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6화 (36/45)

제35장

떨칠 수 없는 번뇌

테노리엘 백작의 장례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아니, 급박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분명 백작의 지인들은 그가 전선에 있는 이상 전사 소식이 들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소식의 여부에 대한 것이었지 문제의 장례 일정이 다급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상관이 없었다. 부고 소식을 전달하기 위한 남부군의 파발꾼이 한창 남부를 내달리고 있을 무렵, 각 가문에 이미 백작의 부고 소식이 도착했다.

「명예와 함께 떠나갈 분의 마지막 자리를 위해, 무거운 걸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망자를 보내기 위해 참석한 조문객들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재어 보아야 할 만큼, 오늘의 행사에는 많은 수가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로 위치. 생전 백작이 중앙 귀족으로 관직에서 보낸 시간이 상당함에도 장례식이 열리는 곳은 영지였다. 대부분의 중앙 귀족들이 황도에서 장례를 치르고 입관만 영지에서 하는 것과 다른 행보였다.

테노리엘의 백작령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결국 오늘의 장례식은 조문객들이 그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참석을 할 것인가, 재어 보았노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두 번째는 날짜다. 오늘은 카 65일, 백작의 전사 일자로부터 정확히 12일이 지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보통 전사자 통지와 함께 수습한 시신이 출발하고, 통지 파발꾼이 먼저 당도하는 편이다. 12일은 남부 전선에서 백작령까지 전사자의 시신이 빠듯하게 도착할 시간이었다.

중요한 건 오늘로부터 이틀 후인 카 67일이 황태자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이곳에 있는 조문객들은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이틀 만에 백작령에서 황도로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건 하늘을 누비는 전서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결국 장소와 날짜가 겹쳐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장례의 주관자는 테노리엘과 황태자 중 누구를 고르겠냐고 선택지를 던진 것이다.

귀족들은 그 질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모두 선택을 해야만 했다. 에렘의 국내 정세가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전은 앞을 웬만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을 하고 있다. 반군의 동태가 아주 명확한 의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조문객들은 부친의 마지막 자리마저 수를 놓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냉혹함에 혀를 내둘렀으나, 또한 탄식을 내뱉어야만 했다. 만약 지금의 판을 짠 것이 제 자식이었다면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을 테니까. 아마 백작도 그러하겠지.

“정세가 너무 날카롭구나.”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은 어디에 서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고, 오늘은 최종 답안을 내기 전의 1차 답안을 내는 날이라고 보아도 좋으리라.

황태자와 테노리엘이 함께 선택지에 오른 상황인데, 설마 같은 편일 리는 없지 않겠나? 테노리엘은 은연중에 황태자를 적대하고 있노라, 하고 말한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테노리엘이 반군이나 내전에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원래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반군과 엮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던가? 그건 귀족들의 세상에서 완전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이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적의 적도 적이다. 테노리엘과 테몬이 모두 황실을 적대했으나, 그들이 뜻을 합친 적은 없다. 두 가문은 서로를 방해한 적이 있을 정도로 뜻이 다른 이들이다.

테노리엘이 반정에 뜻을 둔 적이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모호하다. 조문객들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 황제도 반군과 테노리엘의 연결점을 정확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는 접점이 있겠노라, 같은 추상적인 추측이 전부지.

상단의 움직임이나 자금의 출처 같은 흔적이 너무 어지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꼬리를 잡아 본체를 찾아가려 해도, 정작 도달하는 곳은 본체가 아니라 다른 꼬리다.

애초에 반군마저 자신들을 지탱하는 물자가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들은 테노리엘이 자신들을 지탱하는 귀족 중 하나라고 알지, 반군의 물자를 7할 가까이 테노리엘이 조달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세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의 귀족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은 단편적으로 좁혀진다.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어디까지 엮여 있는가? 반군과 엮일 무렵부터 이름을 가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애한 에스메랄다 덕분에 오늘과 같은 자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급박한 일자 때문에 동부와 북부 귀족들 중 일부는 참석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로 그들 중 일부는 추도문을 보내고,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 식으로 선택지를 전달해 올 것이다.

반면 먼 거리에서 무리를 해 가며 왔다는 건 고민할 여지도 없이 테노리엘을 택했노라, 강경한 태도를 취할 만한 이들이다. 지금 자신의 아들과 백작령까지 와 있는 아브람 백작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동부의 끝자락에서 서부의 끝자락으로 오는 일이었으니, 분명 하루 온종일 밤을 새워 가며 내달렸을 것이다. 실제 아브람 백작의 일행은 오늘 정오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고, 그는 식당에서 만난 다른 조문객들에게 꼬박 11일을 말 위에서만 지냈다고 말했다.

그에 또 조문객들은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고 다른 이들과 시선을 주고받아야만 했다. 아브람 백작은 테노리엘 백작이 죽은 직후 출발을 했다고 말한 셈이었으니까. 테노리엘의 정보망이 얼마나 빠른지, 계속 경계심이 버려질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동부에서 무리를 해 가며 참석했다는 건 그들이 이미 테노리엘과 깊은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걸 이제껏 아무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아브람과 테노리엘이 언제부터 공고한 동맹을 유지했지? 무슨 목적으로? 단순히 테노리엘과 황태자라는 선택지를 놓은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아픈 장례식이 될 것 같았다.

예상도 못 한 아브람은 있건만, 오면 당연히 만날 것이라 여겼던 테몬 후작과 일부 강경한 중앙 귀족들은 없다. 테노리엘이 은연중 반군과의 접점을 드러내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반군과의 접점이 가장 유력하다 못해 확실시되고 있는 테몬이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여전히 테노리엘과 테몬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건가? 그럼 오늘 자리는 대체 무슨 의미지? 왜 황태자와 본인들 사이의 선택을 요구했을까? 조문객들의 머리가 바빠지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났겠군.”

삼삼오오 모여 장례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 조문객들 틈에서 쿠베트 후작이 중얼거렸다.

테노리엘은 어디까지나 은연중에 황태자와 자신들을 고르라고 의사를 내비친 것이고, 오늘의 장례식은 어디까지나 그저 장례식일 뿐이다.

황태자는 오늘의 일을 두고 왜 장례식을 지금 하느냐고 따질 수가 없다. 또한 왜 자신의 생일 연회에 오지 않고 백작의 장례식에 가느냐고 따질 수도 없다. 생일은 매년 있고, 고인을 보내는 장례는 한 번뿐인데, 그런 말을 했다간 저가 옹졸하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다. 제 얼굴에 침 뱉기 이상은 되지 못한다.

그 속에 들어간 수를 모두 읽었음에도 황태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화를 낼 명분이 없다. 오늘의 장례식은 그저 장례식일 뿐이니까. 부친의 장례를 빨리 치르고 싶어서 그러했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내전에 관련되었다는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무고한 백작가를 응징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나. 그건 모든 공후백이 들고일어날 빌미를 주는 것이다. 분명 갑자기 편 가르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황태자 스스로가 원한 상황은 아니다. 오늘의 장례식에서 테노리엘은 많은 것을 챙겼지만, 황태자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집어 가는 동안 구경만 한 셈이다.

“백작이 자랑스러워하겠어.”

쿠베트 후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모두가 긴장을 쉽사리 풀지 못하는 상황에서 속닥속닥, 끊임없는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돌아갈 길이 막힌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오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재작년부터 지팡이를 짚어야만 거동이 가능할 만큼 쇠약해진 쿠베트 후작의 말에 후작가의 봉신 중 한 명인 루게논 자작이 물어 왔다. 그들의 곁에는 과거에 비해 잘 웃지 않게 된 루이자를 비롯한 후작의 혈육들과 봉신들이 가득했다.

자작의 질문에 후작은 잠시간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조문객들이 걸친 검은 상복과 차가운 묘비밖에 없는 곳.

‘누이의 시간이 여의치 않아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백작 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맞이했던 페르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문제는 제 누이와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식이 끝나면 곧장 시간을 내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뜻을 이루시기에 충분한 자리가 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후회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을씨년스러운 자리에 왔다. 그런 자식들을 키워 낸 사람의 마지막을 보는 자리이니까. 오지 않았을 때 더 큰 후회를 했겠지. 그러니 후회라 표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오는군요.”

멀리서 테노리엘의 문장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쿠베트 후작은 자신이 어렸던 시절 가문의 문장을 바꾸었던 테노리엘을 기억한다. 그는 올해 일흔을 넘긴 나이고, 테노리엘이 가문의 전통 대신 미래를 위한 각오를 다지던 날은 전선이 고착되었을 무렵, 약 60여 년쯤 전의 일이니까.

꺾이지도, 흔들리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세운 검 한 자루를 지탱하는 것은 덩굴이다. 지키겠노라 맹세한 생명이 한 포기라도 남아 있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을 신념, 그게 테노리엘의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담은 깃발이 펄럭이는 곳 아래, 마지막 미련을 담고 담아 지나치게 느린 걸음을 내딛는 이들이 보였다.

