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희망의 재림
아무런 사감도 없다, 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없도록 노력했을 뿐이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다짐은 빛이 바랬고 현재의 노력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참 옹졸하게도, 못난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음에도 못마땅해서, 눈에 거슬려서, 어떻게든 정당하게 미워할 만한 구석을 찾아보고 싶어서. 별개의 인물로 보고자 해도 결국은 같은 혈육에 얽혀 있었기에 비겁한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도 인정한다.
‘남부군의 2년 예산이 당신의 사비로 충당이 된다는 거에 꽤나 충격을 받으신 것 같더라고.’
사람은 눈앞에 두 가지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면 어느 순간 당연하게 비교라는 것을 하게 된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이나 유사점, 이러한 비교는 사람을 대상으로 두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교를 하는 사람마다 가진 이유는 모두 다르겠지만 로웨나의 경우에는 이유가 아주 명확했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흠을 찾는 것. 그래, 로웨나가 아르페시스에게 시선을 주며 관찰을 이어 간 이유는 그의 흠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흠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홀로 위안거리 하나 얻고 싶었던 것뿐이다. 비겁하지만, 황태자 앞에선 침묵했던 울분을 그와 어떻게든 엮여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풀어 보고 싶어서.
눈앞으로 달려가 직접 헐뜯을 생각도, 비난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혼자 속으로 ‘이런 사람이라서 싫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변명거리, 작은 흠결 하나면 충분했다. 그 결과가 완벽한 패배일 줄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비교해도, 어디를 따져 보아도, 무슨 수를 써서든 헐뜯어 보고자 노력해도, 결론은 한결같았다.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웃음 속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암울함 속에서 사람을 웃게 해 주고, 그 미소를 간직한 이들이 다음을 그릴 수 있게 만드는 사람.
그를 만나는 모든 순간에 그것을 실감했다. 황태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원하던 흠은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아르페시스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인정은 존경으로, 존경은 신뢰로 변하고, 신뢰가 이성을 향한 호감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과거에 그녀를 겁간한 사내와 피가 섞인 이에게 마음을 품게 될 줄이야. 어찌나 허탈하고 우습던지.
‘혹시나 싶어 언급하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중에는 도박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없겠지?’
피로를 가득 담은 얼굴로 회의장에 나타난 아르페시스.
‘제발, 내가 건의하긴 했으나 제발 이렇게 부탁할 테니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각각의 리퀘나에 생긴 유흥 시설에서 생긴 문제를 두고 당부하던 아르페시스.
‘졌으면 설욕을 해야지요.’
‘그러니까, 그걸 하지 말라는데도? 그냥 유흥이다! 설욕은 무슨 놈의 설욕!’
각기 한 번씩은 내기 대련으로 주머니가 털린 기사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던 아르페시스. 그의 존재는 어디에서나 유쾌함을 그려 냈고, 그 속에서 웃고 떠드는 사이 커진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채 두 계절도 되지 않았다.
‘나를?’
하지만 과거 아르페시스를 향해 품었던 불순한 의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처럼,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혹시나, 어쩌면, 같은 기대감조차 남지 않았다. 마음을 전해 들은 아르페시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당혹감 이후 아주 일관적인 감정을 내비치었으니까.
불편함, 정말 그게 전부였다. 오로지 그것뿐. 타인의 사랑을 고해받은 후 보이는 설렘이나 들뜸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서 로웨나는 자신의 감정이 가망이 없는 혼자만의 것임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답은 줄 수 없겠군.’
먼 길을 돌아 인정한 감정의 끝은 무척 허무했다. 거절의 이유라도 알고 싶어 질문을 했을 때, 답은 의외로 쉽게 돌아왔다.
‘꼭… 대답을 해야 하나?’
물론 말로써 정립된 답을 들은 게 아니라 보았을 뿐이다. 시선을 맞추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넘치는 건 그리움이었다. 한순간 대체 누구인가, 같은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알아낼 방법은 요원했다.
그저 아르페시스의 태도가 홀로 마음을 품은 사람의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짝이 있는 사람을 탐내는 짓만은 하지 말자고 돌아섰는데… 답과 끝을 알면서도 성공은 쉽사리 거머쥐지 못했다.
‘신관, 주둔 신관은 어디 있나!’
로웨나가 혼자만의 감정에 허덕이는 나날을 보내던 중 아르페시스가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 신관을 찾으며 관저를 뒤집어 놓는 본부대 기사들을 봤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이후 주둔 신관이 돌아와 치료를 했다고는 하지만 걱정으로 인해 마음은 계속 울렁이기만 했다.
결국 울적한 기분이나 달래 볼까, 싶은 마음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주류가 보관된 별실로 향했다. 그곳에선 이미 칼라일이 술판을 벌인 상태였다. 노력을 해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마음도, 갑자기 쓰러진 아르페시스에 대한 걱정도. 전부 잊어 보고자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먼저 만취한 칼라일이 주절주절 말을 시작하지 뭔가?
‘사실 다시 오셔도 좋게 보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할 말이 없었어. 멍청하게 아무 말도 못 했어.’
로웨나의 시선이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작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아르페시스의 심장을 허락받은 유일한 여인. 그녀를 직접 리퀘나로 데려온 칼라일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멋대로 떠들었다.
술에 취한 채 상관의 사생활을 떠벌리고 있는 칼라일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아직 노력 중인 것이지 성공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지 말 것을, 칼라일의 입을 막아 버릴 것을, 그 이름을 듣지 말 것을.
‘총사령관님이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냐고…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매일 기다리셨다고… 페드로가 죽고 무슨 심정으로…….’
한참을 웅얼거리던 칼라일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들었다. 로웨나는 그런 칼라일의 맞은편에서 계속 잔을 기울이는 대신 자리를 피했다.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어서 술도 좀 깰 겸, 찬 바람도 좀 쐴 겸, 후원으로 나갔더니…….
‘가지 마…….’
감정에 취한 발악의 끝은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선고된 완벽한 결론.
‘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다시 가겠다는 말을 하나. 제발, 가지 마.’
그녀에게는 애초부터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곱씹던 로웨나는 관저 1층의 복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재촉 한번 없이 기다리는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노리엘 영주 대리.”
이름조차 몰랐던 아르페시스의 연인이 에스메랄다였다면, 로웨나는 더더욱 마음을 접어야 한다. 칼라일에게서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것을 깨달았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르페시스였나 싶은 자괴감에 휘둘려서, 한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테노리엘은 남부군을 후원하는 큰손이다. 그들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자진하여 척을 지어서 좋을 게 어디에 있다고. 우호를 다져야 마땅한 인물이고, 밉보여선 안 될 세력이다. 밤을 지새우며 내린 결론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한결같으리라.
그녀에게 있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부군일 테니, 이제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 노력해 보자. 차라리 잘되었다. 에스메랄다의 존재가 앞으로의 노력을 위한 변명이 되어 주리라.
“지난밤의 무례에 대해 사죄를 드리고자 잠시 자리를 청했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시선을 맞추어 왔다. 로웨나는 마주한 녹색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난 분명히 거절했다. 저 여자의 마음과 나는 무관하다. 그러니 중요하다 언급될 만한 대화를 나눌 이유도 없다.’
사랑 따위, 자존심 따위,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와 우호를 다질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남부군이 매해 토벌하는 마수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 내륙에서의 영향력을 가진 테노리엘과 뜻을 합쳐 걸어야 대응할 수 있다.
“제 부족한 언사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로웨나는 정중한 태도로 에스메랄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차피 가망 없는 감정이 아닌가?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으니, 지난밤 감정에 휘둘려 친 사고나 수습하자.
로웨나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던 은회색 눈동자와 제 바로 옆에서 피어올랐던 파란 잔상을 떠올리며 계속, 계속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게 옳다고.
* * *
“제 부족한 언사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스메랄다는 사죄의 말을 언급하는 로웨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앙뷔는 대대로 남부군을 위해 생의 전부를 걸어 온 이들이다. 남부군이 황태자의 명령서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았을 때 앙뷔를 비롯한 피해자 가문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건 반발이 아니라 침묵. 그것만 보아도 그들의 우선순위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로웨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에 훤히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그녀가 황태자에게 겁간당한 것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건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만약 그 일에 에스메랄다가 개입했다는 걸 알게 되어도, 로웨나는 지금처럼 고개를 숙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까?
에스메랄다는 그 질문에 망설임 한 점 없이 그렇다, 라는 답을 내어 놓을 수 있었다. 그녀도 사람이니 만큼 한순간, 찰나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분명 어제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찰나에 흔들릴지라도, 로웨나의 마지막 결론은 언제나 같으리라. 설령 포기해야 하는 것이 스스로일지라도, 희생해야 하는 게 일생 전부일지라도… 로웨나의 선택 끝에 있는 건 언제나 남부군의 존속일 것이다.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남부 전선을 지켜 온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과거, 복수에 현혹되어 외면했던 존경심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경께서 틀린 말을 하신 것도 아닌걸요. 쓴 말을 들었다 하여 발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불쾌감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고, 앙금이 남아 있지 않다면 기만이다.
“스스로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안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보복을 할 만큼은 아니다. 아직 에스메랄다가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니었다. 그럴 힘도, 능력도 있지만 사적인 일에 권력을 휘둘러 보복을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로웨나는 생각보다 당황한 것 같았다. 이토록 순순히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할 줄은 몰랐을 테니 당연할까?
에스메랄다는 감정이 훤히 드러나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키는 로웨나가 한 뼘이 넘게 큰지라 구두를 신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곧고 단단한, 그리하여 자신이 고른 신념 앞에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로웨나. 그녀는 이미 남부의, 에렘의, 나아가 대륙의 영웅이었다.
그런 로웨나와 다시 마주친 시선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부드러우나 동시에 오만하게 웃었다.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 경고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전하께서 사랑하시는 건 저뿐이겠지만요.”
어떻게 손에 쥔 사내인데 빼앗길 줄 알고.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상황이 오든, 그녀가 아르페시스를 놔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륙에 있는 성문과 성벽을 부수기엔 충분하다. 만약 리퀘나를 건들고자 하면 조금 애를 먹겠지만… 못 할 것도 없지.’
그가 한때 에스메랄다의 존경 속에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그녀의 사랑은 그의 것인데 어떻게 놔주겠나.
“예, 알고 있습니다.”
로웨나는 조금 굳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를 알아들었으니 지난밤과 같은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는 답이었다. 지금 그녀의 속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에스메랄다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눌렀다.
“앙뷔 경은 제가 꼭 뵙고 싶었던 분이었는데… 첫 만남부터 너무 요란했네요.”
관저 1층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두 사람 중 에스메랄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수줍음을 꾸며 말하자 로웨나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전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은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녀의 모습에 에스메랄다는 천진난만한 영애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 어제 그 일도 술김에… 정말 면목 없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지난밤의 얘기를 꺼내는 로웨나의 앞에서 계속 미소 지었다.
이 자리는 지난밤의 상황과 달랐다. 그때는 양쪽 모두가 약이 바짝 올라 날카로웠다면, 지금은 어느 한쪽이 모든 것을 양보하고 숙이는 자리였다. 똑같이 한 사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로웨나가 얼마나 비참한 심정일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남부군의 유망한 기사와 그들을 오래도록 후원해 온 가문의 책임자가 우호를 다지고, 향후를 내다보는 자리다. 그것을 위해 로웨나는 지독히도 많은 것을 포기했고, 로웨나가 포기한 것으로 이득을 얻은 에스메랄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망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로웨나가 어떤 심정으로 만든 자리인데, 그런 못난 짓을 하겠나.
“그래도 언제 한번 경과 술 한잔 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네요. 경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에요.”
“좋게 봐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예전부터 앙뷔 경처럼 남부에 계신 여기사분들을 많이 존경했답니다.”
진심이었다. 그녀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안전한 곳에 앉아 세 치 혀를 놀리던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있는 곳을 비겁한 전장이라 여겨 왔다. 그래서 직접 전장을 누비며 전우들을 지켜 낸 남부의 수많은 이들을 부러워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위를 쌓을 수 없는 몸이기에 포기했고, 다른 방법을 찾아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았다 하여 이 지독한 열등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닐 테지.
