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4화 (34/45)

제33장

길고 긴 여정의 앞에서

파정 직후 아르페시스는 제 아래에서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와 몸속에서 들끓던 열기가 식자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비현실적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평소 꾸던 꿈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그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날을 그려 보며 홀로 욕정을 풀어 왔다.

하지만 그녀와 맞닿은 체온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녀의 음부를 탐했던 감각마저 남아 있었다. 그러니 착각은, 아니겠지? 지금 자신이 그녀와 정사를 나눈 것이 맞는 것이겠지?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거칠기만 한 숨을 내뱉으며 에스메랄다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에스메랄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파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직전의 눈물로 인해 살짝 부어오른 그의 눈매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온 아르페시스가 다시금 그녀의 위로 몸을 겹쳤다. 혹시나 무겁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팔꿈치로 체중을 지탱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에스메랄다가 제 머리 옆에 있는 그의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촉촉, 가벼운 입맞춤이 그녀의 뺨과 눈매 위로 쏟아졌다.

“우움…….”

정사가 힘겨웠던 것인지 에스메랄다는 간간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꼭 졸음에 취한 사람처럼 눈을 끔뻑끔뻑거리며 그의 품에 뺨을 비비기도 했다. 그런 에스메랄다의 응석이 너무 좋아서, 아르페시스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훔쳤다. 느른하게 그녀의 입술을 핥으면서도 탐스러운 가슴을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으응…….”

분명 에스메랄다의 가슴은 아찔한 곡선을 만들어 내며 뭉그러지고 있겠지. 지금의 여운이 좋았다. 강렬하게 휘몰아친 쾌락의 끝에서 헐벗은 채 살결을 겹치는 게 이토록 행복할 줄이야.

“에디…….”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녀의 몸 곳곳에 저가 남긴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그걸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음…….”

정사 후에도 팔팔한 아르페시스와 달리, 에스메랄다는 축축 늘어지는 몸이 너무 무거워서 당장이라도 수마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을 쭉 빨아 먹은 솜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아래로 축축 늘어지기만 했다. 쾌감이 뒤엉킨 열락 속에 풍덩 빠졌다가 꺼내진 기분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까? 조금의 과장을 섞자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몸 깊은 곳에서 울리던 절정의 여운이 머릿속에서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절정의 잔상이 머릿속을 뿌옇게 채우고 있어서 생각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은 드문드문, 수면 아래에서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수면 위에서 퍼지는 파문 덕분에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았을 뿐, 반쯤 잠에 취한 상태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 와중에도 완전히 잠드는 대신 억지로 의식을 붙잡은 건, 시국이 위험하다는 경각심 때문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아르페시스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신탁에 대해서 정보를 모아야 한다고, 광장 근처에서 본 성인에 대한 것을 조사해야 한다고, 억지로 생각을 이어 갔다.

많고 많은 문제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제 위에서 가벼운 입맞춤을 쏟아 내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아르페시스는 힘이라고 부를 게 하나도 없는 손길에도 쉽게 밀려나 주었다. 정사 도중에는 한 번도 물러나지 않더니……. 아르페시스를 흘겨본 에스메랄다가 바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의 끝으로 기어갔다. 그러고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피임약이 담긴 병을 발견한 에스메랄다가 곧바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사내의 경우에는 정사 후에 복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지만, 여인의 경우에는 이후 복용도 어느 정도 임신을 막아 준다. 월경이 끝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또한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났으니 챙겨야 하는 일이었다.

에스메랄다가 피임약을 꿀꺽, 삼키는 동안 아르페시스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품에서 빠져나간 그녀가 둔부를 씰룩거리며 기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내가, 음부에서 제 씨물을 흘려 대며 기어가는 여인을 보고 멀쩡할 수 있겠나. 그걸 보고도 불이 붙지 않는다면 그건 사내 구실도 못 하는 놈들이 분명하다. 아르페시스는 그 부류에 속하지 않기에 다시금 피어오른 열기에 순응했다.

몸을 일으킨 그가 에스메랄다를 따라 하는 것처럼 무릎걸음으로 침대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저를 유혹하고 있는 탐스러운 둔부를 손아귀 속에 가두었다.

“아……!”

피임약을 다 마신 에스메랄다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부러 갈라진 틈을 벌리자 울컥, 하고 그녀의 속에 들어 있던 그의 정액이 쏟아졌다. 아르페시스는 황홀한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밖으로 새어 나온 정액을 그녀의 안에 집어넣고자 손가락을 놀려 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손가락보다 더 굵고 긴 것으로 입구를 막지 않는 한 계속 새어 나오겠지.

아르페시스가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입술을 핥고 있을 때, 계속 음부를 지분거리는 손길 때문에 힘이 빠진 에스메랄다의 상체가 침대 위로 무너졌다.

그녀의 손에서 빈 병이 떨어지는 것을 본 아르페시스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등에 제 가슴을 겹치며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파란 잔상이 생겨나며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피임약 병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중에 사내를 위한 것만 가져온 아르페시스가 빠르게 병을 비웠다. 그 와중에도 벌써 꼿꼿하게 일어선 그의 성기는 에스메랄다의 둔부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자, 잠깐만…….”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만류해 보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을 훔치는 것도 더 하고 싶고, 제 손에서 뭉그러진 가슴도 더 보고 싶고, 가녀린 목덜미도 더 핥고 싶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어 마음껏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아르페시스는 제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파정을 했음에도 다시금 열기를 풀어내기 위해 부풀어 오른 성기를 에스메랄다의 둔부 사이에 문지른 것이다.

비어 버린 피임약 병을 침대 밖으로 내던진 후에는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척추뼈가 도드라진 그녀의 등과 뒷목을 핥으며 손에 움켜쥔 가슴의 돌기를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고.

“으흣……!”

에스메랄다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엉덩이만 높게 치켜든 자세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달가운 자세였다. 다시금 그녀의 안으로 파고드는 게 수월했으니까.

직전의 정사로 축축하게 젖어 있던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손쉽게 빨아들였다.

“아!”

아르페시스는 아찔한 쾌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달뜬 숨을 내쉬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 그의 아래에서, 에스메랄다는 또 한 번 저를 휩쓰는 쾌락에 노출되었다.

“그, 그만……! 아앙……!”

아주 잠시뿐이지만, 에스메랄다는 반항을 시도했다. 제 몸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체중을 밀어내거나,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오고자 바르작거렸다는 의미였다.

“에디…….”

그녀의 귓불을 빨아 대며 거친 숨을 토해 내던 아르페시스가 방해를 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한쪽 팔로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남은 한 손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지분거리는 중이었고.

“여기가 좋은, 것이지? 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에스메랄다는 저가 민감한 곳만 꾹꾹 찔러 오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말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짙은 교성을 뱉어 내느라 바쁠 뿐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아르페시스가 저를 놔줄 때까지 순응하는 것뿐이었다.

* * *

아르페시스는 끙끙거리는 에스메랄다의 옆에서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의 손에는 음식이 담긴 접시와 포크가 나란히 들려 있었다. 스스로의 행동이 과했노라 인정한다. 변명을 해 보자면 너무 좋아서, 오래도록 쌓이기만 했던 욕망이 한 번으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서 그랬다.

그렇게 몇 번이고 욕심을 부린 결과, 아르페시스는 몸살이 난 것처럼 앓는 소리를 계속 내는 에스메랄다를 봐야만 했다.

체력적으로 그녀와 그가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고 반나절을 꼬박 매달려 있었다. 정오에 매달려 있던 해가 기울어 어둠이 창궐한 후에야, 에스메랄다가 혼절하다시피 정신을 한 번 잃은 후에야 겨우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에디, 이것 좀 먹어 보겠나?”

덕분에 백작 저로 돌아와 있던 쌍둥이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애 밥은 먹여야 할 게 아니냐고, 잔뜩 성내는 것을 들어야만 했지.

“입맛 없어…….”

이곳이 백작 저이고, 백작 저엔 쌍둥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지한 아르페시스는 이성과 함께 정신머리까지 되찾았다. 음식을 준비해 온 트레이를 들일 때 열린 문밖에서 보았던 쌍둥이의 표정이 자꾸 생각났다.

‘아브세란 경 외 2명과 함께 왔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모르는 척 좀 넘어가 주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그렇게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살벌하게 노려볼 필요는 없지 않나?

아르페시스는 약간의 불만을 담아 쌍둥이의 똑같은 얼굴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이후 그는 포크에 찍은 고기를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이불 아래에서 드러난 속살을 훔쳐본 아르페시스가 눈을 꾹 감았다. 짐승보다 못한 놈, 참 자주 해 보았던 생각을 반복한 그는 우물거리며 다시 음식을 권했다.

“그래도 조금만 먹어 보라. 히, 힘들었을 테니까… 체력을… 그러니까 먹어야…….”

“안다니 다행이네.”

한숨과 함께 푸욱 늘어진 말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비꼬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이게 정말, 그녀가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인지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고생을 해야만 관계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녀 나름대로 다음은 나을 것이라는 안도 속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걸 알기에 차마, 다음에는 더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대신 수긍하는 척 입을 다문 것이다. 일단 그녀에게 다음을 함께 해 줄 생각이 있어야 자제하는 노력이라도 해 볼 것 아닌가? 그 노력의 결과가 실패이든, 성공이든, 일단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 놔야지.

“생각이 짧…….”

생각이 짧았노라 사과를 하려던 아르페시스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짧았던 게 아니라 아예 없었던 것에 가까우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엔 너무 짐승 같아 보이지 않겠는가? 그는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계속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접시와 포크를 든 채 안달복달하는 아르페시스를 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푸흐, 하고 웃었다. 조금 전 그렇게 아프게 울더니, 이제는 제법 괜찮아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씻고 싶어.”

“그, 그래, 잠시만.”

아르페시스가 시녀를 부르자 곧 침실에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가득 찼다.

“입이 가벼운 아이들은 없을 것이라고 믿으마.”

“예, 아가씨.”

오멘이나 페르멘이 어련히 단속할까 싶었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방문은 꼭꼭 감춰야 하는 일이다. 백작 저 밖으로 그의 머리카락 한 톨 흘러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가 갈아입을 의복까지 준비해 온 시녀들은 목욕 준비를 끝낸 후 침실을 나섰다. 에스메랄다는 시녀들이 나간 후 곁에서 어물거리는 아르페시스에게 손을 뻗었다.

“못 걷겠어.”

사실 걸을 힘 정도는 있지만 어리광을 좀 부린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안아 줄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는 곧장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었다. 그가 상의를 챙겨 입지 않아서 다시 서로의 살이 맞닿았다.

“바, 밖에 있겠다.”

욕실에 들어선 직후 따듯한 물속에 몸을 담근 에스메랄다는 곧장 몸을 돌리려는 그를 불렀다.

“넌 안 씻을 거야?”