에렘의 귀족들은 상복에 아무것도 새기지 않는다.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자리에서만큼은 가문 간의 관계도, 신분의 고하도 따지지 말자는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 전통과 약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이다. 검은 바탕에 흰 실을 새긴 깃발이 떠올랐을 때, 흰 바탕에 검은 실을 새긴 휘장을 걸치는 사람.

그건 죽음으로 비어 버린 자리, 죽음으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걸음을 채우는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그래, 죽음으로 가문의 뜻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 가야 할 후계자만이 의복에 문장을 새길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색이 뒤바뀐 휘장이 없다는 것은 가문 내부의 승계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윗세대가 죽었음에도 서열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말은 계승권을 둔 싸움에서 승자가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방보다 월등하지 못하다고 광고를 하는 셈이니 결국 가문의, 본인의 치부다. 그렇기에 장례식장에서는 제비뽑기를 하든, 동전 던지기를 하든, 일단은 저 휘장을 차고 나온다. 보통은 장남이나 직계 자손이 차는 일이 많다.

이런 자존심 지키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본 후계자와 훗날 진짜 승계자가 다를 때도 종종 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직계의 무덤에서 고인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던 조문객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관의 앞에 서서 함께 걸어오는 혈족의 중앙에 있는 사람은 작고 여렸다. 왼쪽 어깨에서 반대쪽 허리로 떨어지는 하얀 휘장이 커 보일 정도로, 작은 사람이었다.

“역시, 영주 대리가 이어받는군요.”

몇 년 전부터 영지의 전권을 관리했던 가문의 막내가 휘장을 걸치고 나왔다. 이번 세대에서는 테노리엘의 주인이 바뀌지 않겠구나, 조문객들 모두가 확신했다.

쿠베트 후작은 거기서 큰 감흥이 없었다. 그는 이미 테노리엘의 내부 권력이 모두 저 여린 여인에게 쥐어졌음을 알고 있으니까. 테노리엘의 상단이 공격당하다 못해 무너졌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아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그 사건이 가문 내부에서 일어난 싸움이라는 것도 안다. 대부분 테노리엘의 상단과 거래를 하던 가문들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상단을 빼앗으면 어느 정도 수준의 윗선은 모조리 잘라 내는 편이다. 전 주인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을 남겨 놓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테노리엘의 상단은 그 과정을 전혀 밟지 않았다.

분명 상단 주인은 바뀌었건만, 상단을 유지하는 이들과의 거래 조건 같은 내부 구조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생색 내기로 상단주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것도 전 상단주의 아들로. 알아차릴 사람은 알아차리라고,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꽤나 오만한 행보였다.

“아레스……?”

문득, 쿠베트 후작이 베일을 쓴 에스메랄다의 왼쪽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 중얼거렸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텅 빈 왼쪽 소매가 걸음과 바람에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백작이 전사한 날 다른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아레스의 소식은 이미 많은 이들이 확보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렇기에 외팔이 사내가 아레스라는 것을 다수의 조문객이 알아차렸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니까.

물론 남부 전선에서 백작령까지 말을 빨리 달리면 6일 만에 닿을 수는 있다. 하지만 부상 이후 치료에 며칠, 또 전역 절차를 밟기 위해 며칠을 전선에서 보냈을 아레스다. 통상적인 상식선에서 열흘은 걸려야 정상이다. 아레스는 부상자였으니까. 아무리 빠르게 처리를 해도 그가 백작령에 있으려면 이틀은 더 지나야 한다. 시기적으로 말이 안 된다.

모두가 장례식이 끝난 후 아레스의 전역 일자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할 때, 수군거림 속에서 누군가 또 의문을 뱉었다.

“영주 대리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분명 백작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아들 넷에 딸 하나.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이미 떠났다. 백작의 형제들은 모두 과거에 전사했고, 그들은 젊은 나이에 떠났기에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남기지도 못했다. 나머지 혈족은 조부 시절의 친척인데 모두 계승권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진하여 타국으로 출가했다. 현실적으로 부고 소식이 들렸다 하여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관 앞에서 망자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혈족의 자리에 5명이 있나? 백작이 전사하기 이전 영지에 왔었던 혈족이 있나? 분명 중앙에 휘장을 걸친 여인은 에스메랄다이고, 그 왼쪽에는 팔을 잃은 아레스, 양쪽 끝에는 쌍둥이로 추정되는 사내들이 있다. 그럼 에스메랄다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큰 건 혈육이 아니었으나 혈육이 되었을 때인데…….

“영주 대리가 혼담을 추진한 적이 있던가?”

여기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대부분 황실보다는 테노리엘과 교류가 많았던 이들이고, 일부는 황태자 쪽에서 보낸 눈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테노리엘의 행보에 꽤나 밝은 편이었고, 그들이 혼담을 추진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테노리엘은 줄곧 타 가문에서 보내오는 혼담에 정중한 거절 답신을 보내왔다. 그런데 혈족의 자리에 넷이 아니라 다섯이라. 공식적인 약혼이 있었다면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누군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내가 한 명 더 있으니 유일한 여성인 에스메랄다의 약혼자겠지. 하지만 그녀는 약혼자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모두는 속에 담은 혼란을 감추며 조문객으로서의 예의를 지켰다.

장례는 아주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와 함께였다. 백작과 친분이 있던 이들과 자녀들의 고별사가 차례로 끝나고 입관이 시작되었다. 어디에서도 흐느낌은 들리지 않았지만,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그렇게 늦은 오후에 시작된 장례는 노을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조문객들은 묘지를 빠져나가며 테노리엘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착용했던 복면과 베일을 벗었다.

“생각보다 더 복잡한 자리가 된 것 같구나.”

모두가 테노리엘 일가와 함께 묘지 앞에 남아 있는 의문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혈족도 아니면서 혈족의 자리에 선 의문의 사내, 분명 에스메랄다와 연관이 있을 사내.

“……전하세요.”

“뭐?”

쿠베트 후작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루이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자 전하세요.”

“……영주 대리와?”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고, 그리고 묻는 이와 듣는 이가 이미 서로에게 답을 준 상태였다.

“이렇게 나오신 걸 보면… 더는 감추지 않으실 모양이네요.”

쿠베트 후작은 아레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일에 영지에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55일 무렵 남부 전선에서 있었던 대형 마수 5기 토벌은 이미 에렘 전역에서 영웅담처럼 떠도는 중이었다. 무척이나 빠른 확산이었기에 누군가 관여를 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테노리엘일 줄이야.

대체 언제부터? 하고 생각하던 후작은 오래전 제 성에 머물던 아르페시스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고작 하루였다. 당시에는 전선으로 돌아가기 싫은 소년의 핑계로 여겼다. 실제로 머무는 동안 특별한 움직임도 없었고. 결국 깊게 살피지 않은 그의 실책이었다. 짧게 혀를 찬 후작이 제 아들을 불러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자리구나.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르니… 돌아가는 대로 네게 승계를 하마. 오늘 자리에서 전하께 눈도장은 찍어 두도록 해라.”

본래는 내년에 승계를 하고 영지 일에 전념하며 노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해가 바뀌기 전에 움직여야 할 듯했다.

“예, 아버지.”

후작은 오늘의 걸음을 단순히 사적인 감정으로만 내디딘 게 아니었다. 매년 늘어나는 마수는 전선 지역이 아님에도 놈들을 막아야 하는 쿠베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오늘 이 자리는 감내해야 할 위험이 큰 자리였고, 조문객은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감내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기에 온 것이다. 쿠베트를 비롯한 모두는 오늘의 선택과 향후의 선택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이 있다. 귀족의 움직임이란 그런 것이다.

분명 반군과 관련한 자리라 여겨 나름의 선택을 해서 왔건만… 예상했던 반군의 흔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대신 예상치도 못한 아르페시스가 끼어 있다.

“일전 뵌 적이 있으니, 어떤 선택지로든 움직일 수 있게 활로를 열어 두어야 할 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

“루이, 너는 지원 병력에 대한 것을 논의할 때 함께 가자꾸나.”

백작 성에 도착한 날 페르멘을 통해 들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더해진 자리가 더 나을 것이다. 후작은 루이자와 에스메랄다의 교류가 끊기다시피 했다는 것을 모른다. 그녀가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리가 조금이라도 더 유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루이자를 데려가려 한 것이다.

“……네, 할아버지.”

루이자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에스메랄다를 만날 생각이었다.

