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1화 (21/45)

제21장

멈추지 않는 시간

오랜만에 찾아본 천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훌쩍, 후울쩍…….”

현재 천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라면, 저 좀 들어 달라는 듯 노골적으로 울리고 있는 훌쩍임이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걸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 훌쩍임은 아르셀을 볼 수 있는 모니터 앞에 쪼그려 앉은 신이 내고 있는 소리였다.

물론 주변의 천사들은 그것을 일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 봤자 실패할 것이라고 말렸음에도 일을 강행한 것은 신이었으니까.

한편 노골적인 훌쩍임과 그것을 또 한 번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천사들의 신경전에서 꽤나 자유로운 자가 있었으니, 한창 서류 작업 중이던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한 아름 챙겨 든 채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건 로글렌 차원에서…….”

“훌쩍…….”

“또 이건 페르마니아 차원에서…….”

“후울쩍…….”

그는 한쪽 팔에 신의 허리를 걸어 둔 채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업무 규율대로. 이후 가브리엘은 직접 신의 손에 결재 도장을 쥐여 주었다.

축 늘어진 신의 몸은 그가 이끄는 대로 하늘거렸다. 어떻게 보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대롱거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가브리엘이 그다음으로 한 일? 도장을 쥔 신의 손을 직접 붙들고 서류에 쾅쾅쾅쾅쾅 찍는 것이었다.

“결재 감사합니다, 어버이시여.”

이후 다시금 신을 아르셀의 모니터 앞에 떨군 가브리엘이 서류를 챙겨 자리로 복귀했다. 아마도, 각 차원에서 올라온 요청을 들어주기 위한 기획서일 터. 그 장면을 목격한 미카엘은 속으로 기립 박수를 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브리엘과 달리 몇 날,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훌쩍임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업자득이라지만 사랑해 마지않는 신이 매일 울기만 하니 계속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 물론 아르셀의 모니터 앞에만 앉아 있는 신 때문에 업무가 밀리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 요인 중 하나고.

아무튼, 지금 신의 상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무력감과 자책감에 시달리며 쪼그라든 상태랄까? 몇십 일 전, 천계에선 영웅의 영혼이 신력으로 걷어 낸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되짚고 있음을 확인했다. 해서 신은 영웅의 기억을 되찾아 구원자를 말려 보겠다는 기획을 세웠다.

아직은 안 된다고 뜯어말리는 대천사들을 무시하고 신력을 투자한 건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아르셀의 인과율은 아직 정상 궤도로 돌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인과율은 신의 창조물답게 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내가 마비된 적이 있다’라는 사실을 일정 기간 기억하게 된다.

한마디로 신이 인세에 개입한 경우 그것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의 개입을 막기 위해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시간이 흘러 개입이 더는 없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경계를 푸는 것을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된 상태에서 다시 인과율을 건드렸으니 반발이 일어나 신력이 모조리 튕겨져 나왔고 경계 태세가 심해졌다.

“하지 마시라, 하지 마시라, 그리도 간청드렸건만… 쯧.”

조율과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비틀린 인과율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4년 147일. 이전보다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신의 기획안은 신력만 소모하고 성과는 하나도 없는, 오히려 대기 시간만 길어지게 만든 실패한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영웅이 인과율의 존재를 느끼는 것 같기는 한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억을 되찾는 건 힘들겠지.”

창조된 생명이 창조주가 정한 규칙을 깨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하아, 미카엘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아르셀의 모니터 쪽을 힐끔거렸다. 신은 여전히 쪼그라든 채 훌쩍이기만 하고 있었다. 그때 미카엘의 머리 옆에 둥둥 떠 있던 하얀 빛 덩어리가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빛무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미카엘은 그 빛 덩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글쎄, 확실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선택의 결과를 조우하는 법이다.”

아르셀이 이 고비를 버티지 못하고 마신의 창조물에게 먹힌다면 그건 그 세상을 이루고 있던 창조물들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신은 창조물들에게 시작과 기회를 준 것이지 보장된 미래와 완전한 삶을 선물한 것은 아니니까. 시작 이후의 기회를 쟁취하고 삶을 꾸려가는 건 오롯이 창조물들의 선택에 딸린 것이다.

“그들의 무수한 선택 위에서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겠지만, 때로는 묵묵히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단다.”

미카엘의 말을 듣고 있던 건 오늘 자로 천계에 재입성한 지 3일 차가 된 성인의 영혼이었다. 직전의 내세를 차원 ‘율본’에서 겪은 성인의 영혼이 고개(영혼 덩어리에 형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영혼의 심리 상태를 보다 쉽게 표현하기 위해 비유를 해 보자)를 갸웃거렸다.

“모든 것을 우리가 해 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한다면 생명을 가진 창조물들이 신과 천사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장난감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신이 인과율을 만들어 본인의 개입을 제한한 것도 모두 아이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함이다. 천계는 인간을 비롯한 주신의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필 뿐이다.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도와주고, 남은 것은 그들이 알아서 하게 방관해야지.”

그렇기에 마신이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도 필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주신의 아이로 태어난 이상 마신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마신과 엮이는 바람에 겪는 모든 것은 그들이 태어났기에 겪어야 하는 운명의 일부다. 천사들이 차원에 관련된 업무에 치여 사는 것처럼. 뭐, 그때는 이미 인과율이 만들어진 후이기에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그 인과율 덕분에 마신의 적극적인 개입도 불가능한 상황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미카엘의 말은 어찌 보면 꽤나 냉혹했지만 영혼을 살살 쓰다듬는 그의 손가락은 무척이나 다정한 움직임을 담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성인의 영혼이 자신을 토닥이는 미카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이 최초로 창조한 천사이자 천계 최고의 전사이기도 한 미카엘. 그는 죽음에 이른 영혼을 거두고, 그들을 저울에 재어 심판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가브리엘이 생을 누리고 있는 영혼에게 필요한 격려와 지혜를 빌려주는 인도자라면 미카엘은 심판자였다.

본래 영혼의 관리는 보호자인 라파엘이 해야 하지만… 그는 순례자였던 루시퍼가 집어던지고 간 안배의 업무를 떠안는 바람에 사후의 영혼까지 관리할 여유가 없었다. 해서 생을 누리는 영혼을 보호하는 건 라파엘이, 사후의 영혼을 관리하는 건 미카엘이 하는 중이다.

죽음에 달한 영혼을 인도한 직후 라파엘에게 인계하지 않고 직접 관리를 하는 것이다. 율본에서의 내세를 끝내고 돌아온 성인의 영혼이 심판자인 미카엘의 곁에 있는 이유였다.

“모든 것은 선택을 따라 결과로 흘러가는 것이니…….”

주신과 함께 태어난 마신 역시 창조가 가능한 전지전능의 신. 유일하게 주신과 동급의 위치에 있는 존재가 바로 마신이다. 미카엘에게 인간이 까마득하게 어린 아우라면, 마신은 백부… 아니, 숙부로 하자. 주신의 위에 누가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주신에게서 태어난 천사들은 마신을 싫어하면 싫어했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넌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 된다.”

성인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던 미카엘은 곧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없어졌다. 그런 그를 한참 동안이나 주시하던 성인의 영혼이 별안간 포르르 영체를 떨었다.

“응?”

슬슬 다시 서류 더미에 파묻힐 생각이었던 미카엘의 시선이 다시 영혼에게로 향했다. 겨울철에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있는 때의 느낌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빛을 가진 성인의 영혼이 열심히 영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나 좀 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던 미카엘의 시선이 훌쩍이고 있는 신을 찾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가능성을 재고 있었다. 만약 시행한다면 남아 있는 신의 신력을 정말 한 톨도 남김없이 긁어모아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리라.

그것뿐만 아니라 대천사들도 차출해야만 한다. 경계심이 올라간 인과율의 반발을 막아서야 하니 이후 타격도 상당할 것이고. 정말로 시도한다면 대천사들이 모두 나가떨어질 테지. 심판과 인도, 그리고 보호까지. 그들이 직접 내세에 간섭하는 업무가 모두 정지될 것이다. 간섭에 필요한 신력이 한 톨도 남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인과율의 비틀림이 더 길어지는 것 역시 감당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기획안도 세우고 결재 후 안배과와 협업을 해서 마땅한 자리를 찾는 것까지. 벌써부터 까마득한 양의 서류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아직 아르셀의 구원자가 회귀함으로써 생긴 서류도 남아 있는데… 마음 같아선 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다.

지금도 많은 서류를 자진하여 늘리고 싶지 않다고! 미카엘은 일과 서류에 환장한 업무 중독자가 아니었기에 정말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고작 사흘 전에 죽어 안식을 취하고 있는 성인의 영혼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하기에는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신이 눈에 밟혔다. 오로지 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천사의 양심이 콕콕 찔리다 못해 비수가 박히는 것 같은 기분.

미카엘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성인의 영혼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복잡하고 아린 눈으로, 오래도록.

* * *

「노란색, 영주 성 발견. 머저리 철거 기획.」

「노란색, 고용 계약서 개편 시작. 전달 시기 조율 중.」

「노란색, 개편 과정 상세 보고 요구.」

「초록색, 원석 광산 발견. 계약 전 품질 확인 진행 중.」

「노란색, 사냥터 개방.」

「노란색, 주요 주시 사냥꾼을 우두머리와 위선자로 명명. 사냥 결과 지속 보고 요구.」

「노란색, 1~6 사냥터 기호 도입. 현재 우두머리 사냥꾼, 1번 사냥터에서 2번 사냥터로 이동 중.」

「노란색, 위선자 보고 체계 강화 요구.」

「파란색, 고용 인원 131명. 추가 모집 진행 중.」

「파란색, 갈색 머리 무리의 이동 주시 중.」

「붉은색, 업무 인계 완료. 체계 강화를 위한 인사 관리 진행.」

「붉은색, 저택 건설을 위한 준비 작업 착수. 2년여의 건설 기간 필요 요망.」

「노란색, 우두머리와 위선자 각기 상위 우측, 하위 좌측 사냥감 사살. 사냥감 처분 완료. 2번 사냥터 진입.」

「초록색, 광산 정보 공개. 계약 후보자 접대 중.」

「파란색, 보물 상자 주인과 접촉 계획 전달. 시행 요구.」

「노란색, 위선자 상위 좌측 사냥감 사살. 사냥감 처분 완료.」

「파란색, 갈색 머리 무리의 활동 포착. 보석 상자 제작소로 이어진 흔적 제거 중.」

「파란색, 적당한 쉼터에서 뜨개질 요구.」

「초록색, 계약 후보자 접촉. 동행하여 광산으로 안내 중.」

「초록색, 적당한 쉼터에서 뜨개질 요구.」

「노란색, 개편 계약서 전달.」

「노란색, 개편 계약서 이행.」

「노란색, 성벽 철거 도중 사고 발생. 붉은 노동자 다수 사망.」

「노란색, 머저리 추가 고용 진행.」

「노란색, 2차 개편 계약서 작성 중.」

「파란색, 보물 상자 주인의 행패로 자산 3개 완전 소실, 12개 일부 파손. 수리 중. 보물 상자 주인이 개를 구매.」

「초록색, 뜨개질 성공. 순조로운 계약 진행 예상. 1차 접대 종료.」

「파란색, 화폭 주인에게 보물 상자 주인과의 접촉 및 개의 방문 소식 전달 요구.」

「노란색, 2차 개편 계약서 전달.」

「노란색, 우두머리와 위선자 각기 7회, 11회 사냥감 사살 및 포획. 현재 3번 사냥터 진입 중.」

「붉은색, 어미 고양이 추적 작업 착수.」

「노란색, 아기 고양이를 따라 어미 고양이 터전 추적 중.」

「파란색, 화폭 주인 접선.」

「상단, 식용 금가루 장기 납품 계약 완료.」

「상단, 소모용 보석 가루 공개 준비 요구.」

「파란색, 뜨개질 완료. 갈색 머리 무리 유인 중.」

「노란색, 2차 계약서 이행.」

「초록색, 2차 접선 시도 중.」

「붉은색, 갈색 후보지 출신 관심 요망.」

「초록색, 아기 고양이 일부 목격.」

「붉은색, 갈색 후보지 출신과 우호 요구.」

「초록색, 아기 고양이의 거처 확보 요구.」

「파란색, 화폭 주인과 거래 완료.」

「노란색, 철거 현장 추가 사상자 발생.」

「파란색, 낚시 시작. 대형 물고기 포획 성공. 이탈한 소형 물고기 포획 진행.」

「파란색, 명화 2점 확보 성공. 현재 고용인 227명. 추가 모집 중.」

「초록색, 갈색 머리의 무리에 의해 2차 접선 실패. 붉은색에게 지원 요청.」

「붉은색, 초록색의 지원 요청 수락. 갈색 후보지 출신 초대.」

「노란색, 우두머리 및 위선자 3번 사냥터 진입.」

열병을 억지로 떨쳐 내고 꾸역꾸역 일어난 에스메랄다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각 지역에 하달된 명령들은 차근차근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동부에서는 실테르 왕실과 최소한의 접점이 만들어졌고, 루그레디안의 지원이 더해졌다. 황궁 외무부 관료이니 실테르에서 넘어와 에렘에 상주하는 외교관들과의 교류가 쉬웠다. 황도 뒷골목 정리를 수월하게 끝낸 루그레디안이 반군 수색에도 합류하기도 했고, 테몬 후작가를 손에 넣기 위한 계획도 준비 단계에 들어갔다.