“가, 같이?!”

방금 전까지 그렇게 살을 맞대었으면서 같이 씻는 것이 뭐가 어떻다고. 에스메랄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지 와인처럼 붉게 물든 아르페시스는 계속 머뭇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욕조에 걸쳐 둔 팔 위에 턱을 괴고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온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욕조의 물이 넘쳐흐른 직후 그가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당기며 조금 더 밀착해 왔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폭 파묻혔다. 그 직후 그가 에스메랄다의 어깨와 목, 등줄기에 입술을 쪼기 시작했다. 잘고 얕은 입맞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대는 너무 달아.”

얼룩덜룩,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붉은 흔적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배가 불렀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달다고? 손등을 살짝 핥아 봤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에게서 단맛이 날 리가 없지. 아르페시스의 미각이 이상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낸 그녀는 다른 생각을 데려왔다.

“신탁, 들었어?”

에스메랄다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로한 몸이 따듯한 물속에 잠기자 수마가 밀려왔으나 그녀는 졸음을 애써 밀어냈다. 당장 해야 할 얘기가 꽤 많았다.

“들었다.”

아르페시스의 대답이 끝나자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성인을 본 것 같아.”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얼빠진 되물음을 꺼냈다.

“……뭐?”

“그 골목으로 도망치기에 따라갔던 거야.”

“후드를 쓴?”

“정확히는 그 사람에게 안겨 있던 아이. 성녀인지 성자인지는 모르겠고.”

고작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한 작은 아이의 이마에서 주신의 문장을 보았다. 몸에 신의 문장을 타고나는 건 성자나 성녀, 신이 직접 고른 대리인뿐이다. 유일하게 교황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이며, 그들 중 일부는 치료를 넘어 재생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신력을 품고 태어난다.

역사 속에서 성인이 등장했던 경우는 열두 번, 그중 3명이 잘린 신체마저 재생시킬 만큼 강력한 신력을 품고 있었다.

“그때도 있었나?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에스메랄다는 사라진 시간에 대한 것을 물어 오는 아르페시스에게 부정도 긍정도 줄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몰랐어.”

대답을 한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은 상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없었던 일이 생겨난 것인지, 그녀가 발견하지 못한 사이 신전을 통해 제거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 의문 때문에 속이 일렁거린다. 만약 존재했으나 제거된 것이라면……. 에스메랄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직접 보지 않고도 확인하고… 그런 거 가능하지 않아? 리퀘나에서 날 계속 봤잖아.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맞기는 한데……. 아르페시스는 차마 죄를 시인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두 사람도 찾을 수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가능하다.”

지금 나온 주제에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아르페시스가 먼 거리의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주변으로 퍼진 자신의 마나로 사물이나 생명체를 느끼는 것에 가깝다. 인외자의 힘을 얻은 후 마나는 아르페시스의 또 다른 감각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눈과 귀보다는 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유사한 표현이리라.

마나가 닿은 생명체나 사물의 형체를 추측할 수 있고, 공기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추측할 수 있다. 체내에 마나를 품은 생명체는 조금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고, 마나가 아닌 신력을 가진 생명체라면…….

“신관이라면 이질적이라서 찾을 수 있기는 한데…….”

문제는 지금 황도에 널리고 널린 게 신관이라는 점이겠지.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자신의 마나를 풀었다. 그리고 이상한 상황을 마주한 채 얼빠진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어느새 자세를 틀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겨 든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너무…….”

“너무?”

아르페시스는 다시 마나에 잡히는 것들을 느껴 보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적은데.”

그가 파고들기 수월한 마나와 달리 신력은 너무 이질적이라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위치 자체를 찾는 건 더 쉽다. 마나가 밀려나는 부분에 신력이 있다는 의미이니까. 그런데 백작 저를 기준으로 한계치까지 마나를 풀어냈음에도, 근방에서 인지되는 신력이 적다. 정말, 너무 적다.

“적다고?”

조금 경직된 에스메랄다의 되물음에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알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되는 거야?”

“마나가 닿을 수 있는 거리는 모두 확인이 가능하다. 특정 방향으로 집중시킬 수도 있고. 모양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찰흙이라고 하면 될까? 지금은 백작 저를 기준으로 일정 반경만 확인하는데…….”

에스메랄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말하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가치를 알고 있을까? 그런데도 저렇게 태평하다면 놀라운 일이다. 잠시 다른 곳으로 새었던 생각을 바로잡은 그녀가 물었다.

“신관의 수가 적다는 의미지?”

아르페시스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구역을 나눠 계속 살피고 있지만, 수백은 되었던 숫자가 백도 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에스메랄다는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구나…….”

“……뭐가?”

“신탁 말이야. 신관들에게서 신력이 사라진 것 같은데……. 조금 더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아마 맞을 거야. 이러면 남부가 위험한데…….”

신관들이 사라지면 부상자가 사망하는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위치를 짚어 줄 수 있을까? 성인이 맞다면 신력이 있을 테니 확인해 봐야겠어.”

아르페시스는 지도가 있다면 곧장 표기해 주겠노라 답했다. 하지만 당장 욕실로 가져오라 하기엔 두 사람 모두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결국 목욕 후로 일을 미루기로 했다.

“성인도 그렇고, 시간을 지워 낸 주신께서 이번에는 뭔가를 해 주시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그녀는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그대가 몰랐다면 없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내륙에서 그대의 세작이 적은 수도 아니었는데. 그러니 시간을 지워 낸 주신께서… 왜 그리 보나?”

그야 아르페시스가 주신에 대한 것을 자진해서 언급한 건 처음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얼떨떨한 마음에 물었다.

“신은 없다며?”

“……이제는 아니다.”

“그렇게 강경하더니?”

아르페시스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향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잠시 그런 아르페시스를 관찰하던 에스메랄다가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을 지워 낸 주신께서?”

시간을 되돌린 것이 주신이라 단정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에스메랄다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노라니 아르페시스가 우물거렸다.

“인간이 했을 리는 없고, 마신이 그러했을 리는 더더욱 없지 않나.”

물론 에스메랄다 역시 시간을 지워 낸 것이 주신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건 명확한 증거가 있어서 한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행할 수 있는 주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하던 아르페시스가 그러한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더욱이 그는 증거를 가진 사람처럼 마신이 그러했을 리 없다고 단정을 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사라진 게 신이 한 일이라고 하면 주신의 대적자라 명해진 마신도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확신을 가진 채로. 대체 왜? 라고 물었던 에스메랄다는 씁쓸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대로 두었으면 뜻대로 되었을 텐데 마신이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그가 성벽을 부수고 다녔다는 말이 기억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두 사람 사이로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침묵은 오래지 않아 아르페시스에 의해 쫓겨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그는 에스메랄다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눈치를 보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구체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몇 명의 피가 흩뿌려졌는지 같은 말은 한 적이 없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참사를 에스메랄다가 모를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달리 사방에 흩어진 조각을 맞는 자리에 끼워 넣어 상황을 추론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같은 퍼즐을 펼쳐 놓고 맞추며 시간을 잰다면 아르페시스는 그녀보다 몇 배는 오래 걸릴 것이다. 단순한 놀이에 불과하나, 그들의 추론 능력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페드로와 함께 지내며 테노리엘이 얼마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자라는지 듣는 것은 물론, 실제로 겪어 보기도 했다. 페드로는 자신이 배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르페시스를 훈련시키곤 했으니까. 덕분에 그는 사라진 시간에서보다는 추론 능력이 단련된 편이었다.

그런 훈련을 더 빠른 시기에, 또한 꾸준히 받아 온 에스메랄다는 그보다 더 완벽에 가깝도록 다져진 사람이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자진하다시피 하며 떨군 행적의 조각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되찾았을 당시에는 에스메랄다 역시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을 증오한다고. 그들을 해치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노라고. 수많은 행적이 그런 그녀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는 증거가 되었다.

‘빨리 철회해!’

하지만 그가 틀린 판단을 했건, 그녀가 변했건, 지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까?

아르페시스가 입을 다물자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던져 놓고 제 어깨에 이마를 댄 채 표정을 가린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한 짓이 있는데 무어라 말을 할 자격이 어디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침묵으로 답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채웠다.

‘내가 그것들을 도륙하지 않고 두는 건 오로지 그대 때문이니까!’

아르페시스가 보여 주었던 경멸과 증오는 선명했다. 그건 한때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누군가가 없애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깊은 악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스스로가 그곳에 발을 들인 사실을 후회하는 것. 그게 아니면 누군가 밖으로 건져 낸다고 해도 아득바득 돌아가고자 하겠지.

에스메랄다의 생각은 맞았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 이상 아르페시스는 그 깊은 늪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그는 백성들을 떠올리는 바람에 함께 찾아온 검고 짙은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가 그에게 남기고 간 말이 파고들 곳을 찾는 것처럼 심장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페드로는 틀렸다. 그는 결코 멍청하다 못해 병신 같았던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에스메랄다를 지키는 것, 그녀의 곁에 있는 것뿐이다. 그것을 위해 수십만,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면 기꺼이 손을 핏물에 적시리라.

그들을 향한 지독한 증오와 살의는 페드로의 말 때문에 잠시 멈칫거렸을 뿐이다.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에스메랄다 앞에서 지저분하고 부정적인 살의를 내비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꾸역꾸역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떠올리니 침실로 돌아온 직후, 그녀에게 협박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하며 소리를 질렀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조금 전에…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

감히 그녀를 협박하다니, 못난 자신의 모습에도 그녀는 계속 사랑을 고해 주었고 쾌락마저 또다시 허락해 주었다. 스스로가 볼품없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어서 사과를 입에 담았다. 또한 백성들을 생각하니 그녀가 죽던 순간이 떠올라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던 그들이 떠올라서 불안감과 증오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에스메랄다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가 사과를 한 직후 괜찮다는 의미로 등을 토닥여 주려 했는데…….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리며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에 그의 이마가 닿아 있던 탓에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시스?”

그를 살짝 밀어낸 이유는 표정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격한 거부 반응을 보이며 에스메랄다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껴안는 바람에 볼 수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이상해?”

아르페시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목덜미부터 찾아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맥박을 느끼는 쪽이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기억을 가졌노라 말한 후 그녀의 손목이나 목덜미를 자주 만졌다.

“그것들을 생각하니까 그때가 같이 생각나서… 미안, 미안하다. 잠시만 이렇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목에 입술을 댄 채 웅얼거리는 그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발 내게 사과하지 마…….’

그의 사과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참 싫다고. 에스메랄다는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도 내게 사과하지 마.”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사과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노라면 벅차도록 행복한데, 그들은 언제나 사과를 하며 그 행복을 방해하고야 만다. 그래서 그가 하는 사과가 싫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에 다른 말을 하자.”

그도 그녀가 사과하는 것을 싫어하는 듯하니 아예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어떤 말?”

