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3화 (23/45)

제23장

방해꾼과 조력자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남부에서 출몰했던 대형 마수의 토벌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 더위가 심한 남부에서 여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무렵, 리퀘나의 탈환 소식이 에렘 전역을 채웠다.

아르페시스의 전공이 선전물처럼 사용되어 황실의 위상을 드높인 건 두말할 것 없이 당연했다. 그 이전에, 황태자는 바의 달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아우에게 뒷일을 맡겼다’라는 명분으로 황성에 귀환한 상태였다. 그의 귀환을 두고 뒷골목을 중심으로 하여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라는 소문이 퍼진 것 역시 당연한 일이고.

이후 황태자가 남부군에 명령 불복의 죄를 묻기 위해 재판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아쉽게도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만큼 일이 커지지 못했지만.

남부군에서 제시한 황태자의 명령서 사본을 확인한 황제가 재판 자체를 기각했다. 아쉬운 일이다. 재판에서 그의 인장이 떡하니 찍힌 명령서가 증거로 제출되었어야 했는데. 그럼 황태자가 남부군에게 괜한 트집을 잡았다는 명분을 반황실 세력에 쥐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관직에 진출한 중앙 귀족들이라면 그 기회를 제대로 이용해 황태자를 물어뜯어 주었을 것이니 정말 아쉽다.

황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불씨를 덮어 버렸기에 더 이상의 진전을 바랄 수 없는 상태로 사건이 끝나 버렸다.

애초에 황태자가 남부에서 연회를 열도록 유도한 건, 황태자에게 반발한 이들이 이 일을 얌전히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건만. 당초 에스메랄다가 바라던 것보다 더 큰 사건이 터졌음에도 피해자와 그들의 가문은 남부와 남부군 전체를 위해 자신들의 분노를 억누르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들이 대의 대신 자신들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옹졸한 인물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기 못했기에 재판이 열린 후에 명령서가 증거로 나오지 않고, 황제에게 먼저 그 사본이 전달된 것이다.

리퀘나 탈환 이후 황제는 황태자의 이름으로 아르페시스를 치하하는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루그레디안에게 전해 듣기로, 최근 황태자 궁에서 부서지고 깨지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들었으니…….

“놈이 원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말이야.”

황도에서 발간된 신문을 훑어본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황제는 다가온 기회를 아주 확실하게 써먹고 있었다. 황태자의 무능을 조롱하기 위한 소문보다 아르페시스의 전공이 더한 관심을 받았다.

최근 뒷골목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살펴보면 아르페시스와 함께 황실을 칭송하며 떠드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 황족이 백성을 지키고 있다, 그 짧고 간결한 문구가 황실에 가져오는 이득은 이토록 선명하다.

황제가 괜히 황실의 피를 이은 아르페시스를 전선으로 내몬 것이 아니었다. 손에 쥐고 시작한 패의 질부터가 달랐으니 이번 판에서는 황제가 이겼다고 봐도 어쩔 수 없으리라.

“쯧.”

에스메랄다가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아르페시스의 명예와 희생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그때, 다나가 질문을 해 왔다.

“황태자가 중부에 들어서자마자 신관을 찾았으니 부상은 진짜일까요?”

지난봄 임시 사령관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아낸 것이라곤 아르페시스가 사령관저에 발을 들인 날 황태자와 그의 근위대가 서둘러 중부로 귀환했다는 것뿐이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남부군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쫓겨났다고 봐야 하리라.

페드로가 그 내막에 대한 설명을 수정 마도구에 기록해 보내 주었으나 그건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중이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그녀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페드로는 그녀가 그것을 보게 만들겠다고, 에스메랄다는 그가 보낸 것을 보지 않겠다고 서로 고집을 부리는 상황이 언제쯤 풀릴지…….

지금은 원하는 만큼 성과가 나지 않은 황태자 쪽보다 다른 쪽에 신경을 써야 한다. 본래 동부 지역의 어린 세작들을 가르치던 전직 기사가 케니스의 부관과 1차 접촉에 성공했다. 케니스의 부대에 소소하게 곡물을 전달하며 접근했고, 상부의 존재를 조금씩 흘리며 대면을 언질해 주고 있는 상황.

“글쎄. 그게 정말 부상 때문이었는지, 부상을 입었다고 꾸미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

전서구를 통해 온 보고를 읽은 에스메랄다가 다나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테브라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곡식도 동부로 조금씩 옮겨 두고 있다. 이대로 순항이 계속된다면 2, 3년 내에 반군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가씨, 페드로 도련님께서…….”

“두고 나가게.”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페드로가 보낸 수정 마도구가 집무실의 한쪽에 쌓이는 걸 애써 외면했다.

“알그레노 자작에게 남부의 일을 어떻게 숨기나…….”

아브람 백작이나 루그레디안, 혹은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앙그리트 일가의 사람들까지. 그들은 남부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반군의 창설을 위해 에스메랄다가 한 일을 알리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에 속하는 행동이라고 해도, 그들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것이 없기에 눈살을 찌푸릴지언정 효과적인 방법임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케니스의 경우는 아니다. 그는 남부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 아무리 목표와 방식이 같다고 한들 에스메랄다가 남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이성을 잃고 검을 그녀에게 겨눌 수도 있는 일이다. 치료제의 부재로 죽어 나간 이들 중 그와 친분이 있던 이들도 있을 테니까.

타인을 희생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으나 자신이 희생되는 것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이니 남부 폭동의 배경을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 귀족도 아니고.”

중앙 귀족들에게 이득을 위해 가족을 배신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형제를 죽이고 작위를 승계하는 이들도 있는 판에 무슨.

루그레디안은 현재 중앙에서 정계에 직접 발을 담그고 있고, 아브람 백작도 부인의 일이 있기 전에는 중앙에서 활동했다. 또한 앙그리트 일가는 그녀가 직접 황제에게 약점 잡힐 수 있는 일을 하며 테노리엘 백작과 반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들 모두는 결국 에스메랄다와 백작의 불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있는 상태였다.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가족을 배신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남부인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케니스는 에스메랄다가 테노리엘 백작과 다른 행보를 보이며 그와 반목하고 있다는 걸 믿을 리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케니스가 테노리엘 백작의 방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백작과 묶여 버리면 케니스의 호의나 신뢰를 살 수가 없다. 훗날 그것이 반군 규합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일.

“어떤 방법이 좋을까…….”

남부의 일에 대해 밝힐 수 없는 이상 그의 의심을 부추길 위험성도 존재한다. 고로 에스메랄다는 남부의 참극을 다른 미지의 존재에게 떠넘기고 그들을 속여야만 한다.

그게 케니스를 만나기 전 준비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 두 번째 과제는 에스메랄다가 백작과 다른 성향의 인물임을 증명할 수가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고.

“내가 아직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볼까?”

그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지금 당장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겠나? 어차피 반군이 체계를 잡고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나쁘지 않겠는데.”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 정도라면 훗날의 타협에 미리 기반을 닦아 둘 수 있으리라. 다가오고 있는 출장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연극을 한 편 집필해야 할 모양이다.

* * *

아르페시스가 대형 회의실 한쪽을 힐끔거렸다.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서둘러 눈동자를 돌렸지만.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지난봄 황태자를 아예 난도질했어야 한다고 후회 중이었다. 지금 그가 이렇게 초조한 건 모조리 그놈 때문이었으니 당연하지.

리퀘나를 탈환한 지는 9일,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여 진행되는 정기 보고가 시작된 지는 2시간이 지났다. 남부의 정기 보고는 앞으로 병력 운용이나 부대별 협동 작전같이 남부군 전체의 큰 틀을 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발생한 부대별 피해를 메우기 위해 필요한 인력도 충당하고, 물자 확보를 위한 상단을 물색하기도 하고, 또 그 물자를 각 부대에 분배하기 위해 필요한 기록까지 함께 보고 받는다.

