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2화 (22/45)

제22장

육아 일기

「초록색 북서 끝, 어미 고양이 거처 추정 지역 발견.」

평생을 살아왔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력자가 많은 남부. 아니면 인구가 많아 사람들 틈에 섞여 얼굴을 숨기기 쉬운 중부나 북부. 반군의 수뇌부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 곳은 그 3개 지역이었다. 그런데 동부 끝자락에 떡하니 숨어들었을 줄이야.

동부의 최북단은 솔루베르 공작령이다. 북부와 동부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거대한 영지. 북서 끝이면 중동부 경계선 지역을 말하는 것일 터. 황제의 세력 내에 속한 지역인 것도 모자라 중부의 코앞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생각해서 이곳으로 갔나?”

책상에 놓인 종이를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톡톡 치고 지나갔다. 아니라면 정예들이 함께 움직이는 무리라 중앙군 기사들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든가?

“혼자는 죽지 않겠다는 심보일 수도 있고.”

반군이라고 통합해 칭하긴 하지만 그들이 한 사람의 통솔을 받는 건 아니었다. 현재 병영에서 이탈한 반군의 수는 3만에 조금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는 3만을 넘었으나, 리퀘나 돌파 당시 반군의 가족들을 처형하기 전에 일부가 복귀해 수가 줄어든 것이다. 물론, 그 숫자 속에 퇴각 당시 죽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전사자들이 있으니 모두 반군이라 보기는 힘들다.

현재 행적이 묘연한 지휘부의 인물은 11명, 급진파 9명, 온건파 2명. 부대 지휘관이나 그들을 보좌하던 수석 지휘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전사자가 아닌 반군이 된 거라면, 반군은 현재 그들을 주축으로 해서 여러 무리로 나뉘어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11명의 주동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급진파 성향의 기사들과 치료제의 일로 화가 난 병사들까지. 합동을 택한 이들도 있을 테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반군은 최대 11개의 무리로 쪼개져 있다고 봐야 한다.

“11개라니.”

참 우스운 일이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선택을 한 이들임에도 반군 내부에서의 지휘권과 권력을 두고 완전히 통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반군은 총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연합에 가까웠다고 봐야지.

“이딴 식으로 본인의 이득과 권력을 논하면서 반정은 무슨 반정.”

도대체가 그놈의 권력과 권한이 뭐라고.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생각의 고리를 다시 엮어 냈다. 반군이 쪼개져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그들 중 누구의 무리가 솔루베르 공작령을 택해 숨어들었을까? 추측을 위해선 머릿속에 들어 있는 11명의 신상 정보를 훑어야 한다.

“첫 번째 가정이라면, 첼시 남작이나 오케른 남작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들은 신중한 성향의 인물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할 정도로 병력 보존에 집착하는 편이다. 안전한 방어 형태의 전술로 수성에 능하기에 리퀘나의 좌측에 있던 3개의 성벽 중 하나씩을 담당했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행적이 묘연한 11명 중 온건파에 속하는 그들은 탈영을 했을 가능성 자체가 낮은 인물들이다.

“병력이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수성을 하다 고립되어 사망했으면 했지, 반군이 될 사람들은 아니야.”

고로 이 가정은 기각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두 번째 가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정예병을 휘하에 둔 채 중앙군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자만심을 가정에 끼워 넣으면 후보의 명단을 다섯 명까지 좁힐 수 있다.

황실에 대한 반감이 크고 그들을 무력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급진파 5명. 남부가 아닌 내륙의 기사들은 햇병아리라고 무시하는 인물로, 대부분은 남부에 전선 지역이 생기며 영지를 잃은 영주들의 봉신들이다. 랑그루발 백작, 헤르토크 백작, 그리고 부소네 공작의 사람들.

“그들을 따르는 이들 중에 상급 기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들 각자의 세력은 정예병이라고 칭하며 무력의 전적인 우위를 점하기 힘들다.

“다섯이 휘하 세력을 모두 뭉친 상태라면 모를까.”

가능성은 낮은 것 같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일단 머릿속에 넣어 놔야겠다. 세 번째는 혼자 죽지는 않겠다, 라는 가정이다. 만약 반군 수색을 통해 중앙군에게 걸리면 솔루베르 공작이나 그들의 봉신을 붙들고 같이 추락할 의도로 그곳을 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솔루베르성을 공격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세력의 머리를 할 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지.”

남은 4명 중에 황제에게 붙어먹는 귀족들의 행보를 경멸해 마지않는 자가 있다. 카 루그 알그레노 케니스. 알그레노 자작가의 가주였던 그는 급진적이라는 말보다는 과격하다고 평해야 할 인물이었다.

케니스는 황제의 세력에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황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치꾼도, 귀족도 아닌 군인일 뿐이기에 황위에 누가 앉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현 황제를 끌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새 황좌에 앉는 것이 누가 되든 남부군에게 정당한 지원을 하게 만드는 데 한정되어 있다.

케니스는 미래에선 3개의 반군 세력 중 한 곳을 통솔했으며,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에스메랄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같은 목표를 가졌으나, 도착점까지 가기 위해 선택한 길이 너무 달랐으니까.

에스메랄다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는 이런 방식의 차이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케니스는 대의에는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희생을 자신의 사람들이 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황제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백성 수천 정도는 학살할 수 있지만, 그 학살의 대상이 본인이 아끼는 남부인이거나 수하들이 되어야 한다면 검을 거둘 사람이다. 본인의 사람들에게는 광증으로 보일 정도의 충성을 받지만, 외부인이 보기엔 그냥 이기적인 놈에 불과하다.

“이번에는 이 이기적인 놈이랑 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스메랄다는 솔루베르에 있는 것이 케니스이기를 살짝, 바라 보았다. 그는 3천 8백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5부대의 지휘관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5부대는 현재 잔존 병력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남부군 소속의 5부대는 케니스를 추종하며 모인 이들로 구성되었던 곳이니, 그는 자신의 휘하 병력을 손실 없이 전부 데리고 갔다고 봐야 한다.

이기적인 놈이건, 잔인한 놈이건, 케니스를 중심으로 한 단결력과 그를 향한 충성심은 분명 가치 있는 자산이다.

“뭐, 그러니 미래에서도 다른 소규모 반군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거겠지.”

반군의 일은 케니스의 세력을 통해 규모가 작은 세력을 규합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브람 백작에게 솔루베르 공작령에 있는 반군들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방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에게 간절해질 식량을 이용해야겠다.

전서구가 출발한 직후 그녀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상념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남동쪽, 루소멜 백작령이 있는 방향이었다. 당장은 남부의 영토 회복이 급선무이니 반군 문제를 뒤로 미루고 있겠지만 리퀘나를 탈환하고 올해의 겨울을 버티면 내년부턴 남부군도 움직일 것이다.

반군으로 빠져나갔던 이들을 설득해 복귀를 유도할 터. 병력을 다시 채우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일이다. 중앙군에서 지원 온 1만 5천 중 황태자가 날려 먹은 병력이 8천을 넘어 1만에 가까워진 상황에선, 더더욱.

만약 반군에게 접촉해 복귀를 유도한다면 남부군 내부에서의 면책이 행해지겠지. 황실에 올리는 보고서야 새로운 신병이 들어왔다고 적으면 될 테니 문제는 없다. 그리고 그걸 가장 열정적으로 행할 만한 인물이 아르페시스다.

“미래에도 그랬으니까.”

미래에서도 그는 멋대로 이탈한 반군들을 직접 만나 귀환을 부탁하곤 했다. 그게 남부군 사령관의 입장에선 최선의 방법이었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터.

“그땐 내가 너를 도왔는데…….”

가문의 세작들을 제국 곳곳에 보내 반군의 흔적을 수색했다. 그들을 발견하면 아르페시스에게 언질을 주는 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입가에 살며시 그려진 조소가 쓰라렸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방해하는 모양새가 되겠네.”

그의 방해로 인해 반군의 규모가 작아져도 반격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발생할 전투에서 그가 다칠 게 무섭고, 그의 명예와 전공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으니까. 숨고 버티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무력하게. 다가올 그 날이 눈앞에 훤하다.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렸다. 해가 지고 있으니 슬슬 별채로 움직여야 한다. 디아나와 제롬이 부디, 답할 준비를 마쳤으면 좋겠다. 어떤 성과를 올리게 될지는 식사가 끝난 후 확인할 수 있으리라.

* * *

별채의 손님들만 모인 만찬 자리에 나단은 참석하지 못했다. 오고 갈 대화가 꽤나 위험한 것들인지라 배제했다. 오늘의 만찬은 밖에서 시리스를 포함한 용병들이 경비를 서고 있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쓴 자리이기도 했다.

“반황실 세력이 그리 견고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백작 성에 도착한 지 닷새. 문제점을 지적하는 제롬의 말투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영애라 불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디아나와 달리, 그는 본인의 처지를 보다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역시나, 연륜이란 무시하기 힘든 요소다.

“설마 제가 그들을 믿기에 헛된 꿈을 꾸고 있다 생각하시나요?”

에스메랄다는 질문에 질문을 던져 상대방을 비꼬는 화법을 아주 좋아했다. 어째서 이 부분은 보지 못했느냐고, 생각이 그렇게 짧으냐고. 무지를 찔러 모욕을 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기품을 가장하여 쓰고 있던 정적들의 가면이 깨어지는 걸 볼 때면 어찌나 짜릿한지, 그 쾌감에 버릇이 들다 보니 어느새 이런 화법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말씀은… 그들을 배제한 채 일을 진행하실 거란 의미입니까?”

“불필요한 뱃사공이 많으면 무의미하게 배만 무거워질 뿐이죠.”

“하나 사공이 없다면 노는 누가 젓습니까?”

채 숨기기도 전에 에스메랄다의 입가에서 미소가 새어 나갔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해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인지라 피가 들끓는다고 할까? 간사하고 날카로운 혓바닥을 놀리는 것만이 하루의 전부였던 때도 있으니, 어쩌면 반가운 것일지도?

“배가 꼭 노를 저어야만 나가는 건 아닐 텐데요?”

“돛을 펼친다 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그 바람을 만들 수 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 아닐까요?”

귀족의 얼굴을 하고 있던 제롬의 말이 끊겼다. 와인잔을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움찔, 하고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 바람을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신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계를 규정하지 않으셨다, 그리 말씀하셨지요.”

실제 주신이 직접 인간에게 내려 주었다는 성서에 명시된 말이었다. 그것을 인용하자 제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에스메랄다가 사람의 심리를 읽는 데 도가 텄다고는 하나, 지금 제롬의 표정은 그녀로서도 쉽사리 가늠하기 힘든 종류 중 하나였다.

에스메랄다는 제롬의 모든 동작을 눈에 담았다. 살짝 굳으며 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입매, 묘한 감정을 담고 그녀를 향하는 눈동자, 와인잔을 놓고 테이블 위를 지나 무릎으로 떨어지는 손까지. 무슨 생각을 하기에 갑자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아… 테노리엘…….”

저 중얼거림의 의미를 모르고 넘어가도 되나?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단어와 문장들이 휘몰아쳤다.

알아야만 하는 필수인가, 몰라도 되는 선택인가.

에스메랄다는 찰나의 고민 후에 전자의 선택지를 집어 들었다. 제롬이 보인 반응은 긍정보다 부정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 문제 때문에 이후 그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대뜸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터. 그건 도박이다. 당장에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자제해야 하는 수다. 그녀의 무지를 발설하는 건 확정이지만, 그 대화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앙그리트 남작가, 북쪽의 중소 규모 마을 5개를 영지에 포함시키고 있는 가문이다. 영주 성이 있는 곳은 중형 도시 수준의 인구를 유지 중이기도 했다.

“네, 제가 테노리엘이지요.”

느긋한 어조로 제롬의 중얼거림을 받았지만,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은 여전히 바빴다. 매해 사병의 일부를 남부로 보냈던 앙그리트 남작은 어떤 특성을 가진 인물이었나?

돈에 대한 탐욕? 아니.

특권층의 우월감? 아니.

권력에 대한 집착? 아니.

명예에 대한 자부심? 아니.

대의를 향한 희생정신? 아니.

수십 개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제롬의 반응 전에 했던 말과 관련된 단어가 차례를 맞이했다. 신앙심의 유무? 하나를 찍어 내자 연관되는 정보들이 주르륵 엮이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다.

훗날 만난 디아나는 신앙심이 전무하다시피 했었다. 그게 가문의 몰락 이후 생긴 변화가 아니라, 애초부터 부친을 보고 자라 닮아 간 것일 수도 있는 일 아니겠나?

에스메랄다는 머릿속의 창고에서 앙그리트 남작이 신전에 방문한 횟수를 찾아보고자 했다. 그런 부분까지는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았기에 정보가 없었지만.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라면 앞으로 찾아내면 될 일. 당장은 떠보기에 애매한 주제니 시기는 조금 미뤄 두어야겠지.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것들이었다. 제롬이 반응을 보인 건 그녀의 생각이 모두 끝난 후였다.

“아, 별것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군요.”

그런가요? 에스메랄다는 살며시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영주 대리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일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다시 본래의 주제를 논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가능성이라… 무의미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일의 성패를 논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만… 무의미하다 여기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 답을 믿기 위해 필요한 어떤 근거도 가지지 못하셨는데, 답을 해 보았자 무얼 하겠습니까?”

“…….”

“대답의 여부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질문이니 그것을 무의미하다 평하지 않으면 무엇을 그리 평할까요?”

아직은 제롬과 디아나를 외부인 취급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에스메랄다와 그들의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쉽게 그들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목이 타기라도 하는지 제롬이 다시 와인잔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게 쥐여 주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끌어들이려거든 더 성의를 보이라, 이 말이다. 지금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거사가 성공할 만한 가능성은 얼마로 점치는지, 그런 내부 정보들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제롬의 말에 에스메랄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본디 공로란 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성공할 것이 빤히 보일 때가 되어서야 발을 들이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부를까.