속삭이는 질문에 에스메랄다는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사랑해.”

그녀를 옥죄어 오는 아르페시스의 힘이 강해졌다. 에스메랄다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꽉 잠긴 목소리로 듣는 고백은 참으로 달콤하다. 그러니까 사과 말고 사랑을 듣자.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여전히 목덜미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그의 행동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줄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그대가 궁금하다면 무엇이든.”

“언제부터였어?”

“무엇이?”

여전히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를 사랑한 거 말이야.”

이미 따듯한 물 때문에 발그레했었는데, 이제 그는 발갛다 못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그녀를 사랑했던 게 아니면, 그녀의 죽음 이후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그대가 전부였는데 나를 버렸어!’

단순히 믿을 수 있는 친구 정도였다면 그렇게까지는……. 그녀의 질문에 아르페시스는 잠시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본래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괜찮아진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몰래 안도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인지를 했던 건… 사치라고 했을 때.”

“응?”

“……그대가 소중한 존재를 가지는 게 사치라고 했을 때였다. 그대라는 사치를 누리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각했다.”

그게 언제쯤이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답을 찾았을 무렵 아르페시스가 끝나지 않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감정 자체는… 아마, 처음 만났을 때.”

“뭐?”

“황성에서 그대가 나를 찾아왔을 때 처, 첫눈에 반한 것 같다.”

그는 수줍음으로 물든 채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이지 허탈했다. 홀로 마음 아파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두 번 모두 그때였다.”

“……왜 바로 말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유혹했는데! 난 네가 날 여인으로 보지 않는 줄 알았단 말이야!”

말을 하다 보니 너무 억울한지라 에스메랄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사라진 시간에서 그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전혀 그런 낌새가 없기도 했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그가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을 거지?”

설마, 정말 설마, 그녀의 유혹을 몰랐노라 말한다면 서러울 것 같았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그건… 그땐… 그러니까…….”

아르페시스가 안절부절, 말을 더듬으며 당시 자신의 심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타인이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니, 그걸 다 듣고 나니 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억울해…….”

“……미안하다. 나는…….”

그렇게 복잡한 와중에도 사과를 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개를 홱 쳐들었다. 저절로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흠, 흠, 사랑한다.”

에스메랄다의 반응을 본 아르페시스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훨씬 마음에 든다.

“그저, 나는 당시에 너무 겁이 나서… 그대가 이미 선을 그었는데 내가 마음을 고하면 리퀘나로 와 주지 않을까 봐 숨겼다. 그대가 오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으니까……. 내가 너무 겁쟁이라 미안… 사랑한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

말을 하다 말고 묘해지는 아르페시스의 표정에 에스메랄다는 웃음이 터졌다.

“왠지… 비웃는 것 같은데.”

“착각이야.”

그러면서도 웃음이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욕실에는 계속 그녀의 웃음소리가 머물렀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삐죽거리며 투정을 부리는 그가 참 예쁘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웃음을 담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제 부루퉁했느냐는 듯 그 손길에 기대어 오는 그가 참 좋다. 그런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게 너무 미안했다.

“나도…….”

“응?”

“나도 무서웠어.”

무엇이? 하고 눈으로 되묻는 그에게 에스메랄다는 그를 기만했던 이유를 말해 주었다.

“네가 죽는 게 무서워서, 전장에서 네 신경을 긁을 만한 건 알려 주지 말자고 생각했어.”

그와 소중한 추억을 쌓으면 훗날 더 힘들 것이라고, 그러니 마음을 정리하자고 결정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그가 죽는 것이 무서워 알리지 않기를 택했다. 참 모순적인 선택이었다.

“네가 필요 없었던 것도, 널 배제하려던 것도 아니야. 그냥… 무서워서, 내가 겁쟁이라서 그랬어.”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슬픔에 물들어 살짝 일그러졌다. 그걸 본 에스메랄다가 뒷말을 붙였다.

“그러니까, 나도 사랑해.”

앞뒤가 조금 어긋난 말에 일그러져 있던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웃어 주었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사과가 아닌 사랑을 고해 들으며 그에게 안겨 드니 이토록 행복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진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 사과를 하는 것과 구분이 안 될 텐데?”

“굳이 구분을 해야 해?”

“하?”

“내가 사과를 한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해?”

그녀의 말에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넌 아냐? 미안할 때는 날 사랑하지 않아?”

그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 그대로 도리질을 쳤다.

“그럼 구분할 필요 없겠네.”

이제 문제없지? 하고 말을 끝낸 에스메랄다는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어코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길에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좁혀졌다.

“힘들어.”

그의 손을 밀어내려고 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느 순간이 되어도 사랑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내가 다시 자제라는 것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아르페시스에게는 그만하라는 말이 들리기만 하고 와닿지는 않았다. 기어이 목덜미를 잘근거리는 감각이 느껴지자 에스메랄다는 더 강경하게 그를 떼어 내려고 했다.

“힘들다니까?”

“……딱 한 번만 더, 응?”

열심히 그의 손을 밀어내려던 에스메랄다는 그 한마디에 힘이 풀려 버렸다. 아무래도 방안을 강구해 둬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렇게 애처로운 태도로 조를 때마다 속절없이 휘둘리고야 만다. 덕분에 하루 종일 붙들려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사이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서 더듬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안에 들어가도 될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아르페시스의 손가락이 예민한 곳을 찔러 오자 에스메랄다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 불만을 표하듯 목덜미를 꽉 깨문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들려줘. 그대가 울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좋아. 그러니까 참지 마라.”

그게 신호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에스메랄다의 입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헐떡이는 숨과 교성이 멋대로 흘러 나갔다.

“앙! 으앙!”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커다란 손이 가슴을 감싸 쥐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감촉에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가슴을 출렁, 출렁 흔들기 시작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말랑거리는 게 너무 좋다. 하루 온종일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핥기 시작한 아르페시스의 목소리는 몽롱했다. 그는 한동안 손가락으로 에스메랄다를 쑤시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여기 들어갔을 때 얼마나 황홀했는지 몰라. 평생 그대에게 파묻혀 있고 싶었다. 나를 꽉 조여 줄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았어.”

에스메랄다의 몸에 붉은 홍조가 퍼져 나갔다. 아르페시스가 외설적인 말로 수치심을 자극하자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제 다리를 들어 에스메랄다의 허벅지를 꾹 눌렀고, 덕분에 그녀는 욕조 안에서 다리를 활짝 벌려야만 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안을 쑤시면서 엄지로는 음부의 돌기를 꾹, 꾹 문지르는 탓에 별이 반짝거리는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애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른 에스메랄다가 욕조를 붙잡았을 때.

“흡……!”

아르페시스가 예고조차 없이 뒤에서 치고 들어왔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뜨거워…….”

“흐읏……!

직전까지 그녀의 안을 쑤시던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턱을 붙든 아르페시스가 입을 맞춰 왔다. 쭙, 쭙, 소리를 내며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우물거리기도 잠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혀를 내밀며 웅얼거렸다.

“빨아 줘, 에디, 응?”

에스메랄다는 힘겹게 교성을 내지르면서도 제 입 속으로 들어온 그의 혀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가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것을 모조리 받아 마셔야만 했다.

한 손으로는 욕조를, 다른 한 손으로는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 아르페시스 때문에 물이 출렁거리며 넘치기 시작했다.

* * *

아르페시스는 침실에 풀어놓았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욕실에서 나온 후 에스메랄다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겨우겨우 늦은 저녁 식사를 먹이고 재웠다. 그녀가 잠든 후 아르페시스는 신관들의 위치를 다시 찾아 지도에 표기하고, 시리스에게 해당 장소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전보 마도구를 받아 침실에 두었다.

전부 에스메랄다가 웅얼웅얼,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하라고 했던 일들이었다. 지금 그의 잠을 깨운 마나의 움직임은 그 전보 마도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해가 뜨기까지 두어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제 품에서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매일 이렇게 그녀의 곁에서 깨어난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더없이 황홀했던 전날을 떠올린 아르페시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녀가 깨어나면 정식으로 청혼을 해 보자. 예물도, 반지도 없지만… 바람만이라도 전해 보자.

‘내가 사과를 한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해?’

분명 그녀도 기쁜 마음으로 그를 허락해 줄 것이다. 이제야 드디어 그녀와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게 되었음에 벅차오른다.

잠시간 에스메랄다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미적거렸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급한 보고일 수도 있으니 빨리 확인하고 도로 눕자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하는 것을 보고 익힌 암호 수식을 그려 넣자 옅은 빛을 내고 있던 수정 속에서 꽤나 긴 글귀가 떠올렸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본 이후 오래도록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둠에 갇혀 있던 침실이 어슴푸레 밝아진 후에도, 밝은 햇살이 침실을 가득 채운 후에도…….

행복이 찰나의 순간에만 품에 안긴 후 떠난다는 걸 망각했었구나. 조금 전 그가 느꼈던 벅참은 허상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굳어 있던 그가 막 움직인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전보 마도구를 부수기 위해 손을 든 그때.

“부숴도 예비품 있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를 달래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왜, 대체 왜 벌써 깨었나. 더 잠들어 있었다면 미룰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주먹을 움켜쥐자 그녀는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네가 없으면 악몽을 꾸는걸. 그러니 깰 수밖에.”

아르페시스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그의 반응에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어 왔다.

“누구야……?”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건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원치 않는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두 분 모두?”

울음이 터지기 직전까지 몰려서 떨리는 목소리 뒤로 꽉 잠긴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작.”

수정 속에서 나타난 건 테노리엘 백작의 전사 소식이었다. 아레스는 중상으로 현재 의식이 없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왜, 대체 왜, 신께서는 왜 또다시 그녀에게서 가족을 앗아 가시나.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전지전능하다면 마룡과 마수마저 세상에서 모조리 지워 버려 줄 것이지. 그녀를 돌려준 은혜도 잊고 탓해 볼 만큼 아픈 눈물의 시작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침대로 돌아갔다.

“흑…….”

그녀가 울고 있다. 흐느끼는 에스메랄다를 품에 안은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물었다.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대형 마수 3기, 2기, 도합 5기의 출몰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전선에 있었어야 할까? 그렇다면 대형 마수의 출몰 소식을 듣자마자 갔을 텐데, 그러했다면 백작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아르페시스는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만약, 정말 만약 알았다 해도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오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는 골목 속에서 그녀를 더듬던 건달들을 잊지 않았고, 신탁이 내려지자마자 날뛰던 백성들도 잊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흐느낌을 지나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 그녀를 꽉 안아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가졌건만 그는 아직도 무력하다.

그녀가 깨어나면 미래를 논하고 싶었는데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행복의 자리를 차지한 비극은 그것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 * *

어슴푸레한 공간 속에서 침대를 등진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아르페시스였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기척에 예민한 사람이 그녀가 깨어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나.

