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짧은 평화
지금의 만찬에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이 불참한 이유는 간단했다. 업무가 바쁘다는 것은 표면적인 명분이었고, 사실상은 아르페시스가 그들의 참석을 암묵적으로 불허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황제가 보낸 근위대와는 따로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그 덕에 에스메랄다는 따로 신경 쓸 것 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이미 페드로를 통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사이를 모두 안다고 들었으니 자숙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최근과 비슷한 일을 했던 때의 경험이 존재했다. 문제의 그 경험이 무엇인가 하니, 여인의 몸을 적극 이용해 아르페시스를 유혹하려는 행동을 의미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크게 격동하며 테이블을 건드렸다. 덕분에 덜컹, 하고 식당의 테이블이 흔들렸다.
“아… 으으…….”
함께 만찬에 참석했던 이들의 시선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모여들었다. 지금 그는 온몸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상석의 좌측에 앉아 있는 에스메랄다의 발이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허벅지 사이를 열심히 파고드는 중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얽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가 곤란한 얼굴로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본 후 시침을 떼자 일이 여기까지 커진 것이고.
조금 전 아르페시스가 도망간 일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고, 하다 보니 당황해서 절절매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예전과 달리 제 유혹에 분명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신기하다 보니…….
구두를 신은 채 발등으로 그의 종아리를 쓸어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구두를 벗어 던진 채 점점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기 위해 열심히 꼬물거리는 중이었고. 물론,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아 버린 아르페시스의 방어로 인해 성공은 요원했지만.
“천사야.”
그녀의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페드로가 물로 입을 헹군 후 그녀를 불렀다. 꽤나 엄한 어조인지라 아르페시스 유혹하기, 혹은 괴롭히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를 찾아갔다.
“식사 중에는 정숙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에스메랄다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새침하게 대답했다.
“네 접시가 처음과 변한 점이 없잖니. 다른 것 말고 식사에 집중하는 게 좋겠구나.”
“……천천히 먹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다른 것이라니요? 무엇을 지칭하시는 건가요?”
“내 입으로 여기 있는 모두가 테이블 아래에서 움직이는 기척 정도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이들임을 짚어 주고 싶지는 않구나.”
모든 신경을 아르페시스에게 집중하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었다.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곧장 인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에스메랄다는 속에서 일어난 동요를 밖으로 내보이는 대신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가면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테이블 아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궁금하네요.”
모른 체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상황이다. 방금 전까지 하던 일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 벗어 던진 구두를 다시 신으려고 했다. 발을 아무리 휘저어 봐도 구두를 찾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페드로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휴고가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테베르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루이자를 제외한 만찬 참석자 모두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는 게 눈에 보였다.
“여기 있단다.”
페드로가 다시 식기를 들며 말하자 구두가 그녀의 발치로 통, 통 굴러 왔다. 아무래도 조금 전 벗어 던질 때 반대쪽으로 넘어간 모양이다.
“오라버니께선 뵙지 못한 사이 이상한 말을 하는 버릇이 드셨군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한 에스메랄다는 덤덤한 표정으로 구두를 다시 신었다.
“너는 못 본 사이 더 능숙해졌구나.”
거짓말쟁이.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삼킨 말을 무시했다. 어째서인지 옆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루이자의 눈동자가 상당히 초롱초롱한 것 같지만… 당장 왜 그렇게 보느냐, 같은 질문을 할 수는 없으니 모른 척해야지. 에스메랄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르페시스를 흘겨보며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 * *
에스메랄다의 어설픈 발장난이 있던 다음 날, 페드로는 루이자와 함께 있었다.
“후원에 연못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심술인지 보복인지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가 루이자를 그에게 떠넘겼으니까.
‘오라버니께서 루이를 챙겨 주시면 한 번쯤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귀여운 협박이라니. 페드로는 픽, 하고 웃으면서도 제 팔에 매달려 있는 루이자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실내를 지향하며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에스메랄다와 달리 루이자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고로 페드로는 오늘 하루 동안 리퀘나 성벽 내부의 시가지나 관저를 안내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그 마지막 안내지가 관저 뒤에 있는 연못 후원이었고.
편의와 위치상 후원이라 부르긴 하지만, 관저의 후원은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은 작은 숲이었다. 애초에 절벽에 맞닿은 곳에 관저를 세울 때 연못을 비롯한 나무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자르거나 수풀과 꽃을 심는 등의 조경을 거친 곳은 관저 정면에 있는 정원뿐이었다. 지금 두 사람이 도착한 곳에서 인위적으로 손을 본 건 나무 사이로 길을 내놓은 게 전부였다.
사실,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이 일을 떠안기지 않았어도 자청할 생각이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부터 쿠베트와 부소네 간의 혼담이 오고 가는 중이었으니까. 혼담이 오간다고 해도 무산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편이지만, 성사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니 페드로의 입장에선 혀를 찰 수밖에.
부소네 공작령은 리퀘나가 있는 군사 지역의 동쪽 끝에 접해 있기에 남부군과의 교류가 적지 않다. 덕분에 혼담 얘기가 오고 가기 시작한 후 바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무려, 근방에서 자원병으로 구성된 20부대를 이끌고 있는 아레스로부터.
형제라고는 하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을 만큼 페드로는 어리석지 않았다. 아레스와 여인을 보는 눈이 지독하리만치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루이자와의 연결점을 철저하게 숨겨 왔다.
반면 페드로와 루이자 사이의 일을 모르는 아레스는 그저 부소네가 쿠베트에게 손을 내밀었다며, 귀족들의 동향을 알려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페드로는 속이 말이 아니었다. 망할, 페드로는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욕설을 속으로 읊조렸다.
“후원에 자주 방문하시나요?”
“그다지요.”
루이자가 연못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페드로는 곧장 시선을 연못으로 던지며 그녀를 바라본 적이 없는 척 능청을 떨었다. 지금 당장 루이자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부소네와의 혼사에 관심이 없는 건 분명하다. 단지 귀족의 혼사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니…….
일이 어찌 될지는 페드로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지난여름, 행동보다 더 단호한 말로써 선을 그었기에 완전히 끝난 줄만 알았다. 그 이후로는 서신도 오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어느 순간부터 루이자의 서신이 오지 않음에 실망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조소하는 반년이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고 해도 포기할 수 있다고 여겨 왔다. 아직 마음이 커지지 않았으니 전선에 선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건만, 그의 오만이었다.
테노리엘 백작 성에서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났을 때에 그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멍청하기는. 애초에 그녀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을 때부터 흔들려선 안 되었던 것이다. 루이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고 싶어서, 존재감이라도 남기고픈 마음에 생일 선물 같은 걸 보내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선택지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다는 유치한 욕심이 일을 이렇게 키워 버렸다.
그때 스스로를 자제했다면 루이자가 그에게 더 다가오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기껏 걱정을 해 주었는데도 답신을 보내지 않는 나쁜 놈, 매정한 놈에서 끝낼 수 있었건만 그의 욕심이 일을 망쳐 버렸다. 그래, 지난여름에 분명한 거절을 언급했음에도 루이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흐응, 평소에는 그럼 무엇을 하며 지내시나요?”
“라의 달에는 개인 훈련을 하거나 군내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며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의 팔에 말랑거리는 감촉이 닿고 있겠지. 이렇게 행동할 거면서 왜 서신을 보내지 않았던 걸까? 설마 애를 태우기 위해서였나? 그렇다면 루이자는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에스메랄다가 떠안기기도 전에 제 발로 그녀를 안내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페드로는 애가 탄 상태였으니까.
쿠베트성에서 루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을까? 아니, 과거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웃으며 제 심장을 파고드는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도 나름 끔찍했으리라. 페드로는 테노리엘 백작이 왜 전선에 나가야만 했던 젊은 시절에 혼인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의 부친은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직접 경험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다며 아레스와 함께 백작을 흉보았는데, 이제는 과거의 자신이 행했던 성급한 비난을 속으로나마 사죄해 본다. 뭐, 이 사죄가 테노리엘 백작에게 직접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백작이 보는 앞에서 그를 흉봤던 것도 아니니 전할 필요도 없고.
루이자는 그의 일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질문에 질문을 이어 가고 있었다. 페드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페시스의 곁을 비울 수 없는 이유와 그로 인해 루이자를 쟁취할 수 없는 현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망했군.”
“네?”
이런, 홀로 한 생각이 중얼거림으로 새어 나온 모양이다. 페드로는 덤덤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대꾸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눈초리를 가늘게 뜨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미치겠다. 팔을 꽉 붙든 채 놔주지 않던 루이자가 슬금슬금 손을 놀렸을 땐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뻔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 가슴이 닿도록 유혹을 하는 것도 모자라, 고운 손으로 그의 허리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가 어제의 만찬에서 친 발장난을 눈치채고 따라 하는 것 같았다.
누이가 교우 관계에서 권장하지 못할 만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한탄해야 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사내를 대상으로 대뜸 육체적인 유혹을 시도 중인 루이자의 성급함에 한탄해야 하는 것인지.
“하아…….”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뭐죠?”
드디어 페드로의 시선이 루이자의 하늘색 눈동자를 찾아갔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놀라는 통에 팔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더 선명해졌다. 페드로는 마른 입술을 축이는 루이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잡을까? 말까? 여기서 허리를 낚아채 품에 껴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붉은 입술을 삼켜 탐하면 무슨 맛이 나려나? 이미 제 심장은 함락되었노라고 고하면 과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그를 받아 줄까?
지독히도 많은 생각 속에서 에스메랄다의 얼굴을 떠올린 페드로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루이자가 다시 한번 몸을 움찔거렸을 때, 페드로는 그녀에게 붙들려 있던 팔을 빼낸 상태였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바 51일 전사.」
그는 아르페시스가 보았다던 그 문구를 기억 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심장 한구석에 선명하게 새겨 둔 상태였다. 스스로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희망이라는 말로 덮어 두는 대신, 언제나 죽음의 가능성을 그리며 다음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혼자서 그 악귀들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 뒀잖아!’
다 자라지도 못한 손으로 그를 때리며 울던 에스메랄다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페드로의 우선순위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그는 스스로의 행복도, 루이자에게 선택받음으로써 가질 수 있는 미래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미소는 결코 포기할 수 없으니, 아르페시스를 살려 놔야 한다.
그렇지만… 당장 눈앞에 거역하기 힘들 정도로 달큼한 사탕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냥 놔주기엔 아쉽다. 끝끝내 루이자가 내민 손을 잡지 못할 불쌍한 스스로를 위해, 딱 한 번만 허락해 보자.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페드로의 팔은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얇은 허리를 낚아챘다.
“아!”
놀라서 탄성을 내뱉는 루이자를 품으로 바짝 끌어당긴 페드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고운 흑발이 뺨에 닿고, 맞닿은 살결에서 취할 것만 같이 달콤한 향기가 났다. 지난여름 백작 성에서 다시금 루이자를 만난 이후로는 따로 여인과 정사를 가진 적이 없어서인지 꽤나 강한 자극이었다. 페드로의 입술이 루이자의 귓가에 스치듯 닿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그는 아직 어리숙하기만 한 여인에게 사내의 위험성에 대해 알려 줄 생각이었다. 사리사욕을 조금 챙기기는 하겠지만 교육의 일환이니 너무 큰 벌을 받지는 않기를. 페드로가 탄탄한 허벅지가 루이자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품속에서 바르르 떠는 루이자를 이대로 집어삼키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지만…….
“바라시던 일이 아닙니까?”
참을 수 있다. 참아야 한다. 페드로는 루이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살짝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 그건……!”
바르작거려 보아도 이 자세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하지 못하셨다고 해도, 영애께서 저를 먼저 유혹하신 이상 그건 제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니겠군요.”
페드로의 큼지막한 손이 루이자의 등허리를 타고 탐스러운 둔부 쪽으로 움직였다. 루이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자 그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부디, 지금 들려오는 그녀의 심장 소리에 파묻혀 그의 심장 소리가 전해지지 않기를.
“저, 저는… 그러니까…….”
페드로는 루이자의 귓불을 살짝 깨물어 준 후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찾았다. 청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마주해 버리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셔 버리고야 말았다.
페드로가 제 입술을 혀로 살짝 핥는 모습을 본 루이자가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아 버렸다.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이렇게 무방비한지, 페드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페드로의 입술이 닿아 오지 않자 루이자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조금 전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던 농염한 미소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다시금 마주한 페드로의 얼굴은 차가웠다.
“그럼, 감사히.”
“……네? 무슨…….”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페드로는 쓰라린 속내를 감추며 그녀를 위한 불한당이 되기로 했다.
“어디를 찢어 드릴까요?”
루이자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어느새 페드로의 손이 드레스의 앞섶을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루이자가 페드로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단단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페드로는 거기서 멈추는 대신 입매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아, 입은 채로 하시는 게 취향이셨습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맞춰 드리지요.”
그녀가 힘을 주어 반항해 본다고 달라질 건 없다. 여인의 체중만 한 무게의 대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이 기사이고, 그건 지금 루이자를 끌어안고 있는 페드로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니까.
페드로의 손은 이미 루이자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탐스러운 둔부를 움켜쥔 상태였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삼킨 그가 루이자의 목덜미를 깨물며 속삭였다.
“반항하시면 더 흥분될 뿐입니다.”
다시금 거리를 좁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난 건 일그러진 표정이 드러날까 싶어서였다. 루이자의 움직임이 멈추고, 호흡이 떨리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페드로가 사력을 다해 표정을 감추었다. 루이자를 놔준 그는 자신이 직접 걷어 올린 치맛자락을 내려 주고, 거친 손아귀에 구겨진 앞섶을 펴 주었다.
“사내 앞에서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이유를 배우셨을 것이라 믿겠습니다.”
부친에게서 배운 대로 표정을 감춘 페드로는 차마 루이자를 마주 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관저 안내도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린 눈동자에 사로잡히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기로 했다. 더 지체하다간 놀라게 해서 잘못했다고, 못된 짓을 해서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어 버릴지도 모른다.
페드로가 떠나자 풀썩, 하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자는 그가 사라졌기에 주저앉은 것이지만 페드로는 그녀의 시선에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바들바들 떠는 몸을 안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의 눈물을 쓸어 주며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속삭이고 싶다.
하지만 페드로는 몸을 숨긴 채 나서지 않았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루이자가 몸을 추스르고 후원을 벗어났다. 오늘의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마음에 드는 사내를 발견했다고 대뜸 유혹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그거면 되었다.
페드로는 멀어지는 루이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쪽을 엄하게 타일렀으니, 저쪽에 영향을 미친 다른 쪽도 제대로 타일러 두어야 하는데…….
그 전에 조금만 쉬자. 페드로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쪽은 아르페시스를 단속해 두었으니 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난리를 피워 대는 심장을 다독일 겸 조금만 쉬자.
“젠장…….”
손에 남은 감촉이 지독히도 선연해서 끔찍한 기분이었다.
* * *
괴롭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아르페시스는 최근 며칠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중이었다. 그가 당장 에스메랄다의 유혹에 응하지 않는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첫 번째는 그녀가 발장난을 친 만찬이 끝난 후 페드로에게서 떨어진 위협적인 경고. 두 번째는 이미 언급한 대로, 너무 어린 나이에 가지는 관계는 여인의 몸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이론적 지식 때문에 걱정이 돼서.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쌓아 온 가치관 때문이었다. 아르페시스에게 남녀 간의 정사는 배필들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다. 배필의 맹세를 한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것.
남부에 온 이후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인지했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한다.’라고 생각할 만큼 아르페시스가 쌓아 온 가치관이 얄팍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옳다고 생각했기에 가치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타인이 다르게 행동한다 하여 그걸 따라 한다면 아르페시스 입장에서는 옳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필요를 인지했다고는 하나 그는 배필 외의 이성과 가지는 육체관계를 적극적으로 장려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남부군 내부에선 꽤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정도다. 조직이나 사회는 그것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성향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아르페시스가 이끌어 가고 있는 남부군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시작된 변화는 처벌의 강화였다. 그가 총사령관직에 임명된 이후 강제적인 성행위나 폭력이 동반된 관계에 대한 처벌의 강도가 상향 조정되었다. 여인이 임신을 했음에도 혼인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지급되는 양육비도 마찬가지.
그 외에도 죽음의 공포나 살육으로 인해 흥분하고 정신적으로 지친 이들이 성행위 외의 방법으로도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둘 만들어 왔다.
대표적인 예로 7개의 리퀘나성 내부에 만들어진 유흥거리를 들 수 있겠지. 돈을 걸고 하는 내기 대련이나 타국의 특이한 체술이나 격투술 강습, 그 외에는 휴가나 약제 등의 다양한 상품이 걸린 원거리 표적을 맞히는 유흥거리도 있었다.
사행성이 반영된 유흥거리는 그의 꿈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더운 여름, 기사들과 내기 대련을 하다 말고 에스메랄다가 도착한 꿈을 꾼 적이 있다. 본래 방문 예정일보다 하루 이른 도착이었기에 꿈에서의 그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사령관실로 올라갔었다. 그때 에스메랄다와 나눈 대화 중에 내기 대련에 관한 것이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그 꿈을 통해 생각해 낸 것을 정기 회의에서 정식으로 건의했고 각 부대의 지휘관이나 발언권이 있는 이들의 의견을 모아 하나둘 숫자와 규모를 늘리거나 개선해 나가고 있었다.
‘내가 도박을 장려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시설을 만들고 행정 처리를 가다듬던 당시 아르페시스가 했던 말이다. 이런 식의 유흥거리가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혼인을 한 상태이거나 아르페시스처럼 배필 이외의 이성과 관계를 가지며 죄책감을 느끼던 이들이 이성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건 결국 성을 매매하던 이들의 수익이 줄어든 것을 의미했지만 다행히도 두 번째 현상 덕분에 큰 마찰이나 문제가 없었다. 유흥거리를 만들면서 그곳을 관리할 인원이 필요해졌기에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원하지 않으나 생존을 위해 매춘으로 떠밀린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남부군이 고용했다.
