 공사가 다망하니 영지까지 방문하기는 힘들다는 의미로 한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속에 무얼 담았지? 읽지 못하고 놓쳤나?

에스메랄다는 잠시 황제의 표정과 손의 위치, 혹은 호흡 같은 것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오만하고 잔혹한 황제, 하지만 또한 영민하고 유능한 황제, 에스메랄다가 익히 아는 그 황제였다.

고작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릴 시간 동안 그녀와 황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고요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그러니 백작이 짐을 대신해 꼭 전해 주게.”

황제가 조금 전처럼 호쾌하게 웃으며 그 기묘한 분위기를 몰아냈을 때, 섬뜩한 한기가 에스메랄다를 훑고 지나갔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그 어떤 논리적인 과정 없이 그저 확실한 결과만이 존재했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공포.

대체 놓친 게 무엇이기에? 그녀가 인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무의식의 본능을 건들며 경고하고 있었다.

반군을 물려야 하나? 하지만 어떠한 확증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감정만 믿고 포기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괜한 허세일 가능성도 없지 않기에 도박 수는 안 된다.

에스메랄다가 다시 말을 꺼내기 직전의 일이었다. 맑고 고운 목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

“폐하,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계시나요?”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쯧, 에스메랄다는 큰 성과가 없는 대화를 되짚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비, 솔루베르 공작의 장녀 제르아니가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단상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자청하여 그녀의 수발을 들고자 했을 귀부인 한 명을 대동한 채로. 그 모습이 에스메랄다에겐 그저 우습기만 했다.

“황태자비 전하.”

“테노리엘 백작.”

제르아니는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예정된 인물이다. 황태자는 물론, 그와 그녀의 아이들이 아르페시스의 적이니까. 그녀가 권력을 탐하는 유형의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녀들 간의 충돌은 일어난다.

지금 제르아니의 눈에 비치는 에스메랄다는 대뜸 튀어나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협잡꾼, 정도겠지. 황제는 제르아니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제르아니를 솔루베르와의 연결점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솔루베르는 공작을 의미하는 것이니, 제르아니는 도구에 불과하다. 공작이 딸을 도구 취급하니 황제도 어화둥둥 아끼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다. 황태자비 자리에 앉혀 준 것으로 황제는 솔루베르에게 값을 치른 셈이다.

“즐거운 대화랄 것이 있을까요. 진부하고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였지요.”

에스메랄다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에서 발을 뺄 준비를 했다.

“과거의 이야기 말인가?”

수줍게 웃으며 되물어 오는 야심가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그리움에 젖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제 오라버니에 관한 얘기였답니다.”

“아, 그대의 외팔이 오라비?”

아레스가 외팔이가 된 것은 맞다. 그것은 사실이기에 단어 자체에 모욕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르아니가 저 단어를 선정한 이유는 모욕적이다. 그의 장애를 존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헐뜯기 위해서일 테니까.

네년이 명줄을 스스로 잘라먹는구나. 에스메랄다는 제 앞에서 아레스를 흉본 제르아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여기서 당장 아니라 말하며 페드로를 언급하면, 아레스가 외팔이이기에 모욕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아 넘겨 주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트집을 잡기 위해 말을 덧붙이면 본래 말해야 할 페드로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못하겠지.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은 셈이니 제르아니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갔을 때 답을 해 주지 않더라, 같은 말 흘리기를 할 수 있도록 빌미를 준다. 에스메랄다에게 익숙한 것보다 조금 더 쪼잔하고 유치한 지금의 화법은 사교계에서 여인들이 즐겨 쓰는 것이다.

“태자비 전하께서 혼동하시지 않도록 설명을 드리죠. 한쪽 팔이 없는 분은 아레스 오라버니예요. 굳이 설명을 드리자면 제 첫째 오라버니가 되시죠.”

에스메랄다는 제르아니를 슬쩍 아래에서 위로 훑으며 말했다. 그 시선 속에 한심함을 담아서.

아레스가 외팔이가 된 것은 사실이다. 폄하를 위해 그 단어를 사용했음에 천불이 일었지만, 그의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장애를 인정하고 그가 부상을 당한 전장에서 어떤 공을 세웠는지 자랑을 하는 동시에, 그를 헐뜯기 위해 외팔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제르아니를 힐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답을 꺼내기도 전에 페드로에 대한 것까지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제 둘째 오라버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지요. 음… 누군지 알고 계신가요?”

아레스를 언급하며 설명해 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설명을 해 주어야 하냐는 비아냥이 제르아니를 향했다. 에렘의 전선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아르페시스의 충신이었으며, 황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마저 바친 페드로를 모르면 병신이라는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았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너희 집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지? 하고 약을 올리는 것과 같았다.

“아, 테노리엘 페드로 경에 대한 얘기였군. 백작의 오라비가 많아 누구에 대한 것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네.”

지금 페드로의 이름을 언급한 것 자체가 그의 무용이 그만큼 유명하다는 것이며, 그의 이름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인정한 꼴이다. 답하지 않으면 무지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고, 답하자니 페드로의 공을 인정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긍부의 답에 모두 걸고넘어질 만한 함정을 파 두고 기다리는 게 중앙 사교계의 여인들이 쓰는 화법이다.

에스메랄다는 여인들이 좋아하는 그 화법으로 제르아니를 꾹꾹 밟아 주며 다짐했다. 언젠가 황태자의 목을 칠 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붕붕 흔들어 주겠노라고.

제르아니는 공훈 얘기 앞에서 테노리엘과 치고받아 봤자 얻을 게 없음을 안다. 그녀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려 할 때, 황제가 짜증이 스민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백작은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짐은 곤하니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지. 너도 태자에게 돌아가 보아라.”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끊어 버리는 황제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생각보다 빨리 제르아니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이제 가문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백작에게 많은 기대를 해 보겠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노력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는 확신만이 존재하는 오만한 말이었다. 이쪽도 네가 숨길 만한 것에 대비할 만한 능력은 된다고, 혹은 무엇을 숨겼는지 알고 있다는 허세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기대하고 있겠네. 오랜만에 황성에 온 것이니 즐겁게 놀다 가게.”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에스메랄다는 예법에 따른 형식적인 대답을 들은 황제가 웃는 것을 보았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전하.”

“그래요.”

황제의 의미 모를 미소가 섬뜩해서 머릿속엔 제르아니에게 할애해 줄 여유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단상을 등진 채 걸으며 혀를 찼다. 조금 전 보았던 황제의 태도를 한번 정리하고 싶은데, 연회장에서는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들려?”

작게 중얼거리니 단번에 그녀의 귀 주변에 언뜻, 파란 잔상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귀걸이가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정원에 갈 거야.”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고, 꿰어 내야 할 놈도 있다. 겨울이라 귀족들이 잘 찾지 않는 정원이 가장 적당하다. 그녀는 아직 황제가 개회사에서 황태자와 아르페시스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 황태자를 정원으로 꿰어 내야지. 황제보다 쉬운 상대니 캐어 낼 것이 많으리라.