“그럼… 오늘 밤에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짓궂은 말투와 와인잔을 기울이는 듯한 손동작의 끝에서 로웨나는 참 강인하게 웃고 있었다.
“아직은 몸이 받아 주질 못할 것 같아요. 다음에, 꼭 자리를 마련해 봐요.”
“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그럼 다음으로 미루지요.”
“네, 꼭이요. 그나저나…….”
에스메랄다와 로웨나는 관저 1층에 나 있는 복도를 따라 오래도록 걸었다. 그녀들의 대화는 가벼운 농담에서 점차 무게를 더해 갔다. 그래, 지금과 같은 대화를 위해 로웨나가 개인적인 일을 모두 포기한 것이다.
“놈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겨울이 버거워지고 있기는 합니다. 계속 이런 추이로 늘어난다면 내년, 내후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변할 것 같던 상황을 계속 바꾸어 버리죠. 황실에서 증액 요청을 승인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전역의 영주들이 재력을 덧붙여야 해요.”
앙뷔가 조건부로 내전에 동조한다는 얘기는 아르페시스로부터 들었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황실의 증액은 승인이 난 것처럼 말했고, 그 외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종종 오가고 있습니다만… 마땅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몇몇 분들 외에는 남부군 후원을 무슨 장신구처럼 생각하는데…….”
말 그대로, 주기적으로 남부군을 후원하는 몇 가문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생색내기용으로 한두 번 하는 것이 전부다. 만약 제위의 주인이 바뀐다 해도 어리석은 인식은 뜯어고쳐야 한다. 바뀌어야 하는 건 영주들뿐만이 아니다.
매해 남부군을 더 힘들게 하는 병력 문제도 있으니 내륙 전역의 인식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과 해야 할 일, 되돌릴 수 없는 일까지. 수많은 생각과 선택 앞에 놓인 에스메랄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때때로 수단은 목표를 잡아먹고, 목표는 수단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곤 하죠.”
“……예?”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갑자기 멈춰서 뒤를 돌아보는 에스메랄다 때문에 로웨나 역시 우뚝하고 걸음을 멈췄다. 에스메랄다는 마도구 전등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관저의 복도를 빤히,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안은 공허한 것 같기도 했고, 설명할 수 없는 열기에 싸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그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리라.
여전히 머릿속은 엉망이고, 정리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한가득이다. 숨을 쉬는 순간순간 목을 졸라 오는 버거운 압박감 역시 여전했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거의 직감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 가는 중이었다.
“오래지 않아 해결될 거예요……. 오래지 않아.”
로웨나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에스메랄다를 시선에 담고 있었다.
“경께서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전선을 지켜 주세요.”
“…….”
“그 외의 것은 모두…….”
참 오래전에 다짐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속에 담아 본다. 말꼬리를 흐린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복도의 끝에서 로웨나에게로 향했다. 옅은 밀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밝은 자색 눈동자에 총명함과 신념을 담은 사람.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로웨나에게 가면 속의 표정을 보인 건 에스메랄다의 일생 중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미안해요.”
무엇을 사과하는지도 말하지 않고, 그저 그 한마디.
“네?”
반문을 하는 로웨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도 로웨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과거에 무슨 짓을 해 왔는지, 앞으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테노리엘 백작의 선택이 결국 변하지 않은 것처럼, 어떠한 이유에도 로웨나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테니 알아보아야 힘들기밖에 더하겠나.
그러니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얹어 주느니 홀로 짊어진 채 허덕이자. 비겁하고 이기적이라 한들, 그렇게 하자. 세상에는 몰라야만 하고, 묻어 버려야지만 도움이 되는 진실도 있는 법이다.
“내일 다시 출발을 해야 하는지라,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쉬고 싶네요.”
“벌써… 돌아가신다고요?”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러… 시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부디, 다시 뵐 그 날까지 안녕히.”
“……다시 뵙게 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로웨나를 등졌다.
그 길로 곧장 방으로 돌아온 에스메랄다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섰다. 어둑한 공간에서 홀로 몇 번의 숨을 건너왔을까? 그녀는 문득 속옷이 축축하다는 느낌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아…….”
알싸한 아랫배의 통증까지 더해지자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눈치챘다. 체중이 줄어든 이후 주기가 일정하지 않았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할 게 뭐람.
“뭐지?”
갑자기 들려온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에 에스메랄다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조금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를 훑어보았을 뿐이다. 혼자가 되면 곧장 나타나는 것도 그렇고, 나타날 때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떨어진 장소에서 그녀를 지켜볼 수 있는 것 같은데…….
마치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살짝 눈초리가 매서워질 무렵, 아르페시스가 성급한 손짓으로 에스메랄다의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다친 것인가? 피 냄새가 나고 있지 않나!”
어둠 속에서 묘한 광채를 내는 은회색 눈동자 속에 있는 건, 또 이름 모를 무언가다.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그 무언가.
“월경이야.”
“어……?”
다시 한번 그녀를 채근하려던 아르페시스의 입이 막혔다. 에스메랄다는 경직된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월경이라고. 잠시 자리 좀 피해 줄래?”
어둠에 덮인 그의 그림자 중에 입술 언저리가 벙긋거리며 움직였다. 곧 모든 색을 무채색으로 만드는 어둠을 넘어 붉은 열기가 그에게 서렸다.
“미, 미안하다.”
그는 곧 다시 사라졌고 에스메랄다는 시녀를 불러 속옷을 갈아입었다. 통증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신경을 긁을 만큼은 아픈지라 관저의 주둔 의원을 불러 진통제를 처방받기까지 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나서 침대에 앉으니 그제야 아르페시스가 다시 나타났다. 확실하다. 그는 멀리서도 그녀를 지켜볼 수 있다. 마도구 전등으로 환해진 방 안에서 아르페시스는 곧장 다가오는 대신 침대 근처에서 쭈뼛거렸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오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을 어디에 두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흘리는 통에 에스메랄다까지 정신이 사나워질 것 같았다.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걸, 그걸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뭘 저리 돌려 말하는지. 에스메랄다는 베개를 세워 등받이를 만들었다. 그곳에 기대기도 전에 아르페시스가 옆자리에 앉았다.
“감춰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건… 그러니까… 여인의 월경은 조금… 비밀스러운… 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 쑥스러워하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툭 말을 던졌다.
“비밀은 무슨. 내가 월경을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내 말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내게 너무 쉽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미였다.”
조심스러운 말에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정말이지, 이런 얘기에 있어선 어찌나 보수적인지.
“내가 월경을 한다는 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한 여성이라는 의미야. 그건 자랑스러운 일인데 왜 숨겨야 해?”
그에 아르페시스가 묘한 시선으로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페드로와 똑같은 말을 해서.”
에스메랄다는 조금 씁쓸하고 그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오라버니께서 날 가르치셨는걸.”
“……그렇군.”
아르페시스의 품에 기댄 채 정신없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스스로의 것과 지나치게 닮아 있는 그의 박동. 잠시 자리를 비웠던 대화는 아르페시스로 인해서 다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정대로 출발할 건가?”
“……가야지.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깊고 복잡한 한숨은 몇 시간 전 전보 마도구에서 보았던 글귀 때문이었다. 그녀가 리퀘나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출발할 생각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황도 광장, 이상 현상, 각지의 대신관들에게 전서구 이동 중, 다수 신관 ‘신탁’ 언급, 신전 비상.」
신탁이라……. 신관 놈들이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가서 확인해야 한다. 과거 그녀의 끝이 신탁 때문이었기에 더더욱, 직접.
사라진 시간에서는 지금의 시기에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다. 정세의 변동에 자극을 받은 신관들이 보다 빨리 꾸민 짓인지, 정말로 신께서 내리는 말씀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전보를 확인한 직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와 내전과 관련한 남부군의 입장과, 동원할 병력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이후 그의 합류 소식을 루그레디안에게만 알렸다. 반군에게 전하는 것은 향후의 움직임을 제한하기에 조금 더 고민을 해 볼 생각이었다.
「어린 사자 합류, 기밀 엄수.」
메퓌단을 죽이지 않고 감금만 해 두었으니 루그레디안 쪽에는 그녀가 다른 식으로 손을 쓰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남부에서 보인 활약을 아는 대다수의 반군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테지만…….
제 야욕을 위해 움직이고 있던 두 공작이 반군을 통해 소식을 접해 듣는 일이 없도록 관리해야지. 그들이 멋대로 방해하지 못하게 손을 쓴 다음에 알려도 충분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페시스가 직접 반군의 내전에 끼어드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닌 것 같아서 머리가 바쁘다.
아르페시스가 내전에 응해 손을 보탤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생긴 오해. 그가 직접 제위에 오를 뜻을 품고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마찰. 그녀의 사후 아르페시스가 어떻게 변했는지 몰랐기에 한 헛수고.
분명 미래를 겪고 돌아왔는데 그녀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에 손에 묻은 핏물과 아르페시스의 손에 묻은 핏물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러던 도중, 그녀는 끝이 흐린 목소리를 듣고 아르페시스의 가슴께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말도 없이 도망치듯 가는 게 아냐. 영지에 연락을 보내 두었으니 전보 마도구가 곧 도착할 거야. 그걸로 연락해.”
“……알겠다.”
아르페시스는 읽히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얼굴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의 눈동자는 다시 녹안 앞에 멈추었고, 점차 불만이 서리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스치고 지나가자 에스메랄다는 순응하듯 뺨을 내어 주었다.
“……또 나를 홀리는군.”
“뭐?”
“내가 무얼 하든 다 용납할 것처럼… 마치 내가 특별한 것처럼… 이렇게 뺨도, 품도, 전부 내어 주지 않나.”
어떻게 반응할 여유도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스메랄다는 그의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하…….”
또… 그녀를 마주 본 채 꽉 껴안은 아르페시스가 머리카락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고작 그 행동 하나로 아르페시스의 열기가 짙어졌다. 흩어지는 숨소리가 그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려 냈다.
“저, 저기 지금은…….”
응하기엔 곤란한 상황이라 몸을 빼내려 하자 강한 힘이 그녀의 허리를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무작정 덤벼들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다.”
그렇게 속삭이면서도 그의 손길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더한 것은 바라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그러니까…….”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기며 거슬러 올라온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대를 느끼게 해 줘.”
분명 그가 도중에 삼킨 말이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물어보기도 전에 애절한 떨림을 담은 그의 입술이 에스메랄다의 입술과 살짝 맞닿았으니까.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간청에 에스메랄다는 질문을 삼켰고, 아르페시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제 욕심껏 그녀를 집어삼켰다. 맞물린 입술은 서로를 느끼며 천천히 벌어졌고, 그 틈새로 오가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접촉 이상이었다.
서로의 혀가 서로를 쫓으며 얽혀들었고, 서로의 타액이 섞이자 머리가 몽롱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을 흩뿌렸다. 그 위로 얹어진 숨결은 에스메랄다의 것인지, 아르페시스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켜 들며 점점 거칠어지기만 했다.
하체에서부터 시작된 열기와 오싹함으로 인해 에스메랄다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조이자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맞물린 입술 안에서 생겨난 소리는 낮은 비음이 되어 아르페시스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손은 계속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덮은 채 미동도 없었다. 틈 하나 없이 서로를 연결하는 입술 때문에 숨이 부족해진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틀자 아르페시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녀를 놔주었다.
대신 뒤로 몸을 물리려는 에스메랄다를 쫓아가 목덜미를 콱, 깨물었을 뿐이다. 따끔한 통증은 물린 부위로부터 퍼져 나가는 열기에 가려졌다. 에스메랄다의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고,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쫓아왔다. 결과적으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위에 둔 채 침대에 넘어졌다.
넘어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아르페시스의 허리에는 다리를, 목에는 팔을 감았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알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거친 숨을 헐떡인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살갗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는 심장 박동을 듣는 사람처럼 그녀의 가슴께에 귀를 기댄 채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더는, 더는 하지 않을 테니까… 잠시만 이대로…….”
