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7화 (27/45)

제26장

잔인한 현실

말과 마차 등의 이동 수단을 구비하거나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이 힘든 평민들은 타 영지를 오고 가기 힘들다. 개별적으로 무력을 보유했거나, 용병을 고용해 보호받을 수 있는 돈이 없다면 상단 무리나 일정 규모 이상 뭉쳐 움직이는 보부상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 보편적인 이동 방법이었다. 그래야 도적이나 산짐승들, 혹은 두 마리씩 움직이는 마수에게 습격받지 않으면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

전서구가 없었다면 지역별 신문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대로를 깎아 이동의 편의를 확보하고자 했던 황실의 시도가 몇 번 있기는 했지만, 모두 흐지부지되거나 실패했다. 대로 정비와 정기적인, 혹은 공식적인 이동 편을 마련하는 건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니까.

위험 요소를 제거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드는 돈, 방향을 설정해 주기 위한 대로 설치비, 이동을 위한 마차 등을 마련하기 위한 자본금까지. 제국 전역의 이동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득할 정도로 많은 돈이 든다.

이동이 제한된다는 건 뒷골목 세력들에게도 예외는 아니기에 결국 영지별로 독립적인 세력이 구축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물리적인 거리란 쉽게 좁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영지에 손을 뻗어도 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리 매력적인 요소가 아니다. 다른 영지를 관리하는 놈들이 언제 딴마음을 먹을지 모르니까. 결국 뒷골목 세력은 영지 단위로 구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그 영지 내에서 다시 한번 서로의 구역을 구분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해당 영역을 지키기 위해 칼부림이나 주먹질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부 백성들은 뒷골목을 장악한 건달이나 포주들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장사를 하기 위해 임대한 건물이나 가판을 열어 상행위를 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까지 그들의 영역으로 규정해 버렸으니까.

그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상행위는 뒷골목 세력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이 일정량의 돈임을 내야지만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명백한 불법임에도 폭력과 강압, 그리고 뇌물이라는 수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상인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가게로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내부의 물건을 깨부수며 훼손하거나 손님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돈을 내는 이들의 가게에는 무력적 보호를 제공한다.

취객이나 진상 손님들을 대신 내쫓아 주는 등의 일은 물론, 다른 뒷골목 세력이 찾아와 횡포를 부릴 때 상인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렇게 뒷골목이 거둬들인 돈의 일부가 영지의 주인들에게 뇌물로 들어가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이러한 생태는 결국 합법 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뒤에서 또 한 번의 돈이 거둬지는 현상, 이중 징수가 가능하게 만든다. 영주들이 건달들의 불법 징수를 허락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침묵하거나 뒤를 봐주면 더한 돈이 들어오니까.

에렘에, 아니 대륙 전역에 이중 징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지역은 얼마나 될까? 먹고살기 위해 번 돈을 두 번에 걸쳐 빼앗기니 백성들의 삶은 힘들어지고, 정직한 삶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니 불법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뒷골목 세력의 구성원이 꾸준히 채워지게 되는 배경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뒷골목 세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행위는 여관 혹은 주점이다. 아니, 뒷골목 포주들과 여관이나 주점의 주인이 밀접한 관계를 넘어 공생 관계에 놓여 있다. 여관이나 주점의 주인은 자신의 가게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유곽의 존재를 알리거나, 유곽 소속의 창녀들을 여관으로 데려와 손님에게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여자는 필요 없고? 좋은 곳을 알려 줄까?’

대부분의 여관에 투숙할 때 돈을 내고 처음 받는 질문이다. 그렇게 손님 유치를 도와주는 대가로 여관이나 주점의 주인들은 뒷골목에 내야 하는 두 번째 세금의 일부를 탕감받는다. 이런 공생 관계가 영지별로 구분되어 있을 때는 별것 아닌 힘이 따로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조직처럼 서로를 구분한 채 각기 움직이는 힘이 하나로 모인다면? 사람들이 오가는 각지의 여관에서 정보를 보다 빠르고 다양하게 수집할 수 있다. 술집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통해 영지 내부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가능해진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타지로 이동하는 보부상 무리에게 정보를 흘려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할 수 있고, 영지 내부에 있는 이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어 그 소문이 영지를 장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정보란 결국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이다.

뒷골목을 전부 손에 넣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금전적인 가치나 영향력의 규모 같은 것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메랄다가 시간을 되돌아온 직후 뒷골목부터 건든 이유였다. 그곳을 장악하면 어떤 이득이 돌아오는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주워듣는 모든 것을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해 드는 돈은 만만치 않다. 영지마다 소식을 전할 파발꾼을 두거나 전서구를 배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니, 인력비나 투자금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고작 영지 한두 개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에렘 내에 있는 모든 지역을 연결하는 셈이니까.

에스메랄다는 그 단점이자 부담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서부에서부터 천천히 영역을 확장하며 시간 차를 두고 자금을 투입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와는 달리 과거로 되돌아온 그녀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3여 년이 지났을 무렵 에렘 내부의 뒷골목은 에스메랄다의 눈과 귀, 그리고 때때로 입이 되기 시작했다. 뒷골목을 손에 넣음으로써 각지의 건달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 에스메랄다가 머물고 있는 여관방에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올라온 저 소년 같은 존재가 많아지며 점점 더 수월해지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던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꽤나 어려 보이는데, 여관장 아들이니?”

“그냥 일꾼인데요.”

“네 부모는 무얼 하기에 네가 벌써 일을 해?”

음식 접시가 사라진 쟁반을 거둔 소년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저 고아라서요. 먹고살려면 제가 알아서 벌어야 하거든요.”

왜 이런 걸 물어보냐는 듯 짜증 서린 시선도 함께였다.

“저런…….”

에스메랄다는 측은함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러면서도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수고비란다.”

“우와, 이렇게 많이 줘요?”

반색하며 다가온 소년이 그녀의 손에서 금화를 쏙 빼 갔다. 싱글벙글 피어난 미소가 진짜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꽤나 만족하며 가까이 다가온 아이의 뺨을 매만졌다.

“일을 하는 게 힘들지는 않니?”

“뭐, 이렇게 종종 부수입도 있어서요.”

아이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불쾌한 듯 보였지만 혹시나 주었던 금화를 빼앗아 갈까 봐 얌전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꾸며졌다는 것을 아는 에스메랄다가 깜빡 속을 정도이니 평범한 사람은 의심조차 하지 않겠지.

“너무 상심할 필요 없단다.”

“네?”

언뜻 보기엔 돈 많은 이가 불쌍한 아이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에스메랄다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은 눈앞의 소년을 검사하기 위한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는 없으니까. 어딘가에는 반드시 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로부오.”

길거리에 버려짐으로써 굶어 죽었어야 할 네가 운명을 거슬러 이 여관에 있는 것처럼.

로부오, 1천 년쯤에나 있었던 동물을 이르는 말이나 현재는 멸종해 책에서나 나오는 단어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의 주인이 그들을 지칭해 온 단어이기도 했다.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 열서너 살쯤 되었을 법한 소년의 얼굴에서 곧장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웃음이나 불쾌감 같은 감정이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인 소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스메랄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은혜로우신 주인님을 뵙습니다. 존안을 알지 못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앞으로도 넌 내 얼굴을 모를 거란다.”

“예, 저는 은혜로우신 주인님의 존안을 모릅니다.”

지금 에스메랄다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각지에서 교육시키고 있는 세작 중 한 명이다. 나단과 같은 처지에서 굶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길거리의 아이들은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들의 첫 활동은 황태자가 남부에 있던 당시 그의 명령서를 바꿔치기하기 위해 전서구를 포획하는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각지의 뒷골목 세력들을 은밀히 감시하는 일과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나 영주 성에 침입하는 등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일부는 중앙군 내부에 진입한 상태고 곧 황실에도 들여보낼 예정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눈과 귀였다. 이제까지 꽉 막혀 있던 황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훗날 내전이 발했을 때 유용한 정보를 빼내어 오는 데 수월하리라.

지금 활동 중인 이들은 대부분 6년 전 에스메랄다가 거둔 이들이고, 그 아래 기수들은 아직 교육 중이다. 천천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교육시킨 아이들의 숫자는 늘어나겠지. 그녀의 세력이 점점 강해질 일만 남았다는 의미였다.

“지붕의 주인들은 어떻지?”

“최근 외부로 나갔다 온 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대부분 타 영지의 이들과 합작을 했던 이들인데, 다음 일이 있을 때도 같은 이들을 보내는 걸 보면 인근 영지에 있는 지붕 주인들과 개별적인 연락선을 만드는 듯합니다. 현재 지붕 주인 아래로 들어간 로부오가 내부에서 자세히 파고들고 있습니다.”

돈도 어느 정도 먹었고,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마나 사용자에게도 적응했으니 슬슬 딴 주머니를 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과거의 뷔비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대체 어쩜 이리 한결같은지.

“조만간 지붕 주인을 치워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좋겠구나. 아래 녀석들 중에 다음을 이어받을 만한 녀석들을 좀 골라 두어야겠어.”

“명단이 만들어지는 대로 보고해 올리겠습니다.”

“그래, 이만 일어나렴.”

에스메랄다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렴. 오늘 밤까지 너의 로부오를 불러오는 것도 잊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제 그만 돌아가 보렴.”

그제야 그는 다시 평범한 소년의 가면을 뒤집어쓰며 웃었다.

“예, 식사 맛있게 하세요!”

밝게 웃으며 떠난 아이의 미소는 진짜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세작 양성이 성공적임에 만족했다. 이 정도 표정 관리와 태도를 보면 테노리엘 백작가에서 길러 낸 이들과 견주었을 때도 부족하지 않다.

백작의 사후에는 새로운 세작을 키우는 것 역시 그녀의 몫이었으므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민 강제적인 선택지 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가장 먼저 주인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세뇌를 받았다.

극한의 굶주림과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서 살아온 아이들이다. 결국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음식물이나 보금자리를 통제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로부터 전해진 것임을 강조했다. 그래, 모든 교육은 에스메랄다가 그들에게 주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주지시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후에 이어지는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점을 인지시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스메랄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목숨들이니, 그들의 목숨이 그녀의 것임을 절대적인 전제로 만들어 두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저 아이들은 목숨을 바쳐 그녀를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에스메랄다는 세작을 키워 낼 때 감정을 거세하는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감정은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할 때에 더욱 효율적인 성과를 낸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의 충성심은 상당히 강렬한 편이었다. 배운 것이 없던 아이들이기에 다양한 지식을 충돌 없이 가르치는 것도 가능했다.

모두가 심장에 마나를 품은 채로 격투술이나 검술 훈련 등을 가혹한 수준으로 받았기에 무력적인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친화력이 좋거나 운용력에 자질이 있던 일부는 이미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는 중급 기사 경지에 올랐을 정도였다.

그래, 지금 여관방 문을 열고 나가는 저 아이는 에스메랄다의 전력이다. 문무, 어딜 내어 놓아도 부족하지 않고 그녀를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아이들. 6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듬어져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한 그녀의 또 다른 패.

현재 라그나가 마법 전보의 시험작 개발에 성공한 상태다. 교신 거리를 늘이고 보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저 아이들은 그것을 이용해 발 빠른 정보를 에스메랄다에게 쥐여 줄 것이다. 무려 에렘 전역에 걸쳐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의 감시하에 놓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황제파 귀족들의 사병이 움직이는 경로, 그들의 무장과 물자 상태, 그리고 그 사병의 가족들의 위치까지 모조리 실시간으로 파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니까. 불시 검수가 끝났으니 내일은 이 지역에서 저 아이들을 키워 내고 관리하는 이를 만나 아비체룬으로 넘길 인원을 선별하게 될 것이다.

식사를 시작한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로부오라 지칭된 아이와 나눈 대화가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변하는 게 없는지.”

필요에 의해 손에 넣긴 했지만 뒷골목 인사들은 충성심으로 인한 자발적 합류가 아니라 무력과 재력에 의한 억압이었다. 꾸준한 관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제가 생길 기미가 보이면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다 치워 버리겠다고 성을 내거나 더 이상 못 해 먹겠다고 손을 놔 버릴 수도 없으니, 뒷골목을 관리하는 것도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점조직 형태의 뒷골목을 통합했을 때 오는 유용성만 아니었다면 윗사람의 뒤통수를 때릴 생각으로 가득한 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사라진 시간 속에서 세상을 넓게 보기는 했으나 에스메랄다도 결국은 귀족들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도 뒷골목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뿌리 뽑지 못하는 골칫거리’ 정도가 그녀의 인식 속에 있던 뒷골목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이점, 또한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의 가치를 22세 무렵에 깨달았다. 황태자가 남부군 전사자들의 가족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해이기도 했다.

22세의 봄, 어느 날 가문의 기사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청원을 올렸다. 중요한 일이라고, 어떻게든 전해야 할 일이라며 집사에게 호소를 했다기에 짬을 내어 만났다. 그 기사는 남부 자원병으로 출정했던 시기, 자신을 구하다가 죽은 병사의 유가족을 틈틈이 챙겨 왔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저를 지혈해 주다 마수의 발톱에 상체가 꿰뚫렸지요. 당시 죽어 가던 그에게 가족들을 보살펴 주겠다고 맹세했고, 그들에게 줄곧 제 봉급 중 일부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겨울부터 그 돈을 들고 갔던 파발꾼이 사람이 없다며 그대로 들고 왔습니다.’

‘이주를 한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휴가를 내어 직접 방문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해 이웃들의 말을 들어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인과 딸이 사라졌다더군요.’

그 마을에서 실종된 이들은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총 4명이나 되는 여아나 미망인들이 실종된 상태였고, 그들 모두가 남부군 전사자를 가장으로 두었던 이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마을 촌장 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그 얘기를 들은 기사는 이상함을 느껴 복귀를 미루었고, 혹시나 싶어 인근 마을에 들러 다른 전사자들의 유가족들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실종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상은 여아나 미색이 고왔던 남아, 혹은 젊은 미망인들.

그들을 알고 지내던 이웃들의 증언은 대부분 자랐으면 고왔을 텐데, 미망인이 되고 사내들의 추파를 많이 받았다, 같은 말을 동반했기에 추측한 정보였다. 기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그 길로 곧장 에스메랄다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그녀는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고, 아르페시스에게 연락해 최근 몇 년 동안 발생한 전사자 명단을 받았다.

그것을 토대로 각지에 흩어진 유가족에게 가문의 세작들을 보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세작 홀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도시 규모의 영지에서 뒷골목 건달들을 고용함으로써 인력을 보충했다. 그 과정에서 건달 중에 납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취합한 결과 그들이 목격한 것만 해도 스무 번이 넘을 정도. 대부분 유곽의 야간 경비를 서는 이들로, 야밤이 되어야 하루를 시작했기에 목격을 한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생각보다 영지 내에서 발이 넓고 곳곳에 포진한 뒷골목 세력의 유용함을 깨달았던 계기였다. 당시 그런 방법으로 확인한 유가족의 실종자는 전체의 3할 이상. 한 해에 죽어 나가는 남부군 전사자들은 몇만 단위다. 그중 3할에 해당하는 이들의 가족이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라졌겠는가.

그것을 인지한 후에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고정관념을 보리고 진즉에 뒷골목 유용함을 인지해 수중에 넣은 상태였다면, 그들이 납치를 목격한 그때에 조금 더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녀가 늦었고 잘못을 곱씹는다고 실종된 이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책을 끝내고 서둘러 해결책을 모색했다. 대체 그들이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납치된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들의 유가족에게 5년간 지급하는 사망 수당만 해도 모두 합하면 무시할 수 없는 거금이다. 수신인의 부재로 돌아왔을 그 돈은 대체 왜 아르페시스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을까? 대체 왜?

그 부분을 파고들었더니 남부군의 행정관 중 일부가 중앙 재무부 관료와 결탁해 그 돈을 횡령하며 수신인의 부재를 숨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횡령을 권하며 침묵을 요구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함께 알아냈다. 그 사실을 더 파고 들어가 황태자의 근위 기사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분노했던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분노를 억누르고 실종된 이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부터 찾기 시작했다. 살아 있다면 구출해야 할 테니까. 끈질긴 관찰 결과 몇 해 전부터 말수가 눈에 띄게 줄고 음주 폭행 사건을 저질러 근신을 두어 번 받은 근위 기사를 발견했다.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유를 진행했고, 마침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욕조를… 채우고 있습니다.’

미색이 고운 이들은 유희거리로, 나머지는 목을 잘라 피를 뽑아낸다고 했다. 황태자가 그 피로 주기적인 목욕을 한다나? 목숨을 걸어 에렘을 지킨 영웅의 가족들이 황태자의 목욕물이 되었다는 말에 에스메랄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당시 황성에 달려가 황태자의 목을 졸랐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황제의 노환으로 황태자가 국정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던 시기였다.

전사자 실종 사건으로부터 두 번의 계절이 바뀐 후, 황제가 쓰러졌고 황태자가 남부군의 물자를 구비하기 위해 할당된 예산으로 즉위 준비에 들어갔다. 에스메랄다가 반역을 준비하게 된 과정이었다. 그녀는 당시 뒷골목에 대한 생각을 접고 아비체룬의 일을 마무리한 후 해야 할 것들을 짚어 보았다.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케니스에게 그녀의 변화를 드러내며 대업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인식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실을 공격하는 이유, 변화의 동기가 필요했다.

지금쯤 한창 진행되고 있을 황태자의 목욕 사건을 분기점으로 두면 충분할 터.

약혼 후 2년을 채우지 않고 혼례를 올린 황태자는 올해 29세. 이미 지난봄에 그의 장녀가 태어난 상태였다. 오래 살지는 못하고 죽을 테지만. 아이를 가진 채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었던 황태자비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아이의 건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기억대로라면 신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3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황태자가 30세가 되던 해 아들이 태어났고, 그 이듬해에 딸이 죽었으니 맞을 터. 사실 굳이 따지자면 아르페시스는 엄청난 막둥이였다. 황제가 마흔을 넘긴 나이에 태어났기에 황태자와 아르페시스의 나이 차는 꽤나 컸다.

이제야 20대에 들어선 아르페시스와 달리 지금의 황태자는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제 외모에 기이할 정도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얼굴에 생기는 주름을 보고 패악을 떨기 시작했으리라. 젊음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실감했을 테고.

사라진 시간 속에서 목욕 사건과 관련해 조사한 내용 중 가장 오래된 실종 일자는 대략 6년이나 7년쯤. 최소 지난해부터, 늦어도 올해에는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이 일이 시작되기 전 첫 번째 희생양은 황태자의 사생아였을 테니……. 그 부분도 찾아볼까?

혼외자라 한들 제 자식들의 핏물을 빼내어 목욕을 한다는 사실이 퍼져 나가면 꽤나 재미있을 테지. 어디를 어떻게 캐야 그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지. 아니, 이건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황태자를 생각하니 또 골칫거리가 따라온다. 남부에서 명령서가 바뀌었다는 건 그 명령서를 쓴 적이 없는 황태자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처음에는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기만 하더니, 지난해부터는 수작질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배후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었다.

대부분의 의심은 남부군 급진파 쪽으로 집중되어 있지만 일부 충돌에서 갑자기 남부에 나타난 로부오 몇이 의심 대상에 올랐다. 그들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자결을 하는 바람에 ‘알 수 없는 세력’이라는 흔적을 남겼다고나 할까?

황제도 알라반 이후 꾸준히 세작들을 돌리는 중이라 점점 포위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 뒷골목의 유용성을 또 다른 누군가가 인지하기 전에, 그 뒷골목을 누군가 장악했다는 것을 들키기 전에 내전을 일으켜야 한다. 에스메랄다가 생각하는 마지노선은 최소 2년에서 최대 3년, 그 안에 아비체룬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 이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포기해야 옳다.

“지금이라도 일전에 보내 놓은 이들이 돌아오면 좋으련만.”