우선 조건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채 남부군에서 전역한 이들의 가족, 18세가 되지 못했음에도 부양 가족이 있는 사람 등, 몇 가지를 지정했다. 유흥 시설을 이용하려면 기사나 병사들이 이용료를 내야 하기에 그것을 다시 고용인의 봉급으로 제공하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아 소란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원치 않음에도 매춘을 하고 있는 현실을 실감했던 일이었다.
아르페시스의 방식이 좋은 효과만을 가져왔던 건 아니다. 돈을 걸고 따는 사행성에 따른 문제점도 함께 나타났다. 한마디로 도박을 하다가 패가망신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파산이니 빚이니 하는 문제가 생겨나자 아르페시스는 해당 시설을 시찰하며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왜 도박에 죽어라 목숨을 거는 거지? 고작 내기일 뿐인데 대체 왜 전 재산을 거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냐고!’
‘승부욕 때문이지.’
시찰 이후 피로에 물든 아르페시스가 화를 내자 페드로가 금화를 튕기며 대답을 했었다. 페드로는 아르페시스가 시찰을 하는 동안 내기 대련에 참가해 돈을 땄다. 그걸 보며 또 허탈하게 웃어야만 했다. 결국 한 번에 허용이 가능한 금액에 상한선을 걸고, 지나치게 잦은 방문을 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수단이 추가되었다.
좋은 의도로 만든 정책을 좋게만 써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꼭 문제가 따라 나오니 골이 아팠던 사건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계속 그런 식으로 남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늘려 갈 생각이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기존의 남부군 인사들이 그를 ‘나이에 비해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르페시스는 첫 정기 회의에서 나눈 페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을 세워 가고 있었다. 타인은 타인대로 필요한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에 대해 감정적인 비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똑같이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배필이 아닌 이성과 관계를 가지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에스메랄다와 그의 혼인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게 사내이겠나?
결국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가치관과 현실 사이에서 자의적인 타협을 보았다. 최소한 그녀가 성년이 된 이후에 조심스럽게 언급을 해서 허락을 받아 보자고. 페드로가 그런 그의 속내를 알아차린 후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심보냐고 놀려 댔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성년이 제국법에 따른 16세가 아니라, 3년 가까이 함께 시간을 보낸 페드로에게 영향을 받은 18세라는 건 당연하고. 불허가 떨어지면 당연히 물러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장 다시 해!’
‘난 피임약까지 준비를 해 왔는데 거기서 관두는 이유가 뭐냐고!’
‘피임약!’
‘너만 원하는 게 아니라 나도 원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네가 잘하면 되잖아!’
생각했던 것과 달리 허락을 너무 일찍 받아 버리는 바람에 아르페시스는 다리를 달달달달 떨었다. 그가 힐끔거린 시선의 끝에는 비스듬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는 에스메랄다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그의 반대 방향, 다리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 둔 상태였다. 그 자세에서 주목할 점은 치맛자락이 반쯤 올라가서 에스메랄다의 하얀 종아리가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다는 점이겠지. 그녀는 드로어즈조차 입지 않았다!
“리, 리퀘나 방문자에게는 내, 내부 안내를 해 주기도 하, 하는데…….”
“서류로도 볼 수 있으니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들기도 하고.”
“그, 그, 그럼 관저, 관저의 후원이 꽤 아름답… 으아……!”
말을 하는 사이 에스메랄다의 발이 슬금슬금 아르페시스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경박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그의 다리가 뚝, 멈추었다. 닿는다, 닿는다, 그녀의 발이 조금만 더 움직이면 확실히 닿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후에 이어질 환상적인 일들이 가득했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 무척이나 개방적인 남부로 온 후, 그는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주워들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 본 상상이 꽤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지라 지금의 순간이 더 힘들었다.
“뭐 해?”
“……으응?”
“다리가 아프다니까? 주물러 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순간 에스메랄다의 하얀 종아리에 고정되었다. 꿀꺽, 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며 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오만한 여왕을 앞에 둔 몸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이러할까? 덜덜 떨리는 손을 뻗던 아르페시스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의 성격이 원래 이랬나? 그가 아는 에스메랄다는 차분하고, 고혹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는데.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의 색다른 매력은 그를 다시 한번 사로잡았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휘둘리는 모든 과정은 아르페시스를 고양시켰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에게 종속된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그녀의 것이라는 확신을 받는 것 같았다.
뭐, 그런 생각도 전부 에스메랄다의 말랑말랑한 종아리를 만지기 전에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을 이어 갈 수가 없는 상태였다. 손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에 넋이 나가 있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치맛자락.
‘치맛자락을 들쳤으면 끝을 봐야 할 거 아냐?’
이대로 들쳐서, 들친 다음에…….
‘참을 수 있지?’
어깨동무를 해 오며 씩, 웃었던 페드로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다급히 손을 거둔 채 몸을 정면을 향해 틀었다. 다리를 꼬며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허벅지 위에서 노닐던 에스메랄다의 발이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그게 또 지나치게 자극적인지라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훅, 훅, 하고 떨리는 숨을 고르며 별 의미도 없는 천장의 무늬를 세기의 난제라도 된 것처럼 훑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골까지 깊게 파인 드레스에 그녀가 직접 걷어 낸 치맛자락까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대로 코피를 흘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극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서 에스메랄다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나던 상태였다. 그런데 촉감이라는 자극까지 더해지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유혹이 좋긴 하지만 그를 잡아먹을 듯 눈을 치켜뜬 에스메랄다를 볼 때면…….
셀 수 없이 많은 꿈속에서 그는 언제나 에스메랄다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를 간절히 원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아프게 하지 않을지, 기쁘게 해 줄 수 있을지 같은 것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가져 왔던 환상이 에스메랄다에 의해 차근차근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빨리 해치워야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서둘러 끝내 버리고 싶어 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정확할까? 그런 느낌을 종종 받다 보니 솔직히 조금, 불만이 생겨난 상태였다. 에스메랄다를 의식한 채 고심한 것들이 모조리 무의미해지는 기분이라 허탈해졌으니까.
그의 연인은 다 좋은데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게 정말 아주 조금, 불만이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덕에 큰 불만은 아니었고. 그렇게 유혹에 저항하다 보면 에스메랄다가 곁에 있던 쿠션을 팡팡 내려치며 식식거리는 일이 사흘간 반복되었다.
“너 진짜 아랫도리에 문제 있니?”
지금의 모든 것이 사흘간 반복되었다는 말은, 그의 남성적 기능에 대한 의심을 받은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모른다.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온 단어라는 게 믿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녀의 의심이 틀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에 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홀로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없고, 그녀에게 달려들 수도 없었으니까! 그 순간의 당혹감과 억울함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지난 경험으로 최소한의 대처 방법을 익힌 아르페시스는 꾸준히 천장의 무늬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러고 있노라면 에스메랄다는 쿵쿵, 하고 발을 놀리고 아르페시스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화가 난 것인가 싶어 눈치를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흘째 반복된 일이었다.
* * *
밤마다 몰래 그녀의 침실을 방문한 덕분에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나. 잠이 든 그녀로부터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첫날에는 그녀가 잠들기 전에 침실을 방문했는데, 그때 정말로 잡아먹힐 뻔했던 터라 그녀가 잠든 후에 들어오게 되었다. 서둘러 침대로 다가가 품을 내어 주면 에스메랄다는 언제 흐느꼈냐는 듯 새근새근, 평안하게 잠든다.
하지만 새벽녘이 되어 잠에서 깬 에스메랄다는 쿠베트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환하게 웃어 주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친 직후 처음 보이는 건 미소가 아니라 눈물이다.
여기서 아르페시스가 차마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그녀가 울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말을 걸고 대범한 행동도 하지만 아직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차오르는 순간 흘러내리는 눈물에 마음이 아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면 에스메랄다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 솜방망이 주먹으로 몇 번이고 그를 때린다. 밉다, 원망한다, 사랑한다, 나쁘다, 죽지 마라……. 그녀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모든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지금 성급하게 관계를 가졌다가 훗날 그녀가 후회를 하면 어떻게 하지?
그는 에스메랄다와의 관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으니까. 쉽사리 용서를 해 주지 않았던 그녀를 향한 원망은 서로의 옹졸함을 털어놨던 날 모조리 사라졌고 사랑만이 남았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에게는 아직 아르페시스가 남긴 상처가 있고, 그를 향한 원망도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욕심을 참지 못하고 관계를 가지면? 훗날이 되어도 그녀가 그를 향한 원망을 모조리 털어 내지 못한다면?
에스메랄다가 그와 관계를 가진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상상은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음에도 지독한 고통을 선물했다. 그러니 조금의 시간을 더 기다리는 게 옳다.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가지는 원망이 없어진 후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녀가 오로지 행복으로만 그와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여 줄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울다 지쳐 다시 잠든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겁쟁이…….”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꾸었던 지독한 일기가 떠오른다.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던 겁쟁이. 침묵으로나마 곁에 있고 싶었던 비겁자. 손에 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멍청이.’
그는 혹시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후회가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다. 쿠베트성의 온실에서 들었던 환청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 앞에 달려드는 것은 그리도 잘하면서, 그녀의 앞에서는 항상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
그래, 이것저것 핑계처럼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녀에게 버림받는 것도, 거절당하거나 부정당하는 것도 무서운 겁쟁이라서. 곁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그를 복잡하게 만든다. 에스메랄다가 떠나는 날이 밝아 왔다. 또다시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보내고 싶지 않아…….”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매를 쓸어 주며 속삭여 본다. 언제나 곁에 있고 싶다고.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곁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 * *
잠에서 깬 직후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에스메랄다에게 과분한 보상이었다.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보고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마쳤음에도 그를 원망하고 있는 그녀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괜찮다 말해 주며 곁을 지켜 주고, 밤마다 품을 내어 주기 위해 온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과분한 행복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난 직후 마주한 그에게 원망을 쏟아 내고 나면 후회하는 것이다. 직접 입으로 만들어 낸 그 말들이 그를 얼마나 더 아프게 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으니까.
“……미안해.”
“그대가? 무엇이?”
“또 나쁜 말만 해서.”
“……미안해하지 말고 내게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창을 통해 스며들어 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낮게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그대의 어리광이 좋아.”
“……어리광이라니. 내가 애도 아니고.”
“내 품을 파고들어 주고, 내 곁에서 투정을 부려 주는 게 전부 좋다. 그러니 미안하다 여기지 말고 계속해 주었으면 한다.”
이마에 닿는 말캉거리는 감촉에 마음이 녹아 버린다.
“또…….”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아려 왔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곁에 있는 지금 전부 누리고 싶다.”
3여 년의 단절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들어 아르페시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의 잠자리는 피하잖아. 사실대로 말해 봐. 날 원하지 않는 거지?”
굳이 가벼운 말을 꺼내 그의 무거움을 덜어 주고자 해 본다. 그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 준 것은 그녀 본인이면서 병을 주고 약까지 주는 것도 아니고 뭘 하는 건지. 에스메랄다는 치미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그, 그건 이미 설명하지 않았나!”
그래,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던 첫날 침실에 방문한 그의 위에 올라탄 채 구구절절 다 들었다. 페드로의 경고와 이론적 지식, 그리고 그의 가치관까지 전부.
에스메랄다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제 아래에 깔린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아르페시스의 모습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의 위에 올라탄 채 허리를 살짝 움직였을 때는…….
‘뭐, 뭐, 지금 뭘 하는 것인가! 그, 그만!’
그날 아르페시스는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성을 내더니 당황해서는 도망쳐 버렸다. 도대체가 연인이 유혹을 하는데 달려들지 않고 도망치는 사내라니. 에스메랄다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의 턱에 얕은 입맞춤을 남겼다.
아르페시스 역시 그녀의 입맞춤에 답례를 돌려주었다. 이마에 닿은 온기는 아련한 행복으로 변해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가치관이 그렇다면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르페시스의 속내를 들은 후에도 그를 계속 유혹한 건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돌아가야 할 날이 밝았으니 이제 그마저도 못 하겠지.
“여름까지 다치지 말고.”
“여름?”
채비를 해야 할 시간임에도 침대 위에서 미적거리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다음 해 여름 말이야. 그땐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볼게.”
“……또 와 준다고?”
원하던 선물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아르페시스가 기대감에 들뜬 채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옅은 미소와 짓궂은 대꾸를 꺼내면서도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오지 말까?”
“아니, 아니! 와 주면 나야 언제나 기쁠 것이다!”
“반응이 이상한데…….”
“그건, 그건 그저 기뻐서……. 그대를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황제 때문에 남부에서 나올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알면서도, 멋대로 손을 내밀었다가 연락을 끊어 버리는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까지. 모든 것은 그녀의 내면에 남아 있다. 쓰라린 현실은 아르페시스뿐만 아니라 에스메랄다의 숨통까지 함께 조이는 목줄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리퀘나에서 보낸 지난 며칠을 곱씹으며 줄곧 생각했던 것을 언급했다.
“널 다시 만나고 나니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응?”
쓰라린 것을 움켜쥔 채 홀로 곱씹던 때와 그의 품을 파고들어 울고 투정을 부리는 지금. 당연히 후자가 그녀에게도 아르페시스에게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 전자는 홀로 아프기만 했지만, 후자는 함께 아프며 때때로 행복한 순간도 있었으니까.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까.”
“…….”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이 선택이 너와 나에게 훨씬 더 좋은 것이었음을 빨리 깨달았겠지.”
“에스메랄다…….”
단단한 품속에서 그의 체 향에 취해 본다.
“부족한 사람이라서 미안해.”
차라리 그때 아르페시스가 내민 손을 끝끝내 붙들지 않았다면, 제멋대로 구는 그녀 때문에 그가 받는 상처는 덜했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욕심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그런 말 하지 말라. 그대는 내게 과분한 사람인걸.”
그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면 이렇게 달콤한 말은 들을 수 없겠지.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진심과 욕심이 담긴 사랑을 고해 보았다. 아르페시스와 함께 짐을 싸며 떠날 채비를 시작하자 페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웬 상자를 든 채로. 그와 루이자의 일이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먼저 말을 꺼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를 떠밀듯 붙여 준 것이 에스메랄다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 사이의 결정에서 페드로가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제3자이듯, 에스메랄다 역시 두 사람의 일에선 3자니까. 뒤에서 조금씩 도와주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들 사이에서 내려지는 결론을 바꿀 힘 같은 건 없었다.
“천사야, 떠나기 전에 잠시 얘기 좀 할까? 넌 나가고.”
“하?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언제나처럼 다정한 오라비의 모습으로 다가온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아르페시스를 내쫓았다.
“페드로!”
직접 아르페시스를 침실 문밖으로 내몬 페드로가 먼저 소파로 향해 자리를 잡았다. 저렇게 쫓아냈다가 다른 이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페드로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저런 식으로 굴 사람이 아님을 상기했다.
필시 관저 내에 있는 테노리엘의 세작이나 다른 근위 기사들을 배치하는 등, 수를 쓰고 왔겠지. 루이자의 일 때문에 찾아왔나? 괜한 짓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꺼내면 에스메랄다는 반격을 할 거리가 아주 많았다. 페드로 역시 에스메랄다의 의중을 물어보지 않은 채 멋대로 아르페시스를 옆에 들이밀어 주지 않았나.
당시 페드로의 변명거리는 그녀를 위한다, 정도일 테지. 에스메랄다 역시 루이자와 친구가 된 이상 페드로의 의중을 무시한 채 같은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페드로가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굴려 본 에스메랄다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나 장막을 펼치는 것을 보면 밖으로 쫓겨난 아르페시스에게 들려주기 싫은 대화인 모양인데…….
“우선, 네가 그 녀석을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단다.”
말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가 꺼낸 주제는 에스메랄다가 했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넌 아직 어리잖니.”
에스메랄다의 귀가 살짝 달아올랐다.
“나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민망하니?”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이런 주제는 형제들 중 페드로가 전담하다시피 했었으니까. 지식에 대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성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의 문제였다. 그녀에겐 이런 얘기를 해 줄 만한 모친이 없었으니 다른 누군가라도 해 주어야 했다. 그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나서서 해 준 것이 페드로였다.
사라진 시간에서 에스메랄다는 그를 통해 초경을 축하받았다. 당시에는 무서워서 관계를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페드로가 직접 선별한 밤 시중 시종을 통해 사내의 몸을 배우기도 했다. 페드로의 참관하에 진행된 교육은 에스메랄다에게 사내의 존재를 명확하게 정립해 주었다.
애초에 직계들의 밤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은 단순히 성을 제공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직계가 원한다면 관계를 하며, 원하지 않는다면 신체를 보여 주며 이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인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인과 사내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사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달려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두 페드로에게서 배웠기에 황태자가 그녀를 굴복시키기 위해 부렸던 수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페드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사내가 여인을 원하듯, 여인이 사내를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게 심장을 내어 준 연인이라면 더더욱.”
익숙한 일이라고 해도 윗사람에게서 방만한 행동에 대한 훈계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스메랄다는 만찬 시간에 테이블 아래에서 일어났던 발장난을 떠올리며 얕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넌 아직 일러.”
“…….”
“더욱이 사내를 유혹하겠다고 몸을 이용하다니,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아니?”
대상이 아르페시스였으니 무사히 넘어간 것이지, 만약 다른 이였으면 이렇게까지 실패를 거듭하지는 않았으리라. 에스메랄다는 그 사실을 꽤나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의 인내심이 강한 편이니 다행이었지, 다른 놈들이면 당장 달려들어 너를 유린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경험이 있고, 자제를 배운 나도 그런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혹할 정도란다. 사람의, 그것도 사내의 자제심을 너무 신뢰하는 건 좋지 않아.”
