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5화 (35/45)

제34장

고인을 위한 추도

과거 페드로의 장례는 조문객을 받지 않는 가족장으로 치러졌지만 백작의 장례는 공개적인 예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현 가주의 죽음은 가문 내부의 세대교체를 외부에 확실하게 알리기 위한 정치적인 행사의 성격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작령은 에스메랄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부터 장례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덕분에 검은 깃발 속에 하얀 실로 새긴 테노리엘의 문장이 영지를 뒤덮고 있었다. 영지의 곳곳에서 영지민들이 쏟아 내는 느리고 암울한 추도곡이 울렸고, 장례에 참석하기 위한 조문객들이 연일 성문을 지나 백작 성에 당도했다. 먼 거리에서 전서구를 받자마자 출발을 시작한 이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도에서 출발하기 직전 에스메랄다는 주요 귀족들과 황실에 이미 백작의 부고 소식과 장례 일정을 전달했다. 남부에서 전사자 통보가 오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니, 상황의 전후를 파악하면 대다수가 테노리엘의 빠른 정보력을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계심을 만들더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성대하게 준비할 수 있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급한 일정을 잡았다. 백작을 추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작의 장례식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녀는 유일할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죄책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거기에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그녀의 계획을 위해서는 황태자의 생일 연회 전에 황제가 아르페시스를 황도로 불러야 하고, 백작의 장례식도 끝이 나야 한다. 백작이 매정한 딸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추도는 백작을 묻은 후 홀로 몇 번이고 할 수 있으나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백작 성에 발을 들인 에스메랄다는 미리 도착해 있던 아레스를 만나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리퀘나에서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고작 몇십 일이 지났을 뿐인데. 텅 빈 팔의 소매를 늘어트린 채 성의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레스가 다정한 마소로 형제와 누이를 맞이했다.

“다시 보니 좋은걸.”

“형!”

쌍둥이가 곧장 아레스에게 달려들었고 에스메랄다 역시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가리지 않았고 숨기지 않았다. 명예로운 훈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움푹 파인 왼쪽 눈가의 흉터 역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전하를 붙들고 있었더니 장소가 휙휙 바뀌는 게 꽤나 재미있더구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는 부러 가벼운 말을 꺼내며 형제와 누이의 슬픔을 털어 주었다. 이제 막 전역 과정을 밟은 그가 여기에 있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문객들은 아레스가 백작 성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또 한 번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릴 때쯤이면 세간에 모조리 알려질 일이니까. 아르페시스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허락해 주었으니 아레스를 백작의 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얻고자 한 것이 있었다지만 자식이 부친의 장례에 불참하게 둘 수는 없지.

쌍둥이는 직접 아르페시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에 에스메랄다가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아레스에게는 아르페시스가 직접 설명을 하기로 했었고. 그 덕분에 아레스는 급박한 일정에도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인데 제 독단으로 결정해서 죄송해요.”

“지금 보내 드리나 더 늦게 보내 드리나 똑같은 것을. 형식적인 절차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오른팔에 팔짱을 낀 채 성내로 들어섰다.

“몸은…….”

차마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질문에도 아레스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당장은 무게 중심이 어색하지만… 체중이 회복되면 한 손 전투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을 시작할 생각이니 금방 익숙해지겠지.”

방금 그 말에는 한 손 전투에 적응을 하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참 고집스러운 형제를 보며 쓰게 웃었다.

“나는 내륙의 일을 외면하마. 힘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러니 너도 내가 다시 전선에 가려고 한다면 외면하렴. 네게도 내 선택을 막을 힘은 없을 테니까.”

분명 다정한 어조임에도 차가운 말이었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네.”

가족임에도, 사랑함에도,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에 행해진 거래가 끝났다.

“그저 같이 있을 때는 복잡한 것들을 다 내려 두기로 하자. 그게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으니.”

에스메랄다는 얕은 웃음과 함께 긍정했다. 아레스의 말이 맞았다.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것을 바라며, 다른 방식을 선택한 그들이 함께할 방법은 그것뿐이다.

“참, 전하께서 페드로의 묘지에 가 보고 싶다 하셔서 안내해 드렸다.”

“…….”

“용무를 마친 후 당신께서 네게 가겠노라, 그리 전해 달라 하시더구나. 네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시는 것 같았다.”

“……네, 알겠어요.”

아르페시스는 백작 성에 도착하자마자 페드로에게 간 모양이다. 그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내일 조찬은 전하께서 참석하셨으면 좋겠는데… 별실을 준비할 테니 네가 전하께 여쭤보렴.”

아르페시스를 조찬 자리에 데리고 오라는 말에 에스메랄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빛이 돌변한 쌍둥이 때문이기도 하고, 무언가 다짐을 한 것 같은 아레스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잘 단속하마.”

아레스는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알겠노라고 답했다.

형제들과 헤어진 그녀는 곧장 자신의 침실로 향했으나 쉽게 잠을 청하지 못했다. 아레스가 전한 말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수밖에.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직계들의 묘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오후에 도착해서는 곧장 페드로에게 갔다던 사람이, 자정이 넘어 새벽이 깊어 감에도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숨이 깊어진다.

* * *

닿지 않았음에도 차가운 대리석의 냉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오래도록 페드로의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죽음 때문에 네가 자책하지 마라. 그럴 이유가 없다.’

페드로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시스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를 남부로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했다면 에스메랄다의 곁에 남겠노라 맹세했던 그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

참 우스운 점은 그리했다면 페드로가 이토록 그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를 전선으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와 유대를 쌓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사라진 시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메랄다와 처음으로 입을 맞춘 후 입술이 퉁퉁 부어서 눈치를 보았던 일도, 매일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받던 일도, 에스메랄다의 어린 시절이 담긴 수정 마도구를 걸고 내기 대련을 하던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페시스는 그 모든 것을 잃어도 좋으니 페드로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를 데려가는 선택을 되돌릴 수 없었다면 빨리 기억과 힘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했더라면 살아 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에스메랄다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었으나 기억을 되찾은 후 그는 남몰래 기도라는 것을 해 보았다. 또다시 시간을 지워 달라고, 그리해 주신다면 더 잘하겠다고, 염치없게 신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렸는지 모른다. 기억을 되찾은 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남모르게 빌어 보았지만 지금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묘비 앞에 있다.

오후 무렵 직계의 묘지에 방문한 그는 해가 져 버린 후에야 페드로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았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대륙력 1411년 바 51일~1436년 카 57일.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신뢰할 수 있는 형제이며 누구보다 훌륭한 기사로서의 생을 마친 페드로, 여기에 잠들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뻗어 비석을 매만져 보니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페드로의 온기를 기억하는 아르페시스는 그게 너무 사무쳐서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떨리는 손길은 차마 페드로의 이름을 전부 매만지지 못한 채 떨어져 나왔다.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 황제를 죽이겠다고 결정했다면, 현실의 수많은 불가능을 넘어서겠노라 다짐을 했다면,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아르페시스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정말 얄밉고도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팔에 끼워 넣은 채 쥐어박았겠지. 당장 시작하자고 의욕을 불태우며 누구보다 든든하게 그를 지지해 주었을 테고 무얼 해야 할지, 어떤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를 믿었고, 언제까지나 믿어 주었을 테니까.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가 남긴 말이 사라진 시간에서 비명과 절규를 지켜보며 웃던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에디에게…….”

꽉 잠겨 든 목소리를 억지로 꺼냈던 아르페시스가 큼, 큼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에디… 그러니까 에스메랄다 말이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에디와 아시스라고 불렀거든.”

기억을 조금 더 일찍 찾았다면 그가 홀로 좇아가던 의문에 명쾌한 답을 주었을 텐데.

“그러니까… 백작의 장례가 마무리되면 에디에게 청혼을 할까 한다.”

이 시기에 그런 얘기라니, 누군가는 철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른다고 흉을 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마수와의 전쟁도, 에렘의 존속도, 세상의 행복이나 안정 같은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는 것, 중요한 건 그게 전부였다.

“정식으로 혼인을 하려면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내 뜻은 전해 두고 싶다.”

에스메랄다와 혼인을 하겠다고 말하면 페드로는 뭐라고 답했을까? 아마 픽, 하고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부터 했을 것이다. 그다음에서야 다른 말들을 덧붙였겠지. 그가 했을 법한 말들이 지금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의 빈자리가 더 선명하다. 결코 그 말을 들을 수 없을 테니까.

“힘을 되찾았으니 황제와 황태자를 바로 죽이자는 말도 해 봤는데… 그녀가 바라는 방법에는 맞지 않나 보더군. 내가 명분이 되어야 한다나? 중앙 귀족과 후방의 나라들 때문이라는데… 왜 그런 게 필요한지는 사실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워. 정말이지 그대가 그렇게나 가르쳐 주었는데 정치니, 명분이니 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노력을 해도 전장에서만큼 성과가 나오질 않아. 그대는 이해했겠지만 말이야.”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묘비 앞에서 주절주절, 정리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예전보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 아니… 예전에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깊게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던 거겠지.”

그는 제 품에 안긴 채 중얼거리며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던 에스메랄다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주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한 상태를 아르페시스는 벌써 몇 번이고 보았다.

기억을 되찾고 1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한 개의 달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녀와 만날 때마다 보았노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게… 그런 버릇이 내가 없는 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숨 가쁘게 살았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그는 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부상은 새로 찾아왔고, 아무리 많은 전투를 경험해도 팔다리가 잘리거나 복부에 난 상처 때문에 내장을 쏟아 낼 때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물자와 자금은 매번 풍족하지 못했고 부상자들은 필요에 의해 구분된 후에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선별하여 버리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치료받을 병사와 기사들의 선별을 그가 직접 했던 건 아니지만 보고는 매번 올라왔었다. 그 문제에 대해 아르페시스는 죄를 물은 적이 없다. 그 잔인한 선택에 동의했다는 의미다.

살리고, 죽이고, 또 살리고, 또 죽이고, 그게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그런 전선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무거워서, 너무 지독해서 여유도 없었고, 여력도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라 내륙에서 눈을 돌린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에스메랄다가 사라진 시간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감춘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전장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만큼 그릇이 작았으니 더한 것을 안겨 주기 힘들었겠지. 그래서 홀로 감당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녀가 나를 걱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대어 왔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눈물이 그의 뺨을 적셨고, 차가운 겨울의 바람에 의해 얼어 갔다.

“이제야 물어보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페드로의 생전에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던 질문. 언제나 당당하던 페드로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

“그대도 스스로가 너무 모자라다고, 너무 부족하다고 여겨 힘들었던 적이 있을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르페시스의 혼잣말에 답한 건 그리운 페드로가 아니었다.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쌍둥이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언젠가 쿠베트성의 정원에서 봤을 때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룬 채로. 목소리는… 아마 페르멘의 것이리라. 오멘의 것은 조금 전의 그 목소리보다 살짝 음색이 짙은 편이었다. 아레스는 아예 더 낮고.