쯧, 하고 혀를 찬 후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밀어내 주던 현실은 그가 곁에 없음으로써 다시 에스메랄다를 뒤덮은 지 오래다.

* * *

한 해 동안 소비한 물자의 기록을 취합하여 전년도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다. 해당 기간 동안 토벌한 마수의 규모와 소모한 물자의 규모를 비교해야 계속 늘어나는 마수의 숫자에 따라 필요한 예상 수치를 산정할 수 있으니까.

이미 각 부대가 토벌하는 마수의 수를 합산한 결과치는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늘어난 상태였다. 해마다 늘어나는 수치를 고려해 물자 계획을 수립하지 않으면 부족하기 때문에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 일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절이 여름이다.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소모하는 시간이 적기에 이 시기에만 가능한 업무라고 봐야 한다. 에스메랄다가 있을 때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위해 뒤로 미루었지만 그녀가 돌아간 후에는 당연히 업무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사령관실에 앉아만 있을 뿐 업무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었다. 머릿속이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는 에스메랄다가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허락해 주는 게 무서웠다. 그녀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날이 욕망을 정당화하며 인내를 갉아먹고 있으니까. 스스로의 자제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니 에스메랄다 쪽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파렴치한 놈인지 알려 주면 그게 가능할 것이라 여겼기에, 용기를 내어 과거의 일을 꺼내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상한 것이 함께 떠올랐다.

‘아시스.’

쿠베트성에 있던 당시 처음으로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잠을 청했던 무렵의 기억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에게서 나온 짧은 부름. 그날 제멋대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는 충격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그를 지칭하는 말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장 먼저 이름인 아르페시스, 그다음으로는 황자, 황족, 황제의 차남, 남부군 총사령관 같은 직위와 직책은 물론, 성년의 나이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천재, 서부의 영웅같이 황제가 만들어 낸 낯간지러운 명칭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그중에 ‘아시스’라는 지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아시스라는 건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이름의 음절이 비슷하니 그를 부르려다가 잠결에 뭉개진 것일까?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당시 그녀의 부름을 듣고 느꼈던 것들을 차곡차곡 꺼내 왔다. 분명 당시에 아르페시스가 느꼈던 감정은 감사, 혹은 안도 같은 것들이었다.

‘그녀에게서만 불릴 수 있었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생각을 곱씹던 그가 책상에 이마를 박은 채 웅얼거렸다.

“그런 생각은 대체 왜 한 거지?”

또한, 그 낯선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 본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끙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매었다. 기억 속을 열심히 뒤져 보았지만 그 기시감이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시스라는 이름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분명 겪었음에도 시간에 덮이며 점차 흐려지는 것.

홀로 끙끙거리는 그를 향해 함께 사령관실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르페시스와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기묘한 대치가 오래 지속되지 않은 건 노크 소리 덕분이었다.

“전하, 아브세란 경과 페넬로프 경이 도착했습니다.”

에스메랄다가 돌아가던 날 알현 신청을 올린 이들이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서부 대란 때 아르페시스와 함께 출정한 중앙군 소속의 지휘 기사였다. 현재는 파병된 중앙군 전원은 남부군의 각 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아르페시스와 함께 서부에서 전투를 치른 이들은 나았지만, 황태자와 함께 남부에 있던 이들은 제대로 된 마수와의 전투를 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경험의 부재로 따라오는 오판은 병력 손실을 야기하기에 그들을 한곳에 몰아 두지 않고 이끌어 줄 만한 이들과 함께 배치한 것이다.

그의 생일날 복귀 명령이 내려왔으니 그들을 제외한 부대 편성이 완료되는 날 돌아가겠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방문을 기점으로 진짜 업무에 복귀해야 할 시기임을 느꼈다. 에스메랄다를 핑계로 너무 놀아서 그런지 칼라일의 시선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곧 두 사람을 사령관실 내부에 들였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그래, 두 사람 다 오랜만이군.”

과거에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처럼 그들을 비롯한 중부군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파병 3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 가능성을 활짝 꽃피워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뭐, 리퀘나로 남하를 시작한 이후 정기 회의에서나 가끔 보던 이들인지라 ‘잘하고 있다’라는 평가를 전해 들은 것뿐이지만.

“꼭 만나야 한다지? 무슨 일이기에?”

아르페시스는 두 사람이 왜 알현 신청을 넣었나 싶어 물어보았다.

“중앙군 복귀 명령이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둘 중 대답을 꺼낸 건 아스터였다. 그의 상관이기도 한 데미안은 옆에서 우물거리기만 했을 뿐이다.

“그래, 중앙군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부대 편성이 완료되면 바로 복귀할 수 있을 테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가?”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했나? 그래서 저가 들은 소식이 진짜인지 확인차 왔고?

여름이라 안전한 전투를 지속하기는 하지만, 원거리 마도구로 피해를 입은 마수들을 확인 사살하는 과정에서 전사자가 나오기도 한다. 겨울엔 만 단위로 나오던 것이 여름에는 백 단위로 나오는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남부군은 여름에도 전투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돌아가게 되었다고 들떠서는 당장 정보를 확인하러 와? 아르페시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저희가 알현을 청한 이유는…….”

아스터가 데미안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에 데미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 대신 총사령관님을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뭐라?”

아르페시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는 사이 아스터가 품속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저희와 뜻을 함께해 복귀 즉시 전역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의 명단입니다.”

아스터에게서 그 종이를 받아 든 아르페시스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 속에 적힌 이름을 훑었다. 총원 42명. 모두 서부 대란에서부터 아르페시스를 따라 움직이던 중앙군 출신의 중상급 기사들이었다. 두 사람이 아르페시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근위대 임명은 오롯이 총사령관님의 권한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근위대 임명은 황제도 간섭할 수 없는 황족 개개인의 고유 권한이다. 그들에게 지급할 봉급이나 무구 등을 책임질 수 있는 자력이 된다면 100명 내에서 제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다.

현재 아르페시스의 근위대는 41명. 페드로의 합류와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까지 합해 딱 60을 채웠던 수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황제의 기사들 외에 그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들도 벌써 3명이 전사했다.

“저희가 마땅치 않으시겠지만, 부디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충정만은 믿어 주십시오. 기회를 주시길 간청합니다.”

이어지는 아스터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그들을 보는 시선에 여전히 편견이 어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말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멋대로 짐작하다니.

“내 곁에 있으면… 황제가 곱게 보지는 않을 텐데? 두 번 다시 중앙에 진출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 폐하와는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모시고자 하는 분이, 충정과 진심을 다해 모시고자 하는 분이 총사령관님이실 뿐입니다.”

“봉급도 많이는… 못 준다. 사비의 대부분을 남부군 운용에 쓰고 있어서.”

“돈을 받고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내고 곁에 있으라 하신다 해도 따르겠습니다. 그리해서라도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것이 저희의 진심입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해 오는 아스터의 눈동자는 뜨거웠고, 익히 아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르페시스를 바라보는 휴고의 눈이 저러했으니까. 페드로는 그것을 보고 충정이다, 라는 말을 했고 아르페시스 역시 휴고가 자신을 진심으로 모시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런 휴고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를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아르페시스는 3여 년 전 탈영을 저지르고 벌벌 떨던 그가 저런 눈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충정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들으니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아 얼떨떨하기도 하고.

‘네가 죽지 않는 선택을 최우선으로 여겨 줘.’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아르페시스의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황제의 뜻이 아닌 본인의 뜻대로 아르페시스를 모시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전장에 대동하는 20명의 호위대를 더 안전하게 꾸릴 수 있다.

모든 전투에 따라가는 페드로와 휴고도 출전 횟수가 줄어드니 그들의 안전도 조금은 확보할 수 있을 터. 그러면 에스메랄다의 불안감도 점점 옅어지겠지? 아르페시스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터는 밖에 세워 두었던 본인의 종자를 데려와 일단의 서류 뭉치를 내어 놓았다.

“……전역 신청서군.”

“예, 총사령관님.”

이걸 중앙 군부에 제출한 후 처리가 되면 아스터와 데미안을 포함한 42명은 소속이 없는 자유 기사가 된다. 근위대 임명장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조만간 연락을 하겠다는 말로 그들을 물렸다.

두 사람은 총사령관에 대한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 다음에 만날 때는 총사령관 대신 황족으로서 그들을 마주할 터. 아르페시스는 얼떨떨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40여 명의 이름을 찬찬히 훑어봤다. 여전히 황태자의 근위대와 비교했을 때 수는 부족했다. 그래도, 황족이라는 지위를 보고 모여든 그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사생아임에도, 황제의 장기 말임에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모시고 싶다’라는 말을 들었다. 인정을 받았다, 혹은 스스로에게도 가치가 있다, 같은 만족은 결국 후에 따라오는 것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걸 에스메랄다가 알게 되면 그를 조금은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주지 않을까?

치기 어린 마음으로 ‘내가 이 정도다!’라고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녀 앞에서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다. 페드로가 대뜸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아르페시스는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조금 더 오래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얘기 좀 하자.”

그렇게 말하며 훌쩍 자리에서 일어난 페드로가 사령관실을 나섰다. 아르페시스는 제 뒤로 따라붙는 칼라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서둘러 페드로의 뒤를 따랐다. 복도의 끄트머리로 향해 창가에 기대어 앉은 페드로가 마나 장막을 펼쳤다.

“뒷조사부터 해.”

혹시라도 충정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포장한 황제의 또 다른 눈이 아닌지 확인을 하긴 해야 한다. 아르페시스도 그걸 알고 있기에 페드로의 말에 곧장 대답했다.

“알고 있다.”

“조사 기준은?”

그것 역시 알고 있다. 일전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 10여 명을 직접 조사한 기준이니까.

“……최근 황실과 해당 기사들의 본가 인물이 교류를 한 적이 있는지, 그들이 돈이 급박한 상황은 아닌지, 과거의 지인들을 통해 출세욕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아닌지 확인해 봐야겠지. 또 최근 가족이나 연인 등 친인척들의 신변에 변고가 없는지도 확인해 협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 조사도 필요하고.”

“하나 더 있는 거 알지?”

페드로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 황제의 충신이었으나 불명확한 이유로 떠난 후 오랜 기간 동안 칩거를 유지한 이들의 후손이 아닌지 확인하라는 것이겠지?”

지금 사령관실에는 없지만 종종 본부대 지휘관들의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방문하는 바 게만 헤니아겔 테베르처럼.

페드로가 휴고와 달리 테베르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현 헤니아겔 남작이자 테베르의 부친은 즉위 전부터 황제를 지지하던 충신 세력으로 황실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르페시스가 서너 살 때쯤 모종의 이유로 은퇴를 했고, 이후 저택에서 칩거하며 타인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황제의 폭정이 시작된 무렵이니 회의감을 느끼고 은퇴한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무언가를 위해 감투를 쓴 것일 수도 있다는 게 페드로의 의견이었다.

휴고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꽤나 어렸을 때부터 곁에 있던 이라 의심하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페드로의 말에 설득력이 있고, 그의 최우선순위가 본인의 안위라는 것을 알기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관저의 사용인으로 들어와 있는 테노리엘 백작가의 세작을 떠올렸다. 이미 페드로가 그들에게 뭐라고 언질을 해 둔 것인지, 그들은 근위대 건에 관해서는 아르페시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세작같이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없으니 페드로의 도움을 받는 셈이었다.

‘아버지가 반려하지만 않으면 직계의 명령도 이행해야 하거든.’

결국 아르페시스가 하는 근위대의 뒷조사를 테노리엘 백작이 허가해 주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짧지만 페드로의 성정상 반드시 할 것이라 생각했던 대화가 끝난 후,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드로가 마나 장막을 거두지 않은 채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침묵이 길어지자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페드로는 그 질문에 얕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혼자 잘할 수 있겠냐?”

그러고는 저렇게 물어보는 게 아닌가? 잘할 수 있겠냐고? 무엇을?

“이런 식으로 정치적 배후도 알아보고, 군내에서 일어나는 신경전에도 관여하고… 또, 전장에서 살아남는 거 말이야.”

이제껏 계속해 온 것을 왜 물어보지? 아르페시스는 눈을 끔뻑이던 도중 페드로가 했던 말을 다시 상기했다.

“혼자……?”

“……그래.”

무슨 말이지? 또 죽을 준비를 하는 건가? 이 여름에? 아르페시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뭐라고 말하기 전 페드로가 선수를 치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내륙으로 복귀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귀한다고? 페드로가? 놀라움도 잠시, 아르페시스의 입꼬리에는 곧 미소가 걸렸다. 페드로가 그걸 보고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떠나는 게 좋은가 보다?”

“아, 그게, 그런 의미는 아니고…….”

단지 그가 돌아가면 더 이상 죽을 위험이 없는 것이지 않나. 에스메랄다의 불안감과 원망이 해소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섭섭해하지는 않아서 마음이 좀 놓이긴 한데, 아쉽게도 당장 돌아갈 건 아니야.”

“어째서?”

“아브세란 경이랑 다른 사람들을 좀 다듬어 둬야지. 마수를 대상으로 하는 호위 전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이번 겨울이면 될 것 같다.”

“카 게만 아브세란 데미안?”

“그래, 정치에 재능이 없어서 그렇지 무위는 천재 반열에 넣어도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야. 보좌관인 페넬로프 경은 군부 쪽 명문가 출신이라 사교계에서 입지가 좋은 편이었지. 꽤 괜찮은 페어다. 실력이 부족하지도 않고. 뭐… 세도가와 연이 없기도 하거니와 본인들도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 요직 진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에 대해서 꽤 잘 아나 보군?”

“소꿉놀이할 때 종종 마주쳤거든.”

소꿉놀이라면… 중앙군 내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친선 경기를 말하는 모양이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공식 행사라 아르페시스 역시 열 살을 넘긴 후로 종종 관전을 가곤 했다. 황제와 황태자의 면상을 봐야만 하는 날이라 정말 싫어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재능으로만 따지면 아브세란 경이 나나 형보다는 나아. 그가 운용법을 새긴 건 여덟 살 때인데 세 살 때 새긴 나보다 마나가 많거든. 훈련 기간을 따져도 상급 기사에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나보다 짧고. 마수에도 적응을 한 것 같으니 뒤만 깨끗하다면 신뢰해도 좋을 거야.”

“그거 좋은 소식이군. 뒷조사는… 테노리엘의 세작들에게 부탁하면 되나?”

“그래, 말을 해 둘 테니 시작부터 끝까지 네가 해 봐. 빠지는 게 있으면 지적해 줄 테니까.”

“알겠다.”

페드로는 또 한 번, 대화가 끝나자마자 시선을 피하듯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할 때 시선을 피하는 경우가 없던 사람이라 계속 그게 신경을 긁었다.

“……미안하다.”

그런 와중에 대뜸 나온 사과도 그로서는 왜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엇이?”

되물어 보아도 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홀로 생각을 곱씹으며 그럴듯한 답을 찾아냈다. 혹시 그를 두고 혼자 내륙으로 돌아가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질문을 하자 페드로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긍정을 했다. 이게 대체 왜 사과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건 나와 그대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지.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대는 있었음에도 자청하여 와 준 것 아닌가.”

아르페시스는 한순간도 그것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페드로의 유능함을 알기에 그의 합류에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가 다른 것을 우선시해서 떠나겠다고 하면 막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곁에 있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그저 돌아가는 것이 그녀에겐 더 좋을 테니까.”

“넌 여전히 천사가 중심이구나.”

에스메랄다를 중심으로 그의 세상이 돌아가니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저에 그녀가 있는 게 당연하겠지.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애초에 페드로가 아르페시스를 따라온 건 에스메랄다를 위하는 마음이었을 테니까.

“안심이네.”

“음?”

“나는… 좀 변해 가는 중이라고 하면 될까?”

페드로는 씁쓸한 것인지, 행복한 것인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복잡한 미소였다.

“무슨 의미인가?”

“여전히 천사도, 너도 소중한 건 맞아. 네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도 맞고. 그래서 처음에는 포기하려고 했지.”

실제로 페드로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데는 아르페시스의 진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 년이나 함께 지내며 소중해져 버렸으니까. 단지 본인의 진심보다는 페드로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에스메랄다의 감정에 더한 무게를 두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에스메랄다도 아닌, 건장한 사내에게 저렇게 낯뜨거운 말을 듣는 건 그다지…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해지는 사이 페드로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일을 보고 나니까 다시… 다시 욕심이 나네. 네 옆에 사람을 채워 놓고 나면 그녀에게 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계속 들어. 그녀가 울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리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말을 듣자마자 며칠 전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제 사령관실의 문을 열자 보았던 그 광경 말이다.

“사실은 걱정했다. 따지자면 난 너나 천사보다 그녀를 우선순위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말하던 ‘그녀’를 확실히 하고자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었다.

“쿠베트… 영애를 말하는가?”

“……그래, 당분간은 모르는 척하고 있어. 괜히 설레발쳤다가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천사도, 그녀도.”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상대방을 파악하려는 듯 시선을 맞추던 페드로였는데, 지금의 그는 대화가 오가는 내내 계속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나도 내가 꽤나 우스워. 제멋대로 따라왔으면서…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 하다니. 아무래도 나는 정말 아버지를 닮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말을 하는 페드로는 어째서인지 본인의 선택을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페시스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불쑥 말을 꺼냈다.

“그대는 전선에 있으면서 여인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아닌가? 상대방이 힘들어할 테니까.”

지금 아르페시스가 전선에 있음으로써 에스메랄다가 힘든 것처럼.

“……그래.”

몇 년이나 이어진 교류에서 페드로가 아르페시스를 알아 갔듯, 아르페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르페시스가 보는 페드로는 매우 직설적이면서 조금은 냉소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결정을 내리면 순식간에 치고 나가는 행동력을 갖추었으며 기본적으로 두뇌 회전이 빠른 지략가이기도 했다.

속이 깊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명확하게 정립된 사람이었으며, 한번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헌신하는 우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피아 구분이 확실한 것은 물론, 우선순위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과감히 내버리는 냉철함도 갖추었고.

“내가 이렇게 줏대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왜 그런 말을 하지?”

“뭐?”

아르페시스는 벗어날 길이 없는 남부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페드로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남부군이니, 대의니… 여기서 죽어 나가는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까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르페시스가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내게 책정되는 사비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도 알고 있어. 하지만 황제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에스메랄다의 곁에 갈 수만 있다면 당장 떠났을 것이다.”

“…….”

“그런데 줏대가 없다니? 당연한 일 아닌가? 곁에 있고 싶은 이가 있고, 함께하고 싶은 이가 있는데 전선에 남아 있는 게 멍청한 것이지.”

페드로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누구에게도 꺼내 보인 적 없던 진심을 토로했다.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무슨 생각?”

“나와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

“…….”

“황제나 황태자가 나와 테노리엘의 결합을 허가할 리는 없으니 혼인은 불가능하겠지.”

긴 한숨이 애써 외면해 왔던 훗날을 그의 앞으로 데려왔다.

“지금은 그녀가 아직 어리다지만… 곧 혼기가 찰 것이고, 누군가와는 혼인을 해야 하지 않나? 나와는 불가능한데, 그럼 그녀는 누구와 혼인을 하게 될까?”

“…….”

“지금의 나는 고작 스물의 나이지만, 서른, 마흔… 그때까지 살아남는다고 하면 그때도 내 곁에 그녀가 있을까?”

에스메랄다에게도 말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불안감은 사랑을 고한 현실에서도 여전했다. 그녀가 타인과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 주어도 그녀와 그에게 미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대는 나와 사정이 다르지 않나. 기회가 왔고, 상대가 생겼으면 미래를 가지고 싶은 건 당연하지.”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당장 손을 쓸 수 없기에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현재를 누리고자 할 뿐, 아르페시스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무서웠다. 미래를 가질 수 없는 그와는 달리 에스메랄다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을 테니까.

훗날을 애써 밀어 두고자 노력하던 아르페시스에게 다시 한번 페드로의 목소리가 닿았다.