충직한 신하란 고난의 시기부터 함께해 나가는 인물에게만 붙여 줄 수 있는 말이다.

“공로라…….”

에스메랄다는 지금 제롬에게 물은 것이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 일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따라올 생각이 있느냐고. 아니면 훗날 받을 이득을 위해 지지하는 척을 할 것이냐고.

제롬은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디아나가 입을 자꾸 벙긋거리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사전에 제롬이 입단속을 한 탓에 참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떨어진 대답의 기회를 잡을 것인지, 놔 버릴 것인지 조금은 기다려 줘야지.

에스메랄다는 그가 침묵하는 사이 묵묵히 식사를 하던 라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느낀 라그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요?”

까칠하기는. 에스메랄다는 픽 하고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자네가 잘 지내나 싶어 그러는 것이지. 일이 제대로 진척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거참, 도제라도 들여 주고 물어보든가.”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는 게, 아무래도 뭔가 보여 줄 게 있는 모양이다.

“큼, 아직 완성된 건 아닌데……. 이거 한번 보쇼. 오늘 별채에 오신대서 마무리 작업 좀 해 봤수다.”

라그나의 성과 보고는 따로 받지 않는다. 그가 서류 작업 같은 걸로 시간을 빼앗기느니 연구에 힘을 쏟는 게 이롭다고 생각했으니까. 즉, 라그나에게서는 자율보고를 받는다. 올라오는 보고가 아직까지는 거의 없지만. 에스메랄다는 그가 식탁 위에 꺼내 든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 왜…….”

그가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에스메랄다는 생각에 잠겨 있는 제롬과 이쪽에 관심을 보이는 디아나를 힐끔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괜찮네. 편히 말하게.”

고민 중인 제롬에게 조금은 먹음직한 미끼를 보여 주기로 했다. 그녀의 저력이 이 정도이다, 하는 과시라고 할까?

“크흠, 그… 왜 목록에, 멀리 볼 수 있는 거 말이오.”

“확대경 말이군.”

“그래, 그거… 아직 시험작이라서 확대 거리가 제한적인데…….”

에스메랄다는 손으로 감싸 쥘 수 있는 동그란 관 형태의 마도구를 눈가로 가져갔다. 마나를 사용해 마도구를 발동시키자, 까맣기만 했던 통의 중앙에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기가 그 이상 늘어나면 휴대가 불편할 것 같아서 외관은 비슷하게 할 거요. 문제는 확대 전경을 볼 때 살짝, 진짜 살짝 깨진다는 건데… 일단 안정화할 수 있는 수식을 생각해 보고 있는 상황이고.”

“훌륭하군.”

식탁의 반대편 끝에 놓인 의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크게 보였다. 등받이의 형태가 이리저리 조각나 보이는 반쪽짜리였지만, 확대라는 개념 자체는 적용되어 있다.

“개선이 가능하겠나?”

“거, 뭐, 시간이랑 재료가 조금 더 있으면…….”

“재료는 언제나 그렇듯 머릿속에서 털어 내게. 자네 머리에는 수식 연구만 들어 있으면 충분해. 아들에 대한 것은 조금 허락해 주겠지만… 그 외의 모든 걱정거리는 신경 쓰지 말게. 내가 해결할 테니.”

“큼, 크흠. 그렇다면야.”

“물론, 시간은 자네가 부담해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웬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연구만 하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라그나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 분은 영주 대리께서 고용하신 연구 마법사라 하셨던가요?”

침묵 속에서 빠져나온 제롬이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미끼를 물은 것일까, 아니면 한 번 더 떠보려는 것일까?

“제가 아주 아끼는 인재랍니다.”

“영주 대리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입니까? 궁금증이 이는군요.”

“다음으로 향하는 발전은 공유할 때 기쁜 법이지요. 한번 보시겠어요?”

에스메랄다는 시험작이라 명명된 확대경을 제롬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눈에 가져다 댄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본 제롬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군요.”

“크흠!”

“아, 그러고 보니…….”

콧대를 세우며 입술을 꿈틀거리는 라그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본디 남의 것을 제 것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응?”

라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롬에게서 에스메랄다가 기다리던 반응이 나왔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그게 제가 만든 것이라도 되는 양 수식을 베껴 가는 연구 마법사들이 많다고 들었지요.”

“저도 들어 본 것 같아요. 그렇게 윗선 마법사들에게 수식을 빼앗기고 마탑에서 쫓겨난 도제들이 상당하다죠?”

확대경을 내려놓은 제롬과 그의 곁에 있던 디아나가 에스메랄다를 거들었다.

“그런 자들에게서 자네의 훌륭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흠… 수식에 접근하면 폭발하는 형태가 어떠십니까? 수식 충돌로 폭발해 마도구가 망가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쿵짝이 잘 맞는 인사와의 대화는 편한 법이다.

“훌륭한 의견이시군요.”

에스메랄다가 제롬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라그나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러니까… 수식을 더 넣으라고?”

“자네가 만든 물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야.”

정확히는 라그나가 만든 물건이 적대 세력에게 넘어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내부의 마나 수식을 알아내 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그게 그 말이잖아! 나보고 일을 더 하라고?! 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는지 알기는 해?”

언성을 높여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언제쯤 배울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라그나 앞에서 에스메랄다가 물로 입을 헹구었다.

“이런,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가?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잠은 푹 자야지.”

“이, 이이……!”

“성의 주치의를 보내 줄 테니 수면초 처방이라도 받아 보게.”

“안 해, 안 한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그나가 쿵쿵, 발을 울리며 식당을 뛰쳐나갔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본디 마법사들 성격이 한가락 하지요. 이해해 주시기를.”

“……그중 연구 마법사들이 특히나 유별나다고 들었지요.”

장점과 단점. 보유한 세력의 유능함과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노력의 강도가 높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걸 보고도 넘어올 만큼의 열정은 있어야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제롬이 보상에 대해 언급을 해야 원하는 그림대로 일이 진행되는데…….

“제가 보아하니, 영주 대리께선 또래의 소녀들보다 영민하신 것 같군요.”

“보고 들은 것들이 많으니, 동년배들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또 저희 부녀를 꽤나 높게 평가해 주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요.”

“능력은 다듬을 수 있지만 성품은 타인이 손댈 수 있는 범위가 좁은 법이지요. 갓난아기부터 제가 키우면 또 모를까요.”

제롬은 더한 것을 욕심내기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의무를 짊어져 온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부녀에게 두는 가치의 크기가 큰 것이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긴 한숨 소리가 서두였다.

“제정신이 박힌 자라면 지금 에렘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임을 모르지 않겠지요.”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입을 다물고 제롬의 말을 경청했다.

“솔직히, 영주 대리께서 늙은이의 가슴에 불을 지피긴 하셨습니다.”

제롬은 잔 속에서 흔들리는 붉은 와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가 매년 전선에 사병을 보낸 건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선수범하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는 귀족들이 늘어나 조막만 한 손길이 커다란 해일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굳이 유형을 구분하고 따지자면 제롬은 루그레디안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진심으로 에렘의 미래를 걱정하는 나라의 충신. 병장기와 식자재, 약초 같은 물자는 제공받지만 자원병이란 결국 남부군이 아니라 귀족의 사병이기에 봉급은 그들의 주군이 지급해야 한다.

결국 자원병으로 보낼 사병은 기르는 데에도 돈이, 유지하는 데에도 돈이, 내보내는 데에도 돈이 든다. 그렇기에 진심 어린 충심이 아니라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가문의 사병을 내보내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에스메랄다가 제롬을 신임할 수 있는 인사라고 평하는 이유였다.

“이미 목숨 빼고 잃을 것은 다 잃었으니 심장이 시키는 일을 해 볼까, 싶기도 하다가… 일이 틀어지면 하나 있는 딸아이는 어쩌나 싶어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디아나가 움찔거리긴 했지만 특별히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그래도…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배에 올라탈 기회가 몇 번이나 있지는 않겠지요.”

“다음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힘든 문제이기는 하지요.”

남은 건 단 한 마디. 에스메랄다가 슬쩍 그의 등을 밀어 주었다.

“딱 하나만, 다시 신념을 품어 보기 전에 딱 하나,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답 대신 시선을 맞추는 것이 허락이 되었다. 제롬이 암울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채 말했다.

“영주 대리께서는 이상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제롬은 지금 그녀에게 현실의 잔혹함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올바르고 선한 이상만으로 악을 거꾸러트릴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이 본인을 나락으로 인도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서. 에스메랄다는 그들 앞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보여 주었다. 쓰디쓴, 그리하여 어딘가 비틀린 것이 분명한 미소를 보임으로써.

“현실의 잔혹함 속에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새로이 발을 들인 곳이 깨끗하지 않아 마음이 놓이는군요.”

제롬 역시 그녀의 것과 닮은 쓰디쓴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올바른 방법으로는 이 길을 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할 것이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에스메랄다가 느낀 감상평은 길지 않았다. 남부 폭동이나 서부의 난리가 일어난 배경을 알아도 크게 개의치 않을 테니, 굳이 숨기느라 번거로울 필요는 없겠다. 딱 거기까지.

“그럼 이제 과정이 아닌 결과를 논할 차례군요.”

대가 없는 희생은 결코 전부를 받아 낼 수 없는 법. 에스메랄다는 상벌의 기준을 명확하게 세우고 있기에 그것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신념이라 표현했다 해도, 그들이 목숨을 걸어 따라오는 이상 노고에 대한 치하는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세력 내부의 결속력을 다져 주며 그들이 한 배를 탄 동지임을 명확하게 주지시킬 것이다.

“벨베크 놈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야 분이 풀릴 것 같습니다.”

이런, 아무래도 벨베크 백작이 그녀의 생각보다 교활했나 보다. 제롬의 상태를 보아하니 단순히 몸을 사리는 게 좋겠다, 혹은 황실의 동태가 이상하다, 같은 조언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 파 보아야 하나?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제롬의 분노라는 결과가 명확하기에 그 과정까지 상세하게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정도야 일도 아니지요.”

일이 끝나면 루그레디안이 어련히 알아서 분배를 잘하겠지. 에스메랄다는 새로운 인물의 합류를 축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물잔을 들자 축배 제의를 알아들은 두 사람은 와인잔을 들었다. 순서를 양보하자 제롬이 심호흡을 했다. 이후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읊은 말이 루그레디안의 존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에렘을 위하여.”

이미 디아나를 통해 말이 전해졌을 텐데 숨길 필요가 어디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그의 신념과 달리, 자신만의 목적을 꺼내 보이며 그들의 합류를 반겼다.

“그들의 몰락을 위하여.”

각자의 잔을 비운 후,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에스메랄다였다.

“인수인계는 신변 정리가 되는 대로 시작하지. 하루 정도면 끝날 것이니 모레 오전 내 집무실에 방문하게.”

“……예, 아가씨.”

명확한 서열이 정립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것을 넘어, 상관이 된 것이다.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에스메랄다는 곧장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화를 시작할 무렵 속에 담아 두었던 의문을 파헤칠 때가 왔다.

“참, 그리고 미사는 어찌하겠나?”

두 사람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외부로 나다니는 것은 좋지 않으니, 신관을 초청해 주면 되겠나?”

“……괜찮습니다. 저희 모두 그리 신실하지 않은지라.”

신앙심이 없거나, 옅거나. 성서의 말을 인용했을 때 제롬이 보인 반응의 이유가 확실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네. 나도 따로 미사를 드리거나 하지는 않으니.”

그 말에 제롬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테노리엘 일가는 독실한 신도라고 들었습니다만…….”

“신을 향한 믿음인데 타락한 이들에게 허락받을 필요가 있나?”

실제로 에스메랄다는 신을 믿고 따른다. 하지만 신전에 성금을 낸다든가, 미사에 참석한다든가, 혹은 기도실을 대여해 기도를 올리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는다. 성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미사를 이끄는 신관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니까. 기도는 홀로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허면…….”

“모든 것은 타락한 종이 아닌 그분 앞에 섰을 때 고할 것이네.”

“안심이군요. 신관들을 배제하지 못해 피해를 입는 건 사양인지라.”

에스메랄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롬은 확실히 신앙심이 없다. 이런 부친을 보고 자랐으니 디아나도 그를 닮았던 거겠지. 두 사람은 아르페시스처럼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가 내리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신이 정녕 존재한다면, 어째서 그들을 벌하지 않는 거지?’

‘설령 존재한다 해도 그 존재를 떠받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들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의문 때문에 흔들렸던 적도 많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와 신앙에 대한 대화를 할 때면 침묵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신에 대한 모든 것은 아르페시스와 있을 때는 절대 꺼내지 않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믿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시간을 되돌아온 후, 신에게 가지는 믿음은 흔들릴 여지조차 없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신이 아니라면 대관절 누가, 세상의 시간을 지워 내고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낼 수 있겠나.

“마지막으로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자리를 떠나기 전 제롬이 에스메랄다를 붙잡았다.

“무엇인가?”

“……만약 제가 거절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군요.”

에스메랄다는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답했다.

“굳이 듣고 싶은가?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이게 잘한 짓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 그럽니다.”

푸욱, 하고 흘러나온 한숨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옳다고 믿기에 행했으나, 지옥의 불구덩이에 직접 발을 들였으니 속이 엉망인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제롬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기로 했다. 실상이 어떠하든, 이 길이 나았을 거라는 자기만족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별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을 거네.”

몇 년이 넘도록 절대.

“혹여 탈주 시도가 보였다면 사살했을 것이고.”

제롬이 다시금 내쉰 한숨이 안도의 것인지, 포기의 것인지 모호했지만 굳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에스메랄다가 언급했던 대로,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내가 베푼 호의는 자네들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 낚아채 온 것에서 끝난 것이니 말이야.”

“……이제야 인사를 드리는군요. 저와 제 딸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호의가 그들의 생존으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이득 때문임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생각보다 만찬이 길어졌군.”

“음식과 와인, 대화까지 모두 훌륭했으니 길어질 수밖에요.”