“예부터 갖추어야지.”

지금 저 목소리처럼. 퍽, 하고 쌍둥이의 뒤통수를 내리친 아레스가 그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레스가 먼저 허리를 숙인 후에야 쌍둥이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었다.

“혹여 추위가 회포를 푸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잠시 찾아뵈었습니다.”

그제야 쌍둥이가 각기 온돌 주머니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혼자 조용히 찾아뵈려 했는데… 이 녀석들이 아득바득 따라오더군요. 손이 모자라서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아르페시스는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그에게 추위나 더위는 의미가 없는 현상이었다. 인외자의 힘을 가진 후 그의 마나는 육체를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켰으니까. 하지만 기껏 그를 걱정해 찾아온 이들에게 그걸 말하기엔…….

“그런데… 추위가 아닌 저희가 방해를 한 것 같군요.”

아르페시스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아레스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분명 아레스는 페드로와 꽤나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행동까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주었다.

굳이 외형을 따지자면 페드로는 이목구비가 꽤나 유려한 편이었다. 외모와 상반되게 성격은 꽤나 괴팍했었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굵기보다 수려했던 그는 스스로가 모친을 더 닮았다고 했었다.

반면 아레스는 형제들 중 백작을 가장 많이 닮았다. 이목구비가 꽤나 짙고 딱딱한 편이었다. 또한 그 역시 외모와 상반되게 무척 다정하고 잔잔한 성격을 가졌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리 많이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아레스를 만날 때마다 묘하게 페드로가 아른아른거리곤 했었는데, 아르페시스는 오래전부터 느꼈던 그 기시감의 이유를 오늘에서야 찾았다.

“말투…….”

“예?”

아니, 정확하게는 단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페드로가 짐승 같은 놈, 하고 말을 한다면 아레스는 그 말을 조금 더 예의 바르고 고상하게 덮어 말한다. 짐승이시군요, 정도?

분명 다름에도 닮았던 이유는 그들이 같은 상황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방해를 했노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외팔이 되어 손이 모자랐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도, 페드로가 할 법한 말들이었다.

“뭘 그리 쪼…….”

퍽, 하고 때리는 소리를 대체 몇 번이나 들었더라……. 눈을 부라리고 있던 페르멘이 입을 열자마자 아레스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죄송합니다. 철이 없어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 하는군요. 앞으로 전하를 찾아뵙기 전에는 입을 꿰매 놓겠습니다.”

아르페시스는 피식, 하고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웃음 뒤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자책을 담고 있었다.

“이상하군…….”

“……무엇을 이르시는지요?”

“페드로의 묘비 앞에서 그대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이상해서.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방문을 청할 때도 망설이고, 망설이고, 망설인 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여기서 페드로가 아르페시스를 대피시키다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그들에게서 형제를 앗아 간 원흉이나 다름없지 않나.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쌍둥이는 페드로의 묘비 옆에 가져온 온돌 주머니와 주전자,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럴 리가요. 저희는 언제나 환영할 겁니다. 녀석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가 날 반기기는 할까?”

“전하께서도 이미 답을 알고 계실 테지요.”

그날이 떠오른다. 흐릿한 시야 너머에서 피를 쏟아 내며 가라고 소리를 지르던 페드로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 몸을 내던지면 죽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는데, 왜 도망치지 않고 거기에 버티고 서 있었을까?

참, 빤한 질문이다. 페드로는 아르페시스가 가기를 바랐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지금 페드로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아르페시스와 똑같은 마음이었겠지. 어느 누가 위로해도 아르페시스는 그날을 떨치지 못하리라. 말없이 울어 버리는 그의 곁에 아레스가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깨에 닿은 손이 천천히 그를 토닥이는 동안, 그들의 양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쌍둥이가 추도곡을 읊기 시작했다. 울먹임을 머금은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는 추도곡을 배워 보기만 하고 정작 불러 본 일은 없었다. 전장에선 시신을 수습해 보내기는 하지만 장례식을 치르는 건 가족들이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누군가의 시신을 수습해 준 적은 있어도 장례식에 참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전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입에 담아 본 추도곡은 참, 무겁고 아린 곡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묘비 앞에서 슬픔으로 형제를 곱씹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그리움으로 인해 좌절하는 것 말고는 해 본 적이 없어서, 그저 그게 전부였다.

* * *

다급한 이동으로 피로가 쌓여 있던 에스메랄다는 꾸벅, 꾸벅, 병든 닭처럼 졸면서도 오래도록 아르페시스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온기를 느끼고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이 없는 잠이 끝나자 역시나, 그가 곁에 누워 있었다.

“오라버니는 잘 만나 뵈었어?”

“……일단은.”

“언제 왔어?”

“……새벽녘에.”

“춥지는 않았어?”

“……그다지. 아레스도 같은 걱정을 하더군. 그와 쌍둥이가 잠시 들러 주어 함께 추도곡을 읊었다.”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르페시스를 걱정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게는 가지 말라 하시더니…….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따라갈걸.”

아르페시스는 답이 없었다. 그녀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던 아레스의 말이 맞았나 보다. 하지만 언제까지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나. 분명 홀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는 고인을 추억으로 그리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레스가 그를 조찬에 데려오라 한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페드로의 묘지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나도 같이 가자.”

“……그래.”

살짝 잠겨 든 목소리는 그가 숨을 몇 번 고른 후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레스가…….”

조금 망설이던 아르페시스가 간밤에 아레스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내가 백작의 장례에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하더군.”

에스메랄다는 망설이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선연한 그의 품에서 가만히 말을 들어 주었다. 아레스의 부대 이탈은 전역 처리와 함께 해결되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아니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공식 석상에 나오기를 권한다는 건…….

“대형 마수 토벌에서 힘을 드러낸 지금, 자신을 백작령으로 데려온 건 결국… 테노리엘과의 접점을 알릴 생각이라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하던데…….”

맞다. 에스메랄다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그가 황도로 불려 갈 무렵,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개최될 무렵에는 모두가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접점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왕… 이왕 온 것, 참석해 주었으면… 한다는데, 내가 발을 들여도 될 자리인지…….”

어차피 그는 선대 백작의 장례식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려고 데려온 것이고.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기존의 목적이 아니라 이 일이 아르페시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만을 보고 답했다.

“당연히 참석해 주면 기쁠 거야.”

“……예장 의복도 없고, 내가, 내가 참석하게 될 줄은 몰라서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

“아레스 오라버니와 네 체격이 비슷하니 빌려 달라고 하면 되지. 페드로 오라버니의 옷도 많고.”

테노리엘의 후계는 대체로 타고나는 기골이 큰 편이었다. 어린 시절 에스메랄다의 우상이었던 대고모 역시 신장이 175cm나 되었다고 했다. 여인들 사이에서는 거인처럼 커다랬으리라.

이번 세대에서도 미숙아로 태어났던 에스메랄다 외에는 다들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했다. 그중 키가 가장 컸던 건 페드로였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페드로보다는 살짝 작고 아레스와 비슷한 체격이었었다. 페드로보다는 작다고 해도 에스메랄다는 목 아프게 올려다봐야 하는 크기였지만.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참석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단지 백작의 아들인 페드로의 죽음에 관련된 스스로가 장례에 참석하는 게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불편하기 때문인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가능하다면 페드로의 것으로… 입고 싶다.”

“그래, 알겠어. 조금 수선하는 정도면 하루, 이틀로도 충분할 거야.”

참고자 노력했던 눈물을 떨구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르페시스를 꽉 안아 주었다. 그녀가 가족들과 아르페시스에게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페드로의 문제에 있어서는 짐을 떨치지 못한 모양이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라고, 짊어진 짐을 무책임하게나마 내던지면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을 텐데. 전부 끌어안고 끙끙거리고 있다. 이렇게 힘들면 떠넘길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페드로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다. 에스메랄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림자를 남기며 매달렸다.

백성들도, 황태자도, 황제도, 언급할 때마다 그렇게 매정하고 날 선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에게 죄책감은 떠넘기지 못하고 있다. 한결같다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그도 아니라면 강인하다 해야 할지…….

복잡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라서, 이렇게 한결같고 어리석으면서 또한 강한 사람이라서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원치 않았다 하여 자신이 짊어진 짐을 내던질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사랑하지 않았겠지.

에스메랄다는 분명 커다란데도 여린 것만 같은 아르페시스를 꽉 안아 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건 스스로가 이겨 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다. 그가 그리해 주고 있는 것처럼.

“오라버니들과 조찬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에스메랄다는 그가 움켜쥐고 있는 짐을 덜어 줄 수 없지만 짐을 덜 무겁게 매는 방법은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에게 주저앉아 우는 대신 추억을 곱씹으며 웃는 방법도 좀 가르쳐야겠다.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메랄다는 그를 잡아끌어 침대 밖으로 내려섰다. 붉게 물든 그의 눈가를 달래기 위해 씻고 나니, 때마침 아레스가 아르페시스의 옷을 보내왔다.

두 사람은 환복을 마친 후 함께 침실 밖으로 나섰다.

“이렇게 내가 같이 나가도 되는 건가? 보는 눈이, 조문객들이 있을 때가 아닌가.”

“직계의 거처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지금 보는 것을 떠벌릴 만큼 입이 가벼운 사용인들은 성내에 없어.”

자신감이 깃든 말에 아르페시스는 그렇다면…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에스메랄다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맞잡으며 미리 언질받은 별실로 향했다. 공용 식당은 곧 있을 장례에 참석할 귀족들이 오갈 테니 아르페시스가 가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장례식 전까지는 아레스와 아르페시스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극적일 터였다.

두 사람이 별실에 도착했을 때 형제들은 이미 모두 착석해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형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고,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환영해 주어 고맙다.”

“환영한 적 없…….”

물론 그 사이에서 페르멘의 삐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레스에게 얻어맞는 바람에 도중에 끊어졌다. 아르페시스에겐 아직 낯선 광경이겠지만 에스메랄다에겐 꽤나 익숙했다. 생각 없이 말을 내뱉고 형제들에게 맞는 페르멘의 모습은 정말, 한때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는 아르페시스를 끌어다 상석에 앉힌 후 비어 있는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만…….”

사용인들이 식사를 내어 온 직후 아레스가 조금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추실 예정이니, 그동안 전하께서 머무실 객실을 마련했습니다.”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손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따로 방을 내어 줄 테니 에스메랄다의 침실에 들락거리는 건 그만하라는 의미다. 그가 공간을 멋대로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별 소용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겠지만… 곧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출 테니 마땅한 거처가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에 아마 아르페시스는 계속 에스메랄다의 침실로 올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무안한 기분으로 얕은 헛기침을 했고, 아르페시스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알겠다.’ 하는 말을 내뱉는 게 전부였다.