“욕심은 없냐?”

“응?”

페드로와 시선을 다시 마주했을 때 아르페시스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주변에 퍼져 있던 마나 장막이 짙어졌다. 페드로는 혹시라도 누군가 파고들어 와 소리를 훔쳐 가지 못하게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네 미래를 빼앗아 간 사람이 없어지면 그걸 되찾아 올 수 있는 거잖아.”

이어서 나온 주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장 알아들었다. 아르페시스 역시 두어 번 정도는 생각해 보았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동시에 자조하며 불가능함을 깨달아야만 했다. 페드로도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아르페시스는 굳이 그 불가능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희망을 가지는 것 좋지만, 헛된 꿈을 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그가 남부를 벗어날 수 있다, 라는 헛된 꿈 말이다.

“했다가 나 때문에 중앙 지원이 끊어지면 남부군은 어떻게 버티지?”

그건 아르페시스에게 나오는 사비가 중단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다. 애초에 남부군은 중앙 지원금이라는 기반 위에 사가문들의 기부금, 후원금, 그리고 아르페시스의 사비가 쌓여 운영된다. 남부군을 유지하는 건 중앙 지원이지 아르페시스의 사비가 아니다. 그걸 헷갈려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다면 진즉에 했겠지. 중앙군 7만은 어떻게 상대하지? 황실을 지지하는 세력은 제국 귀족 중 3할이 넘는다. 남은 이들을 포섭해도 황제의 군을 뚫고 들어갈 병력을 어떻게 모으겠나? 실패할 가능성이 그렇게 높은 일에 도박 수를 둘 만한 귀족들이 얼마나 된다고.”

“남부군이 있잖아.”

“……내 미래를 위해 남부 백성들의 미래를 빼앗을 수는 없지 않나. 남부군이 자리를 비우면 남부에 마수가 진입할 텐데, 지난 남부 피해를 다시 반복하라고?”

“천사와의 미래를 위해 그 정도도 감수 못 해? 기회만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겠다며. 반군에게 접촉해 보는 방법도 있잖아.”

“위험성이 너무 크다.”

아르페시스는 묘하게 반정을 강요하는 것 같은 페드로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수천, 수만을 제물로 쓰는 것이 정당한가?”

아르페시스는 아릿한 심장을 매만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아직, 서부 대란 속에서 만난 세리와 메리를 잊지 못했다. 모친의 살점을 뱉어 내고 싶어 하던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던 그 어린아이를, 그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서부 대란 시기에… 모친의 사체를 먹으며 며칠을 버틴 아이들이 있었지.”

페드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들을 자르간 가문에 데려다준 것이 그였으니까.

“남부군이 전선을 뒤로하고 내륙으로 향하면, 그들의 빈자리가 한 계절만 되어도 남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부 대란이 일어났던 무렵 남부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존속할 수 있었던 건, 남부군이 계속 마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주둔지를 계속 옮겨 다니며 남부 영주의 사병들과 합심해 리퀘나 군사 지역을 넘어오는 마수들을 토벌했다.

하지만 남부군이 내전을 위해 빠지면 그런 마수들이 완전히 방치된다. 사병만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그 속에서 메리와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날까? 덤덤한 목소리가 혹시나 그의 선택으로 도래할지도 모르는 비극을 그려 보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이들이 생겨날 것을 빤히 알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들을 두고 도망가는 건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 그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할 수 없어. 난… 이런 생각이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페드로는 그런 아르페시스를 보며 안타까움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나를 위해 너를 희생시키지 않는 모습은 훌륭하건만, 에스메랄다와의 미래를 위해 핏물마저 감내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들이 사는 시대는 너무 버거운 것이 많다. 이것도, 저것도 정답이 아닌데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기에 언제나 힘겨운 선택을 앞둔다.

“최선은 중요하지.”

잠시의 틈을 두고 다시 이어지는 말을 페드로는 가만히 경청했다.

“피해를 감수하고 최선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고.”

하지만 그 최선에 스스로를 위한 이기가 들어가 있다면 그게, 정말 최선일까?

“남부군을 쓰지 않고도 황제를 칠 수 있게 되면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군을 전선에서 빼는 것만은 할 수 없다.”

백성들의 목숨도 목숨이지만, 에스메랄다의 안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명제였다. 남부 전선이 무너진다는 건 몇 해 전 발발했던 서부 대란처럼 내륙이 위험해진다는 것과 같다. 그 내륙에는 에스메랄다가 있다. 남부군의 존재는 백성들의 목숨은 물론 그녀의 안전과도 엮여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에스메랄다의 곁에 가고 싶다는 것도 진심이지만 남부군만은 절대로 안 된다.”

아르페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절대 골라선 안 될 유혹이었다.

“그녀의 안전에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르는 일을, 백성들의 목숨을 내다 버리면서까지 강행할…….”

하지만 그 단호함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 남부군과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내 생각만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끔찍하다.’

분명히 목소리를 들었는데, 근방엔 페드로와 그를 제외한 누구도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지금의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그저 남부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왜 그들의 목숨이 제물이 되어야 하지? 왜 그들을 제물로 바치는 게 최선이 되어 버린 것이고? 어째서 나는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환청이다. 쿠베트성의 온실에서 들었던 그 괴상한 대화다. 현실에서 환청을 들으면 꿈에서 깨기 직전에 느낄 수 있는 쇠사슬과 족쇄가 그를 뒤덮는다.

“아르페시스?”

페드로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왜 지금 그때의 환청이 들려오는 거지? 깨달음이 그를 강타했다. 미래에서 나누었을 이 대화가… 반정에 대한 것이었구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쏟아지는 건 검붉은 피였다. 아르페시스는 일전에 겪어 본 적 있는 일을 그대로 반복하며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입에서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낸 후 잇따라 코피가 줄줄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몇 번이고 이런 상황을 겪은 건 페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빠르게 당황을 떨쳐 내고 아르페시스의 뒷목을 주물러 주며 지혈을 시도했다.

‘나의 나약하고 추악한 모습을 눈치챈 그녀가 나를 내친 것이 분명하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문득, 버림받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언제나처럼 반항해 보지만 족쇄와 사슬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 --!

몇 년이 넘도록 그 속에서 무언가를 부르짖으면 무얼 하나?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스스로에게 대체 뭘 그렇게 부르는 거냐고 물어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 입으로, 제 목소리로 지독하리만치 애절하게 부르짖는 그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 --!

이렇게 간절한데, 어째서 간절하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아르페시스의 몸이 무너졌고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 * *

─ 아시스.

바로 조금 전까지 곱씹던 이상한 이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그녀가 있다. 사령관실 문 앞에 꽤나 수척해 보이는 에스메랄다가 서 있었다.

─ 오늘 시찰 일정을 취소했으면 해서 왔어.

─ ……몸이 많이 안 좋은 것인가?

이 여름에 감기라니.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 차라리 날 부르지 왜 여기까지 왔나? 방에서 쉬라는데도. 이리 아프면 올여름엔 방문하지 말고 황도에서 쉬지…….

거짓말.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왔다는 것을 타박하고, 오지 않았어도 된다는 듯이 말한 건 전부 거짓말이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마차에서 내리던 그녀의 안색이 나쁜 것을 알았으면서도, 와 주어서 기뻤다.

─ ……오다가 몸이 안 좋아진 거야.

파리한 입술과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에 마음이 아픈 것은 진심이건만, 그래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음에 기뻐했다. 이기적인 놈.

─ 우선 들어가서 쉬지. 시찰이 뭐가 중요하다고 여기까지 오나.

그는 곧장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녀를 이렇게 안아 본 건 처음이라 이전의 체중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아도 그녀는 지난해에 비해 조금 말랐다. 내륙에서 귀족들과 드잡이를 하는 게 많이 힘든 것일까?

미간을 좁힌 채 생각을 곱씹는 사이 그녀가 머무는 손님방에 도착했다. 서둘러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혀 주자 나른한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아픈 것을 빤히 보고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머릿속에 살색이 들어찬다. 짐승 같은 놈. 그는 스스로를 욕하며 서둘러 몸을 빼냈다.

─ 아시스.

그의 시야가 뒤집히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에스메랄다였다.

─ 보자마자 할 말이 당장 증액은 힘들 것 같다는 소식이라, 면목이 없네.

기어코, 황실에서는 남부군 운영 예산의 증액을 반려했다. 그는 혀를 차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미안해.

─ 왜 그대가 사과를 하나. 15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난 마수의 수를 보고도 반려한 황제와 중앙 귀족들이 잘못한 것인데.

전사하는 대신 끈질기게 살아남아 남부군의 충성을 얻은 후로 황제의 견제가 심해지고 있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말고 마수나 막으라는 압박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지원을 끊어 버림으로써 목줄을 졸라 죽여 버리겠다고. 그리하면 내륙에 있는 그들 역시 위험하지만, 먼저 죽는 건 남부에 있는 이들이다. 누구의 피해가 더 클지 너무나 분명하다.

짙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또다시 시야가 뒤바뀌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바뀌는 장면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언제나 그를 ‘아시스’라고 불렀다.

─ 알.

그러다 어느 순간, 에스메랄다가 황제나 부르는 그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 뭐야? 표정이 왜 그래? 편하게 대하라며?

─ 이름은 부르지 마라, 뭐 그런 심보야?

─ 그럼 다른 이름으로 부를까?

─ 페페?

─ 아니면 페시스?

─ 까다롭기는.

─ 그럼 매번 불편하게 아르페시스, 아르페시스, 그렇게 부르라고? 네 이름은 너무 길잖아.

─ 아, 그럼 아시스는 어때?

그녀의 목소리 뒤로 따라붙는 대답은 그의 것이었다.

─ 마음대로 해.

하지만 족쇄와 쇠사슬은 또 한 번 그의 발목을 잡았다.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난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시스…….”

꿈속의 잔상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평소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는 협탁에 놓인 종이에 날짜를 기록하며 다시 중얼거렸다.

“아시스…….”

미래에서 에스메랄다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왜 그런 호칭이 생긴 것인지도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선 에스메랄다와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 이름을 부른 거지?

‘천사는 매일 울면서 깨.’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혹시, 그녀가 꾼다는 악몽이 그의 것처럼 미래를 보는 것인가? 아르페시스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만약 그녀가 그처럼 미래를 꿈으로 본다면, 변하지 않은 미래가 도래했을 경우 맞이할 스스로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악몽이라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아르페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여러 상황에서 꿈과 현실의 미래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그녀에게 오는 끝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꿈을 통해 미래를 봄으로써 가져야 하는 것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오늘도 한숨을 내쉬며 떨칠 수 없는 짐을 짊어졌다.

* * *

케니스는 갑작스러운 방문자를 확인하고 꽤나 놀란 상태였다. 루그레디안 쪽으로 갈아타며 행적을 완전히 지웠었는데 에스메랄다는 그게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그를 찾아왔다.

“놀랍다고 해야겠군.”

“놀라울 것이 뭐가 있나요. 당신이 절벽 위에 올라가 똬리를 틀었을 때도 찾아냈던 저인데.”

후드 안에서 들려오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 여기저기 긁힌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고 해야 할까?

케니스는 후드 아래 보이는 작은 몸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 일단 자리부터 옮기기로 했다. 에스메랄다를 마땅찮게 보면서도 당장 쫓아내지 않는 건 그녀가 남부군을 향해 보내는 존경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루그레디안을 만나기 전까지 반군의 명목을 이을 수 있게 해 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 은혜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해 버리긴 했지만, 그건 사사건건 제 행위를 틀렸다 말하는 방해를 치워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지 그녀의 지원을 괄시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천막으로 그녀를 안내하면서도 케니스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그가 보는 에스메랄다는 희생 없이는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그녀는 무고한 이들은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이상 속에서 살고 있고, 그 방향으로는 케니스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다. 2년 넘게 신세를 진 에스메랄다 대신 루그레디안에게 의탁을 결정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발목이 붙들리고 싶지 않아서, 나아갈 길이 있어서. 그라고 무고한 이들을 죽이고 싶겠나? 그저 희생을 감당하더라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기에 결심을 한 것뿐인데.

자리를 권하자 그제야 에스메랄다가 후드를 걷었다. 케니스는 후드 아래에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거렸다.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고, 눈매는 붉게 달아오른 것으로도 부족해 퉁퉁 부어 있었다. 입술은 또 어떠한가? 마치 죄다 쥐어뜯은 것처럼 붉은 피딱지가 가득했다.

웬만한 공작가나 후작가보다 많은 자금을 운용하는 테노리엘의 고명딸이라고 보기는 힘든 모습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외관과 달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가 아니었다면 죽기 직전의 병자가 왔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녀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케니스는 에스메랄다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었다. 테노리엘의 저력은 그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규합하는 반군이 늘어나도 언제나 그에 맞춰 물자를 준비해 주었다. 영지에 있는 테노리엘의 가용 병력은 6천 정도이지만, 군부 사정을 아는 이는 그들의 사병이 1만을 넘는다는 것을 안다.

에렘에는 남부 전선에 보내는 자원병으로 인해 사병의 수가 빌 경우 신규 충원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이 있다. 테노리엘은 그 법을 적극 이용해 남부에 4천이 넘는 지원병을 보내고 국경 가문으로서 허락받은 6천 병력까지도 꽉 채우고 있다. 자원병으로 보내는 병력에게 남부군이 해 줄 수 있는 건 물자 지급뿐이다. 그들의 봉급은 여전히 해당 가문이 감내해야 한다.

결국 재력이 뒷받침되는 가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인데……. 남부군에서 자원병만으로 구성된 20부대의 7천 병력 중 6, 7할가량이 테노리엘의 사병이다. 20부대를 테노리엘의 부대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정말 어딜 봐도 테노리엘 출신의 사병들뿐이라 그런 것이다. 그리고 케니스는 에스메랄다와 교류하며 테노리엘의 저력이 1만을 훌쩍 넘어가는 병력을 운용할 정도임을 확인했다.

목표를 위해 추구하는 수단이 너무 달라서 그렇지, 사실 에스메랄다는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든든한 뒷배였다. 테몬은 1여 년 만에 1만 병력을 유지하는 것을 버거워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그나마도 테몬 후작가가 곡물 상단을 가지고 있기에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테노리엘은 그 곡물 상단도 없이 2년이 넘게 반군을 지탱해 주었다. 탐이 나는 뒷배임은 당연하지. 또다시 입술을 꾹 깨물며 상처를 내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케니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가 루그레디안의 후원 쪽으로 갈아탄 후에는 추가적인 접촉 시도가 없었다. 말해 보았자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녀가, 이제 굶어 죽을 일이 없는 그들을 포기를 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방문은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가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하는 동안 에스메랄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 테몬 후작님과는 사이가 좋은가 보죠?”

1년 넘게 침묵했으면서 이제 와서 따지기라도 하려는 건가? 케니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대보다는 훨씬 열린 사람인지라 도움을 많이 받고 있소.”

몇 년 동안이나 사사건건, 범법 행위를 관두라는 에스메랄다의 잔소리를 무시해 왔던 케니스였다. 그는 에스메랄다와 스스로의 방식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당시에는 병력을 유지하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잔소리를 들어도 꾹 참는 방식으로 넘긴 것뿐이다.

그러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뒷배를 갈아탔지. 그런데 대뜸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당신… 당신은…….”

에스메랄다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쥔 채 테이블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기까지 했다.

“황실을 무너트릴 생각이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선택한 단어는 말을 돌리지 않는 직설적인 것이었다. 케니스는 에스메랄다의 표정과 행동을 유심히 살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새삼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는 것일까?

“당연히.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에스메랄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벌벌 떨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매번 꺾이지 않을 나무처럼 꼿꼿하게 잔소리를 해 대던 그녀가 저렇게까지 동요하나?

“그럼,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라도 황좌를 가지고 싶은 건가요?”

에스메랄다는 우회적인 단어를 선택할 만한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케니스는 에스메랄다의 이상한 태도를 계속 관찰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가 뭐라도 말을 해야 저쪽에서도 말이 나올 테니까.

“그대가 오해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내가 원하는 건 황좌가 아니라 정당한 남부 지원이오. 난 군인이지 정치꾼이 아니니까.”

“…….”

“결국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행동, 그래, 영애가 범법행위라고 하는 모든 것들 말이요. 그건 남부의 미래를 위해서요.”

희생 없는 승리는 없는 법. 케니스는 자신의 부대가 이탈했기에 생긴 피해를 알고 있었다. 군대란 한 부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대가 머리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이행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의 부대가 퇴각 작전을 이행하지 않고 자리를 비움으로써 죽은 사람들이 존재할 터.

민간인의 대피 시간을 위해 버텨 주어야 할 병력의 부재는 마수들의 빠른 북상을 야기했을 테니,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 죽음에 먹혔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고한 그들의 목숨을 버려도 이루어야 할 대업이 있었다. 케니스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선택이 틀렸다 지적하며 앞길을 막으려 들던 이가 울먹이는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 이후 에렘은 어떻게 하려는 거죠?”

“테몬 후작이 알아서 할 거요. 그는 기반을, 나는 검을, 개혁 이후 남부의 재건과 존속이 내가 그에게 내건 조건이니까. 황실의 이름이 바뀌든, 허수아비가 서든, 나와는 관계가 없소. 남부군 지원만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말이오.”

말했듯 방식이 맞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테노리엘은 테몬보다 더 든든한 뒷배였다. 영지에 있는 장인들과 병장기 상단을 통해 무구를 자체 수급할 수 있을뿐더러 유사시 병력 전체를 뒷받침해 줄 자금력까지 갖추었으니까.

케니스의 심장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싹텄다. 방식의 다름으로 끊어 내야 했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대체 왜 이런 주제를 꺼내는지 확실히 알아내야만 했다.

“정말 황권을,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되는 일만 한다면 세상이 어찌 변하겠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 여기는 이가 말했다.

“그 불가능이 가능이 될 수 없는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말인가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여 끝끝내 불가능의 끝을 보았던 이가 말했다.

“하지 않는다면 변화도 없는 거요. 나와 같은 노력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가능해지지 않겠소?”

도전이 없다면 성취 역시 없다. 변화를 머릿속에서 바라기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변화는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케니스는 이어 나온 에스메랄다의 말에 짧게 혀를 찼다.

“그 과정에서 죽는 이는 얼마나 나오죠?”

울음이 섞인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그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역시나, 괜한 기대였나? 그녀의 우선순위는 아직까지 변화와 개혁이 아닌 무고한 이들의 생명에 있다.

“남부군에서 에렘을 지켜 온 이들이 반군의 이름으로 죽겠죠. 그 내전에 휘말려 죽는 백성들은 얼마나 되죠? 황도가 전쟁터가 되었을 때, 그저 최선이라는 변명으로 만들어진 선택에 휘둘려 죽는 이들은 몇이나 되냐고요!”

감정적으로 동요한 것이 분명한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케니스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임을 넘어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꼭… 그래, 케니스는 지금의 에스메랄다가 좌절 직전에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내게 달려와 이리 떼를 쓰는 거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꼿꼿하던 테노리엘이 저러는 것인가. 케니스는 참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에스메랄다의 흐느낌 속에서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되묻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딱딱해져 있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치아로 입술을 짓씹으며 딴소리를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보였다.

“이길 수 있나요? 반드시 황제를, 황태자를 끌어내린다고 확답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확답을 듣고 싶은 사람의 재촉. 아니, 확답을 들어야만 하는 사람의 재촉 같았다.

“말하지 않았소? 그 어디에도 확답은 없소. 그저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

“노력만으로는 안 돼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강박적인 소리를 지른 그녀의 몸이 기어코 무너졌다.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접어 무너진 그녀의 몸은 통곡을 토해 냈다.

“황태자가, 황태자를 어떻게든 끌어내려야 해요.”

울음의 끝에 도달한 에스메랄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린 후에야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사자의 유가족들이 실종됨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조사를 진행했다는 말로 시작된 얘기는 길었다.

