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8화 (28/45)

제27장

어리석은 후회

아비체룬으로 보낸 이들의 수만 해도 50명이 넘건만 에스메랄다에게 되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부 대란에서부터 내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꾸준히 세작을 집어넣으며 정세를 파악해 내전에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아비체룬의 일은 완전히 실패했다.

“쯧.”

지난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혀를 찰 정도로, 에스메랄다는 실패에 대한 마땅찮음을 느꼈다.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면 일찍이 포기하고 다른 쪽에 더 집중했겠지만 그건 지금에 이르러서야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과거의 순간에는 이런 결과를 알지 못했기에 시도하는 것이 옳았던 선택이었다. 미래를 겪고 돌아왔음에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에스메랄다는 실패를 짊어져야만 했다.

그녀는 결국 1437년 가을 무렵 아비체룬을 전면 배제한 대신 백성들을 흡수한 반군을 키우는 데 공을 들였다. 그들은 현재 서부 곳곳에 분산되어 있다. 만약의 경우 발각될지도 모르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분산 작업은 필수였다. 적지 않은 수라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만 1년을 꼬박 쏟아부었다. 그들이 아비체룬의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이다.

계획을 수정한 에스메랄다는 익명의 신고자를 자청해 케니스의 본거지를 황제에게 알려 주었다. 루그레디안이 기어코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르페시스에게 접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수포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와 협박이었다.

그 일에서 에스메랄다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아르페시스에게 그녀가 행한 짓을 들켜서도 안 되거니와 그가 제위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익명의 제보를 받은 황제는 확인 작업에 들어갔고, 케니스의 주둔지를 발견한 후 습격했다.

다만 케니스의 병력이 황제의 예상보다 많았기에 큰 피해는 없었다. 기습을 당했음에도 오히려 중앙군을 다수 사로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했을 정도다. 그 사건으로 케니스의 주둔지를 옮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병력이 2할 가까이 깎여 내려갔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큰 타격은 아니었다.

뒷골목을 통해 중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 반군의 성과가 퍼져 나갔고, 그것에 눈이 먼 백성들이 반군에 합류했으니까. 소수로 퍼져 있던 반군이 모여들어 서부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기에 죽은 이들의 수는 이미 메우고도 남았다.

지금은 케니스의 병력보다 숫자 자체는 많아진 상태였다. 질은 장담할 수 없지만 수는 충분했다. 그 일 때문에 루그레디안은 반군과의 연결점을 조사받으며 잠시간 황실에 구금되었지만…….

심증 외에 물자를 지원했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행위에 대한 물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 해가 끝나기 전 곧장 풀려났다. 이후 꽤나 조용한 것을 보면 그녀의 협박이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배운 것이겠지. 루그레디안은 당장 그녀의 선에서 일부 통제가 되고 있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다.

“아가씨, 이번 달에 들어 벌써 세 번째 시도입니다.”

진짜 문제는 남부군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보호 관찰하는 이들을 통해 아르페시스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확한 목적은 언급하지 않고 윗선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행보로 추측하건대 아마 반군을 남부군에 복귀시키려고 접촉하려는 것일 터. 지금쯤이면 아르페시스가 남부군 주요 인사들의 충성심을 얻은 상태겠지. 과거 같은 급진파였던 전우들이 회유에 협력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모른다.

이 때문에 반군 내부에서 그녀가 포섭한 이들이 아르페시스의 접촉을 도중에 잘라 내고 있다. 하지만 시도가 지속되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윗선에 얘기가 전해질 것이다. 그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잘라 내게. 윗선의 반응을 통일 지을 수 없으니 올라가면 안 돼.”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일이 커지거나 어그러지기 전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제 측 세력은 물론 에스메랄다 측의 세력까지, 모두가 에렘의 내륙을 가득 뒤덮은 전운을 감지하고 있다.

첸의 대답을 들은 후 에스메랄다는 가득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서 일단의 뭉치를 꺼내 들었다. 현재 외부로 나가 있는 중앙군의 부대 규모, 배치, 이동 시기와 경로, 황제로부터 내려온 명령서의 상세한 내용까지 기재된 보고서였다. 그녀가 꾸준히 중앙군 내부에 집어넣은 세작들이 올린 성과였다.

이것에 따르면 현재 중앙군은 천천히 복귀하고 있다. 황제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반군 수색을 중단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과가 없는 일에 더 이상의 인력과 시간, 자금을 투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전에 결국 막지 못한 전쟁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중앙군의 체계가 강화되고 병력이 추가 증원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전쟁이란 윗선의 결정 하나로 대뜸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을 치를 병력이 준비를 거쳐야만 한다.

가장 기본적인 부대의 편성과 전투 시 사용할 명령 체계의 보안을 확인해야 하고, 식량이나 약제 같은 물자 확보에 필요한 운송로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 전쟁 도중 파손된 병장기를 수급할 수 있는 환경과 인력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이러니 전쟁이 터지면 상계에서는 돈을 벌 기회가 왔다고 환호성이 터지는 것이다. 일개 개인이 아닌 나라의 주머니가 열린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물자가 동원되니까.

영토와 재물을 약탈할 수 있는 타국과의 전쟁과 달리, 내전은 제 살을 깎아 먹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하지만… 그건 잇속을 챙기기 바쁜 상인들과 상관없는 일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는 날의 선정은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안 된다. 너무 이르게 들어가면 에스메랄다 측의 준비가 미흡할 것이고, 너무 늦게 들어간다면 황제 측이 견고해질 뿐이다.

물가 상승을 염려해 타국에서 채굴해 쌓아 두기만 했던 자금들을 풀어 물자를 사들이고, 남부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지키기 위해 퍼져 있던 케니스의 병력도 복귀해야 하니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추후 들어오는 정보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에스메랄다 측이 쌓아 올린 기반으로 준비를 마치기 위해선 이번 겨울의 끝자락까지는 미뤄야 한다. 하지만 바의 달이 시작되기 전에는 움직여야 한다. 에렘에서 유일하게 쌓이는 북부의 눈이 녹으면 기동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황제 측 세력에 속한 귀족들의 다수가 북부에 있다. 이동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눈이 녹지 않은 동안, 병력을 2개로 분산한 케니스가 그들을 집결을 막으며 각개 격파를 해야 한다. 그래야지 북부의 반군이 후방에 적을 두지 않고 중북 경계선에서 전투를 할 수 있다. 그의 병력은 남부군에서 마수를 상대로 싸우던 정예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을 담당함에도 믿을 수 있다.

“반군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황제는 분산된 반군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그들 측에선 선공을 해 올 수 없는 상황. 패를 가리는 데 노력한 보람이 있다. 황제를 따르는 귀족들도 군수 물자를 축적하고 있지만 상권의 우위는 에스메랄다에게 있다.

과거로 돌아온 그녀는 뒷골목을 장악한 후 수입 곡물 시장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상단들에게 접근하고 투자하며 그들을 포섭했다. 당시에는 작던 그 상단들은 에스메랄다라는 뒷배의 지원을 받아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자라나 있다.

일부는 약제, 기름 등의 소모품 상단과 붕대나 천같이 지속적으로 구매를 해야 하는 소모품을 다루는 상단들이다. 실제 몇몇 타 가문의 방계들이 운영하는 두 개의 상단은 중앙군과 계약을 체결한 곳이다. 그곳들을 통해 전쟁이 터졌을 때 물자를 끊어 황제 측에게 약간이나마 타격을 줄 수 있다.

또 다른 일부는 황도 위주에서 움직이는 사치품 상단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내전이 일어나도 사치를 관두지 않을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 자금이 다시 에스메랄다 측의 물자 구매에 사용될 예정이고. 마지막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로 분류되는 식자재.

“먹지 못하면 싸우지도 못하는 법이지.”

자국에서 생산하는 것은 손대지 못했지만, 수입 곡물을 도매할 수 있는 거래권의 대부분이 에스메랄다의 손아귀에 있다. 그들은 전쟁 전까지 황제 측 세력과 계약을 통해 주문을 받고, 물자를 비축한 후 그날이 다가왔을 때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 줄 것이다.

약제나 붕대 같은 물자의 부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터. 부랴부랴 소형 소매 상단을 통해 채워도 모든 병력에게 넉넉한 물자를 제공하진 못할 것이다.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군대와 훌륭한 식단으로 몸을 채운 군대의 싸움이 기대될 뿐이다.

이외에도 과일, 육류, 채소 등 다양한 식자재를 취급하는 소형 상단 역시 에스메랄다의 손이 닿은 곳이 많다. 에스메랄다에게는 황제 측의 준비를 방해할 만한 패가 아주 많다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위해 필요한 물자의 시장 지배력은 에스메랄다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1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 온 기반이란 이렇게나 탄탄하다.

양쪽 모두 다가올 것이 분명한 전쟁 준비에 주력하고 있는 지금, 에스메랄다는 준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신전과 신관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모은 증거들을 복사해 에렘 각지에 전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내전이 발발하는 그 날, 그 증거들은 각 영지와 황도의 길거리에 공개되어 백성들이 보게 될 것이다. 신관에게 치료를 받고 살인에서 오는 중압감을 고해하며 정신적인 위로를 받아야 할 중앙군을 동요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건 백성들을 동요시키고, 또한 선동하기 위한 수이기도 했다.

내전 중에 황도에서 폭동이 일어나 준다면 일이 더 수월할 테니 그 밑그림을 그려 두는 것이다. 신전은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황실의 눈 밖에 나면서까지 반군을 치료하기 위해 나서지도 않을 터. 이쪽이 쓰지 못할 패라면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약화시켜야 함이 마땅하다.

그 모든 준비가 끝나면 마침내 내전이리라. 서쪽과 북쪽에서는 반군이, 동쪽에서는 실테르의 우군이 압박해 들어갈 것이다. 남쪽에서는 지금까지 루그레디안이 포섭한 반황실 세력의 귀족들이 사병을 동원할 테고.

지금처럼 반군이 서로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각자가 움직이는 날도 명확하게 몰라야 완벽한 보안이 이루어진다.

일이 시작되기 전 그간 주시했던 의심 인물들을 척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래, 이제 정말로 과거로 돌아와 10년 가까이 달려온 길의 끝에서 마주할 그 날이 머지않았다.

‘천사야.’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에스메랄다가 흠칫 몸을 떨며 시선을 들었다.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페드로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저 사람은 그녀의 미련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이미 가족들이 죽은 후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일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에스메랄다가 품속에 항상 넣어 다니는 페드로의 유서를 꺼냈다. 손때가 꼬질꼬질 묻을 정도로 닳았으나 여전히 밀봉된 이것이 있는 이상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의 기억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오찬 시간인데 식사를 또 거르는 거니?’

휘둘리면 후에 남는 것은 지독한 상실감뿐이다. 외면해라.

‘나와 약속했잖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식사는 챙겨야지.’

에스메랄다는 저를 힐끔거리는 첸과 다나의 시선은 물론, 귓가에 들려오는 페드로의 목소리도 모조리 무시했다. 억지로나마 곧 다가올 결전의 날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천사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스스로가 겪고 있는 환상과 환청이 얼마나 끈질긴지 역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이나 시달렸으니까.

가족들이 모두 죽은 후에는 그들이 모여 있는 환상을 보곤 했다. 함께 웃으며 떠들던 그들이 그녀만 두고 사라지는 광경을 수없이 많이 보았지. 이를 악물며 버텨 보아도 페드로의 환상은 그 시절처럼 에스메랄다를 찾아왔다.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 어둠이 하늘을 장악했을 때 소파가 있는 곳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페드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일전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빈도가 줄어들었는데, 지금은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밤마다 제 몸이 행하는 짓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낮에 외면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심보일까?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녀는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휘둘리고야 만다.

“하아…….”

길고 무거운 한숨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페드로의 죽음은 결국 변하지 않았고 그는 지금 이곳에 없다. 다음에는 누가 될까? 지금으로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아레스나 테노리엘 백작이다. 전선에 있는 건 그 두 사람이니까.