에스메랄다는 관저 내를 뜀박질한 것처럼 격해진 숨을 고르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대신 아르페시스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아래로 손을 움직였을 뿐이다. 얇은 침의 위에서 커다란 아르페시스가 기대어 숨을 고르는 사이, 에스메랄다의 손이 그의 어깨와 가슴을 지나 복부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르페시스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딱딱한 근육, 뜨거운 체온, 그리고 움찔거리고 있는 성기까지.
에스메랄다의 손은 어느덧 아르페시스의 중심부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숨을 고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아르페시스가 헉, 하고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잠깐… 윽……!”
예민한 곳을 느른하게 쓸어 올리는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아르페시스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뺨과 턱에 촉, 촉 얕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는 등골을 타고 올라가는 전율을 느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도 더는 안 되겠는지, 다급하게 에스메랄다에게서 떨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몸을 물린 아르페시스가 다시 베개가 있는 등받이 쪽으로 돌아가자 에스메랄다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열기에 달궈진 얼굴도, 얕은 자극만으로도 몽롱하게 풀려 있는 은회색 눈동자도… 순간 에스메랄다는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의 심정을 실감하며 입술을 핥았다. 그걸 본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가 몇 번이고 했던 질문,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것을 입에 담았다.
“그건, 그, 그건 그러니까… 더는 안… 어어어!”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말을 더듬는 사이 침대 위를 기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르페시스는 몸을 침대 끝에 바짝 붙이며 물러났다. 꼭, 언젠가 본 것만 같은 광경에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묘해졌다.
“또 도망갈 거야?”
“도, 도망이라니! 그, 그건… 내, 내가, 아니, 지, 지금은 상황이…….”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 보이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에 그의 모든 것이 집중되기 시작했으니까. 그녀의 손은 천천히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그의 바지춤에. 그녀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아르페시스의 몸도 움찔거렸다.
“싫어?”
속삭임 같은 질문에 아르페시스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의해 바지 버클이 풀리자 아르페시스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에스메랄다의 손목은 어느새 그에게 잡혀 있었다.
“아, 아니, 이건, 이건 아니다. 아, 아직 우리는, 그러니까… 내가, 가, 가, 감당을 못…….”
“그럼 도망쳐.”
에스메랄다가 다시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무언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에스메랄다의 녹안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도망가지 못했고, 그가 움직이지 않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손은 자유를 되찾았다.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스메랄다의 손이 그의 성기에 닿았다. 그녀는 아주 나른한 움직임으로 아르페시스의 성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헉……!”
에스메랄다의 손은 너무나도 보드라웠다. 홀로 욕정을 풀어 온 시일은 결코 짧지 않건만, 딱딱하고 거친 그의 손과 에스메랄다의 손은 그 감촉부터가 달랐다.
“에, 에디……!”
아르페시스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그에 에스메랄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르페시스가 쾌감에 몸부림칠 때,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곧 뜨거운 숨결이 그의 성기를 스쳐 지나갔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열기와 감촉으로 인해 아르페시스의 정신은 아득한 곳으로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 조금 전까지 그가 탐닉했던 에스메랄다의 보드라운 입술이 성기에 닿으니 미칠 것 같았다.
“흡……!”
아르페시스로부터 흘러나온 낮은 신음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벌리며 아르페시스의 성기를 머금기에 이르렀다.
낯선 감촉이 다시 한번 아르페시스를 자극했다. 그녀의 입 속에 고인 열기는 너무 뜨거웠다. 그녀의 말캉한 혀가 기둥을 쓸고 지나갈 때면 그의 몸이 전율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아르페시스는 제 중심부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 에스메랄다는 존재 자체가 선정적이었다. 그녀가 제 다리 사이에 앉아, 제 성기를 빨고 있다니!
잔뜩 흐트러진 숨을 채운 아르페시스가 저도 모르게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고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켜 들고, 그녀의 작은 머리가 손 안에 갇혀 버렸다.
“아, 에디……!”
힘이 잔뜩 들어간 허리는 당장에라도 거칠게 움직이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그걸 꾹꾹 눌러 참았음에도, 움찔거린 허리가 얕게 움직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쭙, 하고 빨아들이는 소리가 민감한 부위를 통해 적나라한 자극을 전해 주었다. 오싹한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에스메랄다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움직이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윽……!”
쾌감에 잠식된 아르페시스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강하게 쳐올리며 에스메랄다의 입 속 깊은 곳에 파정했다. 몰려오는 쾌감에 순응한 그의 몸이 움찔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 * *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어도, 대강의 사정을 눈치챘을 에스메랄다가 여전히 그에게 허락을 쥐여 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물론 기대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시 한번 그 순간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쾌락을 맛보았음에도 그의 몸에 가득 찬 열기는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아르페시스는 곁에서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를 두고 오만 가지 망상을 다 하는 중이었다.
마른세수를 벅벅 하느라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의 품에서 잠든 에스메랄다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게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도통 답을 알 수가 없다.
품에 기대어 잠든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는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복잡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그를 쾌락의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입술을 오물거리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눈으로 보게 되는 그녀의 모든 것이 선정적이다. 입에 그의 정액을 머금은 채 흐릿해져 있던 녹안이 자꾸만 떠올랐다. 한 번 더 바란다면, 아니 더한 것을 바란다면 에스메랄다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곤히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가 그의 이런 짐승 같은 면모를 알아주었으면 싶다가도, 평생 감추고 싶기도 했다. 복잡하다.
이어지는 한숨이 깊은 건 그를 괴롭히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곱씹고 있는 생각 중에는 신탁과 관련된 전보를 받은 후 에스메랄다와 나눈 대화에 대한 것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부군 전체를 동원하는 건 과해. 남부의 피해만 야기할 거야.’
‘실테르와 반군, 그리고 반황실 세력 중 일부 가담한 귀족들의 사병으로 내전은 충분해. 남부 귀족들 중 대다수가 손을 보태고 있으니… 병력 차가 심각하지도 않고.’
기억이 없던 그가 전선에서 헛짓거리를 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많은 것을 이룩했다. 내전을 위해 진행된 일의 전반적인 것을 전해 들었을 때, 아르페시스는 깨달았다. 이번에도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불필요했다.
이미 중앙군의 물자 선을 자르기 위한 기반도 닦여 있고, 가장 중요한 식자재는 물론 소모품과 병장기, 약제의 일부도 그녀가 손에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앙군 내에 그녀의 세작이 가득했다.
내전이 시작되면 중앙군의 내부 정보는 손쉽게 유출되겠지. 위치, 규모, 전술과 작전까지, 그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의 손아귀로 흘러들어 올 테니 중앙군은 절대 그녀를 넘을 수 없으리라.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왔기에 보인다. 그가 없어도 에스메랄다는 이길 것이다. 그는 그저 가만히 내전을 관망하다가 계승권을 가진 적통으로서 제위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에스메랄다에게 스스로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었다. 과거의 한때, 분명 그녀에게 가치가 있고 필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게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고 살고자 만든 이유였는데, 지금은 어째서 아닌 것일까?
“아… 지금뿐만은 아니지.”
작은 중얼거림 속에 담긴 것은 자괴감이었다. 지금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그의 필요성은 빛바랜 추억처럼 옛것이 되어 버렸다. 그게 얼마나, 정말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제가 해내지 못했을 생존을 쟁취하신 전하이시니, 저의 존경을 부정하지는 말아 주시길.’
처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보았다. 에스메랄다에게 받아 보았기에 남부군의 인사들을 존경하여 또한 같은 것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존경을 변명 삼아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부탁드리는 이기심을 용서해 주시길 바라 봅니다.’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로 해 주는 사람 역시, 에스메랄다가 처음이었다. 이용과 필요는 달랐다. 적어도 아르페시스에게는 이용하기 위해 자신을 거둔 황제와 필요하기에 도움을 청한 에스메랄다가 달랐다.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사람, 혹은 환경은 인간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성장시킨다.
“내 존재의 이유.”
에스메랄다가 필요로 해 주었기에 아르페시스는 자신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믿을 수 있었다. 친부에게 이용당하는 사생아에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가 자기애나 자존감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에스메랄다 덕분이었다.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열망 하나로 노력하여 발전하였고, 그 노력의 성과로 인해 남부군에게 인정받았다. 그것은 결국 그가 남부군과의 사이에서 쌓아 올린 수없이 많은 유대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결국 아르페시스의 모든 것은 에스메랄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모든 감정과 관계를 에스메랄다에게 배워 타인과 나누어 왔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동정하고, 연민하여, 지키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에스메랄다를 보고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것이 다른 방향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
그녀가 사랑을 고해 주었기에 스스로가 좋아졌다. 그녀가 아름답게 웃으며 불러 주었기에 황제가 준 이름마저 좋아졌다. 결국 지금의 시간에서도 그는 그녀를 통해 자기애와 자존감을 키운 셈이다.
또한 에스메랄다가 리퀘나로 와 주기를 바라며 열심히 했기에 남부군에게 인정받았다. 그것을 통해 또 한 번 남부군과의 유대를 쌓았다.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시간과 다른 게 있다면 페드로의 존재겠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단지 이것뿐이라면 지금 그가 느끼는 비참함이 반 정도는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에게 시작인 동시에 끝이었다.
“내 삶의 이유.”
어린 시절의 아르페시스는 황제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놈의 뜻대로 쉽게 죽어 주지 않겠다는 집념 하나로 죽음을 부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죽기 싫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라는 열망을 품었다. 살아서 하고픈 것이 생겼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감정을 자각했을 때,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녀에게 마음 한번 전해 보고 싶어서, 그녀와의 미래를 간절하게 원했기에 살고 싶었다. 결국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집착만이 남아 있던 인형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든 존재도 에스메랄다였다.
분명 사라진 시간과 다른 사건을 겪고, 다른 감정을 느꼈건만, 그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르페시스의 기반은 에스메랄다로부터 시작되었고, 삶의 목적 역시 그녀에게 귀결되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지금의 시간에서는 그녀에게 사랑받았기에 같은 결론에 도달하다니.
“나도 참…….”
집요하다고 해야 할지, 우습다고 해야 할지, 어떤 시간 위에 있던 그의 삶은 에스메랄다를 통해 가치를 얻고 색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으니 끔찍하다 못해 비참할 수밖에. 그를 존재하게 하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언제나 에스메랄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아르페시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끔찍하군…….”
에스메랄다에게 불필요하다, 그 간단한 전제가 아르페시스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거야? 죽을 거냐고! 아가씨가 당신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녀의 처형식이 끝난 다음 날, 황성의 지하 감옥에서 들었던 디아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디아나는 그를 살리고 싶어서 해 준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내내 아르페시스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앉아 보시니 어떠십니까?’
모든 것이 끝난 후 만났던 테몬 후작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일렁거렸다.
‘때가 오면… 후방 휴식기 부대를 내전에 찬성한 이들로 편성해서 남부에 파견하는 걸로 충분해. 명분은 후방 안정화, 경비 강화… 간접적인 것으로. 우선은 남부군이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백성들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남부군의 명예는 내전으로 더럽혀지면 안 된다고, 그래야 그 후의 선택지들을 마련해 볼 수 있다고.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대한 의사를 분명히 밝힌 이후 그녀는 무언가 망설이거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다음…….’
홀로 생각에 잠긴 채 다음이라는 단어를 곱씹던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그러느냐 물어도 시선을 피하며 침묵하니 미칠 노릇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캐낼 수도 없다. 어리석고 우유부단하다고, 멍청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그녀가 하지 말라는 짓을 하려고 할 때면 심장이 찢어진다.
‘황도에 가야겠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해야 해.’
그래서 그를 뒤로하고 황도로 가겠다는 에스메랄다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하겠다면 하는 것이다. 아르페시스에게는 반항할 자격도, 힘도 없다. 이미 그녀의 뜻에 반했다가 그녀를 잃어 본 전적까지 있는지라 더더욱.
‘거리가 거리인 만큼 도착했을 땐 일이 끝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야에 둬야 대응하기가 편해.’
