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0화 (30/45)

제29장

함께할 수 없는 신념

천계는 인간을 구분할 때 선악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다. 선과 악은 결국 상대적이고 정의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빵을 훔쳐 간 도둑은 빵집 주인에게 악이고 죄인이나, 허름한 집에서 아비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는 선이고 구원자이다. 길거리에서 사람 머리를 돌로 내려쳐 죽인 자는 살인마이고 죄인이지만, 살해당한 사람에게 겁간당하고 있던 여인에게는 구원이고 은인이다.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보는 신과 천사들은 선함과 악함을 논하지 않는다. 미카엘의 심판대는 신의 가르침을 배반한 죄와 주신을 위해 세운 공훈을 논할 뿐이다. 타락하지 않았으나 죄가 있다면 형벌을 내려 지옥에서의 형기를 채우도록 만들고, 공훈이 있다면 면죄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내세의 기회를 거두고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영혼이 타락하여 신의 창조로부터 부여받은 하얀빛이 온전히 검은색으로 물들 때.

그런 타락의 앞에서 주신이 정한 기준은 아주 명확했다. 죄악을 행한 유무가 아니라 죄악이라 지칭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있어 느끼는 죄책감의 유무. 죄악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타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들을 타락했다고 보는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는 건 속죄를 통한 회개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의미였으니까.

천계에서는 타락한 영혼이 돌아올 경우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고 영원한 고통의 감옥에 집어넣는다. 주신이 허락했던 창조의 생명을 모두 잃어 소멸해 버릴 때까지. 말 그대로 그 영혼이 가진 영원의 세월을 가득 채워야지만 고통이 끝나기에 영원한 감옥이라 불린다. 이제껏 그곳에서 나온 영혼은 없었다. 모두 소멸하거나, 소멸할 그 날까지 고통받거나.

몇만 년 전에 고통의 감옥에 들어간 영혼은 아직도 새까맣다.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한 타락에 물들면 돌아오지 못한다. 물론 타락의 징조가 보인다고 하여 무조건 고통의 감옥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다시금 하얀 빛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신과 천사들은 그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다.

타락의 징조가 보인다는 건 그 영혼이 죄악을 직면한 상태에서 죄책감을 외면하려 든다는 의미였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은 죄책감을 아예 느끼지 않고 완전한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대략 열에 아홉 정도.

신이 시간을 회귀한 후 에스메랄다의 영혼에 얼룩덜룩하게 묻은 타락의 징조를 보고 뒤로 넘어갔던 이유였다. 한번 타락의 징조가 보이면 돌아올 가능성보다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특별한 안배를 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가진 영혼이 그렇게 타락해 버리면, 신은 내세에 간섭하여 차원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절망했었건만, 구원자는 끝끝내 변하지 않았고 다시금 본래 가지고 있던 하얀빛으로 돌아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번이고 검은 타락의 기운이 짙어져 흰색이 거의 남지 않았다가, 다시 흰색이 짙어지며 검은 타락을 몰아내는 일의 반복이었다.

특히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 짙어지는 타락의 기운은 그녀를 잡아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필시 마계의 악마들이 그녀에게 씨앗을 심은 것이리라.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지나 드디어! 신은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마신의 종자 놈이 에스메랄다를 현혹하기 위해 열심히 사탕을 흔들어 댔을 텐데, 그녀는 끝끝내 따라가지 않았다. 이 얼마나 장한가!

수십 번, 수백 번 흔들렸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죄악을 외면하는 대신 인정하고 타락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났다.

‘역시 나의 구원자로구나! 옳지! 이제 지금까지 해 온 걸로 기반을 잡자꾸나. 할 수 있다! 할 수 있고말고! 파이팅!’

신은 구원자의 영혼에서 타락의 징조가 완전히 사라진 후 응원봉을 흔들며 그녀를 독려했다. 사실 타락의 징조로 인해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복수를 하는 것도, 그 과정에서 수만, 수십만의 인간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구원자가 복수를 위해서라면 멸망도 방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복수? 그거야 뭐 할 수도 있지. 학살? 마룡을 죽이기 위한 기반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일전 신이 구원자의 변심에서 충격을 받은 건 학살이니 내전이니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신이 구원자와 영웅을 안배한 이유는 평화와 안녕으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오로지 마신의 파수꾼과 치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다.

그래, 아르셀은 지금 인간의 멸망을 바라는 마신의 파수꾼과 전쟁 중이다. 차원 전체에 인간 한 명 남지 않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멸망이 아니라면, 신은 흐르는 핏물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룡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내륙을 좀 정리해야 한다면 해야지.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외부의 적과 싸우겠나?

신이 절규했던 이유는 구원자가 자신이 일으키는 사건의 혼란에서 멸망이 도래할 수 있음에도, 그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다는 점 때문이다. 멸망을 막는다면 학살이고 뭐고 무슨 상관인가! 마신에게 차원의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도중에 구원자가 복수심을 좀 채우는 게 뭐 문제라고.

어차피 흐를 피가 어떻게, 왜 흐르는지는 신의 관심 밖이다. 그런 것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신에게 너무나도 자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가 타락을 이겨 내고 죄악을 마주했으니, 더 이상은 자신의 행동에서 도래할 수 있는 멸망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에스메랄다가 멸망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해 온 것들은 모두 신에게 A+ 성적을 받을 만큼 잘한 행동이었다. 전선의 최전방, 그것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에렘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구원자가 쌓아 온 것들로 기반을 잡으면 에렘에서 시작될 혼란이 멸망까지 가지 않고 정리될 수 있다. 희망이 보이고 있다. 마룡을 죽임으로써 아르셀과 아르셀에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을 마신 놈에게서 지켜 낼 수 있는 희망!

그런고로, 응원봉을 열심히 흔들던 신의 눈에 들어온 다른 사건은 이미 활활 타고 있던 행복 회로에 장작을 추가로 집어넣은 격이었다.

‘기적이얏!’

그 감탄사를 시작으로 천계는… 아니, 신은 혼자 축제 분위기였다. 영웅이 제힘으로 인과율을 끊어 내고 기억을 되찾았다. 본시대와 달라진 현실을 인지할 수 있을 테니 구원자가 어떤 상태인지도 알게 되겠지!

구원자는 이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나! 아직 새로운 일을 계획하거나 다시 한번 으쌰으쌰, 힘을 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본래 두 사람의 유대는 탄탄했으니 기억을 되찾은 영웅은 구원자를 위로해 주고, 다독여 주고, 지탱해 주리라! 영웅은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이들이니까!

영웅이 제힘으로 기억을 되찾은 건 분명 희소식이었다. 이제는 그가 모든 것을 후회하며 주저앉아 있는 구원자에게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천계가, 정확히는 신이 축제 분위기를 누린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역시, 나의 아이구나. 내 인간을 창조할 때 한계를 규정하지 않았더니 딱, 이렇게 딱 기적을 이뤄 내지 않느냐! 미카엘, 보았느냐? 영웅이 제힘으로 내가 창조한 인과율을 풀어냈다! 라파엘, 보아라! 너의 아우가 해낸 것을 보라는데도? 이 얼마나 장하냔 말이다. 장하다, 장하고말고! 이제 영웅이 구원자를 다독여 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둘이 힘을 합해 마룡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고! 으하하하핫!”

신은 영웅이 기억을 되찾는 것을 본 이후 계속 지금과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멈추어 있는 손을 대천사들이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제 계획대로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면 곧장 신탁을 내려 구원자와 영웅을 지원해 주어야지. 그럼 다 잘될 것이다.

본래는 사라진 시간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에렘의 기반을 잡기 시작하면 신탁을 내려 신관들을 벌할 예정이었다. 평생을 넘어 영원을 보는 천계에서 계획해 둔 장기 프로젝트였는데… 에스메랄다가 고작 24세에 죽는 바람에 시행도 못 해 봤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다!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고, 구원자가 타락을 떨치기도 했거니와 영웅까지 기억을 되찾았다. 호사로세, 호사로세, 이보다 더한 호사는 없노라!

그렇게 들떠서 응원봉과 함께 춤을 추는 신에게 들려온 말은, 장작을 머금어 활활 타고 있던 행복 회로에 기름까지 들이부어 버렸다. 인계를 내려다보는 감사과와 인계에 도움이 필요한 문제를 수집, 정리하는 기도과를 담당하는 인도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어버이시여, 인과율을 풀어낸 영웅이 각성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응?”

기억을 되찾은 영웅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징조를 발견했다.

“벌써? 아직 20대가 아니더냐?”

그것도 20대 초반. 보통 영웅의 영혼들은 일러도 30대는 되어야 각성을 하는 편이었다. 전 차원을 통틀어도 가장 이른 각성이 28세였다는 걸 미루어 보면 아르셀에 있는 영웅의 각성은 무척 빨랐다. 이러니 신의 행복 회로가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여기서 말하는 각성이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무위를 의미했다. 단순히 신체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나이가 찬다고 하여 모두 이루는 것도 아니거니와, 영웅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역경과 고난, 수없이 많은 절망의 기회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열망을 품는 이들에게만 신이 직접 허락한 영역이었다. 개나 소나, 모두가 각성을 했다면 인세의 균형은 이미 파탄이 났을 만큼 대단하고 위험한 힘이었다.

“예, 회귀가 결정된 이후의 일은 따로 확인을 하지 않아서 몰랐습니다만, 아마 시간을 지우기 전에 각성을 했던 모양입니다.”

신이 보고서를 읽고 기획안을 짜고 실제로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한 것까지. 전부 포함하면 구원자의 사후 1년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 것이다. 구원자의 사망 보고서를 확인한 다음 신은 곧장 아르셀의 시간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기에, 이후의 보고서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구원자를 기점으로 시간을 되돌리려 했고, 영웅이 인과율을 끊어 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 이후의 사건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고. 이미 삭제 지시가 내려온 파일을 꼼꼼하게 살펴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국은 업무상의 누락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모르고 있었는데… 영웅이 회귀 이전에 각성 상태였다면 평균보다 훨씬 이른 각성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각성은 영웅의 자질을 가진 채 열망을 품은 이들에게 허락된 것이니, 당시의 기억을 되찾았다면 그때의 열망도 함께 되찾았겠지.

찬찬히 사건의 배경을 인지한 신은 이제 아르셀의 앞에 광명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헤벌쭉, 하게 웃었다.

“요 장한 녀석. 어찌 이리 어여쁜 행동만 하는…….”

영웅이 각성을 한 것 같다는 말에 그를 보기 위해 모니터의 시점을 바꾼 신이 말꼬리를 흐렸다. 신은 잠시 헤벌쭉한 낯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모니터로 손을 뻗은 신은 그 속에서 비치는 영웅을 두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보았다.

확대도 해 보고, 축소도 해 보고, 정수리가 보이는 위로 돌렸다가 뒷모습이 보이게 내리기까지. 상하좌우 대각선은 물론 심지어 발바닥 아래까지 꼼꼼하게 시야를 바꾸어 영웅을 관찰했다. 그때, 걸음을 내딛는 영웅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사령관님?』

물론 당장 눈앞의 현상을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간 신에게는 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차가운 은회색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는 영웅의 영혼. 다른 모니터로 그를 관찰 중이던 가브리엘은 알지 못하지만 창조주인 신은 볼 수 있는 영웅의 영혼. 퍽, 소리가 나며 신의 머리가 모니터를 향해 돌진했다. 그 이후 이어진 것은 적막이었다.

“어버이시여?”

방금 전까지 폴짝폴짝 뛰던 신이 그 모양이니 걱정이 된 미카엘이 별수 없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오히려 자리에 멀쩡히 앉아 있던 신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마침 결재를 받으러 왔던 라파엘이 바닥에 닿은 신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 봐도 미동이 없었다.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기절한 상태였으니까.

신의 머리가 사라진 덕분에 다시 드러난 모니터가 비추고 있는 영웅의 영혼은 새까만 색이었다. 에스메랄다와 달리 그의 영혼에는 하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새까맣기만 했다. 설마 영웅의 각성을 이루어 낸 열망이 복수심으로 인한 멸망을 염원하는 것일 줄은 몰랐으니 신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영웅이 타락했다. 돌아올 가능성이니 희망이니 같은 말을 논하지도 못하도록 완벽하게.

* * *

기업 마계, 그곳의 주요 업무는 주신이 만든 차원을 하나씩 건들며 멸망시키거나, 그 차원에 사는 창조물들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천계가 존재하는 모든 차원을 관리하는 것과 달리, 마계는 특정 차원을 골라 건들기 때문에 과로가 올 만큼 일이 쏟아지는 곳은 아니었다. 천계와 달리 마계의 대표 이사이자 1인 주주인 마신은 자신의 거처에서 늘어져 있을 정도니 그 차이가 확연했다.

천계의 천사들이 쏟아지는 업무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정직원이라면, 마계의 악마들은 원할 때 원하는 일을 하는 프리랜서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건드린 차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것을 이리저리 엮어 최종적으로는 그 차원을 멸망으로 몰고 가기 위한 협업 능력이 남다른 이들이기도 했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 대신 현재 본인들이 손을 대고 있는 차원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모니터가 한가득한 곳. 바로 악마들이 업무를 보는 공용 집무실이었다.

“흐음?”

그곳에서 악마들 중에서도 ‘복수하는 자를 위한 귀공자’라고도 불리는 마신의 종자, 아스모데우스가 묘한 소리를 흘렸다. 그의 눈앞에는 차원 ‘아르셀’이 보이는 모니터 수십 개가 펼쳐져 있었다.

아르셀은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던 차원이었고, 동시에 주신이 시간을 지워 낸 차원이기도 했다. 또한 거처에서 잘 나오지 않는 마신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마계를 운영하는 마계의 2인자 벨제붑이 직접 손을 써 둔 차원이다.

유일하게 마신에게서 창조에 준하는 권능을 받아 실질적으로 마계를 통치하는 벨제붑, 그가 만든 마룡이 아르셀에 있었다. 현재 벨제붑이 차원 ‘율본’을 공격하고 있는 마족들을 통솔하느라 바빠서 아르셀의 마룡은 게으름을 부리는 중이다.

시간을 지워 내는 프로젝트는 아스모데우스가 정말 싫어하는 분야였기에, 그의 심기는 지난 몇 년간 계속 불편했다. 영웅이라는 놈이 전 차원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 만큼 짙고 강렬한 복수심에 휘감겨서 곧장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아스모데우스는 벨제붑에게 아르셀에 손을 보탠다는 소식을 알린 후 영웅의 복수심을 열심히 부추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워지는 바람에 영웅이 가지고 있던 강렬한 복수심까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어찌나 허탈하던지.

다행히도, 완성 직전의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멍하게 앉아 있던 그는 구원자의 복수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서 시간이 지워진 이후에는 영웅이 아닌 구원자에게 초점을 맞춰 복수심을 부추겨 왔다.

매일 밤 에스메랄다가 꾸는 악몽이 바로 아스모데우스의 작품이었다. 복수심을 먹고 자라는 씨앗이 그녀의 속에 있으니까. 계속 복수만을 바라게 되어 과정에서 흐를 핏물도, 과정의 결과가 가져올 멸망도 상관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분명 그러했었는데……. 구원자가 영웅과 마주치던 순간부터 새까맣던 영혼에 하얀 반점 같은 게 생겨났다.

세상에, 한번 타락해서 죄악을 외면한 영혼이 다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니! 과연, 기적을 행하는 인간답다고 해야 할까?

그때부터 약간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구원자는 더 이상 죄책감을 외면하지 않고 완전히 죄악을 직면했다. 주신의 아이를 타락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는 그 영혼의 타락 여부를 알기 위해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원자의 영혼이 검은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색이 되어 버린 것도, 그 빛이 시리듯 차갑고 날카롭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 복수라는 변명을 대며 학살 같은 악행을 행하지는 않을 테고, 그 과정에서 도래할지도 모르는 멸망을 방조하지는 않을 터. 영웅의 복수심을 발견할 때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르셀의 일에 매달렸는데 실패하게 생겼다.

‘아, 거기? 용을 하나 넣어 놨던가? 그거 가져다 쓰면 되겠네. 나 지금 율본 때문에 바빠서 시간이 없어.’

아르셀에 손을 보태겠다는 말을 했을 때 벨제붑은 그렇게 답했다. 그런데 실패하게 생겼으니…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스모데우스는 그의 권한에 속한 복수심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은 인과율의 빈틈을 이용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미카엘이나 가브리엘, 라파엘 같은 치천사들은 주신으로부터 인과율을 뚫고 들어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다. 각기 심판, 인도, 보호 같은 권능은 무에서 유가 가능한 힘이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악인이 급사하거나, 때때로 개개인이 신의 계시를 받는 일이 모두 그런 것에 해당되었다.

인과율이 닫힌다 해도 간섭할 수 있을 정도의 절대적인 힘. 물론, 한번 개입할 때마다 치천사들이 탈진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널브러지는 통에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막다른 순간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루시퍼에게 듣기로는 각자의 권능을 사용하기보단 신과 함께 찔끔찔끔 개입하는 방식이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나?

치천사들이 나가떨어지면 그들이 담당한 업무가 마비되어 버릴 테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의 개별적인 개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할 수 있음에도 이후를 위해 자제하는 것이다.

