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4화 (24/45)

제23장

방해꾼과 조력자 (2)

“지시하신 규모 확장을 위해 세튀스에서 광부를 추가로 데려왔습니다. 갈색 머리 쪽은 조용한 것이 무사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제련 장소를 모두 오두막 내로 옮기고 암막을 쳐 두었습니다.”

“자재를 옮겨 오는 과정에서의 흔적은?”

“수레의 이동 및 말발굽까지 네 번 이상 지워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고생했겠군.”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길, 에스메랄다는 테란으로부터 전서구로는 상세히 들을 수 없었던 보고를 받았다.

바란 상단과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면 자금이 탄탄해야 한다. 계약금을 더 크게 부를 수 있어야 그들의 거래처를 빼앗아 올 수 있으니까. 1, 2년 내에 3개 상단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음을 차근차근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때가 왔을 때 상대방이 제대로 된 저항을 하기도 전에 강탈해 올 수 있다. 고로 케니스의 계획을 알게 된 건 예상하지 못했던 최상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스메랄다의 패는 강화하고, 바란 상단의 패는 약화할 수 있을 테니까.

“갈색 머리는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 없단다. 너무 안심하지 말고 당분간은 계속 경비에 힘을 쏟으렴.”

“예, 알겠습니다.”

테란 일행은 케니스와의 마찰로 생길지도 모르는 불화에 대비해 합류했다. 백작 성에 남아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 중급 기사 실력. 반면 테란 일행은 대인전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황실 기사단 출신의 상급 기사들이다. 다행히도 별일 없이 케니스와의 만남을 끝냈으니 다시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야지.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때는 많은 게 달라져 있길 바라겠네.”

테란 일행이 떠나기 전,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작별에 답해 주었다. 훗날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지금보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생하게.”

테란이 함께 온 이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에스메랄다는 중북부 경계선에서 그들과 헤어진 직후 중부를 지나 서부로 돌아왔다. 이동 중 그녀는 간간이 중요한 보고만 받아 왔다. 빠듯한 일정 동안 일이 또 얼마나 쌓였을지.

“오셨습니까, 아가씨.”

붉은 석양이 하늘을 채운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백작 성에 도착했다. 집사의 마중을 받으며 말에서 내린 에스메랄다는 별채가 있는 방향에서 부산스럽게 뛰어온 시녀를 발견했다.

“지, 집사님!”

헐레벌떡 뛰어왔던 시녀가 에스메랄다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이냐.”

집사가 시녀를 추궁했고, 그녀는 곧 자신의 달음박질에 대해 설명했다.

“벼, 별채에 불이 났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별채는 하나뿐이다. 에스메랄다의 손님들이 머무는 곳. 거기서 왜 불이 났는지보다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있다.

“손님들은?”

“모두 밖으로 대피하셨습니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본성의 사용인들을 별채로 보내 불을 끄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작 성 내부로 출퇴근을 하는 마법사들까지 데려오라고 했다. 모든 지시를 내린 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걸음걸이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리스가 물었다.

“가서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빨리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예?”

“내가 서둘러 가서 물동이라도 옮겨야 한다고 여기느냐?”

아무리 급하다 해도 하지 않는 게 좋은 방법이다. 사용인들과 함께 물동이를 옮기면 당장은 힘을 보탤 수 있겠지만 그들의 인식에서 귀족에 대한 거리감과 경외심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그들처럼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귀족이라니. 사용인들에게 친근하고 자애와 관용을 아는 귀족? 듣기에만 좋은 말이다. 주인과 사용인의 거리감이 줄어들면 아랫사람 중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권위가 손상되면 귀족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되고, 두려움이 사라지면 행동의 근거를 명령에 두지 않고 본인의 자의에 두게 된다. 자애와 관용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권위와 공포 대신 그것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만약 전자를 우선으로 두게 될 경우 사용인들은 실수를 해도 윗사람이 봐줄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실이 어떠한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문제이지. ‘내가 조금 잘못해도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주어진 업무에 방만해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다.

“물동이를 들고 옮기는 주인이라니,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겠구나.”

주인을 만만하게 보면 그들의 물건에 손을 대는 사건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또한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인의 일을 제 흥미를 위해 멋대로 떠들며 내부 정보를 유출하면 어떻게 될까?