아르페시스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그녀의 말을 들을 수는 있다. 정말이지 인외자의 힘은 편하다. 다시금 흔들리는 귀걸이를 느낀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연회장에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주변에 있는 이들을 모두 무시하고 따라 나오지 말라고, 자리를 비우더라도 적당히 상대하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하라는 의미였다. 아르페시스가 곁에 있으면 방해를 받을 게 빤하니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손으로 잡은 채 연회장을 벗어났다.

“거기.”

그녀는 연회장 밖에서 귀족들의 외투를 받거나 가져다주기 위해 대기 중이던 시녀를 지목했다.

“내가 궁의 지리에 밝지 않구나. 정원까지 안내를 해 주렴.”

시녀는 공손히 허리를 접으며 앞장섰다. 그녀는 에스메랄다가 직접 황성에 들여놓은 로부오였다. 황성에서 열리는 연회에 호위를 데려오는 건 황제를 의심한다는 뜻이기에 하지 않는 게 좋다.

황족이야 본래부터 근위대가 황성에 상주하기에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닐 수 있는 것이지, 귀족들은 상황이 달랐다. 호위를 데려온다는 건 사병을 황제의 집 안에 들여놓는 것이다.

고작 한둘 데리고 온다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두고 오나 데리고 오나 똑같다면 두고 오는 게 낫다. 굳이 황제의 눈길을 받으면서까지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다니지 않겠다는 아르페시스와의 약속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으니, 황성 내부에 있는 로부오를 대동한 것이다.

오늘 저 하녀를 외투 담당으로 배치하기 위해 뇌물을 써야만 했다. 특정 인물을 지정한 것은 아니나 뇌물의 흔적이 잡히면 오늘 배치된 시녀와 시종들이 모두 의심 대상에 오르겠지. 조만간 저 시녀는 다른 쪽으로 빼어 내거나, 아예 의심을 몰아주어 다른 세작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로부오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으나 오래지 않아 시선을 거두었다. 당장은 황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그의 반응은 에스메랄다가 충분히 예상했던 것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인외자의 힘에 대한 경계와 탐색을 위한 얌전한 대응은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것 같은 반응은 상정하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노리기에 그렇게 여유로웠을까? 그녀가 생각한 대로라면 황제는 조금 더 초조한 상태여야 하는데…….

“후우…….”

정원에 도착해 여기저기 구경을 하는 척 걷고 있노라니, 다시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이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깊은 한숨을 쉬는가?”

이 역겨운 목소리를 다시 상대하게 될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근위 기사나 시종조차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나온 황태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인외자의 힘을 가지게 된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을 등에 업은 채 나타났으니 손을 쓰기 위해 움직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제 예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움직이는 황태자의 행동을 보며 옅은 짜증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산책 중이었나?”

황태자가 오길 바라긴 했지만, 부부가 돌아가며 그녀의 신경 줄을 긁는 바람에 그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새삼 사라진 시간에서 자신의 성질머리가 꽤나 사나웠다는 것을 상기하며 황태자를 마주했다.

“예, 연회가 익숙하지 않은지라 잠시.”

천천히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다가온 황태자가 유쾌한 미소를 그려 보았다. 어떤 가면을 써도 에스메랄다는 그 속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고 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니까.

“익숙해져도 빠져나오는 건 똑같을 것이네. 처음에야 잠시 재미있어도 이후에는 지겨워지거든.”

“그런가요?”

“그렇지. 매일 술에, 음악에, 똑같은 사람들에…….”

권태로운 척이라니, 에스메랄다는 황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야 중앙 관료로 국정에 참여하느라 매일 마주쳤지만 이번 생에서는 거의 연결점이 없었다. 그의 약혼 연회에서는 부친과 잠시 들러 인사를 한 정도였고, 혼례에서는 혼자 들러 인사를 하고 돌아섰으니까.

오늘이 세 번째 만남임에도 제대로 된 대화는 아직 해 보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를 옆에 둔 채 탄생을 축하한다는 말을 조금 길게 해 준 것뿐이었으니까. 결국 지금의 황태자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포섭하려는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예상 가능한 쪽으로 움직이다니. 새삼 황제와 황태자를 비교하게 된다.

“그래도 가끔은 색다른 사람들을 만나곤 하지. 오늘 백작을 만난 것처럼 말이야.”

이제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관계를 떠보려 들겠지?

“서부 대란 무렵에 알을 많이 도와주었다 들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전하는군.”

참 실없는 짓이다. 에스메랄다는 황태자가 아르페시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이렇게 가식을 뒤집어쓰고 아닌 척해 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정말 우스운 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믿는 척 고개를 주억거려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다.

“오히려 제가 황자 전하께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당시 서부 연합군을 이끄시던 전하께서 얼마나 훌륭하셨는지 모릅니다.”

“알을 좋게 봐 준다니 내가 다 기쁘군.”

저 가식을 잡아 뜯어내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편하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감사 인사를 전했으니 이번에는 사과를 해 볼까 하네만…….”

딱 한 걸음을 남겨 둔 채 거리를 좁힌 황태자가 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가 원래 생각이 짧다네.”

그새 황태자비가 황제의 곁에서 무슨 말을 하고 갔는지 알아냈구나. 아마도 황태자비와 같이 나타나 그림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귀부인이겠지. 에스메랄다는 이해한다는 의미를 담아 가볍게 웃어 주었을 뿐이다.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전선을 지킨 영웅에게 그런 말버릇이라니.”

에스메랄다를 비롯한 테노리엘 인사들이 남부군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가? 호감을 사려고? 그렇다면 지금의 접근이 정말로 포섭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는 증거다. 네놈도 다를 것이 없는 주제에 어디서.

에스메랄다는 쓸데없는 말만 해 대는 황태자의 혓바닥을 뽑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평온한 미소를 유지했다. 원하던 반응이 보이지 않으니 황태자에게서 성급함이 흘러나왔다.

“부황께서 너무 성급하게 혼인을 진행시키신 바람에 내가 고생이네. 배필은 조금 더 생각이 깊고 존중할 만한 여인으로 맞이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솔루베르를 먹고자 한 건 황제였지만 그 혼인에서 덩달아 이득을 본 것은 황태자였다. 기존에 디오세네트 공작가를 잡은 황제의 세력은 솔루베르를 얻으며 커졌고, 그들은 일괄적으로 황태자를 지지했으니까.

황제가 황권을 다지는 동안 후계 구도를 깔끔하게 정리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세력 내부에서 지지하는 후계가 달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부의 파벌 싸움을 완전히 배제한 세력 불리기에서 이득을 얻어 놓고, 그것을 가져다준 부인을 이렇게 헐뜯다니.