“그리 여겨 준다니 대접하는 입장으로서 기쁘네.”

“또한 저희의 영광입니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곧 다시 뵙겠습니다, 아가씨.”

부녀가 입을 모아 인사를 올린 후 에스메랄다는 별채를 나섰다. 성과를 손에 쥐고 돌아가니 걸음이 그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았다.

그녀는 본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집무실에 책상을 하나 더 준비하라 일렀다. 본래 있던 히나의 것은 디아나에게, 새로 준비될 것은 제롬에게. 이제 그들을 황제의 눈에서 감춰 줄 새로운 신분을 준비할 때다. 밑 준비는 다 해 놨으니, 언제나 그렇듯 시행만이 남아 있었다.

* * *

“큼, 큼…….”

확대경을 처음 확인한 날로부터 1주일이 지났을 무렵, 라그나가 완성품을 들고 집무실로 찾아왔다.

“훌륭하군, 역시나 자네는 유능해. 수식 보호는?”

“발동 마나 외의 것이 광석에 접근하면 충돌하게 만들었수다.”

“그냥 유능한 정도가 아니군. 자네는 정말 대단해.”

에스메랄다는 진심을 다해 그를 치켜세워 주었다. 직접 박수를 쳐 주는 것까지 망설이지 않고 행했다.

창밖을 향해 확대경 마도구를 발동하니, 시가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형체까지 흐릿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근거리에서 장거리까지, 거리 조절도 하는 건 물론 시야가 깨지는 일도 없었다. 본 미래보다 3년 정도 당겨진 성과였다. 역시 라그나는 유능하다. 그를 손에 넣은 것은 정말 달콤한 성과였다.

“크흠, 그 대량 제작은 아직 불가능하다는 거 알지?”

“도제를 찾아보고 있네. 운용력과 입이 모두 쓸 만한 이로.”

“흠, 흠, 내가 도제도 없이 딱 가져온 성과를 보라고.”

헛기침을 저리 해 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뭘 원하기에 이리 뜸을 들이나. 에스메랄다는 라그나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대부분의 것을 기꺼이 들어줄 요량으로 말을 받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을 하라는데도.”

“크흠…….”

“자네에게 무언들 못 해 줄까.”

몇 번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라그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뭐야… 그 보상을 받겠다는 건 아니고, 꼭 들어 달라는 것도 아닌데…….”

에스메랄다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대신 다시 한번 그를 재촉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의 시간을 몇 분 정도 더 소비하게 만들 것 같으니까. 그녀는 불필요한 낭비를 정말 질색했다.

“계속 그리 말을 더듬으면 원하는 게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게 싫다면 제대로 말을 하라는데도. 당장 황제의 목을 내어 달라, 정도가 아니면 다 들어줄 테니.”

그제야 라그나의 입이 열렸다. 집무실에 자리를 잡은 제롬과 디아나를 힐끔거리는 게, 꼭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서, 서, 서커스를 좀…….”

“서커스?”

“조, 종종 초청하는 영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

나단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두말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외출 겸 휴가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 초청을 해 볼 테니 아들과 구경을 가 보게.”

“에?”

“계약서를 쓰고 이동 시간까지 잡으면… 바의 달이 끝나기 전에는 가능하겠군.”

“그렇게 빨리?”

조금 얼떨떨한 라그나를 보며 에스메랄다는 픽 웃었다. 재료비 같은 것을 계속 신경 쓰는 것도 그렇고, 가만 보면 라그나는 배포가 참 작다. 큰돈을 만져 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에스메랄다는 이 기회에 그녀가 가진 재력과 권력을 제대로 알려 주기로 했다. 그녀를 따르는 이가 돈에 골골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 않겠나.

“테노리엘이 부르는데 거절할 이들이 어디에 있다고.”

오만함의 극을 달림에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 그래도 그 서커스단 일정이나 그런 것도…….”

“선약 일정에 대한 위약금을 물어 주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그게 몇 푼이나 한다고.”

“…….”

“날이 따듯해지기도 했고 영지민들이 큰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위로차 부른다고 하면 명목도 충분할 터. 일정이 잡히는 대로 알려 주겠네.”

에스메랄다는 제롬이 가져온 재판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그 전까지 확대경 마도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군.”

“몇 개나……?”

현재 확대경의 쓸모가 가장 필요한 곳은 동부다. 실테르의 세작과 반군까지. 감시 및 관찰이 가장 많이 요구되고 있는 일이 동부에 많다. 그러니 아브람 백작에게 조금 넉넉하게 보내 주고, 각 지역의 관리자들에게도 하나씩 쥐여 주고… 황제의 세작들과 엮인 테란에게도 필히 보내 주어야겠지.

“급한 대로 10개면 충분하겠군.”

“그거 하나 만드는 데 며칠이 걸린 줄 알고나 하는……!”

“제작 기간을 단축하는 건 자네의 일이지.”

단호한 에스메랄다의 통보가 떨어지자 라그나는 다시 한번 악을 쓰며 집무실을 나섰다.

“첸, 서커스단을 초청해야겠구나.”

“괜찮은 곳을 추려 볼까요?”

“자네가 알아서 초청장을 보내게. 마수를 쓰는 놈들은 거르면 되겠지. 혹여나 테노리엘의 땅에 마수를 끌고 오는 일이 생긴다면 목을 잘라 주겠노라 경고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아가씨.”

제롬과 디아나는 각기 첸과 다나라는 테노리엘 출생의 신분으로 갈아탄 후 가문의 집사와 에스메랄다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 두 사람 다 행정 업무에 익숙한 이들이라 업무에 적응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첸은 주로 반군과 영지 행정 업무를 보좌하고 있고, 다나는 그림자 아래 가려진 상단과 황실에 보복하기를 바라는 인사들과 뒷골목을 관리하게 될 예정이었다. 뷔비르의 역할은 곧 다나에게 완전히 넘어갈 터. 필체 위조 또한 가르치고 있으니 히사르 상단의 상권을 빼앗아 오는 작업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녀가 짜 놓은 커다란 틀 위에 하나, 둘 세세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 * *

아르페시스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땀이 흐를 만큼, 엄청나게 집중을 하고 있었으니까. 열쇠 구멍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는 이글거리기까지 했다.

아르페시스가 노려보고 있는 열쇠 구멍 속에는 손가락 길이의 얇은 쇠붙이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현재 잠긴 방문을 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쇠붙이에 마나를 덧입혀 유형화를 시킨 다음, 유형화된 마나를 열쇠 구멍 속의 틀에 맞춰 이리저리 변형시킨다. 그렇게 마나가 본래 열쇠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을 때 쇠붙이를 돌리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풀 수 있다.

적진 잠입 시 장애물 등을 제거하거나 납치 및 감금 시 탈출을 위해 배우는 기술이었다. 페드로 정도 되는 실력자는 굳이 날붙이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아직 그의 마나 운용력은 페드로에게 미치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눈을 휙, 휙, 돌려 복도의 좌우를 빠르게 확인한 후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고 내부로 진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르페시스의 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 페드로와 휴고가 함께 쓰는 방이었다. 손님방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이 잠겨 있는 이유를 설명해 보자면, 페드로가 직접 열쇠를 요구해 잠그고 다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아르페시스는 방금 그런 페드로의 제지를 뚫고 두 사람의 방에 잠입한 것이다. 왜냐고? 열흘이 훌쩍 넘었는데 페드로가 새로운 수정 마도구를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찾아보는 수밖에.”

매일 약을 올리면서 말을 돌려 대는 통에 열흘 동안 얼마나 애가 탔던가. 아르페시스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조심스럽고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페드로는 지금 루소멜 백작가의 지하 보관소에 들어가 있을 테니 빠르게 뒤지고 탈출한다.

이틀 전부터 수정 마도구 탈취 계획을 세우고 페드로의 이동 동선을 확인했다. 주관적 검토 결과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다.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떡하니 놓여 있는 2개의 침대 중 어느 것이 페드로가 사용하는 침대인가 하면…….

‘아, 페드로가 양보를 해 주어서 제가 안쪽을 쓰고 있습니다. 한데 그건 어찌…….’

휴고에게 이미 확인까지 했다. 아르페시스는 문과 가까이에 있는 침대 옆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목표물은 페드로의 종자들이 책임지고 운송했을 여행용 가방!

각진 형태의 가방을 조심스럽게 연 아르페시스는 최대한 뒤진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했다. 옷가지나 마도구 등의 개인 물품들이 차례차례 그의 손에 의해 들춰졌다. 잠시간 가방 속을 뒤진 아르페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가방 속에는 그가 찾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으니 보관용 상자가 따로 있을 터. 수정 마도구는 특유의 형태 때문에 굴러다니거나 잃어버리기 쉬우니 말이다. 가방이 아니라면 서랍 속인가? 침대 옆에 있는 수납용 서랍을 열고자 손을 뻗은 순간.

“뭐 하냐?”

아르페시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나 주변에서 마나가 사용되는 기척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나 운용력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마나 장막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이라고 할까? 지금 이 순간 절대 마주쳐선 안 될 페드로의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망할, 짧고 굵은 욕을 속으로 중얼거린 아르페시스가 굳은 자세 그대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툭툭, 둔탁한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치고 들어왔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자 역시나, 손에 넓적한 형태의 상자를 들고 있는 페드로가 보였다.

“동선 확인부터 목표물 위치 확인까지.”

페드로의 동선을 확인해 그의 부재 시간을 알아내고, 그가 사용하는 침대가 어느 방향인지 확인한 것까지, 다 들켰다.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들킨 것이다.

“첫 수정 마도구를 본 이후 오늘 잠입 시도까지 열흘이나 걸렸어. 난 임시 관저에 진입한 이후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당일 내 동선을 확인했으면 훨씬 더 빨리 끝났을 일인데… 계획 수립부터 정보 수집, 이행까지 너무 오래 걸리잖아.”

그 말을 듣고 나니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페드로가 방의 문을 잠그고 다닌 이유 말이다. 그는 아르페시스가 수정 마도구를 목표로 잠입 시도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대체 왜?

“그리고 내부 정보를 확인한 직후 정보원의 입은 왜 막지 않은 거지? 네가 타인의 뒤를 캐고 다닌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고 싶어?”

“……입을 막다니. 휴고를 처리할 수도 없…….”

“일이 끝날 때까지 나를 만나지 못하게 외부로 내보내거나, 최소한의 입단속이라도 시켰어야지.”

이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 건가? 아르페시스가 의문을 느끼는 사이 페드로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휴고는 네게 충심을 다하고 있어. 고로 함구하라는 명령 한마디만 했어도 내게 그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을 거다.”

아르페시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드로가 이번 일을 유도한 이유를 정확히 깨달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 나름대로 아르페시스를 가르치기 위한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교육의 일환이라고 봐도 무방한 지금의 상황에서 문제는… 훈계가 분명한 것을 듣고 있음에도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페드로의 손가에 못 박힌 듯 붙어 있다는 점이다. 교육이고 훈계고, 저걸 목표로 이곳에 왔는데 다른 생각이 들 리가 있나.

“그나마 점수를 줄 만한 건 마나 운용력이네.”

아직 중급 기사의 실력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그는 페드로에게서 저 물건을 빼앗지 못한다. 하지만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느니,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어 봄이 마땅하다. 상자를 쳐 내면 밖으로 굴러 나온 수정 마도구 중 운 좋게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난 열흘간의 갈증에 애가 탄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에게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난 네 나이였을 때 문을 딸 정도로 운용력이 섬세하진 않았는데… 재능은 확실히 좋아.”

갑자기 왜 칭찬이지? 퍽 하면 단순하니 뭐니,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사이 페드로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고작 하나뿐이긴 하지만 잘했으니 보상이 따라야지.”

보상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가 황자라는 것은 아예 까먹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 페드로가 황족을 모욕하고 있는 건 사실이 아닌가? 이 문제로 트집을 잡아 수정 마도구를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페시스는 최근 열흘간 페드로에 대한 불만을 꾸준히 키워 온 상태다. 그렇기에 생각을 행함에 있어 망설임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골라 가.”

다만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페드로의 말에 모든 생각을 폐기 처분했을 뿐이다. 좋아서 황족이 된 것도 아닌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그는 서둘러 페드로의 곁으로 달려갔다.

“맙소사…….”

연도별로 나열된 수정 마도구는 전부 12개였다.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 좀생이처럼 굴었단 말인가!

“내가 아끼는 것만 가져온 거다.”

아끼는 것만? 그럼 여기에 가져오지 않은 건 얼마나 많다는 거지? 그것도 전부 보고 싶은데……!

“미리 경고해 두는데, 망가트리면 뒷감당하기 힘들 거다.”

그가 미쳤다고 이 귀한 것을 망가트리겠는가? 수정이 따듯해질 때까지 애지중지 품을 생각이었다.

“내일까지 반납해.”

“내일? 반납?”

보상이라며! 완전히 주는 게 아니란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페드로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드는 짓을 하면 하나씩 보여 줄 테니까 열심히 해 보라고.”

그 마음에 드는 짓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보상이라면서 그렇게 주관적인 평가의 기준을 내세워도 되는 것인가?!

불만이 꾸역꾸역 자라났지만, 약자는 서러운 법이다. 수정의 주인은 페드로이니 몸을 바짝 낮추고 잘 보이는 방법밖에 없다. 앓는 소리와 함께 아르페시스의 손이 갈팡질팡, 수정 마도구 위를 배회했다.

“추천하자면… 이거. 일곱 살 때 기록한 건데, 생일날 천사가 깨기 전에 침대 위에 꽃을 가득 채워 놨거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진짜 예쁘게 웃었지.”

그렇게 말한다고 누가 혹할 줄 아나? 다른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페시스의 손은 이미 페드로가 가리킨 수정을 집어 들고 있었다.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그에게 페드로의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내일까지다.”

페드로의 폭정 아래에서 느낀 서러움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방을 나서기도 전에 발동시킨 수정 마도구에 모든 정신이 팔려 버렸으니까. 꽃 속에 파묻혀 있던 일곱 살의 에스메랄다는, 요정에 비유하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으으…….”

