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헛된 희망
사 60일부터 서부 연합군으로 차출되었던 테노리엘의 사병이 순차적으로 귀환했다. 연합군으로서 서부 탈환에 참전했던 사병의 수는 전체의 7할, 그리고 돌아온 이들은 그 7할 중 6할을 조금 넘었다. 에스메랄다는 사병의 규모를 회복하기 위한 병력 모집과 훈련을 시작했다.
영지의 평화를 되찾는 대가로 가족과 친구, 동료를 잃은 영지민들은 온종일 추도곡을 부르며 떠나간 이들을 추억했다. 그리고 오늘, 사 75일은 전사자들을 기리는 추도식과 테노리엘이 주관하는 예장이 있는 날이었다.
가족들이 주관하는 장례 절차는 이미 모두 끝났고, 무덤을 유지할 수 있는 봉토를 가진 전사자들은 입관을 거쳐 땅속에 묻혔다. 하지만 봉토가 없는 대다수의 평민들이 취하는 장례식은 화장이었기에, 추도식이 끝난 후 그 절차 역시 진행될 예정이었다.
테노리엘이 주관하는 예장을 위해 대부분의 유가족은 전사자의 시신을 태우지 않고 영주의 관리하에 두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기다림이 끝날 것이다.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유가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함께 참전한 전우들의 고별사가 이어지고, 유가족들의 눈물과 함께 추도곡이 흘러넘쳤다. 마지막 고별사를 읊은 건 오늘의 행사를 주관한 테노리엘이었다.
“떠나기 위해 내딛는 걸음 앞에 명예를, 떠나기 위해 걸어야 할 길 위에 경애를, 그리고 떠나고 남은 발자국 위에 은공을 담으니, 부디 주신의 품에서 나의 기도와 함께 평안하기를.”
조금은 앳된 목소리가 높고 높은 가을 하늘을 채우며 마지막을 고한 직후, 테노리엘의 사병들이 시신이 안치된 관 쪽으로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화창한 오후에 타오른 불은 검은 연기 속에 떠나갈 이들을 담았고, 해 질 녘이 되었을 때 모두가 떠났음을 알리며 하얀 연기를 토해 냈다.
그동안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읊는 낮고 음울한 추도곡이 끝을 모르고 그 장소를 채웠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었다. 그저 몇 시간이 넘도록 꼿꼿하게 서 있는 이들이 있을 뿐. 검은 베일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까지 차오른 검은 의복으로 피부를 가리고, 검은 장갑으로 손끝마저 꼭꼭 감춘 사람들.
그건 에렘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떠나야 할 이들이 돌아보지 않고 이미 끝나 버린 생애를 그리워하며 머뭇거리지 않도록, 생기를 띠는 모든 것을 감추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전통. 이제는 사장되어 간소한 복장으로 생략되는 일이 많음에도 굳이, 그 전통을 지켜 전사자들을 떠나보낸 테노리엘의 후계들.
그칠 줄을 모르는 추도곡 사이에서 하얀 연기마저 사라졌을 때, 여린 소녀 한 명과 한창 자라고 있는 소년 두 명이 등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의 걸음을 좇으며 움직였다. 서부 연합군이 완전히 해산한 날로부터 닷새 전의 일이었다.
* * *
대륙의 최북단, 험준한 산맥과 매서운 눈보라가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매 순간 위협하는 나라는 언제나 하얗기만 하다.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도 여느 왕국보다 적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데녹 제국.
사람의 키보다 눈이 높게 쌓이는 겨울에는 근방의 마을과도 교류가 쉽지 않은 그 땅 위에서, 중년을 지나 장년이 되어 가고 있는 사내가 뺨을 긁적였다. 새하얀 눈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그는 두꺼운 가죽 외투를 입고 커다란 등짐을 지고 있었다.
“대체… 여긴 또 어디인고…….”
스스로를 길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건만, 어째서인지 그는 데녹 제국에 온 이후로 길을 잃는 일이 잦았다. 정말 사시사철 1년 400일 내내 사방이 온통 하얗기만 하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잘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4년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이 눈 나라는 적응을 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사내는 제 발자국을 되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눈이 내려 흔적이 사라지기 전 다시 돌아가 새로 길을 잡아야 할 모양이다. 데녹 제국에 들어선 후에 종종 있던 일인지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었다. 최악은 눈이 내려 발자국마저 찾지 못하는 것이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가 밟고 가는 땅을 감싼 하늘이 청명하기만 했으니까.
사내는 제 발자국을 따라 왔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그가 4년 전에 도착한 데녹 제국은 마을이나 영지 간의 교류도 타국보다 적은 편이며, 한다 해도 무척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데녹에 오래도록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의 이동이 제한되는 만큼 그의 행적을 듣고 득달같이 쫓아올 이들의 이동도 제한되니까.
돈을 받지 않고 신력을 사용하는 것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취급하는 이들은 그가 한곳에 오래 머물 때면 빠짐없이 찾아오곤 했다. 겉으로는 신력을 사용하고 금전을 요구하지 않는 그의 행동을 자애와 선행으로 포장해 칭찬한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사내를 방해물, 혹은 위험 분자 정도로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돈을 받지도 않고 신력을 사용하는데, 그들은 돈을 받아야지만 신력을 사용하니까.
그의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무서운 것이다. 사내의 행동으로 그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체계가 흔들릴까 봐, 그리하여 언젠가 무너져 내릴까 봐. 실제로 몇몇 이들은 사내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언제나 위험에서 살아나 다시금 순례의 길을 밟을 기회가 왔지만.
사내는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준 기연과 우연, 도움 등을 모두 저가 믿는 신의 보살핌이라고 여겼다. 벌써 몇십 년째 순례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 그가 신의 보살핌 아래에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오들도 미련한 종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제 발자국을 되짚어가던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잡아먹혔고, 커다란 등짐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사내가 데녹에 오래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데녹은 무언가를 재배하는 것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얼어 버린 땅에서 약제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약초의 대다수를 수입해 오는 상황. 그 때문인지 약촛값이 타국보다 배는 비싸서 많은 이들이 민간요법 같은 불확실한 방법에 의지하고 있었다.
신이 내려 준 힘으로 보살펴야 할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혹한의 환경 때문에 신전을 세워 머무르는 신관들의 수도 적기에 누군가는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내는 4년 동안 데녹에 머물며 순례를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응?”
열심히 발을 놀려 왔던 길을 거슬러 가던 그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뚝 멈췄다. 그는 마른침을 꿀떡 삼키더니 서둘러 신력을 사용했다. 사내는 순례 중 보호해 줄 이도 없이 혼자 다니는 편이었기에 웬만한 상황은 모두 겪어 보았다. 지금 그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오고 있는 커다란 늑대도 처음 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신력은 주신이 내린 힘, 인간과 함께 주신이 창조한 생명체들은 모두 그 힘에 평온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맹수를 만난다 해도 이렇게 신력을 몸에 두르면 공격당하지 않을 수 있다.
벌써 몇 번이고 이렇게 위기를 헤쳐 나왔지만, 제 몸집보다 큰 늑대를 보는 건 꽤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 늑대가 하얀 털 곳곳에 붉은 피를 묻히고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무서운 일이다. 사내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눈에 뒤덮인 수풀 쪽으로 살살 움직인 그는 늑대가 저를 지나쳐 가길 기다리며 생각했다.
“왜…….”
혼자지? 늑대는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다. 이제껏 그가 마주친 늑대들도 모두 최소 서너 마리씩 몰려다녔다. 딱 그 생각을 했을 무렵, 늑대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가 봐 왔던 녀석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덩치는 물론, 대부분의 털을 붉은 피로 칠한 녀석은 위협적이었다.
보통 이렇게 신력을 몸에 두르면 맹수들은 그를 잠시 주시하다가 떠났다. 그런데 이놈은… 공격을 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평소와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자 문득 겁이 났다.
“어이고!”
늑대가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렸을 때는 그 공포가 극에 달했다. 신력을 둘렀는데도 공격을 당하다니! 사내는 몰려오는 아찔함에 눈을 감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응?”
그리고 곧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늑대가 그의 외투를 물고서는 잡아당기고 있었으니까.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늑대가 사내를 확, 끌어당겼다.
“어, 어이고!”
강한 힘에 딸려가 눈 위에 철푸덕 넘어진 사내는 그대로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이, 이놈이! 이놈이 왜 이러나!”
당황한 사내가 말을 더듬으며 소리를 지르니 늑대가 움찔거렸다.
“이놈, 이, 이거 놓아라!”
이어서 발버둥까지 치자 정말 놀랍게도 늑대가 그를 놔주는 게 아닌가?
“이게… 이게 무슨…….”
늑대는 다시금 옷깃을 문 채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따, 따라오라는 게냐?”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물었다. 말을 하고 나서는 짐승에게 뭘 하는 건가 싶어 잠시의 회의감이 들었지만… 곧 사내는 천천히 늑대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늑대가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갔다.
“이, 이놈아! 천천히 가거라!”
이런다고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사내는 다시 한번 회의감을 느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느 순간 그의 주변에 있는 눈은 붉은 핏물에 젖어 있었고 시체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사내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늑대의 꽁무니를 쫓아갔다. 그의 뜀박질은 조금 전보다 훨씬 급박해져 있었다. 혹시 부상자가 있어서 저를 데려가는 건가? 늑대가? 머릿속이 복잡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친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필요하니까.
곧 사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칭얼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방에 시체가 널브러진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늑대가 시체들 틈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려오는 방향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늑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늑대의 발치에 있는 곳에선 하얀 입김이 희미하게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 * *
연합군의 전사자를 기리는 추도식이 있었던 날로부터 약 20일이 지난 지금.
“영애!”
에스메랄다는 일전에 했던 약속대로 루이자를 백작 성에 초대했다.
“어서 와요, 쿠베트 영애.”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에스메랄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쌍둥이와 함께였다.
“영애,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머무시는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쌍둥이가 루이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에스메랄다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무실에서의 일 이후 오멘은 복잡한 표정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페르멘은 아니었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발견하면 곧장 해맑게 웃으며 달려오는 페르멘을 보며 눈물을 뚝, 뚝 떨구기도 했다. 오멘과 달리, 떠나지 않겠다 말해 주는 그에게 또 한 번 흔들리는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높은 방벽을 쌓고 견고하게 버티고자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죠. 이번엔 제가 영애를 대접할 차례이니까요.”
“헤헤, 기뻐요!”
쌍둥이와 인사를 마친 루이자가 에스메랄다에게 팔짱을 껴 왔다. 스스럼없는 접촉이 놀랐으나 그녀는 움찔거리기만 했을 뿐 루이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일단 루이자의 도움으로 아르페시스와의 관계를 감춘 것은 사실이니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을 위해 루이자가 요구하는 게 이런 친근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제공할 생각이었다.
응접실에서 루이자를 가볍게 대접한 에스메랄다는 다시 집무실로 올라갔다. 아쉽게도 그녀는 할 일이 많은지라 루이자를 위해 하루의 전부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머무는 열흘 내내 마찬가지이니 에스메랄다가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쌍둥이가 루이자를 대접할 예정이다. 그녀는 테노리엘이 초대한 손님이었으니까.
가족들을 밀어내고 원망하면서, 정작 그들의 도움은 당연하게 받는 현실이라니.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숨기지 않은 에스메랄다가 언제나처럼 다나와 첸을 대동한 채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혔다.
* * *
루이자가 백작 성에 도착한 지 닷새가 지났을 무렵, 에스메랄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저기, 영애.”
함께 두던 체스 게임이 끝나자 루이자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 때문이었다.
“저… 그러니까요…….”
