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청연1)이 걷힌 세상
리퀘나로 가기 전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리퀘나에 방문하기 위한 명분.
테노리엘은 사비의 일부를 무조건 남부군 후원 물자에 할당한다. 시세에 따라 규모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20여 년 전부터 금액의 변동은 크지 않았다. 영지 지원금은 물론 남부군에 묶인 자금 역시 상당한 규모이기에 백작이 에스메랄다의 상권 공격에 패한 것이었다.
남부군에게 들이는 돈을 상단으로 돌렸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자신의 손해를 메꾸기 위해 남부군 후원을 중단할 인사가 아니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남부군에게 후원하는 물자는 분기별로 준비가 된다. 매달 중순부터 준비를 시작해 다음 달의 중순이 되기 전에 전달하고, 다시 준비를 해서 다음 달의 중순이 되기 전에 전달하는 식으로. 달의 3, 40일쯤에 남부군에서 정기 회의가 열리기에 물자 취합에 따른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카의 16일이 밝은 오늘은 한창 물자 정리를 한 후 남부군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동 중일 시기다. 에스메랄다는 그 물자 전달을 직접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남부군에 방문 요청서를 보냈다.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현실적인 문제와 과거에 했던 감정적인 대응이 얽혀 만들어 낸 우연은 에스메랄다에게는 이득이 되는 점도 있었다. 페드로의 죽음 이후 에스메랄다는 남부군과 사적인 교류가 완전히 끊어졌다.
내막을 모르는 이라면 과거 그녀가 리퀘나로 향했던 것이 페드로와의 접점 때문이라고 보기 충분했다. 적어도 에스메랄다가 생각하기에는 그녀와 아르페시스의 사적인 접점이 황제에겐 보이지 않을 만한 상황이다.
이번 방문 역시 백작이 남부 전선으로 향한 후의 움직임이기에 주체를 아르페시스가 아닌 백작에게 집중시킬 만한 상황이 만들어져 있고. 백작이 남부군에서 보인 행보는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접점을 추가로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변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르페시스와 접점이 있던 사람은 페드로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에스메랄다와 테노리엘 백작의 내분이 황제의 확신 아래에 들어간 건 분명하다. 중앙군에 잠입해 있는 로부오들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중서부 경계선으로 이동하는 병력이 생길 것이다. 황제의 의심 위에 테노리엘, 더 정확하게 에스메랄다가 올라가 있다는 증거다.
에스메랄다는 백작과의 정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황제의 눈에 발각되었다. 테노리엘 내부에서 백작과 상단을 두고 싸움을 할 만한 세력을 꼽자면 영주권을 가진 에스메랄다가 가장 유력하다. 최악은 사병을 움직일 수 있는 가주의 인장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황제가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부에 묶여 계심에도 중서부 경계선에 병력이 배치된다는 건 영지에 있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겠지.”
올봄에 내려진 출정 명령에는 병력 부족으로 인한 문제를 보완하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확히는 병력을 보강하기 위한 수를 내어 놓음과 동시에 거기에 다른 것도 함께 진척시켰다고 봐야 하겠지.
수년 전 페드로 때문에 생긴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접점에 대한 확인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 황제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추측이 진짜인지, 우연의 연속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구분하고자 수를 둔 것이다. 정말 백작이 주장한 대로 페드로의 독단적인 충성심인지, 아니면 아들을 앞세운 백작이 속내를 가린 것인지 확인하려고.
적대 세력의 속내와 계획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수 싸움, 혹은 정치란 손에 들어온 정보를 이용한 추측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 추측이 증거와 정황을 통해 확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응하면 되니까. 문제는 불확실한 가정이다.
황제는 그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테노리엘을 여러 번 자극했다. 서부 대란 시기의 면세 규모부터 해외 상단의 세율까지 건드렸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국경 감찰을 하며 영지를 들쑤시려 한 적도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다면 테노리엘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기에 물증을 찾기 위한 자극이었으리라.
아마도 백작의 출정 명령은 마지막 판가름을 위한 수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위험은 있지만 백작과 아르페시스를 같은 곳에 밀어 넣어 두면 그가 찾지 못했던 발자취를 남길지 모르는 일. 결국 목표물이 정보를 보여 줄 만한 환경을 제공한 것에 가깝다. 함정을 심어 두어 상대방을 유도하면 자력으로 확보할 수 없었던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는 법이다.
에스메랄다도 종종 써 본 방법이다. 효과는 대상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백작도 그것을 읽은 것인지 전투 외의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결국 찾지 못한 것 같은데…….”
분명 확신을 내릴 만한 물증이나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나 테노리엘의 누군가가 황실 재판소 위에 서지 않은 게 그 증거다.
봉토를 하사받지 못한 하급 귀족 몇을 건드리는 것과 달리 사병을 구축한 공후백을 건드는 것은 조금 더 조심해야 할 일이다. 황제는 물증이 없는 이상 공후백들에게 대뜸 죄를 물을 수 없다. 잘못 건드렸다간 그 가문의 사병들과 싸워야 하니까.
가문이 몰락할 상황에 놓였을 때 귀족들이 사병을 동원하는데 망설일 리가 없지 않나. 아브람 백작 부인을 죽였던 일은 아마, 황제가 밀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겠지. 그래서 백작이 부당한 살인에도 숙인 것이고. 물증은 없으니 죄를 묻지도 못하고, 또 의심을 거두자니 정황 증거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결국 황제의 시선이 증거를 내놓지 않는 백작과 정쟁을 치른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 오기엔 충분했다.
“아니면 운이 좋게 페르멘 오라버니에게 향했거나…….”
페르멘도 갑작스럽게 기사 작위를 반납하는 등 미심쩍은 행동을 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아마도, 현재 황제가 반군과 연결하여 의심하고 있는 건 테노리엘, 테몬, 그리고 남부의 영주들 정도겠지. 그중 테몬이 가장 유력하지만 그쪽도 마찬가지로 물증은 없다. 심증과 정황뿐이다.
증거를 조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에 두 번 당할 에스메랄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 쪽에서 걸어오는 수작을 막는 데도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브람도 오랜 칩거를 깨고 영주 성을 열었으니 가시거리에 들어가 있을 테고 벨베크나 아르페시스의 이름까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에스메랄다가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정보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니 그가 누구를 더 후보에 넣어 두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답답해…….”
황제의 머리를 열어 그녀의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있다면 더 이상의 재어 보기를 관두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고, 없다면 더 조심할 텐데. 지금은 확신이 없으니 최악을 가정해 움직이는 게 전부다.
에스메랄다는 여기저기 뻗어 나갔던 생각의 가지에서 돌아와 테노리엘 백작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전선에 있는 아레스도.
그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게 너무 성급하지는 않은지 곱씹다 보니 생각이 너무 사방팔방으로 얽혀 버렸다. 정작 그들에게 보내고자 했던 서신은 여전히 하얀 종이 상태인데 말이다. 침실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은 에스메랄다가 막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써야 하나? 대체 무슨 말로 만남을 청해야 할까?
현실의 가혹함이 만들어 낸 참사 속에서 잘못한 이는 어디에도 없고, 지독한 선택지로 내몰린 불쌍한 이들이 있을 뿐이라고.
분명 그것을 인정하며 아르페시스에 대한 원망을 한 움큼 덜어 낸 참이다. 그러니 그녀의 죄 역시도 그렇게 덜어 낼 수 있어야 하건만 쉽지가 않다. 아르페시스의 것은 덜 수 있으면서 그녀 스스로의 죄를 탕감할 수는 없었다. 죄책감이 그것을 막아선다.
“너도 이런 심정일까?”
에스메랄다는 침실에 가득한 라퓨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도 스스로가 죄라고 여기는 것을 덜어 내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을까?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의 잘못이 아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원망한 2년이 너무 미안해서, 그럼에도 지워 내지 못하고 덜어 내는 것에서 그쳐 버린 것이 죄스러워서…….
복잡한 마음을 글귀로 정리하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깃펜을 놀렸다.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리퀘나에 도착할 즈음엔 지휘부 정기 회의가 있을 터.
전투가 활발한 겨울에 열리는 정기 회의는 부대 총책임자보다 부관들이 많이 오는 편이지만 그녀는 가족들을 만나야만 했다. 그렇다고 민간인인 그녀가 두 사람이 이끄는 부대가 있는 전투 지역으로 갈 수는 없으니, 두 사람이 리퀘나로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
「곧 중앙 리퀘나에 방문해요.」
차마 와 달라는 말은 적지 못했기에 그 짧은 문장이 전부였다. 한참이나 그 볼품없고 이기적인 문장을 바라보던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손길로 종이를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들이 오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음에도 그 이상의 어떤 말도 적을 수가 없었다.
전투 지역은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기에 에스메랄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만약 이번에 직접 만나지 못하면 계속 리퀘나에서 기다리든가, 비겁하게 서신으로나마 말을 하든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건 나중에…….”
만나지 못했을 때의 일은 너무 막막해서 비겁하게 뒤로 미뤄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시녀에게 파발꾼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서신을 건네주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에스메랄다는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과거 페드로가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던 약과 똑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매년 그녀의 생일날 약제 상단에서 약이 오곤 했다. 페드로가 죽기 전에 대량으로 주문하고선 값을 치러 두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먹지 않고 방치해 두었는데 이제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쓰디쓴 약제를 입에 넣은 후에 집무실이 아니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페르멘과 만찬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한숨이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페르멘은 이미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단과 대화를 나누던 그가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니?”
에스메랄다는 쓴 미소로 답하며 페르멘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에스메랄다는 옆자리에 앉은 페르멘을 힐끔거리면서도 속으로 곱씹는 것이 많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조용한 그녀를 대신해 식당을 채우는 건 나단과 페르멘이었다.
페르멘은 페드로와 분명 다른 사람이다. 페르멘이 곁에 있고자 노력할 때 에스메랄다는 이미 페드로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페르멘은 가문 내부에서 백작과 에스메랄다의 다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녀가 밖에서 무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백작이 형제들과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도록 로부오를 동원해 그들 간의 서신 교류도 모두 막았다. 백작에게서 권한을 모두 빼앗은 후에는 세작의 관리와 운용 역시 에스메랄다가 하고 있다. 덕분에 형제들을 감시하거나 그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 수월했고. 그러니 페르멘은 백작과 에스메랄다 사이의 날 선 분위기를 인지하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할 것이다.
오멘은 중앙 사교계를 통해 테노리엘의 상단을 빼앗긴 소문을 접하고 추측을 할 수 있겠지만, 페르멘은 아니다. 그의 눈과 귀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음으로써 모조리 막혀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반항 한번 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페드로는 그녀가 만든 핏물을 알고도 곁에 있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페르멘의 앞에서 입을 다문 채 따사로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페르멘에게 몇몇의 백성을 학살했음에도 곁에 있어 줄 것이냐는 물음을 던질 수야 있나. 어디로, 어떻게 가도 지독하다.
그는 아직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녀는 그의 방문을 허락할 수 없었다. 숨기는 자에게 재촉하지 않는 자의 미소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식사는 들뜨지 않은 분위기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 디저트가 나온 후에야 신이 난 나단 덕분에 조금 바뀌었고.
“왠지… 예전보다 케이크 숫자가 늘어난 것 같다? 오후에도 간식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페르멘이 나단 앞에 놓인 케이크의 숫자를 세어 보다가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후 간식이랑 식후 디저트는 다르죠! 그리고 오후에 먹은 건 파이였어요. 케이크랑은 달라요.”
그녀가 울고 난 후 부쩍 나단에게 너그러워진 페르멘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도 가만 보면 참 신기하다니까. 대체 그 많은 설탕이 어디로 가는 거야? 좀 더 동글동글해야 하지 않아? 활동량도 적으면서?”
“흠흠, 마나 운용 훈련 때문에 기력 소모가 심해서요.”
나단이 머쓱한 헛기침을 하면서도 자신의 식습관을 변호했다.
“그리고 본성 주방장의 탓도 조금 있어요. 디저트를 너무 잘 만든단 말이에요. 한번 먹어 본 사람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요. 자정에 야식으로 나오는 초콜릿 쿠키랑 머핀도 얼마나 폭신한지 몰라요!”
“야식도… 디저트 종류로 먹는 거야? 네 치아는 무사한 거니?”
어린 시절 잦은 군것질로 충치가 생겨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페르멘은 단것을 입에 잘 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페르멘의 앞에서 다디단 케이크를 섭렵하고 있던 나단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식사량보다 많은 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페르멘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전 아직 젊어서 괜찮아요.”
“……늙어선?”
“그때는… 봉급을 모아 둔 걸로 치료를 받을 거예요.”
“……신력 치료를 충치 때문에 받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페르멘이 웃으며 말하자 나단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나중에 늙어서 잇몸만 남을 거라고 매일 놀린단 말이에요. 겁주지 마세요!”
“겁주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너 진짜 그러다 치아를 다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페르멘을 바라보면서도 케이크를 쪼개 입 속으로 가져갔다.
“맛있으니까 괜찮아요.”
“괜찮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별것 없는 대화 속에서 페르멘이 키득거렸다.
“신력이 만능은 아니니까 양치는 꼬박꼬박해라? 충치 생기면 고생길 말고는 없다.”
“네에…….”
“빈말 아니야. 다녀와서 네가 하루에 양치 몇 번이나 했는지 검사할 거야.”
“네?”
에스메랄다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사이 나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세요?”
“아…….”
페르멘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에스메랄다를 살폈다. 어차피 공식적인 기록까지 남는 방문이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기에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을 대신해 답을 해 주었다.
“곧 리퀘나에 방문할 예정이라 며칠 성을 비울 거란다.”
“남부 전선에 가신다고요?”
나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잠시 눈꺼풀을 끔뻑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인데… 위험하지 않나요?”
“아직 리퀘나 지역까지 전선이 밀리지는 않았어.”
페르멘의 대답에도 나단은 그동안 들어온 것 때문에 쉽사리 걱정을 접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남부군이 예전 같지 않다고…….”
웅얼웅얼, 나단이 케이크를 포크로 짓뭉개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강해 보이던 페드로도 그곳에서 죽지 않았나.
남부군이 위태롭다, 이대로라면 전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도움이 될 만한 연구를 해 봐야겠다, 라그나가 2년 전부터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실제로 페드로가 죽은 이후 남부군은 계속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인구 부족으로 인한 병력 증원 문제에 있고.
“리퀘나를 닫고 수성을 해야 할 정도가 아니면 충분히 움직일 만해. 방문자 호위는 총사령관 부대에서 책임지니까.”
“어…….”
“가문에서도 호위 병력을 차출해 갈 예정이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 주제로 오래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페르멘은 조금 단호하게 말을 끊어 냈다. 애초에 그가 나단에게 너그러운 이유는 에스메랄다가 라그나를 아끼기 때문이고, 또한 그가 찾지 못했던 방법으로 에스메랄다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니까. 페르멘이 나단을 아끼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신하를 대하는 직계의 본분을 놔 버릴 정도로 편애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만찬은 다시 나단의 치아 건강을 화두에 올리며 무난하게 끝났다. 나단도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에스메랄다는 출발 전날 찾아온 그의 행동 때문에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뭐?”
나단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집무실 옆에 있는 응접실로 이동한 에스메랄다가 되물었다.
“제가 물어보니까, 유바스 경이 함께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제가 가면 안 되나요? 원소 마법으로 만든 물리력은 제가 더 강해요. 호위를 위해 전투 마법사로 따라가기엔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기회에 마수를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백작령에 온 후로 계속 여기만 있어서, 아버지가 세상 보는 눈이 좁다며 몇 번 말하곤 했거든요. 이 기회에 남부에 가 보고 싶어요.”
열심히 자신의 장점을 나열하던 나단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의문을 표해야만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나단은 분명 테노리엘 가문에 소속된 전투 마법사로, 차출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본인이 원한다면 자원할 자격도 충분하고.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분명 며칠 전 라그나에게 언질을 주었다. 떠날 것이 분명한 인물을 굳이 남부로 데려갈 이유는 없다. 나단이 계속 테노리엘 소속으로 있을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을 들여 그에게 경험을 쌓아 줄 필요가 어디에 있다고. 그럴 바에는 이미 경험이 있는 가문의 마법사를 대동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곧 라그나와 여행을 갈 예정이지 않니?”
안위를 위해 에스메랄다에게 오긴 했지만 내전에 엮이고 싶어 하지는 않던 라그나는 떠날 것이다. 그런데 곧 떠날 그와 함께 움직여야 할 나단이 남부 호위에 자청하다니?
“아…….”
나단은 잠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히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에스메랄다의 의문이 깊어지기 전 나단은 툴툴거리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분명 아버지가 먼저 가자고 얘길 꺼내긴 했거든요? 그런데 묘하게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아요. 언제 가냐고 물어도 나중에, 나중에, 그런 말만 하고요. 여행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면 남부에 다녀와도 되냐고 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따라가면 안 될까요? 잘할 수 있어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따라가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기 때문일까? 나단의 말은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예전이랑 달리 승마도 엄청 잘해요. 이동에 방해되지 않을게요. 그리고 혹시 작년 겨울처럼 전선이 뚫려도… 아, 뚫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요. 음, 반경… 광역 원소 마법이면 한, 한… 2, 3백 마리는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어요. 중형은 마나 농도를 늘려야 한다고 들어서 잘 모르겠지만 소형 마수를 다수 상대하는 데는 저만한 인력이 없을 거예요. 진짜 잘할 자신 있어요. 저를 데려가 주세요. 네?”