반면 아스모데우스 같은 악마는 주신의 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주신이 창조한 세계에서는 무에서 유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풀리는 것이 한계였다. 가령 탐욕의 악마 마몬은 인간이 가진 탐욕을 부추겨 악행을 자행하게 해 결국은 자멸하도록 만드는 편이었다. 그에게 현혹되어 전쟁을 일삼거나 폭정과 수탈을 일삼은 지배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허위와 사기의 귀공자 벨리알은 거짓과 기만으로 인간들을 현혹해 그들의 관계를 파탄 내거나 배신이 판치게 만든다. 그의 현혹에 넘어가 가족을 팔아먹고, 주군을 찌르고, 반역을 일으킨 인간들이 한 무더기다.

음욕의 악마인 바알의 경우에는 인간이 욕망에 취하게 만들어 타인의 배우자를 겁간하거나, 원하는 이성을 빼앗기 위해 기존의 배우자를 살해하는 등의 파국을 만들기도 한다. 바알은 다른 악마들과 가장 많은 협업을 하는 악마이기도 했다. 음욕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렇듯 악마들은 마신에게 부여받은 권능으로 인간들이 기존에 가진 것을 이용했다. 그중 아스모데우스는 복수에 눈이 먼 자들을 유혹하고 부추기는 악마였다. 그것이 세상의 혼란이나 파국으로 번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번에 나타난 구원자의 복수심은 잘만 이용하면 아르셀의 멸망까지 가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짙고 강렬했는데, 그게 사라졌다. 몇 년이나 공을 들여 쌓은 탑이 흔들리다 못해 끝내 무너지자 아스모데우스는 허탈했다.

구원자가 제정신을 차렸으니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터. 그에 ‘아르셀을 포기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던 중에 영웅이 인과율을 끊고 기억을 되찾았다.

아스모데우스는 신과 달리 구원자가 죽은 이후의 일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손을 댈 만한 가치가 넘쳐나는 복수심이 피어났던 시기였으니까. 실제로 성공에 가깝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처럼 백지화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다시 해야 했지만. 그때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아스모데우스는 흐음, 흐음, 하며 계속 생각을 곱씹었다.

아르셀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영웅 놈이 구원자에게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녀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모호했다. 아스모데우스는 그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 영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시간이 지워졌을 때, 본시대의 기억이 없는 영웅이 멸망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었다. 오히려 남부 전선을 막아내는 데 열중하고 있기에 방해가 되는구나, 싶었을 정도다. 해서 게으른 마룡 놈의 궁둥짝을 걷어찼다. 아직 마룡 쪽의 준비는 미흡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대형 마수 두 마리를 보내 영웅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죽이지 못해 결국 살아난 영웅이 이렇게 새까맣게 변할 줄이야. 역시, 세상사 새옹지마다. 창조물이 창조주가 정한 규칙을 제힘으로 깨고 기억을 되찾을 줄이야. 또 한 번 기적을 행하는 인간의 면모에 놀라울 뿐이다.

아쉽게도 회귀 이전과 달리 구원자가 살아 있기 때문인지 복수심이 희미했다. 그럼 살아 있는 구원자로 인해 변한 상황을 이용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영웅에게서 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의 끝에서 답을 찾아낸 아스모데우스가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그는 곧 멀지 않은 자리에서 팝콘을 먹으며 히죽거리고 있는 바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알의 시선은 전방의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나 마나 그의 현혹에 넘어가 음욕에 잠식된 인간이 행동을 개시한 것이겠지.

“바알, 아르셀의 영웅 좀 확인해 봐. 건들 수 있겠어?”

“아르셀? 당장? 지금 거사 직전이라고. 나중에, 나중에.”

욕망에 충실한 바알은 흥미를 끄는 인간이나 차원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 시선도 주지 않고 거절하는 바알의 앞에서 아스모데우스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의 영웅을 건들기에 가장 적당한 건 바알이다. 그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데…….

“흠… 이놈 혼전순결주의인데?”

뭐, 혼인 이전에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상태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그러긴 했었으니까.

“뭐? 그런 재밌는 얘기를 왜 이제 하는데? 당연히 건드려야지! 영웅? 남자야? 여자야? 난 여자를 현혹시키는 게 더 좋던데! 상대는 누구야? 누구?”

역시나, 바알이 흥미를 보이며 아르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 에이…….”

아스모데우스의 말을 듣고 상기되었던 바알의 표정이 푸쉬쉭, 식어 버렸다. 흥미를 잠시 끌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라진 것이다.

“그냥 툭 건들기만 해도 터질 놈이잖아. 벌써 속에 욕망이 한가득 쌓여 있다고. 그걸 꾸역꾸역 참고 있으니까 바로 끝나.”

투덜투덜, 이렇게 쉬운 놈은 재미가 없다며 바알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난 순백처럼 깨끗한 놈들을 망가트리는 게 좋단 말이야. 순수하고 순결한 녀석들이 욕망에 물들어서 짐승처럼 날뛸 때의 쾌감은 남다르거든.”

아스모데우스에게 바알의 취향은 알 바가 아니다. 그는 아르셀을 멸망시켜 마신에게 칭찬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냥 인간 몇을 파국에 직면하게 하는 것과, 차원 하나를 멸망하게 만드는 건 칭찬의 정도가 달랐다. 전자는 잘했다, 한마디지만 후자는 머리 쓰담쓰담까지 받을 수 있단 말이다!

저쪽 동네나 이쪽 동네나, 창조주를 향한 광적인 사랑은 똑같다. 지금 공용 집무실 한쪽에 들여온 소파에 늘어져 있는 루시퍼가 기이한 것이지, 보통은 다 이렇다.

“조금만 건드려 봐. 나 여기 꼭 망가트리고 싶단 말이야. 몇 년이 넘게 공들였다고.”

아스모데우스는 별 관심 없는 눈으로 영웅을 훑고 있는 바알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귀찮은데…….”

“나도 나중에 도와줄게. 응? 나 진짜 간절해. 응?”

바알은 영 관심이 없는 눈치였지만 곧 힐끔, 옆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흠… 얼마나 도와줄 건데?”

“말만 해, 뭔데? 무슨 상황인데?”

“제르마크에 진짜 곧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무튼 허연 놈이 하나 있는데, 걔 망가트리고 싶어. 그놈 동생이 흑마법사들에게 세뇌당해서 그놈 딸이랑 아내랑 다 죽음으로 몰아넣었거든? 그걸 이용해서 흑마법사들한테 복수를 하게 좀 부추겨 줄 수 있어?”

응? 복수는 아스모데우스의 영역이 아닌가. 바알의 영역은 창조물의 음욕인데?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바알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설명을 이었다.

“이게 흑마법사 놈들이 문을 열어서 넘어온 여자를 좋아하고 있거든? 흑마법사한테 복수하게 만들어서 그걸 알게 하고 싶어! 문 여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걸 제 손으로 없애서 여자가 못 돌아가게 만드는 거지. 곧고 정직한 놈이 여자를 향한 욕망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거야! 그만큼 그 여자에게 집착하게 만들어서 감금시키고 겁간하고, 완전 파국으로! 타락시킬 거야! 이놈 진짜 영웅도 아닌데 엄청 허여멀건 놈이라 꼭 망가트리고 싶어!”

“흐음… 뭐, 알겠어. 콜!”

그렇게 바알과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바알은 영웅의 욕망을 건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당시만 해도 바알은 될 듯, 말 듯 여지를 주기만 하고, 결국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영웅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 * *

리퀘나의 사령관저로 들어선 테노리엘의 마차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시끄러운 파열음이었다. 유리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차 내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창문 밖으로 향했다. 나단은 자던 도중 놀라서 시선을 허둥거리고 있었고, 에스메랄다가 있는 위치에서는 페르멘 때문에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 중 소리의 정체를 정확히 본 것은 페르멘 뿐이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이어 다시 파열음 소리가 이어졌다. 살짝 우그러진 창틀 속에서 반짝거리며 정오의 빛을 튕겨 낸 것은 유리였다.

“뭐…….”

대체 창문으로 보이는 저게 왜 떨어졌지? 라는 의문과 함께 페르멘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3층의 중앙에 있어야 할 창문이 없다.

“저긴…….”

사령관저 정문에서 보이는 3층의 중앙에는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사용하는 집무실이 있다. 관저 내의 정원은 물론 관저 밖의 시가지까지 훤히 보이는 저곳에 총사령관의 집무실이 자리 잡은 건 단순히 경치가 좋아서,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마수들이 장악한 대륙의 남부를 총사령관이 직접 보며 감시한다는 의미를 담아, 선황이 직접 지정한 위치였다.

그곳에 있는 게 누구인지 빤히 아는 페르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선을 내려 관저의 입구를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 불만이 쌓였다. 그는 자신의 누이와 아르페시스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이미 쿠베트 후작 성에서부터 어렴풋이 짐작했고, 이후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 때문에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했다. 거기에 더해 페드로가 남긴 말이 쐐기를 박아 버리기까지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가 도착을 했음에도 입구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이미 페르멘의 머릿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빼앗아 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파렴치한 도둑놈’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니 더, 더, 더 아니꼬워 보일 수밖에.

애초에 몇 년 전 황태자의 약혼 연회에서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쿠베트의 정원에서 한 파렴치한 행동은 또 어떻고? 심지어 그는 에스메랄다의 눈에서 눈물까지 뽑아내지 않았나!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어차피 테노리엘이 황실과 척을 지고 있는 이상 두 사람이 혼인을 할 일은 없겠지만…….

‘아르페시스와 페드로 오라버니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페르멘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직접 마중을 나오지도 않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걱정을 해 주는지. 할 수만 있다면 그 은회색 눈동자의 불한당을 누이에게서 당장 떼어 놓고 싶었다.

‘굳이 한마디를 더 남기자면, 천사와 그 녀석을 너무 오래 방해하지는 마라. 내게는 그 녀석도 너희처럼 소중한 동생이니 심술은 적당히 부리고. 너희가 서로 잘 지냈으면 한다.’

형제가 남긴 말이 잠시 그를 주춤거리게 했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생각했다. 너무 오래 방해하지 말라고 했으니 잠시 방해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하고. 그러니 이번 만남에서 둘 사이를 훼방 놓는 건 괜찮을 것이다.

페르멘은 열심히 아르페시스의 흉을 보며 그를 에스메랄다의 옆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페르멘은 마차가 관저에 가까이 갈수록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잠시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마나로 신체의 감각을 확장한 그의 귀에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잡혔다. 기사 작위를 반납했다 하여 그가 훈련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무위를 다듬고 끝없이 정진하는 건 그에게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의 귀에는 소란의 원인이 아주 잘 들렸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출혈이 심하시다, 의원이라도 불러와!’

‘관저 주둔 신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귓가에 들린 소리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그는 곧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출혈?”

“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반문에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어, 엉? 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질문을 하는가 싶었던 에스메랄다는 그저 입술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그녀의 귀에 달려 있던 귀걸이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그제야 페르멘은 그녀의 귀걸이가 마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마도구지? 하고 의문을 느끼는 사이 에스메랄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38년이면… 주둔 신관은 바 윰 세베루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페르멘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어느새 멈춘 마차의 문을 직접 열었다. 먼저 발판을 밟고 땅에 내려선 그가 손을 내밀자 에스메랄다가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다급한 뜀박질과 함께 관저 안에서 웬 소년이 튀어나왔다.

장식이나 자수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새하얀 의복을 통해 그 소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신의 종이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사제다. 그 사제는 입구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줄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사색이 된 얼굴로 정문을 향해 달리는 것이 전부였다. 칼라일도 페르멘처럼 무언가를 들었는지 초조한 기색으로 관저와 사제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페르멘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는 에스메랄다를 연신 힐끔거렸다. 분명 그의 손을 잡아 주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누이는 멀리 있었다. 다시금 곁으로 다가와 주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과 달리 그들 사이에 있는 원인 모를 거리감은 아직 잔존해 있었다.

페르멘은 칼라일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관저의 입구에 멈춰 선 에스메랄다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는 이미 재촉을 위한 말보다는 인내를 위한 침묵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페르멘의 인내와 함께 에스메랄다는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칼라일이 안으로 안내를 하겠다는 말을 건넸음에도 그녀는 관저의 정문을 응시한 채 침묵했다.

이윽고,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평범한 갈색 마차 한 대가 정문을 지나왔다. 마차는 테노리엘의 마차가 그러했던 것처럼 관저의 입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테노리엘의 마차와 달리 다급한 손짓과 함께 벌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 직후 그 마차 속에서 다급히 뛰어내린 중년인을 확인한 페르멘은 가벼운 콧방귀를 꼈다.

눈처럼 새하얀 사내의 옷을 장식하는 건 금색 실로 새겨진 문장 하나가 전부였다. 삼각형을 이룬 덩굴 속에는 두 개의 저울을 가진 천칭과 단단한 방패, 길을 찾기 위한 나침반이 형상화된 채 새겨져 있었다. 세 명의 치천사를 상징하는 문장과 그것을 모두 품은 채 연결하는 덩굴, 그건 주신의 문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신관의 품계는 색채와 의복으로 구분된다. 푸른 실을 사용하는 건 하급 신관, 붉은 실을 사용하는 건 중급 신관이다. 대신관의 경우 금실을 사용하나 목을 감싸는 버클 부분에 천사의 날개를 새긴 케이프를 무조건 걸쳐야 한다. 그러니 케이프를 걸치지 않았음에도 금실을 사용한 저 중년인은 상급 신관이다. 수십 명을 한 번에 치료할 수 있을 만큼 품고 있는 신력이 강대한 주신의 종.

관저 주둔 신관이니 뭐니, 하는 말이 들려왔으니 눈앞의 저 중년인이 바로 그 인물이리라. 남부군에서 가장 중요한 총사령관을 위해 관저에 주둔하는 신관이 자리를 비웠다라…….

예전부터 신전과 관련된 인물은 참으로 싫어했던 페르멘은 다시금, 자신의 가족들이 미사를 가지 않는 이유를 떠올리며 눈에 경멸을 담았다. 어디서 유흥이라도 즐기고 왔나 보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입구에 멈춰 서 있는 이들을 발견한 중년 신관이 움찔거리며 잠시 걸음을 지체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는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관저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 그의 걸음을 붙잡은 건 입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에스메랄다였다.

“변명은 무엇을 덧대어도 변명일 뿐이니.”

페르멘의 시선이 신관에게서 에스메랄다에게로 돌아갔다.

“외면하기 위해 거짓을 쌓아 죄를 부풀리지 말라.”

성서에서 죄악과 관련된 부분의 구절이 아닌가? 거짓으로 죄악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책임지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페르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상급 신관이 딱딱하게 굳은 시선을 에스메랄다에게로 던졌고, 그녀는 신관이 던진 시선을 올곧게 마주하고 있었다.

“너희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에스메랄다가 이어 읊은 것은 종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를 등져 버린 죄인들에게 주신이 남긴 경고였고, 성서에 기록된 마지막 구절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신관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의 존재를 잊지 말라.”

그에 에스메랄다는 한 폭의 그림같이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신관에게 말했다.

“이 이상 주신의 종을 붙잡는 건 실례이겠지요. 부디 서두르시기를.”

그녀는 관저를 비우고 떠났던 그의 행실을 타박했고, 또한 부재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라는 재촉을 건넨 셈이었다. 분명 의도가 명확한 대화였건만 페르멘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태함을 꾸짖고 성실을 가르치는 구절도 많은데 왜, 에스메랄다가 고른 것은 죄악을 숨기기 위해 하는 거짓말을 꾸짖는 구절이었을까? 의무를 저버린 채 관저를 비운 행동을 성서의 마지막 구절로 타박한 것 역시 이상하다. 분명 그의 해석이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찝찝할까?

페르멘은 에스메랄다의 말 속에서 읽어 내지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오멘이나 아레스처럼 중앙 관료로 재직하며 경험을 쌓았다면, 혹은 남부에 있는 신관들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알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멘은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느라 많은 것을 놓쳤다. 결국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긴장감이 서린 침묵을 뒤로하고 신관은 쫓기듯 다급한 걸음과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신관의 퇴장 이후에도 이어지던 정적을 치워 버린 건 칼라일이었다. 그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관저가 조금 어수선한 듯하니… 물자 전달을 비롯한 업무는 잠시 미루는 것이 어떠신지요? 우선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준비한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페르멘은 에스메랄다가 신관이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대신 칼라일의 말을 받았다.

“제가 관련 서류를 가지고 함께 이동할 테니 바로 확인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영주 대리였다. 남부군에 전달하는 물자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고, 아르페시스는 전달받은 물자를 관리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아하니 에스메랄다가 당장 아르페시스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 페르멘은 여기서 굳이 업무를 미뤄 나중에 두 사람이 만나야 하는 명분을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조금 전 생각한 대로 방해를 오래 하지만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지금 하는 것이 처음인데 페드로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리라. 그는 자신의 방해가 ‘오래’라는 수식어로 꾸며지기 전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서 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예, 알겠습니다.”

조금 경직된 칼라일의 대답을 들은 후 페르멘은 에스메랄다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리디, 피곤하지? 먼저 올라가서 쉬어. 물자 업무는 내가 처리해 둘게.”

“……네, 오라버니.”

“나단, 너도 올라가서 쉬고 있어.”

“네, 도련님.”