“장례식에서 입을 예장 의복은 페드로 오라버니의 것을 수선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에스메랄다는 무안함을 떨치기 위해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재단사를 준비시키마. 식후 저와 함께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하.”

“알겠다…….”

음식을 뒤적거리며 깨작거리던 아르페시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스푼을 든 아레스가 말을 덧붙였다.

“장례 이후 추도식에서 전하를 뵙고 놀라는 이들이 많을 테니, 그럴듯한 명분을 준비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명분이라면?”

“전선을 비우고 여기에 있는 것 말이야. 자칫하면 탈영이 되어 버리니… 미리 서류 작업을 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에스메랄다의 설명에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휴고에게 연락해 두겠다.”

전보 마도구의 관리를 그에게 일임하고 왔으니 서류 작업 정도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기에 그는 부대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탈영이라는 드잡이를 피해 가려면 그의 이탈이 휴가 기간에 잡힌 정상적인 방문임을 서류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미 그가 대형 마수 토벌을 통해 인외자의 힘을 드러냈으니, 귀족들은 곧 그를 경계할 터. 최소한의 증거만 마련해 두면 억지로 트집 잡을 생각은 못 하겠지.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을 힐끔거렸다.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헤, 하고 웃어 보였다. 무언가 찔리는 게 분명해 보이는 얼굴이다. 아무래도 아레스가 그를 통해 전보 마도구의 존재를 알게 된 모양이다. 단기간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으니 아르페시스에게 장례에 참석해 달라 말했던 것이고.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여전히 페르멘에게 향해 있었다. 그 말은, 그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는 뜻이다. 저런 얼굴을 하고 뒤에선 아르페시스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듯 보이니……. 에스메랄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식사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체로 형제들이나 에스메랄다가 대화를 주도했고 아르페시스는 경청하는 편에 가까웠다. 다만 페드로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조금 긴장하는 듯 보였다.

“입관이 끝나고 가면 되겠지?”

오멘의 물음에 마침 아레스가 적당한 크기로 잘려 나온 고기를 포크로 찍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페드로의 기일도 며칠 전이었으니… 조금 늦었지만 함께 챙기자.”

에스메랄다가 기억하기로 사라진 시간에서는 매해 기일마다 가족들의 무덤에 안개꽃을 올려 왔다. 지금의 시간에서도 그녀가 마음을 닫고 사는 동안 다른 형제들은 매번 페드로의 기일을 챙겼고. 이번에는 백작의 부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페드로의 기일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의 기일은 나흘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까.

확인된 바에 따르면 백작은 카 53일, 페드로는 카 57일이었다. 입관을 마치면 그때 두 사람의 묘비 앞에 안개꽃을 올리러 가자는 얘기가 끝났을 때, 아레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움찔거리며 몸을 떤 그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러지.”

그 후에는 별달리 중요한 대화는 없었다. 생전 페드로와 백작이 좋아했으나 자주 즐기지 못했던 술을 가져가자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이건 각자가 기억하는 상표명이 제각각이라 전부 챙겨 가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에스메랄다가 평화 속에서 빠져나온 건 별실의 문을 두드린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아레스의 허락에 다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기다리시던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에스메랄다는 곧장 그 말을 알아들었다. 테노리엘처럼 아비체룬과 국경을 접한 라히크 백작가에서 확보 중이던 물고기가 왔다. 곧 가겠노라 답한 에스메랄다는 다나를 먼저 내보낸 후 물잔을 들었다.

“가볍게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형제들은 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에스메랄다는 물로 입을 헹구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에야 말을 꺼냈다.

“오래는 아니겠지만 당장은 제가 승계를 하겠습니다.”

이미 영주권은 물론, 가주의 전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에게 속해 있다. 이후 아르페시스와의 혼사가 언급되면 형제들에게 양도를 해야겠지만… 당장은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위해서라도 에스메랄다에게 필요한 패였다.

당장은, 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도를 읽은 형제들은 아르페시스를 한 번씩 훑어본 후 서로를 돌아보았다.

“누가 하든 나는 이후에도 제외해 주었으면 좋겠어.”

오멘이 가장 먼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스스로가 전선으로 향할 것이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다. 작위 승계와 관련해서 제외되길 바란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럼 이후에는? 난 딱히 관심 없는데. 까먹은 것도 많고.”

페르멘의 말이 끝났을 때 아레스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중앙에서 움직일 것이라면 귀찮은 일이 많을 테니.”

아직 전선으로 돌아갈 수 있노라 결론이 난 것이 아니기에 아레스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했다. 그중 만약에, 작위를 이은 사람이 중앙에서 후방 원조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의 장애는 문제가 될 것이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장애를 명예로운 훈장으로 보지만 중앙 귀족들은 아니다. 피해 갈 방법이 있는데 맞서 싸우는 건 괜한 번거로움을 자청하는 건 미련한 것이다.

“뭐야, 그럼 나야?”

결국 아레스의 말이 끝나자 페르멘이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조금 기가 막힌 심정으로 눈앞에 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세상에 어느 가문이 작위 승계를 두고 이런 대화를 할까?

“영지 업무는 자신 없는데…….”

페르멘이 웅얼거리며 심란한 포크질을 이어 가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응…….”

“알겠어.”

“집무실로 과일을 올려 보내마, 챙겨 먹으렴.”

“……네.”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다정한 잔소리에 두말하지 않고 알겠노라 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꽤나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말했다.

“식사 마치고 의복 준비부터 마무리해, 알겠지?”

“우리가 모실 테니 걱정 마.”

빨리 괴롭힐 수 있게 가 보라는 것처럼 방긋 웃는 페르멘의 모습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봐.”

아르페시스가 굳어 있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별실을 나섰다. 이후 아르페시스는 별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휙,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세 쌍의 눈동자 앞에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의복 준비를 끝낸 후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희가 성내를 안내해 드리는 것도 좋을 듯한데…….”

그 자리에서 아르페시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 * *

현재 에렘의 국내 정세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신탁과 관련한 소동이다. 신관들의 악행을 기록한 벽보와 발동된 상태로 돌아다니는 수정 마도구도 그 소동에 손을 보태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 즉 신전이 있는 지역에서는 거의 매일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 신전과 백성이 무력적인 충돌을 겪고 있는 상황이고.

신탁이 내려진 날로부터 사흘, 대부분의 신관들에게서 신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신한 에스메랄다가 풀기 시작한 소문도 그 폭동을 부채질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에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 신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관복을 입었음에도 신력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백성들의 행태를 보고 받고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놈들, 그녀가 백성에게 가지는 경멸은 여전했다.

신관이 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은 사흘 전에 처음으로 벌어진 일이고, 문제의 소문이 퍼지며 실제 신력을 잃은 신관들이 신관복을 벗는 경우가 늘고 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추정에 따르면 에렘 내부에 있던 신관들 중 신력을 잃지 않은 이들은 기존의 숫자에서 3할을 조금 넘기는 정도였다.

기존의 7할에 해당하는 인원이 신탁에서 언급된 ‘악마의 하수인’으로 분류되었다는 의미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악행을 일삼았다는 의미였다. 다행히도 남부에 상주하는 신관들 중에는 신력을 잃은 인물이 거의 없었다. 이건 실테르와 이미 정보를 교환했기에 확실하다.

분명 남부의 신관들은 절대 떳떳할 수 없다. 그들도 죄악에 포함되는 일을 수없이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신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탁이 악행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진 것이다.

“확실하더냐?”

“예, 아가씨께서 주신 자료에 있던 초상화와 동일 인물이었습니다. 목의 상처도 똑같더군요.”

별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나에게서 확답을 들은 에스메랄다는 집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데 라히크 쪽에서 전달한 인물 외의 사람들도 함께 왔습니다.”

에스메랄다가 누구냐 묻자 다나는 전달받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아비체룬에 숨어들었을 당시 주워 든 신분의 직계 가족이 살아 있었단다. 부인은 눈을 잃고, 아이는 너무 어렸기에 오히려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때 만난 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은 모양이다. 까딱하면 잡혔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걸음을 옮기며 지난 며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어제부터 신탁은 공공연하게 신벌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전선에서 드러난 아르페시스의 무위에 관한 소문이 뒷골목을 통에 퍼지고 있다. 황제는 대형 마수 토벌 소식을 전해 받은 날로부터 사흘째인 오늘, 남부로 전서구를 띄웠다.

황도의 로부오들이 황제의 전서구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보고를 했다. 황제의 것이라 낙인찍힌 황금색 맹금류가 들고 간 전서구를 탈취할 만큼 간이 큰 건 반군 정도인데,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 서신을 건들지 말라 단속을 해 둔 상태다. 내용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필시 인외자의 힘을 드러낸 아르페시스를 견제하기 위한 수일 것이다.

기록에 남은 인외자에 대한 것을 모조리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판단이 힘들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경중을 재기 위해 그를 황도로 불러들여 치하하는 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르페시스는 각기 다른 전장에 나타났던 대형 마수 5기가 한 전장에 모였을 때 홀로 토벌을 했다. 그건 지금이 겨울임에도 그를 전선에서 빼 와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사건이다. 인간은 혼자서 대형 마수 1기조차 상대하지 못하니까. 그 소식이 진실인지, 과장인지도 확인해야 할 테니 직접 눈앞에 둬야 한다.

탐색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황제는 아르페시스를 쉽게 건들 수 없을 터, 에스메랄다는 그런 상황이 황태자를 자극해 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패륜을 가리기 위해 황태자의 패륜을 내세울 생각이다.

황제가 아르페시스에게 흔들린다고 여긴다면 열등감이나 불안감이 자극받을 것이고, 황제가 무력하다고 여길 경우에는 오만함이 자극받을 것이다. 실제로 황태자가 황제에게 손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황제의 방패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그저 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도가 있은 후라면 증거가 생기고, 그러면 아르페시스가 직접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 독살을 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다. 증거를 위조하는 일은 수없이 많은 씨앗 심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싹을 틔우는 건 가뭄 날에 콩이 나듯 적다.

에스메랄다가 황실 측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증거로 쓸 수 있는 위조 증거를 만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매수하는 일도, 서류 흔적을 남기는 일도, 서로의 감시망을 피해야 가능한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온 후 에스메랄다가 증거나 흔적을 위조하는 데 성공한 건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다. 한 번은 황태자의 명령서, 아직 전서구 사냥이 시작되지 않아 경계가 무른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그 외에는 수입 곡물 상단을 손에 넣기 위해 했던 각종 작업 같은 것들로, 엄청난 공을 들여 겨우 성공한 것이다.