아르페시스가 연회장에서 대놓고 그녀에게 동맹 이상의 접촉을 보였는데 배필을 운운하고 있는 것도 정말, 우습다. 형제를 칭찬하고 아끼는 척하면서 어떻게 형제가 마음에 두었을지도 모를 여인을 노린단 말인가?

기가 막힌 건 지금 황태자는 스스로의 행동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태자에게는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 이런 이들을 상대하니 성격이 더러워진 것이라고, 에스메랄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녀는 정적들을 상대하며 때때로 자신이 정신병자들 틈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배필이란 신중히 맞이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 말을 동조로 받아들인 것인지 황태자가 손을 뻗어 에스메랄다의 뺨을 살짝 쓸었다.

“백작과는 말이 통하는군.”

솔루베르를 버려서라도 아르페시스에게서 테노리엘을 떼어 놓고 싶어 안달이 났군. 성공을 한다면 손해를 보지 않는 계획이다. 그가 혼인을 한 후 솔루베르는 작아졌지만 테노리엘은 내부에서 계승권 전쟁이 있었음에도 더 커졌으니까.

물론 성공을 한다면, 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겠다고 나서다니.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황당무계한 오만함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이 정도로 허접하지는 않았는데…….

분명 황태자와 황제는 달랐다. 황제는 예측조차 하기 힘들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존재였고, 황태자는 쓸 만한 정치 감각을 가졌다 해도 황제처럼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지는 못했다.

황제가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놈이었다면, 황태자는 그냥 상식 외의 짓을 하는 미친놈이었다. 황제는 능력이라는 탄탄한 근거를 기반으로 오만함을 쌓았지만, 황태자는 혈통을 기반으로 오만함을 쌓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상황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손을 쓰는 반면, 황태자는 자신이 손을 쓰면 혈통이 상황을 좌지우지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둘 다 오만했으나 그 태도의 기반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극단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건 두 사람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아득한 격차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그 격차가 커져 있었다. 남부에서 하는 짓이 사라진 시간과 똑같아서 제대로 인지를 못 했던 것 같은데…….

분명 지금의 황태자는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더 쉽게 읽히고, 더 상대하기 쉬워졌다. 미친놈인 건 매한가지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게 더 명확해졌다.

왜지? 아르페시스의 행보가 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에스메랄다가 기억하는 황태자보다 연배가 어리기 때문에?

‘오늘처럼 기쁜 날 짐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니, 황실의 자랑이다.’

황제의 말을 떠올린 에스메랄다가 답을 잡아챘다. 초조하구나. 그러니 성급하게 움직이느라 이것저것 흘리는 게 많은 것이다. 연회를 시작할 때 황제가 굳이 아르페시스를 함께 언급한 건 황태자와 그를 동일 선상에 둬 주겠다는 의미니까…….

경고였던 것이다. 지금 황제의 모든 행동은 황태자를 가지고 뭘 하든 넘어가 줄 테니, 남부군은 절대 쓰지 말라는 경고다. 황제는 남부군의 무력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려는 것이지, 황태자처럼 남부군의 목을 분질러 버리려는 게 아니다.

계속 남부군의 자금으로 그들의 목줄을 졸랐다 풀기를 반복했지만, 황제는 분명히 전선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어떻게든 발버둥 치면 정상 유지가 가능할 정도의 자금과 물자를 제공하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르페시스가 인외자의 힘을 가짐으로써 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예전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협박을 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황제가 자금을 감축했을 때 남부군에게는 반항할 방법이 없었으나 지금은 아르페시스가 있다. 그가 황성을 푸른 물결로 채워 모조리 도륙해 버리면 막혔던 자금줄이 다시 트여 버린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패륜이라는 장애물이 생기기에 쉽게 고를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황제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쉽사리’다. 수틀리면 뭔들 못 하겠나? 결국 황제는 제 뒤를 이를 후계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해도 남부군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가?”

대답이 없는 에스메랄다의 뺨을 문지른 황태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녀를 포섭하려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황제는 황태자를 먹잇감으로 던져 줄 테니 수틀려도 남부군을 데리고 일을 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버림 패로 쓰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으니 초조한 게 당연하려나?

황제가 대형 마수의 준동이 변해 버린 것을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황태자를 완전히 버릴 생각도 있는 것 같은데……. 애초에 황제와 황태자는 같은 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놀라울 것도 없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황태자를 빠르게 훑었다. 황제와 황태자는 분명 부자지간이고 권력을 물려줄 후계의 관계다. 하지만 분명한 우위가 존재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황제가 제 자리를 노리는 황태자를 평생 동안 억눌러 왔으니까.

황후의 가문인 디오세네트가 황제파의 주축이긴 했지만 지금은 솔루베르가 있다. 솔루베르 공작은 제 손자를 조건으로 내밀면 기꺼이 움직여 줄 만한 인물이다. 황태자보다는 이제 고작 걷고 옹알이를 하는 손자가 황위에 오르는 게 솔루베르 공작에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섭정이라는 게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계속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는 제르아니 쪽도 손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이득이 크지 않다. 그쪽은 황태자와 같이 버리자.

섭정을 위해선 아르페시스부터 치워야겠지만, 황태자를 버리면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아르페시스를 황태자로 봉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하면 지금 에스메랄다가 모으는 세력과 타협이 진행되는 셈이니, 그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

그 준비를 통해 아르페시스가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들려는 것인가? 그의 약점을 이용해서?

황제가 생각하는 그림이 이런 쪽이라면 목표는 에스메랄다를 비롯한 그의 주변 인물이다. 호위를 더 면밀하게 짜는 것은 물론 법망 위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다면 지워야 한다.

로부오 중에는 여인들도 있으니 욕실이나 침실 호위는 충분하고, 가문의 상급 기사 중에도 정말 정예들을 황도로 미리 보내 두었으니 곧 도착하겠지. 그녀가 그간 해 온 일들은 대부분 뒤처리를 확실히 해 두었으니, 돌아가는 대로 확인을 하는 선에서 한 번 더 훑어보자.

황제가 왜 오래도록 그녀와 아르페시스의 관계에 대해 침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결과적으로,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 지금의 상황과 추측이 진실이라면 황태자가 제대로 자극받았을 것이다.

대륙의 평균 수명은 70대 초중반이다. 황제는 황태자를 버려서라도 여생 동안 황권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인데…….