묘한 상황 앞에서 눈치를 보며 기다리던 나단이 에스메랄다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페르멘은 안내를 위해 다가온 시녀를 따라 먼저 관저 내부로 들어가는 에스메랄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허락도 받았겠다, 이걸로 두 사람이 만나야 할 일이 하나 줄었다. 그는 이번 방문 기간 동안 계속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날 만한 일을 줄여 둘 생각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에스메랄다가 만나길 바란 것이지, 아르페시스와 그녀가 만나길 바라서 함께 온 게 아니었다. 페르멘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칼라일 앞에서 꽤나 순진무구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 *

사라진 시간에서 황태자는 아르페시스를 죽이기 위해 꽤나 많은 공을 들였다. 성공한 적은 없지만.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르페시스가 쌓은 전공을 황태자가 이용하려면 ‘전사’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명예는 생사에 관계없이 주어지지만, 그 명예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오로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살아남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한 전공을 쌓았다. 그에 황태자는 어느 순간부터 아르페시스가 쉽게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와 함께 아르페시스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성정이 난폭하다 한들 권력의 정점을 이어받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머리를 쓸 줄 아는 폭력배, 그게 황태자를 꽤나 정확히 평가한 문장이리라. 그는 자신의 권력과 권위에 위협이 되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상대방의 수를 읽고, 견제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등, 정치적인 안목은 아르페시스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 황태자가 아르페시스를 자신의 제위에 위협이 되는 상대라고 인식했으니 이후의 일은 빤하다.

실제로도 남부에서 나갈 수 없는 처지만 빼면 아르페시스는 황태자 다음으로 제위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럼에도 황태자가 그를 쉽게 죽이지 못한 건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와 상황이 얽혀 있었다.

우선 남부군. 황태자의 경계가 시작될 무렵 아르페시스는 이미 대다수의 남부군에게 충성을 얻은 상태였다. 본부대 병력은 황태자가 보내는 암살자들이 아르페시스에게 칼을 들이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7천을 오가는 본부대 병력이 아르페시스를 호위했다. 마치 황실 기사단과 황실 경비대들이 그러한 것처럼.

다음은 황제. 그는 아르페시스가 남부에서 나오지 못하니 아직은 본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남부군의 생명줄이 중앙 지원금에 달려 있으니 맞는 말이었다. 이 때문에 황제는 그가 죽기 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전공을 세우는 게 황권에 이득이 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태자도, 황제도.

암살 시도는 이미 몇 차례나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개인 무위는 물론 본부대의 호위 역시 깐깐했기에 암살자들이 쉽사리 아르페시스를 제거하지 못했을 뿐.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실패가 이어지자 황태자는 간접적인 방법을 함께 모색했다.

그게 남부에 있는 신관들을 매수해 아르페시스의 부상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쪽으로 이어진 것이다. 직접 죽이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우니, 제대로 낫지 못한 부상을 단 채 전장으로 나가 죽을 가능성을 높이려는 수작이었다.

“지금도 하는 짓은 똑같으니…….”

에스메랄다는 이미 로부오들을 통해 황태자의 사람들이 남부 신관들에게 접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관저 입구에서 마주쳤던 바 윰 세베루스가 이미 황태자에게 굴복한 상태라는 것 역시도.

에스메랄다가 다급할 것이 빤한 그를 붙들어 경고 조의 말을 남긴 이유였다.

본래라면 아르페시스가 신관들의 매수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내년 무렵. 분명 그는 남부에 남아 신전을 지키고 남부군과 협력하는 신관들이 황태자에게 명령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왜 황태자의 뜻에 따르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관련 정보가 그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에스메랄다가 직접 손을 썼다.

매수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페시스가 신관들에게 가지는 건 약간의 불쾌감 정도였다. 알게 된 이후에는 경멸로 변했고. 당장 그가 죽으면 남부군은 물론 남부에도 많은 악영향을 미친다.

가장 대표적으로 금전 문제다. 황족에게 나오는 사비를 합법적으로 가져올 수 없게 되니 남부군 자금 사정은 다시 위축될 터. 아르페시스의 사비 덕분에 남부군의 자금 사정은 딱 적자를 면하는 정상 궤도를 유지 중이다.

9와 10은 큰 차이가 없지만 9는 절대 10이 될 수 없는 법이니, 아르페시스가 없어지면 다시금 정상을 위해서는 조금 부족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부족한 것이 수천, 수만의 부상과 사망으로 이어지기에 군의 자금 사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건 다시 군의 약화로 이어지고, 군의 약화는 남부에 사는 백성들을 위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 외에도 그가 없어졌을 때 남부군이 겪어야 하는 문제는 많다. 아르페시스는 그러한 전말을 빤히 알면서도 신관들이 부상을 가지고 자신을 위협하는 건 황태자에게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신관이란 신의 종을 자처하며 신이 내린 힘으로 신의 아이들을 보살피기는커녕 약탈하는 장사치들, 이었으니까.

사라진 시간에서 38년 이후, 남부에 있는 신관들은 아르페시스를 치료할 때 교묘하게 부상을 남겨 두었다. 마수의 발톱에 찔린 상처를 겉만 그럴듯하게 치료한 후 내상을 남겨 놓거나, 절단된 팔의 근육을 손상된 채로 방치한 적도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으나, 당장 예정된 전투가 가득하니 아르페시스는 그 몸을 이끌고 출전했다.

겉만 그럴싸하게 치료한 부상을 안고 전장에 들어선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게 서너 번 반복되니 아르페시스는 남부에 있는 신관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다행인 건 남부군의 부상자를 치료하는 신관들이 아르페시스에게만 그런 식으로 위험한 짓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나, 다른 이들은 멀쩡하게 치료하는 신관들의 행동에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남부에는 언제나 신관 수가 부족했으니까. 괜한 마찰을 일으켜 신관들이 남부를 떠나면 피해는 고스란히 남부군의 부상자들이 떠안아야 했다. 그 일을 크게 키우는 대신 에스메랄다가 내륙에서 따로 보내 준 신관에게만 치료를 받는 것으로 일을 덮은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내륙에서 신전의 눈을 피해 순례를 이어 나가는 신관을 설득하거나, 돈을 무척이나 밝히는 신관을 사서 그만을 위한 치료를 제공했다. 순례 신관의 안전을 위해서, 혹은 황태자의 추가 매수에 신관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신관을 바꿔 주기까지 했다.

“후…….”

당시 에스메랄다가 그렇게 내륙의 신관을 따로 보내 준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본인의 부상을 가지고 노는 신관에게서 벗어나면 아르페시스가 그들의 속사정을 파고들지 않을 테니까.

그는 전체를 위해 자신의 문제를 덮을 수 있는 성정을 가졌지만, 적의를 가진 상대방의 속사정까지 부러 보살필 만큼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자신의 사람에겐 굳건한 동료가, 자신의 적에게는 강력한 적이 되는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그리 호전적이기 때문에 황제가 자신을 거둔 이유를 알고도 절망해 자결하는 대신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감내한 것이고.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성향을 이용해 신관들이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던 이유를 감추고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알았다면… 분명 동요했겠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면, 아르페시스는 분명 자신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계속 힘들어질 신관들을 걱정했을 테니까.

그는 분명 호전적인 사람이었지만, 또한 너무나도 따듯한 사람이었다. 남부 신관들과 관련된 일이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번민을 안겨 주지 않기를 바랐기에, 에스메랄다는 그의 눈과 귀를 막기로 했다.

그는 몰랐겠지만 남부에 있는 신관들이 황태자의 지시에 따라 그를 위험에 빠트린 건 재물을 향한 탐욕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금전이 오가긴 했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황태자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두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험하기 그지없는 남부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스스로의 탐욕을 위해 권력과 재물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내륙의 신관들과는 달리 남부의 신관들은 어떻게든 발버둥이라도 쳐 보려고 악행을 감내하기로 한 이들이다.

그들은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신의 자식들 중에서도 특히, 본인들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최약자를 위해서라는 비겁하고도 슬픈 변명을 내세웠다. 그게 결국 사정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이들을 약탈하는 방향이 된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서로를 밀어내는 법이지.”

자조적인 목소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억을 불러왔다. 에스메랄다는 마를 생각이 없는 한숨의 샘을 품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대신관은 총 14명, 그 아래 신관 운영 자격을 가진 상급 신관은 3천 명이 조금 안 된다.

기사들과 구분 체계는 유사하나 신관들이 속해 있는 제도는 조금 더 폐쇄적이고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재계보다 더한 인맥과 혈연에 얽매이는 것이 바로 신관들의 세계였다.

그런 특징 속에서 대부분의 상급 신관은 하나 이상의 신관을 운영하는 편이다. 신전이 많으면 헌금이 많이 들어오니까. 자신이 직접 사제 시절부터 이끈 신관에게 멀리 있는 신전의 대리 감독을 맡기며 여러 개의 신전으로 장사를 하는 셈이다.

“그 장사가 필요한 세상이라니…….”

조금 전 만난 세베루스도 남부에서만 총 3개의 신전을 운영 중인 상급 신관이다. 하지만 내륙의 장사치 신관들과 그는 분명하게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3개의 신전에서 모두 자체적으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보살피는 고아들만 해도 3백여 명에 가깝다. 고아원은 돈이 든다. 보살피는 아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돈이 든다. 아이들에게 먹일 음식, 입힐 옷, 신길 신발, 머물 수 있는 장소, 겨울에 필요한 장작과 덮고 재울 이불까지.

평민들을 치료하면서 헌금을 받는 정도로는 고아원에 소속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고, 매일매일 길거리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더 데려올 수도 없다.

세베루스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병력 주둔지에서 살다시피 하며 남부군을 치료하고 돈을 벌었다. 신력을 사용해 돈 놀음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백 명의 아이들을 보살필 수 없기에 죄악을 감내하고 남부군을 약탈한 것이다.

그는… 남부의 신관들은 현실을 장악한 불합리 앞에서 발악을 택한 이들이다. 단신의 힘으로 저항을 해 봐야 대륙 전체에 흩어져 있는 대신관들에게 제거될 뿐이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변명도 그들의 약탈에 한몫을 보태었다.

신력 치료 시 금전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저항하는 사이 죽어 나갈 이들을 버릴 수 없다는 변명도 있었겠지.

에스메랄다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세베루스는 지난 바의 달에 황태자의 접근과 동시에 관저 주둔 신관에 지원했을 것이다.

“신전과 고아원은 이미 장악되었을 테고…….”

지금쯤이면 그가 운영하는 신전과 고아원에 황태자가 고용해 보낸 용병들이 발을 들이밀었겠지. 그들이 아이들은 물론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제들까지 위협하고 있으니, 세베루스는 다시 비겁한 변명을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세베루스가 선택한 우선순위는 아르페시스도, 그와 함께하는 수만의 남부군도 아니었다. 그들보다 약한 고아들이었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비판할 수는 있었지만 도무지 비난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묵으로 그들의 발악을 지지했다. 그들의 죄를 묵인하고 다른 신관으로 아르페시스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대륙 전역에 있는 14인의 대신관 중 무려 13명이 금전 보상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신력을 베푸는 신관들을 제거 대상으로 여긴다. 한 명은 대륙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한 다시 모습을 감추는 걸 반복하고 있다. 그마저도 10여 년 전부터 종적이 아예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아비체룬이 국경을 닫을 때 연락이 끊겼기에 사실상 대신관은 12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누군가 돈을 받지 않음에도 신력을 베풀면, 돈을 받아야만 신력을 베푸는 이들은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그 비난이 커다란 해일이 되어 제도를 완전히 망가트리지 않도록 미리 단속을 하는 셈이다. 실제로 매해 순례 신관들 중 일부가 실종된다.

금전을 받지 않는 순례 신관에 대한 소문은 백성들을 통해 무척이나 쉽게 퍼져 나간다. 그건 그들의 위치를 노출하는 정보나 다름없다. 그저 받은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순례 신관을 칭송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그들을 위협하는 세상이다.

백성들의 입을 타고 흐르는 소문을 들으면 12인의 대신관과 그들을 따르는 세력이 문제의 순례 신관을 쫓고, 제거한다. 신력 치료에는 무조건 금전이 오가야만 한다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부정이었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가 한 일 중에는 그런 순례 신관들에게 보호 인력을 붙이는 것도 있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남부에 남아 신의 불쌍한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신관들의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은 남부군을 통해 번 돈을 난민 수용소나 고아원, 빈민촌, 쿠그스 병자들에게 푼다. 신력으로 치료를 하고 받는 돈을 전부 그렇게 사용했다. 돈을 받지 않다가 소문이 나면 제거될 테고,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그들이 지키는 수만의 약자가 죽는다.

남부의 신관들은 고아원이나 빈민촌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이가 차면 성별에 관계없이 유곽을 알선해 주기도 한다. 그들이 돌봐야 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고, 혼자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몸이 자란 아이들까지 보살필 여력은 없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택한 악행 덕에 수만의 백성들이 삶을 이어 가고 있다.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은 남부 신관들이 하는 일을 필요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관들의 악행을 캐내어 고발하면서도 남부에 있는 신관들만은 건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비겁한 변명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비겁한 변명이 아르페시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남부 신관들을 고발하지 않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을 남부군의 피해를 야기하지 않기 위한 침묵 정도로 이해했겠지만 말이다.

“후우…….”

진실은 때때로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 되어 사람을 짓누르기에,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그 짐을 짊어지지 않길 바랐다. 당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살아남아 남부군을 살리고, 살아남은 남부군은 남부를 지키는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침묵과 은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아르페시스를 향한 사랑을 자각했던 상태기에 그 감정 역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전장과 생존에 온 신경을 쏟을 수 있도록 현실의 다른 짐은 모두 그녀가 지고자 노력했다. 가혹한 현실 위에서 짊어져야 하는 짐과 번민이 전장에서 그를 노리고 있는 죽음에게 기회를 줄까 봐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에서는……. 조금 전 에스메랄다의 날 선 경고를 듣고 들어간 세베루스가 아르페시스를 제대로 치료했을까?

그녀는 직전에 나누었던 휴고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전하께서… 당장은 움직이시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그는 수척해진 에스메랄다를 보고 잠시 움찔거렸지만 용건을 잊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괜찮으냐고, 대체 어디가 아프기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냐고, 세베루스가 치료는 제대로 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가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상황을 방치했기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론, 아직 황태자의 협박이 초기 단계이니 고아원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베루스는 아르페시스의 중요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우선순위가 아르페시스 외의 것이었을 뿐이다.

아직은 고뇌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번에는 아마 그를 치료했겠지. 에스메랄다의 날 선 경고에 자극을 받기도 했을 테니까.

머리는 알고 있지만 심장이 토해 내는 불안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최악은 언젠가 가시거리에 둔 채 경계해야만 하는 법이다. 혹시 모르니 내륙에서 신관을 고용할까? 라는 생각은 금방 포기에 닿았다. 내륙에서 리퀘나까지 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만약 세베루스가 아르페시스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면 그의 건강이 악화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차라리 중앙 리퀘나 성벽 내부에서 생활하는 의원들을 수배하거나, 아직은 황태자의 손이 닿지 않은 중급, 혹은 하급 신관을 찾는 것이 빠르겠지.

“으…….”

에스메랄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문질렀다. 남부의 로부오들은 최소한의 정보 선을 유지할 만한 인력을 제외하고 모두 북쪽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남부 신관들의 일도, 미워서 어쩔 줄 모르겠던 아르페시스의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전, 고작 20여 일 전까지만 해도 에스메랄다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얼마 남지 않은 내전이었다. 그래서 황태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음에도 부러 무시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후방 도시에서 에반스를 만나 황태자의 용병들을 당장 남부에서 치우라고 지시했지만, 고작 이틀 전의 일이다.

그녀는 그전까지 이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방치했다. 그 사실이 죄책감을 만들어 그녀를 짓누른다. 세베루스를 비롯한 남부 신관들에게 황태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으면 지금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머저리 같으니라고…….”

과거에 쉽게 놔 버린 눈송이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계속 구르며 크기를 불려 버렸다. 그 결과 지금에 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버거운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에스메랄다를 덮쳐 왔다. 그녀가 한 모든 선택은 후회가 되어 그녀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에스메랄다는 관저에 들어오기 전 마차에서 들었던 소음을 곱씹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관저에서 그가 다칠 일이 어디에 있다고 출혈이니, 피니 하는 단어가 들린단 말인가.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에스메랄다는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세베루스를 비롯한 남부의 신관들이 협박에 굴복한 건 반항할 수 있는 무력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채워 줄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가 밉고, 그를 미워하는 스스로가 또 미운 상태에서 내전을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그의 안위를 위한 일을 할 만한 정신이 어디에 있었다고.

그녀가 움직이지 않은 결과, 지금 아르페시스는 신관들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복수심에 휘둘리고, 분노에 취한 채 해 버린 선택에서 남은 후회는 너무 많았다.

에스메랄다는 생각이 후회를 불러오고, 그 후회가 다시 생각을 불러오는 시간 속에서 방황했다. 다시 한번 기적이 행해져 그녀가 또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모를까, 후회한다고 하여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시드는 꽃처럼 사라진 기회를 되찾을 수는 없다.

‘너희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나의 존재를 잊지 말라.’

조금 전 신관을 향해 했던 말처럼 신은 그녀가 행한 모든 것을 보았을 테니 다시금 시간을 되돌아갈 가능성 따위는 없지 않겠나?

사라진 시간 속에서의 그녀는 끝이 비참했을지언정 누구보다 당당했다. 반면 지금은 페르멘이 받은 미소를 부러워하고, 그것을 자신이 가질 수 없음을 절절히 실감하는 죄인일 뿐이다.