알라반 약탈에 관한 것도 죄를 뒤집어씌웠지만 완벽하지 않았기에 대상자들을 모두 죽여서 진실을 묻어 버리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실존하는 흔적에 죄를 덧씌우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조금 더 쉽다.

그렇기에 황태자의 시도가 중요하다. 뒤집어씌울 수만 있다면 아르페시스는 패륜아가 아니라 패륜아를 응징하는 쪽이 될 수 있다. 훗날 제위에 오른 후 귀족들에게 사생아라 알려진 그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채워 줄 것이다. 에렘은 적자라 한들 그게 패륜아라면 배척하는 성향이 강하니까.

“본래 계획대로 갔다면 상당히 번거로웠겠지…….”

그 증거로 연좌제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유사한 처벌이 허용되는 죄가 있으니, 반역과 패륜이다. 반역은 황제가 용납하지 않고 패륜은 귀족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의적인 문제도 그렇거니와, 그 어떤 귀족도 자식에게 잡아먹히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성해지기만 할 자식과 달리, 본인이 늙어 약해졌을 때 패배하여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다. 자식들과도 권력을 나누지 않고, 나아가 자식을 권력을 쌓기 위한 도구로 보는 성향의 중앙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패륜에 민감하다.

패륜으로 성공한 이가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성공을 갈망하며 패륜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애초부터 엄하게, 싹조차 나지 않게, 사회적 관습에서 말살해 둔 것이다.

그 예로, 귀족들은 사생아와 패륜아 중 반드시 누군가의 손을 들어야 할 경우를 마주하면 무조건 전자를 선택한다. 사생아는 더럽기는 하나 그래도 자식이고, 패륜아는 자식도 아닌 짐승이니까. 에렘은, 에렘의 귀족은 대륙에서 패륜에 가장 민감하다.

형제들끼리 치고받는 암투는 패륜이라 불리기보다 암투나 다툼으로 불리지만 부모를 건드리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의 경우 쳐야 한다면 허락되는 선은 권력까지다. 목숨만은 건드려선 안 된다.

실제 현 테뷔르 후작이 14년 전 패륜으로 작위를 이은 후, 중앙 귀족 무리에서 퇴출되다시피 했고 영지로 내려갔다. 명확한 물증이 없었기에 방계나 다른 계승권자가 그를 재판대 위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다들 그가 부모를 죽였다는 것을 안다.

루그레디안도 물증만 없다 뿐이지 심증은 어느 정도 존재하기에 중앙에서 입지가 좁은 편이다. 테노리엘 백작이 출정한 이후 반황실 세력은 내전 문제로 일부가 견고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기에 루그레디안을 옹호하고 있다.

선 테몬 후작과 그의 장남을 죽이는 데 쓴 독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중앙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게 가능한 셈이다. 당시 그들의 증상이 병마처럼 보이기 충분했기에 루그레디안의 패륜 사실을 아는 이는 반황실 세력 내에서도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루그레디안은 겨우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백작을 잡아먹은 게 아니라 빼앗은 선에서 그쳤기에 큰 문제가 없고.

그 순간, 응접실로 향하던 에스메랄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간질거리는 이질감이 그녀를 살짝 건들고 사라졌다. 뭐였지? 하고 의문을 느꼈으나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다.

4백 년이 넘는 에렘의 역사에서 부모를 치고 황위를 차지한 인물은 셋이나, 그들 중 둘은 선황을 살해했고 한 명은 유폐했다. 그리고 살해에 손을 댄 둘은 정당한 심판을 내세운 형제들에게 잡아먹혔다. 귀족들이 패륜아가 아닌 패륜아를 잡아먹을 형제를 지지함으로써 내전에 손을 보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가문은 자식이 패륜을 시도했을 경우 그 자식과 엮인 부인이나 자손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불온의 싹을 키울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반드시 죽여야 한다, 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모든 귀족들이 패륜을 시도한 자식과 관련된 것은 지운다.

패륜으로 가문을 차지한 귀족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에서 루그레디안의 재판장 위에 올라 공격받은 것처럼, 패륜은 공훈이 아니다. 증거를 모두 지워야 하는 약점이지.

그렇기에 지금의 작업 없이 기존의 것으로만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올랐다면, 귀족들이 그의 통치에 비협조적으로 굴며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한 정리가 이제 와 이득이 되는 건가…….”

하지만 아르페시스 말고는 마땅한 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니 심판이니 뭐니, 하며 나설 형제가 없다. 그러니 만약 본래대로 일을 진행했어도 말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정통성, 정통성 하며 시비를 거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단속하기 위해 또 한 번의 핏물이 흘러야만 했을 터.

결국 아르페시스의 힘으로 황제를 건들고 황태자를 자극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내전의 조짐까지 얽혀 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신탁의 징조가 머무는 동안 중앙군은 북부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케니스의 병력은 꾸준히 집결 중이다. 이미 수가 불어난 두어 곳의 집결지 주변에는 황제파 귀족들의 사병들이 모여들고 있다.

예상보다 빠르지만 내전을 분리하기로 한 이상 반군 쪽이 먼저 터져야 하니 나쁠 것은 없다. 조만간 본격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그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와 황도에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다나, 백작령에서 대기 중인 아이들로 호위를 꾸려야겠다. 장례식 후 전속 시녀로 들일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렴.”

아르페시스와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혼자 다닐 만한 시기가 아니다. 그와의 접점이 공개되면 황태자는 상대적으로 건들기 쉬워 보이는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둘 테니 호위를 꾸려야 한다. 자청하여 중앙으로 돌아갈 날이 올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비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예, 아가씨.”

다나의 대답을 들은 후 그녀는 곧장 집무실 옆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초상화로 본 후 기억 속에만 남겨 두었던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감시하는 인원은 시리스뿐이었다.

“관련 인원은?”

“호송에 투입된 이들이 전부입니다.”

“앞으로 전담시키렴.”

“예, 아가씨.”

여러 사람에게 얼굴을 알리는 것보다 이미 아는 이들에게 감시를 전담시키는 게 나으리라.

“이름은?”

소파에 앉은 그녀가 조금 나른한 목소리로 묻자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 있던 사내가 손을 들었다.

[지웠습니다.]

“나이는?”

[감추었습니다.]

“목소리는?”

[버렸습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질문에 미리 정해져 있던 대답이 수화를 타고 에스메랄다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서부 대란 시기 몰래 심어 넣은 세작이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돌아온 것이다.

“약속했던 대로, 너와 네 가족의 여생은 부족한 것 없이 꾸려질 것이다.”

목에 커다란 흉터를 가진 사내가 허리를 꾸벅 숙여보았다.

“부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몇 년이 넘도록 아구토라 불렸으나 본명은 시나였던 남자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들이…….]

곧장 말을 꺼내려는 사내를 말린 건 에스메랄다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모자라 누락이 발생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중으로 상세한 과정과 중요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렴.”

[예, 아가씨.]

“가족들과 함께 왔다지?”

사내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에스메랄다의 기억에 따르면 눈앞의 사내에게는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아비체룬에서 뒤집어쓴 신분으로 또 아내와 아이를 데려왔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국경을 넘을 때 함께했다고? 정이 들었거나 아니면 그녀와의 사이에서 또 아이를 보았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도, 도저히 두고 올 수가… 둘째가…….]

긴장을 했을지언정 실수가 없던 사내는 곧장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가족이라 여긴다면 그들 또한 너의 공을 함께 누릴 것이다. 대신 보고서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게다.”

[예, 예, 아가씨.]

“데려가렴.”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 시리스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곧 그가 물고 온 정보를 손에 쥘 수 있으리라. 지체 없이 집무실로 넘어온 에스메랄다가 다나에게 물었다.

“수색에 관한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황도에서 보았던 성인에 대한 수색에 진척이 너무 없다. 아르페시스가 신관의 수가 적노라 말해 주었을 때만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이러다 허무하게 잃을까 무서웠다. 그날 발 빠르게 대처하는 대신 아르페시스의 품을 마음껏 누린 대가였다.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건 이미 황도에 없다는 의미겠지. 타 지역의 수색을 더 강화하도록. 아비체룬은 잠겨 있으니 실테르와 세튀스, 롤베를만 쪽의 국경도 주시해라.”

“예, 아가씨.”

다나가 책상 위를 차지한 전보 마도구 중 하나를 잡고 지시 사항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사이 첸을 돌아보았다.

“황도의 마수 투기장은 어떻게 되었지?”

“현재 폭파 준비 및 유도 준비 모두 완료된 상태이고, 마도구 역시 지켐 자작에게 배송되고 있던 물품을 훔친 것입니다. 도난 신고가 올라간 행정 서류도 늦지 않게 처리했습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상시 대기하라 전하게.”

“예, 아가씨.”

이제 아르페시스의 행동과 태도를 조금 다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별실에 두고 온 그와 형제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백작의 부고도 힘이 들고, 이 자리에 없는 페드로의 빈자리도 크건만,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며 피로를 자청하는 것이 마냥 힘들지는 않다. 과거와 같은 일을 함에도 과거와 다른 스스로를 가만히 응시하던 에스메랄다가 깃펜을 들었다.

아레스의 태도는 그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는 사람 같았다. 형제들이 그를 언제 놔줄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그녀는 그동안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서부에 있는 반군 병력도 옮겨야 하니 바쁘다.

새로 병력을 편성하고 케니스를 비롯한 반군들에게 계획을 언질해 주기 위해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도착한 집사가 반갑고도 불편한 소식을 가져왔다.

“쿠베트에서 조문객들이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장례식 전까지는 조문객 응대를 페르멘과 오멘에게 맡겼으니 굳이 그녀가 내려갈 필요는 없다. 에스메랄다는 쿠베트의 조문객들과 함께 왔을 사람을 떠올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직계의 장례식도 아니고 가주의 장례식이다. 후작이 직접 참석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루이자도 왔겠지.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페드로가 죽던 해의 여름에 만났던 게 마지막이다. 쿠베트 후작가와의 교류는 지속되어 왔지만 그녀를 따로 만난 적은 없다. 이제 다시 만나겠지만,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해야 할 일로 시선을 돌렸다.

사적인 친분이 그립다 하여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지. 쿠베트와는 따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 * *

아레스는 조찬을 마친 후 에스메랄다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쌍둥이와 함께 문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안에서는 아르페시스가 휴고에게 전보라는 것을 보내고 있다.

페르멘에게서 전보 얘기를 들었을 땐 에스메랄다의 저력이 그의 추측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백작을 이긴 그녀가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을 리도 없으니 이미 중앙군 내에 그녀의 세작이 가득하겠지.