에스메랄다는 내년에 아르페시스를 제위에 올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 죽을 테니 서로 칼을 겨눠라. 그 과정에서 아르페시스는 필요한 명분을 챙길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시도만 있다면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황태자의 짓으로 꾸미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숨어드는 과정이 자유로우니 황제의 입에 독을 쑤셔 넣어 버리고 죄를 뒤집어씌우리라. 인외자의 힘이 패에 생김으로서 에스메랄다 역시 제약을 상당수 털었기에 편했다. 저절로 입매가 위로 말려 올라간다. 에스메랄다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황태자가 좁히지 않았던 한 걸음의 거리를 없애 버렸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캐어 낼 것은 거의 다 캐낸 것 같으니 이제 눈앞에 온 기회를 이용해 손을 좀 봐 주어야겠다. 그래야 다음이 편하다.

아주 잠시간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바람에 손이 움찔거렸다. 연회 전에도, 정원에 나오기 전에도 신신당부를 해 둔 탓에 성급히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는 아마 지금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그것을 상기했음에도 에스메랄다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숨결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좁혀진 거리에서 황태자는 오만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정말, 정말 궁금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어떻게 얽혀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가 성공할 것이라 자신하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유혹하는 것처럼 황태자의 허리에 손을 대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를 응시했다. 정말로, 그녀가 아르페시스를 등지고 저에게 갈 것이라고 믿는 건가?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

“오늘 백작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더없는 행운인 것 같군.”

고개를 숙여 에스메랄다의 귓가로 다가온 황태자가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은 에스메랄다의 뺨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른 손은 이미 그녀의 머리 장식을 매만지고 있었다. 곱게 틀어 올린 그녀의 머리를 금방이라도 풀어 내리려는 것처럼.

“자리를 옮길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에스메랄다의 손이 황태자의 허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갈 때였다. 황태자의 뒤에서 서슬 퍼런 눈을 한 아르페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로 인해 뜨겁게 타오르는 은회색 눈동자와 이득을 위해 차갑게 식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 * *

에스메랄다는 사라진 시간에서 초경을 꽤나 일찍 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형제들이 몸에 좋은 것을 먹인 덕분이었다. 한 알에 금화 수십 개가 필요한 영약을 간식인 줄 알고 먹었을 정도니, 형제들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다양했는지 설명하자면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부족하리라.

덕분에 미숙아의 몸으로도 무척이나 잘 자란 에스메랄다는 열네 살의 여름에 초경을 했다. 그때 페드로가 선물이라며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그 안에는 악력기와 도무지 어디에 쓰는 것인지 모호한 고무공이 들어 있었다.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에게 악력기를 쥐여 주며 하루에 1백 번씩 꼬박꼬박 사용하도록 시켰다. 그녀의 작은 입에는 고무공을 물려 주며 또한 1백 번씩 씹게 만들었고.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악력과 치악력이 꽤나 강한 편이었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도.

당시에는 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름에도 어렸던 에스메랄다는 오라비가 시키니 참 열심히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났을 때, 출정을 앞둔 페드로가 바나나를 한 바구니 챙겨서 에스메랄다를 찾아왔다.

‘작은 천사야, 이제 너도 여인이 되었으니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지.’

‘사내놈들은 말이야, 참 단순해. 머리에 든 것이 다 고만고만해서 제 약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 주거든.’

그러니 만약 어떤 사내가 나쁜 뜻을 품고 접근한다면 기회를 걷어차지 말라고, 섣불리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라 평한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의 손에 바나나를 쥐여 주었다.

이미 그의 참관 아래, 밤시중 시종을 통해 사내의 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에스메랄다였다. 페드로가 그녀의 손에 쥐여 준 바나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혼자라면 괜히 자극하지 말고, 응할 것처럼 굴어서 방심을 유도하렴. 그렇게 해서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게 더 안전해.’

평범한 경우라면 여인의 힘으로 사내를 이기는 것은 힘들다. 특히나 마나로 신체를 단련하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힘에 의한 분류 속에서 무척이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런 다음 놈이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 준 약점을 움켜쥐고.’

그래서 페드로는 약자에 속한 에스메랄다가 만약의 경우 위험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고, 훈련시켰다.

‘으깨 버리렴.’

그 결과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허리를 접고 쓰러진 황태자였다. 에스메랄다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황태자의 뺨을 구두 등으로 툭툭 쳐 주었다. 그 모욕적인 행동에 반응을 보이지 못할 만큼, 황태자는 현재 심각한 고통에 허덕이는 중이다.

보시다시피 에스메랄다는 잘 훈련받은 정예병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녀에 의해 희생된 바나나는 마을 하나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초경 소식을 들은 페드로가 리퀘나에서 건네주었던 상자에 들어 있던 것 역시, 악력기와 고무공이었다.

잔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페르멘의 교육과 달리 페드로의 교육은 위협적이었으며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많은 순간에 스스로를 지켜 냈고 지금 황태자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뭘 그리 놀라?”

에스메랄다는 곧장 황태자를 죽여 버릴 것처럼 나타났다가 얼어 버린 아르페시스에게 말했다.

“내가 가만히 당할 줄 알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황태자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볼품없이 웅크린 채 소리를 질러 대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황자 전하께서 계시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불구가 된다 해도 아르페시스가 뒤를 이을 테니 문제가 없다는 말로 약을 올리고.

“그래도 황가의 수치가 되는 건 좋지 않겠지요.”

황태자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말로 성질을 긁어 주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본색을 드러낸 황태자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조속히 치료받으시기를.”

할 말을 끝낸 에스메랄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아르페시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가서 대기하렴.”

“예, 백작님.”

그림자처럼 에스메랄다 옆에 서 있던 황성의 시녀가 허리를 숙인 후 정원을 빠져나갔다. 황태자가 저렇게 된 꼴을 직접 목격했으니 당연히 화풀이를 당할 것이다. 죽을 것을 알고 두기에는 아까운 전력이니 빼내서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낫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스메랄다 역시 얼어 있는 아르페시스를 잡아당겨 자리를 빠져나갔다. 황태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사람이 오기 전에 사라지는 게 현명하다. 다음 목적지는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휴게실, 아르페시스의 개인 휴게실이다.

* * *

황태자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아무리 정조를 제대로 지키는 자가 드물어진 세상이라 해도 본부인을 둔 채 밖으로 눈을 돌린 것은 도리를 저버린 것이고, 배필의 맹세를 등진 짓이다.

에렘에서 법적으로 한 명 이상의 여인과 혼례를 올릴 수 있는 건 황제가 유일하다. 사내들끼리야 자랑처럼 첩이 몇이니, 정부가 몇이니 떠들지만 여인들에게까지 당당할 수는 없고, 자존심이 강한 황태자의 성격상 시도하다 불구가 될 뻔했노라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그런 도덕적인 힐난이 별것 아니라 여기고 이 일을 공론화할 수도 있다.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크게 부풀릴 수 있는 사안이다. 당연히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이 없으니 지금부터 손을 쓸 생각이다.

“……익숙해 보이는군.”

휴게실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 기사가 문을 닫아 주자, 말 한마디 없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던 아르페시스가 입을 열었다. 꽉 막힌 음성은 그가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차마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글쎄.”