먼저 백작 성으로 돌아온 조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만찬과 함께하는 추도식이 남았다. 모두가 대화를 나누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장 마지막에 묘비 앞을 떠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도식을 겸한 만찬을 위해서 성의 식당에 도착해 있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가장 먼저 에스메랄다, 선대 백작의 뒤를 이어 새로운 백작이 될 그녀가 모자와 베일을 벗었다. 금색 물결이 흘러내리며 백작과 똑 닮은 녹안이 조문객들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은 아레스, 차례로 쌍둥이들까지 복면을 벗으며 주최자를 위해 비워진 긴 테이블의 중앙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 모두에게 의문을 선사했으면서 대부분에게 답을 찾지는 못하도록 했던 그 뜬금없는 사람. 이윽고 의문의 그 사내가 복면을 벗었을 때 중앙 귀족들 쪽이 가장 먼저 어수선해졌다.

“무겁고 또한 귀한 걸음을 해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눈물에 젖어 붉게 충혈된 눈매를 곱게 접은 에스메랄다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황자 전하께도 인사를 전해야겠지요. 참석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에스메랄다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아르페시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문객들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길고 긴 테이블의 중앙에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마주 본 상태로 자리를 잡았다.

“올 수 없었다면 모를까… 가능해졌으니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레스도 데려다주어야 했고.”

아르페시스의 말은 선언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힘이, 사방을 푸른 물결로 뒤덮었다는 그 힘이, 기록에서만 보아 왔던 그 미지의 힘이, 인간의 거리조차 뛰어넘을 수 있다는 선언.

그 앞에서 조문객들은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귀족들의 시선이 어떠하든 대외적으로 아르페시스는 정당한 계승권자고, 황제의 적자다. 현황의 권력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는 에렘에 둘뿐인 황자이기에, 사생아라는 멸시는 속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거기에 인외자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아르페시스 앞에서는 말조심, 행동 조심, 그리고 생각마저 조심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장례가 시작될 무렵 조문객들은 이번 세대의 백작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분명 그렇게 확신했건만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이제 완전히 망가져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테노리엘의 작위는 조만간 에스메랄다의 형제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반드시.

추도식을 위해 모여든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복면을 벗어 낸 사내로 인해서, 조문객들의 확신은 다른 방향으로 변했다. 황후가 되든, 황자비가 되든, 에스메랄다가 가진 이름과 계승권이 바뀔 테지. 아르페시스가 앉아 있는 자리가 조문객들의 생각을 그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귀족들이 모인 식사 자리는 음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10분, 20분이 아니라 한 시간, 두 시간이 넘도록 오갈 대화를 위한 것이다. 이동이 제한된 위치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기에 귀족들의 세계에서 자리는 정말 중요하다.

곁자리가 신뢰하는 신하에게 내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자리라면, 맞은편은 동맹에게 내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자리다. 가장 자주 시선을 마주치고, 정찬의 경우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함께 나눠 먹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형식적이고 공식적인 절차만 없었을 뿐이지, 혼인으로 동맹을 맺은 배필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자식 된 도리로 온 것이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하는군.”

조금은 딱딱한 아르페시스의 말이 귀족들의 뇌리 깊은 곳에 남았다. 그가 줄곧 혈족의 위치에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테노리엘 중 누구도 설명이나 부정을 하지 않았는데, 저런 말을 한다고?

이건 아르페시스가 백작의 사윗감으로서 장례에 왔다는 사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정보가 너무 복잡해서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저 분명한 결과만이 존재했다.

내전이 거의 확실시될 만큼 반군의 움직임이 격한 와중에, 황자가 테노리엘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테노리엘은 이미 황태자와 저들을 놓고 선택지를 던졌으니… 결국 오늘의 자리는 황태자를 향한 황자의 도전을 의미했다.

“분명 아버지께서도 마지막 길에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어 기쁘실 겁니다.”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와 함께 경각심이 오르는 와중에도 조문객들은 제대로 된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지금의 상황을 내전과 연결시킨 황위 쟁탈, 즉 아들이 친부를 치는 패륜의 징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반군은 황태자나 황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니다. 황제가 남부에 행한 수많은 차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내부 인사들이 아닌 외부 인사들이 보고 있는 반군의 목적은 명확하다. 남부를 향한 정당한 지원. 그들은 황위를 찬탈하고자 무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주인이 바뀌든 말든, 남부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반군과 테노리엘의 관계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반군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활동을 한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나, 테노리엘과 반군의 연결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증거가 없음에도 심증으로는 확신할 수 있는 테몬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고로 테노리엘과 함께 나타난 아르페시스가 내전으로 황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보기에는 힘들다. 하지만 테노리엘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혼인으로 동맹을 맺겠다는 건, 분명히 황위에 뜻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전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오늘의 자리는 뜻만 있고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의 결합을 그냥 보고 넘길 리가 없으니까. 반면 지금이라면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아르페시스의 개인적인 힘, 인외자라 불리는 그 힘 때문에 황제가 그를 예전처럼 멋대로 억누를 수가 없다.

그저 권력 구도의 측면에서 황태자냐 테노리엘이냐를 결정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 크게 잡아 봐야 훗날 터질 내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다음 제위의 주인을 고르는 자리였던 것이다. 황태자냐, 아르페시스이냐.

사실, 황실 쪽에서 보낸 몇몇 중앙 귀족들을 제외한 다른 조문객들에게는 색다른 의미가 생긴 자리였다. 과거와 달리 아르페시스의 가치가 엄청나게 치솟았으니까.

오늘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의 8할 이상은 지방 귀족들이다. 황도에 있는 중앙 귀족 중 반황실 세력, 즉 반군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 이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중앙 귀족 중에는 황제파에 속한 몇몇이 전부다.

대부분의 지방 귀족들이 중앙 귀족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중앙 귀족들이 가진 채 휘두르기 때문이다. 국정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 지방 귀족들은 그 권력을 싫어해서 쥐지 않는 게 아니다. 이미 꽉 잡은 놈들에게서 빼앗아 올 수 없으니 중앙 귀족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외자가 된 황자가 테노리엘과 함께 황위에 도전하겠다라. 무려 인외자라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풍랑이 황제의 힘 아래에서 잔잔하게 고여 있던 에렘의 권력 구도를 뒤엎을 것이다. 그 풍랑 속에서 하는 항해는 거칠고 어렵겠지만, 수없이 많은 것이 가라앉고 떠오르겠지.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챙기고 버릴지는 각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터.

“그럼 잔을 들어 보죠.”

찰나의 침묵 속에서 오간 생각들이 낭랑한 목소리에 의해 밀려났다. 에스메랄다를 시작으로 모두가 잔을 들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잊지 않았다.

“고인을 위하여.”

“고인을 위하여.”

그녀의 선창을 모두가 따라 했다. 오늘은 선대 테노리엘 백작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고, 그들은 고인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조문객일 뿐이다.

* * *

오늘은 조문객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지를 전달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지금 테노리엘을 고른 이들에게 선택지를 계속 유지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자리다. 에스메랄다는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귀족들 틈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다음번에는 추도가 아닌 축하를 위해 만나 뵐 수 있을 테니까요.”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약혼식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어 오는 라히크 백작에게 그녀는 수줍음을 담은 미소로 답했다.

“그건 조금 더 훗날이 되겠지요. 그저 저의 개인적인 축하를 위한 자리일 겁니다.”

에스메랄다는 다음 답안지를 내야 할 시일까지 지정해 주며 조문객들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지금 당장은 그녀의 근방에 자리를 잡은 공후백들과의 대화가 전부지만, 오늘 참석한 이들이 대부분 그들의 봉신이니 정보는 충분히 풀리리라.

“그때는 황도에서 뵙게 될까요?”

라히크 백작 부인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오고 간 대화는 그녀의 생일인 카 76일에 황도에서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이제 그들은 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황도로 가서 다시금 발을 들이느냐, 여기서 빠지느냐.

“곧 황성에서 열릴 연회에도 참석해야 하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테노리엘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거리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유치한 자랑이었지만,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말이기도 했다.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을 위해서 힘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이제부터 귀족들은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의 곁에 서 있음으로써 변한 가치를 따져 계산을 해야 한다. 대부분은 향후 결론을 내렸을 때 원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게 황도로 향하겠지. 오늘의 정보를 그간 우호를 다져 온 이들과 나눌 테니 이번 겨울 동안 황도는 꽤나 북적이게 될 것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르페시스의 곁에서 식사 시간 동안 귀족들의 말을 적절히 끊어 내는 중이었다. 아르페시스가 서로를 떠보는 자리에서는 능하지 못했기에 페르멘이 보좌처럼 따라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다른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그를 신경 써 주지 못할 것을 걱정했더니 페르멘이 자청해 주었다. 아레스나 오멘은 분명 가족이고 형제이나, 그녀가 하는 일에는 개입시킬 수 없었다. 해서 페르멘이 자청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시선이 마주치자 페르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미 묘지에서 돌아오던 길에 그녀는 일찍 자리를 비우겠노라 얘기를 해 두었다.

“조금 이르지만, 저는 이만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저도 오늘은 일찍 쉬고 싶군요.”