심장이 제 주인을 반기며 날뛰자 아릿한 통증이 울렸다.

* * *

따듯한 봄날의 햇살 아래에서 만개한 꽃밭에 앉아 있는 건 에스메랄다와 나단이었다. 격일에 한 번, 승마 연습이 없는 날에 하는 산책 겸 운동 시간에 나단을 만난 덕분이다.

별채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던 나단은 나날이 활동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본성의 정원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도 했다. 오늘의 만남은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꽃을 꺾고 있던 나단을 에스메랄다가 발견했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 꽃을 주려 했다는 말에 에스메랄다는 조금의 시간을 더 내기로 했다. 주기만 하는 관계보다는 돌려받는 것이 있는 관계가 건강한 법이다. 감정도, 물질도,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흐르면 언젠간 일그러지기 마련이니까.

루이자를 초대하기로 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나단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엮으면, 꽃들이 떨어지지 않지.”

“헤에…….”

현재 그녀는 나단에게 화관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단은 어설프게 손을 놀리며 그녀를 따라 했다. 화관을 만드는 건 페드로와 아레스의 사이에 앉아 배운 것이었다. 몽글몽글 차오르는 그리움은 언제나 어둡고 퀴퀴한 원망과 함께 그녀를 찾아온다.

“오! 예, 예쁘다.”

완성된 화관을 보고 나단이 히죽히죽,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의 미소가 잦아지는 건 좋은 징조다. 행동과 생각에 활기를 더해 주는 즐거움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어…….”

“언제나 내게 꽃을 주잖니. 오늘은 내가 주는 선물이란다.”

뺨을 붉히는 나단의 얼굴 위로 불쑥 아르페시스가 끼어들었다. 말도 없이 페드로를 데려간 그가 미운데, 또 이렇게 제멋대로 나타나면 심장이 아리다. 시선을 맞춘 채 수줍게 웃던 그의 모습을 봐 버린 후라서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는 걸까?

「거인 사냥 시작, 우두머리 배제.」

오늘 오전에 받은 보고였다. 이틀 전 전초 기지 건설을 위한 물자의 준비와 병력 정비를 마친 남부군이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동쪽에 있는 대형 마수를 포위하는 형태의 군사 진형이 이루어졌다는 보고도 함께 받았다. 참아 보기도 전에 한숨이 흘렀다. 아직 경험이 적은 그가 위험하기 그지없는 대형 마수 토벌에 끼지 않아 안심해 버렸으니까.

미워하려면 미워하고, 걱정하려면 걱정하고, 하나만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복잡하기만 한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때 에스메랄다의 한숨을 들은 나단이 눈치를 보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에 그가 만든, 조금은 허술한 화관이 씌워졌다.

“나도 서, 선물.”

“……고맙구나.”

에스메랄다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속내가 나락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 것과 달리, 꽃에 둘러싸여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도 고, 고맙습니다.”

“그래.”

“그, 아, 아가씨는 꼬, 꽃이랑 이, 있으면 더 반짝반짝해, 해요.”

“기쁜 칭찬인걸.”

화관을 쓴 채 나단을 마주 본 에스메랄다는 차분히 대화를 이어 갔다.

“라그나가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할 텐데, 서운하지는 않고?”

20여 일 후로 잡힌 서커스단의 방문 일정에 라그나는 현재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닷새에 걸려 완성품을 만들었던 처음과 달리, 2, 3일에 하나씩 물건이 나오고 있다. 툴툴대면서도 하라는 건 하게 되었으니 미래에서의 관계보단 발전한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지금쯤 연구실에서 골골거리고 있을 라그나에 대한 만족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 밥 먹을 땐 매일 보니까. 나도 낮에는 고, 공부해야 해서요. 어제 에, 에렘어 받아쓰기에서 17개나 맞았거든요.”

아, 어젯밤 레오가 보고한 30문제짜리 받아쓰기. 글은 빠른 시일 내에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니 나쁘지 않은 성과다.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 100일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훌륭하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학습 초반에 배움의 의지를 깎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다, 다음 주에 서, 서, 서커스를 보러 가, 가요. 가면 사, 사자랑 코끼리도 보,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차후의 일정에 대해서 기대감을 보이는 것 역시, 좋은 징조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닮은 동물상에 대해서도 말이 나왔다.

“그, 그 사람은 내가 토끼를 다, 닮았대요. 난 느, 늑대가 제일 조, 좋지만요.”

순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네가 토끼처럼 귀엽긴 하지.”

“귀, 귀엽…….”

꽃들 사이에 엎드려 바동바동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꽤나 귀여웠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부끄러움과 기쁨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아직 라그나를 인정하기 힘든 거니?”

“이, 인정?”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기에.”

“어… 계속 이, 이렇게 불러서…….”

꽃 위에 벌러덩 누운 채 에스메랄다를 올려다본 나단이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땐 그가 네 양부가 아니었잖니.”

“양부?”

“수양아버지.”

“아… 레오가… 그 사, 사람이 날 이뱡? 이, 이뱐한 거라고요. 그래서 수양아버지라고.”

“입양.”

사용 빈도가 낮은 단어는 아직 발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삶을 구성해 온 과거의 일들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어떤지 알고 있고, 한때는 그들에게 살길을 주기 위해 바동거렸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선명한 장면에 검은 물감을 뿌리고, 낙서를 덮으며 외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다 죽어 나가는 백성 따위 알 게 뭐라고.

“아, 입양.”

“그래, 입양.”

“입양… 그, 그게 저, 정확히 뭐예요?”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에스메랄다는 잠시 말을 고른 후에야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갔다. 부모의 존재, 그들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존재. 아이가 없거나, 직접 낳지 않아도 마음으로 낳아 호적에 올리고 자식으로 키우는 상황 같은 것들.

“친부모…….”

“찾아보고 싶니?”

이 문제에 관해 쉬쉬하고 숨기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건 누군가가 그를 낳았다는 말이다. 한데 넌 친부모가 없다, 같은 말이 가당키나 한가. 키울 수 없어 버렸건, 원하지 않아 버렸건,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딘가에는 그의 친부모가 존재할 터.

그들과 나단의 존재를 구분하여 가르쳐 주고, 모든 부모가 자식과 함께 못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인지시키는 게 낫다. 납득이든, 원망이든, 나단이 하나를 택해 그들을 향한 미련을 잘라 내도록 유도한다고 봐도 좋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여기 오기 전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그래? 난 네가 친부모를 그리워해서 라그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 그건 아닌데!”

그럼 왜?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단이 눈치를 보며 답했다.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해서, 인가.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재촉하고자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 확인하는 것뿐이지.

“어색한 모양이구나.”

“어색?”

“익숙하지 않은 것. 처음 해 보기에 낯선 것.”

“……음… 그런 것 가, 같아요.”

이유를 확인했으니 남은 건 기다림이 전부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심리를 알아낸 것과, 이 대화의 주제를 나단의 심리 속에 남겼다는 것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봄날의 정원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은 불청객의 등장으로 깨졌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가 그들의 존재를 인지했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우두커니 서 있는 쌍둥이를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살살 흔들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이럴 땐 정말이지 무위에 재능이 없는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 도, 도련님들이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쫓아가 그들을 발견한 나단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나단이 쌍둥이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드는 것만 봐도 눈에 훤하다. 그녀가 모르는 친분이 벌써 쌓여 있다는 의미겠지. 그게 소극적인 나단이 아닌, 쌍둥이의 주도로 인한 것임은 당연하고.

오멘과 페르멘이 나단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틈틈이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는 걸 보면 나단이 주목적일 리 없다.

“나단, 안녕.”

“아, 안녕하세요, 도, 도련님, 도련님.”

페르멘과 오멘은 각기 나단의 좌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로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좌우 자리를 꿰어 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오늘은 오전에 승마를 했다며?”

나단은 에스메랄다와 대화할 때보다 편해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에게 적극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슥 훑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나단을 통해 슬쩍 캐 봐야겠다. 당장 쌍둥이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 사람이, 밤에 마나 운용? 그걸 가르쳐 주, 준대서 오전에 말 타고, 오후에 고, 공부 몰아서 하려고 했어요.”

“뭐야, 공부한다면서 여기서 놀고 있어?”

“그, 그건! 아가씨를 마, 만나서!”

오멘이 키득거리며 나단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 놓았다.

“이런, 네 공부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 으, 의미가 아니라! 그냥…….”

에스메랄다는 일견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난이란다. 하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겠구나.”

“어… 버, 벌써요?”

“꽤 오래 있었으니 말이야.”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같이 노는 건 어떨까, 리디?”

페르멘의 말을 곱게 흘려들은 에스메랄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일어나마.”

나단이 오멘의 손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인사를 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쌍둥이들에게서 벗어났다. 그들이 생각보다 집요하게 굴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명백히 그녀의 실책이었다. 알았다면 그날 그 장소에서 결판을 내고 돌아왔을 것이다.

* * *

남부군의 남하는 안정적으로 진행 중이었고, 라그나의 확대경 마도구는 완성되는 즉시 각지로 배달되고 있다. 테브라는 조심스럽게 수입량을 늘리면서도 일부 곡식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제국 전역에 도는 곡물 양에서 1, 2푼에 지나지 않는 양이었지만 그 정도라도 몇천의 병력을 먹이기엔 충분했다.

“일이 순조롭다면 테메프도 내년쯤에는 딴 주머니를 찰 수 있을 거고…….”

루그레디안이 부친과 형제를 쳐내기 위해 독을 쓰기 시작했다. 중독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중독의 증세가 가벼운 몸살감기와 유사한 독이다. 이후 열이 계속 오르면서 손써 볼 틈도 없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그 독의 이름은 ‘오람’이었다.

오람을 루그레디안에게 추천해 준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두어 번 복용해 본 덕에 누구보다 효과를 자신했기 때문이다. 신력 치료를 받고도 발열 증세가 완화되지 않는 것에서 낌새를 느끼고 단식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반드시.

지금의 시간에서는 마법사들이 불법 제조, 유통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존재 여부가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루그레디안을 지원하기 위해 그녀는 암시장에 나오는 오람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독의 존재를 숨겨 줘야지.”

애초에 암시장 자체가 에스메랄다가 손에 쥐고 있는 건달들을 통해 굴러가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제카는 손에 들어왔고, 테메프는 루그레디안이 테몬을 장악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온다. 그러니 히사르 상단을 무너트리기만 하면 바란과 경쟁이 가능한 거래량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아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바란의 상권에 도전할 시기를 재어 보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디아나, 아니 다나에게로 향했다.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한 번 들썩인 후 다시 서류 더미로 돌아갔지만.

“지금 북부에서 금괴 생산이 멈춘 상태잖아요? 그런데 동부에 이렇게 많은 자금을 풀어도 되는 건지…….”

반군 수색과 곡물 운송에 투입된 건달들에게 주는 돈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작 그들은 본인들이 옮기는 수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시키는 일을 하면 돈을 준다, 라는 명제에 따라 자원한 이들이니 일정량의 금화를 지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은화 따위로 옹졸하게 구느니, 그들이 한번 만져 보기도 힘든 금화로 확실하게 내리누르는 게 나은 방법이니까.

“위에 문제가 생겼다고 아래를 조이면 조직 내부에서 분열과 와해가 일어날 수도 있잖니.”

“하지만… 이러다 금괴 생산이 재개되기도 전에 비축한 금화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나가는 양이 상당히 많은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유동 자금 대신 묶어 놓은 것이니, 필요가 다가왔을 때 써야지.”

“그래도 만약에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참 시의적절하게도, 그 대화가 오고 가던 중에 테란에게서 소식이 도착했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다나에게 보여 주며 한마디를 더 붙였다.

“문제를 해결하면 될 일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종이를 받아 든 다나가 읽은 글은 조금 전 오갔던 대화가 무의미했다고 말해 주었다.

「갈색 머리 무리, 뜨개질 장소 발견. 소굴의 위치가 발각되었을 가능성을 논한 것으로 추정. 철수 움직임 포착. 길잡이 움직임 종료. 보석 상자 제조 재개에 회중시계 30개 필요 예상.」

몰살한 국경 마을에서 발견한 세작의 시체들을 보고 세튀스의 다른 세작과 충돌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고문, 회유, 약물 등의 방법에 의해 현재 집결지에 대해 노출되었을까 봐 이동을 준비하는 것이고.

모래시계는 시간, 회중시계는 일을 의미한다. 시간이 뒷자리에 큰 비중을 둔 것과 달리, 일자의 경우에는 단위의 두 배를 적는다. 단순한 숫자만으로도 유추를 금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숫자에 대한 암호 기준은 주기적으로 배수를 바꾸어 사용하게 될 예정이다. 즉, 보름 후에는 금괴 비자금이 다시 생산되기 시작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황제의 세작들이 속아 넘어간 것 같으니까, 우선은 한숨 덜었다. 확실하게 내부 정보를 알 수 있게 그들 무리 내에 세작을 가지면 좋겠지만, 그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괜히 함부로 움직였다가 덜미가 잡히면 안 되니까. 당장은 비밀 광산 주변의 감시 병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그들의 추가 반응을 살피는 것 정도가 한계다.

정말 속은 것이라면 인근 접선지에서 이탈했으니 더 이상의 접근이 없을 것이고. 속은 척한 것이라면 또 한 번의 접근이 있을 테니 그곳을 포기하든지, 아예 공개적으로 채굴을 시작하든지 선택하면 된다.

“저, 아가씨. 또 궁금한 게…….”

“그냥 바로 물어보렴.”

디아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하여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니, 예상했던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물어볼 모양인데, 계속 어두를 저렇게 시작하면 또 몇 초가 낭비되지 않겠나? 그게 몇백일, 몇 년이 쌓이면 시간, 일 단위로 늘어나겠지.