남부에서는 에반스가 황태자의 명령서를 바꿔치기해서 분탕질을 치는 데 성공했다. 차출된 부대의 집결지를 바꿔 적은 명령서가 황태자의 명령서로 둔갑해 각 부대의 주둔지로 날아간 것이다. 그 결과 황태자가 대형 마수 토벌을 위해 내보낸 중앙군 8천 중 대다수가 3만의 마수에게 둘러싸여 사망했다.

현재 황태자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지휘관들을 향해 길길이 날뛰고 있지만, 트집이 잡히지 않도록 그의 인장이 사용된 명령서에 따랐던 남부군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겠지. 보고를 받은 직후 에스메랄다가 한 말은 간단했다.

‘그대로 재판까지 회부해 주렴, 머저리야.’

저가 발을 들인 수렁이 어딘지도 모르고 명령에 불복한 지휘관들을 처벌하겠다고 군법 재판을 열어 주면 최상의 결과다. 집결지를 잘못 기재한 것은 황태자라는 증거. 바로 그의 명령서가 남부군의 손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그 와중에 북부에선 신관들의 악행을 수월하게 기록 중이었고 테브라의 합류가 확실시되기도 했다. 당분간 그는 수입하는 곡물의 양을 늘리며 조금씩, 조금씩, 뒤로 빼돌릴 예정이다. 훗날 시장에 유통되는 양을 제하고도 반군을 먹여 살릴 수 있게.

테브라의 합류는 쉽게 이루어 낸 성과가 아니었다. 보통 유년기에 학대를 받은 이들은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학대한 사람에게 공포를 가진다.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강자라는 인식이 박혀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깨 버리기 위해 북부의 용병들을 동원, 벨베크 백작 내외가 이동하는 무리를 습격, 부상을 안겨 주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벨베크 백작도 결국은 사람이고,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그제야 백작의 사생아들을 보며 분노에 떨기만 하던 테브라가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오랜 학대가 쌓아 올린 복종과 굴복의 벽을 깨고 나와 복수를 열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외에도, 북부와 국경을 접한 세튀스 세작의 소행으로 꾸민 국경 마을 몰살 사건이 있었다. 테란이 사살한 황제의 세작들은 거기서 죽은 것으로 위장된 상태. 이제 실종된 세작들이 그 시체들을 발견해 속아 넘어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동부에서도 실테르의 세작들을 도와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비슷한 일이 있었다.

두 일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고, 덕분에 실테르의 세작들과 아브람 백작 간의 접점이 희미하게나마 만들어졌다. 황제의 시야에 들지 않은 채로.

그리고 나흘 전에 앙그리트 남작가의 일이 터졌다. 남작령에 남아 있던 남작은 진즉에 확보했고 그가 빼돌린 디아나 역시 곧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작은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듣고 의탁을 택했고 디아나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이동 경로를 모두 알려 주었다. 황실 기사단은 이동의 흔적을 뒤져 추적을 해야 하는 입장. 반면 에스메랄다는 디아나가 도착할 곳에 미리 가 있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두 세력 사이에 경쟁이 성립되긴 힘들지 않겠나?

“디아나가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근접 시중은 물론, 업무 보조까지 함께하는 전속 시녀의 부재로 에스메랄다의 피로는 상당했다. 그간 아르페시스와 페드로의 전투 및 부상 소식도 빠짐없이 보고 받아 왔다. 속에서 들끓는 화와 배신감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어리석게도 이미 두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다. 그들을 향한 걱정이 시들어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아 모든 보고를 받아야만 했다.

사냥감을 포획했다는 말은 경상에 준하는 부상. 사냥감 사살은 신체의 일부 등이 절단되는 등의 중상에 준하는 부상을 의미했다. 또한 사냥감을 처분했다는 건 부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아무리 신력으로 회복되었다 한들 아르페시스와 페드로의 부상 빈도는 가볍지가 않았다.

그 소식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압박을 주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두 사람에게 난 화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통에 아르페시스에게 괜찮냐는 서신을 보낼 수도 없다. 초조함 때문에 집무실을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져 운동량이 훌쩍 늘었을 정도다. 매일, 매 순간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후우…….”

에스메랄다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길게 유지했다. 이미 버릇이 들었을 정도로 자주 하는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사람에 대한 걱정을 떨쳐 내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테니까.

바의 13일. 정확히 33일 전에 행해진 페드로의 독단에 타격을 받은 건 에스메랄다뿐만이 아니었다. 테노리엘 백작 역시 파문을 요구하는 간략한 쪽지와 함께 남겨진 임명장 때문에 부랴부랴 황도로 돌아갔다. 멋대로 구는 아들을 정말 파문할 수가 없어서 황제를 비롯한 중앙 귀족들에게 변명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기껏 아르페시스를 숨어 만났건만 페드로의 독단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시간만 날린 꼴이니…….”

최근 테노리엘 백작령을 기웃거리는 황제의 세작들이 늘어나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루그레디안의 보고에 따르면 세작뿐만이 아니다. 3일 전 정무 회의에서 타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상단에 대한 증세 안건이 나왔다.

테노리엘 가문의 상단 중 하나는 타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그곳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당장 타국에서 활동하는 상단들을 보유한 가문들이 합심해 막아서고 있지만, 황제가 또 어떤 공격을 할지 모르니 촌각을 세우고 방어할 수 있는 세력을 다져야 할 처지가 되었다. 쿠베트성에서 무얼 위해 그리도 몸을 사렸는지 모를 일이다.

에스메랄다의 손에 깃펜으로 인한 굳은살이 크기를 더해 가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페드로처럼 땀으로 목욕을 한 시리스가 집무실을 방문했다.

“아가씨, 식사를…….”

“두고 나가렴.”

“……오늘은 승마 연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두고, 나가라고, 했을 텐데.”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한 시리스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는 대신 이를 악무는 것을 선택했다.

‘네놈이 없어도 가능한 길이 그 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 누구의 안위를 우선에 두어야 하는지 잊지 말도록.’

지금 에스메랄다의 눈동자처럼 차갑기 그지없던 페드로의 눈동자를 잊지 않았으니까. 시리스는 그의 충고대로 이 길의 끝에 도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망각하지 않았다.

“드셔야, 합니다. 테노리엘 경께서 신신당부를…….”

“네가 언제부터 오라버니와 신의를 챙기는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놀랍기도 해라.”

시리스는 페드로가 떠나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의 부재 동안 지켜야 하는 훈련 계획표를 전해 주는 것도 모자라, 에스메랄다의 식습관을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나 뭐라나.

그딴 것 알 게 뭐란 말인가? 정작 본인은 약속을 촛불 하나에도 타 버릴 종이처럼 취급하면서, 에스메랄다에겐 약속을 강철과 같이 여기라 말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드셔야, 합니다. 어제도 차 한 잔이 전부였잖습니까.”

“내 체력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넌 실력이나 쌓으렴. 반군을 찾으면 반드시 중앙군과 마찰이 생길 테니까.”

“……아가씨께서 잘못되시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깃펜을 몸의 일부처럼 놀리던 에스메랄다의 손이 뚝 멈추었다.

“테노리엘 경의 당부 때문이 아닙니다. 저희의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

“아가씨라는 구심점이 계시기에 각 지역의 규합이 되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시리스가 주섬주섬, 집무실에 배치된 테이블 위로 음식 접시를 옮겨 놓기 시작했다.

“저는 아가씨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집무실 위를 떠다니는 깊은 한숨은 에스메랄다의 것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다른 지역의 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그런 사람들을 남겨 두고 아가씨께서 어떻게 되시기라도 한다면 저희에겐 내일이 없지요.”

“…….”

“제게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에게 복종한다면 황제를 난도질하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 드셔야 합니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콕콕 쑤시는 배를 움켜쥐며 의자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알겠으니 나가렴.”

“드시는 걸 보고…….”

“잔소리를 한 번에 알아들을 나이는 되었다. 네가 지켜보면 더 매슥거릴 것 같으니 나가렴.”

“……예, 승마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시리스가 나간 후, 에스메랄다는 말 그대로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넘겼다. 살기 위해 먹는 과정 자체가 고문 같다고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과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접시를 반도 비우지 못한 에스메랄다는 결국 체기로 인해 주치의를 불러야 했다. 환으로 만든 것 대신 약초를 우려낸 약을 마시자 승마 연습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속이 더부룩한데, 이 시간은 정말이지 그녀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백작과 함께 황도로 돌아간 건 아레스뿐이니까.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백작과 쌍둥이 간에 언쟁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결과 훈련과 교육에 있어선 누구보다 엄함에도 다른 것들은 자식들에게 다 져 주는 게 버릇이 된 백작이 또 한 번 패배한 모양이다. 그러니 쌍둥이가 영지에 남아 있는 것이겠지.

그들은 이미 지난해 영지로 돌아오기 전 기사 서임을 받았다. 기사 서임의 나이를 제한하던 미성년자 출정 금지법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기사란 황제의 검, 출정 명령이 내려오면 언제든 움직여야 하는 이들이 미성년자라고 출정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나이 제한이 있었던 것인데, 이제 그 법이 없어졌으니 두 사람은 곧장 백작으로부터 서임을 받았다.

황제를 대리해 기사 서임을 내릴 수 있는 공후백의 권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3세부터 운용법을 심장에 새기고 10년 동안 검을 들었는데, 평기사 서임을 받았을 리 있나?

두 사람은 이미 무기에 마나를 씌울 수 있는 중급 기사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결론적으로 스승으로 모시는 기사를 따라다닐 이유가 없어졌으니 영지에 남아 개인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승마장과 그리 멀지 않은 직계의 개인 연무장에서. 고로 그들은 열흘 전부터 시작된 에스메랄다의 승마 시간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아…….”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승마장 울타리 밖에 서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한다. 그 시선이 어찌나 거슬리는지.

에스메랄다는 승마를 위해 환복을 하고 머리를 한 가닥으로 올려 묶었다. 성을 나서는 그녀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 안녕하세요오, 아가씨…….”

그녀의 승마 시간엔 나단도 함께하고 있다. 기껏 말을 받았는데 타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 에스메랄다가 라그나에게 먼저 권하였다. 지금은 그의 허락하에 승마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격일에 한 번, 나단은 매일. 그녀가 경보까지 진도를 뺀 것과 달리 나단은 아직 교육자가 고삐를 끌어 줘야 했다.

“나단, 공부는 잘되니?”

“네에, 그럭저럭…….”

라그나가 뭐라고 했는지 그제부터 나단이 존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난 직후에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 최근 흥미를 가진 것에 대해 언급하면 금세 풀어진다. 나단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응은 에스메랄다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 주곤 했다. 그와 대화를 할 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

“공부도 좋지만,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승마를 꾸준히 하렴.”

나단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시리스의 도움을 받아 먼저 말에 올랐다. 구보로 몸의 근육을 풀고자 다음은 가벼운 경보로 이어졌다. 이대로 몸이 속보에까지 익숙해지면 장애물 등을 동반한 연습을 해도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어김없이 시야에 비치는 두 인영을 무시하며 말의 옆구리를 찼다.

“와아…….”

그녀가 탄 말이 옆을 지나갈 때마다 나단의 시선도 에스메랄다에게 고정되었다. 갑작스러운 감탄사에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단이 움찔, 몸을 떨다가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으앗!”

나단의 승마를 봐 주던 기사가 곧장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낙마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다.

“괜찮니?”

조금 전 낙마할 뻔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새파랗게 질린 나단의 안색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쉬는 게 어떻겠니?”

말이 무서워지기라도 할까 싶어 권했던 것인데, 나단은 도리질 치며 말 위에 엎드려 버렸다.

“나단 님, 허리를 펴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보다 못한 기사가 자세를 지적해 줄 정도로 안장에 바짝 붙었다는 의미였다. 긴장한 게 눈에 훤히 보이는 터라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나단의 옆에서 멈춰 섰다. 그녀보다 정신 연령이 훨씬 어린 나단이 다칠까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의 부상이 문제가 되어 라그나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사양이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가만히 나단을 살폈다. 허리를 펴지 않고 안장을 꽉 붙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말 위에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면서,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건 또 아닌 것 같고. 최근 나단이 학습에 의욕을 보이는 것으로 비추어 봤을 때…….

“천천히 배우렴.”

“에?”

마주친 노란색 눈동자가 거부를 암시했다. 아마도 배우는 것에 조급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 이유까지야 에스메랄다가 파악하기 힘든 내면적인 것이겠지만, 행동의 양상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조금 전 잘못해서 낙마했다면, 말에서 떨어졌다면 말이야. 그러면 며칠은 말을 타지 못했겠지.”

“어…….”