지난달에 정리한 내역을 모아 합산하고, 해당 자료를 각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한 후에야 가능한 회의다. 보통은 각 달의 10일까지 전달의 내역을 총사령관이 보고 받고 합산해 25일까지 각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다. 이후 회의 참석자들이 리퀘나로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해 30~40일쯤에 열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겨울 근방의 부대와만 교류하며 고립되어 있다가 곧장 남하를 시작한 상황이다. 해서 겨울부터 보고 받지 못한 것들을 전부 올려 받아 급하게나마 회의를 개최했다.

리퀘나를 탈환했으니 다시금 남하하기 전까지 고생한 병사들을 치하할 물자도 산정하고, 그들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의 기간도 잡아야 한다. 아마, 여름에 그간 고생한 지휘부에 베푸는 만찬회도 생략될 가능성이 높다. 올여름은 예년보다 더 빠듯하게 남하를 해야 할 테니까.

“무구 수리를 제때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병장기 보충이 시급합니다.”

“남부에 있는 대장장이 수로는 겨울까지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기 힘들 겁니다.”

“이후 추가 남하도 생각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무구 점검을 위해 오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겠지요.”

“테노리엘 영지의 장인들을 초청하면 어떻겠습니까?”

“아, 6년 전에 백작님의 배려 덕분에 일반적인 시세보다 싸게 장인들을 초청했었지요?”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뒤에 기립해 있는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이번 서부 대란으로 영지민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겁니다. 6년 전처럼 전폭적인 지지는 힘들 것 같다는 게 제 개인적 소견입니다.”

“……물자 징집 때문이군요.”

“면세 규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제가 논하긴 힘든 문제 같군요. 자세한 사항은 현 영주 대리와 논의를 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테노리엘 영주 대리면, 에스메랄다였다. 그녀가 거론된 것만으로도 심장은 듣기 좋은 고동 소리를 낸다. 그것을 오래 누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또 한 번 회의장 한쪽을 훑었다.

“영주 대리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도록. 중부와 동부의 영주들에게도 대장장이를 비롯한 장인들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예, 총사령관님.”

현재 남부군이 직면한 문제와 해결 방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아르페시스가 왜 초조한가 하면……. 13부대의 지휘관인 앙뷔 남작과 그의 자제들도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겨울에 있었던 연회에서 황태자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여인은 3명. 그중 한 명은 자결했다고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본가에서 칩거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로웨나는 여전히 앙뷔 남작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어깨에 걸린 견장을 보건대 그녀는 이미 기사 서임을 받은 모양이다. 13부대도 계속 기사들이 비어 나갔을 테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망할, 망할.

반쪽이나마 황태자와 피가 섞여 있는 그로서는 도저히 앙뷔 일가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나 로웨나 옆에 서 있는 로실의 눈동자가 너무 이글거리는지라 등 뒤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다. 일이 터진 건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무렵이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결국은 위대하신 황자 전하의 뜻대로 따라야 할 텐데.”

최종적으로 종합한 내용을 정리하던 도중 들려온 소리였다. 너무나도 선명하고 정확하게 말한지라 그 말 직후 회의실 내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 말을 한 로실에게 집중되었다.

“로실, 그만해라.”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사과 한마디 없이 우리 앞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저놈 좀 보십시오!”

아르페시스 역시 로실과 앙뷔 남작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제 잘못…….”

“아버지!”

“입 다물라는데도!”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실랑이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페드로가 그의 등을 툭, 치지 않았다면 계속 그 상태였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페드로와 시선이 마주쳤다.

‘네 잘못이 아니다.’

벙긋벙긋,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페드로의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픽, 웃었다. 그래, 잘못을 한 건 황태자이지 그가 아니다. 고로 아르페시스가 위축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설령 피가 섞였다 해도 그 절대적인 전제가 변하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와 아르페시스가 죽고 못 살 정도의 우애를 나눈 진짜 형제였다면 죄책감, 혹은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형제의 잘못에 대해 함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허리를 숙일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몸속에 황태자와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아르페시스였다. 황태자가 해야 할 사과를 대신해 줄 우애도, 함께 용서받기 위해 노력해 줄 신의도 없다. 아르페시스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말을 꺼냈다.

“앙뷔 경이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것이니 부디 저를 벌하시고…….”

“아니,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대들의 분노는 정당하겠지.”

꺼림칙하고 힘든 주제지만 아르페시스는 죄인이 아니기에 당당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황태자에게 쏟아야 할 분노를 자신에게 쏟고 있는 로실을 한껏 비꼬아 주었다.

“내가 여덟 살 때, 놈이 내 음식에 설사약을 푼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배앓이를 하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아, 열한 살 때는 계단에서 떠민 적도 있고. 그때 다리가 부러져서 닷새나 훈련을 쉬어야 했지.”

“…….”

“재작년인가… 40도가 넘는 고열을 앓은 적이 있는데, 그게 또 놈이 내게 먹인 독 때문이었단 말이지. 그땐 정말 정신이 흐릿해서 내가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고. 이런 것들 말고도 꽤 많지.”

그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황자 궁 소속의 사용인들을 고문하는 일도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 앙뷔 경에게 분노해도 괜찮겠지? 그대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고, 내게 사과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또한, 로실이 한 모든 말도 이와 똑같은 억지였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쏘아보는 로실을 똑바로 마주했다.

“에렘에서 발생하는 겁간 사건만 해도 해에 수천 건이 넘는다. 그대는 그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나 보지? 그러니 내게 이 문제에 대해 따지는 것이고.”

말을 하다 보니 진짜 억울해졌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봄부터 시작된 수정 마도구 보내기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침묵이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속이 문드러지지 않는 날이 없는데.

사랑하는 연인과 생이별을 해서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다른 놈이 한 겁간의 죄까지 뒤집어쓰게 생긴 상황이라니.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닌 그대가 비난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누이가 겁간당하는 상황에서 황권이 무서워 숨어든 그대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을 왜 내게 뒤집어씌우는가 말이다!”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왜 죽여도 시원치 않을 황태자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여인과 관계를 가져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비슷한 죄를 지은 적이 있다면, 아니 여인을 침실에 들여 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쿡, 하고 터져 나온 웃음 때문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르페시스를 비롯한 다수의 시선이 웃음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로실의 곁에 있던 로웨나에게로.

“오라버니, 그만 좀 하세요.”

“로웬!”

“전하… 아니, 총사령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억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앞에서까지 함부로 행동하기엔 또 눈치가 보인다. 아르페시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숨길 일도 아니지요. 그 일에 관련되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총사령관님이 아니라,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이들이지요.”

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정수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절 구하겠다고 황태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로웨나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쯤 제 동료들 중 일부는 반역죄로 처형당했을 거고, 남부군 전체는 반역도를 품고 있었다는 억지에 시달리며 중앙의 지원을 잃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웨나, 너도 그만해라.”

“아뇨, 아버지.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오라버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총사령관님을 탓하는 어이없는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대체 무슨 심정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그리고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니 반드시 짚고 가야겠습니다.”

남부군에서 남녀의 성비는 8:2 정도. 많을 때는 6:4 정도까지 늘어난다고 일고 있었다. 타 지역에서 여기사의 비율이 1할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추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일에 총사령관님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저 역시 잘못한 것이 없기에 당당합니다.”

로웨나의 말을 다른 여기사가 받았다.

“맞습니다. 현실의 문제 때문에 기사도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이니 잘못을 따지면 앙뷔 경이 아닌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에 로웨나는 회의장을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절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 좀 그만하십시오. 진심으로 짜증 나니까.”