루이자는 머뭇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손을 꼬물거렸다. 이윽고 나온 말은 에스메랄다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였다.
“그… 테노리엘 경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루이자의 모습에 에스메랄다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네,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지난날과 달리 최근의 에스메랄다는 수정 마도구가 도착하면 곧장 확인하곤 했다. 이전의 것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수정 마도구를 쌓아 놓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확인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아마도 페드로는 잘 지낼 것이다. 아르페시스도.
“그, 제가 듣기로는요오…….”
어디를 봐도 수줍어하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루이자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테, 테노리엘 경이 아직… 그러니까…….”
“……아직 약혼은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알기로는 정인이 따로 있지도 않으시고요.”
쿠베트성에서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혀 생각조차 못 했는데 어쩌다가?
물음표에 물음표가 이어지던 와중 에스메랄다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르페시스와의 첫 밀회를 루이자에게 들킨 다음 날, 분명 그녀는 페드로를 힐끔거리며 속내를 털어놓았었다. 그 외에 온실에서 아르페시스를 만났을 때도 루이자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그녀가 몰래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분명 페드로와 함께했기 때문일 터. 그때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이 생겼나 보다.
“아, 그, 그렇군요. 그렇네요. 다행… 아니, 다행이 아니라!”
페드로는 올해 22세, 루이자는 16세. 나이 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성인이 되었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귀족들의 혼인은 나이로 엮이는 게 아니니까. 아니, 벌써 혼인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너무 빠른가? 에스메랄다는 당혹을 숨기기 위해 말을 아꼈다.
이게 쿠베트 후작과 테노리엘 백작 사이에 얘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루이자와 페드로 간의 사적인 일인지, 그도 아니라면 한쪽의 일방적인 호감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에스메랄다가 아는 페드로는 전선에서 죽던 그 날까지 특정한 여인과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루이자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손을 꼼지락거렸다.
“걱정이… 되시면 먼저 연락을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형제들과 함께한 모든 시간에서 그들의 배필이나 연인 문제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에스메랄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더니 루이자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이미 해 보았으나 결과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럴 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지? 에스메랄다는 당황한 채로 다시 침묵했다. 도와… 주어야 하나? 방관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루이자와 엮이면서 대처를 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요…….”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루이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에스메랄다가 느끼는 곤란함의 정도가 심해졌다. 그녀의 예상대로 루이자와 페드로의 접점은 쿠베트성에서 열렸던 연말 연회 무렵이었다. 그와 단둘이 보낸 시간이 꽤 많아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는 말로 서문을 연 루이자의 얘기는 무척이나 길었다.
“그런데 봄에 그분이 출정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며칠을 멍하니 보내다가 덜컥 무서워졌다나?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에렘을 위해 헌신하는 건 분명 훌륭한 일인데… 다치실까 무섭고, 혹여나… 혹시나 싶어서 매일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다 보니 그를 향한 감정을 자각했고, 봄이 끝나기 전에 서신을 보냈단다. 하지만 답신이 오지 않아서 그와 연락이 닿을 만한 에스메랄다에게 말을 꺼내 본 것이다. 루이자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에스메랄다는 결국 침음을 삼키지 못하고 흘려 냈다. 그녀도 지금 페드로와의 관계가 애매한 상황이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인 줄은 아는데요, 그래도 물어볼 만한 사람이 영애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우는 루이자를 대체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건지…….
“너무하잖아요! 사람 마음을 가져갔으면서 답신 한번 주지 않다니!”
페드로를 함께 흉보아야 하나? 아니면 그래도 오라비라고, 편을 들어야 하나?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페드로에 대한 원망인지, 그를 타박하는 루이자에 대한 반감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나 말지…….”
으아앙, 하고 울어 버리는 루이자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벙어리가 되었다.
“저는, 저는 테노리엘 경도 저에게 조금은 관심이 있으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요?”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르니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분명… 제가 아름답다고… 흑, 사내의 마음을 빼앗아 갈 만한 사람이라고… 그러면서 막 뺨도 쓸어 주고! 짝사랑 같은 건 할 필요 없다고 위로도 해 줬다고요! 절 보고 막 심장이 떨리게 웃어도 주고!”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의 시선을 피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녀의 말만 들어 보면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이런 일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말을 듣고 결론을 내릴 만한 것이 아니다. 아니, 뺨을 쓸어 주었다면 페드로 쪽에서도… 그냥 어린 영애가 짝사랑에 힘들어하는 걸 위로해 준 걸까?
그녀 스스로의 연애도 복잡하고 힘든데 루이자 쪽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정말 웃긴 건 뭔지 알아요?! 답신도 보내지 않으면서 제 생일에 대뜸 선물을 보낸 거 있죠? 그때 정말 너무 화가 나서……!”
루이자의 생일은 여름이다. 가문의 이름으로 아르페시스의 생일 선물을 보낼 때 루이자도 비슷한 시기라 함께 보냈던 기억이 있다. 눈물을 거두고 분개하던 루이자는 또 얼마 가지 않아 시무룩해졌다.
“그건 그냥… 안면이 있는 이에게 보내는 예의상의 선물이었을까요?”
“……글… 쎄요.”
테노리엘의 가문 차원에서 챙겼으니 굳이 페드로가 개인적으로 챙길 이유가 없기는 한데…….
“……미안해요. 영애 앞에서 형제분을 헐뜯으려던 건 아닌데… 너무 복잡해서…….”
에스메랄다의 입꼬리가 떨렸다.
“……언제 내륙으로 복귀하시는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루이자의 질문에 그녀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에스메랄다의 침묵이 길어지자 루이자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로서는 그녀의 눈물이 꽤나 큰 곤욕이었기에 다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도 오라버니와 그다지…….”
“네……?”
“연락을… 주고받는 편은 아니라서요.”
정확히는, 그녀의 답변 없이 페드로와 아르페시스 쪽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오는 중이다.
“어…….”
루이자는 눈물을 매단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사람 앞에서 하는 거짓말은 힘겨운 법이다. 에스메랄다는 일전 그러했듯, 루이자 앞에서 속내를 털어놔 버렸다.
“제게… 말씀도 없이 떠나 버리셨거든요.”
“출정하시는 걸… 몰랐다는 의미인가요?”
“……네, 어느 날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미안하다는 쪽지와 함께 임명장이 있더군요.”
에스메랄다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그러자 루이자가 나름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웅얼거렸다.
“그런……! 진짜 못된 사람이에요!”
“……그러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페드로의 흉을 보기 시작했고, 대화는 길어졌다.
예정된 시간보다 오래도록 집무실을 비우고 있었건만 에스메랄다는 응접실을 나설 수 없었다. 속에 담은 음울한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버렸으니까.
“영애는… 괜찮아요?”
어느새 옆자리로 옮겨 와 손을 마주 잡은 루이자가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도 전장에 계시잖아요.”
울지 않는 에스메랄다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루이자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괜찮지 않아요. 그냥…….”
에스메랄다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할 때마다 루이자는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냥 버티는 거죠.”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면서,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매일을 버티는 것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분산하며 바쁘게 보내는 게 좋아요.”
“……어째서요?”
“그러다 보면, 심장이 아픈 것을 잊어버린 채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까요.”
페드로가 출정했던 열다섯 살부터, 가족들과 아르페시스가 전장에 있는 10여 년 동안 줄곧 그렇게 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심장의 고통을 잊지 않으면, 살아 숨 쉬는 모든 시간을 그 고통에 잠겨 어둡고 잔혹한 상상을 하며 보낸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은 채 거기에 잡혀 있으면 살아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그렇죠?”
이미 그녀의 눈은 붉게 부풀어 올라 흉해 보일 지경이었건만, 쓰라린 미소로 억지로나마 웃는 루이자는 예쁘기만 했다.
“감정을 마음대로 붙이고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도 잘 안 되네요.”
에휴, 하고 내뱉은 루이자의 한숨에 담긴 것은 에스메랄다의 것과 똑같은 복잡함이었다.
“……그러게요.”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한다면 안전한 내륙에 머무는 사람이 좋을 텐데. 왜 하필이면,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을 사랑해 버린 걸까.
“미련하네요.”
영애도, 저도. 루이자는 에스메랄다가 삼켜 버린 뒷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냥 밉다고 내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도 그분이 보고 싶어요. 왜 저는 이런 사랑만 하는 걸까요?”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기대어 우는 루이자를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그래, 원망과 화를 원동력으로 내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닮은 사람들끼리 체온을 나누며 속내를 토로해 숨통을 틔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사랑하는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해 본다.
* * *
매번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느껴지는 족쇄와 쇠사슬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꿈은 분명하게 아르페시스의 심리 상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대체 일기를 언제부터 쓰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했더니 그와 관련된 꿈을 꾸었다.
「대륙력 1434년 라 80일.
황제는 내 성년식 날 남부 총사령권을 선물이랍시고 쥐여 주었다. 차라리 가서 죽으라고 말하는 게 덜 역겨웠을 텐데.
남부에 도착한 날은 68일, 당일에 곧장 총사령관직에 취임했다. 그날 본부대의 지휘 기사들이 유서를 써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쓸 사람도, 쓸 말도 없어 미적거렸다. 며칠을 미루자 록세트 경이 일기를 쓰면서 할 말을 생각해 보라고 권해 주었다. 유서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텐데……. 일단 쓰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일기라도 시작해 보는데 여기도 쓸 말이 별로 없다.
지금이 여름이라 지휘부가 전장에 나가는 일이 드물다는 게 다행이라고 적어야 하나? 또… 남부군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 며칠 전에 사비를 내어 놓았다. 본부대 지휘관들의 시선이 조금 유해진 것 같다. 호감을 조금 얻은 것 같으니 후에 전투에 참여하면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내 사비를 보고 엄청 놀라는 것 같았는데, 사실 내가 더 놀랐다.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으니까. 뭐, 많든 적든 쓸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 당장 쓸 만한 일은 이 정도가 다일까? 일기는 어떻게 끝내야 하는 거지? 이게 전부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두서없고 정리되지 않아 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남부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그 날, 에스메랄다를 수신인으로 하는 유서를 썼으니까.
또한 남부에 왔던 첫해, 아직 가 보지 못했던 리퀘나의 다른 성들을 궁금해했더니 그곳에 방문해 시찰을 하는 꿈을 꾸었다. 에스메랄다의 첫 리퀘나 방문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꿈은 그의 심리 상태를 일부 반영하기 시작했다.
남부에 도착한 지 1년이 다 되었을 무렵 꾼 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분명히 하루 종일 페드로를 보았음에도 미래에 관한 꿈을 꾸지 않았다. 꿈에 등장한 것은 기억 속에 있는 작은 에스메랄다였고,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그를 난도질했다.
미래에 관련된 꿈이 아니라 에스메랄다가 이별을 통보하고 등을 돌리는 꿈을 꾼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이 스스로의 불안감으로 인해 꾸는 꿈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래에서 그는 에스메랄다와 이어지지 못했기에 이별을 통보받을 일이 없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에스메랄다를 붙들고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구한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는 그의 애원 뒤에 따라오는 것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식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고작 몇 음절이 만들어 낸 짧은 말이건만, 비수가 되어 그를 파고든다.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것을 놔 버리는 것과, 분명히 가졌던 것을 빼앗기는 것의 차이가 그를 옥죄고 있다. 오늘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현실을 마주했다.
에스메랄다를 만나지 못하고, 그녀로부터 어떠한 답도 받지 못한 채, 용서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 그리고 하필이면 끔찍한 꿈을 꾼 오늘 페드로가 오래도록 이어져 왔던 그의 오해를 짚어 주었다.