“성급해지다 보면 필요하지 않게 다치는 경우도 있는 법이란다.”

이어서 한마디를 더 남긴 에스메랄다가 다시 말의 허리를 찼다.

“다치지 않는다면 매일 배울 수 있고, 그럼 실력이 늘어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지금은 놀라서 몸이 굳은 것 같으니 쉬렴.”

이번에는 권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그에 말고삐를 쥐고 있던 기사가 나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는 테노리엘의 사람이니 에스메랄다의 말을 우선으로 할 수밖에. 머뭇거리던 나단이 겨우겨우 말에서 내려갔다.

에스메랄다의 승마 시간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나단은 다시 말을 타기 위해 움직였다. 그녀는 나단의 옆에 말을 세우고 땅으로 내려섰다.

“이제 좀 괜찮니?”

나단이 대답 대신 고갯짓을 했다. 끄덕끄덕, 하고.

“손이나 몸이 떨리지는 않고?”

이번에도 끄덕거림이 다였기에 에스메랄다는 대화를 굳이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으응… 아, 아니, 네…….”

“나는 먼저 들어갈 테니 조심해서 타렴.”

승마도, 나단과의 대화도 할 만큼 했으니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아!”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가 뒤로 쭉 당겨지는 바람에 에스메랄다의 허리가 꺾였다.

“그만!”

무언가를 파악하기도 전에,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에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허리를 받쳐 준 시리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금방 균형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각기 나단의 손목과 멱살을 잡았던 이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빼내며 말했다.

“나단, 타인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함부로 잡아당기면 안 돼.”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나단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묶어 올린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을 나단이 움켜쥐는 바람에 그녀가 넘어질 뻔했다. 그에 나단의 승마를 봐 주던 기사는 물론, 곁에 서 있던 시리스까지. 둘 모두 나단을 에스메랄다에게서 떼어 놓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단, 대답을 해야지.”

에스메랄다는 겁먹어 있는 나단을 한참이나 달래야만 했다. 그 이후에는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방법도 알려 주고, 상대방을 만지기 전에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이유도 알려 주었다. 멀찍이 떨어진 남자들의 눈치를 보던 나단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에스메랄다는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나단에게 내어 주었다. 충동적으로 행한 사고일 뿐이다. 나단을 10세 이하의 아이로 보고 있는 에스메랄다가 이 문제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났을 때 말릴 새도 없이 나단이 얻어맞을까 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리스와 기사를 더 멀리 보낸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왜 만지고 싶었니?”

“그, 금화 같아서…….”

“글쎄, 금화보단 색이 옅을 텐데.”

“반짝거려서 시, 신기해.”

그날 나단은 다시 말에 오르지 않았다. 본인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기사의 곁으로 가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의 승마 교육자를 바꿔야 할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호출을 받고 온 라그나가 나단을 데려간 이후에도 승마장에 잠시간 남아 있었다. 혹시나 지금의 광경을 다 본 쌍둥이가 나단을 따라갈까 싶어서. 그들이 힘없는 소년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라 여긴 건 아니었지만 의중을 알기 힘든 것만은 분명했다.

말이라도 걸면 뭐라도 파악을 해 볼 텐데, 쌍둥이는 여전히 승마장의 울타리 밖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직접 닿은 후에야 두 사람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또다시 체한 것처럼 속이 꽉 막혔다. 복통과 두통 중 어느 것이 더 심한지, 잘 모르겠다.

* * *

에스메랄다는 참으로 기꺼운 펑, 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라그나 일행이 머무는 별채에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 날이었다.

“영애의 이름을 들었을 때 생각이 많았소.”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왜 테노리엘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명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앙그리트 남작의 신변을 확보한 후 디아나까지 챙긴 용병들이 그들을 백작 성에 데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열흘 남짓. 그 시간을 인내하자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 조금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는 앙그리트 남작. 그와 같은 색채를 가졌으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일견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여인은 디아나였다.

에스메랄다는 경계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앙그리트 남작을 비껴 본 상태로 중얼거렸다.

“테노리엘이라…….”

두 쌍의 호박색 눈동자가 에스메랄다에게 쏠렸다. 지금 두 부녀가 이곳에 있는 건 서로 간의 신뢰를 다졌기에 성사된 일이 아니었다. 당장 의탁할 곳이 없는 급박한 상황이니 따라온 것이지. 앙그리트 남작의 의심과 불안은 일견 당연한 것이었다. 벨베크나 앙그리트가 테노리엘과 유독 좋은 사이였던 것도 아닌데 대뜸 황제의 손아귀에서 구해 준 게 이상하게 보이리라.

에스메랄다는 그의 의문을 풀어 주면서 회유에 필요한 기반을 천천히 닦아 나가기로 했다.

“기왕에 가지신 의문, 그 시작을 조금 바꿔 보시는 게 어떨까요?”

“의문의… 시작?”

홀짝이는 소리 없이, 조용하게 찻물을 삼킨 에스메랄다가 입을 열었다.

“테노리엘이 왜? 보다는 에스메랄다가 왜? 라는 의문을 되짚어 보시길 바라는 사소한 조언이랍니다.”

초상화에 담기는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에스메랄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의 남작 대신,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계속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에스메랄다가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테노리엘에 내분이…….”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에스메랄다로부터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디아나가 귓가를 붉히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영애, 저는 영주 대리이기도 하답니다.”

내분이 일어났으면 가문의 당주인 백작이 에스메랄다에게 영주권을 위임할 리 없다는 설명이었다.

“아, 그, 그렇죠……. 말실수였어요. 테노리엘이 그럴 리가 없죠.”

“두 분의 이해를 돕고자 설명을 해 드리자면…….”

뒤로 갈수록 작아지던 디아나의 목소리와 달리,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하기만 했다.

“제가 아버지를 속이고 있는 것에 가까울까요?”

“무슨……?”

“……네?”

지금에 와서는 속이고 있다는 말도 모호하게 되었지만 아직 전부 들킨 건 아니니까. 에스메랄다는 아직 백작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백작은 에스메랄다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눈치챘지만, 어디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고. 이건 꽤나 중요한 차이였다. 백작이 대응 방법을 정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작께선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가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오?”

에스메랄다는 침묵 대신 다시 한번의 질문을 함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하필이면 왜 앙그리트 가문이었을까요?”

황제와 벨베크 백작 간의 신경전을 모른다면 절대 짐작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그려 본 앙그리트 남작은 그 정도의 하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밀리에 파견된 황실 기사단의 행보를 미리부터 알아채고 반응할 만큼의 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그는 대체 어떻게, 황실 기사단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디아나를 빼돌렸을까? 정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백작님이… 관련되셨나 보군.”

남작이 쓰고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를 악물기라도 했는지 그의 턱이 조금 불거졌다. 그에게 황실 기사단의 동태를 알려 준 건 벨베크 백작이리라. 황제를 실컷 욕하며 몸을 사리는 게 좋겠다고, 사탕발림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걸 본 다른 봉신들은 위기가 와도 자신의 주군이 챙겨 주겠다는 착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의 행동 때문에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만이다.

“음? 백작께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시던가요?”

봉신의 안위를 살펴 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 위험이 닥친 이유를 잘 숨긴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벨베크 백작의 교활함을 새삼 확인하며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에게는 교활이 세간에서의 수완을 논하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꽤나 후한 평이었다.

“곡물 시장…….”

남작과 에스메랄다의 대화 사이에서 침묵하고 있던 디아나가 앓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영지 관리를 위한 수업에 치중했던 지방 귀족임에도 잠시의 생각만으로 답에 도달했다.

에스메랄다가 디아나를 높게 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꼼꼼하고 섬세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특징을 무기로 삼을 수 있는 호기심도 왕성하다. 다양한 사건들 간의 상관관계를 훑고 그것을 엮고 엮어 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인물. 그게 에스메랄다가 디아나에게 내리는 평가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보좌를 받으며 신전의 뒤를 털고 다녔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답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벨베크 백작께서 그곳을 조금 흔들긴 하셨죠.”

황제의 경고를 받는 바람에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겠지만. 아, 어쩌면 일전 북부의 용병들을 동원한 습격 사건을 황제의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테브라의 행적이 변한 것을 들킬 경우에도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습격 사건이 테브라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에스메랄다가 만들어 낸 사건들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건만, 외부의 사건들과 얽히고설키며 기대 외의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을 기반으로 에스메랄다가 탄 배는 더 빠르게 나아가리라. 만족이 담긴 미소를 지저의 아래로 밀어내 숨긴 에스메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없던 초조함도 자극할 만큼 느릿한 목소리였다.

“흐음, 벨베크 백작이라…….”

진심을 숨긴 대신 피어오른 미소는 조소를 닮아 있었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실 것 같네요.”

저 때문에 잘려 나간 봉신을 기만하는 주군이라니, 참으로 흥미로운 인사라고. 에스메랄다의 비꼼이 두 사람을 파고들었다.

“나라를 받드는 기둥들을 본보기의 제물로 사용하는 에렘도 참, 재밌는 곳이고요. 그렇죠?”

비꼼 다음에는 잠시간의 해석이 필요한 말이 툭 떨어졌다. 어조가 너무 평의해서 생각하는 그 말을 의미하는 게 맞는지 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디아나의 몸이 굳는 동안 남작은 눈을 감으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생각하지만, 누구나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아는 단어가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이오?”

에스메랄다는 남작의 목소리에서 낭패의 기색을 읽었다. 괜한 일에 엮였다, 같은 후회를 하고 있으려나? 상대방이 후회를 한다고 해서 에스메랄다가 그들을 놔주는 일은 없겠지만. 두 사람은 라그나와는 완전히 다른 전철을 밟아 에스메랄다의 옆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니까.

“남작께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군요.”

에스메랄다가 던진 서문에 남작과 디아나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말의 의미는 꽤나 단순했다. 가문이 황실을 상대로 수작질을 부렸다는 누명을 쓰고 무너진 상황에서, 그녀가 내미는 손 외에 명줄을 연장할 방법이 얼마나 된다고 감히 그런 타박을 하느냐는 훈계.

어렸을 때는 아니었지만 나이가 든 에스메랄다는 위계질서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업무의 순환 구조에서는 책임과 의무, 권한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어야 최상의 효율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대, 빈말로도 관대하고 자애로운 윗사람이 아니었다. 엄격하고 권위적인 사람이었지.

“남작께서는 지금 하고 계신 말의 의미를 알고 계시긴 한가요?”

마른침이라도 삼키는지 남작의 목울대가 꿀떡였다. 그림 같던 에스메랄다의 미소 위에는 어느새 고압적인 태도가 덧그려진 상태였다.

세상에 책임 없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별채에 도착한 직후까지만 해도 에스메랄다의 의중을 읽기 위해 생각을 곱씹고 있던 남작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러니 테노리엘의 이름에 혹해서건,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건, 그녀의 의중을 모두 밝혀내지 못했으면서도 선택을 한 만큼의 책임을 져야지.

“남작께서 보시기에는 제가 자선 사업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까?”

남작의 갈색 턱수염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신관들조차 하지 않는 일을 제가 할 것이라 여기는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그들의 신변은 에스메랄다의 손아귀 속에 있다. 이대로 완전히 숨어들 수 있게 도와주든지, 반대로 황제에게 내어 주든지, 모든 건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의중을 어느 정도 내보인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황제에게 신변을 인계할 때 두 사람이 꼭 살아 있으라는 법이 어디 있다고. 시체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의탁 이후 이어지는 처분은 그들을 낭떠러지 위에서 구해 준 에스메랄다의 권한이다. 거기에 도전하는 것을 오냐오냐 넘어가 줄 수는 없지. 두 사람이 무지한 나단도 아니고. 지금보다 더 명확한 서열 정리는 제대로 합류한 후가 되겠지만 무엇이든 기반이 있어야 위로 쌓아 올리기 수월하다. 미리미리 해 두어서 나쁠 게 없다.

“어째서 답을 주지 않으시나요?”

에스메랄다의 독촉에 남작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선택지를 모두 지워 버리는 강압을 비겁이라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유도하는 건 협상의 기본이기도 하다.

에스메랄다는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는 남작을 보며 고압을 내려놓았다. 과거의 성급한 선택을 후회하는 모양새니 압박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좋겠다. 무엇이든 과하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니까.

“아, 이런.”

에스메랄다는 왼손으로 뺨을 감싸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순간 바뀐 표정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제가 답을 너무 재촉했네요. 부디 용서하셔요.”

맞은편에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조금은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에스메랄다는 별것도 아닌 일에서 자신의 비틀린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비틀려 버린 것을. 쉬지 않고 흐르면서, 또한 쉬지 않고 훌쩍 떠나 버린 시간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 또 한 번 시간을 되돌려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에스메랄다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시작했다. 본디 중요한 협상일수록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한다. 사람의 심리란 한순간 뚝딱,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지금부터는 시간을 들여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반가운 마음에 손님을 모셔 온 첫날부터 실례를 했네요. 죄송해서 어쩌죠?”

앞으로도 계속 그들이 여기 머물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첫날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이 그런 에스메랄다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말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달갑고 영광된 시간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소. 테노리엘 영주 대리.”