그녀는 납치 현장을 목격한 자의 진술과 최근 폭행 사건과 근신 처분을 받기 시작한 황태자의 근위 기사를 포섭했다. 그 기사의 진술을 토대로 황성에 들여 놓은 세작들이 조사를 진행, 실제 유가족들의 시체가 근위 기사를 통해 황성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가려져 있던 진실이 에스메랄다의 입 밖으로 나와 케니스와 그의 부관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 뭐라 했소?”

케니스는 지금 저가 들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평생을 듣고 말해 온 에렘어이건만, 그 속에서 골라진 단어와 문장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으니까.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때문에 케니스의 콧수염이 이리저리 들썩거리고 있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게 번거롭거나… 방치할 경우 흔적이 남는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서 경계선 너머로 올라와 있던 마수를 포획해 그놈들의 먹이로 주고 있었어요. 제가 보낸 기사들이 마수가 먹기 전에 빼돌린 시체는…….”

“…….”

“기사들 말로는, 산 채로 피가 빠져나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심장이 뛰는 동안, 동맥이, 동맥이 잘린 거라고…….”

에스메랄다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태로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 갔다. 남부군 소속이었던 병사들이 범법 행위를 한다 해도 굶어 죽일 수는 없다는 이유만으로 2년이 넘게 지원을 해 온 에스메랄다였다. 그런데 남부군 전사자의 유가족들이 황태자의 목욕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케니스는 에스메랄다의 변화를 절절히 이해했다. 그의 속에서도 그녀의 것과 같은 충격과 분노가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그놈이 제위를 이으면 아, 안 돼요. 어떻게든… 끌어내려야 해…….”

어떤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황태자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그 과정에서 따라올 피해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다. 케니스는 분노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에스메랄다가 제 방식에 동조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분노와 전율이 뒤섞여 그의 얼굴을 달구었다. 테몬과 더불어 테노리엘까지, 황제파 귀족들을 건드리며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반군의 행적이 변화할 때가 다가왔다. 쉴 틈 없이 눈물을 쏟아 내던 에스메랄다가 혼절한 것을 본 케니스의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황태자는 정말로 올봄부터 전사자들의 가족을 납치하고 있었다. 여름 동안 열심히 황성 내부로 집어넣은 로부오들이 그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했다. 그 목욕물을 마련하는 과정을 수정 마도구에 기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실패했다.

대신 에스메랄다는 납치와 이후 황태자 궁에서 나오는 시체들의 모습을 증거 자료로 쓰기 위해 차곡차곡 기록해 두었다. 너무 빠른 발견은 그녀의 저력을 노출시키기에 케니스와의 접선은 가을까지 미루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때처럼 낙엽이 지고 있는 가을날 케니스 앞에 선 이유였다. 1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혼절한 척 쓰러진 다음 날, 케니스에게 반군 병력을 유가족들의 호위로 차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어차피 당장 황도로 쳐들어갈 수는 없으니 케니스는 흔쾌히 동의했고, 그 대가로 반군 규합과 지원을 약속받아 갔다. 목표했던 일을 마치고 서부로 돌아가기 전, 에스메랄다는 잠시 영지로 내려와 있던 루그레디안을 은밀히 만났다.

허름한 여관방 안이었다. 이 여관의 주인은 알까? 제 여관 안에서 반역에 대한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스튜를 들었다. 케니스와의 일이 끝났으니 다시 식사를 해야 할 시기였다. 이틀이나 굶었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마나 장막은 시리스가 아닌 루그레디안의 기사가 펼쳤다. 몇 년 사이 실력이 늘어 상급 기사를 목전에 두고 있다지만 시리스는 아직 중급의 실력에 머물러 있었다.

“곧 배가 뜰 거요.”

에스메랄다는 아비체룬에 다시 한번 세작을 넣기 위해 랑뒤르 왕국을 오가는데 사용되는 테메프 상단의 무역선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비체룬과 섬나라인 랑뒤르의 영토 중, 쪽배로도 오갈 수 있을 만큼 해상의 거리가 좁은 지역, 그곳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계획 자체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곧 출발하게 될 무역선은 해당 지역 인근에 있는 랑뒤르의 항구로 가는 배로, 도착 직전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침몰될 예정이다. 불을 내는 건 당연히 선원으로 위장한 채 타게 될 로부오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배가 침몰하면 헤엄을 쳐서 아비체룬의 영토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야밤을 틈타 항구를 통해 침입하려는 외국인들을 경계하는 기사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녀는 서부 대란 무렵부터 꾸준히 세작을 집어넣고 있다. 이번이 세 번째 시도, 제발 누군가는 먹음직한 약점이나 명분을 가지고 돌아와 주기를 기도해야겠지.

“자작과는 어땠소?”

“쉽게 넘어오더군요. 전사자들의 유가족과 관련된 일이니 속이기도 쉬웠죠.”

에스메랄다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꾸역꾸역 스튜를 먹었다. 이동하는 틈틈이 묽은 음식으로 몸을 회복해 영주 성에 돌아가면 즉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실테르는 어떤가요?”

“차출 병력의 규모까지 얘기가 진행된 상태인데… 병력 지원에 대한 대가는 아직 조율을 해야 할 것 같소. 다행히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듯 보이오. 국왕 폐하께서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보고 계시니 내전 후에도 국고를 어느 정도는 보존할 수 있을 것 같소.”

현재 실테르의 국왕은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 손을 빌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의 판단이 에렘의 미래를 열어 줄지, 그저 실테르의 병력 손실만을 야기하고 끝날지는 훗날이 되면 알 수 있으리라. 아직 병력 지원에 대한 대가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철광 거래를 열어 달라고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에렘은 산악 지대에서 발견되는 광석이 매우 많고 다양한 반면, 실테르는 아니다.

“아직 말은 없지만… 아마도 그렇겠지.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자원이니 아브람 백작이 문만 열어 주면 실테르의 참전은 확실할 것 같소.”

“인간이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간악한 면모 역시 가지고 있지요. 너무 믿지는 말도록 하세요.”

“……주의하고 항시 경계하도록 하겠소.”

루그레디안과의 대화는 케니스와의 것처럼 반응을 신경 쓰고 행동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실테르의 내전 참여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체룬의 일에서 진척이 없는지라 면목이 없군요.”

“애초에 성과의 지표가 가장 모호한 일이었으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새로 보내는 세작들까지 실패하면 아비체룬은 배제하는 쪽으로 새로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아요.”

에스메랄다는 루그레디안을 비롯한 이들에게까지 로부오의 명칭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건 오로지 그녀만을 따르는 세력이니까.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 루그레디안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꺼냈다.

“하면 중서부 경계선 인근의 병력은 어찌할 생각이오? 지금 반군의 규모는 나누기에 힘들 것 같소만?”

에스메랄다는 반쯤 빈 스튜 그릇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반군은 슬슬 규모가 커질 때가 되었어요.”

그동안 케니스는 착취와 폭행을 당연하게 일삼아 온 황제파 귀족들의 주머니를 털어 왔고, 그의 성과가 에스메랄다의 뒷골목을 통해 에렘 전역에 퍼진 지 꽤 되었다. 결과적으로 반군의 움직임이 단발성 저항이 아닌 연속성 저항임을 인지하는 백성들이 늘어난 상태. 반군을 정착시키기 위해 소모한 몇 년이라는 시간이 그런 인식을 심어 주었다.

“황실에 반감을 가진 일부 과격한 백성들이 합류할 시기가 되었죠.”

‘나를, 우리를 괴롭게 하는 귀족들을 직접 처단하자’라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일부 백성들은 반군에 가담하려고 할 것이다. 저들이 지지하는 이들 역시 귀족이라는 건 깔끔하게 지운 채로 말이다.

반군의 목적은 황위 찬탈이 아니다. 남부군의 정당한 지원을 얻기 위함이지. 반군은 그저 그 과정에서 제위의 주인을 바꿔야 한다면 감내할 만큼의 각오를 하고 있을 뿐이다. 두 가지는 분명 다름에도 백성들은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분노를 풀어낼 기회와 명분이 필요할 뿐이다.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들로 반군을 채우면 최소 2만 이상의 병력 증강이 가능하리라. 에스메랄다는 백성들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집단을 생각할 때마다 치솟는 증오와 역겨움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들을 소수의 규모로 움직이는 반군들과 연결해 줄 생각이에요. 지금까지는 병력을 동원할 만한 규모가 되지 못해 활동이랄 만한 것이 없었지만… 백성들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황제파 귀족의 소굴을 건드는 일에 합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정보에 의지했던 알그레노 쪽이 주춤하겠죠.”

“……알그레노에게 연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랬다간 후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자작이 제멋대로 굴어도 제지할 만한 방법이 없어요. 병력은 그를 따르지 후원자인 우리를 따르는 게 아니니까요. 대항할 세력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어야 해요. 정보전에 치중했던 소수의 반군들이 이미 케니스의 무력을 경계하고 있으니 쉽게 진행될 겁니다.”

루그레디안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반군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구심점이 확실해야 했기에 가장 극단적인 성향의 케니스를 짚어 키워 왔다. 하지만 그의 독주를 계속 방관하다간 훗날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기에 적당히 안전장치를 걸어 줘야 한다. 케니스를 견제하는 다른 소수의 반군들이 뭉치게 만들고, 이후 백성들을 흡수해 병력을 채우도록 하는 것, 그게 에스메랄다가 생각해 낸 안전장치였다.

“반군이 모두 그의 휘하에 복속된다면 훗날 반정의 모든 공을 그가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죠. 황실의 몰락을 바라면서도 그들은 속에서 그 몰락에서 오는 공을 차지하고 싶다는 탐욕을 가진 이들이죠.”

그러니 아직까지 케니스에게 합류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반군 병력을 만들어 내도 두 세력을 지원하는 건 모두 우리 쪽이니 괜찮을 겁니다. 여차하면 다시 한번 10여 년을 들일 각오로 그들의 보급로를 끊어 내는 방법도 있으니 시도해 보죠.”

소수로 뭉쳐 정보전에 주력하고 있는 반군, 그들은 본인들과 달리 이미 무력을 손에 넣은 케니스를 경계한다. 케니스라는 공통의 견제 대상이 있으니 그들끼리의 협력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터. 케니스의 반군이 커진 것처럼, 이제 소수의 반군이 서로 뭉쳐 가며 커져야 할 때가 왔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지금보다 조금 더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그들을 훈련시키면… 내전을 치를 만한 수준은 될 거예요.”

“알겠소. 그럼 알그레노에게는 따로 언질을 하지 않고 방관하지.”

“소수로 움직이는 이들에게 말을 흘리는 건 제가 맡죠. 백성들을 흡수하는 건 그들이어야 하니까요.”

“황도에 숨어 있는 반군과의 접촉은 내가 하겠소.”

“부탁드리죠.”

식사를 마친 후 오래지 않아 대화도 끝났다. 아니, 끝났다고 여긴 건 그녀뿐이다. 루그레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후의 일은?”

“…….”

“난 그대가 왜 이후의 일에 이렇게 미진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소.”

에스메랄다는 루그레디안을 등진 채 침묵했다. 다나와 첸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것을 지금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에스메랄다의 시야 속에 아르페시스와의 미래가 들어와 버렸으니까.

“그들을 끌어내리면 새로운 주인이 필요하고, 현재 남부에서 공적을 세우며 에렘을 지키고 계신 황자 전하만 한 분도 없지 않소? 백성들 중에 그분의 이름을 모르는 이도 거의 없…….”

“경고했을 텐데요.”

그녀의 허락 없이 아르페시스에게 접촉하거나 그를 제위에 올리려고 했다간 내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황제에게 모든 것을 고발해 망쳐 버리겠다고. 에스메랄다는 여름에 찾아온 의문에 두 가지 답안을 찾았으나, 아직 선택은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루그레디안의 행동이 훗날 그녀가 할 선택을 방해할까 봐 단속해 두었다.

“이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지난여름에도 다음이더니 이번에도 다음이군.”

“…….”

“……기다리겠소.”

루그레디안은 이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 그녀의 아랫사람임을 명확히 하고 합류했다. 지금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붙잡지 않고 놔준 건 상관인 그녀를 존중하고 있으며 그날의 복종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그레디안이 명예를 알고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라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진즉 아르페시스에게 접촉했을 테니까. 언제까지 그의 인내심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통제가 되고 있다.

“그럼, 다음에 보죠.”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화의 끝을 알렸고 루그레디안이 답했다.

“……알겠소.”

홀로 뒷골목이라는 음지 세력의 기반을 다지는 데 3여 년, 협력자들을 포섭하며 양지 세력의 기반을 만드는 데 다시 3여 년, 그것을 키우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까지 또다시 2년에서 3년. 그녀가 꿈꾸어 온 끝의 고지가 머지않았건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함과 불안감이 짙어지기만 한다.

에스메랄다는 루그레디안과 시간 차를 두고 헤어지기 위해 먼저 출발했다. 그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영지가 아닌 황도로 움직일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실테르와의 우호를 다지는 데 힘쓰겠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라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일정이 지체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앓더라도 돌아가서 해야 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루그레디안과의 대화가 그녀에게 쥐여 준 의문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내전 이후, 라는 간단한 명제에서 추려 낸 두 가지의 답은 모두 그녀를 괴롭게만 만든다. 아르페시스의 승낙과 거절, 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는 모두, 그녀에게 달갑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아르페시스가 황위에 오르면 그와의 미래에서 에스메랄다는 황후나 황비가 될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사랑은 지독히도 깊고 강렬했고, 그녀 역시 아르페시스를 다른 여인에게 빼앗길 생각은 없으니까. 또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육체적인 욕망 역시 숨기지는 않았다. 미루었을 뿐이지.

그러니 남부를 벗어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게 된다면,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 청혼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남녀의 육체관계는 배필과만 나누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황실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황족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했던 아르페시스와 달리, 그녀는 황족인 황제와 황태자를 경멸했다. 결국 에스메랄다에게 황제와 황태자가 쓰던 에렘의 이름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다.

에렘의 이름을 쓰기 싫다면 정부가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평생 정부를 두는 귀족들을 경멸하며 살았던 그녀가 직접 정부가 되라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또한 제위에 오른 그에게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흘린 피가 에스메랄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도 숨겨야 한다. 감추는 것이 있는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까? 평탄치 못한 미래가 되리란 건 자명하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아르페시스가 황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제위를 이어받지 않음으로써 에렘에 생기는 모든 혼란도 문제였다. 본래는 그를 선택지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생각했기에 그녀와는 상관없는 문제였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죽인 후 비어 버린 황좌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전쟁이 일어나든, 아르페시스 외에 유일하게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고령의 황족이 꼭두각시 황제가 되든 상관없었다.

그가 남부로 갈 무렵에는 2명뿐이었던 계승자가, 지금은 유일하다. 올여름에 다른 한 명이 죽었으니까.

결국 어느 쪽이건 혼란이 올 터. 그 혼란 속에서 루그레디안이 중심을 잡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목표는 신전과 황실의 몰락이었고 그것을 위해 백성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이후 야기되는 문제로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알 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오르지 않음으로써 혼란이 시작되면…….

어떻게 떨쳐 내야 할지 모를 갑갑함이 그녀를 덮은 채 말했다. ‘넌 빠져나갈 수 없어’라고. 이 속에서 빠져나가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수들의 공세는 강해지기만 한다. 42년 무렵 남부군이 죽인 마수의 수는 27년 무렵에 비해 3배 가까이 불어나게 된다.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다. 치고 내려가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3개국의 전선은 뚫린다. 그런 시간적 압박 속에서 루그레디안이 중앙의 혼란을 다잡는 데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지?

그가 노력하는 동안 남부 지원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확률은? 몇이나 되는 사냥개들이 루그레디안이 남부군에게 쥐여 주는 생명줄을 뜯어먹고 싶어 할까? 그것을 시도하고 결국엔 성공해 낼 이들은 또 얼마나 되지?

만일의 경우 남부군의 지원이 정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지원이 인구수를 늘려 주는 건 아니기에 남부만으로는 전선을 지키는 게 힘들어질 터. 남부에 손을 쓰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에렘은 매년 늘어날 마수들에게 집어삼켜지고야 말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에렘이 무너진 후 뒤에 있는 후방국들이 마수를 상대로 오래 버틸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 나라의 병력이 얼마나 잘 훈련된 정예병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전쟁의 상대방이 마수라는 특수성과 인구에 관련된 문제였다.

인간을 상대로 연습을 해 온 이들은 마수를 처음 마주한 순간에 동요할 수밖에 없다. 그건 절대적인 진리였다. 그것들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괴물이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포를 직면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한다. 백작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남부에 가서 전투를 관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부 대란 때 영주들의 사병이 그러했던 것처럼 탈영병이 속출할 것이고, 그들이 자리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공포를 버티고 남은 이들은 죽어 나갈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저항하며 싸울 수는 없기에 마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 외, 현재 남부 전선을 지키고 있는 에렘, 실테르, 아비체룬의 국력도 생각해야 한다. 대륙 중부의 입구를 막고 있는 3개국의 전선을 면적으로 계산했을 때, 5할 5푼가량이 에렘의 몫이다. 이 상황에서 에렘이 버텨 낼 수 있는 이유는 제국이라는 칭호,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토와 인구 덕분이다.

에렘의 평균 인구는 아비체룬과 비교했을 때는 4배가량, 과거 제국의 칭호를 썼던 실테르와 비교를 했을 때는 2.5배를 약간 웃도는 규모다. 전선이 생겼던 시기에 남부의 자체 인구는 아비체룬의 전체 인구보다 조금 적은 정도였다.

병장기를 수급해 줄 장인들, 시장에서 유통되는 철기구와 인구와 소비량에 따른 시장 규모까지. 타국을 압도하는 저력의 에렘이 무너지면? 실테르와 아비체룬은 각기 서쪽과 동쪽에 새로운 전선을 가지게 되고, 북쪽에 있는 세튀스나 롤베르만도 전선을 떠안아야 한다.

영토과 인구, 자국 내의 농작 상황과 시장 규모, 병장기 수급, 마도구 생산량까지. 모든 것을 따져 보았을 때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할 세튀스와 롤베르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4년에서 6년. 이미 해상에서 출몰하는 일부 마수를 상대 중인 아비체룬과 실테르가 3방위로 늘어난 전선을 두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은 4년 미만.

에렘이 뚫리면 대륙 전역이 마수들에게 잠식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모두 에렘의 제위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도래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어 결국 대륙 전역이 마수에게 잠식되면, 아르페시스와의 미래는 대관절 어디에서 누린단 말인가?

마수들은 인간을 구분해서 죽이지 않고, 인간의 영토를 구분하여 침범하지 않는다. 이득을 위해, 명분을 위해 타국을 침략하는 인간들의 전쟁과 달리 마수와의 전쟁에서는 타협이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의 존재 목적은 주신이 창조한 인간의 멸망. 대륙 전부를 집어삼켜 남아 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을 때까지 마룡과 마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르페시스와의 미래를 위해 증오해 마지않는 백성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멸망을 저지해야 하는 건가? 하루는 대륙의 모든 인간이 마수에게 잡아먹히든 말든 알 게 아니라며 외면하고, 또 하루는 그 멸망이 도래하면 아르페시스와의 미래마저 사라진다는 것을 상기하며 주저앉는다.

어째서 신은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나.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만 살 수 있다면 이러한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버겁고 힘들기만 한 선택의 앞에서 휘청거렸지만 그럼에도 예정했던 일자에 영지로 복귀했다. 그녀는 당장 방에 들어가 목욕부터 한 후 집무실로 향했다. 급한 지시 사항이 없어 보고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가씨!”

일이 끝난 후 곧장 침실로 돌아가 쉬려던 그녀는 복도 끝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단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단.”