그 말이 있은 후부터는 다나가 곧장 질문부터 던지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할 수 있는 한 상세하게, 그리고 그 일의 필요성 같은 것들을 잘 엮어 설명해 주었다. 다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사고가 확장되는 건 그녀의 이득이기도 했으니까.

“또요. 비자금을 만드는 금광이 있는 곳은 북부인데, 왜 용병단에게 그곳의 일을 맡기지 않으신 건가요?”

“용병단의 대다수가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돈을 밝히는 신관들 중에는 귀족들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또한,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신관을 독점하며 평민들과 다른 자신들의 우월감을 느낀다. 결국 신전이라는 무리로부터 피해를 입는 건 평민들이 대다수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용병단에게 광산의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

신전에 복수하겠다는 뜻이 있다고는 해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평민이 몇십 개씩 쌓이는 금괴를 보고 딴마음을 먹지 않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본 적도 없는 돈의 단위 앞에서 탐욕을 억누르는 건 소수에게만 허락된, 아주 드문 인내와 자제심이 있어야 한다.

“반면 귀족 출신의 테란 무리는 금괴를 보고도 놀라지 않을 테니 그들에게 맡긴 거란다.”

영세한 가문이라고 해도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이후에는 한 번씩 금괴 단위의 지출을 해 보았을 것이다. 소속 연차나 권한에 따라 다르지만, 황실 기사단의 최소 봉급이 1개의 달에 금괴 2개다. 한 해에 8개. 5년을 모으면 궤짝 하나에 들어가는 40개가 모인다.

에스메랄다의 비자금이 그들에게도 큰돈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겠지만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가시거리 밖의 거액은 아니란 의미였다. 애초에 황실 기사단에서 황제가 돈 쓰는 걸 봤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까, 애초에 도난 사건이 없도록 신경을 쓰신 거군요?”

“그래. 휘하의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윗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지.”

누가 어떤 상황에 어떻게 필요한지 판단해 배치하는 것도 상관의 능력이다. 수에 능한 사람은 세수 부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기록 보관소. 물론, 난독증이 있는 사람이 정리를 잘한다고 해서 기록 보관소에 배치하면 안 되겠지.

“그럼 전…….”

“큰 그림을 볼 줄 알잖니. 사건들 간의 연관점도 잘 기억하고.”

“이렇게 어리신데… 정말 괴물이시네요.”

테란에게 일정을 당겨 보라는 서신을 쓰던 에스메랄다가 다나를 돌아보았다. 다나의 맞은편 책상에 있던 첸의 시선도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 그게, 이게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절 만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그게, 그러니까… 신기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꽤나 당황했나 보다.

“좋게 봐 주어 고맙구나.”

“……죄송합니다.”

“감사 인사인데 죄송할 게 무어 있다고.”

에스메랄다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괴물이 아닐 것은 무엇인가? 24년이라는 시간과 그 끝에서 맞이한 죽음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

후에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은 똑같은 풍경이었다. 종이, 잉크, 질문과 대답, 지시와 이행을 깬 집사가 들고 온 소식은 에스메랄다에게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아가씨, 페드로 도련님께서 보낸 파발꾼이 도착했습니다.”

고작 이름 하나에 구역질을 할 것처럼 속이 뒤집어진다. 파발꾼을 보낸 게 남부군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염치로 감히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냐고, 분노가 몸집을 부풀리며 일렁거렸다.

“무엇을 들고 왔기에?”

“서신은 따로 없었으며, 내용물은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대충 확인해 보게.”

“……예, 아가씨.”

집사가 몸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 순간 울컥하고 치솟은 감정이 충동을 잡아챘다. 에스메랄다는 찰나의 변덕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아니, 가져오게.”

그가 무슨 헛짓거리를 하든 용서를 쟁취할 수는 없을 테니까. 결코 원하는 것을 쥐지 못할 테지만 발버둥 치는 모습은 한 번쯤 봐 줄 생각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

“예, 아가씨.”

비참하게 용서를 구걸하는 꼴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아 주리라. 그리하여 결국 갈망하던 것을 움켜쥐지 못한 채 절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지. 에스메랄다가 페드로의 임명장을 보고 절망했던 그때처럼.

꽁꽁 싸매어 두었던 사슬을 끊어 내고 튀어나온 화는 제멋대로 날뛰며 그녀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집사가 가져온 물건은 성인 남성의 주먹보다 두 배쯤 큰 나무 상자였다. 에스메랄다는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차가운 표정 아래 품은 채 뚜껑을 열었다.

속에 든 것은 붉은 쿠션 한가운데 놓인 수정 마도구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런 물건을 보낸 것이냐고, 답해 줄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질문을 하면서.

침묵이 길어지며 같은 공간에 있던 첸과 다나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녀를 찾아왔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따위…….”

이따위 것을 보내지 말고 직접 왔어야지. 그럼 울고불고, 패악을 부린 후에는 결국 다 용서해 주었을 텐데. 꾹꾹 눌러 속에 가두고 존재하는 것조차 잊기 위해 노력했던 감정들은 이미 난폭함으로 무장한 채 그녀를 휘두르고 있었다. 괴롭다.

분명 물건을 확인해 페드로가 무슨 수작질을 부리든, 차갑게 식은 심장으로 감상하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은 그것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수정 속에 무슨 영상이 담겨 있든, 다시 한번 눈물과 오열을 토해 내며 휘청거릴 것이 빤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절대 이 속에 담긴 것을 보지 않겠노라 다짐해 버린다. 에스메랄다는 손에 들린 것을 옆으로 내던졌다. 타당, 탁, 하는 둔탁한 소리 뒤로 상자와 수정이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이후 집무실에서 적막을 찢어 내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건 깃펜이 만들어 낸 사각거림뿐이었다.

* * *

에스메랄다는 속에 눌러 둔 감정들에 다시 한번, 더 굵은 쇠사슬을 칭칭 감아 주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나단 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녀가 들어와 고한 방문자는 나단이었다.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고는 한들 집무실까지 올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눈을 깜빡인 후 답했다.

“응접실로 안내하렴.”

무슨 일이지? 라그나가 보냈나? 왜 그가 직접 오지 않고? 에스메랄다가 생각하기에 나단이 그녀를 만나러 직접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의문을 품은 그녀는 보고 있던 서류를 마무리한 후 곧장 응접실로 건너갔다.

나단은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몸을 자꾸 들썩이는 걸 보면 지금의 공간이 그에게 편하지는 않은 모양인데…….

“어…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래, 어서 오렴.”

그녀가 나단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시녀가 곧장 다과를 내어 왔다. 에스메랄다의 것은 차로, 나단의 것은 음료로 준비해 준 시녀가 나간 후에야 에스메랄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늘 승마 수업도 재미있었니?”

“네, 네!”

앞에 놓인 간식거리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힐끔거리던 나단이 화들짝 놀라며 답을 했다.

“듣자 하니 이제 혼자서도 말을 몰 수 있다던데?”

“아, 걷는 거는 이제 호, 혼자 할 수 있어요.”

고개가 살짝 위로 들리는 모습을 보건대, 뿌듯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브람 백작령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이른 변화를 짚으며 살포시 웃어 주었다.

“완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곧 경보와 속보도 할 수 있겠는걸?”

“경보… 아, 빨리 거, 걷는 거요?”

“그래.”

“헤헤, 저도 빠, 빨리하고 싶어요. 도련님이 태, 태워 줬을 때, 엄청 빨리 갔어요. 기분이 조, 좋았거든요.”

거기에서 연결점이 생겼구나. 쌍둥이는 그녀가 승마장에 나타나지 않는 격일을 이용한 것이다. 나단을 말에 태워 주거나 승마를 가르쳐 주는 등의 방법으로 접근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찻물로 입술을 적시며 생각했다. 역시나, 아직 어린 쌍둥이 역시 테노리엘이라고.

나단은 계속 승마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보이는 흥미에 동조해 주며 대화에 응해 주었다. 긴장이 풀린 것인지, 나단이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화두에 올렸다. 직접적으로 왜 왔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 건 아니었고 부드럽게 우회를 해서 접근하는 방식으로.

“오늘도 본성 정원에 들렀니?”

“응? 아뇨, 오늘은 저, 정원에 안 갔어요.”

쿠키 가루를 입술에 묻히고 우물거린 나단의 답이었다.

“그럼 별채에서 바로 온 거니?”

“그, 그냥 승마장에서 바로 왔… 아!”

이제 나단이 에스메랄다의 집무실까지 방문한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으리라. 우물쭈물, 잠시 망설이던 나단이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말을 꺼냈다.

“서, 서커스 보러 갈래요?”

“서커스를?”

“네, 같이 가서 노, 놀면 재, 재밌을 거라고…….”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것도 쌍둥이가 행한 수작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에스메랄다는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권해 주어 기쁜걸?”

“어어…….”

“그날 시간을 비워 보마.”

쌍둥이의 부추김이 있었다 한들, 그 문제로 집무실까지 찾아왔다는 건 나단이 이 제안에 매력을 느낀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쌍둥이에 대한 것을 배제한 채 판단을 내렸다. 나단의 변화는 라그나가 에스메랄다에게 가지는 부채감을 늘어나게 만든다. 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가, 같이 가요?”

“그래, 네 말대로 함께 놀면 즐거울 테니 말이야.”

겸사겸사, 괜한 짓을 하고 있는 쌍둥이에게 경고도 하고. 나단을 부추긴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는 나단을 배웅한 후, 에스메랄다는 영지 시찰 일정을 명목으로 며칠 후의 시간을 비우기로 했다. 페드로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쌍둥이와 신경전을 할 차례가 다가온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그들이 어떤 말을 속삭여도 홀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달콤한 속삭임도 기만에 지나지 않을 테니, 이전과 달리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집무실로 돌아온 에스메랄다는 무의식적으로 첸의 책상 위를 훑고야 말았다. 며칠 전 그녀가 집어 던진 수정구 마도구가 그의 책상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치우라거나 버리라는 등의 말을 하지 못했기에 첸이 임의로 챙겨 둔 것인데……. 그게 미치도록 거슬리면서, 오늘도 치우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꽉 깨물며 자리로 돌아왔다.

한순간에는 다 그만둔 채 보고 싶다고, 무사하냐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내가 왜? 라는 생각 때문에 이를 악물게 된다. 거기서 그냥 죽어 버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그 말이 정말로 그들의 죽음에 영향을 미칠까 무서워서 벌벌 떤다. 스스로에게 낸 상처가 아파서 이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야 하나 싶어 막막하다.

아르페시스에게도 괜찮은지, 그는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원망과 그 원망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넘쳐나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에스메랄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습관처럼 길게 숨을 이어 내는 게 전부였다. 또 한 번, 지금의 감정들을 억누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면서.

* * *

페드로의 생일을 무시하듯 넘기고 일상을 지속하자 결전의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서커스단은 테노리엘 백작 성이 있는 도시에서 열흘간 공연을 한 후, 인구가 일정 수를 넘는 백작령의 도시 곳곳을 순회하게 될 것이다.

오찬을 함께하는 내내 빨리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난 나단 덕분에 라그나도 설핏 웃었으니 며칠 동안의 야근은 충분히 보상되었으리라.

“빨리, 빨리!”

미리 준비해 둔 마차에 훌쩍 올라탄 나단이 라그나와 에스메랄다를 재촉했다. 그녀의 또 다른 목표인 쌍둥이들은 보이지 않지만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 빤하니 얌전히 기다리면 될 일이다.

에스메랄다는 시리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녀의 일행이 탄 마차는 곧 성을 벗어나 시가지에 진입했다. 영주 대리로서의 공식 일정이기도 했기에 오랜만에 가문의 기사들이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했다.

유리 세공품, 나무 조각품, 혹은 여인들의 장신구나 길을 가며 사 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한 물건과 수많은 음식을 파는 가판대 거리를 지나자 역시나, 나단이 흥미를 보였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구경을 해도 좋으리라.

에스메랄다 일행은 시가지에서 내려 공연이 진행되는 광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움직이면서 일도 좀 하고. 오찬을 먹고 나왔지만 나단의 손에 간식거리가 가득 들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단이 먹거리에 집중한 사이 에스메랄다는 가판 상인에게 물었다. 나단의 놀이터는 그녀의 일터이기도 했으니까.

“최근 밀가루 가격이 올라 구매 지원금을 책정했는데, 실제 도움이 되던가?”

최근 서부 영지는 연합군의 물자 징수로 식자재의 물가가 오른 상태였다. 그걸 영지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했다간 파산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올 터. 에스메랄다는 후에 황실로부터 받을 면세의 일부를 지원금으로 책정, 실제로 가문의 사비를 거기에 투입하고 있었다. 후에 면세를 받음으로써 생기는 영지 수입이 다시 가문의 사비를 채우게 될 것이다.

“예, 예, 그럼요! 저는 다른 상인들과 돈을 합쳐서 한 번에 구매하는데, 그때 도매상에게 들어 보니 다른 영지들은 난리가 났답니다.”

상인은 에스메랄다를 포위하듯 서 있는 기사들의 가슴팍에 그려진 테노리엘의 문장을 힐끔거리며 질문에 답했다. 도넛을 파는 상인의 옆에서 장사를 하던 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저희도 지원금이 없었으면 판매 가격을 두 배로 올려야 했을 겁니다. 이게 다 아가씨 덕분이에요.”

소득이 한정되어 있는 영지민은 생존에 필요한 필수 지출이 아닌 경우, 물품의 가격이 올라가면 구매를 망설이게 된다. 가판 음식같이 유흥이나 충동적인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지출 품목은 그런 식으로 가격 변동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격을 두 배나 올렸다면 사 먹는 사람은 절반 이하로 줄었을 터. 결국 매출이 줄어 밀가루 등의 식자재에 투자한 값도 건지지 못하고 파산하는 일이 생겼을 것이다. 지원금의 실제 활용도가 높은 모양이었다.

“지원금을 갚아야 해서 동화 한 닢 가격을 올렸지만… 서커스단이 들어와서 당분간은 매출이 높을 겁니다. 이게 다 아가씨 덕분이지요!”

