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3화 (33/45)

제32장

직면하는 순간

잠시의 적막은 곧 웅성거림이 되었고, 문제의 웅성거림은 점점 크기를 키워 소란이 되어 가고 있다.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전율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에스메랄다는 뒤에 기립해 있던 테란에게 속삭였다.

“보석을 풀어라.”

신관들의 악행을 기록한 수정 마도구와 그들의 죄를 고발하는 벽보는 이미 각 영지에 분배가 완료되어 있다. 지금 그녀의 지시로 벌어질 일을 걱정하느라 망설일 틈 같은 건 없었다. 신전의 권력을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 테란은 한발 먼저 백작 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마도구를 통해 곧장 각지에 명령을 하달할 것이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점점 더 사나워지는 광장의 분위기를 감지한 쌍둥이가 그녀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일단 빠져나가자.”

에스메랄다는 두말하지 않고 두 사람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분수대 앞에서 굳어 있는 두 명의 대신관을 잠시 훑었다.

신탁은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걸린 정오에 내려졌다. 오멘이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으니 분명하다. 세상의 진동이 시작된 것은 오전 11시. 신탁이 내려오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지났다는 의미였으니, 황도에 있는 이들을 광장에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일부 신관들에게만 전달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이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인 형태를 취한 신탁이었다. 기록에 남은 세 번째 신탁과 여덟 번째 신탁이 지금과 같은 형태였다. 더욱이 명확한 단어가 사용되며 신관들을 저격하지 않았나.

광장에 모여서 그 모든 것을 함께 본 백성들이 취할 태도는 하나뿐이다. 그 끝이 어떠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폭동은 무조건 일어날 것이다.

객석을 빠져나온 에스메랄다 일행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두었던 마차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그들이 마차 위에 발을 얹었을 때는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은 오멘은 곧장 출발을 명했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은 바빴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이런 식의 신탁이 내려온 적이 없거니와, 신탁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의 종을 사칭하는 악마의 하수인에게서 자격을 박탈한다.’

자격을 박탈한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지? 에스메랄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력…….”

함께 마차에 오른 오멘과 페르멘의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에스메랄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중 다급하게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테란과 함께 오늘 외출의 호위차 따라나선 용병이 말에 오른 채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신관들, 각지의 세작들에게 신관들의 신력 유무를 조사하라고 전하렴.”

“……예?”

“신관들이 신력을 쓰는지 확인해서 보고를 올리라고 해! 남부의 신관들이 가장 시급하다.”

“……예, 아가씨.”

용병이 먼저 말을 내달려 백작 저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황제의 눈이 가장 많은 황도에서 전보 마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놔두고 온 것인데,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용병이 앞서간 후 에스메랄다는 시선을 거둘 여유도 없이 계속, 계속 생각을 거듭했다. 그 속에는 시간을 되돌아온 그녀에 대한 것이 어디에도 없음에 안도하는 옹졸한 생각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깊게, 길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전 온몸으로, 영혼으로 받아들였던 신의 말씀.

‘너희는 더 이상 나의 종이 아닐지니, 스스로가 지은 죄의 값을 치러야만 다시금 나의 종을 자처할 수 있으리라.’

그래, 분명하다. 주신께서 신관들의 신력을 앗아 가신 것이다. 머릿속이 너무 바쁘다. 에스메랄다는 신관에 방문하는 일이 없다시피 할 뿐이지 분명 신앙심을 가진 신도였다.

교리와 성서에 대한 공부는 열과 성을 다했고, 성서의 전문은 모두 외우고 있었다. 교리의 역사나 신전의 발전, 기록된 신탁에 대한 것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 전 벌어진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신탁이라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마룡에 대한 신탁이 내려올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덟 번째 신탁이자 마룡의 존재를 언급한 그 신탁은 최소한의 비유가 있었다. 이렇게, 이토록 직관적인 내용이 아니었는데…….

그때,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보았다. 시선을 다시 거둘 여유조차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기에 분명히 보았다. 후드로 모든 것을 가리고 광장을 등진 채 서둘러 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품에 안긴 채 어깨 너머로 광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영, 뜀박질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작은 몸 역시 후드로 가려져 있었다. 얼굴을 문지르기라도 하는 건지 작은 손이 위로 올라왔고 그 손길에 따라 후드가 살짝 들쳐졌다.

‘모든 것은 나의 대리인이 판단할 것이다.’

그들의 뒤를 쫓아가는 것처럼 움직이는 마차 속에서 보았노라. 에스메랄다가 굳어 있는 사이 마차는 두 사람을 지나쳤다.

“머…….”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에스메랄다는 동요했다. 결국 그녀는 마차가 두 사람을 지나쳐 조금 더 달린 후에야 비명을 지르듯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멈춰!”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차에 타고 있던 쌍둥이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고, 마부가 급히 마차를 세우느라 내부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에스메랄다는 오멘이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정도로 흔들림이 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저가 넘어질 뻔했는지, 말았는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리디!”

기겁을 한 페르멘이 그녀를 쫓아 나온 덕에 에스메랄다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페르멘의 발이 먼저 바닥에 닿았고, 그의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발은 허공에 잠시 체류한 후 천천히 내려섰다. 흩날리는 깃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사뿐하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이미 마차의 뒤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이들에게 닿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페르멘의 팔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이가 방향을 틀었다. 마침 광장 쪽에서는 신관들이 도망치듯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쫓는 이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거리를 울리게 만들 정도였다.

“악마의 하수인!”

“악마다!”

“잡아라!”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서 도망가고 있는 후드의 인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오멘마저 마차에서 내렸을 때 에스메랄다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쌍둥이는 마차 앞에서 굳어 버렸다. 멀어지는 에스메랄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사이 에스메랄다가 보았던 사람은 대로의 옆, 건물 사이사이에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깐!”

에스메랄다는 절박함을 담아 외쳤지만 골목 속으로 사라진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골목 안으로 따라 들어갔고, 그 직후 신관들이 그 골목과 연결된 대로를 지나쳤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이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대로가 사람으로 가득 차 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으리라. 페르멘과 오멘은 인파에 치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리, 리디!”

그들은 잠시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으나 금방 마음을 바꾸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검을 빼어 들고 위협을 하면 더 과격한 상황으로 이어질 게 빤했다.

“젠장, 비켜!”

“쫓아가!”

하필이면 에스메랄다가 데려온 두 명의 호위 용병이 모두 먼저 돌아간 시점에! 그들이 함께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쌍둥이들은 검을 빼어 들지도 못한 채 힘으로 사람을 밀어내며 골목에 들어섰다.

“리디!”

두 사람은 서둘러 에스메랄다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척을 쫓기 시작했다.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문제의 그 작은 인영을 안고 있는 사람을 계속 쫓고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아이는 도망치는 사람의 몸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시나마 허상을 본 게 아닐까 싶은 의문을 느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외쳤다.

“기다려!”

애원을 하며 불러 보았지만 그녀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놓치지 않고 뒤따를 수 있다는 건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수 없는 사람, 무위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과 단둘이 움직이는 거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앞으로 신전 세력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제발!”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앞서 달리고 있는 이와 거리가 점점 벌어질 무렵,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골목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사람과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충돌 직후 그녀와 부딪친 이가 우악스러운 손길을 뻗은 덕분에 넘어지는 것만은 면했다.

“뭘 그리 애타게 불러?”

손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낚아챘다. 히죽거리는 어조의 말을 할 때 풍기는 악취와 술 냄새, 허름한 복장은 물론, 손톱에 낀 때와 제대로 씻지 않아 얼굴을 뒤덮은 구정물까지.

“와, 이거 부드러운 것 좀 봐라.”

히죽거리는 남자가 나타난 골목의 모퉁이에서 두어 명의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그들은 에스메랄다를 멋대로 만지며 음흉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 인물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놔!”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러 보아도 그녀의 힘으로는 사내의 강한 아귀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그녀를 향한 손길이 이어졌다.

“맛 좀 보자. 이 후진 곳에서 일어난 일을 누가 알겠어?”