그때 가서 처벌하면 된다는 등의 사고는 안일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불이 나면 끄면 된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처벌이 무슨 소용인가. 불을 끈다고 해서 타 버린 자산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화재란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 발생한 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현장을 지휘를 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작 불이 난 것으로 무슨. 모두 이런 일에 대비해 교육을 받았고, 실제로 문제에 대응할 실력이 있기에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이란다.”

사용인들의 입에서 유출되는 정보가 이동 위치, 선호 음식, 취침 시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암살 가능성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여 준다. 작은 불씨가 큰 산불을 일으키는 법이다. 윗사람이 자애와 관용에 대한 보답으로 충정을 바치는 선한 자가 있는가 하면, 기만과 배신으로 피해와 손해를 안겨 주는 악한 이들도 존재한다.

문제는 악한 선택을 할 자들을 사전에 걸러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용인들이 머리에 ‘나는 만일의 경우가 발생하면 주인을 배신할 겁니다.’ 하고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자애와 관용보다 권위와 공포를 위에 둠으로써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 둘 필요가 있다.

그다음에야, 모두가 아닌 충정을 바치는 이들에게만 자애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폭력이 직계의 암살에 일조하라는 협박과 함께 올 때 사용인은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내려질 처벌에 대한 공포로 대항해야 한다. 그런 사고가 깊게 심어져 있어야 배신을 향한 걸음이 붙들린다.

자애와 관용에 익숙해진 사용인은 위기의 상황에서 주인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또다시 자애로 용서해 줄 거라고 여기며 곧장 걸음을 내디뎌 버린다.

당장 눈앞에 검이 들이밀어져 있고, 당장 내 가족의 목이 잘리기 직전인데 주인을 향한 충성으로 협박에 저항한다고? 그런 일은 정말 지극히 드물다. 그렇게 굳고 단단한 충성심을 가진 사람은 1백 명 중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적다.

아무리 곧고 충직한 신하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놓인 위협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향한다면 꺾일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리 믿고 따르는 주인이라 해도, 결국은 남이니까.

지금의 논리가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저보다, 제 가족보다 주인이 소중하기는 힘들다. 그렇게 공포에 공포로 대항한 후 신뢰로 만든 희망을 얹어 주어야 제대로 된 저항이 가능하다.

주인의 권위가 만들어 낸 신뢰가 필요한 이유다. 이 문제를 주인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 자신은 닿을 수 없는 것에 쉽게 닿는 높은 사람, 문제를 가지고 가면 해결해 줄 사람, 내가 배신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켜 줄 사람. 그 신뢰가 공포에 붙들린 걸음을 저항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주인에게 들키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공포에 발목이 붙들리면, 그다음으로 주인에게 지금의 일을 알리면 전부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압박에 순응하는 척하며 가족을 적들의 손에 둔 채로도 주인에게 달려와 모든 것을 고하는가, 적들의 손에 쥐어진 가족을 걱정하여 정말 일조하는가의 차이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결국 공포와 신뢰가 전부 있어야 외부에서 시작되는 압박과 협박으로부터 내부를 지킬 수 있다.

“손님들은 다 안전하다는데 내가 급해야 할 것이 어디 있다고. 불이 난 별채야 보수를 하든, 다시 짓든 하면 되겠지.”

저 멀리 화마에 완전히 집어삼켜진 별채를 보면서도 그녀의 걸음은 느긋하기만 했다.

“다들 괜찮은가?”

별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과 합류한 에스메랄다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는 나단에게 꽂혔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라그나도 꽤나 난처한 얼굴이다. 아무래도 이 화재가 단순한 사고는 아닌 모양이지.

“화재의 원인은?”

별채에 머무는 이들을 보필하기 위해 그곳에 함께 상주하는 사용인은 25명이다. 개인별 전속 하인, 하녀, 그리고 주방과 청소 등을 담당하는 이들까지. 그들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앞으로 나서서 에스메랄다에게 보고했다. 나단과 라그나가 있던 방에서 갑자기 화재가 시작되었고, 초기 진압을 위해 재와 모래를 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점점 불길이 거세지자 진압을 포기하고 손님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얼마 가지 않아 별채 하나가 불길에 완전히 잡아먹혔다. 만약의 경우 건물 내에 준비해 두는 재와 모래가 소용이 없었다면…….