에스메랄다는 해가 완전히 떠올라 방이 환해질 때까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부재가 곧 그녀의 악몽임을 익히 아는 사람이 오래도록 곁을 비울 이유가 몇 가지나 될까? 그를 저기에 붙들어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유를 찾는 건 쉬웠다.

‘시리스에게 전보 마도구 가져오라고 해. 너도 아니까, 급한 보고가 올라오면 확인해야 돼…….’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잠들었는데 마도구가 보이지 않으니 그가 가리고 서 있는 거겠지. 전보 마도구 앞에서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참 빤하지 않나. 가져다주고 싶지 않은 소식을 본 것이다. 그런 나쁜 소식이 과연 몇 개나 되겠나?

아르페시스가 손을 움직이자 에스메랄다는 그를 말렸다. 그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아 버린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백작.”

둘 모두 떠나지 않았으니 감사라도 해야 할까? 에스메랄다는 준비를 했음에도 너무나 아파서 울어 버리고 말았다.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곁으로 되돌아온 아르페시스에게 매달렸다.

‘이건 내 선택이다. 그러니 엄한 자책 말거라.’

들어야 할 말은 모두 품속에 담았고, 전해야 할 말은 전부 쥐여 주었다. 그러니 괜찮다. 페드로처럼 매정하게 보내지 않고 사랑한다, 잘못했다, 그 한마디는 하고 보내었으니 괜찮다.

아주 오래된 과거의 한때 해 보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곁에 남은 이들과 함께 울며 보내 주자.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지칠 만큼 펑펑 울고 난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전보를 통해 도착한 소식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5기…….”

아르페시스의 체온 속에 담겨 있던 그녀가 천천히 감정을 뒤로하고 이성을 데려왔다. 오늘도 생각할 것이 많다.

“내가 죽…….”

말을 하다 말고 멈춘 것은 그녀를 안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단어 선정에 조금 더 심혈을 기울여야겠다.

“떠난 후 네가 기억하는 기간은 얼마나 돼?”

“……정확히 1년하고 2일.”

짧게 끊어진 목소리가 충격적인 숫자를 전해 주었다. 생각보다 너무 짧다. 고작 1년이라니……. 에스메랄다는 충격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3국의 전선에서 대형 마수가 3기 이상 출몰한 적은 없다. 그런데 지금은 5기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 시기에 대형 마수의 준동은 어땠어?”

아르페시스는 거칠게 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초반에는 그대가 아는 것과 유사하다.”

초반과 후반을 나누는 기준은 대체 뭐지?

“……초반이라니?”

“내가 리퀘나를 파괴한 것은 사의 달이었다. 그러니까…….”

에스메랄다는 있는 그대로, 덤덤한 목소리로 스스로가 보고 행한 것을 고하는 그의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에렘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반년도 안 된다는 거구나…….”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리퀘나를 건들기 전까지를 초반, 이후를 후반으로 구분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기준에 따르면 리퀘나가 건재하던 시기에는 마수들의 움직임이 에스메랄다가 아는 것과 같다. 후반기의 움직임은…….

“리퀘나가 붕괴된 후 녀석들은 곧장 북진을 시작했다. 인간의 군대처럼 체계가 잡혀 있던 것은 물론, 부대마다 사령관처럼 대형 마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황도를 공격할 당시에는 10기가 한자리에 있기도 했고.”

10기라니……. 마수의 저력은 에스메랄다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밀고 올라오지 않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 얼마나…….”

에스메랄다는 어려운 말을 앞둔 사람처럼 끝을 뭉갰다.

“10여 기까지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리퀘나를 늦게 건드린 건 인외자의 힘에 적응을 하느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었지.”

다행히도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하고자 했던 질문을 꽤나 정확히 알아들었다.

“적응을 마친 후에는 마수를 상대해 본 적은 없어서 모호하지만… 무얼 하든 힘겹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크게 버거울 것 같지는 않아.”

그녀의 상식 범위를 넘어서는 말이 계속 튀어나온다. 에스메랄다는 충격은 우선 옆으로 밀어내고 정보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0기… 가 황도에 집결했을 때, 다른 지역은? 그곳에도 대형 마수가 있었어?”

“아마도. 내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목격한 개체 수만 해도 30기는 넘을 것이다.”

10여 기보다 많은 수가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지만, 총개체수는 30기를 상회한다고?

“그 정도의 전력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 리퀘나를 넘지 않은 거지?”

“보통… 침략 전쟁을 할 때 견고한 수성에 막혀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해지면 군을 재정비하여 다시 칠 준비를 하는 법이니까.”

“……놈들이 재정비를 하고 있다고?”

리퀘나에서 마수가 막힌 날로부터 6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토록 오래?

“대형 마수가 출현한 건 리퀘나 같은 각국의 전선 때문에 마수의 진군이 막힌 후였다.”

맞다. 현재는 대형 마수가 최초로 목격된 날로부터는 50여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고.

“마룡이 나타난 것은 90여 년이 훌쩍 넘었으니까… 그때부터 대형 마수의 출몰까지의 시간이 재정비 시간과 유사하지 않나? 대형 마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면 납득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놈들이 재정비를 하던 중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내륙에서 2기씩 숨어 다니는 놈들 때문인데…….”

인간이나 가축을 잡아먹지도 않고 숨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에스메랄다의 생각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멈춰 버렸을 때,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정찰병이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지성이 있다지만 마수가 적진을 정찰할 만큼의 전술적인 행동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생각을 멈춘 채 기억을 뒤졌다.

이미 중형 마수들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후방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의 전술적 행동을 보여 왔다. 그러니 마수이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지 뒷골목의 유용함을 인지하며 배우지 않았나.

“리퀘나를 넘은 후 놈들의 움직임은 체계적이었다. 영지 내의 소규모 마을을 지나치더라도 보급로를 비롯한 주요 후방 도시는 확실하게 파괴했지.”

진군 방향에 있기에 파괴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르페시스는 당시의 상황을 계획적인 침략, 그로 인한 선별적 파괴로 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머릿속에서 마수가, 마수는, 이라는 생각을 잘라 내서 버리기로 했다. 마수가 아니라 그저 적군이다.

“놈들 중에도… 가령 마룡 말이다. 마신의 파수꾼이라는 이명으로 불릴 정도이니, 놈도 우리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가 하나의 고정관념을 지워 내는 동안에도 아르페시스의 설명과 추측은 계속되고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만약 이 가정이 진실이라면 놈은 약이 바짝 올라 있을 것이다. 성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시간이 지워진 것이니… 마수의 준동에 변화가 일어난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증거는 없으나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추측이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때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대체 무엇을 떠올렸기에 저렇게 섬뜩하고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일까.

“그때라서 즐거운 것도 있었지.”

에스메랄다는 그 낯선 모습을 보며 그의 상처를 다시 실감할 뿐이었다.

“그 개자식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거든. 도망가지 못하게 황도에 가둬 두고 대형 마수에게 사지가 찢어지도록 직접, 내 손으로 던져 주었어. 살려 달라는 비명을…….”

광기를 품은 채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이 자신의 행적을 털어놓더니,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르페시스의 안색이 굳었다.

“아… 그러니까… 나는…….”

에스메랄다는 그의 뺨에 제 뺨을 맞대고 문질렀다. 곧 경직되었던 그의 몸은 풀어지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듣는 나까지 통쾌하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미안…….”

“나도 사랑해.”

“……사랑한다.”

그가 했던 행동을 지탄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든 모든 상황과 선택이 미안한 것이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에스메랄다는 리퀘나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똑같이 중얼거렸다.

아르페시스가 더 이상의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자 남은 건 에스메랄다의 생각뿐이었다. 마수, 마수, 그놈의 마수. 인간들의 문제만으로도 벅차건만 그녀를 비롯한 인간은 마수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적이니까.

“리퀘나…….”

아르페시스가 리퀘나를 망가트린 후에야 북진을 시작했다면 그때까지는 자력으로는 넘을 자신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리퀘나의 수성은 견고하다. 아니, 3국 전선이 견고한 것이다. 어렵고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이지만, 마수가 쉬이 넘볼 수 없을 만큼의 저지력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놈들이 넘지 못했을 때, 아직 3국의 전선을 넘기 이르다고 생각하며 계속 준비를 하는 동안 인간은 내려가야 한다. 그들의 준비 기간은 인간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결론, 마수를 치고 내려가려면 엉망으로 썩어 있는 내륙을 정리해야 한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여전히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그는 제위에 오를 것이다. 오르는 것만 보자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다져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에스메랄다에게 아르페시스의 즉위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른 이후에는? 이후, 다음… 그녀가 몇 년이 넘도록 외면해 왔던 그것을 생각한다면 문제가 존재한다.

다음을 바란다면 인간은 마수가 준비를 마치지 못한 사이 반드시 남진해야 한다. 하지만 마수를 상대로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준비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제위에 오른 이후를 대비하려면 더한 것이 필요하다.

분명 아르페시스는 제위에 오를 것이다. 아비와 형제를 잡아먹는 패륜으로써. 분명 최선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 묻는다면 글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뺨을 쓸어 보며 중얼거렸다.

“제위…….”

그녀의 손짓에 따라 아르페시스의 턱이 조금씩 들렸다.

“명분…….”

분명 마수를 치고 내려가려면 엉망으로 망가져 있는 내륙을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륙을 다져도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힘을 가진 이들에게 남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해 보아야 몇이나 그것을 믿을까? 제 일이 아니라 여기는 후방국은 발을 빼려고만 들 것이다.

그 말 한마디를 믿을 만한 이들이었다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남부가 지금과 같은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수 따위가 그럴 리가 없다는 고정관념이 끊임없이 남진을 방해하겠지.

실제로 에스메랄다 역시 방금 전까지 그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왔기에, 또한 아르페시스의 말을 믿기에 그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어떠한 근거도, 증거도 없는 헛소리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남진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가 없다. 미래에서 아르페시스가 마수의 저력을 보았노라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증거가 없는 이상 에스메랄다나 아르페시스가 할 주장은 추상적인 추측,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적을 믿지 않고, 증거가 없는 불행을 대비하지 않는다. 신과 신의 기적을 믿고 찬양하는 이들이 하는 짓치고는 참으로 옹졸하지.