조금은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압도적인 저력을 지녔다면 내전을 최소한의 피해로 끝낼 수 있을 테니까. 힘이 있었다면 분명 막았겠으나, 아레스는 백작과 별다르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침 침실 문이 열리고 있었기에 아레스는 머릿속에서 상념을 떨쳐 냈다.

그가 알기로 이번 휴가는 아르페시스가 남부군 총사령관직에 취임한 후 처음 써 보는 것일 터였다. 예전에는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에 나오지 못했지만, 인외자가 된 지금은 더 이상 그 목줄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칼라일을 비롯한 본부대 기사들은 아르페시스의 사람이니 날짜를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전보를 보내고 난 후 침실 밖으로 온 아르페시스의 옆자리에 쌍둥이가 섰다. 마치 연행을 하는 듯한 구도에 아레스는 조금은 흐뭇하게 세 명의 동갑내기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것을 내색하는 일은 없었고.

그들은 곧 장소를 옮겨 다른 방에 도착했고, 아레스는 그 와중에도 아르페시스를 꾸준히 관찰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아르페시스는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어우러진 형제들 사이에서 스스로가 이물질이라고 느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조찬을 하는 동안에도 내내 그런 태도였다. 그나마 에스메랄다가 있을 때는 괜찮아 보이더니, 그녀가 돌아간 후에는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어찌나 불안해하던지. 그가 볼품없고 초라하게 벌벌 떨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에스메랄다가 나간 문을 10초에 한 번씩 쳐다보는 정도였다.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이유는 아마, 죄책감. 리퀘나에서 몇 번 만났을 때는 이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왜 저렇게 모든 걸 자신의 잘못이라고 매도하며 짐을 자처하는지, 남 탓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편했을 텐데.

‘그냥 그런 녀석이야.’

하긴, 그러했다면 페드로가 그렇게 싸고돌지도 않았겠지. 에스메랄다 역시 마음을 주지 않았을 테고. 페드로가 아레스에게 남긴 유서 속에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얘기가 참 많았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를 빼면 거의 다 두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이것저것 준비는 많이 해 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으면 멍청한 짓을 할 것 같아서 걱정이야. 형이 도와줄 수 있다면 부탁할게.’

어떻게 페드로의 예상을 전혀 비켜 가질 않는지, 아레스는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형제의 부탁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얄미운 놈…….”

제 죽음에 대한 대비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하고 떠날 건 뭐란 말인가. 그게 너무 얄미워서, 섭섭해서 입 안이 쓰다. 그래도 어쩌겠나? 형제가 남긴 마지막 부탁인데 열과 성을 다하는 수밖에.

함께 있을 때만큼은 각자의 길을 비난하지도, 방해하지도 말자고 에스메랄다와 거래를 끝낸 참이다. 모든 문제를 내려놓은 채 가족으로서 함께하는 방법만 생각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였다.

‘그 녀석 앞에서는 웃더라고.’

에스메랄다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진심이나, 아레스는 그녀의 행복을 이루어 줄 수 없다.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와 주었음에도 결국 냉혹한 선택을 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아레스는 할 수 없다. 그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가능하게 돕는 것으로 만족하자.

아레스의 시선 끝에는 기장이 조금 남는 페드로의 예장 의복을 입어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있었다. 하루 이틀 내에 입어야 할 정도로 급한 게 아니었다면 타인의 옷을 수선해 입는 일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굳이 페드로의 것을 콕 집어 준 것을 보면, 아르페시스 쪽에서도 그러고 싶었다는 의미겠지. 지난밤 페드로의 묘비 앞에서 울던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계속 목에 걸렸다.

“형 다리가 저렇게 길었나?”

“어깨도 생각보다 넓었네.”

“열한 살쯤인가? 체중이 지지대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는 돼지처럼 집어 먹기 시작했거든. 그러더니 열네 살 무렵에는 나보다 커졌지.”

페드로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르페시스의 긴장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도 빤히 보였다. 고인의 얘기는 꺼내면 아파야 하지 않나? 고인을 떠올리면 슬퍼야 하는데? 같은 생각.

‘그… 염치가 없다만, 페드로의 묘지에, 페드로에게… 한 번만이라도 가 보고 싶은데.’

그게 어떻게 형제의 묘비에 가는 사람이 할 말인가, 죄인이 할 법한 말이지. 아레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얼마나 걸리겠느냐?”

“오늘 밤 중으로는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이 없도록 심혈을 기울여라.”

“예, 도련님.”

아르페시스가 수선 범위를 잰 의복을 벗고 돌아오자 쌍둥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앉으시지요? 왜 그러고 서 계십니까?”

아르페시스가 다 받아 주니 나날이 말버릇이 나빠진다. 아레스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뻗어 시건방진 말을 꺼낸 페르멘의 이마에 꿀밤을 얹어 주었다.

“그리 오냐오냐해 주시면 이 녀석 버릇이 계속 나빠질 겁니다.”

“……오냐오냐? 내가?”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아르페시스가 떫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따끔하게 무례하노라, 훈계를 하셔야지요.”

“……무례라고 느껴지진 않는데.”

“거봐, 괜찮다고 하시잖아.”

기회를 잡았노라, 달려들 준비를 하는 동생 놈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레스는 예전부터 말을 참 안 듣던 페르멘을 조련하기 위해 먹음직한 먹이를 들이밀었다.

“전하의 앞인데 좀 얌전할 순 없겠니?”

“나 지금 엄청 얌전…….”

“오늘 하루 그 입을 좀 다물고 있으면 수정 마도구 하나 줄게.”

페르멘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오멘이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아르페시스와 아레스를 돌아보았다. 그걸 본 아레스가 경고했다.

“괜한 짓 하지 마. 가지고 있던 걸 빼앗아 버리는 수가 있다.”

“치사하게…….”

오멘이 억울함을 얼굴에 가득 담고 이를 가는 동안 계산을 끝마친 듯 페르멘이 물었다.

“……몇 살?”

“골라 봐.”

“……두 살?”

“아, 그때 건 좀…….”

주기 아까운데. 에스메랄다가 날 때부터 수정 마도구에 그녀의 모습을 기록하는 건 아레스와 페드로의 취미였다. 그때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제법 큰 상태였으니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직접 앞장서 왔다.

“준다고 했잖아!”

반면 당시 쌍둥이는 고작 대여섯 살이었기에 먹고, 자고, 뛰어다니고, 싸고, 우는 게 전부였다. 에스메랄다 옆에서 같이 빽빽거렸으니 자체적으로 기록을 할 만한 정신은 없었지. 그러다 보니 에스메랄다의 세 살 무렵까지는 쌍둥이가 직접 기록한 수정 마도구가 없었다.

이렇게 조련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아레스와 페드로가 참 많이도 가지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 시절 아레스와 페드로의 품위 유지비, 속칭 용돈의 대부분이 새 수정 마도구를 사는 데 쓰였을 정도니까.

더욱이 에스메랄다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자신도 숙녀라고, 이런 식으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노라 엄포를 놓는 바람에 더 이상 기록을 하지도 못했다. 추가 생산이 불가능한 한정판인 셈이기에 형제들 사이에서는 무척 귀한 물건이었다.

“네 목소리가 오늘 한 번이라도 들리면 거래는 무효야.”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페르멘이 입을 닫았다.

“수정… 마도구?”

그때 아르페시스가 조금 얼떨떨한 어조로 물어 왔다.

“예, 에스메랄다의 어린 시절을 기록으로 남겨 둔 게 있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내깃거리로 가장 자주 거는 것이지요.”

“아, 그거…….”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라 아레스가 물어보았다.

“알고 계십니까?”

아르페시스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페드로가… 남겨 준 게 있다.”

이번에는 아레스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설마, 녀석의 방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던…….

상황을 알아차린 아레스와 쌍둥이의 눈동자에 담긴 탐욕을 보았는지 아르페시스가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페드로의 것 말이지요.”

삼 형제의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빼앗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들어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여기까지 가지고 오진 않았다.”

그걸 눈치챈 아르페시스가 서둘러 벽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 입이 막힌 페르멘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거리며 오멘에게 손짓을 했다.

[뭐야? 왜 아무 말도 없어? 빨리 돌려받아야지!]

“돌려받는다는 건 좀 어폐가 있지 않아? 원래 페디 형 거였으니까 형이 준 사람이 주인이지.”

[그게 오라비로서 할 말이냐?!]

군사용 수신호를 이런 데 쓰고 있는 동생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레스가 고민하는 사이 오멘이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페르멘을 훑었다.

“넌 정말 가끔 병신 같을 때가 있어, 알지?”

쌍둥이가 저들끼리 병신 짓을 하는 동안 아레스는 아주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흠, 제가 가진 것 중에는 세 살 무렵 걸음마를 하던 것도 있지요.”

“……걸음마를 세 살에?”

“형들이랑 아버지가 매일 안고 다녀서 걸음마가 조금 늦었죠.”

오멘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건지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발간 홍조가 피었다.

“걸음마… 걸음마…….”

“열 걸음을 걷고 성공했노라 손을 번쩍 치켜들었는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걸음마 수정구는 두 개다. 하나는 페드로의 유품 중에서 슬쩍 챙긴 것이고, 하나는 그가 직접 기록한 것. 그러니 하나쯤 바꿔 보자. 그게 아레스의 계획이었다.

“보고 싶으십니까?”

넘어와라, 아레스는 속내를 감춘 채 아르페시스를 향해 다정히 웃어 보였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형제들의 여행 짐에는 항시 에스메랄다의 수정이 들어간다. 언제, 어디서, 내기를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생긴 그들만의 규칙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황도와 영지에 나눠 보관하기에 걸음마 수정 마도구는 양쪽에 다 있다. 아레스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멘이 툭 내뱉었다.

“근데 아버지도 몇 개 가지고 계시지 않았어?”

아레스의 몸이 움찔거릴 때 페르멘은 이미 튀어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오멘이 곧장 따라붙자 아레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르페시스는 굉장히 이상한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아레스를 보고 있었다. 살짝 민망했다.

“같이… 가시죠.”

결국 아레스는 나잇값, 나잇값을 중얼거리며 느긋한 걸음을 옮겨 백작의 개인 서재로 향했다. 아레스와 아르페시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쌍둥이는 이미 저들끼리 상속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건 내 꺼.”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페르멘이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오멘이 집은 수정 마도구를 빼앗으려 들었다. 집안의 수치를 이렇게 보일 줄은 몰랐지만 지금 뒤처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아레스가 민망한 표정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아르페시스는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에 껴서 수정 마도구를 훔쳐보았다. 곧 그는 수정 마도구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굴었고, 그동안 형제들은 재빠르게 정당한 상속을 마무리했다.

“황도에 있는 것도 제대로 나눠, 혼자 차지하는 건 절대 안 되는 거다?”