남부의 인구 부족은 결국 남부군의 병력 감소를 야기한다. 그녀가 역병을 건드려 사태를 악화시켰던 전적 때문에 그런 인구 부족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테노리엘 백작령의 인구는 20만을 넘어가는 반면, 남부 전선과 맞닿은 부소네, 랑그루발, 헤르토크, 아르텐의 영지를 모두 합해야 25만이 겨우 넘을 정도로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페드로가 죽던 해에 동시 출현한 2기의 대형 마수 때문에 남부군의 피해가 큰 상황이다. 그해에 전사한 기사들의 수가 평균적인 수보다 2천 가까이 많으니 어련할까. 아르페시스가 부상에서 복귀한 후 열심히 전장을 누비고 있지만… 전체적인 병력 부족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해 겨울 아르텐 공작령과 맞닿은 남서쪽 전선이 다시 한번 뚫린 것을 보면 그 피해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황제는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빨리 테노리엘 백작이라는 패를 꺼내 들었다.

올해 바의 달, 1만의 중앙군을 추가로 차출해 2차 파병의 책임자로 테노리엘 백작을 임명하는 황명이 내려졌다. 병력 부족 문제를 보완하는 겸 다른 의도까지 몇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수겠지. 백작은 그 명령에 따라 남부로 출정했기에 현재 남부 전선에는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이 있다.

이번에는 그들 중 누가 먼저 죽을까? 이번에도 아레스가 먼저 전사 소식을 알릴까? 아니면 테노리엘 백작?

오멘은 후방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황도에 있으니 죽을 가능성이 낮고, 페르멘은 영주 성에서 그녀와 함께 있으니 마찬가지로 안전하다. 안전하다 뿐이겠는가? 페르멘은 이제 자원병으로도 전선에 가지 못한다. 페드로의 죽음 직후 기사 작위를 반환했으니까.

“하아…….”

남부군에 속한 자원병 부대로 가려면 군적에 이름을 올린 상태여야 한다. 민간인을 무작정 들여놓으면 죽어 버리기만 하니 최소한의 제한을 둔 것이다.

황제가, 혹은 황제가 대리 임명권을 준 공후백을 통해 기사 작위를 받으면 소속이 없는 자유 기사라 한들 군적에 이름이 올라간다. 그런데 페르멘은 기사 작위를 반납해 버렸으니 군적에 이름이 없는 민간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 5차까지 진행된 백성의 징집 역시 새로 신설된 중앙 징집군 소속으로 황제 휘하의 군대다. 그런 에렘의 제도 속에서 페르멘이 기사 작위를 버렸다는 건 황제로부터 동원령이 내려와도 전장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가 전선으로 향하려면 군부와 상관없는 귀족들까지 징집되는 일이 생겨야 하는데, 백성의 징집과 귀족의 징집이 같을 리 없다.

그건 각 영지의 통치권을 가진 21명의 공후백 중 2/3에 해당하는 인원이 동의해야지만 가능한 일로, 황제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 에렘의 4백 년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안도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이제는 별다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페르멘의 안전을 곱씹던 에스메랄다는 밤마다 저를 끌어안은 채 속삭이는 절박한 목소리를 밀어내고자 노력했다.

‘리디, 제발…….’

그녀가 머릿속에서 가족에 대한 생각을 쫓아내고 있을 때 책상 위에 놓인 수정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의 세력은 더 이상 전서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전보 마도구가 배급되었으니까. 전보에 접근해 사용을 할 수 있는 건 그녀와 대면한 적이 있는 이들뿐이다. 암호 수식을 넣지 않으면 발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졌기에 꽤나 높은 수준의 보안이 유지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사람의 얼굴만큼 커다란 수정 위에 손을 올리고 마나로 암호 수식을 만들었다. 운용력은 틈틈이 홀로 연습을 해 왔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정말이지 쥐꼬리만 하군.”

에스메랄다는 제 심장에 담겨 있는 마나의 양을 확인할 때마다 차오르는 짜증을 애써 털어 냈다. 그녀가 만든 암호 수식이 수정 속으로 흘러 들어간 후에야 전체를 덮고 있던 빛이 사라지고 중심부에 글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브람 백작, 노소크 당시 실테르 남부군과 철광석 밀매.]

에스메랄다는 그 문구를 확인한 직후 수정에서 손을 거두었다. 노소크는 1420년대 무렵 실테르 남부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했던 인물의 이름이다.

“역시… 무언가가 있기는 했군.”

27년 당시 아브람 백작 부인이 반역이라는 명목으로 어이없게 살해당했을 때, 아브람 백작이 반발하지 않은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 이 정보를 기반으로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의문의 일부도 해소되었다.

실테르 측에서 병력 지원의 대가로 원하던 조건 중 하나는 병장기, 혹은 그것을 조달할 수 있는 철광석의 거래를 다시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에 아브람 백작은 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몇 번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어떻게든 에스메랄다가 동의하게 만들려는 사람처럼.

에스메랄다는 아브람 백작의 요청이 있은 직후 뷔비르의 상단이 가진 광산을 통해 약간의 철광을 유통해 주었다. 소비되는 전량을 채우기에는 부족하지만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된다.

남부를 제외하면 산악 지대가 많은 에렘과 달리 실테르는 산지가 거의 없고 대다수의 영토가 평원이다. 그들이 가진 영토에 있는 광산은 보석, 혹은 구리가 대부분이고 마석 광산은 단 하나뿐이다. 현재 실테르의 영토 내에는 철광이 정말 단 하나도 없다.

실테르는 애초에 전역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해상 무역을 통해 대륙 전역으로 팔며 부를 쌓아 온 나라였다. 에렘은 마수로 인해 곡창 지대인 남부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대량의 곡물을 국외에서 조달한다.

반면 실테르는 과거 제국 시절에 가졌던 남부 영토를 버리고 지금의 전선까지 후퇴하며 철광을 버려야만 했다. 그래서 병장기 손실을 메꾸기 위해 필요한 철광석을 수입하거나, 자국 귀족이 해외에서 구매한 철광석을 왕실이 독점 구매하며 버티는 상황이다.

실테르가 철광을 버리면서까지 에렘의 영토가 시작되는 지역으로 후퇴한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에렘의 남부는 물론, 실테르의 남동쪽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페르데른 왕국의 멸망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왕족과 귀족들은 전선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타국으로 망명했고, 백성들은 마수들의 먹이가 되어 죽어 나갔다.

끝까지 버티던 이들은 죽거나, 이후 에렘을 비롯한 전선 국가에 귀화해 군부에 몸을 담았다. 만약 페르데른 왕국의 영토가 마수에게 넘어간 후에도 과거의 영토를 고집했다면 실테르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면적의 전선을 감당하고 있었을 터.

그들은 인명 피해와 전선을 유지하며 오는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백성들을 이주시키며 영토를 버렸다. 그 결과 지금의 전선이 생긴 것이다. 실테르가 에렘의 남부 국경과 똑바로 이어지는 국경을 가지게 된 배경이었다.

그들은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포기했고 덕분에 본래 부담했어야 할 전선의 면적이 줄었다. 현명하고 이상적인 판단이지만 또한 그만큼 어려운 판단이었다. 나라의 영토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력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음에도 그들은 해냈다.

“그 이후로는 계속 철광석에 목을 맸으니 이상할 게 없지만…….”

에스메랄다는 사라진 시간에 황제가 제한해 둔 철광석 거래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40년 무렵, 일부 거래를 풀어 주었다. 실테르의 전선이 무너지면 에렘도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지금 전선을 보유한 3개국은 공생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난해 실테르에서 소모하는 철광석의 4할가량을 수출하던 베손 왕국이 거래 가격을 올려 버린 탓에 나름 다급했으리라. 이런 배경이 있으니 실테르가 철광석 거래를 조건으로 내민 것은 진즉에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아브람 백작의 적극적인 태도는 의심 없이 넘어가기엔 너무 과했다. 그녀는 백작이 자신 몰래 병장기를 비축해 사병을 양성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실테르와 연합해 계획의 뒤통수를 치려는 것인지 의심했고 따로 조사를 시작했다. 끝에 도달하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내부에서 문제가 터져 일을 그르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그 의심의 결과가 조금 전 에스메랄다가 본 문구였다. 현 황제가 실테르와의 철광석 거래를 제한하기 시작한 건 23년 무렵부터였고 그 규제가 점점 심해지며 26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무렵 아브람 백작이 황제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철광석을 밀매했던 이유는…….

“실테르의 전선이 무너지면 그가 직접 마수를 막아야 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군.”

그는 실테르가 다른 나라들과 철광석 거래를 안정화시킬 때까지 지탱해 준 셈이다. 실제 그 시절 실테르 전선이 조금 위태로웠으니 아브람 백작으로서는 절박했으리라. 그 밀매에 대한 것을 황제에게 들켰기 때문에 부인이 죽었을 때 반발하지 않고 굽혔던 것이겠지.

황명으로 거래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법을 어기고 밀매를 한 건 중죄였으니까. 그 거래 품목이 하필이면 병장기와 관련된 철광석이었기에 정말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황제는 아브람 백작 부인의 목숨으로 백작에게 경고를 했고, 백작은 아내의 목숨을 죗값으로 지불했다. 가문 전체가 반역으로 엮이는 것은 막았으니 나름 주고받은 것이 분명한 거래였다.

하지만 황제의 손에 부인이 죽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 분노가 쌓여 갔을 터. 백작이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은 이유도 모두 설명된다. 이번에 백작이 실테르에 철광석을 제공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그 시절에 밀매를 했던 이유와 동일하리라.

그에게는 에렘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실테르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결국 실테르의 건재함을 지지함으로써 전선을 직접 부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이유를 명확하게 확인한 후 그를 향해 세웠던 의심을 거두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린 시녀는 라그나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들여보내렴.”

그는 이미 에스메랄다가 요구한 마도구들을 모두 개발했다. 전쟁에 대비해 내구도가 낮은 마도구를 추가 제작하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도제가 18명까지 늘어난 상황이라 제작 과정의 대부분은 그들이 담당한다. 도제들의 운용력으로 부족한 부분은 그가 직접 보완하고.

도제들의 가족이나 약점을 에스메랄다가 단단히 쥐고 있기에 아직은 정보의 유출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다. 그 외에 라그나가 하는 일이라면 그녀가 사용하는 마도구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정도다. 에스메랄다는 턱짓으로 모든 질문을 대신했다. 성과를 가지고 왔냐는 의미였다.

“거리를 늘여 봤는데… 수식 구조상 소음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가 않수.”

라그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져온 마도구를 에스메랄다 앞에 내려놓았다.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도청 마도구의 유효 거리를 늘여 달라고 했는데, 성과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나 보다.

“일단 1km까지 늘여 봤는데… 잡음이 심하게 끼어들어서 소리를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7, 800m 정도면 잡음 사이에서 대화를 잡아낼 정도는 되고.”

“그래도 늘어나긴 했군.”

기존의 것은 한계가 500m였으니 도청 거리가 늘어난 건 사실이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가 가져온 마도구를 집어 발동시켰다. 최대 거리를 지정하자 라그나의 말대로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가득 들려왔다.

그녀가 서랍 속에서 꺼내 든 건 확대경 마도구였다. 집무실의 창문을 통해 외부를 내다본 에스메랄다는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근무 교대를 하는 모양이다. 도청 마도구의 거리와 지정 위치를 조절하니 지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희미하게 말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 ……근무…….

─ 충……!

확대경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분명 걸음을 옮기고 있건만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잡음에 잡아먹혀 명확한 단어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대략 900m 거리…….

“여기서 추가로 개선이 가능하겠나?”

“아예 수식을 새로 짜면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는 못 해. 지금 수식에서는 한계 거리야.”

도청 마도구는 여러모로 쓸 곳이 많아 유용하다. 추가 개선이 불가능하다니 아쉬운 일이지만, 여기까지 개선한 것만 해도 성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 연구 결과물인데.”

에스메랄다는 라그나가 새로 내민 마도구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수식 연구가 없다 보니 라그나는 틈틈이 개인 연구를 하곤 했다. 물론 에스메랄다가 그것을 허가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사고의 확장이나 뜻하지 않은 소재를 발견하게 해 주기도 하니까. 라그나 나름의 휴식, 혹은 기분 전환이라고 보면 될 터. 그리고 그가 개인 연구를 하며 관심을 보이는 건…….