딱딱하게 굳은 남작의 미소에 에스메랄다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미소로 답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 또한 영광입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어 버린 디아나를 한 번 더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선은 편히 쉬세요. 별채에 머물고 있는 자와 곧 인사를 나누실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보죠.”

그녀가 자리를 만들기 전까지는 같은 별채에 있는 인물을 보지 못할 만큼, 함부로 나다닐 수 없다는 의미였다.

“……기대하고 있겠소.”

새로운 손님의 환영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두 사람이 있는 별채의 응접실을 나선 직후, 에스메랄다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문질렀다. 승마의 후유증이었다. 머리로는 자세와 기술을 알고 있어도 몸은 처음 겪어 보는 충격 때문에 비명을 질러 대고 있다.

매일 안마를 받고 있지만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바의 달 내내 근육통에 시달려야 겨우 익숙해질 것이다. 그녀의 몸은 형제들의 것과 달리 나약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에는 그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비참했더랬지.

그녀가 통증으로 인상을 찌푸린 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별채의 중앙 계단을 전부 내려왔을 때 만난 사람 앞에서 굳이 그런 표정을 보여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 안녕. 아가씨.”

계단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나단은 레오와 함께였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레오의 인사에 아차 싶었는지 나단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아,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래, 나단. 점심 식사는 했니?”

“네에, 그 사람이랑 가, 같이 먹었는데 그 사람은 다, 다시 오, 올라갔어요.”

평소라면 레오와 산수를 비롯한 학문을 공부하고 있을 시간인데……. 의문을 가진 직후 에스메랄다는 레오가 나단에게 속닥거리는 것을 보았다. 레오의 입가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던지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거 주, 줄게요.”

신발의 앞코로 바닥을 콕콕 찍으며 눈치를 보던 나단이 줄곧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나단의 손에는 몇 송이의 꽃이 들려 있었다.

“정원에서 이르게 핀 꽃을 보고 아가씨께 드리고 싶다기에, 잠시 찾아뵈었습니다.”

“그… 그 사람이 아가씨가 우, 우리를 많이 채, 챙겨 주는 거라고, 고마운 거, 거라고 해서…….”

“그렇구나.”

앞에서는 왁왁거리기 바쁘면서 뒤에서는 그런 기특한 말을 하고 있을 줄이야. 라그나도 가만 보면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손을 내밀어 그 꽃을 받았다. 노란 꽃잎이 하늘거리는 이른 봄꽃 위로 침실에 있는 라퓨나가 덧그려졌다. 아르페시스가 직접 꺾어 보낸 그것은 마석이 떨어지지 않는 한 시들지 않을 것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쓸어 보는 라퓨나는 아르페시스를, 지금 눈앞에 나타난 봄꽃은 페드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꽃이 만개하는 바의 중심에는 페드로의 생일이 있기에 그의 생일은 언제나 꽃과 함께 시작되었다.

“고맙구나.”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스메랄다가 답했다. 고작 꽃 몇 송이에 이토록 복잡해질 수 있다니.

“어… 꽃 조, 좋아해요?”

비어 버린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단이 더듬더듬 물어 왔다. 에스메랄다는 손에 든 꽃을 빤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꽃을 좋아했던가? 사물에 가지는 선호를 굳이 따져 본 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르페시스가 준 라퓨나도, 페드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른 봄꽃도 사람을 애절하게 만드는지라 싫다는 평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응?”

“……아마 좋아하는 것 같구나.”

그 대답에 나단이 웅얼거렸다.

“다음에 또, 또 줄게요.”

“그래… 고맙구나.”

눈치를 보며 위축되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인가? 라그나 앞에서는 잘 웃는다던데. 아직은 타인이 어려운 모양이다. 가볍게 생각한 에스메랄다는 손에 꽃을 든 채 별채를 나섰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절대 반갑지 않은 소식을 맞이해야만 했다.

「우두머리 일행 3번 사냥터 중심부 하루 거리 도착. 직전 사냥에서 우두머리 사냥감 포획, 위선자 사냥감 포획 및 사살 성공. 사냥감 처분 완료.」

이번엔 또 어느 부위를 어떻게 잘라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속이 뭉그러진다. 두 사람을 걱정하는 만큼 화가 난 상태라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물을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보내는 글에 화를 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집무실의 책상 위에 나단이 준 꽃과 남부에서 온 서신이 늘이어졌다. 에스메랄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눈을 감았다. 불안과 걱정, 그리고 분노까지, 감정에 잠식되어 날뛰는 심장이 조금이라도 얌전해질 수 있도록.

* * *

“테노리엘의 위상이 떨어지는 날이 오려면 수십 년은 걸리겠구나.”

“영주… 대리 말씀이세요?”

“그래, 고작 열세 살에… 괴물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앙그리트 남작이 에스메랄다에 대한 평가를 내어 놓았다. 부친의 적나라한 말에 디아나가 문가를 힐끔거렸다. 에스메랄다는 너무 이른 접근이 되레 남작의 경계심을 살까 싶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디아나가 영지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야 남작에게 접촉을 시도한 이유였다.

별채의 응접실에 남은 두 사람이 그런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그들에게 먼저 접근한 것도, 손을 내민 것도 에스메랄다였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붙기는 했으나, 그들이 에스메랄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왜… 우리였을까요?”

디아나의 물음에 이은 남작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그들에게 드러낸 건 황실, 혹은 에렘 자체에 대한 반감이 전부였다. 그들을 선택한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전무했다.

“벨베크 백작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황실에서 곡물 시장 때문에 백작님을 건드린 것처…….”

“그 작자 얘기는 그만하자.”

홀로 생각을 거듭하며 추론을 내어 놓던 디아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남작과 백작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지금 남작의 태도로 보건대, 앙그리트의 입장에선 백작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된 모양이다.

화를 참는 게 분명한 남작의 모습을 보며 디아나는 홀로 생각을 엮어 보았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에스메랄다의 목적은 반정. 황실을 꺾어 내려는 것이리라. 그 이유는 뭘까? 다음 황좌를 테노리엘이 가지려는 것일까? 아니면 이대로 가다간 모국이 멸할 것 같으니 창대를 매고 앞장서는 것일지도?

테노리엘의 명성은 지겹도록 들어 왔으니 이런 행동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에스메랄다가 부친인 테노리엘 백작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에휴…….”

복잡하다, 복잡해.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살살 털었다. 황제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이 폭삭 주저앉을 줄이야. 성의 식솔과 기사들, 영지민들, 친인척들까지. 머리를 차지하고 앉은 걱정거리가 한가득이었지만 별채에 감금당하다시피 한 지금 그것들에 대해 알아내긴 요원하리라.

보름 가까이 말을 타고 왔다. 남작 성을 떠났던 무렵의 닷새보다 훨씬 안전하고 여유 있는 이동이었지만 피로가 없는 건 아니니까. 디아나는 우선 몸이고 머리고 쉬게 하고 싶었다. 다음에 대한 명확한 기약 없이 떠난 것을 보면 당장 그들을 데리고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또, 또 저 버릇. 한번 생각에 빠져들면 몸을 달달 흔들어 부르지 않는 이상 반응이 없는 남작이었다. 디아나는 굳이 말을 붙이는 대신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를 콕 집어 말했다.

“피곤해서 그러는데, 쉴 수 있겠는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시나 이미 머물 방까지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동안 처음 보는 남자들이 뒤로 따라붙었다. 아마도 감시 및 보호 역이겠지.

디아나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 그들이 머무는 별채 주변에는 에스메랄다가 채워 넣은 병력이 가득했다.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탈주를 막기 위한 병력 말이다. 감금인지 보호인지 모를 상황 속에서 디아나가 에스메랄다를 떠올렸다. 천사처럼 곱고 여린 모습으로 인간을 도륙한다는 마수보다 무서워 보이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반정… 이라.”

씻고 침대에 누운 디아나가 중얼거렸다. 대륙에 남은 제국은 두 곳. 그들에게만 허락된 황제의 칭호와 어울리지 않게 에렘 내부가 썩어 있다는 건 디아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솔솔 잠이 오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그 짧은 단어는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정…….”

디아나는 몇 번이고 그 단어를 중얼거리다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며칠 후 디아나로부터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에스메랄다는 오찬 시간을 함께하자며 시간을 비웠고, 본성이 아닌 별채로 향해 디아나를 만났다. 두 사람을 별채에서 꺼내 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녀를 1층의 식당이 아닌 별실에서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에스메랄다가 현재 두 사람에게 허락한 영역은 별채 2층의 좌측 복도 영역뿐이다.

“영애, 오셨어요?”

별실에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디아나가 에스메랄다를 반겼다.

“네, 영애. 함께하자 청해 줘서 기뻐요.”

앙그리트 남작, 제롬이 더 이상 작위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니 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어진 디아나다. 하지만 당장에 그녀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합류를 밝히면 정리될 호칭을 괜히 미리부터 들쑤셔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무엇이 궁금해서 만남을 청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굳이 이리저리 돌아가며 시간을 낭비하기엔 에스메랄다가 바쁘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곧장 용건을 언급하기로 했다. 그에 디아나는 심호흡을 했다. 쥐고 있던 물잔을 다 비운 후에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진심인가요?”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진심이 아니라면 황제가 죽이려고 계획했던 이들을 데려올 이유가 없었다. 후에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을 장난으로 행할 리가 있나? 굳이 이런 부분을 확인하려 드는 걸 보면 아직은 어리다는 게 눈에 보여 신기하긴 했다. 본래라면 첫 만남은 디아나가 20대 중반에 들어섰을 때였으니 올해 19세가 된 디아나가 어린 건 사실이다.

어느덧 테이블을 채운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자 디아나가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에스메랄다는 설핏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앙그리트 남작은 직접 겪어 본 적이 없기에 추측 정도지만, 디아나는 다르다. 에스메랄다가 아는 디아나는 개혁에 대한 반감이 희미하다 싶을 정도로 급진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뒤에 남은 옛것보다 앞에서 만날 새것에 집중한다. 가문을 몰락시킨 황실에 복수하는 것보다 썩어 있는 황실을 무너트리고 다가올 미래에 중점을 두고 움직이던 사람이다.

“그럼… 어떻게 하려는 건지 물어도 되나요?”

“그건 알려 줄 이유가 없는 질문이군요.”

돕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아직은 외부자에 불과한 그녀에게 알려 줄 정보가 아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의미 없는 문답을 이어 간 후에야 에스메랄다의 마음에 들 만한 질문이 나왔다.

“만약… 성공하면 에렘은 어떻게 되는 거죠?”

“에렘일 뿐이죠.”

“아, 혹시 황자 전하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건가요?”

“그건 후일에 남는 이들이 할 일이 아닐까요?”

“네?”

에스메랄다는 수프를 반쯤 비운 후 스푼을 내려놓았다.

“제가 원하는 건 황좌도 권력도, 미래도 아니에요.”

“어…….”

“그들의 몰락일 뿐이죠.”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인지 디아나가 굳었다. 포크에 찍었던 고기 조각이 접시 위로 떨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놀란 모양이다.

“제 역할은 거기까지죠. 다음은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요.”

루그레디안에게도 아직 밝히지 않은 속내다. 에스메랄다는 황실과 신전을 몰락시킬 수만 있다면, 그다음에 다가오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쿠베트성에서 아르페시스와의 관계가 변해 잠시간 ‘다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르페시스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 그의 무엇이 예쁘다고 미래와 다음에 대해 곱씹어 보겠나. 다음 황위에 오를 이가 누구인지, 에렘의 이름이 바뀌든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설령 그녀가 한 짓으로 에렘이 완전히 멸망해 버린다 해도 알 바가 아니다.

“남은 사람들이라면…….”

“저와 행보를 같이하지만,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르겠죠.”

“그게 누구죠?”

“그것 역시.”

물로 입을 헹군 에스메랄다가 냅킨을 들었다. 메인 요리는 두어 점 먹은 것이 다였지만 그래도 수프는 반이나 비웠다. 입가를 닦아 낸 그녀의 대답은 조금 전의 것과 비슷했다.

“영애에게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겠네요.”

궁금하면 발을 들이라는 말을 넌지시 찔러 주는 게 전부였다.

이후의 대화는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식사를 끝냈고, 그녀가 식기를 놓은 후 디아나도 식사를 더 이상 이어 가지 않았으니까.

“조만간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죠.”

그때는 디아나와 제롬 모두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네, 곧… 다시 뵐게요.”

의미를 알아들은 디아나가 에스메랄다를 배웅했다.

그날도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던 나단을 만난 것을 보면 그녀가 별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는 모양이다. 집무실로 돌아온 에스메랄다의 손에는 또 한 번, 노란 봄꽃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시들어 버린 꽃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먼저 선물을 건네기 시작한 변화를 좋게 보는 중이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표한다는 건 마음의 일부를 열었다는 의미니까.

“라그나가 바빠서 신경을 써 주지 못했을 텐데… 다행이네.”