오멘의 당부에 두 사람이 동의했다. 그렇게 아레스는 제 몫을 확실히 챙긴 후에야 아르페시스의 곁으로 가 볼 여유가 생겼다. 아르페시스가 보고 있는 건 오멘과 페르멘이 소유권을 나눈 후 잠시 내버려 둔 마도구 중 하나였다.

『아빠, 아빠, 자 어서 불러 보려무나, 리디. 아빠.』

기록 속에서는 백작이 어린 에스메랄다를 안고 말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거의 20여 년 전의 일이기에 소리가 담기는 마도구는 꽤나 비쌌을 시기건만, 백작은 그것을 기어코 구해서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빠!』

제대로 여물지도 못한 발음으로 백작의 말을 따라 하는 에스메랄다는 사랑스러웠다. 그걸 보니 과거의 추억이 떠올랐다. 쌍둥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수정구가 어디에 있는지, 아레스는 안다. 어린 시절에는 영지에 올 때마다 그걸 보려고 몰래 이곳을 들락거렸으니까.

애초에 아레스와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한 건, 누군가를 보고 배운 행동이었다. 백작 부인이 전선에 있는 백작에게 보내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수정 마도구 속에 기록했으니까. 그럼 그 당시 백작 부인이 기록한 수정구는 어디에 있을까?

“이리 와 봐.”

아레스는 각자가 나눠 가진 것을 확인하느라 바쁜 쌍둥이를 잡아끌었다. 그는 서랍이 아니라 책장을 밀었고, 그 뒤에 파인 공간에서 꽤나 큼지막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아레스, 페드로, 오멘과 페르멘까지. 옹알이를 하는 그들을 안고 에스메랄다에게 했던 것처럼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는 백작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기록이다. 올해 아레스가 스물여덟 살이니 정말, 오래전의 과거다. 그가 태어난 해에 소리가 담기는 수정이 만들어졌으니 정말, 정말 귀했을 것이다. 옹알이도, 뒤집기도, 걸음마도……. 아레스는 자신이 걸음마를 하는 동안 싱글벙글 웃는 부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페드로와 쌍둥이는 기어 다니는 모습도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것은 보이는 자리에 놔두었으면서 형제들의 것은 이리 숨겨 두었다. 그럼에도 혹여나 망가질까 봐 전장에 들고 가지도 않고, 만일의 경우 가장 먼저 수색의 대상이 되는 황도의 저택에도 가져가지 않았다.

가장 안전한 영지에 고이 모아 둔 것을 보면 백작이 이 물건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내막은 쉽게 읽을 수 있는 형제들이 저도 모르게 웃으며 서로의 수정 마도구를 구경했다.

“리디 것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 와중에도 아레스는 페르멘이 말을 한 것을 보고 수정 마도구를 아꼈노라 안도했다.

“숨겨 놓으신 걸 보면 부끄러우셨나 본데?”

오멘의 추측에 아레스는 웃으며 긍정했다.

“맞아, 나랑 페드로가 이걸 발견했을 때 당황하셔서는 당장 우리를 쫓아내셨거든. 내가 여덟 살 때였나?”

들떴던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쌍둥이는 곧 본인들을 안고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는 백작을 보느라 조용해졌다.

“큼, 아버지 보고 싶다.”

오멘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페르멘이 긍정했다.

“나도…….”

“어디쯤 오셨을까?”

“백작령에는 도착하셨을 테니……. 오늘내일 중으로 뵐 수 있겠지.”

“……조금 더 같이 보낼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형제들은 각자 상념에 젖어 부친과의 추억을 곱씹었다. 서재 바닥에 주저앉아 이리저리 말을 주고받는 쌍둥이를 두고 아레스는 다시 아르페시스의 곁으로 갔다.

“이건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그가 건넨 수정 마도구에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남은 페드로가 있었다.

『페디, 아빠라고 해 보라는데도, 아빠. 내가 네 아비란 말이다. 흠… 이 녀석은 왜 이리 말이 느리지? 알은 곧잘 따라 하던데.』

그 속에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모친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알은 형이잖아요! 페디는 태어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다고요!』

페드로는 어린 시절부터 반항기가 가득했던 게 분명하다. 기록 속의 그는 백작의 말을 따라 하기는커녕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바빠 보였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지는 동안 아레스가 오늘 이렇게 그를 데리고 다닌 이유를 입에 담았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무엇을?”

“고인을 그리워하는 것 말입니다.”

아레스가 어느새 서재 바닥에 드러누워서 수정 마도구를 보고 있는 쌍둥이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열 살 생일 때 아버지가 말을 선물해 주셨는데. 발이 하얗던 녀석.”

“아, 나도 똑같은 녀석 받았지. 아버지는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너무 의식하신 것 같아. 쌍둥이라도 취향은 다른데 말이야.”

“그건 우리가 자초한 일 아닐까? 솔직히 우리 어릴 때 유별났잖아.”

“그건 그렇지……. 식 끝나면 오랜만에 녀석들 타고 나갈까? 너도 그 녀석은 영지에 두고 갔잖아.”

“아버지랑 같이 사냥 갔던 숲으로?”

“좋지.”

쌍둥이의 대화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더군요.”

백작은 형제가 전사했을 때 본인의 부친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 각오를 안고 떠난 가족들을 그리는 방법을 자식에게, 또 자식에게 알려 주며 함께 버텨 온 것이다.

“함께였던 이가 죽었다 하여 함께했던 추억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추억으로 가득 채우시고 슬픔에게는 가끔만 자리를 내어 주십시오. 매번 그렇게 울면 못 버티십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모습이 기록된 수정 마도구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아레스가 장식장에서 꺼낸 양주로 쌍둥이와 잔을 기울이던 무렵이었다. 주인이 자리에 없음에도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매일 관리해 왔던 잔을 부딪치며 이것, 저것, 대화를 안주 삼아 쓴 술을 달게 삼킬 때.

“페드로는…….”

아르페시스는 참 어색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좀생이였다.”

형제들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사실이니까. 페드로는 꽤나 좀생이였다. 특히나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기록한 수정 마도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약삭빠르고 좀스러웠다. 내기에서 져 놓고 물건을 내놓지 않는 건 예삿일이었고, 하나를 걸고 했으면서 두 개를 빼앗아 가는 일도 있었다.

“12개를 다 보는 데 1년이 걸렸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하루에 하나씩 봐도 12일이면 끝날 것을…….”

형제들처럼 쌓인 것이 제법 많았는지 아르페시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윽고 한 잔, 두 잔, 그들은 술잔을 함께 들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의자를 찾아갈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 이야기를, 추억을 안주 삼아 잔을 기울였다. 그리움이 가득한 날이었다.

* * *

해가 지고 있음에도 형제들로부터 소식이 없었기에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 결과 그녀는 지금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을 목도하는 중이었다. 시녀들에게 전해 듣기로, 의복 준비를 마친 후에는 다 함께 부친의 개인 서재로 갔다기에 와 봤더니…….

“아빠.”

지금 그녀의 앞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부친의 장식장에서 양주를 까먹은 사내 네 명이 있었다. 그중 아르페시스의 상태는 정말 가관이었다.

“킥킥킥, 아빠래.”

페르멘은 술에 취해서 아르페시스의 모습을 수정 마도구로 기록하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하마터면 그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빠.”

그 와중에 아르페시스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날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 그의 술주정이었다.

처음 그것을 알게 된 건 여름마다 열리는 남부군의 만찬회에서였는데… 하필 그날 아르페시스가 꽂힌 단어는 ‘내장’이었다. 대체 왜 그가 백작의 개인 서재에서, 그것도 바닥에 앉아서 저렇게 술주정을 하고 있나?

“아빠.”

그리고 또, 저 단어가 그의 뇌리에 깊게 남은 이유는 뭐고?

에스메랄다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정 마도구와 빈 술병, 그리고 술에 절어 있는 네 명의 사내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르페시스뿐만 아니라 남은 셋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믿었던 아레스마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들이부었기에…….

“전하와 오라버니들을 방으로 모시렴.”

“예, 아가씨.”

시녀가 불러온 시종들이 각자 한 명씩 붙잡아 자리에서 일으키는 동안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르페시스가 문가에 서 있던 에스메랄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는 비척비척, 시종을 밀치고 에스메랄다에게 다가와서는 대뜸 입술을 들이밀었다.

“술에 취해서는 이게 뭐 하는……!”

그에게 붙들린 에스메랄다는 입술이 틀어막히는 바람에 버둥거려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꽤나 빨리 자유를 되찾았다. 페르멘이 아르페시스를 걷어찼으니까. 두통이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짐승아! 우리는 보이지도 않냐?!”

아르페시스가 넘어지면서 붙잡는 바람에 페르멘도 같이 엎어졌고, 오멘이 웃으면서 그 위를 덮는 이불처럼 몸을 던졌다. 그런 그들을 지나쳐 에스메랄다에게 다가온 아레스는 주절주절, 넋두리를 하지 뭔가?

“에스메랄다…….”

혀가 꼬여서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게 정말, 한숨이 나온다.

“나는 사실 조금 섭섭하구나. 내가 그래도 오라비인데… 내 앞에서 저놈 편을 들고 그러면 말이야, 내가 섭섭하다고. 한창때지만 그래도 꼭 그리 티를 내야겠니? 내 편을 좀 들어 주렴. 내가 너를 그렇게 안고 다니며 키웠는데, 생판 남인 놈에게 홀라당 넘어가면…….”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에스메랄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왜 대낮부터 술판이냐고요!”

“우리는 같이 추도를…….”

“당장 오라버니들을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느냐!”

시종들이 다시 형제들을 한 명씩 챙겨 서재를 나섰다. 여전히 아빠라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서 매정히 등을 돌린 에스메랄다가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찬 시간에 멀쩡한 몰골로 헤어진 네 명이 저 꼴이 났단 말인가.

* * *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꽤나 두툼한 보고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곳에 적힌 글을 모두 머리에 넣은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조로웠다.

“약속했던 것을 쥐여 주렴.”

과거 시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세작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게 애당초 했던 약속이기도 했거니와, 에스메랄다는 본래 성과를 가져온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보상을 후하게 측정하곤 했다. 그런 보상이 또 한 번의 성과를 내어 그녀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나가 고개를 끄덕인 직후 에스메랄다는 보고서를 소각했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침실에 들어섰다. 침실에선 아르페시스가 쭈뼛거리는 기색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에스메랄다가 참,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니?”

그녀의 형제들과 술을 들이켜고 주정을 해 대던 아르페시스는 아레스가 준비한 객실로 돌아간 직후 곯아떨어졌다고 했다. 저녁 내내 잠에 빠져 있던 이가 여기에 있으니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다.