“테노리엘 일가가 리퀘나에 오는 건 보통 며칠쯤인가? 연말에 온다고 들었는데.”
겨울이 되었는데도 테노리엘 가문에서 보내는 방문 요청이 없어서 초조한 마음에 물어보았다.
“우리? 음… 밑의 두 녀석은 아버지랑 움직여서 보통은 카의 80일쯤에 황도에서 출발하지? 89일이나 90일부터 사나흘 정도 머물고. 영지로 가는 시간도 필요하니까. 나랑 형은 연차를 여기다 몰아 써서… 닷새 정도 더 빨리 움직이고. 자원 부대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든.”
“카의 89일…….”
아직 50일가량이 남기는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리퀘나를 방문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아르페시스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독이던 그때, 페드로가 말을 덧붙였다.
“뭐, 올해는 힘들겠지만.”
뭐? 왜? 아르페시스는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그가 아르페시스를 따라오는 바람에 테노리엘 백작이 황도에서 많이 바쁘다나 뭐라나. 그럼 올해는 에스메랄다를 만나지 못한다는 건가?
말도 안 돼. 그가 무슨 심정으로 리퀘나를 수복했는데! 몰려오는 허탈함에 탄식을 내뱉자 페드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버지가 오신다고 해도 천사는 안 와.”
“뭐……?”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곧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답을 구했다.
“우리랑 따로 교류를 하지 않아서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지 오래됐거든. 올해도 마찬가지겠지.”
그녀가 의무적으로 리퀘나에 오지 않는다면 자발적으로 올 리가 없었다. 지금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는 물론 아르페시스에게도 화가 난 상태일 테니까. 1년에 가깝도록 아무런 답이 없는 것을 보면 빤했다.
일이 그렇게 되다 보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에게 버림받는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강렬한 명제가 그를 장악했다. 모든 것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페드로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웃긴 건, 만약 페드로를 임명하기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페드로가 없었다면 아르페시스는 벌써 몇 번이고 죽었을 테니까. 그녀를 그리워하지도 못한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거나, 마수의 배 속에서 녹아 버렸겠지.
하지만 페드로가 식사와 함께 수정 마도구를 가지고 오면 입가에 억지 미소를 그린다. 괜찮다고, 다 잘될 것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에게 사랑을 고하고 용서를 구해 본다. 하지만 매일 후회와 자책이 커지는 일이 반복되니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찾아왔다. 전장에서의 행동이 변한 게 그 시작이었다.
단칼에 베어 내며 체력 관리를 하던 것과 달리 때때로 분풀이를 하듯 마수를 난도질하고야 만다. 누구에게, 무엇에게 향하는 것인지도 모를 화를 마구잡이로 풀어내는 날이 생겼다. 그럴 때면 부상이 늘었고, 그를 타이르려는 휴고나 페드로와 언쟁을 하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난전이 끝나기도 전에 마나가 고갈되었고 준비해 갔던 마석까지 다 써 버렸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페드로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해야만 했다.
깨어났을 때는 그의 천막이었고 화가 난 것이 분명해 보이는 페드로가 옆에 앉아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거냐? 마나 관리 똑바로 안 해?”
“주의하지.”
고작 열흘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지키지도 않을 말을 대충 꺼내 드는 아르페시스의 태도에 페드로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차라리 빨리 죽지 그래? 그럼 나도 천사에게 돌아갈 수 있고, 좋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 그대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혈육이니 용서를 받기 쉬울 것 아닌가?”
친분을 아래에 둔 가벼운 다툼이 아니었다. 감정적인 비난과 모욕적인 언사가 오고 가는 적나라한 언쟁이었다. 참고 이겨 내 보려 했음에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부군 총사령관직에 취임한 이듬해,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버림받는 꿈을 스물네 번이나 꾸었고 매번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나날이 그가 품은 불안감은 커지기만 했다. 페드로와 함께 시작한 수정 마도구 보내기에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그의 불안감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초조함이 그를 갉아먹고 있으니 차분함과 인내가 닳아 없어지고 불안에 잠식당해 버린다.
다시 1년이 지나 다음 해가 왔을 때, 아르페시스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말을 하면 타인을 해친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기 시작한 것이다. 페드로가 그걸 보고 미련한 놈이라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무시하기 위해서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타인과 대화를 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이 줄었고 홀로 곱씹으며 에스메랄다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늘었다.
남부군 총사령관직에 오른 지 3년 차, 아르페시스는 스스로가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가 멀쩡해지기 위해선 에스메랄다가 필요한데 그녀는 그곳에 없었으니까.
페드로를 전장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그는 에스메랄다가 보내는 달콤한 서신들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고통 따위는 알지 못한 채 마수의 배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죽음이 나았을 것이라고 여겨 볼 만큼 끔찍한 시간이 지속되었다.
오늘도 수정 마도구를 보내 보지만 이번에도 에스메랄다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아르페시스를 용서해 주지 않았고, 그는 아직도 에스메랄다에게 용서받지 못했다. 희망은 부서지고 잔인한 현실만이 그를 반긴다.
* * *
아르페시스와 페드로가 보내오는 수정 마도구는 여전했고, 에스메랄다의 침묵 역시 변하지 않았다. 가을은 겨울이 되고, 겨울은 다시 봄이 되어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기만 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는 것도 있는 법. 1434년의 봄, 황태자는 국혼을 올렸다. 같은 해 성인이 된 오멘은 아레스 대신 후방 물자에 손을 보태기 위해 황도로 돌아갔으나 페르멘은 영지에 남았다.
바의 달이 시작되고, 오멘이 관료 시험에 합격해 군사부 재무 관료로 나서자마자 아레스는 관직을 내려놓고 전선으로 향했다. 가문의 사병 중 추가로 자원한 병력을 이끌고 떠난 그의 출정이 에스메랄다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복잡하고 괴로운 와중에도 에스메랄다는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미르베체 백작가에 차곡차곡 빚을 쌓아 두었고, 그들이 인장을 찍은 계약서나 어음이 보다 많은 금액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나와 에스메랄다가 열심히 펜대를 놀려 계약서의 숫자와 조항들을 살짝살짝 바꾼 덕분이었다. 그렇게 조작된 계약서는 막 활동을 시작한 에스메랄다의 개인 세작들이 바꿔치기하는 등, 열심히 일을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도미르베체의 히사르 상단은 황도에 있는 사치품 상단들이 쪼개어 먹었다. 그 사치품 상단이 모두 에스메랄다의 것임은 당연하고.
“황도의 장신구 상단 쪽에서 새로운 상품을 선보이는 게 어떨까요? 최근 황실과 연이 깊은 귀족들이 연회를 자주 여는데… 이 정도 빈도면 새로운 장신구를 구매해야 해요. 같은 장신구를 자주 끼고 나가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진행하렴.”
다나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두말하지 않고 허가를 해 주었다. 귀족들의 사치를 자극할수록 에스메랄다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의 규모가 늘어난다. 그들이 돈을 쓰게 만드는 건 결국 에스메랄다의 주머니를 불려 주는 일이다.
황도의 상단주들은 대개 기회가 없어 날개를 펼쳐 보지 못했던 이들이다. 야망이 있으나 가진 권력과 세력은 없는 하급 귀족들이다. 에스메랄다는 돈과 야망에 혹한 그들에게 투자했고, 그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며 에스메랄다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 그들의 신분은 부채를 상권으로 양도한다는 계약서가 나왔을 때 위조를 주장하던 도미르베체가 승기를 잡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힘이 없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귀족이기에 재판이 벌어졌을 때 증인과 증거가 정확하다면 무작정 도미르베체의 편을 들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증인이 도미르베체 내부의 행정관, 보좌관, 상단주 등이라면 승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빤하지.
계약 당시 백작 부인을 비롯한 이들이 분명 조항을 확인했으며 그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라는 증언이 무수히 쏟아졌다. 그들 모두가 에스메랄다에게 뇌물을 받거나 협박을 받아 위증을 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위증을 위해 도미르베체 쪽에서 그녀가 매수한 증인들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어야만 했고, 성공했기에 지금의 결과가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선 아브람 백작의 지지도 한몫했다. 그는 도미르베체와 혼인 동맹을 맺고 있는 테뷔르 후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0여 년 만에 황도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 그는 도미르베체의 행태를 비웃고 다녔다. 그런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쌓은 기반은 에스메랄다가 14세가 되었던 여름에 시작한 일과 합쳐 더 커다란 발판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가을의 수확을 앞두고 금권을 내세워 바란 상단의 거래처를 빼앗아 오는 일을 진행했다. 겉으로 보자면 밑에서 아등바등거리던 상단들이 합심하여 바란 상단을 물어뜯은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루그레디안이 아직 테메프 상단을 통솔한 건 아니지만, 상단을 관리하던 형제에게 정보를 속살거려 주었다.
그는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가문의 이익이니 뭐니 하며 정보의 대가로 사비 증액을 요구했다. 그런 사전 작업을 거쳤기에 테몬 후작의 장남이 그 판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테메프가 먹는 것은 곧 루그레디안의 것이 될 터, 에스메랄다는 테메프의 참전을 제한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존 수입 공물 시장에서 1강 3중 체제는 무너졌다.
바란의 아래에서 다수의 상단이 시장을 분할해 차지했고, 그 상단 모두가 에스메랄다의 손길에 엮여 있다. 물론 케니스가 솔루베르 공작 성을 습격해 창고를 털어 주었기에 더 수월했던 일이다. 그 일로 반군의 수배가 강화되고 중앙군의 일부가 그들을 찾기 위해 대륙 전역에 풀렸지만…….
실테르와 연결점을 공고히 한 아브람 백작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는 상태다. 조만간 거처를 옮기긴 해야겠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아가씨, 알그레노 쪽의 세작에게서 병력 차출이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번엔 또 어디를 털러 가려고? 첸의 보고에 에스메랄다는 혀를 차면서도 서둘러 깃펜을 놀렸다. 잔소리와 화를 그럴듯하게 꾸며 낸 서신이 완성되는 건 금방이었다. 케니스는 에스메랄다가 보내 주는 식량을 받으면서 그녀가 하는 만류는 일절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반군 세력을 휘하로 통합하는 작업에 열을 올리며, 북부에 터를 둔 황제파 세력의 영지를 유린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해 금전을 털고 사병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등, 본격적인 반군의 행보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에스메랄다가 바라는 일인 줄도 모르고.
지난겨울 리퀘나를 지켜 내는 것에 성공한 남부군은 여름이 되자 다시 전선을 밀어냈고, 그 과정에서 반군에게 접촉하는 움직임도 다수 포착되었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이번 해에 내부 면책을 받고 복귀하는 병력은 3천. 상황이 바뀌었으니 숫자 역시 바뀌겠지만, 접촉 자체는 변하지 않으리라.
겨울이 오면 다시 힘든 전투로 시간을 내기 어려울 테니 추가 접선을 통해 복귀하는 수는 주춤할 것이다. 그사이 케니스를 위시한 반군은 계속 흩어져 있는 이들을 통합하며 규모를 키워 나갈 예정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는 어리숙한 연기를 지속했다. 케니스가 그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후작님께서 영지 전권은 충분히 장악하신 모양이네요. 알그레노 쪽에 내어 줄 주둔지 정리가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그녀가 15세가 된 올해의 봄, 루그레디안이 후작 위를 이었다. 그의 부친과 형제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은 것이다. 독에 중독되면 지속적인 신력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본인들의 증상을 감기 기운으로 오인한 그들은 단발적인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며칠 후 고열이 시작되었고, 정확히 8시간 만에 사망에 이르렀다.