복수에 눈이 멀고, 분노에 잡아먹혀 행했던 모든 일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함과, 온몸이 꽁꽁 동여매진 것 같은 갑갑함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똑같은 게 신기할 지경이네…….”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백성들에게 가지는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참, 우스운 건지 끔찍한 건지 모르겠다. 에스메랄다의 입술 틈을 비집고 거친 숨결이 계속 들락날락거렸다. 그녀는 이틀 전부터 생각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당장 후회했다 하여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탄 배는 너무 멀리 왔다. 당장 그녀가 손을 뗀다 해도 내전은 진행될 것이다. 내전은 막을 수 없다. 황제조차 막지 못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나.

결국 지금까지 그녀가 만들어 온 핏물보다 더 많은 핏물이 흐를 것이다. 그 핏물이 어리석기에 희생되어야 하는 백성들의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 이틀 전에 마주했던 그 이름 모를 아이와 같은 처지의 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미소와 기회를 잃게 될 터.

스스로가 만들어 낸 파국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사고를 치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무력했다. 분명 그녀가 벌인 일이건만 그녀는 그 일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가 없었다. 무력감은 계속 에스메랄다의 생각과 움직임을 방해했다.

“나약하기는…….”

그 악순환을 끊어 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가 없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자신이 만들어 낸 핏물 속에서 허덕이는 중이었다.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 그녀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후회를 불러오는 생각을 곱씹으며 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창틈으로 들어와 그녀를 비추던 햇빛은 노을로 물들고, 그 노을은 다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어둠을 데려왔다.

에스메랄다는 다급히 숨을 들이쉬었지만 이틀 전부터 그녀의 숨통을 조르기만 하는 후회와 번민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헉, 헉, 헉, 갈급하게 공기를 채워 넣어도 숨통이 트이지를 않는다.

갑갑함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악행으로 인해 사그라졌을 것들이 그녀를 찾아와 속살거렸다. 네가 갈 지옥이 기대되지 않느냐고.

속삭임의 뒤에서 음울한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절로 조소가 흘렀다. 직접 이 길을 택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길의 끝에서 마주할 지옥행 판결을 무서워하다니, 참 우습다.

한때는 놈들과 함께라면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지금은 훗날 선고받게 될 지옥의 형벌이 두려운 것이다. 외면할 때와 달리 스스로가 버린 것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똑바로 직면해 버렸으니까. 그것을 버린 죄악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도 깨달아 버렸으니까.

세리와 메리라는 어린아이들이 식인으로 살아났을 때, 그녀는 두 아이를 직접 보지 않았다. 그래서 죄악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확실하게 보지 않고 외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가 과거에 죽인 목숨과 앞으로 죽이게 될 목숨까지,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다.

시간을 돌아오면 무얼 하나. 인간이란 한 치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을.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시시각각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피해 방을 나섰다. 그녀를 찾아온 것들로 가득 차 버린 방을 떠나 정처 없이 내달렸다.

“어?”

겁쟁이처럼 도망치느라 복도에서 나단을 마주친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쫓아오는 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에스메랄다가 다시 주변을 인식한 건 관저의 후원에 도착한 후였다.

페드로가 살아 있던 시절, 리퀘나로 온 그녀가 아르페시스와 종종 밀회를 가지던 그 연못. 그녀의 곁에서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거리고 있는 사람은 나단이었다.

“아, 아가씨… 외, 외투…….”

그는 외투를 벗어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온기와 함께 그녀의 이성도 밀려들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흥분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잠시 이성의 끈을 놔 버리며 추태를 부린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숨결을 따라 허공에 흐트러지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진정을 되찾고자 호흡을 길게 늘이자 하얀 입김이 길게 늘어졌다. 곁에서 함께 숨을 고르던 나단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음… 급한 일이 아니면 일단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밤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워요. 네?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돼요.”

나단의 말대로, 남부라고 하지만 겨울의 차가운 밤바람은 그녀의 손과 얼굴을 얼려 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살피는 나단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그녀는 순순히 발을 돌렸다.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충동적인 걸음이었을 뿐이다.

녹색 눈동자가 잠시 연못에 닿았지만 어둠에 잡아먹힌 연못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초승달이 떠 있기는 했지만, 어둠은 너무나도 짙어서 견고한 절벽 앞에 있는 연못의 물과 흙을 흐릿하게 구분하는 게 한계였다.

에스메랄다는 나단과 함께 연못을 등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연못에서 몇 번이고 만났던 아르페시스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수줍어하던 모습도, 발갛게 뺨과 귀를 붉히던 모습도, 행복에 겨워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던 모습까지.

그는 무사할까? 세베루스가 정말 제대로 치료를 했나? 멍청하게 분노에 휘둘려 그가 위험할 걸 알면서도 황태자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그 걱정과 자책이 쫓기듯 도망 온 그녀를 이곳으로 안내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멈출 기미가 없는 한숨을 내쉬다 말고 움찔거렸다.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했다.”

어둠을 틈타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짧은 음절 하나만으로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아르페시스다. 마도구로 도청한 대화에 따르면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근처에 있다.

깨어났구나.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안도감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단이 다급히 부축을 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의 몸은 무너졌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몸의 균형을 다시 잡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미 그에게로 오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가고 싶었다. 성급하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점차 느려진 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대화 때문이었다.

“무리를 하시…….”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전하께선 쓰러지셨…….”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라 했다.”

“……마치 여기서 저를 쫓아내고 싶으신 것처럼 행동하시는군요.”

낮고 익숙한 저음은 아르페시스의 것, 중음의 언저리에서 차분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다.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낯선 음성이기도 했다. 누구지?

“혼절하셨다 깨어나신 분께서 대체 왜 이 추운 곳에 그런 차림으로 계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휴식을 취하시라 충언을 올렸을 뿐입니다. 헌데 저를 쫓아내시려 하니… 여기에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스메랄다의 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평소의 것과 유사해졌을 때.

“아, 여기서 테노리엘 영애라도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전하의 연인이라는 그 영애 말입니다.”

에스메랄다는 고요했으나 곁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던 나단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도착했다는 말은 들었지요.”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비어 버린 자리를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계속 채워 나갔다.

“그 영애도 참 뻔뻔하군요. 2년이 넘게 연락도 없다가, 리퀘나에 찾아오자마자 총사령관님을 불러냈…….”

“그 입 다물라!”

그녀와 아르페시스 사이의 일을 정체 모를 여인이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해 경각심을 느끼고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까지 움찔거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콰득, 빠득, 분명 무언가 으깨지고 망가지는 소리였다.

“네까짓 게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성은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였다. 에스메랄다는 꾸준히 이어 왔던 걸음을 잠시간 멈추어야만 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그녀가 무얼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노성에서 분노가 넘실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분노에 경직되었던 걸음을 다시 내디디며 마른침을 삼켰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테노리엘 영애에 대해 모릅니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지요.”

그에게 답하고 있는 목소리가 스산하다.

“하지만 모름에도 그녀가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일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어질 말을 들으면 화가 날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하나 더 있군요. 오라비의 명예로운 죽음을 타인의 탓으로 미루고 원망이나 해 대는 이가 그리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 말입니다.”

나단의 입에서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에스메랄다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엇박을 이루며 뛰기 시작했다.

“그런 속사정을 알고 나니 한때는 포기하려 했던 제가 참 어리석게 느껴지더군요.”

“네 감정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 이미 거절했다.”

“거절하셨다 하여 제가 마음을 정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 또한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마지막 경고다. 돌아가라.”

에스메랄다는 이어지는 말을 아주 정확하게 들었다.

“죄송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김에 그분을 한번 뵐 생각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제가 사랑하는 사내의 연인을 언제 만나 보겠습니까.”

조금 전의 직감은 적중했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마가 치솟았다. 그건 자신의 연인을 빼앗기 위해 도전해 온 적수를 향한 적의였다. 아르페시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그를 흠모하는 이성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화가 났다. 그래, 화가 났다.

“저는 볼품없는 여인에게 총사령관님을 빼앗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보다는 제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신분과 직급을 모두 제쳐 둔 채 열렬한 구애를 하는 목소리 뒤로 아르페시스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와 나단이 나무 사이에 있는 길목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누군지 모를 이를 등진 채 에스메랄다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못에서 후원으로 빠져나오는 길목의 입구에서 에스메랄다는 그를 마주했다. 그의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아르페시스의 뒤로 흘렀다. 그가 격한 숨을 들이쉬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신경을 긁어 대는 인물을 확인하느라 보지 못했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들어 본 것 같지만 낯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앙뷔 남작의 딸이자 보좌관이기도 한 라 게만 앙뷔 로웨나였다. 곧 있을 정기 회의에 부대 사령관의 대리로 온 것일 터. 사라진 시간에서 두어 번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눈 적이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발을 들인 장소는 꽤나 엉망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두 사람이 대련이라도 한 줄 알 것이다. 로웨나의 근방에 있는 나무와 수풀은 꺾이고 땅은 뒤집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의 곁에 닿기 전에 발걸음을 멈춘 에스메랄다는 주변을 살펴보지 못했다. 멈추어 서자마자 로웨나가 도전적인 눈을 빛내며 말을 덧붙였기 때문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오라비의 죽음을 당신의 탓으로 돌리며 불합리한 원망을 하는 이보다, 제가 당신께 더 어울리는 배필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저건 아르페시스가 아닌 에스메랄다에게 하는 말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불시에, 그것도 로웨나에게 선전 포고를 받을 줄이야.

그녀의 기억 속에서 로웨나는 아르페시스에게 연정을 품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로웨나의 행동을 바꿔 놓았을까? 잠시 생각을 해 볼까 싶었지만 에스메랄다는 답을 찾는 대신 의문 자체를 치워 버렸다.

원인이 어떠하든 무슨 상관인가. 이미 로웨나는 아르페시스를 향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속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관여한 탓에 로웨나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잊지 않았다. 그녀를 인지한 직후 피어난 죄책감이 에스메랄다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건 오롯이 죄책감으로 인한 감정은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로웨나가 한 말에 반박할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잘못도 아닌데 그에게 원망을 쏟느라 2년을 허비한 그녀는 부족하고 볼품없었다.

반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황태자와 피가 섞인 아르페시스에게 사랑을 고한 로웨나는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어떻게 해도 메꿀 수 없는 패배감과 아르페시스를 빼앗길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난동을 부렸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 없는 상황 앞에서조차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과 감정을 적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지. 그녀가 적을 앞두고 쓰는 가면은 언제나 완벽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그저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먼저 남긴 후 곧장 로웨나를 겨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앙뷔 경.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예요. 첫 만남부터 본의 아니게 경의 대화를 엿듣게 되어 죄송합니다.”

로웨나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겐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오로지 로웨나만을 응시했다.

“변명을 조금 곁들여 보자면, 길이 이곳뿐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중요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으니 저는 바로 자리를 피해…….”

에스메랄다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 다가온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으니까. 그녀는 실제로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던 게 아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두고 걸어온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고, 그 싸움에서 패배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수년 전 쿠베트성에서 오래도록 홀로 품기만 했던 사랑을 그에게 고했을 때. 포기하자고, 거리를 벌리자고, 더없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제 발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아르페시스를 마주했던 그때. 에스메랄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르페시스를 놔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그녀를 비난해도, 그녀가 그를 원망해도, 심지어 더러운 수작을 부려야 하거나 비겁한 거짓으로 점철되어야 한다고 해도, 절대로.

패배감, 불안감, 비참함… 복합적인 감정에 치여 힘들다고는 해도 그 전제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아르페시스를 미워하며 허비한 2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가정에 둔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웨나가 걸어온 싸움에 그녀만의 방식으로 맞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르페시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으니까.

“가지 마…….”

애처로운 목소리는 작았으나, 모두가 각자의 긴장감에 물든 채 침묵하는 바람에 생긴 적막 속에서는 천둥소리보다 컸다.

“그리웠다,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신에게 애원해 볼 정도로 그리워했다. 그러니 가지 마…….”

애절한 목소리가 에스메랄다에게는 승전을, 로웨나에게는 패전을 고했다.

“하지만 전하.”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로웨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앙뷔 경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시던 중이 아닌가요? 제가 자리를 피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중요한 대화 같은 건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로웨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본인에게 내려진 선고를 부정하지 못하고 패배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난 분명히 거절했다. 저 여자의 마음과 나는 무관하다. 그러니 중요하다 언급될 만한 대화를 나눌 이유도 없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지어 보였던 미소에 짙음을 더하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한 것은 사실이니…….”

“지금 이곳에서 자리를 떠나야 할 이는 그대가 아니다. 불청객은 저 여자다. 쫓아낼 테니 제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더하며 애원했다.

“기다리라 하지 않았나. 그래서 기다렸다. 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다시 가겠다는 말을 하나. 제발, 가지 마.”

애초에 이 싸움에서 중요한 건 에스메랄다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또는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같은 게 아니다. 로웨나와 에스메랄다, 두 여인이 모두 원하는 아르페시스의 선택이 중요할 뿐이다. 연적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선택은 언제나 나일 것이라고. 그녀의 선택이 언제나 그였던 것처럼.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앙뷔 경,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아쉽게도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리는 건 어렵겠네요.”

아르페시스가 붙잡은 건 에스메랄다이고 쫓아낸 건 로웨나니까. 에스메랄다의 도발에도 로웨나는 이를 악문 채 답이 없었다. 기껏 선전 포고를 했는데 첫 합을 나누자마자 허무하게 패배하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으리라. 이미 승패의 판결이 끝난 싸움이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벙긋거린 로웨나를 막아선 건, 그녀와 대립하는 에스메랄다가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아르페시스였다.

“돌아가라, 명령이다.”

그는 조금 전의 애처로움을 어디로 던져 버렸는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면 불복의 죄를 묻겠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내내 에스메랄다를 품에서 놔주지 않았다. 여전히 로웨나를 등진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이보다 완벽한 패배 선고가 있을까.

로웨나는 에스메랄다의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시선 한 줌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에스메랄다는 딱딱하게 굳은 걸음을 내디뎌 멀어지는 로웨나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흥미롭네.”

로웨나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에스메랄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를 밀쳐 내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에스메랄다보다 머리 한 개가 넘도록 큰 체격의 사내는 나약한 힘에도 쉽게 밀려났다.

“그래, 너를 사랑하는 게 나만 있을 수는 없겠지.”

“에스메…….”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달아오르던 아르페시스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난 끔찍했는데, 넌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네. 그녀가 마음을 고할 때 어땠어? 우쭐했니? 아니면 기뻤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조금 전 로웨나 앞에서 썼던 가면은 아르페시스 앞에선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꾹 억눌렀던 심장의 난동은 아르페시스 앞에서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뭐……?”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준 시선을 마주하며 반문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경악이었다.

“따로 보내지 말고 함께 가지 그랬니?”

에스메랄다는 한껏 날이 선 말로 그를 할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 못나게도, 또 한 번 그를 상처 주고 있었다. 그녀가 페드로의 죽음 이후 나날이 메말라 가는 동안, 그는 다른 여인의 사랑을 받으며 하하호호, 웃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그러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불안해서, 겁이 나서 이러는 것이다. 그녀가 못난 짓을 하는 동안 아르페시스가 그녀보다 훌륭한 여인에게 흔들렸을까 봐. 그게 당연한 거니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믿지만, 시간을 되돌아왔음에도 후회만 남는 선택을 해 온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아르페시스에게는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다. 그게 그의 화를 건드린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턱이 불거지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었다. 그건 페드로의 버릇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꽉 억눌린 목소리에 잠시 움찔거렸지만, 에스메랄다는 말을 삼키지 않고 모조리 내뱉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일 테니 하는 말이야. 그녀는 나와 달리 멋대로 연락도 끊거나, 옹졸하게 네 잘못도 아닌 일을 들먹이며 원망하지도 않을걸? 지금이라도 따라가는 게 어때?”

아르페시스가 사나운 기색으로 되물어 왔다.

“내가 그대의 신뢰를 등질 만한 짓이라도 했나?”

멋대로 화풀이를 하던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말문이 막힌 사이 아르페시스가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분명 거절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어떤 감정도 없어. 그런데 왜 내가 흔들린 것처럼 말하지?”

아르페시스가 격양된 것이 눈에 보였다. 에스메랄다의 화처럼, 그의 화도 점점 크기를 키우기만 했다. 서로의 감정이 격양된 상태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아르페시스였다. 그는 큼지막한 손을 뻗어 에스메랄다를 끌어당겼다.

“약속하지 않았나. 오로지 그대만을 보겠다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그가 잡은 건 손목이 아니라 팔뚝이었다. 그것도 어깨와 가까운 곳. 그런데 손아귀에 잡힌 팔뚝은 너무나도 가늘어 한 손으로 감싸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분노인지, 자책인지, 그도 아니면… 에스메랄다는 그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대뿐이라는 걸 믿지 못하는 건가?”

그의 음성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실제로 아르페시스는 현재 매우 초조한 상태였기에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2년이다. 실제로는 2년이 훌쩍 넘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여름이었으니까. 그 긴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에스메랄다에게 외도를 의심받게 될 거라곤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한 적은 있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거라곤 정말……. 그를 노려보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너무 날카로워서 아팠다. 그녀의 분노는 비수가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

“왜, 나를 믿어 주지 않지? 지금의 나는… 아니, 그래, 나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그는 순간적인 실수로 헛말이 튀어 나갈 만큼 여유가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말에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엉켰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당장 눈앞에 다가온 화가 먼저였다.

