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1화 (31/45)

제30장

지워졌으나 존재하는 과거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품에 안긴 채로 숨죽여 울었다. 그로 인해 아레스와 페르멘은 계속 오해를 쌓아 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봐도, 조금 전 에스메랄다는 도망치던 중으로 보이지 않나?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복장을 미루어 볼 때, 어떤 상황이었을지 대충 짐작이 된다. 아레스는 페드로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으며 묘한 불쾌감, 그리고 꽤나 적나라한 적대감을 느꼈다.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천사를 지탱하는 게 그 녀석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그 녀석 앞에서는 웃더라고.’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는 있었다. 그 때문에 아르페시스를 때때로 관찰하기도 했다. 하나뿐인 누이를 채어 갈 사내가 어떤 놈팡이인가 싶어서. 위태로운 위치도, 힘겨울 것이 빤한 미래도 제치고 그저 사람만 살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당장 혼인을 논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금 불퉁한 마음이 있었지만 결사반대를 외칠 생각은 없다, 라는 게 아레스의 결론이었다. 페드로가 워낙 그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인지, 정말 좋은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과거에는 그러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두 사람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보고 나니, 정말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불쾌감이 계속 꿈지럭거렸다.

아레스는 제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체중을 느끼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가벼운 애를 데리고 무슨 짓을…….

“리디, 그 녀석… 아니, 황자 전하께 내가 말씀을 올려 볼까? 두 번 다시 네 근처에 오지 못하게… 아니, 오시지 못하게 막아 줄게. 응?”

페르멘이 조잘거리는 소리에 에스메랄다는 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누이가 우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그들 사이에 나눠야 할 대화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제 잘못이에요…….”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고, 그들 사이가 애매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레스는 누이를 사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르페시스를 옹호하는 에스메랄다를 보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스로도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티는 내지는 못했지만.

“그리 울다 예쁜 눈이 퉁퉁 붓겠다. 이제 그만 눈물을 그쳐 주렴.”

아레스는 제 속내를 갈무리하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참, 정말 참으로 오랜만에 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며 달래 보았다. 어릴 때는 간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한다고 울 때마다 이렇게 안아서 달래 주었는데. 그게 대체 몇 년 전의 일인지 모르겠다.

아레스는 더 구슬프게 울기 시작한 에스메랄다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답답한 상황에서도 제 목에 팔을 감아 오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은 참으로 기꺼웠다. 그는 옆에서 계속 아르페시스를 흉보는 듯, 흉보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페르멘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변한 것 같아. 항상 날이 서 있었는데 요즘엔 다시 내 품에 안겨 온다? 부럽지? 리퀘나에 가서 형이랑 아버지를 봐야겠다고 해서 이번에 같이 가기로 했어. 겨울이라 바쁜 건 알지만 잠시 들러 주면 안 될까? 리디가 형이랑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해. 나도 그렇고. 형에게 해 줘야 할 말이 많아.’

페드로의 사후 백작 성으로 보낸 서신에 답신은 한 통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대뜸 페르멘에게서 서신이 왔었다. 영지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 아는 것은 아니나, 페르멘과 개인적인 연락이 끊겼다는 것에서 에스메랄다가 손을 썼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서신이 왔다는 건 에스메랄다가 막아 놨던 선을 다시 풀어 준 것이겠지. 오래도록 이어진 기다림 속에서 드디어, 제대로 대화를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보아도 될까?

‘단 한 순간도 바란 적 없어요. 그따위 것을 짊어질 생각은 없으니 말이죠.’

서부 대란 당시, 마차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싸늘한 목소리가 이제는 조금 녹아 있을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무거운 마음으로 전선을 비우고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뎌 리퀘나에 온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관저 첨탑에서 오른 퇴각 신호 때문에 심란했지만, 당장 다시 전선으로 출발한다고 해도 사나흘은 꼬박 달려야 한다. 이미 신호가 올라간 상황에서는 나흘 후 도착하는 것이나 닷새 후 도착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현재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최전방에서 돌아와 잠시 재정비를 하는 중이었기에 더더욱,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기 회의도 있으니 결국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은 계획대로 에스메랄다를 만나기로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레스도 쿠베트성에서 에스메랄다의 곁에 서 있던 페드로가 많이 부러웠다. 그래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페드로가 전선에 왔을 때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에스메랄다가 달가워할 일이 아님은 분명했으니까.

아레스는 때때로, 기억 속을 빠져나와 곁으로 찾아오는 페드로를 떠올리며 다시 한숨을 삼켰다. 페드로는 제멋대로 굴다가 이 온기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떠났다. 반면 아레스는 페드로가 만들어 낸 기회를 누리고 있다.

아마 페드로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지금 아레스처럼 에스메랄다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아레스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인내의 끝에서 변화를 만들 사람도 없었겠지.

완벽하지 못하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이라 하지 않나. 아레스는 페드로가 만들어 준 틈의 끝에서 누이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참, 복잡하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에스메랄다가 머무는 방에 도착했고, 아레스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는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놔주지 않았으니까. 아레스는 복잡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메랄다의 옆자리에 몸을 누였다. 반대쪽 자리는 이미 페르멘의 차지였다.

“벌써 눈이 부었잖니.”

말 그대로, 에스메랄다의 눈은 벌써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레스는 그 눈매를 매만져 주며 에스메랄다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거창한 대화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저 멈추지 않는 눈물과 함께 그 말을 반복했고, 아레스도 조금은 뜨거운 눈을 감은 채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레스는 페르멘과 달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백작에게 한 일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가족을 밀어내기만 하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 그것 하나만 보자.

그들 사이에 오가던 말은 에스메랄다가 기절하듯 축 늘어진 후에야 고요한 숨소리로 변했다.

“좋은 꿈을 꾸렴.”

아레스와 페르멘은 작은 숨결을 색, 색, 가쁘게도 내쉬는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며 속삭였다.

“성에 있을 때…….”

에스메랄다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 페르멘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형 유서를 펴 보는 데 2년이 걸리더라. 버리지도 못하고, 열어 보지도 못하는 그걸 매일 품에 넣고 다니는데… 그날은 침대에 앉아서 가만히 그걸 노려보기만 하는 거야.”

아레스는 페르멘이 해 주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눈을 꼭 감았다.

‘위선자…….’

언젠가 쿠베트 후작 성에서 들은 형제의 중얼거림은 가끔 그의 눈에 띄곤 했다.

“있잖아, 형…….”

페르멘이 앙상하게 말라 버린 에스메랄다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사실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거든?”

아레스는 물기가 스며든 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리디를 떠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살았어.”

아레스는 아무런 말 없이 페르멘이 홀로 하는 고해를 들어 주었다.

“내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뒤에 남을 리디는 어떤 심정일지는… 페디 형이 죽은 후에… 리디가 매일 밤마다…….”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을 만큼 슬펐지만 아레스는 눈물을 삼켜 냈다. 페르멘과 달리 그는 울 자격이 없으니까.

“그걸 보고 있는데… 내가 리디한테 한 짓이 얼마나 잔인한 건지 보이는 거야. 나는 널 두고 죽을 거니까 살아 있는 동안만 열심히 사랑할게, 그렇게 말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우리에게 웃어 주던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 아파.”

어리고 어리던 에스메랄다가 웃던 모습. 아레스는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떠나는 순간에 떠올려 볼 에스메랄다의 미소를 꼽아 보았다.

그 속에는 페드로의 유서를 읽은 다음 날 꿈속에서 본 미소도 있었다. 어린 소녀가 아니라 훌쩍 자라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던 에스메랄다는 물기에 젖은 눈을 하고도 활짝 웃어 주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귓가가 아니라 심장 근처를 떠돌곤 했다. 한때는 그것이 누이를 그리워하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페드로의 유서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 본 후에는 어쩌면… 하고 생각했다.

‘두 녀석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한 게 있어. 여전히 내겐 어리기만 한 아우들이라 그런지 힘든 짐을 내 손으로 쥐여 주고 싶지 않더라고. 아버지에게도 굳이 짐을 얹어 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말씀드릴 생각은 없어. 아버지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그 아이를 우선하지 못하실 테니까… 무겁기만 하실 거야. 그렇게 제외를 하고 나니 결국 남는 게 형밖에 없더라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내용이, 이제는 잔혹한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러 온다.

‘한 사람은,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형에게 말하기로 했어. 세상에는 참 많은 기적이 있고, 도무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하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줘. 이유도, 가능성도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 줬으면 해.’

그 유서 속에서 페드로는 이미 자신의 추측을 진실이라 믿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할 명확한 물증이 없음에도, 그건 상관하지 않고 이미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형제가 믿었던 진실이니 아레스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그것을 진실이라 믿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에스메랄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속에 무얼 담고 그리 웃어 주었던 거냐고.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실을 믿으면서도 페르멘이 아니라 백작과 닮은 선택을 했으니까. 그간 있었던 일을 꺼내는 페르멘의 곁에서 아레스는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짐을 어깨에 얹었다.

그렇게 영주 성에서의 에스메랄다가 어떠했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빠르게 눈치챘다. 그들 사이에 누워 있는 에스메랄다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직 여명도 밝지 않은 무척이나 이른 새벽, 아레스는 에스메랄다의 눈물을 깨닫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가 싶어서 깨우려고 했던 것인데, 에스메랄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곁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손이 아레스의 손목을 붙들었으니까. 아레스도, 페르멘도, 움찔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차가운 은회색 눈동자로 그들을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있었다.

“깨우지 말라.”

그 조심스러운 속삭임에는 혹시라도 잠든 이를 깨울까 싶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대체 언제 들어왔지? 아레스는 아르페시스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에 잡히기 전까지는 곁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성년식이 지난 후에는 이런 식으로 인지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은 없었는데…….

“뭐… 어떻게…….”

페르멘이 경악을 담아 중얼거리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자연스럽게 에스메랄다의 곁을 차지했다.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나른한 숨과 함께 에스메랄다의 숨소리가 고르게 펴졌다. 그녀의 눈물 역시 한때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메마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레스는 불현듯 페드로의 유서에 남아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개꿈이라고 생각했어. 녀석이 미친 거라고.’

복잡한 눈으로 에스메랄다를 응시하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그 문구를 선명하게 덧칠하는 기분이었다. 아레스는 자신을 돌아보는 아르페시스와 마주했다.

“그녀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지금 뭐 하자는……!”

“조용히 해.”

페르멘이 뭔가를 따지기도 전에 아레스가 그를 막았다.

‘그 녀석 앞에서는 웃더라고.’

또 한 번, 페드로가 남긴 문구가 떠오르고야 만다. 아레스는 결국 에스메랄다에게서 손을 떼고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기에 자리를 비키기는 하겠지만 해야 할 말은 하고 갈 생각이었다.

“조금 전처럼 에스메랄다가 울며 뛰쳐나오는 일이 또 한 번 생긴다면, 다음은 없을 겁니다.”

아르페시스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형!”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잠자코 있지도 못하겠고. 페르멘은 숨소리로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아레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여기에 둘만 남겨 두자고?”

말도 안 된다고 빽빽거리려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아레스는 그런 페르멘의 귀를 잡아당기며 억지로 침대에서 끌어냈다.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딱, 하고 꿀밤을 때려 주자 페르멘은 억울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레스는 그런 페르멘의 등을 떠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명심하십시오, 테노리엘에는 검이 아주 많습니다.”

경고를 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아르페시스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픽, 웃었다.

“페드로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아레스와 페르멘의 눈썹이 동시에 들썩거렸다. 아르페시스는 복잡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분명 노력을 하고 있는데, 왜 매번 이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를 보는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왜 그렇게 복잡해 보였는지, 아레스는 알지 못했다. 잠시의 어색한 적막 속에서 담담한 표정의 아레스가 먼저 끝을 고했다.

“저희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페르멘은 골이 난 것이 빤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힐끔 돌아본 아르페시스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고맙다.”