에스메랄다는 제 뺨을 주무르는 손을 쳐냈지만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리는 손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고 나서 치우면 아무도 몰라.”

“그럴…….”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눈앞에서 솟구치는 피를 인지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를 더듬던 손길의 주인들은 이미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고, 뒤에서 온기가 쏟아졌다.

“리디!”

허공에 튀어 오른 핏물들은 에스메랄다에게 닿기 전 파란색 잔상에 밀려났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진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무렵 뒤를 쫓아온 페르멘과 오멘이 골목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후드를 뒤집어써서 누군지 모를 인물의 뒷모습뿐이었다. 낯선 이를 목도한 두 사람의 손이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의 손잡이에 닿았을 때.

“백작 저에 가 있겠다.”

일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후드 속에 감춰져 있던 시선이 정확히 쌍둥이를 향해 돌아갔다. 오멘과 페르멘은 후드 속에서 드러난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했고, 검을 뽑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

단편적인 말이 끝났을 때 에스메랄다는 백작 저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너, 너……?”

어째서 여기에?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보았던 작은 인영과 아르페시스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번갈아 가며 생각하느라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사정을 봐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그의 목을 조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당한 그는 결국 거칠게 에스메랄다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양쪽 팔뚝을 붙잡힌 채 코앞까지 다가온 아르페시스를 마주해야만 했다.

“기어코 내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겠나?!”

쩌렁쩌렁한 노성이 비어 있던 침실을 가득 채웠다.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말을 잊어버리는 건지, 에스메랄다는 후드를 쓰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것들이 날뛰는 곳에서 혼자 움직여! 놈들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에스메랄다가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자 아르페시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협박했다.

“정말 그것들이 죽지 않길 바란다면 그대의 목숨부터 부지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도륙하지 않고 두는 건 오로지 그대 때문이니까!”

악을 쓰는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팔이 아팠다. 하지만 팔보다 더 아픈 것은 심장이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들이 아파서 지르는 비명처럼 들려서. 에스메랄다가 멈칫거리는 사이 아르페시스가 스산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성벽을 어떻게 했느냐 물었지?”

당당하고 오만한, 또한 이제껏 들어 본 것 중 가장 잔혹한 목소리가 과거의 질문에 답했다.

“내 손으로 인간의 성벽을 부수고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것들을 마수의 먹이로 내던져 주었지. 그대를 내게서 빼앗고자 수작을 부린 놈들, 내게서 그대를 빼앗아 간 놈들, 감히 그대에게 돌을 던진 그 버러지들을 구분할 것 없이 모조리! 내가 또다시 그것들의 비명 소리로 그대를 추도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해. 알아들었는가 말이다!”

화를 내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 전하, 전하! 일어나세요! 일어나 보라고!

잠든 적도 없건만, 그를 깨우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무의미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텅 빈 눈이 철창 밖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 빨리 가야 해요. 탈출로를 마련했어요!

그의 발치에 마나 구속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챙그랑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나가서 무얼 하라고? 아르페시스가 열쇠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애가 탔는지, 디아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 황태자가 또 처형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빨리 움직여야 해요!

처형이라… 그래, 이대로 그녀를 따라가자. 여기에 남아 있어 보았자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나. 모든 것을 놔 버린 눈으로 디아나를 가만히 응시하자 그녀가 독기를 품은 채 악을 썼다.

─ 여기서 죽을 거야? 죽을 거냐고! 아가씨가 당신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를 살리려는 그녀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 무얼 하나.

─ 당신이 죽을까 봐 얼마나 마음 졸이셨는데, 여기서 죽겠다고?! 이 병신 새끼야!

철창을 덜컹덜컹, 흔드는 소리가 거슬린다. 무감각한 눈으로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의 존재가 부정당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해 주지 않고 홀로 짊어졌던 것들이 쏟아져 내리며 그를 허물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한 것이 존재했다.

─ 킥킥… 킥…….

미친 사람처럼 웃자 디아나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가졌다고 여겼던 신뢰와 존경이 반쪽짜리인 줄도 모르고 병신처럼, 이미 쥐고 있지도 않던 것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머저리처럼. 그가 아득바득 쥐고 있으려 했던 그녀와의 유대는 이미 없어졌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에 배제당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 침입자다!

얼마 가지 않아 간수들이 디아나를 끌고 갔고, 그다음 날 아르페시스는 감옥 밖에 있었다. 디아나가 온 날 황제가 깨어났고 그를 감옥에서 꺼냈다. 마녀에게 현혹된 것이다, 마녀가 죽었으니 전선을 계속 지켜라… 그는 그렇게 다시 리퀘나에 처박혔다.

그는 제 처소에 도착한 후 테몬 후작에게 전보를 보내 에스메랄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후작은 파발꾼을 통해 무척이나 자세한 답을 보내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모두 읽은 후 버릇처럼 일기를 꺼내 들었고, 그곳에 속에 담긴 것을 모조리 털어 냈다. 이후에 향한 곳은 사령관실이었다.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서 봤지만 테노리엘의 마차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 전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휴고의 목소리가 근처를 맴돌았지만 그에게 닿지는 못했다. 똑바르게 세워진 채 그들의 곧은 신념을 상징하던 검과,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을 상징하는 덩굴을 그려 넣었던 마차를 타고 그에게로 와 줄 그녀는 없다.

─ 전하, 드셔야 합니다.

그날 이후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 극한까지 단련된 이 빌어먹을 몸은 견뎌 내고 있다.

─ 알고 있다…….

이제 여기서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 전하……?

─ 알고 있단 말이다…….

부질없다는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바라 본다. 제발, 그녀가 다시 이곳에 와 주기를.

오래도록 창가에 서 있던 아르페시스는 리퀘나로 돌아온 지 나흘째가 되던 날 몸을 돌렸다. 황도로 가서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단상 위에서 비열하게 웃던 황태자도, 그놈의 옆에 앉아 있던 귀족 놈들, 그녀에게 불을 붙이던 신관들, 그녀에게 돌을 던지던 버러지들까지, 모조리, 하나도 남김없이.

10년 동안 갇혀 있던 우리를 벗어나는 동안 그는 누구의 눈에서도 숨지 않았고, 누구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다. 허망한 걸음을 옮겨 무단으로 리퀘나를 이탈했을 때,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이 쫓아왔고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들의 검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걷던 아르페시스는 곧 이상한 상황에 직면했다.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 중 일부가 그를 공격하려 했을 때, 또한 그들 중 일부가 그를 보호했다. 아르페시스가 무감각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 모시고 가, 우리가 해결할 테니.

대답을 한 건 테베르였다.

─ 부탁한다.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아르페시스는 테베르를 가만히 바라보느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저들끼리 싸우던 근위 기사들은 시체가 되었고, 핏물이 늘어진 리퀘나의 성문 앞에서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 뭐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기에 아르페시스는 다시 물었다.

─ 저놈들과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길고 긴 침묵의 끝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 함께 폐하로부터 전하를…….

테베르의 답을 전부 듣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것은 새까만 색이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향한 증오, 평생을 헌신하여 지켜 주었더니 그 보답으로 감히 그녀에게 돌을 던지던 백성들을 향한 살의, 그리고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한 원망.

이것들을 풀고 싶었다. 모조리, 모조리 풀어내어 놈들을 나락으로, 아니 나락보다 더한 지옥으로 떨어트리고 싶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에 있는 마나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파란 물결이 허공에 창궐했다. 테베르의 목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휴고를 비롯한 그의 근위대도, 황제가 보냈으나 어째서인지 테베르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던 근위대도, 모두가 굳어 있는 자리에서 아르페시스만이 말했다.

─ 또 있나?