에스메랄다는 마주 본 페드로의 눈동자에서 곤혹을 읽었다. 이런 식으로 루이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었던 건 아닌데.
“……다른 사람에겐 하지 않아요.”
그녀로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페드로와 하는 것은 면역이 있었다. 하지만 페드로의 상황을 엿보는 것은 조금 민망했다. 그녀는 형제들의 여자 문제를 겪어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녀석이 꽤나… 아니 무척이나 좋은 놈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페드로의 입에서 그런 칭찬이 나올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민망한 와중에도 두 사람이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도 사내야. 네가 계속 그렇게 당기면 버티는 게 쉽지는 않을 테지.”
페드로가 원하는 대답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겠다는 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녀의 멋대로 굴며 아르페시스를 자극하긴 힘들겠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래, 녀석과 네가 모두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는 미뤄 주었으면 하는데, 약속해 주겠니?”
“……네.”
“착하구나.”
페드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일단 그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노력을 해도 지키지 못할 상황이 온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에스메랄다는 아직 아르페시스를 가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듣자 하니 이미 초경을 했다지?”
보나 마나 아르페시스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페드로를 생각보다 의지하고 있는 듯 보였으니 당황한 상태로 쪼르르 달려가서는 모조리 쏟아 냈겠지. 에스메랄다는 그런 아르페시스가 꽤나 귀여웠다.
“네가 초경을 하면 축하해 주고 가르쳐 줄 게 참 많았는데…….”
전선에 있느라 하지 못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사라진 시간에서의 그가 전부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있으니……. 조금 늦게나마 해 줄까 하는데, 괜찮겠니?”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방에 도착했을 때 들고 온 상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라진 시간에서 해 주었던 것과 똑같은 교육을 해 줄 모양이다. 페드로는 그녀에게 상자를 쥐여 주며 그때와 정말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교육을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립고, 기쁘나 또한 조금은 지겨운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챙겨 준 초경 축하 선물을 챙겼다. 이미 초경을 시작했을 때부터 자의적으로 구비한 것이지만… 뭐, 여벌 품이 있다고 나쁜 것은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페드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쿠베트 영애를 생각보다 많이… 마음에 두고 있단다.”
“…….”
“하지만 나는… 나와 형은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부재 동안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얼마나 불안해하셨는지 보고 자란 탓에 그녀에게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페드로가 원하는 답을 가져가지 못하리라.
“그건 제 소관 밖이죠.”
“…….”
“오라버니께서도 전선에 나가야 하는 아르페시스와 제 사이의 일에 나서셨잖아요?”
“그건, 그 녀석이 네게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루이에게도 오라버니가 필요할 수 있어요. 전 그녀가 도움을 청하면 이번처럼 행동할 거예요.”
에스메랄다는 곤란한 표정의 페드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에게 저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을 때 지금의 순간을 예상하셨어야죠.”
쿠베트성에서 루이자와 따로 만난 페드로가 했던 부탁이란다. 에스메랄다가 타인에게 가지는 경계심이 클 수밖에 없는 위치임을 들먹이며, 그녀를 향한 호감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루이자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니 지금의 일은 페드로 본인이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흠…….”
“오라버니 덕분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고, 그녀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에스메랄다에게 루이자는 옹졸한 진심을 털어놓아도 비난이 아닌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다. 루이자에게도 그녀가 같은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에 두 사람은 쿠베트성에서의 인연을 친구의 관계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는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하세요.”
“끙.”
에스메랄다는 곤란해하는 것이 분명한 페드로를 등지고 다시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아르페시스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이후로 떠날 채비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다음을 기약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작별은 짧았다.
* * *
테몬 후작이 되어 영지의 전권까지 손에 넣은 루그레디안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1만 가까이 규합된 케니스의 반군은 북부에 성공적으로 똬리를 텄다. 적당한 규모로 흩어져 있는 덕에 아직까지는 황제의 눈에 발각되지 않았다.
물론 케니스는 에스메랄다와 루그레디안 사이의 접점을 모른다. 그는 후작 위를 차지한 후 접근한 루그레디안과 자신의 방식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후원자를 갈아탄 것뿐이다. 후에 에스메랄다가 그들과 같은 사고를 가지는 척할 때까지는 당분간 거리를 둘 예정이다.
테몬 후작령의 야산에 본거지를 둔 그들을 제외하고도 많은 반군들이 체계를 갖추며 규합되는 중이다. 후작령에 인접한 도미르베체 백작령에도 반군이 숨어 있다. 히사르 상단을 먹어 치우며 해당 영지에 상단의 호위 병력, 물자 창고 경비 병력을 교체시킨 덕분이었다.
또한 백작령의 남동쪽에 있는 벨베크 백작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은 진즉에 에스메랄다의 유혹에 넘어와 복수를 꿈꾸고 있는 테브라가 상단을 이끌고 있으니까. 그는 제카 상단의 호위 병력을 에스메랄다가 찾아낸 반군의 용병단으로 갈아 치웠다.
용병단의 단주이자 반군 3백을 이끌고 있는 자는 그 계약을 두고 ‘신께서 나를 돕는다.’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든 것은 에스메랄다의 계략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뒷골목 인물들의 호의나 도움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은 반군들은 그들과 섞여서 각지로 숨어들었고. 아직 케니스의 밑으로 복속되지 못한 반군들의 위치도 모두 파악하고 지원을 시작하거나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그들은 조금씩 협동을 시작했다. 각지에 소수로 분산된 이들이 황제파 귀족들의 사병 규모나 동태, 영주 성의 경비 상태나 순찰 빈도, 취약점 같은 것을 알아내는 정보전을 펼치면, 당장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케니스에게 그것들을 토대로 귀족들의 영지를 치고 있다.
케니스가 황제파 귀족들의 본거지를 털고 다니며 난동을 피울 수 있는 배경이었다. 반군의 존재감을 인지시킬 수 있는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백성들이 그 행동에 자극받기를 기다려야 할 때다.
“훌쩍, 이거 맛있네요. 리디도 먹을래요?”
“고마워요.”
눈물과 콧물을 짜내면서도 쿠키를 우물거리던 루이자가 에스메랄다에게도 간식을 권했다. 그녀가 건넨 쿠키를 받아 든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의 고리를 계속 연결해 나갔다.
케니스의 무력 시위에 반군의 수배령이 강화되었지만 지역적 특성과 현재의 상황이 겹친 상태라 쉽게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케니스의 둥지가 북부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중앙군 일부를 파견해 수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북부에 영지를 둔 귀족들은 대부분 황제파에 속한다.
명확한 증거 없이 그들의 영역을 들쑤시며 괜한 의심을 내보이면 그들 사이에 내분을 조장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반군 수색이 강압이 아닌 협조로 진행 되고 있는 이유였다. 그들을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나면 북부에 남는 영지는 중립을 주지 중인 벨베크 백작령과 테몬 후작령이다.
이쪽을 건드는 일도 황제에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잘못했다간 그들이 반황실 세력으로 돌아설 테니까. 두 가문 모두 황도에서 관직을 영위하는 중앙 귀족이기에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다. 에스메랄다가 북부를 반군의 둥지로 고른 이유는 방위적인 문제 외에, 지금의 상황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루그레디안이 국정 회의 때마다 엄청난 불쾌감을 토로하며 제 영지에서 중앙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를 들먹이고 있다. 또한 몇 년 전 곡물 시장의 일로 황제와 마찰이 있었던 벨베크도 마찬가지. 곡물 시장 건으로 벨베크가 황실과 마찰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릴 수 있었던 그림이다.
벨베크 백작은 최근 제 영지가 접한 롤베르만 왕국의 국경병을 이용해 황제와 신경전을 하는 중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제 영지를 들쑤시면 국경을 열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협박이다. 그러면서도 루그레디안을 몇 번이나 떠봤다고 하니, 반군이 몇 번의 힘없는 반항을 하다 사라질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반군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남부군을 떠난 이후 4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성과를 계속 내고 있으니 반군을 이용해 이득을 볼 생각이 한가득이겠지. 벨베크 백작은 합류를 한다고 해도 첸과 다나 때문에 도중에 잘려 나갈 패 이상은 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그것도 모른 채 반군을 이용해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는가, 없는가, 재어 보는 백작이 얼마나 우스운지.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툭툭 튕겼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황제는 막강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채로도 반군 수색에서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해 보았자 남부군에서 이탈해 수배령이 내려진 기사들 중 일부를 체포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들을 고문하거나 회유해도 큰 성과를 볼 수 없는 것이, 반군의 인사들은 대부분 다른 반군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자력이 아닌 에스메랄다의 도움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연락 역시 에스메랄다의 개인 세작들을 중간에 낀 상태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 위치 정보는 서로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본인들에게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이상 지금의 방법이 안전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에 에스메랄다의 방식에 따르고 있다.
본디 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패를 캐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다. 본인의 패를 얼마나 잘 숨기는가도 중요하다. 에스메랄다는 반군이라는 패를 잘 숨기고 있었다. 황제의 눈에서도, 같은 반군의 눈에서도. 반군의 존재는 명확한데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는 다수의 중앙군을 외부로 내보내지 못한다.
“빈집 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니까.”
일정 수 이상의 중앙군을 내보냈다가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반군이 중앙을 치면? 반군에게 농락당한 황제라니, 우습게 보이기 딱 좋지. 결과적으로 황제는 현재 유용할 수 있는 병력이 제한되어 있다. 이처럼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황제가 행하고 있는 반군 수색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케니스는 황도에서 주로 생활하는 중앙 귀족들의 영지를 터는 데 상당한 열정을 보였다. 몇 년 사이 황제파에 속한 공후백의 봉신 가문 중 8개를 털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서 곡식이나 금화같이 당장 처분이 가능한 것들을 영지민들의 집 앞에 두고 오는 의적 행위에 푹 빠진 것처럼 굴고 있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말을 하고 있기는 한데… 에스메랄다가 보기엔 그 본인의 탐욕을 위해서였다. 황제가 반군을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동안 황제파의 불만은 커질 것이고, 그러한 황제파의 자금으로 본인의 병력을 강화하겠다는 탐욕. 성을 털어 나온 돈이 얼마나 많을까?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고 해 봐야 절반도 되지 않으리라.
그는 남은 것을 제 병력에 투자하거나, 아직 휘하로 끌어들이지 못한 반군들을 회유하는 데 쓰고 있었다. 장물이라 불러야 마땅한 그 재물을 처분하는 건 에스메랄다가 손에 꼭 쥐고 있는 뒷골목이니 덜미가 잡히기도 힘들었다. 본거지를 공격하는 동안 전투가 진행되고 귀족들의 사병은 당연히 죽어 나간다. 반군에게도 피해가 없지는 않겠지만 케니스는 계속 황제파 귀족들의 재력과 무력을 깎아내릴 생각인 모양이다.
반군이 황제파 세력을 갉아먹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훗날 내전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탄탄히 만들기로 했다. 솔루베르가 운영했던 바란 상단의 상권을 히사르, 제카, 테메프가 나눠 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금, 시장의 규모를 늘려 놔야 한다.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의 양을 늘리기 위해 타국에서 캐내 모아 두었던 자금들이 동원되고 있다. 1년에서 2년이면 거래량의 일부를 빼내는 수준으로도 최소 4만의 병력을 2개의 달 이상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되리라.
“쯧…….”
내전을 위한 기본이 다져지고 있기에 에스메랄다의 기다림은 점점 초조함을 동반하고 있었다. 아브람 백작령에서는 이미 실테르와 연대가 이루어졌다. 훗날 그가 국경의 문을 열어 주면 실테르의 병력이 에렘에 들어올 수 있다.
문제는 에스메랄다가 맡았던 아비체룬이었다.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건만, 그곳에 들여보낸 세작들로부터 연락이 없다. 그들만으로는 부족할지 몰라 이미 섬나라인 랑뒤르 왕국을 경유해 따로 키운 세작들도 보내 두었건만, 여전히 진전은 없다.
어쩌면 이미 모두 척출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손 놓고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아비체룬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수를 놓을 때가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은…….
“해상.”
“네?”
테몬 후작의 합류로 손에 넣은 해안가를 이용해 볼 수도 있다. 아비체룬은 나라의 영토 절반이 해안을 접하고 있는 나라다. 그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할 수단이 마련되었으니, 계략을 짜 보아야겠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중얼거림에 반문한 루이자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혼잣말이었어요.”
그녀는 그런가 보다 하며 에스메랄다의 혼잣말을 넘겼다. 지난겨울과 마찬가지로, 에스메랄다는 이번 여름에도 루이자와 함께 리퀘나를 방문했다.
이번 해에는 페드로가 루이자에게 생일 선물을 보내지 않은 탓에 그녀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다시 만난 페드로가 루이자를 피해 다니는 바람에 상황이 더 악화되는 중이었고. 허락이 있거나, 내부 관계자와 동행하지 않는 이상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사령관실에 붙어사는 중이니 어련할까.
잠시간 그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더니 손님 대접을 위해 아르페시스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고가 함께 들어오지는 않는 걸 보면 그는 밖에서 대기할 모양이다. 그럼 굳이 말이나 대화를 조심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지금은 루이자도 함께 있으니까.
페드로의 외면 때문에 루이자는 하루는 화를 냈다가, 또 하루는 울었고, 사흘째가 된 오늘은 화를 내는 동시에 울고 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기다렸건만, 응접실 문을 지나 나타난 것은 아르페시스뿐이었다. 그녀는 문을 빤히 노려보며 페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겁쟁이! 멍청이! 망할 놈! 정말이지 미워 죽을 것 같아요!”
에스메랄다는 순수하기 그지없던 루이자의 입이 걸어지고 있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하얗기만 한 천 위에 얼룩을 새겨 넣은 배덕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녀 역시도 심심찮게 놈이라거나 버러지라는 비속어 사용을 망설이지 않는지라, 루이자가 누굴 보고 저런 말을 배웠는지 눈에 훤했다.
루이자에게 말투에 대해 한마디를 해 주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러는 사이 페드로와 루이자의 일을 전혀 모르는지 자리를 잡고 앉은 아르페시스는 눈을 끔뻑거리기 시작했다. 소곤거리며 쿠베트 영애가 왜 저러느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확실히 모르는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분개한 듯 쿠션을 팡팡 내려치고 있는 루이자를 두고 아르페시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와 단둘이 남는 건 좋지 않지만…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의 눈물에 꽤나 약한지라 언제나 수를 내어 놓고야 만다.
“응?”
에스메랄다가 손을 내밀자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없어도 원할 때 사령관실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줘.”
그녀의 말이 끝나자 루이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었다.
“역시 리디가 최고예요!”
에스메랄다는 옆자리로 옮겨 와 뺨을 비비적거리는 루이자를 끼고 손을 까딱거렸다.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에스메랄다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다 듣고 보는 아르페시스가 기괴한 표정으로 품을 뒤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페드로와 계속 같이 지냈으면서도 모르다니, 저렇게 눈치가 없기도 힘들 텐데. 뭐, 원래 타인의 관계에 둔한 사람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나?
이윽고 아르페시스가 품에서 꺼낸 건 남부군 총사령관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관저 내의 기밀 정보 보관소에도 들어갈 수 있는 최상위 패이기도 했다. 에스메랄다는 싱긋 웃으며 루이자의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어어…….”
“고마워요! 사령관실 들어갈 때만 쓸게요.”
“루이는 믿을 수 있으니까요.”
눈물을 쏙 집어넣은 루이자가 패를 챙겼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더니 그녀는 찻잔을 집어 들며 에스메랄다의 곁에 남았다.
“바로 가지 않고요?”
“흠, 흠, 저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에요. 두 분만 있어서 좋을 게 없으니 위장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요.”
기꺼운 제안이다. 둘만 남아 있는 것보다는 허수가 들어간 셋이 좋을 테니까. 매번 이렇게 세 명이서 있을 수는 없겠지만 둘과 셋 사이를 오가면 확신을 내릴 정보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제가 루이를 좋아하는 거 알죠?”
“당연하죠! 리디도 제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죠?”
서로를 보며 웃는 그녀들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늘어 갔다.
“이게 무슨……?”
찻잔을 기울인 에스메랄다가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긴, 권력 남용이지.”
“응? 권력?”
“자고로 권력이란 쓰라고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정작 그녀들이 언급한 권력의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에스메랄다는 본인이 리퀘나를 둘러보는 데 관심이 없음을 확실하게 피력했다. 테노리엘로부터 후원받은 금액으로 증축하거나 보수한 건물도 예의상 슬쩍 훑어보는 게 전부였다. 리퀘나 내부의 상권을 확인하기 위해 시가지를 둘러보는 것 역시 형식적인 선에서 그쳤다.
모두 체력이 약해서, 몸이 좋지 않아서 등의 핑계를 대며 일정을 일찍 끝냈다. 외부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귀족 영애의 연기에 충실한 것이다. 괜히 밖으로 나돌며 기억 속에 있던 리퀘나를 다시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죽어 갔는지, 그녀가 그런 영웅들과 그들의 가족을 어떻게 죽음으로 밀어 넣었는지… 어둡고 질척한 생각을 제 속으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또한 실내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어야지만 사심을 채울 수 있으니 그녀로서는 외부로 나다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음…….”
낮은 비음을 따라오는 것은 한껏 거칠어진 숨소리였다. 얇은 여름용 드레스 위를 스쳐 지나가는 손길은 조급했고 그녀를 뒤덮은 체온은 뜨거웠다.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겹쳐진 입술 사이에서는 야스러운 소리를 내며 얽힌 혀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타액이 섞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자극받은 아르페시스가 옷 위에서 노닐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골반을 타고 올라와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그 움직임에 반응한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놔주었다.
아르페시스는 여름에 다시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만의 접촉이 있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바라 왔다. 물론,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고.