“마기만 해결하면 마수도 정신계 마법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마수였다. 정확히는 그들이 보유한 마기를 뚫고 들어가 정신적으로 마나의 영향을 받게 하는 방법. 원소 마법같이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마법은 마수에게도 통한다. 검으로 가죽을 베듯, 마법으로 만들어 낸 물리력은 그들을 태우고 찢어 낼 수 있다.

하지만 환상을 보게 하거나 수면을 유도하는 등, 정신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변환 마법은 마수에게 효과가 없다. 이 현상에 대한 가장 유력한 이론은 마수의 체내에 있는 마기가 마나의 움직임을 방해한다는 것. 라그나는 그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마나가 마수의 체내에 있는 마기를 억제하거나, 역으로 다시 한번 마나가 마기를 방해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 중이다.

라그나가 원래부터 마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사라진 시간에서 그는 무언가에 특별히 흥미를 보이거나 한 적이 없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라그나의 본심인지, 그의 미래가 변했기에 생긴 변화의 일부인지 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하고 싶다니 그러라고 허락을 해 주었을 뿐이다.

마수를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전투가 아닌 학살이 가능할 테니 유용한 건 맞다. 만약 연구에 성공하면 남부군이 그걸 이용해 더 안전한 전투를 할 수 있겠지. 진전이 되면 좋지만 당장 에스메랄다에게는 성과의 창출이 급하지 않은 분야였다.

그녀의 관심은 황제의 군대와 신전의 체제를 무너트려 그들을 몰락시키는 데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오는 파급 효과로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만큼 집착하고 있던 복수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다. 다른 곳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마수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것들이다.

“자네의 개인 연구는 자율적으로 진행하라고 했을 텐데?”

당장 필요한 마도구의 물품을 확보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라그나가 개인 연구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굳이 내게 보고를 할 필요는 없네. 재료는 얼마든지 써도 되지만 물품 확보에는 지장이 없도록 주의하고.”

포로 기사들에게 채울 마나 구속구, 함정에 이용할 원거리 발동 폭발 마도구, 그 외에도 확대경과 유용한 마도구들의 물량이 더 중요하다. 지금은 수량 확보에 집중할 시기, 라그나가 괜히 이 문제에 더 빠져들기 전 언질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단은 눈이 쌓인 광경을 본 적이 없겠군.”

“하?”

“이참에 눈이 쌓이는 지역으로 여행이라도 가겠나? 개인 연구는 거기서 지속하는 게 어떨까 싶네.”

“대뜸 뭔 말…….”

인상을 구긴 채 되묻던 라그나가 움찔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출발하도록 하게. 그날의 약속대로.”

라그나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가져온 마도구를 챙기며 꽤나 오래전의 대회를 되짚었다.

‘그날이 다가올 무렵에는 두 번째 신분으로 갈아타 세튀스로 넘어가게.’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는 놔주겠네. 그때가 되면 앞으로 자네를 보호할 이들이 국경을 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맹세하지.’

그 당시 라그나와 약속했던 때가 다가왔으니 보내 주어야지. 이미 그가 필요한 부분은 모두 채웠다.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 데 신경 쓰게. 기분 전환도 좋지만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지.”

기분 전환은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이다. 해야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순간 그건 태만이 된다. 에스메랄다는 할 말을 마친 후 손을 내저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잠시의 침묵 후 라그나가 몸을 돌렸다. 그가 집무실을 나서기 전 에스메랄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간 고생했네, 라그나.”

라그나에게서 돌아온 답은 없었다. 그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만이 집무실을 잠시간 울린 후 사라졌을 뿐이다.

그날 에스메랄다는 영지에서 발생한 재판 사건을 조금 더 훑어보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감시 보고를 확인했다. 벨베크 백작령과 솔루베르 공작령, 그리고 아브람 백작령과 남부군 전사자들의 유가족 주변에 분산되어 있는 케니스의 병력.

남부에 있는 케니스의 반군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꼬리가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현재 그들은 소수로 분산되어 있기에 자칫하다간 집결하기도 전에 각개 격파당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신경 써야 할 것에 한 번씩 더 손을 댄 후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집무실을 나섰을 때 세상은 이미 검은 먹물에 집어삼켜진 후였다. 침실로 돌아간 에스메랄다는 곧장 취침 준비를 시작했다.

내일을 위해 어떻게든 잠을 청해야 한다. 악몽으로도 모자라 밤마다 하는 멍청한 짓 때문에 푹 자지는 못하지만 억지로라도 자야지 몸이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페드로의 유서를 침대 옆 협탁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 둔 후 서랍 안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손목과 침대에 밧줄의 양쪽 끝을 묶는 동안 그녀의 숨소리가 잠시간 멈추었다. 밧줄을 단단히 동여맨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유서 옆에 있는 화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실 곳곳에는 아르페시스가 매년 보내오는 선물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금색의 라퓨나는 아직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년 늘어나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흘러갔다. 매달 아레스의 편으로 받으나 결코 내용을 확인해 본 적이 없는 수정 마도구가 쌓여 있는 창가 쪽으로.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수정 마도구를 보내오고 있고, 에스메랄다는 이전처럼 그것을 쌓아 두기만 했다. 무슨 표정으로, 어떤 심정으로 그 속의 내용을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가 페드로를 죽이고 싶어서 데려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페드로를 데려가는 것에 동의했기에 죽음이라는 결과가 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통제를 벗어난 채 자라난 원망의 가시는 아르페시스를 찌르기 바빴다.

죽음의 늪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에게 당장 달려가 안기고 싶은데 지독한 말을 쏟아 내 그를 할퀴고 싶기도 하다. 이 얽히고설킨 것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달려 마주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나아가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시간은 냉정하게 떠나 버린다.

* * *

「너에게는 네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20여 년에 가깝도록 줄 수 있는 사랑을 모두 주었기에 아쉬움도, 미련도 크지 않다. 그러니 남길 말도 많지 않다.

그저 형제로서 너를 사랑했고, 너의 탄생으로 나의 인생이 행복했으며, 먼저 떠나 미안하다는 것이 너에게 남길 말의 전부다. 다만 나의 죽음이 가져올 걱정거리 때문에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너의 곁을 떠나는 것처럼 우리와 아버지가 모두 천사의 곁을 떠났을 때, 홀로 남을 그 아이의 심정을 한 번만 생각해 주렴. 나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며 살던 모든 순간이 그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이기적인 오라비였기에 결국 방법을 바꾸지 못했다. 성급하게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그걸 배신함으로써 그 아이에게 더한 상처를 주었지.

천사를 아프게 했음에도 나는 지금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는 없으니 부디, 그 아이가 지금은 아프더라도 훗날에는 행복하길 빌어 볼 뿐이다.

네가 지금 영지에 머물고 있는 건 아마 나와 같은 맹세를 했기 때문일 테니 걱정이 앞선다. 네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 봐 그게 너무나 두렵다. 너의 삶은 너의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하니 강요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또 한 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천사는 우리의 맹세가 거짓이라는 걸 진리로 여길 터. 그러니 만약 네가 나와 같은 선택을 눈앞에 두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라는 못난 오라비로 인해 너의 선택에 더한 상처를 받게 될 천사를 딱 한 번만 더 생각하고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 이게 내가 너에게 남길 마지막 부탁이다.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부탁할 이가 너뿐이라 참 이기적이게도 짐을 떠넘기고 간다. 네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 누이를 더 위하는 것임에 또 한 번 미안하다. 이 우선순위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니 부디 너무 오래 섭섭해하지는 말아 주렴.

굳이 한마디를 더 남기자면, 천사와 그 녀석을 너무 오래 방해하지는 마라. 내게는 그 녀석도 너희처럼 소중한 동생이니 심술은 적당히 부리고. 너희가 서로 잘 지냈으면 한다.

이만하면 이별 인사로 충분하겠지. 신의 품에서 네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마.

사랑하는 형제야,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

그리 길지 않은 말을 남기고 떠난 형제는 때때로 기억 속에서 현실 위로 튀어나와 페르멘을 찾아왔다. 식사를 할 때, 훈련을 할 때, 걸음을 걸을 때, 그저 숨을 쉬는 당연한 행동을 할 때까지. 그 모든 순간을 함께했기에 페드로가 존재하지 않게 된 지금에도 그가 옆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개인 훈련을 마치고 땀을 닦다 보면 문득, 함께 대련했던 기억이 떠올라 주변을 돌아본다. 페드로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건만, 당장이라도 그가 나타날 것 같다.

곧 나타날 그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다 보면 페드로와 두 번 다시 같은 연무장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검을 맞대어 대련을 할 수 없고 그 상태에서 얄밉기 그지없던 미소를 짓는 것도 볼 수 없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문득 음식을 먹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이나 옆자리를 보게 된다. 그 자리에 페드로가 나타날 것만 같지만, 그가 거기에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페르멘의 형제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자리에, 그 공간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 다시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아찔한 상실감 속에서 형제를 그리워하며 참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형제의 부재가 아니었다. 페르멘은 자신을 깨우는 손길을 느끼며 잠기운을 떨쳐 냈다. 그러고는 서둘러 침의 위에 외투를 걸쳤다.

그를 깨운 집사를 따라나서면 침의 위에 위태롭게 외투를 걸친 에스메랄다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밤마다 이렇게 성내를 배회한다. 초점이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미어진다. 그녀가 멈춰 서는 곳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에 더더욱.

에스메랄다가 밤중에 정원으로 나가 바라보는 곳은 페드로를 비롯한 직계들의 개인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외에도 식당, 복도, 침실과 지하 보관소로 가는 길목까지. 모두 생전 페드로의 발길이 자주 닿았던 곳이다.

형제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멈춰 선 에스메랄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작았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차라리 예전처럼 울지. 눈물과 오열로 속에 담긴 상처를 모두 토로하지. 울고 난 후에 털어 내라고 몇 번이나 다그쳐 보았으나 그의 누이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저 작은 몸속에 상처와 감정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채 밖으로 꺼내 보이지 않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기도 하고 홀린 사람처럼 어딘가로 비척비척 걸어가기도 한다.

“리디, 밤공기가 차가워. 옷 제대로 입자.”

페르멘은 서둘러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다가가 시녀가 겨우 걸쳐 준 외투를 제대로 여며 주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침실을 나온 직후 시녀가 겉옷을 입히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몸은 페르멘의 손길이 아니면 순순히 따라 주지 않기에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결국 그 과정에서 에스메랄다가 다칠 것을 염려한 페르멘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엄히 단속을 해 둔 상태였다.

에스메랄다의 외투를 여며 준 후 손짓하자 시녀와 집사가 서둘러 물러났다. 눈물조차 쏟아 내지 않고 속에 담아 두기만 하는 누이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

「홀로 남을 그 아이의 심정을 한 번만 생각해 주렴.」

2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종종 꺼내어 보는 형제의 유서가 그의 심장에 새겨져 아린 마음을 더한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키기 위해 남기 전만 해도 그녀가 형제들의 부재에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누군가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너희가 직접 해라.’

어릴 때부터 부친의 가르침에 동의해 왔던 그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훗날 그의 목숨이 필요하다 해도 기꺼이 내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 배움에 동의했기에 그것은 그의 가치관이었고, 의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이 오기 전 에스메랄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주고자 했던 것이다.

훗날에도 부족함 대신 행복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을 쏟아부었다. 에스메랄다가 이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떠날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며 선택지조차 없이 뒤에 남아야만 했던 그녀의 심정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페르멘은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에스메랄다를 곧장 쫓아가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 미치겠네…….”

복잡한 마음에 마른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러 보지만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다.

“형…….”

언제나 지혜를 빌려주던 형제를 불러 도움을 청해 보지만, 더 이상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하지?”

페르멘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속에 상처를 담아 두기만 하다가 완전히 망가질까 봐 무섭다. 형제의 부재도 힘들고, 그의 부재에 나날이 망가져 가는 누이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어떻게 신뢰를 주어야 할지 모르겠고, 차라리 울고 풀어내라 달래 주고 싶어도 귀를 닫아 버린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과거 잔인했던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기에 이제라도 잘못했던 것을 바꾸고 싶건만, 누이는 그를 봐 주지 않는다.