질문과 동시에 허공에 넘실거리던 푸른 물결이 황제가 보낸 근위대를 모조리 두 동강 냈다. 황제가 보낸 놈이 또 있느냐 물어보았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하긴, 이 꼴을 봤는데 누가 자수를 하겠나.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푸른 물결이 난폭하게 넘실거리며 사방을 긁고 파헤쳤다. 아르페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 있는 근위대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들 중 누구도 반항하지 않았고, 누구도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40구 정도의 시체가 널브러진 성문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 그런 적막. 아르페시스는 시체와 성벽 위에서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 그리고 남쪽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곳에 득실거리고 있을 마수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 그래…….

나락보다 더한 지옥으로, 그녀가 만들어 낸 평화를 제 것처럼 누린 놈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려 주어야지. 그 과정에서 죽어 나갈 수십만, 수백만의 백성들 따위 알 게 무엇인가. 어차피 은혜를 권리로 아는 것들인데,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아르페시스는 핏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휴고의 시체를 지나 리퀘나를 완전히 벗어나는 동안 그를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힘에 적응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었다. 공간을 넘나드는 것도, 눈에 닿지 않는 먼 거리를 탐색하는 것도, 사물에 마나를 씌우지 않고도 원거리에서 유형화하는 방법까지. 훈련에,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이듬해 사 20일, 그는 다시 중앙 리퀘나 앞에 섰다.

그의 지배를 받는 마나들이 그의 의사를 반영해 날카롭게 벼려졌고, 하나씩, 하나씩, 착실하게 7개의 리퀘나 성벽을 모두 허물었다. 리퀘나가 없는 인간 따위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마수들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치고 올라왔다.

황제의 서거 소식이 들린 건 사 57일, 남부군이 공식적으로 남부에서 완전히 퇴각한 후의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황태자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웃었다. 놈이 그토록 원하던 에렘을 세상에서 없애 버릴 때, 과연 무슨 표정을 할까? 그게 너무나 기대되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도에서 새로운 황제를 감시하면서도 어디선가 마수를 막아냈노라, 하는 소식이 들리면 당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마수들 틈에 서서 성벽을 허물고 인간들을 도륙하니 놈들은 아르페시스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수가 막히는 내륙의 견고한 성벽을 부수고 다니자 카 10일쯤에는 남부가 궤멸하고 중남부 경계선은 완전히 뚫렸다.

이윽고 카 34일이 되었을 때 서부, 동부, 중부의 남쪽 지대가 마수에게 잠식되었고 황실에선 북부로 대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르페시스는 그 앞을 막아섰다. 그가 전선이라는 우리 속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처럼 놈에게도 황성이라는 우리를 선물해 주기 위해서였다. 절대 그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네가 그토록 바라던 그 제위에 앉아 마수에게 뜯어 먹히라고.

아르페시스가 황실 기사단과 황도에 주둔한 중앙군의 대다수를 학살했을 때, 네 번째 대피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황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카 55일, 북부 지역에 마수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황도는 10만 마수에게 포위당했다.

근처 절벽에 앉아 황도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에 취하니 천상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웃었다. 광기로 가득 찬 그의 웃음소리는 마법과 마도구가 만들어 내는 폭음과 인간이 토해 내는 비명에 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마수 떼를 뚫고 어떻게든 도주하려는 황태자가 나타났을 때, 아르페시스는 그를 찾아갔다.

죽어 버리라고 달려드는 놈을 대형 마수에게 직접 던져 주었노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놈의 사지가 마수에게 뜯어 먹히는 것을 친히 보아 주었노라.

마수들은 이후, 몇 시간이고 광기에 취한 채 폭소하는 아르페시스를 지나쳐 북진했다. 그가 웃음을 거두고 다시 텅 비어 버린 건 붉은 석양이 하늘을 핏물 색으로 적신 후의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폐허가 되어 핏물과 시체 조각밖에 남지 않는 황도를 거닐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오래전 떠나왔던 황성이었다. 찰박, 찰박, 찰박, 사방에 낭자한 핏물이 그의 발걸음을 질척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접견실에 들어 황좌 앞에 섰을 때 삭막한 중얼거림이 고요함을 깨 버렸다.

─ 이까짓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래, 겨우 이까짓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을. 버러지 같은 놈들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버리지 못했는가 말이다. 그들을 버려 얻은 이 자리로 그의 전부였던 에스메랄다의 옆에 서는 것이 뭐가 무섭다고.

에렘을 지도상에서 지우고도 죄책감 한 톨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들키면 어떠한가? 그녀가 자신을 경멸의 눈으로 본다 한들 뭐가 어떻다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 멍청이…….

아르페시스는 느린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랐다.

─ 겁쟁이…….

오롯한 황좌 위에 홀로 앉아 눈물을 떨구었다.

─ 비겁자…….

시간은 지독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갔다. 분명 몇 년을 보낸 것 같은데 고작 몇 초가 흘렀을 뿐이다. 텅 비어 버린 세상은 그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을 고통으로 채웠다. 비명을 내질러 발악을 해 보고플 만큼 아팠다.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을 느낀 것 같은데 고작 몇 분이다. 고요하게 비어 버린 세상에는 들리지 않는 비명이 그의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내뱉을 면목이 없어서, 뱉어 보았자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속에 담고만 있었다.

그가 황좌에 앉은 지 하루가 지났을 무렵,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굳어 버린 핏자국을 밟고 뚜벅, 뚜벅 울리는 발걸음 소리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르페시스가 아는 사람이었다.

─ 앉아 보니 어떠십니까?

테몬 후작은 피곤에 물든 안색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르페시스는 답하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상상도 못 해 봤는데…….

전하께서 에렘을 멸망시킬 줄이야,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 아, 황성의 지하 감옥은 정말 안전하더군요. 비겁하게 그곳에 숨어 있다가 나왔더니 제 기사들이 전하께서 여기 계신다지 뭡니까? 해서 잠시 찾아뵈었습니다.

궁금해한 적도 없건만.

─ 이 꼴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물어본 적 역시 없건만.

─ 남부를 버리고 그곳에 앉으셨으면 과연 어떠했을까……. 지금과 같은 참사를 이룩하고 앉은 자리에 미래가 있기는 했을까…….

테몬 후작은 주절주절 말을 쏟아 냈다.

─ 어쩌면, 그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을 때부터 이런 결과가 예정되었던 건 아닐까요?

넋두리 같기도 했고, 한탄 같기도 했고, 어쩌면 고해 같기도 했다. 아르페시스는 왜 제게 이런 말을 하나, 같은 의문도 없이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 에렘은 이미 늦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황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도, 저도 찾지 못한 다른 방법 말입니다.

처음으로 아르페시스가 반응을 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리자 그걸 본 테몬 후작이 웃었다. 참, 씁쓸한 미소였다.

─ 저는 데녹으로 갈 예정입니다.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언제 반응을 보였냐는 듯 아르페시스는 얌전했다.

─ 에렘은 끝났지만 위에서는 아직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마치 생명이 없는 인형을 보는 것 같다고, 테몬 후작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 포기하기 싫으시거든 한 번쯤 들러 주십시오. 저보다는 이동이 용이하신 것 같으니.

후작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아르페시스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포기? 이미 가진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데 무엇을 더 포기할까. 그녀가 없는 곳에서 아득바득 발버둥 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아르페시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루, 이틀… 분명 살아 있으나 실감이 나질 않는 시간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곱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느꼈다.

무엇인지 모를 존재가 그의 것을 빼앗아 가고 있다. 싫어, 가져가지 마.

그가 누려 왔던 시간과 함께,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계속 곱씹었던 에스메랄다와의 과거가 없어진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있는 건 기억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는데, 그걸 빼앗아 가면 무엇으로 그녀를 그리나.

지독한 상실감이 버거워 숨을 들이켰을 때, 그에게 채워진 족쇄가 상실감마저 빼앗아 가려 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발버둥을 쳤다. 결국 그의 발악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 못한 존재가 잔상을 남겼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성별이나 체형마저 알 수 없음에도 색채만은 뚜렷한 누군가가 붉디붉은 화마 속에서 사라졌다.

‘헉……!’

아르페시스는 악몽 속에서 깨어나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빼앗긴 그것은 대체 뭘까? 대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이토록 지독한 상실감을 느껴야 하나. 어째서 이것을 붙들었나.