“마나로 만든 불길인가 보군.”

에스메랄다가 결론을 내리자 라그나가 꽤나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단을 제 뒤로 숨겼다.

“그… 원소 마법을 가르치는 중이었는데… 그게…….”

라그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울고 있는 나단을 보니 대충 그림이 보인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과 똑같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성취를 기대해도 좋겠는가?”

“어……?”

“들은 대로라면 대뜸 저렇게 크게 만든 건 아닐 테지?”

불타오르고 있는 별채를 보며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생각보다 불길이 큰 것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겁을 먹어 벌벌 떠는 나단의 앞에서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다.

“구현이 된 이후에 마나 소모로 인해 소멸되지 않고 더 커진 걸 보면…….”

에스메랄다는 꽤나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나단에게 지금의 일이 별것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친화력이 상당한 모양이군.”

“큼,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운용력은 가진 마나를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대한 척도다. 타고나는 재능도 있지만 꾸준한 훈련으로 증진이 가능한 노력의 범위도 포함한다. 반면 친화력은 타고나는 재능, 아니 체질이라고 보는 게 옳다. 유독 피부가 하얗거나 검게 태어나는 사람처럼, 체질적으로 마나와 상성이 좋은 사람을 마나 친화력이 뛰어나다고 지칭한다.

친화력이 뛰어난 이들은 같은 운용법을 심장에 새겨도 모이는 마나의 양이 많다. 또한 마법을 구현했을 때 본인이 소유한 것 외에 자연적으로 퍼져 있는 마나가 달라붙어 마법을 강화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단이 만든 저 화마처럼. 그렇기에 전투 마법사들은 친화력 척도에서 상급 판정을 받은 이들이 많은 편이다. 같은 마법을 구현해도 위력이 다르니까.

나단 마나 친화력이 좋다는 건 희소식이다. 두 사람에게 제공한 운용법이 이득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과가 있다는 데 손해 볼 것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말꼬리를 흐리는 라그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되물었다.

“운용력이…….”

라그나가 굳이 말을 꺼낼 정도라면 운용력 측면에서 타고난 재능은 없는 모양이다.

“심장에서 꺼내는 데 두 계절이 넘게 걸렸으니… 연구 마법사가 될 재능은 아니야. 노력을 해도 재능이 없으면 연구는 못 해.”

“전투 마법사 쪽인가?”

“그런 것 같아서 원소 쪽으로 가르치려고 했는데…….”

이 사달이 났단 말이군.

“앞으로는 마법 연무장을 이용하게. 사용 허가를 내어 줄 테니.”

“어…….”

“그리고 연구 마법사인 자네가 가르치는 것보다는 같은 전투 마법사에게 배우는 게 좋겠지. 조만간 가문의 마법사를 전담 스승으로 붙여 주겠네.”

“알겠수다…….”

나단을 가르칠 시간에도 수식 연구를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라그나도 에스메랄다가 제안한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전투 마법사와 연구 마법사는 마나를 쓴다는 것만 제외하면 공통점이 적으니까.

“그리고 나단.”

“자, 잘못했어요…….”

고작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나단은 죽음을 목도한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저가 만든 불이 건물을 태우고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분명 보수가 아니라 재건을 해야 할 테니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갈 것이다. 물론 나단이 제대로 된 전투 마법사가 된다면 감내할 만한 손실이다. 그의 마법이 에스메랄다의 힘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쉽게도 실현의 가능성이 낮은 가정이지만.

라그나가 끝까지 남아 있을 인물은 아니니 나단을 원한다면 개별적인 포섭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단이 라그나와 갈라서면서까지 에스메랄다의 곁에 남을까? 아니, 의문을 던져 본 그녀는 곧이어 단호한 답을 내렸다. 나단에게 라그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보호자다. 두 사람은 나단의 정체성이 성장하면 할수록 견고한 관계를 이룰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불타는 별채를 한 번 나단을 한 번, 이어서 라그나를 한 번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나단은 훗날 라그나와 떠날 사람이다. 그녀의 개별적인 힘이 되어 주지는 못한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골머리가 아팠지만 에스메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손해를 침묵함으로써 라그나의 적극적인 협조를 재촉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게 최선이다.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니 크게 혼내지 않으마.”