레오와도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고 말이다. 이참에 가신의 자제들이라도 불러 또래 친구를 만들어 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타인과의 교류가 나단의 발달에 좋은 영향을 줄 테니 말이다.

작은 꽃병에 담긴 봄꽃을 보며 나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열어 놓은 창문으로부터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란 깃의 전서구였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에스메랄다가 물러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가 다시 한번 대형 마수를 토벌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이상 남부에서 올 소식은 많지 않으니, 아르페시스나 반군에 대한 소식일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또 그의 부상 소식일까 싶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두머리, 3번 사냥터 중심부 진입 후 머저리 이탈. 모래시계 32개.]

다행히도 부상에 관련한 소식이 아니었다. 전서구가 남부에서 오는 데 이틀하고 반나절은 걸렸을 테니, 황태자 일행은 이미 중부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루소멜 백작 성은 영지 내부에서도 꽤나 북쪽에 위치한 곳이니까.

지금 사용하는 시간 체계는 앞의 숫자가 홀수일 경우 무시하고 뒤에 있는 숫자만 읽으면 되는 식이다. 그러니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아르페시스가 사령관저에 도착한 지 2시간 만에 떠났다는 의미다.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백작 성 내부에 있는 이들에게 한 번 더 접근을 해 보아야 할까? 잠시간 가능한 수를 골라 보던 에스메랄다의 인상이 구겨졌다. 읽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던 문장이 서신의 말미에 떡하니 적혀 있었으니까.

「올가미에 걸린 사슴, 사냥 및 도축. 이야기꾼 출발.]

참아 내기를 바랐건만 히나가 독단적으로 사고를 쳤다. 만일의 경우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 문제에 대해선 이미 지시를 내려 놓았다. 자율 판단에 의해 선처리, 후보고를 해도 좋다고.

올가미에 걸렸다는 것은 시도 후 실패했고, 황태자 측에 잡혔다는 말과 같았다. 이후 고문, 회유 등의 과정에서 그녀를 통한 정보 유출을 걱정한 에반스가 독살, 암살 등의 방법으로 히나를 제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구출을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으니까.

이야기꾼, 전서구로 전하기 힘든 상세 보고를 위해 정한 전령의 암호명이었다. 그 전령이 출발했다고 하니 곧 상세한 보고를 받을 수 있을 터.

“후우…….”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 속에는 떨쳐 내지 못한 답답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공문서 등의 필체 위조를 위한 인재를 키우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히나처럼 잘하는 이는 드물었다. 애초에 그녀가 에스메랄다의 전속 시녀로서 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필체 위조를 가장 잘했기 때문이니까.

디아나도 이제야 도착한 상황이니 연습이 필요하다. 당장은 서류 위조 등의 업무가 생기면 에스메랄다가 해야 한다.

“한 번 더 경고를 했더라면…….”

아마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눈앞에 황태자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가 나타난 상황이었으니 몇 번을 경고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확률이 높다. 남부에서의 일이 끝나면 그녀를 루그레디안 쪽으로 지원 보낼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바꿔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책상 끝에 놓여 있는 작은 종을 흔들어 문밖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시리스를 불러오렴.”

히나는 에스메랄다의 측근에 속했다. 그녀의 부재 소식은 감추려고 한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니 괜히 어설프게 숨기는 것보다는 알리는 게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윗선의 인정 없는 선택에 공포심이 생길지라도, 히나가 배제된 사유를 명확하게 공개하면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그녀처럼 독단적인 행동을 할 경우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경고해 두는 쪽으로 사용하면 될 터.

시녀가 나간 후 다시 홀로 남은 에스메랄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너도… 정말이지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황태자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움직인 히나는 어리석었다. 때를 기다리며 참지 못했으니까. 또한, 아르페시스와 끝이 어떨 줄 알면서도 그를 놓지 못한 에스메랄다 역시 어리석다. 어쩌면 훗날 에스메랄다도 히나의 전철을 밟게 될 수 있겠지. 두 사람 모두 어리석으니까.

쓰라린 미소가 에스메랄다를 찾아왔다. 그녀에게 동조한 히나는 미카엘의 심판대 앞에서 지옥행을 선고받으리라. 결국 그녀는 지옥에서 훗날의 복수를 지켜볼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히나에 대한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죽음으로 시간이 멈춰 버린 자와 달리 살아 있는 그녀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창밖에서 울리는 날갯짓 소리와 집무실 내부에서 차오르는 사각거림이 그것을 실감케 했다. 에스메랄다는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생각을 털어 내고 다시 깃펜을 들었다.

히나와 관련된 보고가 백작 성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사슴 행적 상세 보고.

(독자적 행동이 시작된 2차 계약서 이행 이후부터 보고 시작.)

일상생활에서 초조함이나 짜증 등의 감정 표출의 빈도 증가.

- 3차 계약서에 대한 진행 여부에 지대한 관심.

- 대기 명령에 반발 시작.

- 1, 숙소, 집무실 등 주 거주지에서 무단이탈.

- 2, 머저리의 침실에 들어가는 창녀들에게 접선 시도.

- 우두머리가 3번 사냥터에 진입한 직후 1, 2 행동의 빈도 증가.

- 창녀의 아이를 납치 및 협박, 뇌물의 지급 등으로 대역 출입이 성사되었다고 추측.

(중략)

- 친분이 있던 다른 창녀들의 진술(별도 첨부 1) 확보.

- 협박했던 창녀 대신 머저리의 소굴로 들어가는 마차를 운전해 준 길잡이의 진술(별도 첨부 2) 확보.

- 해당 창녀와 아이 시체로 발견.

- 머저리 일행이 마부 역의 건달을 포획하려 했으나, 사슴이 대신 입장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길잡이가 머저리 소굴 진입 직후 도주, 관리부에 소식 전달.

- 소굴 내에 있는 토끼(약초 회유 전적)를 통해 지하 감옥 개방에 대한 정보 확보.

- 음식에 접근이 용이한 다람쥐를 통해 사슴의 식사에 독 유입.

- 성 외곽에 버려진 시체 확인.

- 사슴 본인 확인.

- 조사 및 처분 공식 종료 다음 날, 우두머리의 진입과 동시에 배달꾼과 함께 이야기꾼 출발 예정.

- 공식 상세 보고 종료.」

복수에 눈이 멀었던 사람의 최후는 허망했다.

* * *

주변에 마나를 장막처럼 퍼트리면 소리를 차단할 수 있다. 더 많고 세밀한 마나로 파고들 수 있기에 절대적인 보완이 이루어지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마나 장막,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을 정도의 운용력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다.

고작 몇 초 전 상급 기사 중에서도 천재의 반열에 든다고 평가되는 페드로가 행한 것이기도 하고. 아르페시스는 마나 장막이 퍼진 직후 바짝 다가온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널 반기진 않을 거다.”

당연한 말을 왜 굳이? 아르페시스는 의문을 표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느껴지는 마나의 양으로 보건대 장막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고작해야 아르페시스와 페드로, 두 사람을 감싸는 정도. 주변의 근위대에게까지 감추면서 할 말이 뭐가 있다고? 휴고와 테베르에게서 의문 섞인 시선을 받았을 때 페드로가 말을 이었다.

“연합군 출정식 날 남부에서 연회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그 무렵 황태자에게 축하 서신을 보내야 한다는 휴고의 말을 들은 후 에스메랄다에게 서신을 보내고 싶었던 거니까. 제대로 된 허락을 받지 못해서 생일을 핑계로 보내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렸던 것까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반면 황태자에겐 뭐라고 써서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 대충 썼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페드로가 잠시 말을 고른 후에야 말을 이었다.

“그날 연회장에서 일이 좀 있었다는 모양이다.”

일? 하고 되물었던 아르페시스는 곧 뒷목이 당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제야 본인이 남부군 인사들에게 씹어 먹힐 수도 있는 상황임을 인지한 것이다. 그가 혈압의 안정을 위해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사령관저로 향하는 이동은 계속되었다.

“지휘부 인물들이 황실에 가진 반감이 가중된 상황이라 초반 기선 제압에서 밀리면 이후 병력을 통솔하는 데 힘들 거다. 군대라는 조직은 생각보다 보수적이거든.”

남부군 내부에서 명령에 불복하는 등의 문제가 일어나선 곤란했다. 그 문제로 지휘부 인사들을 처형하면 반감은 더 커질 것이고, 반대로 그 문제를 덮기만 하면 차후 리퀘나 탈환 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루라도 빨리 리퀘나를 탈환해 에스메랄다가 방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그에게는 좋을 것이 없다.

“기왕이면 황태자와 완전히 다른 놈이라는 인식을 초반에 심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알겠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를 확실히 이해했다. 남부군에게 빨리 섞여 들어야지만 더 안전해질 테니까. 페드로는 그의 안전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었기에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대답이 있은 후 페드로가 주변의 마나를 거두었다. 사령관저로 진입해 황태자가 있는 회의실로 향하는 건 금방이었다.

“황태자 전하, 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남자는 본인을 남부 총사령관 부대 소속 차석 지휘관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이가 총사령관을 부르는 호칭이 황태자라니. 페드로가 말하길 남부에서는 상관의 직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휘하 기사들이 불만 표현을 저렇게 한다고 했다.

“아르페시스,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게 얼마 만이냐!”

차라리 왜 살아 있냐고 물어보질 그러나. 아르페시스의 눈썹이 들썩거리자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던 황태자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아르페시스는 무어라 대꾸를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황태자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박고서 츄릅, 춥,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던 여자가 완전한 나신이었으니까.

“그간 잘 지낸 게냐? 네 팔다리가 마수의 간식이 되었다는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었다만…….”

여자의 머리채를 틀어쥔 황태자가 직접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붉어진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기만 했다.

황성에서 지내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황후에게까지 줄곧 숙여 왔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였음에도 고열, 구토, 마비 등을 유발하던 독을 종종 먹어야만 했다. 때때로 훈련과 교육을 방해하던 각양각색의 수작질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던 건 어떻고?

시중이 미흡하다는 등의 괜한 트집을 잡아 황자 궁 소속의 시녀와 시종들을 고문한 일도 있었지. 그럼에도 반발하는 것보다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편했다. 그럼 화풀이가 끝나는 대로 방임을 빙자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순 없었다. 황태자를 죽이고 싶어 할 게 빤한 남부군 앞에서 절대 해선 안 될 행동임은 분명했다. 어차피 이제 황성으로 돌아갈 일도 없다. 남은 평생을 여기서 살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즉, 괜한 괴롭힘을 피해 가기 위해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 아니겠나? 생각을 끝낸 아르페시스가 황태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릿속엔 사령관저에 들어오던 당시 페드로가 해 주었던 말이 둥둥 떠다녔다. 기선 제압, 황태자랑 다른 놈, 남부군 통솔, 리퀘나 탈환!

계획을 세운 후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잔을 봤을 때는 그간 당했던 울분까지 함께 담아 보기로 했다. 전투에 임하는 기사가 술을 마시다니, 말이 되는가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부군을 자극하는 황태자는 불화만 가져오는 해악이다. 여름이 끝나기 전 리퀘나를 탈환하기 위해선 확실히 치워야 한다. 남부군의 인사들이 좋아할 만한 방식으로.

“페드로, 휴고.”

그 부름에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던 두 사람이 뒤로 따라붙었다. 계속 이죽거리는 황태자의 앞에 멈춰 선 직후, 아르페시스가 손을 내질렀다. 마나를 한껏 담아서.

“꺽!”

“꺄악!”

“전하!”

퍽, 하고 울린 것은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아 있던 황태자의 명치를 가격하는 소리였고. 챙, 하고 퍼진 것은 황태자의 근위대가 내지른 검을 막아서며 난 소리였다. 회의실 내부에 있던 인물들이 흥미로운 눈을 빛내며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의 얼굴은 여전히 시뻘건 상태였다. 의식적으로 여자가 있는 방향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야 끄트머리에 자꾸만 살색 덩어리가 잡혔다. 아르페시스는 그 광경에 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의자 옆으로 굴러떨어진 황태자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끄아악! 이 쓰레기가……!”

그 검은 황태자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바닥까지 꿰뚫었다. 이후 아르페시스는 핏물이 묻은 검을 회수해 털어 냈다. 10년이 넘도록 친한 척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해 온 입장에선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하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고통에 발버둥 치게 만들고 싶었지만 시끄러운 비명이 달갑지 않았다. 고작 관통상이다. 절단상도 아닌데 호들갑은. 아르페시스는 그대로 황태자의 머리를 걷어차 기절시켰다.

1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남부군을 통솔했던 황태자다. 그럼에도 그를 공격하는 동안 검을 빼 들고 방어에 합류한 남부군 기사가 한 명도 없다. 미친놈에 더해 한심한 놈이라는 평가까지 함께해야 할 판이다. 아르페시스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태자에게 부상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근위대들이 죽어 있는 걸 보니 암살자라도 왔던 건가?”

딱딱하고 인위적인 목소리에 어디선가 픽, 하고 숨이 빠져나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는 그 웃음의 주인공인 파란 머리의 기사를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 혹시 암살자를 본 목격자가 있는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쉽게도 없나 보군.”