현실적인 증명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것을 대체할 만한 방법이 있어야 한다. 결국 남진이 옳은 일, 바른 일이 되어야 하는데……. 남진을 주장하는 이의 말 한마디가 정의이고 명예이고, 또한 옳은 일이라는 믿음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르페시스는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하다. 제위의 주인이 될 테고, 지금까지 남부에서 쌓아 온 명예가 있었다. 하지만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 제위에 오르려면 패륜이라는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이 모순은 대체 무엇인가. 목적을 위해 수단을 희생했을 때, 과연 그 목적이 본래 바랐던 것과 같은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이미 자신이 걸어온 길의 끝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목적을 영위할 수 없었다. 수단을 위해 목적을 희생하는 순간 목적은 퇴색된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두 번 다시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목표를 가질 수 없다. 가진다 한들 과거의 그녀가 가졌던 것과는 다른 형태일 것이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마수를 치고 내려가야 할 이유를 곱씹고 있는 것은 백성들 때문이 아니었다. 아르페시스와의 미래를 위해서 마수에게 넘어가지 않은 영토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마수가 인간과 타협하지 않기에 도래할 수 있는 결론은 어느 한쪽의 멸망뿐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얽혀 있는 모순과 아르페시스 앞에 놓여 있는 모순을 보았다.

“모순…….”

그가 제위에 오르기 위해 행하게 될 패륜. 그 모순을 없애고 흠결 한 점 없는 정의를 뒤집어쓰면 남쪽으로 내려갈 힘을, 나무가 될 수 있는 씨앗을 심는 게 가능하다. 그 씨앗을 심기 위한 최소한의 땅 고르기는 되어 있다. 그는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남부 전선을 지켜 온 훌륭한 기사니까.

결국 아르페시스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 정의다, 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만들어야 내려갈 수 있다. 그러니까 그가 갈 길 앞에 모순이 있다면…….

“없애야지.”

“에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불러 보았으나, 깊은 생각 속으로 침잠해 있는 에스메랄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리퀘나에 있을 때 그가 황제와 황태자를 인외자의 힘으로 암살하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고 죽일 수 있다고. 당시 에스메랄다는 곧장 동의하는 대신 잠시 미루자고 답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흔적을 보았기에 미래의 선택을 제한하는 방법을 보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장에서 인외자의 힘을 사용해야 그가 안전한데, 황태자와 황제를 죽인 정체불명의 힘이 그와 연결되는 일은 벌어져선 안 된다. 그가 패륜의 용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에 인외자의 힘으로 행하는 암살을 제외해야 하는 것이다.

고작해야 숨어들어 독살하는 정도만 허용이 가능한 선이다. 그 과정에서 아르페시스가 타인과 함께 있었다는 증언도 확보해 두어야 하고. 그의 제위에는 패륜 같은 악의 그림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결국 정의를 위한 발판이 있어야 한다.

“내전…….”

반군이 일으킬 내전 외에, 정당한 심판을 내세울 내전을 하나 더 만드는 건 어떨까? 그것을 위한 명분을 다듬어야 하는데…….

“쪼개면…….”

번거롭고 촉박하겠지만, 필요하다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귀족의 명분이란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성과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아직 루그레디안을 제외한 다른 반군에게는 그의 합류 소식을 알리지 않았으니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선택지다. 더욱이 대부분의 반군들은 아직 실테르의 병력이 동원될 것을 모른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루그레디안, 아브람 백작, 에반스와 아드리안 등, 그녀가 직접 나서서 포섭한 인물뿐이다.

에스메랄다의 생각은 더 넓고 먼 곳까지 가지를 이어 갔다. 내전 이후의 남진을 고려할 것이라면 병력도 어느 정도 보존해야 한다. 반군은 남부군에 합류하며 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패이고, 중앙군도 남부군에 파병하는 쪽으로 쓸 수 있다. 그러니 비슷한 규모의 양측을 붙여 두고 최소한의 피해를 감수하는 방법이 나을 것이다.

현재 반군의 총수는 4만을 조금 웃돌고 있는 반면, 유사시에 황제가 중부 밖으로 내보낼 중앙군의 규모는 최소 4만, 최대 6만까지 생각해야 한다. 중부의 사정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병력의 배치가 달라질 테니…….

“남부 영주들.”

그들이 반군과 함께 움직이면 황제는 북부와 남부, 양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모두 감당해야 하니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반군은 그녀가 압박을 넣을 수 있고, 중앙군 쪽도 분탕질을 치거나 의견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의 세작이 들어가 있다.

이런 이점을 사용해서 대다수의 중앙군을 붙들어 두는 건 반군과 남부의 영주들에게 맡기고, 실테르와 다른 귀족들의 사병으로 남은 중앙군을 상대하면 어떨까? 어차피 남부 영주들은 이미 반군과 너무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한 탓에 아르페시스 쪽에서 쓸 수는 없다. 반군들이 일으킬 내전에 동원하는 게 옳다.

동부는 에렘의 영토 중에서 가장 면적이 좁은 지역인 데다, 아브람 백작이 이쪽 손에 있으니 상대해야 하는 다른 귀족들의 사병은 기껏해야 1만 이하. 중앙군이 일부 남아 있겠지만, 철광 거래를 대가로 받아 둔 실테르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북부는 반군이 상대해야 할 테니 남는 건 서부의 영주들이다. 록스부터 라히크, 쿠베트까지, 끌어들일 세력은 많다.

“미리 움직여 둬야…….”

황태자를 제물로 만든 후 그들의 사병을 얻어 내려면 그들이 혹할 만한 판을 깔아 주어야 한다. 정말 실현될 판이 아니라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결과는 같을 테니까.

“영지…….”

백작의 장례식을 황도가 아닌 영지에서 해야겠다. 지금 한 생각을 현실로 만들려면 그의 장례식에서 얻어야 할 것들이 많다. 백작의 장례식을 통해 그녀가 새로이 끌어들이고자 하는 세력에게 아르페시스를 선보여야 한다. 작품의 제목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황자의 반격’ 정도가 좋겠지.

아르페시스가 가진 인외자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의 힘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가능성을 논하게 된다. 5년, 10년,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이어질 후계 쟁탈을 꿈꾸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일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10년짜리 달리기를 생각해 손을 잡은 이들을 한 계절짜리 달리기에 밀어 넣어야 한다.

아르페시스가 내전으로 황실을 위협하는 순간 그를 따르는 남부군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부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늦어도 다음 해가 끝나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물론 에스메랄다가 새로이 구상한 계획에도 문제는 존재했다. 그건 아직 전선에 있는 아레스가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인데…….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를… 모셔와 줄 수 있을까?”

“영지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페시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얼마든지.”

아레스의 이동이 자유로워졌으니 그의 불참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이제 다음으로는…….

“소문.”

뒷골목을 통해 그의 영웅적인 행보를 더 적극적으로 풀자. 그건 그가 정의롭다는 인식을 세간에 심어 줄 것이다. 영웅이란 본디 정의의 편이니까. 그건 훗날에 그가 내전 속에서 움직여도 백성들에게 남아 있을 터, 부정적인 말이 들어와도 ‘설마…….’라는 생각 한 번을 하게 만든다면 충분하다.

다음을 위해서는 그가 제위에 오르는 과정을 반드시 다듬어야만 하니 미리부터 준비를 해야지. 하지만 그 이후의 본격적인 남진은 에렘만으로 불가능하다. 최전방 전선을 담당하는 삼국은 공생 관계이니 문제가 없고, 북쪽의 후방국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마기만 해결하면 마수도 정신계 마법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에스메랄다는 생각보다 빠르게 답을 찾았다.

“라그나…….”

그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소한의 밑그림을 그린 그녀는 다시 이전의 의문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내전을 위한 명분.

‘그 개자식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거든.’

제물로 그의 패륜을 가리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황태자…….”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들썩거린 순간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남부에 나타났다는 대형 마수, 잡을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 입으로 그를 사지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지금 그녀가 세운 계획을 진행하게 된다면 대외적인 인식을 위해서라도 즉위 이후 몇 번은 출정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에스메랄다의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더 복잡한 상태였다. 어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손길로 그를 쓰다듬더니 대뜸 황태자니, 대형 마수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겁에 질린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보다 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디.”

그녀의 품에 기댄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내가 마수를 상대하며 위험해질 일은 없다.”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마룡이면 또 모를까. 단호한 말에 잘게 떨리던 에스메랄다가 진정을 되찾았다.

“진짜… 야?”

“그래. 수만이 달려들어도 내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어. 그러니 이제 제대로 설명을 해 주겠나?”

그가 엄한 곳에서 끙끙거리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선 또 어떤 결론이 내려졌으리라. 그러니 확인을 위한 질문이 나왔겠지. 에스메랄다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자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말해 주기 힘든가……?”

주저하는 기색이 가득한 물음에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차렸다. 어제의 언쟁 이후 그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기로 했다. 결국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앉은 에스메랄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길고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의 손가락은 아르페시스의 손등 위에 오른 채 계속 일정한 박자를 타고 움직였다.

“신뢰……?”

“너를 따르는 게 정의라고 믿어야 해. 증거가 없잖아, 증거…….”

“솔직히 제대로 이해를 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설명을 모두 들은 후 물어 왔다.

“대형 마수를 잡아서 내 힘을 드러내야 한다는 거군?”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냥 잡는 정도로는 안 된다. 제물이 반응할 만큼의 자극이 있어야 한다.

“과시가 필요해. 놈을 자극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밀어붙이는 거지.”

“극단적인 선택?”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아는 황태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경계, 위협, 초조함, 열등감, 오만함……. 성공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으니 강하게 밀어붙여야겠어.”

역시나,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르페시스는 다시 한번 방법을 물었다.

“과시라면?”

“모두가 네 힘을 보도록.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황제가 너를 경계하도록. 그게 황태자를 자극하게 될 거야.”

그의 행보와 의사에 관계없이 무조건 경계할 수밖에 없도록,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목격하도록 잡으라는 말인가?”

“또한 화려하게, 압도적으로.”

추가된 요구 사항에도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다.”

그녀가 하라면 하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온 아르페시스에게 그건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난 바로 영지에 갈 거야.”

다시 감정에 물든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장례식을 치러야지…….”

“……그래.”

“내전은 미룰 수 없어. 그러니 남은 시간 안에 해결을 봐야 해. 촉박한데… 황태자의 생일 연회 전에는 네가 황도에 도착해야… 황도… 황제… 다음…….”

눈시울을 발갛게 달군 상태로도 바지런히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아르페시스는 침묵했다. 그가 바랐던 얘기는 다음에, 에스메랄다가 백작을 완전히 보내 준 후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다. 지금은 그녀를 방해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에게서 살짝 비켜 나 있었다. 해가 떠오른 이후부터 침실이 있는 3층에서 어슬렁거리는 기척이 있는 방향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하고자 했던 청혼을 뒤로 미룬 아르페시스다. 얼쩡얼쩡, 천천히 다가와서 주변을 맴돌다가 돌아가는 기척은 그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했다.

* * *

지금부터 행해질 것들은 그녀의 세력이 평균보다 훨씬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걸 광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의 접점을 완전히 드러내게 될 테지. 하지만 그것을 알리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촉박한데 해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어차피 결과를 안다 해도 방법은 알아낼 수 없을 테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터,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 에스메랄다는 당장 영지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짐을 싸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쌍둥이를 찾아왔다.