아레스는 무어라 답을 하는 대신 한층 더 복잡한 심정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침실을 나온 아레스가 툴툴거리기 시작한 페르멘을 돌아보았다. 이제 사적인 2년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공적인 2년의 이야기도 해야만 한다.

“내륙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문을 노려보던 페르멘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전혀 몰라. 리디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안 했어. 무슨… 문제 있는 거야?”

아레스가 그러한 것처럼, 세작들을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없게 된 건 페르멘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 영주 성에 상주했던 페르멘이 따로 외부 사정을 알기 힘들었겠지.

“……가면서 얘기하자.”

길고 긴, 그리고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 이야기. 아레스는 페르멘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 * *

에스메랄다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끝나지 않는 악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화마에 잡아먹히지 않고 처형대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건, 그가 곁에 있다는 의미였다.

에스메랄다는 눈꺼풀 사이를 파고드는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역시나, 조금 뻑뻑한 눈을 억지로 뜨자 그립고도 미운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곧장 마주쳤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녀를 맞이한 은회색 눈동자는 따스했다. 두 사람은 잠시간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속에 있는 것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대륙력 1444년 카 76일.’

오래전 그녀를 쫓아오며 괴롭히던 의문에 대한 답은 지금에 와서야 나타났다. 분명 백작 성에서 그를 떠보았을 때 기억이 없었다. 그녀가 틀린 판단을 했던 것인가 되짚어 보았지만, 아니다.

아시스, 아르페시스는 그 이름에 굉장히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때때로 진명을 부를 때면 부루퉁함을 숨기지 못했다. 어떨 때는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며 절절매기도 했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는가?’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름을 부르기에.’

밉보일 짓이라도 했나, 라는 말을 웅얼거리기도 했었지. 그는 이름보다 아시스라는 별칭을 선호했고,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상황 자체를 좋아했다. 원하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티를 참 많이 내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이름 앞에서 보이는 반응이 타인에 대한 의문과 경계심이었는데, 기억이 있었을 리 없다. 정말 아르페시스가 무슨 일을 계기로 변했다 해도 눈동자에서 드러난 무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런데 대체 그 일기 같은 것은 뭐였지? 당장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많지 않았다. 과거에 불필요하다고 여겨 덮었던 일이 다시 의문을 물고 왔다.

‘지하 보관소에 좀 들어갔으면 하는구나.’

‘화, 황자 전하의 침실에서… 지금 페드로 도련님이 출입을 금하시고 계신데…….’

당시 페드로는 왜, 아르페시스의 곁을 맴돌았을까? 발견하지 못한 전조가 있었나? 그녀의 녹안에 경계심이 차근차근 들어서자 그걸 보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를 주시하면서도 몇 시간 전 보았던 글귀를 되짚었다.

‘--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속에 처박힌 채 화마 속에서 사라지는 --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력함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순간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성이 돌아온 다음 생각을 해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왜 그 기록은 차례대로 적히지 않고 빈자리를 남겨 놓았나? 그 글귀 속에서 글자가 아니라 부호로 표시된 단어는 아무리 봐도…….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 간결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 아르페시스가 기억을 전부 가진 게 아니라 일부의 단편적인 것들만 가진 상태라면?

그가 부르던 에스메랄다의 별칭이 기재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일기로 보이는 그 기록들이 모두 채워지지 않고 빈자리 사이에 남아 있던 것도 마찬가지.

며칠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엉망이었고, 그 상태에서 생각을 반복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모두 내던지고 과거처럼 간결하고 분명한 방법을 택했다.

“아시스.”

고요함이 속삭임에게 밀려난 직후 그녀는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어설프던 사람답게, 줄곧 마주 보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떨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명확하기 그지없는 답, 과거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있다. 그것이 아직 일부에 불과한지, 아니면 전부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볼 일이다.

“언제부터였어?”

아르페시스는 쉽사리 답을 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자 그도 따라 하듯 자리에 앉았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경계 어린 눈으로 보며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그에게 기억이 있다. 변해 버린 현실에서 이유를 찾았을 아르페시스 앞에 서 있는 게 무서웠고, 그 시절의 기억을 홀로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고, 사랑보다 신뢰를 먼저 쌓았던 그 시기의 관계가 돌아왔음에 기뻤지만, 또한 그에게서 연락이 오길 바라며 기다리기만 했던 1여 년의 시간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녀는 지금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그에게서 멀어지고자 하는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이 뒤집힌 아르페시스가 성급하게 손을 뻗었다. 에스메랄다의 손목은 이미 그에게 붙들려 있었다.

“어제.”

그녀가 떠날까 무서웠던 아르페시스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어제?”

“그대가, 관저로, 들어오던, 순간에, 전부 기억났다.”

선택지가 없어서 말을 하고는 있지만, 감추고자 했던 것을 토설하는 상황이 아닌가? 숨이 뚝뚝 끊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에 스며든 경계심이 그를 계속 자극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행동도 그를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악수에 가까웠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비틀었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파!”

에스메랄다 역시 예민한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이를 앙다문 것과 달리 아르페시스의 손에서는 힘이 빠져나갔다. 그에 곧장 손목을 빼낸 에스메랄다는 침대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발…….”

그런 에스메랄다의 행동에 아르페시스는 울고 싶은 건지, 화를 내고 싶은 건지 모를 심정으로 말했다. 그의 몸은 이미 그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쫓아오는 아르페시스에게서 계속 거리를 벌렸다.

“오지 마.”

그녀의 경고로 인해 아르페시스가 우뚝, 멈춰 선 후에야 기묘한 추격이 끝났다.

어제 기억을 되찾았다면 왜 지난밤 만나자마자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따지지 않았지? 왜 주변에 가득한 문제를 밀어내고 그녀와 함께 침실로 돌아갔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그가 기억을 찾기 전에 쌓인 것이니 그렇다 쳐도, 기억을 찾았다면 달라진 현실을 문제 삼지 않을 리가 없는데?

설마, 눈치채지 못한 건가? 기억이 있다면 사방에 널린 그녀의 흔적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아르페시스를 경계하며 말했다. 대체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에스메랄다!’

시간을 돌아온 후 줄곧 그녀를 쫓아다녔던 환청이 눈앞에서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에스메랄다는 지난밤 자신이 본 글귀로 그가 처형장에 왔었음을 깨달았다. 정말, 왔었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눈물을 흘릴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한때 해 보았으나 무가치하다고 여겨 털어 낸 의문이 그녀의 발치에서부터 기어올랐다. 그녀가 죽은 후, 그 이후는 어찌 되었을까? 아르페시스는 그 처형장에서 함께 죽었나?

황제가 오늘내일하던 시기이니 전권의 대부분을 쥐고 있던 황태자가 남부를 멋대로 벗어난 아르페시스를 살려 두었을 리 없다. 그럼? 그가 거기서 죽었으면? 남부군은 어찌 되었지?

황태자는 남부군에게 무능의 낙인을 찍고 멸시했다. 마수와의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특별하니까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믿던 놈. 그녀가 한층 더 복잡해져 가는 동안 아르페시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잘못했다.”

“뭐?”

그는 에스메랄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옷자락을 붙든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이라곤 지난밤에 빌린 그의 상의가 전부인 에스메랄다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이런 식으로 겁에 질려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대가 하자는 대로 했어야 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내가, 내가 잘못했다.”

아르페시스가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 갈 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몸은 굳어 갔다.

“이번에는 그대가 하라는 대로, 남부군이든 뭐든, 그대가 하라는 건 전부 다 하겠다.”

지금 저 말이, 남부군을 내전에 동원하자던 그녀의 말을 의미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대체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아르페시스가 사과를 하고 있지? 그가 남부군을 동원하지 않은 게 잘못인가? 그래서 사과를 하는 것이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말대로 정말 남부군을 동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 전 보았던 그 이름 모를 아이의 미소가 계속 에스메랄다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북부에 있는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가 털리며 죽어 간 사병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수년 전 모친의 시체를 뜯어 먹어야만 했던 세리나 메리와는 달리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그녀가 쿠그스의 존재를 감추고 치료제를 강탈했기에 죽은 백성들은 대체 몇 명이지? 반군이 죄책감보다 황제에 대한 반감을 더 우선시하게 만들려고 살해한 그들의 가족들은?

그녀의 말 한 번에, 결정 한 번에 반드시 지켜야 할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에서 무더기로 사라졌다. 사라진 시간에서 남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다면 남부의 백성들이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최선을 위해 가족들을 죽음 속에 버려둔 남부군, 그 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향한 조소를 내뱉었다.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시에는 다급해서, 초조해서,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외면했던 게 이제야 눈에 보인다. 그건 절대 골라서는 안 되는 선택지였다. 눈앞에 그것밖에 없다고 해도 절대로 집어 들어서는 안 되는 것.

남부군을 내전에 동원해 황위를 찬탈하면 그 이후에 더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을 터였다. 그 사달이 난 후에 남부군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 아르페시스를 따랐을 리 없다. 그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그들에 의해 무너지는 파국, 그곳으로 가는 선택지였다.

에스메랄다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산에 오르기 위해 남부군이 필요하고, 그들과 함께 가야지 산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부군과 산을 함께 넘는 순간 정상에서 마주한 건 끝없는 절벽이었으리라.

너무, 너무 급했다. 당장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조급함을 감추고 황태자의 즉위에 순응했어야 했는데, 속에 든 것을 감추고 복종을 표하면서라도 다음을 기약하는 선택지를 찾아냈어야만 했는데.

그런 다음 지금처럼 차근차근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키워서 황태자의 패를 옭아맬 방법을 마련했어야 한다.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볼 수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이렇게 멀리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결국 그때 옳았던 건 아르페시스였다. 에스메랄다는 사과를 꺼내고 있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쳐온 문제에 현혹되어서 이 간단한 것을 빨리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과 길을 돌고 돌아 마주하고 있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고, 언제 비난당할지 몰라 위축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선택해 골랐다는 것이 너무 한심하고 끔찍했다. 지난밤 보았던 로웨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다를 테니까. 그녀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이렇게 비참하지 않을 테니까. 에스메랄다가 자괴감에 허덕이며 다시 한번 후회를 곱씹고 있을 때 아르페시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진심이다. 그 버러지들을 버리는 데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제발, 나를 배제하지 마라.”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울고 있었다.

“뭐……?”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계속 쏟아졌다. 버리다니? 배제하다니?

“이전부터 계속 노력 중이었다. 우선, 우선은 급진파 지휘관들과 얘기를 끝내 놓았고… 며칠 전에 후방 도시에서, 거기서 테몬 후작이 보낸 기사를 만난 것도 반군과 접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남부군으로 중남 경계선의 중앙군을 잡아 둘 생각이었다.”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충격이 그녀를 때렸다.

“지금도 남부군을 쓸 수 있을지 확인 중이다. 퇴각 신호가 올라갔으니 부대 사령관 중에 반하는 자가 있다면 곧장 척출하면 되고… 그들의 자리를 급진파 지휘관의 사람들로 채울 생각이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아르페시스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퇴각? 대체 무슨 퇴각?

몇 가지 단어를 곱씹던 에스메랄다가 다급한 발걸음을 뻗어 창가로 다가갔다. 그 때문에 아르페시스는 붙들고 있던 그녀의 옷자락을 놓쳤다. 일렁거리는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지체 없이 커튼을 걷었고 밖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녹색 빛기둥과 환한 햇빛을 함께 보았다.

“뭐…….”

저건 전군 퇴각 신호가 아닌가. 한창 전투에 전념해야 할 겨울에 저게 왜? 대체 언제 발동되었지?

에스메랄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았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바짝 다가와 있던 아르페시스를 발견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내가, 지금, 이상하니까.”

말 그대로, 그의 표정은 정말 이상했다.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은데 웃어지지 않는 표정이라고 할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지 마.”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눈동자 속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저절로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눈에 담으며 파르르 떨리고 있는 손을 뻗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모든 것을 망가트릴 것 같아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게 힘들었다. 어떤 것도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그리하여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만들고 싶다.