에스메랄다는 상인들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돌렸다.

“많이 팔게.”

“예, 예,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애초에 에스메랄다의 외출 명목은 영지 시찰이었다. 나단이 방문하는 가판대 상인들 위주로 영지 실정을 파악하면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저건 무, 뭐야?”

라그나가 나단의 손에 묻은 설탕 가루와 기름을 닦아 주는 동안에도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아이고, 아가씨!”

마침 공예품을 늘어놓고 팔던 상인이 에스메랄다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그녀가 멈춰 서자 다른 일행들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예품을 살피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식품 같은 필수재보다 소득 변동에 따른 판매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치품을 가만히 돌아보며 물었다.

“최근 판매량은 얼마나 줄었지?”

“말도 마세요. 요즘 장사를 접는 이들도 많은 것을요. 그래도 그제부터는 서커스를 본다고 놀러 온 인근 마을 주민들이 많아서, 조금씩 팔리고 있어요! 그 덕에 여관에도 손님이 많다더라고요.”

테노리엘 영지는 장식품, 가구, 세공품, 병장기 등을 생산하는 장인이 많다. 이렇게 판매 규모가 줄어들면 수공업에 종사하는 영지민들의 생계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조만간 세공품을 외부 영지에 수출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영지 내의 상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소득이 유지되어야 조금 전 살펴본 가판대 상인들의 소득도 유지될 수 있을 테니까.

종달새 모양의 유리 세공품에 관심을 보이는 나단에게 그걸 쥐여 주고 나서도 에스메랄다의 시찰은 계속되었다. 덕분에 광장까지 가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늦은 건 아니었지만 일행이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어어! 코가 빨개!”

광장을 떡하니 차지한 것은 거대한 천막이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일행을 위해 마련되어 있던 자리에 앉으니 나단이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 빨간 코네. 진짜 이걸 몇 년 만에 보는 거지?”

“쟤는 왜 코가 빠, 빨개?”

“눈에 잘 띄게 일부러 칠한 거야. 쟤들이 돌아다니면서 돈을 받거든.”

“돈?”

“뭐, 동물 간식값을 내는 사람도 있고 재주를 더 보려고 동화나 은화를 내기도 하고.”

“진짜? 동물한테 가, 간식도 줄 수 있어?”

“고기 조각 몇 점 던지는 거야. 다 상술이라고. 해 봤자 돈만 아깝… 해 볼래?”

“해, 해 볼래! 할래!”

나단과 라그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좌측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빈자리가 두 개나 더 있었으니까. 오늘의 일정을 계획한 쌍둥이가 서커스단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실제로도 쌍둥이는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리디, 너도 보러 왔구나.”

“어, 도련님들!”

“나단, 안녕?”

“라그나는 오랜만에 보네.”

쌍둥이를 발견한 나단과 라그나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사이 라그나에게까지 접근했다니 발이 빠르다. 별채에 그들이 방문했다는 보고는 받지 않았으니 라그나가 외부로 나오는 시기를 노렸겠지.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쌍둥이를 훑었다.

“나단이 하도 기대를 하기에 와 봤더니, 여기서 다 만나네.”

방긋 웃은 오멘의 말에 에스메랄다 역시 방긋 웃어 주며 답했다.

“생각보다는 늦으셨네요.”

페르멘의 입매가 살짝 떨렸지만, 그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응? 무슨 소리야?”

“모른다고 답하실 건가요?”

“우리는…….”

“자,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페르멘의 반박은 우렁찬 목소리에 잡아먹혔다. 서커스 단원들을 돌아본 단장이 공연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가벼운 곡예와 저글링은 물론 불을 뿜는 등의 기예까지. 구경거리가 계속 바뀌었다.

“사자다! 저거 사자 맞지? 우와!”

그토록 기다리던 맹수들이 나타나자 나단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 아래에서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쌍둥이와 대화 중이었다. 그 속에서 오가는 단어들이 화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셋 모두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기에 멀리서 보기엔 화목한 오누이로 보였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 무지한 어린아이를 선동한 오라버니들의 재치에 감탄했답니다.”

“……선동이라니, 그저 아이가 즐겁길 바라는 마음에 한 조언인걸.”

페르멘이 입을 꾹 다문 사이 오멘이 어떻게든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너도 서커스 같은 볼거리는 오랜만이지? 함께 나오니까 재밌고 좋지 않아?”

“네, 3여 년 전 황도를 누비던 마수가 떠올라 즐겁네요.”

페드로라면 덤덤함을 가장하며 ‘네가 울고 있던 그 날?’ 하고 받아쳤을 텐데 두 사람에게선 답이 없었다. 아직 이런 공격적인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겠지.

“오라버니들 덕분에 이런 경험도 다 해 보네요. 감사해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야, 하지 마.”

한껏 비꼬아 말했더니 페르멘이 주먹을 움켜쥔 채 물어 왔다. 오멘은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우리한테 화가 난 게 있으면 말을 해 줘. 뭐든 우리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줘. 응?”

환호성과 웃음소리 아래에서 그들만의 대화가 오고 갔다. 에스메랄다는 페르멘의 간절한 말을 들으며 조소했다. 실수? 실수라고? 그건 그들의 실수가 아니었다. 선택이자 신념이지. 에스메랄다가 간섭할 수 없는 그들의 인생.

그녀가 가족들을 설득하는 대신 처음부터 선을 그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신념이 거기에 있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결국은 다시 똑같은 길을 걸어갈 테니까. 주고 싶었던 모든 사랑을 주고, 그녀가 주는 사랑 또한 넘칠 만큼 받은 후 떠나 버리겠지. 거짓말로 그녀를 기만한 페드로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나. 그들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페드로라는 전적이 있기에 두 사람이 하는 사과는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에스메랄다가 직접 그 사과를 부정했다. 그들의 사과는 한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니까.

그녀를 위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곁을 내어 주는 것도. 곁에서 살랑거리는 온기에 취하는 것도. 더 이상은 싫다. 현혹되지 않고 버틸 것이다. 어차피 혼자가 될 거라면 애초부터 혼자인 것이 났다. 그럼 가졌던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공허를 겪지 않을 수 있겠지.

“기회?”

에스메랄다는 쌍둥이의 앞에서 경멸로 가득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을 준다 해서 변하는 게 있긴 한가요?”

“어째서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 거야? 우리를 그렇게 못 믿어?”

“네.”

페르멘이 조금 화가 난 듯한 어조로 따지고 들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단호하게 답했다.

“오라버니들을 믿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고.”

돌아오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결국은 그녀를 떠나갔다. 사랑한다고 속삭였으면서 결국은 그녀를 버렸다.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그녀를 위한다는 이유로 떠나지 않았던가. 부탁한 적도 없건만! 거짓말밖에 하지 않는 이들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

차라리, 그래 차라리 하루빨리 남부군의 파발이 페드로의 전사 소식을 가져왔으면 좋겠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걱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속 시원하게 원망만 할 수 있지 않겠나? 시간을 거슬러 왔던 직후에 그랬던 것처럼. 심장을 꽁꽁 얼리고 원망만을 담은 채 그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팔을 잡아끄는 나단의 행동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쌍둥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지독하게 일그러진 속내를 다정한 미소로 감추며 나단과 시선을 마주했다.

“바, 방금 봤어요?! 사람이 불 속을 지나갔어요! 막, 막 호랑이가 막 뒤로 따라가고!”

“그럼, 봤지. 신기하니?”

“진짜, 진짜 신기해요! 대단해!”

그녀의 속내가 나락으로 떨어진 채 그곳을 부유하고 있다 해서 라그나의 중요한 아들을 대접하는 데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에스메랄다는 충격으로 인해 굳은 형제들을 외면했다.

그날 외출 일정은 상당히 길었다. 온몸이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다행히도 달가운 소식이 그 피로를 몰아내 주었다.

「난폭한 고양이 포착.」

솔루베르 공작령에 숨어 있는 반군이 누구의 세력인지 확인되었다. 카 루그 알그레노 케니스,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반군이 창설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첫 번째 패를 찾았다. 생각보다 빠른 성과였다.

“시기는… 선물을 가득 안겨 줄 수 있는 사의 달이 좋겠네.”

그때쯤이면 이동에 방해가 되는 에스메랄다의 승마 실력이 늘어 있는 것은 물론, 부대 전체가 남부군을 이탈하며 온전하게 가져간 물자도 슬슬 떨어질 터. 본디 사람이란 여유로운 시기에 받은 도움보다 어려운 시기에 받은 도움을 상대적으로 강렬하게 기억하는 법이다.

케니스가 그런 도의적인 부분을 제 선택에 반영할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병력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나? 내부에 우호 세력을 만들어 두는 건 해 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 성급하게 접촉하는 것보다 그들의 물자가 떨어져 조급해질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렇게 다가오는 사의 달에 그녀의 출장 일정이 잡혔다.

* * *

최근 꿈에는 에스메랄다가 나오지 않는다. 전투를 하거나 서류를 보거나 가끔 일기를 쓰는 등, 근래의 일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꿈에서 빠져나온 아르페시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하는 건가?”

“하나 보냈으니 다음에 보낼 걸 기록해야지.”

페드로가 한 손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고 있는 수정 마도구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보고 훌쩍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느라 눌린 머리를 정리하고 눈곱이 끼진 않았나 확인하는 등, 부산을 떨고 있었더니 페드로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발동도 안 했다.”

“흠, 흠…….”

아르페시스가 몰려오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조금이라도 멋있게 보이려던 속내를 페드로에게 다 들켰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며칠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황제가 보낸 50명의 근위대가 합류하고 남부 영토 회복을 위한 전투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뒤집어쓴 마수의 피를 씻고 왔더니 그의 천막에 자리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던 페드로가 대뜸 수정 마도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여기 보고 좀 웃어 봐라.’

‘……하?’

대체 뭘 하려는 것인가 싶어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사한테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기록해서 보내려고.’

그들이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기록된 수정을 보니까, 그녀에게도 그들의 모습이 기록된 수정을 보내자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어떻게 하냐며 따졌지만… 몇 분 후에는 수정을 든 채 보고 싶다고, 잘못했다고 구구절절 속내를 토로하고 있었다. 차마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어서 절절매기만 하던 그의 등을 페드로가 떠밀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녀에게서 답이 없으며 어찌하나?

첫 수정 마도구를 보낸 날 페드로에게 물어보았다.

‘또 보내야지.’

답이 없다는 건 대화를 하기 싫다는 게 아니냐고, 화가 났다는 의미일 텐데 계속 보내도 되냐고.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불안에 떨 때, 페드로는 조금은 삭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보기엔 우리 행동이 우스울지도 모르지. 말도 않고 떠난 오라비나, 말도 않고 오라비를 데려가 버린 연인이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냥 콱 죽어 버리라고 저주하고 있을지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소리를 참 쉽게도 한다 싶었더니…….

‘이게 이기적인 행동이라도 어쩌겠어? 용서받고 싶고, 다시 그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서신을 보내면 읽지도 않고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 같으니… 우리가 멀쩡하다는 걸 조금 더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아서 생각한 거다. 마도구를 망가트리는 건 서신을 찢는 것보단 힘드니까.’

그녀가 수정을 보지 않고 치워 버리면 어쩌려고?

‘열 번, 백 번, 천 번… 셀 수도 없이 많이 보내면 한 번쯤은 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보기만 한다면 서신보다 효과가 좋을 테니까.’

그렇게 한 번이라도 그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지 않겠냐고. 아르페시스는 그의 말을 듣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들 스스로를 위해 에스메랄다를 괴롭힐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게 옳은가?

‘이기적인 게 뭐가 나빠.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어.’

그 질문에 페드로가 던진 말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동시에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참 모순적이지.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고 그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 페드로는 그 이기심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을 안겨 줄 때, 그들이 공생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익에 대한 문제가 그렇지. 후방국에게서 받아 내는 원조 문제를 들어 볼까? 평소에는 서로 물어뜯느라 바쁜 중앙 귀족들이 타국의 협상단을 대할 때 얼마나 합이 잘 맞는데.’

‘이득은 결국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넘치는 것을 의미하지. 누군가의 것을 빼앗거나 희생해야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인간이 이득을 추구하는 이상 분쟁이 단 하나도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어.’

‘가족들끼리도 마찬가지야. 내가 용서받는다는 이득은 결국 그 아이가 물러난다는 손해 속에서나 가능한 거니까.’

‘난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심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게 된 결과라고 생각하거든.’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라고 말하던 페드로를 보며, 아르페시스는 깨달았다. 인간은 양면의 동전 같은 존재다. 때론 경멸이 일어날 정도로 추악한 짓을 일삼으면서, 또 어느 순간에는 심장을 울리는 고귀한 행동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과거에 인간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던 에스메랄다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페드로와 에스메랄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악한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두 가지의 결과가 같을 리 없다. 부족하고 주의해야 할 단점을 인지한다면 그것을 보완할 수 있게 되니까.

페드로와 에스메랄다는 자신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가 악을 품고 있지 않다고 부정을 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그 악이 찾아와 속살거릴 때 경계조차 하지 못한 채 휘둘리지 않을까?

‘천사에게 용서받고 싶다는 게 내 이기심이니까, 난 그걸 위해 움직일 뿐이야.’

‘이 방법 때문에 지금은 그 아이가 아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이게 훗날 천사가 가질 더할 행복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할 거고.’

아르페시스 역시 페드로와 똑같은 이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용서받고 싶다는 염치없는 이기심. 쿠베트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품을 파고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 페드로를 데리고 온 게 아닌가. 살고 싶어서. 죽음에게 붙잡혀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아르페시스는 스스로의 이기심을 똑바로 직면한 채 페드로의 계획에 동참했다.

“얼 빼고 있지 말고 식사나 해.”

페드로가 합류한 후 아르페시스의 식사를 챙기는 건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본래 그 업무를 담당하던 휴고는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었지.

어찌 보면 괘씸한 그 모습에 왜 웃음이 났던 건지… 아르페시스는 본인이 황자로서의 위엄은 없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발동시킨다?”