그럼에도 차마 그녀를 놓을 수가 없어서 꽉 껴안았더니, 그녀는 변명처럼 말했다. 가야 하는 이유, 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아르페시스가 감정에 휘둘려 멍청한 짓을 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감정을 밀어내고 이성을 데려와 필요한 선택을 했다.
남부군을 내전에 동원하자 말할 때도, 그녀는 감정적으로 동요하면서도 결국 그 말을 꺼냈다. 필요한 말이었으니까. 언제나 옳은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아르페시스는 결국 가지 말라는 애원도, 곁에 있어 달라는 청원도 하지 못했다.
“황도라…….”
에스메랄다로 인해서만 느낄 수 있는 충만함과 안정감, 그리고 조금 전에 누려 보았던 쾌락까지. 아르페시스는 그 모든 것이 뒤엉키며 생겨난 집착을 직면했다.
“에디…….”
품에서 움, 하고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가득 채운다. 이렇게 그녀를 느끼고 있노라면 속에서 쉴 새 없이 꿈틀거리던 것이 침묵한다. 모든 것이 더는 찰 수 없을 만큼 꽉 찬 것 같은 충만함이 있는 이 거대한 세상을 또 잃을 수는 없다. 그녀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여 쉽게 놓을 줄 알고.
“차라리…….”
어딘가에 가둬 둘 수만 있다면 잃을 걱정은 하지 않을 텐데. 언제 어디서든 시야에 두면 이전처럼 허무하게 잃는 일은 없을 텐데.
아르페시스는 음습한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잠든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던 그는 조용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청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잠에 빠져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 *
시야를 가리던 복수심이 사라졌음에도 에스메랄다의 악몽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수와 악의, 화마가 창궐하는 그 지옥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변해 있었다.
‘마녀를 죽여라!’
‘죽여! 죽여 버려!’
‘와아아아아!’
‘빨리 죽여라!’
‘죽여!’
‘화형! 화형!’
그녀에게 이 비참한 자리를 선물한 정적들을 향한 증오도, 그녀를 비참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백성들을 향한 경멸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대체 너희의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그 아름다운 건 어디다 던져 버리고 그렇게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고. 분명 그녀는 그들이 행복을 영위하도록 발품을 팔아 가며 노력했는데, 왜 그러고 있냐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건 며칠 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의 곁에서 잠을 자던 때에는 악몽이 끝까지 이어지질 않았으니, 리퀘나를 떠난 후에야 가능해졌다. 마차에 올라 여정을 시작한 후 에스메랄다는 악몽을 꾸어도 몸이 경직되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깨어날 뿐.
그리고 그녀는 며칠 전부터 스스로가 시작한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분노와 원망은 여전하나 더 이상은 거기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곁자리에 끼어든 연민과 이해가 그것을 방해했으니까. 이해란 참 모질고 잔인한 것이다. 상대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하면 용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용서가 그리 쉽던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너의 사정이 그러했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당장에 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이해라는 건 참 모질고 잔인한 것이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용서를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들어 있던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던 페르멘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좋은 아침이야, 리디.”
그녀가 악몽을 꾼다는 걸 알게 된 직후, 페르멘은 잘 잤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페르멘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라버니.”
에스메랄다 일행은 이미 중남부 경계선을 넘어 중부에 들어섰다. 일정이 촉박해 야밤에도 마차를 이동시키며 안에서 쪽잠을 자는 식으로 이동해 왔다. 하루빨리 황도에 도착해야 하니 서두른 것이다.
“도련님, 아가씨, 곧 시모체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열흘 차의 해가 뜬 이른 시간, 황도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도시 시모체에 도착을 앞두고 있다. 말도 아니고 마차로 열흘 만에 리퀘나에서 황도로 도착할 예정이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꿀 만큼 빠른 이동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 옆자리에 앉아 있는 페르멘을 잠시 돌아보았다.
‘형한테 듣기는 다 들었어.’
리퀘나에서 출발한 직후, 후방 도시로 이동하는 중에 페르멘이 먼저 말을 걸어왔었다.
‘찬성과 반대를 논하자면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기울기는 해. 난 평생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페르멘은 조금 전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난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네가 뭘 했는지, 뭘 할 건지, 모르는 척할 거야. 전부를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잖아?’
무언가를 선택하면 또한 그만큼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백성보다 그녀를 택해 주는 따듯한 애정을 마주했을 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고, 죄책감도 있지만, 여기 있을 거야.’
그 대화의 끝에서 에스메랄다는 본인의 신념과 의무보다 자신의 곁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페르멘의 의지를 보았다.
‘난 여기 지겹도록 있을 거야. 네가 어디 가라고 해도 안 가.’
형제의 선택에 상처받았던 그녀를 보듬는 또 다른 형제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버린 페르멘 앞에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시리스의 목소리에 곧 나가겠다고 답한 그녀가 페르멘에게 말했다.
“테몬 후작의 호위 기사가 아르페시스에게 개별적인 접선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후방 도시에서 외출했던 이유가 그 기사 때문이야?”
“네, 테몬 후작에게 신변을 인계하기 위해 따로 이송 중이었는데… 상황이 변해서 잠시 만나 보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으흠… 그렇구나. 이걸 말해 준다는 건 따라가도 된다는 거지?”
“……앞으로도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당부이자 경고의 끝에서 페르멘이 씩, 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지.”
짧은 대화를 끝낸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간 남쪽에 닿았지만, 오래지 않아 당장 향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눈앞에 있는 여관은 그녀의 로부오들과 뒷골목 건달들 중 한 명이 운영하는 곳으로, 현재 메퓌단이 여기에 있다. 에스메랄다 일행은 잠시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에스메랄다나 페르멘이 식사를 하거나 목욕을 하는 동안, 기사들은 이동을 위한 식량을 구비하고 말을 쉬게 할 예정이니 고작해야 두어 시간 머물다 떠나게 된다.
여관의 1층에 있는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에스메랄다가 방문을 미리 알려 두었기에 손님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손을 썼으리라. 손님이 먹는 음식에 수면제를 타든, 수면 초를 태우든,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다.
테이블을 닦고 있던 청년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온 에스메랄다를 발견하자마자 행주를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반응을 보이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나단, 넌 올라가서 먼저 쉬렴.”
“에… 네, 다녀오세요!”
함께 마차를 타고 왔던 나단이 두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때마침 청년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과 귀는 닫아 두게.”
“예…….”
에스메랄다는 그런 중년인에게 짧은 말을 남기고 청년이 간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시모체는 유독 뒷골목의 변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어찌나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딴 주머니를 차려고 하는지, 뒷골목의 머리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다. 계속해서 숙청이 이루어진 후에야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겁을 먹고 머리를 조아렸다.
방금 여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중년인은 네 번째 머리가 곁에 끼고 다니던 간부였다. 윗선이 딴짓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에스메랄다 측에 보고했기에 함께 숙청되지 않았다. 그가 밀고의 대가로 바란 것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과 안정적인 직장 정도였다. 해서 아직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로부오들을 대신해 그를 여관의 주인으로 앉혀 둔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중년인을 뒤로하고 청년이 향했던 주방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후였다. 주방장을 비롯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쪽에 있는 이라고는 주방의 안쪽서 쪽문을 열어 둔 채 그녀를 기다리고 청년이 전부였다.
“내 얼굴을 봤으니 당분간은 면밀히 주시하렴.”
“예, 주인님.”
에스메랄다가 청년이 열어 준 문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가자, 그녀보다 먼저 움직인 시리스가 식료품의 일부를 보관하는 곳의 바닥을 특정한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곧 바닥 대리석이 위로 들리며 위에서 본 청년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따라 더 깊은 지하실로 내려가자 마나 구속구를 차고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메퓌단을 만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입을 열기 직전, 테란이 마나 장막을 펼쳐 소리를 가두었다.
“다시 뵙는군요, 아르바논 경.”
이곳까지 안내를 한 여인이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메퓌단의 재갈을 풀어 주었다.
“제가 드린 신뢰가 충분하지 못했던 걸까요?”
나긋한 어조로 말을 하는 동안 지하실에서 메퓌단을 감시하던 여인이 의자를 가져왔다. 에스메랄다는 메퓌단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그리 말씀드렸는데…….”
“……후작님께서는 너무 늦어진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녀가 혼자만의 고뇌에 빠져 미적거렸기에 최선의 선택이 늦어진 건 사실이나, 그걸 루그레디안의 앞에서 인정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 찾아가 황위에 오르라 말하면 황자 전하께서 당장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셨습니까?”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 것인지 메퓌단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통해 당시 후방 도시에서 그가 메퓌단과 나눈 대화의 전부를 숙지했다. 오해의 여지가 충분했기에 거기에 맞춰 각색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일을 적당히 각색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제는 그 각색한 상황을 메퓌단에게 알리고, 이후 돌아간 그가 테몬 후작에게 전달하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에 기다리라는 말씀을 드린 것인데, 제가 그리도 못 미더우셨나요?”
아르페시스는 황위와 먼 거리에서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의 계승권이나 적통성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그간의 행보가 그러했다. 그는 남부군의 일에 전념하며 중앙 정치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아르페시스가 총사령관직에 임명된 후 남부군의 과격한, 혹은 집요한 행동들이 하나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행동의 필요성이 사라졌으니까.
대표적으로 남부군 예산의 증액을 요구하던 행동을 예로 들 수 있다. 분기마다 이루어지는 정기 회의의 결과를 가지고 국정 회의에 참석한 남부군의 행정관들. 그들은 더 이상 증액을 운운하며 중앙 귀족들과 드잡이를 하지 않는다. 아쉬운 소리를 해 가며 적자를 면할 도움이 필요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아르페시스 덕에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증액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각종 자료들, 예를 들면 마수의 수가 증가한 기록,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소모되는 금액의 지출 증빙 자료, 매해 적자를 반복하는 남부군의 재정 장부의 수시 보고가 중단되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분기별 보고서가 황실로 전달될 뿐이다.
즉, 남부군은 최소한의 의무 보고를 제외하면 중앙과의 교류를 포기한 상태다. 그게 남부군이 아르페시스의 사비를 사용하기 때문임을 모르는 중앙 귀족은 없다. 아르페시스의 의도나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앙 귀족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그 행동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남부군이 중앙에 나타나 돈을 더 내놓으라고 드잡이를 하지 않는 것, 그들이 매 분기 중앙 국정 회의에 내딛던 발길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것, 중앙 정치에 내밀던 손을 완전히 거둬가 버렸다는 결과 말이다.
그건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이고, 결국 정치에 관여하거나 끼어들어 무언가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앙 귀족들 중 일부는 그런 행동과 남부군 내의 보수적인 세력의 힘을 믿는다. 그들의 생각은 ‘이제 귀찮을 일이 없겠군.’ 정도.
남부군의 운영 자금 증원은 황제의 인가 없이 불가능하고, 황제는 남부군이 어렵게나마 버텨 내고 있는 지금 절대 증액을 해 주지 않을 터였다. 결국 그들의 입장에선 불가능한 일로 국정 회의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남부군이 무척 번거롭고 귀찮았을 것이다.
또 다른 일부는 보수적인 세력의 힘보다 급진파의 힘을 경계하는 이들로, ‘남부군이 아르페시스를 위시해 중앙을 칠지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황태자의 세력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는, 루그레디안을 위시한 반황실 세력인데……. 그들은 반군과의 일 때문에 남부군의 일에는 최대한 간섭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는 중이다. 그러한 중앙 귀족들의 생각을 제쳐 두고 보이는 것만 논하자면, 아르페시스는 중앙 정치와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직접 황도로 와서 보고를 할 법도 한데 그는 모든 보고 과정을 행정관에게 일임하고 황도를 쳐다보지 않았다. 황도로 걸음하려는 시도를 행한 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가 남부에서 나가면 황제가 곱게 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움직였다가 목줄이 더 졸리는 일만은 피해야겠지.’