솔직히, 아르페시스도 그녀를 향한 동정심이 없지는 않았기에 몸이 움찔거렸다.

“당장 그 발정 난 개자식의 목을 선물로 가져다줄 게 아니라면, 적당히 하라는 말입니다.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예요.”

흥, 하고 콧방귀를 낀 로웨나가 아르페시스를 향해 몸을 틀더니 말했다.

“제 오라비가 행한 무례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불경과 하극상으로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부디 총사령관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해 봅니다.”

“……되었다. 불문에 부치겠다.”

아르페시스는 로웨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조금 전 스스로가 동정받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똑똑히 밝혔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는 건 그녀를 동정한다는 의미가 될 터. 치부나 마찬가지인 일을 직접 꺼내 들며 용기를 낸 기사에게 그럴 수는 없다.

“영광입니다.”

“……영…….”

로웨나가 허리를 숙이자 로실 역시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차마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르페시스는 그의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다시 회의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진짜 총각이십니까?”

이어 나온 로웨나의 질문만 아니었다면 원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초, 초, 초…….”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아르페시스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든 상태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 나이가 되시도록 왜…….”

로웨나의 질문을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칼라일이 받아 다시 한번 확인 사살에 들어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거기에 페드로가 한 수를 더 거들었다.

“뭐, 가끔 속옷을 적시며 깨시긴 하는데 아직 경험이 없으신 건 맞…….”

“페드로!”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르페시스가 경악 어린 시선으로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로웨나에게서부터 시작된 웃음소리가 회의장 전체로 퍼졌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본 것만 두…….”

“그만, 그만! 그 입 다물라!”

한 대 때려 버리고 싶은 특유의 얄미운 표정을 지은 페드로를 보며 아르페시스가 악을 썼다.

“회의가 끝나면 괜찮은 이를 보내 드릴까요?”

“저희 부대 쪽에 매력적인 여인들이 많습니다.”

“내, 내가 알아서 한다!”

“거참, 능숙한 이들로 보내 드릴 테니 처음에 대한 걱정은 털어 내시지요.”

“이건 흐, 희롱이다! 그만!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겠나!”

아르페시스가 충격 속에서 말을 더듬는 동안 여기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내들이란.”

“하, 너희도 사내를 찾으면서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찾는 거고. 너희는 발정이 나서 쫓아다니는 거니 다르지.”

“우리도 전장에서 지친 몸과 영혼을 달래는 거라고.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다가 여인의 살결에 취하면 그게 얼마나 행복한데.”

회의장 가득 음담패설이 들어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르페시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페드로의 웃음소리에 부들부들 떨었다.

“또 우리만 좋은 것도 아니고, 그녀들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기도 한다고.”

“여인들 사이에 네놈의 허리 짓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파다한데, 먼저 찾기는 무슨.”

이제 회의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아르페시스 뿐이었다. 창녀와 부대가 함께 움직인다는 말은 그도 당연히 들어 보았다. 피와 살육, 죽음의 공포 속에서 흥분한 이들이 이성과의 성행위에서 그것을 달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휘부의 정기 회의에서 이런, 이런 난잡한……!

“남부에선 쉬쉬하고 덮었다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문제가 바로 성욕에 관한 거라서.”

아르페시스가 날이 바짝 선 시선으로 페드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페드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지 않았다. 남의 사생활을 그렇게 떠벌리다니!

페드로는 낮게 웃으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마나 장막까지 쳐 가며 그들의 대화를 감춰 주는 게 배려인지 괴롭힘인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매일 직면하는 죽음과 공포, 거기서 빠져나오는 데 타인의 체온만 한 게 없어. 아직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실감을 하게 해 주니까. 그리고 피를 본 후 흥분한 상태에서 그걸 진정시키는 데 정사만 한 것도 없고. 여기사들도 다르지 않아. 그녀들도 욕구를 품고 있는 엄연한 인간이니까.”

“…….”

“물론, 다들 저렇게 시정잡배처럼 말하긴 해도 긍지와 명예를 가진 기사들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들 중 그 누구도 강제로 상대방을 취하지 않아. 그러니 그들의 명예와 긍지를 의심하지는 마라.”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페드로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혼인도 하지 않은 이성과 육체관계를 가지는 것에서 어떻게 명예와 긍지를 찾는단 말인가!

“제국법상 황실의 인가를 받지 않은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된 것은 맞지만… 전장에서 불법을 운운하며 행위를 금하기만 하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거든.”

실제로 각 부대는 암암리에 전속으로 계약한 창녀 무리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성욕을 해소해 주지 않으면 후방 지역으로 휴가를 간 병사들이 민간인을 겁탈하는 사건까지 발생할 수도 있다. 때때론 개인 간의 일이 국가적 일로 번져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것처럼, 남부군은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주의해서 다루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만약 병사들이 행하는 겁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거나 해서 남부군을 향한 시선에 부정적인 요소가 확연하게 늘어나면? 중앙의 지원이 흔들리는 명분이 될 수 있고, 남부군의 운용이나 지휘가 중앙 귀족들의 입맛대로 움직이게 될 위험성도 있다. 페드로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남부군에서는 성욕 문제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대신 인정하고 보듬어 다음 문제로 커지지 못하도록 관리한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리는 이들이 수두룩하게 나올 수도 있어. 그들이 병영 내에서 아군을 찌르거나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게 되고.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 방안이 있나?”

페드로는 현실적인 문제를 짚으면서 그것이 글로 만들어져 있는 도덕과 어떻게 상충되는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위안거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상황과 가혹함으로 내몰리기만 하는 상황은 많이 달라. 모든 인간의 인내심이 강철마냥 튼튼한 건 아니니까.”

결국 죽음의 공포를 마주해야만 하는 군대에서는 이 문제를 덮고 쉬쉬할 수만은 없다는 게 페드로의 설명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해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했다. 이론으로만 알던 문제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치자 아르페시스로서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페드로의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에서 성적인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젊은 층의 기사들이지만, 그들의 대화는 모두 나이가 있는 중년층의 묵인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 세대는 순결이 강조되는 시대 풍조가 강했다. 결국 이런 문제에 고지식할 수 있는 윗선도 동참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욕을 가지고 있어. 그걸 법의 울타리 밖에서 풀어낸다고 해도…….”

“…….”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버둥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어. 이런 성욕 문제를 제거하려면 인간을 광기에 취하도록 만들거나 흥분하게 만드는 전투 자체가 없어야겠지.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세대에게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수와 전쟁 중이야. 문제는 어떻게 해도 발생해.”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하지만 페드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때때로 시간은 문제를 인지하기도 전에 터트려 버린다. 군의 전술이나 전투, 군 내부의 사건들도 마찬가지. 다분히 성적인 문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남부군 내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실제 난동을 부리거나 자결을 하는 이들에 관한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아르페시스는 급박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어디서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의 병력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고, 수천의 처분이 달라지는 군법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남부군은 강제적인 관계가 있었음이 밝혀질 경우 군내에서 거세 및 참수 등의 엄격한 처분을 내리고 있어.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의 예방과 해결을 위해 인력과 자금을 투입 중이지. 그 외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상대방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제공하도록 행정 처리가 마련된 상태고.”

원하지 않은 자리라 해도 한번 오른 이상 아르페시스는 이미 무거운 책임을 뒤집어썼다. 그는 원하지 않는다 하여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페드로는 무겁고 힘든 짐을 짊어진 아르페시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이런 방식에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정당한 보수가 오가는 관계 도중에 폭력이 가해지기도 하거든. 그 부분도 군법 재판으로 다루고 있지만… 쉽게 해결되지는 못하고 있어.”

페드로는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런 문제를 포기한 사람에 가까워. 결코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선을 시도할 수는 있지만… 완벽은 불가능해. 세상에 완벽한 제도와 해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내 입장이다. 너는 어떻지?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지?”