에스메랄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단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 보마. 라그나와도 대화를 해 봐야 할 일이고.”
“저는… 네에…….”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푹 숙인 나단에게 라그나를 불러오라 이르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마음대로 하라니? 라그나가 나단을 남부로 보낼 생각을 한다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계속 두드렸다. 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이윽고 그 답을 가져온 자가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뭐요? 불렀다며?”
라그나는 삐죽이는 심정을 감출 생각도 없이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애초의 약속대로 그날이 도래하기 전 빼내 주겠다고 말한 직후인데 왜 저러나?
그녀는 불퉁함이 가득 담긴 라그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각자의 일로 바쁜 첸과 다나의 사이에서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누렸다. 그들 사이에서 대화가 시작된 건 라그나가 삐죽거리면서도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기 시작한 후였다.
“나단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
에스메랄다가 먼저 포문을 열자 라그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퀘나 방문에 동행하는 것을 자네가 허락해 주었다지?”
“뭐, 지가 가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수?”
“자네는 곧 출발해야 하지 않나?”
“빨리 쫓아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갈 거요!”
저건 또 무슨 반응인가? 에스메랄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그나가 도착한 후 잠시 멈추었던 손가락이 다시 일정한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 남부에 다녀오는 게 몇 년 걸리는 것도 아닌데 갔다 오라고 할 수도 있지.”
“…….”
“어차피 일정 마치고 돌아와도 겨울이 한창일 텐데 뭐 급한 일이라고, 가라, 가라, 떠미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눈치를 보는 것도 그에게서 나올 만한 반응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가정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의미인데… 에스메랄다는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 자네를 떠밀었지?”
“뭐요?”
“지금 자네 태도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심술을 부리는 열 살짜리 꼬마 같군.”
슬쩍 건드려 보았더니 참, 에스메랄다는 심통이 난 게 분명한 라그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의 반응은 아무리 봐도 소외감에서 오는 섭섭함으로 보인다.
에스메랄다는 과거를 되짚었다. 라그나의 태도가 변한 적이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긍정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툴툴거렸고 성질을 내기 바빴다. 페드로의 사후에 그 빈도가 조금 더 늘어난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매번 하는 툴툴거림이었기 때문인지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심리가 변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의 행실이 중요한 것이다.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 말을 하면 될 일 아닌가?”
움찔, 하고 떨린 손이 그의 답을 대신했다.
“나와 고용 계약서를 쓸 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반역죄로 엮이고 싶지는 않다고.”
“그건, 그때는 당연히…….”
“내 나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일이라고는 해도 위험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실제로 우리 측 병력은 황제가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에 비해 부족하네.”
아비체룬의 병력이 완전히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반심을 품은 백성들을 데려다 숫자를 불렸지만 패 하나가 나가떨어진 손실을 모두 채울 수 있을 리는 없다. 상대가 가능한 수준에 이른 것이 최대치였고,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것이네. 약속했던 대로 말이야.”
라그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꿍얼꿍얼거리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내 말의 어디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는 이제 제법 잘 맞는 크기의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난 그날의 약속을 지켜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을 뿐이네. 자네가 위험을 감수하고 가지 않는다 하면 굳이 보낼 필요 없지.”
라그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가 어찌 되고 있는지 말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 달래려는 거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툴툴거림에 섭섭함이 담겼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는 툭하면 제멋대로 신경질을 부렸으니까. 결국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렀다.
“그럼? 자네에게 내부 정보를 전부 말해 줬어야 한다는 건가? 자네가 훗날 계획대로 떠나 내 행적을 유출하면 어찌하려고?”
“거봐! 아예 내가 떠날 거라고 확정을 하고 있잖아!”
“자네가 떠나고 싶다 했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내가 준 세튀스의 신분 패를 여전히 잡고 있는 자네가 남을 것이라 믿었어야 하나?”
드디어 말문이 막힌 모양이지.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가 떠나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남아도 상관없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총애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패전으로 인해 자네와 나단이 반역에 엮일 수 있다는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내전이 시작되면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 못한다. 황권에 도전하는 첫 번째 전투가 발발하는 즉시 황제는 귀족들에게 사병을 차출하는 즉결 명령을 내릴 것이다. 사병 차출에서 중요한 부분은 일이 끝났을 때 황제가 동원한 병력에게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군 창설 이후 책정되는 면세와 비슷한 이치다.
차출 명령을 일찍 내리면 그만큼 황제의 부담이 커지기에 아직은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터지면 수면 아래에서 나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에스메랄다가 그 명에 응할 리 없으니 당연히 황제는 테노리엘의 뜻을 확인하게 된다.
아브람, 테몬, 그리고 남부의 반황실 세력들 역시 황제에게 등을 돌리겠지. 결과적으로 황제가 사병 차출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반정에 손을 댄 인물들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테노리엘에 남겠다는 건 반역을 지지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떠나기 싫다면 행동을 확실히 하게. 도망칠 방도를 계속 쥐고 있는 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신뢰는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야.”
이전처럼 제 성질을 마음껏 부리며 따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라그나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의 라그나 앞에서 에스메랄다도 복잡한 생각을 반복했다.
나단의 마나 친화력은 분명 우월한 전력이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의 개별적 포섭을 포기했었다. 라그나가 떠날 것이라 너무 확고히 믿기도 했거니와, 나단과 라그나의 관계가 견고해 떨어트릴 수 없다고 판단했었으니까. 하지만 라그나가 남고자 한다면… 데려가 키우는 것이 맞다.
나단은 테노리엘 소속이지만 더 깊게 파고들면 에스메랄다 개인을 따르는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라그나와 떠나지 않는다면 내전에 동원할 수 있다. 이동 중에 데리고 다니며 그가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지 한번 살펴볼까?
“본인이 바라고 있기도 하니, 리퀘나 방문 문제는 나단이 동행하는 것으로 진행하겠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자네도 마음을 정하는 게 좋겠군.”
에스메랄다는 결국 나단을 데려가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라그나에게 확답을 내릴 유예 시간을 줄 겸, 나단이 그녀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확인할 겸.
이후 라그나는 에스메랄다의 손짓에 의해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복잡함을 담은 한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없이 무거웠다. 훗날을 그려 보지 않았기에 라그나와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훗날을 정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는 유용하다. 그는 쥐고 있다고 해서 손해가 나는 인물이 절대 아니다.
라그나가 남음으로써 생각해야 하는 다음은 그녀에게 골칫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르페시스의 즉위 문제에 대한 선택을 하지 못했다. 당장은 그의 곁에 가야 하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녀는 여러 인물과 얽혀 있는 용서의 문제와 내전을 비롯한 복수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당장의 문제 외에 미래의 문제는 여전히 그녀의 시야 밖에 있었다.
“끝…….”
에스메랄다가 내뱉은 중얼거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끝이 온다면, 다음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참 우유부단하구나.”
그렇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또 한 번 선택을 미루었다. 그녀는 선택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 * *
물자 준비는 에스메랄다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차질 없이 진행되었을 사항이다. 그러니 그녀는 정말 몸만 준비해 출발하면 되었다. 방문 요청서를 든 파발꾼이 이미 리퀘나에 도착했을 터, 그녀는 짧은 준비를 마치고 여정에 올랐다. 함께 가기로 한 나단 역시 기대감에 들뜬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본래는 빠른 이동을 위해 말을 타고자 했으나 페르멘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녀의 몸이 승마로 인한 장기간 이동을 버티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 몸은 지금 너무 약해. 절대로 말은 안 돼.’
그는 마차가 아니면 아예 성 밖으로 에스메랄다를 내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엄하게 훈계했다. 그녀 역시 사라진 시간에서 보았던 제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초췌한 모습 때문에 아르페시스와 가족들을 만나는 게 걱정될 정도로, 그녀는 너무 말랐다. 식사량을 늘렸고, 페드로가 보내 준 약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지만 고작해야 닷새의 노력으로 나아지긴 힘들다. 이동하는 동안에라도 조금씩 나아지길 바라야지.
얕은 한숨과 함께 카 18일, 에스메랄다 일행이 올라탄 마차가 테노리엘 백작령을 나섰다. 호위로는 에스메랄다가 지정한 용병 다섯 명과 가문의 기사 다섯 명이 동행했다. 용병 중에는 시리스는 물론, 지난해 북부 광산을 떠나 백작령으로 돌아온 테란도 속해 있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그녀의 정보선은 탄탄해졌다. 로부오들이 매해 교육을 마치고 활동을 시작하고 있으니까. 테란은 지난해 늘어난 로부오들에게 광산의 관리를 맡기고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동하는 내내 끊임없이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만 했다. 옆자리에 앉은 페르멘이 소화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계속 먹거리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가 마른 이유는 병마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먹지 않아서였으니 지금은 잘 챙겨 먹을 때였다.
“너 어릴 때도 이렇게 먹였는데. 새삼 그때 기억이 나네.”
페르멘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형제들 틈에 둘러싸여 아기 새처럼 음식을 받아먹던 과거를 떠올렸다.
“기억나?”
“……네, 그 무렵에 오라버니들을 졸라 케이크를 먹었던 기억도 나요.”
처음 먹어 본 달콤함이 너무 좋아서 조르고 또 졸라 형제들 품에 앉아 군것질을 했었다. 그녀는 어느새 아득하게 먼 과거의 기억이 추억이 될 만큼의 시간을 거쳐 왔다.
에스메랄다는 때때로 페르멘과 추억을 나누거나 페드로의 상실로 생긴 상처를 함께 보듬었다. 과거에도 이런 식이었다. 한 명이 떠날 때마다 남은 이들과 함께 떠난 이를 추억하며 떠난 이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익혀 갔다. 그리고 테노리엘 백작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떠났을 때는, 그마저도 하지 못한 채 혼자 천천히 무너져 갔지.
에스메랄다는 때때로 어두운 과거를 보며 차근차근 일정에 따라 이동했다. 나단은 자신이 챙겨 온 군것질거리를 에스메랄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함께 입술을 오물거리는 두 사람을 본 페르멘이 다람쥐 두 마리가 앞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웃는 일도 있었다.
물론 따듯하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에스메랄다가 홀로 자리를 피할 때면 그들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그녀는 종종 시리스와 테란이 따로 보관 중인 전보 마도구를 확인했다. 자동 발현 실드 마도구와 함께 그녀의 목걸이에 걸린 휴대용 전보 마도구 때문이었다.
내용까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전보가 도착하면 펜던트가 빛난다. 그 순간이 오면 에스메랄다는 어김없이 페르멘을 등지고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페르멘과 나단의 곁에서 차분함을 영위하는 동안에도 내전을 위해 쉬지 않고 달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괴리감이 때때로 에스메랄다를 짓눌렀다. 가족, 희생, 핏물, 학살, 미래, 사랑, 죄책감. 엉키고 뒤섞인 생각들을 풀어내지 못해 홀로 앉아 있으면 어김없이 페르멘이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그를 빤히 응시하곤 했다. 페르멘은 결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시선의 끝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얼굴을 본 시리스는 물론, 지난해에 갑자기 백작 성에 나타난 테란에게도 절대 접근하지 않았다. 함께 있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기 위해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거나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분위기와 함께 에스메랄다의 일행은 남부에 발을 들였다. 호위 병력을 데려왔다지만 남부에서 야영을 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드물긴 하지만 개별적으로 전선을 넘어온 마수들이 뭉치고, 뭉치고, 또 뭉쳐 1백의 규모까지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결국 꼬불꼬불하게 외성이 있는 도시를 거쳐 가며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고 소형 마수를 마주쳤고, 간단한 교전이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원소 마법으로 마수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재능에 대해 감탄했다. 그를 대뜸 전쟁에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하기엔 이른 것 같았지만 만약 동원할 수 있다면 큰 전력이 되어 줄 것은 분명했다.
에스메랄다는 불편함과 번거로움 속에서 오는 초조함을 참아 내며 12일을 마차 속에서 달렸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 시간이 되었을 때, 그녀가 탄 마차는 중앙 리퀘나 성벽과 가장 가까운 헤르토크 백작령의 최남단 도시에 당도했다.
그녀를 비롯한 페르멘의 방문은 이미 전달된바, 본부대 기사들이 후방 도시에서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 앞에 대기 중이던 일단의 기사들이 테노리엘의 마차를 보고 서둘러 다가왔다. 페르멘은 그들을 발견한 후 곧장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록세트 경이십니까?”
에스메랄다는 리퀘나 방문 요청서와 일자별 이동 경로를 파발꾼에게 들려 보냈다. 최근 전서구 사냥이 성행하는지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인편을 사용한 것이다. 그와 관련해 이틀 전, 파발꾼이 가져온 승인서를 받아 보았다.
그 승인 문서 위에 적혀 있던 방문자 호위의 책임자는 칼라일이었기에 페르멘이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예, 카 루그 록세트 칼라일입니다. 영식께서는…….”
“처음 뵙겠습니다. 라 에타 테노리엘 페르멘입니다.”
“아…….”
“형님께 종종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쁘군요.”
“저 역시, 페드로에게 경의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현재 루가 작위를 보유하지 않았으니 편히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문을 두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을 때 페르멘의 곁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와 칼라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이군요, 록세트 경.”
“오랜… 만에 뵙습니다, 테노리엘 영주 대리.”
잠시 몸을 움찔거린 칼라일의 목소리가 흐렸다. 과거에 비해 너무나도 야윈 그녀의 모습 때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에스메랄다는 흔들리는 칼라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리퀘나 진입은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마차와 말이 느릿한 속도로 함께 움직이는 곳에서 칼라일과 에스메랄다의 대화가 조심스럽게 오갔다.
“저희도 어제야 토벌에 들어갔기에 아직 작업이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최근 개체 수가 늘어난 바람에 진입은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리퀘나에 방문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전선, 정확히는 7개의 리퀘나 성벽은 모두 가장 가까운 후방 도시를 하나씩 두고 있다. 방문자는 그곳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후방 운송로를 통해 리퀘나의 각 성으로 진입할 수 있다. 물론 후방이라 한들 남부의 영토 내에서 어슬렁거리는 마수들이 있기에 놈들을 모두 소탕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방문자가 리퀘나로 이동하는 것은 물자 운송로 주변 하루 거리에 마수가 정말 한 마리도 없어 완벽한 안전이 확보된 이후다. 방문자가 미리 방문 요청서를 보내 일정을 잡아야 하는 이유였다.
운송로를 따라 이동하는 게 군의 물자라면 이런 대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물자 운송을 책임지는 병력은 마주치는 소수의 마수들을 토벌하며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처럼 주변 마수를 모두 치워 위험 한 자락 없는 상태가 되어서만 이동을 시작하는 건 방문자에게 남부군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이었다.
대개 방문자들은 남부 전선의 중요성을 인지한 채 후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리퀘나로 가기 위해 왔다가 사고가 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 이 때문에 남부군은 방문자의 이동 경로 근방 하루 거리에 마수가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30여 년 동안 방문자가 마수를 마주하거나 습격당해 다치는 사건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건 남부군이 그 원칙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위험을 완전히 배제하는 작업은 방문자가 스스로의 안전에 대해 가지는 확신이 되어 주고, 그 확신은 지속적인 방문으로 이어진다. 이후 그들이 리퀘나에서 남부의 실상을 보고 후원을 지속하는 것이다.
“일정을 촉박하게 전달한 것은 저희 쪽 잘못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후방 도시에 도착을 했음에도 곧장 이동하지 못하는 것은 남부군의 입장과 절차는 물론, 현재 남부군의 병력 운용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남부군의 부대는 크게 최전선에 나서는 전투기와 전투에서 배제되는 휴식기를 번갈아 가며 가진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휴식을 취하는 부대가 후방 운송소의 안전을 담당한다. 후방으로 빠진 휴식기의 부대가 순찰을 돌며 발견하는 소수의 마수를 토벌하는 방식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남부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를 잡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임무는 후방 운송로의 안전 확보뿐이니까. 순찰 전투와 방문자의 진입을 위해 인근 지역의 마수를 전부 토벌하는 건 명백히 다르다. 휴식기의 부대는 해당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남부군이 어기지 않는 원칙 중 하나다.
순찰 시 발생하는 소규모의 토벌이 있지만 그들은 엄연히 휴식을 취하는 부대, 기존의 임무 외의 것을 추가로 시키지 않는다. 남부군에서 방문자를 위한 마수 토벌은 총사령관의 부대가 하는 일이다.