오람은 열이 들끓기 시작하면 신력 치료를 한다 해도 생존 확률이 낮은 독이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신력 치료는 체력을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니까. 에스메랄다가 테몬 후작가의 테메프 상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배경이었다.
여러 상황과 배경이 겹쳐 에스메랄다는 15세의 여름이 되었을 때 수입 곡물 시장의 8할을 모조리 차지했다. 에렘 내에서 도는 곡물의 4할가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모두 에스메랄다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아는 이는 몇 없었다. 상단주들조차 모르는 것을 누가 알겠나?
그렇게 내전이 일어난 후 병력을 먹여 살릴 물자 보급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이제 루그레디안이 영지의 전권을 가졌으니 북부의 이곳저곳에 분산되어 있던 케니스의 병력이 모여들 땅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테노리엘 백작은 그녀의 움직임을 파헤치기 위한 시도를 지속했다.
계속 백작이 자신의 뒤를 추적해 일을 망치게 둘 수 없었던 에스메랄다 역시 반격에 나섰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작년 겨울,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급 용병들에게 아레스의 암살 의뢰를 했다. 마나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하급 용병 3명이 아레스를 이길 수도 없건만, 가족을 위협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에서 오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실효가 하나도 없는 행동 이후 테노리엘 백작의 움직임이 주춤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잠시 행보를 멈춘 사이 쉬지 않고 그를 공격해 들어갔다. 서부 대란이 일어났던 해의 겨울, 뒷골목을 파헤치고 다니는 테노리엘 가문의 세작들을 공격한 이후 에스메랄다는 백작과의 정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런저런 일 중에 가장 좋은 소식은 라그나가 생각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 구현이 되는 실드 마도구를 비롯해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마탑의 고위 마법사에게 수식을 빼앗긴 채 쫓겨났던 연구 마법사들이 라그나의 도제로 들어온 후 생산이 조금은 수월해지기도 했다. 모든 것은 그녀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가족들과 아르페시스에 대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리디!”
그 모든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 루이자와의 교류는 생각보다 길고, 깊어졌다. 진심을 토로하며 함께 힘들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루이자는 자리를 쉽게 비우지 못하는 에스메랄다를 위해 계절마다 테노리엘성을 방문했다. 나무 그늘 속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루이자를 찾아 움직였다. 수심이 얕은 호수의 가장자리를 맨발로 거닐고 있던 그녀가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계속 거기 있으면 내가 끌고 올 거예요! 빨리 와요!”
활동적인 것과 거리가 먼 그녀는 루이자와 어울릴 때면 체력의 한계를 쉽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휩쓸리듯 함께해 버리고야 만다. 점점 심해지는 더위에 지쳐 그늘 속에 있던 에스메랄다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산을 들어 줄게.”
곁을 지키고 있던 페르멘이 따라 일어나며 양산을 펼쳐 주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언제나 그렇듯 그를 무시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 있다.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의 곁으로 다가가 신발을 벗고 치마를 부여잡은 채 물속을 거닐었다.
“어, 이거 예쁘네요.”
조약돌을 하나 줍는 루이자와의 대화는 에스메랄다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는 대화는 각자가 사랑하는 사내들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한마디로 마음껏 험담을 할 수가 있어서 속에 담긴 울분이 조금 풀어진다고 할까?
“올해도 전하께 따로 선물을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여전히 페드로에게서 답신을 받지 못함에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어떠한 연락도 하지 못하면서 아르페시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 사이에선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네.”
“수정 마도구는 여전히 똑같아요?”
“네, 사람의 염장을 지르는지 아주 잘 지내더군요.”
교류를 이어 왔던 2년여의 시간은 루이자가 에스메랄다의 입이 상당히 걸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 그런 염장이라도 질러 줬으면 좋겠네요. 계속 무시나 하고, 미워 죽겠어요.”
그런 에스메랄다를 닮아 루이자의 입도 아주 조금씩, 걸어지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팔짱을 껴 오는 루이자의 행동은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이럴 거면 선물을 보내지 말든가.”
그녀는 올해도 페드로가 보낸 선물을 받았다. 무려 세 번째. 지금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사파이어 장신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을 괴롭히기라도 하는 건지 페드로는 루이자를 거절하면서도 계속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올해도 변함없이 루이자에게 선물을 보낸 것을 보고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심리에 대해 확답을 내렸다. 그것을 루이자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기까지 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맞을 테니까. 호감은 있으나 본인이 전장에 있는 이상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다음번 보내는 서신에는 욕을 좀 써야겠어요. 읽기는 하겠죠?”
“한심한 겁쟁이에게 어울리는 단어를 추천해 줄까요?”
루이자와 함께함으로써 정말 좋은 건 페드로의 험담을 실컷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르페시스의 험담도 당연하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리디에게 그렇게 달콤하게 구셨으면서 뒤통수나 때리고. 전하도 생각만큼 멋진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얻어맞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은데, 방법이 마땅치가 않네요.”
이렇게 험담을 하면서도 그녀들은 결국 두 사내에 대한 감정을 접지 못하고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그래도 무사히 여름이 와서 다행이에요.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요.”
여름은 마도구 등을 대거 투입해 안전한 원거리 토벌을 하는 시기다. 열기에 지쳐 자리를 잡고 주저앉은 마수가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상자가 가장 적은 계절로 아르페시스와 페드로 같은 지휘부는 전장에 나가는 대신 행정 처리에 주력하게 된다. 사실상 그들이 가장 안전한 계절이라는 의미였다.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의 말에 공감하며 말문을 닫았다.
그 무렵 물가를 찰박거리며 걷는 그녀들의 걸음 소리 옆에 이질적인 것이 끼어들었다. 에스메랄다의 걸음이 멈추자 함께 걷던 루이자도 멈춰 섰다. 그녀들의 시선이 호수로 진입하는 통행로 쪽으로 향했다.
“말……?”
말발굽 소리였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호수는 테노리엘의 직계나, 그들의 손님만 들어올 수 있는 휴양지 같은 곳이다. 언제나 경비병이 출입을 통제하며 인근을 지키는 곳에 들어올 수 있는 건… 급한 보고라도 올라왔나 싶어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첸에게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쥐여 주고 왔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까워진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에스메랄다의 팔짱을 끼고 있던 루이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도 희게 질렸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 사이로 나 있는 통행로를 지나 모습을 드러낸 건 그녀들이 아는 사람이었다.
라의 달에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에스메랄다와 똑같은 색채의 금발을 가진 청년. 생각을 하고 움직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내달렸고 말에서 내린 사내는 그런 그녀를 번쩍 안아 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천사야.”
페드로, 그녀를 기만하고 떠났던 기사가 돌아왔다.
* * *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에 안겨 울다 지쳐 정신을 잃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침대 맡에 앉아 있는 페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깼니?”
다정한 인사 뒤로, 페드로는 혹여나 에스메랄다가 오해할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전선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테노리엘 백작이 과거에 그러했듯 바쁘지 않은 시기에 휴가차 내륙으로 잠시 돌아온 것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얇은 여름 이불 속에서 또 눈물을 흘렸다. 타인의 가족을 죽음으로 밀어 넣어도 그녀의 가족만은 품고자 하는 이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돌아온 페드로를 보자마자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 안겼는데, 어떻게 포기하겠나.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을 놔 버렸다. 어차피 지옥에 갈 것인데 더한 짓을 한다 해서 뭐가 달라질까. 타인의 가족을 죽여 놓고 그녀의 가족은 죽지 않기를 기원한다.
“오라버니가…….”
“응?”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페드로의 옆에서 에스메랄다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미워요.”
“…….”
“미워서, 죽을 것만 같아.”
메마르지 않은 눈물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였다.
“말도 없이 오라버니를 데려간 아르페시스는 더 미워. 두 사람 모두 전장에서 죽어 버리라고,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
“나는 이렇게 힘든데, 멀쩡하게 지내는 모습이나 보내고.”
에스메랄다의 시야가 선명해지는 일은 없었다. 눈물로 인해 계속 일렁이기만 했으니까. 페드로의 커다란 손이 눈물을 떨구기만 하는 에스메랄다의 눈가를 덮어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다시 갈 거라고요?”
“……그래.”
“이럴 거면 아르페시스와 함께 있을 시간 따윈 만들어 주지 말든가!”
“…….”
“속 시원하게 그를 원망할 수 있게 해 줬으면 좋았잖아!”
에스메랄다는 곁에 있던 베개를 페드로에게 집어 던졌다. 여전히 그에 비해 작은 손으로 뺨을 때려 주기도 했다. 속에 담은 채 키워 오기만 했던 화를 모조리 풀어냈다.
“그런데 가장 끔찍한 건…….”
“…….”
“두 사람을 원망을 하는 저였어요!”
페드로는 그저 덤덤한 눈으로 에스메랄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라진 시간에서 아르페시스가 남부로 간 건 여름이었다.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남부군의 총사령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안전한 여름도 아니었고 에스메랄다가 벌인 일 때문에 평소보다 더 위험하기까지 했었다.
중형 마수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겨울과 봄에 남부에 진입하다니, 그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르페시스와 페드로는 그것을 막기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원망을 거두지 못하는 스스로의 옹졸함을 마주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화를 꺼내 들었던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과하지 못했다. 과거에 모친의 연주실에서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어렵다. 현실은 결코 그녀에게 다정하지 않건만, 페드로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 * *
에스메랄다가 눈물을 거둔 것은 하늘이 까맣게 물든 후였다. 하루를 완전히 날려 버린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곱씹으며 퉁퉁 부은 눈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결정이 시급한 일은 없었기에 오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눈을 부릅뜨려고 해 보아도 퉁퉁 부은 눈매 때문에 시야가 좁았다. 침실로 올라가기 위해 움직이던 그녀가 멈춘 건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대화 때문이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잠깐, 어디를 가요? 아직 제 얘기 안 끝났어요!”
페드로와 루이자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일 제가 따로…….”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확실히 거절을 하라고요!”
페드로가 다급히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건 에스메랄다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만약 페드로가 루이자에게 정말로 호감이 있고, 지금 그녀의 마음에 긍정적인 답을 준다면, 그건 그가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의미다. 에스메랄다가 아는 페드로는 본인의 배필을 모친처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하지만 페드로가 이곳에 남으면 전선에 있는 아르페시스는 어떻게 하나?
페드로가 루이자를 거절해 그녀가 상처를 입는 것도 결코 바라는 미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스메랄다는 두 사람의 일에 제3자였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 관여할 수 없다. 페드로의 것이 분명한 긴 한숨이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시작됨을 알려 왔다.
“제가 거절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그, 그건…….”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
“영애에게 호감을 표하긴 했으나, 저를 선택해 달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을 거두실 수 있는 기회 역시, 수없이 많이 드렸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건만 루이자가 어떤 표정일지 훤했다.
“영애께서는 제가 답신을 하지 않은 이유까지 분명하게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그 의미를 아시고서도 서신을 계속 보낸 건 영애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마다 매번 분명한 거절을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을 꺼낸다고 해서 제 답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생일 선물은 왜 보낸 거예요?!”
“제가 영애께 호감을 품고 있으니 보낸 것이지요.”
“지금 절 거절하겠다는 거예요, 승낙하겠다는 거예요?”
“이미 답을 아실 텐데요.”
시종일관 차분한 페드로의 목소리와 달리 루이자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기만 했다.
“제가 영애께 호감을 품은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영애의 마음을 받을 수 없다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
“저에게 계속 마음을 두기로 하신 건 영애의 선택이지 제 강요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럼 제가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상관없나요?”
“……기회를 잡지 못해 영애를 놓친다면 저의 어리석음이겠지요.”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복잡한 심정으로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가… 경께서 내륙으로 복귀하실 때까지 기다리면요?”