때때로 스스로를 자제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건지, 그녀를 제 두 팔 안에 가둔 채 손을 깍지 낀 채로 버티기도 했다. 아무래도, 농밀한 입맞춤까지가 지금의 아르페시스가 정한 한계선인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껴안은 채 얕은 신음성을 내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에스메랄다…….”
억눌린 부름 끝에 다가오는 것은 답답할 만큼 그녀를 꽉 껴안아 오는 힘이었다. 조금 전과 달리 가볍고 자잘한 입맞춤이 그녀의 턱과 뺨, 눈매를 훑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아르페시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남부의 더위를 증명하듯 그의 머리카락은 살짝 젖어 있었다. 이마와 콧등에도 땀이 송송 피어올라 있었고. 지난겨울과 달리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조금의 적극성이 담겼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이러면서도 다음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할지, 이상하다고 할지… 새삼 그의 고집이 그녀의 것 못지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몸을 겹친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숨을 고르던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우물거리며 물어 왔다.
“달갑… 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저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고심하며 대답했다.
“그랬다면 거절했겠지?”
이런 식의 농밀한 접촉이 있은 후면 조금씩 눈치를 보는 것도 그렇고, 후에 꼭 그녀의 감상을 듣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도 그렇고…….
그녀가 아는 아르페시스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체로 자존감이 낮은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을 최근 아르페시스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싫어할까 봐 불안해?”
바짝 굳는 몸이 말로써 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에스메랄다의 영민한 머리는 아르페시스가 저런 생각을 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네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더구나.’
아마도 지난해의 여름에 페드로가 말해 준 것과 연관이 있겠지. 실제로 에스메랄다는 그를 원망하는 태도를 보이며 죄책감을 자극하기도 했으니, 얼토당토않은 추측은 아니었다.
그녀를 품 안에 가둔 아르페시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이미 그의 행동으로부터 답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이유가 명확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곧장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불안이나 걱정이라는 것은 결국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니까.
아르페시스가 가진 불안도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정작 그 문제를 제공한 에스메랄다조차 해결책을 내어 줄 수 없는데 그가 무얼 어떻게 하겠나. 감정은 생각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원하지 않는다 하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모든 건 황제가 그를 사지로 보내 놓고 풀어 주지 않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하지만 상황과 사정을 이해한다 하여 단번에 용서를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용서란 스스로가 가진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니, 상대방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뺨을 쓰다듬어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를 향한 원망이 그녀의 안에 존재했다. 페드로의 부재로 그가 죽는 것이 무섭고, 그를 지키기 위한 페드로의 죽음 역시 두렵다. 지금으로서는 침묵과 온기로 그의 곁에 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매달리듯 온기와 품을 파고드는 아르페시스를 안아 주던 에스메랄다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 * *
흐릿하던 잔상들이 천천히 또렷해지고, 몽롱하던 감각은 순식간에 선명해진다. 아르페시스는 이틀 전에도 테노리엘의 마차가 관저의 정문을 지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지금이 처음이다. 그는 테노리엘의 마차가 관저에 도착하는 것을 지금 처음 보았다. 그런데 왜 이틀 전에도 보았다는 생각을 했을까? 헛생각이었겠지.
─ 진정으로 그것 하나만을 바랍니다.
기억 속에 있던 간절한 목소리가 마차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레스와 함께 떠나기 직전에 보았던 그녀의 미소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대체 저 마차는 왜 이렇게 느린 거지? 얼토당토않은 의문이 짜증을 불러왔다.
하지만 모든 것에 끝이 있듯, 그의 기다림에도 끝이 찾아왔다. 마차가 관저의 입구 앞에 멈춰서고, 그 속에서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자란 소녀가 나타났다. 시야를 장악하는 녹안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목울대가 크게 격동했다. 눈을 마주친 순간 그녀가 기억 속의 그때처럼 웃었으니까.
경멸, 동정, 무관심, 혹은 그를 이용하려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사람을 향해 순수한 반가움을 담은 미소였다. 과거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레스를 반겼던 그것과 똑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반가움의 대상이,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던 순간이다.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피어올라 심장을 뒤덮었다.
─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전하.
─ ……오랜만이군, 테노리엘 영애.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손을 마주 잡아 주는 온기는 따듯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체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건만 왜 ‘따듯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그간 강녕하시었는지요?
─ ……언제나 똑같지. 그대는, 무탈했나?
─ 저 역시도 언제나 같았지요.
그 순간 세상을 밝히고 아지랑이가 일 정도로 땅을 뜨겁게 달구던 태양의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관저의 첨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리퀘나의 성벽은 처음 봤던 순간의 위용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저 웅장한 성벽에 익숙해지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간 리퀘나의 성벽을 바라보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전방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해 주었다.
─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성급하게 말을 덧붙여 본다.
─ 그런 기대를 할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어깨에도 닿지 못하는 작은 소녀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간 전하께서 해 오신 행동을 대단하지 못했다, 라고 평한다면 전하께서는 이미 이곳에 계시지 않았겠지요.
─ ……무슨 의미지?
─ 제가 전하의 입장이었다면.
단호하고 섬뜩한 말이 그녀의 입을 타고 세상으로 나왔다.
─ 진즉에 목을 매달았을 겁니다.
움찔거리며 떨리는 몸을 막아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하지만 전하는 저와 달리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 그건…….
─ 전하께서는 이미 거기서부터,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신 겁니다. 그것을 대단하지 않다 말하는 건 폄하에 불과합니다.
─ 그건, 그저… 나는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스스로 생을 끝내는 대신 아득바득 살아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 지금 전하께서 여기에 계신 것이 곧 현실의 가혹함을 상대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 저는 나약했기에 전하와 똑같은 성과는 내지 못했을 겁니다.
─ ……그대가 나약하다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 이가 나약하다고?
아르페시스가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에스메랄다의 미소는 쓰게 변했다.
─ 제 심장은 제게 투쟁의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았지요.
무슨 의미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사이 성벽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 그녀가 말했다.
─ 여섯 살 무렵에 오라버니들처럼 두 번째 운용법을 새기려다 피를 토했답니다.
아, 몸이 약하다는 의미였구나. 미약한 웃음 속에 담긴 씁쓸함이 왠지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의 심장에 새겨진 마나 운용법 마법 진은 3개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2개는 당연히 새기고, 운용법을 얻을 수만 있다면 3개를 새기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4개부터는 타고난 강골들이나 가능한 영역이지만 3개까지는 건강함의 범주에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두 번째 마법 진을 새기려다가 피를 토했을 정도면…….
─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느냐고, 왜 오라버니들과 아버지처럼 전선에서 훌륭하게 싸울 수 없는 것이냐고 펑펑 울었죠.
─ 전 이미 약하게 태어나 버렸고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이만큼 자라는 것도 힘들었겠지요. 그러니 저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나약했다는 의미지요.
너무 극단적인 시각 아닌가? 나약함이나 강건함의 기준이 육체의 건강으로만 규정되는 건 아닐 텐데.
─ 조금 극단… 과한 생각 같은데. 그대가 황실에서 태어났다면 건강하게 태어났을 수도 있지 않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더니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 만약 탄생의 기준점을 바꿔 버린다면 그건 이미 제가 아닌 것이죠. 저라는 사람의 행동을 추측하기 위해선 제 몸 상태와 당시의 심리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는 가정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이후에 다른 환경을 적용하는 것이고요.
솔직히, 이해를 못 했다. 아르페시스는 뺨을 긁적이며 말을 아꼈다. 괜한 말을 했다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창피할 것 같았으니까. 그가 말을 아끼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계속 말을 이었다.
─ 저는 어린 시절 몸져누웠던 경험이 꽤 많답니다.
─ 인간의 강건함이란 육체와 정신의 것을 모두 포함하는데… 정서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몸이 아팠던 저는 전하와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면 진즉에 포기를 했을 테니 나약했었다는 말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 제가 너무 어렵게 설명을 했을까요?
그제야 그녀가 스스로를 ‘나약하다’가 아닌 ‘나약했다’라는 형태로 말했음을 깨닫는다. 지금의 그녀가 나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그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유년기 시절을 그렇게 평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년기를 가진 그녀는 그가 겪은 유년기를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다.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그녀도 결국 귀족은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말을… 어렵게 돌려 말하는 편인가 보군.
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것이 푸쉬식, 하고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 그럼 간단하게, 또한 쉽게 말을 해 볼까요?
─ 응?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쪼그라든 그것은 다시 빵빵하게 차올랐다.
─ 전하께서는 투쟁을 허락받지 못했던 과거의 저와 다르시니 살아남으실 겁니다.
다시금 그를 올려다본 녹안은, 아니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는 무척이나 단단했다.
─ 이미 황제가 만든 지옥에서 투쟁하셨고 종내 살아 나오셨으니, 전장이라는 지옥에서도 또 한 번 살아남으시겠지요.
황성에서 살아남은 그의 행동을 비굴한 굴복이라 보지 않고 명예로운 투쟁이라 여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 제가 해내지 못했을 생존을 쟁취하신 전하이시니, 저의 존경을 부정하지는 말아 주시길. 또한, 존경을 변명 삼아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부탁드리는 이기심을 용서해 주시길 바라봅니다.
─ ……지난번에, 말… 언급했던… 뭐, 그…….
존경의 대상이 되어 본 적 없어 말이 꼬여 버렸다.
─ 예, 전하를 위해 해 드린 것 하나 없음에도 감히. 이번에는 홀로가 아닌, 이곳에 있는 영웅들과 함께 살아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사이 그녀가 말했다.
─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전하께서 살아남으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 부디, 부족한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세요.
황성의 연회에서 들었던 그 간절함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남부군을 살리고 싶은 모양이다.
─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지? 그대는 서부 태생일 텐데? 아니… 황도인가? 남부군과 특별한 접점이나 친분이 없지 않나.
─ 그리고, 어차피 남부군들도 자신의 터전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닌가. 고결한 희생정신 같은 것 때문은 아닐 텐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물었더니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말했다.
─ 생존을 위해 떠밀렸다 해도 그들이 마수로부터 대륙에 남은 모든 인간을 보호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지요.
다시금 마주한 녹안은 조금 전 그가 꺼냈던 말을 질책하고 있었다.
─ 이유보다 결과를 봐 주십시오. 그들은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웅이니, 돕고자 하는 것에 어찌 이유를 매기겠습니까?
이어진 말에 그는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잇속을 챙기며 움직이기 전에 계산부터 하는 귀족들을 그토록 경멸했으면서, 그런 귀족들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다니.
─ 그러니 제가 그들을 위하는 마음을 의심하지는 말아 주시길.
또 한 번 눈앞의 모든 것이 일그러지더니 연기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족쇄를 차고 쇠사슬에 억눌린 채 반항을 하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후우…….”
현실만큼이나 생생한 꿈을 하루도 빠짐없이 꾸기 시작한 건 3년이 조금 넘었다. 꿈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분명 몇 번이고 있었다. 처음 1여 년 동안은 그가 깨기 전부터 곁을 지키던 페드로의 도움으로 꿈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홀로 구분을 하기 위해서라도 버릇을 들였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을 더듬으면 언제나 그렇듯 숫자를 적어 둔 일지를 찾을 수 있다.
「라 57일.」
마지막 숫자 옆에 다음 수를 기재하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라 58일.」
에스메랄다가 리퀘나에 도착한 지 나흘째인 오늘은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아르페시스는 오늘 에스메랄다와 보낼 시간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꿈에서 본 것을 기록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침실의 한쪽, 그는 검은색과 파란색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파란색 책 중 마지막에 꽂혀 있는 것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은 일기의 내용을, 파란색은 일기를 제외하고 일자를 특정할 수 없는 꿈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 꾼 꿈처럼 날짜의 정확한 언급이 없는 경우에는 속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토대로 부정확한 일자를 추측해야만 한다. 테노리엘의 마차를 처음 보았다, 라는 생각과 꿈속에서 느꼈던 날씨,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이들의 외관까지.
오늘 본 에스메랄다는 14~15세 사이의 소녀의 나이로 추정된다. 최근 보고 있는 실제 모습보다 조금은 어려 보이니… 16세까지는 잡기 힘들다. 그렇다면 대충 대륙력 1434년에서 35년 사이, 옷차림이나 더위를 느꼈던 것을 상기하면 라의 달이다.
그가 리퀘나에서 에스메랄다를 맞이한 것을 보면 아마도 18세에서 19세, 꿈에서 본 날은 1434년이나 1435년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충의 일자를 추정한 다음 꿈에서 겪은 모든 것을 기재했다. 아르페시스는 완성된 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꿈을 꾸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본래 맞이해야 했던 미래는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 리퀘나에 처음 오는 것도 18세의 나이여야 하니까. 지금까지 꾼 모든 꿈을 기반으로 추측하건대, 본래의 미래에서는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먼저 다가와 관계의 시작을 연 것 같다.
그렇다면 몇 년 전 황실 복도에서 도망가고, 백작 성에서 만났던 시기에 차가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꿈을 순차적으로 꾸는 것이 아니기에 정보는 뒤섞이고 이유는 흐려진다. 그는 자신의 꿈이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꾸준한 노력을 해 왔다.
「대륙력 1444년.」
에스메랄다가 죽는 해다. 그는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갔기에 에스메랄다가 화마에 뒤덮이는 것인지, 어떤 현실을 바꿔야 그 미래가 실현되지 않을 것인지 페드로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꿈에서 보는 미래와 현실에서 보는 미래가 다를 수 있음을 인지했으니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페드로의 전사 통지서가 작성되는 일도 어떻게든 막아야 하고.
하지만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43년, 44년쯤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몇 년간 그 시기에 대해 꾼 꿈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현실의 에스메랄다에게 직접 반정에 관한 얘기를 꺼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추천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전혀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페드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미 페드로를 신뢰하고 있는 아르페시스는 그의 조언을 뿌리치고 도박 수를 둘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이유나 정보를 수집하는 건 불확실한 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내일의 꿈을 기약하기로 했다. 제발, 늦지 않게 그 시기의 일과 정보를 알아낼 수 있기를.
“후우…….”
아르페시스는 오늘 꿈은 페드로와 상의를 해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홀로 현실과 꿈을 구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이후 페드로는 그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이후 사령관실에서 만나면 따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에스메랄다가 도착한 후 이상하게 사령관실에 콕 박혀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침실에서 가볍게 조찬을 챙기는 동안 생일을 맞이해 온 귀족들의 선물 목록을 확인했다. 대부분 진심으로 축하를 하기보다는 흠이 잡히지 않도록 하는, 명목상의 선물 같은 것이다. 나중에 근위 기사들에게 대충 대필을 해서 답신을 보내라고 일거리를 몰아줄 생각이었다. 물론,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에게 말이다.
에렘에 존재하는 귀족들이 모두 선물을 보냈으니 간략한 답신을 쓰는 데도 꽤나 시간이 걸릴 터. 리퀘나에 와서부터 매년 여름마다 해 온 나름의 괴롭힘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오전 훈련을 하고, 오찬은 손님인 에스메랄다와 루이자와 함께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리디, 이제 뭘 할 거예요?”
“글쎄요? 루이는요?”
“전 어제 너무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좀 쉴래요.”
“흠… 그럼 전 소화도 시킬 겸 잠시 걸어 볼까요?”
“오후 업무 시간까지는 여유가 조금 되니… 내가 안내하지.”
“영광입니다.”
의심을 사지 않는 평범함의 선에서 에스메랄다의 안내를 자청하고 휴고와 테베르를 대동했다. 관저의 후원은 이미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지정 밀회 장소가 되어 가고 있었다. 평지가 많은 남부에서 무척이나 드문 절벽을 등진 중앙 리퀘나의 특성 때문이다. 그 절벽 바로 앞에 사령관저가 있으니까.
이곳에서의 퇴각은 에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선황의 이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퇴각하느니 여기서 항전하고, 죽음으로써 에렘을 지키라나 뭐라나. 황성에 있던 시절 읽었던 리퀘나의 기원에 대해 떠올린 아르페시스는 홀로 웃었다.
사실상 그 이념은 꽤나 잘 지켜져 왔다. 에렘에 전선이 생긴 후 중앙 리퀘나를 포기하고 퇴각한 건 두 번뿐이니까.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작, 두 번. 한 번은 처음으로 대형 마수가 출몰했던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몇 년 전 반군의 이탈이 자행되었던 때.
반군에게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아르페시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관련 인사들을 찾아 회유하는 일도 생각보다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내저으며 그것을 떨쳐 냈다. 지금은 일 생각 따위는 모두 던져 버리고 에스메랄다와 있는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아무튼, 그런 지리적 특성을 가진 중앙 리퀘나의 구조 덕분에 절벽 아래에 있는 연못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했다. 자꾸만 꾸물꾸물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준 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주변의 기척이 없어졌다. 곧장 에스코트를 위해 가볍게 겹쳐 두었던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에스메랄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안전한 거야?”
“지금은.”
서둘러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훔쳐 본다. 쪽, 하고 울린 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기만 하다.
“오후 일정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겉으로는 본부대 지휘 기사들과 업무를 보는 것으로 되어 있겠지만 변장을 하고 시가지에서 함께 놀 생각이었다.
‘또… 저희만 두고 가신다고요?’
계획을 말한 후 입단속을 했을 때 칼라일의 표정이 살짝, 그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해의 한 번뿐인 생일이 아닌가! 이런저런 일로 에스메랄다와 함께 맞이한 것은 올해가 처음인지라 그는 무척이나 들뜬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고.
지난겨울에도 에스메랄다의 체류 동안 대부분의 업무를 뒷전으로 미뤘으나, 그녀가 리퀘나에 온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다. 업무를 외면한 횟수는 열 번도 되지 않는다. 3년 동안 고작 열 번이면 무척 양호하다. 아르페시스는 곧 있을 자유 시간에 들떠 계속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않은가.”