벌써 몇 년째인지, 이제는 그만 믿어 주면 안 되겠냐고, 염치없는 원망이 때때로 날을 세운다. 억지로 잘라 내고 묻어 버려도 감정이란 죽지 않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페르멘은 밀려드는 감정의 무더기에서 몸을 떨었지만 이를 악물며 에스메랄다의 뒤를 쫓았다. 어둠밖에 없는 지하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에스메랄다의 몸을 꼭 안아 주어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다.

“리디, 이제 들어가자. 여기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지금은 우선 쉬고 내일 같이 형 보러 가자. 응?”

그녀를 달래 보고자 말을 꺼냈지만 페르멘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낮 시간의 에스메랄다는 그와 교류가 거의 없다. 집무실 내부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그 밖으로 나오는 것도 하루에 몇십 분이 전부이니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다. 고작해야 그녀가 집무실과 침실을 오갈 때 복도에서 기다렸다가 따라다니는 것이 전부다.

페르멘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제 눈물을 꾸역꾸역 닦으며 에스메랄다를 토닥여 주었다.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면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의 반복이다. 스스로가 부족한 오라비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페드로가 살아 있었으면 달랐을까? 그럼 그가 손도 쓰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을까?

전장에 있는 아레스와 백작에게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 문제가 전장에 서는 그들의 마음을 흐트러트려 놓았다가 그들이 페드로처럼 떠나게 될까 봐 본성의 사용인들을 단단히 단속했다.

황도에 있는 오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근 군수 물자에 손을 대려는 황태자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다. 걱정거리를 늘려 주고 싶지 않았다. 뭐, 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도 전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에스메랄다가 그의 사적인 연락을 모두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라 형제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것도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신년마다 영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것도 이미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은 겨울에 전선을 비울 수 없기에 영지로 오지 못하고, 오멘은 자의적으로 오지 않기를 택했다.

형제와 부친의 얼굴을 본 건 페드로의 장례식이 있던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떻게든 그의 선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무능하다.

페르멘은 페드로의 장례가 끝난 날 처음으로 보았던 테노리엘 백작의 눈물을 떠올리며 갈등했다. 백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계속 이렇게 숨기다가 에스메랄다가 완전히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고민을 해 봐도 매번 백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을 반려하고, 노력은 포기하게 된다. 황명으로 출정한 백작은 전선을 뒤로하고 올 수도 없거니와, 당장 달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괜한 심려만 끼친다면…….

그것 외에도 문제는 또 있다. 몇 년간 백작과 에스메랄다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직계인 그의 명령에 대기하던 세작들이 없어졌다. 이후 몇 번, 그가 얼굴을 아는 가문의 세작들이 에스메랄다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페르멘은 그걸 본 후에야 에스메랄다와 백작 사이에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주는 그의 부친이건만, 세작들이 에스메랄다를 위해 움직이는 상황에서 무얼 더 말할까.

징조는 있었다. 어느 날 영지의 사병들이 분주한 것을 보았다. 무언가 전해 들은 일이 없었기에 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병사들이 움직이던데?’

그때 집사는 몇 번 입을 벙긋거리더니 말했다.

‘아가씨께서 도련님께는 외부 소식에 대한 일체를 전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그때는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다. 에스메랄다가 왜 자신에게 정보를 제한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왜 사병들이 차출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집사를 재촉해 억지로 답을 들었다.

‘백작님께서 상단 호위에 사병을 차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사는 해임되었다. 3대 동안 테노리엘을 모셔 온 방계의 혈육이었기에 성에서 쫓아내는 등의 가혹한 처사가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집사의 아들에게 업무를 인계했기에 방계 가문에 대한 부당한 처분이나 봉신들 간의 세력에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집사의 해임이 아니라, 그녀가 본성 사용인 전원에게 내려 둔 명령이었다. 그에게 외부의 소식을 전하지 말라는 그 명령 말이다. 굳이 상황을 깊게 파헤쳐 보자면… 그녀는 페르멘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을 방해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가까우리라. 정보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형제들과의 연락이 제한된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고용한 사용인들에 대한 인사권은 영주권을 가진 에스메랄다에게 있지만 직계인 그가 명령을 내리면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페르멘은 사용인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문뿐이겠는가?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에게 반항적으로 보일 만한 대처와 행동을 모두 포기한 것이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반하는 모든 행동을 멀리하며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오로지 그녀의 신뢰를 다시 얻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페르멘은 자신의 눈과 귀가 차근차근 막혀 감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필시 두 사람의 싸움이 진행되었고 결과까지 나왔으리라. 상황이 이러한데 부친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리디…….”

간절함을 담아 사랑하는 누이를 불러 보지만 오늘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리디, 제발…….”

페르멘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진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라퓨나로 인해 은은한 금색 빛이 떠도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를 눕혀 주면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이 매일 쌓여 간다. 침대 기둥에 매어져 있는 밧줄을 풀어내는 동안, 페르멘은 꾸역꾸역 흐느꼈다.

* * *

“나단 님.”

“우음…….”

커튼이 걷어지며 쏟아진 햇빛이 눈꺼풀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나단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벌써 정오입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죠.”

하지만 새벽까지 구현 훈련을 하느라 늦게 잠들었단 말이야. 나단은 웅얼웅얼, 말이 되지 못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6년 가까이 그의 시중을 들어 온 레오는 달랐다.

“그러게 일찍 주무시라니까요. 훈련도 좋지만 규칙적인 생활은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지난겨울 마법사 시험에 합격해 테노리엘 백작가 소속의 전투 마법사가 된 나단은 밤낮이 조금 뒤바뀐 생활을 하는 중이다. 구현 훈련을 하다 보니 새벽 늦게 잠들어 정오가 훌쩍 넘어서야 일어나는 생활이 몸에 익어 버렸고, 매번 레오가 깨우러 와야지만 일어나곤 했다.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던 나단은 오늘도 흐느적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앉은 그의 앞에 레오가 세숫물을 가져왔다.

“자, 어서 세안을 하시고 식당으로 가시죠. 지금쯤이면 라그나 님께서 도착하셨을 겁니다.”

“응…….”

나단은 손가락에 물을 묻힌 후 눈곱을 떼기 위해 눈을 비볐다. 그런 그의 행동에 레오가 손을 뻗는 건 매일 있는 일이었다.

“눈만 씻으시면 안 되죠.”

나단의 고양이 세수를 보다 못한 레오가 직접 손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레오의 손길에 의해 나단의 얼굴이 이리저리 뭉개지기 시작했다. 나단이 버둥거리며 말했다.

“내 얼굴은 찰흙이 아니야!”

“네네, 아니고말고요.”

레오는 나단의 반항을 일축하며 그의 얼굴을 깨끗하게 씻어 냈다. 정말이지, 레오의 태도는 작위를 받기 전과 똑같았다. 변함없이 어린애 취급이라니!

마법사와 기사는 서임을 받는 순간 루가의 단승 작위를 받게 된다. 관직에 나가 지휘권을 가지게 되면 그 위의 울 작위를 받을 수도 있고. 나단 역시 마법사 시험에 붙어서 단승 루가 작위를 받은 귀족이건만, 몇 년 전 동물 놀이를 할 때부터 함께해 온 레오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단은 레오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풀려난 건 세수가 끝난 후였다.

나단은 세안과 환복을 마친 후에야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침실을 나섰다. 식당에 도착하니 레오의 말대로 라그나가 이미 자리해 있었다.

“일어났냐?”

“응, 아버지도 일어났네.”

“깬 지 다섯 시간은 넘었다, 인마.”

“늦잠 잤다고 또 잔소리하는 거야?”

“잔소리를 하면 듣긴 하고?”

나단은 라그나의 맞은편에 앉으며 툴툴거렸다.

‘아, 아버지…….’

3여 년 전쯤, 큰마음을 먹고 불러 보았다. 함께 만찬을 들다 말고 멈칫거린 라그나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었고. 괜한 짓을 했다고 스스로를 질타하고 있을 때 억눌린 목소리가 답을 대신했던 순간, 나단은 아직도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왜.’

무뚝뚝한 답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아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받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그 날은 나단의 일생 중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제 본성에 갔다 왔다며, 아가씨를 뵙고 온 거야?”

시녀가 가져온 수프를 한 술 떠먹은 나단이 곧장 질문을 던졌다. 레오에게 듣기로 그가 연무장에서 구현 훈련을 하는 동안 라그나는 본성에 방문했단다. 마법 연무장과 가까운 본성에서 매일 만찬을 먹는 나단과 달리 라그나는 본성에 가는 일이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다. 보나 마나 연구 성과를 보고하러 갔을 테니 당연히 에스메랄다도 만났을 것이다.

“뭐… 그렇지.”

“좀… 어떠셔?”

페드로의 장례식 이후 나단은 에스메랄다를 만나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정확하게는 대화를 하는 경우가 줄었다. 만나는 것만 따지면 새벽마다 며칠 걸러 한 번씩은 꼭 마주치니 그리 적지는 않고. 에스메랄다 쪽에서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정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어쩌다 한 번씩 승마장이나 정원에서, 달에 몇 번 만찬을 함께하는 정도.

‘당분간 아가씨 귀찮게 하지 마라. 가족이 죽은 거니 심란하실 거야.’

페드로의 장례 직후 라그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후 가끔가다 한 번씩 만나는 에스메랄다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그래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 미소, 아니, 그녀가 그간 자신에게 지어 준 모든 미소가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1년 전쯤이었다. 새벽녘의 그녀를 보았으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의 사람이 멀쩡하게 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글쎄…….”

나단의 질문에 라그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이나 갈래?”

“어?”

이렇게 대뜸? 나단은 닭고기 살을 발라내던 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메랄다에 대해 물었더니 왜 여행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여행이란 것을 가 본 적이 없어 흥미가 돋긴 했지만 굳이 어떻게든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가면 훈련도 못 하고, 공부도 못 하니까. 또… 에스메랄다 역시 보지 못할 테고. 물론 라그나가 가고 싶다면 따라갈 생각이긴 했다.

“어디로?”

“……북쪽.”

북쪽이면 세튀스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에렘 북부?

“언제? 얼마나 있다가 돌아올 건데? 오래 머물 거면 지금 하고 있는 훈련 좀 마무리하고 움직이면 안 될까? 구현 시간을 단축하는 중인데 성과가 좋단 말이야.”

“……생각해 보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라그나가 입을 다물었다. 나단은 먼저 얘기를 꺼내 놓고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 보이는 라그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저런 표정을 할 때는 대체로 ‘몰라도 돼’ 혹은 ‘관심 가지지 마’ 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평소의 라그나는 이것도 저것도 전부 오냐오냐 넘어가 주고 나단이 하고 싶은 대로 두는 편이다. 하지만 어떤 짓을 해도 답을 해 주지 않고 엄하게 선을 그을 때가 있다. 지금처럼. 숨기는 게 있는 건 분명하다고 해서 그걸 억지로 캐낼 수는 없는 일이다. 라그나가 원하지 않으니까.

“그럼 일정 정해지면 말해 줘. 그 전까지는 계속 훈련할 테니까.”

“……그래.”

마른세수를 한 라그나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나단은 제 몫의 음식을 깔끔히 비웠다.

“그럼 난 연무장 간다?”

“……다녀와라.”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 라그나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나단은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냥 곧장 연무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훈련을 하러 가곤 했으니 평소와 그리 다를 것도 없다.

별채의 정문 쪽으로 향하자 레오가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꽃 뭉치를 챙겨 온 상태였다. 대부분은 에스메랄다에게 주지도 못하고 다시 들고 오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나는 날에는 줄 수 있으니까. 이제 가문에 소속된 마법사라 정식으로 봉급도 받으니 이 정도는 쓸 수 있다.

라그나는 레오가 건네준 꽃을 상의의 가슴 주머니에 꽂은 후 외투를 걸쳤다.

“오늘도 만찬은 본성에서 드실 건가요?”

“응, 가까우니까. 주방장이 간식도 많이 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봐.”

장갑을 끼고 모자까지 눌러쓴 나단은 그대로 별채를 나섰다. 새벽에 돌아오면 그의 시중을 드는 건 야간 시종이니 레오는 내일 일어날 때는 되어야 다시 만날 것이다.