방문 일정이 잡히면 전선에 있는 총사령관 부대가 후방으로 이동하고, 그들이 휴식기 부대의 순찰 경로 밖에 있는 마수까지 모조리 토벌하는 것이다. 총사령관의 본부대가 빠짐으로써 생기는 전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합동 전투 일정이나 병력 변동에 따른 전술을 새로 짜야 한다.
그렇기에 보통의 방문은 2, 30일 전에 고해 주는 것이 남부군에 대한 배려이다. 결과적으로 후방 도시에서 대기해야 하는 건 너무 급하게 움직인 에스메랄다의 잘못이다. 하루빨리 들어가겠다고 본부대 병력을 재촉할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방문자의 안전 확보를 총사령관 휘하의 병력이 담당하는 것 역시 남부군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이다. 그렇다고 총사령관이 직접 토벌에 나서는 건 아니지만. 귀족들이 노래를 부르는 체면과 명예 때문에라도 총사령관은 손님을 맞이할 주인으로서 리퀘나에서 기다리는 게 일반적이다.
“기다리시는 동안 머무실 여관을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는 그 대화를 끝으로 칼라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반면 칼라일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에스메랄다를 계속 힐끔거렸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마차가 성내로 진입하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다시 대화가 시작된 건 페르멘이 입을 연 이후였다.
“후방으로 넘어오는 개체가 많아진 모양이군요.”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던 칼라일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해 마수의 수가 늘고 있습니다. 아직 대규모 마수 무리가 넘어온 적은 없습니다만, 이전보다 후방 순찰선을 넘어 남부에 들어오는 수는 증가했지요.”
“전체 규모로 보면 어느 정도나 늘어났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10여 년 전에 비해 1.5배 정도 늘어났습니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이 무렵부터 점점 마수의 수가 늘어났다. 40년이 넘어가면 더 빠르게, 더 많이 늘어날 것이다.
42년 겨울, 아르페시스가 황실에 남부 현황 보고를 하며 남부군에 내려오는 중앙 지원금의 증액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남부군이 토벌한 마수의 전체적인 숫자는 20년대 후반 무렵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상태였다. 물론 증액 요구는 반려되었다. 황제가 노환을 앓기 시작했을 무렵이라 황태자와 황제파 귀족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황제가 쓰러진 건 그다음 해의 일이었지만… 노환이란 어느 한 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에 걸쳐 쌓여 나간다. 나이와 세월이 쌓이듯 천천히. 이미 그때부터 징조가 있었던 것뿐이다.
에스메랄다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앞으로 남부는 점점 더 위험해질 것이다. 아르페시스라는 구심점 위에서 몇만의 병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지켜도 힘들어질 시기가 오고 있다. 곧 내전이 일어날 테니 그 이후에는…….
에스메랄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대화 중인 두 사람을 외면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때 고개를 돌렸던 건 갑작스러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 순간 반드시 겪어야 했던 필연이었을까?
에스메랄다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먼 훗날에도 그녀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그 순간이 없었다면 많은 것이 달랐으리라는 것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이후의 일은 없었을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돌린 직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마차를 등지며 후드의 끝자락을 잡는 사람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곁에 똑같이 후드를 쓴 사람은 한 명. 주변을 빠르게 훑은 직후 에스메랄다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왜 등을 돌릴까? 왜 후드를 잡았을까? 마치 얼굴을 더 확실하게 가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뒤를 지나가는 마차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처럼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지?
에스메랄다는 추론에 매우 능한 사람이다. 손 안에 들어온 정보를 가지고 추측을 하는 일은 그녀가 숨을 쉬는 일처럼 자주 반복하는 일이다. 그 과정은 언제나 같다. 왜, 어째서, 어떻게, 언제, 무엇을, 누가, 아주 기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가진 정보를 답안지에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의문을 던졌고 가진 정보들로 답안지를 만들어 냈다.
테노리엘의 마차가 지나갈 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건 마차 안에 탄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이겠지. 후방 도시에서 테노리엘의 마차를 보고 그래야 하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자신이 본 사람의 체격적인 특징을 더해 가며 후보들을 추렸다. 함께 있던 이들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후드를 잡은 사람은 체격적인 특징을 통해 두 명까지 좁혀 냈을 때였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차갑게 굳었다. 그들 중 누구도 여기에 있어선 안 되니까. 그녀가 탄 마차는 일정한 속도로 내달려 문제의 그 인물을 완전히 지나쳤다. 조금의 거리가 더 벌어진 후에야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열렸다.
“테란.”
“예, 아가씨.”
말을 타고 마차를 따라오던 테란이 곧장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창가로 다가왔다. 건너편 창문에서 칼라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메랄다는 지금부터 나눌 대화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테란을 응시하자 의도를 알아챈 그가 마나 장막을 펼쳤다. 느껴지지는 않지만 고작해야 그와 그녀를 감싸는 정도겠지. 에스메랄다는 테란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후방에 후드를 쓴 2인을 쫓아라. 그중 한 명은 상급 기사가 확실하니 자네가 단독으로 움직이게.”
테란은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에스메랄다가 이어 갈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 에스메랄다는 그 기다림에 부응해 짧은 순간 자신이 확인한 신체적 특징이나 신발의 색상 같은 단편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움직임을 보이면 곧장 전보 마도구로 알리게. 자네가 쫓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도 안 되고 절대 놓쳐서도 안 되네.”
“예, 아가씨.”
테란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마나 장막을 거두고 마차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는 곧장 말을 돌려 쫓아가는 대신 잠시간 더 마차를 따라왔다. 마차가 대로에서 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택한 모양이다. 페르멘을 등지고 말했으니 다른 이들에게 입 모양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테란이 물러간 후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단이 움찔거렸다.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잠시 일그러졌다. 전투 마법사들은 분명 가문에 소속된 병력이다. 테노리엘은 그들에게 당연히 수신호나 복화술 등의 훈련을 시킨다. 나단 역시 마법사 자격을 얻어 테노리엘에 정식 고용된 이후 이러한 훈련을 받았고. 그가 얼마나 잘 쫓아 왔는지는 보고 받은 적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 그의 위치에선 에스메랄다의 입술 모양이 어느 정도 보였으리라.
“쯧.”
나단을 여전히 어린아이로 여겼기 때문일까? 조금 전 보았던 사람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등 같은 최소한의 대비도 하지 않다니,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단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움직인 건 경솔했다. 주의를 주기는 해야겠지만… 당장은 페르멘과 칼라일이 곁에 있으니 후로 미루는 것이 좋으리라.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잠시간 응시한 뒤 시선을 돌렸다. 이후 마차는 칼라일을 따라 그들이 머물 여관으로 향했고, 어느 순간 테란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관 앞에 멈추어 선 마차에서 내린 페르멘과 칼라일의 시선이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페르멘은 곧 고개를 내저으며 에스메랄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부딪쳤다.
“어찌 그러시죠?”
에스메랄다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질문을 꺼내자 칼라일이 묘한 안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곧장 이동을 할 것도 아니니 여관 주변의 병력은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가문에서 대동한 호위들이 있으니 토벌이 끝나면 연락을 주시는 게 좋겠어요. 편히 쉬고 싶네요.”
에스메랄다는 여관 주변에 포진한 몇몇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후방 도시에는 남부군을 위한 숙소가 있다. 그들을 여관에서 몰아낸다고 해도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것도 아니니, 호위와 동시에 감시가 가능한 시선들을 붙이고 있을 생각은 없다. 테란이 무슨 소식을 전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옅게 웃은 후 칼라일을 지나쳐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카 30일의 해 질 녘, 에스메랄다가 중앙 리퀘나와 반나절 거리에 있는 후방 도시에 도착했다.
* * *
여관에 들어온 후 에스메랄다는 곧장 나단을 따로 불렀다. 씻거나 쉴 시간조차 없이 마련된 자리임에도 곧장 대화가 시작된 건 아니었다. 옆방에 페르멘이 있으니까.
그의 실력은 나단의 방문을 알아차리고도 남았다. 마음만 먹으면 에스메랄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터.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대화임을 피력한 셈이다. 곧 시리스가 시선을 돌렸다. 에스메랄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그에겐 페르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터였다.
“여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전부 페르멘을 사랑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이 다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 그녀의 배제에 페르멘이 순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사랑과 신뢰가 같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의 일에 그들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만은 여전했다. 그들의 신념이 무고한 이들에게 있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굳건한지 아니까.
페드로가 조금 달랐다 해서 다른 이들도 모두 다를 것이라 신뢰할 수는 없다. 그게 기사 작위를 반납하면서까지 곁에 남아 있는 페르멘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날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의심에 의심을 더해도 과하지 않다. 조심해야 할 시기다.
이윽고 시리스가 마나 장막을 펼쳤다. 이제 그보다 운용력이 높은 이가 장막을 뚫고자 하는 시도만 조심하면 된다. 꾸준한 훈련과 노력 덕분에 어느덧 시리스도 상급 기사의 경지에 발을 들였고 꾸준히 실력이 느는 중이니 여기서는 충분하리라.
“아까 무얼 보았니?”
에스메랄다는 침대에 앉은 채로 앞에 서 있는 나단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질문에 답했다.
“후방, 후드, 3인, 쫓다, 상급 기사, 단독, 움직임, 전보 마도구, 들키지 말고 놓치지 말라… 제가 본 말은 이 정도가 전부예요.”
중요 단어는 전부 포착한 나단을 보며 에스메랄다는 조금 감탄한 참이었다.
“열심히 했구나.”
“……네.”
나단이 가문에서 지정한 훈련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였다. 에스메랄다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수줍게 웃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널 왜 따로 불렀는지는 알겠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르신 거 아닌가요?”
순수하고 어리기만 하던 나단이 이제 윗선의 의도를 살필 정도가 되다니, 정말 긴 시간이 지나긴 한 모양이다.
“그래, 다 알고 있다 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에스메랄다는 조금은 장하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걸 본 나단이 헤벌쭉하게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여전히 그에게 순수가 남아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긴 이동에 피곤했을 텐데 이제 그만 가서 쉬렴. 네 침묵을 믿고 있으마.”
물론 거짓말이다. 이제부터 나단이 하는 모든 말은 에스메랄다의 감시하에 들어올 것이다. 용병 중 한 명에게 그를 주시하고 그가 하는 말 중에 오늘 나눈 대화에 대한 것이 있는지 감시하게 할 생각이니까.
“에?”
이어지는 에스메랄다의 말에 나단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런 나단을 보며 에스메랄다의 고개도 기울어졌다.
“어찌 그러니?”
“어…….”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나단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가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은 그는 곧 에스메랄다의 방을 나섰다.
“앞으로 나단을 주시하게 시키렴. 저 아이가 오늘의 대화를 언급하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예, 아가씨.”
짧은 대화 후 시리스까지 자리를 비킨 후에야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씻은 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외출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쉬어 두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평소라면 용병들과 이 도시에 있는 로부오들만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마도, 직접 가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며칠은 더 걸릴 것이라 여겼는데 눈앞에 기회가 있으니 성급해진다. 어차피 그녀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아니니 잠깐 보고 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아주 잠시, 가지 말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동행하면 누군가는 그녀의 보호를 위해 전투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전력이 깎이는 것이다. 비전투 인원인 에스메랄다는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인근에서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옳은 판단은 고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봐야 뭘 하겠어…….”
어차피 갈 것인데. 또한 그들의 움직임보다 에스메랄다의 이동이 빠르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녀가 후방 도시를 떠난 후에는 로부오들만 다녀와야 할 테니까. 지금은 테란이 연락을 취해 올 때까지 할 일을 하자.
에스메랄다는 잠시 의자에 앉은 채 기다렸고, 몇 분 후 시리스가 옆방을 빌린 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안고 왔다. 시리스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나 장막을 펼치자 그와 함께 들어온 객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에반스였다. 에스메랄다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고 맞은편에 앉은 그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에는 곧장 본론이다.
“머저리가 고용한 용병들을 치워야 할 것 같네.”
“수가 워낙 많은지라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합니다.”
에반스 역시, 그녀를 만나는 목적은 이것뿐이라는 듯이 사담을 건너뛰고 곧장 일 얘기로 넘어갔다.
그동안은 방치하다시피 했지만 마음을 다잡았으니 손을 써야 할 일이 바로 남부의 일이다.
“예상하는 기간은?”
“봄까지 이어질 듯합니다.”
“매수는 제해도 좋다.”
“겨울 내에 끝낼 수 있습니다.”
“곧장 시행하고, 피해 상황 및 결과만 간략히 보고하게.”
“용병을 단속하고 있는 머저리의 기사들은 어찌할까요?”
에스메랄다는 그 질문에서 깊고 깊어 사무치기까지 하는 원한을 보았다.
“자네 뜻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겠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케니샤가 죽은 후 더는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숨어 있는 데 전력을 다해 온 에반스다. 황태자는 아직도 과거의 전말에 대해 제대로 찾지 못했기에 남부에 꽤나 많은 인력을 심었다.
그 모든 인원이 수색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남부는 황태자가 분명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는 지역이다. 그의 근위 기사나 사비로 고용한 자유 기사들이 상당히 많다. 계속 칼을 갈기만 하고 쓸 일이 없었을 텐데 이런 일에서 사적인 원한을 푸는 것 정도는 눈감아 줘야겠지.
곧 시리스가 들어와 에반스를 데리고 나갔다. 사실 전보 마도구의 배치가 완료된 이상 굳이 만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가 과거의 히나처럼 일을 그르치지 않길 바랐기에 직접 얼굴을 마주했다.
에반스는 방계이기는 하나 히나와 달리 분명한 귀족이다. 에스메랄다를 만나기 전부터 교육을 받아 온 인물이기에 히나보다는 자제력이나 인내심이 더 강하다고 평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인내는 강철처럼 단단해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 아무리 튼튼한 강철이라도 수백 번, 수천 번, 나아가 수십만 번 내리치면 부서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의 만남은 그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격려이자 위로이고, 또한 허튼짓으로 일을 망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에반스가 돌아간 후 틈틈이 전보 마도구를 들여다보며 방 안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리스가 페르멘의 귀환을 알려 왔다. 이후에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평범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휴식에서 빠져나와 움직임을 재개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할 만큼 늦은 밤이 되었을 때였다. 전보 마도구에 불빛이 들어왔다. 근거리에서 간편한 단어 정도만 주고받을 수 있는 휴대용 전보를 가져간 테란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신원 미상 인물 합류, 도시 이탈, 추적 중.」
테란은 실력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황실 기사단, 거기서도 황족이 기거하는 황성 내부 경비를 담당하던 실력자였다. 과거 황태자가 중앙 귀족의 딸을 겁간하고 그 영애가 자결을 하는 바람에 일이 커진 적이 있다. 하필이면 중립파 소속의 중앙 귀족 가문이었기에 요식 행위라도 본보기 제물이 필요했고, 거기서 선택된 게 테란이었다.
그는 황태자의 겁간 죄를 뒤집어쓰고 기사단에서 쫓겨났다. 계승권이 없는 방계 출신의 힘없는 귀족이 희생양이 된 셈이다. 당시 그 사건의 피해자였던 소니른 자작가는 비공식적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받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명뿐이라지만 황제의 기사를 잘라 냈으니 실리와 명분을 충분히 챙긴 셈이다.
대부분의 중앙 귀족들에게 자식이란 본인의 대를 잇거나 이용하기 위한 또 다른 패에 지나지 않으니 당시 소니른 자작은 딸의 죽음으로 거액을 벌었다며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란은 이미 연배와 경험이 쌓일 대로 쌓여 상급 기사 중에서도 윗줄에 있는 사람이다. 마차를 타고 오던 중 발견했던 인물이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테란보다는 하수, 쉽게 들키지는 않으리라.
“외출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리스가 새 의복을 준비해 왔다.
“오라버니는 주무시니?”
“1층 식당에 계십니다.”
“……이만 들어가시라고 말을 전해 주렴.”
또 한 번 그를 배제하겠다는 의사였다. 에스메랄다가 옷을 다 갈아입었을 무렵에는 시리스가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혹시 몰라 한 명을 감시 역으로 붙여 두었습니다.”
“……그래.”
또 무거운 짐이 늘어난다. 에스메랄다는 잡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전보 마도구에 불빛이 들어왔다.
「남동쪽, 이동 경로 표시.」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걱정할 것 없다. 테란이 이동 흔적을 남겨 둘 테니.
“딱 오늘에 맞출 건 뭐람.”
에스메랄다의 뜻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조금 전 발견한 이가 남부에 있을 만한 일은 없다. 결국 그녀의 뜻에 반하는 일이 그녀의 눈을 피해 진행되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한 번의 경고로 뜻을 접기에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라그나가 만든 각종 마도구가 그녀의 몸을 채워 나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활동성을 위해 바지를 갖춰 입고, 외관을 가리기 위해서 머리를 틀어 올린 후 복면까지 뒤집어썼다. 그다음은 그녀의 체형을 부풀릴 수 있게 옷을 두껍게 껴입는 일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마친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후드를 걸쳤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그대로 침실을 나섰고 텅 빈 식당을 지나 여관 밖에 발을 내디뎠다.