최대한 조용히 넘기고 싶었건만, 아르페시스는 그럴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했을까, 싶지만 결국은 이게 맞다. 제대로 한번 꺾어 줘야 오늘처럼 귀찮은 수작을 부리며 그녀를 포섭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황태자는 이미 적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이럴 때는 차라리 완전히 척을 지는 것이 낫다. 행동이나 대응에서 제약이 없어지니까.

그녀의 대답이 화를 건든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붙든 채 바짝 다가왔다. 코앞에서 마주한 은회색 눈동자에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본래는 정원에서 그가 당황하는 사이 빨리 화제를 넘겨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뜻에 따르는 대신 반발했다.

에스메랄다는 분명 조금 전 행동이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필요에 의해 행했다.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도 언제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녀가 해야 하는 선택이 버겁고 역겨워 숨통이 틀어막히는 것처럼 끔찍하다 해도,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것을 고르리라.

아르페시스는 창백하게 질리면서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아니나 에스메랄다는 그가 무엇을 물어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세어 보진 않았어.”

에스메랄다는 그가 분노에 잡아먹혔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 무려 나라 하나를 지워 버렸지. 어쩌면 대륙 전부를 지웠을지도.

“알고서, 놈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서 나간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그를 부러 연회장에 남겨 두고 먼저 나갔던 행동이 이미 그에게 확신을 준 후였다.

“처음에는 그대가 날 연회장에 두려 했으니까, 따르려고 했다.”

“…….”

“그런데 놈이 그대를 쫓아가더군. 곁에 시녀를 두었기에, 우선은 참았다. 그대에게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지켜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대를 만지게, 만지는데.”

정원으로 오기 전까지 아르페시스가 얼마나 많은 고뇌를 거쳤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대는 피하지도 않았어. 놈의 손을 내치지도 않고 그냥 두었다고! 놈의 더러운 머릿속을 훤히 다 알고 있었으면서!”

결국 그의 언성이 높아진다.

“제정신인가?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함께할 자리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에 에스메랄다는 차갑게 식은 답을 내놓았다.

“필요했으니까.”

이후 황태자의 귀찮은 포섭 시도를 지워 버리고, 완전히 적대하게 만들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황제를 상대하며 알아내지 못했던 것들도 캐어 봐야 했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필요하면 그대의 안위도 팔아넘기겠군?”

“당연히.”

아르페시스가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분노 때문에 시작된 떨림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엄한 어조로 그에게 경고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그걸로 끝이야.”

“그 필요가 그대의 안위와 관련되었다면 포기해야 마땅하다!”

붙들려 있던 팔을 털어 내자 참 손쉽게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 말했으면 그건 네 의견이 어떠하든 필요한 거야.”

남부 전선이 그의 전장인 것처럼, 그곳에 있는 병력이 모두 그의 휘하에서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이곳은 에스메랄다의 전장이다. 그녀에게 속한 세력 모두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군.”

에스메랄다에게 밀려 한 걸음 멀어진 아르페시스가 아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무슨 의미지?”

“너는 팔다리가 잘릴 때마다 내게 사과했어?”

딱딱하게 굳은 그를 응시하는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매서웠다. 지금부터 그녀는 황태자를 막다른 선택의 기로에 몰아넣어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이 단순한 변명에 불과할 때도 있으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우연의 연속이 극적으로 만들어 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떨 때는 누군가가 의도하여 몰아붙인 경우도 존재한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후자의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지 하나만을 던져두고 그것을 고르도록 유도하려고. 사냥꾼이 사냥감을 궁지로 몰아넣어 천천히 옥죄는 것처럼 황태자를 덫 속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

“…….”

“여기서 필요한 전투가 무엇인지, 거기서 희생되어야 하는 병력의 규모는 얼마인지, 모두 내가 정해.”

이곳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희생하는지 정하는 건 그녀다.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을 이끌고 남부 전선에서 하는 모든 일을, 에스메랄다는 귀족들을 이끌고 중앙 정계에서 행한다.

“내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으면 다시 네 전장으로 돌아가.”

에스메랄다는 애초에 조직 내부의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판단과 결정에 반발하는 것이 아르페시스라고 해도, 여기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마수와의 전쟁은 인간의 창칼과 마수의 발톱이 서로를 짓이기기 위해 휘둘러지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정쟁은 날이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위험하고 힘들다고 정의할 수는 없으나, 두 가지 모두 안전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곳에서 의견의 충돌이 일어나 반발하고, 그녀의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간 세력 전체가 갈기갈기 분해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만들어야 할 상황이 패륜과 내전, 그리고 명분까지 얽힌 복잡한 것임을 떠올리면 더더욱.

“……잘못했다. 곁에, 곁에 있게 해 주면…….”

에스메랄다는 이를 악문 채 숙이고 들어온 아르페시스에게 손을 뻗었다. 채찍은 충분히 휘둘렀으니 이제 달래야지.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는 아직도 몸을 잘게 떠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잡아끌어 소파로 향했다. 황족의 개인 휴게실은 그곳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기에 밀회가 자주 벌어지는 장소다.

“우리의 규칙을 잊은 것 같은데?”

아르페시스를 억지로 소파에 앉힌 에스메랄다가 그의 무릎 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아르페시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표정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아르페시스의 고개를 억지로 들게 해 시선을 마주하자, 여전히 분노가 넘실거리는 은회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는데,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게 원했다는 의미는 아니야.”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 전 황태자가 지분거린 뺨이었다. 아르페시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나도 당연히 기분이 나빠.”

마치 정화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커다란 손에 뺨을 문지르고 있노라니,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온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만 하면서 승리할 수는 없는 거야.”

언젠가 페르멘이 씁쓸한 표정으로 해 주었던 말을 이제는 그녀가 입에 담아 본다.

“필요하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너도 알잖아?”

그가 부상병을 선별하여 치료하는 데 동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한 적이 없다 해도 감내해야 할 때가 있다. 아르페시스는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상황과 함께였다. 원한 적이 없음에도 황제의 아들이 되었고, 전선으로 향했고, 살기 위해 싸울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넌 나를 너무 약하게만 봐.”

그를 두고 먼저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쳐도 에스메랄다가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를 지킬 힘 정도는 있어. 페드로 오라버니가 많이 가르쳐 주셨거든.”

페드로의 얘기가 나오자 아르페시스의 안색이 조금 더 풀어졌다.

“나는 네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저항할 거야. 만약 내 힘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게 힘들어도, 내 호위진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과거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을 때도 에스메랄다는 최장 1시간 만에 구출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전에 안일한 게 아니라 대비할 자신이 있기에 움직이는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필요하다면 위험마저 감내하겠다는 에스메랄다의 말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발하다간 쫓겨날 판이니 그저 꾹 눌러 참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젠 너도 있잖아.”