그는 그게 너무 무서웠다. 모든 게 자신의 손에 의해 망가지는 게 아니라, 망가트린 이후 만족을 할 스스로가 무서운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이상한 상태의 아르페시스가 거칠게 숨을 고르며 하는 말을 멍청하게 듣고 있었다.

“그대가 일자를 말해 주면 때에 맞춰서 남부군을 이동시키겠다. 북진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에 내부 정리를 마칠 테니,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에스메랄다는 정말,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을 잃고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가 머릿속에서 떠도는 단어들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아르페시스는 처음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이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보였다. 그게, 정말 그게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에스메랄다는 속이 울렁거렸다.

“저거, 뭐야? 왜 이 시기에 퇴각 신호가 올라간 거야?”

이미 아르페시스의 말에서 모든 답이 나왔는데, 에스메랄다는 굳이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 에스메랄다의 질문이 시작되자 아르페시스는 심문을 받는 사람처럼 어렵게, 어렵게 답을 했다.

“그때와 내가 다른 행동을 꽤 많이 해서, 확인을 하려고.”

“무슨……?”

“급진파 외에는 북진 명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이 없어서 확인을 하려고 했다.”

저 녹색 기둥 하나에 수만의 병력이 피해를 감수한 채 퇴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이유로 퇴각 신호를 올렸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르페시스가.

“빨리…….”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해하기도 힘들고, 감당하기도 힘든 일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빨리 철회해!”

하지만 잘게 이어지던 떨림은 몰려오는 다급함으로 인해 시들어 버렸다. 그녀의 언성이 높아진 것과 달리 아르페시스는 침묵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서 예의 그 이상한 표정이 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기 시작한 아르페시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서?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뭐? 에스메랄다는 백치가 된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조금 전과 달리 텅 빈 무표정의 아르페시스였다.

“그, 그야…….”

그에게선 정말 처음 보는 표정이라 에스메랄다는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했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사상자가…….”

“그것들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에스메랄다의 세상이 잠시간 텅 비었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그 간단한 사실까지 함께 사라지는 바람에 숨이 멈췄다. 그러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이후 깨달음을 얻기라도 했는지 얼굴에 천천히 분노를 그렸다.

“설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은회색 눈동자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 그것들을 걱정하는 건가?”

그것들? 에스메랄다의 손끝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에스메랄다를 응시했다.

“뭐?”

“어차피 백성이란 다 똑같은데 대체 왜 그것들을 걱정하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말과, 본 것 같은 표정, 그 끝에 서 있는 건 무려 아르페시스였다. 말이 계속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분위기가 온화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대가 하라는 건 전부 다 하겠다.’

본능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직감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설득이 불가능한 상태, 그녀가 겪어 보았던 그것. 에스메랄다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불가능을 버리고 가능의 활로를 찾았다.

“내…….”

그가 다정하게 녹은 눈으로 에스메랄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하라는 건 전부 하겠다며.”

잠시 거부감을 표하는가 싶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곧 돌아오겠다.”

“어?”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괴이한 현상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다시 한번 굳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밤 그의 온기에 취해 잊고 있던 것이 기억났다. 갑자기 후원에서 그의 침실로 이동했던 때.

에스메랄다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동안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이 툭, 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피로와 함께 불현듯 바닥이 꺼지고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추락감이 느껴졌다. 깨어난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이렇게…….

화마 속에서 사그라졌던 정신이 다시 깨어났을 때, 서커스단이 황도에 가져온 마수를 다시 보았던 그 순간에 느꼈던 질척거리는 것, 이번에는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 이리저리 엉킨 생각의 끝은 어느덧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에 닿아 있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제발, 나를 배제하지 마라.’

에스메랄다는 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버려……?”

그녀의 말이 허공을 맴돌다 사라진 직후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칼라일이 곧 처리할 거다.”

뒤에서부터 그녀를 뒤덮은 온기는 아르페시스의 것이었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너… 방금 그게 뭐야?”

“무엇이?”

“눈앞에서 사라졌잖아.”

“아.”

그는 말을 고르는 사람처럼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 직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뒤에서 앞으로 뻗어지는 손을 발견했다. 아르페시스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들었고,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따라 침대 옆에 놓인 화병을 발견했다. 잠시 파란 안개가 보이는 것 같더니 곧 화병이 파삭, 소리를 내며 사 등분으로 갈라졌다.

“마나를 밖으로 보낸 후 바로 유형화하는 것이다.”

중급 기사부터는 자신의 몸과 닿은 물건에 마나를 유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신체와 닿은 상태여야 한다. 마나가 신체와 떨어져도 유형화 상태를 유지한다면 상급 기사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신체에서 완전히 떨어진 장소에서 마나를 유형화하는 건…….

“이동하는 건… 물건이나 신체를 마나에 녹인다고 할까? 마나에 담는다는 게 더 적절하겠군. 그런 후에 다른 장소에서 마나에 담긴 것을 재구성하면 조금 전처럼 이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뭐… 내 마나가 지배하는 범위 내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말을 하는 동안 거둬진 손은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감은 채 그녀를 잡아당겼다. 목덜미에 따듯한 숨결과 작은 진동이 닿았다. 오늘따라 에스메랄다의 머리가 제 기능을 하기보단 녹슨 경첩처럼 삐걱거리기 바빴다.

“그거…….”

다행히도 아예 멈춘 것은 아닌지라 더듬더듬 질문을 꺼낼 수는 있었다.

“설마 기록에 남은……?”

“아마도.”

마룡이 알을 깨고 나온 직후 남부에 있던 3개 왕국에서 지금의 아르페시스처럼, 신체와 떨어진 곳에서 마나를 자유자재로 유형화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추정하건대, 일부는 자국의 귀족들과 있었던 정쟁 때문에 죽었다.

다른 한 사람은 에렘과 실테르가 주도했던 마룡 토벌전에서 전사했다. 이후 남부의 왕국들이 차근차근 멸망하고 에렘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페르데른 왕국까지 멸망했지.

더 오래전의 역사에서도 몇 번 등장한 적이 있는 그들이 칭하는 단어는 명확했다. 마나로 하늘과 땅을 가르는 존재, 인간을 넘어선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 바로 인외자.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돌려 아르페시스를 보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수줍어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내전은 쉽게 끝날 것이다. 마나가 예전보다 부족하기는 한데… 어렵지는 않겠지.”

그래, 반군의 창설 시기는 물론 지금 내륙의 전황도 많이 달라졌으니 내전에 그녀가 관여되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대체 왜, 아르페시스가 그 내전을 위해 거쳐 간 일들을 언급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자 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내륙에 있는 성문과 성벽을 부수기엔 충분하다. 만약 리퀘나를 건들고자 하면 지금의 마나로는 조금 애를 먹겠지만… 못 할 것도 없지.”

지금의 그는 꼭, 칭찬받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기대감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에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말 중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 너무 많았으니까.

“부숴……? 뭘… 리퀘나가… 뭐?”

곧장 답을 하려던 그가 멈칫거렸다. 그는 경악과 불안이 선명한 에스메랄다의 녹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빨리 철회해!’

‘사상자가…….’

고작 몇 분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아르페시스의 대답을 막았다. 그들이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빛기둥이 청색으로 변했다. 직전 명령을 철회하는 신호였다.

에스메랄다는 거의 생각이 멈춰 버렸지만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하고 바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아 다른 길로 새어 버렸다. 눈앞에 있는 게 무려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에스메랄다였으니까.

그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며 참 많이도 해 본 생각을 또 반복했다. 그녀를 이대로 집어삼켜서 속에 넣어 다니고 싶다고.

에스메랄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에게서 너무나도 쉽게 이성을 앗아 가고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결국 심장에게 이성의 자리를 내어 준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긴 한데, 정확히 무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르페시스는 결국 무엇인지 모를 말을 삼켜 버렸다.

대신 천천히 거리를 좁혀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머금었다. 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어지고, 품에 있는 온기에 그의 모든 것이 얽매였다. 아르페시스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지난밤의 열기를 좇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반응은 한 박자 늦어졌다. 그가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대뜸 입술부터 들이밀 줄은 몰랐으니까!

이런 종류의 육탄 공세는 처음 받아 보는지라 당황스러웠다. 또한 당황으로 생긴 그 짧은 순간에 외발 테이블 위에 올라앉을 거라곤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에스메랄다가 그것을 인지한 건 테이블 위에 앉은 직후,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그는 얇은 옷감 아래에 감춰진 에스메랄다의 둔부를 잡아 바짝 당겨 안았다. 그의 혀가 조금 더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아르페시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에스메랄다가 팔에 힘을 줘 그를 밀어냈다. 그의 온기에 잠식되어 현실을 밀어내기엔 충격적인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난밤에도 그랬듯이 그는 쉽게 물러나는 대신 집요하게 굴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낌새를 눈치챈 그가 더 빨랐다. 허리에서 맴돌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기민하게 움직여 그녀를 막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양손에 뺨을 붙들린 채 갇혀 버렸다.

계속된 에스메랄다의 바동거림에 아르페시스가 불만을 표하듯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리자 그의 숨소리가 변했다. 마치, 기뻐하는 사람의 것처럼. 조금 더 노골적인 입맞춤이 이어진 후에야 아르페시스에게서 자유로워진 에스메랄다가 말로써 분명한 의사 표현을 했다.

“그만, 그만해!”

아르페시스의 몸이 무언가에 걸린 사람처럼 덜그럭거렸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망설임이 담겨 있는 손길은 여전히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손을 내렸다. 뺨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어깨로, 어깨에서부터 팔을 타고 점점 더 아래로. 이윽고 하얀 허벅지에 닿은 손은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것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는 그녀의 옷 속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이었다.

“……왜?”

그러면서 지난밤과 똑같은 반문을 하는 게 아닌가? 에스메랄다는 옷 속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의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떨며 그를 다시 밀어냈다. 아르페시스는 순순히 밀려나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어느새 에스메랄다의 얇은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옷 속에서, 말이다.

“잠시 얘기 좀, 대화부터 해.”

“……지금 하던 것부터 끝내고 해도 될 텐데? 그대도 나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르페시스가 이런 식으로 분명한 의사 표현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행동으로는 표현할지언정 말로써 언급하는 건 피할 때가 더 많았다.

“갑자기 왜 이래, 얘기하는 중이었잖아!”

에스메랄다가 민망한 마음에 그를 밀어내자 아르페시스가 불만을 담은 채 속삭였다.

“나를 부추긴 것은 언제나 그대였으면서.”

그러면서 귓불을 잘근잘근 깨무는 바람에 몸에 흐린 소름이 돋았다. 아르페시스의 손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두를 스칠 때마다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슬금슬금, 가슴 주변을 배회하는 손길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나름 단호하게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갑자기 벌컥 열린 문만 아니었으면 그를 퍽퍽 때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열린 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글거리는 눈을 치켜뜬 페르멘이었다. 그의 곁에는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경직된 아레스가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어깨 너머에서 형제들을 발견하자마자 딸꾹질을 시작했다. 너무 놀라서.

아레스가 뭐라고 말을 하며 페르멘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을 보았으나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또한 같은 이치로, 아레스가 다급히 닫은 문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마나 장막으로 소리를 차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보다는 성에 있어서 조금 더 개방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형제들에게 그 과정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스스럼없이 하는 정도지, 관음이나 노출에 흥분하는 성벽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르페시스의 체격에 그녀가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자세가… 다리가…….

“에스메랄다.”

갑자기 문밖에서 아레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또 언제 마나 장막을 거둔 것인지…….

“아버지께서 오찬을 함께하자시더구나.”

조찬이 아니라 오찬? 그 말을 들은 후에야 해가 중천에 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곧, 나갈게요.”