아르페시스의 말문이 막힌 사이 페드로는 한숨을 내쉬며 회의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마디를 덧붙여 볼까? 지금 남부군이 취하고 있는 방식은 누군가를 짓밟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방법 외의 어떠한 대안도 찾지 못했어. 그렇기에 지금의 방법에 찬성하는 사람이다. 성욕에 관한 문제 말고 생존에 관한 문제도 얽혀 있기 때문이지. 남부에서는 이렇게라도 돈이 돌아야 해.”

“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남부의 시장이나 상권 같은 경제가 모조리 남부군 위주로 구축된 바람에 직업의 수가 제한되고 있다. 의원, 약초상, 대장장이, 광부, 각 상단의 행정관 정도가 평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거의 전부라면 이해가 쉬울까?”

“…….”

“현재 남부 백성들의 선택지에는 곡물이나 과일, 꽃 등의 농작이나 재배에 관련된 것이 없어. 대부분의 남부 지역은 전선을 넘어가 십여 기씩 움직이는 마수들과 그놈들의 시체 때문에 성벽 외부에서의 농작이 불가능한 상태니까.”

전선이 고착된 이후 남부에서 대규모 농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가 백성들의 직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농작에 필요한 인력은 소수보다 다수에 가깝다. 농작이 불가능해지며 일자리를 잃은 그 다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직업의 종류는 제한되어 있고, 그 직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도 시장의 규모에 따라 제한이 되어 있지. 그럼 그 제한된 소수 안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은 어떻게 먹고살고 있을까?”

전선의 고착화가 가져온 문제는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돈을 주고받는 육체관계. 그래, 매춘은 군에서 병사와 기사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이 군 외부로 흘러나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해.”

아르페시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아직도 단편적이다. 세상을 넓게, 그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본인을 주축으로 세상을 보는 건 인간의 당연한 습성이다. 그렇기에 지배자가 될 사람은 그 습성을 버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런 방식으로나마 돈을 벌지 못하면 굶어 죽는 이들이 수두룩해질 거야. 때론 부부가 합의를 하고 군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

“그게 무슨…….”

“남편은 여인을, 부인은 사내를 상대로 체온을 나눠 준다고. 어려운 일이지.”

저 말이 정말 체온만 나눠 주는 것일 리 없다.

“나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지만… 만약 훗날에 혼인을 한다면 내 배필이 다른 사내와 살을 섞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나 역시도 배필의 맹세를 하는 날부터는 그녀에게만 충실할 생각이니까.”

아르페시스는 어쩐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나는 내 배필이 정조를 대가로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 재산도 꽤 되고, 기사단에 적을 올린 동안 나온 봉급도 쌓여 있으니까. 하지만 나와 같지 않은 상황의 사내들은? 혹여나 전쟁에서 불구가 되어 전역한 후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사내라면?”

은퇴한 군인에게는 남부군으로부터 지원금이 나가지만 그것도 3년이 한계였다. 유가족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은 5년이 끝이고. 배필이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성을 팔지 않으면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면, 막아설 수 있나? 페드로는 묻고 있었다.

그 질문에 아르페시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혼인을 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사지가 잘린 상태를 가정해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숨을 쉬는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필이 돈을 벌어 오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해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성을 파는 것 외에 없다면? 그녀에게 함께 굶어 죽으라 강요할 수 있는가? 누군가로 특정할 수 없는 그녀를 에스메랄다라고 가정한다면…….

역한 구토감이 그를 찾아왔다. 최선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서 최선의 선택이 있기는 한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도 있어. 지독하지? 황실은 남부 백성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하지 않아. 남부군을 지탱하는 게 전부다. 그래서 남부군이 대신 그것을 어떻게든 채워 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어.”

“…….”

“매춘을 하고 있는 이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수입원이 끊긴 그들을 네가 먹여 살려 줄 생각이고?”

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가 성을 매매하는 그들의 생존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러지 못할 거면 넌 그들에게 굶어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그들은 쾌락이 아닌 생존을 위해 지금의 선택지로 내몰린 것이니까. 이건 개인이 아니라 단체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지만… 지금 황실이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

아르페시스는 조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방식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은 일찌감치 부대에 함께 소속된 인물과 약혼이나 혼인을 하고 그 상대방과만 관계를 가지기도 해.”

아르페시스는 그들에게 정조를 강요하며 성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페드로는 더 엄하고 잔혹하게 현실을 알려 주었다.

“현실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건 좋다.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변화도 없으니까. 하지만 남부의 성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도도 갖추지 못한 채 이상을 강요하는 건 살인과 다르지 않아. 피와 공포에 흥분한 이들이 그걸 제때 식히지 못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잊지 말아라.”

불현듯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대체 페드로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저리도 잘 아는가?

“설마… 그대도……?”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 때면 종종. 나도 죽음이 무섭고 광기에 지배당하는 인간이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나랑 형은 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을 때 가문에서 밤 시중 시녀를 따로 데려와서 했기 때문에 남부 백성들과는 관계를 가진 적이 거의 없고. 이번에도 그리 많지는 않아.”

“그, 그러다 아, 아,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피임약을 복용하지. 군내에서도 이성을 찾는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피임약을 지급하고 있다.”

남부군에 적을 올린 이가 상대를 찾으려면 이 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부에 가서 서명과 기록을 남겨야만 한다. 만일의 경우 여인이 임신을 했을 때 기록과 마도구로 친자 판별을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페드로는 임신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8할가량은 혼인을 하는 편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걸 거부하는 이들의 경우에는 남부군이 직접 해당 병사나 기사들의 봉급에서 배상금과 양육비를 제해 대리 지급을 하고 있지.”

이 대화는 아르페시스에게 혼란을 넘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성관계를 배필과 하는 신성한 것이라 배웠다. 혼인하지 않은 이와 하는 관계는 본인과 같은 사생아를 만들 수 있기에 경멸하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남부에서는 그런 도덕만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부 전선은 성의 문제를 생존의 문제와 엮어 낸 지 오래다.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지? 물론 현실의 문제를 이해했다고 해서 자신이 틀렸다고 여겼던 방식을 곧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저들은 쾌락이 아닌 생존을 위해 이성의 품을 찾는 거야.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도 모두 되어 있고 배우자를 기만한 것도 아닌데, 지금의 방법이 아니면 남부군이 직접 관리 중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거지?”

“…….”

“성욕에 관한 문제를 지금처럼 인정하고 해소할 방도를 마련하지 않은 채 덮고 쉬쉬했을 때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은?”

페드로는 언제나 아르페시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글로만 세상을 배운 그가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이미 그를 형제처럼 여기기에 그가 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은 수십, 수백 단위가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숫자만큼 많은 방식과 방향이 존재한다. 페드로는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이해하길 바랐다. 더 다양하고 많은 방향에서 세상을 보는 것, 그게 지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애초에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문제를 보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정리해 가르치는 것이 제왕학이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보며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현상을 보고 파악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페드로 자신이 보는 세상이 아르페시스가 보는 세상과 다름을 알려 주면서 그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또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참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현재 남부군의 방식에 찬성하는 편이다. 중요한 건 참는 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지.”

“무슨 의미인가?”

“생존을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아이가 생긴다면 혼인으로 책임지는 것. 그 가정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만약, 술이나 약에 취해 강압적인 행위를 하는 등의 죄를 지었다면…….”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경멸인지, 이해인지, 그도 아니라면 낯선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인지 모를 것이 가득 뒤덮여 있었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지. 그리고 속죄를 하는 것까지.”

“그런다고 죄가 없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가장 좋은 건 그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거지만… 최악의 경우 그것에 실패했을 때를 말하는 거다. 최악의 경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달라.”