물을 먹은 솜처럼, 기름에 절여진 가죽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그녀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냈다. 피곤하다 해도 공사는 구분해야지. 라그나를 위한 접대는 그녀가 심혈을 기울이는 업무였다.

“돌아오셨군요!”

몇 년이라는 시간은 그녀뿐만 아니라 나단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비쩍 마른 소년은 어디를 갔는지 그는 이미 훌쩍 자란 청년이 되어 있었다. 살집이 오르는 건 물론 피부가 고와지고 자세가 곧아지니 나단은 꽤 예쁘장한 미청년이 되었다.

윤기가 흐르고 있는 회색 머리카락은 구불거려 폭신한 느낌을 주었고 노란색 눈동자에는 언제나 생기가 돌았다. 예전과 달리 아주 잘 웃게 된 것도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항시 얼굴에 미소를 달게 되어서인지 어두침침하던 인상은 화사하게 피어났다. 말도 어눌한 구석 없이 제대로 하고 개인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잘 다녀오셨어요? 힘드시진 않으셨어요? 안 계시는 동안 전격 마법을 익혔어요! 아직 구현이 좀 불안하긴 한데, 스승님께서 이 속도면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시험을 봐도 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더불어 말도 많아졌고.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순수하고 귀여운 나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친화력은 정말 대단하나 운용력은 좀처럼 늘지 않는 그는 원소 마법에 집중하며 실력을 쌓고 있었다. 황실이 전투 마법사에게 요구하는 자격에 따르면 원소 및 보조 마법을 10개 이상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단이 지금 사용 가능한 원소 마법은 5개, 그리고 보조 마법 3개였다. 마법별로 마나 배열이 모두 다르니 종류를 많이 배우는 대신 최저 요구 선에 맞춰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화염 마법 하나를 시전하기만 해도 마을 하나는 거뜬히 태울 정도니 그에게는 이 방법이 맞았다.

“노력에 성과가 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

에스메랄다는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피로를 미소로 가렸다. 순수한 호의를 보이는 나단과의 대화는 힘들지 않기에 때때로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게 된다. 에스메랄다가 지난여름 이후 보지 못한 루이자를 떠올리는 동안에도 나단의 말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헤헤, 빨리 10개를 채워서 시험을 보고 싶어요. 그럼 아가씨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참! 오늘도 꽃을 가져왔어요.”

그는 제 가슴께 주머니에 꽂아 두고 있던 가을꽃을 꺼내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나단에게서 꽃을 받는 건 만날 때마다 지속되는 일이기에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그 꽃을 통해 제 침실에 있을 금색 라퓨나를 떠올리며 복잡한 것들을 잠시나마 밀어냈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우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성급함은 때때로 일을 그르친다고요.”

나단은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나단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아, 식사!”

“응?”

“식사는 안 하셨다고 해서 온 건데 너무 들떠서 완전히 까먹어 버렸어요!”

나단은 그때부터 에스메랄다를 재촉했다. 다 본인의 경험이라면서, 잘 먹어야 잘 큰다는 당연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일도 좋고 휴식도 좋지만 식사하고 올라가세요. 네? 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상념과 피로를 떨치고 싶었지만 지난여름 리퀘나에서 만난 아르페시스와 페드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페드로가 백작 성으로 휴가를 온 이후 에스메랄다는 다시 그가 주었던 약제를 챙겨 먹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르페시스와의 체력적인 차이가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그녀는 나단의 조름에 응해 침실이 아닌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페드로와 아르페시스를 위해서.

* * *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똑같은 족쇄와 사슬로 끝나는 꿈에서 빠져나와 눈을 끔뻑거렸다.

“오늘도 실패인가…….”

오늘도 그녀가 화마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에 대해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꿈이 그의 심리를 반영하는 게 분명한데 잠들기 전에 아무리 그에 대해 곱씹고 궁금해해도 관련된 장면은 보지 못한다.

오히려 전장에 서 있는 꿈을 이전보다 자주 꾼다. 최근의 하루 일과와 다를 것 없는 내용이다. 몸에 튀는 마수의 검은 피, 사방에서 울리는 살려 달라는 애원, 공포와 고통이 가져오는 비명, 전투 마법사들이 사용한 화염 마법에 마수들이 불타는 매캐한 냄새.

“답답하군.”

아르페시스는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천막의 중앙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있는 모닥불이 내부 공기를 덥히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오늘 본 꿈을 기록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간 꾸었던 꿈과 환청을 이리저리 모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던 이유는 이미 답이 나온 상태였다.

“반정인가…….”

아마도, 높은 확률로 에스메랄다는 미래에서 반정을 시도했고 실패해서 죽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지금 추측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언제부터 반정을 준비하는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디서 실패했기에 불길에 집어삼켜졌는지 같은 상세한 정보가 없었다. 일전 꿈에서 무슨 신탁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그녀가 신탁과 연관되는지는 모르겠다.

“언제 끝나는 것인지는 분명한데…….”

대륙력 1444년 카 64일, 그녀가 황도의 광장에서 죽는 날이다.

“대체 언제부터 시작하는지는 전혀 모르겠군.”

이미 그가 전선에 온 시기도 다르고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는 것도 다르니 미래가 변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에스메랄다의 끝도 바꾼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더 불확실했다. 그녀가 이미 반정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더 훗날에야 가지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지?”

만일 현실에서도 그녀가 반정을 준비하면 말려야 하는가, 지지해야 하는가. 그녀가 하는 일이니 무조건 지지하면 되는 건가? 남부라는 철창에 갇힌 신세로 그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에게 떨어진 의문에 대한 정답을 누군가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꿈을 통한 정보 수집은 성과가 너무 없었다. 그렇다고 대뜸 에스메랄다에게 반정을 준비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페드로가 아주 확실하게 부정한 방법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결국 민감하다 못해 위험한 주제였기에 혼자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내 보려고 했지만 성과가 없다. 이미 변한 미래가 똑같이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고, 에스메랄다가 정말 반정을 시도할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반정을 시도한다면, 그녀는 다음 황위의 주인을 누구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난여름 페드로와 반정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부터 계속 그 문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 미래를 빼앗아 간 사람이 없어지면, 그걸 되찾아 올 수 있는 거잖아.’

페드로가 했던 말이 그를 부추기는 기분이었다. 이건 그의 착각이나 자의식 과잉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서류상 적자였고, 다음 제위의 주인인 황태자가 없다면 계승권 순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황제까지 갈 것 없이 위에 있는 단 한 명, 황태자 단 한 명만 제거해도 에스메랄다와의 미래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가지기 위해 가야 하는 길에 해쳐야 하는 건 고작 한 명이 아니었다. 단순히 황태자를 죽이는 문제라면 쉽다. 그저 검을 뽑아 실력은 쥐뿔도 없이 마나만 넘치는 그놈의 목을 치면 되니까. 문제는 황태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까지 가는 일이다.

황성에 잠입? 말이야 쉽지, 그가 남부에서 이탈하면 당장에라도 황제가 보내 둔 근위대를 통해 그의 부재가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분명 황제에게 정기적인 보고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그들을 치우면 또한 금방 들통나겠지.

그렇다고 회유하자니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접선 시도가 그대로 보고될지도 모르니까. 고문을 해서 보고 일정이나 방식을 알아내도 문제다. 한두 명이 실종되는 등의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당장 이상 징후 등의 보고가 올라갈 수도 있다.

황태자를 죽인다, 라는 단순한 가정에서 빠져나와 세력 싸움으로 넘겨도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그를 지지하고자 하는 세력이 몇이나 있을까? 당장 회유를 시도하면 몇 명이나 끌어들일 수 있지? 아르페시스는 꿈의 내용을 기록하고 남은 종이를 끌어 와 이것저것 끄적거려 보았다.

‘남부군이 있잖아.’

페드로의 말대로 일단, 남부군. 그가 반정을 시도한다고 했을 때 무력이 되어 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세력이다. 문제는 그들 중 내전을 위해 남부를 비우는 데 동의할 사람이 몇 없다는 거겠지. 비워서도 안 되는 일이고.

“끽해 봐야 전투가 안정적인 여름에 급진파를 조금 동원할 수 있으려나……?”

아르페시스는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급진파 세력의 이름을 적으며 병력을 추산해 보았다. 남부군에서 급진파의 대다수가 반군으로 이탈해 버렸기에 그리 많지도 않았다.

“대략 8천… 인가…….”

중앙군은 이미 남부에서 사망한 파병군의 빈자리를 메꾸고 있는 중이었다. 남부로 파병되었던 중앙군이 귀환한 후 고작 두 계절 만에 1만의 병력이 보충된 상태니…….

“앞으로 계속 보충하겠지. 그럼 다시 7만까지 회복되는 건 순식간일 거고…….”

그들을 유지할 만한 힘이 황제에게 있으니까. 그럼 7만 대 8천의 전쟁이다. 아르페시스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남부군 급진파의 이름 옆에 다른 것을 써 내려갔다.

“테노리엘…….”

에스메랄다와 페드로의 가문이지만 아르페시스는 테노리엘 백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페드로는 반정에 적극 가담할 의사가 있는 것 같지만 테노리엘 백작도 그런가?

“그다음에 황제와 사이가 안 좋은 중립이… 테몬… 쿠베트… 예전에 아브람 백작이랑 황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던데… 귀 기울여 들어 둘 걸 그랬나…….”

중얼중얼, 몇 개의 이름과 숫자를 썼다가 지우는 일을 반복하던 아르페시스는 결국 깃펜을 놓고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만약 테노리엘이 정말 가담한다면 남부에 있는 자원병을 가담시킬 수 있으니 4천에서 5천가량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국경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어서 사병을 많이 빼긴 힘들 것이다. 또한 아직 사망 확인이 안 된 추정 탈영병 수가 2만에 달하니 그들을 모두 반군이라 생각하고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이들이 다 동조한다고 가정하면 6만 정도인가…….”

8천에 비해 해 볼 만한 숫자가 되긴 했지만, ‘모두가 동조한다면’이라는 가정이 성립되어야 한다.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사병을 차출하여 내전에 가담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전자는 신하의 올바른 말로 포장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명백한 반역이니까.

그들이 동참한다고 해도 넘어야 하는 산은 또 있다. 아르페시스가 반정 세력을 모으듯 황태자나 황제도 본인의 세력을 모아 병력을 늘릴 수 있다. 황제파 세력의 사병들을 합산하면 다시 병력 차가 벌어진다. 에렘에 존재하는 공작가는 5개, 후작가는 3개, 백작가는 13개, 도합 21개 가문.

그들 중 확실하게 황제의 뜻에 따르는 세력은 8개 가문. 제국의 공후백 중 3할이 넘는 수가 황제의 손아귀에 있다. 또한 그 가문의 가주들 중 무려 6명이 중앙 귀족이다. 봉신들 중 다수가 함께 국정 회의에 참여하는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막강하다. 내전이 일어난다면 중앙 귀족 외, 영지에서 생활하는 봉신들의 사병까지 합해야 하니 동원 가능한 사병 수는 아득하게 늘어난다.

반면 반황실 세력에 속하는 가문은 6개. 그들 중 중앙의 관직에 진출한 귀족은 라히크 백작과 테노리엘 백작, 아르텐 공작까지 3명뿐이다. 그들의 봉신들 중 일부가 중앙 귀족이지만… 황제파에 비해선 수가 적다. 그들의 봉신이 가진 사병까지 합해도 모자란다.

“나머지는 중립 가문들인데…….”

황제파와 반황실 세력으로 명확하게 나뉜 공작가들과 달리 후작가는 모두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 3개 가문과 백작가 중에서 4개 가문. 그들과 봉신들을 끌어들이면 가능성이 늘긴 하는데……. 중립 세력의 대부분은 국경을 영지로 두고 있다. 그들의 사병을 빼내 오면 국경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황제의 세력에도 국경을 이끄는 귀족이 몇 있지만 중립파는 정말 한 가문을 제외하면 전부 국경 가문인지라 암담할 지경이다. 현 테몬 후작이 작위를 승계한 이후 과거와 달리 황제에게 반하는 행보를 조금씩 보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중립을 벗어나지 않는 선이다. 또한 그의 미래를 위해 황위 찬탈을 시도하면 그 내전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지? 그의 미래를 위해 그들의 미래를 제물로 바쳐도 되는 것인가?

“하…….”

책상에 머리를 박은 아르페시스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답답하군.”

그의 손은 깃펜과 종이를 밀어내고 서랍을 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꺼낸 건 지난여름 에스메랄다에게서 받은 마도구였다. 페드로를 통해 이게 자동 발현 마도구라는 걸 들었을 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발동 조건에 포함되는 것들이 다가오면 자동으로 방패와 비슷한 형태의 실드가 만들어지고 발동에 사용된 마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마도구 수식이 여기까지 진보되었나 싶어 놀랐지만, 에스메랄다가 따로 데리고 있는 마법사가 만들었고 아직 세간에 공개하지 않은 기밀 품목이란다.

해서 근위대는 모두 전투 중에 나타나는 실드가 아르페시스의 자의적 발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덕분에 반사 신경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 픽, 하고 웃은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손에 쥔 채 그리운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에스메랄다…….”

이번 해의 겨울에는 그녀가 본인의 생일에 맞추어 리퀘나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함께 있고 싶다는 아르페시스의 청을 그녀가 받아 준 덕분이었다. 그녀가 오기까지 20여 일 정도가 남았으니 며칠만 더 전투에 참여하고 리퀘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번에 그녀를 만나면 최소한 그녀가 반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잠시간 마도구를 빤히 내려다보던 아르페시스는 곧 꿈을 기록한 종이를 잠금이 되는 개인 짐 내에 넣고, 귀족들의 세력을 정리한 종이는 불 속에 넣어 태워 버렸다. 때마침 출정 준비를 모두 마친 휴고가 그의 식사를 들고 천막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식사 시중은 페드로가 전담하는데?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휴고는 잠시 말을 고른 후 대답했다.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제가 왔습니다.”

“좋지 않다고?”

아르페시스는 제 몫의 식사도 제쳐 두고 서둘러 천막을 나섰다. 휴고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아르페시스가 도착한 곳은 페드로와 휴고를 비롯해, 새로 합류한 아스터나 데미안이 함께 사용하는 천막이었다.

“페드로.”

그 속으로 들어가 페드로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다른 기사들처럼 출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부름에 답한 페드로의 모습에 아르페시스는 휴고를 돌아보았다.

“별것 아니라니까 그걸 또 가서 말했냐?”

“별것 아니라고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페드로가 발화 마도구와 실드 마도구를 끼운 가죽끈을 목에 걸며 뒤돌아보았다. 아르페시스는 걱정이 가득한 휴고의 표정과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페드로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오늘 하루는 쉬…….”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넌 가끔 말을 정말 기분 나쁘게 할 때가 있어.”

“몇 년이나 봤으면서 새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휴고가 저런단 말인가?

“휴고의 말을 들어 보면 무슨 일이 있기는 했나 보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했더니 휴고가 곧장 답을 해 왔다.

“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저 녀석이 일어나 있었는데 그때 상태가 조금 이상했…….”

“그냥 꿈자리가 사나웠던 거다.”

페드로가 도중에 끼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다 듣지는 못했지만.

“꿈?”

“그래, 너도 꿈을 꾸잖아. 나도 그냥 그랬던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식사나 해.”

단순히 그렇구나 하고 넘기기엔 휴고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곧 출정이다. 가서 식사하고 무장해.”

페드로의 말대로 곧 출정이다. 이미 다른 이들도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그가 늦으면 출정 시간만 지연될 뿐이다. 그럼 조우 예상지보다 후방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고, 지형물이 다르다면 작전에 영향이 미칠 수도 있다. 아르페시스는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위해 천막을 나서면서도 따라 나온 휴고에게 물었다.

“대체 상태가 어땠기에 그러는 건가?”

“……깨어나 보니 녀석이 침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습니다.”

“…….”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녀석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는데… 울더군요.”

페드로가 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르페시스는 조금 얼이 빠졌다.

“울어? 페드로가?”

“……예, 갑자기 눈물을 떨구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뜬금없이…….”

아르페시스는 뒷말을 이어 가지 않는 휴고를 돌아보았다.

“뜬금없이?”

“……전하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말을 하더니 씻으러 가 버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기에 제가 전하의 식사를 챙겨 온 것입니다.”

갑자기 제 안전은 왜?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냥 꿈이라더니, 악몽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종류였나? 아르페시스 역시 꿈자리가 사나웠던 적이 많았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하,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오늘은 페드로를 대동하지 않는 게 어떠실지…….”

휴고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에게는 페드로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던 거겠지.

“알겠다,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페드로에게 말을 전하고 오도록.”

“예, 전하.”

그는 다시 돌아가는 휴고를 등지고 본인의 천막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 두고 나간 음식을 끌어 와 식사를 하고 있으니 한껏 굳은 표정의 휴고가 돌아왔다. 표정을 본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페드로가 함께 출정을 하겠다고 말한 모양이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걱정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휴고의 표정에는 언짢음과 화가 가득했다.

“다투기라도 했나?”

“예.”

단호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식사와 출정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와 다시 마주한 페드로는 정말 평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휴고와 그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사나웠을 뿐이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하루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르페시스는 휴고의 의견을 반영한 채 다시 한번 페드로에게 권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괜한 소리 할 시간에 출발하지.”

사람이 걱정이 되어 휴식을 권한 것인데 저렇게 말할 것은 또 뭔가. 물론, 직설적인 성격의 페드로는 가끔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곤 했기에 평소에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페드로의 말투가 악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솔직한 것뿐임을 안다. 그런 점 때문에 페드로를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페드로와의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 아르페시스와 휴고처럼.

뭐,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아르페시스는 휴고의 표정이 왜 그리 언짢았는지 알 것 같아서 표정을 구겼다. 몇 번 더 페드로를 떼어 놓고 가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그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고집하고는, 마음대로 하라!”

그렇지 않아도 직전까지 반정에 대해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암울했던 아르페시스다. 페드로의 출정 문제로 계속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언짢은 마음을 드러낸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의 고집에 물러서며 그들의 신경전은 끝나 버렸다.

아르페시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에 오르자 눈치를 보던 다른 이들도 서둘러 말에 올랐다. 기분이 좋지도 않고, 출정을 해야 해서 시간이 많지도 않은 상황이라 그는 곧장 출발을 명했다.

근위대와 지휘 기사들, 그리고 7천에 달하는 본부대 병력이 이동을 시작했다. 오늘 정오에는 남서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2만 5천가량의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3, 4, 5 부대와 합동 전투를 하게 될 것이다. 주둔지에서 집결지까지 3시간은 움직여야 하니 출발을 미뤄서 좋을 것이 없다. 그는 전투가 끝나거나 주둔지로 돌아와서 다시 대화를 하면 되겠지, 같은 생각으로 말을 재촉했다.

* * *

이틀 후 리퀘나로 출발해야 하기에 에스메랄다는 꽤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각지에서 반군에게 가담하고자 하는 백성들이 생겨났기에 그들의 위치를 파악해 반군에게 연결해 주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합류한 백성군을 다듬고 훈련시키는 데 1, 2년 정도는 들여야 한다. 전장의 광기를 알지 못하는 그들을 지금 상태 그대로 중앙군과 붙이면 그저 고기 방패에 불과할 뿐이니까.

아비체룬으로 들어간 로부오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최소한의 기다림을 유지하되, 그들을 끌어들일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두어야지.

실테르에서는 총 2만의 병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병력의 지원을 대가로 제시한 첫 번째 조건은, 내전이 끝난 후 에렘이 전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과거 그들이 포기하고 후퇴해야만 했던 옛 실테르 영토의 회복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고. 영토를 회복하고 다시금 제국의 칭호를 사용하는 데 일절의 간섭을 하지 말라는 밀약이다. 애초에 그들이 밀어낸 영토를 탐할 만한 이유가 없던 에스메랄다는 당연히 그 조건을 승낙했다.