여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외의 인물을 마주해 주춤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문 근처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단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나단을 감시하는 역은 그의 말에 한정했으니 행보에 대해 보고를 하지 않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고 해서 왜 이 시간에 나단이 여기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왜 여기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나단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계속 밖에 있었니?”
“네… 언제 나가실지 몰라서…….”
“내가 나갈 건 어찌 알고?”
“음…….”
나단은 적당한 표현을 찾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 음… 그걸 붙이셨다는 건… 위치를 파악하시려는 거니까 만나러 가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나가지 않았으면? 오늘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텐데?”
“동틀 무렵에는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저는 어차피 원래 늦게 자는 편이었으니 괜찮은 방법 같아서……. 내일도 나와 있을 생각이었고요.”
에스메랄다의 시선 앞에서 나단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코와 뺨이 빨간 것은 열기 때문에 달아오른 게 아니었다. 냉기에 얼어 버린 것이지.
정성이 갸륵하긴 하지만 나단을 데려가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이동을 하는 내내 에스메랄다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나단을 살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인으로 자라긴 했지만 나단은 과거와 비슷하게 순수했고, 선했고, 또한 해맑은 이였다. 잔인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인가에 대한 구분에서 부정 쪽으로 결론이 기울고 있었다.
그녀는 라그나와의 잔류와 별개로 전쟁에서 나단을 배제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혀 가는 중이었다. 만약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가는 생각이 진실이라면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때 나단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너를 데려가기에는 힘들겠구나. 위험할 수도 있고, 네가 잘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으니 말이야. 또한 네가 다치면 라그나가 걱정…….”
“아버지랑은 상관없어요!”
에스메랄다의 거절에 점점 사색이 되어 가던 나단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다급히 말했다.
“저는, 저는 테노리엘 소속의 전투 마법사예요! 아가씨께서 시키시는 건 뭐든 할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조금 변했다. 그의 기준이 과연 그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기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차가웠다. 나단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그의 유능함을 재는 것은 별개다. 분명 소수의 전투에서 마법사의 유무는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해꾼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섣불리 데려갔다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의 동행에 부정적이던 에스메랄다의 생각이 변한 건, 잠시의 틈을 두고 돌아온 나단의 대답 때문이었다.
“정말로 무엇이든요. 아버지 때문에 제가 받은 특혜를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 아가씨를 따라온 것도 제 능력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저는, 테노리엘의 명령에 따르는 전투 마법사입니다. 아가씨께서 명하신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아이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기회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전력에 마법사가 포함되면 전투의 양상이 변한다. 당연히 이쪽에게 유리한 방향이고.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생각을 곱씹으며 나단을 가만히 응시했다. 대규모 전쟁에서는 마법사 한 명보다는 그 마법사가 이용하는 원거리 발동 마도구가 더 유용하지만, 나단의 친화력이면 소수 간의 전투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다. 다양성은 부족해도 소수를 모두 저격하는 광역 마법이 가능하니까.
“결계 마법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청각 및 시각의 물리 반응을 차단할 수 있어요.”
“외부 마법 공격에는?”
“결계 마법은 물리력에 관한 것이 한계라 변환 마법 자체는 막지 못합니다. 하지만 정신 계열이나 변환 계열 모두 파훼하는 건 가능해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요.”
그 정도면 원소 마법을 사용해도 외부에서 마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빛이나 굉음을 가둘 수 있다.
“기회라 했으니 두고 보마.”
활짝 펴진 나단의 표정은 곧이어 나온 에스메랄다의 말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많은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결국 나단의 동행을 허락했다. 이번에 어떤 행동을 할지 확인하면 내전에 깊게 끌어들일지 말지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 보자. 용병 중 한 명이 다시 여관으로 들어가 복면과 후드를 가지고 왔다. 체격에 조금 맞지 않는 후드 자락을 움켜쥔 나단과 함께 에스메랄다가 여관을 완전히 벗어났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후방 도시의 뒷골목에서 활동하는 로부오 5명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외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줄 길잡이였고, 또한 추가 전력이었다.
남부는 외성 밖에 마수가 돌아다니기에 성벽에 난 개구멍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보수한다. 혹시라도 마수가 구멍을 비집으며 성벽을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에스메랄다 일행이 아무런 문제 없이 외성을 지나올 수 있었던 건, 로부오들이 열심히 파 둔 굴 덕분이다. 외성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을 매입해 그 지하실로부터 구멍을 파서 외성 밖으로 연결한 것이다.
남부에 있는 로부오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렇게 외부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었다. 이건 남부의 영지들이 밤에 외성의 문을 폐쇄하기 때문이다. 낮과 달리 밤은 대부분의 인원이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다. 문을 훤히 열어 놨다가 뭉쳐 다니는 마수 무리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야간 경비가 있지만 그들만으로 피해 없는 전투가 가능할 리 없다. 자칫하다간 다른 병력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마수가 성문을 넘어와 피해가 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로부오들은 밤에도 자유롭게 오갈 만한 길을 준비해 둔 것이다. 언제든, 어떤 경우에든 움직임에 제약이 없도록.
지하 굴은 성인 남성이 기어가기엔 조금 좁았으나 에스메랄다의 체격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굴의 끝에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올라간 후에는 수풀과 나무 사이에 가려진 판자를 들어 올렸다. 판자 위에도 잔디가 핀 흙을 덮어 두는 등 위장을 해야 하기에 로부오들은 분주했다. 뒷정리가 끝난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시리스의 등에 업힌 채 이동을 시작했다.
* * *
「신원 미상 인물, 길잡이 추정.」
「마수, 교전, 이동 지체.」
테란으로부터 지속적인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일행은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때때로 마주치는 마수 때문에 그녀의 일행도 이동이 지체되고 있었다. 나단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겠지.
나단은 마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결계 마법을 펼쳤고, 마수를 상대하는 건 시리스와 용병들이 담당했다. 그리하여 2시간의 추격 끝에 테란과 합류할 수 있었다. 합류 직후 테란은 곧장 에스메랄다에게 확대경을 건네주었다.
수풀과 나뭇가지가 시야를 방해하는 바람에 사람의 형태만 보일 뿐이다. 그마저도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저기에 있는 인물들 대다수가 에스메랄다가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대략 1km가 넘는 거리……. 도청 마도구를 사용하려면 거리를 좁혀야 한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터,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접근했다. 확대경을 통해 추측한 거리를 통해 대략 900m쯤의 거리에 달했을 때 도청 마도구를 발동시켰다. 복면 속에 가려져 타인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왼쪽 귀에 걸린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 ……제안을… 미래를 위… 개혁…….
잡음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조금씩 선명해졌다. 분명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가 계속 잡음 속을 파고들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 사이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 것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 개혁이니 미래니,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내전이란 결국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 다를 바 없고, 그 방법을 고른 이상 황제와 똑같은 인사가 되는 것뿐이다. 그럴듯한 말로 선택을 포장하지 말라.
역시나, 그립고도 익숙한 그 목소리가 마도구의 힘을 빌려 그녀에게 닿았다. 잡음이 흐려지며 모든 단어가 명확하게 잡힐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800m.
─ 그럼 계속 이런 부당함 속에서 참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제위를 이으시면 남부군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다수 반군의 인사들은 남부군 출신입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걸 지지하겠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사이 에스메랄다의 귓가로 흘러 들어오던 잡음이 모두 사라졌다. 700m. 점점 그들 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 무슨……?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잠깐, 뭐지? 마나가…….
─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목소리와 대화는 선명해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마도구 발동으로 인한 마나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다니, 아르페시스의 무위가 한층 더 다듬어진 모양이다. 본시대의 성장보다는 조금 빠를까?
에스메랄다는 마도구의 발동을 중단하지 않은 채 천천히, 계속 걸음을 내디뎠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실력인 것은 아니다. 검술, 체력, 경험 등, 많은 요소가 상급 기사들의 실력을 구분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체에서 분리한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단창을 뒤덮은 마나가, 화살에 덧씌워진 마나가 유형화되는 거리는 그 기사가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도구로 인한 유동은 극히 희미하기에 절반 정도의 거리에서도 잡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 누군가… 오고 있는데. 일행이 더 있었나?
─ 아… 망할…….
짧은 욕설을 끝으로 건너편에서는 침묵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에스메랄다의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누구도 보지 못한 빛이지만 라그나가 하나, 하나 완성시킨 마도구는 그녀만을 위한 무장이 되어 주었다.
“도주하는 자가 없도록 막으렴.”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소년의 것처럼 조금 낮아졌고, 눈동자 색이 점점 옅어져 노랗게 변했다. 그녀의 마도구가 발동한 직후 나단이 마법을 구현했다.
“눈과 귀를 막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만들리라.”
속삭이는 목소리 끝에서 나단이 만든 결계가 사방을 뒤덮었다. 이제 저 결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빛과 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리라. 에스메랄다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변에 얇은 막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시작되니, 끝이 도래하기까지 누구도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리라.”
곧이어 붉디붉은 화마가 피어났다. 멀지 않은 전방에 생겨난 불의 벽 때문에라도 열기가 느껴질 만도 한데…….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돌아보았다. 그는 방긋 웃을 뿐이었다. 광범위 결계 말고 그녀의 주변에도 물리력을 제한하는 결계를 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그간 자신이 나단을 너무 어리게만 보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이미 한 명의 전투 마법사였다.
나단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전방에 나타난 불의 벽을 가르고 길을 텄다. 검을 빼어 든 채 전투 준비를 마친 이들이 화마 속에 갇힌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제가 여기서 당신을 만난 것인지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르바논 경.”
바 루그 아르바논 메퓌단, 루그레디안이 후작이 되기 전부터 그를 따르던 호위 기사로, 그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다. 과거 에스메랄다가 황도의 뒷골목을 장악하던 당시 접근을 시도해 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 중 한 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에스메랄다는 메퓌단의 검 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함께 걸음을 멈춘 나단이 중얼거리며 마법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하?”
당황한 것이 빤히 보이는 이는 분명 아르페시스다.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한들, 목소리가 그의 것이었다.
루그레디안이 그녀의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아르페시스에게 접근했다. 그러니 그의 기사가 이곳에서 그를 만나고 있겠지. 만약 후방 도시에서 메퓌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손도 쓰지 못한 채 아르페시스와 그들의 만남을 허락했을 것이다.
아마도 전서구 사냥이 성행하고 있기에 따로 만나는 방법을 택한 것이겠지. 시도에 그치지 않고 거의 성공할 뻔하다니,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루그레디안이 이번 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아쉽게도 운은 그녀의 편을 들어 준 것 같지만.
‘내전이란 결국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 다를 바 없고, 그 방법을 고른 이상 황제와 똑같은 인사가 되는 것뿐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고 사라진 시간에서와 똑같은 말을 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2년여 만의 재회는 언젠가, 과거의 그녀가 예견했던 대로 서로의 대척점에서 이루어졌다. 하루 이틀은 더 지나야 리퀘나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여기서 만날 줄이야.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무척 복잡한 심정이었다.
여관에서 홀로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의 순간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본 덕분일까?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면서도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조금 전 오간 대화를 들어 보면 아르페시스가 내전에 반하는 것도 분명하고… 그의 성격상 제위에는 관심이 없을 터다.
분명 아프지는 않았지만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초조해졌다. 복면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입술이 치아에 잘근잘근 짓눌리고 있었다. 루그레디안이 그녀의 눈을 피해 아르페시스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전지전능하지 못하기에 이런 식으로 놓치는 것들이 또 생길 것이다.
그 틈을 타 다른 이들이 어떤 식으로 아르페시스에게 황위를 떠넘길지 모른다. 남부군 역시 자신들이 따르는 그에게 황좌를 권할 가능성이 높다. 그가 황위에 오르면 남부군과의 접점이 있는 이상 예전처럼 중앙의 일방적인 횡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녀가 어물거리는 사이 다른 이들은 이미 아르페시스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이러다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그가 제위에 오르면 어떻게 하지? 그 위기감이 지금까지 미루고 미뤄 온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가 황위에 앉으면 증오해 마지않는 황실의 일원이 되어야만 그의 곁에 설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 위에 황제와 황태자가 쓴 에렘의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증오와 경멸은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정말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결국 그가 제위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지.
그가 루그레디안이나 다른 사람들의 권유에 떠밀리듯 황관을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격리해 두고, 일이 끝났을 때 남부에서 빼내자. 아르페시스도 스스로가 황족인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 에렘의 이름을 떼어 내자고 말하면 반겨 줄지도 모른다. 황족이나, 귀족이나, 이름이나 명예도, 의무도, 권리도 다 버리고, 황제가 죽으면 아르페시스에게 함께 에렘을 떠나자고 말하자.
그때가 오면 과연,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남부를 버리고 그녀에게 와 줄까? 2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를 위해 전우를, 동지를, 무고한 이들을 버려 줄까? 정말 그를 황위에서 완전히 배제시켜 에렘의 혼란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도록 두어도 되나? 그런 결과가 도래해도…….
강제적인 선택 직후에 휘몰아치는 감정은 그녀를 동요시켰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고요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전혀 반갑지 않군요.”
“뭐라……?”
“아, 리퀘나에 계셔야 할 분을 여기서 뵈어 조금 놀란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
메퓌단은 반정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분명 내전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반군의 목적은 남부군의 정당한 지원을 얻어 내는 것, 그 과정에서 무력을 위시하여 움직이고 있기에 황좌를 꺾어 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과격한 의사가 표현이 된 상태다.
그런 와중에 메퓌단과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했으니 지금 에스메랄다는 메퓌단과 대립하는 반군 내부 세력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겠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말투도 바꾸었다. 조금 건방지고 사나워 보이도록. 불순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아르페시스가 반군에게 가지는 반감을 키우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선 답이 없었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며 가슴께를 문지르거나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뭐… 이게……? 그대는 누구지?”
“굳이 번거롭게 소개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다시 만나지도 못할 테니 할 필요도 없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퓌단이 돌발 행동을 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를 시도했다. 그래, 루그레디안에게 발뺌의 기회라도 주려면 잡혀선 안 되겠지.
“벌하리라.”
나단의 목소리와 함께 쾅, 하고 떨어진 낙뢰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에 마나를 둘러 낙뢰를 튕겨 냈지만 이후 메퓌단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사방이 화마의 벽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허공에서 파지직, 거리는 전류가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조금 전처럼 낙뢰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리라. 보통의 전투 마법사라면 이렇게 넓은 범위를 감싸는 마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나 소모가 막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단의 마나 친화력은 범위 마법을 몇 개씩 겹친 상태에서도 건재했다. 그의 장점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웃음기를 담은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에 메퓌단이 초조함을 드러냈다.
“오늘 만남은 없었던 것으로 여기십시오. 어차피 당신께서 끼어들 판이 아니니 신경을 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만나서 자세한 대화를 하자던 건 그대들이 아닌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제위에 전혀 관심이 없…….”
그가 내전에 반하고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굳이 빤히 아는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손짓했다.
결과적으로 사방에 떨어져 내리는 낙뢰 속에서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잡아먹혔다. 테란과 나단을 제외한 인원이 모두 메퓌단의 일행에게 달려드는 동안 아르페시스와 그의 근위대는 나단이 만들어 낸 낙뢰가 견제했다.
“이봐!”
하지만 아르페시스 일행은 나단의 마법을 튕겨 내거나 파훼하며 메퓌단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단이 그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에스메랄다는 거친 움직임 속에서 후드가 벗겨지며 드러난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마 올 수가 없어 원망과 그리움 속에서 곱씹기만 했던 아르페시스다. 몇 년 만에 보는 그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에스메랄다는 땅에서 일어난 흙더미가 단단한 돌로 굳어 가기 시작하자 뒤늦게 움찔거렸다.
“단단함은 때때로 거짓이 되고, 변화는 언제나 세상을 채우고 있으니.”
만약 지금 아르페시스가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다면……. 로부오 한 명과 합심한 시리스가 마침 메퓌단을 제압해 바닥에 내리꽂았고 아르페시스가 그를 구하기라도 하려는 듯 달려들었다.
“원하는 곳에 원하는 형태가 자리를 잡으리라.”
말릴 새도 없이 흙의 성질을 변환시켜 만든 바윗덩이가 아르페시스를 덮쳤고, 허공에 푸른 실드가 생겨났다.
“어……?”
나단의 입에서 나온 의문과 동시에 마법 공격이 멈추어 버렸다. 그 틈을 타 아르페시스가 로부오를 걷어차며 메퓌단을 잡아끌었다. 그가 휘두른 검을 피해 시리스가 허리를 젖힌 사이 에스메랄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미리 언질을 해 두지 못한 그녀의 실책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빠르게 나단에게 손을 썼다.
“기회를 달라 하지 않았니?”
자동 발현 실드 마도구, 그걸 보고 놀라 굳었던 나단이 정신을 차렸다.
“모든 생명의 탄생과 함께하니 결국 생명의 근원과 다를 게 없다.”