페드로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대는 만약…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당연히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관계는 가질 생각이 없다.”

페드로가 전장에 서는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마나 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폭력성을 경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손짓 한 번에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강자였다. 만약 술에 취했을 때 그의 기분이 나쁘다면?

화가 나서, 억울해서, 기분이 나빠서, 눈앞의 거슬리는 것을 전장에서 마수를 죽이던 것처럼 제거해 버리고자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생명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며 주군에게 충성하겠다는 기사도에 반하는 짓이다. 페드로는 자신의 속에 담긴 살의와 광기가 술에 힘입어 폭력성이 되어 나오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술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인내심이 강철보다 튼튼한 것은 아니다. 그도 사람이다. 죽음이 무섭고 때때로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그에게도 전장에서 한껏 달구어진 몸을 식히기 위해 이성과의 정사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준비의 미흡으로 아이가 잉태된다면 책임져야지. 그럴 일이 없도록 조심은 하고 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만약 혼인을 약속한… 그러니까 약혼녀가 있다 해도? 아니 이미 혼인을 한 상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겠지. 약혼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파혼을 하거나, 외부에서 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

“아이는……?”

“당연히 내 호적에 올려야지.”

페드로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태도로 대꾸했다. 너무 충격적인지라 허탈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피식, 하고 웃은 페드로가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성과의 육체관계는 생각보다 큰 유혹이야. 사내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겁간 사건은 물론, 여성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겁간 사건도 매해 발생하고 있다. 수치적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여인이라고 욕망에서 자유로운 건 아냐.”

“…….”

“쌓이고 쌓이다가 자제심을 잃고 망가지는 이들도 많아. 나도 인간인 이상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페드로는 그래서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전에 주기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인간을 갉아먹는다. 나도, 너도, 전장의 광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나는 다를 것이다, 나는 특별할 것이다, 같은 생각은 현실이 아니라 몽상을 꿈꾸는 헛된 것이지. 너도 너만의 해결 방법을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페드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사실 아버지께서 좀 특이한 경우셨지.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 외의 여인과 관계를 가지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 덕분에 배다른 동생이 생기지 않았다고나 할까?”

아니, 왜 백작 내외의 침실 사정을 듣고 있는 것이지?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페드로가 쿡쿡 웃었다. 무겁고 답답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지만 방금 전 대화로 알게 된 현실의 무게는 평생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르페시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고, 또한 페드로가 일부러 분위기를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실제로 페드로는 아르페시스를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달려드는 문제를 직면해 보았으니 이제 그것을 속에 담아 둔 채 고민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페드로가 조언했고 아르페시스가 받아들였다.

“내가 다섯 살 때인가… 그때까지 아버지께서 전선에 계셨거든? 쌍둥이 녀석들이 태어난 이후에 완전히 내륙에 들어오셨고. 그런데 아버지께서 저택으로 귀환하시면 유모가 나랑 형을 꼭 다른 방에서 재우는 거야.”

듣고 싶지 않은데, 또 듣고 싶기도 하고. 아르페시스는 양심이라는 이성과 호기심이라는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에게 결정권을 넘겨준 적이 없는 페드로는 말을 이어 갔다.

“어릴 때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지금은 얼핏 짐작이 된다고 할까? 그때 나랑 형이 어머니 침실의 옆방을 썼거든. 아버지가 휴가의 대부분을 어머니의 침실에서 보냈던 걸 생각하면…….”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는 아르페시스에게서 난 것이었다.

“뭐, 자식들에게 그런 부분을 들키고 싶진 않으셨겠지. 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거든.”

꽤나 짓궂은 표정으로 웃는 페드로는 즐거워 보였다. 아르페시스와 달리 그는 추억이라 부를 만한 기억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그런 것을 타인에게 말하면 어찌하는가!”

“뭐가? 당연한 거잖아?”

“그, 그, 그건!”

“두 분이 부부 관계를 가지셨으니 내가 태어난 거지. 내 형제들과 누이도.”

그건, 그건 그렇긴 한데. 아르페시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사내가 여인을 원하는 게 뭐가 나빠. 아버지는 사내이시고, 두 분은 혼인을 하셨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다고.”

“허!”

“미혼의 이들이 이성을 원하는 것도 결국은 당연한 거야. 거기서 신경 써야 하는 문제는 원한다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진행 과정, 그리고 이후의 책임이지. 그것을 위해 교육을 하는 거고. 욕망 자체는 당연한 거라고. 너도 아직 쪼그만 천사를 대상으로 이것저것 생각 정도는 하잖아?”

저 당당함이라니!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페드로의 말은 반만 맞았다. 아르페시스 역시도 에스메랄다를 원한다, 라는 욕망은 가지고 있다. 혼자 이것저것 해 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그녀가 아니라 꿈에서 본 그녀, 성숙하게 자란 에스메랄다가 대상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욕정하는 변태가 아니기에, 여전히 어린 에스메랄다와 꿈속의 에스메랄다를 구분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페드로는 그런 아르페시스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눈치였다. 필시 그간 자진해서 제출한 꿈속의 일기 때문이리라. 왜 하필 그런 꿈을 꿔 가지고는!

그렇다고 그런 종류의 꿈이 싫으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지만……. 아무튼, 페드로가 한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충격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아르페시스가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을 종합해 보면…….

“설마 이번 일정 동안에도……?”

“뭐, 두어 번.”

아르페시스는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배신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는 페드로가 아닌가. 그러니까, 따로 움직이려면 그가 잠들어 있는 시간 말고는 없다. 결국 페드로는 그가 자는 동안…….

“그렇게 짐승 보듯 쳐다보지 말아 줄래? 휴고도 같이 갔다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페드로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페드로와 휴고의 사생활을 이런 식으로 듣고 있는 거지?

아르페시스는 차마 페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회의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드로는 그 행동을 대화의 끝으로 여긴 모양이다. 마나 장막이 사라지고 차단되어 있던 외부의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때 하필 가장 선명하게 들린 게…….

“그 사내가 잘하긴 했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을 꺼낸 여기사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여기사의 입매에 조금 짓궂은 미소가 걸린 것과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드는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접한 여체는 교재에 있던 그림이 전부란 말이다! 아니면 꿈에서 본… 아르페시스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순진한 반응이 짓궂음을 자극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기사들은 점점 더, 단어의 수위를 높여만 갔다.

때때로 순진한 이를 괴롭히는 것은 재미있는 법이다. 언제 다시 아르페시스를 놀려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기회가 온 김에 해야 하지 않겠나? 확실한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남부의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책상 위에 얼굴을 묻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참 아이러니한 건, 귀는 쫑긋거리며 주변의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걸까?

사춘기의 소년이란, 아르페시스를 보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현실에 대한 암울함을 잠시나마 웃음으로 덮어 낸 시간이었다. 아르페시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 * *

예정보다 길어진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을 나서던 길, 로웨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붉은 홍조가 남아 있던 아르페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움찔거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로웨나 역시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것으로 무언의 인사를 대신했다.

처음 아르페시스가 남부군의 총사령권을 이어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가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이가 어떠하든 아르페시스가 황태자의 이복동생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황족의 핏줄이 어찌 달갑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로실처럼 적대감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황태자에게 그 끔찍한 일을 당하던 당시 동료들은 침묵했지만 그녀는 포기를 했으니까.

‘하……! 꽤나 맛이 좋은데, 기대 이상이군.’

역겨운 숨소리와 함께 들려왔던 모욕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황태자에게 한 방 먹이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로웨나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확신했고, 아직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서 복도를 걸으며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황태자가 있던 때와는 꽤 다르겠네요.”

“……그래.”