오멘의 응접실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에스메랄다는 눈을 부릅뜬 채 나타난 그들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한참 동안 사내는 짐승이다, 늑대다 같은 잔소리를 할 기색이기에 에스메랄다가 선수를 쳤다. 짐승이라 행복한 경우도 있는 법이니 오라비들의 지나친 간섭은 사전에 막아 두어야지.

“영지로 가야 해요.”

“벌써? 조금 더 있다 가지…….”

오멘이 어물거리며 말을 받자 에스메랄다는 전하고 싶지 않으나 전해야만 하는 소식을 입에 담았다. 덤덤하고자 노력을 해 봐도 소용이 없을 것임을 알기에 에스메랄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백작의 전사 소식을 들은 쌍둥이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얗게 질린 그들의 손을 에스메랄다가 잡아 주었다.

“아레스 오라버니는 다행히, 무사하시고요.”

에스메랄다가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 아레스가 정신을 차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왼쪽 눈과 팔을 잃었다. 왼쪽 어깨와 가까운 심장이 무사한 것은 천운이고, 눈을 지나 뇌를 다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페르멘은 에스메랄다가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 곧장 눈치챘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오멘은 과정을 모름에도 에스메랄다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여겼기에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접실은 곧 눈물바다가 되었고 남매는 서로를 붙든 채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붉게 물든 눈으로 침실로 돌아온 에스메랄다는 전선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아르페시스의 품에 안겼다.

“당일까지는 아레스를 데리고 돌아오겠다.”

“……응.”

서둘러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놓지 못하고 꽉 붙잡았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곁을 비우는 것이 무서워서, 에스메랄다는 그를 사지로 보내는 것이 무서워서. 그들은 언제까지고 겁쟁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말… 너, 정말 안전…….”

“그래, 마수는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대가 위험해지는 것이지, 하고 말을 덧붙인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약속했던 대로 항시…….”

“호위를 대동할게.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을게.”

“……그래.”

그는 조금 떨리는 손길로 에스메랄다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대가 없어지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을 테니까…….”

아르페시스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에 또 협박과 다를 게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이번에도 약속해.”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침묵과 거짓말로 상처를 준 적은 있어도 약속한 것을 어긴 적은 없다. 그만을 보겠다는 약속도, 반드시 그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도 모두 지켰다. 그러니 오늘의 약속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르페시스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억지로나마 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주고받은 후에야 자리를 옮겼다.

“곧 돌아오겠다.”

에스메랄다의 개인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호위 기사들과 합류한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에스메랄다는 순간 백작 저로 돌아오기 전 눈앞에서 허물어지던 남자들과 핏물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중에는 인외자의 힘에 대한 것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분명, 이동을 원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나 훨씬 안전한 것은 신체가 직접적으로 닿아 있을 때라고 말했다. 그래야 확실하게 마나에 담을 수 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당연하게 하던 그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에스메랄다와 닿은 상태에서 장소를 이동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호위 기사들 중 누군가와도 닿아 있지 않다. 에스메랄다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아르페시스.”

나지막한 부름에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명을 모두 불렀는데 그에게선 거부 반응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일전 아시스라는 별칭을 부를 때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지금의 시간에서는 그 별칭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깨물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부탁이…….”

아시스라는 별칭을 부르지 않을 때면 부루퉁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그가, 지금은 어느 것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꼭 증거 같았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녀가 알던 아르페시스가 아니고, 지금의 시간에서 알아 온 그 아르페시스가 아니라는 증거.

몇 번이고 망설였다. 입술이 벙긋거리며 벌어졌다가 고집스럽게 다물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이미 에스메랄다가 알던 이와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미 후회한 길을, 그는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른 이유로 다른 선택을 하기에 그녀에게 옳은 것은 누군가에게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그들이 유사한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분명 아니다.

지금도 보아라, 고작 이름 하나라고는 하나 그것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그녀가 알던 아르페시스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입술을 벌려 억지로 말을 꺼냈다. 최악에 대비하지 않으면 전부를 잃으니까. 그가 그녀처럼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면 대비해야 한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무엇이든.”

지금의 제재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막으며 방해할지도 모르지만, 고작해야 날파리가 윙윙거리는 역할 정도에 지나지 않을 터. 그가 백성을 죽여 얻을 수 있는 건 크지 않다. 하지만 훗날,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후회의 순간에 그를 지켜 주는 데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만약 아르페시스가 그녀처럼 후회하게 된다면 그 순간 느껴야 할 끔찍한 것들을 최대한 덜어 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그가 손에 묻힌 핏물은 에스메랄다가 흘린 핏물과 달리 지워져 있으니, 말하자. 그저 어떤 과정도, 결과도 없이 기억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늦어 버렸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있다.

“쉽게, 죽이지 마.”

백성들을 위한 말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분노와 화에 물들어 벌인 살육의 무게가 훗날 그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서, 오로지 그를 위해 하는 부탁이었다. 에스메랄다의 의도도, 생각도 알지 못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그녀를 위해 날뛰는 살의를 풀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지금의 그가, 훗날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그를 지켜 줄 수 있기를.

지금의 이것 역시 그를 위한다는 말로 하는 기만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언젠가 지금의 순간을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지금은 그것이 옳다고 믿기에 또다시 선택을 해 본다.

“곧 돌아오겠다.”

“응, 기다릴게.”

에스메랄다는 입을 맞춰 준 아르페시스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순간, 훗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또 반복한 순간에서야 깨닫는다. 후회가 없는 선택 따위는 없다. 그저 더한 후회와 덜한 후회가 선택의 뒤를 졸졸 쫓아올 뿐이다.

* * *

아르페시스는 인외자의 영역에 발을 들인 후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마나의 사용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테베르의 입에서 황제가 언급되던 그 순간 불타오르던 증오와 복수의 열망이 선물해 준 힘. 그의 심장에 새겨진 마법 진이 모아 둔 마나는 그의 모든 의지를 반영했다.

사방으로 퍼트려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을 감시할 수도 있고, 그의 마나가 존재하는 곳으로 언제든 향할 수도 있었다. 각성 이전에는 마나를 통제하여 썼으나, 각성 이후에는 지배하여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마나가 존재하는 장소는 곧 그가 지배하는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영역은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었다.

영역의 규모는 가지고 있는 마나의 양에 좌우되었다. 지금처럼 장거리를 이동할 때에는 마나를 최대한 일직선 거리로 쭉 뻗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늘이는 편이었다. 그러니 마나를 전방으로 보내는 동안 걸리는 시간만 제외하면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몇 시간 거리를 몇 분 단위로 이동하니 반나절이면 황도와 전선을 오가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체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분해와 재구성이라고 불렀다. 그가 지배하는 마나에 사물이나 생명체를 분해하여 담은 후 원하는 곳에서 다시금 재구성하는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제 근처에서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는 데미안과 2명의 호위 기사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신체가 닿지 않았을 때 타인의 신체를 분해하여 재구성하면 조금의 부작용이 있었다. 메슥거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황도에서 도주하려던 황태자를 다시 황성에 집어넣는 일을 반복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다른 인간을 잡아다 실험을 해 본 결과 신체가 닿아 있거나 거리가 짧을수록 그런 부작용이 상당히 완화된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호위 기사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황도로 향할 때는 물론, 전선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지금 그의 곁을 지키는 이들이 모두 곧장 속을 게워 낼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분명 그것을 보았음에도 아르페시스는 또다시 신체가 닿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였다.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이동해 병영의 천막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영역을 본부대의 주둔지로 한정했다. 데미안을 비롯한 근위 기사들을 다른 천막으로 옮겨 버린 후 한 일은 행정관 천막에서 느껴지는 칼라일을 천막으로 옮겨 오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중 아르페시스의 천막으로 옮겨진 칼라일은 곧장 넘어질 뻔한 몸을 지탱하며 바로 섰다.

“총사령관님을 뵙…….”

“대형 마수가 출몰한 전장은?”

그가 경례를 올리며 인사를 건네었지만 아르페시스는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칼라일의 앞에서 후드와 가죽 갑옷을 벗는 동안 아르페시스의 태도는 서늘했다. 황도로 출발하기 직전, 로웨나에게 그와 에스메랄다의 일을 떠벌린 게 칼라일이라는 것을 들었으니까.

칼라일은 술에 취해 잠든 다음 날 사색이 되어 아르페시스를 찾아왔고, 자신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고하며 벌을 청했다. 아르페시스가 그를 죽이지 않은 건 어차피 황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칼라일을 치우면 후에 본부대를 맡길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로웨나가 에스메랄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섰다는 것 역시 이유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칼라일은 분명 한때의 테베르처럼 아르페시스의 손에 죽었으리라.

“……20부대, 18부대, 13부대 및 중앙군이 담당 중인 동쪽입니다.”

“토벌 계획은?”

“현재 인근 8개 부대에서 기사들을 차출하는 중입니다. 예정에 따르면 모레…….”

“토벌 일자는 내일 동이 트는 시기로 하며, 내일까지 해당 지역으로 모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이 집결할 수 있도록 신호를 올려라. 내가 직접 갈 것이나 본부대는 여기서 대기한다.”

에스메랄다는 목격자가 많기를 바랐으니 병사이든, 기사이든, 보는 눈을 모아야 한다.

“……예, 총사령관님.”

“그리고 테노리엘 아레스 경의 전역 절차를 밟아라. 63일 전까지는 전장을 이탈하는 것에 문제가 없도록 서두르고.”

“예, 총사…….”

“나가 보라.”

칼라일이 돌아가자 다음은 휴고였다. 바로 옆 천막에 있는 그를 찾아낸 아르페시스는 상자와 휴고를 동시에 옮겨 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칼라일처럼 서둘러 자세를 잡은 휴고가 인사를 올렸다. 에스메랄다가 리퀘나를 떠날 당시 라그나에게 연락을 해 전보 마도구를 보내 주기로 했었다. 그 수취를 휴고에게 맡기고 갔었고.

민간인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은 리퀘나가 한계다. 결국 휴고는 전보 마도구를 받기 위해 리퀘나까지 다녀와야 했을 것이다. 그가 겨울 중에 리퀘나로 돌아간 공식적인 이유는 아르페시스의 개인 물품을 챙겨 오기 위해서, 라고 되어 있다.

아르페시스는 상자 속에서 전보 마도구를 꺼내며 물었다.

“암호는?”

휴고는 물건을 가지고 도착한 테노리엘의 파발꾼에게 배운 수식을 직접 만들어 보았다. 아르페시스는 그 수식을 똑같이 사용해 전보 마도구를 발동시켰다.

[도착했다. 내일 곧장 토벌을 할 예정이다. 벌써 그대가 그리워.]

수정 속에 글자를 그려 전보를 보내는 과정에서 망설임이나 어색함은 없었다.