오늘의 행사가 생일 연회도 아니고, 주최자가 반드시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추도식이란 본디 주최자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경우가 많은 행사다. 주최자가 없어도 추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가족을 잃은 이에게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라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아르페시스는 그녀보다 오래 남아 있을 예정이다. 오늘은 다음 제위에 오를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아레스도 아직 오래 거동할 만큼은 아니기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이제 추도식은 쌍둥이들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쿠베트 후작님께 응접실에서 잠시 뵙자고 전해 드리렴.”

에스메랄다는 식당 앞에 서 있는 시종에게 말을 남기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이후 묘비에 꽃을 올리러 가기 전까지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다. 반군 중 일부와 교류하며 아르페시스의 자리를 노리는 두 명의 공작을 손봐 주어야 한다. 그전에 쿠베트 후작을 만나 봐야겠지만.

계단을 올라 2층에 멈춰 선 에스메랄다는 함께 식당을 빠져나온 아레스를 돌아보았다.

“전 후작님을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나중에 보자.”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아레스가 위층으로 간 후에야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으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무실에 들러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지원금 서류와 기한 연장 서류를 정리해서 응접실로 가져오렴.”

“예, 아가씨.”

그에 집무실에 있던 다나가 곧장 답했다. 그녀와 첸은 장례식 이후 곧장 업무로 복귀한 상태였다. 관련 서류는 에스메랄다가 이미 모두 작성해 두었으니 다나가 형식적인 검토만 끝내면 된다.

이후 곁문을 통해 응접실로 넘어간 에스메랄다는 몸을 소파에 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 고작 두어 시간 전에 백작의 장례를 치르고 왔다.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아르페시스의 곁을 비우면서까지 먼저 자리를 떠났지만,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쉴 시기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기다린 손님이 도착했으니까.

“영주 대리, 아니… 이제는 백작이라 불러야겠군.”

“승계 절차는 아직 진행 중인지라, 그저 편히 부르시면 됩니다.”

응접실 문을 지나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과거보다 왜소해진 쿠베트 후작과 한때 누구보다 친했던 루이자.

“1여 년 만인가?”

“지난겨울에 보았으니 그쯤 되었겠군요. 우선 앉으세요, 얘기는 차차 이어 가죠.”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에스메랄다는 조금 희미한 미소를 그린 채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루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리디. 그간, 그간 잘 지내셨어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루이자도 에스메랄다처럼 흐린 미소를 지어 보았다. 후작은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놓치는 게 많아졌다. 후작은 자신이 정말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한숨을 참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야 언제나 똑같은 것을요.”

서로 간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안으로 들어온 시녀들이 다과를 준비했다.

“직접 맞이해 드렸어야 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테노리엘 영식이 신경을 많이 써 주었으니 마음에 두지 말게.”

후작이 느긋한 태도를 취하며 한 손으로 찻잔을 쥔 반면, 루이자는 초조한 듯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정신이 없었을 텐데 식이 끝나자마자 찾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쿠베트 후작은 진심을 담아 말했고 에스메랄다는 웃음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마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말은 전선 지역이 아님에도 마수를 상대하는 쿠베트의 부담이 나날이 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사라진 시간에서 쿠베트는 1441년경 황실에 지원을 요청하고, 황제는 3천의 중앙군을 파견해 주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서도 일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지난해 겨울, 쿠베트는 인근 영지에 도움을 청했고 테노리엘과 록스 백작가, 그리고 아르텐 공작가는 지원병을 보냈다. 황제의 세력에 속하는 레트몬 백작가를 제외하면, 후작령과 영지의 경계선을 접한 모든 가문이 응한 것이다. 쿠베트가 무너지면 다음은 그들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곧 1년 조건으로 파병한 병력이 귀환할 시기다. 후작은 조문객인 동시에 가문 간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를 원하는 계약 당사자이다. 아마도 파병 기간을 늘리는 것은 물론, 병력 증원까지도 바라고 있겠지.

“아무래도 제가 오래 자리할 여건은 되지 않는지라, 곧장 본론을 논했으면 합니다.”

“당연히 이해하네. 나도 자네를 오래 붙들 생각은 없으니 바로 진행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후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곧장 용건을 꺼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파병 기간을 늘려 줄 수 있겠나?”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같은 기한을 연장해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그리고… 가능하다면 증원도 조금 부탁하고 싶네.”

이전 용건에 대해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번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때였다.

“국경 경비와 치안 유지, 그리고 유사시를 위한 전력 외에 가능한 병력을 모두 보내 드렸습니다. 기간의 연장은 가능하나 병력 증원은 불가능합니다.”

“국경 지역의 병력 피해가 너무 커서 추가 지원이 필요하네. 지금의 병력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해.”

“죄송하지만 후작님, 병력 증원에 대해서만큼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생각을 곱씹는 것 같던 후작은 오래지 않아 반문했다.

“다른 방식으로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에스메랄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때마침 곁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다나가 정리한 서류를 에스메랄다에게 전해 준 후 돌아갔다. 아무리 우호 가문이라고 하나 손해를 떠안으면서까지 퍼다 줄 수는 없다. 그게 병력에 관한 문제라면 절대 안 된다.

가문의 사병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수십만의 영지민이기 때문이다. 영지민은 영주의 근간이며 가문의 기반이다. 그들이 없으면 가문의 존속이 흔들린다.

내전이 일어날 것을 아는데 여기서 병력을 더 빼내는 건 위험하다.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전쟁 중에는 물자의 우선순위가 백성이 아닌 군에게 책정되니까.

자연스럽게 식자재나 소금 같은 생필품의 물가가 오르게 되고, 그에 따라 백성들은 먹고사는 게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결국 소매치기나 강도 같은 절도 범죄가 증가할 테니 치안을 유지할 병력은 뺄 수 없다. 아직 아비체룬과의 관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국경병은 건들 수 없고, 내전을 위해 출정할 병력 역시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쿠베트로 보낸 지원병은 그런 필수적인 부분을 제한 후 가용이 가능한 병력 전부를 차출한 규모였다. 더 이상의 증원은 안 된다.

하지만 병력을 빼낼 수 없다고 해도 쿠베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남아 있다. 에스메랄다가 단호하게 말을 끊은 이유는 쿠베트 쪽에서 미련을 두지 않고 병력 증원 건을 포기해야 향후의 일 처리가 쉽기 때문이다.

“당장으로서는 금전 지원이 최선일 것 같군요.”

“용병을 고용하라는 말이군.”

이미 그들은 상당한 자금을 들여 용병을 고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모자라기에 병력 증원 얘기가 나온 것이다.

쿠베트 후작령은 전선이 아니기에 국법으로 제한된 사병의 규모를 넘을 수 없다. 몇만이라는 규모의 남부군이 지키는 전선보다는 좁은 지역이지만, 그래도 마수와의 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는 소모전이다. 단일 영지의 규모로 버티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사병을 더 내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하니, 에스메랄다는 쿠베트가 필요한 추가 병력을 용병 쪽에서 병력을 채우길 바랐다. 내전이 벌어지면 용병들이 고용되는 건 당연하다. 훈련을 시키지 않았음에도 무력을 보유한 병사를 충원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전쟁 시에는 용병을 두고 양측이 신경전을 하기도 한다. 더 많은 보수로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적진의 용병을 빼 오는 것이다. 전날 적국의 편에서 자국의 병사를 죽였던 용병들이 다음 날에는 자국의 편에서 타국의 병사를 죽인다. 전장에선 흔한 일이다.

그러니 황제 측이 용병으로 병력 증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면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어느 정도 묶어 두어야 한다. 분명 이건 용병을 묶어 두겠다는 의도가 있기에 고른 선택지다. 하지만 내전이 다가왔을 때 영지를 흔들리지 않게 지키면서도 쿠베트를 저버리고 싶지 않기에 고른 선택지이기도 했다.

에스메랄다는 다나가 전해 주고 간 서류 중 일부를 후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상환의 일부와 이율을 제한 금전 지원이 테노리엘이 도와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서류에 기재된 것은 금액의 양도 방식과 일자, 혹은 상환 기일이나 이윤 같은 정보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서류에 적힌 조건으로 금액을 지원하는 조건이 몇 가지 더 붙어 있었다. 용병들을 1년 단위로 장기 고용할 것, 계약 기간 위반 시 용병들이 내야 하는 위약금을 10배로 책정할 것, 그리고 용병들이 병장기를 교체하고자 할 때 테노리엘 영지의 장인들에게서 구매한 것을 판매해 줄 것.

“상환의 일부?”

후작의 목소리가 조금 격양되었다. 금전 지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모두 가문의 빚으로 남는다는 것인데, 에스메랄다는 그중 일부를 제거해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영지의 병력을 빼기 어려운 시기지요.”

“…….”