에스메랄다는 당황한 상태에서도 가까스로 답을 내어 놓았다.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목소리였다. 문밖에서 그 작은 답을 들은 아레스가 말했다.

“지금 당장… 아니, 최대한 서둘러 준비하렴. 여기서 기다릴 테니.”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딸꾹질이 멈추질 않았다.

* * *

지난밤 아르페시스를 만난 이후부터 갑자기 많은 일이 쏟아진 탓일까? 머리가 아팠다.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사실부터 당장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아르페시스가 직접 기억이 있다 시인했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그에게서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렸던 1여 년의 시간이 아른거렸다.

이럴 땐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곱씹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당장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가족들을 만나는 건 그녀가 바랐던 일이기도 했으니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준비를 하는 동안 급한 대로 생각을 찬찬히 정리했다. 이상한 위화감이 계속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르페시스가 보인 낯선 행동 때문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내내 가슴께를 몇 번이나 짓눌렀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그대가 하라는 대로, 남부군이든 뭐든, 그대가 하라는 건 전부 다 하겠다.’

‘그 버러지들을 버리는 데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

‘이전부터 계속 노력 중이었다. 우선, 우선은 급진파 지휘관들과 얘기를 끝내 놓았고…….’

‘그대가 일자를 말해 주면 때에 맞춰서 남부군을 이동시키겠다.’

후방 도시 인근에서 만났던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과 조금 전의 말이 엇갈렸다. 그가 내전을 거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그 방법을 고른 이상 황제와 똑같은 인사가 되는 것뿐이다. 그럴듯한 말로 선택을 포장하지 말라.’

‘나는 제위에 전혀 관심이 없…….’

제위에 관심이 없다며? 그런데 급진파 지휘관들과 무슨 노력을 했다는 건가?

에스메랄다의 눈앞에 웃고자 노력하는데 차마 웃지 못하던 아르페시스의 기괴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설마… 지금 그것들을 걱정하는 건가?’

텅 비었던 표정도, 분노가 서리던 표정도…….

‘어차피 백성이란 다 똑같은데 대체 왜 그것들을 걱정하지?’

아르페시스가 백성들에게 보인 건 지독한 혐오감이었다. 그 위에 깔린 것은 분노와 경멸. 에스메랄다가 시간을 되돌아온 직후에 가지고 있던 것과 지독하리만치 똑같았다. 문제는 에스메랄다가 아는 아르페시스는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언제…….”

그러니, 그녀가 모르는 일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긴 것이겠지. 에스메랄다가 모르는 무언가. 과거에 생각을 해 봤던 대로, 시간을 돌아온 것이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된다면…….

에스메랄다가 죽은 이후, 아르페시스가 죽기 이전, 그 사이의 사건이 분명 더 있는 것이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한다. 과거 분명히 해결했던 예외적인 변수가 튀어나온 일이니, 상대측에서 이후에 기억을 되찾은 사람은 없는지도 확인해야겠지.

‘내륙에 있는 성문과 성벽을 부수기엔 충분하다. 만약 리퀘나를 건들고자 하면 조금 애를 먹겠지만… 못 할 것도 없지.’

에스메랄다의 손끝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이미 흔적을 찾았으니까. 등골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제발, 나를 배제하지 마라.’

그녀가 아는 사실로 연결이 되지 않는 말이 너무 많았다.

“내가 누굴 버렸다는 거야…….”

버린 건 그였으면서. 에스메랄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아르페시스는 아레스가 문밖에 버티고 선 후 돌아갔다. 정확히는, 아레스가 그를 쫓아낸 것에 가깝다. ‘설마, 환복을 하는 동안에도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아르페시스에게 나가라는 재촉을 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떠나기 전까지 가기 싫다는 티를 내며 제 손을 지분거리던 아르페시스를 떠올렸다. 우선은 가족들부터, 그들과의 대화가 끝나면 그다.

페드로가 남기고 간 약제를 입에 넣고 침실을 나서자, 계속 밖에서 기다리던 형제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 만이에요, 오라버니.”

가족에게 말을 거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삼키며 아레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네.”

방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준 아레스는 백작이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가족끼리 만나는 것이라 별실에 자리를 마련했다.”

할 얘기도 있으니 방문객이나 관저에 머무는 기사들이 내려와 식사를 하는 공용 식당보다 격리된 별실이 편하리라.

“음식은 정찬으로 준비했고.”

“네…….”

그 별실에서 오가게 될 대화를 사용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신경 쓴 것이다.

별다른 대화 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별실로 들어가자 홀로 앉아 있던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백작에게서 전권을 빼앗은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리디.”

먼저 입을 연 건 백작이었다. 밤을 지새우기라도 했는지 그의 얼굴은 조금 푸석했다. 에스메랄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예, 오랜만에 뵈어요. 아버지.”

에스메랄다는 백작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아레스와 페르멘이 각각 백작과 에스메랄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식으로 가족들과 둘러앉아 하는 식사 자리가 대체 몇 년 만인지, 이 자리에 없는 오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중앙, 그것도 황성에 심어 둔 로부오들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그도 오래지 않아 이곳에 오리라.

“혹여나 싶어 언급한다만.”

식탁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말을 꺼낸 백작에게로 향했다.

“페드로 녀석이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 주었을 뿐이다. 내가 조사한 것은 없다.”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일에 대해 따로 뒷조사 같은 것을 해서 알아낸 게 아니니,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어제 그와 함께 있던 것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기에 대강 짐작은 했다.

에스메랄다의 눈썹은 살짝 일그러졌고 억지로 끌어 올린 입매는 슬프기만 했다. 마지막 대화는 거의 몇 년 전의 일이다.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모친의 명예를 모욕하려 하고, 그가 가진 힘을 빼앗았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끝에서 다시 만난 백작은 에스메랄다가 괜한 일로 고민을 하진 않을까, 그것부터 걱정한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놓이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녀가 말을 꺼낸 건 테이블을 음식으로 채운 사용인들이 별실을 나선 후였다.

“화를…….”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담겼지만 그녀의 눈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아레스에게 안겨 펑펑 울었기 때문인지, 백작 앞에서는 울 면목이 없을 만큼 많은 짓을 했기 때문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화가 나진 않으세요?”

백작은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별다른 고민도 없이 답했다.

“어찌 아니겠느냐, 나도 사람인 것을.”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깨물며 자책했다.

“하나 이미 끝난 일로 화를 내고 싶지는 않다. 몇 년 만에 만난 너와 싸우느라 값진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고.”

에스메랄다는 차마 백작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무엇보다,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야위어 버린 자식에게 화를 낼 자신이 없다.”

페르멘이 손끝을 움찔거렸고 에스메랄다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아비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게 조금이라도 신경 쓰인다면, 그 나쁜 버릇은 관두고 식사부터 하자.”

입 안을 깨무는 버릇을 지적하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울지는 못했다.

백작이 식기를 들자 식사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에스메랄다는 누구보다 빨리 식사가 끝났지만 식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배가 부름에도 눈치를 보느라 깨작거리고 있으니 백작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억지로 먹…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지, 왜 그리 꾸물거려.”

그제야 식기를 내려놓은 에스메랄다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입이 짧구나.”

타박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을 읽지 못할 에스메랄다가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의 말을 받은 건 그녀가 아니라 아레스였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이 짧다고 하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요. 에스메랄다가 어릴 때 조금이라도 더 먹이겠다고 음식을 들고 졸졸 쫓아다녔죠.”

“아, 그때 누가 더 많이 먹이느냐로 내기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맞지? 거의 페디 형이 이겼잖아.”

“나도 가끔은 이겼어. 너희가 매일 졌고.”

“누이를 내깃거리로 둔 것이 무어 자랑스럽다고 떠들어.”

“에이, 리디를 위해서였다고요.”

“너희가 그리 품에 끼고 다니는 바람에 리디의 걸음마가 늦었던 건 생각도 않느냐? 위한다는 말을 변명으로 내세우지 말라는데도.”

어린 시절, 에스메랄다는 세 살이 넘은 후에야 혼자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형제들과 부친이 매일 그녀를 안고 돌아다닌 덕분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혼자 걸을 일도 없었다. 한두 걸음 내디딘 후 넘어지면 형제들이 다시 안아서 움직이는 일의 반복이었지.

“아버지도 리디만 보면 안기 바쁘셨잖아요. 제가 안고 있다가 빼앗긴 것만 해도 엄청 많은데.”

백작은 무안한 듯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주제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하는 생각과 함께 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시간을 돌아온 직후 백작 저의 식당에 모여 앉아 있던 가족들을 보았다. 그때 화풀이를 하지 말고 달려가 안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 그녀도 함께하고 있을 텐데.

오가는 건 정말 누군가 보면 시시껄렁한 대화라고 코웃음을 칠 만한 것들이 전부였다. 지루한 옛날얘기, 큰 의미 없는 과거의 순간을 가져오는 말들, 그리고 언제나 입에 올릴 수 있는 평범한 단어들. 그 모든 것들이 참, 사무치게 아파서 목이 잠겼다.

스스로가 직접 걷어찬 것이 무엇인지 절절하게 실감하고야 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사람에게서 같은 것을 빼앗았다. 에스메랄다는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자신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얘기가 끝난 건 모두가 식사를 마친 후였다. 하지만 문제의 그 대화는 에스메랄다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다과가 마련되자 백작이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다.

“네가 괜한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두마.”

찻잔을 들어 올리던 에스메랄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가 찻잔을 도로 내려놓자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 한들, 내가 내전에 동의하고 손을 거드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게다. 아직 내게 방법이 있었으면 이리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피로를 가득 담은 목소리는 무거웠다.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너와 황제가 돌아가며 나를 배제하는 통에 내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백작은 손을 뻗어 찻잔을 집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정말, 오로지 에스메랄다를 위한 것이었다.

“그저 그뿐인 것이니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내자.”

반군의 사람이 아니라 딸을 만나러 온 것일 뿐이니,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자고. 백작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 후 말을 하는 사람이라곤 아레스와 페르멘 뿐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그간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고, 에스메랄다는 그들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백작이 산책을 권한 건 차가 다 식은 후의 일이었다.

“산책이나 나가자꾸나.”

아레스와 페르멘이 먼저 일어났고, 에스메랄다는 백작과 함께 별실을 나섰다. 그녀는 직접 자신의 외투를 여며 주는 백작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보인 다정함 앞에서 꺼내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던 그 한마디를 꺼내 본다.

“잘못했어요.”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속삭이자 머리 위에서 얕은 한숨이 지나갔다. 참 별것 아닌 말인데 그것 하나로도 충분했다. 백작은 에스메랄다를 꽉 안아 주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다. 오래 담고 있지 말거라.”

에스메랄다는 붉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감추며 백작의 품에 안겼다. 지금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내전은 멈출 수 없다.

이미 비상 물자 구비가 완료된 시점이다. 에스메랄다가 물자에 손을 대 방해해도, 반군은 일을 강행할 것이다. 그들과 에스메랄다는 어느 한쪽이 충성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또한 그들은 불리하다 하여 포기할 만큼 무른 각오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막을 수 없는 일을 막으려다 반군의 패배를 야기하게 될 수도 있다. 넘칠 만큼 많은 피를 흘리고, 또 무의미한 피를 무더기로 쏟아 내는 것에서 끝나 버린다는 말이다. 그것만은 정말 손대선 안 될 선택지였다. 어떤 피가 흘려 만든 기회인데 그녀의 죄책감 때문에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녀도, 내전도, 희생도, 멈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일이 끝나도 계속 전선에 있을 생각이다.”

백작은 너무 말라서 두툼한 외투 아래에서도 뼈마디가 만져지는 에스메랄다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는 내륙에서 무언가를 할 힘이 없다. 내전의 결과가 어떠하든 공신들 위주로 새로운 권력 구도가 개편될 때 거기에 아득바득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이건 내 선택이다. 그러니 엄한 자책 말거라.”