* * *

일말의 죄책감도 내비치지 않으며 그녀가 모르는 시간을 고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너무 아팠다. 치밀어 오르는 통증으로 인해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아르페시스는 불에 덴 사람처럼 서둘러 손을 거둬 갔다.

“젠장!”

하지만 화는 거두지 못했다. 아르페시스가 거칠게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을 따라 침실 한가운데에 있던 외발 테이블이 넘어졌다. 위에 있던 화병이 떨어지며 시끄러운 파열음과 함께 깨졌다.

에스메랄다는 화병과 함께 바닥에 늘어진 라퓨나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방에서 계속된 소리를 들은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아가씨……?”

두 명의 시녀들은 분명 외출을 했던 에스메랄다를 한 번,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르페시스를 한 번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깨진 꽃병과 넘어진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아르페시스는 어떻게 보아도 괴한, 그 자체였으니까.

“겨, 경비병! 경비병!”

둘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다른 한 명은 아르페시스에 비해 문 쪽에 더 가까이 서 있던 에스메랄다를 잡아끌었다. 그 소란이 일어난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두통이 몰려왔다. 그녀는 자신을 잡아끄는 시녀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만, 내 손님이니 나가 있으렴. 복도를 비우고.”

“예, 예?”

“나가서 복도를 비우라는데도.”

“예, 예, 아가씨.”

여전히 창백하기만 한 시녀가 침실을 나가자 침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곳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흥분한 것이 분명한 아르페시스의 식식거림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건 금색의 빛을 흩뿌리고 있는 라퓨나였다. 아르페시스의 숨이 점차 고르게 펴지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허리를 숙인 그의 손에 들리는 라퓨나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진즉에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 왜 버려? 네가 준 건데.”

아르페시스는 다른 곳에 놓인 화병에 라퓨나를 꽂아 넣었다. 화병마다 마석을 넣어 두어 몇 년째 생생히 빛나는 그 꽃은 아르페시스가 매해 그녀의 생일 선물로 보내오던 것이었다.

몇 년이나 이어져 온 그들만의 선물은 이미 침실을 꽤나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를 향한 수없이 많은 감정에 휘둘리면서도 저것을 버리고자 한 적은 없었다. 그와의 이별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라퓨나를 정리한 아르페시스가 손을 흔들자 바닥에 널브러진 화병 조각들이 가루가 되며 흩어졌다. 에스메랄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넘어진 테이블을 세우고 후드를 벗었다. 근처에 있던 의자 위에 대충 후드를 걸쳐 놓은 그가 말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좀 이상해서.”

“……괜찮아.”

그를 화나게 한 건 그녀니까 감수하는 것도 당연히 그녀여야 한다. 에스메랄다도 외투를 벗어 그의 후드 위에 걸어 두었다. 이후 그녀는 곧장 아르페시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가 제 발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품에 안겨 잘못했노라고, 생각이 짧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아직, 이상하니까……. 아니, 지금은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

같은 단어가 두 번이나 반복되자 에스메랄다는 경직되어 있는 그의 표정을 살펴야만 했다.

‘내가, 지금, 이상하니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지 마.’

아니, 두 번이 아니다. 기억을 되찾았노라 시인한 후 때때로 아르페시스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이상하다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으면서, 지금은 이상하다고 떨어져 있으려 한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하는 그에게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그 행동은 마치…….

에스메랄다는 그를 채근하는 대신 침묵과 함께 기다렸다. 일전 그가 악몽에 대해 물었을 때처럼 물러나는 대신 자리를 지켰다.

“그대가…….”

꽤나 긴 기다림이 지나간 후에야 아르페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하지만 그것이 대답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대답을 만들지 못했고 끝내는 포기를 하려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기다림을 허락한 것이지 외면을 허락한 게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물어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대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톡, 톡, 톡, 어둠 속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움직이자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다.”

겁에 질린 목소리 사이에 끼어들고 있는 건 그의 주먹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카펫 위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충격적이다 못해 고통스러운 대답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적막 위로 다시 한번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깔렸다.

“그대가 죽어 버릴 것 같아서, 분명 살아 있는데, 그런데 당장 죽을 것 같아서, 무섭다.”

그녀는 말을 하는 대신 아르페시스에게 서둘러 다가갔고, 그는 또 한 번 에스메랄다에게서 물러섰다.

“오지… 마.”

언제는 가지 말라더니,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깨물자 아르페시스가 울먹였다.

“또, 아프게 할 것 같…….”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안겨 들었다. 단단한 팔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녀를 품에 안은 아르페시스의 입술을 타고 뜨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멋대로 덜컹거리던 그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빠른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마저 가빠질 정도로 빠르지만 안정적인 박자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죽음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기에 그 사이의 공백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의 행동과 말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의 시간에는 에스메랄다에게 없는 공백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가족들이 죽었던 시기의 기억을 되짚으며 그를 이해해 보고자 했다. 이해를 해야 도와주든, 시간을 들여 지켜보든 할 게 아닌가.

“계속 그런 거야?”

“……그대와 떨어져 있을 때 심해지는 것 같다.”

“지금은?”

“……희미하다.”

“없어지지는 않는 거야?”

“……그대를 느낄 때는 잠잠하다.”

“정확히 어떤…….”

작은 틈을 두고 이어지던 문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질문이 완성되기 전에 답이 나왔으니까.

“심장 박동, 체온, 숨소리 같은… 그대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실감할 때는 고요해진다. 그때를 떠올리면 다시 시작되는 것 같고.”

분명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은 에스메랄다이건만, 어째서인지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찾아내었지만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잘못했다. 내가 전부 잘못했다.’

‘홀로 남겨 두어 미안하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를 달래겠다는 생각 하나로 사과를 토로하던 형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그 말을 하면 아르페시스는 분명 용서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녀가 겪어 봤기에 어떤 상황이 될지 빤했다. 그래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그게 강요와 무엇이 다르기에? 에스메랄다는 갈등 앞에서 방황했다.

“오늘…….”

결국 선택을 하지 못한 그녀는 비겁해졌다.

“조금 전 일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너무 급해서… 나도 정신이 없어서… 앞으로는 혼자 다니지 않을게.”

아르페시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훈계했다.

“절대, 절대 혼자 다니지 마라. 항시 호위를 대동해라. 내가 늦었으면, 신탁에 정신이 계속 팔려 있었으면… 그것들이 감히, 감히…….”

“응, 약속할게.”

대답을 하고 나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떠오른다. 살짝 흘러내렸던 후드 속에서 보았던 것이 아른거려서 어지러웠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줄래?”

아르페시스는 생각보다 쉽게 그녀의 몸을 놔주었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그러쥐기는 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에스메랄다의 맥박을 잡을 수 있는 부분에 정확히 닿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떼어 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곧장 침대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기자, 복도를 비운 채 계단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서둘러 달려왔다.

“테란을 불러오렴. 상처를 치료할 일이 있으니 약제도 가져오고,”

“예, 아가씨.”

왔던 때처럼 서둘러 달려간 시녀가 테란을 불러올 때까지, 에스메랄다는 문을 열어 둔 채 기다렸고 아르페시스는 열린 문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곧 테란이 도착하자 에스메랄다는 당장 조금 전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성인의 경우 체격과 걸음걸이의 특징 정도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와 함께 움직이는 이를 찾아라. 일행이 몇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 수색에 신경을 쓰도록 해.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

몇 번이고 호칭을 입에 담아 일의 경중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에스메랄다는 결국 말하지 않았다. 분명 확실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이 신전 측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 신전은 아직 위치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그녀를 통해 알려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일 때다.

“황도부터 철저하게 뒤지고, 국경 지역에 인원을 증원시켜서라도 타국으로 넘어가게 두어선 안 돼.”

국경을 넘어가면 에스메랄다의 세력이 미미하다. 제대로 지켜 줄 수 없게 된다.

“예, 아가씨.”