그의 걸음 하나에 달린 것이 남부군 수만을 지탱하는 군수 예산이다. 괜한 짓 하다가 또 견제니 뭐니 하며 남부군의 자금에 손을 대면 훗날이 더 힘들어진다. 그의 모든 행보는 중앙과 엮이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자,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아르페시스는 황성에 있던 무렵 외부 활동이 무척 적었다. 황족의 생일이나 약혼 같은 공식 행사, 혹은 건국 기념 연회에만 간간이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으니 고작해야 한 해에 네댓 번이다. 친분을 위해 만나는 귀족은 한 명도 없었고, 교육을 책임지는 스승들과도 사적인 만남은 가지지 않았다. 그는 세력을 형성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계승 전쟁에 발을 들일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 그게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아르페시스는 제위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제위에 오를 기회가 왔으니 함께하자 내밀어진 손을 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루그레디안이 그런 아르페시스의 배경을 모를 리가 없다. 결국 아르페시스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스스로 제위를 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따로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라는 게 에스메랄다가 할 거짓말이었다. 그것을 루그레디안이 얼마나 믿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반드시 가질 생각이다. 가장 완벽한 수단이니까.’
아르페시스가 스스로의 입으로 제위에 앉겠노라 선언한 결과가 존재하니, 루그레디안에겐 따질 만한 명분이 없다.
“다음은 없을 겁니다. 저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과 계속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전하세요.”
메퓌단은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에스메랄다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흘 후 도템에서 풀어 주렴.”
“예, 주인님.”
시모체가 황도를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도시라면 도템은 동쪽에 있는 도시다. 두 곳 모두 황도를 방어하는 마지막 저지선 역할이다. 각기 북쪽과 서쪽에도 같은 역할을 하는 도시가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황도를 기준으로 사방위에 도시가 있다는 의미다. 다가올 훗날 에스메랄다가 넘어야 하는 곳이기도 한 그 4개의 도시는 모두 수성용 성벽이 견고하다.
리퀘나보다는 못하지만 여타의 성보다 해자가 깊은 것은 물론, 성벽에 새겨진 마도구 역시 많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중부에서는 황도를 제외하고 인구수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정착 인구도, 유동 인구도.
굳이 그를 도템에서 풀어 주는 이유였다. 정착 인구나 유동 인구가 적은 지역에선 황제나 황태자에게 주의 대상으로 올라가 있는 메퓌단이 눈에 띌 가능성이 있다. 결국 그의 행적이 황제의 눈에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는 셈이다. 갈대 속의 갈대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법이니까. 이후 황도에 들어가면 굳이 사람들 틈에 숨어 누군가의 눈을 피할 필요가 없어지겠지.
메퓌단은 루그레디안의 심복이다. 그런 그가 황도에서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녀의 욕심과 이기로 망칠 뻔했던 일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한 루그레디안에게 하는 속죄이자, 배려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돌아가는 것 정도는 홀로 하실 수 있겠죠?”
에스메랄다는 메퓌단의 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할 말이 끝나기도 했고, 제대로 된 휴식 없이 계속 마차에 타고 있어 피곤하기도 했으니까.
메퓌단은 전형적인 무인으로 행동이나 말에 들어 있는 속내를 읽는 데 서툴지만 루그레디안은 아니다. 에스메랄다가 하는 허울뿐인 거짓말을 쉽게 믿지는 않아도 이미 결과가 나온 일이다. 명을 어긴 그의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읽는다면 그녀가 아직 우호적인 태도라는 것도 인지할 터, 무작정 따지고 들지도 않겠지.
이번에 루그레디안과 관련해 발생한 일에서 손을 쓸 수 있는 건 모두 썼다. 이제 순번을 넘길 차례다. 에스메랄다는 황도에서 다시 보게 될 루그레디안을 떠올리며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후에 만나면 할 얘기가 꽤나 많을 것이다.
그들을 지하실로 안내했던 청년은 에스메랄다가 완전히 주방 밖으로 나선 후에야 지하실 문을 닫고 내쫓았던 직원들을 데려왔다. 주방이 다시 사람으로 채워진 것은 에스메랄다가 이미 객실에 발을 들인 후였다. 방에서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했더니 곧 다시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에스메랄다는 예정대로 마차에 오르기 전에 시선을 남쪽으로 주었다.
그녀는 리퀘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남쪽을 자주 바라보기 시작했다. 리퀘나를 떠나기 전 함께 있었던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그녀를 찾아와 혼란을 주고 떠나는 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황도로의 출발이 예정되어 있던 날,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는 바람에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의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잠에 취한 몸은 몽롱함에도 그와 맞닿았던 곳의 감각은 선연해 그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분명 밤새 이어진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흐릿했건만, 눈앞에 보이던 그에게서 빛이 나는 것만 같던 그 찰나의 순간. 그 뭉클한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에스메랄다는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잠에서 깬 직후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에스메랄다에게 과분한 보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잠에서 깨자마자 아르페시스에게 모든 신경이 쏠렸고, 그 순간에 붙들어 이름을 찾았어야 할 감정은 기억 속으로 놓쳐 버렸다. 그저 언젠가 다시 같은 감정을 맞이할 때, 그때는, 그 순간에는, 꼭 알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깼나……?’
저가 깨워 놓고 눈치를 보는 게 어찌나 얄밉고 귀엽던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그 미소에 답해 세상의 전부를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던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계속 웃으려 했음에도 웃지 못하는 듯 보였던 그가 기억을 되찾았노라 말한 후 처음으로 보여 준 미소였다.
그는 곧장 그녀의 위로 올라타 깃털같이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 갔다. 보내기 싫다는 듯이 떨어질 줄을 모르는 그를 달래고자 했을 때.
‘곧 다시 만날 거야.’
그날까지 머지않았으니 정말로 오래지 않아 그와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돌아온 것은 에스메랄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래.’
그는 직전의 해사한 미소 대신 기괴한 미소와 함께였다. 은회색 눈동자 속에서 꿈틀거리던 그건 대체 뭘까?
‘그래, 곧 다시 만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아직도 그가 뒤에 덧붙인 말을 곱씹지만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늦지 않을 테니까.’
그는 대체 무엇에 늦었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답을 찾아 헤매 보지만, 답은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숨어 버린 채 나타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마차에 올랐다. 평생 그의 곁에 누워 무거운 현실 따위 모두 잊은 채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의 온기에 녹아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멍청이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 에스메랄다의 곁에는 그녀를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만드는 아르페시스의 온기가 없다. 그러니 계속해서 쉬지 않고 현실을 쫓아가며 생각을 늘어놓고야 마는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자리에 앉자 곧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황도를 향해 움직였다.
* * *
신탁, 그것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신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1천 년이 훌쩍 넘는 역사 속에서 신탁이 내려온 것은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다. 마지막 신탁은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마룡의 출현을 알리며 토벌을 명하는 신의 말씀이었다.
「어둠이 뱉어 낸 사냥꾼은 재앙이 되어 멸망을 몰고 오니, 곧 나의 적이다. 세상이 휘둘리기 전에 눈을 뜨고 걸음을 내디뎌 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늦지 말라.」
그 이전의 신탁은 시처럼 모호하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인 그림처럼 보여 그 의미와 뜻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반면 당시의 신탁은 명확한 언급을 통해 인간을 재촉했다. 재앙, 이제껏 신탁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단어가 내려왔음에도 신전은 미적거렸다.
신을 믿고 신의 말씀을 실천하겠다는 이들이 그렇게 설렁설렁, 일을 처리했기에 지금 대륙이 이 꼴이 된 것이다. 만약 그때, 그 과거의 순간에, 누군가 빠르게 마룡이 웅크리고 있는 알을 발견해 제거했다면 오늘날의 대륙은 평화로웠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기에 찾을 수 없는 답을 뒤로하고 에스메랄다는 멀리 보이는 것을 주시했다.
신탁은 단순히 신관에게 전달되거나, 어느 날 갑자기 뚝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이 창조한 신의 땅 위에 생겨나는 이상 현상, 신탁이 내려오기 전에는 전조가 반드시 나타난다.
때로는 겨울철의 앙상한 나무가 꽃을 피우기도 하며, 분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허공에 쌓이거나 한여름에 연못의 물이 얼어붙기도 한다. 그 현상이 정말 신탁의 전조라면 어떤 방식으로도 없앨 수 없다.
꽃을 피운 겨울의 나무는 무슨 짓을 해도 베어지거나 불타지 않고, 얼어붙은 물은 녹지 않고, 허공에 쌓인 물은 어떠한 것으로도 오염되거나 증발하지 않는다. 인간이 흉내를 낼 수 있으나 절대 같아질 수 없는 현상, 그게 신탁이 내려올 것임을 암시해 오곤 했다. 대부분은 신전 내부에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현상이지만, 두 번은 신전 외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신탁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마녀로 몰았던 가짜 신탁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것이 신관과 황태자가 합작해 꾸민 가짜임을 눈치채자마자 파헤치려 했으나, 그녀보다 상대방의 행동이 빨랐다. 애초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신탁이 가짜라는 의문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에스메랄다를 엮어 처형했으니까.
신탁의 전조가 보인 후 에스메랄다가 지명받고 처형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아흐레였다. 그중 사흘이 그녀의 구속과 처형에 쓰인 것이다.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백성들을 선동해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설마 신의 이름을 이용하다 못해 사칭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일어난 패착이었다.
놈들에게 양심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그녀에게 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하여 타인도 그러할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를 가졌었다.
“또 무슨 짓을 꾸미려나…….”
에스메랄다가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선명한 빛기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건 진짜 신탁의 전조인가, 아니면 또다시 신의 이름을 사칭하려는 악마들의 수작인가. 에스메랄다는 광장에 닿는 대신 옆으로 방향을 트는 마차 안에서 계속 그곳을 주시했다.
저 현상 앞에서 신전이 보인 반응은 그녀의 판단을 방해했다. 신전은 신탁의 전조가 시작된 후 수없이 많은 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에스메랄다는 백작 저와 영지로 도착했다는 파발꾼의 서신을 되짚어 보았다. 고상하게 이리저리 돌려쓰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간략했다. 신의 말씀이 있을 터이니 직접 걸음해 신도로서의 신앙심을 보이고, 신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내용이었다.
신탁이 내려온다는 건 신께서 인간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에렘의 황도에 있는 대신관의 이름으로 각 귀족들에게 보내진 초청장은 정치적인 면모를 가득 담고 있었다.
신의 자애와 거룩함, 그리고 전지전능함을 강조해 신도들이 신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관들이 가지는 권력을 더 단단하게 다지려는 선전 행위였다.
신의 말씀을 신전의 권위와 권력의 도구로 쓰려는 수작이라니. 이래서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 저 이상 현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구조물 설치는 이미 끝났다고 했지?”
페르멘은 어제 자로 알게 된 전보 마도구를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며 물어 왔다.
“네, 광장을 둘러싼 객석이 벌써 마련되었다고 하네요.”
에스메랄다의 대답에 그는 조소와 경멸을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객석이라…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러게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진정으로 저것이 신탁의 전조라면 신관들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신도들에게 소식을 전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신관들이 해 온 악행의 무게가 얼마인데, 그리 미친 짓을 많이 했으면서 그들에게 이로운 신탁이 내려올 것이라 믿을 리가 없지 않나. 아니, 어쩌면… 그들이 한 행동이 정말 악행이 아니라 신을 위한 짓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신관들을 대할 때면 상식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걸 몸소 경험했다. 그래서 가능한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연결해 활로를 열어 두기로 했다. 현실에서 다가온 신탁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해 불안감과 경계심이 들쭉날쭉거렸다. 만약, 정말 만약 진짜 신탁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에스메랄다가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을 때 페르멘이 중얼거렸다.
“신탁… 어쩌면 특유의 모호한 표현을 믿고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래, 어쩌면 모호한 시처럼 알 수 없는 비유가 가득한 신탁이기에 안심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 9백여 년 전, 대륙의 인구 2할을 죽음으로 내몬 역병에 관해 내려온 신탁은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모호했다. 마룡과 관련된 것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던 것이지, 다른 신탁들은 보고 있노라면 알쏭달쏭한 말들뿐이다.
만약 저것이 누군가 꾸민 일이 아니라 진짜라면, 신관들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신탁의 해석은 전적으로 신전의 소관이니 제멋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오만함의 표출이겠지.