히끅거리는 딸꾹질 사이로 에스메랄다가 나단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다가온 나단의 손을 붙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네가 의도한 건 아니잖니?”

“그, 그렇지만, 히끅.”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 된단다.”

“나는 재, 재능이 없다고…….”

나단이 고개를 푹 숙인 사이 에스메랄다는 라그나를 올려다보았다.

“크흠.”

라그나의 성격에 좋게, 좋게 토닥이며 이끌고 가는 건 힘들었겠지. 그녀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나단을 다독였다.

“승마나 마법이나 똑같단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지는 않아.”

물론 처음부터 기가 막힐 만큼 무언가를 잘하는 천재도 있지만… 그것을 언급해 봤자 좋을 게 없다. 차라리 라그나가 못 하는 걸 대신해 줌으로써 그의 마음에 빚을 더 얹어 주는 게 낫지.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 오늘 같은 사고가 없도록 실력이 쌓일 때까지는 실내에서 마법을 쓰지 않으면 되고.”

“네에…….”

“말했지? 천천히 해도 된다고. 성급함이 때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하니 여유를 가지렴.”

재촉해야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독여 주어야 성과를 내는 이도 있다. 아랫사람이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파악해 그에 맞는 방식으로 이끄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완벽한 방법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선 새로운 별채를 정리하는 동안 식사나 하지. 나도 막 도착한 참이라 식전이니까.”

여기서 계속 불구경을 하고 서 있을 것도 아니고.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데리고 본성으로 향했다.

* * *

인간의 몸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자란다. 1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나단이 아직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건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이건 에스메랄다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였다. 현재 그녀의 키는 기억 속에 있던 것과 달리 조금 더 작았다.

본래 에스메랄다는 황도에서 생활했고, 아르페시스를 만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위한 발판을 쌓았다. 그것을 위해 주기적으로 새로운 옷을 맞추었기에 신체 치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단처럼 극단적인 부족함은 아니지만 충분한 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이만 일어나지.”

해서 식사량을 늘리고자 노력 중이지만 포만감이 느껴질 만하면 먹은 것을 게워 내곤 했다. 그날 저녁도 충분하다고 표현할 만큼 많이 먹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억지로 먹어 게워 내느니, 조금씩 자주 먹는 방법이 나았다.

에스메랄다는 별채에 머무는 이들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몸의 성장과 체력은 훗날 제국 곳곳을 누비며 그녀의 세력들을 만나는 데 도움을 줄 터, 제대로 자라는 건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가씨.”

먹는 것에 열중하던 나단 외, 3명의 성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메랄다를 배웅했다.

“아가씨, 자, 잘 가요.”

입 한가득 음식을 집어넣은 나단도 곧 그들을 따라 일어섰다.

“그래, 맛있게 먹으렴.”

식당을 나올 무렵에만 해도 에스메랄다는 곧장 씻고 쉬려고 했다. 이미 식사를 하는 도중 다나에게서 그간 특별한 변수는 없었다고 보고를 받았으니 피로를 푸는 데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중앙 계단에서 집무실로 향할 수 있는 2층의 복도 앞에서 멈춰 선 발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독한 것들이 섞여 있는 한숨이 그녀의 속내를 대변했다. 충동인지 미련인지… 에스메랄다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연 것은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의 문이었다. 창문을 등진 커다란 책상은 에스메랄다의 것, 그 좌우를 차지한 책상은 첸과 다나의 것이다. 그리고 첸의 책상 뒤에는 계절이 바뀌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상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첸의 책상을 지나 그 앞으로 다가갔다.

“내 꼴도 우습군.”

에스메랄다는 며칠 전 케니스를 기만하고 돌아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기만하고 떠난 페드로와 말도 없이 형제를 데려간 아르페시스를 원망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그렇다고 순순히 칭찬과 감사를 전할 수도 없다. 이렇게 화가 나는데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수정 마도구들이 들어 있을 상자는 그녀의 작은 손이 쥐기엔 조금 컸다. 에스메랄다는 그중 하나를 쥐고 뚜껑을 열었다. 그때, 그녀는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끈질긴 오기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건 결국 페드로와 아르페시스 측이었다.