허공에 물이 차오르며 아르페시스와 메퓌단을 집어삼켰다. 아르페시스가 마나를 유형화시켜 물을 밀어내고자 했지만, 고체가 아닌 액체가 사방에서 밀려드니 막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와 그의 기사들이 물과 대치하는 사이 시리스가 다시 메퓌단을 낚아채 에스메랄다에게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헙!”
그러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물속에 완전히 가두어졌다.
“전하!”
다른 용병들과 로부오들을 상대하던 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 불로 만든 벽은 사라지고 일대가 전부 물로 가득 찼다. 얼핏 물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광범위한 마법이었다. 다시 한번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설마 나단이 지금… 수계 마법과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건 빙결 마법이다. 지금 저 물을 전부 얼려 버리면?
“형태가 다르다 하여 존재의 근원이 다른 것은 아니…….”
“그……!”
에스메랄다가 반사적으로 그만하라고 말하려던 순간, 아르페시스가 유형화시킨 마나에 의해 물이 잘렸다. 그래, 그는 물을 자르고 그 속을 빠져나왔다.
“휴고! 데미안!”
그는 제 주변의 물을 잘라 낸 직후 나단의 마법에 사용된 마나 배열을 모두 깨 버렸다. 그 틈을 타 근위 기사들이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나단보다 아르페시스의 마나 운용력이 우위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나단이 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시리스와 로부오들이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만.”
에스메랄다의 말에 새로 마법을 구현하려던 나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는 어느새 기절해 버린 메퓌단 일행을 돌아보았다. 물에 푹 젖은 아르페시스가 혀를 찼다. 각자가 노리던 목표물이 한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리자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발을 묶으렴. 암석은 피하고.”
에스메랄다의 말에 나단이 다시 마법을 구현했다. 흙더미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아르페시스 일행이 있는 곳을 돔처럼 뒤덮었다.
“출발하지.”
“잠시 기다려라! 테몬 쪽에서 반군과 의견이……!”
시리스와 테란이 각기 나단과 에스메랄다를 들쳐 업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로부오의 어깨에는 기절한 메퓌단 일행이 걸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동에도 불구하고 나단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아르페시스 일행을 다치게 했어야 도주할 수 있었으리라.
수가 두 배가량 된다고 해도 실력 차가 심했으니 그녀의 사람들도 부상을 감수했어야 했을 테지.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머릿속을 다른 것으로 채웠다. 후방에서 흙더미를 상대하기 바쁜 이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눈으로 그곳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 * *
“록세트 경 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가씨의 말씀 때문인지 간밤에 여관을 주시하는 시선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행이구나.”
객실에서 나오자 문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시리스가 말했다.
지난 새벽, 아르페시스가 나단의 마법에 묶여 움직이지 못한 사이 에스메랄다는 무사히 여관으로 돌아왔다. 복잡하고 어려운 새벽을 지새우고 두어 시간 전에 간신히 잠들었지만, 언제나처럼 악몽의 화마 속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이제는 악몽이 그녀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르페시스, 루그레디안, 반정, 내전, 황위, 전쟁, 미래, 에렘……. 복잡하고 무거운 단어들이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지난 새벽 아르페시스를 보았기 때문일까? 그립고, 아리고, 또한 조금은 원망스러운 그에 대한 것을 곱씹느라 다른 쪽으로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기상 직후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답답했다. 어디를 뒤적여 보아도 명쾌한 것이 없어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답답해…….”
에스메랄다는 애써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계단을 밟았다. 그녀가 여관방에서 홀로 먹지 않고 식당으로 내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페르멘과 함께 식사를 하려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편했다. 그녀의 객실에는 전보 마도구를 비롯해 라그나가 만든 마도구가 너무 많았다.
1층으로 내려온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창가 자리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함께 외출을 했던 나단이 이 시간에 식당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에스메랄다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에 늘어져 있는 나단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그는 꽤나… 아니, 무척이나 잘해 주었다. 그의 실력을 보고 나니 왜 데려가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라그나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테노리엘 소속의 전투 마법사가 아닌 라그나의 아들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게 불만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억울했던 것일까? 아마도 나단은 라그나의 그림자를 벗어나 한 사람의 역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의 눈에는 훌쩍 자란 자식이 독립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그나는 이런 나단의 생각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금발이 금화 같다며 잡아당기던 나단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를 일이다. 그를 어릴 때부터 챙기고 자라는 것을 보아서 그럴까? 어쩐지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성장을 보며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흐아아암.”
테이블에 뺨을 붙인 채 긴 하품을 하는 나단의 행동에 에스메랄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 곤하면 더 쉬지 않고.”
“어?”
번쩍, 하고 고개를 든 나단의 노란색 눈동자와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마주쳤다.
“아가씨.”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스메랄다를 발견하고 해사하게 웃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잤니?”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좀 뒤척거렸더니 해가 떴지 뭐예요. 지금 자면 오늘 해 질 녘에나 일어날 것 같아서 하루를 꾹 참아 보려고요. 대신 오늘 밤에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날 거예요.”
배시시 웃은 나단이 다시 테이블에 뺨을 붙이며 웅얼거렸다.
“그런데 당장 잠들 것 같아요.”
그는 이어서 흐아암, 하고 하품을 하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버지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할 때 말을 들을 걸 그랬어요. 밤낮이 바뀌니까 여행할 때는 그리 좋지 않네요.”
에스메랄다는 식사가 나오기 전 먼저 준비된 차를 들며 물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그 질문에 나단은 테이블에 뺨을 댄 채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실은요, 그렇게 연계 마법을 쭉쭉 써 본 게 처음이라 엄청 긴장했어요. 게다가 파훼되기도 해서……. 제 실력이 부족한 건가 같은 생각을 계속했어요. 다른 전투 마법사들은 그때 어떻게 했을까? 운용력 차이가 생각보다 큰데 훈련을 늘릴까? 광역보다 개인 집중도를 올려야 하나? 머릿속이 막 복잡해서…….”
첫 실전에 대해 생각하느라 바빴나 보다. 에스메랄다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난 지난밤에 네가 참 잘했다고 말하려 했는데.”
공사를 구분해 오긴 했지만 나단에게 사적인 위로 한마디 못 해 줄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의 실력은 에스메랄다의 기준에서 나쁘지 않았다. 마법이 파훼된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장점은 운용력이 아닌 친화력이니까.
다시금 번쩍 고개를 든 나단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물었다.
“정말요? 저 잘했어요? 제가 아가씨께 도움이 되었을까요?”
“물론.”
“우와!”
그 짧은 한마디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하던 나단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에스메랄다는 얕은 웃음과 함께 이어지는 나단의 조잘거림을 들어 주었다. 나단의 수다 덕분인지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다시 엉켜든 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손길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좋은 아침?”
에스메랄다는 그 커다랗고 따스한 손길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페르멘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 이네요.”
그녀가 흐리게 웃는 동안 페르멘은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도련님도 좋은 아침이에요!”
“뭐야, 엄청 기분 좋아 보인다?”
“네!”
나단은 계속 발을 구르며 웃었다. 페르멘은 나단에게 왜 기분이 좋으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필시 어제 외출에서 나단이 따라간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일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거겠지. 먹구름이 몰려온다.
“약은 먹었어? 피곤하지는 않고?”
페드로가 준 약제는 이미 방을 나오기 전 먹었다. 몸의 피로는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부터 줄곧 함께했기에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그저 평범하게 답을 할 수도 있는 질문이건만, 에스메랄다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난 새벽, 아르페시스를 보며 했던 선택이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를 남부에서 빼내면, 그리하여 그와 함께 떠나면… 페르멘은? 오멘과 아레스는? 테노리엘 백작은?
“함께…….”
“응?”
함께 가자 말해 볼까? 그들이 신념과 의무를 버리고 그녀와 함께 떠나 줄까?
아르페시스도… 그의 곁을 지켜 온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그의 전우들은? 그녀 하나를 위해 그의 세상을 구성하는 모두를 버리라고? 정말로 만약 그녀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가 준다면? 어디로? 언제까지? 비어 버린 황좌를 두고 에렘이 과연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분명 선택을 했는데 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선택의 기회가 그녀에게 돌아온 것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위에 올라온 기분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선택을 해도, 어디로 가도,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이상한 기분.
너무 오랫동안 이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그녀 앞에 놓인 것이 정말 답이 없는 선택지이기 때문인가?
에스메랄다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페르멘은 고요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라. 그는 분명 그녀를 위해 함께 떠나 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찌 되나? 그녀를 위해 그의 신념도, 의무도, 인생까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게 과연 옳은가? 그런 선택에 페르멘의 인생이 있기는 한가? 그녀의 평온을 위해 아르페시스가 믿고 의지하는 남부군을 버리라 말해도 되는 건가?
에스메랄다는 오래도록 말을 꺼내지 않았고, 테이블엔 미리 주문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미 선택을 했는데, 지금 하는 생각들은 대체 왜 그녀를 졸졸 쫓아다닐까? 망설임인가, 그도 아니라면…….
깊은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가 억지로 페르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와 페르멘,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변하자 나단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똑똑 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그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창밖에서 얼굴을 들이민 건 꾀죄죄한 어린아이였다. 페르멘이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겁에 질린 사람처럼 굴던 아이가, 다정한 페르멘의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꼬, 꼬, 꽃…….”
“꽃?”
“꽃 사, 사세요.”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온 손은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그 손에 들린 가녀린 꽃송이도, 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떨고 있었다.
아이가 쥐고 있는 건 겨울에 길을 지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잡초 같은 꽃이었다. 질기고 질겨 삭막한 추위 속에서도 고개를 내밀고 피어나는 그런 꽃. 아마도, 창가에 앉은 그들의 행색을 보고 용기를 낸 모양이다. 한 송이 정도는 사 주지 않을까, 하고.
아이를 발견한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에겐 겁에 질린 표정 아래에 감춘 악귀의 얼굴이 보인다. 나단이 서둘러 주머니를 뒤져 금화를 꺼냈을 때 에스메랄다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가 가만히 그 시선을 돌아보는 동안 페르멘이 나단을 만류하며 뒤에 기립해 있던 호위 기사를 불렀다. 기사에게서 동화를 건네받은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주방에 다녀오거라.”
나단은 페르멘이 무얼 하나 싶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가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가자 페르멘은 다시 창가로 손을 뻗었다.
“예쁜 꽃이구나.”
그는 아이의 손에서 꽃을 받아 들고 대신 동화를 쥐여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식사는 했니?”
동화를 움켜쥔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 주방에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샌드위치가 들린 접시가 있었다. 페르멘은 직접 접시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가렴.”
아이의 눈이 커졌으나 곧 다른 곳으로 흘렀다. 페르멘은 아이의 시선을 쫓아 창밖으로 살짝 몸을 내밀었다. 창문 아래에는 꽃을 가져온 아이보다 작은 아이가 있었다. 페르멘은 기사에게 음식을 하나 더 준비해 오라 말하며 아이에게 직접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걱정 말고 먹으렴.”
창밖에 서 있는 아이는 계속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음식을 받아 들었다.
“음식이 흐를지도 모르니 여기를 잘 잡고.”
페르멘은 직접 음식을 잡은 아이의 손을 옮겨 주었다. 계속 아래를 힐끔거리던 아이가 억지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샌드위치가 반쯤 사라졌을까? 기사가 새로운 접시에 샌드위치를 담아 왔다. 그때, 마침 아이가 샌드위치 사이에 있던 동전을 씹은 모양이다.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가 페르멘에게 닿았다.
“이건 동생에게 주고.”
아이가 허겁지겁 남은 샌드위치를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페르멘이 새로 내민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이 하는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조심해서 가렴.”
아이가 창틀 아래로 사라진 후에야 창문을 닫은 페르멘이 모든 과정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단에게 말했다.
“금화 같은 큰돈은 함부로 쥐여 주면 안 돼.”
값싼 동정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면, 동정을 베푼 이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정이 누군가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릴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 나락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 줄 능력이 없다면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나단은 길거리의 아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지금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깨닫겠지. 페르멘이 나단의 행동에 끼어든 것은 창밖에 있는 이름 모를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훗날 지금의 일이 가져온 결과를 깨닫게 될 나단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 주는 조언이었을 뿐이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걸 지킬 힘이 없거든.”
나단이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금화를 보란 듯이 주는 건 그 아이를 공격하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직업이 있는 평민조차 쉽사리 만질 수 없는 것이 금화다. 그들의 눈이 돌아갈 만큼의 금액이 힘없는 아이에게 주어지면 그걸 축하해 주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단언하건대 없다. 모두가 축하 대신 질투를 하며 눈에 힘을 줄 것이다.
처음에는 부러움이, 그다음에는 왜 내가 아니냐는 원망이 피어날 테고 그것이 힘없는 아이에게서 금화를 빼앗아 버리자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세상은 그 생각에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하는 사람과 기어코 실천하는 사람이 뒤섞여 있다. 아이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면 주지 않는 게 옳다.
“그러니 보이는 장소에는 동화를,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은화 정도가 좋아.”
그의 목소리는 겨우 나단과 에스메랄다에게 닿을 정도로 작았다. 그래, 페르멘이 샌드위치 속에 담은 건 고작해야 은화일 것이다. 금화를 담아 보았자 저 아이는 쓸 수 없으니 은화 정도가 적당하다.
음식에 은화를 넣어 온 주방장에게는 금화를 쥐여 주었겠지. 아이보다 많은 것을 얻었으니 그들은 아이가 받아 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약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세상이다. 속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다.
그때 창밖에서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받아 간 건 곧장 먹어 치울 수 있는 음식과 동화 하나뿐이다. 굳이 적극적으로 행동해 가며 빼앗을 정도의 가치는 없다. 그 증거로 아이가 금화 대신 동화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남은 건 근처에서 구걸하던 아이들의 시선뿐이다. 그들은 조금 전의 상황을 보고 여관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에 페르멘이 여관 주인장에게 음식값을 치르며 아이들에게 나눠 주라 말했다. 이번에는 안에 돈을 담지 못했다. 한 사람씩 주시하며 동전을 떨어트리지 않는지 확인을 할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게 맞다.
아이들은 여관에서 미리 만들어 둔 빵을 하나씩 쥐고 돌아갔다.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간 주방 쪽으로 시선이 흘렀지만 그마저도 오래 두지 않고 떠났다.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의 기묘한 분위기도, 조금 전 꽃을 팔던 아이 때문에 생긴 침묵도 오래가지 않아 테이블을 떠났다. 그들은 곧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이름 모를 아이가 돌아온 건 꽤나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에스메랄다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고요한 티타임까지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찬 바람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닫아 버렸던 창문 밖에서 다시 한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단이 창밖에 선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어?”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의 시선이 나단을 따라 창가로 향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발간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내부를 힐끔거리고 있는 아이와 페르멘의 시선이 서로를 찾아갔다. 나단이 창문을 열어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그 아이는 창문 아래로 쏙 사라지더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페르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꼭 기억 속에 그를 담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이거 주려고요.”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건 작은 바구니였다. 에스메랄다는 그 속에 담긴 꽃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래전, 황도를 누비던 서커스를 구경하던 중 빨간 코가 그녀에게 쥐여 주었던 그 작은 꽃이었다. 겨울철 어디에서나 피는 잡초나 다를 바 없는 그 꽃, 조금 전 페르멘이 아이에게서 사 준 그 꽃.
페르멘은 직접 일어나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게 주는 거니?”
“서, 선물이에요!”
에스메랄다는 창가에 서 있는 페르멘과 얼굴만 겨우 내민 아이를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가 약이 없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고마워요. 엄마 약을 살 거예요.”
아이는 혹시라도 누군가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아이의 모친이 쿠그스에 걸린 모양이지. 에스메랄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50일 전후의 잠복기가 끝나면 얕은 열병이 달의 길이만큼 이어진다. 이후 온몸에 수포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구토와 설사를 하며 영양분 섭취를 거부하게 되는 병. 구토를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래 버틴 병자가 보름이다. 병마의 끝에서 모두 죽음에게 인도하는 병의 이름은 쿠그스였다. 어느 순간 남부에서 뿌리를 내려 버린 그 망할 놈의 전염병.
분명 오래전의 과거에는 그러하지 않았건만, 몇 해 전부터 마수의 사체는 여름을 맞이할 때마다 쿠그스를 인간에게 떠안기기 시작했다.
물론, 알라반이 개발되어 불치병에서 치료가 가능한 병이 되긴 했다. 값은 고작 은화 2개. 시간이 지나며 점점 제조가 쉬워져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아이와 아이의 동생에게 줄 음식에 각기 은화를 하나씩 넣었을 테니 딱 2개다. 번듯한 직업을 가진 자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먹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은 약 하나를 구하기도 힘들 것이다.