그녀는 그 일이 있은 후 죄인처럼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던 부친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또한 그 울음 끝에 자신에게 찾아왔던 치하 역시도 잊지 않았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내 딸아.’

잘 참아 주었다고, 아비가 미안하다고……. 앙뷔 남작은 딸보다 남부와 남부군 전체를 선택했고, 로웨나 역시 자신보다 남부와 남부군 전체를 우선시했다. 그렇기에 황태자와 달리 직접 전장에 서며 남부군과 함께하고, 그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도록 노력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속으로는 그가 꺼림칙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황족인데 사비가 꽤 되지 않을까요?”

로웨나는 황태자와 피가 섞인 아르페시스를 원망하기보다 그를 이용해서라도 남부를 지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도. 일전 테노리엘 경에게 듣기로는… 겉으로는 적통 황자 대우를 해 주고 있다고 하더구나.”

생일 연회도 매년 열리고, 처음으로 마나 유형화에 성공했을 때는 별장을 선물해 주었으며, 선생들도 황태자의 교육자처럼 최고를 뽑아 붙였다고 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황제가 꽤나 공들여 만든 장기 말이며 황실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소모품이다. 황도에서 자라난 아레스가 전선에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을 때 만난 적이 있던 남작은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걸 남부군으로 가져와 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황족의 사비면 꽤나 큰돈일 테니 말이다.”

“그 일을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던데, 그걸로 자극해 보면 어떨까요? 보니 꽤 순진하고 선한 인물인…….”

“선해? 정말 그리 여기는 거냐? 결국은 그놈도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피를 이었을 뿐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로실이 기회를 잡았다는 것처럼 득달같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날 그녀의 부친은 무릎을 꿇고 울며 칭찬해 주었지만, 그녀의 오라비는 제대로 시선도 맞추지 못하며 울기만 했다. 로실은 예전부터 욱하는 성질머리로 남작에게 자주 혼이 나곤 했다. 지금처럼.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걸음을 멈춘 로웨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함께 멈춰 버린 로실을 돌아보았다.

“자꾸 방해할 거야?”

“뭐라고?”

“오라버니는 지금 황자의 사비를 남부군이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고 있잖아.”

“그깟 돈 몇 푼…….”

“그깟?”

로웨나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그 몇 푼으로 병사들을 치료할 약제를 살 수 있어!”

로실이 그깟 돈 몇 푼이라 칭한 것으로 전력을 보존하고, 나아가 강화할 수도 있었다. 눈앞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나타났는데도 걷어차려는 로실의 행동에 화가 났다.

“절단 부상으로 은퇴해야 하는 기사들을 치료할 신관을 불러올 수 있다고!”

억울하고 모욕적인 일을 당했으나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것에 얽매여 울기만 하는 건 로웨나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 그것을 이용해 그녀의 고향과 동료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쓰는 게 더 옳다고 여겼다.

“그딴 식으로 굴 거면 연회장 밖으로 순순히 끌려 나가지 말고 난동이라도 부리든가. 그땐 하지 못하고 왜 지금 와서 이래?”

로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이를 지켜 주지 못한 순간을 분노해 주고 있는 그의 행동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침묵으로 잡으려 하는 기회를 방해하려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거 알아?”

로웨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문 로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런 일을 당했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아.”

그녀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로웨나는 이를 악문 채 로실을 노려보았다.

“오히려 이 문제를 기회로 남부를 위한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겁간을 당했노라 대륙 전역에 선언을 해도 상관없어.”

“…….”

“그런데 오라버니는 그런 내 각오를 자꾸 잘못된 것으로 몰고 가잖아!

“아니야! 난 그런 의도가 아니……!”

“내게는 그렇게 보여.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무런 이득도 없는 사과가 아니라 물질이라고! 수천, 수만의 병력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망치려는 오라버니가 내가 하려는 일을 부정하는 것과 뭐가 달라!”

로실이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그러니 정도껏 해. 지금 오라버니가 하는 행동은 오라버니 본인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거칠게 로실을 밀어낸 로웨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을 기다리는 앙뷔 남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먼저 가요, 아버지. 오라버니는 조금 후에 온대요.”

“……그래.”

로웨나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앙뷔 남작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선택을 했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선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버리고 상처 입히는 것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분명 그 일에 대해 일말의 부채감을 느끼는 것 같았으니 피해자인 그녀가 직접 나서서 자극하면 그의 사비를 남부군에 복속시킬 수도 있다.

다음 날, 로웨나는 아르페시스를 만나기 위해 가던 중 칼라일을 마주쳤고 자신의 계획이 불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총사령관님을? 어제 회의에서 결정된 것 중에 13부대 쪽에서 조정해야 할 부분이라도 있어?”

아르페시스를 만나러 가던 길이다, 라고 설명했을 때 칼라일이 이유를 물었다. 그와 함께 총사령관실로 가며 로웨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미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칼라일이 자신처럼 남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지 오래니까.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이었다.

“그거 임명장이 왔을 때 이미 진행됐어.”

“뭐……?”

“리퀘나까지 남하하는 동안 기존에 보유 중이던 물자의 8할을 넘게 썼다는 건 알지?”

당연히. 어제 정기 회의에서 그간 소모한 물자를 전부 취합해 계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시 남하를 준비 중이잖아. 그 물자가 어디서 나왔겠어.”

“…….”

“리퀘나로 출발하기도 전에 총사령관님의 사비로 추가 구매를 시작했다. 며칠 내로 리퀘나의 각 성에 배분될 거야. 이후 부대에게 지급되는 2차 배분은 이번에 정해진 일정대로 진행할 예정이고.”

로웨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비가 조금 있을 거라고 하시기에 티는 안 냈지만 살짝 기대는 했거든? 일단 황족이시잖아. 그런데… 진짜 많더라.”

“…….”

“군 전체의 2년 예산을 조금 웃도는 규모였어. 뭐 기록을 보니까 궁 유지비 외에는 따로 꺼내 쓰신 적이 없더라고. 덕분에 10년 넘게 모여서 그 정도인 것 같은데… 당분간은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난… 몰랐어.”

“굳이 알리지 않았으니까. 구매해 둔 추가 물자가 도착하면 그때야 총사령관님의 사비에 대해 얘기가 나돌겠지.”

“……왜? 미리 말했으면 남부군 내부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우호 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일에 침묵을 택했단 말인가? 그 질문에 칼라일은 조금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그게?”

“일단… 처음에는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그런 일로 생색을 낼 생각이 없다고 하셨거든?”

일단? 로웨나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근데 막상 꺼내 보니 꽤 많았던 거라고 해야 하나?”

“……아?”

“꺼내 쓴 적이 없어서 얼마가 들어오는지도 모르시고 계시더라.”

칼라일은 그 일이 있었던 당시를 떠올리며 조금은 허탈하게 웃었다.

‘뭐라? 그리 많다고?’

‘아니… 사실 얼마가 들어오는지 잘 모르는데… 궁의 관리는 다 카덴이 알아서 했으니까…….’

‘연회복이나 장신구? 그거야 연회가 있을 때마다 황실 내정에서 내 물품이 따로 나와서…….’

‘검이랑 무구? 내 성장에 대비해 치수별로 전부 구비가 되어 있는데 또 살 필요는 없지 않나.’

‘애초에 사비를 꺼내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다.’

본인 스스로도 금액이 믿기지 않는 듯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르페시스였다.

‘이 정도 규모면… 내년 카의 달에 나오는 사비에선 조금 제외해도 되겠나? 많이는 아니더라도 요, 용돈으로 쓰, 쓸 수 있게 조금 남겨 주면 좋겠는데…….’

용돈이라니, 본래 그의 돈인데 왜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칼라일은 머뭇거리면서도 카의 달에 배정되는 사비의 일부는 따로 빼 달라던 아르페시스를 떠올렸다.