“하지만 마수의 문제를 외면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상환의 일부를 제하는 방식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거의 7할에 가까운 금액을 무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남은 3할에도 이율이 적용되지 않기에 원금만 상환하면 된다.

“생각보다… 과한 조건인데.”

금액의 총액을 확인한 후작의 표정은 분명 밝았으나 조금은 복잡해 보였다.

“마음만으로는 사병을 모두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여의치 않기에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고요. 실상은 그리 과하지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시기를.”

에스메랄다 나름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였으니 후작에게 찾아갈 부채감이 줄 것이다.

“이러니 내가 여길 온 것이지…….”

후작은 일견 뿌듯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또한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미 다른 두 가문에서는 모두 파병의 연장만 체결하고 손을 뗐으니 그럴 만도 하지.

“복잡하고 무거운 걸음이셨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감사드리고 있지요. 혹여 여전히 불편하시다면 훗날을 위한 성의로 여겨 주세요.”

“훗날 말인가?”

후작은 이미 테이블 위에 비치된 깃펜을 들어 서류 아래 서명을 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서명과 영주 대리의 인장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에스메랄다는 명확한 답을 피했다. 아비체룬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쿠베트라는 패의 가치가 변할 테니 아직은, 가림막이 필요하다. 더욱이 병력 증원의 필요성을 남겨 놔야 쿠베트가 중앙에 발을 들이려 할 터. 아직은 전부 해결해 줄 때가 아니다.

“그리 멀지 않은 훗날이라는 말이 제가 언질드릴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래, 성의라 했으니 마음에 남겨 두겠네.”

에스메랄다가 말을 덧붙이는 사이 후작은 서명 옆에 가주의 인장을 찍었다.

“고맙네.”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이지요.”

두 장으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나누어 가진 후 할 일은 파병된 병력의 기간 연장이다.

“다만, 타지 생황을 오래 하도록 두는 것은 가혹하니 병력의 구성은 바꾸었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들 가족이 그리울 게 아닌가.”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조만간 병력 교체를 위한 이동을 시작하죠.”

연장된 파병 조건은 그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것, 손상된 병장기의 수급을 책임져 줄 것, 그리고 부상 시 우선적으로 치료를 행해 줄 것 등, 지난해와 똑같았다.

테노리엘은 쿠베트에게 용병을 보낸 게 아니다. 엄연한 지원 병력이기에 그들의 봉급은 테노리엘이 책임져야 한다. 그들을 파병했다는 것 자체가 테노리엘의 사병이라는 의미인데, 그들의 봉급을 쿠베트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오르덴 공작가와 록스 백작령 쪽에서는 조금씩 조건이 다르다고 들었지만, 에스메랄다는 파병한 병력을 두고 돈을 챙기는 저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뒤 후작은 다시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고, 에스메랄다는 이 또한 웃음으로 흘렸다.

“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 봐야지. 오늘 고생 많았네.”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이지요.”

“……백작이 참, 흐뭇하겠군.”

과연 그러할까? 부친의 장례마저 이득을 재고 따지는 정치판으로 만들었는데?

쓰라린 감정이 올라왔지만 에스메랄다는 온화한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후작은 더 머물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루이자는 후작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피곤하실 건 알지만… 조금만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루이.”

“이런, 젊은이들 대화가 남았군. 그럼 늙은이는 비켜 주어야지.”

잠시 두 여인을 살핀 후작이 가벼운 말로 자신을 배제했다. 계약서와 인장을 챙긴 그는 에스메랄다와 악수를 나눈 후 지체 없이 응접실을 떠났다. 한 공간에 남겨진 것이 세 사람에서 두 사람이 된 것뿐인데, 세 사람이 모두 사라진 것만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시녀들에게 식은 차를 새로 내어 오라 지시를 내리는 동안에도, 다시금 잔을 채운 찻물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내는 동안에도,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먼저 말문을 연 루이자는 그녀들이 교류를 하던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이자 역시 나름의 힘든 시간을 보내 왔고, 에스메랄다는 그 시간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네, 오랜만이에요.”

분명 주고받았던 인사를 다시 거듭하는 동안 차는 식어 가고 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쁘네요. 오늘 식에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먼저 말문을 열었으나 대화를 계속하지 못하던 루이자를 대신해서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당연히 와야죠…….”

차가 바뀌는 동안 잔을 내려놓았던 루이자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꼼지락거렸다.

“혹시…….”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녀에게 무척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시간이 된다면, 돌아가기 전에 오라버니께도 한번 들러 주세요. 기뻐하실 거예요.”

대번에 루이자의 입매가 아래로 처졌다. 리퀘나에서 페드로를 헐뜯으며 엉엉 울던 루이자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지난 2년은 언제나 소리와 함께 울며 감정을 모두 드러내던 여인이 소리와 감정을 눈물에 담고 고요하게 울 수 있게 될 만큼 긴 시간이었다.

“……미안해요.”

하필이면 사과라니, 이번에는 에스메랄다의 입매가 아래로 처졌다.

“빨리 올 수가 없었어요.”

“…….”

“너무 미워서……. 그 사람이 선택한 게 내가 아니라 리디라서, 그게 너무 미워서……. 리디 잘못이 아닌데, 아는데도 원망하느라 올 수가 없었어요.”

“……루이 잘못이 아니에요.”

상대방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은 거둘 수가 없고, 그런 스스로를 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나날이 반복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정말 그 사람이 잘못을 했느냐의 문제보단, 스스로가 상대방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힘든 것이다.

분명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와 페드로의 문제에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기에 당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정작 루이자는 에스메랄다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원망을 거둘 수 없는 스스로를 보며 힘들어했겠지.

에스메랄다라고 해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날 표정을 보았고, 페드로가 루이자에게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처음에는…….”

에스메랄다는 이렇게 털어놓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다. 그녀와 아르페시스도 서로에게 속에 담은 것을 다 털어 내고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지 않나. 그래서 루이자가 하는 말을 모두 들어 주려고 했었다.

“당장이라도 그 사람이 내륙으로 돌아올 줄 알았어요. 리퀘나에서 내 침실에 왔었거든요.”

하지만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처음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분명 때때로 엉뚱한 때에 엉뚱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 루이자의 매력이었지만…….

“허락해 주면 후회할 거라고 말해 봤자 내가 할 답은 정해져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 줬는데!”

페드로와 그녀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 본인의 침실 사정도 아니고 오라비의 침실 사정은 관심 밖이다.

“당장이라도 나한테 올 것처럼 안겨 오더니, 끝나고 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루이자를 막을 수도 없고, 계속하라는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간 말을 하지 못해 답답했는지 봇물 쏟아 내듯 얘기를 꺼내는 루이자를 말려야 할지, 이대로 속 시원하게 계속 말하게 둬야 할지…….

“내륙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오늘이 끝이라고, 내가 막 울면서 때려 봤거든요? 그런데 대답이 안 변하더라고요.”

페드로와 있었던 일을 말하는 루이자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참 오랜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기는 경고를 했대요. 후회할 거라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서 밤새 또 놔주지는 않고!”

이런 식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건 추억이었다. 루이자와 페드로가 묘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진 후 참 오랜만에 겪는 일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전하 곁에 있으면 두 명이고, 저는 한 명이잖아요?”

대충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사람 선택이 맞는 건데, 그 정도는 아는데…….”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왜 이럴까? 모두들 혼자 끌어안은 채 힘든 길을 자처한다. 저부터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군다면 적어도 혼자만은 편할 텐데.

어제 아침 아르페시스를 품에 안고 했던 생각을 루이자를 보며 똑같이 하고 있다. 원망이든, 의무이든, 혹은 잘못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남에게 미룰 줄을 모른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에게 던져진 짐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지 못해서 힘겹게 짊어진 채 버티는 사람들이다. 곁에 있음에 아프고 힘들지만 도무지 놓을 수가 없다.

“루이.”

미안하다는 흐느낌만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나지막한 부름이 내려앉았다. 루이자가 훌쩍거리며 시선을 맞춰 왔다.

“전 오라버니에게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하지 않았죠. 그래서 참, 많이 미안해요.”

“그건 리디 잘못이 아니에요. 돌아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을 사람인걸요.”

돌아오라는 말을 했을 때 페드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기로 택한 그녀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루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나는 미안해요.”

루이자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자 그녀가 콧물을 훌쩍이며 에스메랄다를 훔쳐보았다. 루이자는 잠시 망설이긴 했으나 결국 과거의 어느 날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녀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우린 서로에게 미안한 것이 많죠. 계속 스스로가 잘못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놈의 잘못을 따지는 건 그만하자. 따지고, 원망하고, 탓할수록 힘들어지기만 한다. 아르페시스도, 가족들도, 지금 함께 있는 루이자도. 가슴에서 지우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나. 그럼에도 결론은 언제나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해도 에스메랄다는 결국 그 미련한 사람들을 모두 사랑한다.