이미 어디를 갈지, 뭘 할지 전부 생각해 두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마주 잡은 에스메랄다의 손을 조몰락거리며 기다렸다. 본인이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정도는… 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원하는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
“응?”
지금 직면한 문제를 먼저 언급하기엔 조금 민망했다. 아르페시스는 기다리면 주겠지? 같은 생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차마 제 입으로 생일 선물은? 하고 물어볼 정도의 철면피는 되지 못했다. 물론, 테노리엘 가문에서 보낸 선물은 오전에 확인한 목록에서 보았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가문의 선물이 아닌 그녀의 선물이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지.
설마 가문에서 보낸 것으로 끝난 건가? 테노리엘에서 보냈던 건 가구였던 것 같다. 영지에 장인들이 많은 덕분인지 매해 유사한 선물을 받아 왔다. 덕분에 사령관저 내부에 낡은 가구들이 하나씩 바뀌어 가고 있고. 그녀가 자주 사용하게 된 응접실 소파는 사심을 섞어 좋은 것으로 구매해 두었지만.
잠시 동안 매해 테노리엘 가문이 보냈던 가구들을 곱씹던 아르페시스가 생각했다. 그게 끝이라고? 섭섭함을 티 내지도 못하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눈치를 봤더니 산책이 끝나 버렸다. 나중에 보자며 뺨에 입을 맞춰 준 에스메랄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멍청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테베르가 말했다.
“안 가십니까?”
선물을 못 받은 것도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축하한다는 인사도 듣지 못했다. 물론 오찬 시간에 루이자와 함께 형식적인 축하는 받았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더 사적인, 그리고 둘만의 무언가가 담긴 축하였는데!
이런 것으로 섭섭해하는 것이 조금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다. 그도 매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상단에서 구매한 라퓨나 한 다발로 끝내긴 했지만…….
쿠베트성에서 그녀는 그게 좋다며 계속 라퓨나로 생일을 챙겨 달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니,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부족한 선물이라 속에 담아 두었나?
그는 황실에서 나오는 사비의 대부분을 남부군에게 유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겨울에 라퓨나를 사기 위해 따로 빼는 약간의 용돈 외에는 유용 가능한 자금이 없다. 이번 해에는 용돈의 액수를 늘려서 장신구라도 사 볼까, 같은 생각을 하며 사령관실로 돌아가는 동안 어깨가 축 처졌다.
이제껏 태어난 것을 기뻐해 본 적은 없었는데, 에스메랄다를 알게 된 후에는 모든 게 변해 버렸다. 페드로를 데려온 일로 3년을 홀로 보냈지만 오늘은… 그는 바닥을 보고 걷는 것도 모자라 생일 선물, 생일 축하 같은 생각을 하느라 매우 바빴다.
고로 사령관실이 있는 3층 복도가 북적북적, 조금 시끄럽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사령관실 내부에 마나 장막이 펼쳐져 있다는 것도, 당연히 인지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아르페시스의 뒤를 따라가던 휴고와 테베르는 눈치를 챘다. 두 사람은 복도 저편에서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고 있는 본부대 지휘관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춰 선 두 사람이 아니었다. 멈추는 대신 넋을 놓은 채 문고리를 잡은 아르페시스였지.
“어, 어어!”
“총사……!”
지휘관들이 그를 말리기 위해 불러 보았지만, 그들의 입과 동시에 사령관실의 문도 함께 열려 버렸으니 늦었다. 바닥을 보면서 걸어왔던 아르페시스는 문을 연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문을 열자마자 그의 책상이 측면으로 보이는 것까지는 같았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를 잡은 채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어야 할 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그가 서 있는 복도의 끝 편에 모여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을 대신해 사령관실 내부에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측면으로 보이는 그의 책상에 올라 앉아 있는 루이자, 그리고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는 페드로. 화들짝 놀란 루이자가 페드로와 떨어지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거의 동시에 페드로가 책상에 앉아 있던 루이자를 끌어안은 채 아르페시스를 등졌다.
커다란 페드로의 체격에 루이자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이미 옷이 반쯤 헤쳐져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아주 확실하게 봐 버렸다. 문고리를 잡은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린 그에게 페드로의 날 선 목소리가 닿았다.
“노크할 줄 모르냐?”
허, 여긴 제 사령관실인데. 그는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만큼 당황한 상태였다.
“문 닫아.”
으르렁거리는 게 분명한 페드로의 협박에도 당장 움직일 만한 여유가…….
“네가 천사와 침대에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이닥쳐 줄까?”
없어도 움직여야만 했다. 아르페시스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문을 닫은 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어 댈 만큼 놀랐기에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네가 없어도 원할 때 사령관실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줘.’
‘루이는 믿을 수 있으니까요.’
‘바로 가지 않고요?’
어제 응접실에서 에스메랄다와 루이자가 나누었던 대화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가? 이거라고? 페드로와 루이자가? 대체 언제부터? 아니, 해도 본인의 침실에서 할 것이지 왜 사령관실에서 저러고 있단 말인가! 사람 놀라게 옷은 또 왜 풀어 헤치고 있냐고!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니 그가 잡고 있던 문고리가 슬쩍 돌아갔다.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니 내부에서 문을 열고 나온 루이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고, 아르페시스 역시 몰려오는 민망함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저, 전하를 뵈, 뵙습니다.”
“어, 그래, 봤군, 다음에도 보는군, 아니, 또 보는군.”
그는 지금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되는 대로 얼버무렸다. 인사고 예법이고 되었으니까 빨리 가 버려라. 현재 아르페시스의 속내를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오래지 않아 루이자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 직후 아르페시스는 제 앞에 멈추어 선 구두코를 보았다. 근위 기사의 정복과 함께 지급되는 구두였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조금 전과 달리 옷을 말끔하게 정리한 페드로가 서 있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질타를? 일단 사과가 먼저지 않을까?
그가 지금까지 봐 온 페드로라면 성질을 부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조금 전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고 성을 내지 않았나. 아르페시스는 우선 사과를 먼저 하기로 했다.
“어… 그, 미안… 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페드로의 신경질이나 이죽거림이 아니었다. 표정을 살짝 구긴 페드로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르페시스는 지금과 같은 페드로의 표정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서부에서 세리와 메리를 데리고 돌아가던 날. 쿠베트의 온실에서 잠들었던 에스메랄다를 두고 나오던 날. 또한 에스메랄다의 단절에 망가지기 시작하며 입을 다물었던 시기에도 종종 보았다. 보았다고 해서 저런 표정의 페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음… 그러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해 보고자 입을 열었지만, 페드로가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오늘 나 쉰다.”
그러고는 훌쩍 사라져 버렸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 *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페드로는 짧게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스스로를 질책하기 위함이었다. 품 안에 안긴 온기를 떼어 놓고 싶지 않았지만… 사령관실 밖에 그득그득한 기척 때문에 이성을 다잡았다. 그는 움찔거리는 루이자의 옷을 추슬러 주려고 했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얼굴을 붉힌 루이자가 그의 손길을 거절한 채 몸을 움츠리는 바람에 놔주었다. 등을 돌리고 드레스를 추스르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얇고 가녀린 목선, 그 아래 이어지는 둥근 어깨,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보이는 살결까지.
직전까지 손 안에 움켜쥐었던 그녀의 가슴이나 허벅지, 그리고 제 마음껏 탐했던 입술의 감촉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페드로는 루이자의 뒷모습에서 어렵게 시선을 거둔 채 등을 돌렸다. 그녀의 손이 직접 풀어 주었던 단추를 채우는 동안 아쉬운 열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서투른 그녀가 바지춤을 건들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다. 하의에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았으면 문이 열렸을 때 어떤 상황이었을지 아찔했다.
조금 전의 상황은 루이자가 총사령관 패를 들고서 사령관실에 나타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노크 소리가 나기에 칼라일이 직접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저 들어가도 되는 거죠?’
칼라일이 루이자가 내민 총사령관 패를 보며 멀뚱거리는 동안,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페드로는 칼라일의 손에 들린 총사령관 패를 보며 슬쩍 얼굴을 구겼다. 루이자의 편에 선 듯 보였던 에스메랄다였으니 그녀가 저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훤했다.
분명 에스메랄다에게 꼼짝도 못 하는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달라는 대로 내어 주었을 터. 망할, 속으로 욕설을 삼킨 페드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사령관실을 나서서 루이자를 피할 생각이었다.
‘도망치기만 해 봐요! 여기서 옷 다 벗어 버릴 거야!’
하지만 문 앞을 막아선 루이자가 본부대 기사들이 있는 장소에서 진짜 드레스 앞섶을 풀어내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움직일 여유 따윈 없었다. 페드로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들어야만 했다.
‘교훈이 부족하셨습니까? 사내를 상대로 이리 행동하시면 안 되는 이유를 가르쳐 드린…….’
‘경이 계속 절 피해 다니면 다른 사내들에게도 할 거예요. 여기 있는 분들에게 다 할 거라고요!’
그러면서 그를 사령관실 안쪽으로 밀어내는 바람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힘으로 얼마든지 제압을 할 수 있음에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루이자가 그에게 했던 행동을 다른 사내들에게도 한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페드로는 조금 전의 일을 상기하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뜸 입을 맞추려고 하기에 피하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옷을 풀어 헤치는 걸 막는 사이, 칼라일을 비롯한 본부대 기사들이 슬금슬금 사령관실을 나서 버렸다. 루이자의 옷을 사수하기 위한 페드로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협박하는 루이자의 신경전이 꽤 길게 지속되었다.
‘대체 왜 계속 피하냐고요!’
페드로가 요지부동으로 입을 맞춰 주지 않자 결국 루이자가 울기 시작했다.
‘날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입도 맞춰 주질 않고, 손도 잡아 주질 않느냐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끝난…….’
‘난 안 끝났어! 내가 싫어서 거절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걸 아는데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오늘의 일은 루이자가 사령관실에 들어옴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제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멍청한 탐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아니, 어쩌면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밀회를 엿들은 후 뺨에 손을 올린 채 예쁘게 웃던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가식으로 속내를 가리거나 계산으로 할 말을 고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내보이던 그녀를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그리운 에스메랄다의 미소와 쌍둥이들처럼 동생이라고 여기게 된 아르페시스, 그리고 그의 심장을 뒤흔드는 루이자까지. 페드로는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밀어냈다.
‘어디 가요? 진짜 여기서 옷을 벗어 버릴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헛된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인 페드로가 그녀의 협박을 무시하고 나가려던 때였다.
‘사랑한단 말이야!’
엉엉 울면서 명확한 단어를 내뱉은 그녀에게 붙들리고야 말았다. 실질적으로 그를 붙잡는 힘은 어디에도 없었건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루이자가 페드로에게 감정을 표현한 경우는 꽤 많았고, 좋아한다는 말 또한 몇 번이고 들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과 똑같은 감정을 그린 단어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페드로가 이제껏 했던 결심을 뒤흔들어 버리는 끈질긴 단어, 사랑.
‘외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며! 어떤 사내도 날 보면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했잖아!’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져 대는 루이자를 등진 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의 사랑을 부정하는 말에 충동적으로 일을 그르쳤다. 어느 순간 루이자를 껴안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솔직히 그 과정의 기억이 조금 흐릿했다. 그의 목에 팔이 감겨 왔을 때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책상 위로 올려 앉혔다.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손으로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지금껏 참은 것을 보상받겠다는 심보였는지 노골적으로.
흘러내린 드레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가슴은 달았고, 뽀얀 살결은 향기로웠으며, 딱 한 번 만져 본 속옷의 감촉은 잔인했다.
루이자는 저돌적인 페드로의 손길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서툰 손길로 페드로의 단추를 풀어내며 그를 원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거기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아르페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해하지 않았다면 분명…….
“쯧.”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페드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어깨 위로 흘러내렸던 드레스를 단정하게 정리한 루이자가 있었다. 그녀는 페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를 힐끔거리던 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손을 꼬물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잔인한 사람이다. 페드로는 한숨을 삼킨 후 몸을 돌려세웠다.
“나중에…….”
“네?”
“지금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대화를 후로 미루자 루이자의 표정이 뾰족해졌다. 이미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도주를 했으니 신뢰가 없을 만도 하지. 페드로는 쓰게 웃으면서도 그녀에게 다가섰다. 머릿속은 복잡하건만, 심장은 그녀의 뺨을 한 번 쥐어 본 것만으로도 그의 모든 것을 장악해 버린다. 생각 따윈 하지 못하게.
곧게 바라보는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피해 버리는 하늘색 눈동자가 무섭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던 기준을 바꿔 버리려고 하니까. 또한 그렇게 무서운 만큼 달콤하다. 절대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페드로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제가 따로.”
“…….”
“찾아뵙겠습니다.”
“……이번에도 도망치려는… 읍!”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탐해 본다. 갑작스러운 행동임에도 기꺼운 손길로 응해 오는 루이자 때문에 심장이 이성을 밀어냈다.
자제해 보기도 전에 멋대로 나아간 손이 루이자의둥근 가슴을 쥐고 주물럭거렸다. 이미 옷을 끌어 내리고 만져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얇은 여름용 드레스의 감촉이 유독 거슬렸다.
조금 전에 맛본 그녀의 가슴은 손에 착착 감기며 그를 잡아당겼다. 당장이라도 다시 드레스를 끌어 내리고 주물러 보고 싶건만. 밖에서 우왕좌왕하는 기척이 그를 방해했다.
“우웅.”
결국 페드로는 입술을 맞댄 채 루이자의 타액을 양껏 훔쳐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보드라운 입술을 할짝거린 페드로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뭔가…….”
깊지만 짧은 입맞춤을 끝내자 루이자가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페드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뭔가… 능숙하시네요.”
투정 같은데……. 이제껏 원할 때마다 따로 참지 않고 여인과 정사를 가졌던 과거를 원망해야 하나? 뭘, 그럴 것까지야. 첫 경험 때는 루이자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는데 오늘이 올 것이라고 어찌 생각했겠나? 그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속삭이는 게 다였다.
“제 나이가 스물다섯입니다. 순진한 소년의 반응을 바라시면 곤란합니다만…….”
“뭐, 제, 제가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
“심장은 처음 내드렸습니다.”
“……에?”
그녀의 고운 손을 쥐어 가슴께로 가져왔다. 귀로 들려오는 루이자의 심장 소리만큼이나 가파르게 뛰고 있는 박동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러니 우선은 잠시 미루죠.”
“……네에.”
미적미적, 떠나기 싫어하는 루이자를 겨우 돌려보내니 남은 건 아르페시스다. 루이자가 떠나서 그런가? 심장은 다시금 이성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문 앞에서 당황한 게 빤히 보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더없이 복잡해진다.
아르페시스의 가치관은 남녀 간의 관계를 배우자들 간에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라고 여긴다. 반면 페드로의 가치관은 본인의 죽음을 빌미로 배필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루이자의 곁에 있고자 한다면 전선을 떠나야 한다. 아르페시스의 곁에 있으면서 루이자도 차지하는 건, 그에게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근위 기사직을 내려놓고 아르페시스의 곁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당장의 장점은 루이자와의 미래, 그리고 그의 죽음을 무서워하는 에스메랄다의 안정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만일의 경우 아르페시스에게 닥쳐오는 위험에 대처할 수 없겠지.
처음보다는 많이 능숙해졌지만 그게 아르페시스가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10년을 살아남은 사람도 내일 죽을 수 있는 게 전장이다. 곁을 비우면, 만일의 경우 아르페시스를 위해 함께 검을 들지도 못한 채 죽음에게 형제를 빼앗길 수도 있는 일이다. 무력하고 한심하게,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그가 루이자의 곁에서 웃으며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아르페시스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에스메랄다는 물론 페드로 역시도 상실감에 휘청거리겠지. 어린 시절 숙부와 백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은 오로지 에스메랄다를 위한 선택이었을지라도 지금에 이르러서 아르페시스를 지키는 건 그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페드로는 한참이나 복잡한 눈으로 아르페시스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오늘 나 쉰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선택지를 결정해야만 할 때였다. 자리를 벗어나는 내내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 * *
에스메랄다는 남자처럼 바지를 입고 금발을 틀어 올린 채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였다.
아르페시스는 생일날 관저에서 근위대의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다고, 밖으로 몰래 나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겠냐고 권했다. 기억 속의 리퀘나를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절을 하면 시무룩하게 처질 게 분명해 보여서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가 보내 준 휴고의 도움을 받아 몰래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르페시스가 오지 않고 있다. 골목길의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더니 휴고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네, 기다리면 되겠죠.”
망토를 풀어 허름한 나무 상자 위에 깔아 주는 것이, 앉으라는 뜻 같았다.
“감사합니다, 오비텐 경.”
굳이 거절할 만한 호의는 아닌지라 에스메랄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아르페시스의 측근이고, 이미 몇 번 만난 사이이기는 했지만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주제넘은 짓일지도 모르겠으나…….”
하지만 오늘은 조금의 대화가 오갈 모양이다. 휴고가 먼저 입을 열어 대화를 청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자리에 앉은 채 휴고를 올려다보았다.
“언제고 영주 대리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게 말씀이신가요?”
“……예.”
무엇 때문에? 침묵으로 답을 요구하자 휴고가 그녀의 뜻대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는 관저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궁에 계실 때와는 달리 감정 표현이 풍부해지셨습니다.”
그가 황성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여유롭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안다. 사라진 시간에서 만났을 때는 지금처럼 웃기까지 몇 년은 걸렸으니까.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영주 대리 덕분이지요.”
“……과분한 칭찬 같네요.”
“그저, 한 번쯤은 전하를 웃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웃게만 해 드린 건 아닐 텐데요.”
에스메랄다는 이미 두 사람이 단절을 유지하던 시절 아르페시스가 어떠했는지 페드로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러니 휴고가 하는 감사 인사를 받을 만큼 당당하지는 않았다.