테란이 돌아간 후에는 시녀가 약을 들고 도착했다. 에스메랄다가 약제를 받은 후 문을 닫자 아르페시스는 시간을 거슬러 간 사람처럼 다시 그녀를 품으로 잡아끌었다. 결국 조금 전 그 자세 그대로 아르페시스에게 안겨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는 아르페시스를 대신해 먼저 입을 열어야만 했다.

“치료부터 하자.”

그는 에스메랄다를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뒤로 돌아갔을 뿐이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뜨거웠고 허리를 옭아매는 팔은 단단했다. 뒤에서 일렁거리는 커다란 온기에 폭 파묻히자 그는 에스메랄다가 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확고한지라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그의 손을 잡았다. 피를 닦은 후 지혈제와 연고를 바르고 얇은 붕대를 감아 주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찬찬히 대화를 시도했다.

“언제 도착했어?”

“그제.”

“황도까지 얼마나 걸려?”

“예전보다 마나가 적어서 반나절 정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착실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그제 황도에 도착한 후 줄곧 에스메랄다의 곁을 맴돌았다. 혹여나 전선을 비우고 온 것에 신경을 쓰진 않을까, 타박을 하진 않을까 무서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로 계속.

에스메랄다의 침실로 곧장 돌아온 것 역시 그가 그녀를 지켜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며 우는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을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참았다. 그가 품을 내어 주면 에스메랄다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고, 그럼 그가 왔었다는 것 역시 알아챌 테니까. 그의 일생 중 밤이 가장 길었던 이틀이었다.

“전선에선…….”

“한 번 출정했고 휴식을 핑계로 천막에서 쉬겠다고 말했다. 휴고를 두고 왔으니 내가 있는 척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늦어도 사흘 후에는 잠시 돌아가서 모습을 보일 생각이었다.”

6일. 아르페시스가 정한 부재 가능 기간이었다. 기마에 능한 이들은 보통 리퀘나에서 황도까지 달렸을 때 최소 7일 만에 주파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뭐, 밤낮을 가리지 않은 채 말이 거품을 물고 넘어갈 때까지 달리면 사나흘 만에 갈 수 있겠지만 정상적으로는 7일이 최소한의 기간이었다.

그러니 그보다는 짧은 틈을 둔다면 아르페시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황도에 왔었다고 생각하긴 힘들 터였다. 인간의 영역 속에서는 7일 이내에 남부 전선에서 황도를 왕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땐 그의 손을 치료하는 것도 함께 끝났다. 다시금 그녀를 마주 안은 아르페시스가 뺨을 맞댄 채 문질러 왔다. 그런 행동을 가만히 받아 주던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그는 뺨을 비비는 행동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기억 속에서도 몇 번이나 이런 접촉이 있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에스메랄다는 닿아 있는 모든 순간 애절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아르페시스에게 사과했다.

“제발 내게 사과하지 마…….”

하지만 이건 그가 좋아하는 행동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속이 답답해서 입술을 깨물고자 했다. 그가 손을 들어 입술을 빼앗는 바람에 생각만 하고 실행은 하지 못했지만. 입술이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있어서인지 긴장되었다.

“그대는 나쁜 버릇이 너무 많아.”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은 그리움인지 씁쓸함인지, 잘 구분이 되질 않았다.

“입술을 깨무는 것도, 입 안을 깨무는 것도, 모두 그대를 다치게 하는 버릇인데.”

분명 닿아 있는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는 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대의 피 냄새가 나면… 계속 그때가 생각난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조금씩 경직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

반사적으로 입 속을 깨물 뻔했던 에스메랄다는 숨을 고르며 버릇을 밀어냈다.

“너 정말 왔었…….”

“갔었다. 갔었는데……. 늦어서, 내 잘못이라는 것은 안다. 아는데, 염치가 없다는 것도 아는데, 제발 이렇게 애원할 테니까 상처를 내지 마라.”

리퀘나에서 헤어지던 당시 언급했던 늦음이 이거였구나. 에스메랄다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재촉해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후, 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곳에 담긴 안도감은 선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잘하겠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의 안도감에 함께할 수가 없었다.

“늦지도 않고, 말도 잘 듣고, 내전도 확실하게…….”

버릇이란 오랜 반복을 통해 저도 모르게 몸에 익어 버린 것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에스메랄다는 또 입술을 깨물 뻔했다. 그걸 행하지 않고 밀어낸 건 오로지 아르페시스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를 더 힘들게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대체 왜 이 말을 또 하는 거지? 잘하겠다니? 이전의 그는 못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뭘 잘못했었…….”

에스메랄다의 말은 도중에 잘려 나갔다. 말을 꺼내자마자 아르페시스가 텅 비어 버리는 바람에 끝까지 이어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비어 있으면서 그는 웃으려고 했다. 그의 기괴한 웃음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속에 웃을 수 있는 게 전혀 없는데 웃으려고 하니까, 완성되지 못하고 도중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안다.”

“……뭐?”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나. 이번에는 잘하겠다고, 진심…….”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잘못한 게 없…….”

“잘못했다지 않나.”

이건 대체 무엇을 논하는 대화란 말인가? 머리를 콕콕 찔러 대는 두통이 심해진다. 에스메랄다의 두통처럼 그는 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페드로를 닮아 간 게 분명한 버릇으로 그는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난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 오히려 당시 네가 한 선택이 옳…….”

“거짓말하지 말라!”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코앞에서 직면한 그의 분노를 보고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옳았다고?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말을 찾지 못한 그녀의 입술이 벙긋거리는 동안 그의 손에 붙들린 어깨가 아려 왔다. 아르페시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몇 번을 꾸역꾸역 참아 보았으나 결국 끝에 가서 실패를 하고 만 그가 속에 들어 있던 것을 무작정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내가 잘못한 게 없다면 왜 나를 배제했지? 왜, 대체 왜?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그대에게 필요 없어지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어.”

완전히 비어 버린 사람이 어떻게 울 수 있는 것일까? 흘릴 눈물조차 없이 완전히 비어 있는 게 보이는데, 저 눈물은 어디서 나오고 있나. 아르페시스는 저가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음에 절망했고, 그 눈물의 근원을 헤집었다.

“그런데, 이유는 몰라도 내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니 무언가 잘못을 했겠지. 그게 아니면, 내 잘못 때문이 아니면, 나를 필요로 해 주던 그대가 날 배제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이유도, 과정도 알 수 없음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아르페시스의 상처를 보았다. 그에게 이런 상처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그는 보는 사람마저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무, 무슨 말이야… 내가 널 배제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에스메랄다의 반응을 본 직후, 기억을 되찾았을 무렵 아르페시스가 묻어 두었던 것이 흘러넘쳤다.

“전사자 유가족.”

그건 과거가 지워졌음에도 기억의 서고에 남아 있던 진실이었다.

“남부의 신관들.”

에스메랄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쉬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였다. 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은 지옥이었노라고, 그곳에서 내가 이렇게 아팠노라고!

“그런 것들은 말을 했어야지!”

결국 에스메랄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르페시스는 제 눈에서 흐르는 것보다 더 아픈 그녀의 눈물을 보며 무너졌다. 이렇게 원망을 쏟아 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더 이상 홀로 담아 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입이 제멋대로 나불거리며 모든 것을 토해 냈다.

“그 미친놈이 그대에게 하려던 짓도 내게 말했어야지! 위험하다고, 힘들다고! 그리해 주었으면 병신 같은 짓을 하느라 그대를 잃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홀로 남은 그는 절대 내뱉을 수 없었던 절규였다. 그것을 받아 줄 에스메랄다가 없었기에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속에 쌓아 두었던 원망.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감추어 왔던 건 말을 하지 않은 것이지, 말을 해선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았다면 그대부터 지켰을 것이다! 내륙이 그렇게까지 엉망인 줄 알았다면 그대를 위험하게 두지 않았을 거라고! 그대에게 받을 경멸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켰을 거란 말이다! 내게 제대로 된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 눈과 귀를 모조리 막아 놓은 채 배제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라!”