마지막은 역시나 철광석 거래였다. 지금 에렘은 황명으로 실테르와 철광 거래가 금지되어 있기에, 그 제약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하에 실테르의 참전은 확정되었다. 자국 영토에 2만의 타국 군대를 들여놓기로 한 셈이다. 그들이 나중에 에렘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을 품는다면…….

차라리 실테르에 의해 에렘 황조가 모조리 무너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르페시스가 제위에 오르니, 마니 하는 문제는 말끔하게 해결되니까.

하지만 그런 방법은 루그레디안이 동의할 리 없다. 이미 루그레디안은 다음 황제로 아르페시스의 이름을 언급한 상태였다. 다른 계승권자가 너무 늙었고, 그의 후계들도 모두 죽은 상태였으니까. 접촉을 해 보자는 그의 의견을 에스메랄다가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꼭 에렘이라는 이름에 집착할 것 없지 않느냐는 말을 흘려 두기는 했지만… 그는 권력을 탐하기보다 경계하는 사람이라 황위에 직접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브람 백작을 자극해 볼까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는 황제에게 부인이 죽은 후로 권력을 혐오하는 기색이 강했다. 황제가 되란다고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타국의 군대를 에렘에 데려오는 것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본래의 미래와 달라진 현재 반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사라진 시간에서 아르페시스는 황위에 욕심을 가지거나 관심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가 그것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남부군에 완전히 정착한 이후로는 남부를 지키는 것에만 신경을 썼으니까.

“답이 없군…….”

아무래도 이번 리퀘나 방문에서는 그가 황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 보아야겠다. 사라진 시간과 비교했을 때 기본적인 성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행동의 일부는 변했으니 확인 작업을 거쳐야 마땅하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해 온 모든 악행들을 감추어야 하니 신경을 곤두세워야겠지.

“황위라…….”

남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는 제안을 수락할까? 만약 그가 제위에 오르면 어떻게 되지? 또한 오르지 않으면?

차근차근 한 발씩 내디뎠던 것이 수년 안에 결실이 맺히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시작했을 때보다 막막하고 복잡했다. 에스메랄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와의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이 없었을 때는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편하기만 했는데, 이후를 생각하게 된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까닥거리는 손가락이 책상을 때리며 규칙적인 소리를 내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정리되질 않았다.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게 맞는가? 그 이전에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할까? 타국의 군대를 동원하다니 미친 게 아니냐며 비난하지는 않을까? 그가 거절하면 루그레디안은 어떻게 나올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가 눈을 감고 의문을 곱씹는 동안 곁방에서 시종이 건너왔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눈을 떴다.

“노란 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후 시종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아 펼쳐 들자 다시 머리가 아프다.

「화재, 방화범 머저리, 카나리아 사망, 피해 심각, 도토리 집으로 이동, 꼬마가 등불을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 상세 조사 후 추가 보고 예정.」

화재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는 유일하다. 습격을 당했을 때. 도주하더라도 증거를 인멸해야 하기에 습격을 인지할 경우 곧장 거처를 전부 태울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노란 깃이 가져왔으니 결국 에반스의 거처가 습격당했다는 말이다.

황태자는 명령서가 바꿔치기당한 후 계속 관련된 이들을 쫓는 중이었다. 그 일과 관련해 수색망에 잡힌 로부오가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황태자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발견 후 곧장 접선하지 않고 뒤를 밟은 모양인데……. 꼬리 중 큼지막한 것을 들켰으니 당분간은 움츠려야 한다.

몸이 그렇게 된 후에도 곁에 남아 진심으로 사랑을 쏟아 낸 케니샤가 죽었으니 에반스의 복수심이 더 타오를 터, 이 일이 향후 그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에스메랄다가 남부의 일을 정리하며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했을 무렵, 그녀가 마침 새로 작성한 명령서를 완성해 깃펜을 내려놓았을 무렵. 또다시 곁방에서 시종이 서신을 가지고 나타났다.

“파발꾼을 통해 남부로 보내렴.”

거처가 습격을 당했으니 전서구는 당분간 자제하는 게 좋다. 에반스의 다른 은신처에 전서구가 자주 들락거리면 또 위치가 노출될 위험도 있으니까.

“예, 아가씨.”

시종이 새로 가져온 서신을 받으며 방금 작성한 것은 들려 보낸 그녀는 망설임 한 점 없는 손길로 밀봉을 뜯었다. 당연히 남부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추가 소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글자를 보며 오래도록 침묵했다.

「호랑이 2기 탈주. 극단주 해임 위기, 모금함 수거, 후원금 적자, 조련사 해임.」

때때로 혼잣말을 하며 쉴 틈 없이 손을 놀리던 에스메랄다가 몇 분이 넘도록 조용하니 첸과 다나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저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저 손 안에 들린 글귀를 반복해서 읽었다. 10여 분이 넘도록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빈 종이를 꺼내 들어 서신을 한 통 작성하는 것이었다. 수신인으로 기재된 것은 루이자였고, 봉투에 그녀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완성된 서신은 책상 한쪽으로 밀려났다. 이후 짧은 음절이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타고 나왔다.

“오늘은.”

그녀의 목소리에 첸과 다나가 곧장 반응했다.

“그만하지.”

“무슨 일…….”

“예, 아가씨.”

다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왔지만 첸이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곁방 문을 잠그고 나가 주게. 리퀘나 방문 일정은 취소될 테니 남부군에게 전달할 물자 준비만 마치면 될 거네.”

“예,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첸이 각기 서재와 응접실로 이어지는 곁문을 잠근 후 나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선 후 텅 빈 집무실을 채운 건 긴 한숨 소리였다.

속에서 치솟는 원망과 화를 어떻게든 다스려 가며 아르페시스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어쩌면 이대로 계속, 그녀가 리퀘나에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미 두 번이나 리퀘나에서 그들을 만났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한 번, 두 번, 다시 만나는 날이 늘어나면 거짓말을 하고 떠난 페드로를 완전히 용서하고 그를 멋대로 데려가 버린 아르페시스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헛된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결국은 다시 한번, 그 헛된 것을 가슴속에 품었던 모양이다. 희망이라는 게 그녀를 얼마나 비참하게 배신하고 떠나는지 배웠으면서 또 그것을 믿었나 보다.

“어쩜 나아지는 게 이리도 없는지…….”

현재 그녀의 세력은 남부군에 대한 것의 암호를 서커스단에 빗대어 사용하고 있었다. 호랑이, 이번 겨울 동안 에스메랄다의 세력이 대형 마수를 지칭하는 암호였다. 탈주라는 단어는 마수가 전장에 출몰한 상태를 의미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는 40년이 넘어야 대형 마수가 2기씩 출현하기 시작했건만, 이제 고작 36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남부 전선에 대형 마수 2기가 동시에 나타났다.

극단주라는 명칭은 남부군의 총사령관인 아르페시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모금함은 신관들, 후원금은 신력이나 치료 행위를 지칭했다. 그리고 조련사, 그건 페드로를 지칭하는 암호명이다. 마지막으로 해임이 의미하는 말은 ‘전사’였다.

에스메랄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품어 본 희망은 또 한 번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떠났다. 이제는 드디어 메마른 모양이라고, 그녀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매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어리석고 멍청하기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에스메랄다의 중얼거림은 삭막했다. 해임 위기라 언급되었으니 아르페시스는 신관들이 모여들어 치료를 하고 있음에도 사경을 헤매는 중일 테고, 명확하게 해임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페드로는 죽었다. 페드로가 곁으로 돌아오든 말든 다시 마음을 열지 말고, 남부로 가서 아르페시스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토록 아프지 않았을 텐데.

형제의 죽음은 세상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상실감이 되었고, 아르페시스의 위독함은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가 되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건만 현실의 잔인함으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버거운 감정 속에서 과거의 그녀가 예견했던 원망까지 피워 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아르페시스를 향한 끔찍한 것. 그가 페드로를 전장에 데려갔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여기는 지독한 원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은 그에게 가혹한 삶을 선물한 황제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페드로의 죽음은 열심히 말려 죽이고 있던 감정을 다시 살려내 그녀를 지배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며 만들어 낸 고통은 원망의 가시를 사방으로 뻗어 내며 아르페시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가시가 뻗어 나갈 방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그녀를 기만했고, 결국은 다시금 지독한 상실감을 안겨 준 페드로. 페드로를 전장에 데려가 종내에는 죽게 만든 아르페시스. 아르페시스가 죽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가 행한 선택을 원망하는 그녀 스스로까지.

에스메랄다는 3명 중 누가 가장 미운 건지 고르지 못했다. 또한 3개의 행동 중 어떤 것이 가장 끔찍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페드로의 죽음을 인지한 날로부터 엿새 후, 페드로의 전사 소식을 전하기 위한 남부군의 파발꾼이 도착했다.

그 파발꾼은 그녀의 손에 페드로의 유서함을 쥐여 주었다. 함의 수령자가 에스메랄다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가주인 백작 대신 그녀에게 온 것이다. 최초 수신자는 그 함에서 각 수신인들에게 유서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와 다른 가족들의 것까지.

수신인 목록에는 없지만 남부에 있는 휴고나 아르페시스, 다른 근위대들에게는 개별적인 전달이 이루어졌으리라. 테노리엘 백작에게도 남부 파발꾼이 갔을 터, 그도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 황도에서 할 것인지, 영지에서 할 것인지……. 그건 백작이 정하겠지.

장례 일정이 정해지기 전, 에스메랄다는 미리 써 두었던 서신을 루이자에게 보냈다. 페드로는 루이자에게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보낼 것이라고는 부고 소식을 전하는 서신이 전부였다.

몇 해 전 이미 이날에 대비해 열병을 앓았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열병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며칠 내내 식음을 전폐한 채 인형처럼 앉아만 있는 그녀의 곁을 페르멘이 지켰고, 며칠 후 황도에 있던 테노리엘 백작과 오멘, 그리고 남부 전선에 있던 아레스가 영지에 도착했다. 따로 논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백작이 페드로의 장례를 영지에서 치르고 싶어 했기에 곧장 온 것이지.

살아 있는 테노리엘의 직계가 모두 모인 다음 날, 남부군이 전장에서 회수했던 페드로의 시신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에스메랄다는 직접 관을 여는 테노리엘 백작의 곁에 서서 죽어 돌아온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머리의 반은 함몰되어 있었고, 대체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그의 오른팔이 있어야 하는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의 형제와 아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왔다. 테노리엘 백작은 고개를 숙여 저보다 먼저 떠난 아들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춰 준 후 형제들에게 차례를 넘겼다. 에스메랄다 역시 사라진 시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에게 이별의 입맞춤을 해 주었으나 그때와는 달리 마른 눈으로 입관을 지켜보았다.

이후 함의 수신인으로서 가족들에게 각자의 유서를 전달했고 조문객을 받지 않고 치러진 조용한 가족장이 끝났다. 에스메랄다는 방으로 돌아와 페드로가 그녀에게 남긴 유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에스메랄다는 차마 그것을 뜯어보지 못했다. 속에 담긴 말과 그 말이 가져올 것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그리고 페드로의 장례식이 끝난 지 사흘 후, 20여 일 가까이 의식이 없던 아르페시스가 깨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에스메랄다의 열여섯 번째 생일, 본래라면 그녀의 성년식이 있어야 했던 날의 일이었다.

1부 조효(早曉) 마침

2부 진정(辰正)1)

하늘을 차지한 태양이 안개를 밀어내면 비로소 앞을 볼 수 있다.

OPENING

페드로가 조금 이상하게 굴기는 했지만 그날의 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에 도색을 한 다음 발화 마도구와 실드 마도구를 착용하고, 갑옷을 입고 단창과 대검, 유사시를 대비한 단검, 마나 보충을 위한 마석까지 챙겼다.

주둔지에서 말에 올라 전투 예상지로 이동하는 것도 똑같았다. 조금 툴툴거리긴 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이동하는 내내 페드로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휴고와 페드로 사이에 대화가 전혀 없었지만 그들의 친분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기에 곧 화해하리라 여겼다.

집결지에 도착한 후 잠시의 휴식을 취하고 북상 중이던 마수 무리와 마주쳐 난전이 시작된 것도 마찬가지. 평소와 똑같은 전투였고 평소와 똑같은 광경이었으며 평소와 똑같이 시간이 흘렀다. 전투를 하면서 한 생각도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보고 싶다는 것은 당연했고, 돌아가면 페드로가 꾼 꿈이 뭔지 물어보고, 그와 휴고가 화해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홀로 곱씹어 본 반정에 대한 것도 의견을 구해 볼 요량이었다. 당연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날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시작과 과정이 같다 하여 끝 역시 같은 게 아닌데, 그가 발을 들이고 있는 곳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장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었다면 그날을 피해 갈 수 있었을까?

페드로가 이상했다는 휴고의 말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면, 반정에 대한 것으로 심정이 복잡하다는 이유 때문에 페드로와의 실랑이를 피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일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페드로가 고집을 부리든 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떼어 두고 갔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도 현재에서는 선택을 하고 미래에서는 후회를 한다.

삐익, 하고 울린 시끄러운 소리에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마수의 피로 얼룩진 정면에서 허공으로 향했다. 소리에 이어 먹구름처럼 허공에 퍼져 나가는 연기 덩어리는 적색. 남부군의 명령 체계에 따르면 대형 마수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을 확인한 아르페시스는 곧장 소리를 지르며 허리춤에 매달아 둔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퇴각! 퇴각하여 병력을 정비하라!’

대형 마수가 날뛰는 전장에서 준비되지 않은 채 난전을 지속할 경우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의 피해가 커진다. 그렇기에 대형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놈과 함께 움직이는 마수의 규모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후 소형 마수를 상대할 병사들과 중형 이상의 마수들을 상대할 기사들의 구성을 맞추어 병력을 새로 편성하는 것이다.

직접 대형 마수 토벌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기에 아르페시스는 곧장 퇴각을 명했다. 그가 쏘아 올린 신호탄을 따라 하늘 위에는 녹색 연기 덩어리가 퍼져 나갔다. 마수들과 뒤섞여 있던 인간이 그곳을 빠져나오는 1차 퇴각, 이후 전투 마법사와 마도구를 사용해 마수들의 발을 묶는 사이 거리를 벌리는 2차 퇴각.

아르페시스는 저를 노리고 쫓아오는 중형 마수들 틈에서 근위대와 함께 분전하며 천천히 후방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차 퇴각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다시금 삐익,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또 한 번 허공에 붉은색 연기 덩어리가 자리를 잡았다.

남동쪽 하늘에 있는 붉은 연기 덩어리 아래에서는 이미 대형 마수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 아직은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일 만큼 먼 거리였지만 그 방향에 대형 마수가 있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저기 서쪽에 새로 피어난 붉은 연기 덩어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발인가?’

아르페시스는 남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형 마수를 한 번, 서쪽에 새로 피어난 붉은 연기 덩어리를 한 번씩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대형 마수가 2기 이상 동시에 출현한 적이 없기에 서쪽 전장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때때로 예고조차 없이 변해 버린다. 시간은 흘러가며 과거를 가져가고, 대신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가져오니까. 90여 년 전 마신의 파수꾼이 어떠한 예고도 없이 강림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처럼.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시야에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는 물체가 보였다. 새까만 마기에 뒤덮인 바위가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질량, 부피, 그리고 속도.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고 대검의 절삭력을 높인다 해도 가르거나 부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닿는 순간 튕겨 나가리라.

구체적인 생각을 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전장의 위기에 대처하는 데 익숙해진 그의 몸이 직감적으로 판단을 내렸고, 곧장 그 판단을 따라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아르페시스는 물론, 그의 근방에 있던 3명의 근위 기사 역시 똑같은 판단을 내린 후 도약했고 곧이어 그들이 있던 자리에 큼지막한 바위가 내리꽂혔다.

쾅, 하는 커다란 굉음 속에서 아르페시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바위를 피해 허공에 체류한 그 짧은 시간에 또다시 마기가 넘실거리는 바위가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각기 다른 방향에 있던 근위 기사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전하!’

함께 허공으로 뛰어오른 테베르가 아르페시스의 앞을 막기 위해 마나로 발판을 만들었다. 아르페시스 역시 유형화한 마나를 밟고 몸의 방향을 틀고자 했지만 그들보다 저들이 빨랐다.

시야로 직접 확인한 것만 7개. 지금의 속도면 몸의 방향을 바꾸기도 전에,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충돌한다. 아르페시스가 팔로 머리를 감싼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바위가 그의 앞을 막아 보고자 몸을 틀던 테베르의 팔을 부러트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방패의 형태를 이룬 실드에 막혀 주춤거렸다.

그와 동시에 아르페시스처럼 허공으로 도약했던 근위 기사 한 명이 다른 바위에 맞아 튕겨 나갔다. 바위와 실드가 맞닿는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 정적은 곧이어 이어진 파열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실드를 깨트린 바위에 직격당한 아르페시스가 튕겨 나갔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남동쪽에서 나타났던 대형 마수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십 미터를 날아간 아르페시스가 아직 마수와 뒤섞여 있는 이들 사이에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사령관님!’

‘퇴로를 확보해!’

‘사령관님을 모셔라!’

‘길을 열어!’

아르페시스는 정말로 눈 한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시야 밖에서 코앞까지 다가왔던 바위에 얻어맞았다.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고작해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땅을 짚은 게 다였다. 아니, 땅을 짚은 게 맞나? 분명 눈을 깜빡이고 있는 것 같은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홀로 갇혀 버린 그의 귓가에서 이명이 울렸고, 투구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온다! 놈이 온다!’

이명을 뚫고 들어온 괴성과 고함을 인지하게 되었을 무렵에는 천천히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는 사이 그는 옆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다. 오른쪽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왼쪽마저도 겨우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흐릿할 뿐이었다.

어떻게든 감각을 되찾고자 노력한 덕분일까? 반쪽짜리 시야로 사람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주변이 푸르스름한 걸 보면 마나가 퍼져 있나 보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리는 사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대검 조각으로 보이는 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 사이로 사람의 팔로 보이는 것이 함께 바닥에 떨어졌고 허공에 퍼진 푸른 마나가 짙어졌다.

‘휴고!’

페드로? 익숙한 목소리에 의문을 느낀 직후 아르페시스는 피를 토해 냈다. 머리가 너무 뜨겁다. 그의 얼굴은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보니 테베르와 페드로가 대형 마수의 손톱을 막아선 상태였다. 아니, 아니다. 테베르의 몸은 이미 두 동강이 난 채 무너지는 중이었고, 페드로의 몸에는 대형 마수의 손톱이 박힌 상태였다.

페드로는 제 몸의 서너 배는 될 법한 대형 마수의 손을 한 팔로 붙들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팔은 그의 것이었다. 팔이 잘려 나간 어깨에서, 마수의 발톱이 박힌 몸에서, 잔인한 핏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페드로가 대형 마수의 움직임을 잠시 붙든 사이 다른 상급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사령관님을 노린다!’

‘또 온다! 한 놈 더!’

‘몸으로 막아!’

‘길을 열어!’

‘퇴로를 열어라!’

아르페시스는 앞에 있는 게 페드로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손을 뻗었다. 그를 붙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원하던 것을 쥐지 못했다. 그가 바랐던 것이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페…….’

‘가!’

그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잠시의 부유감 끝에서 다시 암흑으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그를 찾아온 건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지독한 열기였다. 아니, 몸속의 피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혹한의 냉기였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 낸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 지속되었다. 지금 있는 곳이 불구덩이 속인지, 얼음덩어리 속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주둔지로 돌아와 있었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머리에 각인된 것만 같은 장면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사이 하얀 빛무리가 그를 감싸 안았다. 신관과 함께 휴고를 발견한 아르페시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마지막 기억이 거짓된 것이기를 바랐다. 제발, 지금 그의 머릿속을 떠도는 이 장면이 꿈이라는, 환상이라는 확답을 받고 싶었다.

‘페드, 로…….’