에스메랄다는 지난 2년여간 페드로가 행한 모든 것이 그의 최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루이자가 권해 온 관계의 시작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에게 온 기회를 내쳤다. 그녀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는 선택을 했고, 다음 선택지를 그녀에게 넘겼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당장은 곁에 설 수 없는 사내를 기다리는가, 그를 저버리고 다른 이와 함께하는가.
혹자는 루이자에게 가지는 호감마저 감추는 게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루이자를 위한 것이지 페드로를 위한 것은 아니다. 페드로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도 루이자에게 분명한 기회를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제 오라비가 영악하게 머리를 굴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루이자에게 선택지를 쥐여 주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한 거절을 했지만, 루이자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도 않음으로써 그녀의 선택지 안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떠나왔던 집무실 앞으로 돌아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니 억지로나마 가두어 두었던 아르페시스에 대한 것이 날뛰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페드로가 그러했듯 그녀도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르페시스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든 이상 에스메랄다는 그를 먼저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를 향한 사랑은 지독히도 오래되었고 그 지저에는 존경과 신뢰, 이어서는 전우애까지 있다. 최근 들어서는 원망까지 섞여 버렸고.
많은 감정이 뒤섞이고 다양한 감정이 얽혀 있는 그것은 한순간 불타오르듯 피어난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독히도 깊고 긴 감정이기에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사랑하는 걸 포기할 수 없다. 이미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으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지금은…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도래한 지독한 냉전기라고 봐야 할까? 어떻게 처음으로 하는 사랑싸움이 이렇게나 지독한지. 에스메랄다의 한숨은 깊었다. 아직 수정 마도구를 보내는 것을 보면 그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아르페시스를 곱씹었다.
“엿듣는 건 나쁜 버릇이란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페드로가 말했다.
“오라버니께서도 저와 아르페시스의 대화를 다 들으셨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다만… 서로 비긴 것으로 할까?”
눈을 떠 보니 그녀의 앞에 멈춰 서 있는 페드로가 보였다.
“루이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는 답을 분명히 전했다.”
“……이기적이시네요.”
“인간이란 다 그런 법이지. 눈앞에 없을 때는 당연히 놓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다가오니 쉽게 놓아지지가 않더구나. 탐욕이란 끈덕진 놈이라서 말이야.”
페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울고불고 때린 사람과 손을 잡다니. 왜 그렇게 감정 소모를 했나 싶지만 다 해 보고 나니 가족이란 본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시간에서 누렸던 가족들과의 교류가 지나칠 정도로 그녀를 위했던 것뿐이다. 모두가 훗날의 죽을 순간을 위해 에스메랄다의 감정을 우선시해 주었을 테니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 역시 모두 인간이기에, 결국은 하나가 아닌 독립된 타인이다. 우선시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다른 타인이기에 평범하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가족이라 한들 다툼 없는 관계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본래 가족들과 감정 소모까지 가는 다툼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지금이 되어서야 그 간단한 사실을 배운다.
“그나저나, 네가 생각해야 하는 건 나와 쿠베트 영애의 문제가 아닐 텐데?”
페드로의 말대로 지금 그녀가 신경 써야 하는 건 페드로와 루이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최근 들어 꼴 보기 싫은 짓을 해 대니 손을 좀 봐 주렴.”
“……제가 왜요?”
고생 좀 하라지. 언질조차 주지 않고 오라비를 데려갔는데, 뭐가 예쁘다고 보듬어 주겠나?
“계속 화를 내려고?”
화가 아직 풀린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전처럼 마냥 화가 나기만 하는 건 아닌지라 말문이 막혔다.
“자, 어서 용서한다고 한마디 해 주렴. 나에게도, 녀석에게도.”
“……싫어요.”
“흐음… 그럼 바로 돌아갈까?”
“가 버리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이 손 좀 놔주겠니?”
그런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페드로는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지만 직접 손을 빼내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중앙 계단으로 향하는 대신 성내의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르페시스는… 잘 지내요?”
“그다지.”
“…….”
“달에 몇 번씩은 비명을 지르면서 깬다. 네가… 떠나는 꿈을 꾸는 날이 있거든. 정확히는 네게 버림받는 꿈인 것 같더구나.”
화가 나는 건지, 아린 것인지. 아마도 둘 다이리라. 수정 마도구엔 멀쩡한 모습만 기록해 보내더니, 마냥 괜찮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해내니 난 놈은 난 놈이지. 책임감이 강해서 꾸역꾸역 움직이기는 하는데 네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더구나.”
친해졌다고 편이라도 드는 건가? 그런다고 쉽게 용서할 줄 알고? 옹졸해도 어쩌겠나? 이게 진심인데. 속이 뭉그러진 에스메랄다가 침묵하는 사이 페드로가 물어 왔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단다. 녀석은 후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
황실을 공격하는 일을 말하겠지. 에스메랄다는 답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복수를 꿈꿀 때만 해도 아르페시스와는 상관이 없는 타인이 되려고 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지금도 결국은 그를 속이기에 가능한 관계였다.
쿠베트성에서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짚어 보기도 전에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계속 외면해 왔다. 과거에 고개를 돌린 문제가 지금에 와서야 다시금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황제와 황태자를 제거하면 아르페시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이 이상적이겠지.
루그레디안은 에렘의 훗날을 걱정하니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 그를 추대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벌써부터 그는 남부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가고 있다. 남부에서 공적을 쌓아 올리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제치고 황위에 오를 만한 인물은 없다.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감출 수만 있다면 그가 즉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후에 거사가 다가오면 루그레디안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있고. 남부군을 빼내지만 않으면 아르페시스도 반대할 이유는 적을 테니 승낙할까? 그가 황제가 되면 어떻게 되지? 그와 그녀의 미래는?
지금의 상황에서 아르페시스는 포기를 하지 않은 것 같으니 훗날 일이 끝나면 청혼을 할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황후나 황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황실에 그녀의 이름이 오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패전으로 인한 안식을 평온이 아닌 증오로 만든 이가 바로 황태자였다.
처형대에 오른 직후 바로 불이 붙지 않았던 건 분명 악질적인 행동이었고, 에스메랄다는 그에 엄청난 반감과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겨운 놈이 있는 황실에 이름을 올리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지금은 그와 단절을 하고 있으면서 미래는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니, 우습기도 해라.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조소했고 페드로는 굳이 질문을 이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실 근처의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페드로에게서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정확히 언제…….”
다시 떠나느냐고. 말로써 묻지 않았음에도 페드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닷새 후에.”
“…….”
“녀석에게 보낼 게 있으면 그때까지 준비하면 될 거다.”
속내를 다 읽은 건 뭐란 말인가? 에스메랄다는 대답하지 않은 채 페드로를 뒤에 남겨 두고 먼저 걸음을 옮겨 버렸다.
“내일 보자, 천사야.”
페드로는 굳이 에스메랄다의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멈춰 선 곳에서 인사를 건네는 것이 다였다.
* * *
‘휴가 간다.’
지난여름, 그 말을 툭 던진 페드로는 그날 곧장 훌쩍 떠나 버렸다. 황당해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다른 계절은 보통 각 부대에서 사용하는 물자 내역을 기록하고, 취합하여 정기 회의를 하는 것이기에 행정적으로 손을 댈 부분이 적다. 본부대 지휘 기사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취합된 것으로 다음 1년간 사용할 예산과 물자 배분까지 하는 계절이다. 남부군의 끝과 시작은 신년이 아닌 여름이다. 그렇기에 행정 업무가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손이 부족해진다. 그래서 근위대도 종종 손을 보태던 상황이었는데 서류 업무가 쏟아지는 여름이 되자마자 도망쳐 버리다니!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스스로의 변화가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통제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었다. 그 첫 번째가 감정을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뭐, 속에서 그를 헐뜯는 것까지 자제하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그 헐뜯음 속에 페드로를 향한 부러움과 혹시나 하는 기대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혈육이니까, 죄를 짓고도 염치없이 얼굴을 들이밀어도 혈연이라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돌아올 때 그녀가 보내는 무언가를 들고 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조한 나날이 끝나고 돌아온 페드로는 빈손이었다. 그날부터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불안이 근거 없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단념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미련을 가진 건 그뿐이고 에스메랄다는 이미 그를 내친 지 오래일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그를 궁지로 밀어 넣기 시작한 건 또 있었다. 페드로가 수정 마도구를 기록하기 위해 가지고 오는 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르페시스가 ‘수정 마도구는?’ 하고 물으면 아차, 싶은 얼굴로 내일 하자며 미루는 날이 늘어만 갔다.
결국 그런 페드로의 태도에 괴로움이 더해지기만 했던 아르페시스는 가을이 지날 무렵부터는 혼자서 수정 마도구를 기록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출정에서 돌아온 후 기록을 마친 수정 마도구를 페드로에게 주었다.
“또?”
“……본래 열흘에 한 번씩은 보내지 않았나?”
차분함을 가장해 보지만 속이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히 지난여름 휴가를 가서 에스메랄다에게 용서를 받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저리 태평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천막 속으로 들어가자 칼라일이 서류 더미를 안겨 주었다. 겨울은 방어를 위한 전투가 많은 시기다. 마수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기에 퇴각을 하면서 전투를 함에도 진군을 하며 전투를 하던 여름보다 위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아직 카의 달이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사의 끝 무렵이다. 더위에서 자유로워진 마수들은 이미 북상 중이다. 라의 달에는 리퀘나에 들어가 병영 시찰 등을 위해 서너 번 나오는 반면, 나머지 3개의 달에는 외부의 병영에서 지내는 게 일반적이고 서너 번 정도 리퀘나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이제 남부에 온 지 3년에 가까워진 터라 익숙해진 생활.
날이 서늘해지며 전투가 많아졌다고 서류 업무가 없는 건 아니다. 전사자 통보나 물자 사용 허가는 언제나 그를 통해서만 가능하니까.
“아주 제대로 혼쭐을 내는군.”
“뭐라?”
킬킬거리며 말하는 페드로의 어조에 바짝 날이 선 짐승처럼 쏘아붙인 직후 아르페시스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움직임도, 숨소리도, 찰나의 심장 박동과 그의 세상까지 모두. 칼라일이 가져온 서류의 가장 위에 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방문 요청자 :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 방문 목적 : 후원 물자 전달 및 물자 소모에 따른 현황 파악과 중앙 리퀘나 시찰.
- 체류 기간 : 카 13~17일.」
에스메랄다, 그녀가 리퀘나에 방문할 것을 요청했다. 아르페시스는 오랜 시간의 침묵 후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페드로에게 물었다.
“아, 아, 알고…….”
“알고 있었지.”
“왜 말을 해 주지 않았나!”
아르페시스는 진심으로 페드로에게 화를 내었다.
“천사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야 말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를 노려보는 대신 서둘러 허가서를 작성했다. 에스메랄다가 온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다. 만날 수 있다. 용서받지 못해도 좋았다. 이번 방문이 그저 물자 지원을 위한 공적인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분명 그 생각 역시 진심이건만, 페드로의 입단속을 한 그녀의 행동에 스스로를 위한 의미를 부여해 본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런 건 아닐까? 이미 그녀의 화가 풀렸을까? 가능성이 낮지만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더해 보는 것이다.
“윽…….”
다른 것은 다 치우더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북받쳐 오른다. 흉터가 남아 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울먹이는 소리는 총사령관실을 가득 채웠다.