“내일 새벽에 대형 마수를 토벌할 것이니 함께 출정할 인원을 선별하고 늦지 않게 준비시키도록.”

“……예, 전하.”

“나가 보라.”

휴고가 등을 돌리자 아르페시스는 씻지도 않고 전보 마도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답이 없지? 에스메랄다와 단절되었던 1여 년의 기억이 쏟아졌다. 아르페시스가 석상처럼 앉아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잘 도착해서 다행이다. 정말 빠르네. 난 내일 영지로 출발할 거야. 장례 소식을 알리고 전서구와 파발꾼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어.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식사는 했어?]

[아직, 이제 먹어야지. 그대는? 끼니를 거르지 마.]

곧장 답을 보냈는데 또, 답이 없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서 답이 오기 전까지 혹시 전보 마도구가 고장이 난 건 아닌가 싶어 툭툭 쳐 보기도 하고, 마석이 닳아 버렸나 싶어 바꿔 끼우는 등 부산을 떨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챙겨 먹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수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에스메랄다의 답변이 왔다.

[방금 오라버니들과 함께 먹었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잘 챙겨 먹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잘 챙겨 먹는 사람의 허리가 그리 얇은가?]

답변을 보낸 직후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가 직접 손으로 잡아 보았던 에스메랄다의 허리는 정말 한 줌이었다. 그 감촉과 함께 그녀와 보내었던 열락의 시간이 떠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치겠군.”

발정이 난 짐승도 지금의 그보다는 얌전할 것이다. 이놈의 몸은 어찌나 정직한지……. 아르페시스는 자책을 하면서도 수정 속에 새로운 글을 썼다.

[내가 본 것이 있는데 어찌 걱정을 하지 않겠나.]

그녀가 그토록 마른 것에는 그의 책임이 큰데.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애써 글을 완성했다.

[앞으로도 잘 챙겨 먹겠노라 약속해 줘. 그대는 너무 말랐어.]

이번에는 답이 꽤나 빨리 돌아왔다.

[이미 체중은 회복 중이야. 계속 그렇게 걱정하면 먹었던 걸 게워 낼 것 같으니 그만해.]

[알겠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서 답이 오면 다시 답을 보내고, 오지 않으면 마도구를 노려보며 기다리는 것을 반복했다.

* * *

「에렘 제국의 15대 황제,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는 창기사 엘리나와 함께 마수와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섰으며, 직접 마룡의 목을 베어 낸 대륙의 영웅이다.

그가 인외자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1438년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에는 인외의 무력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그 무렵 각성을 했노라, 많은 이들이 확신을 하고 있다.

인외의 힘이 처음으로 세간에 드러난 것은 1438년 카 55일 행해진 전투에서였다. 당시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이 남긴 기록에는 아르페시스 황제의 무위를 찬양하는 면모가 돋보이는 내용이 가득하다.

그의 걸음 하나에 땅이 진동하고, 손짓 한 번에 푸른 물결이 솟구친다는 묘사는 물론, 인간을 도륙하던 거인이 그 물결 속에서 조각났으며, 검은 핏물이 땅을 뒤덮었다, 라는 신화적 표현 역시 상당하다.

이외에도 인외자가 된 아르페시스 황제가 에렘을 구원할 것이라는 내용까지 존재한다. 이 때문에 그 시절 아르페시스 황제를 향해 광적인 복종을 맹세한 기사들이 상당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실의 기록을 토대로 아르페시스 황제는 권력과 먼 생활을 했으며, 타인의 주목을 그리 즐기지 않는 것은 물론, 일평생 황후의 지지자로서 제위를 지켰을 뿐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날의 전투는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 과시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에, 그 이유를 해석하기 위한 많은 추측이 존재한다. 가장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것은 남부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당시 아르페시스 황제가 행한 대형 마수 5기의 토벌은, 갑작스럽게 변화한 마수들의 준동으로 남부군의 사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했다는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페시스 황제는 황자 시절부터 남부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동시대를 호령한 대부분의 남부군 주요 인사들에게서 존경과 충성을 받았다. 또한 남부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직후 남부군의 재정적, 정신적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본인의 사비를 남부군의 운영에 보태는 것은 물론, 제도적으로도 꾸준히 남부군을 다듬어 왔다. 황자 시절의 그가 남부군을 존경하며 그들의 유대를 소중히 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에, 당시 과시적인 성향의 전투는 남부군의 사기를 위해서였다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그날의 전투 이후 아르페시스 황제의 무위를 경계한 페라노스(당시 에렘 제국의 황태자)는…….

(후략)」

- 사 주브 자간 『평화의 시작 : 아르페시스 황제의 업적』 中 발췌.

* * *

내전과 복수에서 멈춰 서 있던 그녀의 생각들은 계속 다음을 향해 덩굴을 뻗기 시작했다.

‘정확히 1년하고 2일.’

당시 아르페시스라는 변수가 존재했기에 그토록 짧은 숫자가 만들어졌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제하더라도 마수의 규모가 늘고 있는 지금 인간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으리라.

“자력으로 넘는다…….”

마수가 자력으로 전선을 넘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게 되는 그 날은 언제일까? 며칠 후? 몇 달 후? 몇 년 후?

언젠가, 그녀의 앞에 놓인 선택지를 보며 고뇌했던 적이 있다. 스스로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노라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도, 아레스도, 오멘과 페르멘도, 그녀의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과 누릴 수 있는 미래. 그걸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와 열락의 시간을 나눠 가지던 때, 리퀘나에서 찾아내지 못했던 그 뭉클한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것, 너무 흔해서 세상의 모두가 알고 있는 단어, 그건 행복이었다.

그녀가 아주 오래전 가족들의 사랑 속에서 느꼈던 완전한 감정. 죄책감이나 불안감 같은 부정적인 찌꺼기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행복.

너무 오래전에 느껴 보았던 것이기에 다시금 그 이름을 알게 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는 그 행복을 다시 놓을 수 없다. 마음의 추가 기울어 버린 그녀의 생각 속에서 엮여 드는 손쉽고 빠르며, 또한 효과 역시 분명한 방법은 많았다. 문제는 그 방법들이 대부분 또다시 무고한 핏물을 제물로 요구한다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분명 핏물을 쥐어짜 낸 죄악을 후회한다. 아무리 밉고 증오스러운 이들이라 한들 그것이 죄악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고뇌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흘려 낸 핏물 속에서 생각했다. 또다시 피를 흘려 내고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고. 그 핏물이 훗날 그녀에게 선고될 지옥의 형벌과 같은 무게라 생각하면 너무나 무섭다. 하지만 그녀는 마수가 지워진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미래를 떠올리며 손에 묻은 핏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떨어질 것이라면…….”

어차피 그녀가 떨어질 곳이 지옥의 불구덩이 속이라면, 그전에 아르페시스와의 일생을, 남은 가족들과의 삶을 원하는 만큼 넘치도록 누리고 싶었다. 진실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후의 형벌이 무서운 것 역시 진심이었기에 몸이 떨렸다.

그녀가 공포에 떠는 것은 백성들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다. 훗날 지옥에서 형벌을 버텨야 하는 것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래,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무섭다. 하지만 그 핏물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이미 그것으로 성과를 만들어 냈으니까.

그래서 이를 악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지옥행이 예정되어 있다면, 더한 죄악을 쌓더라도 이번 생에서는 아르페시스와의, 또한 남은 가족들과의 행복을 누리겠노라고. 그러니 가자. 일어나자. 또다시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 손에 쥔 것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결심을 굳힌 에스메랄다는 곧장 라그나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종 기한 장례식, 합류 시 마수용 마도구 연구 최우선.]

다음을 본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후방국을 마수와의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는 최전방 3국에 마수의 문제를 떠넘기다시피 한 놈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켜 주어야지.

마신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마룡이 만들어 낸 괴물, 마수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알게 만들리라.

고작 돈 몇 푼을 쥐여 주며 후방국의 역할을 다 했다고 말하는 놈들. 그것마저 매년 줄이려고 아등바등거리는 놈들. 그들에게 마수가 어떤 놈인지 각인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마수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전방 3국 너머로 마수를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후방국을 겁주려다 자국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라그나가 개인적으로 하려던 연구에 시선을 두었다. 정말로 마수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한한 패를 쥐게 된다. 그 패를 쓰려면 마땅한 명분이 있어야 하니 손을 써 둬야겠지. 에스메랄다는 그 희생물로 가장 가까운 후방국, 세튀스를 골랐다.

[세튀스 정세 파악 시급, 파견 로부오 선별 요구.]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둥도, 지붕도, 벽을 쌓을 수 있는 벽돌도 아니다. 그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다지는 일이다. 그렇게 가장 기초가 되는 초석이 다져져야 그 위에 무언가를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껏 그녀가 내전을 위한, 에렘의 내부를 위한 기반을 다져 왔다면 이제는 기둥을 세울 때다. 동시에 밖에도 기둥을 세울 수 있도록 초석을 다져 주어야 한다.

[많이 바쁜가? 대형 마수 토벌이 끝났다. 그대가 말했던 대로 목격자도 많고, 최대한 화려하게 사냥을 했다.]

생각을 연결해 지금까지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가던 에스메랄다의 녹안에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다친 곳은 없어?]

아르페시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전보 마도구에 붙어살기라도 하는지 끊임없이 연락을 하는 중이었다.

[전혀, 5개 부대가 집결했지만 사상자 역시 전무하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충분하다 뿐이겠나? 넘칠 정도로 완벽한 것을. 이제 남부군에 들어 있는 황제의 세작이 그 소식을 황도로 전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보낼 명령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자의 전공을 빠르게 퍼트릴 것, 각색에 대한 전권을 일임. 과거 머저리의 무능과 비교하기를 권장.]

이번에는 영지에 있는 다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르페시스의 무공을 퍼트리고 황태자는 다시 한번 깎아내린다. 황제는 인외자의 힘을 과시한 아르페시스를 황도로 부를 수밖에 없다. 그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경계해야 할 테니 그때를 대비한 수도 놓아야 한다.

[황도 마수 투기장 공개, 머저리의 방문 기록 정리, 공개 시일 미정, 준비 착수 권장, 지켐 자작이 마탑에서 구매한 품목 갈취 추천, 이후 도난 신고 처리를 위한 로부오 사전 선별, 향후 해당 사태를 이용한 법안 추진 요구, 근시일 내로 기획서의 배달 예정.]

이번에는 루그레디안에게 보내는 전보였다. 황도에는 마수를 붙들어 놓고 싸움을 붙여 도박을 하는 투기장이 있다. 마수를 잡아서 데리고 다니던 서커스단과 똑같은 짓이다.