쇠를 긁어내는 것 같은 목소리는 얼핏 비명 같기도 했다.

‘쉬셔야 합니다.’

침상 밖으로 빠져나온 아르페시스의 손을 꽉 붙들어 준 휴고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 드로… 는?’

휴고는 답하지 않았고 아르페시스는 다시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대륙력 1436년 카 57일. 에렘 남부 전선에 최초로 2기의 대형 마수가 동시에 출현한 날이었으며 총사령관 부대의 7천 병력 중 3천 명가량이 전사한 날이기도 했다.

그 전사자들 중 2천이 넘는 수가 마나조차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바위에 직격당한 후 부상을 입은 아르페시스를 노린 대형 마수에게 몸을 던져 시간을 벌었다. 당시 복귀한 병력은 절반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고, 아르페시스의 호위를 담당하는 20명의 근위대 중 귀환자는 고작 3명뿐이었다. 휴고, 아스터, 데미안을 제외한 근위대는 모두 전장에서 전사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는 음식물을 섭취하며 체력을 보충할 수 없기에 반복적인 신력 치료는 사망에 이를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짓이다. 그럼에도 아르페시스는 20여 일이 넘도록 사경을 헤매면서 서른두 번의 신력 치료를 받았고, 끝끝내 살아남아 휴고로부터 페드로의 유서를 전해 받았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네가 읽고 있다면 나는 네 곁에 없다는 의미일 테니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긴다. 유서의 수정 일자는 1436년 사 86일이니 그 이후의 정보는 미흡할 수 있다.」

유서 속에는 그간 페드로가 홀로 조사한 것들, 그가 홀로 추측한 것들, 그리고 홀로 그려 본 미래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7백여 년 전 대륙의 남부에 있던 히페로크 왕국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왕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역병을 막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당시 선왕이었던 자의 악행을 찾아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런 증거도, 발판도 없이 악행이 자행되고 있는 장소를 지정했고 그곳을 습격한 왕성 기사들이 현장을 급습, 선왕을 체포했다는 기록이다.

기록을 남긴 자는 ‘왕은 마치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라고 표현했다. 이 기록의 전문은 과거 내 아래에서 종자 생활을 한 후 서임을 받은 기사가 꾸준히 가문의 지하 보관소에 들어가 찾아낸 것이다.

번역본을 필사해 관저의 숙소에 보관 중이니 짐을 정리할 때 네가 챙겨서 살펴보도록 해라. 나는 이게 29년 당시 천사가 갑자기 변해 버린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계속 파고드는 중이었다.

미래를 내다본 사람,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그게 아니라면 미래를 겪고 돌아온 사람, 이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추측의 경우를 나열한 것뿐이니 모두 오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꿈을 통해 보는 미래를 너보다 더 선명하게 알고 있는 게 천사가 아닐까 한다. 그 미래 속에서 너와 그 아이 사이의 연결점이 있었으니 현실에서 너와 그 아이의 접점을 찾으려던 노력은 헛수고였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여러 가정 중 나는 미래를 겪고 돌아왔다는 것에 더 무게를 실어 보았다. 그럼 그 아이의 감정적인 반응들이 이해돼서 다른 쪽으로는 생각이 흐르질 않는다. 하지만 확답을 내릴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에 신중에 신중을 가해 여러 상황을 가정해 본다.

이러한 정보들과 네가 전해 준 꿈속의 이야기들을 통해 미래에서 천사는 반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추측에 도달했다. 그 아이의 끝이 화마에 집어삼켜지는 것이었다는 네 말에 따르면, 아마 실패했겠지.

가능한가의 여부를 제쳐 두고, 만약에 그것이 진실이라고 여기고 생각을 해 보자. 미래를 알고 있을, 혹은 겪고 돌아왔을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미래에선 우리 형제가 모두 그 아이의 곁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되기에 홀로 남아 고군분투했을 그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아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또한 너를 통해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너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면 비겁하게 도주해서라도 목숨을 챙길 각오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죽었다는 건 너를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이 필요했다는 의미겠지. 지금의 말을 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요구하는 비겁한 협박이라 생각해도 좋고, 결국 죽어 버려 스스로 행하지 못한 나를 향한 동정이어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애원이라 생각해도 상관없어.

부디 그 아이의 끝을 바꿔 주길 바란다. 또다시 그 아이가 화마 속에서 끝을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해 다오. 이것 외에도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것들이 무척 많으나 나는 침묵을 택했다.

나는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해 줄 수 없다. 그저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게 나의 한계다. 네게 모든 것을 알리는 게 천사의 뜻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이미 내 행동으로 번민하고 힘들어하는 중이다. 여기에 더한 것을 보탤 용기가 없어 차마 입을 열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해. 나도 결국은 에렘에서 나고 자란지라 모국이 조금은 걱정된다. 그러니 염치없게도 내 걱정을 네게 부탁하마.

아마, 내 죽음은 그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고 또 한 번 너와의 단절을 야기하겠지. 또한 지난번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 아이는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 대화를 해 보길 바란다.

내가 보기에 그 아이는 나보다 너를 더 신뢰하거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내 누이를 조금만 기다려 다오. 그때가 오면 내가 말하지 못했으나 네가 알아야 하는 것들, 그걸 천사에게서 듣도록 해. 그 아이가 말해 주지 않으려 한다면 캐내어서라도 반드시.」

당부와 조언, 그리고 죽음에 이를 것을 가정했음에도 전하지 못했던 무언가. 그것이 왜 에렘과 관련되는 것일까? 아르페시스로서는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너에게 해 주지 못한 말 중에 근위대에 관한 것도 있다. 테베르가 따로 전서구를 날리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내가 그저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전서구가 돌아오기 전에 조련석을 폐기 처분했으니 일방적인 보고를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너와 천사에 대한 얘기를 전하고자 했다면 전하고도 남았을 시기라 대응을 포기했다. 전서구를 막을 경우 그의 윗선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 없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그가 너를 모시는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전서구용 조련석을 처분하며 흔적을 지우려 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의심스러운 행동을 완벽히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그를 너무 신뢰하지 마라. 최악의 경우 그가 보고하는 대상이 황제라 한다면, 너와 천사의 관계가 모두 알려졌다고 가정해야 한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해라.」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필체로 가득 찬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페드로와 같은 날 죽은 테베르, 그는 누구에게 보고를 했던 것인가? 황제? 황태자? 그도 아니라면 인지조차 하지 못한 누군가인가? 이제 테베르가 죽어 버려 파헤쳐 볼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아르페시스는 마기가 뒤덮인 바위를 막기 위해 허공에서 몸을 틀던 테베르를 기억 속 한구석에 담아 두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천사를 위해 너에게 남기는 말이었다면, 지금부터 하는 말들은 온전히 너를 위해 남기는 나의 마지막 말이다.

너는 마음이 곧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선과 악, 온과 냉, 빛과 어둠, 굳이 기준을 정해 사람을 구분한다면 너는 모든 순간에 전자에 포함되겠지. 너의 장점이고 내가 너를 신뢰하며 아끼는 이유지만,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그것만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직면해 있다.

모두가 너처럼 양보하고 배려할 줄 안다면 다르겠지만,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너처럼 손해를 감수하며 양보하기보다 이익을 얻기 위해 빼앗는 걸 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걱정이 된다. 때때로 어둠이 되고 악에 물들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제들이 너를 찾아올 텐데, 부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거부하지 마라.

예전보다는 덜하다만, 내가 보기에 너는 스스로가 황실의 핏줄임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럴 필요 없다. 네가 황제의 아들임은 변하지 않으나, 그 피가 너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그분과 많이 달랐으니 너도 스스로와 황제를 구분해라.

너는 황제와 달리 한때 그리된다고 해도 다시금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올 사람이니,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핏물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 바란다. 내가 본 너는 그 선택으로 생겨난 짐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건한 사람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장점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그 장점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산을 마주했을 때가 걱정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을 덧붙인다.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라.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다가오는 겨울까지는 너와 천사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했고,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후 겨울이 지나 네 곁을 지킬 사람들이 다듬어지면 내륙으로 돌아가 심장에 품어 본 여인을 최우선으로 두고자 했지.

미래에 그녀를, 쿠베트 영애를 최우선으로 두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너와 천사를 우선에 두고 있기에 나의 죽음이 도래했다면 그것은 결국 나의 선택이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우선순위를 세우길 바란다. 잃어도 되는 것, 잃을 수 없는 것,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정립한 후에 움직여라. 그러면 미래의 순간에 찾아오는 후회가 최소화된다. 내 나름 20여 년을 살며 배운 지혜다.

너의 또 다른 장점은 포기를 모른 채 노력하는 끈기와 쉬지 않고 정진하는 성실함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이 되어도 너를 지켜 줄 무기이니 마음이 놓인다. 그 무기를 가진 네가 천사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겨 그 또한 안심이다.

이 모든 것을 읽은 네가 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타박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죽음이라는 최악에 대비했다. 대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법이니 절대 최악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지금의 나에게 그러한 것처럼 놈은 언제, 어느 순간에 네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니 언제나 그놈을 주시해라.

그리고 내가 아는 너는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라 어리석은 생각을 할까 싶어 한마디를 덧붙여 본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왔기에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 나의 죽음은 네 탓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고, 조금 잔인한 시대가 만들어 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죽음 때문에 네가 자책하지 마라. 그럴 이유가 없다.

네가 힘들 때 지금 내가 남기고 가는 말이 네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눈물은 그칠 줄 모르는 폭우처럼 쏟아져 페드로가 남긴 말 위로 떨어졌다. 두껍고 길던 유서의 끝에서 발견한 말은 아르페시스를 찾아온 상실감과 절망을 커다랗게 부풀려 주기만 했을 뿐이다. 그 순간 직접 겪고 있는 일과 감정이 현실이라는 게 끔찍했다.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간절함이 짙어졌다.

「아르페시스, 너는 나를 어떻게 여겼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와 지내는 수많은 시간에 너를 피가 섞이지 않은 나의 아우로 여겨 왔다.

때때로 모자란 너를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또한 훌륭한 너를 보며 뿌듯하기도 했다. 언젠가 같은 피를 타고난 쌍둥이에게 너를 정식으로 소개해 네가 나의 또 다른 형제임을 자랑하고 싶었다.

녀석들이 천사와 네 사이를 알게 돼서 기회는 없었지만 말이야. 매일 서신으로 땍땍거리며 너에 대해 캐 보려고 하는 통에 나름 골치가 아팠다. 만약 내가 너를 이토록 귀애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으면 당장 리퀘나로 쳐들어와 너를 괴롭혔겠지. 녀석들은 투정이 조금 심하거든.

당시 네가 천사와의 단절 때문에 힘들어했기에 녀석들의 괴롭힘이 더 힘든 짐이 될까 봐 네 얘기를 자제하기로 했었다. 천사가 리퀘나로 온 후에는 종종 네 얘기를 꺼내 보곤 했는데… 답신에 심술이 가득 담긴 게 보여서 조금 걱정이다.

어릴 때 갑자기 천사와 사이가 틀어진 것 때문인지 녀석들은 네가 그 아이를 완전히 빼앗아 가 버릴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다. 그러니 누이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리석은 오라비들의 투정으로 생각해라. 너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정하기 싫어서 버둥거리는 것이니 귀엽게 봐 주고.

반면 아레스 형에게는 네 얘기를 꽤나 자주 했다. 형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겪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각자의 현실과 역할이 바빠 사적인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셋이 모여 앉아 술잔이라도 한번 기울여 봤으면 꽤 재밌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미처 해 보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는다.

후에 너와 천사가 혼인을 하여 완전한 가족이 되는 순간을 꿈꿔 보기도 했다. 너희 두 사람이 서로의 곁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나 역시 그녀와 함께 있기를 바라 보았지.

하지만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이상 나는 볼 수 없는 미래가 되어 버린 상태일 테니 그게 참, 많이 아쉽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도 죽음의 순간을 가정해 보니 미련도, 후회도,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그럼에도 죽은 이상 그걸 모두 잊고 떠나야겠지. 그러니 바라건대, 먼저 미카엘의 심판대 앞으로 가는 나를 오래 붙잡지 말고 너의 과거에 묻어 주렴. 그렇게 한 후에 너처럼 나를 묻었을 천사가 웃을 수 있도록 함께 살아 다오. 그리하여 네가 그 아이 곁에서 웃기를 희망하고 있다.

너희 두 사람의 행복은 결국 나의 행복이니 부디, 끝까지 살아남아 행복해져라.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남겼으니 너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쓴 길고 긴 인사를 이제는 끝내야겠다. 이제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곁을 지키마. 사랑하는 형제야, 조금은 얄미운 매제야, 영원한 이별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을 나섰다. 휴고가 뒤를 따라 나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그의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부축을 해 주었다.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 페드로가 사용하는 좌측 천막을 젖히고 들어가자 내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근위 기사들이 일어났다. 일전의 전투에 동행하지 않고 대기하던 이들이었다.

아르페시스의 천막을 기준으로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 때문에 몇몇 침상이 비어 있었지만, 그중에 페드로의 갑옷이 걸린 자리는 없었다. 투둑, 투둑, 떨어지고 있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일렁거리니 잘못 본 것이겠지. 저 중 어딘가에는 페드로의 침상이 있을 것이고 그의 물건이 있을 것이다. 그가 지금 천막 내부에 보이지 않는 건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아르페시스는 빈 침상에 다가가 직접 그 자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갑옷이나 명패를 뒤졌다. 하지만 빈 침상도,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침상도, 어디에도 페드로의 물건과 이름은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 사용하는 천막을 옮겼나 보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근위대의 천막으로 향했다. 근위대의 수가 늘어난 만큼 천막의 개수 또한 늘어난 상태라 들를 곳이 많았다.

‘아르페시스.’

그가 네 번째 천막에서 빠져나올 때의 일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본인의 천막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아르페시스는 팔짱을 낀 채 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페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라.’

그래, 그가 죽을 리 없지. 아르페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상한 꿈을 꿨는데, 얘기 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대화를 청하려던 아르페시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던 페드로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페드로?’

갑자기 어디를 갔지? 아르페시스가 절박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페드로는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이별 인사를 이제는 끝내야겠다.’

직전의 전장에서 그를 휩쓸었던 바위보다 무겁고 커다란 것이 그를 짓눌렀다.

‘전하,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곁을 지키고 선 휴고가 그를 데려가려 했지만, 아르페시스는 체중이 확연히 줄어 홀쭉해진 상태에서도 그의 힘에 끌려가는 대신 버티고 섰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고 있는 페드로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병영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페드로를 발견했다.

‘휴고.’

‘……예, 전하.’

아르페시스는 혼란을 느끼며 휴고를 불렀다.

‘페드로는 어디에 있지?’

왜 방금 그의 천막으로 들어간 페드로가 병영을 누비고 있나.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리가 없는데, 그럼 지금 눈에 보이는 저 페드로는 누구지?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휴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어디에 있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금 답을 요구했을 때 휴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는 카 57일 전사했습니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기어코 꺾여 흙바닥을 짓눌렀다.

‘죽었다고?’

아르페시스는 전장에 나서기 직전 페드로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게 마지막이라고?

아직 그에게 배운 세상의 다양함에 대한 감상도, 그와의 대화에서 배운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에 대한 감상도 전하지 못했다. 페드로라는 사람으로 인해 변한 그의 인생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말해 주지 못했고, 그의 애정과 신뢰에 대한 감사 또한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 그가 존재함으로써 얻고, 배우고, 나아갔던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값졌는지도, 말해 주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투덜거리며 시답지 않은 대화나 나누었는데, 그게 마지막이라고? 이별의 인사도, 감사의 인사도 하지 못한 그 날의 일이 끝이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 않나. 그에게 주지 못한 것들이 이렇게, 이렇게 차고 넘칠 만큼 많은데 어째서 그게 마지막이란 말인가!

제발 거짓말이라고, 장난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손 안에 움켜쥔 페드로의 유서가 없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 이별은 세상과 시간을 앗아 갔고, 바라지도 않은 순간에 마주한 끝은 미련과 후회를 선물했다.

‘예, 카 57일 전사했고 59일 대형 마수가 이동한 전장에서 시신을 확인함과 동시에 통지서를 작성, 백작령과 황도로 각기 파발꾼이 출발했습니다. 이후 시신을 영지로 보냈고 현재 테노리엘 영지에서 가족장으로 진행된 장례식과 입관이 모두 끝난 것으로 알…….’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건만 그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진실은 변하지 않았다. 현실은 듣고 싶어 하는 말 대신 들어야만 하는 말을 해 줄 뿐이다.

‘이제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곁을 지키마.’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던 그의 앞에 페드로가 나타났다. 아르페시스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형제야, 조금은 얄미운 매제야.’

‘아…….’

‘영원한 이별이다.’

페드로는 활짝 웃더니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아아아악!’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내뱉은 절규와 함께 아르페시스의 신영이 무너져 내렸고, 휴고가 혼절한 그를 천막으로 옮겼다.

의식을 회복한 아르페시스는 두 번의 신력 치료를 더 받았고, 이동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신관과 의원들의 견해가 떨어지자마자 본부대 지휘관들에 의해 리퀘나 사령관저로 이동해야만 했다.

20여 일 가까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신력 치료를 받은 아르페시스는 체중이 3할 이상 줄고 근육이 빠져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1436년 카 77일, 남부군 총사령관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가 전투에서 배제된 채 리퀘나로 복귀한 공식적인 이유는 회복을 위한 요양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사이 이미 대형 마수 2기가 토벌되었기에 억지로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해당 전투에서 죽은 기사가 8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치열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긴 했지만, 리퀘나로 돌아온 아르페시스는 남부군의 업무에서 일절 손을 뗀 채 침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4년 전 황도의 광장에서 처음 만나 그를 걷어찼던 페드로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듯이 함께했다. 그는 아르페시스의 시야를 넓혀 준 스승이었고, 때로는 감정을 주고받으며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친구였으며, 또한 유일한 형제였다. 수명의 반도 살지 못한 20세의 청년에게 스승의, 친구의, 또한 형제의 부재는 너무나도 무겁고 힘겨운 짐이었다.

식욕이 없어 음식을 물리면 휴고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무릎을 꿇고 시끄럽게 굴기에 대충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가 게워 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르페시스는 침대 위에 늘어진 채 울거나 페드로의 유서가 닳을 정도로 자주 읽기 위해 하루의 전부를 사용했다.

페드로의 죽음만으로도 버거웠건만, 그가 죽음으로써 에스메랄다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져 매일을 지옥 속에서 보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죽던 날의 일과 에스메랄다에게 버림받는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나날을 반복했다.

그러나 요양을 위해 리퀘나로 귀환한 지 63일이 되던 날, 아르페시스의 침실이 열렸다.

‘네가 죽지 않는 선택을 최우선으로 여겨 줘.’

‘그럼 난 몇 년이 걸려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는 과거에 연인이 해 준 위로와 약속을 떠올리며 절망 속에서 꾸역꾸역 기어 올라왔다.

‘너의 또 다른 장점은 포기를 모른 채 노력하는 끈기와 쉬지 않고 정진하는 성실함이다.’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라.’

절망에서 기어 올라온 아르페시스는 떠나간 형제가 남긴 말을 붙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 문을 열고 나온 날, 그는 휴고를 불러 말했다.

‘황제와 황태자를 죽여야겠다.’

그 대가로 필요한 피가 호수를 넘어 바다가 된다 해도, 남부에 옭매여 있는 제 목줄을 직접 풀어낼 것이다. 에스메랄다와의 미래. 그게 페드로의 유언에 따라 아르페시스가 정한 우선순위였다. 언젠가 페드로의 죽음이 준 상처를 딛고 품으로 돌아와 줄 연인을 위해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 둘 것이다.