“엄마 얼굴이랑 몸에 막, 고름 같은 게 났는데 약 먹으면 낫는대요. 엄마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쿠그스는 분명 전염병이지만 잠복기와 희미한 열병 시기에는 전염이 잘되지 않는다. 쿠스그가 전염병이라는 것과 병의 원인이 여름에 썩어 가는 마수의 사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늦었던 이유다. 또한 에스메랄다가 사라진 시간보다 몇십 일이나 쿠그스의 발견을 늦출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후 병명이 확정되고 증상과 치료에 필요한 약이 만들어졌음에도 사상자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환자를 언제, 어떻게 격리하고 돌봐야 하는지 제대로 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으니까. 길게 이어지는 얕은 열병이 쿠그스에 감염된 상태라는 것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대부분의 평민들이 아는 쿠그스는 온몸에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죽는 병이다. 환자에게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함께 생활하는 이들도 감염되었다고 봐야 한다. 쿠그스의 전염은 수포가 올라온 직후 주변에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 아이의 집 근처 수십 명이 함께 감염되었으리라.
이후 겨울과 봄에 걸쳐 얕은 열병을 겪은 후 여름쯤이 되면 수포가 올라와 또다시 다른 감염자를 만들겠지. 그 여름에는 또 마수의 사체가 썩어 가며 새로운 감염자를 찾아낼 것이고.
지독한 악순환이 계속되며 남부의 인구가 갉아먹힌다. 오늘 아이가 구걸로 번 돈으로 살 수 있는 약은 하나. 결국 앞으로 은화 4개를 벌지 못하면 저 아이와 동생이라던 더 작은 아이는 내년에 죽는다.
페르멘이 혀를 차며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모르면 몰랐을까, 그는 상황을 알게 되었는데도 방치할 인물이 아니었다. 한 병에 고작 은화 2개. 하지만 남부 인구만큼 마련하려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인구가 줄었다 하여 개인이 나라 규모의 사람을 책임질 수는 없다.
쿠그스의 가장 큰 문제는 전염보다 재발에 있다. 걸렸던 사람이 치료를 해도 다시 감염될 수 있다. 결국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건 페르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를 구할 수 없다 하여 눈앞의 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페르멘은 가문에서 나오는 자신의 사비의 일부를 쿠그스 약제 구매에 사용하고 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있다. 그는 당장 행정관에게 사람을 보내 약을 구매하고 저 아이의 모친이 있는 근방 사람들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그런 페르멘과 달리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아이가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저 아이가 죽든, 말든 알 게 뭐라고. 애써 날을 세운 그녀는 아이가 빨리 가 버리기를 바랐다. 그런 그녀의 불편함을 읽은 것인지 페르멘이 아이의 손에서 바구니를 받아 들며 말했다.
“나도 고맙구나.”
검은 때가 앉아 더러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페르멘이 작별 인사를 고했다.
“어서 약을 사러 가렴. 주신의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바라마.”
그때 페르멘이 다른 말을 했다면 그녀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도련님께도요!”
그 순간 에스메랄다를 파고든 아이의 미소는 흠결 한 점 없이 아름다웠다. 에스메랄다가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걸어가게 될 잔인한 현실 위에 있는 아이의 미소는 대체 왜 저리도 아름다운지. 창밖에서 페르멘이 보낸 기사가 아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기사의 뒷모습에서 에스메랄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보았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누군가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너희가 직접 해라.’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창문을 닫고 있는 페르멘에게 닿았다. 밝은 미소와 함께 아이의 뒷모습을 좇고 있는 그의 모습이 비수가 되어 다가온다.
에스메랄다는 절대 페르멘처럼 웃을 수 없다. 그녀는 저 아이와 같은 이들에게서 핏물을 빼내 제물로 바쳐 왔으니까.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이토록 비참한가 보다. 자신이 절대 받을 수 없는 미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페르멘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무너졌다.
아, 그것은 깨달음이다.
* * *
무고한 이들을 지켜 내며 비틀린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동안, 그녀는 특별한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하여 그녀의 인생을, 그녀의 가족들의 목숨을 바쳐 지킨 이들에게 맞아 죽기를 원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녀는 처형대 위에서 화마가 일던 순간에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화마 속에서 느낀 열기는 희미했으니 불을 붙이지 않았어도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불타 죽은 것이 아니라 맞아 죽었다. 그녀에게 비참함을 선물하고자 했던 정적들이 계획했고, 그날 처형대를 가득 에워싸고 있던 백성들이 실현시켰다.
만약 백성들이 동조가 아닌 침묵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반항할 힘이 없다는 건 에스메랄다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처형대 위에서 침묵과 고요함을 동지 삼아 불타 죽었다면, 그녀는 시간을 되돌아와 다시 한번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이 아닌 동조를 함으로써 직접 에스메랄다를 죽였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가 바친 헌신과 사랑에 돌아온 답이 고작 돌팔매질이어서, 화가 났었다. 그것 때문에 시간을 되돌아온 후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바라는 마녀가 되어도 좋다고, 그들을 지키는 대신 정적들에게 행할 복수를 위해 이용해 주겠다고, 그들이 버린 그녀의 사랑이 얼마만큼 귀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겠다는 악의를 품었다. 그녀에게 비참한 최후를 선물했던 이들에게 복수하며 그녀의 사랑을 배신한 백성들에게 절망을 알려 주겠노라고.
짙고 어두운 악의로 인해 한때 믿었던 길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고 걸어 마침내, 에스메랄다는 그때와 다른 곳에 도착했다. 그녀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그곳에.
사라진 시간 속의 그녀는 이름 모를 아이의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페르멘이 그러한 것처럼. 삭막한 세상 위에 피어난 맑은 미소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고, 아이의 미소를 지켜 주었음에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켜 낸 것을 보며 그 길이 옳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믿고 더욱더 단단해졌겠지.
하지만 지금의 에스메랄다는 이름 모를 아이가 보여 준 그 아름다운 미소를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다. 그것을 실감하고 나니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의 미소는 거창한 선의와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아주 쉽고 간단한 선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언제고, 어디서나 고를 수 있는 선택지였음에도 그녀는 고르지 않았다. 그 결과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제 발로 걷어찼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와서는 안 되는 곳에 도달한 후에야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여 깨닫는다. 그녀가 내다 버린 것이 얼마나 값졌는지, 그녀가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게 된 그게 얼마나 벅찬 것이었는지. 참 역설적이게도, 내다 버린 것의 가치를 다시 인정했기에 무서운 것이다. 저 아름다운 미소를 짓밟아 온 그녀가 가게 될 지옥이.
스스로가 쌓아 온 죄악과 핏물, 그리고 죄책감이 한데 뭉쳐 그녀에게 공포를 선물했다. 이 끔찍한 공포를 피해 갈 수 있는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가 겪어 왔던 모든 순간에 느꼈던 죄책감은 차마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회가 되어 그녀를 붙잡았다.
아르페시스를 다시 만났던 날이 그 기회의 시작이었다. 그날 악귀의 늪은 다시금 인간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 에스메랄다를 뱉어 냈고, 페드로의 온기가 그녀를 그곳에서 건져 냈다. 그럼에도 감사한 줄 모르고 아득바득 기어서 다시 늪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니.
그녀가 만든 핏물을 먹고 자라난 가시덩굴이 더 이상 가지 말라고, 가서는 안 된다고 그녀를 붙들어 만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의로 멈추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가 떠난 후 정상에 달했던 하늘 위의 태양은 다시 땅끝을 향해 기울어 가며 붉은 노을을 만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에스메랄다는 아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창밖을 응시하기만 했다.
물론, 이렇게 후회를 한다는 것이 다시 백성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을 증오한다. 하지만 아무리 밉고 증오스러운 이들이라 한들, 그 감정은 그녀가 행한 죄악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죄악은 어떤 변명을 붙여도 죄악에 지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가게 될 지옥을 그려 보며 그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그래, 아르페시스가 옳았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가 증오해 마지않던 정적들과 똑같은 죄인이 되었다.
페르멘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석상처럼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노을에 물들어 가고 있는 누이가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곧은 시선조차 느끼지 못한 채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반복했다. 텅 빈 표정으로 인형처럼 앉아 있기만 하던 에스메랄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석기는…….”
기적처럼 시간을 되돌아왔음에도 그녀는 가족과 백성들을 앞두고 후회만이 남는 선택의 끝에 서 있다.
“왜…….”
왜 돌아온 것이 그녀였을까? 차라리 아르페시스나 남부군의 인사였다면 달랐을 텐데, 왜 그녀가 돌아왔던 것일까? 누구도 답해 주지 않는 의문이 그녀를 짓눌렀다.
처음 한 방울은 아르페시스를 향한 죄책감이, 그다음에는 페드로의 온기가, 다시 아르페시스가, 다시 페드로가, 다른 가족들과 수많은 사람들까지. 그들이 떨어트린 작고 작은 물방울이 오랜 시간을 들여 그녀의 눈을 가리던 복수심을 흔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름 모를 아이가 떨구고 간 마지막 한 방울이 위태롭던 복수심을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복수심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타 버린 신념의 잿더미가 아니라 어느새 가득 고여 버린 핏물이었다. 붉디붉어 검게 보이는 핏물. 그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발판이 되어 주던 복수심이 사라지자 드디어,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만들어 낸 핏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스스로의 죄악을 직시하여…….”
외면하지 말지어다. 성서에 기록된 신의 말이 그녀를 깊고 깊은 핏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했던 모진 짓과 달리, 이것은 용서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울 자격이 없다. 죄를 고하고 용서를 청할 수도 없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빠져나올 수 없는 죄악의 핏물 속에서 익사하리라.
* * *
이리저리 뒤집어진 땅은 엉망이었다. 물에 젖어 질퍽한 곳이 있는가 하면 벼락에 맞아 검게 그슬린 곳도 있었다. 성한 곳이 없는 땅 위에 서 있던 아르페시스가 신경질적으로 푹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게 뭐란 말인가!”
몇십 일이 넘도록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자리였다. 어떻게든 테몬과 반군의 접점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접선하려 했는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상하지 못했다 뿐이겠는가? 아예 무산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엉망이라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확인한 것이라곤 테몬과 반군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의 추측으로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니 성과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메퓌단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기도 전에 그를 빼앗겼고, 짧게나마 나눈 대화 속에선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다.
‘대다수 반군의 인사들은 남부군 출신입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걸 지지하겠죠.’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반군이 황실의 이름을 바꾸고자 했던 게 아닌가? 계속 에렘의 이름을 걸어 놓기 위해 그를 추대할 것이라고?
휘하 귀족들은 에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권력을 쌓아 온 이들이다. 기존의 권력 구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에게 동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나라의 주인이, 정확히는 주인의 이름이 바뀌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그로 인해 발생할 혼란과 문제를 배제하기 위해 에렘의 이름에 맞는 이를 제위에 올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럼 이제까지 그의 접선 시도를 무시한 건 어째서이고? 정당한 황위 계승권자인 그를 경계한 것이 아니면 대체 왜? 그리고… 아르페시스는 마법에 묶여 있는 사이 완전히 기척이 사라진 이들을 떠올렸다.
소년인지 여인인지 구분하기 애매했던 미성의 인물. 복면의 틈으로 드러난 노란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왜 이렇게…….
그는 테노리엘 일가를 볼 때처럼 멋대로 날뛰었던 심장 부근을 문지르며 혀를 찼다. 움직임과 체격이 맞지 않았다. 부러 본래의 체격을 부풀린 것이라고 봐야겠지. 본래의 모습은 그가 본 것보다 여리거나 작을 테니 10대 중반의 소년이거나 매우 여린 체격의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테노리엘 일가 중에 10대의 소년은 남아 있지 않고 여인은 에스메랄다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녹안이고 또한 그녀가 남부에 있을 리 없다. 대체 그자는 누구란 말인가?
기사를 보내 추적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는 갈 수 없다. 곧 동이 틀 테니 8부대의 주둔지로 늦지 않게 돌아가야 한다. 더욱이 저들이 이동을 하며 흔적을 지우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젠장!”
반군의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는 아르페시스에겐 이번이 큰 기회였다. 그런데 이토록 허망하게 날리다니!
“그 망할 놈은 또 뭐지?”
마나 배열에 사용되는 운용력은 간섭 한 번에 파훼될 만큼 허술하면서, 대체 나이가 얼마기에 그리 화수분 쏟아 내듯 마나를 흩뿌리고 다닌단 말인가!
끝없이 튀어나오는 놈의 마법이 아니었으면 메퓌단을 그렇게 허무하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놈의 마법에 발목이 묶이지 않았다면 곧장 추적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시전된 마법에 자연적인 마나가 들러붙어 부피를 키워 갔다.
마법의 종류는 적었어도 구현된 마법의 개수가 수십 개씩 쌓여 몰려드니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를 뒤덮는 흙을 파훼하면 불벼락이 떨어지고, 불벼락을 처리하는 동안 사방에 흩어진 주먹만 한 불덩이가 달려들고, 그것을 쳐내는 사이 몸집을 키운 물이 몰려오고, 물을 잘라 내는 사이 땅이 늪처럼 변해서 발을 잡아당기고!
파훼가 너무 쉬워 위협이 되지는 않으나 시간은 오래 걸렸다. 마치 수십 마리의 날파리가 달려드는 바람에 그것들을 잡기 위해 시간을 쓴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 마법사와 실전 훈련을 해 보는 것인데.”
깊은 한숨이 그가 느끼는 답답함을 대변했다. 아르페시스는 마법사와 대치한 것이 처음이다. 기본적으로 마나 배열 파훼 훈련은 했지만 실전에서 상대해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싸우는 것은 마수였지 인간이 아니었다. 남부군 소속 전투 마법사들과 싸울 것도 아닌데 마법사들과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데미안, 쫓아라.”
“예, 전하.”
흔적을 지웠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쫓는 데까지는 쫓아 봐야 한다.
보아하니 메퓌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반군 내부에서 의견이 다른 세력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분일 가능성…….”
반군 내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메퓌단을 구할 수 있다면 구해야 한다. 테몬을 통해 반군에게 접선하는 방법 외에는 마땅한 것이 없다 보니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메퓌단을 되찾지 못하면… 후작가에 직접 사람을 보내 봐야 하나? 접근 시도가 황제의 눈에 띌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머릿속을 생각으로 채운 아르페시스가 몸을 돌렸다.
“8부대로 돌아간다.”
동이 틀 무렵에는 8부대 지휘관과 함께 리퀘나로 출발해야 한다. 그때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괜한 의혹만 만들 뿐이다.
복잡하고 답답한 생각 속에 갇힌 아르페시스는 동이 트기 전 8부대의 주둔지로 복귀했다. 그렇게 그는 일정대로 리퀘나로 이동해 사령관저 내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리고 관저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마자 로웨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지난봄,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고했던 일이 불쑥 떠오른다. 아르페시스는 로웨나에게 제대로 된 시선도 주지 않고서 경직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남작을 대신해 왔나?”
“예, 이번 분기부터 카의 달에는 제가 대리 보고자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회의 때 보지.”
“예, 총사령관님.”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해 왔던 일 이후, 그녀가 불편했다. 미련도,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매정하고 모질게 굴었기 때문에 불편함은 더해지기만 했다.
그날 이후 사적인 접점은 없었고 정기 회의에서 만나는 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면 그곳엔 언제나 로웨나가 있었다.
로웨나는 공사 구분이 꽤 분명한지라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대뜸 그녀에게 가서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
애매모호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로웨나와의 대화를 최대한 짧게 정리했다. 자리를 떠나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페시스는 로웨나를 뒤로한 채 관저 내부로 들어갔다.
얼마 남지 않은 지휘부 정기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사령관실로 올라가니 관저에서 대기하던 본부대 지휘 기사가 다가왔다. 아르페시스가 리퀘나 시찰을 핑계로 테몬 쪽의 인사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였다.
“총사령관님, 자의적인 판단으로 전달하지 못한 소식이 있습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들은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습관처럼 깃펜을 들며 그를 마주 보았다.
“뭐지?”
자의적 판단이라는 말은 대체로 처벌이 있을 만한 사건을 불러왔다.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멋대로 결정했다는 의미니까. 의문을 표하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기사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테노리엘로부터 온 방문 요청서였다. 방문자는 에스메랄다와 페르멘.
아르페시스는 눈앞에 보이는 글자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외부 일정에 영향을 미칠까 싶어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를 물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옳은 판단이다. 에스메랄다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그는 테몬 쪽 일에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을 테니까. 아니, 테몬이고 반군이고 모조리 내던진 채 그녀의 이동 경로를 거슬러 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일찍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가 에스메랄다와 관련될 때마다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본부대 지휘관들이니 소식을 감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 중요한 소식을 차단한 이들에게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문… 에, 부치겠, 다.”
“……용서에 감사드립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의 끝에서 아르페시스의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파발꾼을 통해 전달받은 이동 일정에 따르면 어제 중앙 리퀘나 후방 도시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칼라일이 책임자로 나갔습니다.”
“……알겠다.”
아르페시스는 눈물로 일렁이는 시야 밖에서 보이는 그녀의 이름을 응시했다. 에스메랄다가 후방 도시에 있다는 말에 지난 새벽녘에 만난 신원 미상의 인물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정말 그녀일까? 그래서 주인을 발견한 심장이 날뛰었던 것이고?
‘이렇게 뵙게 되니 전혀 반갑지 않군요.’
‘아, 리퀘나에 계셔야 할 분을 여기서 뵈어 조금 놀란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
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정말 그녀가 반정에 관련이 있다면 대체 언제부터?