감춰야 하기에 사라진 게 아니라 감추기 위해 사라진 것. 당시 에스메랄다는 그것이 필요하다 여겼다. 괜한 근심거리가 그에게 더한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가 죽는 것이 무서웠던 그녀 스스로를 위해 감춘 것이다. 가족들이 그녀에게 행했던 기만을 그녀는 아르페시스에게 행했다.

“나를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으면서 내쳤다. 내게 신뢰를 가르쳐 놓고 그걸 등졌어! 나를 존경한다는 거짓말로 기만했다! 그깟 반쪽짜리 존경을 지키려고 내가 얼마나 얼간이같이 굴었는지는 알고 있나? 고작 그딴 것을 버리지 못해서! 그게 진즉에 없어졌다는 걸 알았으면 그런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

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숨이 끊겼다. 아르페시스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손에 어깨가 잡힌 에스메랄다도 함께 떨어야만 했다.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한때 비난이라 여겼던 그의 말 속에 담겼던 것을 어렴풋이 엿본 순간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안도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그때. 아르페시스는 감정이 너무 제멋대로 날뛰는지라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그녀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는데.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내륙에서 등을 돌리고 서는 것을 제안한 건 분명 에스메랄다였지만, 받아들인 것은 그였다. 연락이 단절되었을 때, 몇 번이고 내륙의 상황을 알아볼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한 것 역시 그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분명 아는데도, 너무 아파서 못난 마음을 품었다. 대체 그는 왜 이렇게 못난 것일까.

원망으로 기울어 있던 아르페시스가 이번에는 절망으로 치우쳤다. 딱 세 번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긴 호흡을 세 번 고른 후 에스메랄다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시, 실언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치맛자락을 붙드는 그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앞에서 절박하게 매달렸다.

“잘못, 잘못했다. 실언이었다. 실수… 실수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부족해서… 못나서…….”

울음에 잡아먹힌 발음은 흐렸으나 너무 짙은 색을 가지고 있어서 에스메랄다에게 똑바로 전해지고야 말았다.

“그때도 지금도 다 내가 부족하고 못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금의 아르페시스를 본다면 미쳤노라 단언할 정도로, 그는 위태로웠다.

“마…….”

에스메랄다는 방금 아르페시스가 왜 말을 끝맺을 수 없었는지 눈치챘다. 그의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때문이다.

‘오라버니는 위선을 사랑이라 부르시나요?’

그녀는 저것을 꺼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겪어 보았다. 검고 지독한 덩어리가 악취를 풍기며 그를 갉아먹을 것이다. 그녀를 갉아먹었던 것처럼.

“말해.”

결국 에스메랄다는 무릎을 꿇으며 그를 독촉해야만 했다. 그녀와 시선의 높이가 같아진 아르페시스의 턱이 불거졌다. 그는 아직 절망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가 그를 원망으로 밀어내려 한다.

“말해, 나한테 다 말하라고!”

그녀가 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했던 것.

“나…….”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이제 겨우 말을 배운 사람처럼 더듬거리기만 했다. 이미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아르페시스의 망설임을 읽은 에스메랄다가 한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꺼내 왔다.

“기억나? 감정에는 자격이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말해.”

에스메랄다가 다정한 손길로 등을 떠밀어 주자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그녀는 자신에게 어디까지 허락해 주려는 것일까.

“말해 줘, 제발.”

페드로는 자세한 내막을 몰랐기에 등을 밀어주지 못하고 에스메랄다를 억지로 당기는 것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당시의 그녀에게 간절하게 필요했고,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과정이었다.

반면 에스메랄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든든하게 받치며 밀어줄 수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 필요하고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그 과정을 위해서.

아르페시스가 그녀처럼 오랜 시간 그 끔찍한 덩어리를 속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페드로에게 털어놓고 녹여 갔던 것보다 더 확실하게 털어 내길 바란다. 그래야지만 덜 힘들다.

“나를…….”

아르페시스가 절박한 손길로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에스메랄다의 뺨을 감싸 쥐었다. 에스메랄다의 다정함에 밀려 원망으로 떨어져 내린 아르페시스가 기억 속의 지옥을 가져왔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끝을 보여 주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눈물은 방울을 셀 수가 없었다.

“내게 전부 가르쳐 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면서.”

눈물은 이미 잔뜩 섞여 버려서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존경도, 신뢰도, 사랑까지 다 멋대로 쥐여 주더니 멋대로 빼앗아 갔다.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기회도 주지 않았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그 지옥에 내팽개쳤다고…….”

아르페시스가 울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그가 지금의 시간에서는 너무나 많이 운다.

“내게는 그대가 전부였는데 나를 버렸어!”

아르페시스는 자신만의 지옥에서 몇 번이고 토해 내고 싶었던 비명을 이제야 꺼내 보았다.

그녀가 죽은 후 홀로 지새웠던 시간은 아르페시스에게 지옥이었다.

위험하니 도와 달라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에스메랄다를 원망했다. 또한 그녀가 직접 그 한마디를 꺼낼 수 있도록 믿음을 주지 못하고, 어렵게나마 돌려 말했던 청을 매몰차게 내쳤던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렇게 보낸 1년은 분명 지옥이었다.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대를 선택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전부 빼앗아 갔어!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

에스메랄다가 제 품으로 파고드는 그를 꽉 움켜쥐었다.

“윽… 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녀의 온기를 붙든 채 애원하던 아르페시스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대가 떠나고 어떤 심정이었는데, 전부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대는 모를 것이다!”

“미안해, 혼자 둬서 미안해,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가지 마, 제발 나를 버려두고 떠나지 마…….”

에스메랄다는 저를 으스러질 듯 꽉 껴안은 아르페시스의 품속에 갇혔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부르짖으며 한참을 울었다.

“에디? 에디?”

에스메랄다는 온 힘을 다해 아르페시스를 안으며 기억 속의 날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여기 있다.’

과거에 남아 있는 페드로의 목소리 위로 덧씌워지는 것은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였다.

“응, 나 여기 있어, 여기에 있어.”

“에디……!”

아르페시스의 손이 그녀의 뺨에서 목덜미 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손끝에서 빠르게 튀어 오르는 박동을 느끼며 세상을 되찾았다.

“아시스, 나는 네 옆에 있어.”

곁으로 돌아왔노라, 이곳에 존재하노라 선고하는 그 목소리가 어찌나 황홀한지. 아르페시스는 전율에 물들며 그녀를 찾아들었다. 맞물린 입술은 서로의 눈물에 젖어 짠맛이 났다. 그런데도 달콤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인내를 버리고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에스메랄다는 마치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기다렸고 그가 바라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체중을 실어 밀어붙이는 그에게 속절없이 휘말렸다. 에스메랄다는 몸이 뒤로 넘어가는 느낌에 순응했다.

잠시 부유감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침대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본래 그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침대 위에서 뒤엉켰다. 아르페시스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더듬으며 그녀의 박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감시 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에 의해 드로어즈가 벗겨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보인 반응은 거부도, 망설임도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등 뒤로 손을 돌려 드레스 단추를 풀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한발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허공에 파란 잔상이 만들어지며 에스메랄다의 드레스가 헐거워졌다. 인외자의 힘을 옷을 찢어 내는 데 쓰는 사람은 아르페시스가 유일하리라. 그는 소리조차 없이 흘러내린 드레스를 손으로 마저 찢어 냈다.

에스메랄다가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은회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 속에 담긴 것은 그녀였다. 그녀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2부 진정(辰正) 마침

6권에 계속

주석

1) 晴煙, 맑은 하늘에 낀 안개 또는 靑煙, 빛깔이 푸른 연기.

3부 정오(正午)1)

태양이 하늘의 정점에 닿은 순간 길고 긴 정오(正誤)2)를 바라본다.