‘-----, 어리석은 나는 너를 잃은 후에야 네가 나의 세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래전 과거에서 본 그 일기처럼 다가올 미래에 또 한 번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는 과거의 그 날, 페드로를 전장에 데려갔던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를 잃은 후에야 각오를 다지다니 참으로 어리석다.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에스메랄다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그녀가 웃으며 행복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형제의 유언을 심장에 새겼다. 그날부터 그는 어떤 꿈을 꾸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 되었다. 그저 조용히 울며 깨어날 뿐이었다.

황성은 인간을 상대로 했을 때 누구보다 강한 황실 기사단, 그리고 황족 개인의 근위대가 있다. 황도의 경비를 담당하는 중앙군 역시 정예 중의 정예. 그들 틈에 존재하는 쥐구멍은 너무나 좁다. 결국 내부로 숨어들어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외부에서부터 차근차근 무너트려 내부에 숨어 있는 그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내전, 혹은 반정, 그것이 무엇이든.

결단을 내린 아르페시스는 이후 몸을 회복했고 페드로가 죽은 이듬해 여름이 되어 행동을 개시했다. 남부군은 그의 유일한 힘이었지만 또한 양날의 검이었다.

에스메랄다와의 미래를 위해 남부 백성들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드디어 ‘그렇다’라는 답을 내어 놓았음에도 남부군을 내전에 동원하는 일에는 조심스러웠다. 대다수가 남부에 적을 둔 인사들이므로 그들의 터전과 가족들을 등한시한 채 내전에 동원하려 했다간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아르페시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상태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 정도의 유대를 쌓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기에 신중을 기해 본다. 최악의 경우 남부를 버리는 데 반대하는 이들이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 황제에게 말을 전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남부군 내에 심어져 있을 황제의 눈을 조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남부가 무너지면 몇 년 전 서부 대란과 같은 사태가 또 발생할지도 모를 일.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남부 너머에 있는 건 에스메랄다, 그의 세상이니까.

마수가 그의 팔다리를 뜯어 먹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녀를 해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안전은 물론,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그 어떠한 것에도 마수의 발톱과 이빨이 닿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남부는 절대 무너지면 안 된다.

최악을 가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페드로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최악에서 최악, 그중에서도 다시 한번 최악을 가정한 아르페시스는 남부군 내에서도 급진파 세력에게 먼저 접촉했다. 급진파 세력의 병력 증원이 첫걸음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급진파에게 할당되는 군수 물자 규모를 위조해 만든 이중장부가 황실에 보고되고 있다.

그다음은 군적 위조. 군에 이름을 올렸으나 지워지고, 이름이 지워졌으나 실존하는 병력들을 만든 것이다. 이것 역시 황실에 보고가 올라가야 하는 내역이라 숨겨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병력 증원은 매해 분기마다 재발하여 사상자를 내는 역병 때문에 순조롭지는 못했다. 군에 입대하는 이들의 수가 적어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 것이다. 다른 부대의 빈자리도 채워야 남부군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동원이 가능한 재정도 빠듯해서 수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급진파만으로는 2만을 채우지도 못한 상황이니 남부군 전원을 차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그를 도와줄 만한 보수파 세력들에게도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

이외에도 출정한 후 처음으로 황자 궁을 지키고 있는 카덴에게 연락해 황실 내부 사정을 주기적으로 전달받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는 북부에서 주로 활동한다는 반군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접촉 자체가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회유를 통한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그들을 찾을 때도 이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아르페시스에게는 에렘을 누비며 정보를 모아 올 사람들이 없다. 다행인 것은 이전에 비해 반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남부에 많이 숨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남부군 전사자들의 유가족들 근처에서 자주 발견되는 그들을 통해 상부에 접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룩한 것은 많지 않았다.

반군의 상부는 그의 접촉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어쩌면 반군이 내세우려는 새로운 지도자가 있기에 적통 황위 계승권자를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서구 사냥이 성행하고 있으니 서신으로 연락을 취하는 건 자살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위치를 알아낸 후 믿을 만한 이를 파발꾼으로 보내거나 만나서 의사를 밝혀야 한다.

그가 원하는 건 에스메랄다와의 미래지 황위가 아니다. 황제에 의해 갇혀 버린 남부에서 풀려날 수 있다면 황위 따위 준다 해도 걷어찰 것이다.

‘윗선에게 내가 만남을 청한다고 전해라.’

지속적으로 말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군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최근 유가족 근처에 있던 이들마저 사라지고 있는 실정. 그런 와중에 반황실 세력과의 접촉은 백지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얼마만큼의 도박금을 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세력이 없으니 누가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서툴게 건드렸다가 상대방이 아르페시스를 이용하기라도 한다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해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그 위에 다시 신중을 쌓아 모든 것을 의심하며 움직이다 보니 진척이 너무 느렸다.

확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모든 상대방을 의심하라는 것 역시 페드로가 살아 있을 당시 가르쳐 준 것이었다. 배경에 꺼림칙한 행보가 있던 테베르를 의심했던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그 가르침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에도 불과하고 성과는 적었다. 벌써 페드로의 사후 2년이 지났건만, 반황실 세력과의 접점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반군의 움직임은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아르페시스는 아스터를 통해 내륙의 상황을 전해 받았기에 알 수 있었다. 아스터는 입지가 두텁거나 권세를 가진 집안의 자제는 아니었으나, 중앙 군부에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중앙 사교계에서도 꽤나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페드로가 죽은 다음 해 여름, 그가 혼인을 한 것이 기회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처럼 자랐던 여인과 한 것이라 의심할 구석도 적었다. 데미안과도 아는 사이라 했고. 결국 아르페시스는 그를 남부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지난해 여름 혼인을 위해 전역을 한 아스터는 황도로 돌아갔다.

그는 근위대에서 제외되었음에도 아르페시스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각종 사교 행사에 참석하며 중앙 귀족들의 행보나 고위 귀족들 간의 관계 변화 같은 동태를 알아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넓지는 않으나 아르페시스만의 정보 선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런 행동과 방법들 역시 2년 전 그를 떠난 페드로가 가르쳐 주고 간 것이었다.

본래 아스터는 반황실 세력에게 접근해 그들의 속내를 캐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중앙군 지휘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전해 왔다.

‘북부로 나간 병력이 복귀하고 있습니다. 이미 준비 단계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르페시스는 며칠 전 파발꾼을 통해 도착한 아스터의 서신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반황실 세력 중 움직이는 이들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반군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고 분명했다. 남부군을 위한 정당한 지원. 반군은 그 과정에서 황제를 갈아 치워야 한다 해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내전, 황제가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성을 무너트리기 위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끝은 세 가지 경우로 좁혀진다. 어떤 식으로든 반군이 이겨 황제의 권력이 깎이거나, 아예 주인이 바뀌거나, 혹은 황제가 이겨 반군의 모든 행보가 부나방이 한 찰나의 반항이 되거나.

그의 준비는 미흡하건만 내륙의 상황은 그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서신을 전해 받은 이후 아르페시스는 반황실 세력과의 접촉을 포기했다. 그들의 도박금을 끌어모을 때가 아니라 이미 움직이고 있는 반군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 그는 내전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후발 주자다. 일을 주도하는 것은 그보다 먼저 출발한 반군이다.

애초에 아르페시스가 남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그들은 황제에게 칼을 겨누며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공들인 시간이 다르니 아르페시스가 그들보다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과거에 했던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반정이 불가능하다는 낙인을 찍고 포기했었다. 대신 그 외의 문제를 우선시해 왔고. 그의 선택으로 인해 수만의 남부군이, 수십만의 남부 백성들이 무너질까 봐… 그의 위치가, 그에게 붙은 에렘이라는 이름이 너무 위험해 쉽사리 가능을 보지 못했다.

만약 과거의 순간에 불가능이 아니라 가능을 찾았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가 보지 않은 길이기에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성은 그가 남부를 지킨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준다. 남부가 굳건하지 못하면 내륙의 정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남부를 지켜 냈기에 남부를 떠난 반군은 미련으로 돌아보지 않고 기반을 닦은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질 수 없는 문제였다. 그저 다름을 보아야 할 뿐이다. 그와 반군은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각기 다른 일을 각자가 열심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은 그걸 알고 있지만 감정은 그간 그가 반군으로 이탈했던 이들을 회유해 다시 남부군으로 데려온 것을 후회한다. 방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그의 선택 때문에 그들이 만든 기회가 무너질까 봐 무서웠다.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 믿었건만 시간이 지나 지금에 이르러 보니 틀린 선택이 아니었을까, 후회하고야 만다. 어째서 과거의 선택은 항상 후회가 되어 돌아오는 것일까. 조급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곧 다가올 기회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 않게, 반드시 성공하게, 늦지 않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지금까지 아르페시스가 준비한 것으로 중남 경계선에 중앙군을 묶어 두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렇게 중앙군의 일부가 묶인 사이 반군이 황도까지 치고 들어가야 한다. 기사들을 차출해 반군 쪽으로 보낼 수도 있다. 과거 반군 쪽으로 이탈했던 이들이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응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좇아가고 있음에도 때때로 초조함은 그의 목을 졸라 온다. 겨우 이 정도 준비한 것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성공할 수 있는가? 황제와 황태자를 죽일 수 있나? 만약에, 그가 반정에 발을 들인 것이 드러난 후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언제나 인간을 흔들고 지나갈 뿐이다.

남부군 병력 일부를 빼내 중앙군을 상대하게 되면 더 이상 일을 무를 수 없다. 황제는 아르페시스의 반심을 확인하는 즉시 남부 지원을 모두 끊어 버릴 것이다. 내전에 엮이는 순간 남부군은 완전하게 고립된다.

일이 틀어지면 대체 몇 명이 죽어 나갈까?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 해도 죽는 이가 생길 것이다. 내전을 치르게 될 경우 죽어 나갈 무고한 이들의 비명이 그를 찾아와 발목을 붙든다.

페드로가 죽던 날, 아르페시스를 살리기 위해 대형 마수에게 몸을 던진 이들의 원혼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전우를 내전의 제물로 내몰 줄 알았다면 그날 죽여 버렸어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으며 아르페시스를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무섭고 무거운 것을 짊어진 채 버티고 있었다.

「내가 본 너는 그 선택으로 생겨난 짐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건한 사람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가 그를 믿어 주었으니 그도 스스로를 믿어야만 했다. 버티고 버텨, 종내 에스메랄다와의 미래를 손에 넣는 날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페드로가 죽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리움이 그의 다짐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페드로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정기 회의 때마다 아레스가 수정 마도구나 서신을 받아 가 에스메랄다에게 전해 준다.

분명… 분명 아레스는 페드로와 꽤나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행동까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레스를 만날 때마다 묘하게 페드로가 아른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형제라서 그런가 보다, 하는 중이었다. 그런 아레스를 통해 에스메랄다에게 물건을 보낼 수 있는 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버지도 알고는 계십니다.’

리퀘나 관저에 있는 테노리엘의 세작들을 통해 근위대의 뒷조사를 했으니 그게 보고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에스메랄다와 그의 관계가 알려질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백작이 에스메랄다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건……. 필시 페드로가 무슨 말을 남긴 것이겠지.

아직까지는 별다른 반응은 없었지만 아르페시스는 백작을 볼 때마다 긴장하곤 했다. 테노리엘 백작은 지난 바의 달 무렵 새로이 파병된 1만 중앙군의 책임자로 전선에 온 상태였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쓰임을 위해 친부에게 거둬진 사생아, 죽음만을 위해 길러진 소모품이 백작의 눈에 찰까? 만약 반정에 성공해 에스메랄다와의 미래를 거머쥘 수 있게 된다 해도 백작이 순순히 허락해 줄까?

정기 회의에서 백작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가 긴장으로 실수를 하지 않은 건 아레스 덕분이다.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그를 통해 백작이 별다른 불만이나 언짢음을 내보인 적은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부정당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테노리엘 일가와 새로운 접점이 생기기는 했지만 에스메랄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일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수가 줄었고 혼자 감정을 곱씹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쌓여 가는 것이 없어 초조해하던 어느 날, 테몬 후작의 수하가 접촉을 해 왔다. 정확하게는 작년 겨울 무렵에 있었던 접촉 직후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가 해가 바뀌어 겨울이 되어 버린 최근 다시 연락이 왔다.

‘한번 뵙고 싶군요.’

전해 받은 것은 짧은 말이 적힌 쪽지가 전부였다. 테몬은 중앙에서 대표적인 중립 귀족. 대체 후작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작년 겨울 그의 영지에서 알그레노 자작이 이끄는 반군이 발견되어 중앙군과 교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망설임을 밀쳐 냈다. 반군이 그도 모르게 숨어 있었을 수도 있으나 반군과의 접점을 가진 그가 숨겨 주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

아스터에게 전해 듣기로, 반군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 처벌은 하지 못했지만 최근 중앙 정계에서 테몬 후작의 입지가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했다. 물증만 나오면 처벌의 대상이 될 게 빤하니 아니었다고 해도 당장 발을 들여야 할 테지. 결국 아르페시스는 테몬 후작이 보낸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지속된 접촉 시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진한 반군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늘, 그는 테몬 후작이 보낸 사람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잠시 꿈속을 헤매었다. 근 2년여간 그의 수면 시간은 불규칙했다. 꿈 때문에 잠을 오래 잘 수 없었기에 틈틈이, 더 이상 깨어 있기 힘들 때 기절하듯 수마에 빠져야만 잠들 수 있었다.

페드로의 죽음 이후 아르페시스가 꾸는 꿈의 종류는 4가지였다. 색채밖에 없는 본래의 악몽과 에스메랄다가 그를 버리고 떠나는 잔인한 망상, 혹은 페드로가 죽던 날의 기억. 마지막 하나는 정기 회의에서 마주치는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을 보고 꾸는 미래에 관한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잠시간 잠들었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전하.”

오늘은 페드로가 죽던 날의 기억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쓸며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오지 않았나?”

아스터와 달리 곁에 남은 데미안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외출은 본부대 지휘 기사들도 일부밖에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대동한 이들 역시 의심 한 자락 없이 그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위 기사 다섯 명이 전부였다.

일부러 매달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시찰 일정에 맞추어 시기를 잡았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가 겨울에 리퀘나로 복귀해도 이상하지 않을 업무는 그것뿐이니까. 본부대의 1할 병력이 그를 호위하며 성벽 외의 주둔지를 거쳐 이동하는 일정.

이미 보름간 다른 6개의 성을 시찰했고, 내일은 중앙 리퀘나로 복귀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도착하면 이후 지휘부 정기 회의가 있지만 전투가 잦은 겨울이라 부대 지휘관들보다는 그들의 부관들이 대리 참석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중앙 리퀘나 성벽에서 가장 가까운 외부 주둔지는 8부대가 있는 곳이다. 그곳의 총지휘관은 전형적인 급진파 세력이고.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현재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후 함께 리퀘나로 움직이기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헤르토크 백작령의 최남단 도시 근처로 이동한 상태고. 8부대에서도 지금 그의 외출을 아는 것은 해당 부대의 총지휘관과 부관 2명뿐이다.

“예, 벌써 한 시간째입니다. 어찌할까요?”

그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 때문에 오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안내를 위해 보내 준 길잡이와 합류를 하지 못해 헤매고 있는 건지…….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외출이 가능할지 알 수 없다.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인근 지역을 수색한다. 2시간 내로 발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것으로 하지.”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늦지 않게 본부대 호위 병력과 합류하려면 동이 트기 전에는 8부대의 주둔지로 이동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예, 전하.”

휴고를 제외한 이들이 2인 1조로 흩어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수통을 꺼내 얼굴에 들이부었다.

“후…….”

전투가 없을 때에도 항상 목에 차고 다니게 된 마도구를 손으로 쓸어 보는 건 그의 버릇이 되었다. 에스메랄다에게서 직접 받은 것은 그날 전투에서 파손되었지만, 페드로를 통해 따로 받은 여벌품은 아직 남아 있다.

마기에 뒤덮인 바위에 직격당해 튕겨 나갔던 그는 머리를 다쳤다. 당시 잠시간 시야를 잃었던 것도 머리에 너무 강한 충격이 가해졌기 때문이고. 보고에 따르면 서쪽에서 나타난 대형 마수는 애초부터 등에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리고 등장 직후 정확히 아르페시스를 목표물로 하여 투석을 감행했다.

대형 마수의 위력은 인간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함께 바위에 직격당한 근위 기사는 즉사했다. 부상이 조금만 더 심했더라면, 체력이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손써 볼 틈도 없이 죽었을 거라고. 그를 살려 낸 신관들이 녹초가 되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목숨 줄을 붙들며 무리한 신력 치료를 시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마도구 덕분이었다. 당시 실드가 바위와 먼저 충돌함으로써 위력이 감소되지 않았다면 아르페시스도 즉사했을 터.

‘전장에서 너를 지켜 줄 수 있기를.’

결국 에스메랄다의 축복이 아르페시스를 살린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

과거 그녀가 해 주었던 약속을 곱씹으며 아르페시스는 오늘도 그리움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 따라야 하는 페드로의 유언도 있었다.

그녀를 통해 알아내야 하는 것. 그건 대체 무엇일까? 미래, 시간을 되돌아온 사람, 꿈, 반정, 무고한 희생, 수없이 많은 생각이 흩어지며 가지를 뻗었지만 열매를 맺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에스메랄다를 다시 만난 후에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꾸는 악몽이 미래에 관한 것이고 그녀가 아르페시스보다 더 세세하게 미래를 알고 있다면?

페드로는 그녀가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 겪고 돌아왔다, 라는 가설에 더 무게를 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진실이라면 지금 그가 꾸는 꿈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가 사라진 미래가 된다.

그것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제쳐 두고, 진실이라고 가정해 생각을 정리하면 그동안 해 온 모든 추측이 뒤집어진다. 그녀에게 배제당했다고 말하던 휴고와의 대화는 비수가 되어 버린다. 그의 꿈이 앞이 아닌 뒤에 있었던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녀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이다.

한데 지금의 에스메랄다는 왜, 어째서 그에게 사랑을 고해 주고 있는 것일까?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이 있던 날로 추정되는 꿈은 무슨 의미이고? 사이가 틀어진 후 시간을 되돌아온 그녀가 그를 배제하기로 했기에 그날의 사건이 변한 것일까? 그래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건만, 가정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게 그에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지금의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를 처음 만났던 날 보았던 일기.

「--에게 돌을 던지던 그들, --의 죽음에 환호하던 그들, --를 죽음으로 내몬 그들, --의 절박함을 외면한 나를 용서할까 보냐.」

그들, 아마도 꿈속의 처형식에서 에스메랄다에게 돌을 던지고 있던 황도의 그들.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허상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진실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아르페시스는 스스로가 무서웠다. 막을 수 있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그것을 에스메랄다가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껏 지켜 왔던 모든 걸 짓밟고, 대륙 위를 붉은 핏물로 적셔 버리고 싶다는 끔찍한 살의가 들끓어 버린다. 그가 살아온 방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아득한 감각과 함께 찾아오는 것들.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그 지독한 것은 때때로 갑자기 튀어나와 그를 뒤흔들고, 또한 갑자기 사라져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해할 수 없고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은 전제에 붙잡힌 아르페시스는 휘둘리고 있다. 하지만 괴롭기만 한 생각 속에서도 그는 의문을 흩어 내지 않고 붙잡았다.

어떤 이유에서도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의문과 의심, 그 끝에서 반드시 답을 찾아내야만 하니까. 페드로가 남긴 유언이다. 끔찍하게 힘들다 해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숨을 고르며 힘겨운 생각을 이어 가던 무렵, 2인 1조로 수색에 나섰던 이들 중 데미안이 돌아왔다.

“찾았습니다. 마수 때문에 이동이 조금 지체되었던 모양입니다.”

데미안은 에스메랄다가 페드로 편으로 전해 주었던 확대경 마도구 덕분에 손쉽게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고 있나?”

“예, 전하.”

“이쪽에서 움직이면 더 빨리 만나겠군.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가지.”

아르페시스가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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