수정 마도구 속에는 에스메랄다에게 행복을 주었으나, 또한 고통을 준 두 사람이 함께였다.

“이렇게 웃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시답지 않은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친해졌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각자가 상대방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스스한 모습은 전장이 아니라, 일상 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또? 이미 세 통이나 먹었다.』

『어제 손목을 잘라 먹은 건 기억이 안 나냐? 신력 치…….』

『체력은 다른 것으로 채워도 되지 않나. 땅콩이라면 이제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란 말이다!』

『맛을 따져 가며 먹을 여유가 있나 보다?』

『차라리 식사량을 늘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몬드도 땅콩도, 무슨 물을 마시듯이 먹는데 질리지 않을 리가 있나!』

『그냥 네 생명줄이다, 생각하고 입에 쑤셔 넣어!』

아웅다웅, 말싸움을 하는 것과 견과류를 집어 던지는 등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모습까지.

에스메랄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정 마도구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사이에 그녀의 헝클어진 숨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들이 무슨 변명을 하든, 화가 나기만 할 줄 알았다. 실제로도 수정 속의 영상은 그녀의 화를 부추겼다.

그녀에게는 상처를 남기고 떠났으면서 팔다리가 멀쩡하게 붙은 채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해소할 수 없는 새까만 분노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분노를 덮을 정도로 강렬한 안도감도 함께였다.

그녀를 기만하고 떠난 형제도, 가족을 데려가 버린 연인도, 모두 무사했다. 차라리 이런 걸 보내지 말지. 그럼 오래도록 미워하기만 할 수 있었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그날 쌓여 있기만 했던 마도구를 모두 보았다. 10여 년 동안 그녀가 흘린 눈물로 호수를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호수는 기어코 바다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지치지도 않는지 미련한 눈물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억눌린 흐느낌은 상처 입은 짐승이 낑낑거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수정구에선 여전히 아르페시스와 페드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또 울고 있을까?』

『왜 너를 울리기만 하는지, 못난 오라비라 항상 미안하다.』

그렇게 사과한다고 용서할 줄 알고.

『페드로가 그대 걱정을 많이 한다. 물론 나도… 염치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대가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달콤하게 속삭인다고 화를 풀 줄 알고.

『우리는 잘 지낸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와 나는 잘 지낸다. 그대가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그런 입에 발린 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알고.

『네가 많이 그립구나, 사랑하는 천사야.』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대가 너무나도 그립다.』

상처를 주고 떠나간 그들이 밉다. 비수와 가시가 가득한 날 선 말들을 내뱉어 그들에게도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제발…….”

그러니까 돌아와라. 똑같이 상처를 주고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게, 살아 돌아와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속에 담은 모든 화를 내던지며 있는 힘껏 패악을 부린 후에는 모두 용서할 테니까.

『천사야,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에스메랄다, 매 순간 그대만을 사랑한다.』

그 사랑을 주고, 용서를 받고 싶으면 살아서 곁으로 돌아와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녀 역시도 같은 사랑을 돌려줄 테니까.

“제발 죽지 마…….”

에스메랄다는 간절히 빌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만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집무실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제대로 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눈물을 쏟아 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보다 무서운 건 없다. 에스메랄다는 본인의 죽음보다 그들의 죽음이 더 무서웠다. 눈물을 흘려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에스메랄다는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쌍둥이는 에스메랄다가 식당에서 식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슬금슬금 아래층으로 내려왔었다. 근처에 갔다간 또 그녀를 자극할 게 분명하니 먼발치에서나마 잠시 보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려갔을 땐 에스메랄다가 이미 식당을 떠난 후였다. 아쉬운 마음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동안 식사를 마친 나단과 라그나가 나왔다.

“도련님들!”

그들은 자신들을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오는 나단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나단을 이용할 계획으로 접근한 것은 맞지만 그걸로 상처나 피해를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에스메랄다의 옆에 접근할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오멘과 페르멘은 나름 나단을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별채를 태워 먹었다며?”

“대단한데?”

“마법의 천재 같은 거 아냐?”