“남부군의 2년 예산이 당신의 사비로 충당이 된다는 거에 꽤나 충격을 받으신 것 같더라고.”

“…….”

“어이가 없지? 우리도 그랬다.”

칼라일은 용건이 끝난 것 같으니 먼저 가 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로웨나는 그런 칼라일의 뒤에 남아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것은 혼란이었고, 또한 당혹감이었다.

* * *

뜨거운 햇살이 공기를 달구고, 녹음으로 사방이 물드는 라의 달이 끝났다. 싱그러운 생명을 가득 품었던 나무는 색색으로 물들고 바람은 서늘해지기 시작한 사의 달이 한창인 것이다.

리퀘나를 탈환한 남부군은 정비 기간을 가진 후, 마수들이 움직임을 멈춘 라의 달 동안 전선을 밀어냈다. 예년보다 많이 내려가지는 못했지만 남은 가을 동안 빠듯하게 움직이면 겨울을 버틸 만한 영토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에스메랄다는 오래전부터 예정해 왔던 출장을 나온 상태였다.

“생각보다… 어린 손님이 왔군.”

그녀는 온몸을 장악한 근육통을 느끼면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넘은 절벽만 3개다. 2개는 완만한 형태의 암석 지대라고 표현해야겠지만 마지막 하나는 정말 직각으로 깎여 있는 가파른 절벽이었다.

솔루베르 공작령까지 말을 타고 오는 데만 해도 체력의 한계를 느낀 에스메랄다가 그걸 직접 넘어온 건 아니다. 북부에서 합류한 테란이나 시리스의 등에 번갈아 가며 매달려 있었던 것뿐이다. 그럼에도 몸을 쓰는 것에는 영 재주가 없는 그녀는 지친 상태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케니스를 의식해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계속 그리 싸매고 있을 건가?”

에스메랄다는 현재 후드와 복면 등을 이용해 외관적 특징을 모두 가린 상태였다. 이곳까지 그녀 일행을 안내한 케니스의 기사에겐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또한 함께 온 테란을 비롯한 전 황실 기사들과 시리스까지. 모두가 에스메랄다를 부를 때 아가씨라는 단어 대신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성별을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도 알려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이 어린 소년인지, 소녀인지. 그 정도 정보만 제한해도 추측의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그들로서는 에스메랄다가 영식인지, 영애인지조차도 알 수 없을 테니 나이를 추측해서 가문의 이름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제약이 걸린다.

그녀는 케니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손을 들었다. 그의 뒤에 주르륵 서 있는 지휘관급 기사들을 가리킨 것이다.

“내보내라는 의미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케니스의 얼굴에 잠시간 불쾌감을 표방한 찡그림이 들어섰지만 에스메랄다는 침묵으로 답을 재촉했다. 그들을 내보내지 않는 이상 대화는 절대 불가능할 거라는 의도를 담아서. 결국 그녀의 침묵에 케니스가 먼저 손을 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부관 둘을 남겨 두는 것 정도는 에스메랄다도 양보했다. 그녀 측에서도 시리스와 테란만이 남고 다른 이들이 모두 천막 밖으로 나섰다. 직후 테란이 마나 장막을 펼쳤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반군의 소굴에 들어가는 데 호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테란을 비롯한 황실 기사단 출신들과 합류를 한 이유였다. 대인 전에서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던 그들의 실력은 에렘에서도 수위를 다투니까.

“이제 그 귀한 얼굴을 좀 볼 수 있겠나? 그대가 누구인지,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건지, 궁금한 것이 아주 많거든.”

삐딱한 자세를 취하는 케니스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금발이 흐트러지는 사이 눈 밑까지 가려 주던 복면도 끌어 내렸다.

“언행에 주의하는 게 좋겠군요, 알그레노 자작.”

“…….”

“아니, 알그레노 가문의 몰락을 가져온 어리석은 가주라고 칭해야 할까요?”

케니스의 침묵 위로, 그의 뒤에 기립해 있던 두 명의 부관이 얼굴을 찡그렸다. 한 명은 라 루가 오세라, 평민 출신의 상급 여기사. 다른 한 명은 사 루가 베르토 시나, 베르토 남작가의 삼남으로 케니스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조카였다. 케니스는 위로 누이만 셋인 막둥이였으니까.

“자작… 이라. 그대의 나이에 금발, 녹안…….”

“꽤나 놀란 모양이군요.”

“적어도 사내아이일 거라고 생각했으니 이해해 주시오.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하는군, 테노리엘 영주 대리.”

이래서 외관과 성별을 철저히 숨긴 것이다. 그녀의 나이대, 성별, 외관을 알게 되면 가문의 이름을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까. 만약 케니스를 부르는 호칭에 주의했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케니스와의 신경전에서 잡을 수 있는 기선 제압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시간은 아니다.

“이름을 알아내셨으니 제가 왜 그렇게 정체를 숨기는 데 주의했는지 이해하셨을 거라고 믿어요.”

“……그대 덕에 내 병사 수천이 굶주림을 피했소. 하니 기밀 유지에 신경을 쓰리다.”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테노리엘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반역죄로 엮여 황제의 중앙군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최근 아르페시스와 페드로의 연결점 때문에 몸을 사려야 할 테노리엘 입장에선 절대 들켜선 안 될 일이다. 그걸 이해한 케니스가 그녀의 이름을 감춰 주는 데 동조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만약 그녀의 정체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여기에 있었던 세 명만 의심하면 될 일이기에 수를 줄인 것이고. 그녀가 식자재를 충당해 준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살아났을 터. 케니스는 그 일로 에스메랄다에게 최소한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부탁드리죠. 아직 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일이라.”

“……백작님과 상의가 되지 않은 일이오?”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임명된 사건에서 백작은 아들을 파문하는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가 자식보다 의무를 우선순위에 둔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의무와 자식이 충돌할 때의 문제다.

의무가 끼어 있지 않다면 백작은 자식을 위해 기꺼이 고단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이 때문에 그는 페드로의 문제에 있어 어려운 명분을 마련하고 있다.

‘서부를 지켜 낸 황자를 모시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남부를 구원하고 있는 황족을 모시는 건 영광이다.’

백작은 이러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중이다.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결합이 아닌, 황실의 아들을 모시는 것뿐이라고. 페드로의 움직임은 반역의 기미가 아닌 황족을 향한 충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분을 만들고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정치이니 무척 바쁠 것이다. 당분간은 백작이 반군 쪽에 손을 쓰지 못하리라.

뒷골목에 나타난 가문의 세작들도 하나, 둘 잘라 내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본격적으로 백작과의 정쟁을 치르게 되리라. 물론 백작이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의 연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황제는 이미 테노리엘을 압박해 오고 있다.

서부 대란 당시 징집된 물자를 보상하기 위해 책정된 면세 규모는 테노리엘 백작령이 가장 작았다. 누구보다 많은 물자를 징집한 그들이 누구보다 적은 면세를 허락받은 것이다. 사용한 양을 채우지도 못할 수준이다. 황제는 이미 정치적인 측면에서, 또한 영향력이나 권력적인 측면에서도 다방면으로 테노리엘을 압박해 오고 있다.

“지금 오라버니의 일로 황도에서 바쁘셔서요.”

에스메랄다는 케니스가 이 문제에 대한 반문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깊숙한 오지에 숨어 있으면서 황도의 상황을 알고 있다? 연결책이 있다는 의미다. 그게 제 병력을 외부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반군과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라면 반군의 일부가 황도에 숨어들어 있다는 의미겠지.

돌아가는 대로 루그레디안에게 황도의 건달들을 풀어 흔적을 찾아보라고 해야겠다. 연결점도 만들고. 당연히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몇몇은 황도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것은 차근차근 캐 보면 될 일이다. 정보를 공유받기 위한 발판을 쌓아 두면서.