에스메랄다가 그의 뺨을 두 손 안에 가둔 채 살살 달래었다.

“……나는 싫다.”

“…….”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대에게 닿는 것도, 그대가 그것을 알면서 용납하는 것도, 그대가 위험을 자처하는 것도, 다 싫어.”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해도 그대의 말이 옳은 거겠지.”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옭아매며 매달려 왔다.

“……우선은 참을 테니까, 필요하다면 불러라. 언제든, 어떻게든 늦지 않게 가겠다.”

용납할 수 없음에도 그녀의 뜻을 우선시하기에 물러나 주는 그가 참 고맙다. 그리고 그에게 상처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겠노라 말하는 것이 미안하고. 하지만 그건 아르페시스가 감내해야 할 일이다. 그녀 역시, 소중한 이들이 전장에 있음으로써 느끼는 고통을 감내했으니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잠시의 침묵 후에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어 왔다.

“내가 계속 그대를 지켜보는 것 말이다. 혹여… 불쾌하지는 않은가?”

“그다지?”

처음에는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유용한 점을 훨씬 더 높게 사기에 불쾌하지 않았다.

“솔직히 편해.”

“……편하다고?”

“연락을 하겠다고 파발꾼이니 전서구니 날리지 않아도 되고, 네 범위 내에 있으면 언제든 의사 전달이 가능하잖아?”

그는 자신의 마나를 언제, 어디서든 유형화할 수 있기에 그녀의 귀걸이를 건드렸던 것처럼 사물을 움직여 긍부의 대답을 줄 수가 있다. 전보 마도구 없이도 원거리에서 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인데, 그런 유용함은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찬찬히 설명을 했더니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정말 묘해졌다.

“가끔 느끼는 것인데, 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은 조금… 평범하지 않은 것 같다.”

“뭐? 이 정도면 평범한 거 아냐?”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한층 더 묘해졌다. 무려 작위의 승계 문제를 눈앞에 놓인 다과를 나눠 먹는 것처럼 해결하는 집안이 평범하다고?

에스메랄다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어떤 생각이 오가고, 어떤 의문이 찾아오든, 그가 내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아르페시스는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다시 고개를 기대었다. 조금 전 황태자가 그녀의 뺨을 멋대로 만지작거리던 것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침범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입술을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계속 화가 나…….”

그녀를 만졌던 황태자의 손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사랑해…….”

지금 에스메랄다가 꺼낸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겠지. 그녀가 그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섭섭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계속 화가 났다. 그가 그녀만의 것이듯, 그녀는 그만의 것인데, 다른 사내와 나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럼에도 아르페시스는 차마 에스메랄다의 뜻에 반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대신 몸이 하고픈 말을 표현했다. 그의 손은 에스메랄다의 치맛자락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에 탄식을 내뱉으며 입술을 맞추어 왔다.

그녀는 필요에 의해서 다른 사내를 이용했던 것뿐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원해 주는 것은 그만이 유일하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여유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결국 아르페시스의 행동이 거칠어졌다. 성급하고 다급한 몸짓이었다.

아르페시스는 품에 안겨 있던 에스메랄다를 번쩍 들어 소파에 눕혔다. 속옷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어 문질러 보았지만, 그녀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아르페시스의 인내심이 다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치맛자락 아래로 기어들어 간 후 눈앞에 보이는 속옷을 옆으로 젖혔다. 초조함에 쫓긴 그가 에스메랄다의 음부에 입술을 파묻고서 질척거리는 침을 묻히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 하는…….”

당황한 에스메랄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는 제 손에 뱉어 낸 침을 성기에 문질렀다. 그녀의 속옷을 벗기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아르페시스는 속옷을 한쪽으로 젖힌 상태 그대로 그녀의 질구에 귀두를 맞대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에스메랄다가 헛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아르페시스는 이미 그녀의 안으로 침범한 상태였다.

“아읏……!”

황홀하기만 하던 그녀의 교성에 얕은 고통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허리를 뒤로 빼낼 여유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를 취해야만 했다. 그래야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 감정들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

거친 손길로 그녀의 드레스를 끌어 내린 그가 양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양껏 움켜쥐었다.

헉, 하고 다급하게 숨을 채운 그가 에스메랄다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그대를 안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렇지?”

“으읏… 다, 당연한… 앙!”

“약속한 것이다. 누구도, 누구에게도 허락하면 안 된다. 윽……! 알겠는가?”

“으응, 응! 알겠… 알겠어! 아앙!”

그의 양손은 에스메랄다의 유두를 괴롭히기 바빴고, 그의 입술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붉은 정사의 흔적을 남기기 바빴다. 그리고 그의 하체는 점점 더 고혹적으로 젖어 가는 에스메랄다의 음부를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마나로 소리를 가둔 공간에 질펀하고 자극적인 마찰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르페시스는 오래지 않아 파정했다. 그는 제 성기를 빼자마자 울컥, 하고 정액을 토해 내는 에스메랄다의 음부를 만지작거렸다. 탁한 정액이 그의 손을 흠뻑 적셨다.

제 흔적으로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던 아르페시스가 별안간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응…….”

짧은 순간에 강렬하게 휘몰아친 쾌락을 뒤로하고 숨을 고르던 에스메랄다가 몸을 움츠렸다. 아르페시스는 그에 굴하지 않고 더 노골적으로 손을 놀렸다.

둥글고 탐스러운 가슴은 어느덧 질척거리는 정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르페시스는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홀로 바라보았던 광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다니.

그녀에게 제 흔적을 가득 묻히자 음습한 소유욕이 충족되었다. 황태자 따위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다 한들, 그녀는 이미 아르페시스의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정액으로 범벅이 된 채 붉게 물든 얼굴로 색색, 숨을 몰아쉬는 에스메랄다는 그의 것이다.

그 명확한 전제에 축 늘어져 있던 성기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보다 더 질척하고 끈적하게. 짧은 욕망을 구체화한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다리 사이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느덧 말라 가기 시작한 손으로 계속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주물럭거린 그는 다른 손으로 수음을 시작했다.

“아… 흐… 에디.”

“자, 잠깐, 너 뭘 하려고…….”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에 성기를 대고 허리를 흔드는 건 색달랐다. 손으로 허벅지에 맞닿은 기둥을 누르자 적당히 기분 좋은 쾌감이 느껴졌다.

“하, 으… 윽…….”

에스메랄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을 질끈 감은 것과 달리, 아르페시스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저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훑었다. 그녀의 속살은 아름다웠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활짝 벌어진 다리를 넘어 에스메랄다의 허리 위에 올라탄 아르페시스가 동그란 가슴을 제 손으로 모았다. 그 아찔한 계곡 사이에 성기를 끼우자 에스메랄다가 당혹스럽게 그의 손목을 붙잡아 왔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짝 솟은 돌기를 문지르며 허리를 흔들었다.