“전하와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매일 서로에게 사과만 했죠. 그러다 보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에스메랄다는 촉촉하게 젖은 루이자의 눈매를 쓸어 주며 말했다.

“그러다, 더는 힘들기 싫어서 전하와 저는 규칙을 하나 정했어요.”

이번에는 흐린 미소가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과거의 그녀와 언제나 함께했던 미소를 지어 보았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듯하고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그런 미소.

“미안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자고, 그렇게 약속했어요.”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품에 꼭 안겨 오는 체온이 그리웠다.

“저도… 그러니까, 저도… 그렇게 말해도 돼요?”

루이자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어 왔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웃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고, 루이자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 저도 염치가 없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서…….”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만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다시 될 필요 없어요.”

“네?”

“그날…….”

에스메랄다는 루이자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전선으로 떠난 이들을 기다리던 나날도, 그녀와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하던 나날도.

“그날부터 계속 친구였으니까요.”

품속에서 꼬물거리던 체온이 희미한 물기를 머금은 채 속삭여 왔다.

“제가 리디를 좋아하는 거 알죠?”

“제가 루이를 좋아하는 것도 알죠?”

두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함께 자리를 지켰다.

* * *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에스메랄다는 해야 할 일을 오래 미룰 수가 없었다. 루이자에게도 후에 묘지에 함께 가자는 말을 전했기에 두 사람은 자정에 다시 만나기로 한 후 헤어졌다.

집무실로 돌아온 에스메랄다는 조금 나른하고 복잡한 숨을 내쉬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게 사라진 건 일정한 박자를 타고 울리는 소리가 들린 후였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루이자와 함께 있으며 했던 생각을 더 깊게 곱씹는 중이었다. 벌써 몇 명이고 보고야 말았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는 또 그들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죄도, 원망도, 남의 것으로 미루지 못해 힘든 길을 자처하는 사람, 한결같고 어리석으며 또한 강인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아르페시스도, 루이자도, 오멘과 페르멘, 아레스, 그리고 이제 떠나 버린 백작까지. 그녀가 행해 온 일 때문에 어딘가에 있을 그들이, 사랑받아 마땅할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겠지.

잠시나마 떨쳐 냈던 공포가 다시금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가 가게 될 지옥이 가져온 공포. 에스메랄다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흘렸다. 두 가지 기억이 그녀를 침범하며 일렁거렸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선택했었다. 뒷골목 건달들이나 불법 노예상, 그리고 권력을 위해 악행을 자행하는 귀족과 신관들까지. 분명 그녀는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은 자들을 사랑했으나, 그 선택지는 죽음과 함께 버렸다.

반면 지금의 시간에서 그녀가 택했던 것은 ‘그렇기에’였다. 악하고 간사한 자들이 있기에 증오한다고,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핏물이 흐른다 해도 신경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길고 긴 시간을 다시 걸어 도착한 오늘, 에스메랄다는 그 선택지마저 버리고야 만다.

어딘가에 있을 그들을, 그녀가 사랑해 버린 이들과 같은 그들을 죽이며 가야 할 길이 너무 어렵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눈앞에 놓인 선택지를 다 골라서 각기 다른 길로 모두 가 보았는데 왜 두 길 모두 더 가는 것이 두려운가.

“이 길도, 저 길도 왜…….”

그녀는 자신이 골랐으나 또한 버린 선택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도에서 그녀에게 돌을 집어 던지던 백성이 일부의 과격한 이들임을 안다. 모든 백성이 그녀의 죽음을 기원한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어딘가에 있는 이들은 에스메랄다가 마녀일 리 없다고 비호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백성들을 증오하기에 과거의 선택지를 다시 고를 수가 없다. 그녀가 돌에 맞아 가며 죽던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백성들을 이해하고 연민한다 해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다.

“남은 건…….”

그럼 남은 건 다시 ‘그렇기에 증오한다.’라는 선택지인데, 에스메랄다는 그것 역시 고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죽일 누군가는 분명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 테니까. 그녀의 가족들처럼, 친구처럼, 연인처럼, 분명히.

에스메랄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을 지키고자 했던 테노리엘 백작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수없이 많은 백성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황제도 되지 못했다.

분명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부친의 가르침 위에 그녀만의 것을 또 쌓아 단단히 만들어 냈던, 오로지 그녀만의 정의가 있었다. 분명… 그러하다고 믿었다. 그게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라 굳게 믿으며 그 믿음으로 지켜 내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갈대처럼 바람에 따라 흔들린 그것을 어찌 신념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바라지 않았던 답이 돌아왔다 하여 손바닥을 뒤집듯 바뀌어 버리는 것의 이름은 신념이 아니다. 그저 신념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기적인 욕심이었을 뿐.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무엇을 마주해도 꺾이지 않는 것을 신념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때 그녀가 가졌던 것이 정말 신념이었다면 가족들이 죽었다 해도, 그 목숨으로 평화를 누린 이들이 그녀를 죽였다 해도, 변해서는 안 되었다. 백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버티지 못한 채 변해 버렸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러한데도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학살한 그녀에게 선고될 지옥의 형벌이 두렵고, 그녀의 선택으로 죽어 나갈 훌륭한 이들의 목숨이 무거웠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선택을 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방황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골라야 하나. 참으로 우유부단하기 그지없구나. 왜 그녀에게는 이렇게 힘든 선택지만 찾아오나.

그때 번민에 뒤덮인 에스메랄다를 파고드는 것이 있었으니, 펄럭이는 새의 날갯짓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창밖을 돌아보았으나 어둠이 모든 것을 가린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의 날갯짓 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래… 바삐 움직여야겠지.”

오늘의 자리에서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를 함께 본 귀족들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바쁜 것이다. 지금 어둠을 틈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을 새들이 그 증거였다. 에스메랄다는 펄럭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창밖을 주시했다.

“다나.”

줄곧 본인의 일에 전념하고 있던 다나가 에스메랄다의 부름에 곧장 반응을 보였다.

“예, 아가씨.”

번민은 여전하건만 그녀는 입을 열어 말했다. 시간은 찰나의 순간조차 기다려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가 버리는 잔인한 놈들이니까.

“부소네 공작을 쳐야겠구나.”

제위를 탐내며 반군을 통해 세력을 만드는 두 명의 공작 중 에스메랄다가 고른 건 부소네였다. 황태자는 과거에 있었던 명령서 사건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반군과 연결점을 가진 부소네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현명하다. 아직 보관 중인 황태자의 인장을 공작 성에 넣어 두면 정황 증거가 함께 엮일 테니 반론은 힘을 얻지 못하리라.

인장의 수식은 기밀이기에 마도구에 보호 수식이 따로 존재한다. 수식에 접근하는 마나가 있으면 곧장 수식 자체가 소멸하는 형태다. 에스메랄다가 라그나의 마도구에 요구했던 폭발 수식과 같은 이치였다. 인장은 기밀에 더 무게를 두고, 에스메랄다는 공격에 더 무게를 두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장이 유출되었다는 것을 알면 황성 마법사부터 잡아들일 것이다. 당장 황실 인사들과 주요 귀족들이 인장을 바꾸겠지만 겨울이 끝나기 전 반군이 움직일 예정이다. 그녀가 중앙 정계에서 움직일 생각도 없으니 황태자의 인장은 더 이상의 효용 가치가 없다. 이번 일에 쓰는 게 더 이득이다.

아르텐은 건들지 않기로 했다. 공작령이 쿠베트 후작령의 남동쪽에 접해 있기 때문이다. 그쪽을 건들면 현재 지원병으로 마수를 막아내고 있는 쿠베트에게도 타격이 있을 터. 결국 부소네의 일로 아르텐에게 간접적인 경고를 전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 섰다.

“부소네 공작이 조만간 반군과 만나기로 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예, 머저리의 생일 연회 이후 은밀히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반군의 주요 인사들 주변에도 에스메랄다의 세작이 많다. 매수한 이들도 있고 애초부터 그녀의 사람으로 측근이 된 자들도 있다. 반군의 일은 5년 넘도록 진행되어 왔으니 에스메랄다의 눈과 귀가 정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황태자에게 공작의 행적을 알리렴. 현장에서 덮칠 수 있게.”

황태자의 옆에도 세작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한 명 있다. 현재 남부에 황태자가 고용한 용병들이 많으니 그쪽을 매수해서 정보가 올라가게 만들면 충분하리라.

아예 가문의 이름을 지워 주어야 제대로 된 경고가 될 터. 반군의 내전과 관련해 가장 먼저 몰락하는 가문은 부소네가 될 것이다. 명령서 탈취 건으로 남부에서 계속 에스메랄다의 뒤를 캐던 황태자에게 부소네의 행적을 알려 주면, 참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지.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탁, 탁, 탁, 일정한 박자를 타고 움직이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조벤 자작이 몇몇 인사들에게 뇌물을 쥐여 주었지. 그 흔적을 좀 풀어야겠는데…….”