에스메랄다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거리를 슬쩍 훑었다. 황도는 권력의 중심지이기에 신관의 수가 본래 많은 편이었다지만, 지금은 정말 눈을 돌리기만 해도 신관이 보일 정도로 많았다.
고작 열흘 정도의 시간 만에 황도에 들어온 신관의 수가 두세 배는 늘어난 것 같다. 그들 모두가 향하는 방향은 광장. 저 중 누구는 신실한 마음으로 가서 기도를 올릴 것이고, 누구는 호기심으로 살펴볼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불안에 떨며 저것이 가짜이기를 간절히 바라겠지.
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에스메랄다는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을 이어 갔다. 그것도 마차가 백작 저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백작 저의 정문을 지난 후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창밖으로 보이는 한 사람에게 꽂혔다. 아직 정오도 되지 못한 이른 시간이건만 황도가 아니라 백작 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마차가 백작 저 앞에 천천히 멈추어 서자 나단과 페르멘이 차례대로 내렸다. 마지막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에스메랄다가 페르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백작 저의 입구 앞에는 페르멘과 똑같이 생겼으나 분명히 다른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형제가 있었다. 오멘은 오래지 않아 에스메랄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페르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뭐야, 이 시간에 어떻게 저택에 있냐?”
잔뜩 들뜬 페르멘의 목소리에 답하는 오멘의 어조는 차분했다.
“오늘 도착한다기에… 연차를 냈지.”
몇 년 만에 듣는 목소리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일렁거리는 입술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오랜만이다!”
페르멘은 반가운 얼굴로 오멘과 포옹을 하며 그간의 그리움을 나누었다. 오멘 역시 흐릿하게 웃으며 자신의 쌍둥이를 마주 안았다.
“그래, 오랜만이야.”
에스메랄다는 그런 쌍둥이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자.”
오멘은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몸을 돌렸고, 페르멘이 에스메랄다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리디, 어서 가자.”
그럼에도 페르멘은 말을 하는 대신 에스메랄다를 데리고 오멘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오멘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그녀의 잘못을 없던 것처럼 용서해 줄 순 없는 거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녀가 했던 짓을 직접 겪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참, 못났다.
* * *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노란 빛기둥은 장대했다. 아니,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려 땅에 창궐한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빛기둥과 가까워질 때마다 느꼈던 벅참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잡은 곳은 동그란 황도의 광장에 마련된 반원 모양의 객석이었다. 신관들이 눈앞에 보이는 저 빛기둥을 귀족들 앞에서 선전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자 만든 그 객석 말이다. 신의 말씀이 내려올지도 모르는 곳을 구경거리처럼 만들어 객석을 세우다니. 에스메랄다는 신관들을 향한 조소를 가면으로 가렸다.
이미 황도에 있는 그녀의 로부오들이 저 이상 현상을 살피고 보고를 올렸다. 저 빛은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모든 것을 넘어 처음 내려앉은 곳을 찾아간다.
십여 명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너비를 가진 빛기둥 속에 손을 넣어도 바닥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어떠한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려서야 할 곳에 도달하는 노란색의 빛기둥.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넣어 지금의 현상이 인간에게 가능한 영역인지 알아보라 했지만, 아직 성공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황도의 광장 중앙에 세워진 분수대에 내리꽂힌 빛기둥을 보고 있노라면,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경외심이 차오른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신탁의 전조라 믿을 법도 한데,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워낙 크게 데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감고 있던 눈을 뜬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시선으로 빛기둥이 내려앉은 곳을 바라보았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3명의 대천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었다. 빛기둥은 정확히 대천사들 사이에 있는 나무를 비추고 있는 상황. 천사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나무는 알 수 없는 창조주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만들어 둔 것이었다.
성서는 대천사들과 주신을 배신한 루시퍼의 외관마저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과 인간을 창조한 주신의 외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저 감히 넘볼 수 없는 전지전능함을 가진 창조주, 그들의 존재를 정성으로 빚어낸 어버이, 그런 표현이 전부였다.
이 때문에 나라마다 주신을 상징하는 형태가 달랐다. 에렘은 나무로, 실테르는 꽃으로, 아비체룬은 그저 주신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다. 대륙의 북부에 있는 데녹은 얼굴을 새기지 않은 동상으로 주신을 섬기고 있었다.
지금의 이상 현상이 나타난 곳은 에렘의 황도뿐만이 아니었다. 리퀘나에서 신탁의 전조에 대해 보고받은 직후, 에렘 각지에서 추가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에렘의 황도 광장뿐만 아니라, 저런 식으로 3명의 대천사가 주신을 의미하는 매개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물이 있는 지역에 모두 빛기둥이 생겨난 상태다.
낮에는 제대로 구분할 수 없지만 밤이 되면 동서남북 각기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다른 빛기둥을 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나라도, 지역도 구분치 않고 동일한 의미를 지닌 상징물 전부가 신탁의 전조를 의미하고 있다. 해서 각기 다른 나라에 머무는 신관들이 가장 가까운 빛기둥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
신전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신탁을 위조할 만한 저력이 있는가? 에스메랄다는 그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을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명 신전은 지금의 상황을 가능케 만들 저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탁을 꾸미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내젓게 된다.
“어느 것이기에…….”
이상한 점은, 신전 내부에 있는 조각상에는 지금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전 외부에 있는 상징물에만 빛기둥이 내리꽂혔다. 외부보다는 내부가 단속하기 좋고, 접근을 차단하기에도 좋다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른 오전에 페르멘과 함께 객석에 도착했던 에스메랄다는 해가 진 늦은 저녁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페르멘은 아직 에스메랄다의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말로 해가 지면 그녀를 데리고 백작 저로 돌아갔다. 이제 막 몸에 살이 붙기 시작한 시기라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말대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사상 전조가 발견된 후 가장 짧은 시기를 거친 신탁은 나흘, 그리고 가장 긴 시기를 거친 신탁은 보름 만에 내려왔다.
황도의 광장에서 빛기둥이 생긴 날로부터 보름이나 지났다. 에스메랄다 일행이 황도에 도착한 날로부터는 나흘이나 지났건만 신탁은 아직이다. 그녀는 루그레디안이나 반황실 세력 귀족들도 만나지 못한 채 계속 광장에 매달려 있는 상태다.
본능적인 경외심을 자극하는 저것마저 신관들이 만들어 낸 거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꿈틀거렸다. 에스메랄다는 백작 저의 침실로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밤이 깊었을 때였다. 자정이 머지않은 시간, 오멘이 귀가했다. 에스메랄다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정문을 지난 마차가 백작 저 입구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늦은 시간까지… 군수 예산에 손을 대려는 황태자의 시도가 점점 심해질 시기다. 자금을 운송하는 행렬을 습격하거나, 물자를 강탈하려는 행동들. 본래대로라면 내년에 그 사건들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반군이 창설된다. 아직은 황제가 막고 있기에 성공한 적은 없다.
에스메랄다의 행동이 변했기에 중앙 정치의 흐름도 조금 변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 성공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후방 물자를 지키는 오멘이 황태자를 물고 늘어지기 위한 재판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가 이토록 늦은 시간까지 황성에서 업무를 본다는 말은, 아직 황태자가 보내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막아서고 있다는 의미다.
에스메랄다는 마차에서 내린 오멘이 백작 저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오멘과 그녀는 현재 무척이나 서먹한 상태였다. 아니, 교류가 없는 상태라고 해야 맞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잘 주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는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페르멘과는 교류를 하는 것 같지만 에스메랄다와는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상황이니 에스메랄다는 오멘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못하고, 에스메랄다가 말을 걸지 않으니 오멘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 일의 반복이었다.
“하…….”
그래, 용서를 구한다고 하여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면 세상에 원망이라는 게 존재할 리 없다. 그녀 역시 백성들을 이해하면서도 용서할 수는 없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마음이 아프고 입 안은 쓰다.
깊은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는 침대에 몸을 누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수마는 쉽게 그녀를 잡아가지 못했다. 끊임없는 상념에 시달리며 뒤척거리던 때, 자정은 진즉에 넘어 고요한 새벽이 되어 버린 시간.
차마 잠들지 못하고 있던 에스메랄다는 갑자기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했다. 지금의 시간에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암살을 시도할 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베개 아래에 숨겨 둔 마도구를 쥐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침대 맡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그제야 짙은 알코올 향이 쏟아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깨웠니? 미안, 미안해.”
혀가 풀릴 만큼 취한 게 분명한 오멘이 그녀에게 뻗어 보던 손을 거두었다.
“잠든 거 보기만 하려고… 이제 오지 않을게…….”
웅얼웅얼, 오멘은 말을 뭉개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랄다는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소매가 붙들린 오멘의 몸이 굳어 버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메랄다가 오멘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안겨 들었다. 눈이 시큰거린다.
허공을 맴돌며 망설이고, 망설인 오멘의 손길은 결국 에스메랄다에게 닿지 않고 아래로 추락했다.
“나… 나 내년에 출정할 거야…….”
오멘에게 매달려 있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년은 1439년. 황제가 5년에 한 번 중앙군에서 1천의 기사를 파병하는 해다. 오멘이 지금 언급하는 건 분명 그 출정에 대한 것이다. 파병되는 중앙군을 지휘하기 위해 필요한 건 근무 연차였다. 중앙군 혹은 중앙군의 상급 기관인 황실 기사단에서 3년 이상. 황제를 위한 군에 적을 올린 경력이 있어야 지휘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구조였다.
과거에는 페드로가 중앙군을 통솔할 자격이 있는 황실 기사단에서 그 권한을 준비 중이었는데 사임해 버렸다. 그때 테노리엘을 비롯한 반황실 세력은 지휘권자로 자원한 중립 귀족에게 1천 병력을 맡겨서 남부로 보냈다.
당시 아레스는 중앙군이 아닌 황성 재무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지원 자격이 없었다. 그가 하던 일은 군수 예산 편성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었다. 반면 오멘은 군사부 내의 재무 관료다. 그가 하는 일은 재무부에서 배정된 예산이 군사부에 전달되면 그 자금으로 중앙에서 물자를 구매 및 관리,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편성된 군수 예산을 빼돌리려는 황태자와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업무였고, 군의 지휘권에 손을 댈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년이 되던 해 바로 관료 시험을 통과했으니 이미 근무 연차 조건까지 만족된 상태다. 결국 과거에 놓쳤던 그 1천의 병력이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테노리엘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유체브 자작님이 내년부터 재무부 책임자로 임명되시는데… 이제 군사부 재무 관료로 들어온 우리 쪽 기사들도 많아서…….”
에스메랄다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오멘이 이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테노리엘의 봉신인 유체브에게 후방 물자를 맡기고 후출정하겠다고, 오멘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에스메랄다가 영지에 똬리를 튼 채 몸집을 불리는 동안, 중앙의 반황실 세력은 중앙 자금을 움켜쥐는 성과를 냈다. 근무 연차도 채웠으니 지원 자격은 충분하고, 군의 인사권 중 파병에 관련된 것은 반황실 세력이 꽉 쥐고 있기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휘관의 자격 심사 위원들이 모두 반황실 세력의 봉신들이니까.
“자원했어…….”
그의 한숨에 담긴 향은 짙고 쓰라렸다. 에스메랄다는 오멘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못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멘은 그녀에게 더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물러난 것뿐이었다. 그게 심장을 아프게 만든다.
“원래부터 네 옆에 없던 사람처럼… 그렇게… 그런데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안, 깨워서 미안해… 이젠…….”
“잘, 다녀오세요…….”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한때 오멘에게 했던 인사를 다시 읊조렸다.
울지 말자. 다 알고서 오기로 했던 것 아닌가. 같은 길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하지 않았나. 이런 사람이라서, 이런 가족들이라 사랑했던 것인데, 분노와 설움에 취해 미워하려고 노력했음에도 그녀는 아직 가족들을 사랑한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들은 제 손으로 사지를 찾아갈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에스메랄다를 아프게 만든다 해도, 그게 그들에게는 옳은 길이니까.