그가 내륙에 없기에 죽는 이들도 있겠지만, 전선에 있기에 살아남는 이들도 있을 터. 백작은 끝끝내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내팽개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만약 후에 부고 소식이 전해지더라도, 그의 힘을 빼앗아 황제가 그를 전선으로 쫓아내는 데 일조한 에스메랄다가 덜 힘들기를 바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저 종종 얼굴이나 보러 와 주렴. 건강에도 조금 더 유의하고. 너무… 너무 야위었구나.”

다정한 말에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네 오라비들이 기다리겠다. 어서 가자.”

그래, 그녀의 형제들도, 지금 앞에 서 있는 부친도, 모두가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 더 늦었다 해도, 그들은 한 결같이 그녀를 기다렸을 것이라고.

“네…….”

그래서 그들이 더는 기다리지 않게 백작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와 함께 관저의 정원으로 향하는 동안 겨울의 메마른 잔디 위로 느린 걸음이 지나갔다. 느리고 느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걸음이었다. 결코 같은 길 위에 설 수 없음에도 지금은 함께 있지 않나. 그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자.

* * *

에스메랄다는 쭈뼛거리면서도 만찬까지 함께 먹은 후에야 가족들과 헤어졌다. 내일은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었기에 아레스와 백작 모두 저녁에는 회의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고 방으로 돌아갔다.

정기 회의에 오는 사령관과 부관들은 물론 호위 기사까지, 사령관저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그곳의 2층, 중앙 계단의 좌측에는 주로 방문객에게 배정되는 객실이 있다.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은 아레스와 백작을 보낸 후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굉음 때문에 두 사람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뭐지?”

복도에 나 있는 창문 쪽으로 다가간 페르멘이 밖을 내다보았다.

“남쪽인데… 마수인가?”

겨울에는 리퀘나 주변에서 백여 마리씩 뭉쳐서 돌아다니는 마수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알아볼까?”

페르멘은 열었던 창문을 닫으며 그렇게 물었다. 폭음과 굉음은 몇 번이고 지속된 후에 멈추었다.

“직접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에스메랄다는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직접 상황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르페시스도 만나야 하니까.

두 사람은 3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에 도착했을 때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던 칼라일을 마주쳤다.

“록세트 경, 다시 뵙는군요.”

페르멘은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곧장 용건을 꺼냈다.

“폭음이 들리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1번 경종과 연동된 마도구가 발동했습니다.”

1번 경종은 성벽에서 확인이 가능한 거리에 마수 무리가 50기 이상일 때 울린다. 마수의 숫자에 따라 울리는 경종의 종류가 다르다. 또한 성벽에서 울린 종소리가 관저까지 들리기엔 너무 멀기에, 각기 다른 경종은 마도구와 연동이 되어 있다. 경종이 울리면 연동된 마도구가 발동하고, 관저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보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소식을 전한 칼라일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추가적인 말을 덧붙였다.

“오늘 테노리엘의 전투 마법사가 성벽을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본부대 마법사들은 모두 후방 토벌을 위해 나가 있는지라 조금 전 소리는 아마도…….”

방문객 안전을 위한 인근 토벌이 무척 빠르게 진행되었다 했더니… 마법사를 모두 방문객 안전을 위한 토벌로 차출했던 모양이다. 전후 관계를 파악한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칼라일의 입에서 나온 예기치 못한 이름 때문이었다. 나단이라니…….

에스메랄다가 나단의 이름을 곱씹는 동안 페르멘이 낭패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놀러 나간다더니…….”

에스메랄다는 뭔가를 아는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리퀘나 시가지를 구경하고 싶다고 나갔거든. 녀석이 성벽에 있을 때 일이 난 모양인데?”

칼라일이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 때문에 지금 성벽으로 나가 보려던 참입니다.”

페르멘은 토를 달지 않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벌은 군에 맡기겠습니다.”

군사 지역, 그건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군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이유는 간단하다. 군사 지역이란 곧 위험 지역이고, 그 위험을 통제하는 것이 바로 군이니까.

리퀘나 일대와 남부군 병력이 남하한 지역까지 모두 남부군의 통제하에 놓인 군사 지역이다. 그곳에서는 개인적 능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설령 좋은 일이라고 해도, 주둔군의 허가 없이 군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 개인적 판단으로 인한 행동이 위험 요소를 전체적으로 관리하던 군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문객이란 말 그대로, 방문을 한 손님에 지나지 않기에 그들도 군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 때때로 긴박한 순간에는 절차가 방해물이 될 수 있으나, 절차란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군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인이 협조 절차 없이 군의 일에 간섭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당장 피해 소식이 들린 것은 아니기에 훈방 조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절차상 잠시간 구금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희 쪽 잘못이지요. 연락을 주시면 그때 데리러 가겠습니다.”

페르멘의 대꾸를 들은 칼라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를 붙들었다.

“실례지만, 전하께서는 사령관실에 계신가요? 잠시 뵙고 싶습니다만.”

진즉부터 그녀를 힐끔거리던 칼라일의 몸이 움찔거렸다.

“계셨… 었는데… 그…….”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힘을 전혀 숨기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황태자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이 없는데……. 에스메랄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부재중이시라면 기다리도록 하죠. 혹시라도 성벽에서 뵙게 된다면 말을 전해 주시겠어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후 칼라일은 이만 가 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칼라일이 자리를 떠나자,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만나 뵈려는 거야?”

아르페시스를 언급한 직후부터 페르멘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자세한 것은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그녀가 답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말이 전부다. 또 감추는 대답을 했음에도 페르멘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대신 머무는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조금 엄한 어조로 잔소리를 시작했을 뿐이다.

“잘 들어, 리디.”

에스메랄다는 이어지는 말에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사내들은 다 늑대야.”

“……네.”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는 짐승 놈들이라고.”

“……네에.”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정말 위험한 짓이야. 아니, 멍청한 짓이야. 큰일 난다고.”

“……네에.”

“혹시라도 막 널 만지려고 하잖아?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해야 돼. 자, 따라 해 봐. 안 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내가 당장 뛰어갈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손이 어디까지 들어왔었는지를 떠올리며 페르멘을 힐끔거렸다. 그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생활에 관련해서 오라비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오라비들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페르멘의 조언은 페드로의 조언과 달리 불상사가 벌어졌을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페드로가 두 번이나 가르쳐 준 것들을 아직 잊지 않았으니 페르멘의 말은 흘려들어도 괜찮으리라.

페르멘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오니 저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선 그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페시스에게 해야 할 질문이 한가득이다. 정오 무렵 그의 입을 통해 들었던 말을 곱씹으니 상념을 위한 침묵이 짙어졌다.

그녀가 짙은 피로를 느끼며 침대로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불조차 밝히지 않아 어둑한 방에 갑자기 온기가 들이닥쳤다. 생각보다 문가에 오래 서 있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온기에 파묻혔다. 옷자락에 숨어 있던 냉기가 온기와 뒤섞였다. 외부에서 온 건 분명한데…….

“성벽에 다녀온 거야?”

“마수가 나타났다기에 잠시. 혹시라도 들어오면 안 되니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입술을 문지르며 답했다. 에스메랄다는 목을 지분거리는 감촉을 밀어내고자 했다. 몸을 빼내려고 하자마자 강한 힘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 했지만.

‘내가, 지금, 이상하니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지 마.’

고작 몇 시간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린 에스메랄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이 상태로 대화를 해야 할 모양이다. 그녀는 나름의 준비를 위해 심호흡을 거쳤다. 그리고 가장 빨리 처리해야 할 것부터 언급했다.

“너무 늦게 와서…….”

그녀를 옥죄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미안해.”

지난밤 그를 보자마자 이 말부터 했어야 했는데, 화가 났다는 이유로 그를 또 할퀴었다.

“어제 한 말도 미안해. 순간…….”

사과를 하는 것인데 어째서 변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일까. 에스메랄다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를 대신해서 말을 꺼낸 건 아르페시스였다. 어깨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대가 왜 내게 사과를 하나. 잘못한 것은… 내가 페드로를…….”

흐느낌도 없이 쏟아 내는 것이 너무 서글펐다. 에스메랄다는 시큰거리는 눈을 꾹 감으며 그의 커다란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을 두고……. 그녀의 다정함에 아르페시스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잡으려고 했는데… 잡아서 데려왔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녀보다 한참 커다랗기만 한 사람이 애처롭게 떠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네 잘못이…….”

칼처럼 날카로운 것으로 이 못난 감정을 잘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를 탓하지 말고 흘려보내도록 해라. 너를 위해서, 녀석을 위해서 부디 그렇게 해 주렴.’

에스메랄다는 기억에 담긴 글귀를 짚으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흘려보내자.

“네 잘못이 아냐. 그냥… 그냥 사고였던 거야. 진즉에 이렇게 말해 줬어야 하는데…….”

에스메랄다는 드디어, 페드로와 똑같은 말을 하며 아르페시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다. 그 손길 한번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와 똑같은 말을 하는 에스메랄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감정에 휘둘리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페드로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 봤자 그와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에… 같이 성묘라도 가자.”

곁을 지켜 주었던 페르멘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에스메랄다도 아르페시스를 달래기 위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기댄 그대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서로의 감정을 추스른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침대 위에 앉았다. 다시금 아르페시스의 무릎 위로 돌아온 에스메랄다는 붉게 물든 그의 눈매를 살살 매만졌다.

“버린다는 건 무슨 의미였어? 마치 내가 널 버린 것처럼, 배제한 것처럼 말하던데…….”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녀의 허리를 옥죄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팔이 굳었다. 그는 잠시 후 텅 빈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가, 연락을 하지 않았잖아.”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삐죽하고 솟아올랐다.

“내가 필요 없어져서…….”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가 생겨났다. 대체 왜 아르페시스와 대화를 하기만 하면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는지. 아르페시스를 똑바로 올려다보자 그는 그녀를 피하는 것처럼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작정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 건 너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 혼란이 내려앉았다. 그런 그의 앞에서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한껏 구겨졌다. 울리지 않는 마법 전보를 보며 느꼈던 감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록스 백작이 신관들과 사고를 쳐서 수습해야 한다고, 전보로 남기기 힘든 내용이라 서신을 남기고 갔어. 생각이 정리되면, 감정이 조금 추슬러지면 연락을 달라고, 다시 얘기를 해 보자고 했는데, 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갔던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를 들쑤시는 1여 년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모두 끝난 것 같아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혼자 외롭고 아픈 시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록스 백작이 일부 신관들과 함께 신전의 기금을 빼돌린 일이 공론화된 적이 있다. 당시 반황실 세력의 귀족들은 중앙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에스메랄다의 포섭 대상이었고, 록스는 꽤나 큰 세력이었다. 남부에 속한 영지치고는 전선과 멀어 마수의 피해를 비교적 덜 받았고, 국경 지역도 아니었기에 사병을 동원하기 수월했으니까.

애초에 반정을 생각하자마자 테몬과 록스를 묶어 생각했었다. 이후 록스 백작이 에스메랄다의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그를 도와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그때는 그런 사실을 몰랐던 관계로, 횡령으로 작위 강등이나 영지 반환 같은 형벌을 피하기 위해 손을 썼다. 록스가 타격을 입으면 에스메랄다의 반정을 위한 패를 하나 놓치는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새벽에 전보로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쌌고 곧장 황도로 출발했다. 그때 굳이 서신을 남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전보 마도구의 보안 문제와 아르페시스와의 언쟁 직후였다는 점.

당시의 전보 마도구는 보안에 있어서 매우 취약한 물품이었다. 누군가 마나를 사용해 발동시키기만 하면 속에 담긴 글자가 모두 드러나는 통에 전보로 전달하기엔 너무 위험한 내용이었다.

당시 록스 백작의 횡령은 진실이었으니까. 결국 에스메랄다는 록스 백작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더러운 짓을 해야만 했고, 그걸 전보에 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찾아가 말하는 방법도 있었건만,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서 결국 글로 남기는 것을 택했다.