“응, 읏… 으응…….”

격렬한 쾌감 대신 간질간질거리는 자극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배배 꼬며 제 가슴을 유린 중인 아르페시스의 손을 더듬었다.

굳이 참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보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일까? 아르페시스는 평소보다 적은 자극에도 금세 파정에 이르렀다.

그 직후 그는 에스메랄다의 가슴 위로 흠뻑 뿌려진 정액을 너르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두 번의 파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딱딱해진 성기는 이미 촉촉한 질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으읏……!”

망설임 없이 에스메랄다를 파고든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질척거리는 가슴을 동그랗게 움켜쥐었다.

“하…….”

퍽, 퍽, 퍽. 단조로운 박자로 허리를 쳐올린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입을 맞추었다. 무자비하게 입속을 헤집는 혀도, 가슴을 유린하는 손도, 깊은 곳을 파고드는 성기도. 에스메랄다를 버거운 쾌락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대에게서 내 냄새가 나.”

“아흣! 흥! 자, 잠깐……!”

아르페시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킁킁, 에스메랄다의 향을 탐했다. 기저에서부터 그릉그릉하고 만족스러운 울림이 시작되었다.

항상 바쁘게 허리를 쳐올리기만 하던 아르페시스가 어느 순간부터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 아……!”

그의 신음성이 점차 고조될 때마다 미끈거리는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페시스는 비릿한 냄새가 풍겨 오는 에스메랄다의 유두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댔다.

“흐응……! 오, 오늘 왜 이러는… 그마안……!”

“그대는 내 거야.”

이성이 점멸한 탓에 에스메랄다의 말을 듣지 못한 아르페시스가 으르렁거렸다.

“내 여인, 내 배필… 내 흔적으로 얼룩진 그대가 내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겠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속삭임은 진득한 소유욕과 집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세뇌시키고 싶은 것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단조롭고 비슷한 박자로 허리를 치대기도 한참. 거듭된 절정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파들거리기 시작했을 무렵. 별안간 에스메랄다의 허벅지를 꾹 누르고 저를 품고 있는 음부를 활짝 벌린 아르페시스가 추삽질에 힘을 더했다.

진작 메말라 버린 정액 때문에 뿌옇게 변해 버린 에스메랄다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아르페시스는 교성을 내지르며 숨을 헐떡이는 에스메랄다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가장 깊은 곳에 저를 쏟아 냈다.

“하……!”

벌써 몇 번이고 겪어 본 정사이건만, 매번 색다르고 황홀했다. 또 한 번 뭉근하게 허리를 돌린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안에 가득한 제 정액을 음미했다.

아름답고 황홀하여 눈이 부신 에스메랄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것이었다.

* * *

“이동에 대해서는 보유하신 마나에 따라 거리가 한정되는 것 같습니다.”

“인지 범위는 얼마나 되는 것 같더냐?”

“마나가 닿아 있다면 행동이나 대화는 모두 잡아내시는 것 같으니 황성 전체를 포함해 두어야 합니다. 종이에 적힌 글자까지 확인이 가능하신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의 대화를 알이 듣고 있다는 의미인가?”

“지금은 거둬들이신 상태입니다. 전하의 휴게실에 마나 장막이 펼쳐지는 것을 느끼고, 유형화를 해 보았으니 확실하다고 여겨집니다.”

마나를 유형화할 때 느껴지는 이질감이 없다는 건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주변에 없다는 의미다. 반대로 만약 무언가 섞인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면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주변에 가득하다고 봐야 한다.

곁에서 몇 가지 실험을 해 본 결과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휴게실에 견고한 마나 장막이 생겨난 이후 이질감이 사라졌으니 지금은 아르페시스의 시야에서 자유로운 상태다.

“휴게실 안에는 백작이 함께 있고?”

“……예.”

유쾌한 웃음소리가 짧은 대답의 뒤를 채웠다. 동시에 꼬고 앉은 다리가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꽤나 꽉 막힌 녀석이니…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도 싫은 모양이군.”

느른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떨치지 못하고 이어졌다.

“식사 시간에는 그리 교묘하게 굴었던 것도 다 백작이 시킨 게였어. 하기야, 그 녀석이 생각하기는 어려운 방법이었지. 여전히 제 것을 과시할 줄을 몰라. 어릴 때부터 그 부분은 어리석단 말이지.”

혼잣말이 분명하건만, 묘하게 대화처럼 들렸다.

“흠, 저런 식으로 꽁꽁 옭아매다가 엉망으로 끝나는 관계를 꽤 보았는데……. 이거, 이거, 손쓰기도 전에 퇴짜를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리 절절매는 것을 다 보여 주다니, 참으로 못났구나. 그렇고말고.”

저 중얼거림을 들은 것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건만,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뭐,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겠지. 정신을 다른 곳에 두면 내가 움직이기 수월하니……. 거참, 내 궁에서 말조심, 행동 조심을 하게 될 줄이야.”

혀를 끌끌 차며 하는 말은 한탄일까, 감탄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두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를 자주 만드는 게 좋겠군. 그 나이에는 곁에 있기만 해도 타오르니 잠시 잠깐 틈이 생길 테고…….”

저렇게 다리가 까딱거리는 동안에 나오는 모든 말은 들어도 듣지 못한 척 넘기면 된다.

“백작의 성격상 그냥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고, 머리를 내리고 나서 주면 좋겠는데……. 란과 마찰이 있었으니 다행이군. 영식들을 살짝 자극해 두어야겠구나.”

가만히 기다리고 있노라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후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후작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황제의 까딱이던 다리가 멈추었다. 그래, 주의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지금처럼 움직임이 멈추고 웃음기도 남지 않은 후의 말이다. 저절로 긴장감이 부추겨진다.

“나서는 대로 알이 글자까지 확인할 수 있는지 검토하라. 불가능하다 여겨지면 앞으로는 글로 보고를 하고, 반대라면 침묵한 채 곁에 있으라. 이후로는 이리 찾아와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그만 물러가 보아라. 짐도 일어나야지.”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휘휘 내젓는 손길을 따라 몸을 돌리자 황제와 함께 있던 밀실을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후……”

깊은 한숨 속에 복잡한 것들이 섞여 있었으나, 손에서 피워 낸 푸른 마나는 여전했다. 아직 연회가 한창이었지만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급하게 청한 만남이었다. 근처에 있어 좋을 것이 없겠지. 다급한 걸음을 내디뎌 밀실에서 멀리 벗어난 후 지나가던 시종을 붙들었을 때였다.

“지금…….”

계속 손끝에 마나를 유형화해 둔 상태였기에 갑자기 몰려드는 이질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다시 황궁 전체로 퍼진 것이다.

“어찌 그러십니까?”