“숙취는 없고?”

“……머리가 아프다. 술을 마시고 마나를 써서 그런지 속도 좀 울렁거리고.”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그리 들이부었으니 당연하지 않나?

에스메랄다는 저가 물어본다고 주절주절 다 말하는 아르페시스를 예쁘게 봐야 하는지, 한심하게 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욕실로 향했다. 집무실에서 나서기 전 그녀의 일과를 아는 시녀들이 미리 목욕 준비를 끝내 놓았기에 옷을 벗기만 하면 되었다. 다시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욕실 입구를 돌아본 그녀가 물었다.

“지금도 나를 보는 거야?”

“아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는데 답으로 돌아오는 건 어찌나 우렁찬지.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웃으며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씻고 왔어?”

“아니… 깨어나자마자 왔다.”

“그럼 들어와, 너도 씻어야 할 거 아냐.”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페시스가 욕실 밖에서 슬쩍 고개를 집어넣었다. 이미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문 앞까지 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되겠나?”

“볼 거 다 본 사이에 새삼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다고.”

씰룩거리는 입매를 매만진 그가 욕실로 들어오며 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냉큼 그녀의 뒤에 자리를 잡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뭘 했기에 머리에 남은 단어가 아빠야?”

그의 품에 기대어 앉은 에스메랄다가 물어보자 아르페시스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있었던 일을 말했다.

“오라버니들만 하신 줄 알았더니…….”

백작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두 번의 생을 보내는 동안 전혀 몰랐다. 사라진 시간에서 백작의 유품을 정리할 때는 집사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심장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춰야만 했고, 그녀의 빈자리는 아르페시스가 대신 채워 주었다.

“아레스는 백작 부인이 했던 것을 보고 따라 한 것이라 하더군.”

에스메랄다는 그 말에서 모친이 그런 행동을 해야 했던 이유를 읽었다. 그녀의 입가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내 옹알이는 누가 가져갔는데?”

“……페르멘.”

돌려받아야겠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얕은 물기와 함께였다. 에스메랄다는 억지로 숨을 고르며 감정을 밀어냈다. 추도는 미뤄 두었다. 지금은 새로 손에 쥔 정보를 다듬어 둘 때였다. 욕조에 걸쳐 둔 그녀의 손가락이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하려고 그러나?”

아르페시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에스메랄다가 속삭였다.

“아비체룬.”

“아비체룬?”

“서부 대란 무렵에 보내 둔 세작이 돌아왔거든.”

이미 그녀가 무슨 일을 해 왔는지 모두 알려 주었다. 더 이상은 그에게 들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편했지만, 말을 하는 내내 모든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의 덤덤하던 모습은 지나 버린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도, 그녀도, 참…….

“무슨 소식을 가져왔기에?”

오늘도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쪼기 시작한 아르페시스의 곁에서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의 대답 없이 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나가 가져온 소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비체룬에 정착한 직후 내륙에서 신관들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소식. 신전은 텅 비어 사제들이 꾸리다시피 하는 중이었으며, 치료는 신관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 받는 것이 당연한 인식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고 한다.

에스메랄다의 로부오들이 귀족들에게 접근해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파 오기 위해 들어갔다면, 시나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특별한 무력이 없는 평범한 세작, 그의 역할은 숨어 다녀야 할 로부오들이 보기 힘든 아비체룬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시나는 자신이 확인해야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국경을 넘어야겠노라 마음을 먹은 이유는 그가 가져온 두 번째 소식 때문이었다. 에스메랄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정보.

「- 바 20일, 남부 전선 목공으로 차출.

- 바 39일, 아비체룬 남부 전선 도착.

- 바 42일, 신관 발견.

- 바 45일, 신관들이 항상 기사들과 함께 움직임을 인지.

- 바 47일, 신관들과 함께 다니는 기사들이 호위가 아니라 감시역임을 인지.

- 바 48일, 국법에 따라 신력 치료는 군적에 속한 이들에게만 제공된다는 사실을 인지.

- 바 70일, 신관 탈주 사건 발생. 실패 및 시도 신관 억압.

- 바 77일, 탈주 시도 신관과 접촉 성공.

- 바 88일, 탈주 시도 신관으로부터 국경 폐쇄 당시 사건 파악.」

그 아래에 적힌 무수히 많은 글자들이 지금의 에스메랄다를 채우고 있었다.

과거 국경 폐쇄 전, 아비체룬에서 활동하던 상단들은 천천히, 천천히 외부로 쫓겨났다. 당시 외국계 상단의 국내 거주 불가법이 상정되었고 통과되었으니까.

아비체룬 왕실은 당시 강경한 입장으로 자국의 땅에서 외국인을 몰아냈다. 국적을 옮긴 외국인 출신은 물론, 여행객까지도. 덕분에 라히크와 테노리엘처럼 아비체룬과 국경을 마주한 영지에서 유동 인구가 급증했다고, 백작에게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외국계 상단들의 거주가 불가능해진 것뿐이다. 상단과의 거래 자체는 유지되었기에 금전적 손해를 본 곳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 덕분에 왕실의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군사적 충돌을 우려한 타국은 먼저 물러나며 사태를 주시했다.

또한 개인적인 소장용의 조련석이 분실되거나 망가지는 사건들이 발생했기에 세작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방법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직후 조련석이 군사 물품으로 지정되어 사적인 사용이 불가능해졌고 그 이듬해, 국경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 아비체룬이 국경을 완전히 잠그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년이다. 그 이후 상단 교류는 무조건 국경에서 물자 양도가 이루어졌고, 외부인이 국내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억지로 들어간다 한들 나오는 건 더 힘들다. 아비체룬 왕실은 국경을 폐쇄한 후 단 한 번도 외국으로 사절단을 내보낸 적이 없다. 타국의 즉위나 국혼 같은 행사에도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나가 조사해 온 것은 현재의 상황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40여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을 알고 있는 기성세대들의 기억도 함께였다. 지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정보들을 정리하면 당시 아비체룬에서 벌어진 일들이 가졌던 명확한 목적을 알 수 있다.

「- 1401년, 왕권 교체 직후 병력 증원. 기성세대에게 수소문한 결과 남부군 증원이 목적이나 실질 증원 병력은 국왕 통솔의 직속 병력. 해외 상단 거주 불가법 제정.

- 1402년, 국경 지역에 영지 시찰 명목으로 병력 파견, 외국인 퇴출 작업 시작, 상단 거래 국경에서 주도 및 국경 폐쇄 준비 시작.

- 1403년, 각지의 조련석 압수 및 파괴, 조련석 군사 물품 지정.

- 1404년, 국경 폐쇄, 신전 급습, 신관을 통제하고 반항할 시 처형하는 등의 과격한 무력 사용, 신관 남부 강제 동원 시작.」

그 끝을 알기 전에 아비체룬의 내부에 있던 대부분의 세작들이 연락망을 잃었다. 그래서 외국에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즉위한 아비체룬의 새로운 왕이 가지고 있던 목적.

“신관 사냥.”

썩을 대로 썩어서 남부 전선 유지에 도움은 쥐똥만큼도 되지 않는 신관들에게 검으로 목줄을 채운 후 강제로 남부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관이나 사제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갔을 터.

아마 즉위 전부터 차근차근, 물밑 작업이 이루어졌겠지. 고작 3년 만에 모든 일을 해결했을 리 없다. 상정과 동시에 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우호 귀족들을 포섭하고, 왕권과 군력을 강화해 한 번에 몰아칠 수 있도록. 만약 반발을 하는 귀족들이 있었다면…….

“피바람이 불었겠군…….”

에스메랄다는 아비체룬의 왕실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과연 몇 년이나 기반을 닦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최소 20년은…….”

준비에 20년, 유지에 40년, 세대교체를 위해 버티려면 또 수십 년이 걸린다. 몇 세대에 걸친 장기적인 계획이었으리라. 단 한 번의 실수로도 타국의 비난과 공격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대부분의 대신관들은 머무는 나라의 지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 준 신관들을 억압했다는 것을 타국에 들켰다면? 곧장 전쟁이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면 신관들의 신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이점 역시 존재한다.

“대단한데…….”

미친 짓이라고 평가를 해야 할 만큼 극단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렇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본래부터 아비체룬이 타국과의 무역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아비체룬의 영토가 에렘의 1/3을 조금 웃도는 정도였으며, 왕실이 오랜 시간을 들여 귀족들을 완전히 휘어잡았기에 가능했겠지.

정말 대단하다. 당시 성공한 것은 물론,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지를 하고 있는 것 역시 가히 찬사를 보내야 할 정도였다. 아비체룬은 전선 유지에 돈을 요구하며 비협조적으로 구는 신관들을 무력으로 협박해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국의 신관들에게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하도록 외부와의 단절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지했다.

외부에 있는 신관들은 내부에 있는 이들의 안전을 들먹이며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느껴도 언제나, 어디서나 명분이 발목을 잡을 테니까.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왕실의 행동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비체룬의 땅은 아비체룬 왕실의 것이니까.

왕이 제 땅에서 무엇을 하든 간섭할 명분과 증거, 그게 당시의 지도층에게는 없었다. 폭압과 폭정 속에서 이루어 낸 성과는 에스메랄다 역시 정말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리고 세대교체가 행해지면…….”

어린 사제들이 신력을 발현해 신관이 되고, 당시의 폭압을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신관들을 모두 처리해 과거의 일을 묻어 버릴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국경을 열 생각이었겠지. 어쩌면 들키기 전까지는, 혹은 전선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예 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당시 어떤 식으로든 백성들을 통제했겠지만, 모두의 입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만약 이 진실을 알게 되면 타국의 고위 신관들이 당장에 들고일어났겠지만…….

“신탁…….”

며칠 전 내려진 신탁은 분명 아비체룬에게도 닿았을 터. 왕실과 접촉을 해서 그들이 국경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 늦어도, 에렘의 내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그들이 나와야지 최상의 결과다. 남진은 3국이 함께 가야 하니까.

물론, 그 이전에 아직도 찾지 못한 성인의 성향도 중요할 것이다. 만약 신의 대리인이 신관들을 억압한 아비체룬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성인… 성인…….”

우선 성인을 확보해야 한다. 아직 신전 깊은 곳에 숨어 권력과 재력을 움켜쥐려고 발악하는 대신관들로부터 지켜야 한다. 또한 신탁의 마지막 문장, 대리인이 판단할 것이라던 그 문장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신앙심이 성인의 안전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 역시 이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고. 더욱이 이제 아비체룬의 일까지 엮여 있다. 성인이, 교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향후 아비체룬과의 동맹이 영향을 받는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욕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계속 아비체룬에 관한 것만 생각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동안 어색한 손길로 머리를 감겨 주고, 떨리는 손길로 몸을 씻겨 주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물이 식기 전 가운을 걸치고 욕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전보를 통해 내전에 관련된 인력을 빼어서라도 성인에 대한 수색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곧장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들이 음식을 가득 실은 트레이를 이끌고 들어왔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에스메랄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사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으니까.