이미 그가 에스메랄다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본부대 지휘관들 대부분이 눈치를 채 버렸다.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음을 절절히 한탄해야만 했었으니, 확실하다. 한 번은 졸다가 에스메랄다를 부르짖으며 깨어난 적도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
다행인 건 그 사실을 황제가 보낸 근위대와 공유하는 이가 없기에 황제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낮다는 점일까? 아니, 그들은 남부군의 다른 지휘관들에게도 그의 감정을 떠벌리지 않았다. 지난 3여 년 동안 본부대 지휘관들은 근위대와 달리 완벽히 아르페시스의 사람들이 되어 버렸기에 침묵과 기밀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있는 사령관실에서만큼은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볼 만큼, 기뻤다.
* * *
에스메랄다가 이별을 통보하고 매정하게 떠나는 꿈처럼, 지금 꾸고 있는 것도 그의 심리 상태가 반영된 것이었다.
「대륙력 1441년 라 70일
--가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너무나 그립다. 곁에서 조잘거리던 --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나를 찾아온다. 다음 방문은 아마도 겨울이 되어야만 가능하겠지.
--가 와 주었으면 하는 열망과 위험한 기간에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아니, 치졸하지만 --가 위험한 기간에도 와 주기를 바란다. --가 리퀘나에 있을 때 마수들이 날뛰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후방 보급로가 마수에게 점령당하면 --는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할 수 있겠지.
미친 게 분명하다. --를 오래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수만의 목숨이 달린 보급로를 마수에게 넘기고 싶어 하다니. (후략)」
에스메랄다가 리퀘나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아르페시스는 꿈속에서 빠져나오며 볼품없게 떨리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틀 전 리퀘나로 귀환한 상태였다. 테노리엘은 남부군을 후원하는 이들 중에서도 큰손이기에 그들을 접대하는 건 총사령관의 업무이기도 했다. 남부군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아르페시스가 이끄는 본부대는 에스메랄다의 방문을 전후로 약 보름간 전투에서 배제된 상태다.
전투 대신 방문자 호위에 힘쓰게 될 터. 오늘을 위해 후방 보급로 주변의 경계를 몇 번이고 강화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사히 도착할 터,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곧 볼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남부군 후원에 소극적이었던 쿠베트가 함께 오니 남부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의 후원을 꾸준히 유치하는 일도 해야 하건만,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는 그런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에 관한 것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그는 해가 뜨자마자 사령관실 내부를 초조하게 서성였다.
페드로는 물론, 휴고와 테베르까지 그런 아르페시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에스메랄다를 다시 본다는 생각에, 그녀가 무사히 도착할까 싶은 걱정에 머리와 심장이 난장판인데.
황제가 보낸 근위대는 관저 내부에 떡하니 있다. 그들에게 에스메랄다를 맞이하는 데에서 과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 최대한 적당하게, 공적으로 대해야 하건만,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남쪽 성문을 지나셨답니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 성벽에서 한발 먼저 소식을 전하러 온 경비병이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아르페시스는 그제야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가 관저의 입구에 섰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신경은 총사령관저로 들어오는 정문에 집중된 상태였다.
“진정 좀 해라.”
페드로의 말이 그의 귓가에 닿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테노리엘의 문장을 새긴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르페시스는 숨을 죽였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쿠베트의 마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한 곳만 바라보았다.
대륙력 1433년 바의 3일에서부터 1435년 카 13일인 오늘까지. 자그마치 3년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그리워했다. 그녀의 유년기가 기록된 수정 마도구는 초반 1년에만 효과가 있었지 이후부터는 갈증만 더해졌다. 연인을 향해 매일 더해지기만 하는 그리움을 견디며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린 재회를 마주한 사내가 덤덤할 수 있을 리 없다.
페드로와 휴고가 관저의 입구에 멈춘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동안에도 아르페시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 이것도 꿈일까? 그녀를 너무 그리워해서 꿈에서나마 대리 만족을 하려고 보는 건 아닐까? 이미 꿈이 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합당한 의심이었다.
분명 해 볼 만한 의심이건만, 아르페시스는 지금의 순간이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페드로가 열어 준 마차 문을 지나 땅으로 내려서게 될 사람이 환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테노리엘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루이자였다. 왜? 에스메랄다는? 그제야 아르페시스의 신경이 뒤에 멈추어 선 쿠베트 후작가의 마차를 발견했다. 따로 출발했지만 여정 중에 같은 마차를 타고 움직인 건가?
“리퀘나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쿠베트 영애.”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오비텐 경. 몇 해 전 연말 연회에서 뵌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이자를 휴고가 에스코트하는 동안 뒤이어 페드로의 손을 잡고 그녀가 나타났다. 반짝이는 금발 아래에서 앳된 티를 벗어 여인의 모습을 그려 가고 있는 에스메랄다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는 데 힘겹지는 않았니? 천사야.”
다정한 목소리가 마차 속에서 나타난 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르페시스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덕분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어요.”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 음성이 아르페시스의 귓가에 닿았다.
“윽…….”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전율과 그리움 앞에서 멈춰 버린 그와는 달리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장거리 이동이었잖니, 오늘은 푹 쉬렴.”
“놀러 온 것이 아닌걸요. 물자 인계부터 하고요.”
“고집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유사한 대화를 듣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페드로는 지난여름 영지로 돌아가 에스메랄다에게 용서를 받은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그는 쟁취해 냈다. 그게 억울하고, 부럽고, 원망스럽고 또한, 감사했다. 페드로가 용서받았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 테니까. 어찌나 옹졸하고 이기적인지.
그가 이를 꽉 깨무는 사이 페드로의 에스코트를 받은 에스메랄다가 다가왔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조금 전 가졌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그를 포로로 만들던 그녀의 녹색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3여 년 전의 열기와 전율은 물론, 그의 것과 닮았던 감정의 편린까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시선을 떨구며 답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에스메랄다와 그녀의 곁에 선 루이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지금 그에게 루이자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에스메랄다가 내뱉은 고작 몇 음절로 만들어진 질문이 변질되어 다가왔으니까.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도 잘 지냈느냐는 비꼼으로 들렸다.
“예를 올리고 전하의 공적에 찬사를 보내야 함을 알지만, 우선 행정관에게 물자 인계부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깨달았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그를 내친 것이다. 형제를 사지로 끌고 들어와 그녀를 기만한 연인을 용서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이미 연인이 아닌 거겠지.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뻣뻣한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을 사령관실로 안내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이 무너지는 아득한 감각이 이어졌다. 그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를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만 같은 박탈감과 공허함에 지배당했다.
무슨 정신으로 사령관실에 도착한 것인지 모르겠다. 시야는 뿌옇게 변해 있었고, 귓가에 닿는 소리는 멀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두 가문의 후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영웅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언제나 죄송하지요.”
아르페시스가 자리에 앉은 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결국 칼라일이 나서서 두 사람을 응대했다. 가지고 온 물자 서류를 전달하는 과정은 간단했고 그만큼 빨리 끝나 버렸다. 칼라일이 에스메랄다와 루이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제자리에 멍하게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공식적인 절차를 마친 에스메랄다는 간단한 인사를 남긴 후 사령관실을 떠나 버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끝나 버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건지 인지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무언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에 질질 끌려간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부정확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아르페시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사령관실에 있지 않았다. 초점이 없어진 채 텅 비어 버렸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선 끝에 모습을 드러낸 에스메랄다로 인해서. 그녀는 매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인지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잘못, 했다.”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그는 오래도록 한 가지 말만 반복했다. 투둑 하고 떨어진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턱에 매달리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그의 앞섶으로 떨어지기 바빴다.
“내가, 잘못했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그 의문은 보드라운 손길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답을 내어 놓고 사라졌다.
“멍청이…….”
에스메랄다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그녀의 체온이 아르페시스를 다시 현실 속으로 끌어 올렸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쉰 아르페시스는 저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에스메랄다를 잡아당겼다.
눈앞에 있는 에스메랄다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왜? 그런 의문이 끊임없이 찾아왔지만 당장 거기에 대한 답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품 안에 그녀를 가둔 채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잘못했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 * *
“두 가문의 후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영웅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언제나 죄송하지요.”
에스메랄다는 어떻게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속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덤덤함을 가장하고 감정을 수면 아래에 감춰 멀쩡한 모습을 그려 냈다. 외부에 그와 연인이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직까지 연인이긴 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자 서류를 전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칼라일이 에스메랄다와 루이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전달한 것은 물자의 종류, 숫자, 상태 등을 기록한 서류였다. 함께 이동한 물자는 사령관저가 아니라 바로 창고로 향하는 중이다.
지금 전달한 서류를 통해 후에 실물과 기록을 비교한 후 각 부대에 분배될 것이다. 페드로에게 몇 번 들었기에 아르페시스의 상태가 수정 마도구를 통해 보이는 것보다는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해서 물자 준비를 앞당겨 최대한 빨리 리퀘나에 방문 일정을 잡았다. 이런 핑곗거리라도 있어야 황제의 눈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가을에는 케니스와 반군의 일로 너무 바빠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보니 겨울에 오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르페시스에게 수정 마도구나 서신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쉽게 용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계속 연락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애타게 만들 생각이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침묵에 지쳐 포기를 하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고생하라는 못된 심보가 불안감을 이겨 버렸다. 사령관저 어디에 황제의 눈이 있을지 모르는데 아르페시스에게 달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앳된 모습을 완전히 떨쳐 낸 상태였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보았던 그가 서 있는 것만 같아 심장이 떨렸으나, 그녀는 꾸역꾸역 숨겼다. 그게 아르페시스의 상태에 악영향을 미칠 줄 알았다면 한 번쯤은 다시 생각을… 해 보진 않았을 것 같다. 괜히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그를 따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페드로에게 들었던 것을 기반으로 추측해 보면, 분명 혼자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으리라. 그러니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의 상태를 보고 있노라니 옹졸하게 굴었던 스스로를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지만, 그녀는 기어코 그곳을 벗어나 관저에 머무는 동안 사용할 방에 도착했다.
“그래, 기분이 어떠니?”
찰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뒤를 따라온 페드로가 물어 왔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서둘러 손을 쓰지 않은 채 아르페시스를 방치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겠나.
“그 녀석의 인내심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책임감이 조금만 덜했어도 진즉에 망가졌을 거다. 지금도 망가져 가고 있는 게 분명하고.”
“…….”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네 분노를 탓하는 게 아니란다. 그건 누가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제 머리 위에 닿는 페드로의 손길에 앓는 소리를 냈다.
“네 입장에선 정당한 것이고 그게 저 녀석을 힘들게 했다고 해서 널 탓할 수는 없지. 선택을 한 이상 녀석이 감당해야 할 문제이니까. 하지만 네 단절이 녀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인지해 두렴.”
“…….”
“우선은 쉬렴, 저녁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페드로는 그 말대로 해가 진 후 그와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본인의 침실에서. 우두커니 서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손길에 떠밀려 침실 내부로 들어왔다.
“옆방에 있으마. 소리는 걱정 말고.”
아르페시스를 떨군 페드로는 그렇게 말한 후 방을 나섰다. 그가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령관실에 있던 때처럼 눈에 초점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았으니까.
“잘못,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초점이 돌아온 그가 한 말이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연락이 끊긴 1년 동안, 지독할 만큼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난 상태건만, 그녀의 태도 하나에 저렇게까지 변해 버린 그에게 죄스러웠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못되게 굴었는데도 보자마자 잘못을 고하며 용서를 바라는 그의 행동에, 그간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다가가 뺨을 쓸어 주었고, 곧이어 강한 힘에 끌려 그의 품에 파묻혔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울기 시작한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준 그녀가 속삭였다.
“미안해.”