OPENING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는 서로가 닿는 모든 곳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열기를 느꼈다. 그로 인해 몸이 불타오르는 듯했고 머리는 몽롱했다. 생각과 선택 없이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만이 서로를 좇고 붙잡으며 이어졌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가슴에 닿는 뜨겁고 커다란 감촉에 희미한 신음성을 흘렸다. 드레스를 찢어 내듯 벗겨 낸 후 슈미즈 안으로 들어온 아르페시스의 손길이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슈미즈를 밀어 올리더니 곧장 벗겨 버렸고, 이어서 자신의 상의도 훌러덩 벗어 옆으로 내던졌다.

침대 밖으로 떨어진 옷가지들이 하나, 둘 쌓여 가고 있었다. 상의를 벗어 낸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홀린 듯이 응시했다. 지독히도 노골적인 시선에 에스메랄다가 팔로 가슴을 가리려 했으나, 그에게 손목이 붙들리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의 팔을 옆으로 밀어낸 아르페시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놀란 심장이 난동을 부렸다. 언젠가 홀로 바라보았던 대로, 그는 에스메랄다의 가슴을 손아귀에 쥔 채 뭉그러트렸다.

제 손 안에서 일그러지는 그 모양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아르페시스의 몸이 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붙들린 에스메랄다의 심장 역시 빠르게 달음박질을 치며 날뛰었다.

아르페시스가 떨리고 있는 몸을 숙여 도착한 곳은 에스메랄다의 가슴, 그곳에서 그를 유혹하고 있는 과실의 끝자락이었다.

긴장과 흥분으로 빳빳하게 솟아오른 유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혀를 놀리자 에스메랄다가 조금 더 선명한 신음 소리를 냈다. 자신이 낸 소리에 놀란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한편 아르페시스는 처음 맛보는 과실이 너무 달콤해 혀가 얼얼할 정도였다. 평생 이것만 먹으며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의 탐욕에 솔직해질수록 에스메랄다는 앓는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괴롭혔고, 몸을 움츠렸다. 그 작은 행동에 자극을 받은 아르페시스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에스메랄다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낯선 감촉에 허덕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어느덧 반대쪽 가슴을 입에 문 아르페시스는 직전까지 제가 빨아 댄 탓에 타액으로 젖어 있는 돌기를 손가락에 끼우고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저를 괴롭힐 때마다 에스메랄다가 다급한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입술은 비단 그곳뿐만 아니라 온몸을 돌아다니며 제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분명 간지러운데 닿는 곳마다 뜨거워서 몸이 들썩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가슴에서 쇄골, 쇄골에서 목덜미, 목덜미에서 어깨, 어깨에서 다시 가슴과 복부로 이어지는 감촉 때문에 계속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걸치고 있던 속옷마저 아르페시스의 손길에 의해 침대 밖으로 사라졌다.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며 작게 피어 있던 벽난로의 열기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완전히 달궈 주지 못했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에스메랄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을 위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르페시스의 손길이 찬 공기를 막고 그녀의 둔부를 덮쳤다.

혀와 입술로 탐해 본 그녀의 모든 것이 너무 달콤했다. 혀가 얼얼해져서 이미 감각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양껏 에스메랄다의 나체를 탐하던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에스메랄다가 반사적으로 다리를 모으며 숨어 버렸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깊은 곳을 보여 준 적이 없기에 지금의 과정이 낯설었다. 리퀘나에서 아르페시스의 바지춤을 건드릴 때만 해도 호기로웠건만, 직접 마주한 상황은 그녀에게 미약한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그 반응에 아르페시스가 애타는 숨을 삼켰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무릎에 얕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녀는 몸을 잘게 떨면서도 반사적으로 발바닥에 닿은 아르페시스의 상체를 밀어내고 있었다. 따끔한 감촉에 시선을 주었더니 뜨거운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시킨 아르페시스가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은 채 종아리를 잘게 깨무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잃기 직전의 사람처럼 애절한 눈동자에 에스메랄다가 얼굴과 가슴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부, 부끄러워…….”

아르페시스는 물러나는 대신 무언의 애원을 지속했다. 무릎과 허벅지에 닿아 오는 깃털 같은 입맞춤에 에스메랄다의 다리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원한다면 언제든 닿을 수 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간절하게 그녀의 허락을 구했다.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서.

그와 맞닿은 부위로부터 전율이 옮아오는 것만 같았다. 에스메랄다의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꼭 그에게 홀리는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에 힘을 빼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또다시 그를 허락해 주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은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나친 열기 때문에 머리가 멍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제 욕심대로 에스메랄다의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에 가려져 있던 음부를 응시했다.

집요한 시선에 수치심을 느낀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어 제 음부를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에스메랄다의 손바닥에 얕은 입맞춤을 남긴 그는 곱고 작은 두 손을 포개서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직후 그는 고개를 숙여 저만이 볼 수 있는, 그리하여 저만이 탐할 수 있는 성역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 하지 마……!”

깊게 숨을 들이쉬는 아르페시스로 인해 에스메랄다가 느끼는 수치심은 배가 되었다. 예전부터 아르페시스가 냄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하필 지금도 그럴 건 뭐란 말인가.

얼굴이 벌겋게 물든 에스메랄다가 발버둥을 쳐 보았으나, 아르페시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요원했다.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에스메랄다의 반항을 쉽게 제압한 아르페시스가 제 눈앞에 있는 성역에 남은 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 읍……!”

에스메랄다의 수풀은 이미 미끈한 액체로 젖어 있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르페시스의 불길이 다시 한번 거세졌다. 미끈거리는 음부를 손가락으로 유린하자 에스메랄다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흑……!”

그에 아르페시스는 엄지로 에스메랄다의 돌기를 문지르고, 입술로 그녀의 깊고 깊은 음부를 탐하기 시작했다. 츕, 츄웁, 아래를 게걸스럽게 핥아 대는 소리가 울리자 에스메랄다가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내는 교성이 낯설었던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꼭 깨문 채 소리를 참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을 놔준 아르페시스가 제 얼굴 옆에 있는 보드라운 허벅지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의 아귀힘에 눌린 허벅지가 야한 굴곡을 만들며 뭉그러졌다.

붙잡으려는 것인지, 밀어내려는 것인지, 행방을 정하지 못한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유를 되찾은 에스메랄다의 손이었다.

끙끙끙,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흘리는 애액을 조금이라도 더 삼키기 위해 혀를 바삐 놀렸다.

“그, 그만……!”

에스메랄다는 제 다리 사이에 고개를 박고서 게걸스럽게 핥아 대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심장에 품어 온 사내가, 만인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내가, 제 다리 사이에 매달려 추잡한 소리나 내고 있다니.

그녀는 지금 저가 느끼는 것이 배덕감인지, 만족감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분명 이런 날이 오길 바랐건만, 직접 겪어 본 접촉은 정도 이상의 쾌감을 주었기에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아르페시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낯선 쾌락에 머리가 몽롱해지던 중, 에스메랄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밀어내고자 했다.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열고 들어오려 했으니까.

“흐앙……!”

지금까지 꾹 참아 왔던 교성이 붙잡을 새도 없이 멋대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에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직전의 달뜬 신음을 듣기 위해 그녀의 음부를 몇 번이고 혀로 찔렀지만, 에스메랄다는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문 채 끙끙거릴 뿐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나체를 직접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불만을 느꼈다. 대체 왜, 소리를 참는 거지?

그가 고개를 들어 본 것은 제 얼굴을 가린 채 끙끙거리고 있는 에스메랄다였다.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그가 그녀의 음부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좁고, 뜨겁고, 보드라운 그곳을 침범해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여기에 그가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이미 오래전부터 열기가 피어올랐던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가 감격에 젖어 가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반응이 격해졌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눈에 새기려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살짝 일그러진 눈썹, 그가 주는 쾌락으로 인해 풀어진 녹안, 오로지 그로 인해 느끼는 자극에 반응하는 몸까지……. 모든 것이 그를 그녀의 세상에 붙들어 놓는다.

하복부에서부터 시작된 열기와 통증이 전율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아르페시스는 음부 속을 탐하고 있던 손가락을 살며시 굽히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콱, 깨물었다.

“흡……!”