“그것 역시 사람의 감정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휴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저도 서부 대란 때가 되어서야 인지한 것입니다만……. 영애를 만나기 전까지 전하께서는 조금 결여되어 있던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에스메랄다 역시도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가 타인의 관계에 조금 둔한 것은 그만큼 타인과의 사이에서 배울 수 있는 감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니까.
“황제 폐하께선 전하께 사람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전하께선 그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울 수 있는 감정을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했던 생각을 휴고 역시 똑같이 하고 있었다.
“……왜 제게 이런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말과는 달리 에스메랄다는 휴고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르페시스를 위하는 마음이겠지. 그녀가 또다시 그를 외면한 채 단절을 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저 불편한 대화를 길게 이어 가고 싶지 않았기에 끝내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이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은가 보다.
“영주 대리께서는 전하의 중심… 이라고 해야 할까요?”
“…….”
“저의 짐작일 뿐이지만, 전하의 세상은 영주 대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 형제, 친구, 그 외의 모든 인간관계가 없던 상태에서 처음으로 생긴 연인.
“아니, 분명히 전하의 세상은 영주 대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생각의 끝은 모두 영주 대리께 귀결됩니다. 리퀘나 수복 당시, 전하께서는 이곳을 빨리 되찾아야 영주 대리께서 당신을 만나러 올 수 있다며 열심히 하셨습니다.”
“…….”
“마수와의 전투에 진심을 다해 임하시는 것도, 결국은 내륙에 계신 영주 대리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스메랄다는 휴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니 그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살펴 주시기를 간청…….”
“경이 이미 언급한 대로 꽤나 주제넘은 말이군요.”
지금 휴고가 하는 말은 만약 지난번과 같은 일이 생겨도 아르페시스를 조금 더 위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녀보다는 아르페시스를 위하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충언. 그것을 알면서도 에스메랄다는 휴고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냈다. 휴고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분명 주제넘은 행동이었으니까.
평소의 그녀라면 굳이 이렇게 상하를 구분하며 휴고의 말을 자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혈통이 줄 수 있는 이점을 잘 써먹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휴고가 꺼낸 주제에 오래 엮여 있고 싶지 않았기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 버렸다.
귀족의 서열은 작위와 혈통으로 구분된다. 정확히는 작위 혹은 작위 계승권을 일컫는 두 번째 이름으로. 에스메랄다의 두 번째 이름은 에타, 그녀는 백작 위의 계승권을 가진 직계였다. 당장 작위가 없다 해도 계승권이 있기에 단승 작위만을 가진 귀족들보다는 높은 신분이었다.
사교계에서 계승권 귀족이 보다 낮은 작위를 승계한 귀족에게 말을 높여 주는 건 보통 연배나 배려 때문이지, 신분 때문이 아니다. 본래의 법대로라면 승계 귀족이라 해도 계승권이 높은 귀족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들의 혈통이 더 고귀하니까. 그렇기에 에렘 내에서 에스메랄다보다 신분이 높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에타보다 높은 후작의 작위나 계승권인 아그라를 가진 사람, 혹은 동급인 에타의 계승권을 가진 채 다른 계승권 역시 3개 이상은 가진 사람이어야 하니까. 평소 소개를 할 때는 쓰지 않지만 가문의 족보에 기재된 그녀의 계승권이 더 있기 때문이다.
모친과 외조모, 조모와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까지 합해 도합 4개의 계승권을 가진 것이 에스메랄다와 그녀의 형제들이다. 대부분은 출가를 한 계승권자가 작위 승계자와 혼인을 할 경우 3대에게 계승을 허락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계승권은 최대 4개, 작위는 1개. 도합 5개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가지고 있던 계승권 중 하나의 작위를 승계하기에 공훈을 세워 새로운 작위를 하사받지 않는 이상 4개가 한계다. 그건 진정으로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고귀한 혈통만이 가질 수 있는 숫자였다. 연배에 따라 존칭과 존대를 쓰는 관습을 존중하는 것뿐이지, 본래라면 에스메랄다는 휴고에게 하대를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반면 휴고는 에스메랄다와 태생, 혹은 혈통이 다르다. 보통 형제가 작위를 승계하면 그 외의 이들은 방계가 되고, 그들은 선대 작위 귀족 1대로 하여 계승권을 보유할 수 있는 2대가 된다. 승계권이 유지되는 건 그들의 자식들까지. 그 아래로는 계승권이 없는 방계로서 가문의 이름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에반스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사 루실 에반스, 그는 계승권이 없는 루실 자작가의 방계였다. 현재 휴고가 가진 것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남작 위 계승권 게만과 본신의 능력으로 받은 준남작 단승 작위 울이다. 그의 조모와 외조모, 모친이 계승권이 없던 방계 귀족이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최근 3대 간 방계의 피가 한 번도 섞이지 않은 직계와 직계, 또한 직계의 후손. 휴고는 여러 세대에서 방계의 피가 섞인 직계의 후손. 만약 혈통적 고귀함을 기준으로 귀족들을 줄 세운다면 휴고와 에스메랄다 사이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페시스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고 나타났다.
“무슨 일… 있었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용병처럼 가죽 갑옷과 평범한 철검을 착용한 그도 에스메랄다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굳은 표정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휴고를 번갈아 보았다. 그에게 이 대화를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늦었어.”
별로 탓하고 싶지도 않은 지각을 굳이 언급한 건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아, 미안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조금 있어서. 많이 기다렸는가?”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아르페시스가 서둘러 곁으로 다가왔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 들었다.
“조금?”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왔으니까 용서해 줄게.”
아르페시스로부터 뺨에 잘게 내려앉는 입맞춤을 받은 그녀가 휴고를 힐끔거렸다.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고 그는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전하, 저는 근방에서 따르겠습니다.”
“그래.”
휴고를 돌아본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휴고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그에게 상처를 준 스스로의 잘못을 지적받았다는 불쾌감.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를 위해 나서 주는 충신이 있다는 안도감. 그를 위해 충언을 올린 이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만약 다시 한번 휴고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녀라고 원해서 아르페시스를 원망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 그대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응?”
휴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올라갔다. 조금 전처럼 복잡 미묘한 표정의 아르페시스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
“그?”
“혹시 페드로와 쿠베트 영애가…….”
“이제 눈치챘어?”
어제 총사령관 패를 내어 줄 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못 하더니, 오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알고 있었군…….”
에스메랄다로서는 몇 년이나 옆에 있었으면서 모르는 그가 신기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했던 휴고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대체 언제부터?”
“쿠베트성에서.”
“하……?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그때부터 천천히 진행되었다고 봐야겠지?”
“세상에…….”
아르페시스는 꽤나 놀란 듯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페드로의 연애사에 빠져 있는 사이 주머니에 넣어 온 물건을 꺼냈다.
“응?”
그걸 쥐여 주니 아르페시스가 정신을 차렸다.
“이게 뭐… 아…….”
반사적으로 되묻던 그의 입꼬리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주먹보다 훨씬 작은 상자를 움켜쥔 채 히죽거리는 아르페시스에게 속삭였다.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면서 아침부터 입이 간질거렸던 에스메랄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아르페시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투툭, 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가 너무 뜬금없이 울어 버리는 바람에 에스메랄다는 당황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매해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때는 쑥스러워하고 말더니… 그 시절에는 그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건만, 지금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다.
새삼 그녀가 알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드로에 대해 반쪽만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르페시스의 눈물을 훔쳐 주고자 손을 뻗자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태어난 건…….”
그가 그녀의 손을 붙든 채 손바닥에 입을 맞추어서 젖은 뺨을 쓸어 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말을 끝마친 그가 갈급하게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서로가 쓰고 있던 모자가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더 바짝 붙어 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격정적인 입맞춤에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아르페시스의 손이 등을 훑어 내리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옷깃을 움켜쥔 채 움찔거리자 자극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밀어붙였다. 평소보다 예민한 반응에 놀라기도 잠시, 그로부터 다가오는 자극에 모든 신경과 생각이 집중된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맞대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각자가 따로 태어나 별도의 존재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렇게라도 하나의 존재처럼 붙어 있고 싶은 사람처럼 밀착해 왔다.
찌르르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의 힘에 밀려나는 동안 등이 벽에 닿아 버렸지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거의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해 가며 서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르페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미안, 미안하다…….”
아쉬운 듯 그녀의 허리를 매만지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평소보다 훨씬 부족한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몸을 떨었다.
“너무 기뻐서, 순간… 놀랐다면 미안하다.”
사과하지 않아도 그를 거부할 생각이 없건만.
“혹여…….”
“싫지, 않아.”
“아?”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아르페시스가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해 왔다. 당장 문제의 원인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녀는 그와의 모든 행위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기만 했으니 달래 주고 싶었다. 아직도 호흡이 거친 그녀는 단어를 끊어 가며 말했다.
“네가 뭘 하든, 기분 나쁘지, 않다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허리를 옥죄어 오는 힘이 갑갑할 정도였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호흡이 평소처럼 잔잔해지자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여 주었다.
“그대를 사랑하는 데 내 평생을 써도 부족할 것 같다.”
그 달콤함에 에스메랄다가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에스메랄다, 그대를 사랑해. 언제나 그대만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언제나 그녀의 사랑은 아르페시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짙고 오래된 감정, 아르페시스가 그 감정의 깊이를 알게 되면 무어라고 할까?
조금 전과 달리 얕은 입맞춤으로 서로의 아쉬움을 달랜 후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지금 확인해 보아도 되나?”
선물 상자를 말하는 거겠지.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페시스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서 마름모 형태로 제련된 무광의 흑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아래와 양쪽에 다이아몬드가, 정중앙에는 마석이 박혀 있는 마도구였다.
“마도구… 인가?”
라그나가 개발에 성공한 자동 발현 실드 마도구였다. 에스메랄다의 것은 인간의 원거리 저격이 있을 경우 실드가 발동하지만 지금 아르페시스에게 준 것은 조금 달랐다. 마수 중에는 발톱이나 가시 같은 것을 뿌리며 공격을 하는 놈들도 있기에, 그런 성질에도 실드가 발동하게 만들었다.
난전 중에 암석이 등에 튀어 입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대다수의 석재에도 특정 무게가 넘어가면 발동하도록 조건을 걸어 두었다. 타인의 시야에 들어 좋을 게 없는 물건들이지만 페드로와 얘기를 끝내 두었으니 어느 정도의 무마는 가능할 것이다. 그녀의 저력을 숨기는 것보다 아르페시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 공개되더라도 감수해야만 한다.
“발화 마도구를 끼우는 가죽끈 있지? 거기에 끼워서 같이 착용하면 돼.”
“아, 그래서 고리가 양쪽에 있었군?”
이것 외에 확대경 마도구같이 유용한 것들도 페드로 편으로 전달해 두었다. 그는 라그나의 존재는 물론 에스메랄다의 목적도 알고 있으니 타인의 이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으리라.
“출정할 때 꼭 가져가, 알겠지?”
기능이 궁금할 법도 하건만 아르페시스는 질문을 하는 대신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며 속삭였다.
“소중히 여기겠다.”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응?”
그녀가 차고 다니는 목걸이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제 것과 똑같은 펜던트를 발견한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붉히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그의 오른손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전장에서 너를 지켜 줄 수 있기를.”
“……언제나 그대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그가 축복의 답례를 해 준 후, 두 사람은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어 탈탈 털었다. 서로에게 그것을 씌워 준 후 시가지로 나가는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에스메랄다는 최대한 시가지의 모습을 시야에 담지 않은 채 아르페시스만을 보았다.
그 역시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걸었다. 두 사람은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길게 난 대로를 걸으며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길에 자리를 잡고 연주를 하는 이들을 구경하거나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직업이 어떨 것이다, 추측을 해 보기도 하고.
짧기만 한 하루를 보낸 후 관저로 돌아가는 길, 아르페시스가 문득 성벽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저 성벽이 어색하기만 했는데…….”
아르페시스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뭐랄까,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곳 같다고 할까?”
“익숙해졌다는 의미야?”
“그렇다기보다는…….”
그는 조금 더 적절한 말을 찾는 듯 뜸을 들였다.
“고작 한 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있음으로써 남부군 내부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급진파의 변화를 이르는 말이다. 그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에스메랄다의 눈동자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본래 지금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당장 황실을 무너트려야 남부 전체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던 급진파가, 나라는 존재 때문에 황실의 재산을 빼 올 수 있게 되니 조금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 그가 남부군에서 쉽게 섞여 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탐욕으로 그것을 움켜쥐는 대신 사비를 내어 놓았으니까. 그라는 존재로 황실의 재산을 당당하게 남부군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급진파의 태도가 조금 유해진 것이다.
남부군의 물자 규모는 아르페시스가 오기 전과 후를 구분해서 보아야 할 만큼 차이가 명백했다. 아르페시스가 오기 전 남부군은 계속 적자 재정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가 온 후에 겨우 정상 궤도로 재정이 변했다.
금액만 따지자면 남부군 전체 예산의 1할도 되지 않겠지만, 그것이 없어 완성되지 못했던 재정이 아르페시스 덕분에 안정된 것이다. 9와 10은 유사하나 결코 같지 않다. 우호적인 시선 속에서 조금 더 쉽게 섞여 든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성실히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에 남부군의 수뇌들이 감화되었기에 그는 남부군의 전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부당한 명령에도 복종할 수 있는 그만의 병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사라진 시간에서 황실이라는 이름을 떠나 그라는 사람을 존경하며 따르게 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대략 6년.
이번 시간에서는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왔고, 이미 4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가 남부군의 충성을 받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때가 도래하면 급진파라 지칭 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아르페시스의 말 한마디면 검을 들고 죽음으로 뛰어들 정예군이 되겠지. 본래 그러했던 미래와 똑같이.
“황제는 남부군을 제 땅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보고, 그들이 여유를 가짐으로써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지원 규모를 빠듯하게 책정해 두고 있다. 그게 개선되어야 하는 폐단이라는 것은 안다.”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빠듯하면 다음의 문제는 뒤로 미뤄 놓게 되는 법이다. 지금이 있어야 다음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을 버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황제는 지원 규모를 통제함으로써 남부군이 마수와의 전쟁 외의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부군 내부의 파벌 구분은 그런 황제의 태도에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 낸 것이다.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더라도 남부부터 지키고 봐야 한다는 이들과 당장의 피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황제를 쳐야 훗날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이들.
“하지만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을 위한 방향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곳으로 갈 수 없는 경우도 있지. 가령 그 길로 갈 경우 포기해야 하는 생명이 너무 많을 때… 정도일까? 지금 남부처럼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아르페시스의 옆에서 침묵했다. 서부 연합군의 출정식이 있던 겨울날이 떠오르고야 만다.
“그런 상황에서 나로 인해 부당에 반발하지 않더라도 남부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나온 것이라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다시금 관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부군은 내 존재로 인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손에 쥔 것이다. 비록 그 방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 규모가 늘어나서 겨울에 리퀘나 후방으로 넘어가는 마수의 수가 많이 줄었지. 그로 인해 남부에 있는 민간 백성들이 습격을 받아 사망하는 경우 역시 많이 줄었다.”
그녀가 알던 것과 다르게 행동하는 아르페시스를 보고 가졌던 희망. 어쩌면 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래서 이곳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로 인해 줄어든 피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이곳이 달가웠던 적은 없지만… 또한 여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나라는 존재가 유용한 장소임은 변하지 않겠지.”
이미 헛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입 안이 쓰다. 저도 모르게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가 변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변한 그가 에스메랄다가 행하는 모든 악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꿈.
“내 생각이 그대에게 제대로 전해졌는지 잘 모르겠다.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의 생각은 결국 사라진 시간에서 그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것이니까. 남부군에, 나아가 남부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아르페시스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상 앞으로의 일은 눈에 훤했다.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사람, 혹은 환경은 인간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성장시킨다.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자존감을 지탱해 주며 스스로를 인정해 준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노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르페시스는 앞으로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애정을 느낄 것이고, 더한 것을 해 주지 못함에 스스로를 질타하며 더욱더 노력할 것이다. 또한 그의 노력을 보며 감동하거나 감화된 이들은 유대감을 단단히 만들어 다시금 그를 위할 터. 남부는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 소중한 이들의 가족이 머무는 곳, 그러니 지키고자 할 수밖에.
직접 얘기를 해 본 것은 아니나, 아마도 아르페시스가 사라진 시간 속에서 남부를 버린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남부는 버려도 되는 곳이 아니라 지켜야만 할 곳일 테니까. 결국 아르페시스는 사라진 시간과 똑같은 행보를 밟아 갈 테니 그녀가 바라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어째서 이렇게 쓰라린지.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은 훗날 그녀의 행적을 들켰을 때,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포승줄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그의 책임감을 자극할 수 있는 이성 간의 육체관계라는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연인 간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바라지 못하고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생각이라니. 책임감을 빌미 삼아 붙들어 놓을 궁리를 하는 것 자체가 그를 기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가치관과 그녀의 절박함 사이에서 기도했다. 부디 그날까지는 어떠한 것도 들키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 본다.
이렇게 불안한 것이 싫다면 그의 가치관 같은 것을 배려해 주지 않고 달려들면 그만인데, 제 코가 석 자이면서도 그를 배려하고 있다. 지금 기다리기로 한 것을 훗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건만, 또 한 번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야 만다.
에스메랄다는 관저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생각했다. 그를 속이고 있는 지금이 끝나면 어떻게 되지? 루그레디안은 황위에 그를 추대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황실의 이름을 바꿔야 하는데, 그는 권력을 경계하는 경향이 강하기에 직접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을 터.
모든 것이 끝나고 아르페시스가 황좌에 앉게 되면 어떻게 되지? 아니, 애초에 그가 피로 얼룩진 자리에 앉으려고 하기는 할까? 지금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의 끝에 미래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만약 그것이 없다고 해도 그녀는 이 핏길을 포기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 의문들의 답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나?