“일단 복습부터 하고, 전격 원소로 넘어가서 물리력 수치랑 증폭으로 확대 가능한 범위를 확인하고… 끝나면 구현 감속 훈련인데… 아으, 할 거 많다.”

오늘 해야 할 것을 정리해 보던 나단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별채의 정원을 지나 10분 정도 걸어가면 본성이 보인다. 거기서 다시 본성의 정원을 지나 후원 쪽으로 가면 연무장으로 통하는 길이 나오고.

나단은 웅장한 본성을 감싸고 있는 정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리디, 제발 나 좀 봐, 응?’

처음의 충격은 어느새 안쓰러움과 자괴감이 되어 있었고,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씁쓸해지고야 만다. 푸욱, 하고 내쉰 한숨은 10여 분간 정원을 배회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그녀는 오찬 이후 산책을 자주 했는데, 페드로가 죽은 후에는 아니었다.

나단은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발걸음을 다시 재촉해 연무장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과 마법사가 사용하는 연무장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훈련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마나를 응집시키는 마법 진이 새겨진 건 동일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연무장에는 방해물이나 표적, 그리고 방음 마법 진이 추가적으로 새겨져 있다. 원소 마법이 만들어 내는 물리적 충격과 그에 따른 폭음과 굉음을 막기 위해서였다.

해서 사방이 트여 있는 기사들의 연무장과 달리 마법사들의 연무장은 벽으로 막혀 있는 경우가 많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도 직계들의 전용 연무장은 마법사들의 것처럼 사방을 막아 놓지만.

나단은 자신의 전용 연무장을 내어 준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품에 넣어 온 꽃을 꺼냈다. 연무장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훈훈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과 수식을 이리저리 적어 둔 종이, 마법 서적, 훈련 일지 같은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꽃병에 꽃을 꽂아 둔 나단은 외투를 벗은 후 곧장 훈련 일지와 깃펜을 집어 들고 테이블을 등졌다.

“우선은 복습.”

지금까지 훈련해 온 화염과 물, 빛 계열의 원소 마법을 복습한 후에야 지금 한창 연습 중인 전격 원소를 훈련할 수 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지를 펼친 그가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내밀었다.

“모든 생명의 탄생과 함께하니 결국 근원과 다를 게 없다.”

나단의 손에 피어난 마나는 동그란 형태의 물로 변했고 점점 더 커다랗게 몸집을 불렸다.

“구성은 7초.”

나단은 그것을 확인한 후 일지의 페이지에 숫자를 채워 넣었다.

“그러니 생명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으리라.”

다시 한번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물 덩어리는 꿀렁거리며 밧줄처럼 길게 변했다.

“변환은 3초.”

연무장 곳곳을 누비고 있는 물줄기를 확인한 나단이 깃펜을 들어 일지 옆에 추가 시간을 적었다.

“줄었네.”

꾸준히 복습을 하고 있는 덕에 마나를 배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좋은 성과다. 나단은 물줄기를 다시 구의 형태로 되돌린 후 마나 배열을 바꿨다.

“그러니 생명이 존재하는 곳 어디든 채울 수 있으리라.”

한곳에 뭉쳐 있던 물이 안개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나단은 자욱한 안개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연무장을 둘러보며 다시 일지에 시간을 추가했다. 다시 한번, 안개로 퍼져 나갔던 물이 구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러니 생명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으리라.”

커다란 물이 쪼개지며 나단의 주먹만 한 크기의 물이 허공을 채웠다. 그것은 뾰족한 창이 되기도 하고 원판처럼 넓게 펴지기도 했다.

“여기서 빙결 배열을 더하면…….”

중얼중얼, 깃펜을 내려놓은 나단이 속삭이듯 말했다.

“과거는 미래 속에 담겨 있다.”

연무장을 채우고 있던 물이 모두 사라졌다. 마나로 만들어졌던 물이 다시 마나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 어엿한 마법사의 태가 나는 나단은 무릎이 저릴 때까지 미동 한번 없이 훈련을 계속했다.

대부분의 평민들이 아는 것과 달리 마법의 구현은 특별한 주문이나 의식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정확한 양의 마나를 정확한 자리에 정확한 순서로 배열하면 마법이 구현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마법사는 그 구현을 편하고 빠르게 하기 위해 주문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을 읊을 때 반사적으로 마나가 배열이 될 수 있게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이다. 대체로 좋아하는 문구나 단어, 노랫가락 같은 것들이 사용되고 일정한 규칙을 가진 채 단어의 종류나 순서가 바뀌는 편이었다.

나단 역시 그만의 주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 더 빠르고 정확한 마법을 구현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각자가 사용하는 주문이 다르기에 옆에서 다른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싫어하는 마법사도 많고. 그러한 점 때문에 마법사들이 단체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괴짜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단도 옆에서 다른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을 방해라고 여기기에 협업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다. 물론 운용력이 극에 달한 이들은 주문이 생략되어 버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라그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구성과 변환을 끝내 안개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나단은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의 장점은 친화력이지 운용력이 아니니까.

그날 저녁 식사를 위해 본성에 잠시 들렀지만 역시나 에스메랄다는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페르멘도 페드로의 장례식 이후 식당에 잘 내려오지 않게 되었기에 나단은 텅 빈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 되어서까지 줄곧.

“허공에서 내리꽂혀 눈앞의 적을 벌하리라.”

콰광, 거리는 굉음과 함께 연무장 곳곳에 낙뢰가 떨어졌다.

“지금 사용한 게 3푼이니까… 4할까지 마나를 늘리면 물리력은…….”

이후 이어진 건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마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굉음뿐이었다.

나단이 훈련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새벽이 깊어졌을 무렵이었다. 만약 지금이 여름이었다면 멀리서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늦은 시간.

나단은 꽃병에 꽂아 두었던 꽃과 외투를 챙겨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반가우나, 또한 반갑지 않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침의 위에 외투를 걸친 차림으로 정원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에스메랄다와 페르멘이었다.

“아…….”

나단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정원을 지나가야 연무장이 있는 장소가 나오니 에스메랄다가 이렇게 정원까지 나오는 날은 거의 매번 마주치곤 한다.

처음으로 새벽의 정원에서 에스메랄다를 발견했던 때, 나단은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주칠 때마다 아름답게 웃던 그녀의 미소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때때로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밤마다 이렇게 주변을 배회하는 에스메랄다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속에 저토록 아픈 상처를 두고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나단이 충격과 의문 사이에서 방황하면 페르멘은 무너진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고 돌아가 버리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그는 오늘도 그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서 있는 길목을 지나려는 듯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아마도 페드로가 사용하던 개인 연무장.

나단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던 중 평소와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혼자다. 그녀의 곁을 지키며 따라가야 할 페르멘은? 그의 시선이 페르멘을 찾아 움직였다. 이렇게 정원에서 마주치면 페르멘은 언제나 침묵을 강요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후 에스메랄다와 함께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나단의 시선이 조금 전 에스메랄다가 서 있던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페르멘에게 닿았다. 큼지막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페르멘으로부터 억눌린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형… 리디 좀 어떻게… 윽…….”

나단은 멀어지는 에스메랄다를 한 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페르멘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사이 페르멘의 몸이 애처롭게 떨리며 흐느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단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혼자 저렇게 걸어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결국 페르멘을 뒤로한 채 서둘러 에스메랄다를 쫓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페르멘의 흐느낌 소리가 너무 슬퍼서 그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아가씨……?”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본 건 처음이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단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에스메랄다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단은 생각했다. 죽음은 떠난 자보다 남은 자에게 무거운 짐이 아닐까, 하고. 만약 라그나가 죽는다면 남겨진 자신은 대체 어떤 심정일까? 나단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나단은 기억 속에 있는 페드로를 떠올려 보았다. 페르멘이나 오멘과 달리 사적인 교류가 거의 없기에 성격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저 외관만으로 판단하건대 무섭고, 강하고, 큰 사람. 페드로는 남겨질 에스메랄다가 이렇게 힘들어할 걸 알고 있었을까?

‘페드로 오라버니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그것을 알고서도 전장으로 가 버린 거라면 페드로는 잔인한 사람이다.

나단은 아름다운 가짜 미소 대신 아린 눈물과 함께 겁에 질려 있던 에스메랄다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울게 만든 페드로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나단은 에스메랄다가 언제나 웃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의 세상을 넓혀 준 스승이었으며, 처음으로 사람의 미소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비록 거짓으로 만들어진 미소라고 해도 그것이 아름답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라그나를 부친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에스메랄다의 격려와 배려 덕분이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준 존재가 라그나라면, 에스메랄다는 늦지 않게 그 사랑을 받는 법과 주는 법을 가르쳐 준 은인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있었기에 지금 하루하루를 웃으며 사는 그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보은을 하고 싶은 마음에 과거의 그는 에스메랄다가 조금이라도 더 웃기를 바라며 매번 꽃을 들고 찾아갔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그녀의 진짜 미소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그가 에스메랄다를 쫓아가는 건 혹시라도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였지, 스스로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아니다. 그가 따라간다고 해서 그녀가 웃게 되는 일은 없다.

페드로는 아마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았겠지? 이토록 짙은 사랑을 받았으면서 어떻게 먼저 떠나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대체 왜 그 위험한 전장으로 자청하여 갔을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안전한 이곳에서 계속 살면 되었을 텐데.

새벽마다 배회하는 에스메랄다를 보게 되면, 무언가 딱딱하고 무거운 것이 속을 짓누른다.

“하아…….”

나날이 말라 가는 에스메랄다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보낸 2년 동안 나단은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농담과 장난을 치며 어울리는 페르멘이 그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테노리엘의 직계다. 그들은 결코 쉽게 닿을 수 있는 친근한 이들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어울릴 수조차 없는 머나먼 곳의 사람들.

그럼에도 나단이 그들의 곁에 있는 건 에스메랄다가 특혜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본성 사용인들은 나단을 보면 살갑게 인사를 해 오고 그에게 마법을 가르쳤던 스승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나단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때때로 마주치는 테노리엘 소속 다른 마법사들은 시기 어린 질투를 보내면서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특혜가 싫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직계들에게 사적인 접근을 허락받은 그를 향해 시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볼 때면,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그렇다 하여 그 특혜가 나단 스스로 얻어 낸 것이 아니라는 걸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에스메랄다가 라그나를 아끼고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단은 자신이 지난 몇 년간 당연하게 누릴 수 있었던 특혜의 이유와 스스로의 위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아…….”

조금씩 날이 서고 있는 겨울의 찬 바람 사이를 나단의 한숨이 파고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훔쳐보는 사이 느릿한 걸음으로 비척비척 움직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허공으로 뻗어진 그녀의 손은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 안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차가운 공기뿐이겠지.

허공을 가로질렀던 에스메랄다의 손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10분, 20분……. 시간이 지나도 에스메랄다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 남았던 페르멘도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고.

나단은 복잡한 심정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 위에 파란 마나가 피어났다.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시작되니.”

방금 읊은 것은 화염 속성의 원소 마법에 사용하는 기초 문장이었다. 여기서 추가 문구를 읊으며 배열을 늘리면 화염 덩어리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때로는 대지를 불로 온통 뒤덮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한 건 기본적인 불씨를 만들어 내는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손바닥 위에 붉은 불꽃이 피어났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꽃은 점차 개수를 늘려 갔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수십 개까지 늘어난 불꽃이 에스메랄다의 주변을 배회하며 열기를 뽐내었다.

불러도 답이 없고, 페르멘이 억지로 데려가려 했을 때 그녀가 발작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기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가운 공기가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 정도다. 나단은 자신의 마법에 들러붙기 시작한 자연적인 마나를 확인한 후 에스메랄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면… 따듯하시려나?”

보통의 경우에는 이렇게 마법을 구현했을 때 배열한 마나가 모두 소모되면 마법적 성질이 사라진다. 장작 같은 연소물이 없으면 사라지고 물이나 모래를 끼얹어 끌 수 있는 평범한 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단이 구현하는 마법의 경우 허공에 존재하는 마나가 달라붙어 빈자리를 채우기에 배열을 깨 버리지 않는 한 마법의 성질이 두어 시간 정도는 지속된다.