황태자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고 페드로와 휴고는 검을 빼어 들었던 근위 기사 3명을 모두 처리했다.

“근위대까지 처리할 정도면 무척 유능한 암살자였나 본데……. 휴고, 당장 황태자의 근위대에게 부상으로 인한 귀환 준비를 시작하라고 전해라.”

“예, 전하.”

“페드로, 시체를 처리하고 배후를 파악할 수 없는 암살 시도에 대해 조사하라. 저놈 지혈도 하고. 그, 그리고 저, 저 사람 좀, 여인 좀 내보내지. 그, 아, 황태자를 그, 어… 그에 맞게 챙겨 보내게. 그러면 되겠군.”

잘 나가다가 엉성하게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하지만 헐벗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다시 보니 냉철하게 굴 수가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면서도 여자가 없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크크큭… 예, 전하.”

아르페시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는 페드로를 한 번 노려봐 주었다. 황태자와 다른 놈이라는 인상을 주라며?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라고 했던 게 누구더라?

분명 아르페시스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 제 망토를 벗어 바닥에 있던 여자를 감싸 안은 페드로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웃는 낯으로 여자를 안아 들고 문가로 다가갔을 뿐이지. 아르페시스는 그가 여자를 문밖으로 내보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할 수 있었다.

“남부군 지휘부는 지금부터 각 부대의 병력 및 물자 현황에 대해 보고하라.”

당장은 페드로에게 왁왁거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참자.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남부군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계속 그리 인형처럼 서 있을 것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출하는 기사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면 당장 황성에 쳐들어가 총사령권을 가져올 수 있어서 그러고 있는 것인가?”

이번에는 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전년도 전초 기지와 후방 보급 기지 확보를 언제 시작했지?”

“……해마다 며칠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날이 따듯해지기 시작하는 바의 20일을 전후로 작업에 착수하는 편입니다.”

회의실 한쪽에 서 있던 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신을 잡아먹을 듯 눈을 치켜뜬 건장한 사내들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기선 제압, 기선 제압, 아르페시스는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남부군이 하나의 명령 체계 아래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최소한의 피해로 체계적인 남하를 할 수 있다.

“황성에 올라왔던 보고에 따르면 준비 자체는 카의 달이 끝나면 곧장 시작한다던데,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지난해의 겨울에는?”

“대형 마수의 출몰과 퇴각 후 진지 구축을 우선시했기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벌써 바의 40일이 넘어간 시점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리퀘나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상황이 아닌가.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아르페시스가 회의실 내부의 인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저놈이 황성으로 돌아가면 내게 총사령권이 넘어온다.”

답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행동들이 아르페시스에겐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반항처럼 느껴졌다. 황태자를 쫓아내는 걸로는 부족했나? 여기서 무엇을 더 해야 하지?

“벌써 일정이 늦어 버린 상황에서 얼마나 더 지체할 생각이지?”

저도 모르게 자꾸 페드로를 힐끔거리게 된다. 그가 계속하라는 듯 턱짓을 해 주지 않았다면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렇게 페드로를 의지하게 된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이런 자신의 행동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서 이상하기도 했고.

“황실에 황태자의 부상을 알리고 그로 인한 사령권의 위임을 요청하는 서신부터 보내라. 이후 임명장이 도착하면 남하할 수 있도록 준비에 착수한다.”

아르페시스는 아차, 하고 떠오르는 생각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가장 중요한 일을 빼먹을 뻔했다.

“아, 그리고 현재 황태자의 근위대 수가 얼마지?”

“……72… 아니, 69명이 사령관저에 머물고 있습니다.”

“동급 기사를 두 배로 파견, 중부까지 호위시켜라. 명분은…….”

말은 호위였지만 이대로 남부에서 쫓아낼 감시 역을 붙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르페시스가 말꼬리를 흐리자 황태자의 자상을 지혈한 페드로가 의견을 제시했다.

“부상 치료를 할 수 있는 신관이 부족하니, 황태자 전하를 서둘러 중부로 이송하는 게 좋겠습니다.”

소식을 알리기 전에 남부에서 쫓아내면 신관들이 황태자의 부상을 알지도 못할 테니 치료하러 달려올 수는 없겠지. 좋은 수작이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의견은 적극 수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는군. 저놈 성격이 지랄 맞으니 이동하는 사이에 수면제든, 약이든 먹이는 게 좋을 터. 근위대에게 말을 전해라.”

“…….”

“그사이 각 부대에는 전서구를 보내고. 대형 마수의 위치는 최대한 빠르게 각 부대에게 공유하며 해당 지역을 포위하는 형태로 남하 계획을 수립해 보도록 하지.”

삐딱하던 기사들의 자세가 곧게 펴진 것이 신호였다. 아르페시스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침을 삼킨 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들 하는가, 당장 현황 보고부터 시작하라!”

아르페시스의 일갈이 떨어진 직후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선 제압… 에 성공한 모양이다.

아르페시스가 황태자가 앉아 있던 상석에 자리를 잡자 페드로가 뒤에 기립했다. 핏물이 그대로 남은 회의실에서 남부군의 현황 파악이 시작되었다. 이제 리퀘나를 수복하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거리를 남하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에스메랄다가 남부로 올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니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페드로를 데려온 행동을 용서받기는 힘들겠지만, 일단 다시 만날 수 있는 환경이라도 만들어 놔야 할 것 아닌가.

* * *

급한 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안내받은 침실이 본래 루소멜 백작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르페시스는 황태자의 무도함에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남하 준비가 끝나는 대로 떠날 테니 손님방으로 준비해 주게.’

그 결과 지금 욕실 밖에선 시종들이 한창 손님방 침실을 정돈하는 중이었다. 일거리를 늘린 셈이지만 그는 루소멜 백작의 침실에서 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욕실에 들어와 탈의를 마친 아르페시스는 직접 챙겨 온 통에서 노란 액체를 손에 덜었다. 마법 처리가 된 잉크를 지워 주는 약품이었다. 몸 곳곳에 문신처럼 그려져 있던 것들이 노란 액체를 문지르기 시작하자 지워졌다.

‘뭐야, 단창은?’

이 문신 같은 것들은 남부에서 첫 전투를 치르기 직전 아르페시스를 훑어본 페드로가 알려 준 무장의 한 형태였다.

‘설마 도색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도색?’

아르페시스가 남부에 대해 아는 것은 문서화된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 온 것이 그의 첫 남부 방문이었기에 실제 전투 현장에서 취하는 무장이 어떻게 다른지 당연히 몰랐다. 보고서에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기록되지 않으니까.

직접 아르페시스의 갑옷을 벗겨 낸 페드로는 한숨을 내쉬며 본인의 종자들을 붙여 주었다. 처음엔 그들이 왜 자신의 몸에 이리저리 줄을 긋는지 몰랐지만, 첫 전투에서 그의 머리통 대신 페드로의 팔이 마수에게 먹혔을 때 이해하게 되었다.

페드로는 팔이 물어뜯김과 동시에 목에 매고 있던 발화 마도구로 절단면을 지져 출혈을 막았다. 등허리에 챙긴 단창을 마수의 몸에 꽂아 넣은 것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페드로의 종자들이 그 단창이 박힌 마수의 배를 갈라 그의 팔을 챙겨 왔다.

난전 중 마수에게 먹힌 신체의 부위를 빠르고 확실하게 찾기 위해 표시를 하는 것. 그걸 도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남부 전선에서 행해지는 전투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었다. 더욱이 발화 마도구를 목에 차는 이유를 들었을 땐 잠시간 말문이 막혔을 정도였고.

‘목이 잘리면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테니까.’

꽤나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지. 왜 이런 것들을 헤롤이 알려 주지 않았을까, 하고 대화를 해 보았더니.

‘당연히 아는 줄 알았겠지.’

아르페시스의 무장은 근위 기사들이 직접 챙겼고 헤롤은 관여하지 않았기에 도색을 알지 못했다. 또한 서부에선 소형 마수를 주로 상대했기에 투창용 단창이 필수 장비도 아니었다. 결국 헤롤은 아르페시스가 남부용 무장 형태에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다음 날부터 페드로는 본인의 단창에 추가적인 흠집을 내서 빌려주었다. 그 후로는 아르페시스의 신체 부위를 먹은 마수들도 같은 방식으로 찾았다. 그는 몸에 새긴 도색을 다 지우고 난 후에야 욕조에 발을 들였다.

“으아…….”

따듯한 물에 몸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얼굴에 물을 잔뜩 끼얹은 아르페시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준비 기간은 대략 보름…….”

빠듯하다. 더 이상 남하가 늦어지면 다가오는 겨울이 위험하기에 서둘러야 했다. 준비가 끝나면 대형 마수를 포위하며 남하할 것이다. 물론 그 후 이루어질 대형 마수 토벌에 아르페시스가 참가하는 건 아니었다. 페드로는 물론, 그를 좋게 보지 않는 남부군 기사들까지 모조리 반대했으니까.

‘전하의 체중으로는 숨결에도 훌러덩 날아갈 겁니다.’

아르페시스의 행동을 보고 웃었던 카 루그 록세트 칼라일이 한 말이었다. 고로 대형 마수 토벌은 남부군 기사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진행하게 될 예정이다. 몇 년 전에 나타난 대형 마수도 토벌한 이들이라고 하니, 이 문제에 있어선 제국 최고라 해도 될 것이다.

“관전도 불가하다고만 하니 답답하군.”

서부에서의 전투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부에 온 후 그곳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쉬웠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여기서 순조롭게 살아남았다고 자신하지 마라.’

‘남부는 서부와 달라. 중형 마수가 소형 마수처럼 떼거지로 몰려다니니까.’

실제로 페드로가 했던 말은 맞았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팔과 다리에 가득한 절단 흉터들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신력으로 치료를 받은 덕에 멀쩡하게 붙어는 있지만 당시의 고통을 잊은 건 아니었다.

신체가 마수에게 먹힌 건 전부 중형 마수를 상대할 때의 일이었다. 중형 마수의 발길질에 휭, 꼬리질에 휭. 제멋대로 날아가다 보면 허공에서 피할 틈도 없이 다른 놈에게 물려 버리곤 했다. 옆구리에는 장기까지 뜯겨 나갔던 흉터가 있을 정도였다.

“그땐 정말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나는 줄 알았지.”

홀로 픽, 웃어 본 아르페시스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런 식으로 튕겨 나가는 일이 많으니 보다 못한 페드로가 그의 허리에 30kg짜리 훈련용 마도구를 채워 주기까지 했다. 몸이 무거워 이동 전투를 줄여야만 했지만 팔을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기에 여기저기로 튕겨 나가 위험해지는 일은 줄었다. 실제 체중이 아니라서 마나로 가중을 할 수도 없고, 딱 그 정도가 한계였지만.

아르페시스는 그간 겪어 온 전투를 떠올리는 짓을 관두었다. 끔찍한 기억들이 전부인데 굳이 되짚어 무얼 하겠나. 대신 그는 욕조의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머리끝까지 잠수를 하고 나니 고요한 물속에서 가장 선명한 건 그의 심장 소리였다. 쿵쿵거리는 박동이 가득한 공간에서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히, 심장의 주인인 에스메랄다였다.

40여 일 가까이 지났건만 서신이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쿠베트성에서 전달이 미뤄졌던 서신을 전해 주었으니 그녀의 차례인데. 페드로의 합류로 황제의 시선에서 숨어야 한다는 제약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임에도 그녀로부터 서신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먼저 보내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하건만…….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연락을 했는데 그녀로부터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환청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 그를 찾아와 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교류하는 가족을 사지로 끌고 들어오지 않았나. 이 행동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계속 그를 침범해 오고 있다. 홀로 하는 망상에 가까운 걱정이 커지기만 하는 나날이다.

‘나를 근위대에 임명해.’

‘……뭐라?’

쿠베트성에서 출발하기 직전, 페드로는 이미 임명이 필요한 서류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 말을 들었던 직후에는 당연히 반대를 했다.

‘난 곧 남부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대를 근위대로 임명하라니?’

‘네 꿈이 테노리엘을 보고 반응하는 거라면, 주변에 누구든 있어야 할 거 아냐?’

페드로의 논리는 간단했다. 꿈에 대해 알아보려면 테노리엘 중 누군가는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의 다른 형제들은 내년에야 남부로 올 테니 본인이 직접 곁에 있는 것이 효율적이라나 뭐라나.

그가 한 말에 틀린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후에 다른 테노리엘의 사내들이 전선에 온다고 해서 같은 부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해에 서너 번, 사령관 주둔지에서 열리는 지휘부 정기 회의를 할 때 보는 것이 전부일 터. 꿈에 대해 파헤치고 내용을 기록하려면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는 근위대에 소속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건 맞다.

‘그대를 데려가면 에스메랄다는 어찌하라고?’

그럼에도 도저히, 에스메랄다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택할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지금에 와서는 결국 페드로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어 버렸지만.

‘난 천사가 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의미지?’

‘네가 죽었을 때를 말하는 거다.’

‘……그렇다고 그대를 데려갈 수는 없다.’