아르페시스의 말은 맞다. 그는 의심받을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한 적이 없다. 이건 그가 아니라 그녀 때문이다. 열등감과 패배감, 그리고 불안감.

“나를 거절했던 사람을 왜 믿어야 해?”

이번에는 아르페시스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그의 표정은 또 한 차례 묘해졌다.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의 표정을 읽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화가 난 동시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리며 입을 벙긋거리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을 떼어 내고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다시 손을 뻗었다.

도중에 나단이 끼어드는 바람에 에스메랄다에게 닿지는 못했지만. 곤란함, 당혹, 그리고 묘한 열기와 분노, 어색함까지 섞여 있던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한순간 분노로 물들며 험악해졌다.

“어…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전… 우악!”

아르페시스는 눈앞에 있는 방해물을 밀쳐 냈다. 정말 우악스러운 힘에 옆으로 떠밀린 나단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의 부재로 다시금 열린 길을 따라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훌쩍 다가섰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다 설명하지 않았나?”

“글쎄, 나는 거부했지만 그녀와는 달랐을지 누가 알아?”

“젠장, 정말 미치겠군! 아니라고 하지 않나! 왜 이런 얘기를 이렇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나는 그저…….”

나단이 두 사람의 묘한 말싸움을 보며 얼을 빼놓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그대뿐이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게는 그대뿐이라고!”

절절한 말의 뒤에 이어진 답은 단호했고, 또한 명확했다.

“증명해 봐.”

아르페시스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그가 초조하게 말을 고르는 동안 에스메랄다가 다시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이것 봐, 넌 또 나를 거부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나는 그저 이런 식으로, 이렇게 떠밀리듯이… 젠장, 그대는 나를 경계해야 해. 이리 쉽게 허락해 줄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그대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데, 내 속에 있는 저열함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어찌 그리도 쉽게 허락을 논하나!”

“이러니 너를 의심하는 거야. 넌 사랑을 고하면서도 매번 나를 거부하고 미루잖아! 그런데 어떻게 신뢰하겠냐고!”

“지금 그대의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아파 보이는 이에게 어찌 그런 짓을 하나!”

“지난번에는 네 가치관을 변명으로 삼더니, 이번에는 내 탓이라는 거야? 다음에 네가 할 변명은 뭐가 될까?”

“정말 돌겠군, 변명이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마를 정도로 힘들어한 그대에게 내 욕망을 내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대체 왜 그… 그런 그게 없었다 하여 내 마음을 의심하느냔 말이다! 그대를 위해서 참고 있는 것뿐…….”

“그게 어째서 나를 위한 거야? 원한다고, 바란다고 몇 번을 말해!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너 편하자고 피하는 거면서, 결국은 너를 위한 거잖아!”

서로를 마주한 채 언성을 높이던 중, 아르페시스가 욱하는 표정으로 에스메랄다를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스칠 만큼, 곧장 입술이 닿는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선명하게 두드러져 있는 아르페시스의 목젖이 크게 반동했다. 어느새 이를 앙다문 그는 언성을 높인 게 언제였냐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를 위해서? 내가 정말 나를 위하기만 했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그대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더 이상은, 나를 부추기지 마.”

마지막 경고처럼, 필사적인 인내를 담은 아르페시스의 말이 끝나자 에스메랄다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녹안에는 반항심과 원망, 그리고 짙은 불만이 가득했다. 이어진 말에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계속 부추겨도 넌 나를 거부할 거잖아.”

아르페시스가 꽉 물고 있던 잇새 사이로 아득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렵게 답을 꺼내 놓았다.

“후회할 거다.”

“그럴 리가.”

말이 끝난 직후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 버린 주변의 풍경에 몸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 희미한 초승달이 비추는 후원에 있었는데 지금은 불빛이라곤 전혀 없는 어둠 속이었다. 아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발견했다. 그녀는 어느새 실내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무언가 제대로 생각을 곱씹어 볼 여유는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이미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과거보다 더 갈급한 그의 행동에 휘말렸다. 언제 외면했냐는 듯, 아르페시스는 이미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에스메랄다의 입술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르페시스로부터 낮은 비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뒤로 떠밀렸다. 갑작스러운 추락감에 그의 옷깃을 움켜쥐려 했으나, 그녀의 등은 이미 푹신한 침대에 닿아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여 왔다.

에스메랄다는 벌써부터 부족한 숨을 애타게 찾으면서도,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채 매달렸다. 몇 년 만에 다시금 섞인 서로의 타액은 지나치게 달콤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타인과의 접촉에 면역되지 않은 입 속의 여린 살이 계속된 자극 때문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혀를 옭아매며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몸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도 열기로 후끈했다. 에스메랄다는 입맞춤이 주는 자극과 쾌락에 취해 그의 손이 자신의 등을 더듬으며 드레스의 단추를 풀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몰랐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하느라 아르페시스는 몇 번이나 실패를 반복하며 헛손질을 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쉽게 쟁취해 내지 못한 아르페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찌익, 하고 옷감이 찢어지며 에스메랄다의 드레스가 헐거워졌다. 그 직후 단숨에 옷자락을 끌어 내린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축축한 입술이 아찔한 곡선을 품은 둔덕을 더듬었다. 무작정 혀를 내밀어 그 둔덕을 핥아 대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뾰족하게 올라선 유두를 스쳤다.

“흣!”

그 야릇한 감각을 참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신음을 흘리자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손가락 사이에 앙증맞은 유두를 끼우고서 문질렀다.

“흐응!”

에스메랄다가 거듭 신음을 토해 냈고, 아르페시스는 귓가를 타고 들어와 몸을 달궈 버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활짝 벌린 입으로 왼쪽 유두를 물어 버린 아르페시스가 어설프게나마 혀를 굴렸다. 그에 입술을 꾹 깨문 에스메랄다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사이 치마 사이로 들어간 손은 그녀의 얇은 종아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은밀한 접촉이 점점 더 집요함을 더해 갔다.

아르페시스의 손이 에스메랄다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얇은 속옷을 찾아낸 아르페시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흡!”

꾹, 하고 음부의 갈라진 틈을 누르자 에스메랄다의 몸이 꿈틀거렸다. 아르페시스는 더듬더듬, 속옷을 젖히고 뜨거운 음모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닿은 몸 곳곳에 열기가 퍼져 나가며 심장의 박동을 부채질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박동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목덜미에 제 뺨을 비벼 왔다. 한 손 가득 쥔 가슴을 주무르자 에스메랄다의 몸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어느덧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채 숨을 들이쉬기에 이르렀다. 에스메랄다의 체 향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그가 음부의 갈라진 틈을 파고들었다.

“자, 잠깐……!”

그때, 아르페시스와 똑같은 열기에 취해 있던 에스메랄다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분명 그녀의 말을 들었을 텐데, 아르페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듯 귀를 닫아 버렸다.

탄성과 닮은 신음은 분명 아르페시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이를 들이밀어 에스메랄다의 목을 꽉 깨물자, 그녀에게선 한층 더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잠깐, 잠깐만!”

에스메랄다는 아무리 밀어도 밀려나지 않는 아르페시스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분명 그녀가 원하던 일이었음에도 잠시 중단을 외쳐야 할 만큼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아르페시스!”

평소라면 진즉에 물러났을 아르페시스는 몇 번이나 그녀의 부름을 무시한 후에야 반응을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겨우 움직임을 멈춘 아르페시스의 품 아래에서 어렵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아르페시스로부터 들려오는 숨소리 역시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가 숨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스메랄다의 초조함은 더 짙어졌다. 이윽고, 그가 길게 숨을 들이쉬며 에스메랄다의 부름에 답했다. 이런 그의 행동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왜?”

억지로 쥐어짠 것이 분명한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아르페시스를 잔뜩 부추겨 놓고 만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에스메랄다도 면목이 없었다. 그럼에도 얼굴을 발갛게 붉힌 상태로나마 말을 해야만 했다.

“씨, 씻고… 나서…….”

그녀를 뒤덮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자꾸 자신의 냄새를 맡으며 행위를 이어 갈 때부터 다른 의미로 긴장을 해야만 했다. 모르고 넘어가기가 참으로 애매한 것이,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탄식과 닮은 소리를 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꾸만 냄새를 맡는 것 같은 행동에 불쑥 이성이 돌아오고 잡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오늘 오전에 마차를 타고, 오후와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힌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오전에도 여관을 나서며 세안을 한 것이 전부였다. 보통 그녀는 일과를 마치고 목욕을 하니까.

그런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청결에 관련된 문제가 그녀에게 제동을 걸었다. 누군가와 정사를 가져 본 적이 없던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서 무척이나 서툴렀다.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조금의 틈을 두고 웅얼거렸다.

“상관, 없는데…….”

그도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서툴렀고, 경험이 없다 보니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당장 그녀의 체 향을 좋아하기에 씻는 것보다는… 같은 생각을 하며 솔직하게 답할 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본래 사랑하는 이에게는 예쁜 것, 멋진 것,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내가, 신경이 쓰여.”

어색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열기는 다시 달아오르지도 못하고, 식지도 못하는 어색한 상황에 놓였다. 이윽고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에스메랄다는 잔뜩 흐트러진, 아니 거의 반 이상 흘러내린 드레스를 붙들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등을 떼어 냈다.

어둠 속에 있는지라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 채 몇 번 움찔거리더니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던 것도 잠시, 그는 곧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불을…….”

천장에 설치되어 방 전체를 밝히는 전등 마도구를 발동시키기 전, 그는 망설임을 담아 말했다. 에스메랄다는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흐트러진 드레스로 어떻게든 몸을 가렸다. 곧 방이 환해졌고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욕실은 저쪽에… 시녀를 부를까?”

에스메랄다는 재빨리 도리질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상황이 너무 어색한지라 그냥 잠자코 있을 걸, 같은 후회가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씻을 수 있다면 씻고 싶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아르페시스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를 등진 채 서둘러 욕실 안으로 도망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에스메랄다는 문을 닫자마자 문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지던 손길로 인한 긴장감,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은 후회, 그리고 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가 이리저리 섞인 탓이었다. 그와의 정사가 자신 때문에 다시 한번 미루어지자 안타깝고 민망하기도 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하나를 두고 다른 공간에 있는 아르페시스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생각을 자세히 되짚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은 복잡하고 멍한 상태에서 흘러내리다시피 한 옷을 모두 벗었다. 욕조의 물이 다 받아졌을 무렵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될 수 있었다. 욕조 속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은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원래…….”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관계를 가지나? 에스메랄다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을 느끼며 서둘렀다. 왜 이런 순간이 있다는 걸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서둘러 씻고 난 후 또 한 번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커다란 수건을 찾아 두른 채 욕실을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가운이 없다.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나갈 수도 없고, 수건만 두르고 나가기엔 또 민망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에스메랄다는 결국 문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아르페시스?”

목소리를 조금 높여 부르자마자 밖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름에 대한 답은 에스메랄다가 몇 번이나 눈을 끔뻑거린 후에야 들려왔다.

“왜, 왜 그러나?”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에 에스메랄다는 더듬거리며 제 상황을 설명했다.

“가, 가운이… 없어서.”

“아, 어, 내, 내가 본래 가운을 쓰지 않는지라… 자, 잠시만 기다… 악!”

뭔가 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스메랄다는 수건을 모포처럼 두른 채 기다리던 중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도 저만큼이나 긴장한 게 빤히 보여서 그런지,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 언성을 높여 가며 싸운 것이 고작 몇십 분 전일 텐데, 정말 이상한 상황이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완전히 잡아먹었던 화는 미묘한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나가서는 차분하게 대화를 해 볼까?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니 시간은 많았다. 우선 다짜고짜 그를 의심하는 말로 몰아붙인 것도, 2년이나 기다리게 한 것도 사과를 하고…….

내전에 대해서도 완전히 덮어 둘 수는 없다. 에렘의 혼란을 방조할 것이 아니라면 손을 써야 하고, 거기엔 아르페시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녀가 복잡한 심정으로 생각을 곱씹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에스메랄다에게서 현실의 문제를 밀어내 버린다.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고, 틈 사이로 문을 등지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보였다.

“그… 여긴 내 침실이라, 다, 다른 의복이 없어서…….”

비스듬하게 몸을 돌린 아르페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메랄다는 팔만 쏙 내밀어 옷을 받아 들었다. 욕실 문이 다시 닫히는 건 금방이었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보인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부끄러웠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대체 어떻게 후원에 있던 그들이 아르페시스의 침실에 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허리가 너무 커서 줄줄 흘러내리는 그의 바지 때문에 의문 자체를 잊어버렸다.

기장이 너무 길어서 발이 옷 밖으로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상의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들이 흔히 입는 실내복은 전체적으로 에스메랄다에게 너무 컸다. 에스메랄다는 길게 늘어진 소매를 흔들어 보다가 픽, 하고 웃어 버렸다. 묘하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바짓단과 소매를 모두 접은 후에는 허리를 조일 만한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허리춤을 붙든 채 조심스럽게 욕실 밖으로 나섰다. 침대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 손으로 바지를 붙잡은 채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에스메랄다를 발견하자마자 아르페시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묘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에스메랄다였다.

“거기서 뭐 해……?”

“어, 어?”

조금 전보다 긴장을 내려놓은 에스메랄다와 달리 아르페시스는 여전했다. 그녀는 뻣뻣한 아르페시스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게 아르페시스에게 다시 불을 지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여유를 되찾은 그녀는 아직 닫지 못한 욕실 문을 밀며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자 했다. 그래서 양손이 모두 바지에서 떨어졌고,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르페시스의 바지는 그녀가 손을 놓자마자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의 옷이 커서 상의만으로도 허벅지가 가려졌지만, 무릎은 훤히 드러났다.

아르페시스는 그걸 보고 격한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성기는 이미 바짝 고개를 치켜든 채 바지춤을 힘껏 밀어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앞에서 옷을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당황해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나, 나도 씻고 오겠다.”

잠시 후, 아르페시스는 흘러내린 바지를 보며 굳어 있는 에스메랄다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침실에 혼자 남은 에스메랄다의 얼굴은 발갛게 변한 지 오래였다. 좀 편해졌다 싶었더니 이게 뭐람. 그녀는 바지를 다시 입으려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커서 입고 있어 봐야 또 흘러내리겠지. 그리고…….

“어차피 벗을 텐데 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스메랄다는 바지를 집어 들었다가 욕실을 바라보았다.

“아르페시스.”

목소리를 조금 높여 부르니 잠시 후 욕실 안에서 꽉 잠긴 대답이 돌아왔다.

“왜……?”

“의복은 가지고 들어갔어?”

“……아니.”

“그럼 욕실 문에 바지를 걸어 둘게, 나한텐 너무 커.”

“알겠다…….”

웅얼거린 답을 들은 에스메랄다가 바지를 욕실 문에 대충 걸어 놓은 후 몸을 돌렸다. 그녀는 곧장 침대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뭘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혼자 남으니 생각이 다시 길어지려고 했다. 에스메랄다는 우선 아르페시스가 나오면 대화를 해 보든지, 아니면 일단 거사부터 치르고 보든지 결정하자며 애써 생각을 접었다. 조금 전 그와 닿았던 입술, 그가 만지던 감촉, 그가 내뱉던 숨결 같은 걸 떠올리면 생각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잠시 앉아서 아르페시스를 기다리던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안에서 뭘 하기에…….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모로 이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따로 피임약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를 만나는 것만 생각한 탓이다. 에스메랄다는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그가 준비한 것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협탁 서랍을 당겼고, 그곳에 떡하니 있는 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없으면 그를 불러서 물어볼까 했더니, 다행이다. 이건 에렘에서 유통되는 가장 일반적인 피임약이었다. 사내가 복용하는 것과 여인이 복용하는 것, 두 가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마법적 처리를 거쳐 임신을 막는 것으로 양측이 모두 복용할 경우에는 아이가 절대 생기지 않았다. 한쪽만 복용하면 조금의 가능성은 있다고 들었지만… 마실 거니까 뭐. 사용한 것 없이 10병짜리가 온전히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설마 그녀가 온다고 새것으로 바꾸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노란 액체가 담긴 병을 집어 들어 곧장 뚜껑을 땄다. 내용물을 꿀꺽하고 삼킨 후에는 서랍을 다시 밀어 넣기까지 했다. 긴장이 한층 더 완화되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침실을 쭉 돌아보았다.

사라진 시간에선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침실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 두근거리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을 뒤질 생각은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물건이 있는지라 저절로 발걸음이 향했다.

그녀가 앞에 둔 것은 가죽 책이 꽤나 많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파란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고.

사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침실에 책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책과 그리 친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가 자의적으로 보는 책이라곤 전술 교본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그 책들이 전부 그런 종류라고 생각했다.

책 제목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그가 전장에서 직접 활용하며 따로 정리한 것일 수도 있다. 검은 가죽의 책 중 하나를 꺼내 든 건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아르페시스와 달리 에스메랄다는 글과 책에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 책을 전술 교본이라 생각했기에 조만간 다가올 내전에 대한 생각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책을 펼쳐 들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륙력 1441년 사 26일.」

아르페시스가 사적으로 일기를 쓰는 버릇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일기를 엿보는 행동은 무례한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것이 일기라는 걸 알자마자 덮었을 테지만, 눈에 보인 숫자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441년.