에스메랄다의 허리를 옭아맨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3여 년 만에 다시 서로의 품을 찾은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페드로의 침실을 빼앗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서로를 품에 안고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와 그녀 모두 자랐건만, 체격 차이는 여전했기에 그의 무릎 위에 앉는 것은 수월했다. 그들 사이의 침묵을 걷어 내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아르페시스였다.
“나를…….”
에스메랄다는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시끄럽게 울어 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도 행복했지만, 거기에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인가?”
아르페시스는 붉게 달아오른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매만지며 답을 미루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르페시스의 몸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윽고 나온 답에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널 사랑해.”
번쩍 뜨인 눈꺼풀 너머로 드러난 은회색 눈동자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사로잡고 홀로 독차지할 수 있음에 만족감을 주는 그의 눈동자.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네가 나를 상처 입히고, 기만하고, 못되게 굴어도.”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를 사랑하는 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원망하고, 헐뜯으며 단절을 택해도 결국 그녀는 지금의 자리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그의 무릎 위로, 품속으로, 곁으로, 반드시.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비난하고 결국엔 등졌던 기억이 있음에도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전제만은 변하지 않겠지. 입술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찾는 그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
“차라리 콱 죽어 버리라고 저주를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진짜로 네가 죽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생각을 해 버린 나를 원망했어.”
그렇게도 많이 흘려 냈건만, 그녀의 속에 잠들어 있는 눈물은 아직도 메마르지 않았다.
“혹시 날 원망한 적은 없어?”
“그대에게 죄를 지은 것은 나인데 그대를 원망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아르페시스가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뺨을 매만지던 에스메랄다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옷깃에 닿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옷깃의 단추를 풀어 내릴 때마다 아르페시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 차마 그녀의 손을 쳐내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도 없어 갈팡질팡했다.
“에, 에스메랄다?”
단추를 모두 풀어낸 에스메랄다가 그의 셔츠를 벗겨내자 아르페시스가 간절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싶어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분명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리고, 또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뭘 해야 하지? 놀라서 손을 벌벌 떠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당황한 사이 에스메랄다는 차분하게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그의 상의를 벗겨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옷 속에 숨어 있던 것은 이미 성장의 끝에 도착한 사내의 몸이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 탄탄하게 들어찬 근육, 그 위에 제멋대로 그려져 있는 흉터까지.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자상처럼 길게 이어진 상처도 있었지만, 그의 팔에 난 상처는 띠처럼 생겼다. 절단 상처다. 팔 구석구석, 한때 그의 팔이 마수의 이빨에 짓이겨져 잘려 나갔던 흔적이 가득했다. 다리도 다르지는 않겠지. 때때로 이 흉터가 목에 새겨질 뻔한 적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애달픈 마음으로 그의 흉터를 쓸며 속삭였다.
“아프지 않았어?”
“어?”
아무래도 그가 바라던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아르페시스는 상황을 가리지 않는 제 저열한 욕구를 헐뜯으며 웅얼거렸다.
“지금… 은 아무렇지도 않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대답 속에서 회피하려는 어설픈 술수를 읽었다.
“지금 말고 상처가 나던 당시에 말이야.”
그래서 도망칠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
“대부분 잘렸던 걸 다시 이어 붙이면서 생긴 흉터잖아. 아프지 않았어?”
“그건…….”
“참 우습지?”
무슨 말인가 싶어 입을 다문 아르페시스 대신, 에스메랄다는 흉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그의 눈동자를 찾아 가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오라버니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넌 지금 여기에 있었을까?”
아니. 아르페시스는 제 목을 대신해 페드로의 팔이 뜯어 먹혔던 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페드로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너와 오라버니의 선택은 너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잖아? 그런데도 난 두 사람이 한 선택을 원망해.”
“…….”
“우습지 않아? 이 흉터들은 네가 죽음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이고, 네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보여 주는데.”
“…….”
“정작 네 죽음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네 죽음을 막은 게 분명한 선택을 원망하고 있는 거라고.”
아르페시스가 이를 악물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불거진 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희생 없이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하다니… 어찌나 옹졸하고 이기적인지.”
“그런 말, 하지 말라.”
“들어 줘. 이런 추악하고 이기적인 부분도 나의 한 부분이니까.”
에스메랄다는 그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원망을 저버릴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또한 아르페시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래, 혹시라도 페드로가 죽는 일이 생긴다면 말이다.
“너를 살리는 일을 반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나를 원망하지 않았어? 난 자그마치 3년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널 힘들게 했는데.”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왜 그게 네 잘못이야? 넌 살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찾은 거잖아.”
“……그대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질문을 꺼낼 때마다 조금씩 늦어지는 답은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원망하듯,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원망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훗날 똑같은 일이 생겨도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기반을 닦아 두기 위해서.
이런 순간마저 그를 붙들어 둘 생각으로 가득한 스스로를 경멸하지만, 이게 그녀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인정하고 품었다. 옹졸하며, 이기적인 것이 모두 그녀의 것이니까. 또한, 그렇게 모자란 스스로 때문에 아르페시스가 조금 전처럼 고개 숙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망하고 아파한 상처 덕분에 지금 내 옆에 네가 있는 거야.”
“…….”
“그러니까, 만약 훗날에.”
에스메랄다는 툭, 툭 떨어지는 눈물을 쓸어 주는 아르페시스의 손에 뺨을 기대었다.
“그때와 같은 순간이 오면, 똑같은 선택을 해 줘.”
“에스메랄다…….”
“네가 죽지 않는 선택을 최우선으로 여겨 줘.”
그로 인해 옹졸한 그녀의 원망을 사더라도 감내해 달라고, 이기적인 부탁을 해 본다. 부족한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까.
“그럼 난 몇 년이 걸려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를 향한 원망에 천천히 익숙해지면서, 사랑을 우선시할 수 있게 될 날까지 지치지 않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태어난 이래 가장 유사한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함께 보고 자란 형제와도 불화를 겪는 것이 인간이다. 지난여름까지 에스메랄다와 페드로가 그러했다. 그런데 몇십 년 동안 완전히 다른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자란 후에야 만난 연인이나 친구와 불화를 겪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지금은 이렇게 애절하게 서로를 만지고 있어도, 어느 순간 에스메랄다와 그는 또다시 서로를 원망하거나 불화를 겪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지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페드로에게 내뱉은 원망이 그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않았듯, 앞으로 그들이 할 싸움과 원망도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숨이 막히도록 자신을 꽉 끌어안는 아르페시스에게 속삭였다.
“언제나 내 끝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일 테니까, 기다려 줘. 나도 기다릴 테니까.”
언제나, 언제나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그의 무릎 위로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에스메랄다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울고 있듯이, 아르페시스도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울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리고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옹졸함을 고해 보았다.
“사실은 조금, 아주 조금 원망했었다.”
그녀를 두고 죽고 싶지 않아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기에 한 선택인데 3년이나 용서해 주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아주 조금은, 이제 그만 용서해 주어도 되지 않느냐고 에스메랄다를 원망했던 적이 있었다. 그 원망을 꺼낼 염치가 없어서 생겨날 때마다 잘라 냈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 그대가 나를 영영 용서해 주지 않을까 봐 무서워서 털어 내길 반복했다. 잘못은 내가 했으니까, 원망할 자격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생각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자격 같은 게 있기는 할까, 하고. 케니스를 비롯한 반군의 모두를 기만한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기만한 이들을 원망할 자격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르페시스와 페드로를 원망했다. 에스메랄다가 그러했으니, 아르페시스가 그러해선 안 된다는 논리는 우스운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말해 주며 덧붙였다.
“내가 너를 원망해도 여전히 사랑하듯이, 너도 그렇다고 해 줘. 나를 원망해도 사랑해 줄 거라고, 그렇다고 말해 줘.”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그대를 사랑한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또다시 이런 단절과 함께 원망이 찾아오더라도 그들은 걱정하지 않으리라. 결국은 원망의 끝에서 서로를 사랑할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을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뺨을 가리지 않은 채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쓰라린 웃음을 본 아르페시스 역시 똑같이 웃어 주었다. 잠시간 서로의 못난 웃음을 본 그들은 곧 어둠을 털어 내고 밝은 미소를 데려왔다. 서로의 젖은 뺨을 쓸어 주던 중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언제나, 나는 언제나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나도 언제나.”
이마를 맞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심장에 남긴 상처를 어루만지고 달래 주었다. 그들 사이의 따듯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에스메랄다가 계속 아르페시스의 살결을 쓰다듬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이런 대화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자주 볼 수 없다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그를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들고 갈 생각이었다. 그를 제게 묶어 두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사랑했다.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듯, 여인이 사랑하는 사내를 원하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부터 이것을 목적으로 그의 상의를 벗긴 건 아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현명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골적인 손길이 계속되자 아르페시스가 움찔거리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에 마주친 은회색 눈동자에 천천히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는 감미로웠고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은 매혹적이었다. 이윽고 아르페시스가 천천히, 그녀를 애태우듯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고자 했으나 개미 걸음보다 느려 터진 속도 때문에 그녀의 인내심은 금방 동이 났다. 결국 에스메랄다가 먼저 그를 잡아먹듯 달려들었다.
“읍!”
아르페시스는 저보다 먼저 움직인 에스메랄다 때문에 잠시간 굳어 버렸다. 곧 본인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올리는 그녀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다시 움직였지만. 그는 제 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허리를 더 꽉 옭아맸다. 딱 한 번, 파렴치한 짓으로 맛보았던 그녀의 타액은 여전히 그의 갈증을 자극했으니까.
그녀에게 완전히 용서를 받은 게 아니었던지라 머뭇거렸지만, 그에게는 제 발로 다가온 그녀를 내칠 수 있을 만큼의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년간 갈구해 왔던 체온, 몇 년이 넘도록 열망해 왔던 접촉이었다. 그걸 어떻게 뿌리칠까.
에스메랄다는 제 바람대로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보다 더 거친 움직임으로 반응하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우위를 빼앗겨 버렸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입 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의 혀는 에스메랄다의 혀를 붙든 채 놔주지 않다가도 입속의 여린 살을 건들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서로의 타액이 섞여 들며 달콤한 맛이 흘러넘쳤다.
“음…….”
허리에 닿아 있던 아르페시스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등을 쓸며 위로,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자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귀엽기만 하던 예전의 입맞춤과 달리, 지금의 것은 농밀했다.
그가 더 깊은 곳으로 침입하기 위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뒤로 밀렸다. 바짝 밀착한 그의 몸은 단단했고, 손끝에 닿은 피부는 뜨거웠다. 아르페시스는 때때로 그녀의 치열을 훑기도 하고, 잠시간 밖으로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금 진입하기도 했다.
분명 바랐던 일이다. 문제는 에스메랄다가 사내와 입을 맞춰 본 것이 처음이라는 데서 발생했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숨은 점점 부족해졌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강렬한 자극 속에서 제 입술을 놓아주지 않는 아르페시스의 가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 버티긴 했지만, 아르페시스는 곧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에스메랄다는 뜀박질을 한 사람처럼 잔뜩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로 달궈지고 열기로 끓어오른 눈을 뜨니 정염에 물든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반겼다.
그의 입술과 제 입술 사이에 매달린 은색 실타래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원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농밀한 접촉은 처음이라 부끄러웠다. 심장이 매섭게 뛰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무의식적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한 번만…….”
그러자 아르페시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리며 낮게, 지독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애원이 들려왔다.
“한 번만 더…….”
에스메랄다는 손등 위에 닿은 아르페시스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떨림과 열기가 손등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제발…….”
그가 호소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더한 것을 바라는 그녀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이번에는 아르페시스 쪽에서 먼저 달려들었다.