붙들린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조금만 더 지체했어도 들켰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입술이 바짝 말라 버렸다. 손끝에 피어났던 마나가 자취를 감추는 것과 동시에 조금 경직된 대답이 나왔다.

“종이와 펜을 잠시 쓰고 싶은데.”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길을 나선 후에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조금 전 그 시종이 종이와 받침, 잉크와 깃펜을 챙겨 돌아왔다. 머뭇거림은 잠시였다. 이미 몇 가지 정황 증거도 있었으니 마지막 확인 절차만 거치면 된다. 괜찮을 것이다.

시종이 건네준 받침 위에서 종이를 걷어 낸 후 딱 한 장만 남겨 두었다. 괜히 다른 종이에 흔적이 남아 좋을 것이 없다. 살짝 떨리는 손이 빈 종이 위에 그려 낸 문장은 짧고 간결했다.

「나는 황제의 세작이다.」

이제 답을 기다릴 때였다. 글자가 적힌 종이를 챙기고 다른 물건은 시종에게 돌려주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주머니에 든 종이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스터!”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이름을 불리면 누구나 긴장을 하리라. 삐그덕거리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아스터는 배시시 웃으며 다가오고 있는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죽마고우는 여전했다. 실력은 좋은데 눈치는 참 없다. 뭐, 데미안의 실력이 아니었다면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이렇게 빨리 눈치채지는 못했을 테니, 그의 여전함에 감사를 해 본다. 마찬가지로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눈치에 또 한 번, 감사를 전한다.

“전하께서는……?”

“아직 휴게실에 계신 것 같아.”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 종이가 아니라 돌덩이 같았다. 이 짓도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내일부터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래.”

황성에 귀환한 날 밤, 아르페시스는 다시 아스터를 근위대로 임명했다. 그는 내일부터 다시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곁을 지키리라.

“어, 돌아오셨네.”

데미안의 말에 아스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개를 돌리자 연회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가 보였다.

‘머리를 내리고 나서 주면 좋겠는데…….’

조금 전 만나고 온 황제의 뜻대로 에스메랄다는 틀어 올리고 있던 머리를 풀어놓은 상태였다.

“장식을 잃어버리셨나?”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릴 때 아스터는 복잡한 한숨을 삼켜야 했다. 주변에 아르페시스의 마나가 있을 때는 정말 말조심, 행동 조심을 해야 한다.

계속 남부에 있던 데미안은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최근 중앙 사교계에서 여인이 묶었던 머리를 풀어낸다는 건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함께 돌아온 사내와 관계를 가졌노라, 하는 의미 말이다. 최근 젊은 층의 여인들에게 부채 언어처럼 당연하게 자리 잡은 행동이었다.

기성세대의 귀부인들이 조금 고까운 눈으로 보기는 하나, 그렇다고 제 딸이 그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는다. 그게 여인이 가진 매력의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2, 30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혼 세대들이 교제 중인 이성을 숨기는 대신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중앙 사교계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여인에게는 정조를 강요하면서 첩과 정부에게 나돌아다니는 사내들의 행태가 불러온 변화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젊은 여인들 사이에서는 저런 행동이 일종의 권력의 하나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탐내는 여인인지, 얼마나 많은 추종자의 무릎을 꿇린 여인인지 같은 척도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2, 3년쯤 전부터 관계 후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대신 풀어 버리고 연회장에 돌아오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제는 연인이나 남편이 있는 여인들에겐 자랑거리처럼 유행하고 있었다. 아스터의 부인도 때때로 연회에 참석할 때 원해 왔을 정도였다.

그녀가 만삭이라 연회에 불참하지 않았다면, 아마 아스터도 지금쯤 연회장 주변에 있는 밀실을 찾아 들어갔으리라. 예전에는 숨어서 몰래몰래 하고, 감추기 급급했던 것이 이제는 그리 비밀스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 때문에 풀기 위한 올림머리가 유행하고, 머리 장식이 다양해지고 있었다. 몰려드는 시선에 의문을 표하는 것 같은 아르페시스는 그런 내막을 모르는 것 같고, 에스메랄다는… 당연히 알겠지.

‘영식들을 살짝 자극해 두어야겠구나.’

다시 한번 황제가 했던 말이 귓가를 둥둥 떠다녔다. 이제 곧 아르페시스에게 몰려드는 영식들이 나타날 테지. 그들을 통해 에스메랄다와의 정사가 언급되리라는 건 자명하다. 감상을 물어보든, 에스메랄다의 나신을 말로 희롱하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게 무엇이든 좋지 않다. 아스터는 자신의 주군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는 데다가, 다시 만난 그가 과거와 달리 조금 냉혹해진 것 같다고 여기는 중이다.

자칫하다간 연회장에서 피가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결국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곁으로 다가가 예를 취하자 아르페시스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주머니에 든 종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글자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하구나. 인외자에 대해 남은 기록대로, 눈으로 본다기보다는 느낀다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먼 거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공기가 울리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운용력에 따라 섬세한 것까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스터는 홀로 추측을 하면서도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았다. 딱히 전하지 말라는 경고는 없었기에 그는 아르페시스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결심을 굳혔다.

아르페시스를 다시 만난 아스터는 그가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노라 확신한 상태였다. 황자 궁에서 대면했을 때는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날이 서 있는 것은 물론, 언행에 담겨 있던 기본적인 배려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바라보던 그 무감각한 은회색 눈동자는…….

시국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서 아르페시스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결국 아스터는 저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잠시 굳어 있던 아르페시스가 경악한 얼굴로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몰랐구나.

“이래야 놈이 입을 다물지.”

에스메랄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어쩌면 조금 즐기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 그게, 그게 무슨, 어떻, 이런 외설적인……!”

“동생의 연인에게 치근거리다 불구가 될 뻔했다고 말하진 못할 거 아냐?”

“아니, 아, 아 아, 아무리 그래도, 나, 나와 그, 공유, 이건 아니지 않나!”

“네가 내 사내라고 자랑을 한 건데, 뭐가 어때서?”

혹여나 말이 새어 나갈까 속닥거리면서도 아르페시스는 연회장을 빠르게 훑었다. 그에게서 줄줄 흘러나오는 살기 때문에 아스터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아르페시스는 언제든 주변에 풀어놓은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다. 그건 그의 마나가 존재하는 곳에서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데미안을 잡아끌어 두 사람을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리고자 했지만… 여긴 연회장이었다. 사방이 눈이다. 잠시의 언쟁 후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데리고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 그제야 아스터는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리퀘나에서 한 번 쓰러지신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조금 무서워지셨어…….’

그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데미안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그게 전부였다. 에스메랄다의 곁에서는 예전의 그와 비슷해 보이는데, 살기 때문에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스터는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또 한숨을 삼켰다. 조금 전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던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대체, 어쩌다 저리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랑을 고하게 된 것일까.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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