관저로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음 속도를 늦추는 게 다였다.
* * *
전전긍긍, 방 안을 오가던 루이자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일까 싶어 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영애, 테노리엘 페드로입니다만.”
줄곧 혼자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었다. 루이자는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금발을 축 늘어트린 페드로가 서 있었다.
“드, 들어, 들어와요.”
씰룩, 하고 위로 올라간 눈썹이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페드로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지…….”
“뭐, 뭐라고요? 지금 시비 거는…….”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던 루이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드로가 성큼, 침실 안으로 발을 들였으니까.
곧장 문을 닫고 잠금쇠까지 걸어 버린 그는 루이자의 얇은 허리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루이자는 쿵, 쿵, 쿵, 시끄럽게 울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듣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눈을 떼기 힘들었습니다.”
대뜸 이어진 말은 루이자의 심장마저 가쁘게 뛰도록 만들었다.
“뭐, 뭐…….”
“쿠베트성에서 영애를 눈에 담았을 때부터 줄곧…….”
루이자는 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페드로를 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집무실에서처럼 입을 맞춰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내가 함락되리라는 걸 알았어. 당신이 웃는 걸 봤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아니었다. 페드로는 그녀의 목에 고개를 묻었을 뿐이다. 허리를 쓸며 올라오는 손길이 적나라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는 건지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어.”
도대체가, 제대로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저가 할 말만 쏟아 내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를 밀쳐 내고 따지려고 했는데.
“내가 하려는 말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확신해.”
“잠깐만요, 이것 좀 놓고…….”
“그런데도 원해.”
힉, 소리와 함께 몸이 굳어 버린 건 제 하체를 바짝 들이민 페드로 때문이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페드로가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루이자의 손에 들려 준 그가 가녀린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귓가에 제 입술을 파묻었다.
“허락해 준다면, 안을 겁니다.”
제멋대로 말투를 바꾸는 것도 짜증 났고, 대화를 하자더니 멋대로 품으로 잡아끈 것도 밉고, 이런 식으로 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허락해 주면 후회할 거야.”
그런데도 열망으로 가득한 청록색 눈동자에 홀린 듯 손에 쥔 병의 뚜껑을 열고야 만다. 페드로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페드로를 따라 하는 것처럼 꿀꺽, 내용물을 삼키자 부쩍 거칠어진 숨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후회할 겁니다.”
이를 악물고서 읊조리는 목소리가 질척거렸다. 비어 버린 병을 놓고 페드로의 뺨을 감싸 쥐는 루이자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내가…….”
집요하게 저를 쳐다보는 그와 시선을 맞춘 루이자가 울먹이며 답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해요…….”
아직 어리던 소녀 시절 심장에 들어와 그녀를 헤집고, 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린 사람인데.
루이자가 뒷말을 삼킨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가기도 전에 입술을 맞대어 온 페드로 때문이었지. 그는 더 이상 망설일 게 없다는 듯 저돌적이었다.
“흡… 으음!”
집무실에서 나누었던 것보다 더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듯이 온전히 루이자의 혀를 옭아맨 페드로가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를 거칠게 비벼 댔다.
“흡!”
외설스러운 입맞춤과 더불어 엉덩이를 꽉 움켜쥐는 손길에 놀란 루이자의 몸이 펄떡 뛰어올랐지만, 페드로의 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처음 겪는 열렬한 입맞춤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루이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페드로가 그녀를 안아 든 채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루이자의 몸이 잠시 굳었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체중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본능적으로 위축된 것이다. 그걸 느꼈는지 페드로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루이자는 몽롱하게 풀어진 눈으로 페드로를 올려다보았다. 잠시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페드로가 피식, 웃으며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긴장하지 마. 나 잘하거든.”
“뭐…….”
“빈말 아니야. 기대하라고. 내 좆을 더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줄곧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던 페드로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만큼 상스러운 말이었다.
“마, 말을 왜 그렇게……!”
“침대 위에서까지 예의를 갖추길 바라? 여긴 황족도, 귀족도, 평민도 없어. 오로지 여자인 너랑 남자인 내가 전부야.”
몸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루이자가 황망함과 수치심에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하의까지 탈의한 페드로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들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처음이잖아. 핥아 줄게.”
처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으며, 처음인데 왜 핥아 준다는 말이 나온 것이냐고, 따박따박 따져 물을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으아!”
치마를 들치고 들어가 대뜸 속옷에 얼굴을 비비는 페드로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씻고 기다렸나? 장미 향이 나는데… 향유 썼어?”
“그, 그건, 씨, 자려면 씻어야 하니까……!”
가랑이 사이에 누군가 입을 들이민 것도, 입을 들이민 채로 말을 하는 것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기대했나?”
쿡쿡, 하고 웃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당장 낯선 상황만으로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페드로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수치심을 자극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씻은 건 맞다. 은근히 이런 상황을 바라기도 했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는 페드로와 뜨거운 정사를 상상하며 혼자 다리 사이를 적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적인 말로 들으니 당장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페드로가 미워져서 빽,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기쁘네. 나만 기대한 게 아니라서.”
“힉!”
훌렁 벗겨진 속옷이 침대 밖으로 날아갔다. 그 직후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음부에 물컹한 무언가가 닿았다.
“으앙……!”
“난 두 번이나 씻었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음부의 돌기에 생소한 압박까지 느껴졌다. 쭙, 쭙, 상스러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허리가 들썩거릴 만큼 오싹한 쾌락이 하복부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혹시 네가 싫어하는 냄새라도 날까 봐 평소에는 귀찮아서 쓰지도 않는 향유까지 찾아 댔고, 긴장해서 실수할까 봐 한 발 빼고 왔는데, 미치겠네. 만지지도 않았는데 섰잖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거, 거기다 대고 마, 말하지 마앙!”
“하, 보지까지 예쁘면 어쩌라는 거야. 사내새끼들이 환장하겠네. 딴 놈한테 보여 주기 싫은데…….”
“따, 딴 놈 없… 으앙! 앙!”
“좋아? 어디가 제일 좋은데? 말해 봐, 제대로 빨아 줄 테니까.”
“그, 그런 말 하지… 헉! 으앗!”
쑤욱, 몸을 가르고 들어온 이물질에 놀란 루이자의 몸이 펄떡 뛰어올랐다.
“얌전히 있어. 빨기 힘들잖아.”
그에 우물우물, 음부에 입술을 파묻고 있던 페드로가 한 손으로 그녀의 골반을 붙잡았다.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혀가 음부의 돌기를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흐읏! 학!”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에 뒤덮인 페드로의 머리를 붙잡은 루이자가 숨을 헐떡거렸다. 멋대로 그녀의 몸을 열고 들어왔던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탁탁, 길쭉한 것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자 어느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홍수가 났네. 사람 미쳐 버리게.”
“으응! 히윽……!”
“벌써 갔어? 아주 오물오물, 내 손가락을 씹어 먹을 기센데? 여기 넣으면 바로 싸 버릴 것 같아.”
“힉, 히익…….”
움찔, 움찔, 루이자는 직전의 생소한 감각이 잦아들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그사이 치마 속에서 빠져나온 페드로가 흥건하게 젖은 입가를 닦으며 픽, 웃었다.
“벌써 늘어지면 난 어쩌라고?”
그는 루이자의 애액으로 젖어 있던 손으로 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그 광경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얇은 막이 쓰인 것처럼 먹먹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보여?”
무릎을 딛고서 몸을 곧게 세운 페드로가 씩, 웃었다. 저렇게 보란 듯이 하체를 들이미는데 안 보일 수가 있나. 루이자는 손을 들어 서둘러 눈가를 덮어 버렸다. 하지만 양옆으로 훤히 벌어진 손가락은 눈앞의 광경을 가려 주지 못했다.
“가리려는 거야, 보려는 거야.”
나지막이 웃은 페드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냥 봐. 네 거잖아.”
“내, 내, 내 거라뇨! 당신 거잖아!”
“이제는 아닌데.”
“그건 또 무슨…….”
따져 물으려고 했지만 페드로가 제 성기를 쥐여 주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잘 봐. 만져도 보고. 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나, 난 아무것도…….”
“너한테만 선다고 이제. 정확히는 널 보기만 해도 서. 그러니까 네 전용이라고 생각해.”
얼굴에 오른 열이 식을 여유가 없었다. 루이자는 황망하면서도 부끄럽고,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싫어?”
그에 루이자의 손을 가져가 멋대로 수음을 하던 페드로가 움찔, 멈추었다. 루이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왜 피해? 난 네 거 하루 종일 봐도 안 질릴 것 같은데, 넌 아닌가?”
“궁금하기는…….”
반사적으로 어물거리며 답하던 루이자가 합,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난 그렇게 솔직한 게 좋아. 침대 위에 너랑 나밖에 없어. 보고 싶으면 봐. 만져 주면 더, 후우… 좋고. 어, 그렇게. 좀 더 강하게 쥐어도 돼. 그대로 위아래로 흔들… 하아……!”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은 페드로가 루이자의 손을 자유롭게 놔주었다. 그럼에도 루이자는 자신의 의지로 페드로의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잠깐 사이 숨이 거칠어진 페드로가 루이자의 옷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잠깐 그건… 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루이자의 헐렁해진 실내 드레스를 끌어 내리고 가슴을 쥐어 보려던 페드로가 별안간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이미 그의 성기를 입에 물어 버렸던 루이자가 허리를 숙이며 따라갔고, 참아 볼 새도 없이 울컥하고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아!”
얼굴에 쏟아진 정액 때문에 놀란 루이자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움찔, 움찔, 페드로의 엉덩이와 복부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침실을 채웠다.
루이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페드로를 힐끔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는 의미 모를 눈으로 루이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서 머뭇거리기도 잠시, 루이자는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껏 아래로 처진 입매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저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멋대로 굴었으면서 왜. 괜스레 눈물이 났다. 눈이며 뺨에 흥건한 정액을 닦아 내기 위해 들어 올린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런 거 시킬 생각 없었어.”
그때, 드디어 입을 연 페드로가 루이자의 손을 잡고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아래로 푹 숙인 그녀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는 직접 루이자의 얼굴에 묻은 정액을 슥, 슥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당신도 했잖아요.”
“……난 힘들지가 않잖아. 여자들은 구음할 때 생각보다 힘들어. 헛구역질도 나고, 턱도 아프고.”
“히, 힘들지 않은데…….”
픽, 하고 웃음을 되찾은 페드로가 루이자의 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딴 놈 거 빨아 봤어?”
그 순간 뜨겁기만 하던 청록색 눈동자가 스산해진 것 같았다. 루이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냐! 당신이 처음이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알아? 힘든지, 아닌지.”
우물우물, 페드로의 눈치를 살피던 루이자가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당신 거니까…….”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드로의 손은 여전히 루이자의 입술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럼…….”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힘을 잃고 처졌던 페드로의 성기가 조금씩 부풀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
“해 줄래……?”
루이자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긴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앉아서 해. 엎드려서 하면 목 아파.”
“아…….”
주섬주섬,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루이자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 선단을 쥔 채로 머뭇거리던 페드로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세워 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루이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제 얼굴 앞으로 다가온 페드로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움찔, 하고 움직인 성기는 이미 반쯤 선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머뭇거리며 가볍게 입을 맞추자 조금은 말랑거리던 선단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루이자는 힐끔힐끔, 페드로의 안색을 살피며 귀두 부분을 입에 머금었다.
“침 묻혀서… 하……! 좋아. 하아… 혀로, 혀를 써. 그래, 그렇게… 이를 세워 봐, 나 긁어 주는 거 좋아해.”
“흣!”
나지막하면서도 일렁거리는 페드로의 목소리를 따라 어설프게나마 혀를 놀리자, 입 안으로 들어온 성기는 금세 딱딱해졌다.
“웁, 쭙……!”
“사탕 빨듯이 귀두만… 아……! 루이자……!”
조금씩 허리를 앞뒤로 흔들던 페드로가 별안간 허리를 숙이고 루이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가 이렇게 예쁘게 크라고 했어.”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꽤나 초조했다.
“젠장…….”
“으흥! 흐응, 흣!”
가슴의 돌기를 만지작거리는 페드로 때문에 몸이 자꾸만 들썩거렸다. 그럴 때마다 페드로는 제 허리가 움직이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침이 흘러내리고 추잡스러운 소리가 침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 젠장, 못 참겠는데… 조금만 할게.”
별안간 이해하지 못할 말을 꺼낸 페드로가 허리를 펴고 루이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대로 퍽, 허리를 쳐올리기까지.
“읍!”
차마 삼키지 못했던 부분까지 쑤욱 입 안으로 들어오며 루이자를 채워 나갔다.
“조금만, 진짜, 조금만… 하……!”
페드로의 허리에 힘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 깊은 곳까지 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루이자는 반사적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페드로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아! 흐아!”
눈을 꾹 감은 페드로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줄곧 여유롭기만 하던 그가 쾌락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은 황홀했다. 루이자는 보다 크게 입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조금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페도르는 허리 짓을 쉽사리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깊은 곳을 찔린 루이자가 헛구역질을 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제 성기를 빼내었다. 다급히 자세를 낮춘 그가 루이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젠장……. 미안, 미안. 괜찮아?”
켈록켈록, 기침을 하던 루이자가 더 할 수 있다고 말하려던 순간 페드로가 그녀의 옷을 훌렁 벗겨 냈다.
“으응……!”
순식간에 나신이 된 루이자는 제 가슴에 매달린 페드로의 머리를 껴안았다. 어깨를 미는 힘에 순응해 침대에 눕자 커다란 체격을 가진 페드로가 그녀의 위로 올라타며 속삭였다.
“이게 더 기분 좋을 거야.”
“아응……!”
한껏 움켜쥔 가슴을 주무르며 유두를 핥기 시작한 페드로는 자연스럽게 루이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예고조차 없이 불쑥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은 점차 그 개수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페드로는 루이자의 질 속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구부려 안쪽을 더듬거렸다.
“세 개……. 조금 뻑뻑할지도.”
“하응! 응! 자, 잠깐……! 아아!”
“다리 더 벌려 봐, 넣을 테니까.”
몇 번이고 안을 문지르며 그녀를 풀던 페드로는 오래지 않아 제 성기를 음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다, 당신 피임약…….”
“먹었어, 오기 전에.”
쪽, 쪽, 루이자의 뺨과 턱에 잘게 입을 맞춘 페드로가 속삭였다.
“네가 허락해 주면 무조건 할 생각이었으니까.”
“으응……,”
“겁먹지 마. 금세 기분 좋아질 테니까. 맹세해.”
눈을 똑바로 맞춘 페드로가 허리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몸을 가르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직전까지 그녀를 헤집었던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꺼웠다.
“아흑!”
“쉬이… 몸에, 힘 빼.”
거친 숨을 몰아쉰 페드로가 상체를 세우고 음부와 유방의 돌기를 동시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굳어 버린 루이자의 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결국 제자리에서 멈춰 버린 페드로가 다시 상체를 숙이며 할딱할딱, 힘겨운 숨을 내뱉고 있는 루이자의 입술을 핥아 주었다.
“힘, 빼.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날 받아들여.”
“흑, 읏……!”
문질문질. 페드로가 엄지로 루이자의 가장 예민한 돌기를 문지를 때마다 조금씩 몸의 긴장이 풀렸다. 딱딱하기만 하던 그녀의 몸이 부드러워지자 페드로가 다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윽!”
루이자의 목덜미를 핥아 주던 페드로가 별안간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커다란 선단이 배 속을 가득 채우자 루이자는 짜릿하면서도 버거운 감각 때문에 머릿속이 울렸다.
“읏, 으응, 그, 그만, 아, 안 들어가…….”
“다, 들어갔어. 네 안에 다 들어갔다고.”
격양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루이자의 입술을 집어삼키고서 봉긋한 가슴을 양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쭙, 츄릅, 쭙. 축축한 살덩이가 마찰하면서 자극적인 소리를 만들어 냈다.
“하아, 하아, 예뻐. 너무 예뻐.”
루이자가 숨이 모자랄 때까지 입을 맞추고서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페드로가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속삭였다.
“미칠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 흔들고 싶은데… 아직 아파? 쓰라리다든가, 화끈거린다든가.”
“읏… 조, 조금…….”
루이자는 눈을 꾹 감은 채 말했다. 그에 이를 악문 페드로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양팔을 굽히고서 상체를 지탱한 그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천천히.”
“네?”
얼떨떨한 심정으로 되묻기도 잠시, 루이자는 반사적으로 페드로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흐응!”
그는 아주 느릿하게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쉴 틈 없이 제 입술을 루이자에게 쪼아 댔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몸이 울려 대는 것 같았다.
“괜찮아지면 바로 말해. 나 지금 감질나서 죽을 것 같으니까, 바로 말하라고. 알겠어?”
“읏! 으읏!”
“뜨거워… 녹아 버릴 것 같아. 아, 미치겠네.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은 거야, 흐.”
중얼중얼, 루이자의 귀나 목을 깨물어 댄 페드로의 움직임은 일정했다. 꾹 움켜쥔 손에는 힘줄이 두드러졌고, 이를 악문 턱이 불거졌으며, 목에도 두꺼운 혈관이 튀어나왔다.
때때로 괴로운 소리를 내면서도 그는 루이자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사라지고, 완전한 교성이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했다.
“흐앙, 아! 조, 좋아! 아! 더……!”
그리고 마침내, 루이자가 고통을 잊고 완전한 쾌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질구 밖으로 귀두가 살짝 보일 만큼 허리를 뺀 페드로가 단번에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앙!”
“하! 좋아? 어디가 좋은지 제대로 느껴 봐. 찾으면 네가 기절할 때까지 긁어 줄 테니까.”
말랑거리는 귀에 입술을 묻고서 읊조린 페드로가 퍽, 퍽, 퍽,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저를 찔러 대는 것을 반복했다.