“나중에 에렘 최고의 마법사가 되겠는데?”

오늘 나단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 들었기에 장난스럽게 말을 꺼내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위로를 해 주기도 했다. 식당 입구의 근처에서 나누던 그들의 대화가 짧게 끝난 것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집사 때문이었다.

“오멘 도련님, 페르멘 도련님.”

무엇인지 모를 상자를 들고 있던 집사가 몇 번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아가씨께서…….”

집사는 또 한 번 도착한 수정 마도구를 집무실에 두러 갔었다. 하지만 문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쌍둥이를 찾아온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예전과 달리 사용인들에게 일절 웃어 주는 일이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권위와 자애에서 후자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해서 예전처럼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쌍둥이에게 말을 전하려고 온 것이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주인 아가씨의 일을 그녀의 혈육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리고 두 사람은 에스메랄다가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집사의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쌍둥이가 발견한 것은 제대로 된 울음소리조차 없이, 끅끅거리며 눈물을 떨구고 있는 누이의 뒷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마주한 광경에 두 사람은 잠시간 굳었다.

그들은 페드로가 떠나기 전까지 그를 졸졸 쫓아다니며 방법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에스메랄다가 자신들에게도 마음을 열어 주겠냐고. 페드로는 가족들 중 유일하게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그의 지혜와 경험을 빌리려고 했다.

며칠 내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던 페드로가 입을 연 건, 꽤나 끈질긴 조름이 있은 후였다. 돌아온 답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페드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함부로 약속하지 마라. 앞날을 자신하지도 말고. 천사에게 상처를 주는 건 나 하나로 족한 것 같으니까.’

의미 모를 말을 남긴 페드로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다음 날 떠나 버렸다. 테노리엘 백작이 새벽부터 출발 준비를 하라기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잠시,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임명되었다는 게 아닌가? 쌍둥이도 페드로가 갑자기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간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긴 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가 버렸고, 사실 페드로가 없으면 에스메랄다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황도로 돌아가지 않겠노라 백작에게 빽빽거린 후 영지에 남았다. 고집을 부리면 백작에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하지만 고집을 부려 영지에 남으면 무얼 하나?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

‘오라버니들을 믿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고.’

심지어 지금은 자신들에게 날을 세운 채 상처받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에스메랄다가 울고 있기까지 하다. 페르멘은 에스메랄다가 주저앉아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리디, 무슨 일 있어?”

힘없는 몸짓으로 반항하는 에스메랄다를 품에 가두고 토닥여 주었다. 오멘도 에스메랄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눈물로 젖은 뺨을 쓸어 주었다.

“어디 아파? 의원을 부를까?”

“왜 그렇게 울어, 응? 우리한테 말해 줘 봐.”

그들에게 당연했던 음성으로 다정히 속삭여 보지만, 돌아오는 건…….

“나가요!”

“……리디…….”

“나가, 나가란 말이야!”

울기만 하던 에스메랄다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페르멘은 그녀를 따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작은 온기를 꽉 껴안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응? 전부 우리가 잘못했어.”

속에 담아 둔 채 이렇게 홀로 눈물짓지 말고 자신들에게 털어놓고 분풀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페르멘은 바르작거리는 에스메랄다를 꽉 안아 주며 속삭였다.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아요?!”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이미 겪어 본 입에 발린 사과를 듣고 더 화를 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또 떠날 거잖아! 나만 남겨 두고 가 버릴 거면 처음부터 혼자 두란 말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에스메랄다를 달래려던 쌍둥이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또 떠난다는 그녀의 말과 함께 기억 속에 남은 페드로의 말이 그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지키지 못할 말은 함부로 약속하지 마라.’

이거구나. 페드로가 가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그녀를 떠났구나. 그걸 알아차린 쌍둥이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입을 연 건 페르멘뿐이었다. 오멘은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난 가지 않을게. 진짜야. 난 어디 안 가고 네 옆에만 있을게.”

“거짓말쟁이들! 그냥 날 혼자 내버려 두란 말이야!”

“이렇게 우는데 널 어떻게 혼자 둬! 절대 그렇게 못 해!”

처음으로 페르멘의 언성이 높아졌다. 웃고 있어도 혼자 두기 싫은 판에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혼자 두란 말인가.