‘어차피 당신께서 끼어들 판이 아니니 신경을 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만약 그 인물이 정말 에스메랄다라면 그녀는 그를 반정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가 불필요해서? 그렇다면 왜 리퀘나로 오고 있을까? 어쩌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테노리엘 백작과 아레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를 반정에 배제하려고 드는 것이라면 왜 그런 것인지, 누군가 제발 명확한 답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무겁고 힘든 의문들은 그를 쫓아다니면서 속살거리지만, 그녀의 이름이 모든 것을 다 잊게 만든다.
페드로의 사후 2년. 에스메랄다, 그녀가 오고 있다.
* * *
─ 네가 제위에 오르는 건 어때?
그리운 목소리다. 아르페시스는 사령관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연 에스메랄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 뭐라……?
지금 그녀가 말한 것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건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선택에 휩쓸려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이들의 숫자가 아득히도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내륙의 상황이 어떻기에 그녀가 저런 말을 하지? 아르페시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전선에 신경을 쓰느라 내륙 쪽은 솔직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고. 정계에 진출한 이후 에스메랄다는 내륙은 신경 쓰지 말고 전선만 보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에 필요한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모두 그녀가 하겠다고,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여 줄곧 그리해 왔다.
─ 어떻게……?
그 때문에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저런 말을 쉽게 꺼낼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아르페시스가 꼭꼭 감춘 희망이 있었다.
황위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치우면 남부에서 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해꾼이 없어지면 그녀에게 마음을 고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리하여 그녀에게 청혼하는 미래를 꿈꾸어 보았다. 그의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에스메랄다를 중심으로 흘러왔으니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는 애써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 남부군을 이끄는 내가 엮이면 남부 지원이 동결될 텐데? 최근 황태자가 보내는 암살자가 많아졌다. 놈이 날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 이참에 나를 비롯한 남부군을 전부 치우고 새로 전선을 세우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모르고. 전선의 실상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남부군을 무능하다고 낙인찍은 머저리가 아닌가.
아르페시스의 질문 앞에서 그녀는 어려운 말을 앞둔 사람처럼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굳이 현실의 장벽을 조목조목 따져 본 것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와 달리 현명한 그녀는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 일단 테몬 후작님과 얘기를 해 봐야겠지만 반황실 세력에 속한 귀족들의 사병을 모을 수 있다면 2만에서 2만 5천 정도… 될 거야. 아비체룬을 무시하면 영지 사병을 뺄 수 있으니 우리 쪽에서도 봉신들의 사병을 징집하면 1만 2천까지 추가로 모을 수 있어.
이어진 말에 아르페시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하는 말에서 커다란 벽을 느꼈으니까.
─ 4만… 으로 중앙군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황제 측도 귀족들의 사병을 징집할 수 있지 않나.
전쟁에서 병력이 전부를 판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두 배가 넘는 병력을 꺾어 내고 승리를 쟁취한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손에 꼽는 소수의 경우다. 대부분 총병력이 적군보다 7할 이하로 떨어지면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수는 아닐지라도 병력의 규모는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전장의 유형이 수성인지 공성인지에 따라서도 많은 변수가 생긴다. 만약 실행한다면 이쪽은 중앙군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공성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공성을 하는 입장은 수성과 동수라 해도 힘들다. 성벽의 역할은 그만큼 크다. 그녀가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 나, 남부군을…….
아르페시스는 그날 에스메랄다가 말을 더듬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타인과의 대화가 능숙했고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그와 달리 그녀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말을 더듬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그 사실에 그리 충격을 받지 못했다. 딱 한마디, 그녀가 꺼낸 단어 하나가 너무 충격적이라 다른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남… 부군을?
설마, 전선을 지키는 남부군을 내전으로 돌리자고? 듣는 순간 깨달았기에 아르페시스는 하얗게 질려야만 했다. 지금까지 불가능하다 여겨 왔던 반정이 필요할 만큼 내륙의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방금 그녀가 꺼낸 말은 최선이다.
남부군이 움직이면 중앙군보다 많은 병력이 생기기에 이득을 재고 따지는 귀족들의 사병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남부군에게는 도박금을 걸 만큼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렇게 남부군을 움직이고 난 후의 여파다.
비어 버린 전선, 외성 안에서 고립된 채 마수에게 둘러싸일 영지들, 2만, 3만 단위로 움직이는 마수에게 짓밟히는 성벽과 그 속에서 죽어 나갈 백성들, 내전을 진행하는 동안 서로를 죽고 죽일 에렘의 병사들까지. 아득하게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가정을 해 보는 것뿐임에도 그다음에 벌어질 처참한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아르페시스는 지난 10여 년간 자신과 함께 살아남은 남부군을 떠올렸다. 그들의 가족을 떠올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최선임을 인정한 방법이 어떻게 이런 것일 수가 있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현실을 향한 것이었다.
─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고 있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버리자니, 그게 가당키는 한가!
그녀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화가 났다. 남부군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해 왔는데, 그 끝에서 마주한 최선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 목적을 위해 수단을 고르는 것이다. 수단을 위해 목적이 퇴색된다면 그게 어찌 옳은 일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죄를 덮기 위한 변명이다.
잔혹하고 끔찍한 선택지를 던져 준 현실이 미워서 언성을 높이자 에스메랄다 역시 점점 목소리를 키웠다.
─ 이대로 그놈이 즉위하면 더 힘들어질 거야.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보다 더 힘들어하는 에스메랄다를 보고 있노라니 슬펐다. 만약 모습을 드러낸 감정이 현실에 대한 분노뿐이었다면, 그는 언쟁을 나누었을지언정 에스메랄다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그게 최선임을 인정해 버렸으니까.
전부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에스메랄다가 꺼낸 그 잔혹한 말이 최선이다. 하지만 문득, 정말 문득 이상한 의문이 고개를 치켜드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남부군을 동원하면, 남부에 있는 수십만 백성을 버려 제위를 가지게 되면 남부에서 풀려나 그녀의 옆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아니, 고작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확신이다. 내전이 끝나고 정략혼이라는 변명으로 제안하면 그녀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아르페시스는 스스로가 제왕의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군 내부의 정치도 칼라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정책을 만들고 권력을 이용하는 지배자보다 정해진 규율 아래에서 권력에 따르는 군인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황위에 오른다면 그의 부족함을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하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배필이다.
10여 년이 넘도록 연을 이어 온 그녀보다 적당한 인물이 있을까? 이 얘기를 꺼낸 건 그가 아니니까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면… 찰나의 순간에 그를 집어삼킨 환희는 공포와 함께였다.
이 지독한 방법이 정말 최선일까? 정말로? 잠시 말을 멈춘 아르페시스는 그 의문의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도 정말, 방금 전 인정한 최선이 진실된 최선인가? 그의 이기가 거짓을 최선이라 정당화한 건 아닐까?
아르페시스는 제 속에 담긴 괴물을 보았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수십만의 백성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괴물. 그것을 깨달은 직후 그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속에 있는 괴물을 그녀가 보지 못했기를 바랐다.
본인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고 있는 황제의 피를 똑같이 이어받은 괴물. 그는 방금 전 깊은 곳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던 그놈을 똑똑히 보아 버렸다. 그녀의 말에 설득되는 척하며 따르면 해결될 문제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속에 이런 추악한 괴물이 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되면? 그녀의 녹안에 황제의 혈육을 향한 경멸이 스며들면? 심장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백성들을 버리는 일에 느끼는 거부감과 죄책감은 진심이었으나, 최선을 위해서는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합리화하는 자신의 괴물을 들켰을 때 찾아올 에스메랄다의 경멸은 감당할 수 없었다.
─ 그 썩은 살을 도려내기 위해 희생되어야 할 무고한 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잘못은 그놈들이 했는데 목숨은 어째서 남부의 백성들이 내어야 하나!
그의 심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 거세게 날뛰었다.
─ 그럼 계속 이렇게 버티기만 할 거야? 황태자라는 놈이 내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기는 해?!
아르페시스는 황태자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경멸을 내비치는 에스메랄다를 보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그녀가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하지?
그는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방금 황제가 키우는 것과 똑같은 괴물이 있음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스스로가 속내를 숨기는 데 서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몇 년이 넘도록 숨길 수 있었던 건,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에 겨우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혹여나 마음이 드러날까 싶으면 자리에서 도망가는 일을 반복해 왔기에 가능했던 일.
반면에 이건, 그녀의 제안에 따르는 순간 이 괴물은 숨길 수 없다. 에스메랄다의 곁을 차지하는 순간, 죄책감 한 톨 느끼지 않으며 행복을 누리는 그를 보면, 그녀는 눈치챌 것이다.
─ 그 미친놈이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지. 아니면 기발한 미친 짓을 하나 더 시작했든가.
들킨다. 아르페시스는 이 대화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 미친놈들을 치우겠다고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줄 수가 없었다.
─ 내전을 위해 전선을 비우는 순간, 남부의 민간인들은 마수들의 간식거리로 전락할 거다. 힘들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 가면서.
사령관실을 벗어나기 직전에 한 말은 그의 발악이었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물려받은 괴물을 들켜서, 경멸받고 싶지 않다고.
─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거기서 멈춰.
그는 황태자와 다르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다, 스스로의 이기를 위해 타인을 제물로 바치는 괴물이 아니다.
에스메랄다에게서 몸을 돌린 직후 그는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서 만난 사슬과 족쇄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떼어 냈다. 계속 이대로 이곳에 있고 싶었다. 끔찍하게 무거운 현실과 불안감, 공포와 환멸까지 전부 내려놓고 평안 속에서 영원히.
─ 너는 황제와 달리 한때 그리된다고 해도 다시금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올 사람이니,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핏물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 바란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기억 속의 형제가 해 준 위로 때문에 고개를 치켜들어야만 했다.
─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 ……--.
─ 천사를 웃게 해 주렴. 그리하여 그 아이와 함께 너도 웃기를 희망하고 있다.
어둠과 사슬은 허상처럼 사라졌다.
“허억!”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은 옷이 무거웠다. 아르페시스는 격한 들숨과 함께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괴물…….”
덜덜 떨리는 손이 페드로의 유서를 담아 두는 상자를 열었다. 너무 자주 손을 타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보다는 덜하다만, 내가 보기에 너는 스스로가 황실의 핏줄임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럴 필요 없다. 네가 황제의 아들임은 변하지 않으나, 그 피가 너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그분과 많이 달랐으니 너도 스스로와 황제를 구분해라.」
그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꿈에서 본 일기를 기록해 둔 검은색 책을 뒤적거렸다. 오래지 않아 원하던 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력 1440년 라 58일.
(중략)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나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사랑해 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가 질색을 하곤 했던 내 버릇, 사생아라는 단어를 언급하던 그 버릇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아르페시스는 스스로가 황제에게 얽매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가 사생아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거기서 열등감을 느낀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의 일기도, 그가 신뢰했던 페드로도 다르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사생아라서, 사생아인데, 같은 말버릇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정말 그런 버릇이 있었는지 휴고에게 확인을 해 봐야겠다. 테노리엘 백작 앞에 설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긴장한 것도 어쩌면 열등감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혈육…….”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그 버릇이 정말 있었던 거라면 그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혈육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그래, 한때는 그랬던 것 같다.
“아마… 그녀를 향한 욕망을 처음 인지했을 때…….”
아르페시스는 두 개의 글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에스메랄다의 꿈을 꾸며 첫 몽정을 했을 때, 분명 배필도 아닌 이에게 욕정을 하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그런 행동을 황태자나 황제와 연관시켜서 생각했고.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지 않게 되었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에스메랄다가 그의 앞에 있었다.
‘왜 그렇게 봐?’
그녀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긴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아, 조금 신기해서.’
‘뭐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게 왜 신기해?’
‘나는…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황제나 황태자와 함께 만찬을 먹어야 했었는데, 그날은 내가 독을 먹는 날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즐거웠던 적이 없다. 나로서는 가족들과의 식사가 즐겁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아.’
에스메랄다의 눈매가 경직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익숙한 쇠사슬과 족쇄를 뒤로하고 아르페시스는 핏덩이를 토해 냈다. 곧이어 퉤, 하고 남은 핏물을 마저 뱉어 낸 그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이 짓도 정말…….”
보여 줄 것이라면 전부 보여 주든가, 대체 왜 이렇게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나.
“휴고가 또 난리를 피우겠군.”
바닥에 떨어진 핏물을 보며 아르페시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맞는 것 같은데.”
반정을 논하는 자리, 그와 그녀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처럼 보이는 순간, 오늘 그가 본 것은 분명 미래에 대한 것이다. 테노리엘 백작도, 아레스도 만나지 않았는데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가장 의심되는 건 새벽녘에 만난 그 묘한 인물, 후방 도시와 가까웠으니 에스메랄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본 건 녹안이 아니라 노란색에 가깝던 눈동자였다. 감정은 그녀라 말하는데, 이성은 그녀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 다 그의 것인데 다른 말을 하니 혼란스럽다.
“하…….”
페드로가 죽기 전에 꿈을 통해 그녀가 언제, 어떤 식으로 반정을 준비하게 되는 것인지 알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원할 때는 보이지 않더니 일이 훌쩍 다가온 지금에서야 보인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라고.
오늘 꿈에서 본 대화를 끼워 넣으면 쿠베트 후작 성의 온실에서 들었던 환청이 얼핏 이해된다는 게 나름의 성과일까?
“괴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던 아르페시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하늘을 뒤덮었던 어둠을 밀어내는 태양처럼, 현실의 미래를 뒤덮고 있는 암울함을 밀어내 줄 빛도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오후, 흔적을 놓쳐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다는 소식과 함께 데미안이 리퀘나로 귀환했다.
* * *
하늘에 걸린 해가 정상을 찍은 정오 무렵이었다.
“테노리엘의 자제분들께서 성문을 지나실 예정입니다.”
칼라일과 함께 방문자 호위를 위해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벌써……?”
하루, 이틀은 더 걸릴 것이라 여겼다. 보통 방문자를 위한 토벌은 나흘에서 닷새 정도는 걸리니까. 그런데 토벌 작업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그녀가 리퀘나 성벽을 지나고 있다.
“칼라일이 서두른 모양입니다.”
휴고가 아르페시스를 살피며 먼저 도착해 소식을 전한 기사를 내보냈다.
아르페시스는 잘게 떨리는 제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가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인데, 대체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페드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반정에서 그를 배제하는 게 맞냐는 건 또 어떻게 물어보고?
“전하, 숨을 쉬셔야 합니다.”
휴고의 다급한 손길을 느낀 후에야 아르페시스는 저도 모르게 참아 버렸던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일단 밖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아니니 그녀와 따로 만날 자리를 만든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아르페시스는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창가를 바라본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관저의 입구는 물론, 관저 3층의 중앙에 있는 사령관실도 남쪽을 향해 창이 나 있으니까. 서쪽 성문을 지나도 관저에 들어오려면 남쪽으로 난 정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니 저 창문은 그녀를,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를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아르페시스는 긴 시간이 지난 후 그때를 떠올리며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왜 그렇게 늦었냐고, 그보다 이전이었을 수는 없었느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가 아니라 그 이전이었어야 하는데 대체 어째서.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분명 그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건만, 창문 바로 앞에 서 있을 때나 볼 수 있는 전경을 보았다.
“전하?”
휴고의 부름을 뒤로하고 홀린 사람처럼 창문 앞으로 다가간 아르페시스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인지, 밤인지, 그도 아니면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인지 모르겠다. 그는 그곳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순간 그의 시야는 밝아졌다. 하지만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해가 기울어 노을이 되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늘의 색이 계속 변하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공허 속을 부유했고, 어떻게 해도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을 떠안았다.
이렇게 기다려 본들 그가 바라는 마차는 오지 않는다. 그 마차 속에 타고 있어야 할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녀가 오고 있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벌어지며 무언가 말을 하고자 했으나 나온 것은 없었다. 뭐지?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박탈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분노와 살의를 느끼며 들끓었다. 이게 뭐지?
창문을 손으로 짚은 그가 버거운 숨을 헐떡였다. 다시 한번, 무언가를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관저의 정문을 지난 마차 한 대가 그의 시야 속으로 들어온 것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올곧게 선 검 한 자루와 그 검을 감싸고 있는 덩굴, 신념과 생명을 상징하는 테노리엘의 문장을 새겨 넣은 마차. 언제나 저곳을 지나쳐 관저로, 그에게로 오던 그 마차. 인형에 불과하던 그에게 존경과 신념, 사랑과 욕망, 탐욕과 질시까지 가르쳐 기어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가 타던 마차. 그녀의 죽음 이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여겼던 그 마차가 그를 향해 오고 있다.
“으…….”
기적이다. 멍청한 짓거리를 하느라 잃었던 그녀가 저기에 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뒤덮은 사슬 속에서 몸부림쳤다. 저를 옭아맨 족쇄를 벗어나기 위해 악을 썼다.
“으아…….”
한마디,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 그 한마디를 제발.