‘너보단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하라는 대로 좀 해!’

초조함이라도 느낀 것인지, 페드로의 언성이 높아졌었다. 그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화풀이를 해서 미안하다.’

사과를 곧장 하는 건 형제간에 닮은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그가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었다.

‘에스메랄다는 내게 특별해.’

‘어머니께 그 아이를 지키겠노라 맹세하기도 했고, 쌍둥이 녀석들과 달리 매일 내 품에 끼고 살았어. 천사가 어릴 땐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약해서, 뜬눈으로 아픈 아이 옆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지.’

‘후에 내가 딸아이를 가지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 아이보다 특별하진 않을 거야.’

아르페시스는 그저 가만히 페드로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속내를 보이며 진심을 토로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감정적으로 동요했다는 의미였을까.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매일 그 아이의 웃음소리로 저택이 가득 찼었는데, 몇 년 전부터 천사가 웃지를 않아.’

‘겨우 틈을 비집고 들어와 옆에 있기는 하는데, 내 앞에서는 웃지 않는다고.’

솔직히,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아르페시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웃었으니까. 당시에도 막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왔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르페시스에게 그녀의 미소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었다. 해서 그게 페드로에게 그토록 절박한 이유가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따라가려는 거다.’

‘그 애가 네 앞에선 웃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망설였고 페드로가 대신 그가 해야 하는 말을 언급했다.

‘넌 죽으면 안 돼.’

‘설마 그 애를 두고 죽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두고 죽는다고? 절대 안 될 소리.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심장에서 자라기 시작한 감정이 비겁한 선택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할 것이다.’

‘그럼 그 말대로 뭐든 해. 날 이용하는 것도, 천사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어느 것도 망설이지 마라. 살아남는 것만 신경 써.’

물속에서 빠져나온 아르페시스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행복한 선택 같은 건 없다…라.”

그는 결국 페드로가 준비해 온 임명장에 인장을 찍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 본능을 넘어, 그녀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갈망. 죽음의 공포 따위가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이 그 선택을 부추겼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페드로는 훌륭한 기사다. 개인의 무위 역시 휴고나 다른 근위 기사들보다 우위를 점할 정도의 실력자. 무엇보다 그는 근위 기사들이 가지지 못한 남부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만약 페드로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진즉에 죽었으리라. 아르페시스의 머리통 대신 페드로의 몸이 뜯어 먹힌 게 열 번은 훌쩍 넘으니까.

‘그녀에겐, 말한 것인가?’

‘말하지 마.’

‘하지만…….’

‘천사가 날 데려가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거역할 자신 있어?’

당연히 없었다. 페드로도 그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고.

‘난 그 아이가 가지 말라고 붙들면 절대 못 갈 거다.’

‘그러니까, 말하지 마.’

‘천사를 백작 성에 데려다준 후에 합류할 테니까, 조만간 다시 보자.’

그렇게 에스메랄다에게 말도 하지 않고 페드로를 사지로 데려왔다. 이성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지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아르페시스를 좀먹고 있었다. 생각을 한가득 안고서 욕실에서 나오자 여전히 분주한 시종들이 보였다.

“침대는?”

“그, 급한 대로 우선 준비를…….”

“나머지는 되었다. 내일 방을 비웠을 때 해도 되니 나가 보라.”

“예, 예. 전하.”

그들을 물리고 난 후에는 또다시 사색의 시간이었다. 방의 한쪽에 구비된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더니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이 페드로의 방문을 알려 왔다.

“들어오라.”

어수선한 방의 침대 위에 주저앉자 페드로가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손에 쥔 견과류를 오물거리면서. 그는 휴식 시간 동안 항상 저렇게 간식거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아르페시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고. 페드로가 휙, 하고 던진 건 주먹만 한 크기의 나무통이었다. 안에는 그가 먹고 있는 견과류가 들어 있을 터.

“아직 안 먹었지?”

“먹을 새가 어디에 있었다고.”

아르페시스는 툴툴거리면서도 통의 뚜껑을 열었다. 신력 치료를 받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실제 그 때문에 체중이 줄어든 상태였으니 틈틈이 계속 열량을 채워야만 했다. 아르페시스는 견과류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도 당당히 문으로 들어온 페드로가 낯설어서 한마디를 던졌다. 실없는 말임을 알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페드로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대가 문으로 들어오는 일도 있고, 신기하군.”

그간의 행동을 반성하라는 비꼼을 담았으나 페드로는 느긋한 태도로 받아쳤다.

“여기서 창문을 넘나들었다간 들킬 게 빤하거든. 너랑 밀회를 한다느니 같은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고.”

페드로는 말을 하면서도 의자를 끌어 와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라고 그런 오해가 달가울 줄 아는가?”

질색을 하며 대꾸한 아르페시스는 맞은편에 앉은 페드로를 보며 물었다.

“한데 그대 정도의 실력자가 들킨다고?”

마나를 운용한 페드로의 은신은 그가 본 기사들 중 단연 최고였다. 그런 페드로가 들키다니?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지자 페드로가 큭큭 하고 웃기 시작했다.

“황도에선 우리 형제를 두고 세기의 천재라고 떠드는데, 남부에서 이 정도 실력은 그리 드문 게 아니거든.”

성년이 되던 해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르는 걸 말하는 것이겠지.

“내륙과 남부의 수준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난단 말인가?”

“남부에서 살아 있다는 건 죽음의 위기에서 제힘으로 빠져나왔다는 의미니 내륙의 햇병아리들과 비교하면 곤란하지.”

오독오독, 페드로가 아몬드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남부군이 고향과 백성들을 버리겠다고 각오했으면 황도가 지금처럼 조용하지는 못했을걸.”

하지만 버릴 수가 없으니 지키기 위해 버티는 것이라고. 페드로는 남부군이 황실의 폭정에 침묵하면서 전선에만 신경 쓰는 이유를 그렇게 일축했다. 황제에겐 남부가 영토의 일부일 뿐이겠지만 그들에겐 나고 자란 고향이고, 가족과 친지들이 사는 땅이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회의실에서 만났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고국, 고향, 나아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옆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황태자가 그 난리를 피워 두었으니 잡아먹을 듯 눈을 빛내던 게 당연한 것이겠지. 그들에게 중요한 터전을 물건처럼 이용하려 드는 황실에 대한 반감도 마찬가지고.

황태자가 벌여 놓고 간 짓의 뒤처리를 왜 그가 해야 하는지… 앞길이 막막했다. 갑자기 이마에 닿는 딱딱한 감촉이 없었다면 황태자에 대한 욕을 조금 더 오래 했을 것이다. 딱, 하고 그의 이마를 때리고 떨어진 건 견과류였다.

“표정 한번 볼만한데.”

페드로는 종종 이런 식으로 아르페시스의 생각을 끊어 놓곤 했다. 오늘처럼 견과류를 던질 때도 있고, 꿀밤을 때리는 것은 물론 뒤통수를 가격할 때도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필요가 없다나? 고로 이것도 몇 번 당해 본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제 허벅지 위에 떨어진 호두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이것 때문에 온 것인가?”

“설마,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려고 온 거다.”

“해야 할 일?”

남부군과 함께 리퀘나를 수복하는 것 외에 해야 할 게 또 있나? 의문을 담아 바라보았지만 남은 견과류를 한 번에 털어 넣은 페드로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재촉도 해 봤지만 팔짱을 낀 페드로는 한참 동안 입을 꾹 닫은 채 견과류를 씹어 삼킬 뿐이었다. 잠시 후,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닿아 있음을 보았다. 마저 먹으라는 의미인가? 하고 열심히 통을 비웠더니 그제야 페드로의 입이 열렸다.

“그들이 남부를 포기할 수 없어서 버티고 있는 거라고 말했었지?”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왜 그 얘기를 다시 하는 것인가?”

“모두가 그런 건 아니거든.”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아, 하고 단출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래, 남부라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이 모여 있는 곳에 갈등 없는 완전한 화합이 있을 리가 없지.

“황실부터 무너트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가 몇 있지.”

“……온건파는 그것보다 남부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래, 온건파의 규모가 7할을 넘어서 급진파들이 함부로 움직이질 못해. 저들만으로는 황도를 칠 수 없으니까. 지금은 그중 대다수가 이탈을 한 상태고.”

아르페시스는 이런 남부군의 내부 사정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반면 성년 이후 매년 남부군과 함께 전투를 했던 페드로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본래 남부군의 규모는 8만에서 10만 사이를 오가는 편이었다. 그중 3할이라고 해 봐야 2, 3만 정도. 중앙군을 상대하긴 힘든 숫자다.

“총사령관이 전투만 할 수 있는 자리면 좋겠지만, 군 내부의 정치질도 할 줄 알아야 하거든.”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이제껏 그가 한 말 중에 해로웠던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페드로의 우선순위가 아르페시스의 안전인 이상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반군이라는 이름으로 이탈한 병력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급진파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8, 11, 19부대의 지휘관이다. 지금부터 네가 생각해 봐야 하는 곳은 11부대.”

“11부대면 지휘관이…….”

“라 루그 록세트 제로크, 랑그루발 백작가의 봉신이지.”

랑그루발은 남부에 전선 지역이 생기면서 영지의 절반 이상을 잃은 가문이다. 그로 인해 가문의 역량이 곤두박질쳤기 때문인지 봉신들까지 황실에 대한 반감이 크다. 머릿속에 있던 귀족들의 정보를 꺼내 보았지만 페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곧장 깨닫기는 힘들었다.

아르페시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간 겪은 바로는 페드로도 답을 바로 알려 주지 않는 편이었다. 일전 에스메랄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언제나 그가 직접 답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원석을 다듬는 세공사처럼,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처럼.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번에 황태자의 일로 목소리가 커졌을 급진파 때문이겠지? 그들을 다루는 건 결국 내가 해야 하니까.”

생각한 것들을 꺼내 놓자 페드로는 대답 대신 계속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록세트… 록세트…….”

페드로가 하고 많은 가문 중에 왜 그곳을 언급했을까?

“록세트 경 때문인가?”

조금 전 회의실에서 만났던 본진 부대 소속의 차석 지휘관? 인물을 특정하자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서 정보와 가정이 뒤섞였다. 그가 부친이 이끄는 부대를 두고 본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원인가, 강압인가?”

그 질문에 페드로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르페시스는 이미 두어 번의 경험으로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그걸 찾아야 대신 답을 알려 준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이렇게 굴 때마다 느끼는 울렁거림을 꾹 눌러야만 했다.

지금 페드로의 행동은 마치… 그가 없을 때에도 홀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게 훈련시키려는 사람 같았으니까.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힌 아르페시스가 당장 생각한 답을 꺼냈다.

“록세트 경의 전출 기록부터 살펴봐야 할 테고, 그 시기에 록세트 자작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소문해 봐야겠지?”

록세트 자작과 그의 후계인 칼라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면 방금 아르페시스가 했던 질문의 답을 추측할 수 있다. 칼라일이 본진에 온 것이 부친과의 불화 때문인지, 명령 때문인지.

“하나 더.”

“더? 어디를?”

그가 생각한 것들이 페드로가 정한 답에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팔짱을 낀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아르페시스가 몇 개의 답을 꺼냈지만 페드로는 침묵으로 퇴짜를 놓았다.

여섯 번쯤 틀리고 나서 모르겠다는 포기를 선언해야 했다. 이러면 페드로는 답과 함께 그것이 답이 되는 이유를 찾도록 만든다.

“황실에서 관리하는 가문별 족보 기록소. 거기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아르페시스는 새로 떨어진 질문에 생각을 곱씹었다.

“파문 여부의 조사?”

다행히도 이번에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4년 전 록세트 경이 총사령관 부대로 자원했고, 사흘 후 그를 파문하겠다는 서류가 황실에 올라갔던 기록이 남아 있다. 다시 나흘 후 랑그루발 백작이 록세트 자작을 독대하면서 철회되었고.”

“……록세트 경이 부친의 뜻에 반하면서 본진 부대로 자원한 것이군. 그럼 그는 부친과 달리 온건파에 속한다고 봐야 하나?”

드디어 페드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록세트 경에 대한 것을 알려 주는 이유는… 그를 통해 급진파 내부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인가?”

“그것도 있고, 그가 무력보다는 지략, 그것도 군내의 정치에 능한 인물이기 때문이지. 네가 회유해야 하는 대상이다.”

어차피 본진 소속 차석 지휘관이니 계속 얼굴을 볼 사이가 아닌가. 굳이 회유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주의를 주는 이유는 뭐지?

아르페시스의 의문은 곧장 이어지는 페드로의 말에 막혀버렸다.

“여기서 질문 하나 더, 그는 왜 부친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온건파의 뜻에 동조하는가?”

“……대의?”

페드로가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틀렸다는 건지, 완전한 정답이 아니라는 건지……. 아르페시스는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전 페드로가 해 주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아들이 부친의 성정을 모를 리 없다. 칼라일은 파문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부친에게서 벗어나 본진으로 왔다고 봐야 한다. 왜?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가정을 뱉어 내자 페드로가 다음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남부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인물이군?”