결국 에스메랄다는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돌아오라고,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오라고,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던 약속을 다시 바라 본다. 어떻게 해도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보내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가득 해서 보내자. 페드로에게 이 짧은 말조차 하지 않고 보낸 후 그녀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하지 않고 보내는 것보다 하고 보내는 것이 덜 아프다고.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고… 너무 무리하지도 마시고… 그리고…….”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에스메랄다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오멘의 옷자락에 묻으며 흐느낌을 삼켰다.
“안 가려고…….”
그녀가 삼킨 흐느낌은 오멘이 대신 꺼내 주었다. 그는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에스메랄다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과 스스로가 납득하기 위한 변명을 읊었다.
“안 가려고도 해 봤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
에스메랄다는 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그저 안겨 있을 뿐이었다.
“소중하다고… 가족을 사랑한다고 해서 가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누군가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계속 그렇게 한 명씩 사라지면 어느 순간 그건 열 명, 다시 백 명이 되어 기어이 모두가 되어 버린다. 테노리엘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건이 되는 이들 모두가 전선으로 향해 왔다.
가문에서 여아가 잘 태어나지 않아 그렇지, 에스메랄다의 대고모는 전선에 섰고 마흔을 넘긴 나이에 내륙으로 돌아와 관직에 나섰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작고했기에 만나 본 적은 없으나, 에스메랄다는 부친에게서 전해 들은 대고모를 참 많이도 존경했다.
그녀 역시 몸이 무위를 허락했다면 갔을 것이다. 한때 분명 바란 일이기도 했다. 그건 단순히 명예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직접 나서는 그들을 본 누군가도 함께해 주기를 바라며, 칼자루를 쥐고 먼저 뛰어든 것이다.
첸이 앙그리트 남작이던 시절 매해 적지만 계속 사병을 자원병으로 보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며, 버려선 안 되는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는 노력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는데, 그 노력의 결과 마수가 점점 늘어나서 전선은 힘들어지는 와중에 백성들에게 맞아 죽기까지 했으니…….
에스메랄다는 한마디로 그 선택이 쓸모없노라 매도하고 부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오멘은 계속 그것을 짊어지고 있다. 소중한 가족을 등지더라도, 사랑하는 누이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해야 하는 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굳건히.
진심을 말하자면, 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야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 준비가 되었는데 어떻게 쉽게 보내겠나. 하지만 보내야 함을 안다.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무게임을 이제는 다시 인정했으니까. 당장의 성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훗날의 성과가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후방 도시에서 꽃 한 송이를 주고 떠난 아이가 보여 주었던 그 미소가 온 세상에 만개할 어느 순간을 위해 차근차근해 나가야 하는 것. 누구는 내륙에서 핏물을 흘려 내실을 다지면, 또 다른 누군가는 본래부터 해 왔던 의무를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버려도 되는 게 없어서일까? 현실은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겁다.
에스메랄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안아 주지 못하는 오멘을 대신해 그를 안아 주었다. 술기운에 무너지듯 쓰러진 오멘이 잠들자 그제야, 홀로 흐느껴 본다.
* * *
“그간 쌓인 연차 이번에 다 쓰는 거 아냐?”
“겨울인데 뭐 어때.”
이번 해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멘은 그간 쓰지 않고 남아 있던 연차를 몰아 쓸 생각인 모양이다. 어차피 분기별로 남부군에게 전달되는 물자가 운반되려면 꽤 남았으니, 당장은 보관 창고 경비만 강화하면 된다.
에스메랄다는 오멘이 눈을 감아 주는 선에서 황도의 로부오들을 그 창고에 보내 경비 강화를 도왔다. 그 결과 오멘은 어제부터 황성으로 가는 대신 연차를 내고 광장에 함께 나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손에 따듯한 돌 주머니를 쥐여 주는 오멘에게 살며시 웃어 보였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기만 했던 거야?”
“응, 정오에는 식사하러 잠시 움직이는 정도?”
술에 취해서 잠든 오멘은 다음 날 에스메랄다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참 열심히도 쭈뼛거리기에 에스메랄다는 그저 그에게 달려가 안겼을 뿐이다.
“오늘은 뭐 먹을 거야?”
“리디가 먹고 싶은 거.”
“리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쌍둥이 형제의 사이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건강을 위해 꾸준히 식사를 하고 있지만 원래부터 입이 짧던 그녀였다. 당장 먹고 싶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생각나는 음식은 없었다.
“어제는 근처 식당에서 오리 구이를 먹었는데…….”
“최근에 문을 연 식당이 있는데 거기 꽤 맛있어. 좀 가야 하긴 하는데…….”
“그럼 기각, 최대한 빨리 먹고 올 수 있는 거리가 좋아.”
“고작 마차 타고 20분 정도라고.”
“뭐가 그렇게 멀어? 거의 시가지를 벗어나는 수준인데 가서 먹는 사람이 있어?”
“로체르모 남작이 운영하는 식당이야.”
“아, 그 맛쟁이 아저씨… 그럼 맛은 보장된 셈인데…….”
“너무 멀어요. 다음에 가죠.”
“들었지? 그냥 어제 갔던 데 갈까? 다른 음식 시키면 되잖아.”
“그게 좋겠어요.”
“뭐야, 모처럼 외출이라 여기저기 생각해 뒀는데.”
“외출이라기보다는 감시 업무지.”
“신전 측 움직임은 특별한 게 없던데……. 우리 쪽이 못 잡은 걸 수도 있고. 요즘 인력난이라.”
“요즘만 그러냐? 난 어릴 때 아버지가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어, 하고 말하는 걸 지겹도록 들었는데.”
오멘이 한 명 더해졌을 뿐인데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의 외출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계속 이어지는 대화를 음미하며 여전히 변화가 없는 빛기둥을 훑었다.
“근데 벌써 점심 식단을 정하고 있는 거 좀 웃기지 않아?”
“뭐가? 어차피 먹어야 하는데.”
“음… 정확히는 웃기기보단 이상한 느낌? 왠지… 먹고, 자고, 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가 된 것 같아.”
“넌 백수 맞잖아.”
“야!”
티격태격 오가는 대화 속에서 웃거나 고개를 젓거나, 간간이 한마디 더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정오까지 한 시간가량을 남겨 둔 어느 순간, 문득 사흘 차부터 동상이 있는 분수대에 나오고 있는 두 사람이 에스메랄다의 시야 속에 들어왔다. 에렘 황도에 상주하는 오키만과 에렘 북부에 상주하는 요젤이다.
둘 모두 예순을 넘긴 고령으로 요젤은 부에 조금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에게 가장 많은 재물을 털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겨울에 열리는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황도에 와 있던 것일 터.
반면 오키만은 권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 인물이다. 그는 중앙 귀족, 그중에서도 황태자 측 세력과 탄탄한 우호 관계를 쌓아 왔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를 엮어 낸 가짜 신탁을 주도한 게 바로 눈앞에 있는 오키만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운영하는 신전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고 나흘 만에 신탁이 내려왔다. 그리고 이틀 후 에스메랄다를 체포하기 위한 황실 기사단이 테몬 후작 저를 급습했지. 둘 모두 무릎을 꿇은 채 고요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지만 그들의 속에서 오가고 있을 추잡한 생각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신탁을 기다리는 신관의 소명이니 뭐니 하며 저렇게 기도를 올리는 척 연기하는 것도 꽤나 고역일 것이다. 빛기둥이 나타난 지 20일이나 되었다. 만약 정말 지금의 현상이 그들의 수작으로 준비된 것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시간을 끄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은 없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저 이상 현상을 파헤칠 기회를 주는 셈이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현상이 신을 사칭하고자 하는 악마들의 수작이 아니라, 진실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에스메랄다의 속에 있는 생각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럴수록 입술이 메말랐다. 진짜 신탁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시간을 거슬러 온 그녀는 마녀로 불리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한때 그녀는 마녀가 되고자 다짐했던 적도 있기에 더 불안했다.
“나 배고픈데.”
“아직 정오도 아닌데?”
“아침에…….”
오멘이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며 웅얼거렸다.
“긴장해서 제대로 못 먹었어.”
그 말을 들은 페르멘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을 때, 세상이 진동했다. 그래, 그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세상이, 세상의 공기와 하늘이 진동했다. 페르멘을 따라 웃어야 할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을 사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녀는 빠르게 빛기둥과 객석의 정면에 보이는 분수대를 에워싼 신관들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분수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 요젤과 오키만. 그들은 이미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조금 전 시작된 세상의 진동은 지속되고 있었다. 웅, 웅, 웅, 귓가에서 공기가 울리는 소리가 머리를 멍멍하게 만들 정도였다. 혼자 주고받던 감을 다 뒤로 내던진 에스메랄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신전 내부에 있는 세작들이 건져 온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정말 신의 말씀일까? 하지만 사라진 시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시간을 돌아온 그녀가 신의 뜻을 곡해해 못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변화라면 그럴 법하지만… 도대체 신께서는 왜 하필 그녀를 돌려보낸 것일까?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가지를 뻗었다. 에스메랄다는 쉽사리 확답을 붙일 수 없는 의문을 계속 곱씹었다.
그렇게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한 지 1분, 10분…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가 고요해졌다. 눈앞에 진실이 나타난 그 순간, 에스메랄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신탁이다. 그들의 창조주가 내리는 말이 세상에 창궐하는 순간이었다.
* * *
주신은 눈이 퀭하다 못해 움푹 파일 정도로 야위어 병자 같은 모습이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신에게 가브리엘이 첨언했다.
“어버이시여, 더 미루시면…….”
“나도 알고 있다!”
신은 현재 차원 전체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결정 앞에서 고민하는 중이었다.
“인과율, 인과율, 그놈의 인과율… 내가 왜 그런 것을 만들었을까… 왜 없애지도 못하게 그리도 단단하게 만들었느냔 말이다!”
광인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리는 신의 앞에서, 이번 신탁을 계획하고 실행한 인도자 가브리엘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영웅의 기억을 되찾아 주려다 신력이 부족해서 실패했을 때,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4년 147일. 하지만 그 상태에서 신계는 안배 업무를 추가로 진행했고, 그 결과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5년 283일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약 20여 일 전 인과율이 정상 궤도를 되찾자마자 인도자 가브리엘을 주축으로 신탁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전조를 내린 지 2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신탁이 내려지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신이 계획한 신탁 후보지 중 하나를 확실하게 고르지 못한 탓이다.
후보지는 총 3개였다. 첫 번째는 신탁을 내릴 때 지켜지는 규칙을 모두 적용한 것으로 무척이나 모호한 말들로 이루어진 것. 단점을 찾아보자면, 말을 죽어라 듣지 않는 주신의 종들이 제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장점은 인과율이 비틀리는 기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두 번째는 신탁을 내릴 시 적용하는 규칙을 몇 개 빼서 적당히 직설적인 말로 구성된 내용이다. 과거 마룡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려진 신탁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장점은 신관들이 곡해할 여지를 상당 부분 제외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정상적인 경우보다 인과율이 비틀리는 기간이 서너 배는 길다는 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규칙이고 뭐고 모두 무시한 직설적인 말로 만든 신탁이다. 장점은 곡해의 여지가 전혀 없기에 신관들을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가능하다. 반면 단점은… 아르셀의 인과율이 경계가 아니라 단절을 선택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선택을 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직도… 보류인가?”
때마침 심판장에서 내세를 마친 영혼들을 심판한 미카엘이 돌아왔다. 성인을 새로이 안배한 후 다른 차원에서 내세를 마치고 돌아온 두 영혼이 그의 곁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제 자리로 돌아가던 미카엘은 심판장으로 갈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신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을 내비치었다.
가브리엘은 그런 미카엘을 보며 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미카엘은 정이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과중한 업무에 지쳐 신을 노려볼 때가 많은데, 미카엘은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안달복달, 걱정을 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신을 살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천계 최고의 전사를 연상하겠나.