“여기? 앞이 좋아?”
“흐응, 흥, 거기! 응! 거기! 빼, 뺄 때!”
“잘했어.”
쪽, 하고 루이자의 입술을 훔친 페드로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절대 나를 잊을 수 없도록, 몸에 새겨 줄게.”
본격적인 추삽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짝, 하고 시원한 소리가 들렸을 때 페드로의 고개는 한쪽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푸르른 눈동자를 눈물로 적신 루이자가 그의 뺨을 올려붙였으니까.
“말했잖아.”
페드로는 얼얼한 뺨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후회할 거라고.”
“이, 이……!”
“그만 울어. 네가 그렇게 울어도 변하는 건 없어.”
“이 나쁜 자식!”
다시 한번 짝, 하고 명쾌한 소리가 울렸다. 루이자에게 또 뺨을 내준 페드로는 덤덤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안게 해 줘.”
그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고 사랑을 속삭여 뜨거운 열락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웃기지 마!”
체중을 실어 누르자 루이자는 손쉽게 밀려났다. 페드로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루이자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의 손에 딸려 온 하체가 바짝 맞물렸다. 축축하게 젖은 음모가 허벅지에 닿자 벌써부터 허리가 움찔거렸다.
페드로는 바둥거리며 몸을 비트는 루이자를 붙잡아 제 정액으로 가득한 그녀의 질에 선단을 밀어 넣었다. 척추에서부터 머리까지 단번에 치고 올라오는 쾌감이 느껴졌다.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아…….”
“아응……!”
직전까지 그를 받아들였던 질은 여전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아니, 격한 절정을 경험한 직후라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꿈틀거렸다. 페드로는 저를 오물오물 씹어 대는 루이자를 느끼며 저릿한 쾌락에 취했다.
“으앙, 앗, 빼애, 빼라고……!”
그의 가슴을 퍽퍽 내려치기 시작한 루이자가 울고 있었다. 페드로의 표정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겠다는 답은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내륙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를 품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비겁하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를 안아 보고 싶어서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황홀한 이를 품어 볼 수 있었으니까.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서 루이자의 안에 저를 치대기 시작한 페드로가 탄식을 내뱉었다. 주름진 내벽이 그를 뒤덮었다. 부드럽다 못해 노곤노곤한 질벽은 황홀하기만 했다.
“몇 번을 들어가도 좋아. 절대 못 잊을 거야.”
“아응, 당장 빼……!”
“루이자, 루이자.”
완전히 귀를 닫아 버린 페드로의 허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허억,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 위로 루이자의 교성과 울음이 뒤섞였다.
“아, 좋아. 좋아. 허리가 빠질 것 같아.”
“나도, 나도! 그러니까, 응, 나한테, 흣, 나한테 오라고……!”
“여기, 좋아하지? 잔뜩 쑤셔 줄게. 좋아서 미쳐 버릴 만큼 찔러 줄게. 원하는 대로 말만 해,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루이자를 안아 든 페드로가 상체를 세우고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앙! 앙! 기, 깊어! 깊……!”
“이게 뭐가 깊어. 난 더 들어가고 싶은데.”
여린 몸을 양팔로 끌어안고서 허리를 치댈 때마다 등줄기가 저릿했다. 첫 경험을 한 애송이도 아니고, 루이자를 안을 때마다 이성이 날아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금 이거, 기억해.”
퍽, 퍽, 허리를 쳐올리던 페드로가 무릎을 세웠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루이자의 몸이 허공에 덜렁 떠올랐다. 부유감에 놀란 루이자가 그를 꼭 안아 왔고, 페드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숨을 골랐다.
“내가 네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떤 기분인지 기억하라고. 알겠어?”
귓불을 우물거리며 속삭여 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페드로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루이자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축축한 살덩이를 문지르고 타액을 빼앗아 삼키고, 나아가 여린 입 안의 살을 모조리 맛보았다.
외설적인 입맞춤으로 루이자의 혼을 쏙 빼놓은 그가 으르렁거리며 답을 재촉했다.
“대답해.”
퍽,
“나랑 치댄 거, 기억할 거라고.”
퍽.
“빨리 대답해.”
퍽.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해.”
그는 한마디를 할 때마다 허리를 쳐올렸다. 하지만 루이자는 비명과도 닮은 교성을 뱉어내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페드로의 눈에 불이 붙었다.
“잊을 거야? 날 잊겠다고?”
그녀를 떠나기 위해 품고 있으면서 저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저를 잊을 것이라 생각하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잊을 수 있어? 지금 이 순간을 잊을 수 있냐고!”
조금씩 언성이 높아짐에 따라 루이자를 파고드는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루이자, 제발.”
페드로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힘이 풀린 것처럼 침대 위로 엎어진 그가 루이자에게 제 몸을 바짝 밀착했다. 보드라운 가슴이 짓눌렸고, 가녀린 팔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으응, 응! 앙!”
“나를 잊지 마. 잊지 말아줘.”
조금은 강압적이던 말투가 점차 애원이 되고, 불이 붙은 듯 뜨겁던 청록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염치도 없이 흐르는 눈물이 루이자의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루이.”
끝내 애틋한 부름은 울먹임이 되었다. 이 잔인하고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힘겨운지. 페드로는 루이자의 품속으로 허물어졌다. 거칠던 움직임이 멈추자 남은 건 흐트러진 숨소리가 전부였다.
“나한테, 와요…….”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안 돼.”
충동을 이겨 낸 페드로가 억눌린 음성으로 답했다. 그는 죽어 버린 식물처럼 메말라 버린 에스메랄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혼자서 행복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래, 페드로는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이다. 아르페시스의 곁을 비운 어느 날 그가 죽는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루이자의 곁을 떠나기로 결정한 건 그였다.
“당신이 없으면 리디랑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페드로는 헛웃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애처롭게 울고 있던 루이자가 어설픈 협박을 시도했으니까. 쓰게 웃은 그는 고개를 들고 눈물로 젖어 버린 루이자를 눈에 담았다.
정말 어설픈 협박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루이자가 없어도 살 수 있다. 친구를 잃어 조금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버텨 낼 것이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아니다. 그가 없으면 에스메랄다도 없다.
“……어쩔 수 없지.”
“뭐…….”
“나라도 기억하는 수밖에.”
이를 악문 페드로가 상체를 세웠다. 가녀린 허리를 타고 올라간 손이 볼록한 가슴을 움켜쥐자마자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으앙! 항!”
이 감각, 그를 온전히 집어삼킨 채 우물거리는 이 감촉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부드럽게 뭉개지는 가슴도, 달큼한 유두도, 은은하게 풍겨 오는 살 내음과 황홀한 교성까지 모두 그가 기억할 것이다. 혹여나 죽음이 다가와 그를 데려간다 해도 잊지 않고 떠올릴 것이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간직하리라.
“하아, 루이……!”
페드로는 저를 기억해 주겠다는 그 짧은 말을 해 주지 않는 루이자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녀의 눈이 젖어 버릴 때마다 핥아 주었는데도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리기만 했다. 어쩌면, 그건 루이자가 아니라 그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그날 밤, 조심스럽게 창문을 넘어 침실로 찾아온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 이유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외출했던 사이 황실에서 중앙군의 복귀 명령이 내려왔더군.”
서부 대란과 리퀘나 함락 때부터 중부 밖으로 파병되었던 2만의 병력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실상 에스메랄다가 황태자를 방해하며 1만 가까이 줄였고, 그 후로 3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사자가 계속 나왔으니 돌아가는 이들의 수는 7천에 조금 못 미치겠지만.
2만이 출정하여 7천이 남았다니. 거기서 죽은 이들 중 1만 이상이 황태자의 탓이니 돌아간 이들이 동료들에게 무어라 쑥덕거릴지 참으로 기대된다. 놀랄 것도 없는 소식이다. 에스메랄다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니까.
황제는 이미 소진한 중앙군의 숫자를 회복하기 위해 병력 모집을 시작한 상태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에 맞춰 중앙군 내부에 사람들을 넣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일부는 그녀가 따로 키우고 있던 세작들이고, 또 다른 일부는 신전의 뒤를 캐는 데 열중했던 북부의 용병단이다.
북부의 붉은 하늘 용병단은 몇 년이라는 훈련 동안 대부분 마나가 신체 강화에 쓸 수 있는 평기사 수준으로 자란 상태. 중앙군 내부에 병사로 들어간 그들은 훗날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중앙군의 속을 들쑤실 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을 숨기며 침대 위로 올라오고 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르페시스가 흠칫거리며 행동을 멈추었다.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린 채 허리를 숙이며 이불을 짚었던 그 자세 그대로.
“왜… 그러나?”
그의 목소리 한 번에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을 휘젓던 생각들이 흩어졌다. 그녀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의 상황이 조금 신기해서?”
“무엇이?”
에스메랄다는 정말 그가 몰라서 저러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정사는 치르지 않으면서 같이 자는 건 당연하게 하잖아?”
“저, 저, 저…….”
“정사.”
이 주제만 나왔다 하면 와인처럼 붉어져서 말을 더듬기는. 올해 스물이 된 그가 저렇게까지 순진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현세대는 여인이나 사내를 가릴 것 없이 보통 성년을 넘으면 호기심에서라도 이성과의 육체관계를 가져 보는 이들이 많은 편이었다. 미혼의 이들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풍습이 사라진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많은 미혼자들이 교제를 하며 연인 사이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뿐이겠나?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중앙 사교계에서는 관계를 가진 것을 자랑처럼 언급할 텐데. 기혼을 한 이들 중에서도 정조를 중요시하지 않는 이들이 꽤나 많고. 정부와 첩을 대놓고 끼는데 정조는 무슨.
“계속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 거야?”
에스메랄다는 침대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는 채로 굳어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제야 아르페시스가 머뭇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자리를 잡고 눕는 그의 품을 파고들자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오지 말라는 의미인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잠잠해질 기미가 없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럴 거였으면 네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부터 막지 않았을까?”
“그건 그런데…….”
그의 큼지막한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 중에 그의 단단한 복근 위에서 손장난을 쳤다. 옷 위로 손가락이 원을 그리다가도 제 배와 달리 폭폭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이 신기해 눌러 보기도 했다.
그런 손장난이 이어지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을 쥔 채 가닥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땋아 보고 싶다기에 가르쳐 줬더니 아직은 엉성한 솜씨였다. 수정 마도구에서 페드로가 그녀의 머리를 땋아 주는 걸 봤다나 뭐라나. 대체 페드로는 수정 마도구를 왜 전선까지 가져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없는 것에 흥미를 느끼며 만지작거리다 보면 수마가 그들을 찾아오곤 했다. 지난겨울도, 지금의 여름도. 리퀘나에 방문한 이후로 계속 반복되어 온 시간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의 악몽이 변하는 것이 좋았다.
“졸음이 오는가?”
“……응.”
잠들기 직전, 이마에 내려앉는 온기는 그녀가 화마에 휩싸여도 그가 꺼내 줄 것이라는 확답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녀가 안도감에 휩싸이며 수마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꿈 꾸기를, 에스메랄다.”
그가 곁에 있을 때면 악몽에 붙들리지 않고 평온한 꿈속을 누릴 수 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에게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마 그는 지금 사령관실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에스메랄다가 머물던 손님방에서 갈급하고 애절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지만. 에스메랄다는 평소보다 긴 입맞춤에 다리가 풀려 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런 그녀의 몸을 단단한 힘으로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힘으로 그녀를 안아 들고는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 몸을 뉘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입술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에스메랄다를 침대로 데려간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채 깍지를 꼈다. 묵직하나 또한 안정적인 체중으로 그녀를 누른 채, 제 손을 믿지 못해서 꽉 붙들어 둔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갈급하게 입 속을 헤집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몸은 계속 움찔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고작 입맞춤에 불구한데도 아르페시스가 쏟아 내는 열기에 쓸려 갈 것만 같았다.
에스메랄다가 열기에 들뜬 신음성을 흘렸으나, 맞대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몸을 물린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에스메랄다가 숨을 쉬지 못해 그의 가슴을 퍽퍽 때린 후였다.
아쉽다는 듯이 뺨을 비벼 오는 행동에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더 이상의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맞붙은 뺨 때문에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선명했다. 떨림과 함께한 숨결은 거칠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숨기지 못한 정염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아르페시스의 품속에서 축 늘어졌다.
한껏 달구어진 두 사람 사이의 열기가 식어 버리길 기다리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엔 잡다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입맞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다음을 견딜 체력이 될까? 아르페시스가 망설이는 동안 체력을 길러 와야 하는 건가? 스스로의 활동량이 극악일 정도로 적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연무장이라도 뛰어다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에스메랄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 하고 있을 아르페시스가 움직였다. 보통 그가 다시 한번 자제에 성공한 후 하는 행동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 싫었던 건…….”
“아니라니까…….”
확답을 주니 헤실헤실,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 아쉬움이 남는 것처럼 훤히 드러나 있는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훑어봤다. 그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저도 모르게 제 목덜미를 매만져 보았다.
“왜……?”
조금 늘어지는 목소리로 물으니 그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냥…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르페시스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말을 얼버무렸다. 귀를 붉게 물들인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지라 에스메랄다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믿을 만한 놈은 아니라는 생각.”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는 바람에 에스메랄다는 웃음이 터졌다.
“그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허락해 준다. 내가 어떤 놈인지 알면 이러지 못할 텐데…….”
“대체 뭐가 어떻기에 놈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거야?”
몇 번 우물거리며 답을 삼키던 아르페시스가 고해 성사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쿠베트성에서 파렴치한 짓을 한 적이 있다.”
“응?”
“온실에서는 잠든 그대의 입술을 내 멋대로 훔친 적도 있고, 침실에서는 깨어난 직후에는…….”
혼이 날까 싶어 눈치를 보면서도 제 입으로 모든 것을 줄줄이 토설하던 그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메랄다는 무언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처럼, 혹은 당황한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끔뻑거리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왜 이러는지 정말 하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으니까.
“왜?”
“어… 그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삼키는 행동이 참으로 어설픈지라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웃었다.
“할 말이 있는 게 빤히 보인다고. 무슨 일인데?”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재촉에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가 속에 담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몇 번 더 물어보았지만, 계속 별것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을 피하기에 에스메랄다도 더 이상 캐지 않고 물러났다.
그녀는 관저의 입구에서 보자며 창문을 타고 돌아가는 그의 손에 다시 한번 축복을 남겼다. 이제 영지로 돌아가 케니스와의 새로운 접점을 만들 시기다. 아비체룬의 일도 한 번 더 손을 써 두어야 할 것 같고. 지금까지 키워 낸 세작들을 본격적으로 써야지.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손을 써 두어야겠다.
미래와 다음에 대한 의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지만 그녀는 붙들리는 대신 나아가기를 택했다. 머릿속을 차지한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찾아보자. 멈춰 있음으로써 발생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다.
* * *
루이자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통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건 다음에 얘기하겠다는 답과 쓴웃음이 전부였다. 배웅을 하기 위해 나온 페드로의 한쪽 뺨이 붉게 부어 있었기에 어렴풋이, 당장 두 사람의 일이 좋은 쪽으로 풀린 게 아님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지난여름의 귀환길에는 함께 마차를 탔건만, 루이자는 따로 타겠다며 쿠베트의 마차에 올랐다. 침실에서와 달리 형식적인 인사로 배웅하는 아르페시스를 등지고 마차가 움직였다. 멀어지는 관저를 바라보는 내내 에스메랄다는 복잡하기만 했다.
그녀와 아르페시스의 문제처럼 페드로와 루이자의 문제 역시 어렵기만 했다. 뒤따라오는 마차에 타고 있는 루이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곁에 남고자 하는 이유는,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페드로는 에스메랄다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사이가 돈독해진 듯 보이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페드로 본인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에스메랄다에게서 시작된 선택이다. 페드로를 사랑하는 루이자의 입장에서 누이를 위해 그녀를 뒷전으로 미루려는 그가 용납될까?
“그럴 리가.”
에스메랄다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이성 간의 사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서로를 향한 독점욕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져올 수 있는 폐단은 비현실적일 만큼 끔찍한 경우도 많다.
아마 루이자가 출발 전 마차를 따로 타기로 한 건 페드로의 행동 아래에 깔린 그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에스메랄다는 마차의 창문에 고개를 기대었다. 루이자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녀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손을 잡는 것도 결국은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서였다.
만약 페드로의 결정이 아르페시스보다 루이자를 우선시한다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었다. 페드로의 안전은 에스메랄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서 페드로에게 아르페시스의 곁을 떠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루이자와 아르페시스, 둘 중 누가 더 중요한지 고를 수가 없었으니까.
결국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외면하면서 루이자가 희망을 버리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루이자에게 꽤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비겁하기는.
페드로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은 진심이기에, 하루는 그에게 당장 돌아오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페드로 정도의 실력자가 곁에 있으면 아르페시스가 더 안전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하루는 또 비겁한 침묵을 지킨다. 지겹고 힘겨운 고뇌는 도대체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나 보다.
며칠간 각자의 마차를 타고 이동한 두 사람은 남부 군사 지역을 벗어났다. 에스메랄다는 다른 영지에 들러야 할 일이 있다며 일찌감치 따로 이동하기로 했다. 실제로 가야 할 곳도 있고, 루이자가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써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루이.”
두 사람은 가볍고 무난한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길에 올랐다.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는 쿠베트 후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던 에스메랄다 역시 출발을 지시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테노리엘 백작령이 아니라 중부에 있는 황실 직할령 중 한 곳이다. 그곳에 똬리를 튼 채 조심스럽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에스메랄다는 도중에 들른 영지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의복으로 갈아입고 이동 수단을 말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는 텅 빈 채로 록스 백작령을 지나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귀환하게 될 예정이다. 에스메랄다가 올라탄 말이 중부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