황성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일을 처리한 뒤 테몬 후작 저로 돌아갔을 때, 그녀를 반긴 건 새로 도착한 전보가 없는 마도구였다. 아르페시스와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던 마도구는 빛을 내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후방 도시에서부터 말을 타고 달려 여드레, 일을 해결하는 데 다시 며칠, 거의 20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 텅 빈 마도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나.

마지막 대화에서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 때문에 먼저 연락을 해 볼 수도 없었다. 먼저 연락을 했다가 답이 없으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 그렇게 시간은 쌓여 가기만 했다.

격양을 참기 위해 식식거리는 에스메랄다의 숨소리 사이로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신……?”

아르페시스는 화를 내고 싶은 것인지, 울고 싶어 하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그대는 내게 언질도 주지 않고 새벽에 도망치듯 떠났다. 전해 들은 것이라곤 정문 경비병이… 그들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잖아. 그 말을 듣고, 전보 마도구를 보면서 얼마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에스메랄다는 골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훅, 훅, 숨을 몰아쉬었다.

중앙 리퀘나에서 지내는 테노리엘의 세작을 통해 그에게 남긴 서신이 왜 전해지지 않았는지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정말 너무 억울했다. 그렇게 기다렸는데 돌아온 말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같은 사과가 아니라 버렸다는 원망이라서.

“먼저 했으면 됐잖아!”

다독이려고 했는데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아르페시스 역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염치로 그대에게 연락을 하나! 그런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대가 날 보기 싫다는 듯이 떠났는데! 그대에게서 답이 없으면…….”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품에 안은 채 울먹거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대강 짐작한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용기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탓하며 웅크리는 사이에 벌어진 시간은 1년을 훌쩍 넘겼다. 에스메랄다는 정말이지, 그 시간이 너무 억울해서 입술에 화풀이를 했다.

모든 상황을 인지한 그녀는 억지로나마 숨을 고르며 감정을 다스리고자 노력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아르페시스를 다그칠 자격이 어디에 있다고. 결국 그가 겁을 먹었던 것처럼 에스메랄다 역시 겁을 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않았나.

“겁쟁이…….”

작은 중얼거림은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오로지 그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확인한 에스메랄다는 곧장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한 말이야. 네가 답을 하지 않을까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했거든.”

지난밤 제멋대로 굴어 그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차분해지고자 노력했다. 날뛰는 감정에게 휘둘려 그에게 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못난 짓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

“세작에게 서신을 맡겼어. 직접 얼굴을 보고 설명하지 못한 건… 용기가 없어서였고. 네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너를 몰아붙인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글로 남기자고… 그렇게 생각했어. 전보를 타기엔 위험한 내용이었으니까. 황도로 돌아간 이후에 1년이 넘게, 계속… 계속 네 연락을 기다렸다고. 왜 서신이 전달되지 않은 건지는… 설명을 못 하겠네. 우선, 그 일에는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당시 리퀘나에 있던 세작들에게서 무언가 보고가 올라왔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연히 전달이 된 줄 알았다. 한 번이라도 확인을 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조금씩 흐려졌다. 또, 그 텅 빈 표정이다.

“오해라…….”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 오해지.”

마치 오해가 아니라는 말 같아서 저절로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아르페시스는 대답을 피하며 다시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가둬진 에스메랄다는 숨결을 타고 오는 속삭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부족했다.”

이게 정말 그가 사과할 일인가? 대체 어디에 그의 잘못이 있지? 그저 오해와 오해가 쌓여서… 오해…….

“잘못했다. 다시 기회를 준다면 더 잘할 수 있게 노력하겠다.”

분명 진심이 느껴짐에도 거짓말 같은 그 속삭임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면 조금 다를까 싶었지만, 때때로 낯선 표정을 보여 주는 그는 예전과 달리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시간과 함께 지워져서 무언가를 찾아볼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결국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물었다.

“성벽을 부쉈다는 건 뭐였어?”

알아야 하나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참 우스운 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와 귓불 근처에 숨결을 남기던 그가 툭, 답을 내어 놓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고작 몇 시간 전, 그는 아주 명확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말을 듣던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이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지만, 차분히 정리를 하고 나니 답을 찾는 건 쉬웠다.

그런데 이제 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녀가 보인 반응을 보고 답을 삼켰던 아르페시스다. 그러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대충 집어 온 변명이다. 정말, 빤히 눈에 보이는 허술한 변명.

어처구니가 없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무어 당당하다고 아르페시스에게 말을 하겠나. 그보다 더한 짓을 해 온 게 그녀인데. 그녀가 질문을 이어 간 건 타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질문이었다.

“왜… 왜 그랬어?”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그것들이 그대를 해쳤으니까. 용서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증오했으니까. 그대가 없었으니까.”

날이 바짝 서 있는 목소리가 그녀에게 답을 모조리 내어 놓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또… 내가 평생 동안 헛짓거리나 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는 또 이상하게 웃었다. 웃으려고 노력하는데 결코 웃지 못하는 표정. 에스메랄다는 정확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또한 제대로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토로하는 사람도,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물어본 사람도 서로를 살피며 말을 삼켰다.

“나도…….”

어느 순간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에스메랄다의 되물음이 있기도 전에 그가 느릿한 어조로 질문을 꺼냈다.

“그놈은 뭐지?”

그놈? 에스메랄다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이니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잠시 놔주었다. 마주 본 은회색 눈동자 속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 불안감이 그녀의 주변을 에워쌌다.

“마법사 놈. 그대 주변을 졸졸 쫓아다니는 불쾌한 놈. 그대를 언급하면서 웃고 다니는 짜증 나는 놈.”

에스메랄다가 이해를 못 했다고 여긴 것인지 아르페시스는 굳이 말을 덧붙였다.

“회색 머리카락, 노란색 눈동자, 후방 도시에서도 봤던 그놈. 조금 전에 성벽에서 제멋대로 마법을 쓴 그, 나단이라는 놈.”

성벽에서의 문제로 나단의 이름을 알게 된 모양인데…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르페시스가 낯설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향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 라, 라그나의 아들이야.”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아르페시스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자에게 아들이 있었나?”

“……그때는 내가 찾아내기 전에 죽었던 것 같아. 지금은 일찍 찾아서 살아 있고.”

“일찍… 얼마나?”

“뭐?”

“라그나를 찾은 게 언제냐고.”

짧은 질문에서 느낀 건 왠지 모를 스산함이었다. 곧장 답을 하지 못한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정말 석고상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그… 연회… 황태자의 약혼 연회 무렵에…….”

“하.”

꾸역꾸역 답을 꺼냈더니 돌아온 건 짧은 헛웃음이었다. 텅 빈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그래, 그렇군.”

“왜… 그렇게 웃어?”

“아무것도.”

에스메랄다의 떨림을 느낀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달래려는 것처럼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직후 그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놀란 에스메랄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리자 귓가로 바짝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이제 끝난 것인가?”

“어?”

“대화.”

잠시 할 말을 찾느라 삐걱거리는 사이 아르페시스가 선수를 쳤다. 노골적인 손길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답이 없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이미 답을 받아 갔다.

조심스러운 손길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이렇게 노골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목덜미 근처를 오가던 아르페시스가 더듬더듬, 에스메랄다의 턱을 타고 올라왔다. 습한 숨의 뒤를 쫓아온 건 아르페시스의 입술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살짝 스칠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에스메랄다의 반응 때문인지 아르페시스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멈추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묘한 기류가 흘렀다.

“왜?”

왜? 왜라고? 에스메랄다는 정말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해명인지 설득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나는 분명 그대에게 말했다.”

아르페시스의 손가락이 에스메랄다의 뺨을 훑고 내려와 턱에 닿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내 저열함에 대해서도, 욕망에 대해서도,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도… 분명히.”

이번에 마른침을 삼킨 건 에스메랄다였다. 은회색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욕망이 선연했다.

“그럼에도 허락해 준 건 그대다. 난 그걸 물러 줄…….”

아르페시스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 정말 미치겠군.”

잠시 후 에스메랄다의 품에 고개를 묻은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계십니까?”

테란의 어조는 꽤나 다급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힐끔거렸다. 아직 내전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의 즉위 문제와 이것저것 다루어야 할 것이 많다. 그렇다고 급한 소식일지도 모르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에스메랄다는 테란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대뜸 그녀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문으로 향한 아르페시스가 아니었다면 혼자 걸어갔을 것이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테란이 몸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용건.”

간결한 단어에 테란이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품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빤히 올려다보던 중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의 팔에 들린 채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려 달라고 해도 내려 주지 않을 게 빤했다.

라그나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전보 마도구도 추측했을 터. 그에게 자동 발현 마도구가 있으니 이전보다 연구 속도가 빠르다는 것 역시 알고 있겠지. 이미 그녀가 내전에 관련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그 앞에서 숨길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의사를 물어보기도 해야 하고.

“가져오게, 직접 확인할 테니.”

테란이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따로 보관해 두었던 마도구를 상자째 들고 왔다. 에스메랄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대신해 상자를 받아 드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손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를 한 팔로 안아 든 채 외발 테이블 위에 마도구를 꺼내 놓은 그가 곧장 마도구를 발동시키려 했지만 암호 수식이 걸려 있었기에 실패했다. 전보 마도구를 익숙하게 다루는 그 모습에 새삼, 기억을 정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심정으로 커다란 수정 위에 손을 올리고 암호 수식을 그려 넣었다. 수정 속에서 천천히 글자가 떠오르는 동안 그가 물어 왔다.

“다 똑같은가?”

암호 수식을 말하는 거겠지.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연결된 마도구마다 달라, 전보를 관리하는 이들 두어 명만 알고.”

“보안에 신경을 쓴 모양이군.”

“머저리한테 몇 번 털…….”

반정을 준비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언급하려던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본래 하고자 했던 것 대신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안전을… 확보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어째서인지 그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문구를 바라보기만 했다.

「중북 경계선 인근 1차 다락방 집결지 병력 마찰, 분산 퇴각, 2차 다락방 집결지에서 피해 규모 추산 중, 생존 병력의 전체 복귀 예상 기일 최대 나흘.」

케니스 측에서 온 소식이었다. 남부군의 유가족들을 보호하던 병력이 복귀 중에 중앙군에게 발각된 모양이다. 중앙군은 현재 천천히 북부에서 철수 중이지만 아직은, 파병된 병력의 반수가 넘게 남아 있다. 완전히 물러나려면 20여 일 정도는 더 걸릴 것이다.

현재 케니스의 병력은 남부로 직접 전달된 1차 집결지에서 2차 집결지에 대한 정보를 받는다. 이후에는 2차 집결지에서 3차 집결지의 위치를 전달받고. 그다음 다시 3차 집결지에서 안내인을 대동한 후에야 주둔지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개개인에게 최종 목적지, 즉 주둔지의 위치를 명확하게 공개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집결지는 다시 다락방, 응접실, 다과실 같은 세부적인 명칭으로 구분해 두었다. 1차 다락방에서 모인 이들은 2차, 3차 집결지도 다락방으로, 1차 응접실에서 모인 이들은 또한 2차 응접실로 지정된 집결지로 이동한다.

복귀해야 할 전체 병력의 이동 추세는 물론, 지금과 같은 불상사가 벌어졌을 때 발생하는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고 세세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유동 인구의 갑작스러운 증가로 이목을 받지 않도록 각기 이동 일자를 정해 주었을 정도로 신경을 썼는데…….

그럼에도 집결지 중 한 곳이 발각되었으니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장소로 변경을 명해야 한다. 모든 것은 암호화해서 전달하도록 되어 있지만, 중앙군이 1차 집결지에서 무슨 흔적을 발견했을지 모르니 빠른 시일 내에 다락방으로 지칭되는 집결지를 폐쇄해야 한다.