‘그럼 나는 그대를 --라고 부르지.’
‘뭐? 싫어. 사내 같잖아. 난 이미 리디라는 예쁜 이름이 있다고!’
숨소리보다 약한 목소리가 아르페시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마디,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 그 한마디가 드디어.
“에디…….”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야 말았던 발악은 그에게만 주어졌던 그 이름에 성공을 거머쥐었다. 아르페시스의 손이 닿아 있던 창문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망가졌고, 부서진 유리와 창틀이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 드디어. 시끄러운 파열음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전율로 몸을 떨었다. 족쇄를 풀어내고 사슬을 끊어 내 언제나 사라지고야 말던 그것을 붙드는 데 성공했다.
“에디.”
그가 빼앗겼던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컥하고 토해 낸 핏물 위로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내려앉았지만 아르페시스는 듣지 못했다. 그녀가 살아 돌아왔는데, 그의 세상이 다시 세워졌는데 그딴 게 무슨 상관이라고. 휴고의 팔에 기댄 아르페시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 * *
─ 괜찮으신가요?
그가 하얀 입김과 함께 거친 숨을 고르고 있던 그때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그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금발, 녹안, 단 하나의 보석도 없이 자수만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고작 열두 살의 어리던 그녀였다.
─ 누구냐.
─ 인사가 늦었습니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치맛자락을 잡은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무릎을 굽히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 테노리엘의 인사들이 암살자마냥 살금살금 다가오는지 몰랐군.
날 선 목소리는 자신의 것.
─ 그럼 거래는 어떠신지요?
간절한 미성은 그녀의 것.
─ 그곳에 필요하지 않은 저를 대신해서 그들을 살려 주신다면, 저는 전하께서 살아남으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진정으로 그것 하나만을 바랍니다.
의미를 알지 못했던 지난날과 달랐다. 지금의 아르페시스는 꿈을 통해 보는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건 기억이었다.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온 후 잃어버렸던 그녀와의 모든 것.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건 아마 그 첫 만남부터였으리라.
작은 손이 상처 위에 묶어 주었던 손수건은 그날 이후 언제나 아르페시스의 품속에 들어 있었다.
─ 에스메랄다.
─ 오라버니.
이후 나타난 아레스를 바라보며 그녀가 지었던 미소가 자신에게도 향하기를 바랐었다. 그 바람은 몇 년 후 리퀘나에서 다시 만난 그녀가 들어주었다. 그녀는 아레스를 반기던 것처럼 그를 반기며 똑같이 웃어 주었다. 처음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의 대상이 되었다.
한순간에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것이 일그러지며 장면이 바뀌었다.
─ 실례합니다만.
이건 새로운 기억이다. 아레스와 테노리엘의 형제들을 볼 때마다 날뛰었던 심장은 환희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이 살아 있다는 건 아르페시스에게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녀가 아직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사치로 여기지 않았을 시기, 언제고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기에 느꼈던 이기적인 환희.
─ 혹시 요만한 여자아이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지만 참 우습게도, 그녀는 그를 배제했다. 후원을 떠난 후 복도가 꺾어지는 곳에서 그녀를 마주쳤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때의 눈물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쳐 버린 그녀를 쫓아가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를 배제한 그녀가 두 번 다시 제 품을 떠날 수 없게.
사라진 시간은 물론,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에서의 기억까지 손에 쥐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꿈을 떠나 현실에서 깨어난 아르페시스가 적막 속에서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은회색 눈동자 속에서 이름 모를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의 숨소리는 죽은 사람의 것처럼 얇았고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아르페시스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시간을 돌아왔다. 그녀가 죽었던 날은 대륙력 1444년, 지금은 1438년. 자신은 22세, 그녀는 18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불가능이라 하여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의 세상인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는데. 아르페시스는 몸의 냉기를 한 번에 몰아내는 희열을 느끼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에디…….”
그립고 그리운 이름을 다시 한번 입에 담아 보았다. 그녀가 떠나고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리도 허망하게 잃은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홀로 떠난 그녀를…….
이번에는 그때처럼 머저리 같은 짓을 하느라 그녀를 놓치지 않으리라. 아르페시스는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기억과 달리 남부 폭동이나 반군 창설같이, 몇몇 사건들은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기억과 다른 행보를 보인 에스메랄다가 주도했겠지. 그녀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기억을 되찾은 모양이다.
아마도,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 이전부터. 더 정확히는… 그녀가 본래 가지 않았던 영지로 내려갔던 그때. 1429년.
‘나는 이게 29년 당시 천사가 갑자기 변해 버린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계속 파고드는 중이었다. 미래를 내다본 사람,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그게 아니라면 미래를 겪고 돌아온 사람, 이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페드로의 추측은 거의 정확했다. 에스메랄다도, 아르페시스도, 미래를 겪고 돌아왔다. 그녀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건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건이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
분명한 증거, 그건 황태자의 연회가 열리던 그 날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의적으로 그를 배제했다는 의미였다. 멍청한 짓을 하느라 그녀의 뜻에 따르지 않은 이를 찾아올 필요가 없었겠지. 그녀에게 기억이 없다면 남부군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의 가치가 변했을 리 없다.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거기서 멈춰.’
그는 무서웠다. 백성들을 버린 이후 그녀의 곁에 서는 것을 기뻐할 스스로가 무서웠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을 들켜 그녀에게 경멸받는 게 너무, 너무나도 무서웠다. 에스메랄다가 존경을 표한 이후로 그에게 백성들을 지키는 건 진리였는데, 이제 와 백성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고?
에스메랄다가 그 선택으로 인해 얻은 것에 기뻐하는 그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에게 주었던 존경을 거둬 갈 것이 빤하지 않나. 그리고 잃어버린 존경 대신 경멸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황제와 황태자에게 주는 그 경멸.
“겁쟁이…….”
아르페시스는 제 목에 차고 있는 실드 마도구를 쓸어 보았다.
‘어차피 당신께서 끼어들 판이 아니니 신경을 끄시는 게 좋을 겁니다.’
후방 도시 인근에서 만났던 인물, 노란색에 가까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작은 인영은 에스메랄다였다.
“라그나…….”
그가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구나. 목소리와 눈동자 색을 바꾸는 마도구는 물론, 자동 발현 실드 마도구와 확대경이나 도청 마도구까지.
“이미 전보까지 개발했을 수도 있겠군…….”
헛웃음이 튀어 나갔다. 라그나는 변함없이, 어쩌면 보다 빨리 그녀의 곁으로 갔을 텐데 그는 배제당했다. 그녀가 매긴 가치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머저리 같은 놈…….”
그깟 백성들을 버리는 게 뭐가 문제라고, 황제에게 피와 함께 물려받은 괴물을 들키는 게 어떻다고. 백성들의 죽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짐? 그녀에게서 받는 경멸?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딴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큼지막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후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무얼 의미하는지, 왜 그런 꿈을 꾸는지 깨달았어야 했다.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페드로의 유서를 보고서라도 기억해 냈어야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 혹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 그 문장을 봤던 때도 기회는 있었다. 빨리 기억을 찾아서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했어야 했다.
한데 실제로 그가 한 일이라곤 반군을 빼 오며 그녀를 방해하거나 버러지 같은 백성들이 무사하도록 전선을 지키는 게 전부였다.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백성을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간의 행보들이 그것을 암시하고도 남았다.
별 가치도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다니. 그녀가 원했으면 싫어도 했을 것이나, 그녀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 역겨운 것들을 또 한 번 지켰다. 한심한 스스로의 작태에 욕지거리가 올라왔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생각보다 침착할 수 있었다. 늦게나마 가야 할 길에 들어선 상태였으니까.
그는 페드로의 사후 내전을 거들기 위해 노력했다. 별로 성과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낸 그는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앓는 소리가 침실을 채워 나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날뛰었음에도 그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탐했던 기억과 감정, 감촉이 선연하다.
“사랑…….”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모자라 입맞춤까지 받다니.
“연인…….”
그 유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만으로도 기억이 없던 채로 행했던 모든 멍청한 짓을 용서해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편히 환희에 취할 수 없는 건…….
‘사랑하는 형제야, 조금은 얄미운 매제야.’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침대 옆으로 향했다. 페드로의 유서를 담아 두는 상자였다. 에스메랄다만 보고 있던 그의 시야에 페드로가 끼어들자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와 지금의 시간에서의 그가 뒤섞여 버렸다. 누가 먼저지?
다시 한번 앓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중요한 건 그런 구분이 아니다. 떨쳐 내자.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묘한 광채를 내며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쪽으로 향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소형 전등 마도구가 사선으로 베어졌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에 분명 떨쳐 냈는데, 의문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시 그에게 달라붙었다.
어째서 페드로가 죽은 후에야 되찾았나.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에스메랄다를 잃은 후에야 가지더니. 아르페시스의 턱이 불거졌다. 앙다문 잇새 사이로 아득거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미 한번 풀어놓은 괴물을 다시 묶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오래가지 않아 에스메랄다에게 들킬 것이다.
그럼에도 곁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라진 시간에서와 달리 그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너는 황제와 달리 한때 그리된다고 해도 다시금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올 사람이니,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핏물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 바란다.’
페드로의 말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외면했다. 페드로가 준 신뢰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죽었을 때는 버텼지만 에스메랄다가 죽었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으로 가져 본 형제의 신뢰보다 처음으로 열망해 본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건 명백하다. 설령 그것이 만약 그녀에게 해가 된다 해도…….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나, 필요하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
그래,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관저 내부에 있을까? 방문자들에게 제공하는 손님 객실? 그녀가 어디에 있건, 만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황성 연회 당시만 해도 분명 그를 배제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의 연인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녀의 사랑을 받았음에 기쁜 것과는 별개로 의문은 존재했다. 아르페시스가 초조함으로 인해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아시스…….”
빼앗겼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상태로 되돌아왔기 때문일까? 지금의 시간에서 쌓아 온 기억도 지나치게 선명했다. 덕분에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아시스에게 내가 찾는다고 전해 주렴.’
‘그저 종종 일을 시키는 사람일 뿐입니다.’
황성에서부터 백작 성에 발을 들일 때까지 그녀는 아르페시스에게 선을 그어 왔다. 그녀의 태도가 변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건 그 이름이 언급된 이후다.
“확인했던 것이구나…….”
그에게 기억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인한 것이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그들끼리만 공유한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꽤나 티를 많이 내기도 했고, 과거 별칭이 그리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아 쑥스러워했던 적도 있다. 그러니 에스메랄다는 그 이름 앞에서 그가 보이는 반응을 살펴 기억의 유무를 확인한 것이다.
당시 그가 보인 반응은 무지였다. 그녀는 분명 그에게 기억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겠지. 그때부터 에스메랄다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서부 연합군의 출정식 날 뺨과 함께 그의 파렴치한 손길을 허락해 주고, 서신을 보내 주었으며, 걱정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쿠베트성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그의 저돌적인 행태에 끝내 사랑을 고해 주기까지 했다.
“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전부 가진 만족감 속에서 허우적거릴 만큼 황홀한 기억이다.
‘나도… 사랑, 해.’
아르페시스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르렁거리는 목의 울림은 배부른 짐승의, 아니, 굶주린 짐승의 탄식과도 닮아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기억을 가진 그와 기억이 없는 그를 왜 다르게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르페시스는 타인의 세세한 심리까지 알아낼 수 있을 만큼 감정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를 몰라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있으니 상관없다.
“기억이 돌아온 건 들키면 안 되겠군.”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기억이 없다고 생각해서 흔들렸고, 사랑을 고해 준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실이 비참한 것인지 기쁜 것인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겠지.”
세상이 무너진 후 지옥에서 보낸 1여 년은 에스메랄다가 알던 아르페시스가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론을 내린 그는 심장에 고여 있는 마나를 사방으로 풀어냈다.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힐끔 돌아본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녀가 잠들어 있다면 잠든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악몽…….”
아직도 그녀는 악몽을 꾸나? 그녀가 꿈으로 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품에서는 꾸지 않는 것 같았으니 잠든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의 마나가 에스메랄다를 찾아 헤맸지만 방문자들에게 주로 배정되는 객실 쪽에 있는 사람은 페르멘뿐이었다.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에스메랄다는 어디에 있지? 설마 그의 환상이 만들어 낸 착각일까?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나?
그도 알고 있다. 페르멘이 이 시기까지 살아 있다는 건, 그의 기억에 있는 시간과 일이 다르게 흘러갔다는 증거였다. 더군다나 아직 그날이 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떨어졌던 절망의 나락은 너무나도 깊어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감정은 다시 겁을 집어먹고 두려움을 호소했다.
초조함이 피어나자 차분하게 관저를 누비던 그의 마나가 곧장 사납게 날뛰었다. 오래지 않아 기어코 원하는 이를 찾아냈을 때, 아르페시스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후원의 연못에 있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보니 다시금 환희가 그를 감쌌다. 그의 입술을 타고 탄식이 흘러넘쳤다. 그녀의 곁에 함께 있는 사람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곧장 자신의 세상에게 가려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글거리고 있을 이들이 그의 살의를 일깨웠다.
스스로가 일구어 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우매함을 방패 삼아, 힘이 없다는 것을 변명 삼아 저를 도와 달라고, 제 것을 지켜 달라고 조를 줄만 아는 것들. 그 소리를 듣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인생과 가족을 희생하며 가르쳐 주고, 지켜 주려 했던 그녀에게 돌을 던진 그 버러지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가 한 일은 고작 남부군을 지탱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륙의 이들에게 마수의 위험성을 알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마수의 공포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군사 목적 외에 마수를 내륙으로 들여올 경우 극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는 것은 물론, 그 법을 통해 아직 전선에 나선 적 없는 어리고 미숙한 이들이 마수에게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교육 과정을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들의 삶과 목숨을 노리는 마수들이 어떤 놈들인지,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것들인지, 가르치고 이해하게 만들어 종래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었다. 실제 그런 교육과 훈련 이후, 내륙 깊게 들어간 소수의 마수에게 간간이 공격을 받던 마을 주민의 생존율은 수배 가까이 늘었다.
또한 버러지들이 그녀의 사후 마수 앞에서 잠시나마 버틴 것도 모두 그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히, 에스메랄다에게 돌을 던졌다. 고작 그런 것들을 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니.
놈들을 버리고서 얻어 낼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무서워하기 바빴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녀에게서 연락이 끊겼던 1여 년 동안 차마 먼저 연락을 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라.’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휴고…….”
아니, 그는 아니다. 휴고가 남부군의 행정 처리를 돕기는 하지만 그건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사람은 휴고가 아니라 남부군에 소속되어 있으며, 남부에 대한 애정도 강한 인물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칼라일 같은 인물 말이다.
아르페시스가 부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래지 않아 칼라일이 도착했다.
“부르셨습…….”
자다 깬 것이 분명한 듯, 잠긴 목소리가 만들어 낸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겼다.
“전군 전투 중지. 모든 부대는 현 시간부로 격전지에서 이틀 거리까지 퇴각한다. 전투 재개는 사흘 후 동이 틀 때까지 불허한다.”
아르페시스는 차가운 눈으로 칼라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가 남부군을 내전에 동원했다면, 그들은 복종했을 것이다. 당시의 아르페시스는 분명 남부군의 충성을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사라진 시간과 너무 다른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확답은 없었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모자라, 피해를 낼 것이 빤해 부당하기까지 한 명령에도 남부군 전원이 따를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은 겨울이다. 남부군은 옛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까지 깊숙이 내려간 상태에서 연일 조금씩 리퀘나가 있는 방향으로 퇴각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이틀 거리를 후퇴하고, 거기에 더해 사흘간 전투를 하지 말라는 건 전방 전투 부대의 피해를 방관하겠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납득되지 않고 엉망인 명령임에도 지금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로 인해 힘든 퇴각을 진행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사상자와 부상자가 산처럼 쌓인다는 것을 알아도 따를 것인가? 그리하여, 가족과 고향을 버리라는 그의 명령이 내려져도 그에 복종할 것인가?
아르페시스는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의 시간에서도 남부군이 그의 패가 맞는지 알아야, 에스메랄다에게 자신의 가치를 논할 수 있을 테니까. 기억과 힘을 함께 되찾았으니 내전의 승패는 판가름 난 것이다.
하나 전쟁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는 이미 내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남부군은 필시 도움이 되겠지. 속에 있는 괴물을 들킨다 해도 가진 패가 많으면 쉽게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듣지 못했나?”
아르페시스는 답이 없는 칼라일을 향해 물었다.
“명을… 따릅니다.”
칼라일은 잠시 복잡한 눈을 했지만 곧 퇴각 신호를 올리기 위해 침실을 나섰다. 아르페시스는 칼라일이 침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첨탑 위에 있는 마도구가 발동될 것이다.
리퀘나가 만들어진 이후 단 두 번 발동했던 그 마도구를 통해 전군 퇴각을 명령하는 신호가 올라가면 판가름이 될 터.
칼라일이 나간 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르페시스의 신영이 불현듯 사라졌다. 텅 빈 침실에 남은 건 적막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