“병영 꼴이 말이 아니더군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에스메랄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케니스가 있는 천막에 들어오기 전 남부에서 탈취해 온 물자로 세운 병영을 보았다. 함께 사 들고 온 식량은 벌써 다 먹었기에 병사들의 체력도 저하되어 있었고.

“당신의 섣부른 선택 때문에 몇만의 영웅들이 나락으로 추락한 건지 알고 있나요?”

그녀가 방금 꺼낸 말로 얻고자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케니스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이탈한 시기의 범위를 좁히기 위해서. 각 부대에서 이탈한 반군들은 그 이탈 시기가 모두 달랐기에 한 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첫 번째 이득은 케니스가 최초 주동자에 가까운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다음은 남부의 폭동을 유도한 게 에스메랄다 본인이라는 것을 가리면서도, 그녀가 그들을 돕는 이유를 포장하기 위해서다. 남부에서 희생하고 마수로부터 대륙 전체의 인간들을 지켜 내고 있는 영웅들에 대한 존경심. 과거 그녀가 가졌던 신념의 뿌리를 지금은 연극을 위한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군이라는 죄인이 되었으나, 영웅들이 굶어 죽는 꼴은 볼 수 없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케니스를 속이기 위해 에스메랄다가 연기해야 할 배역이었다.

“몸을 쓰는 놈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이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그렇다면 대체 왜……!”

“후회를 하지 않은 건 아니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았으면?”

에스메랄다는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는 사람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부는 앞으로 평생 황제 놈이 만든 우리에 갇힌 채 도살당하기만 했을 거요.”

“…….”

“누군가는 불꽃을 피우고, 칼을 꺼내 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에스메랄다는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새된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가 만들어낸 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당신들은 누군지도 모를 이의 수작에 놀아났을 뿐이라고요!”

케니스의 표정이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무슨 의미요?”

“황도에서 출발한 알라반은 진품이었어요. 도중에 바꿔치기당한 것이지.”

그녀의 의도대로 천막 내부에는 적막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울리는 건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뿐이었다.

“누군가 폭동이나 황실과 남부군의 반목을 위해 의도적으로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당연히 그 누군가는 에스메랄다였다. 일부 기괴한 과시욕이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인간은 잘못이나 죄악 같은 결점을 감추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게 자신의 약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심리적인 측면을 반대로 이용했다. 먼저 의혹을 제시함으로써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방법을 고른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에스메랄다의 성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케니스다. 그녀가 또래들보다 교활하다는 것도, 귀족들의 심리전에 능하다는 것도 모른다. 또한, 그 일이 에스메랄다에게 관련되어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지워 냈고 남은 거라곤 무언가 있었다, 라는 추상적인 존재감뿐이다.

“증거는 가지고 하는 말이요?”

케니스가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당시 약품을 운반했던 이들 중 일부의 소재가 불분명해요. 대부분이 약품 운송 직후 탈영을 했는데도 체포된 이는 아무도 없어요. 모두 경비병이나 결계 마법을 담당하던 마법사임을 보면 분명하죠.”

“…….”

“흔적을 지워 버려서 더 이상의 추적은 힘든 상황이지만… 당신을 비롯한 이탈병들은 모두 그쪽의 수에 놀아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두통을 느끼는 것처럼 손으로 머리를 짚은 에스메랄다가 앓는 소리와 함께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그녀 앞에서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케니스가 한층 더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허면 반군들의 가족들을 처형하고 다닌 것은?”

“……그건 중앙군이 맞을 거예요. 지난겨울 처형당한 이들은 살인 사건 당시의 소재도 불분명하고, 사건이 일어난 구역에서 그들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었고요. 남부군을 무시하면서 제 놈들의 우월감이라도 채우고 싶었겠죠.”

“……영주 대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죽여야 할 놈이 늘어난 것 같소만.”

“……지금 계속 이탈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건가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당장 면책을 받고 복귀하세요!”

하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케니스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후에야 짐승의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울림을 담아 말했다. 낮고 음울하여 속에 담긴 화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놀아났다 해도, 기왕 뽑아 든 칼이니 황제의 개를 자청하는 놈들의 배는 갈라 주어야 할 것 아니오?”

아하, 이곳을 고른 이유에 역시 솔루베르 공작령을 건드는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케니스는 공작가를 칠 생각이다. 그녀가 은근히 바랐을 정도로 괜찮은 수다. 그들의 손을 빌려 공작 성에 묻혀 있는 자금을 빼돌릴 수 있다면 훗날 바란 상단과의 상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더 쉬워진다. 물론, 그들의 범죄 대상이 되는 건 귀족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힘없는 약자를 터는 것이 아니라 강자의 것을 털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된다. 탐욕으로 똘똘 뭉쳐 제 배만 채우는 귀족의 배를 가른다, 귀족들에게 억압당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보다 의로운 행동이 있을까.

에스메랄다가 그들이 약탈 같은 범죄를 행하기 전에 찾으려 했던 건 약자의 것을 빼앗아 반군의 삶을 영위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라면 말려야 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그들이 잡히지 않도록 적극적인 도움을 줘야 할 정도다.

그러면 반군이 선이고 정의라는 인식을 차근차근 쌓아 갈 수 있다. 이대로 케니스가 반군을 통합하며 솔루베르 공작령과 맞닿아 있는 북부를 천천히 들쑤시는 동안, 루그레디안이 후작 위를 승계하고 영지를 차지해야 한다. 그럼 그곳으로 주둔지를 옮겨 테몬의 그늘 아래 숨을 수 있다. 서부의 테노리엘와 아비체룬, 동부의 아브람과 실테르, 북부의 반군.

내전이 일어났을 때 황실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남부군이 있는 중남부 경계선의 병력은 빼 오기 힘들 터.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남부는 루그레디안이 포섭할 반황실 세력의 사병이 책임져 줄 것이다. 결국 중앙군과 황제파 귀족들의 사병은 4방위에서 들어오는 적대 병력을 상대해야 한다.

순조롭다. 에스메랄다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지만 케니스의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남부 참사와 관련이 없음을 더 확실하게 해 두기 위해서라도 당장은 수단과 방법에 얽매이는 순진한 어린아이를 연기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좁힌 채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케니스가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처럼. 그리고 곧 경악 어린 표정을 지으며 비명과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꽤나 훌륭한 연기였다. 사교계와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보낸 10여 년은 헛되지 않았다.

“당신 미쳤군요!”

그에 케니스의 턱이 불거졌다. 이를 악물기라도 한 것처럼.

“탈영으로는 모자랐나요?! 이제는 하다 하다, 당신을 따르는 그들을 도적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탐욕과 죄로 쌓아 올린 것을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려는 것뿐이오.”

“되지도 않는 의적 흉내일 뿐이에요! 결국 그것이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잠시의 간격을 두고 케니스가 꽤나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서?”

“뭐… 라고요?”

“내 명에 따를 그들이 도적이 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소만?”

에스메랄다는 지금 케니스에게서 협박을 받은 것이다. 그는 반군이 악에 연루된다고 해도 그녀가 그들을 버릴 수 없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이런 협박을 한 것이다. 케니스는 에스메랄다가 반군이 된 남부의 병사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뭐라고 하든 일을 강행할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바람대로.

그녀는 속내를 철저히 감추며 언쟁을 꽤나 길게 이어 갔다. 케니스의 오해와 편견, 잘못된 확신이 깊어지도록. 이토록 완벽하고 확실한 기만이 또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 또 다른 장기 말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에스메랄다가 집필한 연극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서부 연합군이 공식적으로 해산한 날로부터 30여 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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