「사흘 후 일출과 동시에 다락방 집결지 폐쇄, 당일까지 확인한 낙오 병력 보고 요망.」

폐쇄 기일이 예상 집결일보다 빠른 이유는 중앙군이 따라붙을 경우 최소한의 피해로 꼬리를 자르기 위함이었다. 그 집결지를 따라 이동하는 병력을 전부 위험에 노출시키느니, 빠르게 합류하지 못해 낙오하는 이들을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챙기는 게 더 안전하다.

케니스 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는 이에게 전보를 보낸 에스메랄다는 바로 다음 전보를 보냈다.

「사흘 후 일출과 동시에 다락방 집결지 폐쇄, 낙오 병력 수색 및 보호 요망, 추후 이동 일자 통보 예정.」

북부의 뒷골목을 관리 중인 아드리안에게 보내는 전보였다. 그는 그동안 뒷골목과 신전에 잠입시키거나 매수한 이들을 통해 신관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일을 주도해 왔다. 신관들이 오가는 유곽은 전부 그의 수중에 있고, 신관들이 인신매매를 통해 불법 성노예들을 그들의 거처에 감금하는 것도 뒷골목 사람들이 직접 했으니 많은 증거가 쌓여 있다.

북쪽에서 발생할 낙오 병력은 그에게 일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내전과 동시에 신전의 치부를 퍼트릴 예정이라 말해 두었으니, 손이 바빠도 내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리라.

에스메랄다는 빛이 사라진 수정을 빤히 응시하며 툭, 내뱉었다.

“후방 도시에서…….”

그는 분명 내전을 비난하고 제위에 욕심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남부군의 급진파와 내전에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제위에 뜻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있을까?”

그때 만난 것이 서로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날 본 것이 상대방임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어보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놓았다.

“바란다고 묻느냐면 아니었다. 그때는 제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반군을 도울 생각이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자신을 품에서 내려놓지 않는 그를 따라 침대로 돌아갔다.

“하나 지금은 반드시 가질 생각이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에스메랄다를 빤히 응시하며 속삭였다.

“가장 완벽한 수단이니까.”

대체 무엇을 위한? 에스메랄다가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그는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눈동자에 담은 채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그때의 나는 내전을 대의나 정의라는 말로 포장할 생각은 없었고 제위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반군이 황태자와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하도록 거들고자 했다.”

“…….”

“페드로가… 떠난 후에, 그래, 그 무렵에. 놈들을 죽이고 여기서 나가겠노라, 그렇게 결심했다. 또 그날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에스메랄다가 덧붙이려던 질문은 틈을 주지 않고 따라온 아르페시스의 말에 의해 불필요해졌다.

“분명히 말해 두자면, 앞으로는 내전에 직접 손을 보탤 것이고 제위에도 오를 생각이다. 테몬 후작의 세력과 남부에 있는 반황실 세력을 통하면 특별한 잡음 없이 즉위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에스메랄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에렘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해야 하는 답도, 할 수 있는 답도 이미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최선의 방법을 언급하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가 제위에 오르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이것도 그녀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에스메랄다는 짧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악행을 숨기려고 노력한 몇 년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왜 그리도 아등바등거렸는지.

설마 그가 남부에 있는 반군에게 접근한 게 내전을 지지하기 위해서였을 줄이야. 스스로가 가졌던 고정관념 때문에 겹겹이 쌓였던 오해를 접은 에스메랄다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아르페시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난… 네가 그들을 남부군으로 복귀시키려는 줄 알았어. 그래서 도중에…….”

“……일전 한 짓이 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군.”

아르페시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랬구나, 하는 식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다였다. 그의 눈은 또 텅 비어 있었다.

“난 반군이 새로운 이름을 원하는 줄 알았다. 그때는 기억이 없어서 그대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확신하질 못했다.”

현재 내전을 원하는 이들을 구분해 설명하자면 크게 3개, 아니 4개의 세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루그레디안을 위시한 일부 귀족 세력, 그들은 아르페시스를 추대하길 원한다. 황좌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가장 적은 혼란으로 정리가 가능한 최선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케니스와 관련된 일부 반군 세력, 그들은 남부 지원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에 중앙 권력 구도에는 큰 관심이 없다. 누가 앉건 남부 지원만 정당하게 진행되면 지지를 할 것이다. 지금은 루그레디안이 케니스와 가장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래 보았고, 또한 그들의 뜻과 방식이 정말 지나치게 일치하기에 신뢰 관계가 쌓여 있다.

세 번째는 반군과 관련 있는 다수의 남부 귀족들 중 일부 세력, 그들은 상황을 살피며 어디에 붙어야 하나 눈치를 보는 이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부터 네 번째 세력이 생겨났다. 남부 귀족 중 규모와 세가 막강한 아르텐 공작과 부소네 공작이 야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봉신들 중 일부가 반군에 적을 두고 있으니, 그들을 통해 반군 인사들과 접촉하고 회유하며 세력을 만들고 있는 상태다. 일이 끝났을 때 자신을 지지하도록.

애초에 루그레디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아르페시스에게 접근한 이유도 그들 때문이리라. 그들이 제위를 넘보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 다급했겠지.

“해서 이미 그러한 것인지, 앞으로 그러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꿈 때문에 추측하는 정도가 한계였지.”

“꿈?”

아르페시스는 잠시 혼자 생각을 곱씹더니 별안간 픽, 하고 웃었다. 분명 비어 있었는데, 이름 모를 무엇이 다시 그를 채우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을 꿨다. 빼앗겼던 걸 포기할 수가 없어서… 아니 빼앗기기 싫어서 잡고 있었지.”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뺨을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황성에서 그대를 다시 만난 날 처음으로 기억을 봤다. 일기나, 상황이나… 그래, 그 시절의 기억을 꿈으로 보았다. 아마 조급했기 때문이겠지. 그대가 있고 그대의 가족들이 있으니 아직 기회가 있다고, 빨리 기억을 되찾으라고…….”

점점 흐려진 말꼬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감정 변화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섬광 같은 것이 머리를 스치고 가는 기분이었다.

‘네가 말해 주지 않는 것들. 너를 울게 만드는 악몽이나… 네가 웃지 않는 이유, 그런 것들 말이다.’

페드로가 의뭉스럽게 굴며 아르페시스와 붙어 다닌 이유. 갑자기 지하 보관소를 찾았던 이유.

“설마 오라버니께서…….”

아르페시스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꿈을 말해 주었고, 그는 계속 그것을 좇았다. 결국은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기까지 했지. 그가 날 따라온 건 내가 그대나 그대의 가족을 볼 때만 정확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기도 해. 처음에는 분명 그 이유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눈매에 열기가 맴돌았다. 페드로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떠났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 많이.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내 꿈이 언젠가 일어날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일어났다가 사라진 과거의 일이라고… 완벽한 정답이지.”

아르페시스는 고해를 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말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몇 년이 넘도록 꿈을 꾸었으면서, 페드로가 명확히 짚어 주기까지 했는데도 나는 이제야…….”

에스메랄다는 제게 매달린 온기를 꽉 안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기억을 빨리 되찾았으면 이 힘도 빨리 가졌을 텐데… 그럼 그가 아직, 아직 여기 있을 텐데…….”

억지로 흐느낌을 삼키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녀도 감정을 다독여야만 했다.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스스로 감정을 추슬렀는지, 대뜸 그가 에스메랄다의 품에서 웅얼거렸다.

“그대가 꾸는 악몽은 뭐지? 내가 없으면 계속 꾸는 그것 말이다.”

그녀는 등골을 타고 올라가는 오싹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에스메랄다는 성벽을 부수었다고 말하며 웃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뿌듯해하던 그 모습은…….

“그냥…….”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후회하고 자책한 길 위에 그가 서 있어서. 마치, 그녀를 따라온 것처럼 우두커니. 그 길 위에선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돌아보지 못한다. 보고 들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증오와 원망, 악의가 전부다. 에스메랄다가 직접 그것을 겪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르페시스가 내전을 위해 흐른 핏물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이유, 그건 한때 에스메랄다가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다.

“그냥 악몽…….”

“그냥 악몽.”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그래, 그렇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텅 빌 때와 일렁거릴 때, 여전히 원인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유에 따른 위험을 완벽히 파악한 것이 아님에도 에스메랄다는 깨달았다.

수년간 시달린 악몽이 마지막 순간 불 속에서 사그라지던 그때라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고. 직감일지 본능일지 모를 것이 계속 그녀에게 경고를 해 왔다.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직접 겪어 보았기에 더더욱 무겁다.

‘그것들이 그대를 해쳤으니까.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증오했으니까. 그대가 없었으니까.’

정말 기가 막힌 건, 이런 상황에서도 그 말을 떠올리는 스스로였다. 아르페시스가 변한 결과 말고, 이유.

“물어볼 게…….”

확답을 받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으나 말을 하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홀로 쫓으며 했던 생각들, 품었던 감정들, 그리고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결국은 해내지 못했던 과거까지, 너무 복잡하다.

“왜 나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결국 그 복잡함은 말꼬리를 흐리며 끝을 맺지 못하게 만들었다. 꼭 말더듬이가 된 기분이었다. 고작 그뿐이었는데도 아르페시스는 알아서 뒤를 이어 붙였다.

“내 머릿속을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제나, 언제까지나…….”

말 그대로 알아서, 제멋대로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는 말을 하는 대신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집요한 아르페시스의 시선 앞에서 침묵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전보 마도구 때문이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방 안은 어둡기만 했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마도구로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아르페시스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은 없다는 걸 행동으로 증명했다. 스스로가 그녀의 다리라도 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전보 마도구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는 곧장 수정 위에 손을 올리고 마나 암호 수식을 그려 넣었다. 고작 한 번 봤으면서…….

확연한 운용력의 차이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조금 허탈해졌다. 그녀는 저 암호 수식을 완벽하게 배열하기 위해서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만 했으니까.

에스메랄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먼저 수정 속의 글자를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좌우로 목을 꺾었다. 뚝뚝, 거리는 위협적인 소리가 들린 후에야 에스메랄다의 시선도 수정 속의 글귀로 향했다. 곧 그녀의 녹안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 * *

페르멘에게 듣기로, 오늘 그와 에스메랄다는 가족들끼리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내일은 혼자 놀아야 할 거야.’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을 만난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페드로의 장례식이 있던 시기에 잠시 인사를 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어색한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끼어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나단은 조찬 무렵에 두 사람을 따로 찾아가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백작님. 전투 마법사 나단입니다.’

백작은 그를 가만히 보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형식적으로 조찬을 함께했으나 그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거의 없었다.

‘펠에게 듣자니 그 아이가 꽤나 아낀다지.’

그저 식사가 끝날 무렵 덤덤한 어조로 당부를 남겼을 뿐이다.

‘잘 보필해 주게.’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충분했다.

조찬 이후에는 방에서 뒹굴거리기보다 혼자 놀더라도 밖에 나가서 놀자, 같은 심정으로 외출을 결정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여행 중인지라 조금 들뜨기도 했고. 방문객은 사전에 요청하면 성벽에 올라가 볼 수도 있다고 해서 오전에는 미리 신청서까지 냈다.

리퀘나는 단순한 군사용 성벽이 아니라 원활한 물자 조달을 위한 최전방 도시였다. 성벽 내에는 대장간도, 약초상도, 식당이나 주점도 있었다. 나단은 병사만 가득할 줄 알았던 리퀘나를 돌아보는 내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번성한 타 도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성내에 정착하여 사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테노리엘 백작령에서 보았던 가판 상인들도 많았다.

점심을 먹은 후에 나왔지만 그는 군것질거리를 한 아름 사 들고 리퀘나를 계속 돌아다녔다. 그런 후에는 또 군것질거리를 잔뜩 싸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가 광활한 평지를 바라보았다. 마수가 나타난 후 에렘에 전선 지역이 생기면서 농경을 비롯한 재배 활동에 지장이 생겼지만 대부분의 지대가 평야인 남부는 본래 에렘의 최고 곡창 지대라고 배웠다.