부소네 공작의 봉신인 조벤 자작이 반군 측의 인사들을 포섭하며 뇌물을 뿌린 적이 있다. 당시 자금이 움직인 흔적을 잡아 두었으니 그걸 쓸 생각이었다. 부소네가 황태자에게 붙들리면 같은 짓을 하고 다니던 아르텐은 분명 위축될 것이다.

그때 쓸 수 있는 패를 손에 넣는다면 적극적으로 부소네를 없애서 본인의 행보까지 함께 덮고자 할 가능성이 크다. 부소네 측에서 반군에게 뇌물을 건넨 증거 자료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본인들이 반군과 연결되었던 흔적도 지우려 시도할 테니 만약을 위해 로부오들을 붙여야겠다. 훗날 아르텐을 옭아맬 약점을 이번 기회에 잡아 두는 것도 좋으리라.

“아르텐 공작 측에 세작들이 얼마나 있지?”

“루폰 남작의 보좌관이 매수되어 있고, 제그첸 자작의 호위 기사 중에도 아가씨의 개인 세작이 들어가 있습니다. 공작 성에 사용인 4명과 집사의 정부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보좌관이 좋겠구나.”

에스메랄다의 충직한 로부오들이 바쁘게 움직여 줄 것이다.

“예, 아가씨.”

다나가 대답을 한 직후, 이번 테노리엘 상단이 새로 체결한 계약서를 들고 온 첸이 넌지시 말했다.

“전하께서 잠시 다녀가셨습니다.”

결재를 위해 깃펜과 잉크를 챙기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르페시스가 왔었다고?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에 왔던 모양이다. 하긴, 그가 자리를 떠났으니 조문객들이 객실로 돌아가 전서구를 날렸겠지.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첸에게 알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자정쯤에 다시 만날 테니 지금은 일이나 하자.

[황제의 세작 및 중앙 귀족과 북부 귀족들의 동태 파악.]

그녀는 전보 마도구에 손을 올린 후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우선 그녀가 놓친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 * *

고작 몇 시간 전에 흙을 덮은 테노리엘 백작의 무덤에는 아레스가, 페드로의 무덤에는 아르페시스가 가장 먼저 꽃을 올렸다. 어쩐 일인지 오멘과 페르멘이 그에게 순순히 양보를 해 준 덕분이었다. 술을 들이부은 후로 아르페시스가 조금 안정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이어서 늦은 시간에 무덤가를 찾은 이들이 각자가 챙겨 온 꽃을 두 사람의 묘비 위에 올렸다. 에스메랄다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그들과 함께였다. 백작과의 일을, 페드로와의 일을 추억하며 그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옆에는 붉어진 눈시울로 페드로의 묘비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이자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함께 페드로의 묘비 앞에 꽃을 올렸다. 그녀들이 페드로의 묘비 앞에 자리를 잡자 에스메랄다의 형제들은 부친의 묘 앞에,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오른쪽에 앉았다.

형제들은 아직 어제 술이 덜 깬 것 같다며 음주를 거절했지만, 에스메랄다와 루이자는 마음 가는 대로 잔을 기울였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새벽이 깊어졌을 때였다. 루이자는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비틀거렸고, 아레스가 나서서 그녀를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우리가 할까?”

“이 정도는 거뜬해.”

오멘의 질문에 아레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그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에게 닿아 있었다. 루이자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거겠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리를 떠나기 직전, 에스메랄다는 묘비 앞에서 그들을 배웅하는 페드로와 부친을 보며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페르멘 오라버니.”

그러면서도 페르멘을 불러 해결해야 할 문제를 언급했다.

“제 옹알이를 가져가셨다면서요?”

“으, 으응?”

“아버지의 유품이면 제게도 상속되어야 할 텐데요.”

“…….”

“오라버니들께서 기록하신 것은 관여하지 않겠지만, 아버지 유품 중에 제가 기록된 수정구는 돌려주세요.”

쌍둥이가 눈에 쌍심지를 켰고, 아레스도 조금의 원망을 담은 채 아르페시스를 돌아보았다. 본래의 눈빛이 노려보는 선에서 끝났다면, 이번에는 꽤나 살벌한 수준까지 나아갔다.

쌍둥이에게 둘러싸인 아르페시스가 도움을 청하듯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살짝 시무룩해진 아레스와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묘지를 거의 다 벗어났을 무렵,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레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셋이서 죽이 잘 맞아.”

“그런가요?”

“아르페시스가 두 녀석을 많이 봐주는 게지. 웬만한 일은 다 오냐오냐해 주고 있다.”

문제의 술판이 생각보다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항시 예를 지키던 아레스가 그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편히 대해 달라기에.”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레스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페르멘에게 듣자 하니 생각보다 잘했다던데.”

아레스의 말에 에스메랄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추도식에서의 일을 언급하는 게 분명했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병신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리 평하더구나.”

“……네.”

아르페시스가 귀족들의 대화에 능하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귀족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속내를 파헤치기 위해 대화라는 것을 한다. 그런 대화를 위해 필요한 건 호기심과 의심이다.

대체 무얼 감추고 있느냐는 호기심, 그리고 상대방이 내뱉은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의심. 에스메랄다가 아는 아르페시스는 이 두 가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대해 논해 보면, 그는 본래부터 타인이나 타인의 일에 대체로 무심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행동을 볼 때 왜? 라는 의문을 잘 가지지 않는다.

에스메랄다와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인 것이다. 그녀는 누가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곧장 저 사람이 왜 저기에 가지? 라고 생각하며 이유를 파고든다.

반면 아르페시스는 그저 가는구나, 하고 시선을 돌려 버린다. 뭐, 예외적으로 에스메랄다의 일에는 조금 민감한 것 같지만… 일단은.

다음으로 의심에 관한 것을 따져 보자면 그의 성격, 혹은 성향 때문이다. 아르페시스는 자의적으로 누군가를 속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감추어야 할 이유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니까.

에스메랄다와 연인 사이인 것을 감추려는 것이나 반군에게 접촉하려던 것처럼,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몇몇 일에 대해서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이것도 일단은.

분명 머리는 의심을 해야 한다고 인지하기에 어설프게 따라는 하나, 근본적으로 그의 무의식 속에는 타인을 속이거나, 타인에게 속는 상황 자체가 없다. 본인이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에 타인을 의심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며 억지로 따라 하니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을 수밖에. 분명 억지로 따라 하는 정도, 그 이상은 되지 못했는데 이번 시간에서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영애는 내가 모시마.”

아르페시스의 성격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던 에스메랄다에게 아레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녀는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아레스를 올려다보았다.

후작가에서 데려온 사용인들을 불러도 될 텐데, 새근거리며 잠든 루이자를 굳이 챙기려 드는 아레스의 행동에서 에스메랄다는 묘한 확신을 얻었다. 루이자가 그녀의 언니가 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지금 아레스는 본인과 루이자를 엮고 있으니, 그녀와의 혼례도 염두에 두라는 의미다.

분명 에스메랄다가 백작 성에 도착했을 때 아레스는 전선에 복귀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이다. 그가 한 손으로도 마수와의 전투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지금 아레스의 행동은 그 가능성의 전제가 불가능해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한 손 전투로 출정하는 것이 자살과 다를 바 없을 만큼 무의미하다면, 가문 간의 동맹을 위해 혼례를 올릴 수도 있다고. 전선이 아니라고는 하나 쿠베트는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겠지. 물론 지금의 사안이 쿠베트 후작과 논의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반드시 쿠베트여야 한다는 의사 표현도 없었다.

아레스는 그저 자신의 의중과 향후의 행보에 대해 미리 언질을 준 것뿐이다. 혼사라는 게 원한다고 하여 뚝딱 되는 것도 아니고, 루이자가 그와의 혼인을 원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입장에서 쿠베트와의 동맹은 달가운 소식이다. 그게 사적인 감정 때문이든, 대의적인 명문 때문이든.

본래 아레스가 죽기 전까지 혼례 문제에 고개를 내젓기만 했는데…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내일 보자.”

이번에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아레스는 뺨에 답례를 받고 곧장 돌아갔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도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긴 한숨이 그녀를 찾아왔다.

에스메랄다는 지금부터 자신이 겪을 일을 알고 있었다. 눈물과 추억으로 고인을 보내고 나면 남은 이는 공허해지고, 그건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따라오는 한숨과 함께 씻고 침대에 도착한 그녀는 인형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찾아온 기억과 추억, 그리고 제 발로 걷어찼기에 잃은 기회까지.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어떻게든 가족들과 함께 버텨도 혼자 남으면 이렇다. 다른 형제들도 똑같을 것이다. 가족을 잃는다는 건 그런 거니까.