“형이 네 옆에 있어 줄 거라고 해 놓고 출정한 거야? 난 안 그럴게,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계속 여기에 있을게. 약속할게.”

페르멘은 아무런 말 없이 침묵하는 오멘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에스메랄다를 더 꽉 껴안았다.

“거짓말쟁이들… 거짓말…….”

다정한 속삭임 아래에서, 에스메랄다는 몇 번이고 더 반항한 후에야 페르멘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울음소리가 그곳을 채웠다.

“아르페시스와 페드로 오라버니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아르페시스의 이름에 잠시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페르멘은 페드로의 미래를 확언해 줄 수 없었다. 전선에 가지 않겠노라 약속한 이상 직접 그곳에 가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지켜 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페르멘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꼭 돌아오라고 기도하자. 내가 곁에서 같이 해 줄게.”

페드로의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그곳에 가서 함께 검을 들지 못하고 몸을 던져 그를 죽음에서 끌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형제의 생환을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페르멘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품을 파고드는 에스메랄다의 정수리에 고개를 묻었다.

그와 그의 형들은 가겠다, 가지 않겠다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 페르멘 역시도 방금, 갈 수는 있으나 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몸이 약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무위를 배울 만한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선으로 향해 함께 싸운다는 선택지 자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직접 전선에서 형제들을 위해 싸우지 못할 그녀에게 주어진 거라고는…….

앞으로 페르멘이 해야 하는 것처럼 형제들의 귀환을 바라며 기도하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무력하게. 그 잔혹한 현실을 에스메랄다가 깨달았던 모양이다. 페르멘은 3년 전 갑자기 달라졌던 누이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 비참한 현실을 배제하려고 미리부터 가족에게서 정을 떼려 했던 건 아닐까? 무력하게 빌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깊게, 그녀가 왜 갑자기 변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페르멘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에스메랄다를 걱정스레 바라보면서도 가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제 쌍둥이 형제가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페르멘은 이를 악물기라도 한 듯 턱이 불거진 오멘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페르멘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평생을 서로가 특별하다고, 서로가 또 다른 자신이라 여겼었는데, 쌍둥이라 한들 매번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페르멘은 쓰게 웃었다. 오멘이 한 선택은 그와 다른 것임을 깨달았으니까. 품 안의 에스메랄다가 왜 가족들을 멀리하고 싶어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 * *

집사가 쌍둥이에게 속닥거리는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갑자기 뛰어가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따라왔을 뿐이다. 나단은 반쯤 열린 문 앞에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금색이 지금 들리는 울음소리가 누구 것인지를 알려 주었다.

에스메랄다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고 그녀의 울음소리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항상 예쁘고 따듯하게 웃던 에스메랄다가 우는 소리를 들으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타인의 울음소리에 울컥한 건 나단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어색한 거…….”

나단이 살기 위해 보다 약한 이의 것을 빼앗았을 때, 그 아이는 울었다. 그것에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들이 우는 건 그가 하루를 더 살아남았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단은 타인의 울음과 슬픔에 동조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빼앗은 음식을 먹었지.

그런데… 에스메랄다의 눈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준 사람이었다. 라그나는 나단을 사랑했지만 다정하고 따스한 미소로 그를 마주할 만큼 유한 성정이 아니다. 그렇기에 보고 있노라면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미소를 보여 준 건 에스메랄다가 처음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단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에스메랄다가 준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를 배부르게 해 주고, 따듯한 잠자리를 주었으며, 라그나와 함께 살 수 있게 신분 패도 주었다. 다정하게 웃어 주기도 하고, 그의 잘못이 아니니 더 잘하면 된다고 위로도 해 줬다.

똑똑해질 수 있도록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에스메랄다의 도움 덕임을 안다. 아무나 배우지 못한다는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녀 덕분이다. 그런 에스메랄다가 울고 있으니 나단은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였다.

문득 그녀가 꽃을 받아 들고 웃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단은 에스메랄다가 계속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을 꺾어서 에스메랄다에게 주면 조금이라도 웃어 주지 않을까? 나단은 아직 어린 마음을 품은 채 서둘러 정원으로 나갔다.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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