이번에도 에스메랄다는 소리를 참으려는 것처럼, 제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아르페시스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음에도 다급한 숨을 들이쉬며 몸을 떠는 에스메랄다는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수풀 사이에서 앙증맞게 부풀어 오른 돌기를 빨며, 음부 속으로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뭉근하게 돌려 가며 음부를 풀어내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하복부에서 시작된 열기가 머리를 하얗게 태워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몸이 경련하고 있음을 느낀 아르페시스가 길고 달콤한 숨을 흘려 보냈다. 하체에 닿는 그의 숨결이 너무 선연해서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몰아쉬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얕은 절정으로 인해 조금 흐트러진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그런 아르페시스를 좇아갔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탐욕을 드러낸 그의 눈동자가 에스메랄다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그래, 그녀에게로 향하는 탐욕을 날 것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아르페시스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잠시간 에스메랄다와 서로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페시스가 제 바지춤을 헤치기 시작했다. 잔뜩 성이 나서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성기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스메랄다에게 쾌락의 한 조각을 선물한 아르페시스는 다급한 움직임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녀와 제 하체를 바짝 맞붙였다.

그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긴장감으로 인해 살짝 굳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에스메랄다의 몸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으며 귀두를 그녀의 질구에 맞추었다.

오래도록 홀로 염원해 왔던 그 순간이 다가오자 저절로 숨이 떨리기 시작했다. 긴장감과 기대감에 취한 그가, 아주 천천히 에스메랄다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직전에 손가락을 양껏 찔러 주었음에도 그녀의 길목은 좁았다.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찾아든 아르페시스는 긴장으로 굳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에 따라 빈틈없이 맞물리기 시작하는 체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능숙하게 서로를 찾아 얽히고, 그 속에서는 맞닿은 사람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접촉이 오고 갔다. 그들은 마치 서로를 구속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탐닉했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그녀의 안에 도달했을 때, 아르페시스에게 입술이 잡아먹힌 그녀의 허리가 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이 허공에 뜬 자신의 허리를 붙든 채 지탱해 주는 것을 느꼈다. 아르페시스는 생소하나 황홀한 감각 때문에 성급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이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날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자신을 가득 채우는 감각을 배웠고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에스메랄다에게 뒤덮이는 감각을 배웠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를 차지하는 감각 속에서 두 사람은 똑같은 전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리를 지배하는 쾌감은 생소했으나, 격렬했다.

“에디……!”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몸을 묻으며 헐떡였다. 그의 탐욕은 멈출 줄을 몰라 그녀에게 뒤덮인 후에도 그녀의 체 향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워 나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아르페시스에게 매달려 마찬가지로 헐떡였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운 감각에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붙든 채 스스로를 다독여야만 했다.

“……아픈 곳은?”

잠시 후 아르페시스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고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열기에 충분히 달궈진 몸은 무리 없이 아르페시스를 받아들였다. 그저, 너무 낯설었다.

“괜, 찮겠나?”

에스메랄다는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아르페시스의 속삭임과 숨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딘가로 쓸려 가 버릴 것 같은 부유감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아르페시스가 아니었다. 그는 시트를 움켜쥔 에스메랄다의 손을 제 손과 마주 잡게 만들어 깍지를 꼈다. 에스메랄다의 다른 손은 그의 어깨를 붙든 채 놔주고 있지 않으니 되었다. 이제 그녀가 잡고 있는 건 오롯이 그뿐이다.

에스메랄다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아르페시스는 전부가 서툴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가 됨으로써 다음을 향해 움직였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서툴게나마 허리를 흔들 때마다 그를 꽉 붙잡았다.

“으응…….”

느릿한 다정함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바르작거릴 때마다 아르페시스의 몸을 채운 근육이 꿈틀거렸다.

“윽……!”

그때 교성을 참기 위해 억누른 에스메랄다의 입술 위로 기어코 상처가 났다. 그걸 본 아르페시스가 재촉하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듣고 싶어…….”

간절한 부탁에도 에스메랄다는 도리질을 치며 신음을 참기만 했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애원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억눌린 소리뿐이었다.

그녀가 참지 못할 정도로 격한 교성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 초조한 마음에 아르페시스는 직전보다 더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깊고 깊은 그녀의 속살에 아르페시스가 닿는 순간이었다.

“아앙……!”

에스메랄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교성을 뱉어 냈다.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리며 만족감을 토해 냈다. 그래, 이것을 바랐다.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쾌락에 취하기를, 그리하여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이 제게 빠져들기를.

“여기?”

아르페시스가 직전의 그곳을 다시금 세게 찔렀다. 그에 숨이 넘어갈 듯 다급한 교성을 흘린 에스메랄다가 기이하고 낯선 쾌락을 거부하는 것처럼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그녀의 뜻에 따라 순종할 만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를 탐하겠다는 본능만이 남은 사내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학……!”

허리를 휘며 바르르 몸을 떠는 에스메랄다를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같은 곳을 연달아 찌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참을 새도 없이 달뜬 교성이 터져 나왔다.

에스메랄다가 저의 손길에 의해 쾌락을 느끼고 만족한다는 것, 그게 아르페시스를 고양시켰다. 이 감정은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으리라.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절대적인 종속감이 그를 충족시킨다.

기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느껴야 했던 소속감이 결여된 채 살아온 그였기에,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안도감과 안정감을 준 것이었다.

에스메랄다에게 뒤덮여 있는 감각은 그에게 고문인 동시에 황홀한 쾌락이었다. 그럼에도 더한 쾌락을 바라기에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와 마주 잡은 손과 달리 자유로운 손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밀려나는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붙잡은 채 놔주지 않고 있었다.

서툰 허리 짓은 점차 제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처럼 능숙해졌고, 에스메랄다와 마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몸도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집요하게 맞물렸다.

어느 순간, 아르페시스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활짝 벌어진 에스메랄다의 다리를 모아 제 쪽으로 당겼다. 보드랍고 가녀린 다리가 그의 단단한 팔 안에 갇혀 버렸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무릎을 제 어깨에 걸고서 빠르게 허리를 치대었다. 에스메랄다의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허리를 흔들 때마다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그의 둔부에 힘이 들어갔다.

끝에 가까워질수록 아르페시스의 움직임은 다급해졌고 에스메랄다의 교성은 높아졌다. 들리는 것이라곤 살과 살이 맞닿으며 생기는 자극적인 마찰음과 격한 행위로 인한 거친 숨결, 그리고 서로의 존재로 인해 느끼는 쾌락에 점철된 신음 소리가 전부였다.

불현듯 에스메랄다의 다리를 놔준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골반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때부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몰려오는 쾌락을 버티지 못한 에스메랄다의 몸이 축 늘어진 채 아르페시스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그녀는 저를 휩쓰는 쾌락에 떠밀리며 울부짖었다.

그에 아르페시스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언젠가 홀로 상상해 보았던 그 모습이다. 저의 허리 짓에 따라 흐트러진 그녀가 울부짖고, 저의 허리 짓에 따라 나체가 된 그녀의 몸이 흔들린다.

아르페시스는 저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에스메랄다의 가슴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다. 앞뒤로 빠르게 허리를 흔들던 그가 에스메랄다의 깊은 곳에 저를 찔러 넣었을 때였다.

“하읏……!”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의 팔뚝을 할퀴며 경련했다. 그녀의 속살이 아르페시스의 성기를 쥐어짜는 것처럼 오물거렸다.

“윽……!”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한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등 근육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지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여운을 붙잡는 것처럼, 에스메랄다의 골반을 틀어쥐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며 주물럭거렸다. 바짝 맞물린 그들의 몸이 파르르 떨며 서로가 느끼고 있는 것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녀를 취하여 그녀로 인해 취해 버리고, 그를 취하여 그로 인해 취해 버리는 그 순간, 너로 인해 내가, 나로 인해 네가 완벽해질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 격렬한 열기의 끝에서 그들이 맞이한 것은 흠결 한 점 없는 완벽한 쾌락과 환희, 절정과 파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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