마수를 통한 공포를 유흿거리로 쓰는 것들이 황도에 있다. 거기에 들락거리는 건 무려 이 에렘의 황태자를 비롯한 일부 고위 귀족들이다. 대부분 황제를 따르는 이들이고. 이번 기회에 내전에 참여할 황제파 귀족 중에서 최소한 하나는 잘라 내야겠다. 황제가 직접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지켐은 오르테메스 백작의 봉신으로 황제의 세력권 내에 있는 가문이다. 곧 일어날 게 빤한 내전을 위해 폭발 마도구를 대량 주문해 둔 상태니 그걸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루그레디안에게 패를 쥐여 주고, 새로운 법안도 통과시켜 두자. 훗날을 위해서라면 미리 해 두어서 나쁠 게 없는 일이다.

핏물을 흘려 빠르고 확실하게 도달하기로 한 이상, 그녀는 죄악을 보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한때는 분노에 물들어 죄악을 외면했다면 지금은 그녀의 자의로 죄악을 감내하고자 한다.

“실테르도…….”

내전을 쪼개기로 한 이상 병력의 구성도 바꾸어야 한다. 반군은 반군대로 움직이되, 그 외의 병력은 아르페시스를 위해서 움직이는 그림이 필요하다.

실테르의 왕과 병력 운용에 대해 다시 정리를 해야 한다. 거래를 완전히 새로 틀 필요는 없다. 나라 간의 철광 거래를 정상화하는 것을 해 주는 게 루그레디안이든, 아르페시스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 이틀, 각양각색의 준비를 위해 에스메랄다가 움직이는 사이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황도에서 백작의 부고와 영지에서 치를 장례 소식을 전하고 출발한 지 나흘, 에스메랄다는 나단과 따로 대화할 자리를 마련했다.

나단의 의사를 확인하고 라그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 판별하기 위해서였다. 더 빠르고 확실한 다음을 위해서는 라그나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녀의 부재 동안 마음을 정했다면 좋으련만.

“음… 아버지가 가자고 하면 일단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래? 하긴, 대륙을 돌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백작 저에서 출발할 무렵부터 묘하게 나단의 표정이 굳어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것도 한몫을 했다.

“가려면 봄이나 가을이 좋을 텐데, 왜 하필 겨울에 가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잠시 얘기를 하자는 말에 응해 마차에 남았던 나단이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겨울이니까.”

나단은 아직 내전에 대한 것을 모른다. 그러니 라그나가 왜 하필 지금의 시기에 여행 얘기를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것을 슬쩍 언질해 줄 참이었다. 알고서도 남겠노라 선언한다면 라그나는 더 흔들릴 터. 혹여 라그나가 떠나게 되더라도 나단이 남는 것은 에스메랄다에게 이득이었다. 이미 확인하지 않았나? 그는 충분한 전력이다.

“겨울이라서요?”

“그래, 겨울이라서.”

국내 정세 같은 것은 나단이 스스로 알고자 하지 않으면 접근할 방법이 없다. 굳이 그를 두고 관련된 얘기를 하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단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새장 속의 새처럼 곱게 자랐다. 에스메랄다의 비호를 받는 라그나가 직접 그를 편애했기에 오냐오냐하며 자랐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그런 비호나 편애가 문제가 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단은 타고난 성정 자체가 유한 편에 속했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타인과의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보는 나단은 악의나 적의, 혹은 날카로운 이기심을 품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그러니 뒷골목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구걸 경쟁에서도 뒤처졌던 것이겠지. 그런 나단이 내전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그의 결정이 라그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 왜 겨울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단에게 곧장 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대뜸 이러하다, 하고 정보를 전부 전달하는 게 그리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에스메랄다가 생각하기에는.

“정확히는 이번 겨울이라고 해야 할까?”

나단은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정보를 한 번에 쥐여 준다는 것은 생각을 이어 나갈 기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아가씨께서 명하신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분명 나단은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가 결심을 했다면 눈앞에 있는 한두 명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끼어야 할 판은 단순히 몇 죽이는 것으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다. 학살과 다르지 않을 전쟁이지. 살인은 어떤 이유를 가졌건, 그것을 행한 이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직접적으로 느끼며 암울한 기운을 풍기는 이도 있고, 인지하지 못한 채 살육을 반복하다가 파국에 직면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각오가 필요하다. 그녀가 성채를 불태우라고 명령한다면 망설임 없이 모든 마나를 쏟아부을 만큼의 적극적인 각오. 그러니 생각을 곱씹고, 곱씹게 만들어 스스로가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완전한 포섭이란 그런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과거 첸과 다나를 포섭하기 위해 생각의 시간을 주고, 생각의 방향을 유도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강압에 따른 선택은 완벽한 협조와 자발적인 조력을 제한하고,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저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이번에 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생각이 많았단다.”

“네?”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노란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자율적인 판단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 그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완전히 방치하며 기다리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너를 너무 어린아이 취급했다는 것도, 네가 생각보다 훈련을 열심히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가 내릴 판단이 그녀에게 이로운 방향이 되도록 이끌면서도, 그게 스스로가 결정한 길이라고 믿을 만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의미였지.

새삼, 몇 년을 함께 자란 나단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의도를 담아 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무어, 돌아본다고 하여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에스메랄다는 사적인 감정에 휘둘러 이득이 될 게 빤한 일을 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그녀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했던 나단이니, 생각을 곱씹는 모든 순간 지금 에스메랄다가 하는 말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계속 곁에 두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의도적으로 지금 꺼낸 말을 실행하기엔 문제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라그나와 대화를 해 보렴. 그도, 너도,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는 있어야지.”

‘하지만’이라는 말 뒤에 라그나가 언급되었으니 백작 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단은 그를 찾아가리라. 그리고 겨울을 강조한 에스메랄다의 의도에 따라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하겠지.

“그나저나…….”

우선 그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말은 모두 했으니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물어볼 차례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네?”

나단은 혼자 생각에 빠지려다 말고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표정이 좋지 않기에.”

실제로 백작 저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의 표정은 때때로 지나치게 경직되었다. 그게 신경 쓰여 굳이 물어보는 것이다. 나단은 에스메랄다의 질문 앞에서 조금 어물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 그는 힐끔, 힐끔, 에스메랄다를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이라기보단… 그냥 조금… 놀라서요. 갑작스러워서…….”

“무엇이?”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 그러니까… 저, 전하랑 그런… 어, 음, 특별한 사이이신 줄 몰라서, 조금 놀라서 그래요.”

몇 번이고 말을 더듬은 후에야 완성된 문장에 에스메랄다가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음, 음… 그러니까… 황족을 뵙는 것도 처음이고, 또 황족님의, 아니, 황자 전하를 뵙는 것도 긴장을 했던 것 같아요. 아직도 좀 실감이 나지 않기는 해요.”

대부분의 평민들에게 황족은 경외나 공포, 혹은 미지의 대상이다. 분명 존재하기는 할 텐데 자신의 삶에 결코 닿지 않는 머나먼 존재.

귀족들의 경우에는 영주나 관료들을 통해 접하며 보지만 황족은 존재가 정말인지도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황도에 거주한다 해도 황족의 얼굴을 보는 건 건국 기념일에 있는 행렬 정도일까? 그마저도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게 다니까. 남부에서 백성들이 정확하게 인지를 하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유별난 존재지.

나단도 그런 거리감 때문에 조금 놀란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 거기다 음… 아가씨께서 황자비 전하가 되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낯설어서… 아니, 그,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나단의 행동을 이해하려던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굳었다.

“에? 아가씨께서 화, 황자비 전하가 되신다고… 아닌가요?”

굳은 얼굴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어서 가능한 한 보지 않았던 이물질이 눈앞에 확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굳이 따지면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오를 테니 황후나 황비가 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황실의 이름 에렘, 이 나라의 이름 에렘, 에스메랄다는 애써 외면해 왔던 그 이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 록트 에렘 에스메랄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이는 이름이다. 이건 아르페시스와의 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황제와 황태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이름을 쓴다는 것에서 오는 거부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두 사람을 경멸하고, 혐오하고, 증오한다. 하지만 에렘이라는 이름을 이렇게나 끔찍하게 여김에도 그와의 미래를 바라는 것은 진심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순은 어떻게 정리해야 하지?

“그래…….”

나단이 앞에서 눈치를 살피는 동안에도 굳어 버린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정말 싫다. 그럼에도 그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니… 감내해 보자. 그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인데 못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에스메랄다는 그의 곁에서 겪었던 뭉클한 행복을 떠올리며 애써 거부감을 밀어냈다.

“그렇게 될 거란다.”

표정을 풀어낸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된다 해도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낯설어할 필요는 없어.”

“네에…….”

“아가씨,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곧이어 들려온 소식에 나단과 에스메랄다는 대화를 끝냈다.

마차 밖으로 나오자 오멘과 페르멘이 그녀를 곧장 데리러 왔다. 머릿속은 난잡하고 심장은 울렁거려 입맛이 없었지만 억지로 입 안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황도에 돌아가기 전까지 사람처럼 보일 만큼 체중을 늘려야 한다. 여전히 마름의 기준에 속하긴 했지만 꾸준히 회복 중이었던 덕분에 백작 성을 떠날 무렵보다는 사람 같아 보였다.

아르페시스의 제위를 조금 더 멀끔하기 꾸미기 위해선백작의 장례식 이후 최소한의 사교 활동을 해야 한다. 해 보았자 몇십 일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그녀의 건강 때문에 아르페시스가 걱정을 하는 것도 마음이 쓰이고.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었는데 백작의 장례식까지 무게를 더하자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마침 테란이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는 말로 그녀의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면, 또 백작의 환영을 보게 되었겠지. 에스메랄다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로 돌아왔다.

[라히크의 파발꾼 도착, 전달받은 특징이 아비체룬의 물고기와 일치, 라히크가 국경을 넘어온 물고기를 보호 중인 것으로 추정, 호위 및 호송 병력 출발.]

이미 포기했던 계획이 다시금 불씨를 품을 기미를 보인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그녀가 풀어놓았던 물고기가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온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을 생각하기로 한 이상 아비체룬의 국경은 억지로라도 열어야 했는데…….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상념들을 털어 냈다.

후방국의 멱살을 잡고 전선에 끌어오기 위해서 마수들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라그나가 남느냐, 떠나느냐, 남는다면 성과를 얼마나 빨리 내어 주느냐에 따라 시기가 달라지겠지.

잠시 그녀의 녹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지만 굳게 다져진 것은 흩어지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죄악을 준비 중인 에스메랄다에게 지금 이 소식은 호재일까, 악재일까, 과연 어느 쪽인가.

[아레스의 전역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조금 전 그와 이야기를 마쳤으니 빠르다면 내일 오후에는 백작 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아비체룬과 관련된 보고를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아르페시스가 아레스를 데리고 먼저 백작 성에 도착했고 에스메랄다 일행 역시 백작 성에 발을 들였다. 황도에서 출발한 지 여드레가 되던 날의 늦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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