지금은 1438년이다. 머리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에스메랄다의 심장은 괴상한 숫자 앞에서 엇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의 사적인 기록을 마음대로 들추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거기 있는 내용은 그녀가 되찾은 여유를 빼앗아 가고도 남았다.

남부 상황의 악화, 마수의 증가, 각지에서 기록된 마수의 숫자와 부상병, 사상병, 그리고 41년 라의 달에 집계한 분기 지출액까지. 모든 숫자가 익숙했다. 에스메랄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종이를 넘겼으나 뒷장은 백지였다.

촤라락 하고 책 사이를 훑어보니 듬성듬성, 일자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해당 책에 있는 날짜는 전부 41년.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다시 책장으로 돌아갔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가죽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다음 책, 다음 책, 다음 책까지 꺼내 읽은 후에야 1444년이라고 기록된 일자가 있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텅 비다시피 했고, 글자가 있는 것은 딱 한 장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일기가 쭉 이어지지 않고, 책의 중간에 덜렁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눈으로 확인한 숫자가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

「대륙력 1444년 카 76일.

--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속에 처박힌 채 화마 속에서 사라지는 --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력함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순간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첫 문단을 읽자마자 그녀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가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워 잠을 자는 것도 피해야 할 정도로 암살자가 들끓었다는 것. 입에 대는 모든 것에 반드시 독이 들어 있다는 것.

사지를 찢어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 미친놈이 --를 겁간하려 든 것이 수십 번이 넘는다는 것까지. 나는 그중 아무것도 몰랐다.

--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내가 말해 주지 않았음에도 --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계획과 달리…….」

이어지는 내용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에스메랄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혼란이 시작되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게 지금까지 배제해 두었던 위협이 되어 돌아오는 것 역시 금방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아르페시스에게 기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행동 때문에 예외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에 혹시나, 중요 인물 중에 누군가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며 관찰을 지속해 왔다.

로부오들이 활동을 시작한 후 황제 측 귀족들을 감시하며 하나하나 확인했지만 예외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건 그녀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덜덜 떨리는 손에서 책이 빠져나갔고 에스메랄다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직후 그녀는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떨림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건 딱딱함이 전부였다.

욕실이 있는 방향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대화를 하거나 질문을 한다,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아르페시스에게 기억이 있다는 증거를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건 달라진 현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고, 그 변화로 인해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도 안다는 말이다. 그걸 에스메랄다가 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여지가 너무 많았다.

그가 그것을 알면서도 왜 비난 대신 사랑을 고하는 것인지 알 게 뭔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수없이 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녀의 죄를 들켰다, 라는 결과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아르페시스를 기만해서라도 숨기고 싶었던 걸 들켰는데 이성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녀는 복도를 따라 달렸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의 침실을 나선 후 처음 마주친 건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관저에 도착한 이들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복도 옆에서, 정확히는 복도와 이어지는 계단으로 가기 위해 꺾이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곳에 있던 사람과 부딪혔다. 상대방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지는 상황은 면할 수가 있었다. 이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에스메랄다에게 닿았다.

“리디……?”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할 만한 정신도 없던 에스메랄다가 그리운 목소리 때문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잡힌 건 테노리엘 백작이었다. 그의 곁에는 아레스와 페르멘까지 함께였다. 그녀의 가족들이다.

공포와 혼란에 잡아먹혀 도망치던 에스메랄다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그게 그리움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무서운 상황에서 마주한 가족을 보고 느낀 본능적인 안도감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흘렀다.

아레스가 서둘러 제 망토를 끌러 내는 동안 그들과 동행한 호위 기사들이 등을 돌렸다. 에스메랄다가 아레스의 망토를 걸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메랄다!”

그녀가 지나왔던 모퉁이에서 아르페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의만 걸친 채 방금 전 씻은 게 분명해 보이는 아르페시스, 그리고 제 옷이 아닌 사내의 상의만 덩그러니 걸치고 있던 에스메랄다. 지금의 장소에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를 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테노리엘 백작이 먼저 말했다.

“알, 리디를 데려가거라.”

“예, 아버지.”

“펠, 너도.”

“……예, 아버지.”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쓴 에스메랄다는 곧장 아레스의 품에 안겨 그 장소를 떠났다. 그들의 뒤를 부루퉁한 표정의 페르멘이 뒤따랐다.

* * *

“총사령관님?”

침실을 벗어난 후 곧장 에스메랄다에게로 향하려던 아르페시스의 발걸음이 붙들렸다. 익숙하지만 결코 달갑지 않은 목소리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르페시스가 서 있는 산책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아마, 그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거겠지.

“갑자기… 아니,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로웨나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나마 붙들렸다는 것이 불쾌했고, 곧장 다시 움직일 생각이었다. 로웨나는 그럴 생각이 아닌 것 같았지만.

“깨어나셨군요, 다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 순간 휴고와 테베르, 데미안같이 자신의 사람이라 확신했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퇴각 명령을 전달한 칼라일의 얼굴도 잠시나마.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얼굴들을 떠올렸음에도 외면을 택했다.

‘모시고 가, 우리가 해결할 테니.’

‘부탁한다.’

에스메랄다가 죽은 후 있었던 일들이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지금의 시간에선 죽어 버린 테베르의 모습이 담겨 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 중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잠시 로웨나를 주시했으나 곧 몸을 돌렸다. 그가 기억을 곱씹는 사이 로웨나는 이미 아르페시스의 근처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조금 더 휴식을 취하지 않으시…….”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돌아가라.”

갑자기 나타나면 에스메랄다가 놀라지 않을까 싶어서 이곳에서 걸어가길 택했던 것인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연못으로 가기 위해 나 있는 길로 내딛던 순간, 로웨나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관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의 세상이 무너진 후 어떻게든 그를 지탱하고자 발버둥 쳤던 휴고와 테베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전하, 드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결심을 하고 나온 참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의 곁을 차지하겠노라고. 그것이 자신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근위대를 죽이는 일이라도, 한평생 함께했던 남부군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라도.

아르페시스는 자꾸 귀찮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로웨나를 돌아보았다. 죽일까?

“제 망토라도 걸치시지요.”

로웨나의 자색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진실된 걱정이라서 더더욱 거슬렸다. 그녀는 제 망토를 벗어 아르페시스에게 전해 주려고 했지만 그는 로웨나의 손을 쳐냈고 망토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 그의 뒤를 자꾸만 쫓아오는 것들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물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당장 귀찮은 로웨나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에스메랄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는 와중에, 얼마 남지 않은 재회의 그 순간에 방해꾼이 끼어드는 건 싫었다.

몇 번이나 생각했다. 죽일까? 하고.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그 기회를 낚아채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웨나는 앙뷔 남작의 딸이다. 그리고 앙뷔 남작은 조건부로 내전에 병력을 동원하기로 한 세력이다. 방금 무리한 명령을 내리고 나온 길이다. 여기서 그를 향한 적대감을 더 만드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특히나 로웨나는 확실한 명분이 없다면 함부로 죽여선 안 될 인물이다. 과거의 한때 황태자와 있었던 일 때문에라도 더더욱. 번거로운 생각을 마치고 속으로 혀를 찬 아르페시스가 로웨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라 했다.”

당장 죽일 수 없는 인물과 드잡이를 해야 하는 시간이 아깝다. 그녀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로웨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에스메랄다가 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리를 하시…….”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선 로웨나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오늘은 대체 왜? 의문을 느낀 직후에야 그녀에게서 흘러오는 와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취할 정도로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평소보다 감정적으로 굴 만큼은 마신 모양이지. 아르페시스는 짧게 혀를 찼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전하께선 쓰러지셨…….”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라 했다.”

“……마치 여기서 저를 쫓아내고 싶으신 것처럼 행동하시는군요.”

그래, 쫓아내고 싶다. 곧 이루어질 재회에 타인이 끼어들어 변수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 혀를 찼다.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정말 편할 텐데.

“혼절하셨다 깨어나신 분께서 대체 왜 이 추운 곳에 그런 차림으로 계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휴식을 취하시라 충언을 올렸을 뿐입니다. 헌데 저를 쫓아내시려 하니… 여기에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로웨나가 말을 꺼낼 때마다 머릿속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조금씩 울렁거리는 심장도, 모두 거슬렸다. 이 불필요한 것들은 전부 기억을 되찾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와 지금의 시간에서 그가 겪은 일들은 달랐기에 완성된 인격 또한 조금 달랐다. 그런 것이 뒤섞인 상태이니 그는 지금 두 가지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그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과 감정 중에 우선순위가 무척이나 명확하다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를 잃었던 그와 에스메랄다를 기다리던 그, 둘 모두 아르페시스 본인이었으나 더 강렬하고 간절했던 것은 전자였다. 그러니 우선순위 역시 후자가 아닌 전자에 쏠려 있었다. 로웨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참 쉽게, 너무 당연하게 할 정도로. 하지만 로웨나를 죽여서는 안 될 이유가 확실하기에 죽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르페시스는 어느 순간부터 로웨나의 목소리 대신 점점 느려지는 에스메랄다의 발걸음 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심장이 긴장을 하듯 발걸음 소리를 따라 박동을 늦추고 있었다. 그녀가 오고 있다.

“아, 여기서 테노리엘 영애라도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전하의 연인이라는 그 영애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로웨나가 미간을 좁히며 이런 말을 하니 눈썹이 들썩거리는 것이다. 다시 로웨나를 돌아본 아르페시스가 생각했다. 그녀가 에스메랄다와 자신의 사이를 어찌 알고 있지?

그가 감추지 못했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거의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는 본부대의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말이다. 1년에 열댓 번 볼까 말까 한 이들이 알기엔 너무 사적인 영역의 일이었다. 그들 앞에서 아르페시스가 행정 업무를 보다가 졸면서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으니 당연하지 않겠나?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와의 사이를 알게 된 본부대 기사들에게 분명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데 본부대 지휘 기사도 아닌 로웨나가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했다? 누군가 말을 했구나. 아르페시스는 단번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의 개인적인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깨달음 뒤에 남은 건, 본부대 기사들을 향한 적대감이었다. 숨기라 말한 것을 떠들고 다닌 놈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그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테베르가 따로 전서구를 날리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최악의 경우 그가 보고하는 대상이 황제라 한다면, 너와 천사의 관계가 모두 알려졌다고 가정해야 한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해라.’

페드로가 남긴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의 기억에 남은 말 또한 그 결론에 힘을 보태었다.

‘함께 폐하로부터 전하를…….’

아르페시스는 사라진 시간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테베르의 목을 베어 버렸다. 지금의 시간에선 이미 죽어버렸지만, 테베르는 분명 황제의 사람이었다. 결국 지금의 황제는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사이를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황제가 그와 에스메랄다의 사이를 알든, 말든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알고 있음에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죽일 것이니까.

남부군 문제만 아니었으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로웨나도 황제처럼 죽일 수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도착했다는 말은 들었지요. 그 영애도 참 뻔뻔하군요. 2년이 넘게 연락도 없다가, 리퀘나에 찾아오자마자 총사령관님을 불러냈…….”

로웨나의 자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의 모든 게 분노로 가득 찼다. 손을 뻗은 그 찰나의 순간에는, 정말 로웨나를 죽이고자 했다.

“그 입 다물라!”

그가 풀어놓았던 마나가 사방에서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에게 몰아쳤다.

“네까짓 게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

그의 분노가 위협에서 끝난 건 절박함 때문이었다. 괜한 헛짓으로 남부군을 다루는 데 문제가 생기면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매기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그건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패가 줄어든다는 의미와 같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그 결과 아르페시스가 만들어 낸 마나에 피해를 입은 건 로웨나의 주변뿐이었다. 최소한의 조경을 거쳤기에 자연 그대로의 형태로 남아 있던 나무와 수풀이 부서지고, 잘리고, 뒤집어져 주변의 땅을 갈아엎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그녀가 무얼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테노리엘 영애에 대해 모릅니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지요.”

로웨나의 목소리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 역시 긴장감으로 바짝 굳은 것이 보였다. 아르페시스의 위협은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고, 지금 그는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긴장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모름에도 그녀가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는 로웨나의 말은 아르페시스의 화를 계속 부추기기만 했다. 에스메랄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아르페시스는 페드로를 데려와 죽게 만들었다. 페드로는 본인의 죽음이 아르페시스의 탓은 아니라고 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그가 없었을 때도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으니까.

“하나 더 있군요. 오라비의 명예로운 죽음을 연인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이나 해 대는 이가 그리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 그녀가 원망을 하는 건 당연한데, 로웨나는 그런 에스메랄다의 원망을 비난하고 있다. 에스메랄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딴 식으로 지껄이는 로웨나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로웨나의 목에 닿았다. 그걸 느낀 것인지 그녀의 몸이 흠칫거리며 떨렸다. 지난 바의 달에 사랑이니 뭐니, 감정을 고했던 로웨나의 모습을 떠올린 아르페시스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어느 순간부터 닮아 갔던 것, 언젠가부터 따라 하며 배웠던 것, 이건 화를 참던 페드로의 버릇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페드로를 닮아 있었다.

아, 죽이고 싶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까짓 것들이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저가 가진 것이 가장 귀한 줄 아는 버러지들. 결국은 그 감정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에스메랄다에게 반감을 가진 거겠지.

“그런 속사정을 알고 나니 한때는 포기하려 했던 제가 참 어리석게 느껴지더군요.”

“네 감정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 이미 거절했다.”

“거절하셨다 하여 제가 마음을 정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 또한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마지막 경고다. 돌아가라.”

죽이기 전까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화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화를 내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기척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로웨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후원의 연못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돌아섰다.

에스메랄다가 나무 사이에 나 있는 길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더 이상 로웨나의 존재는 그에게 인식이 되지 않았다. 로웨나의 목소리 역시 그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에스메랄다에게 쏟아졌으니까.

그녀가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수십 개가 뒤섞여 엉망이 되어 버린 감정이 일렁거렸다. 분명 그녀는 살아 있다. 지금의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장이라도 그녀가…….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게 너무 버거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가 없던 지옥에서 보낸 1여 년의 기억이 아르페시스를 짓눌렀다. 그녀가 죽던 순간, 그녀를 부르짖었던 순간, 그녀가 겪었던 일을 알게 되었던 순간, 그녀를 그리워했던 순간을 지나 끝내 그녀를…….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열여덟 살 무렵일 때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만난 에스메랄다가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너무 달라서,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았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는 분명 지금보다 키가 더 컸다. 체형도 저렇게 뼈마디가 눈에 보일 만큼 마르지 않았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체중이 줄고 있다, 라고 인지했을 만큼 마르기 시작한 건 그녀가 스물두 살이 되었을 무렵에나 있었던 일이다. 테몬 후작의 말에 따르면 그녀를 겨냥한 독살 시도가 시작된 게 그 무렵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에스메랄다는 그때보다 더 말랐다. 당장 바람이 불면 흐트러져 사라질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게, 그녀가 어떤 고통을 짊어진 채 지난 2년을 보냈는지 보여 주는 증거 같아서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감정 중 하나가 튀어 올랐다.

왜, 왜 페드로를 데려와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가 기적처럼 되찾은 가족을 빼앗은 것인가. 모든 건 그의 잘못이다. 그래, 전부 그의 잘못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기는커녕 헛짓거리를 했고, 지금의 시간에서는 페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사라진 시간에서도, 지금의 시간에서도 잘못은 모두 그의 것이다. 그게 진실이니 속에 있는 이 발칙한 것은 묻어 두어야 한다.

기억과 너무나도 다른 그녀의 모습 때문에 받은 충격을 추스르기도 전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그를 떠나갔다. 고작 시선 한번 돌린 것뿐인데 그녀가 자신을 떠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묻어 두려 했던 것이 슬금슬금 그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아르페시스는 감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였기에 자신의 속에서 오가는 것을 억누르기 바빴다. 그에게는 에스메랄다와 로웨나의 대화를 제대로 인지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떠날 것처럼 말을 하자 반사적으로 매달렸을 뿐이다. 잘못은 모두 그가 했으니까, 빌어야 하는 것도 그다.

안다, 그녀에게서 오라비를 빼앗은 죄인에겐 그럴 자격마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참 이기적이게도 그녀를 놓을 수가 없다. 매달리고, 애원을 해서라도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벌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가지 마…….”

애처로운 목소리는 작았으나, 모두가 각자의 긴장감에 물든 채 침묵하는 바람에 생긴 적막 속에서는 천둥소리보다 컸다.

“그리웠다,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신에게 애원해 볼 정도로 그리워했다. 그러니 가지 마…….”

그의 지독한 그리움이 그녀에게 닿기를, 그래서 제발, 이 염치없는 죄인에게 곁을 허락해 주기를.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더했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은 에스메랄다에게 적대감을 비추고, 한 사람은 그와 에스메랄다 사이를 막으려 드니 화가 쌓여 갔다.

그건 위태로운 상태로 타오르고 있던 감정의 화로에 계속 장작을 집어넣는 격이었다. 거기에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온 의심과 거부라는 단어가 더해지자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년을 돌아 겨우 다시 만난 그녀가 대뜸 계속 미뤄 왔던 그들 사이의 일을 언급할 줄도 몰랐다.