“알아서 하시겠지.”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자마자 신탁 후보지를 만들고, 준비까지 다 마쳤으니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미카엘과 달리 가브리엘은 이미 신에게서 관심을 거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신탁까지 준비하느라 피곤하다. 신의 건강 따위 알 게 뭐라고. 어차피 신은 물론, 그들 모두가 불멸의 삶인데 건강 따위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 건은… 단절이 거의 확실한 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신을 힐끔거리던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가브리엘은 그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아르셀의 인과율은 구원자의 회귀부터 몇 년 동안 쉴 틈 없이 자극을 받았다. 여기서 신이 인세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직접적인 간섭을 하면 더는 참지 않고 단절을 선택해 버릴 것이다.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는 경계심이 흐려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지, 과거를 모두 잊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이번에… 닫히면 몇 번째지?”
“여덟 번째.”
인과율의 경계와 단절, 그 차이는 명확하다. 경계 상태는 날이 바짝 서서 주변을 경계하는 고양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할퀴거나 물리면 아프긴 하겠지만 건드릴 수는 있다. 하지만 단절은 신계가 인세에 더는 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차단한다. 건드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특별한 영혼을 안배하는 것도, 신탁을 내리는 것도,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청원으로 올라온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희미한 계시를 내리는 등의 모든 간섭이 불가능해진다. 단절 상태에 들어가면 치천사들이 가진 권능 외에는 인세에 개입할 수가 없다. 그 권능을 한번 썼다 하면 치천사가 한 10년은 앓아눕게 되니… 사실상 방법이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아직 열린 곳은 없나?”
“없어.”
“제일 오래된 곳은?”
“13,889년.”
경계와 단절의 기준은 오로지 인과율의 판단에 좌우된다. 지금까지 단절을 택한 인과율은 총 7개. 신계에서 더 이상 간섭을 할 수 없게 된 차원이 7개라는 말이었다. 대개 지속적인 자극을 받은 상태에서 신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았을 경우 인과율은 단절을 택해 왔다.
간섭, 그 방법은 무구하게 많고 그 영향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과율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가장 소극적인 반응은 천계가 직접 관리하는 특별한 영혼들을 안배했을 때. 보통 경계 상태가 1년에서 2년 정도 유지된다.
간섭으로 발생하는 영향의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한 다리를 건넌 간섭이라는 의미였다. 안배를 받아 태어난 인간이 무슨 선택을 하는지는 오로지 그 인간의 몫. 신의 영향이 최소화되는 간섭지가 바로 영혼의 안배다.
시간을 지워 내는 등의 작업도 그리 엄청난 경계를 받지는 않는다. 시간을 되돌아가도 선택을 하는 건 인간들이니까. 물론 신이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드는 셈이기에 안배보다는 많은 경계를 받는다. 대체로 5년 미만. 이 방법을 자주 쓰지 못하는 건 인과율 때문이 아니라 신력 때문이다. 안배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신력이 필요하니까.
반면 신탁은 신이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척 많은 규칙을 적용해 모호하게 만든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 인간의 선택이 덧붙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해도 신이 직접 인세의 선택지를 정해 주는 것이기에 인과율의 경계는 내용에 따라 10년 이상, 20년 미만 정도에서 오간다. 지금 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신탁을 내려 훗날 간섭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느냐, 혹은 단절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 물갈이가 필요한 신관들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세 번째를 선택하느냐.
어느 것을 선택하든 가브리엘로서는 큰 상관이 없다. 이미 신탁과 관련된 업무의 준비까지 끝나 있기에 그의 일이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이 세 번째 신탁을 선택하길 바란다.
일부 신관들의 머릿속에만 남기는 방법은 진즉에 포기했으니 모두에게 공개될 신탁이다. 이왕 할 것, 가브리엘은 호된 훈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신관들이 헛짓을 할 만한 여지를 남겨 놓지 않으니 구원자가 기반을 다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신의 종을 자처하며 신을 기만하는 신관들이 더 이상의 거짓말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 그게 세 번째 신탁이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간섭의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때때로,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을 위해야 하는 선택도 필요한 법이다. 그게 누군가에게 다시금 일어설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으니까.
“가브리엘.”
“예, 어버이시여.”
미카엘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감시과 업무를 보고 있던 가브리엘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구원자가…….”
“어버이의 아이입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천계에서는 업무상의 자연적인 누락이라는 말로 많은 실수를 했다. 해서 주신은 영웅의 타락을 인지한 직후 아르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에스메랄다가 완전한 타락 속에서 돌아온 것도 보았다.
영원의 시간을 걸어온 천계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이적, 그것은 기적이다. 한계를 가지지 않고 신을 넘어서는 기적을 품은 존재가 인간이 아니던가.
“때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저 믿어 주어야 할 때가 있노라…….”
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미 그렇게 몇 개의 차원이 닫혔음에도 신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그 차원은 멸망하는 대신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래…….”
그의 손은 이미 책상 위에 놓인 세 개의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든 상태였다.
* * *
“이놈 이거 왜 이래? 대체 왜 이러냐고!”
모니터를 짤짤 흔들며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영웅을 닦달하고 있는 건 바알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감금하면 되잖아?! 이 멍청한 놈아! 그 정도 용기도 없어? 이 덜떨어진 놈! 아아악!”
시끄러운 바알의 목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아스모데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 어… 어어어! 뭐야, 아르셀 왜 이래!”
바알에 이어 마몬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이렇게 우수수 떨어져 나가? 뭐야? 뭐냐고! 내가 어떻게 모은 수집품인데!”
탐욕에 물든 인간들을 차곡차곡 모아 목록을 만들던 마몬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이름들을 보며 절규했다. 주신이 강수를 두는 바람에 아스모데우스는 피로에 찌든 얼굴을 문질러야만 했다.
“아스모데우스, 너 아르셀 건들고 있지 않았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신탁.”
주신이 작정을 하고 훈계를 했다. 제 욕심을 마음껏 챙기던 신관들에게 직격타가 갔으니 마몬의 수집품이 대거 이탈을 했을 수밖에.
“아…….”
영웅이 타락했을 때 끝을 봤어야 했다. 정말 다 된 밥이었는데 주신이 거기에 재를 뿌리고, 다시 될 것 같다가 또 이렇게 망하고. 희망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포기할까…….”
지금이라도 아르셀에서 손을 떼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호되게 혼이 난 셈이니 신관들 대부분이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더욱이 구원자가 에렘의 내실을 다질 준비는 다 끝내 놓은 상태다.
아스모데우스는 똬리를 튼 채 게으름 부리기 바쁜 마룡을 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영웅은 구원자가 살아 있는 이상 예전처럼 날뛰지 않을 것 같다. 목줄이 너무 단단하게 묶여 있다. 영웅의 목줄을 꽉 쥐고 있는 그 문제의 구원자는 너무 확실하게 정신을 차려 버렸다. 계속 복수심을 자극하려고 악몽을 꾸게 두었음에도 검은 반점이 보이지를 않는다.
“포기…….”
당장 포기를 선언하고 벨제붑에게 마룡을 돌려주려던 아스모데우스가 잠시 움찔거렸다.
‘장하구나, 아들아.’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든 기꺼움을 모를 만큼 아스모데우스는 둔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신의 칭찬을 받았던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 따듯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처음으로 차원 하나를 멸망시켰던 날이었다.
달달달달, 다리를 떨며 마룡과 영웅, 그리고 구원자를 빤히 바라보던 아스모데우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마몬.”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시간이 지워졌을 때 진즉 했어야지. 누가 쉽게 물러날 줄 알고. 실시간으로 줄어들던 수집품 목록에 넋을 빼어 놓고 있던 마몬이 아스모데우스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
지금 상황에선 영웅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댈 수 없다.
“아르셀에 수집품 얼마나 남았어?”
그렇다면 직접적인 것 말고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면 될 것 아닌가? 영웅이 목을 매는 구원자, 그쪽을 무너트리자. 놈이 다시 한번 인간을 나락 속으로 밀어 넣게 만들고 말리라.
“신관이 대부분 다 빠져나가서 절반 정도?”
“목록 좀 보자.”
인과율이 닫혀 버렸지만 괜찮다. 아직 마룡이 건재하다. 파수꾼을 추가로 파견하는 건 안 되겠지만 이미 들어가 있는 놈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구원자가 꾸는 악몽도 그녀의 속에 복수의 씨앗이 있는 한, 평생 계속될 것이다.
본래는 무럭무럭 자라나 그녀를 집어삼켰었지만, 이제는 줄기가 모두 잘려 나가 다시 씨앗 상태로 변해 버렸다. 정신적으로 흔들지는 못해도 괴롭혀 줄 수는 있겠지.
다시 자라게 해서 구원자가 복수심에 목을 매도록 만들거나, 아예 두 번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완전히 절망시키든가. 둘 중 하나다. 그렇게 구원자가 무너져 버리면 그녀에게 꽉 잡혀 있는 영웅은 알아서 날뛰어 주겠지. 그는 아직 타락한 상태니까.
마몬이 보여 준 목록 속에서 원하는 이름을 찾아낸 아스모데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탐욕의 씨앗을 심은 놈들 맞지?”
“당연하지. 전부 인과율이 닫히기 전에 심어 뒀어. 이놈은 지금 엄청 커진 상태인데… 바알이 음욕의 씨앗도 심어 둔 놈일걸?”
아스모데우스는 아직도 영웅을 보며 성을 내고 있는 바알을 돌아본 후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안 보잖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영웅을 전담시키는 게 나아.”
“아르셀 계속하려고? 인과율도 닫혔는데? 이거 닫히면 기존의 것만 쓸 수 있는 거 아냐?”
맞다. 인과율이 닫힌다는 건 더 이상의 추가적인 간섭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건 이미 간섭해 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천계에서 안배한 영혼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마계에서 심어 둔 것들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 새로 넣는 건 못 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반드시 멸망시킬 것이다. 그래서 칭찬받고 말리라!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마룡의 궁둥짝부터 다시 걷어차야 할 것 같다. 아르셀을 멸망시키려면 구원자를 흔들어야 한다.
* * *
「제1장 4절 성국의 이념.
대륙에 창조주의 흔적이 직접적으로 새겨진 것은 역사상 고작 아홉 번에 불과하나, 그때마다 인간의 역사는 크게 격동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를 야기한 것은 아홉 번째 신탁이다. 지금까지 내려온 신탁 중 마지막 것이기도 한 문제의 신탁은 현재 성국에서 신벌이라는 말로 지칭될 정도이다. 방향을 제시해 주기만 하던 이전의 신탁들과 달리 주신께서 직접적으로 종의 자격을 앗아 가셨으니, 신탁보다는 신벌에 가깝다는 것이 성국의 입장이다.
성국은 그 마지막 신탁을 모든 사제들과 신관들에게 주지시키며 창조주께서 언제나 인간을 지켜보고 있음을 강조한다. 많은 신관들은 그 신벌을 교훈 삼아 악마의 현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성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결국 마지막 신탁을 대다수의 신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 주신께서 다시금 신벌을 내리실지 모른다, 라는 간단한 전제가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신관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다.
건국 이래 성국은 탐욕과 이기에 물들어 신도들을 억압하거나 약탈하는 신관들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교수형이라는 무거운 형벌이 줄곧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니 교리를 어기는 신관들이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겁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게 본 저자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성국에 만연한 아홉 번째 신탁이자 마지막 신탁, 그리고 성국이 지칭하는 신벌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종을 사칭하는 악마의 하수인에게서 자격을 박탈한다. 너희는 더 이상 나의 종이 아닐지니, 스스로가 지은 죄의 값을 치러야만 다시금 나의 종을 자처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은 나의 대리인이 판단할 것이다.
보다시피 읽은 이라면 누구든 그 뜻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직설적이다. 신탁보다는 신벌이라는 불리는 데는 판결문, 혹은 선고문처럼 보이는 문장의 영향도 있으리라.
모호한 단어와 비유적 표현이 대부분인 이전의 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 신탁은 대륙의 마지막 성자이자 성국의 초대 교황이었던 제르민의 출현 역시 언급하고 있다.
카 율 제르민은 성국의 초대 교황이자 성국의 개국 이래 유일한 교황으로서, 일생의 전부를 마수와의 전쟁에 바치고 성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신도들을 이끄는 신관들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자격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현재에 이르러 성국의 이념이 되어…….
(후략)」
- 라 주브 테세우스 『성국의 건국과 역사』 中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