아르페시스는 테이블에 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정 마도구의 윗부분에 박힌 마석에 반짝, 하고 불이 들어왔다. 마도구가 발동된 것이다. 지금부터 보이는 모든 행동과 대화가 수정에 기록되어 에스메랄다에게 전해지리라.

곁을 지키기만 하던 휴고와 달리 페드로는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그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누거나 전투 시 주의해야 하는 단점들을 지적받으며 머리에, 몸에 새긴다. 꿈에서 본 내용을 적어 보여 주기도 하고.

최근 숙제 검사는 정말 마음이 편했다. 에스메랄다가 나오는, 정확히는 그녀를 대상으로 하는 야한 꿈을 꾸지 않고 있으니까. 이 모든 건 함께하는 식사가 더 맛있다고 주장하며 멋대로 겸상을 시작한 페드로 덕분에 시작되었다.

‘우리 집안은 외부 일정 없이 저택에 있으면 다 식당에 모여서 먹었다고. 혼자 먹으면 그게 무슨 맛이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페드로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고 있다. 휴고나 테베르와의 관계, 개인 시간이나 식습관, 그리고 아르페시스 본인의 사고방식까지.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아르페시스는 홀로 픽, 하고 웃곤 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즐거웠으니까. 절대 거부하고 싶지 않은, 오히려 순응해 따라가고 싶은 변화였다.

“무구 점검은?”

“그대가 하도 뭐라고 해서 이제는 그냥 내가 챙긴다.”

“휘하 기사들을 믿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무기는 직접 관리하는 게 좋아. 철에 불과하더라도 검은 사람의 손을 타거든. 검을 드는 기사라면 그걸 잊지 마라.”

“그래서 매번 내가 챙긴다는데도?”

“조언을 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듣고만 있을 수는 없는 거냐? 어떻게 매번 따지냐?”

“본인이 지나치게 잔소리가 심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투닥거리는 것도, 절대 나쁘지 않다. 아니, 이런 것들이 있기에 끔찍한 전장에 나가는 게 예전보다 버겁지 않아졌다. 정말 마음을 놓고 쉬는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니까.

“오늘도 치즈는 안 먹겠지?”

“그래, 너 먹어.”

전장에서의 식사는 정량 배식이 원칙이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식단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를 게 없다. 천막이 쳐진 주둔지를 떠나 전장에서 야영을 할 경우에는 미리 만들어 둔 전투 식량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곤 한다. 대체로 밀가루나 육포, 손가락 마디 크기로 구운 작은 빵과 치즈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르페시스는 굳이 황족이니 어쩌니 해서 황태자와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정량 배식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서부 연합군과 전투를 할 때부터 겪은 일이라 따로 적응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페드로는 치즈 특유의 미끈거리는 식감이 싫어 먹지 않는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남는 치즈는 아르페시스의 몫이 되었다, 그는 유제품을 꽤 좋아했기에 나쁠 것이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녀도 치즈를 싫어하나?”

“천사는 향이 강한 것만 싫어한다고 보면 돼. 치즈 중에서도 향이 덜한 건 조금씩 먹더라고.”

사실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니까. 이렇게 툴툴, 저렇게 툴툴, 궁금한 걸 물어보거나 시답지 않게 킬킬거리다 보면 식사가 끝나 버린다.

아르페시스는 수정을 집어 드는 페드로를 보며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페드로가 기록을 끝내면 다음은 그의 차례니까. 어디까지 남하했다, 네가 많이 그립다, 식사량을 늘리는 노력은 계속해라……. 잠시 후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끝낸 페드로로부터 수정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흠, 에스메랄다.”

어서 나가 버리라고, 페드로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그는 정말이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대뜸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그대를 볼 수 없는 하루하루가 애달프기만…….”

아르페시스가 지난번에 했던 말을 흉내 내는 게 아닌가? 놀리는 게 분명한 표정으로!

그는 결국 페드로를 내쫓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등을 떠밀며 왁왁거리자 페드로는 또 순순히 밀려나며 웃었다.

“나가라는데도!”

천막 밖으로 내몰린 그가 킬킬거리는 게 정말이지,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잠시간 부들부들 떨던 아르페시스는 수정에 대고 페드로의 욕을 실컷 해 주었다. 그러다 아차, 하고 정신이 들어 횡설수설하기까지.

“아니, 내가 그대의 오라비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존경할 만한 기사이고, 훌륭한 사람이니까.”

가끔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것만 빼면 말이지. 그 말을 삼킨 아르페시스는 대신 다른 것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녀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하는지, 페드로에게 배우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그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는 말까지 하고 나서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까… 내게는 형제가 없지 않나?”

혹시나 페드로가 엿들을까 싶어 마나 장막까지 쳤다.

“황태자를 형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평범한 형제는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사실 그와 지내는 건 꽤나 즐겁다.”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스로가 느낀 것들을 전해 본다.

“그대는 아직 화가 많이 났을까? 내가 그대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때때로 겁이 난다. 그대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웃어 주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싫어진 것이면 어쩌나…….”

솔직한 말로 용서를 구해 보고.

“그럼에도 그대가 보고 싶다는 마음은 나날이 커지기만 해.”

애절한 말에 그리움을 담아 본다.

“페드로는 그대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많다. 나도… 그대의 식사량이 적은 걸 알고 있는지라 걱정이 되고.”

그와 페드로는 잘 지내고 있으니 부디, 그녀도 잘 지내기를 바라며. 전선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휘말려 걱정을 떠안은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 웃어 본다.

“또 연락하겠다.”

기록을 멈추기 전, 몇 번을 표현해도 부족한 마음을 다시 한번 고했다.

“에스메랄다, 언제나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고 나면 부끄러워서 귓가를 새빨갛게 붉히지만 말이다. 마석의 불빛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얄미운 표정의 페드로에게 그걸 건네주면 그가 파발꾼을 보낸다. 페드로가 근위대에 임명된 것 때문에 연결점이 노출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아르페시스가 보내는 것보다는 페드로가 본가에 연락을 하는 것처럼 보내는 게 나을 테니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전장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허공에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땅을 채웠다. 이게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 아르페시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뛰어올라 단번에 접근하는 중형 마수의 그림자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가득 채운 그림자를 발견함과 동시에 들려온 소리에 반응했다.

“굴러!”

그림자의 범위 밖으로 몸을 내던지며 서둘러 흙바닥을 굴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딛고 선 땅이 살짝 흔들렸다. 아르페시스가 구른 몸을 다시 일으킨 그 순간.

“숙여!”

페드로의 말에 허리를 접자마자 단창이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분명 그의 인근에 착지했을 중형 마수가 거기에 찔렸으리라. 그러니 이렇게 끔찍한 괴성이 등 뒤를 때리는 것이겠지.

아르페시스는 재빨리 옆 방향으로 한 번 더 굴렀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장소에 커다란 발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가만히 있었다면 저기에 눌려 납작해졌을 것이다. 그는 익숙해진 등골의 오싹함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페드로가 던진 단창이 중형 마수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다시금 공격을 하기 위해 발을 치켜드는 중형 마수와 그의 사이를 페드로와 휴고가 막아섰다. 내리쳐지는 발을 휴고가 막고, 아르페시스의 검이 휴고에게 막힌 발바닥을 찔렀다. 이어서는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검에 붙들려 있는 마수의 발을 잘라 냈다. 몸을 진동시키는 또 한 번의 괴성 사이에서 주변의 다른 마수를 처리한 근위대가 합류했다.

“빠져!”

페드로의 말에 따라 아르페시스는 중형 마수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잘려 버린 마수의 발에서 대검을 빼내며 빼곡히 모여들기 시작한 소형 마수에게 겨누었다. 방금 등장한 중형 마수가 이끄는 놈들이다. 그사이 페드로는 또 다른 단창으로 중형 마수의 시야를 완전히 빼앗았다. 무구에 마나를 실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면 두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현재 아르페시스의 마나 운용력 수준은 상급 기사가 되기엔 부족했다. 신체에서 마나를 분리하면 흩어져 버리고 마니까. 아쉬움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감정 속에서 그를 낚아채기 위한 마수의 꼬리가 날아왔다. 아르페시스는 대검에 마나를 씌워 그 꼬리를 잘라 버렸다.

‘중형 마수가 끼어들면 너는 집중 공격을 받는다고 봐야 해.’

‘학계에선 마수를 깎아내리려고 헛소리니 뭐니 콧방귀를 끼는데… 중형 마수부터는 똑똑한 동물 정도가 아니야.’

‘놈들은 보호를 받는 이가 중요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인간의 군대에서 머리를 제거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그러니 널 발견하면 죽이려고 달려들 테지.’

페드로가 알려 준 중형 마수의 습성에는 지휘관을 주도적으로 노리는 행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위를 대동해도 죽어 나가는 지휘 기사들이 많은 이유였다. 그렇다고 지휘관을 호위 하나 없이 전장에 던져둘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헤롤과 함께했던 서부에서도 아르페시스는 항상 중형 마수를 직접 보았다. 난전이 벌어지는 넓고 넓은 전장에서 언제나 그의 주변에 중형 마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게 보호받는 인물을 찾아 죽이려는 행동이었다는 건 몰랐지만. 그에게 도달하기 전 다른 기사들에게 저지를 당했기에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이다.

아르페시스가 4마리의 소형 마수를 처리했을 때, 페드로가 중형 마수의 목을 잘라 냈다. 그리고 그 즉시,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의 틈을 파고들어 와 아르페시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빠질 땐 네가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는데 내가 빠지면 넌 어떻게 하고?”

“그 정도는 알아서 살아남아.”

“전장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너무 자만하지 마라.”

페드로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휴고가 본인의 업무를 몽땅 가져가 버린 페드로에게 가지는 호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6년이라는 나이 터울을 두고도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왜 나는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거지?”

“혼자서는 처리 못 하냐?”

그들이 투닥거리는 사이 다른 이들과 중형 마수를 상대했던 테베르까지 합류했다.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이 생각보다 제대로 호위를 하는지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들이 마수에게 겨눈 검을 아르페시스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페드로는 본인이나 휴고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르페시스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장 남부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 죽이려고 들진 않을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페드로가 마수를 상대한다고 옆으로 빠지면 휴고가, 휴고가 마수를 상대한다고 빠지면 페드로가.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아르페시스의 곁을 지켰다.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보낸 이들은 50명이 번갈아 가며 아르페시스의 전투에 따라나서지만 그들은 한 번도 빠짐없이 전장에 서며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

‘테베르도 꽤 믿을 만한 인사인데… 그도 함께하면 그대들의 부담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기각.’

페드로는 개인적으로 근위 기사들의 뒷조사를 했다고 솔직하게 밝히며 기각의 사유를 언급했다. 뒷조사 결과, 의뭉스러운 점 하나 없이 깨끗하고 믿을 만한 배경을 가진 건 휴고뿐이라고.

가끔 과하다 싶을 만큼 아르페시스의 안전에 예민한 페드로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의 과보호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질 것이라 믿으며 정진하는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난전 중에 잡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는 일. 아르페시스는 소형 마수의 미간에 대검을 찔러 넣은 직후 다시금 인근에 등장한 중형 마수를 발견했다.

“하, 중형 마수가 이렇게 흔한 개체였나?”

정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중형 마수에게 진저리가 난다.

* * *

사흘 밤낮없이 지속되는 난전 속에서 야영을 하며 전투에 임했다. 해당 지역에 집결해 있는 네 개의 마수 무리를 토벌한 후 근처의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아르페시스를 반긴 건 사흘간 쌓인 서류였다. 그는 온몸에 뒤집어쓴 마수의 피와 먼지를 씻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총사령관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고.

함께 복귀했으나 그보다 먼저 서류를 훑어보던 지휘관들은 행정 업무에 한창 열중하고 있었다. 숫자, 글자, 숫자, 글자……. 서류에 빼곡한 것들을 보고 각 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인가하고, 신관들에게 들어갈 돈을 지불하고. 아, 때려치우고 싶다. 한숨을 푸욱 내쉰 그가 행정 업무를 마쳤을 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내일은 현재까지 마수를 소탕한 지역에 새로운 병영을 세우는 작업이 예정되어 있다. 대규모 전투 일정이 없으니 그가 직접 출정할 일이 없는 상황. 쉴 수 있다! 아르페시스는 그리 멀지 않은 천막에 있는 침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부름에 응해 당장 달려갈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업무입니다.”

“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1주일 전 새로 지휘부에 합류한 기사에게 닿았다. 왜 새로 합류했는가 하면, 이전 지휘관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상급 기사, 그것도 지휘관 자리가 꽉꽉 차서 승진이 힘들던 중앙과 달리 남부는 자리가 빨리 빈다. 그럼 자격을 갖추고 있던 다른 상급 기사가 지휘권을 이어받는다.

윗선의 지휘권자들이 바뀌는 사이 중급 기사는 상급 기사가 되고, 평기사는 중급 기사가 되며 빈자리를 계속 메우는 것이다. 남부군은 현장에서 직접 전투와 훈련을 병행하기에 성장 속도가 빠르다.

“또 있다고?”

보통 그의 업무는 부대별 전투 기록, 피해 상황, 그리고 이동 경로와 위치를 보고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총사령관의 인가나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읽고 조정하거나, 허가하면 끝난다. 그런데 오늘은 뭐가 더 있단다.

“최근 닷새간 전사한 이들의 명단과 전사 일자입니다.”

한 무더기의 종이 뭉치를 가져온 기사가 가장 위에 있던 종이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에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잠시 벙긋거렸다. 천막 한쪽에 서서 하품을 하고 있던 페드로와 그의 시선이 잠시간 마주쳤다.

‘대체 록세트 경을 회유했다, 혹은 친해졌다는 것의 기준이 뭔가?’