그 순간 그녀는 뭔가 분위기 같은 것을 내는 데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당황하고야 말았다. 결국 그가 그토록 고대했던 재회는 난장판이 되었고 그들의 언쟁은 계속 같은 화제를 맴돌았다. 이 사달을 야기한 로웨나에게 가지는 살의가 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메랄다가 작정을 한 것처럼 그를 계속 부추기자 결국 그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굴복했다. 허리가 정말 한 줌도 되지 않는 에스메랄다를 침실로 데려와 짐승처럼 달려든 이유였다.

재회에 기쁘고, 의심받았음에 화가 나면서 억울하고, 또 기대감과 흥분에 취해 있었기에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그를 밀어내며 거부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을 때부터, 상황이 변했다. 그녀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강행하려 할 때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지속할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만류대로 멈춘 것이었다. 만약 거부가 담긴 그녀의 행동에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면 분명…….

“짐승보다 못한 놈…….”

아르페시스는 아릿한 통증이 남은 가슴께를 더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그녀를 선명하게 느껴서인지 그의 속에서 계속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와 닿아 있을 때는 꿈틀거리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중이었으나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어느새 그녀를 잃었던 그와 그녀를 기다리던 그의 우선순위가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마른세수를 벅벅 하며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본래 협탁 위에 있던 소형 전등 마도구는 아르페시스가 방을 나서기 전 동강을 내는 바람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방 전체를 밝히는 전등 마도구를 발동시킨 것이다.

그가 침대 옆에 섰을 때였다. 창문 밖에서 녹색의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아르페시스는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창가로 다가갔다. 전군의 퇴각을 지시하는 첨탑의 마도구는 30일 거리에서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높고 밝은 녹색 빛기둥을 만들어 낸다.

자세한 명령 사항은 전서구를 타고 가지만, 이 신호를 확인한 이상 당장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는 중이라 해도 퇴각을 해야 한다. 지금부터 시행할 퇴각 경로와 부대 현황에 대한 보고가 돌아오려면 약 이틀 정도는 기다려야겠지. 새삼 전보 마도구가 떠올라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볼 때와 달리 차갑게 굳은 눈으로 오래도록 창밖을 주시했다. 물론 이후에는 커튼을 쳐 밖에서 들어오는 녹색 빛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지만.

잠시 창문 앞에 서 있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침대 옆으로 돌아왔다. 조금 무감각한 듯했던 눈동자에는 다시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들어섰다.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를 가지는 건 조심해야 할 것 아냐? 그래서 피임약을 준비해 왔다고!’

감정이 이성에게 밀려나자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피임은…….”

그들의 무책임을 아이에게 물려줄 수는 없으니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잠시 이쪽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이라니,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존재를 인지하고 손을 떨었다. 그는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바른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이건 너무 앞서갔다.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무슨…….

“그래도…….”

만약 하더라도 그녀가 당장 아이를 원하지는 않겠지. 그들은 혼례도 올리지 않았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너무 이른 생각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 직접 협탁의 서랍을 당겼다. 그곳에는 과거의 그가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과, 만약의 경우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구비해 둔 피임약이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피임약을 운운했던 에스메랄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 생각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약병을 꺼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탁, 하는 가벼운 마찰음을 끝으로 잠시의 적막이 이어졌다.

“너무…….”

적나라한가? 이걸 꺼내 놓는다는 건 즉, 하겠다는, 그러니까 관계를 가지겠다는 의미이지 않나. 물론 하긴 할 거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대놓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르페시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만 한 크기의 얇고 긴 병을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

“하지만…….”

이걸 넣어 두면 다시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서랍을 열어서 꺼내 마셔야 하지 않나. 원래 그렇게 하는 건가? 덩그러니 입을 벌린 서랍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초조함에 손을 말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그가 남부에 와서 들은 실전형 이야기 중 어디에도,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피임약을 꺼내 마시고 다시 이렇게 저렇게 했다, 같은 내용은 없었다. 왜 누구도 이런 애매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지? 아르페시스는 다시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하지…….”

지금 마시나? 아니면 나중에 같이?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는 몇 번이고 병을 꺼냈다가 넣거나, 서랍을 열었다가 닫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 도중에 언급되지 않았으니 미리 마셔 두는 게 맞다,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마자 지속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바람에 멈칫했다. 그의 이론적 지식에 따르면 피임약 한 병에 약 2시간가량의 효과가 지속된다. 에스메랄다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지금 마셔 두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지속 시간이라는 게 있으니 직전에 마시는 게 좋겠지?

그는 다시 뚜껑을 닫고 서랍까지 곱게 밀어 넣었다. 하필이면 그때, 욕실 너머에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욕실이 있는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꿀꺽, 하고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욕실에서 씻고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인 장면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쓰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에스메랄다를 상상했다. 식은 줄 알았던 열기가 다시 피어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처럼 잔뜩 성이 난 제 하복부를 내려다본 후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나오면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하지? 그들은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지 않나? 대뜸 이렇게 관계를 가져도 되는 건가? 그녀는 눈에 보일 만큼 수척해진 상태인데 무리하게 만들어도 되나? 하지만 수척한 것 치고는 손에 닿았던 감촉이 상당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가 복잡함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에도 욕실에서는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게, 그게 정말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라 괴로웠다. 기뻤다. 저 문 하나만 넘으면, 그가 수년간 갈망했던 그녀가 무방비한 모습으로, 간절히 바랐던 모습으로 존재하겠지.

홀로 그녀의 몸을 수없이 많이 그려 보았던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마침 그의 눈에 이질적인 것이 띈 건 정말 다행이었다. 열기가 확 식어 버리고 짜증이 치솟았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불과 몇십 분 전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불쾌한 노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침대 위로 손을 뻗었다. 거기엔 에스메랄다가 걸치고 있던 외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체격에는 컸으니 분명 다른 사람, 후원에서 외투를 걸치고 있지 않던 그놈의 것이리라.

아르페시스는 그 외투를 집어 들어 창밖으로 휙, 내다 버렸다. 그럼에도 그가 느끼는 불쾌함은 끝을 모르고 깊어졌다. 그녀가 후원 연못에서 나오던 중 마주쳤으니 그곳까지 결국 같이 갔다는 의미가 아닌가? 왜 이 야심한 시각에 단둘이 그곳에 있었을까?

아르페시스가 아는 에스메랄다는 늦은 시각에 이성과 함께 자리를 해야 할 때, 반드시 시녀를 대동하는 사람이었다. 그 대상이 테노리엘의 사람이라고 해도, 본디 말이란 단속을 뚫고 나가는 버릇이 있다며 만전을 기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에서는… 다른가? 서부 대란 무렵 시리스라는 사내와 단둘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덜컥하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후방 도시 근처에서 만났던 마법사 놈. 조금 전 보았던 그 노란 눈동자의 사내와 놈의 목소리가 비슷한 것 같다. 당시에는 마나가 너무 넘쳐나는 인물이라 연배가 꽤 될 것이라 여겼는데 자세히 되짚어 보면 주문을 읊는 목소리는 젊은 축에 속했다. 미성 쪽에 가까웠으니까.

그때 같이 있던 마법사가 놈이 아니라고 해도 거슬렸다. 그는 지금 연인 자리에 있는 것도 위태로운데, 놈은 뭔지 모를 역할로 곁을 딱 지키고 있으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아르페시스의 앞을 막아섰을 때 에스메랄다는 뭐라고 만류하지도 않았다. 대체 뭘 하는 놈이기에 에스메랄다가 곁에 끼고 도는가 말이다. 무슨 사이지? 녀석이 뭐라고 소개를 했던 것 같은데… 전투 마법사라고 했나?

모든 신경이 에스메랄다에게 집중되어 있던 때라 확실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슬려.”

아르페시스는 창문 옆에 있는 작은 티 테이블과 함께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노란 눈동자의 남자를 곱씹는 동안 그는 불쾌감에 잠식되었다. 그것도 뭐, 욕실에 있는 에스메랄다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였지만.

“저기… 아르페시스?”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왜, 왜 그러나?”

의자를 다시 세울 정신도 없이 부름에 응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가, 가운이… 없어서.”

그는 목욕 후 따로 가운을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누군가의 시중도 잘 받지 않기에 씻고 맨몸으로 나와 바로 옷을 입는 편이었다. 그래서 욕실 내에는 가운 같은 것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한 아르페시스가 다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곁방에서 그녀가 입을 만한 것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아, 어, 내, 내가 본래 가운을 쓰지 않는지라… 자, 잠시만 기다… 악!”

이번에는 의자가 아니라 티 테이블을 걷어차는 바람에 정강이를 붙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의 신체가 극한까지 단련된 건 맞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강인한 사람의 몸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 정강이는 어떻게 단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급소 중 한 곳이다. 누구든 맞으면 일단 아프다.

외발 테이블이 우당탕 넘어질 정도로 세게 걷어찼으니 아르페시스도 아팠다. 그는 정강이를 문지르면서도 의복을 보관해 두는 곁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방에 여인을 위한 의복이 있을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평소에 입는 실내복을 챙겨 나와야만 했다.

서둘러 욕실 쪽으로 다가간 아르페시스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쪽을 볼 만한 담력은 없는지라 등을 돌리고 섰더니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아르페시스는 살짝 몸을 돌린 채 팔을 뻗었다.

“그… 여긴 내 침실이라, 다, 다른 의복이 없어서…….”

에스메랄다가 문틈으로 팔만 쏙 내밀어 옷을 가져갔다. 욕실 문이 다시 닫히는 건 금방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때부터 다시 몸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그녀가 나오면 바로 하나? 그도 씻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정오쯤에 기절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냄새가…….”

옷을 코앞까지 끌어당겨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사람은 원래 본인의 냄새를 잘 모르는 법이다.

“씻는 게 좋겠지? 그래.”

그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본인의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씻는 김에 이것도 좀 어떻게 해결하고 말이다. 한 번 열기를 빼면 조금 진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시 짐승처럼 굴지는 않겠지.

그가 초조하게 침실을 서성이고 있노라니, 드디어 에스메랄다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 욕실에서 부름이 들렸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허리춤을 잡은 채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에스메랄다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른침이 꼴깍, 하고 넘어가는 건 당연했다.

“거기서 뭐 해……?”

“어, 어?”

이런 볼품없는… 얼빠진 답이나 하고 있다니. 아르페시스가 속으로 스스로를 열심히 헐뜯는 사이 그녀가 웃었다. 그를 홀리는 미소였다. 스멀스멀 욕망이 피어올랐다. 한때 꿈꾸어 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손길과 움직임에 울부짖는 그녀를 보고 싶다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에스메랄다가 입고 있던 바지가 훌러덩, 흘러내리는 걸 봤으니 뭐…….

아르페시스는 순간 그녀에게 달려들 뻔했던 제 몸을 억지로 붙들었다. 그는 격한 숨을 들이쉬면서도 에스메랄다의 하얀 허벅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 나도 씻고 오겠다.”

이대로 있다간 다시 짐승이 될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눈앞에 그녀가 보이지 않아서 잠시 진정이 되나 싶었더니…….

“어차피 벗을 텐데 뭐…….”

이런 말을 들은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손을 바쁘게 놀렸다. 일단, 일단 진정을 하자. 혼자 한 번 식히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바지 버클을 풀었을 때였다.

“아르페시스.”

그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을 참은 덕분에 그녀의 부름에 답하는 목소리가 꽉 억눌려 있었다.

“왜……?”

“의복은 가지고 들어갔어?”

그런 걸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그제야 자신이 갈아입을 옷도 없이 욕실에 들어왔음을 상기했다.

“……아니.”

“그럼 욕실 문에 바지를 걸어 둘게, 나한텐 너무 커.”

“알겠다…….”

정말, 미칠 것 같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에스메랄다의 기척 때문에 모든 것이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결국 마나까지 사용해 가며 에스메랄다의 기척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마나로 귀를 틀어막으니 속에서 시끄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차라리 이게 낫다.

아르페시스는 눈을 꾹 감은 채 바지 속에서 성기를 꺼냈다.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면 언제나 그러하듯, 그의 성기는 힘을 잔뜩 머금고서 배꼽까지 고개를 치켜든 상태였다.

“윽……!”

평소처럼 덥석 선단을 쥔 아르페시스의 몸이 들썩거렸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던 가슴, 그 위로 톡 튀어나와 그를 유혹하던 유두,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발갛게 일어났던 손자국.

“으하……!”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귀두를 스윽, 문질렀을 때였다. 순간 아랫배의 근육이 수축하며 절로 몸이 구겨졌다. 울컥, 하고 동그란 구멍에서 질척거리는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헉, 헉…….”

욕실 바닥에 흐트러진 제 정액을 보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리 파정을 해 버렸다. 이러다가 에스메랄다의 안에 들어가자마자 싸 버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다시금 힘을 얻고 슬금슬금 일어나기 시작하는 성기를 보자마자 의미를 잃어버렸다.

“넣는다고…….”

이걸 그녀의 안에.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아르페시스는 문가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다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녀를 조금 만진 것만으로도 잔뜩 예민해져서 파정을 하고야 말았는데, 그 갈라져 있던 틈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기분이지?

모르겠다. 상상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가 없는 영역이었다. 당장, 당장 넣어 볼까?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위로 올라타서 넣으면 알 수 있을 텐데.

그녀의 안이 어떻고, 그녀의 울음소리는 또 어떤지 전부 알 수 있다.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킨 아르페시스가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나가 짐승처럼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여유를 가지고 그녀가 아프지 않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그간 주워들은 이야기와 진지하게 정독한 서적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첫 경험 때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에스메랄다가 아프지 않으려면 그가 잘해야만 했다.

몇만에 달하는 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설 때보다 더한 긴장감과 부담감이 느껴졌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문을 여는 대신 콩, 하고 머리를 문에 기댄 채 더 거칠게 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이대로 몸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더 식히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그는 다시 감각을 활짝 열었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에스메랄다의 기척을 좇으며 닿지 않은 채로 그녀를 탐하는 건 생소한 감각이었다. 꼭, 이 문에 그녀를 세워 놓고 허리를 치대는 느낌.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손을 고정한 채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롯이 기척으로만 느껴지는 그녀를 탐하자 오래지 않아 사정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쏟아 내고 싶다는 충동과 조금 더 그녀의 기척을 탐해 보며 익숙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했다.

갈등하기도 잠시, 아르페시스는 오래지 않아 몸을 덜덜 떨며 파정했다.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보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의 안에 들어가서는 절대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 아르페시스는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차분하게, 부드럽게, 그 짧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런 후에야 몸을 돌린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썼던 욕조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찬물을 뒤집어썼다. 그는 몇 번이나 찬물로 몸을 식힌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외부 손잡이를 더듬으니 그녀의 말대로 바지가 걸려 있었다.

서둘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구름을 거니는 것처럼 둥둥 떠다니던 그의 기분은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휑하니 열린 침실 문이 보일 뿐이었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떠나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바닥에 널린 검은색 가죽 책에 닿았다. 기억을 되찾지 못했던 때, 꿈에서 본 일기를 기록해 두던 책이었다.

“머저리같이…….”

기억이 있는 걸 들키면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린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그렇지, 저 기록이 있는 방에 그녀를 데려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고, 그의 마나가 침실 밖으로 퍼져 나가며 에스메랄다를 쫓았다. 그녀가 없어지니 이름 모를 무언가의 꿈틀거림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와 그가 뒤바뀌기 위해 필요한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코앞에 있다. 침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인의 가족들을 마주했을 때는 참을 새도 없이 낮은 욕설을 중얼거려야만 했다.

“망할…….”

그녀의 의복과 그의 의복, 거기에 야심한 시간까지…….

“에스메랄다!”

그러한 요소들이 집합된 결과 아르페시스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보는 테노리엘의 사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 명 모두 같은 색채의 금발을 가진 상황에서, 눈동자의 색채마저 유사한 이들이다. 녹안이나 청록색 눈동자.

그건 정말 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만 같은 막막한 기분. 힐끔, 돌린 시선의 끝에는 아레스의 손길 아래서 망토를 둘러쓴 에스메랄다의 뒷모습이 잡혔다. 그가 에스메랄다에게 뭔가 해명을 하기도 전에, 차마 말을 걸어 보기도 전에, 테노리엘 백작이 기회 자체를 없애 버렸다.

“알, 리디를 데려가거라.”

“예, 아버지.”

“펠, 너도.”

“……예, 아버지.”

백작은 페르멘은 물론 호위 기사들까지 먼저 보냈다. 누가 보아도 따로 대화를 나누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에스메랄다를 빼앗아 가고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이 백작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쫓아가 붙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부친이 직접 나선 상황에서 아르페시스는 반발할 수가 없었다.

이를 꽉 깨문 채 아레스의 품에 안겨 사라지는 에스메랄다를 눈으로 좇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장이 찢어지든 말든, 그녀가 만류할 때 멈추지 말 것을. 그럼 그녀가 일기를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그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떠나기는커녕 지금쯤 그의 품속에 안겨 있었을 텐데, 결국 그의 우유부단함이 일을 망치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자괴감 때문에 스스로를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다. 중요할 때, 필요한 순간에 옳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잃는다.

아득거리는 소리에 에스메랄다를 좇던 백작의 시선이 다시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백작의 표정이 무척이나 묘해졌다. 그가 아는 아르페시스는 저런 살벌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말로써 정의를 하자면, 아르페시스는 인간을 상대로 적의와 투기는 가질지언정 살의는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밉다, 혹은 원망한다와 같은 감정과 눈앞에 있는 이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다, 라는 감정은 같지 않다. 페드로가 남긴 말을 통해 에스메랄다와 그의 사이를 알게 된 후, 티 나지 않는 선에서 더 유심히 살펴 왔기에 분명했다. 좋게 보자면 선한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무른 것이라 평해야겠지.