“그렇다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끝이 없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페드로에 의해 쓸 데가 있다고 규정되는 생각이겠지.

“남부… 자체의 피해를 줄이는 방향을 찾아야 하나?”

“더 자세하게.”

“우선 남부군의 피해를 줄이고 민간 백성들의…….”

“조금 더 감정적인 부분.”

“……남부가 겪는 부당함에 분노해야 되나?”

“더 개인적인 부분을 생각해 봐.”

“……내가 당장 남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어쩌라는 건가?”

이런 식으로 문답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고 나면 전투를 마친 직후보다 더 피곤하다. 한숨을 내쉬는 사이 페드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까지 단순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한심함이 뒤섞인 말에 아르페시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렇게 적나라한 평가는 태어나 처음 받아 봤다. 물론 머리 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하다 평가될 만큼은 아니지 않나?

답답함 때문인지 페드로가 한숨과 말을 함께 쏟아 내기 시작했다.

“록세트 경도 네가 남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런 판단도 하지 못했으면 부친의 아래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았겠지.”

그런고로 아르페시스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해야 하는 건 해결이 아니다. 주어진 문제에서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한 거라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회유나 포섭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표물의 심리 상태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부분부터 파악하고 나서 목표물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쥐여 줄 생각을 해야지. 남부에 애착이 있다고 해서 그쪽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면 어떻게 해?”

호감을 사서 회유를 하려면 그 상대방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면 되는 건 아닌가? 위와 같이 되물었더니 페드로가 혀를 찼다.

“그 문제를 본인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면? 그 문제가 현실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면? 목표물이 그 문제에 직면한 것이 자의라면? 문제의 해결이 목표물의 호감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지?”

“…….”

“회유나 포섭에서 문제의 해결은 절대적인 보상이 아니다. 때로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방금 그게 사람의 언어가 맞나? 왜 이해가 되지 않는가? 아르페시스가 그런 의문을 느끼는 사이 페드로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회의실에 같이 있던 인물은 고작해야 8명이었는데, 4시간이 넘게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 그들을 파악했어야지. 대체 뭘 한 거야?”

“……서류를 봤다만.”

행정 서류를 통해 남부군 실상과 물자 이동, 부대별 현황을 파악하는 건 총사령관의 의무이지 않나.

“하아… 그는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 함께 등을 맞대고 버틸 사람을 원하는 편에 가까워. 그러니까 네 행동을 보며 웃는 등의 관심을 보이고, 먼저 말을 걸어온 거다.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될 너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고 싶어서.”

페드로가 하는 말의 절반 정도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칼라일은 그저 조금 껄렁거리며 웃거나 서류를 가져와 보고를 했을 뿐이다. 가끔 말을 먼저 걸어온 건 맞지만……. 아르페시스가 느끼기에 칼라일은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떠보는 행동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페드로는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가?

그가 눈을 끔뻑이는 모습을 보고 페드로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어떻게 봐도 그를 한심해하는 모습이라 반발심이 삐죽거렸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노력과 성과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보니 다 들켰다.

“뭘 잘했다고 삐죽거려. 하… 아니다. 넌 그냥 록세트 경이랑 친해지는 것만 생각해. 애초에 그를 최우선으로 삼은 것도 너한테 가장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니까. 근위대에 자원한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본부대 소속이니 큰 문제는 안 되겠지.”

그러니까 한심하다는 평을 바꿔 줄 생각은 없는 거군. 아르페시스는 나날이 무례함의 정도를 더해 가는 페드로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열흘까지는 누가 보든 상관할 필요 없지만… 이후에는 보는 눈이 적을 때만 먼저 접근하도록.”

타인의 눈을 조심하라는 건가? 그런데 왜 열흘 동안만 괜찮고? 아르페시스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어보았다.

“왜 열흘인가?”

“전서구를 통해 사령권 위임 요청서가 황도로 가는 데 하루 반나절, 황제가 기사들을 차출하는 데 하루에서 이틀. 이동 준비에 하루. 직선거리로 루소멜까지 달려오는 데 최소 닷새. 도착해서 기존의 호위 기사들과 호위 일정을 맞춰 배치되기까지 이틀에서 사흘.”

아르페시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잠시 입을 벙긋거렸다. 황제가 채워 주었던 목줄은 서부에서 잠시나마 벗어던졌다. 거의 100여 일 가까이 그 자유로움을 누렸기 때문일까?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위… 대를 추가로 보내겠군.”

“그래, 내 예상으로는 최소 30. 최대 50까지.”

“그들을 통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함인가?”

페드로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아르페시스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록세트 경과의 접점은 어떻게 해도 귀에 들어가. 정확히는 황제에게 전달되는 말이 ‘적극적인 자의로 보였다’가 아니라 ‘본진 부대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의 일부로 보였다’여야 좋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이나 행동은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르니까.”

고작 한 계절 정도 편히 지냈다고 근위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니. 아르페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천사한테 서신은 안 보내는 거냐?”

씁쓸함을 느끼며 침묵했더니 대뜸 주제가 넘어가 버렸다. 에스메랄다의 얘기에 아르페시스가 힐끔, 페드로를 살폈다. 왜 그녀에게 서신을 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 대화 주제는 매번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대부터 쓰지 그러나?”

“난 잘못한 게 있어서 자중하는 거고.”

“……따지면 나도 잘못한 게 있지 않나.”

“난 쓰면 안 되는 입장인 거고, 넌 쓰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대신 보내 줄 수 있을 때 써먹으라고.”

마지막 말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가끔가다 그를 울컥하게 만드는 기묘한 태도가 또 나왔다. 아르페시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페드로는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 두려는 사람같이 굴 때가 있었다. 무슨 숙제를 하는 것처럼. 그게 마치, 죽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속을 긁어낸다고나 할까?

그를 사지로 끌고 들어왔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그가 죽을 생각을 하는 게 보일 때면 울컥울컥,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뭘?”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해치우려는 사람처럼 굴지 않나. 살 생각을 해야지 왜 죽을 준비를 하는가 말이다.”

뱉고 나서는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것 같아서 아차, 싶었다. 아르페시스는 이어지는 페드로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페드로는 조금 전 내뱉은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오래도록 아르페시스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아…….”

“하?”

“……습관이 된 모양이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중얼거림이었다.

“습관?”

“……그런 게 있어. 나쁜 습관.”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자 페드로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종자들에게 네 몫을 더 챙겨 보내라고 해 두었으니까 자기 전에 한 통 더 먹어. 백작님께도 부탁해 뒀으니 과일도 곧 준비가 될 거야. 전투가 없을 때 체중을 늘려 놔야 하니 거르지 마라.”

대뜸 치고 들어온 그의 손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정말이지, 이런 식의 접촉은 너무 생소한지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알겠냐?”

아르페시스는 엉망이 된 제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내가 말귀를 들어먹지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챙겨 먹을 생각이다.”

“그래, 그럼 잘 챙겨 먹으라고.”

페드로는 인사조차 듣지 않고 훌쩍 돌아가 버렸다.

* * *

며칠이 지났다. 남하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 중이며 칼라일과의 관계에는 딱히 진척이 없다. 그리고 어제부로 황실에서 아르페시스의 남부군 총사령관 임명장이 도착했다. 이후 공식적인 기록 없이 행동부터 진행되던 남하 준비에 서류 행정 작업이 추가되었다. 임명식은 각 부대에 임명장 사본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했고, 황제가 구구절절 적어 보낸 격려 서신에 잠시 부들거리는 일도 있었다.

‘네놈 뜻대로 쉽게 죽어 주진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물며 읽어 내린 서신에는 페드로가 언급했던 근위대 문제도 있었다. 새로이 그를 보필한 근위 기사들이 출발했으니, 부디 전장에서 무사하길 바란다나 뭐라나. 그 문장 부분을 특히나 신경 쓰면서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주었다.

임명장이 온 일을 제외하면 며칠간 아르페시스의 일과는 똑같았다. 새벽녘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남부군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류 보고를 받는다. 내부 사정을 인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에 열심히 숙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토벌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해 필요 병력들에게만 공개했던 대형 마수의 위치가 남부 전역에 공유되었다.

리퀘나 탈환을 위한 남하 준비는 전체적으로 순조로웠다. 버릇을 운운하던 대화 이후 페드로의 말수가 묘하게 줄어든 것이 신경 쓰였지만, 신력 치료를 받지 않으니 며칠 사이에 곧장 체중이 늘기 시작한 터라 나름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서부를 떠날 때에 비해 키도 많이 자란 덕에 페드로의 어깨를 훌쩍 넘어섰다. 고작 반 뼘 정도 차이가 날까? 아르페시스는 현재 루소멜 백작이 내어 준 개인 연무장에 있었다. 백작의 침실은 부담스러웠지만, 근위대와만 공유할 수 있는 연무장은 환영이었으니까. 그 장소의 한쪽에는 이제 막 개인 훈련을 마친 페드로가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저렇게 앉아서 뭔가를 한참 보더니…….

페드로는 전투가 중단되자마자 아르페시스의 곁을 자주 비웠다. 루소멜 백작에게 듣기로는 가문이 따로 모은 기록이 있다면 살펴보고 싶다고 하기에 허가를 해 주었다나?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체력 훈련을 끝낸 후 그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가까이 다가가니 페드로의 손에 들려 있는 게 수정 마도구임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씩 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은 그가 수정을 휙 던져 주었다. 얼결에 받아 든 것이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곧장 수정 속의 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작 시선뿐이겠는가? 몸과 마음까지 모조리.

“귀엽지?”

아르페시스는 격렬한 고갯짓으로 페드로의 의견에 동의했다. 수정 속에는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담겨 있었다. 소년에 불과한 페드로의 허벅지 근처에서 오가는 키에 아장거리는 걸음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뺨에 오른 젖살이 포동포동했지만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금발, 녹안, 해사한 미소 하나까지 모두 지금의 에스메랄다와 똑같았으니까.

“어, 언제 기록한 것이지?”

“천사가 다섯 살 때.”

“다섯 살? 그보다는 훨씬 어려 보이는데…….”

“아직 또래들보다 작았을 때라서. 여섯 살부터 훌쩍 크기 시작했지. 우리가 엄청 먹였거든. 입이 짧아서 조금 고생했지만.”

우리라는 건 그녀의 위로 있는 형제들을 말하는 거겠지?

페드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이 수정 속에서는 아레스가 에스메랄다를 번쩍 안아 들더니 의자에 앉혀 주었다. 옹알옹알, 어린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 순간 수정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10여 년 전의 물건이라 그런지 수정에 담긴 건 영상이 전부였다.

아르페시스가 수정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굴자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천사가 어릴 때는 성장 속도가 너무 느려서 군것질을 조금 엄하게 제한했거든? 간식을 먹으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더라고.”

“으아…….”

“그래서 다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케이크를 줘 봤는데, 진짜 귀여웠지.”

오멘이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푹, 떠 올리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케이크를 달라고 조르는데, 마음이 미어지더라.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해 줬던 때라서 마음대로 못 줬거든.”

페드로의 목소리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그리움과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듣는 사람을 녹여 낼 것 같은 행복까지, 한가득.

“그랬더니 요 조그만 녀석이 머리를 굴려서는 우리가 꼭 따로 있을 때만 찾아와 조른 거야. 결과적으로 한 번은 형이, 한 번은 내가, 그다음엔 오멘이나 페르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줘 버리는 일이 생겼지.”

아르페시스는 수정 속의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페드로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싹이 보였어. 연기를 어쩜 그리 잘하는지, 아직 먹지 않았다는 말에 우리가 전부 속았다니까?”

그가 모르는 에스메랄다의 어린 시절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 며칠 이어졌더니 배탈이 났더라고. 충치도 생기고.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 단체로 기합을 받았었지. 그때는 쌍둥이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엄청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또 웃기네.”

큭큭거리는 페드로의 웃음소리 아래에서 오멘이 쥔 포크가 에스메랄다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물거리는 게 너무, 너무 귀여웠다. 아르페시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는 페드로와 수정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이걸 품속에 집어넣어서 가져가면…….

“다 봤으면 내놔.”

꿈도 꾸지 말라는 어조였지만 고작 그 경고 하나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재빨리 도주할 만한 길을 물색했다.

연무장의 정면 입구는 너무 멀다. 마나를 사용할 경우 신체 능력이 월등해지는 페드로를 따돌릴 수 없다. 개인 연무장을 둘러싼 벽은? 그곳을 넘어가면 외부 연무장과 가까우니 루소멜 백작의 사병들 틈으로 숨어드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을 탈취하는 데 성공할 확률이 얼마일까, 고민하고 있노라니 페드로가 말했다.

“다른 것도 있는데, 궁금하지 않나 보다?”

아르페시스는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순순히 수정을 돌려줬다.

“더 있다고? 몇 개나? 최근 모습을 기록한 건 없나?”

또 말을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을 피하는 게 정말,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날부터 페드로에게 수정을 보여 달라고 닦달하는 게 아르페시스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르페시스에게 페드로가 챙겨 온 수정은, 홀로 곱씹기만 했던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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