이미 칼라일과 개인 훈련과 대련을 몇 번이나 했다. 행정 업무를 볼 때면 칼라일 쪽에서 먼저 농담을 걸어올 때도 있을 정도다. 아르페시스의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한 친분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페드로는 수정 마도구를 보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답답해 물어봤더니 웬일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게 아닌가?

‘그들이 전사자 통보 권한을 너에게 내어 줄 때. 그 정도면 록세트 경뿐만 아니라 본진 기사들 전원이 네 권한을 인정했다는 의미일 테니까.’

지금 페드로가 언급했던 기준이 충족된 것이다. 모든 병사들의 전사 통지서를 총사령관이 적을 수는 없다. 수가 너무 많으니까. 그것만 하다가 전투를 등한시할 순 없지 않겠나?

해서 남부군은 부대별, 병력별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기사들의 전사 소식만 총사령관이 작성한 서신으로 통보한다. 48년 전, 3대 남부군 총사령관이 재임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쭉. 2대 전 테노리엘 백작, 즉 에스메랄다와 페드로의 증조부가 남부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관습이었다.

유가족에게 전사자의 부고를 전하는 일은 남부군 총사령관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이다. 또한 총사령관이 짊어져야 하는 가장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남부군 소속의 기사들 중 7할이 남부 출신이니까 외부 출신의 상관에게는 잘 맡기지 않는 일이지.’

법으로 명시된 것도 아니고, 관습이기에 업무를 넘겨주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 황태자를 비롯, 중앙에서 파견했던 총사령관들은 해당 업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을 그들의 손으로 직접 내어 준다는 건 아르페시스를 상관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와 같았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상관을 곁에서 보좌하겠다는… 그래, 일종의 남부 기사들만이 하는 충성 맹세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파견 온 총사령관에게는 좀처럼 하지 않는 그들만의 관습. 아르페시스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해도 되겠나?”

“효율을 위해 애도문은 행정관이 적습니다만, 성명과 전사 일자는 총사령관님께서 기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적으면 되나?”

“예, 총사령관님.”

유가족에게 부모나 자식, 혹은 형제와 자매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바랐던 일이지만 아르페시스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목록에 기재된 이름이 결코 적지는 않았으니까.

“지휘권자만 기록한 게 맞는가?”

“예, 현재 분할된 21개 부대에서 올라온 지휘 기사들의 전사 목록입니다.”

많다.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깃펜을 들었다. 잠시 후, 기사가 가리킨 빈자리에 이름과 일자를 쓰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불현듯 우뚝 멈추었다.

「카 울 아슈페…….」

멈추어 버린 펜촉을 타고 잉크가 점점이 종이를 물들이는 동안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펜촉이 있는 곳보다 위로 향했다.

“총사령관님?”

딱딱하게 굳은 얼굴 속에서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종이의 상단 정가운데 위치한 남부군의 문장과 전사자의 용기를 칭송하고 그의 명예를 찬양하며, 부고의 소식을 애도하는 글귀. 마지막으로 애도문의 아래 비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성명과 일자.

아르페시스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을 알고 있다. 테노리엘 백작 성에 머물 무렵 꾸었던 꿈 중에, 황도에서 처형식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내달리는 내용이 있었다. 그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곁에 있던 페드로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살아 있다고……?’

한순간 페드로의 죽음을 당연시하게 여겼던 그때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던 이상한 광경. 상단의 중앙에 찍혀 있던 남부군의 문장. 흐릿하게 번져 읽을 수 없던 검은 흔적들. 아래의 빈 공간에 그의 손이 직접 쓰고 있던 짧은 문장.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바 51일」

아르페시스는 그 뒤에 깃펜이 이어 쓰려던 단어를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제 생일입니다만?’

창백하게 질린 그가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바 51일 전사.」

완성되지 못했던 문장의 끝은 분명 그것이었으리라. 아르페시스는 그 단편적인 장면이 꿈처럼 미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 그 장면은 미래에서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뿐만 아니라 페드로까지 죽는다는 의미겠지.

“전하?”

“총사령관님?”

아르페시스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가 손까지 벌벌 떨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페드로까지 함께. 꿈속에서야 매일 느끼지만, 현실까지 쫓아오는 일은 거의 없던 족쇄가 그를 뒤덮었다.

─ --!

쇠사슬에 억류된 채 절그럭거리는 움직임 사이로 그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울렸다.

─ 테노리엘!

영혼이 찢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울컥하고 토해 낸 피는 내장을 쥐어짜는 고통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전하!”

“총사령관님! 신관, 신관을 불러오라!”

두어 번 더 피를 토해 낸 아르페시스의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슬과 족쇄가 사라졌다.

“아르페시스!”

당황이었는지, 공포였는지, 아니면 절망이었는지.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한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아르페시스가 흠칫,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훌쩍 다가온 페드로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페드로는 다급한 어조로 그를 부르며 현실의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잔뜩 일그러진 페드로의 표정엔 걱정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나 따라서 숨 쉬어.”

어느새 호흡이 멈췄던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깊게, 그리고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호흡을 따라 했다.

“괜찮으십니까?”

등을 쓸어 주던 페드로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르페시스는 천막 내부에 있던 남부군 기사들이 서로 간에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지.”

“……예, 전하.”

어느새 도착한 신관에게 신력으로 치료를 받고 난 후에도 쉽사리 진정을 하지 못했다. 억지로 호흡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전사자의 이름과 일자를 명시하는 글자가 잔뜩 흐트러졌다.

“오늘은 쉬는 것이 어떠신지요?”

칼라일이 권했지만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심호흡을 했다.

“손이 잘려 나간 것도 아닌데 미룰 필요가 어디 있다고. 하겠다.”

손의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간 쉬기는 했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날 23장의 부고 서신을 작성했다. 머릿속은 엉망이었건만 몸은 해야 하는 일을 찾아 움직였다.

‘천사가 백작 위를 이었다면 저희 형제가 모두 죽었다는 말인데…….’

‘저는 전선으로 향할 생각이 없고, 그곳이 아니라면 제가 죽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미래가 그딴 것일 리도 없지요.’

하지만 지금 페드로는 전선에 있지 않은가. 미래에 정말 에스메랄다가 백작 위를 이어받는 것이라면, 그녀의 형제가 모두 죽는단 말인가? 아레스, 페드로, 심지어 쌍둥이까지? 그럼 결국엔 그녀의 미래도……. 끔찍한 가정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 * *

겨우 먼저 다가오기 시작한 에스메랄다를 두고 떠나왔으니 페드로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혼동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 아르페시스의 곁에 있다. 그리고 그게 잘한 선택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남부에 진입했을 무렵 곁에 그가 없었다면 아르페시스의 목은 진즉에 마수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간 페드로가 지켜본 아르페시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진심을 담는 것도. 당장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는 대신 맞서 싸우기를 택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며 매일 성장하는 것은 물론 겸손한 자세로 주변에서 하는 말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듣는 것까지.

본인보다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양보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르페시스가 기본적으로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르페시스는 ‘저런 사람을 모시고 싶었노라’ 같은 기사의 욕구를 부추기는 장점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장점만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순 없으니 분명 단점도 존재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나는 것이다. 그런 단점을 모두 메워 주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리게 만들 만큼, 장점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정치를 못 한다거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것? 그런 건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그런 일을 대신해 줄 만한 충신들을 끌어모으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희망을 보고 밝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사람.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웃음이 함께한다.

아르페시스는 그를 따라가는 이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는 대신 그를 보며 쉬고, 다시금 힘을 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페드로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그리 신기하지만은 않았다.

“최근 닷새간 전사한 이들의 명단과 전사 일자입니다.”

남부의 기사들은 그 어떤 지역의 기사들보다 죽음 앞에 자주 노출된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거역하고 살아난 이들. 약자를 보호하고 주군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죽음 앞에 위축되지 말라는 기사도를 누구보다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무리가 바로 남부의 기사들이다.

“……여기에 적으면 되나?”

“예, 총사령관님.”

그런 그들이 페드로보다 덜할 리가 없다. ‘올바른 주군을 위해 생의 전부를 걸어 보고 싶다’라는 기사의 욕심 말이다. 페드로는 전사자 통지서를 작성하기 위해 다시 깃펜을 드는 아르페시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태자와 그를 제외하면 다른 계승권자는 2명. 다들 오늘내일하는 고령이다. 그 외의 인물은 모두 현 황제가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후 죽어 나갔다. 에스메랄다가 계획하는 일이 성공하면 황위 계승 순위가 가장 높은 건 아르페시스다. 만약 그가 황위를 계승하면, 그의 아래에서 치세될 세상이 기대가 된다면, 너무 앞서나간 생각일까?

물론 그 기대감 아래에 깔린 의문이 페드로를 찝찝하게 만들기는 했다. 그의 성정과 근래 보인 모든 행동으로 짐작하건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왜 아르페시스에게 그 일에 대해 숨기는 것일까?

구심점이 있는 반정과 없는 반정 중 성공 확률이 높은 건 당연히 전자인데, 페드로는 그녀가 왜 아르페시스를 배제한 채 일을 진행하는 것인지 고심해 보았다. 하품을 쩍쩍 하고 있다고 해서 머릿속까지 늘어진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관습적으로 이어지는 총사령관의 최고 권한까지 손에 쥔 아르페시스를 조금, 장하게 여기기도 하면서.

쌍둥이와 동년배라 그런지 페드로는 아르페시스가 정말 동생같이 보이는 중이었다. 쌍둥이들과 붙여 놓으면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동생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난 기분이랄까?

‘사실… 내게는 형제가 없지 않나?’

‘그래서 평범한 형제는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사실 그와 지내는 건 꽤나 즐거워.’

페드로는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끔가다 보면 정말 멍청한 건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 기록을 한 수정구를 넘겨주면 어차피 들을 수 있는 말인데 마나 장막은 왜 펼치는 건지. 그런 생각들은 아르페시스가 창백하게 질리며 피를 토했을 때 모두 사라졌다.

트집이 잡힐 일이 없도록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철저하게 지키던 경어까지 던져 버렸을 정도로, 페드로는 놀란 상태였다. 그가 진정한 후에는 다시 거리를 벌려 호위 위치로 돌아갔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후 행정 업무를 끝내고 천막으로 돌아가 들은 말은 드물게 페드로의 말문을 막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대의 전사 통지서를… 꿈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 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심호흡을 반복하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페드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돌아오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결국은 와 주지 않았잖아!’

‘혼자서 그 악귀들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 뒀잖아!’

아르페시스의 꿈을 정말 미래라고 믿는다면… 그 말을 했던 에스메랄다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의미인가? 페드로의 생각이 깊어졌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저항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거역할 수 있으리라는 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페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에스메랄다의 행동들을 엮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 보고 나니, 지독하리만치 잘 어울리는지라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의 이별을 진실이라 여기며 믿고 있던 에스메랄다. 가족들에게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던 에스메랄다.

그녀는 방어적이고 위축되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심각할 정도로 깎여 있었다. 루이자의 호감을 의심하고 수를 세고, 속내를 캐어 내고자 하던 그녀를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페드로의 머릿속에 그녀가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 라는 가정이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아마도, 꿈을 통해 그것을 단편적으로 보는 아르페시스보다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을 기반으로 무언가 일을 꾸밀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그 속에 그녀가 작위를 이어야만 했던 배경, 테노리엘 일가의 죽음이 존재한다면…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페드로의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떨고 있는 아르페시스와 먼 곳에서 떨고 있을 에스메랄다가 그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처럼. 하지만 페드로는 동요를 내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살며시 말아 쥐었다.

“뭘 그리 겁내는 건데?”

“……하?”

“네가 천사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건 일자가 다르다며.”

“그건…….”

“네 말대로라면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별것도 아니라고. 동요를 내보여 아르페시스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선택지를 골라 본다. 홀로 불안을 짊어져 아르페시스가 진정할 수 있도록.

“네가 쉽게 죽어 줄 생각이 없듯이, 나도 그럴 생각 없다.”

“…….”

“그 거지 같은 예지몽이 개꿈이라는 걸 증명해 보자고.”

쌍둥이들에게 해 주던 것처럼,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 주었다.

“그러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견과류나 챙겨 먹어.”

페드로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곧장 천막을 나선 건 아니었다.

“그냥 가면 어찌하나!”

아르페시스가 그를 붙들었으니까. 불안을 완전히 털어 내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아르페시스는 당당하게 수정 마도구를 요구했다. 공사는 구분해야 된다며 뻔뻔해져 가는 게 누굴 닮는 건지. 페드로는 실소하며 수정 마도구를 가지러 천막으로 돌아갔다.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아르페시스를 등지고 걸음을 옮긴 직후에 그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다.

“에스메랄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과 함께 천막으로 돌아온 페드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서신?”

“예, 쿠베트 후작가의 파발꾼이 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종자가 서신을 한 장 내밀었다. 발신인은 루이자.

「테노리엘 경께.

그간 잘 지내셨나요? 겨울의 눈이 녹기 전 뵈었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최근 바의 달이 한창이라 정원에 예쁜 꽃들이 한가득 폈어요. 산책을 할 때면 한 송이씩 방에 장식해 둔답니다.

(중략)

갑작스러운 서신을 받고 놀라지 않으셨을까 마음을 졸여 봅니다. 출정하셨다는 얘기를 늦게나마 전해 들어 이렇게 연락을 드려요.

경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안부와 평안, 그리고 무사 귀환을 바라며.

사 아그라 쿠베트 루이자」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은 사내로서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스스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은 조금 씁쓸했지만.

“귀엽기는.”

서투르게나마 여인의 흉내를 내는 루이자의 행동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1년, 2년, 시간이 지나 그녀가 정말로 성인이 될 날을 생각하면 입꼬리가 씰룩거리기까지 했다. 아레스에게 자랑이나 해 볼까, 하다가도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페드로는 답신을 적는 대신 종자들에게 잘 보관해 두라는 말과 함께 서신을 건네주었다. 수정 마도구를 챙겨 든 그는 다시금 아르페시스의 천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루이자에게 돌아갈 답신이 쓰이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 그게 전장에 선 사내가 내륙의 여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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