그는 갈급하게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말캉거리는 혀가 그녀의 입술을 길게 쓸어 내더니 곧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금 입 속의 깊은 곳까지 침범당한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가 쏟아 내는 열기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닿아 본 적 없던 입 속의 여린 살을 통해 강렬한 자극이 전해져 왔다. 때때로 귓가에 닿는 낮은 침음은 그 자극을 더 부채질할 뿐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무릎 위가 아니라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함과 동시에 아르페시스에게 목덜미를 깨물렸다. 에스메랄다가 움찔거리는 사이 따끔한 통증과 짜릿한 감각이 시작되었던 목덜미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아르페시스의 혀가 목덜미의 여린 살을 빨아올리는 감각 때문에 그녀가 몸을 떨었다.
“아……!”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도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이 제 치맛자락을 들치며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올라오는 커다란 손으로부터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고대했던 순간이 온 것이라고, 에스메랄다는 기꺼운 마음으로 다음에 이어질 행위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탐하던 아르페시스가 별안간 몸을 굳히더니 다급히 물러나 버렸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뒤덮고 있던 열기가 사라짐으로써 마주한 싸늘한 공기는 이게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노라니 아르페시스는 소파를 등진 채 조금 전 그녀가 벗겼던 상의를 입고 있었다.
“뭐…….”
너무 황당하면 말을 잊어버린다더니, 지금 에스메랄다가 딱 그 상태였다.
“시…….”
“뭐?”
“시, 시장하지는 않은가? 마, 만찬 준비가 되었을 시간이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진 에스메랄다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아?”
단추를 채우던 그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뭐야?”
“무슨……?”
“왜 여기서 끝내?”
눈에 보일 만큼 덜커덕거리는 몸을 보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의미다.
“그, 그건… 그러니까…….”
“내가 어려서 안 된다 같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기만 해 봐?”
뻣뻣하게 굳는 것을 보면 그 이유가 맞았던 모양이다.
“내년이면 성년이야! 고작 몇십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에스메랄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는 만큼 아르페시스 역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통에 거리가 바로 좁혀진 건 아니었지만… 그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는 전세가 역전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여기서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분명 아르페시스와 관계를 가질 생각이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않거니와 월경도 시작했으니 여인이 되었다 해도 부족할 것이 없는 몸이었다. 조금 전의 상황도 분명히 그런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런데 정작 아르페시스는 진도를 빼기는커녕 물러서 버렸다. 그 사실을 제대로 상기하니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다시 해!”
“……어?”
“다시 하라고! 치맛자락을 들쳤으면 끝을 봐야 할 거 아냐?”
그녀의 노골적인 말에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뿐이겠는가? 목덜미는 물론 귀까지 시뻘건데. 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꼴불견이라서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
“그, 그, 그, 그…….”
“이게 뭐라고 말을 더듬어? 난 피임약까지 준비를 해 왔는데 거기서 관두는 이유가 뭐냐고!”
“피, 피, 피, 피…….”
말을 더듬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치밀어서 에스메랄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피임약!”
이게 뭐 그리 거창한 것이라고 말도 못 하냐는 의미를 담아, 침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놀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 그리 크게 말을 하면 어찌하는가!”
어차피 페드로가 옆방에서 마나 장막을 펼쳐 두었을 텐데 문제 될 것이 어디 있다고! 읍읍읍! 에스메랄다가 반항의 의미로 그의 손을 밀어내자 아르페시스의 손이 맥없이 밀려났다. 그가 힘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가능한 날은 오지 않으리라.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를 가지는 건 조심해야 할 것 아냐? 그래서 피임약을 준비해 왔다고! 무슨 문제 있어?”
“그, 그건… 하지만 그대는 아, 아직 어리고…….”
“월경도 시작했고 가슴도 커졌어. 내년이면 성년인데 어리긴 뭐가 어리다는 건데?!”
손가락으로 그를 쿡쿡 찔러 대며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아르페시스는 석고상이 된 것처럼 굳었다. 월경을 시작했다는 말도, 가슴이 커졌다는 말도 그에겐 지나친 자극이었으니까.
물론, 마냥 어린아이였던 예전과 달리 그녀의 몸이 굴곡지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다. 애초에 인형 같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여인으로 보였으니 입맞춤에서 멈추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더듬은 것이지 않은가! 다시 만난 에스메랄다는 훌쩍 자라 있었다. 꿈속에서 본 그녀와 현실의 그녀를 구분해 두었던 경계선이 흐릿해질 만큼 훌쩍.
설마 그가 그녀의 변화를 모른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조목조목 짚어 주는 건가? 그 이전에, 아무리 그들이 연인 사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노골적인 대화가 오가도 되나?
“당장 벗지 못해?!”
굳어 있던 아르페시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에스메랄다가 제 상의를 다시 벗기려고 했을 무렵이었다. 그는 옷자락을 움켜쥔 채 강경하게 저항했다.
“그, 그만!”
“나랑 하기 싫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하면 그녀와 하기 싫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나! 아르페시스는 다급히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이런 것을 주제로 그녀와 언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하다 말고 그만두는 이유가 뭐야? 내가 여인으로서 매력이 없어? 그런 거야?”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봤으면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온통 살색 천지란 말이다!”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부정을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어째서…….
아르페시스는 멋대로 날뛴 입을 질책하며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꿈속의 그녀를 생각했던 대다수의 순간에 살색이 동반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성숙한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홀로 열기를 풀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으니까. 이미 꿈에서 해 본 것을 현실에서 못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신체가 정말, 정말 건강한 사내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욕망은 나날이 강해지기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르페시스는 언젠가 그녀와 가지게 될지도 모를 정사를 그리며 심적 안정을 찾았거나 욕구를 해결해 왔다. 꿈속에서 본 에스메랄다를 대상으로 했던 모든 파렴치한 위로를 떠올린 바람에 그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웅얼거려야만 했다.
“그저, 이건 그저 내가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
“너만 원하는 게 아니라 나도 원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아, 아직 그대가 어리지 않은가! 책에서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가지는 정사가 여인의 몸에 부담을 준다고 했다!”
“글로 본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직도 몰라? 네가 잘하면 되잖아!”
잘하면 된다니! 그들이 정사를 가지는 건 기정사실화된 건가? 분명 그녀가 허락해 주려 한다는 것은 기뻤지만 이런 얘기를 이리 노골적으로 해야 하나? 조금 분위기 있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오가야 하는 대화가 아닌가 말이다!
아르페시스가 첫 경험에 대해 가지는 환상 중 일부가 바스러졌다. 그가 입을 떡 벌리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내년이면 성년이라고 몇 번을 말해? 1년도, 2년도 아니고 100일도 남지 않았는데 조금 일찍 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의 상의를 벗기려고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에스메랄다와, 옷을 사수하기 위해 꽉 움켜쥐는 아르페시스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그, 그, 그대가 말하는 성년의 기준은 지금의 시대에는 개정되어야 마땅한 법이지 않은가!”
에스메랄다에게 옷을 빼앗길까 싶어 초조해진 아르페시스가 다급히 말했다. 다행히도 그가 한 말은 에스메랄다의 입을 막는 데 성공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에렘을 비롯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서 남녀의 성년을 규정하는 나이는 동일했다. 18세.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남녀의 성년을 규정하는 나이가 다른 건 에렘뿐이다.
8년 전까지만 해도 실테르와 세튀스 역시 그 범위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이미 원래대로 18세를 성년으로 규정하기 위해 법을 수정했다. 두 나라와 에렘에서 여아의 성년 기준이 낮아진 이유는 간단했다.
30여 년 전 당시 유행했던 여성의 미용 제품 때문이었다. 마법 가공을 거쳐 제작된 그것은 피부 미백에 뛰어난 효과를 보이며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의 사랑을 받으며 팔려 나갔다. 평민들에게 판매되는 제품은 더 저렴하고 싼 재료를 사용해 대량 생산이 되었기에 측정이 불가할 정도로 소비자가 많았다.
당시 세튀스, 에렘, 실테르를 대상으로 주요 소비 시장이 형성되었고, 타국까지 확장되기 전 해당 제품의 단점이 발견되었다. 불임. 그 제품을 미용에 사용한 대다수의 여성들은 석녀가 되거나 월경이 멈추는 등, 불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미 혼인을 해서 후계를 낳은 부부에게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걱정거리 정도였지.
진짜 문제는 혼기가 꽉 찬 20대 초반, 10대 후반의 여인들이 불임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년이 되지도 않은 16세, 17세의 소녀 중에도 그 제품을 썼다면 예외가 없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그런 일이 생겼으니 세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혼기가 꽉 찬 미혼의 딸이 있는 집안은 물론, 미혼의 아들이 있는 집안들까지 난리가 난 것이다. 신력 치료 한두 번으로는 당장 불임 증상이 치료되지 않는 통에 각국은 여아의 성년을 16세로 낮춰 버리는 임시방편을 취해야만 했다. 문제의 미용 제품을 쓰지 않았던 어린 여아들이 혼인을 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다행인 것은 불임 판정을 받은 여인들의 경우 최소 3년, 최대 7년 정도의 신력 치료를 받으면 월경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불행인 것은 그건 귀족들에게나 가능한 치료 방법이었다는 것이고. 평민들 중에서 불임이 된 여인들의 대다수는 사내들의 선택지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런 배경 때문에 조혼이 성행했고, 혼인을 하지 못한 여인들이 넘쳐났다. 그런 상황에서는 필요한 법이었을지는 모르나 문제가 해결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과거와 달리 지금은 16세에 혼인을 하는 여인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욕정하는 변태에게나 유용하기에 아르페시스의 말대로, 지금의 시대에는 개정되어야 마땅한 법이었다. 물론, 에스메랄다는 그 악법 덕에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빨리 관직에 나설 수 있어 도움을 받은 편이었다. 그리고 에렘도 곧 해당 법규를 개정하게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기억하기로, 그녀가 18세가 되던 해에 개정 법안이 통과된다.
에스메랄다가 입을 다물자 아르페시스는 눈치를 살살 보며 제 옷깃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물러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조심스럽게 운을 뗄 수 있었다.
“나,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말이다.”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수줍은 미소였다. 그 미소는 일견, 뿌듯함을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
그에 에스메랄다는 헛웃음일지, 탄식일지 모를 소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지금 저 태도는 뭐지?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연인을 눈앞에 두고 달려들지는 못할망정 물러나는 주제에, 대체 뭘 뿌듯해하고 있단 말인가!
에스메랄다의 눈매가 다시 사나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장 그가 한 말이 옳다고 하여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음에 만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사람의 일이란 자신해선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하니까. 미래를 겪고 돌아온 에스메랄다도 실패에 따른 손해를 감수해 가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실정인데!
“그래서?”
“응?”
“그래서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손을 대지 않겠다고?”
“소, 소, 소…….”
노골적인 표현에 놀란 아르페시스가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태도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며 언성을 높였다.
“손! 이게 뭐라고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건데?!”
“그대야말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이런 건 조금 더 은밀하게… 좀, 조금 더 은밀한 분위기에서…….”
가령, 촛불이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숨소리로 서로에게 속삭이면서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혹시나, 어쩌면, 하며 상상해 보았던 그녀와의 야하고 은밀한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은밀한 분위기를 따지게 생겼어? 네가 나한테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는데!”
분명 입맞춤을 나눌 때까지만 해도 그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였는데 왜, 대체 지금은 왜?
아르페시스는 이 얘기를 계속하다간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에스메랄다에 의해 벽으로 몰려 있던 그는 다급히 몸을 뺐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페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성년이 되었던 지난해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른 그가 도망쳤다. 에스메랄다에겐 그의 도주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르페시스!”
고작 뒤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전부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