‘아마 모르시겠지만 꽤 오래되었습니다.’

페드로의 유서에서 그 문구를 보았을 때, 백작은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었다. 오래라는 것이 10여 년에 가까운 시기까지 거슬러 가는 것이라면, 에스메랄다가 변한 것이 아르페시스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혹시 아르페시스가 제위를 욕심내서 에스메랄다를 이용하는 건 아닐까? 에스메랄다가 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해 내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일견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기에 백작은 딸아이의 연인이라는 아르페시스에게 상당히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느라 드러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백작 스스로만이 아는 집요한 관찰의 결과는 조금 허탈했다. 만약 황족이라는 불필요한 짐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사위를 삼았어도 좋았을 거라는 결론이었으니까. 그 결론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아르페시스의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포기를 논하지 않고 언제나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며 다음의 희망을 논하는 사람이었다.

백작이 본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주변에 웃음을, 그리고 평화를 주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보는 희망에 동화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지팡이 같은 존재. 그렇기에 아르페시스는 충정을 얻는 데 뛰어났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지탱해 주는 이었기에 힘겨움 속에서 그의 지탱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그에게 충정을 바치고자 했다. 말을 넘어 직접 성실의 모범을 보이는 것은 물론, 상벌의 기준이 명확하고 무위도 뛰어났다. 군을 이끄는 감각도 나쁘지 않고, 행정 업무도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이 원하는 이상적인 황젯감은 아니었다. 사람을 쉽게 모으나 그것을 다스릴 배포와 실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정확하리라. 밑의 사람이 악의를 품고 이용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쉽게 놀아날 유형의 인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타인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못하다. 충신이라 하여도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지존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페드로는 그가 제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백작의 생각은 반대였다. 두 사람이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백작이 보기에, 아르페시스는 옳은 신하가 없으면 안 되는 황제다. 평화의 시대였다면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을 계속 주고 나쁜 마음 대신 훌륭한 마음을 가지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전란의 시대, 난세다. 인간은 마수와 1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쟁을 하고 있고 에렘은 그 최전방에 있다.

그렇기에 백작은 아르페시스를 지금의 시대에 어울리는 황제로 보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신하 중 누구 하나라도 비뚤어지거나 엇나가면 황좌가 함께 흔들릴 테니까. 난세에 필요한 황제는 신하를 거느려야 하지, 신하로 인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이들이 ‘너를 위해서’보다는 ‘나를 위해서’를 택하게 되는 것이 난세이니까.

먹고살기 힘들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힘드니 베푸는 것이 어려워진다. 배가 부를 때 빵을 나누는 것과 배가 고플 때 빵을 나누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아르페시스가 신하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주어도 나쁜 생각에, 타락에 혹하게 될 상황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아르페시스의 호의를 등지고 배신을 택하게 되겠지.

백작은 황제가 된 아르페시스가 기대되지 않았다. 그저 사람으로서 나름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도 딸아이를 둔 아비이다 보니, 아르페시스가 여색을 밝히지 않고 순박하다는 점도 흡족함에 한몫을 더했다.

하나뿐인 딸의 곁에 세워도 부족하지 않겠다는 결론이 났던 것을 보면, 백작이 아르페시스를 얼마나 좋게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표정은 뭐랄까…….

백작은 지난여름 분기의 정기 회의 이후로는 줄곧 부관을 대리 참석자로 보내왔다. 이 때문에 그는 아르페시스를 반년 만에 보는 것이었다. 고작 반년이었을 뿐인데 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본질적인 느낌이 바뀌어 버린 것만 같을까? 의문의 앞에서 백작은 직접 마나 장막을 펼쳤다.

“강제이셨습니까?”

평소라면 예를 지켜 인사부터 올렸을 테지만, 오늘은 대뜸 용건부터 튀어 나갔다. 많은 일이 있기는 했으나 백작은 에스메랄다와의 정쟁에서 패했을 뿐이다. 딸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리퀘나에 방문하겠다는 짧은 서신에 전선을 잠시나마 비우면서까지 걸음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하나뿐인 딸아이가 그런 복장, 그런 표정으로 뛰쳐나와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나. 지금의 상황에서 예법을 지킬 만큼 백작이 황족에게 경외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니다!”

질문에 곧장 돌아온 대답은 확고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백작은 대답 속에서 절대적인 부정을 읽었다. 그렇다면 에스메랄다가 제 발로 따라갔다는 건데…….

백작은 자녀들의 사생활에 일일이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문제가 될 점이 있다면 적당한 훈계를 할 의향은 있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들어 보아야겠지만 멋모르고 따라갔다가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라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한다.

이 시간에 사내를 따라간다는 것, 혹은 단둘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판단이다. 백작은 설마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부추겼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는 에스메랄다와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쑥스러운 것은 부가적이고,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에스메랄다의 나이가 찼을 때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는 혹시나 자신이 전후를 잘못 살폈나 싶어 확인부터 했다. 전에 뛰쳐나온 것인지, 후에 싸운 것인지 말이다.

“혹여나 싶어 언급하겠습니다만, 피임은 하셨습니까?”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보면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백작의 시선 끝에 서 있던 아르페시스는 생각했다. 에스메랄다가 이 주제를 그렇게 직설적으로 꺼내는 게 가족 내력인 것 같다고. 페드로도 백작의 침실 사정을 있는 대로 다 말하더니, 백작도 제 딸과 있었을 법한 일을 있는 대로 물어 오지 않나!

“아, 아무런 일도 없… 었다.”

있을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없기는 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버벅거리긴 했으나 답을 끝마칠 수는 있었다. 저 말이 진실이라면 전에 뛰쳐나온 것이라는 의미다. 백작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르페시스를 쭉 훑었다.

딸아이를 가진 후 세상의 모든 사내가 적으로 보일 때마다 해 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도 사내이기에 사내가 여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아주 잘 아니까. 저절로 경계심이 벼려지고 있었다.

딸은, 그래. 아비에게 있어 딸은, 특히나 에스메랄다는 다른 아들과 조금 다른 존재였다. 아들은 연무장을 굴리며 키워도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겠다, 싶은 걱정에서 끝난다. 다치면 치료를 하면 되니 해결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딸은, 그것도 날 때부터 조금 약하게 태어난 에스메랄다는 연무장에 두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인지 백작은 4형제보다 에스메랄다를 조금 더 오냐오냐, 혹은 과보호하며 키운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에스메랄다와의 정쟁에서 패한 건, 차마 그녀에게 위험한 짓은 못 하겠어서 머뭇거렸기 때문이기도 했으니 말 다 했지. 그런데 에스메랄다와 밤을 보낸 것 같은, 혹은 앞으로 보내게 될 사내가 눈앞에 있으니 저절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 체격으로 밀어붙이면 아이가 부서지지는 않을까? 같은 망측한 걱정을 하게 될 정도니 어련할까.

백작이 말없이 자신을 훑기만 하자 아르페시스가 긴장한 기색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백작이… 여기까지, 아니… 정기 회의 때문에 왔는가?”

그 질문에 백작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왜 와서 방해를 하냐, 같은 것으로 질문을 꼬아 듣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 못 올 곳을 왔냐며 약이라도 올려 볼 텐데. 하지만 다행히도 백작은 유치한 기 싸움을 하자고 말을 꼬아 듣지는 않았다.

“회의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리디가 리퀘나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주었기에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렇… 군. 그럼… 그, 혹시, 일정 중에 시간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함께 만찬이라도…….”

“사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거절에 아르페시스가 움찔, 손끝을 떨었다.

“황제가 지켜보는 시기이니 주의해서 나쁠 것이 없지요.”

지금의 대화도 자정을 넘겨 깊은 새벽이 되었기에, 보는 이들의 시선이 없을 만한 시간이라 조금 무리를 한 것이다. 백작은 황제가 자신을 남부로 보낸 이유를 헛짚지 않았다.

“그럼, 만약…….”

뭐라고 더 말을 붙이려던 아르페시스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백작은 아르페시스가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을 잡아냈다. 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간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욕심이 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를 어려워했다. 그런데…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백작은 에스메랄다가 시시각각 진행시키고 있는 내전 문제에 아르페시스가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의 급진파에게 접근해 내전을 돕고자 하는 것 역시, 기밀로 다루어졌기에 몰랐다.

“황제가 없어지면,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아르페시스는 백작의 직설적인 말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걸 보고 백작은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 직접 주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내전의 주동자인 것을 안다. 그녀는 가족에게도 검을 겨눌 정도로 공사 구분이 명확하다.

아르페시스가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주었을 리 없다. 그는 곧 일어날 내전에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 그게 아르페시스의 뜻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가 제위에 오르게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뜻이 없는 그를 밀어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때가 되면 제가 총사령관님을 그리 좋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핏물로 만든 제위에 앉은 이가 어찌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겠나. 핏물로 쌓아 올린 것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한 핏물을 요구하는 법이다.

내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해도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오른다는 건 반역이 성공한다는 뜻이다. 적통 계승권자를, 그것도 피가 섞인 형제를 제거하고 친부를 잡아먹는 패륜을 저지른다는 의미. 그렇게 제위에 앉으면 부족한 정당성은 물론, 귀족들이 목을 매는 명분과 정통성을 채워야 한다. 그게 없으니 무력을 내세워 숙청이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대는… 여전히, 뜻을 바꾸지 않았나?”

아르페시스의 기억에 따르면 사라진 시간에서 테노리엘 백작과 테몬 후작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이 황제를 적대한다는 건 같았지만 백작은 후작의 방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마찰이 있었다.

상단, 정책, 국정 회의에서도 백작은 후작의 발목을 붙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백작은 답을 함에 있어 정말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예.”

백작은 무고한 백성과 병사들, 기사들의 죽음으로 쌓아 갈 결과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의 시대를 바꿔야 한다는 것도, 그것을 위해선 지도층이 변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희생되는 이들이 무고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백작의 이런 생각을 상황에 따른 융통성을 보이지 않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때로 희생이 있어야 다음이 있는 것이라 말하는 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때, 백작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 희생에 네가 포함되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나와 우리가 그 희생물에 포함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너와 너희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그 어디에도 희생해도 되는 것은 없다. 그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의해 강제로 희생당하는 것뿐이지.

반항할 힘이 없어 희생당하고야 마는 자들을 지키는 것은 백작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가 쌓아 올린 가치관이고, 의무이고, 신념이었다. 백작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너와 너희, 무고한 이들을 지킬 것이다.

그런 그가 내전이 일어날 것이 빤히 보임에도 가만히 있는 건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손발을 다 잘라 버렸으니까.

반군이 마음을 돌리게 설득하거나, 방해하려면 접촉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백작은 가문의 세작이나 정보원을 모두 빼앗겼기에 그들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반군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귀족들, 대표적으로 테몬 후작 말이다. 그는 백작과의 연락을 외면하고 어떠한 교류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국정 회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황제가 그를 관직에서 빼내어 남부에 집어넣었으니까.

황제, 그 이름을 읊을 때마다 백작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는 곧 자신이 걸어온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남부에 온 것은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접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황제의 마지막 수일 뿐이다. 그건 너무나도 분명하다.

힘이, 세력이, 여력이 남아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그에게는 내전이라는 판에 끼어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배제되었기에 다른 방향에서 다른 무고한 이들을 지키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전하께서는 뜻이 변하신 모양이군요.”

백작의 질문에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확실히, 내륙에서 곧 내전이 터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구나. 애초에 전쟁이란 막을 수 없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전조도 없이 갑자기 터져 나가는 것은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폭동, 혹은 반발이라 부르고 그 일과 관련된 결과는 승전이 아닌 진압, 혹은 해결이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아무런 사전 단계도, 전조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누군가 피워 냈고, 누군가는 꺼트리지 못한 파국이다. 반군과 에스메랄다는 피워 낸 사람, 백작은 꺼트리지 못한 사람이 된 것뿐이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닌가? 그대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반대하는 것이지?”

모두가 필요를 좇아가면, 필요에 의해 버려질 이들은 어찌하나. 누군가는 남아서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백작은 그 누군가를 직접 자처하겠노라 맹세했다. 자신의 창조주에게, 부친에게, 먼저 떠난 형제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변화를 위해 전하의 목숨이 필요하다면 내어 놓으실 겁니까?”

아르페시스의 입매가 굳었다.

“지금 당장 전하의 목을 리퀘나 앞에 걸어 두신다면, 그 희생의 뜻에 따라 저도 내전에 손을 보태겠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투로 꺼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그건 못 하시겠지요?”

“…….”

아르페시스는 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똑같습니다.”

백작의 답변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보았던 처형대와 끔찍한 화마를 떠올렸다.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놈들이, 누군가를 해쳐도 말인가?”

질문을 꺼내는 아르페시스는 떨고 있었다. 백작은 눈앞에 보이는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어 잠시 침묵했다.

“그래, 만약에 말이다.”

비틀린 저 표정은 원망인가, 증오인가, 그도 아니라면 절망인가.

“놈들이 그녀를 죽이는 날이 오게 된다고 해도, 놈들을 지키겠나?”

백작의 표정이 한층 더 묘해졌다. 놈들? 지금의 대화에서 보면 백작이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 혹은 무고한 자들이 되겠지. 그들이 에스메랄다를 죽인다는 의미인가?

사실 불가능한 가정이다. 황실이나 적대 귀족들도 아니고, 백성들이 에스메랄다를 어찌 죽인단 말인가? 그녀를 지키는 건 황제마저 견제할 정도로 굳건한 테노리엘인데.

헛소리다. 백작은 별 시답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순간, 영주권 위임장을 들고 찾아와 웃던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영지로 내려가자마자 뒷골목의 백성들을 도륙한 에스메랄다의 행동이 그를 붙잡았다. 이유와 과정은 물론, 그 상황 자체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백성들이 에스메랄다를 죽인다고. 그가 평생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그의 딸을 죽인다고.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주먹을 말아 쥔 백작이 답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지지 않습…….”

“그대의 자식이지 않은가!”

일렁거리며 때를 노리던 감정이 기회를 낚아챘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처럼 필요에 의해 거둬진 자식도, 사랑 없이 쓸모를 위해서만 자식이라 불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평생을 부친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리 만약이라는 가정을 덧대었다지만 백성들이 그녀의 죽음에 일조한다는데 어째서?

아르페시스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되물었다. 말이 되지 않아서 화가 났다. 하지만 백작은 잔뜩 화가 난 것이 분명한 아르페시스 앞에서 고요할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아르페시스는 백작의 답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차갑게 굳어 버린 아르페시스의 모습에 백작은 스산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감정 변화가 극단적인 사람이었나?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도 백작은 끝끝내 같은 대답을 내어 놓았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백작은 이미 한 번의 예외를 만들었다. 이미 작고한 그의 부인, 남매들의 모친.

과거 그는 육체가 늙어 전투력의 하락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 40대까지는 전장에 있을 생각이었다. 이후 정권에 발을 들여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지키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버렸다.

전장에 있던 시절, 그는 부인이 버티고 버티다 더는 못 하겠다고, 제발 돌아와 달라고 했을 때 맹세를 등지고 내륙으로 돌아갔다. 당시 테노리엘 백작은 고작 30대 초반이었다. 본래의 계획보다 10여 년 가까이 이른 시기였다. 그때 분명히 다짐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다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겠노라고.

그렇기에 그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로 또 다른 예외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맹세를 저버렸던 몸, 상황이 변했다 하여 두 번이나 맹세를 등질 수는 없다. 부인의 죽음으로 그의 예외는 끝난 것이다. 또다시 필요한 예외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안 되는 일이다.

백작은 좋게 보자면 타인에게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가진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지나치게 고집불통인 것이다. 모든 장점은 때때로 단점이 되고 또한 단점은 장점이 된다. 아르페시스는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고, 백작도 복잡한 심정을 다스리느라 꽤나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들 사이에 다시 대화가 생겨난 건 백작이 먼저 감정을 추스른 덕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주제가 오가긴 했지만 본래 대화의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흠, 흠, 본래 대화로 돌아가 보자면…….”

아르페시스가 흠칫거리는 사이 백작은 꽤나 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 큰 자식들의 사생활에 사사건건 참견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리디가 몸이 조금 약한 편이니 조심해 주십시오.”

무거운 침묵은 낯부끄러운 대화에 밀려났고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수치심과 묘한 불쾌감, 그리고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리디의 건강을 생각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총사령관님께서도 어엿한 성인이시니 옳은 판단과 자제를 갖추셨으리라 믿겠습니다. 혹여나 그런 날이 온다면 피임도 잊지 마시고… 흠, 전희에 대해서는 충분한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사내와 여인의 몸은 많이 다르기에 배려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아르페시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연인의 부친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정상인 건가?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시기를.”

“……그래.”

백작이 떠난 후에도 아르페시스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하룻밤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덕분에 몸에서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무언가 일어났는데 해결된 것은 없다. 그저 더한 것이 쌓이기만 했다.

지금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은 때때로, 삶이 버겁다는 생각과 함께 찾아온다. 아르페시스는 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온기가 빠져나간 손이 황량하기만 했다.

“하아…….”

백작과 대화를 하느라 흐트러졌던 생각이 하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시, 속에서 꾸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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