연소물의 역할을 마나가 대신하기에 허공에 둥둥 뜬 채로도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의 마법이 이런 특성을 보이는 이유는 마나 친화력 때문이다. 마법사 시험에서 나단의 마나 친화력에 내려진 평가 등급은 9단계 중 가장 위에 있는 극상. 에렘의 4백 년 역사 속에서도 200여 명에게만 허락된 등급이었다.

운용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메우고도 남을 만한 재능으로, 시험 직후 황실 마법사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정도다. 이미 고용 계약을 조건으로 후원받은 가문이 있다는 말로 거절했지만.

그의 심장에 마법 진이 새겨진 것은 1433년 바의 달. 지금은 38년 카의 달이니 고작 5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몇십 년간 심장에 마법 진을 새긴 이들보다 월등한 양의 마나를 심장에 품고 있다.

마법을 연습함에 있어 마나의 부족을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고, 사용한 마나가 회복되는 속도도 타인보다 몇 배는 빠르다. 또한, 지금처럼 이미 구현한 마법에 증폭 배열을 넣어 규모를 확대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가지 못할 곳은 없으니.”

그가 만들어 낸 불꽃은 에스메랄다가 움직일 방향으로 뻗어 나가며 차가운 공기를 데우기 시작했다. 온기가 허공을 가득 채웠을 무렵이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움찔거렸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나단은 그것을 보았다.

몇 번의 관찰로 알아낸 바에 의하면 지금 상태의 에스메랄다는 외부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전 그건… 나단이 정신을 차리고 에스메랄다를 불러 보려던 그 찰나의 순간,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아가씨!”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단이 서둘러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나단은 에스메랄다를 따라가면서도 뒤에 남은 불꽃의 마나 배열을 하나씩, 하나씩 깨트렸다. 잘못하다간 화재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은 과거에 별채를 태워 먹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페드로가 생전에 사용했던 개인 연무장까지 도착한 에스메랄다가 무언가에 안겨 들 듯 두 팔을 뻗고 몸을 던졌으니까.

“어어!”

깜짝 놀란 나단이 앞으로 넘어지려는 에스메랄다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무장에 앉아 마나만 다루는 마법사였다. 붙잡은 이가 평균적인 체중보다 가벼운 사람이라 해도 안정적으로 받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작령에 온 이후 그가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이 3백 장짜리 책인데 어련할까.

결과적으로 나단은 완전히 앞으로 기우는 에스메랄다의 체중을 버티지 못해 함께 넘어졌다. 그녀를 대신해서 바닥을 마주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심장은 벌렁거리느라 바빴고 땅바닥과 마주한 엉덩이는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으… 아파…….”

나단은 통증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리느라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에스메랄다의 행동을 조금 늦게 인지했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에스메랄다의 팔이 둘린 상태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건 금방이었다.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몸은 너무 여렸고, 끊임없이 떨리는 몸은 애처롭기만 했다. 나단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여린 몸에서 나온다고 믿기 힘들 만큼 강한 아귀힘이 그를 붙들고 있었으니까. 에스메랄다의 절박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오라버니…….”

과거의 흔적을 쫓아다닐 만큼 페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 에스메랄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잘못, 했어요.”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숨소리와 구분되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나단은 그녀와 바짝 붙다 못해 그녀가 내쉬는 숨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페드로에게 고하는 잘못은 대체 무엇일까?

나단은 에스메랄다와 페드로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녀가 왜 그리움이 아닌 잘못을 고하는지 몰랐다.

“어…….”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무지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있었다. 백작령에 처음 도착한 날 정찬을 함께하며 보았기에 의심 한 자락 없이 확신할 수 있는 것. 그건 그들이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나단이 라그나를 사랑하고, 라그나가 나단을 사랑하는 것처럼.

“페드로 도련님은…….”

만약 나단 스스로가 먼저 떠나게 되었을 때, 라그나가 지금의 에스메랄다처럼 잘못을 고한다면…….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그는 손을 뻗어 에스메랄다의 마른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그리워하시고 또 사랑하고 계시니까, 그분은 다 용서하시고 또, 어… 아, 그래, 또 엄청 행복하셨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요.”

타인을 위로해 본 적이 없는 나단의 어설픔 위로 에스메랄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괜한 말을 한 걸까? 자세한 내막은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나선 건 아닐까? 나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스메랄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실에는 새벽의 어스름이 가득했다. 멀리서 동이 터 오고 있는 모양이다. 페드로가 죽은 이후부터 화마와 환청이 찾아오는 악몽이 끝나면 그녀의 세상은 안개에 뒤덮이곤 했다. 시야로 보이는 것은 흐릿하고 몸의 감각은 무뎌진다.

당시에는 의식이 수면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몽롱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깨어난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는 정도였다. 과거에는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자 발버둥 쳤지만 이번 해가 시작된 무렵부터는 거의 포기해 버렸다.

그 결과 에스메랄다는 새벽마다 손목에 묶어 둔 밧줄을 풀어내기 위해 끙끙거리고야 만다. 처음에는 줄곧 실패만 하더니, 언젠가부터는 기어이 성공을 거머쥐고 밖으로 나돌아다닌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왼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자력으로 풀지 못하게 꽁꽁 매어 놓았더니, 손목이 밧줄에 쓸려 상처가 생겨나는 나날이 매번 반복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붉게 쓸린 상처 앞에서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가 안개 속에 갇혔을 무렵에 대해 기억하는 건 단편적이었다. 그림으로 그려 둔 것처럼, 찰나의 광경과 소리들이 끊어져 남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기억을 되짚는 순간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이 연속성을 가지고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창궐한 화마 속에서 또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낸 환청에 이어 아르페시스가 나타났다. 그는 울고 있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선 그가 우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지금의 시간 위에선 너무 자주 봐서 그런가?

그가 울고 있는 환상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그것이 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울고 있었다.

버거운 선택의 기로에서 원하지 않았음에도 떠안아야 했던 짐을 짊어진 사람.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고해 본 사람이자 형제의 죽음에 일조한 사람.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건만, 그를 향한 원망도 진심이다.

말없이 우는 아르페시스와 대치를 하는 것처럼 오래도록 서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찰나의 마주함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사라지고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드로였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음과 동시에 에스메랄다에게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락, 하고 표정이 구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안개 속에서 언제나 뒷모습을 보이며 도망가던 그가 에스메랄다를 직시하며 말했다.

‘네 단절이 녀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인지해 두렴.’

지금 아르페시스는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을 터. 여기서 홀로 번뇌하는 것보다 그에게 달려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또 한 번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밀려드는 선택지는 모두 지독하게 잔인한 것들이라, 무엇을 골라도 힘들기만 하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자괴감과 원망에 허덕여야만 했다. 기억에 남은 페드로가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어째서였을까?

‘계속 거기 서 있을 거니?’

언제나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고 사라지기만 했었는데 오늘의 그는 말을 걸어왔다. 왜?

‘또 후회할 텐데?’

페드로가 한 말은 그녀를 몰아붙이는 경고였고, 다독이는 조언이었다. 에스메랄다의 의식은 그를 무시하고자 했으나 몸은 순응했다. 페드로에게 달려가 안겨 들었을 때 분명 온기가 밀려왔었다.

‘오라버니…….’

그 순간 페드로가 돌아왔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니 2년에 가깝도록 부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던 그 말을 꺼낸 거겠지.

‘잘못, 했어요.’

온기가 그동안 가슴속에 가두어 두었던 것들을 꺼내 버렸고, 억누를 틈도 없이 빠져나온 감정이 기어코 말이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목소리 뒤로 따라붙는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페드로 도련님은…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왜 여기서 나단의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언제부터 있었지?

화마 이전의 기억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그마저도 페드로의 뒷모습을 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갑자기 왜 나단이 나타난 것인지…….

에스메랄다는 기억 속에 남은 어설픈 위로를 떠올리며 협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떠오른 해가 금색의 라퓨나를 환하게 비추었다. 꽃병 앞에 놓인 꼬질꼬질한 유서도 함께.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알고 있다. 페드로는 죽는 순간 본인을 위해 원망과 저주를 쏟아 내고 갈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남겨진 이를 위해 사랑과 위로를 건네고 갈 사람이다. 사라진 시간에서 떠났던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의 시간에서 떠난 그도 똑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 유서 속에 들어 있는 말이 너무나도 무섭다. 저것을 읽어 버리면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저 속에 담긴 깊고 올곧은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결국 또다시 그에게 패배하고야 말 것이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도, 그녀의 아집과 싸워 이기는 건 항상 페드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것을 부정하는 데 실패하면 결국 남는 건 인정뿐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선 안 되기에 페드로와의 줄다리기에서 져서도 안 된다.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지금 여기서 후회하면 그녀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져선 안 된다.

에스메랄다는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페드로의 유서를 집어 든 채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았다. 열지 않으리라, 보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인정하지 않으리라,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시야 밖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다정한 음성이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굳은살로 인해 딱딱해진 손이 그녀를 이끌어 봉투를 천천히 뜯어 주었다. 크고 딱딱한 손은 봉투 속에 가두어져 있던 것을 그녀의 손에 쥐여 준 후에야 역할을 다 했다는 듯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빛바랜 봉투가 열리고 그 속에 담긴 말이 에스메랄다에게 찾아왔다.

「너는 내 덕에 쿠베트 영애를 만났노라 말했었지. 나 또한 네 덕에 평생 연이 없을 줄 알았던 녀석을 만났다. 그 작은 인연은 나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너만큼이나 귀해진 녀석을 위해 바칠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다.

분명 후회는 없으나 걱정은 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를 남기자면, 이런 선택이 필요했던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태어난 시대가 조금 잔인했기에 벌어진 참사일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탓하지 말고 흘려보내도록 해라. 너를 위해서, 녀석을 위해서 부디 그렇게 해 주렴.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으니 나를 너무 오래도록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이렇게 간청하마.

또한 앞서 했던 말과 같은 이치로 나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조심스러운 망설임을 담아 한마디를 더 남긴다. 혹시라도 너 스스로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여긴다면, 내가 모두 용서할 테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나 역시 혈육이라는 면죄부로 많은 죄를 사해받았으니 너도 조금은 비겁해져 보렴. 그게 너를 비롯한 모두를 위한 일이니 스스로를 용서해 주어라. 이 순간이 오면 네게 할 말이 참 많을 줄 알았는데… 머무는 시간 동안 전부 전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많지 않구나. 덕분에 미련이 적은 것이 다행이다.

떠나는 자가 남기는 이별 인사가 길어서 좋을 건 없겠지. 사랑하는 누이야, 나의 천사야. 너로 인해 벅찰 만큼 행복한 삶을 누렸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부디 언젠가는 나의 위선이 너의 행복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먼저 떠나마.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주렴.」

이래서 열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도 못되게 굴었음에도 죽음을 가정하던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내리쬐었던 사랑을 마주하고 나면,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발버둥을 쳐 가며 열심히 부정했던 과오를 인정할 때가 왔다. 차오른 직후 떨어진 물방울이 빛바랜 종이를 적셨다. 페드로가 떠나던 순간에는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뒤늦은 이제야 흐른다.

‘잘못, 했어요.’

모친의 연주실에 함께 찾아갔던 그때, 내륙으로 돌아온 그가 울기만 하던 그녀의 곁을 지켜 준 그때 했어야 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집 때문에, 아집 때문에, 원망 때문에 하지 못한 그 말은 앞으로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정말 끔찍한 것은 사과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스스로 죄를 고할 기회를 놓쳐 버렸음에도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떠났는데 그녀에게 쏟아진 커다란 사랑은 이미 그녀의 죄를 용서했다.

페드로 역시도 사람이다. 그녀의 모진 태도와 말에 상처 한번 받지 않았을까?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건만, 그럼에도 그는 에스메랄다를 원망하기보다 용서하길 택했다.

이렇게 곧고 짙은 사랑이 눈앞에 있었는데 제대로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면하느라 그가 준 사랑에 답례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의 현실을 자초한 것이 그녀이기에 너무나도 끔찍하다.