테노리엘 백작령에서는 어디를 돌아보아도 울룩불룩 산이 많았다. 아비체룬과의 국경 지대에는 웅장한 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장관이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다. 장대한 산맥은 분명 절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부와 남부는 달랐다. 성벽 위로 올라가 어디를 돌아보아도 쭉 뻗은 평지가 가득했다. 눈으로 직접 머나먼 지평선을 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단은 ‘광활한 대지’라는 단어를 실감할 만한 광경을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눈을 떼지 못했다. 땅에 발을 붙인 채 보는 것과 높은 성벽에 올라 보는 건 감상 자체가 달랐다.

‘우와!’

그는 싸 들고 온 간식을 성벽 위에 늘어놓은 채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순수한 감탄사를 쏟아 내며 방방거리는 나단의 모습은 평생을 그곳에 바쳐 온 병사들의 자긍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30분쯤 지났을 때 나단은 자신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기 시작한 병사들과 함께 간식을 먹으며 성벽 위에 자리를 잡았다. 성벽에 설치된 마도구가 몇 개인지, 그것으로 한 번에 사살 가능한 마수의 수가 얼마인지, 상주하는 병력과 정착한 이들의 숫자까지 세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일이 생긴 건 간식도 다 떨어지고, 해도 떨어져 가던 때였다. 남쪽 성벽 위에 걸터앉은 채 서쪽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보고 있던 때. 산 너머가 아니라 땅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은 분명 매일 보던 것임에도 신비로웠다. 일몰을 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땅땅땅, 하는 경종 소리가 들렸다.

‘나단 경, 내려가셔야 합니다.’

병사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까만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부로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보았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수구나.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정말 전선이구나. 나단은 정말 별생각 없이, 그냥 손을 뻗어서 곧장 마법을 썼다. 리퀘나로 오는 동안 마수를 몇 번이나 잡았으니 또 잡으려고.

낙뢰와 화염을 섞어 점점 가까워지던 마수를 처리한 후에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쓸모가 있는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꽤나 먼 거리에 있는 표적을 저격한 원거리 원소 마법이 제대로 성공해서 기쁘기도 했고.

‘마법사라…….’

저 멀리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마수 무리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였다. 토끼처럼 놀라 돌아보니 분명 어제 후원에서 보았던 아르페시스가 서 있었다. 그를 다시 보자마자 지난밤 홀로 곱씹었던 복잡한 생각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나단은 자신의 옆에 있던 병사들이 서둘러 경례를 올리는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전투 마법사 나단입니다.’

나단은 답이 없는 아르페시스를 힐끔거렸다.

‘어… 그러니까, 어제 후원에서 잠시 뵈었는데… 아가씨와 같이… 아 참, 아가씨는 잘 들어가셨나요? 어제 갑자기 가신 후에 아직 못 뵈었어요. 오늘 아가씨와 도련님은 백작님과 같이 계신다고 하던…….’

나름 어색함을 떨쳐 내려고,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르페시스는 그의 말을 도중에 끊어 냈다.

‘협조 과정이 있었나?’

협조? 나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닙니다…….’

동시에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군의 허가나 협조 없이 마수와의 교전을 강행한 자다. 정확한 경위가 파악될 때까지 구금하라.’

그 직후 나단은 그 기사들에게 양쪽 팔을 잡혔다. 군사 지역 어쩌고, 구금 어쩌고 하는 말에 얼을 빼고 있었더니…….

‘상관의 얘기를 참 쉽게 하는군.’

못마땅하다는 듯이, 거슬린다는 듯이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리는 말을 뒤로하고 성벽 위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 이후에는 뭐… 태어나 처음으로 철창이라는 것 안에 들어온 상태라고 보면 된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팔짱을 낀 나단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그를 이송한 기사는 대체 왜? 라는 질문에 하나하나 전부 설명을 해 주었다.

남부와 군사 지역은 다르다고, 군사 지역 내에서 마수와의 교전은 군과의 협력, 혹은 협조 절차를 거친 후에만 허락된단다. 개인 및 단체가 무작정 마수와 교전을 할 경우 군에서 알지 못하는 전투에서 마수의 도주나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놓친 마수가 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리퀘나의 성문은 밤이라 할지라도 쉽게 닫지 않는다. 전방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퇴각한 병력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도록. 그렇기에 만약 나단이 사용한 마법에서 살아남은 마수가 있었다면, 그놈들이 쉽게 닫지 않는 성문을 넘어왔다면 백성의 피해를 야기했을 것이다.

남부와 남부 전선, 그 차이를 모른 채로 무작정 마수를 죽였으니 이렇게 구금되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알면 엄청 비웃겠지?”

나단은 철창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에스메랄다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한 것인데, 구금되다니!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책임자인 에스메랄다에게도 소식이 전해질 거라고 했다. 창피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폭, 내쉬어진 한숨 뒤로 조금 전 보았던 사람의 모습이 따라왔다. 짙은 남청색 머리카락, 묘한 광채를 내던 은회색 눈동자, 선명하고 짙은 이목구비에 강렬한 눈매, 건장하다 못해 위압적인 체격까지.

“연인…….”

그 커다란 사내가 에스메랄다의 연인이란다. 에렘의 황자이자 또한 남부군의 총사령관인 사람. 마치 에스메랄다의 연인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단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충격을 받았고, 그렇게 충격을 받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또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의 주제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간밤에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리면 목이 칼칼했다. 그 야밤에 둘이 사라져서 뭘 했겠나… 같은 생각을 하면 더더욱.

“에비!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냐!”

나단은 또 제 머릿속에 멋대로 들어온 생각들을 흩어 내기 위해 고개를 털었다. 하지만 지난밤과 달리 이번에는 큰 성과가 없었다. 혹시나, 싸우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나쁜 마음이 계속 생겨났다.

순전히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 에스메랄다가 행복하기를, 시름 한 점 없이 아름답게 웃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에 헛된 것을 덧붙인 모양이다.

‘오라버니께서… 날 용서하셨을 거라고 말해 줘서 고마워. 네게 도움을 받았구나.’

사실 어느 순간에 이런 헛된 것이 들러붙었는지 알고 있었다. 거짓으로 꾸며진 미소만 보여 주던 에스메랄다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웃어 주었던 그 날. 그의 도움을 받았음에 감사하며 완연한 진심으로 그에게 웃어 주었던 그때. 이렇게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녀를 웃게 만들었으니 어쩌면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탐욕이 피었나 보다.

“탐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수없이 많은 원인을 양분 삼아 싹을 틔우니, 언제나 내면을 보고 그것을 경계하라…….”

성서의 구절을 절절하게 실감하게 된다. 나단은 웅얼웅얼, 나름의 변명을 해 보았다.

“나도 가망 없는 거 안다고……. 아버지가 있지만 일단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잖아. 욕심내면 안 되는 거야.”

참 어이없는 자각을 거친 후 빠르게 포기를 선언했지만, 아르페시스를 다시 보고 난 이후에는 자꾸 마음이 술렁거렸다.

“좋아하는 분과 맺어지면 매일매일 웃으실 테니 잘된 일이라고.”

그거 하나면 되는 건데. 그를 웃게 해 준 에스메랄다가 언제나 웃는 것, 그거 하나면 되는데. 철없고 가망 없는 마음 같은 거 말고, 에스메랄다가 웃는 거, 그거 하나만. 그러니 지금까지와 달라질 것도 없다. 나단은 다시 한번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이런 생각 말고 자신의 처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기사는 구금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까!

“으… 창피해…….”

에스메랄다에게 구금 소식이 전해진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런 자신의 상황과 조금 전 성벽에서 만난 아르페시스가 자꾸 비교가 되는지라 기분이 저조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찾아온 건 우울함이 땅을 파고 들어갈 만큼 깊어졌을 때였다.

“놀러 간다더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목소리는 페르멘의 것이었다. 고개를 획 치켜드니 철창 밖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단은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니임…….”

전선에서는 마수 한 마리 잡는 것도 군의 통제하에 따라야 하는 건지, 진짜 몰랐다.

“아, 이거 수정 마도구에 기록해서 라그나한테 보여 줘야 하는데.”

그럼 두고두고 놀림받을 텐데! 나단은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빌었다.

“흐엉, 제발요, 안 돼요. 저 평생 놀림받을 거란 말이에요!”

철창에 매달린 채 엉엉거리는 나단을 보고 있노라니, 페르멘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감옥 가는 건가요?”

나단은 불안한 마음에 그런 그에게라도 답을 구해 보려고 했다. 그리고 페르멘은 오래지 않아 답을 해 주었다.

“이미 감옥에 있는데 또 가겠냐? 빨리 나와.”

“에?”

페르멘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철창문을 열고 있었다.

“나오시면 됩니다, 나단 경.”

나단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곧장 철창 밖으로 쏙 빠져나왔다. 안에 있기 싫어서 나오기는 했는데,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처음이고, 추가적으로 사고가 생긴 것도 아니니 경위서 작성 후 훈방 조치하겠대.”

훈방! 최악의 경우 재판 같은 걸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부턴 조심해라? 상습범은 가중 처벌받는 거 알지?”

“네, 네! 조심할게요!”

나단은 감격에 겨워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이후 경위서보다는 반성문같이 보이는 걸 다 쓴 후에서야 관저 옆에 있던 구금 시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름 파란만장한 하루를 뒤로한 나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도련님, 아가씨도…….”

“당연히 알고 있지.”

도움이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따라왔는데 이게 뭐람. 나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울적한 마음에 터덜터덜, 관저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서 짐 챙겨, 내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에?”

페르멘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어제 도착했는데? 열흘 일정이라고 들었는데? 나단이 이해를 못 해 눈을 끔뻑거리고 있노라니 페르멘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황도에… 아니,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내일 아침에 출발이다.”

“어… 네에…….”

나단이 계단을 올라가며 얼빠진 답을 내어 놓았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던 에스메랄다와 마주쳤다.

“오라버니, 나단.”

“아버지께 말씀드렸어? 형은?”

“……두 분께 모두 전했어요.”

“그래, 나단에게도 곧 출발할 거라고 말해 뒀어.”

그렇지? 하고 돌아보는 페르멘의 모습에 나단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출발하겠다면 출발하는 거지. 나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소식을 전해 들으셨다고…….”

우물쭈물하는 말에 에스메랄다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라 생각하렴.”

나단은 자신의 앞에서 예전과 달리 진짜로 웃어 주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이거면 되는 거지. 더는 욕심내지 말자. 내 봤자 이루어질 리도 없고. 홀로 마음을 다잡은 나단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딘가 어색하고 뻣뻣한 미소였다. 분명 진심으로 에스메랄다가 웃는 것 하나만을 바라는데, 왜…….

“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나단이 가까스로 평소처럼 나온 목소리에 안도할 때, 세 사람이 함께 2층 복도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직전의 일이었다.

“테노리엘 영주 대리.”

다급한 걸음으로 아래층에서 올라온 사람이 에스메랄다를 불러 세웠다. 나단의 시선이 곧장 계단 아래로 향했다.

“어…….”

지난밤에 아르페시스와 같이 보았던 사람이었다. 이름이…….

“앙뷔 경.”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돌리니 에스메랄다 역시 로웨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따로 뵐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지요.”

나단은 지난밤에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로웨나와 에스메랄다를 번갈아 보았다.

“오라버니, 잠시 실례할게요.”

“응, 그럼 우리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

“다녀오세요, 아가씨.”

에스메랄다가 로웨나와 떠난 후, 페르멘도 곧장 다시 움직였다. 그래서 나단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금방 시선을 거두어야만 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어제 있었던 일은 어떻게 마무리된 건지, 로웨나라는 사람과 아르페시스는…….

털어 내도, 털어 내도 다시 달라붙는 복잡한 생각 위에서 걸음을 돌린 나단은 서둘러 페르멘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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