사라진 시간에선 이런 점 때문에 장례 직후에는 가족들과 있는 시간을 늘리곤 했다. 모두 떠난 후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홀로 모두 움켜쥐었지. 에스메랄다는 문득 묘지가 있는 방향을 보며 생각했다. 형제와 부모를 잃는 것도 이토록 힘든데, 자식을 잃는 건 대체 얼마나 힘들까… 하고.

사라진 시간에서 백작은 에스메랄다를 제외한 형제들을 모두 먼저 묻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고통을 덤덤하게 품었던 부친의 대단함을 새삼 깨닫고야 만다.

“에디.”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아르페시스가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체온을 나눠 주었지만 그는 백작도, 페드로도 아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는 나아졌으나 완전하게 채워지는 건 불가능했다.

에스메랄다는 공허함과 상실감에 허덕이며 아르페시스를 찾아들었지만 그는 버거운 표정으로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피했다.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에렘에서는 상복을 입는 기간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망자를 묻으면 그들은 떠난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다. 결국 상복을 입는 기간은 장례를 치른 이들의 선택에 따라 다르다.

남부에 전선이 생긴 이후 본래 관습법처럼 규정되어 있던 상 문화가 많이 변해 버렸다. 너무, 많이 죽으니까. 만약 과거처럼 최소 1개 달 이상 상복을 입어 고인을 추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다면, 눈만 돌려도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선으로 인해 에렘은 죽은 자를 배웅한 후에는 오래 그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고, 그게 관습까지 바꿔 버릴 만큼의 시간이 지나 버렸다. 에스메랄다 역시 사라진 시간에서는 장례식 다음 날부터 곧장 상복을 벗었다. 죽은 사람을 오래 붙드는 대신 산 사람과 함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아직 상중이라고 여기기에 관계를 가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닿은 몸은 이미 뜨겁건만, 그가 계속 피하자 에스메랄다가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비어 버린 나를 좀 채워 달라고. 울먹임의 끝에서 아르페시스는 망설임이 남은 손길로 에스메랄다의 의복을 풀어 헤쳤다. 이전의 정사가 격정적이었다면 오늘은 조심스러웠다.

그가 의복 아래에서 드러난 가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껴안으며 흐느꼈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의 돌기를 입 안에 머금었다.

혀를 동글게 말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돌기를 툭툭, 건들 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달큼한 그것을 치아 사이에 끼우고 살살 문질렀을 때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에스메랄다의 가슴에 매달려 있던 아르페시스는 어느 순간, 그녀를 번쩍 안아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러고는 다리를 벌린 채 제 허리를 껴안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속옷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아……!”

속옷 안으로 들어와 음부를 문지르는 손길이 이어지자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은 아르페시스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 찔러 대고 싶었으나, 오늘은 제 욕망을 채우기보다 그녀를 공허함을 채워 주고 싶었다.

어느덧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음부 속으로 검지와 중지를 집어넣어 헤집자, 에스메랄다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르페시스는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그의 입술은 쉼 없이 흘러넘치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눈물을 핥아 주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에스메랄다가 잔뜩 성이 난 아르페시스의 하체에 제 음부를 비비기 시작했다.

“에, 에디…….”

“빨리, 응? 빨리 넣어 줘…….”

아르페시스에겐 흐느낌과 함께 다가온 재촉을 이겨 낼 힘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제 바지춤을 풀어 헤쳤고, 에스메랄다가 그 위로 내려앉으며 그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자의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순간 이성이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을 양껏 품에 가둔 채 헐떡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에스메랄다의 가슴이 탄탄한 근육에 짓눌리는 것이 반복되었다.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억눌린 교성이 새어 나온 후에야 아르페시스가 움직였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허리를 쳐올렸다. 맞물린 입술을 통해 에스메랄다의 교성이 그에게 흘러 들어갔다.

아르페시스는 한참을 그렇게, 에스메랄다에게서 교성과 숨결, 타액을 빼앗았다. 이후에는 여전히 아프게 울고 있는 그녀의 뺨과 눈매를 핥아 눈물마저 삼켜 주었다.

그와 살을 섞는 내내 에스메랄다는 울었고,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눈물을 핥으며 위로했다. 에스메랄다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그의 손길에 순응하자 아르페시스는 제 손길에 기대어 오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 * *

아레스가 루이자의 객실에 도착하자, 그녀의 전속 시녀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어둠이 만연한 시간임에도 붉게 물든 그녀의 눈매는 선명했다.

페드로의 유서에는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얘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형제인 그에게 남기는 몇 가지 말, 사랑했으며 존경했고, 먼저 떠나 미안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사랑했고, 사랑받았어. 그게 전부야.’

그리고 오늘에서야 가장 마지막에 짧게 적혀 있던 문장이 루이자를 의미했다는 걸 깨닫는다.

에스메랄다가 갑자기 일행이 생겼노라 말하며 루이자를 데려왔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페드로의 묘비 앞에 선 그녀를 보고는 확신했다.

“대체 누군가 했더니…….”

눈치를 보아하니 쌍둥이는 전혀 몰랐던 모양인데, 누이의 사랑 얘기는 주절주절 다 말해 놓고서는 정작 본인의 얘기는 고작 한 줄이다. 아레스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오늘 굳이 루이자를 챙긴 건 에스메랄다의 생각이 맞다. 적응 훈련을 시작한 후 아레스는 불가능에 조금 더 시선을 두게 되었다. 격한 움직임 끝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게 힘들었다. 열에 아홉 번은 넘어질 정도다.

훈련을 하면 분명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시야의 한쪽이 완전히 사라진 것 때문에 생각보다 사각지대가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중형 마수를 상대하기 위한 필수 장비,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는 데 마나 소모가 심하다는 것이다.

평소보다 마나 소진이 빠르다는 건 그가 전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 며칠씩 전투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상태로 전장에 서 봤자 죽을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마나를 효율적으로 보충할 방법이 없으면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아레스는 다른 방법을 시야에 담기 시작했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문의 이름은 총 7개. 모두 아레스와 연배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미혼의 영애가 있으며, 마수로 인한 문제를 가진 곳이다.

일부는 쿠베트와 그들의 봉신이고, 다른 일부는 남부 전선과 접해 있는 영지 쪽 가문이다. 반드시 쿠베트여야 하는 것은 아니나, 굳이 목록을 만들면 가장 위에 있는 건 쿠베트다. 아레스가 혼자 생각을 이어 가며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테노리엘 경……?”

루이자가 그의 텅 빈 소매를 붙들었다. 아레스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 닿았다. 따지자면 그 역시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으며 테노리엘의 후계이니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는 저 부름이 페드로를 향한 것을 안다. 자신처럼 형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페드로를 만날 수 없음에 슬프다.

이제는 익숙해진 슬픔을 삼킨 아레스가 조심스럽게 루이자의 손길을 떼어 내고자 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다시 몸을 숙여야만 했다.

“왜 이제 와… 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취한 상태라는 건 알지만 취객의 행동이라 하여 귀찮게 여길 수는 없었다. 어쩌면 가족이 되었을지도 모를, 제수라 불렀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레스는 제게 문제와 짐을 한가득 떠안기고 떠난 페드로를 흉보며 침대에 앉았다. 커다란 손으로 눈물을 떨구는 루이자의 눈매를 덮어 주었다.

“녀석도 영애가 많이 그리울 겁니다.”

그저 우는 것을 조금 달래 주려 했을 뿐인데, 몸을 일으켜 품을 파고드는 루이자의 행동 때문에 잠시 멈칫거려야만 했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아레스는 제 무릎 위로 올라와 뺨을 감싸 쥐는 루이자 때문에 꽤나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의 전속 시녀가 서둘러 등을 돌렸다. 훅하고 밀려들어 오는 달큼한 와인 향에 묘한 것이 섞여 있어서 몸이 움찔거렸다.

“영애, 저는 페드로가 아…….”

“사랑해…….”

고개를 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동생의 연인과 입을 맞추는 불상사가 생겼으리라. 아레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토닥였다.

혼례에 대해 생각을 한다고 해도 아직 그들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페드로 때문에 억지로 엮였을 뿐이지.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하여 그들이 반드시 혼인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선 후작에게 언질을 주어야 하고, 본격적으로 혼담이 오간다 해도 아레스보다는 페르멘이 나을 수도 있다. 장애도 없고 나이 차도 적으며 작위를 승계할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아레스는 술에 취한 여인에게 손을 대는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영…….”

취객에게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해 보려던 아레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루이자가 왜 입을 맞춰 주지 않느냐고, 왜 또 도망가느냐고 엉엉 울기 시작했으니까. 울음 속에 더해진 욕설은 무척이나 차졌다.

아레스는 페드로를 떠올리며 참지 못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갔기에 이렇게 차진 욕을 얻어먹는단 말인가?

아레스는 몇 번이고 입을 맞추려는 루이자를 피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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