페드로의 유서를 열기 위해 도와주었던 페르멘이 건넨 침묵의 토닥임에 에스메랄다가 기어코 흐느낌을 토해 냈다. 이토록 짙은 사랑을 코앞에 두고도 화가 나서, 그녀를 두고 떠난 가족들이 미워서 분풀이를 했다. 그 어리석은 선택은 기적적으로 다시 찾아온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지독한 후회와 죄책감에 짓눌린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감싸 안은 페르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사랑한다고…….”

페르멘은 그저 다정한 토닥임으로 그녀의 고해를 들어 주었다.

“감사하다고…….”

그 흔한 말 한번 해 주지 못하고 보냈다. 화가 났다는 이유로 잔인한 말을 휘두르며 할퀴기 바빴다. 이미 떠나 버린 페드로에게 웃어 주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품고 갔을 기억이 행복한 미소가 아니라 끔찍한 악귀의 표정일까 봐, 그게 너무나 죄스러웠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후회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버둥거렸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결국 어리석은 후회를 한다. 사랑을 주고받은 후 떠나보냈을 때보다, 그러지 못한 후에 떠나보낸 것이 더 아프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스스로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 보지만 그녀는 이미 수많은 기회를 놓쳐 버린 후였다. 그녀가 페드로의 유서를 읽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유다. 선택을 후회하고 잘못을 인정해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이토록 지독한 후회를 남긴 건 그녀가 스스로 행했던 선택이다. 누구도 그녀의 등을 떠민 적이 없다.

* * *

울다 지쳐 쓰러지고, 깨어나 다시 울기를 반복하는 동안 하루가 끝나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바짝 메마른 숨을 몰아쉬었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 사이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많이 운 탓인지 두통이 일었고 눈은 따끔거렸으며 격한 감정을 감당하느라 지친 몸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난 그녀가 향한 곳은 수정 마도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창가였다. 뻑뻑한 눈을 애써 부릅뜨며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수정 마도구가 도착한 순서대로 정리를 해 두었기에 꺼내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첫 번째 수정 마도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사경을 헤매던 당시 무리하게 신력 치료를 진행했으니 체중이 줄어든 건 당연하겠지.

역시나, 그는 울고 있었다. 그저 수정 마도구를 응시하며 텅 빈 얼굴로 울기만 했다. 다음도,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아르페시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는 것을 반복했다.

다섯 번째 수정 마도구를 발동시킨 후에야 곧 꺼져 버릴 듯이 위태로운 불꽃처럼 희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대의 오라비를 잡아먹고 살아난 괴물이다.』

기록이 꺼지고 수정에는 아르페시스 대신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비쳤다. 페드로가 죽은 해의 겨울에 온 수정 마도구는 그게 끝이었다.

그 짧은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의 죽음을 자신의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정답은 아니었다. 페드로의 죽음은 그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아르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건 페드로였으니까.

하지만 오답 역시 아니다. 아르페시스가 페드로를 데려가는 데 동의했기 때문에 페드로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

에스메랄다는 다음 해 바의 달에 도착한 것을 꺼내 보았다. 그해 봄에 온 건 하나뿐이다. 그 속에는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는지 이전보다 조금은 나아진 모습의 아르페시스가 보였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얼마나 염치없는 것인지 안다. 그럼에도 감히, 그대에게 용서를 구해 본다.』

억눌린 목소리와 태도, 말투, 표정까지. 모든 면에서 그의 심리에 변화가 생긴 게 보였다.

『페드로는 내게 살기 위해서면 본인을 이용하는 짓도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대 또한 내게 살아남는 선택을 해 달라고 했지. 그러니 난 그 면죄부에 매달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끔찍한 죄악을 짊어진다 해도 살아 있어야지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눈물 때문에 계속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아르페시스를 지켜보았다.

『또 무엇을 잡아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무섭다. 그럼에도 언젠가 과거의 그때처럼, 그대가 내 품으로 돌아올 그 날을 위해 살아남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강렬한 의지를 담았다. 눈물은 여전히 그녀의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기 바빴다.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과 함께 기록이 끝났다. 에스메랄다는 차분한 손길로 이후에 도착한 것들을 모두 확인했다.

후에 도착한 수정 마도구에 기록된 것은 모두 ‘기다리고 있겠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에스메랄다는 탄식과 닮은 한숨을 토해 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녀가 한숨을 거둔 직후였다.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곧 조심스럽게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페르멘과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의 침묵 후 흐린 미소와 함께 페르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깨어났구나.”

에스메랄다는 그런 제 오라비를 빤히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혈육이라는 면죄부로 그간의 죄를 용서받는 게 얼마나 염치가 없는 것인지,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염치가 없다 하여 침묵하며 후회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난 그 면죄부에 매달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수정 마도구를 계속 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지. 염치가 없다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 역시 없으니까.

‘그게 너를 비롯한 모두를 위한 일이니 스스로를 용서해 주어라.’

페드로가 남긴 말은 조언과 충고가 되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겨우 용기를 내어 페르멘에게 손을 뻗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손을 뻗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어 본다. 페르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왈칵하고 터져 나온 눈물은 또다시 후회 때문이었다.

그녀도 아르페시스에게 이렇게 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가족을 밀어내기 바빠 사랑에 보답하지 않은 건 그녀 본인이면서, 아르페시스가 가족을 빼앗아 갔기에 사랑을 줄 수 없었노라 탓하고 싶었던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옆에 무릎을 꿇은 페르멘의 품을 파고들며 속삭였다.

“잘못, 했어요…….”

페르멘은 쓰게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아 주었다.

“잘못했어요. 나쁜 말을 한 것도, 오라버니께 못되게 굴었던 것도, 제가 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의 뒤를 꽉 잠겨 버린 목소리가 따라왔다.

“나도, 나도 미안해. 잘못했어. 널 두고 떠날 생각만 해서, 그게 네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해서, 미안해.”

페르멘은 그녀처럼 울며 사과를 받아 주었고, 또한 사과해 주었다. 그날 에스메랄다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며 속에 담긴 것을 눈물로, 울음으로 토해 냈다. 그녀가 아르페시스에게 해 주지 못한 용서를 페드로와 페르멘에게서 받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구슬프게 울어 본들 원망으로 갉아먹은 시간을 되찾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 * *

에스메랄다의 앙상한 손이 새하얀 비석을 쓸어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페드로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페드로의 무덤을 찾은 건 그의 장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또 한 번 후회가 되어 가슴에 남았지만 털어 내야만 했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담고 울 때가 아니라 희미하게라도 기회가 남은 후회를 붙잡고 노력할 때니까.

‘그게 너를 비롯한 모두를 위한 일이니 스스로를 용서해 주어라.’

페드로가 그녀에게 허락한 면죄부에 매달려 어떻게든 스스로를 용서해야만 한다. 잘되지는 않는다지만,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조금 더 빨리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빨리 인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조금만 더 빨리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강건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부… 전부 죄송해요…….”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치를 불고하고 이렇게 찾아와 죄를 고해 본다.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이 겨울에 들어서며 차가워진 바람과 함께 그녀의 뺨을 얼려 가고 있었다.

깊은 한숨은 그녀가 지금부터 걸어가야 할 길이 험난하기 때문이었다. 페드로에겐 속죄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용서받았다. 이 짐은 평생 마음에 짊어지고 가야 할 테지. 당장 그녀의 곁에 있는 페르멘도 괜찮다며 그녀를 토닥여 주었지만… 그에게 했었던 모진 말들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평생을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레스에게 암살자를 보냈던 순간은 물론, 오멘에게 모진 말을 쏟아 낸 후 그가 영지를 떠날 때까지 외면으로 일관했던 시기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테노리엘 백작.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부친을 떠올릴 때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그간 백작의 손발을 잘라 내기 위해 가했던 협박과 위협은 절대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하아…….”

과거의 순간에 백작의 방해를 아예 차단해 버리기 위해 너무 열심히 했다. 정말 틈 하나 주지 않고 너무 열심히.

현재 백작이 내륙의 문제에 관여하지 못한 채 남부 전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데는 많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백작 본인의 신념. 굳이 말로 표현해 보자면 두 가지로 추릴 수 있으리라.

백작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하겠다는 의지와 에렘의 신하는 무고한 백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반황실 세력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백작이 황제의 출정 명령에 두말하지 않고 응하는 건 그 명령으로 인해 지킬 수 있는 무고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을 제외한 채 다시 이유를 찾아보면, 현재 그의 저력이 7할 가까이 깎여 나갔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백작에게 그 피해를 입힌 건 당연히 에스메랄다였다. 가장 먼저 서부 대란이 발발했던 이듬해, 뒷골목 인사들에게 접근했던 테노리엘 가문의 세작들이 공격당했다. 당시의 피해를 규모로 추정하면 가문에서 보유한 세작의 2할 정도는 깎여 나갔다고 봐야 한다.

그에 백작은 각지에 풀었던 세작들을 철수시켰으나,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하늘 용병단과 전직 중앙군 출신의 기사들을 동원해 각지의 세작들이 사용하는 집결지를 습격했다.

이후에는 테노리엘이 세작을 양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소유한 근거지를 공격함으로써 줄어든 인원이 충원되는 것을 막았다. 백작의 사후에 가문의 모든 전권을 이어받았던 그녀는 위치, 규모, 무장 수준까지 모두 알고 있었기에 손쉽게 성공했다. 그렇게 황도나 황실파 귀족들의 영지에 있는 세작 외에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다.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세작의 수가 줄어드니 백작이 반군을 수색하거나 접선하는 등, 손을 댈 방법이 막힌 셈이다. 그 틈을 타 에스메랄다는 케니스와의 접점을 계속 쌓아 갔었고 그 후 어설프게나마 아레스를 암살하려고 했기에 백작이 잠시 주춤했었다. 아레스가 출정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백작은 그녀의 행보에 집중했다. 어떤 방식으로 다음 공격이 들어올지 재어 보며 경계한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백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무력과 정보 측을 넘어 재력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한마디로 백작이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을 축소하기 위한 작업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상단의 운송 경로를 알고 있으니 미리 원거리 발동 마도구를 심어 두고 터트리거나 상품을 보관하는 창고에 불을 내기도 했다. 이 역시 운송 일자나 위약금 규모, 그리고 상단 내에서 운용하는 경비의 순찰 시기 같은 내부 정보를 알고 있었던 덕에 수월했다.

이러한 공격으로 상품을 망가트리자 계약된 인도 기일을 맞추지 못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위약금 등의 상단 부채가 늘어나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이후 뷔비르가 운영하는 광석 상단이 접근해 채무를 대신 탕감하는 조건으로 상단주를 바꿔 앉혔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건 또 뭐람…….”

백작은 그 접근 세력이 에스메랄다의 것임을 알아차렸기에 동의한 것이다. 바꿔 앉힌 상단주가 이전 상단주와 사이가 좋지 않던 둘째 아들이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것이다. 그들 일가는 테노리엘의 방계니까.

당시 발생한 위약금 부채가 서커스단의 위약금 정도의 푼돈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지 수입의 반절 정도는 되었으니 에스메랄다가 부채를 대신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파산하거나, 기회를 노리던 황제파 세력에게 빼앗겼겠지.

백작은 힘을 완전히 잃느니 어떻게든 보존하길 택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테노리엘이니 훗날 되찾아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채를 메꾸기 위한 신규 투자금이 인도되었다.

물론, 투자자의 지시에 불복할 경우 투자금과 그로 인해 창출된 이익의 전액을 회수한다는 악질 조항을 조건으로 해서. 황제가 서부 대란 이후 테노리엘에게 측정한 면세를 박하게 책정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이다.

당시 테노리엘은 영지민 지원금으로 사비의 상당 규모가 영지에 붙들려 있었다. 서부 대란 이후 백작령은 3년 정도 세수가 들어와도 다시 지원금으로 빠져나가야만 했는데, 에스메랄다가 백작의 상권을 공격한 것이다.

거기에 자원병과 영지 사병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과 남부군에게 매달 보내는 후원 물자 마련에 필요한 자금까지. 가문의 사비가 영지에 대부분 묶여 버린 상태였기에 에스메랄다의 승리가 가능했다.

케니스는 그 사건을 두고 반군을 지원하는 데 테노리엘이 무리를 해서 자금이 부족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후에 상단 일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다며 걱정을 표하곤 했으니까. 상단주의 관계나 영지의 내부 사정을 모르니 그럴 만도 하지.