“식사를 걸렀던 것인가?”

뒤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던 아르페시스가 물어보자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늦어도 모레 중으로는 전선에 황제의 전서구가 도착할 거야.”

“아…….”

시녀가 두고 떠난 트레이 옆에 있는 외발 테이블 앞에 그를 앉힌 에스메랄다가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너를 부르는 내용이 거의 확실해. 추상적인 기록만으로는 실질적인 위협의 정도를 확실하게 측정할 수 없을 테니, 눈으로 보고 관찰하기를 원할 거야.”

황제에게는 아르페시스가 어느 정도의 위험인물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상태다. 그러니 단 한 번도 남부군으로 황명을 전달한 적 없던 황제가 본인의 전서구를 띄웠지. 그것도 한창 겨울이 짙어지고 있는 시기에.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그때 네가 황도에 도착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야.”

“도착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에스메랄다에 의해 자리에 앉은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가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야 그날 일 때문에 안달이 나게 될 황제가 곧장 식사 시간에 널 부를 테니까.”

그가 황도에 도착할 무렵에 벌어질 일을 설명해 준 후에야 그의 옆에 있는 트레이에 손을 댈 차례가 올 것이다. 젖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어낸 그녀가 빗을 들며 말을 이어 갔다.

“황도에는 마수 투기장이라는 게 있어.”

더 정확히는, 황도 외곽에서 상단들이 사용하는 물품 보관 창고들이 있는 지역에. 그것도 지하에.

“방음 마법과 각종 결계 마법이 쳐진 장소지. 내륙에서 잡아들인 소형 마수들을 가두고 며칠을 굶긴 후 서로 싸우게 만드는데… 어떤 놈이 이길지 돈을 걸어. 일종의 도박이야.”

식량이 없을 때 마수들은 동족의 사체를 먹기도 한다. 참 쓸데없는 것에 머리를 쓰는 놈들이 그런 마수의 행동을 보고 새로운 유흥거리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황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수 투기장의 시작이었다. 이미 몇 해 전 로부오들을 통해 마수 투기장이 황도에 완전히 정착했음을 확인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이끌어 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설명을 경청했다.

“네가 도착해야 할 때, 내 로부오들이 그곳을 공격해서 마수를 황도에 풀어놓을 거야.”

물론, 유인을 해서 황도 외성 내부 지역으로 데려가는 일도 병행할 것이고. 에스메랄다는 그 사건으로 몇이 죽어 나갈지, 같은 문제는 거론하는 대신 묻어 버렸다. 황태자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아르페시스의 행보가 부각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당장은, 핏물을 내서라도…….

그녀가 빗질을 시작하자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물었다.

“잡으라는 건가?”

황도에 마수를 풀어놓겠다는데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에스메랄다는 새삼 백성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그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입 안이 썼다.

“당연하지.”

“……이번에도 과시하면서?”

“아니, 보는 눈이 많을 사건이니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그리고 완벽한 정도면 충분해.”

황도에는 정예라 불릴 상급 기사들이 많기에 혼란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란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수가 주는 공포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한 건, 대부분의 사람이 열에 아홉꼴로 마수를 보면 일단 도망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선 도주해야 한다고 여길 만큼 짙은 공포가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 공포에 황도의 기사들이 흐트러지는 건 고작해야 몇십 분이다.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곧장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이고, 정예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신을 차리고 마수를 잡을 것이다. 그렇게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오래지 않아 정리된다. 황도에 풀 수 있는 마수는 고작해야 3, 40마리니까.

아르페시스가 할 일은 황도의 병력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선수를 쳐서 피해를 차단하는 것, 한마디로 모든 공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것을 위해 인위적으로 계획한 상황이다.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모조리 그가 가져야 한다.

“뭐,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 하면 좋을 법한 말도 많지.”

“예를 들면?”

“황도에 있는 병력을 무능력자로 만들 만한 것?”

아르페시스는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그가 할 말을 연습시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연극을 하는 것 같은 어색한 말투 때문에 잠시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어떻게든 다듬어 볼 수는 있었다.

대화의 끝에서 화장대를 등지고 일어난 에스메랄다의 손길이 트레이로 향했다. 음식이 담긴 접시가 외발 테이블 위에 오르고, 그의 시선이 본인의 앞에 놓인 접시에 닿을 무렵, 에스메랄다가 어서 해 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물론 아르페시스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힘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해.”

에스메랄다는 그런 아르페시스에게 조근조근한 어조로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또 다른 접시를 집어 든 채 아르페시스와 조금 떨어진 침대 위에 앉았다.

“넌 황제를 만날 때마다 모든 행동에 과시를 담아야 해.”

지금부터 할 말은 아르페시스에게 도착 시간을 정해 준 이유와 관련 있었다. 만약 식전에 아르페시스가 황도에 도착한다면, 황제는 이후에 예정된 식사 시간에 그를 부를 것이다.

그 직전에 황도에서 마수 사태가 일어났고, 그것을 해결한 게 아르페시스라면? 황제는 그와 만찬을 함께해야만 한다. 다른 귀족들의 눈을 피해 가장 빠르게 아르페시스를 만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관찰하려 들거나 직접적으로 물어 온다면 해야 할 행동을 알려 줄게.”

“……어떻게?”

아르페시스는 황제의 이야기가 나온 이후부터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가 하라니까 얌전히 무얼 해야 하는지 듣고 있었다.

“처음, 내게 네 힘을 보여 주었을 때 기억나?”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퀘나의 객실에서 화병을 조각내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음식을 이용해 그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다.

“이번에는 네 앞에 있는 고기를 그 화병처럼 잘라봐.”

그는 두말하지 않고 파란 물결을 만들어 냈고, 고기와 함께 접시까지 잘려 나갔다. 아르페시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르페시스는 지금과 같이 신체와 떨어진 곳에서 마나를 유형화할 때, 대부분 성벽을 무너트리거나 인간을 도륙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 부분을 짚어 냈기에 확인 작업을 거친 것이다. 역시나, 접시 위에 있는 음식만 자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듯했다.

“성공할 때까지 해 봐.”

말을 잘 듣기로 한 아르페시스가 트레이 속에서 고기 접시를 새로 꺼내 들었다. 연습이 필요했다고는 하나 그는 에스메랄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마나 운용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작 세 번 만에 고기만 자르는 데 성공한 아르페시스를 보며 에스메랄다가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들고 있는 거.”

잠시 미간을 좁히는 듯했던 그가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에스메랄다가 들고 있는 접시 위에 푸른 물결을 피워 냈다.

“더 천천히.”

에스메랄다는 그가 고기를 조각내기 전에 다양한 요구를 했다. 아주 천천히, 섬세하게, 그리고 일정한 크기로.

“황제의 앞에 놓인 음식은 이렇게 천천히, 그가 눈으로 목격하고, 인지하고, 이해하면서도 경계하도록.”

고기만 적절한 크기로 잘라 낸 아르페시스가 안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쉴 때, 그녀가 덧붙였다.

“만약 황태자가 동석한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간 에스메랄다는 실패작을 가리켰다.

“그놈의 접시는 이렇게 만들도록 하고.”

황제에게 과시를 함과 동시에 황태자는 위협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트레이 속에서 새 접시를 꺼내 들어 그의 앞에 하나, 자신의 손에 하나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동시에 해 볼까?”

아르페시스는 이미 감을 잡은 것인지 곧장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성과를 내어 놓았다. 그녀는 말을 잘 듣는 학생처럼 질문을 해 오는 그에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지시 사항을 읊어 주었다.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꼼꼼하게 짚어 주었고.

아르페시스는 적군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알지만, 정적 앞에서 교묘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있을 법한 상황을 모두 나열하며 그에 따른 대응을 세세하게 가르쳤다.

모든 연습이 끝난 이후 시녀들이 들어와 동강 난 접시와 음식을 치웠고, 에스메랄다는 그녀들이 방을 나서자 말했다.

“황제와의 만찬이 끝나면 나를 데리러 와 줘.”

“알겠다.”

영지에서 장례식을 치른 에스메랄다가 황도에 있다는 것, 그건 황제의 서신을 받자마자 황도에 도착한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접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동이다. 이미 이 일정에 대해서는 조찬 시간에 형제들과 대화를 마쳤다.

아레스는 영지에 남아 몸을 추스르기를 원했고, 페르멘과 오멘은 함께 황도로 가겠다고 했다. 오멘은 가족상을 위해 낼 수 있는 휴직계를 내고 영지로 온 것이기에 원래 황도로 돌아가야 하고, 페르멘은 에스메랄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황제는 테노리엘과 너의 관계를 확신하게 될 테니… 그의 반응에 대해서도 경계를 계속해야 될 텐데…….”

“그…….”

연습이 끝난 후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돌아온 아르페시스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돌아본 에스메랄다는 이어진 말에 저절로 표정을 굳혔다.

“황제는 이미 알고 있다.”

“……뭐?”

그는 테베르의 일을 언급하며 그와 그녀의 관계가 이미 황제에게 알려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페드로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전해지고도 남았을 시기라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도 안 돼, 그게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었다.

“그자가 알든, 모르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것을 깜빡했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 겪은 일들이 너무 파란만장해서 말을 할 기회도 없기도 했고. 아르페시스가 말을 덧붙였지만 에스메랄다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알고 있다고?”

그것도 거의 처음부터?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 어째서?

황제는 분명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테노리엘을 들쑤시는 수를 두었다. 흔적을 캐기 위해, 상황을 보기 위해, 경고를 하기 위해 분명히 그러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접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간 테노리엘을 들쑤셔 본 황제의 행동은… 허수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어……?”

대체 왜? 지금 에스메랄다에게는 황제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그 말인즉…….

“놓쳤어…….”

그녀가 놓친 게 있다. 무엇을? 어디서? 언제? 직접 정립한 계획과 과정으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 엉망으로 뒤엉킨 생각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것을 제대로 파헤치기도 전에 그녀를 생각 속에서 끄집어내는 소리가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도착한 시녀가 꺼낸 그 짧은 말.

“아가씨, 남부군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남부군에서 보낸 사람과 함께 오던 것은 전사자의 시신이다. 그녀와 형제들의 부친이 도착했다. 에스메랄다는 창백한 안색을 한 채로도 복잡한 생각을 멈추었다. 곧장 성의 입구로 내려갔고,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형제들과 함께 남부군의 기사로부터 백작의 시신을 인계받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부친을 보내 줄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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