이런 과정을 거쳐 차근차근, 상단의 모든 행보에 가주인 백작이 아니라 에스메랄다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형태로 변했다. 계약 체결, 수익 배분, 재투자 규모까지 전부. 겉으로 보기엔 테노리엘이 상권을 잃은 것이기에 중앙 사교계에서 말이 참 많았던 사건이다.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이것이 테노리엘 내부의 알력 다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상단은 여전히 테노리엘의 영지민과 일하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하겠지. 결과만 놓고 보자면 에스메랄다 역시 테노리엘의 일원이기에 왼쪽 주머니의 돈이 오른쪽 주머니로 옮겨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부의 실질을 조금 따져 보면, 에스메랄다는 백작이 상단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상단의 주인은 여전히 테노리엘이지만, 백작의 것에서 에스메랄다의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의 차이가 있었다.

상단 공격이 시작된 직후 테노리엘 백작이 사병을 동원해 상단 운송 행렬을 호위하고자 한 적은 있다. 아쉽게도 에스메랄다는 사람을 보내 물건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훼손시킨 것이다 보니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대처였다. 그 일로 백작이 다시 한번 주춤했다. 물론 포기는 하지 않았기에 또 한 번의 마찰이 있었고.

에스메랄다는 지난해 중앙 사교계에서 오멘과 페르멘, 페드로를 두고 쑥덕거렸던 소문을 떠올리며 막막한 한숨을 뱉어 냈다. 에스메랄다는 과거 테노리엘 백작에게 했던 협박을 기어코 실현해 냈다. 이미 작고한 모친의 부정 말이다.

“죄악에 죄악을 쌓아 왔구나…….”

그저 어디선가 그렇다더라, 하는 더러운 소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소문을 흘려 낸 게 바로 에스메랄다였다. 정확히는 그녀의 로부오들이 황제파에 속한 하위 귀족들에게 속살거린 것이다.

백작의 패색이 짙어진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남은 권한을 모두 양도하지 않으면 위조된 합방 기록을 밖으로 내보내 형제들의 이름을 가문에서 지워 버리겠노라 위협했다.

백작은 소문을 정식으로 부정하고, 위조되지 않은 원본을 통해 부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패배를 선언했다. 분명, 그는 분명 자식의 곁을 지키는 것보다 본인에게 주어진 의무를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의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작고한 백작 부인이다.

에스메랄다와 형제들의 모친은 백작이 사랑한 여인이고, 유일한 배필이니까. 그가 신념 위에서 허락한 예외는 부인뿐이다. 에스메랄다가 구역질과 죄책감을 참아 가며 모친의 명예에 손을 대었을 때부터 백작의 패배가 확정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테노리엘 백작이 가진 것은 작위뿐이다. 그 어디에도 권한은 없다.

영주권은 원래부터 그녀가 빼앗아 둔 상태였고 이후 세작과 상단은 물론, 사병을 움직일 수 있는 가주의 인장까지 에스메랄다의 손에 있다. 작위는 백작에게 있지만 테노리엘의 실질적인 지배는 에스메랄다가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이 마무리된 후에 에스메랄다는 거래한 대로 근거 없는 소문을 쑥덕거린 귀족 일부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위조되지 않은 가문의 사기록을 재판소에 제출해 악의적인 소문을 떠들고 다닌 황제파 귀족들 일부에게 명예 훼손의 죄를 씌우고 벌금을 먹였지. 그 소문의 출처인 로부오들은 진즉에 타 지역으로 몸을 숨겼으니 결국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게 에스메랄다의 손 위에서 놀아난 사건이었다.

“하…….”

정말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행보였다. 에스메랄다가 백작의 손발을 자르고 그의 발걸음까지 묶어 버린 게 바로 지난해 겨울이었다. 아르텐 공작령과 맞닿은 남서쪽 전선이 다시 한번 뚫렸던 때.

이후 해가 바뀌자마자 백작에게 출정 명령이 내려졌다. 내륙에서 내전을 막거나 에스메랄다를 방해할 수단을 모두 잃은 백작은 출정 후 남부 전선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자신의 의무를 짊어지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막혀 버렸으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현재 백작은 황제가 쥐여 준 중앙군 1만 외에는 힘이랄 것이 없으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후 손에 쥔 무력이 경멸해 마지않는 황제로부터 나온 것이라니. 이런 일들이 있었으니 에스메랄다가 백작을 생각할 때마다 아찔한 것이다. 대체 이 죄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일을 벌여 두었으니까.

당시엔 이유가 있기에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과거의 자신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본인의 철두철미함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무섭고 힘들다 해서 여기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지금 아레스와 백작은 남부 전선에 있다. 페드로처럼 언제 떠날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움직여야 한다.

“아버지께선… 쉽게 용서해 주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비석을 다시 한번 손으로 훑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 일의 일부를 알고 있으니 더더욱.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용서를 빌미로 당장 일을 그만두라는 조건을 내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잠시간.

“그럴 리는 없으려나…….”

에스메랄다는 부정의 의미를 담아 픽,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페드로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위에 이마를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몇 년에 걸친 시간 동안 두 사람이 해 온 것은 정쟁이다. 가문의 전권을 두고 일어난 싸움에서 에스메랄다는 이겼고, 백작은 졌다.

에스메랄다는 백작을 공격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백작은 에스메랄다를 공격할 부분을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하니 공평한 싸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공격한 에스메랄다와 달리 백작의 대응에는 어설픈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그녀가 딸이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어린 나이를 보고 얕보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유에 관계없이 대응의 미흡함은 분명 백작의 책임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인사가 아니고,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감정에 휘둘리는 이도 아니다.

정쟁의 패배는 패배로 인정하고, 그 정쟁에서 딸이 행한 무도한 짓을 아비로서 용서하는 건 별개의 일로 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조적인 미소가 흐르나 보다. 그녀가 아는 가족은 모두 죄악을 용서할 사람들이니까.

그녀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그녀의 죄는 모두 사해받을 수 있으리라. 마음의 짐이 늘어만 간다. 기적처럼 시간을 되돌아와 다시 한번의 기회를 얻었는데 후회는 더 짙어져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페드로의 비석에 떨어졌다. 어째서 그녀가 아르페시스에게 선뜻 해 주지 못했던 것을 그녀의 가족들은 이토록 쉽게 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마주 보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곧 리퀘나로 갈 거예요.”

오늘은 카 15일. 겨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는 날이었다. 리퀘나에 들렀다가 황도로 향해 오멘까지 만나고 영지로 귀환한다 해도 아직 겨울이 한창일 것이다.

그녀는 외부를 발로 뛰는 사람이 아니다. 정점에 앉아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방향과 방법을 지시하는 사람이지. 그렇기에 백작령에서 보고를 받는 것이나, 마차를 타고 움직이며 보고를 받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법 전보가 있는 이상 그녀에게는 위치의 제약이 없다시피 하니 이동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니 내전 준비를 이어 가며 이동을 하는 것에 부담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순간에 그녀가 움직이는 건 황제에게 허수를 안겨 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이 다가오기 직전, 가장 주의해야 할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니까. 전보 마도구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보다. 전서구 사냥이 활발해진 시기라서 더더욱.

“다녀와서 얘기를 전해 드릴게요.”

에스메랄다는 제게 닿아 있는 비석을 쓰다듬으며 흐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있고 싶지만 이동을 대비해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때였다. 출발을 앞두고 몸이 아프거나 하면 이동에 지장이 생길 뿐이다.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하는 법이다.’

페드로의 유언에 따라야지. 떠난 페드로가 아니라 남아 있는 다른 가족들을 우선시할 때다.

에스메랄다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페드로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찾아오는 사람을 곱씹었다. 부족한 그녀 때문에 다시 한번 죄악에 짓눌린 채 힘들어하고 있을 아르페시스. 에스메랄다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기다리고 있겠다.’

페드로의 말대로 과거의 선택은 아르페시스의 잘못이 아니라, 가혹한 현실로 인한 참사다. 현실의 가혹함이 만들어 낸 참사 속에서 잘못한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지독한 선택지로 내몰린 불쌍한 이들이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인정하는 데 2년이나 걸렸다. 에스메랄다의 선택도, 아르페시스의 선택도 죄가 아니다. 진즉에 그것을 인정했어야 하는데. 페드로가, 페르멘이 그녀에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용서를 베풀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부족하고 옹졸한 그녀는 자그마치 2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이곳에 섰다.

페드로와 페르멘은 대체 어떻게 그리도 쉽게 용서를 말한 것일까? 그들의 사랑이 깊어서 그런가? 그저 그녀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아르페시스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부족했기에 오래 걸린 것은 아닐까? 그를 향한 감정이 부정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버거운 감정의 선택 앞에 휘청거리는 게 그녀뿐인지, 다른 이들도 모두 이러한지, 답답하다. 다만 분명한 건,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녀가 용서받은 후에야 타인에게 용서를 언급할 수 있게 되다니. 이기적이고 옹졸한 여인이 여기에 있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스스로의 추악한 그림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녀가 페드로의 묘를 등졌을 때, 자박자박하고 울리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 사이로 그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천사야.’

이제는 환청으로만 들을 수 있는 페드로의 부름에 에스메랄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본인의 무덤 앞에 자리를 잡고 선 페드로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또 들러 주렴.’

“……네.”

그녀의 대답을 들은 페드로는 본인의 무덤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번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본성으로 돌아오던 중 에스메랄다는 정원에서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홀로 다녀오고 싶다는 그녀를 흔쾌히 보내 준 페르멘과 지난날 그녀에게 필요했던 위로를 해 준 나단이 함께 서 있었다.

‘페드로 도련님은… 다 용서하셨을 거예요.’

그 말이 없었다면, 이어서 페르멘의 도움이 없었다면 에스메랄다는 아직도 후회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겠지. 지금도 이미 늦었지만, 더 늦지 않기 전에 인정할 수 있도록 그녀의 등을 밀어 준 사람들이 눈앞에 있다.

나단은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직후 당황해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직계의 묘지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는 걸 보면 두 사람 다 그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리디, 잘 다녀왔어?”

페르멘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쓰린 미소와 함께 그의 뺨에 답례를 남겨 주었다.

“네.”

“형이 좋아하지?”

“……아마도요.”

“에이, 아마도라니. 분명 좋아 죽으려고 했을걸?”

이제는 그리운 말로 추억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형제를 그려 본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과의 대화 후에야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아가씨를 뵙습니다…….”

한껏 긴장한 게 백작령에 온 직후에나 잠시 보았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나단의 목소리를 되짚으며 말했다.

“오랜만인 것 같은데 또 마냥 그렇지는 않겠구나, 나단.”

“네에……?”

“그제의 일을 말하는 거란다.”

나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가 먼저 이 주제를 꺼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손을 꼼지락거리는 나단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늦지 않게 감사 인사를 꺼낼 수 있었다. 너무 늦어서 페드로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그 흔한 말, 이제는 그 말을 할 수가 있다.

“고마워…….”

“에……?”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녀의 등을 떠밀어 줘서, 페르멘이 내밀어 준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어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아르페시스에게 갈 수 있게 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당시에는 제대로 인지하지조차 못했던 찰나의 위로가 그녀를 구원했다. 에스메랄다는 몇 년 만에야 지어 보이는 미소로 나단을 마주 보았다.

“오라버니께서… 날 용서하셨을 거라고 말해 줘서 고마워. 네게 도움을 받았구나.”

잠시간 나단의 표정에 떠올랐던 놀라움은 곧 환하게 피어난 미소 아래로 사라졌다.

“도움이 되셨다니 기뻐요!”

나단은 귓가를 발갛게 붉힌 채 해맑게 웃었다.

“사실은, 제가 막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엄청 걱정했어요. 아가씨께 무례한 말을 한 건 아닐지 걱정도 되고, 또 넘어지실 때 제대로 붙잡아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다친 곳은 없으신지 계속 걱정했어요.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긴장이 풀렸는지 예전처럼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는 나단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잠시나마 평온하게 웃었다. 그녀가 더 늦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였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손을 붙잡은 채 꽤나 오래도록 정원에 머물렀다.

5권에 계속

주석

1) 진시(辰時)의 한가운데. 오전 여덟 시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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